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구곡을 지리산에 경영한 명암 정식

2017. 6. 6. 08:56사람과사람들

[지리산의 각자] – 주자의 [무이구곡]을 지리산에 경영한 명암 정식

 

                                                                                                [지리99]    지 종 석

 

1. 명암 정식의 [무이구곡(武夷九曲)]

 

조선시대 국가 이념이자 중심 철학으로 삼았던 성리학을 집대성한 송나라 주자(朱子 - 朱熹 높임 명칭:1130~1200)가 고향인 중국 복건성 무이산 계곡에 이름 붙인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조선시대 사대부들도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무이구곡을 경영하며 자신이 목숨같이 믿고 따르던 학문의 아버지 주자를 숭상하는 마음을 표현하곤 하였다.

 

이러한 경향으로 우리나라에도 송시열의 화양구곡, 율곡의 고산구곡 등 산천 수려한 곳에 구곡을 경영하며 주희를 숭상하는 한편으로 당쟁에 회의를 느껴 도교적 은둔에 대한 동경을 실현하는 곳으로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유토피아로 삼았다.

 

무이구곡이 조선시대 사대부 지식인들의 유토피아였다면 이찌 조선시대 지조와 절개 높은 유림들의 순례지와도 같았던 지리산에 무이구곡이 없을 수 있겠는가.

 

지리산에 무이구곡을 경영한 선비가 있었으니 바로 명암 정식(明菴 鄭:1683~1746)이다.

명암은 진주 사람으로 19세때 합천의 시험장으로 과거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중국 송나라 호전(胡銓:1102~1180)이라는 사람이 지은 척화소(斥和疏:송나라가 오랑캐의 나라인 금나라와 화친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읽고, 병자호란(1636)으로 오랑캐 나라인 청나라에 수모를 당하고 화친을 맺은 세상에 비분하여대장부로 태어나 이찌 차마 지금  세상에서 출세할 수 있겠는가.”하고 돌아온 이후 평생 출사하지 않았다.

지조와 기개 넘치는 명암이 만년에 가족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주자를 본받아 무이산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아홉 구비에 무이구곡을 경영하였으니 바로 지금의 구곡산 무이구곡이다.

 

 

명암이 무이구곡을 명명하며 각자를 새겼다는 사실을 [이도암(李陶庵)에게 주는 서신]에 상세히 기록해 놓았으니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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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선생의 [이도암에게 주는 서신]에서

제가 사는 주산은 이름을 무이산(武夷山)이라고 하는 바, 바로 두류산의 돌문 안에 있는 흘러온 기슭입니다. 그 아래는 구곡(九曲)이 있는데, 대개 옛날부터 그 이름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흘러 전해 오는 것으로는 수홍교(垂虹橋), 옥녀봉(玉女峰), 고루암(鼓樓巖), 와룡암(臥龍巖) 등입니다. 구비 가운데서 이름이 없는 것은 저가 이름을 지어 붙였습니다.

선생을 위해서 하나 둘 아뢸 터이니 들어 보시옵소서.

 

제 일곡은 수홍교(垂虹橋)이고, 그 다음은 옥녀봉(玉女峰)이고, 그 다음은 농월담(弄月潭)이고, 그 다음은 낙화담(落花潭)이고, 그 다음은 대은병(大隱屛)이고, 그 다음은 광풍뢰(光風瀨)이고, 그 다음은 제월대(霽月臺)이고, 그 다음은 고루암(鼓樓巖)이고, 그 다음은 와룡암(臥龍巖)입니다. 와룡암의 길이는 거의 오십여 아름쯤 되고, 골짜기에 가로로 뻗어있어 그 모양은 드러누운 용과 같습니다.

 

수십 길의 폭포가 바위의 바로 허리께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자를 고쳐서 ()자로 하였습니다. 폭포 위에는 자연적으로 된 돌대가 있는데, 그 이름은 연화대(蓮花臺)입니다. 그 높이는 거의 수백여 길이나 되는데, 그 위가 평평하여 이십 여명 정도 앉을 수 있습니다. 이곳이 구곡 가운데서 제일가는 경치입니다.

