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문서

2018. 4. 19. 10:34알아두면 조은글

한국의 고문서 / 고문서의 주제

 

 

 

 

1. 관료생활

 

고문서 가운데 그 보존율이 가장 높은 것이 관료로서의 자격과 임명에 관한 문서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사회적 지위 및 부(富)를 증진시키는 데에는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는 것이 첩경이었다. 따라서 관료 진출 자격시험인 과거에 합격한 증서, 또는 국왕 또는 해당 부처에서 내려 준 고신(告身)은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었고, 가문의 경우 가격(家格)을 알아 볼 수 있는 기준이었고 척도였다. 고신은 통칭하여 교지(敎旨)이라 통칭하기도 하는데, 이 때의 교(敎)는 사대 문자 가운데 하나로서 중국 천자가 발하는 칙(勅)에 대하여 제후국 왕이 발하는 명령서였다. 즉 교지는 국왕이 신하나 백성들에게 관직ㆍ품계ㆍ자격ㆍ시호 등을 내려주는 문서로서, 오늘날의 임명장ㆍ사령장과 같은 것이다.

 

고신교지는 고려대에는 관고(官誥), 조선초기에는 왕지(王旨) 또는 관교(官敎)라고도 하였고, 황제국가로서 그 위상이 바뀐 대한제국 시대에는 칙명(勅命)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국왕의 신하에 대한 권위의 상징이며, 봉건적 관료정치의 유물이다. 따라서 고신 교지는 그 가문이나 선조의 권위를 나타내는 자료로 양반가문에 전래되어 오는 고문서 가운데 주종이 되고 있다. 교지의 종류를 좀 더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고신교지(告身敎旨) : 관리에게 벼슬과 품계를 내려주는 일종의 사령장.

■ 급제ㆍ입격교지(及弟ㆍ入格敎旨) : 문ㆍ무과와 잡과 등 과거 합격자에게 내려지는 홍패ㆍ백패.

■ 추증교지(追贈敎旨) : 후손이 고관이 됨으로써, 당사자의 처, 부모, 조부ㆍ조모의 품계를 내려 주거나, 올려주는 교지.

■ 시호교지(諡號敎旨) : 관원이 죽었을 경우 등 심사를 거쳐 그 사람의 업적과 관련된 시호를 내려주는 교지.

■ 사패교지(賜牌敎旨) : 왕이 특별히 노비ㆍ토지를 하사하거나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는 교지.

 

조선시대에 관료 혹은 그에 준하는 직임은 크게 국가 임명직 관원과, 이들 중 지방수령이 임명하는 지방직 관료가 있다. 국가 임명직 관원의 관계(官階)ㆍ관직의 수여는 크게 5품을 기준으로 발령 부서가 달라진다. 인사 부서인 이조와 병조에서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5품 이하 관원을, 그 이상은 국왕이 친히 발령자가 된다. 관계 관직임명의 특징은 추증(追贈)과 대가(代加)에서 잘 나타난다. 전통사회는 신분사회였고, 특정인의 영달은 곧 그 일족의 영광으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관료임명 특히추증제도에서 잘 나타난다. 추증은 관료로 임명되거나 승진되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처, 부모, 조부ㆍ조모의 품계를 함께 내려 주거나, 올려주는 제도이다.

 

그 중에서도 공신이 된다는 것은 그 자신뿐 만 아니라 대대로 그 후손들에게 명예와 부를 물려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공신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이 주어진다. 먼저 공신임을 증명하는 문서가 공신교서(功臣敎書)이며, 관복을 입은 모습을 그려서 내려주는 영정이 공신도상(功臣圖像)이다. 시호는 조선 초기까지는 왕과 왕비, 왕의 종친, 실직에 있었던 정2품 이상의 문무관원과 공신에게 내려준 명칭이며, 이 때 그 업적을 기록한 것이 시장(諡狀)이다. 송시열이 쓴 정경세(1563-1633)의 시장은 관청에 보관된 원본이다. 이 시장은 서경(署經) 과정을 비롯하여 각 관부의 관문서가 첨부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일단 관료가 되면 각기 해당 부처의 관원들과 공적 혹은 사적인 모임을 갖는다. 가장 흔한 회합은 이른 바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동료 관원들과의 모임이고, 또 한편으로는 과거 동기생들과의 모임이다. 이들 모임은 단순히 시문을 짓거나 오락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그 모임의 자체를 기록으로 남겼다. 동관(同官) 및 동방(同榜)의 계회도, 계회첩, 시첩 등이 바로 그것이다.

