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魏晋)·육조(六朝) 1)시기는 중국의 차 생산이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종차(種茶)와 음차(飮茶)는 이미 남방 각지에서 보편화되었고, 음차의 보급도 점차 화북지역으로 확산되어갔으며, 회하(淮河) 이남의 동남 각지에서도 비로소 산차(山茶)의 기록이 명확하게 출현하게 되었다.
(1) 중국 동남 각 지역의 차나무의 확산과 보편화
《속수신기(續搜神記)》에서는 진나라 무제 때, “선성(宣城)사람인 진정(秦精)이란 자가 무창산(武昌山)2)에 들어가 차를 땄다.”라고 언급하였고, 《형주토지기(荊州土地記)》에는 “무릉(武陵)의 일곱 현에서 모두 차가 나는데, 최고 좋다.” 또 “부릉차가 최고 좋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배연(裴淵)의 《광주기(廣州記)》에는 “유평현(酉平縣)에서는 고로(皐盧)가 나는데, 명(茗)의 별명이다. 잎이 크고 떫으며, 남쪽 사람들은 이를 음료로 삼는다.”라고 했으며, 산겸지(山謙之)의 《오흥기(吳興記)》에는 “오정현(烏程縣) 서쪽에는 온산(溫山)이 있는데, 어천(御荈)이 난다.” 또 “매년 오흥(吳興)과 비릉(毘陵)의 두 군수가 이곳에서 차를 따서 연회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왕부(王浮)의 《신이기(神異記)》에는 “여요(余姚)사람인 우홍(虞洪)이란 자가 입산하여 명을 땄는데, 명(茗)을 크게 얻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들은 모두 위진·육조 때 이미 차나무가 중국 동남 각 지역에 보편적으로 분포되어 있음은 물론 이미 인간에 의해 발견되고 생활에 이용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2) 위진·육조 시기 동남지역의 음차 활성화와 생활화
그 외에도 여러 고대문헌에는 위진(魏晋)·육조(六朝) 때 동남지역에서 음차활동이 활발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오지(吳志)》에는 “손오(孫吳 : 손씨 오나라) 때 대신(大臣) 위요(韋曜)가 주량이 작아서 조정 연회 때마다 오왕 손호(孫皓)가 각별히 배려하여 다른 대신들 몰래 술 대신 차를 내려주었다.”3)고 전하고 있다. 《진서(晋書)》 <환온전(桓溫傳)>에는 “환온은 성정이 검소하여 매 연회 때에는 항상 일곱 쟁반의 다과만을 진설하였을 따름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제서(南齊書)》에는 남제(南齊)의 무제(武帝)가 임종 전에 유언하기를 “제사 때에 동물을 희생하여 제물로 삼지 말라. 오직 떡과 차음(茶飮), 건반(乾飯), 주포(酒鋪)만을 진설해 올릴 따름이니, 세상에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이 제도와 같이 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3) 북방의 남방 차 수입과 음차활동의 전개
아울러 같은 시기에 중국의 북방에서도 남방의 차를 대량으로 수입하게 된다.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의하면, 왕숙(王肅)이란 자가 남제(南齊)에서 북위(北魏)로 도망갔는데, 낙양(洛陽)에서 살면서도 양고기와 버터, 밀크 등의 기름진 것들을 먹는데 여전히 습관이 안 되어 매 식사 때마다 항상 붕어탕으로 식사를 하고, 목이 마를 때는 차(명즙, 茗汁)을 마셨다.”한다. 또한 북위의 급사중(給事中)인 유호(劉縞)는 “왕숙의 풍을 사모하여 전문적으로 차(명,茗)를 마시는 법을 배웠다.”고 전한다.
이상의 기록으로 볼 때, 당시 낙양에도 이미 차가 공급되었음을 물론, 북방에서도 이미 음차의 풍속이 형성됨과 동시에 남방에서 생산되는 차가 북방으로 끊임없이 수출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겠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차나무를 인공적으로 재배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로 이 당시의 동남지역에서는 역시 사람들이 아직은 야생차나무를 채취하여 음료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 견해라 할 수 있다.
(4) 중국 사천(四川)의 차엽 생산 발전
이와 같은 시기에 중국의 서남지구인 사천(四川)에서는 이미 차엽의 생산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 장집(張輯)의 《광아(廣雅)》에는 “형파(荊巴) 간에 차를 따서 떡을 만들었다.”4)고 하였고, 손초(孫楚)의 《출가(出歌)》에는 “생강과 계피, 차천(茶荈)은 모두 파촉(巴蜀 : 중경과 성도)에서 난다.”5)고 하였으며, 《술이기(述異記)》에는 “파촉의 동쪽에서 진향(眞香)의 명(茗)이 난다.”6)고 하였다. 또한 《동군기(桐君記)》에 “파(巴 : 현 중경)의 동쪽지역에서는 특별한 진향(眞香)의 명(茗)이 난다.”7)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위진·육조시기에 사천 서부지역에서 차가 생산되는 것 외에도 사천 동부지역에서도 차가 왕성하게 생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동남지구에 비해 차의 품질(질량)이 빼어났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5) 차죽(茶粥) 점포와 차관(茶館)에서의 음차고객 출현
동시에 음차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사천에서는 또한 “차죽(茶粥)”을 경영하는 점포와 차관(茶館)에 와서 차를 마시는 고객이 출현하게 된다.
