蓀谷山人傳 - 許筠

2017. 8. 18. 16:42사람과사람들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 허균(許筠)

 허균(許筠: 1569년 음력 11월 3일~1618년 음력 8월 24일)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허균의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성소(惺所)로 불리웠고, 후에는 백월거사(白月居士)로도 불렸다. 광해군 때 반역을 도모하려했다는 밀고로 능지처참되었다.


관리자 註(주)

허균家와 우리 신평이문의 인연은 대단히 깊다. 손곡의 관향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이런 내용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관찰사공 13세 휘 이거(李蘧)는 허엽의 門人이었고 그 부인 이씨와 허균과는 외사촌간이었다. 손곡이 허균의 형 허봉과 막역한 친구였고 허균의 집에서,손곡의 집에서 허균과 허난설헌에게 시를 가르쳤는데 이처럼 신평이씨 집안과 긴밀한 혈연과 학연으로 이어진 양천허씨 집안에서 과연 손곡이 신평이씨 여부를 몰랐을 것인가?  더구나 관찰사 공의 아들인 훈련대장 문전과 그 아우 현감 문란이 역적으로 몰린 허균을 구명하기 위해 상소를 올린것이 왕조실록에 뚜렸이 나와 있다. 역적을 비호,두둔하면 같이 역적으로 몰릴 위험이 있음에도 구명 상소를 올린 두분의 행적에서 혈연이 엉켜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 허균(許筠)


蓀谷山人李達字益之(손곡산인리달자익지)
손곡산인(蓀谷山人) 이달(李達)의 자는 익지(益之)로

雙梅堂李詹之後(쌍매당리첨지후)쌍매당(雙梅堂) 이첨 의 후손이다.

其母賤(기모천) 그는 어머니가 천인(賤人)이어서

不能用於世(불능용어세) 세상에 쓰여질 수 없었다.

居于原州蓀谷(거우원주손곡)원주(原州)의 손곡(蓀谷)에 살면서

以自號也(이자호야) 자신의 호(號)로 하였다.


達少時(달소시) 달(達)은 젊은 시절에

於書無所不讀(어서무소불독)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綴文甚富(철문심부) 지은 글도 무척 많았다.

爲漢吏學官(위한리학관) 한리학관이 되었지만

有不合(유불합)  합당치 못한 일이 있어

棄去之(기거지) 벼슬을 버리고 가버렸다.

從崔孤竹慶昌(종최고죽경창) 고죽 최경창과

白玉峯光勳遊(백옥봉광훈유)옥봉 백광훈을 따라 노닐며


相得懽甚(상득환심) 서로 마음이 맞아 아주 기뻐하고

結詩社(결시사)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다.

達方法蘇長公(달방법소장공)  달은 한창 소장공을 본받아,

得其髓(득기수)  그 요체를 터득하여

一操筆輒寫數百篇(일조필첩사수백편)한번 붓을 잡으면 문득 수백 편을 적어 냈으나

皆穠贍可詠(개농섬가영)  모두 농섬(穠贍)하여 읊기에 좋은 시들이었다.


一日思菴相謂達曰(일일사암상위달왈)
하루는 사암 정승이 달에게 말해주기를

詩道當以爲唐爲正(시도당이위당위정)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 하는 것이 정도(正道)가 되네.

子瞻雖豪放(자첨수호방)  자첨의 시는 호방(豪放)하기는 하지만

已落第二義也(이락제이의야) 이미 당시의 아래로 떨어지네."하였다.

遂抽架上太白樂府歌吟(수추가상태백악부가음) 그리고는 시렁 위에서 이태백(李太白)의 악부(樂府)ㆍ가음시(歌吟詩),

王孟近體以示之(왕맹근체이시지)왕유(王維)ㆍ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찾아내서 보여주었다.

達矍然知正法之在是(달확연지정법지재시) 달은 깜짝 놀란 듯 정법이 거기에 있음을 알았다.