 

같은 부서에서 함께 근무했거나, 사마 혹은 대과에서 같은 시험에서 합격했다는 사실은 그 구성원들의 관료로서의 진출, 학문적 정치적 성향 등 해당 인물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1602년 용만가회사마방록, 1630년 임오사마방회도, 1823년 금오시첩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한편 1585년∼1590년 사이에 그려진 이응인(李應仁)의 인동감시시관계회도, 1610년 사림오현(士林五賢)을 문묘에 배향할 때 집사로 참여한 정경세의 성정계첩은 기록화 가운데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1729년에 작성된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의 무수동도(無愁洞圖)는 그가 호조판서로 서울에 거주할 때 고향마을이었던 공주목 산내면 무수동 일대를 화공에게 그리게 한 것이다. 이는 엄격히 말하자면 관료로서 행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앙의 관직을 수행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 인간의 고뇌와 체취를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이 그림은 전통시대 마을의 경관을 실경과 흡사하게 구현하였다는 점에서 회화사뿐만 아니라 사회사와 생활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여 진다.

 

2. 지방자치와 민원해결

 

1) 지방자치

 

현존 고문서는 그 작성의 지역적 배경이 대부분 지방, 그리고 그 속에서 세거해 온 가문이다. 지역인으로서 한 개인은 마을(동) - 군현으로 이어지는 행정조직과, 가중(家中), 문중(門中), 향중(鄕中), 계중(契中), 원중(書院中), 교중(鄕校中)가 같은 자치조직에 의해 수행되는 교화, 교육, 향사(享祀)와 같은 내용을 매개로 하여 거미줄처럼 교차되는 삶의 그물망에 의해 통제되고 교화된다. 이 가운데 지역주민의 삶과 가장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부분이 향약과 동계이다.

 

이것은 경상도 경주의 양동마을의 경우에서도 생생하게 구현된다. 양동마을은 하회마을과 더불어 반촌(班村)으로서 유명하지만, 사족간 혹은 같은 마을 사람을 대상으로 한 향약과 동약이 시행되었고 그 기록이 온전히 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초기이래 경주손씨(慶州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가 지배 사족으로 서 대대로 동족마을로 계승하여 왔다. 1819년 양좌동초안(良佐洞草案)에 의하면 마을의 당시 호수는 91호 정도였고, 근대적 호구 조사가 이루어진 1973년에는 손씨가 28호, 이씨가 88호를 차지하였다. 두 문중은 외손 관계로서, 동민 교화와 사족지배질서의 확립과 그 유지를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에 관한 문서가 향약과 동약의 운영과정에서 남긴 각종의 기록들이다.

 

양동향약안(良洞香約案)은 1689년부터 1782년의 100여 년의 시기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양동마을에 거주하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두 가문 인물들이 지켜야 할 각종 규약 및 참여한 사람의 좌목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1609년부터 1769년 사이에 작성된 양동동안은 마을의 동약에 참여한 인원의 좌목 등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로 상ㆍ하계로 구분되어 있어, 손씨와 이씨의 두 사족뿐만 아니라 서자나 양인 및 천민들도 동계 동약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자료는 사회분화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 밖에 양동동중완의(良洞洞中完議)가 있는데, 이는 19세기 접어들면서 이완되고 해이해지는 동민들의 풍속을 다잡기 위해 마을 구성원들의 합의사항을 적은 것이다.