진(晋)나라 사람 부함(傅咸)이 쓴 《사노기〔사노교(司奴敎)〕》에 “남방의 촉노파가 차죽을 만들어 파는데, 염사(廉事 : 관직명)가 그 기구들을 부셔버려서 그 후로 또 시장에서 떡을 팔았다고 들었다. 차죽(茶粥)의 판매를 금지시켜 촉(蜀)의 노파를 곤란케 함은 어찌된 일인가?”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촉(蜀)의 늙은 부녀자가 차죽(茶粥)을 만들어 팔다가 관리에 의해 판매 금지를 당한 일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이 기록은 음차(飮茶)가 당시 봉건상층부로부터 일반 하층의 민간 백성들에까지 널리 보편화되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차(茶)는 사회생활의 바탕을 둔 문학창작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하게 된다.
주) -----
1) 위진(魏晋) : 삼국시대의 위(魏)나라와 위나라를 이어 사마염이 세운 진(晋 : 서진)나라를 말하며, 육조(六朝)는 남쪽 한족의 정권인 남조(南朝)와 남조 전의 세력인 오나라(삼국시대)와 사마(司馬) 예(睿)의 동진(東晋)을 포함한 것이다.
2) 호북성(湖北省) 악주시(鄂州市) 양자호반(梁子湖畔)의 태화진(太和镇)에 있는 산. 1911년 10월 10일 이 일대에서 무창봉기(武昌蜂起)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국민당 손문과 장개석이 주도한 신해혁명(辛亥革命)이다.
3) “密賜茶荈以當酒”
4) “荊巴間採茶作餠”
5) “薑(姜)、桂、茶荈出巴蜀”
6) “巴東有眞香茗”
7) “巴東別有眞香茗”
60. 중국의 차(茶) 산업 ⑤
진·한·위진 때 이르러 차엽 가공 기술 생겨나
▲ 안계 서평진 철관음 제다 모습.
4) 위진(魏晋) 이전의 제다(製茶)와 음차방법
(1) 선진(先秦)시기의 음차
고대에서 차엽은 한방약 혹은 민간약의 제작과 마찬가지로 잎을 딴 후에 햇볕에 말리거나 그늘에서 건조시켜 만들었다. 식용(食用)으로 사용하였을 뿐 그 어떤 가공(加工)기술도 사용하지 않았다.
선진(先秦)시기에는 사람들이 야생 차나무를 발견하고, 그 신선한 잎을 따서 채소처럼 그대로 먹었을 뿐이며, 달리 특별한 ‘팽음(烹飮)방법’이나 팽다기구를 이용해서 먹지는 않았다. 그냥 밥과 함께 채소반찬을 먹듯이 하였으며, 그 맛이 쓰고 떫기 때문에 ‘고채(苦菜)’라고 불렀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찻잎을 솥 안에 물을 넣고 껄쭉한 탕처럼 끓여서 한약을 조제하듯이 해서 먹었다.
(2) 차엽(茶葉) 가공의 시작과 발달
진(秦)·한(漢)·위진(魏晋) 때에 와서야 비로소 차엽 가공의 기술이 생겨났다.
장집(張輯)의《광아(廣雅)》에는 “형주(荊州 : 현 호북성)와 파주(巴州 : 현 사천성 일대) 사이에서는 차를 채취하여 떡을 만든다. 늙은 찻잎은 쌀의 끈끈이를 낸 것으로 떡을 빚는다.