 

구곡의 각 구비마다 모두 이미 그 이름을 돌에 새기고 붉은 색을 발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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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곡산 무이구곡

 

, 무이구곡 아홉 구비마다 이름을 짓고 바위에 각자로 새겨놓았다고 하니, 어디가 어디인지 밝혀줄 명확한 증거를 남겨 놓아 감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막연한 설명만 곁들여 400년이 지난 오늘날 지리산 후답자들에게 그 증거들을 찾아내도록 던져준 명암 선생의 숙제 앞에 흥분과 두통을 번갈아 느끼게 된다.

 

 

1) 1 수홍교(垂虹橋)

 

무이구곡의 제1곡으로, 계곡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9곡을 명명했다 하였으니 수홍교는 계곡의 가장 아래 지역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무이구곡이 흘러내려 덕천강을 만나는 곳이 그곳이니 덕산에서 중산리 방향으로 덕천서원을 지나 서신마을에 있는 관천대 바로 앞 다리가 수홍교터다.

 

1수홍교지형도.jpg

*수횽교 지형도

 

2수홍교터.JPG

*수홍교 터(좌측에 관천대가 있고 그 앞 계곡에 수홍교가 있었으나 지금은 홍예교 석축하나 흔적도 없다.)

 

수홍교(垂虹橋)라면 무지개다리라고도 하는 홍예교를 말한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홍예교인 순천 선암사 승선교와 같이 아름다운 다리가 걸려 있었으니 바로 옆 관천대와 덕천강과 어우러져 가히 제1곡이라 할만 하였을 것이다.

 

3선암사승선교.JPG

*수홍교와 비슷했을 선암사 승선교

 

그런데 명암이 남겼다는 垂虹橋(수홍교) 각자는 수홍교 터 바로 곁에 있지 않고 이곳에서 약 30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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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垂虹橋 각자(명암의 막내아들 相華(상화)의 글씨)

 

5수홍교각자주변.JPG

*수홍교 각자 주변(지금은 어느 민가 담벼락에 묻혀 있다.) 

 

지금은 어찌 하다가 어느 만가의 담장에 깔려 간신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만가가 없었을 옛날에는 수홍교에서 한발 물러앉아 수홍교와 관천대와 덕천강이 어우러진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기에 더 없는 위치임을 깨닫는 순간, 왜 명암선생이 수홍교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각자를 새겼는지 그 깊은 뜻을 알아차릴 것이다.

 

 

2) 2 옥녀봉(玉女峰)

 

지금은 계곡 오른쪽에 승용차도 다닐 수 있는 시멘트 포장된 농로를 따라 가다가 옥녀봉을 목전에 두고 들어가면 되지만, 명암선생이 구곡을 지을 때는 수홍교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구비마다 이름을 지었으니 옥녀봉 의미를 느끼면서 제대로 찾으려면 명암 선생의 발자취 따라 계곡을 따라 그슬러 올라가야 맞다.

그러나 현재 무엇을 하려는지 수홍교 위 계곡은 온통 공사판이라 진행도 불가할 뿐 아니라 옛 정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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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봉 지형도

 

7옥녀봉.JPG

*옥녀봉(전봇대 좌측 조그만 봉우리) 

 

서신마을에서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멀리 도솔암 올라가는 계곡의 좌측으로 통신탑이 세워져 있는 봉우리(사진 가운데)가 보이고 그 앞에 짙은 소나무숲의 봉우리가 있고, 그 우측 앞에 구분하기도 어려운 신록색을 덮인 작은 봉우리(전봇대 좌측)가 옥녀봉이다.

무이구곡은 짙은 소나무 봉우리와 옥녀봉 사이로 흐른다.

 

임도를 따라 옥녀봉 바로 옆까지 올라가면 도로 좌측에 무덤이 있고 무덤 뒤로 옥녀봉 정상 올라가는 희미한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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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女峰 각자(명암선생의 막내아들 相華(상화)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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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가 있는 바위(옥녀봉 정상에서 계곡쪽으로 조금 내려서면 만나게 되는 바위. 그냥 지나쳐버리면 각자를 볼 수 없다.)

 

옥녀봉 정상은 평범한데, 정상에서 계곡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서면 바위가 보이고 바위 뒤쪽(계곡을 바라보는 면)에 각자가 새겨져 있다.