 

2) 민원해결

 

양반과 평ㆍ천민을 막론하고 왕이나 관청에 자신의 민원이나 청원을 제기하는 방법은 여러 경로가 있었다. 왕에 대하여 선비들의 경우는 상소, 백성들은 신문고를 두드리거나 징을 치는(擊錚)의 방법을 쓰는 방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민원ㆍ청원의 방법은 흔히 소지(所志), 상서(上書)라 통칭되는 청원서를 통해 관청에 그 내용을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이 청원ㆍ민원의 처리절차를 보면 소지를 수령이나 관계 관청에 올리면 해당관원은 그 소지에 대한 판결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제음(題音)이라 한다. 제음이 내린 소지는 청원을 한 사람에게 되돌려주어 그 판결의 지속성을 유지하고, 또 증거자료로서 보관하였다.

 

소지는 내용상의 차이보다는, 발급주체의 신분이나 형식에 따라 다시 발괄(白活), 등장(等狀), 단자(單子), 원정(原情), 의송(議送) 등으로 구분된다. 소지의 수급자는 관찰사, 감사, 군수, 현감, 어사 등이다. 이러한 민원의 처리과정에서 소지보다 법제적인 효력을 갖도록 한 것이 완문(完文)과 절목(節目)이다. 다만 완문과 절목은 청원이 아닌 경우에도 관청이나 향청(鄕廳), 질청(作廳) 등의 기관에서 일방적으로 발급ㆍ공시할 수 있었다는 점이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 소지는 사인(士人)과 서민의 생활 중에서 생긴 제반 문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 사회의 생활상, 활동상을 반영한다.

 

특히 지방의 경우 지방의 실정과 개인의 고민, 그리고 그 처리내용을 반영하므로. 지역사 연구에는 필수적인 자료이다. 또 관청과 관청사이, 관청과 일반백성 사이, 백성들 사이의 제반 다양한 문제들을 통해 그 시대인들의 의식의 범주와 사회 성격도 엿볼 수 있다. 경주손씨가에는 현존 최고(最古)의 결송입안(決訟立案)이 전한다. 이 자료는 1560년 사돈간인 손광현(孫光睍)과 최득충(崔得忠) 사이에 벌어진 노비 소송에 대한 것으로, 법제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여성의 지위와 그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이다.

 

3. 경제생활 -매매와 상속

 

1) 노비ㆍ토지의 매매

 

명문(明文)이란 개인과 개인, 또는 다자(多者) 사이에 특정사안에 대하여 합의하고, 그 사실을 문자를 통해 공표함으로써, 상호간의 권리와 의무관계를 밝힌 문서를 말한다. 명문은 매매 이외에 분재기 등에도 광범위하게 쓰여진 용어였다. 하지만 명문의 대부분은 토지, 가사(家舍), 노비(奴婢) 등을 매매할 때 사용된 계약서이다. 토지명문에는 매매, 전당, 상환 등 그 내용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된다. 일정기한을 정해 돈을 빌리면서, 전답을 저당 잡히는 문서를 흔히 전당(典當)문기라고 부른다. 정작 고문서에는 이러한 문서를 수표(手標), 수기(手記) 혹은 불망기(不忘記)라 하기도 했다. 상환문기란 말 그대로 매매 당사자끼리 서로에게 편리한 다른 물건으로 교환하는 내용을 담은 문서를 말한다.

 

매매의 경우, 토지와 노비를 막론하고 계약이 있은 지 100일 이내에 관에 신고하여 관부의 공증문서인 입안(立案)을 받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노비 거래의 경우에만 입안이 철저하였고 토지의 경우 조선 중ㆍ후기 이후에는 입안을 생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명문의 내용은 작성 시기, 발급자와 수급자, 해당 물건의 전래경위, 매매사유, 매매내용, 가격, 약속 위반 시의 조치사항 등을 기재하고 있다. 또한 이와 함께 매매 당사자 및 증인ㆍ필집인(筆執人:집필자)의 서명이 있어야 한다. 서명은 수결(手決)이라고 통칭하기도 하는데, 작성 시기나 남녀, 신분 또는 당사자의 지위(官人, 私人의 여부) 등에 따라 호칭, 서명방법과 내용이 차이가 있다. 요컨대, 사대부 남자의 경우 착명서압(着名署押) 또는 서압(署押), 부녀자는 도서(圖書)를 한다. 일반 양인과 노비를 비롯한 천인은 수촌(手寸), 수장(手掌) 등 수형(手形)을 표시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2) 재산상속