차를 마시려면, 먼저 구워서 붉은 빛깔이 나게 한다. 그리고 찧은 찻가루를 자기(瓷器) 그릇에 담은 다음 끓는 물을 붓고 덮개를 덮는다. 파·생강·귤을 사용해 솎아낸 후(파·생강·귤을 가려서 사용하고), 그것을 마시면 술이 깨고 사람으로 하여금 잠을 자지 않게 한다.”1)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차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차의 효능 및 그것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도 포괄적으로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시기에는 차에 대한 여러 가지 음차법이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다른 식물과 함께 끓여먹는 ‘차죽(茶粥)’과 국수를 넣어 삶아 먹는 ‘면차(麵茶)’2)도 이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먹는 방법은 오늘날의 객가족들의 뢰차(擂茶)와 거의 동일하며, 그 외에도 몽고의 ‘우유차’나 티베트족들의 ‘소유차’ 등도 기본적 음차법에서는 대체로 동일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3. 당(唐)과 오대(五代) 시기의 중국의 차업(茶業)
1) 당대(唐代) 차엽(茶葉) 생산의 발전
(1) 동남(東南)지구의 차업(茶業)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때부터 시작된 음차(飮茶)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그 문화와 활동이 화북으로까지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당대에 이르러서는 그 음차활동이 이미 중국 전역으로까지 확산·보급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이때 이미 차는 쌀과 소금만큼이나 중요한 음식물이었다. 이러한 풍속은 가까운 곳이나 먼 곳이나 할 것 없이 같은 현상으로 나타났으며, 모든 중국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의지하는 필수품이 되었다. 심지어 밭에 나가 일할 때나 마을에 돌아와 이웃과 한적한 시간을 보낼 때도 차는 그들에게 있어 기호음료로서 매우 절실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중국인들의 차엽에 대한 폭발적인 인기와 수요의 증가는 당연히 당대의 차엽생산을 촉진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하는 기본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 최초의 차 전문서인 당대(唐代) 육우의《다경(茶經)》에서 “차의 기원은 동진(東晋)에서부터 기원하여, 본 조〔朝, 당조(唐朝)〕에 이르러 흥성(興盛)하였다.”라는 기록으로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3)
또한《다경》의 <팔지출(八之出)>에서는 중국의 차 생산지를 산남(山南)·회남(淮南)·절서(浙西)·검남(劍南)·절동(浙東)·검중(黔中)·강남(江南)·영남(嶺南) 등 8곳으로 구분했는데, 모두 54개 주(州)에서 차가 생산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이 당·송인들의 서술을 종합하여 당(唐)과 오대(五代) 시기의 ‘차엽(茶葉) 생산지역’을 통계·산출한 결과,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69개 주였다고 한다.4)
※ 8대 차엽 생산지역
① ‘산남(山南)’은 당나라 태종(太宗)은 정관(貞觀) 원년(元年, 627년)에 천하를 10개의 감찰구역인 도(道)로 나누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산남도(山南道)이다. 산남도는 2부(府) 33주(州) 60현(縣)을 통할하였다.
산남이라는 지명은 종남산과 태화산의 남쪽에 위치한 데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산남도 전체를 통치하기 위한 주(州)는 양주(호북성의 양양현)에 있었다. 육우의《다경》이 완성된 상원 원년(760년)에는 산남동도〔襄州〕와 산남서도〔梁州〕로 나뉘었다. 산남도의 경계는 호북성의 대강 이북, 한수 이서, 호남성의 일부, 섬서성의 종남산 이남, 하남성의 북령 이남, 감숙성의 일부, 사천성의 검각산(劍閣山) 이동(以東)과 대강 이남 지역이었다. 육우가 산남도를 첫 번째로 적은 까닭은 산남도가 당시 차나무의 북한대(北限帶)였기 때문이다.
② 회남(淮南)은 당나라 태종 정관 원년(627년)에 회수(淮水)의 남쪽에 있다 하여 회남(淮南)이라고 하였다. 당나라 때 설정된 10도(733년에는 15도가 됨) 중 하나이다. 지금의 호북성 대강 이북과 한수(漢水)의 이동(以東), 강소성과 안휘성을 흐르는 대강의 이북 및 회수의 이남, 하남성의 남부를 망라하는 지역이었다. 회남도 지역 안에는 차의 역사와 관련이 깊은 천주산과 팔공산 등이 있으며, 송나라 신종(神宗)의 희녕(熙寧) 연간(1068~1077년)에는 회남에 13개소의 차장(茶場)이 있었다.
③ 절서(浙西)는 절강의 서부지방을 가리킨다.《신당서(新唐書)》권68, 방진표 제8에 의하면, 숙종의 지덕 2년, 항주(절강성 항주현)에 강남절도사를 두었다가 건원 원년(758년)에는 승주(남경)에 절강서도 절도 겸 강영군사를 두었다. 그 이듬해에는 승주자사인 안진경(顔眞卿, 709~784년)을 절서절도사 겸 강영군사로 임명하였다. 그 해에 절서관찰사라고 개명되고 선주(宣州)로 옮겼다.
④ 검남(劍南)은 당나라 태종 정관(627~649년) 초에 검각산맥(劍閣山脈)의 남쪽에 둔 도(道)로서 지금의 사천성에 해당된다. 헌종의 개원 2년(714년)에 검남절도사를 두었다.
⑤ 절동(浙東)은 현재 절강성의 동쪽지방으로 당나라 숙종의 건원 원년(758년)에 둔 절강동도 절도사의 관할구역이다.
⑥ 검중(黔中)은 당나라 현종의 개원 21년(733년)에 둔 도(道)로서 15고을을 거느렸다. 지금의 호남성과 귀주성 지역이다.