遂盡捐故學(수진연고학) 드디어 전에 배운 기법을 완전히 버리고,

歸舊所隱蓀谷之莊(귀구소은손곡지장)예전에 숨어 살던 손곡(蓀谷)의 전장(田莊)으로 돌아갔다.

取文選太白及盛唐十二家(취문선태백급성당십이가)《문선(文選)》과 이태백 및 성당(盛唐)의 십이가·

劉隨州(류수주)  유 수주

韋左史曁伯謙唐音(위좌사기백겸당음)  위 좌사와 백겸의《당음(唐音)》까지를 꺼내서

伏而誦之(복이송지) 문을 닫고 외었다.

夜以繼晷(야이계귀)밤이면 날을 새운 적도 있었고,

膝不離坐席(슬불리좌석) 온종일 무릎을 자리에서 떼지 않기도 하였다.

凡五年(범오년) 이렇게 하여 5년을 지내자

悅然若有悟(열연약유오)어렴풋이 깨우쳐짐이 있었다.

試發之詩(시발지시) 시험삼아 시를 지었더니

則語甚淸切(칙어심청절) 어휘가 무척 청절(淸切)하여

一洗舊日熊(일세구일웅) 옛날의 수법은 완전히 씻어졌었다.


卽倣諸家體而作長短篇及律絶句(즉방제가체이작장단편급률절구)그리하여 당 나라 여러 시인들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장편(長篇)ㆍ단편(短篇) 및 율시(律詩)ㆍ절구(絶句)를 지어냈다.

鍛字聲揣律摩有不當於度(단자성췌률마유불당어도)글자와 구절을 단련(鍛鍊)하고 성음(聲音)과 운율(韻律)을 췌마(揣摩)하면서, 법도에 부당함이 있으면

則月竄而歲改之(칙월찬이세개지) 달이 넘고 해가 가도록 개찬(改竄)을 거듭하였다.

凡著十餘篇(범저십여편) 그러한 노력을 기울여 10여 편을 지어서

乃出而詠之諸公間(내출이영지제공간) 비로소 세상에 내놓고 여러분들 사이에서 읊자,

諸公嗟異之(제공차이지) 모두 감탄해 마지 않으며 깜짝 놀랐었다.

崔白皆以爲不可及(최백개이위불가급) 최고죽(崔孤竹)ㆍ백옥봉(白玉峯) 등도 모두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고,

而霽峯荷谷一代名爲詩者(이제봉하곡일대명위시자) 제봉· 하곡과 같은 당대의 시로 이름난 분들이

皆推以爲盛唐(개추이위성당) 모두 성당(盛唐) 풍의 시를 짓는다고 추켜 세웠다.


其詩淸新雅麗(기시청신아려) 그의 시는 청신(淸新)하고 아려(雅麗)하여

高者出入王孟高岑(고자출입왕맹고잠) 수준 높게 지은 것은 왕유ㆍ맹호연ㆍ고적(高適)ㆍ잠삼(岑參)에 버금하고,

而下不失劉錢之韻(이하불실류전지운) 수준이 낮은 것도 유장경(劉長卿)ㆍ전기의 운율을 잃지 않았다.


自羅麗以下(자라려이하) 신라(新羅)ㆍ고려(高麗) 이래로

爲唐詩者皆莫及焉(위당시자개막급언) 당시(唐詩)를 지었다고 하는 사람 중 아무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寔思菴鼓舞之力(식사암고무지력) 정말로 사암(思菴)이 고무시켜 준 힘이었으니,

而其陳涉之啓漢高乎(이기진섭지계한고호) 그것은 진섭이 한 고조(漢高祖)의 창업을 열어 준 것이라고나 할까.

達以是名動東國(달이시명동동국)달은 이 때문에 이름이 우리나라에 울렸고,

貴之而捨其爲人(귀지이사기위인) 귀하게 여겨져 그의 신분은 놓아두고도

稱譽不替者(칭예불체자) 칭찬해 마지 않는 분들로

詞林三四鉅公也(사림삼사거공야)시문(詩文)에 뛰어난 3-4명의 거장(巨匠)들이 있었다.