 

개인 또는 조직(문중,또는 계)의 경제적 토대와 그 경위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재산 상속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재산을 상속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가 곧 분재기(分財記)로, 분재기란 재주(財主)가 노비 토지 가사(家舍) 우마(牛馬) 가재도구 등 재산을 자녀들에게 상속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재산상속은 재주가 살아있을 때 분재하는 경우와 재주가 죽은 뒤 시행하는 두 경우가 있고 그 방법에도 몇가지 차이가 있다. 따라서 분재 시기나 상속방법에 따라 분재기를 분류하면, ① 금급문기(衿給文記) 혹은 분금문기(分衿文記), ② 별급문기(別給文記) ③ 유서(遺書) 혹은 유언(遺言) ④ 화회문기(和會文記) 등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금급은 ‘깃급’으로 읽으며, 재주(주로 부모)가 자식 각자의 몫(衿)을 나누어주는 것을 말한다. 이 때 ‘몫’이란 상속 주체가 상속인 개인의 능력, 처한 입장, 또는 사회 관행에 따라 정해 진 상속의 양을 뜻한다. 따라서 자식 각자의 몫은 시대 상황이나 가족 구성상의 처지에 따라 달랐다. 주로 남녀, 장자ㆍ차자 여부, 그리고 봉사(奉祀) 여부가 상속의 양을 규정하는 요소가 된다. 예컨대, 평균분급(平均分給)이 일반적이었던 조선전기의 경우 자식간의 균분(均分)된 양, 과거 등으로 인해 별급 받은 양 등이 각자의 몫이다. 별급은 과거합격, 혼인, 득남, 효성, 봉사(奉祀) 등 본인의 능력이나 처한 입장에 의해 재주가 ‘특별히 재산을 증여하는 것’을 말한다. 유서ㆍ유언은 재산상속과 관련하여 자손들에게 특별히 당부할 필요가 있을 때 작성되었다. 주로 서모(庶母)나 양ㆍ천첩자녀(庶孼), 봉사자(奉祀者)를 배려하기 위해 행한 경우가 많다. 궁극적으로는 훗날의 분쟁을 막고, 분재의 이견을 없애기 위해 행해졌다. 화회 분재는 재주의 사후, 자식 등 후손들이 한 장소에 모여 만장일치로 행한 상속행위를 말한다. 재주에 의한 금급 분재나 동생(同生)들에 의한 화회 분재는 대개 그 가문의 전통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분재기 양식은 대체로 재산을 상속하는 배경, 자녀별로 나누어진 토지와 노비, 가옥, 가재(家財)의 내용과 수가 기재되고, 마지막으로 재주, 증인, 필집 등의 서압(署押)과 도서(圖書)를 행하였다. 이러한 분재기는 공신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소송의 증거자료로 빈번히 제출되기도 하고 판결의 유용한 자료로 채택되기도 했다. 재산상속은 복잡한 가정사만큼이나 여러 가지 조건이 있고, 어떤 때에는 분재 때문에 부모자식 혹은 동생들끼리 긴장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하지만, 비록 집집마다 사연이 많고 여러 분재원칙이 있었을지라도 이들 원칙을 포괄하는 대원칙이 있다. 조선전기의 경우 대체로 그 원칙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균분 원칙

∙ 금득(衿得)한 재산에 대한 배타적 처분권 부여

∙ 손외여타(孫外與他) 금지

 