⑦ 강남(江南)은 당나라 태종의 정관 원년(627년)에 둔 도(道)로서 지금의 절강, 복건, 강서, 호남, 강소, 안휘, 호북성의 큰 강 이남의 땅(즉, 장강 이남의 땅인 사천성의 동남부와 귀주성의 동북부를 포함)이며, 51개 주(州)를 거느렸다.
⑧ 영남(嶺南)은 당나라 태종의 정관(627~649년) 초년에 둔 도(道)로서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 지역을 거느렸다.5)
이상과 같이 당대의 차엽 생산(生産)이 발전함에 따라 차엽의 무역(貿易) 또한 그야말로 공전(空前)의 번영을 누리게 된다.
안휘성의 기문(祁門)에서 품질이 우량한 차화(茶貨 : 차 상품)가 생산됨에 따라 전국의 차상(茶商)들은 매년 2,3월이 되면, 많은 은괴(銀塊)와 비단 등의 견직물을 가득 싣고 왔다. 이곳에 이르는 자들이 줄을 이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그들은 은괴와 비단 등의 견직물을 팔아 차를 사서 다른 군에 팔았다. 즉, 차상들이 차를 사들이기 위해 서로 앞을 다투어 각자 물건을 이고 지고, 수레에 싣고, 배에 싣는 등 갖가지 수단을 다 동원하여 몰려들어 안휘성 기문은 매우 번거롭고 바쁜 상황이 고조에 이르렀다.
또한 낙양(洛陽)2) 상인 왕가구(王可久)란 자는 “매년 강남(江南)과 호주(湖州 : 浙西도에 속함) 간에서 차를 팔아 항상 풍성한 이익을 취하여 돌아갔다〔歲鬻茗于江湖間, 常獲豊利而歸〕.”3)고 한다. 여용지(呂用之)의 아버지 여황(呂瑝) 또한 “차를 파는 일을 생계로 삼아, 회남(淮南)과 절강지역(절서, 절동)을 왕래하였다〔以賣茶爲生, 來往于淮浙間〕”4)고 한다.
그 외에도 백거이의 “늙어 장사꾼의 아내로 시집갔더니, 장사꾼은 이익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아내와의 이별은 가벼이 여기네. 지난달 부량(浮梁)으로 차를 사러 간 뒤, 오고가는 강구(江口)에서 (나만) 홀로 빈 배만 지키네〔老大嫁作商人婦, 商人重利輕別離. 前月浮梁買茶去, 去來江口守空船〕.”5)라고 쓴 시와 왕건이 쓴 “수문은 저녁까지도 열려 있어 차상들은 여전히 북적거리고, 다리 위 시장엔 밤새도록 취객들이 다니네〔水門向晩茶商閙, 橋市通宵酒客行〕”6)란 시구에는 모두 중원지구에서 차상들이 매우 번거롭고 바쁘게 활동하였음과 그 당시 차엽무역이 매우 흥성했던 사회적 정황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2) 차 전문 저서(著書)의 출현
차(茶) 생산의 발전과 차(茶) 무역이 흥성함에 따라 차엽경제는 국민경제생활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커지게 되었다. 이에 봉건정부도 곧 차세(茶稅)를 징수하여 국가 재정 수입의 중요한 기반으로 삼았다. 이렇듯 중국 전체 사회가 차엽경제에 대해 보편적으로 중시함에 따라 이에 적응하여 전문적으로 차의 생산과 가공(加工)기술 등을 비롯한 차사(茶事) 활동에 대해 기술하는 전문서 등이 줄을 이어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다서로 유명한 육우의 《다경》은 육우가 몸소 차 생활을 실천하고, 여러 분야를 광범위하게 조사하였으며, 수많은 고서들을 인용하여 필생의 유작으로 심혈을 기울여 써낸 작품이다.
그 뒤로도 배문(裴文)의 《다술(茶述)》, 장우신(張又新)의 《전다수기(煎茶水記)》, 온정균(溫庭筠)의 《채다록(採茶錄)》, 소이(蘇廙)의 《십육탕품(十六湯品)》과 오대 전촉(前蜀) 때의 모문석(毛文錫)의 《다보(茶譜)》등의 차(茶) 전문 저술들이 줄을 이어 세상에 출현하게 된다. 또한 유림(儒林)의 시인(詩人)ㆍ묵객(墨客)들은 더욱 차 마시는 일을 시의 소재와 제재로 삼아 창작활동을 하게 되어 이미 당시에 음차(飮茶)를 읊조리고 찬양하는 문장들이 문단에 가득하게 되었다.
이는 당(唐)과 오대(五代) 시기가 ‘중국차엽경제(中國茶葉經濟)’에 있어 그야말로 공전(空前)의 발전을 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