 

10계곡에서본옥녀봉.JPG  

*계곡에서 바라본 옥녀봉

 

 

3) 3 농월담(弄月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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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월담 지형도

 

산행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계곡을 따라 진행하는 것도 가능은 할뿐 아니라 군데군데 멋진 풍경이 힘을 들어주기도 하는데, 등산화등 채비가 부실하거나 산행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이거나 단순하게 무이구곡을 찾아 보는 것이 목적이라면, 옥녀봉의 각자를 확인하고 다시 덕산-중산리간 도로로 나와서 차량을 이용하여 도솔암 방향으로 올라간다.

3곡에 해당하는 농월담이 옥녀봉에서 한참 떨어진 도솔암 아래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도솔암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면 아스팔트가 시멘트 포장길로 바뀌고 불지사 입구를 지나 무명교를 건너면 좌측에 큰 주차장이 있다. 도솔암 바로 아래 공터에도 3-4대 주차가 가능하지만, 제월대 위에 있는 곳만 갈 것이 아니라면 이곳에 주차하고 올라가는 것이 좋다.

 

주차장에서 20미터 올라가면 우측으로 갈리는 구곡사 가는 길을 따라 계곡에 내려서서 계곡을 따라 20미터 정도 내려가면 농월담(弄月潭) 각자를 만날 수 있다.

 

12농월담각자.JPG

*弄月潭 각자(명암선생의 막내아들 相華(상화)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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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월담 주변 풍경

 

사실 농월담 주변의 경치는 도솔암과 구곡사 가는 도로 개설 때문에 훼손되기는 했지만 각자 주변만 놓고 본다면 그렇게 뛰어난 경치는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숲이 짙어 제대로 볼 수가 없지만 농월담 각자에서 조금 아래 계곡 건너편을 바라보면 기암괴석이 하늘을 찌를 듯 암봉이 솟아 있다. 농월담 주변 계곡과 이 암봉이 어우러진 경치가 제대로 된 농월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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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월담 주변 암봉

 

 

4) 4 낙화담(落花潭)

 

농월담에서 도솔암으로 향하여 계속 올라가면 도솔암교 다리를 건너게 된다.

이 다리 20미터 못 미처 도로 우측으로 드러누운 바위에 [명암정식] 각자가 있다. (다음편에 소개)

도솔암교에서부터 계곡은 상수도 보호구역으로 연두색 철망이 쳐져 접근을 막고 있다. 이 철망은 광풍뢰를 지나 제월대에 도달할 때까지 도로와 산길 옆으로 쳐져 있어 접근을 막고 있다.

 

현재도 상수도 취수 기능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긴 하지만, 이곳에서부터는 광풍뢰까지 계곡치기로 올라가기도 상당히 위험할 뿐 아니라 우회할 곳도 마땅치 않아, 채비를 제대로 하고 산행 경험이 많이 않은 경우라면 직접 보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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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지형도

 

철망 좌측으로 혹은 도솔암교 다리 아래로 들어가서 조금 올라가면 글자 그대로 소폭(小瀑)에서 물이 꽃잎처럼 떨어지며 만든 아담한 담() 가운데 바위에 落花潭 각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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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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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花潭 각자(명암선생의 가운데 아들 상문(相文)의 글씨이다.)

 

 

5) 5 대은병(大隱屛)

 

조선시대 선비문화로서 성행한 구곡문화는 주자가 무이정사를 짓고 무이구곡을 경영한 것을 본받아 산수 좋은 곳에 전국에 무슨 구곡(九曲), 혹은 무슨 정사(亭舍)라 이름을 지어 지내면서 구곡도(九曲圖)를 걸어 놓거나 구곡가(九曲歌)를 읊곤 하였다. 특히 구곡의 이름을 지으면서 주자의 무이구곡을 흉내 낸 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명암선생이 구곡산 무이구곡을 정하면서 주자의 무이구곡에서 따온 지명이 옥녀봉과 대은병이다.

 

그런데, 4곡인 낙화담을 지나 아무리 찾아 보아도 대은병 각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명암선생이 [도암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나열한 9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던 난가암(爛柯巖)이 나타난다.

 

이 수수께끼는 명암선생이 남긴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중에 [대은병]에 그 답이 있다.