균분원칙이란 남녀 혹은 장ㆍ차자를 막론하고 부모(상속자)가 남긴 재산은 양적 질적으로 ‘정확ㆍ 철저하게’ 나누어 가진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노비의 경우 노(老:50세 이상)ㆍ장(壯:16∼49세)ㆍ약(弱:0∼15세)으로 구분해 분재했으며, 심지어 그 분배 기준으로서 미(迷), 즉 노비의 지능까지도 구분하였다. 전답의 경우 수확량 단위인 결부( 結負)를 기준으로 분재하였다. 즉 면적 단위인 두락지(斗落地:마지기)보다는 파(把) - 속(束) - 負(卜) - 결(結)의 소출량 단위로 분재하였다. 물론 이 방법도 분재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전답에서의 이러한 분재 과정을 분재기에서는 ‘집주분금(執籌分衿)’이라 하였다. 집주 분금이란 ‘산대(算臺)를 잡고 일일이 정해진 원칙과 관행, 그리고 법에 따라 몫을 계산해 나누는 행위’를 말한다. 1510년에 작성된 손소자녀칠남매화회문기(孫昭子女七娚妹和會文記)에는 7명의 자식들의 노비 18∼19구씩 정확하게 균분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동일한 문서를 7매 작성하여 각기 나누어 가진다고 명기하고 있다.

 

일단 분재가 된 뒤 그 재산은 부변(父邊)ㆍ모변(母邊) 등 금득별(衿得別)로 치부해 두며, 각자 몫에 대한 처분권은 결혼 뒤일지라도 부부 각자에게 있다. 따라서 타인 몫을 상속하거나 방매 할 때에는 반드시 금득자의 허락, 즉 동의(同議) 절차를 거쳐야 했다. 예컨대 분재기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서명하거나 도서를 찍는 것은 분재행위에 대하여 부부가 동의하고 승낙한다는 표시이다. 손외여타 금지란 ‘자손 이외 타인에게 재산을 주지 말라’는 재주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서 조선초기 문서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혈연 즉 ‘피’가 제도나 의례(儀禮)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동시에 사회의 전근대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재산의 자녀간 균분, 그리고 상속재산의 자녀별 관리와 처분권 인정에 관한 문제는 조선사회의 사회 경제적 구조와 관계된 중차대한 문제이다. 즉 자녀간 균분상속은 부의 집중과 확대 재생산을 방해하는 조건이 되었고, 부변 모변과 같은 몫별 재산상속의 종말은 필연적으로 여성의 경제적 지위를 하락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호주제 개폐 등 오늘날 쟁점이 되고 있는 사회문제의 초점은 이와 같은 조선조 사회의 구조적 요인, 특히 사회 경제적 요인의 분석 위에 그 해답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4. 여성생활

 

유교사회에서는 남녀유별(男女有別)이라는 역할분담 원칙에 따라 집 밖에서 이루어지는 제반사는 남자들의 몫으로 돌렸다. 그러나 유교이념 특히 주자가례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지 않았던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여성의 사회활동이 남성의 보조적 차원에서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은 전통시대에 있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했다. 다만 그 활동을 알려주는 기록이 빈약할 뿐이다. 연구사를 통해 보면, 17세기 이전의 상속 및 가족제도를 통해 여성의 참모습들이 일부 조명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사료에서 확인된 것만을 부조적으로 드러낸 것에 불과할 뿐이다. 고문서에는 여성의 생활상과 그 의식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많다. 그 보편성 여부는 접어두고서라도 여성의 다양한 측면을 그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기록이다. 명분이 우선하는 조선조 사회에서 제사문제는 여성의 재산상속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우선 제사의 유형부터 살펴보자. 상속과 제사문제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17세기 중엽 이전의 관행을 살펴보아야 한다.

 