而俗人之憎嫉者(이속인지증질자)그러나 속인(俗人)들 중에는 증오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比肩林立(비견림립) 줄줄이 이어 있어,

屢加以汚衊(루가이오멸) 여러 번 더러운 누명을 덮어씌우며

寘之刑網(치지형망) 형벌의 그물에 밀어 넣었지만

卒莫能殺而奪其名也(졸막능살이탈기명야) 끝내 죽게 하거나 그의 명성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達貌不雅(달모불아) 달은 용모가 아담하지 못하고

性且蕩不檢(성차탕불검) 성품도 호탕하여 검속(檢束)하지 않았다.

又習俗禮(우습속례) 더구나 시속(時俗)의 예법에 익숙하지도 못하여

以此忤於時(이차오어시) 이런 것들 때문에 시류(時流)에 거슬렸었다.

而善談今古(이선담금고) 그는 고금(古今)의 이야기를 잘했으며,

及山水佳致(급산수가치)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이르면

喜酒(희주)  술을 즐겨 마셨다.

能晉人書(희주능진인서) 진(晉) 나라 사람에 가깝도록 글씨도 잘 썼다.

其中空洞無封畛(기중공동무봉진) 그의 마음은 툭 트여 한계가 없었고,

不事產業(불사산업) 먹고 사는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아서

人或以此愛之(인혹이차애지) 사람들 중에는 이 때문에 더 그를 좋아하는 이도 있었다.

平生無着身地(평생무착신지) 평생 동안 몸을 붙일 곳도 없어

流離乞食於四方(류리걸식어사방) 사방으로 유리(流離)하며 걸식(乞食)까지 했으니,

人多賤之(인다천지) 사람들이 대부분 천하게 여겼다.

窮厄以老(궁액이로) 그렇지만 궁색한 액운으로 늙어갔음은,

信乎坐其詩也(신호좌기시야) 말할 나위도 없이, 그가 시 짓는 일에만 몰두했던 탓이었다.

然其身困而不朽者存(연기신곤이불후자존) 그러나 그의 몸이야 곤궁했어도 불후(不朽)의 명시를 남겼으니

豈肯以一時富貴(기긍이일시부귀) 한 때의 부귀로

易此名也(역차명야) 어떻게 그와 같은 명예를 바꿀 수 있으랴!

所著殆失盡(소저태실진) 지은 글들이 거의 다 없어질 지경인데

不佞粹爲四卷以傳云(불녕수위사권이전운) 내가 가려서 4권으로 만들어 전해지게 하였다.

外史氏曰(외사씨왈) 외사씨(外史氏)는 논한다.

朱太史之蕃(주태사지번) 태사(太史) 번은

嘗觀達詩(상관달시)  일찍이 달의 시를 보았다.

讀至漫浪舞歌(독지만랑무가) 만랑무가(漫浪舞歌)라는 시를 읽고서는

擊節嗟嘗曰(격절차상왈) 격절차상(擊節嗟賞)하면서 이르기를

斯作去太白(사작거태백) "이 작품이 이태백(李太白)의 시에서

亦何遠乎(역하원호) 또한 어찌 멀리 있겠는가."했으며,

權石洲韠見其斑竹怨曰(권석주필견기반죽원왈)석주(石洲) 권필도 달의 반죽원(斑竹怨)이라는 시를 보고서,

置之靑蓮集中(치지청련집중)  "청련의 시집 속에 넣어도,

具眼者不易辨也(구안자불역변야) 안목(眼目) 갖춘 사람일 망정 판별하기 쉽지 않으리라."했었다.

此二人者(차이인자) 이 두 사람이

豈妄言者耶(기망언자야) 어찌 망언(妄言)을 할 사람이겠는가.

噫達之詩(희달지시) 슬프다, 달의 시야말로

信奇矣哉(신기의재) 진실로 기특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