 

[대은병(大隱屛)]

 

五曲雲山去去深  다섯째 구비 그름 낀 산 갈수록 깊은데

閒來無語倚楓林  한가하게 말없이 단풍 숲에 기대섰노라

千秋一局爛柯處  천추 한판 바둑에 도끼자루 썩는 곳에

移得箕山洗耳心  기산에서 귀 씻던 마음을 옮겨와야지

 

 

대은병 시에 등장하는 난가(爛柯)는 중국 고사에 나오는 [난가일몽(爛柯一夢)]의 준말로써 나무꾼이 겪었던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설화에서 나온 말이다.

명암선생이 주자의 대은병에서 따온 이름으로 5을 명명한 이후 [대은병] 시를 지어놓고 보니 문장에 들어있던 난가처가 신선놀음 하기 좋은 곳에 더욱 그럴듯하여 [난가암] 각자를 남긴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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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爛柯巖 각자 (명암선생의 가운데 아들 상문(相文) 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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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암 주변 풍경

 

 

6) 6광풍뢰(光風瀨)

  

5곡 난가암을 지나고 나서 제6곡까지는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으나 계곡을 타고 진행하기는 차츰 수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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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뢰 지형도

 

광풍뢰란 맑은 햇살과 함께 부는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여울이란 뜻으로 낙화담과 함께 가야산 홍류동 소리길에도 같은 이름이 있다.

 

광풍뢰 주변 계곡의 기세는 주춤하여 감탄을 자아내기에는 부족한데, 경치가 어디 눈으로 보는 것만 경치인가. 풍류 그윽한 마음으로 [광풍뢰]라 이름 짓고 흐뭇해하였을 명암선생 옷깃으로 불어왔을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을 애써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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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뢰 주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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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風瀨 각자(명암선생의 가운데 아들 상문(相文)의 글씨이다 사진 <강호원>.)

   

 

7) 7 제월대(霽月臺)

 

광풍뢰를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양쪽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합해지는 합수부에 너른 반석이 있고, 비로소 계곡치기를 벗어나 도솔암에서 올라오는 반듯한 등산로를 만나게 된다.

합수부의 너른 반석이 제월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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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대 지형도

 

광풍뢰 다음의 제7곡에 제월대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광풍제월] 혹은 [제월광풍]이 한쌍으로 뜻을 이루기 때문이다.

 

송나라 명필이자 송 4대가의 한사람인 황정견(黃庭堅:1045~1105)이 송나라 유학자인 주무숙(周茂叔:1017~1073)의 인간됨을 말하면서, “광풍제월(光風霽月-비 온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깨끗하고 맑은 마음)과도 같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또한, 무이구곡의 창시자인 주자가 남긴 문장도 있으니,

靑雲白石聊同趣 霽月光風更別傳(청운백석료동취 제월광풍갱별전 ; 푸른 구름과 흰 돌은 애오라지 같은 정취인데, 제월광풍이 다시 따로 전해오네.”

 

이후, 주자를 따르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광풍과 제월 혹은 광풍제월을 합하여 정자 등의 이름에 사용하였으니, 소쇄원의 제월당과 광풍각, 안동의 제월대와 광풍정이 짝으로 서 있고, 창덕궁의 정자 제월광풍관을 비롯하여 도봉산에 있는 도암(陶庵)의 각자 광풍제월 등 부지기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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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대 주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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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霽月臺 각자(명암선생의 큰아들 상협(相協)의 글씨이다.)

 

 

사실 제월대를 찾으러 복수의 팀이 몇 차례나 들어갔다. 이곳이 제월대라는 것을 몰랐더라도 너른 반석의 형상이 분명 족보 있는 곳이라 짐작이 되지만 제월대 각자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올라가서 이미 몇 번 와본 곳이라 눈에 익은 암반 구석구석을 찬찬히 찾아보는데, 반석 위에서 산을 바라보고 좌측 아래 계곡에 잠길 듯 말듯한 곳에 희미하게 霽月臺 각자가 새겨져 있었다.

갈수기 때는 각자가 드러나겠지만 수량이 조금 불어나면 물에 잠길 지경이라 등산객이 빈번한 곳의 각자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8) 8 고루암(鼓樓巖)

 

등산로가 양쪽으로 갈라가는 제월대에서 무이구곡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구곡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우측 등산로가 아닌 좌측 등산로를 잡아 올라가야 한다.