자식의 입장에 섰을 때 남녀간 균분(均分) 상속은 하나의 권한이었지만, 제사는 이에 수반하는 의무였다. 즉 재산 상속의 반대급부로서 자식들은 부모 및 조상에 대하여 봉양과 제사봉행이라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제사의 방법은 윤회봉사와 분할봉사로 크게 구분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 선조들은 윤회봉사를 채택하였다. 윤회봉사란 자식들이 번갈아 가면서 선대의 각종 제사를 전담하여 설행(設行)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의 자식이란 남녀 혹은 장자 지차를 막론하고 모든 자식이 윤회봉사의 주체가 된다. 윤회의 경우, 대상이 되는 제사는 기제(忌祭) 뿐만 아니라 사명일(四名日:정월 초하루, 한식, 단오, 추석) 제사, 묘사(墓祀)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윤회봉사는 하나의 관행이기에 문서로 남아있는 예는 흔치 않다. 그런데 고산 윤선도의 아들 윤인미(尹仁美, 1607-1674)의 처가 문화유씨가에서는 그 사실을 문서로 남기고 있다. 유씨가의 <忌祭ㆍ墓制次例>에 의하면, 기제의 경우 시대봉사(四代奉祀)의 예법에 따라 고조부ㆍ모, 증조부ㆍ모, 조부ㆍ모, 부주(父主)ㆍ모주(母主) 등 조상의 제사를 각각의 자식들이 분담, 윤행하였고, 묘제는 정조(正朝,정월초하루), 한식, 단오, 추석 때에는 제사의 담임자는 제물을 직접 장만하고 제사를 모셨다. 딸의 친정 제사 윤행(輪行)은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와 관련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사는 자식 된 자의 당연히 해야할 의무였지만, 재산의 균등분배는 그 의무에 대한 권리였다. 그러나 제사를 모시지 않는 다는 것은 의무의 불이행이자 권리를 포기였다. 17세기 중엽 제사의 윤회가 해소되면서 여성에 대한 차등분재가 새로운 관행으로 굳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여성의 차등 분재에 대해 양반가의 논리는 매우 정연하면서도 단호하다. 그 논리의 과정을 추적해 보자. 사대부가에서 딸이 제사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그 남편인 사위(女婿)와 그 자식인 외손이 제사를 주관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이른 바 유교적 예제의 성립과 발전은 사위 및 외손의 처가ㆍ외가 제사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가져온다.

 

세간의 사대부가에서는 사위 집에서 제사를 윤행하는 것이 흔하게 있어왔다. 그러나 일찍이 남들의 사위 및 외손들을 보건대 제사를 (뒤로)미루거나 왜곡시키거나 빠트리는 자가 많다. 비록 제사를 모시더라도 제물(祭物)은 정결하지 못하고 제례(祭禮)에는 정성과 공경함을 결여하고 있으니, 이는 도리어 제사를 행하지 않아서 나음만 같지 못하다. ‘처삼촌 벌초하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바로 조선후기 사위ㆍ외손의 처가 제사에 대한 태도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는 딸 자식을 제사 윤행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것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남녀의 평등분배라는 분재권을 제약, 또는 축소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 논리는 한마디로 ‘딸 자식은 부모 생전에 봉양의 도리도 못하고, 사후에도 행제(行祭)의 예법도 차리지 못하니 남자들과 재산을 등분(等分)할 수 없다’ 는 것이었다.

 

17세기 중엽 전라도 부안의 부안김씨의 경우, 결국 딸에게는 남자의 1/3에 해당하는 재산만을 분재하도록 하는 변화된 원칙을 만들어 대대로 준수토록 했다. 즉 남자 상속분의의 1/3만을 분재한다는 정식(定式)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딸이나 아들이나 부모의 자식이라는 데에서 차별성이 없어 그 분재권은 인정되지만, 여자는 부모 봉양과 조상에 대한 봉사라는 의무를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의무를 이행치 못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재산상의 불이익을 주겠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상속제의 변화는 17세기 이후 이른 바 종가 및 동성촌(同姓村)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남귀여가혼의 해소와 직접적 관련성이 있다. 특히 주자가례에 다른 종법제의 벌전은 남자 중심으로 가계(家系)를 상속토록 하는 이른 바 종통(宗統) 의식을 확산시켰고, 이에 따라 변화된 혼속이 영부제(迎婦制)였다. 영부제는 시가에서 며느리를 맞이하는제도로서 오늘날 가부장적 유교사회의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17세기 혼속 및 상속제의 변화에 따라 나타난 관행은 가기(家基) 및 전답 노비를 남자에게만 지급하는 현상ㅇ르 낳았다. 이에 조상 전래의 전답이나 노비는 딸에게 더 이상 분재의 대상이 아니었고, 가문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재산을 반드시 남자에게 주어, 대대로 상속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17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생긴 약 250년 간의 전통에 불과한 것이었다.

