2018. 5. 1. 16:48ㆍ한시
정여창
다른 표기 언어 鄭汝昌
출생 | 1450(세종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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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04(연산군 10)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로 죽었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에 대하여,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었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육을(六乙)이다.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되었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物欲)과 공리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은 정몽주(鄭夢周)·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었다.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공격했다. 정여창 역시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소각되어 대부분이 없어지고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 文獻公實記〉에 일부가 전하며, 1920년 후손이 유문을 엮어 만든 〈일두유집〉이 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10)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나주 경현서원(景賢書院),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상주 도남서원, 합천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 도산서원, 종성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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