 

고루암은 수홍교와 옥녀봉과 함께 주자의 무이구곡에 나오는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명암선생은 [도암에게 드린 서신]에서 선생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일부 구곡의 이름이 남아 전해진다고 하였다,

제가 사는 주산은 이름을 무이산(武夷山)이라고 하는 바, 바로 두류산의 돌문 안에 있는 흘러온 기슭입니다. 그 아래는 구곡(九曲)이 있는데, 대개 옛날부터 그 이름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흘러 전해 오는 것으로는 수홍교(垂虹橋), 옥녀봉(玉女峰), 고루암(鼓樓巖), 와룡암(臥龍巖) 등입니다. 구비 가운데서 이름이 없는 것은 저가 이름을 지어 붙였습니다.”

 

누군가가 훨씬 이전에 들어와 그곳을 무이구곡이라 삼았다는 말이니 명암선생 이전에도 주자를 숭상하는 유학자가 들어와 은거하였다면 구곡산의 무이구곡의 역사는 좀 더 깊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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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루암 지형도

 

고루암은 등산로 바로 곁에 있지만 계곡을 치고 올라가지 않고 등산로 상에서 찾으려면 놓치기 십상이다. 고루암 각자가 등산로 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계곡을 향한 바위 면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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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상에서 보이는 고루암(등산로상에서 계곡 쪽으로 고개를 빼서 보면 계곡면으로 고루암 각자가 보인다.)

 

등산로에서 계곡 쪽으로 바짝 붙어서 유심히 보면 각자를 찾을 수 있다.

산행에 능숙한 사람이라면 바위 옆의 나무를 잡고 바위에 올라 경사진 곳에 서서 각자를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위험하므로 각자를 보기 위하여 바위에 올라가지는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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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올라가서 본 鼓樓巖 각자(명암선생의 큰아들 상협(相協)의 글씨이다.)

 

다행히, 고루암 조금 아래 등산로상에서 고루암 각자가 잘 보이는 곳으로 접근하는 산죽 사이 좁은 길이 있으니 이 길을 찾으면 된다.

 

 

9) 9 와룡폭(臥龍瀑)

 

사실, 제월대에서 위쪽으로 양쪽 계곡을 살펴보면 우측의 계곡이 훨씬 크고 풍광도 뛰어난 반면, 좌측 계곡은 초반의 모습이 협소하고 볼품이 없어 어떻게 명암선생이 무이구곡을 정하면서 우측 계곡으로 올라가지 않고 좌측 계곡을 따라 올라갔는지 의아했는데, 이 의문은 와룡폭 앞에 서면 완전히 풀리게 된다.

 

과연 마지막 제9곡다운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와룡폭은 규모나 형상으로 지리산의 폭포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품폭포이다.

다만, 가파른 구곡산 중턱에 위치하다 보니 우기가 아니라면 수량이 풍부하지 못하여 와룡폭 진면목을 발휘하기 쉽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마치 하늘 중간에 떠 있는 듯 지금까지 둘러보고 왔던 무이구곡을 압도할 장관이 펼쳐지는 곳이라, 이곳 바로 위에 무이정사를 짓고 세상의 이치를 초월하려 했던 명암선생의 기상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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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폭 지형도

 

등산로 상에서 와룡폭 각자가 있는 폭포 상부로 접근하는 길이 있으며, 와룡폭 각자는 폭포 상부로 들어와 물길을 건너기 직전에 있다.

 

30계곡에서본와룡폭.JPG

*계곡 아래에서 바라본 와룡폭

 

명암선생이 와룡암의 길이는 거의 오십여 아름쯤 되고, 골짜기에 가로로 뻗어있어 그 모양은 드러누운 용과 같습니다.” 표현하였듯, 숲에 가려 좌우의 끝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엄청 넓은 폭을 자랑하고 있다.

 

31와룡폭상부.JPG 

*와룡폭 상부 모습 (물길 건너기 직전 각자 사진을 찍기 위하여 물칠을 한 각자가 보인다.)

 

32와룡폭각자.JPG

*臥龍瀑 각자(명암선생의 큰아들 상협(相協)의 글씨이다..) 