 

여성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민원의 제기와 해결과정에서 보여주는 여성의 역할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특유의 섬세하고 자상하며 구체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가정내의 양자(養子) 및 서자(庶子) 문제는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였으므로 그 대응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여성이 주체가 되어 작성한 고문서 가운데에는 이에 관한 것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1634년 <이지처고령신씨발괄(李遲妻高靈申氏白活)>이 경우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남편과 자식을 일찍 여윈 신씨는 매득(買得) 문서가 소실된 것을 기화로 주위 사족이 그 매도 사실을 부인하고 그 소유권을 부정하였다. 이에 신씨는 관련 사항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나서 자기 의사를 관부에 개진하여 소유권을 방어한다. 시집간 딸의 친정 재산권 유지 문제, 그리고 그가 자식없이 죽었을 경우의 재산 귀속문제는 여성의 사회 경제적 위상을 가름하는 하나의 척도가 되었다. 초기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에 관한 기사가 빈번하다.

 

시집간 딸은 친정으로부터 대개 두 번에 걸쳐 재산을 상속받는다. 첫 번째는 혼인할 당시로서, 이른바 신노비(新奴婢)를 받는다. 신노비는 신부가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유모(乳母) 혹은 사환을 목적으로 분재된 노비였다. 대체로 2∼4명을 받는데,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 친가에서 노비를 상속받는다. 두 번째는 부모 혹은 자식들에 의해 전 재산을 일시에 나누어 가지는 경우이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문서를 ‘도문기(都文記)’라 하였다. 분재에 있어서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는 딸이 시집가서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이다. 이 때 그 딸이 친정으로부터 이미 지급받은 재산을 친정측과 시집측이 어느 비율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법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자식 없이 죽은 전모(前母) 측(친정측)과 의자녀(義子女, 시집측)의 상속비율은 기본적으로 사대 일(4:1)이었다. 그러나 후처의 자식으로 죽은 딸의 제사를 모시게 되는 의자녀가 가계(家系)를 계승하는 승중자(承重子)일 경우 3분(分)을 더해 주도록 했다. 즉 대개의 경우 본족인 친정측과 시집측은 4 : 4의 비율로 재산을 나눠 갖게 되었던 것이다. 여성이 자식이 없을 경우, 또 하나의 방편은 조카 등 시집의 인물 가운데 적당한 사람을 시양자(侍養子)로 삼아, 그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방법이다. 1539년 <안동부상속입안(安東府相續立案)>이 바로 그러한 유형에 속한다.

 

여성의 사회활동에서 한자(漢字)는 여러 가지 면에서 걸림돌임에 틀림없었다. 따라서 한글의 창제는 여성들의 의사소통 수단의 큰 변혁이었다. 한글의 가장 큰 의의는 여성들이 그들의 의사를 자기 손으로 직접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글창제이후 서간에

서뿐만 아니라 투서, 진정 등의 수단으로 꾸준히 한글이 사용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빈번히 등장한다. 한편 민간에서는 여성들이 소지를 올리면서 한글을 사용하는가 하면 문집 등에서 시문을 창작하면서도 한글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가

장 빈번히 한글이 사용된 것은 편지였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여성들이 언간을 통해 자기 의사을 분명히 전달하고 있는 가문은 충청도 회덕(懷德)의 은진송씨(恩津宋氏) 가문이 아닌가 한다. 재월당 송규렴 종가, 동춘당 송준길 후손가 등지에는 다수의 언간이 전하는데, 이것은 송씨 가문 고문서의 특징이기도 하다. 1705년 <호연재언간(浩然齋諺簡)>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이는 여류문인으로도 유명한 호연재 안동김씨의 언찰을 모은 간찰첩이다. 호연재 안동김씨 자신은 간찰뿐만 아니라 <오두추치(鰲頭追致)>, <호연재유고(浩然齋遺稿)>, <자경편(自警篇)>등

의 시문을 남긴 인물이다. 하지만 이는 이 가문의 간찰 가운데 극히 일부로, 호연재 안동김씨와 그 후손되는 며느리들은 대대로 언간을 통해 의사를 주고받았다. 이 가문에는 17세기∼20세기에 이르는 약 3세기 동안 약 300 여 통의 언간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