 

 

10)연화대(蓮花臺)

 

무이구곡은 제9곡 와룡폭에서 끝나지만, 명암선생은 다음과 같이 무이구곡의 설명을 마무리하였다.

 

폭포 위에는 자연적으로 된 돌대가 있는데, 그 이름은 연화대(蓮花臺)입니다. 그 높이는 거의 수백여 길이나 되는데, 그 위가 평평하여 이십 여명 정도 앉을 수 있습니다. 이곳이 구곡 가운데서 제일가는 경치입니다.”

 

와룡폭 위에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비행선처럼 웅장하게 서 있는 자연석의 대가 있는데 바로 연화대이다. 와룡폭은 이 연화대가 있음으로 더욱 신비감을 자아낼 뿐 아니라, 와룡폭의 감상은 연화대에 올라 바라볼 때 제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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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폭 위에 앉은 연화대

 

연화대는 등산로에서 와룡폭 들어가는 곳에서 몇발 더 올라가면 좌측에 벤치 몇 개가 놓여있는 곳에서 들어가면 바로 연화대 위에 올라서게 된다.

 

 

11)무이정사(夷亭舍)

 

무이구곡의 최고 절경 연화대까지 보았는데, 이것으로 끝이라 생각하면 명암선생의 무이구곡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세속의 명예를 버리고 지리산에 은둔하며 일생을 바친 명암선생의 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무이구곡을 발 아래에 깔고 저토록 깊은 산중에 무이정사를 짓고 살았던 명암선생의 자취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한 후에라야 비로소 지리산을 품고 살았던 명암선생과 마주하게 된다.

 

 

무이정사는 명암선생이 1728년 최초로 건립하여 깊은 지리산중 이곳에서 18년간이나 지조 있게 살다가 1746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곳이다.  

 

연화대에서 계속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뜻밖의 장대죽 밭 사이로 등산로가 이어져 있는데, 우측으로 장대죽이 가장 우거진 곳에 석축이 보이는 곳이 무이정사의 옛터이다.

 

34와룡폭-무이정사가는 등산로.JPG

*무이정사 올라가는 장대밭 사이의 등산로

 

35무이정사옛터.JPG *장대밭 속에 묻혀있는 무이정사의 옛터

 

무이정사의 옛터 뒤에 주춧돌 흔적이 남아 있는 암자터 규모의 터가 있는데 이곳이 명암선생이 중수기를 남긴 와룡암 터인지가 숙제이다.

명암선생이 낙화담을 설명하면서, 낙화담 위에 와룡암을 짓겠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도솔암 자리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현재 국동에 있는 무이정사는 1933년 후세의 관리 문제를 숙고하여 원래 자리가 아닌 국동마을에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버리고 그 이후 다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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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동마을에 있는 현재의 무이정사

무이정사 건물은 근래에 지은 것이라 옛 멋이 없지만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옛 정취를 전해주고 있다.

(현재 무이정사 지형도는 수홍교 지형도 참조)

 

 

 

이로써, 일찍이 지리산의 산수와 지리산의 정신을 흠모하여 속세를 떠나 지리산 산중에서 여생을 보낸 명암선생의 정신과 일생이 함축된 구곡산 무이구곡과 무이정사 옛터를 둘러보았다.

 

김춘수 시인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듯”,

한낱 미물에 불과한 지리산의 산수에 명암선생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빛나는 명소가 되었다.

 

 

무이구곡의 순례는 지리산에 묻혀 살았던 명암선생의 애환과 풍류를 느끼며 지리산을 오르는 지리산꾼의 크나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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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구곡]의 탐구를 위하여 정보와 자료를 제공해 주신 [무이정사]<정은석>, <정태종>님과 [지리99]<가객>님께 감사 드리며,

몇 차례의 사전 답사로 고생한 <산유화>님과 완결 탐구산행에 함께 하여 한몫씩 해준 <해영>, <봄이>, ,핫쵸코>님께 감사 드립니다.

 

 

 

참고문헌

 

1)     허권수 역 [명암집]

2)     무이정사유계 편 [명암정식선생 추모시집]

3)     동북아전통문화연구회 편 [명암정식선생의 도학과 정충대절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