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27. 18:07ㆍ周易의 理解
2013년 12월 16일
명리학을 莊子가 낳았다고 해서 책장에서 꺼내왔어.
현대명리학의 물상법이 飛伏 이론에 방점을 두고있는 깔끔한 답이 될듯 싶군.
莊子만큼 鯤鵬을 詩가 되게 한 이도 없으니...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하는 데,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를 못한다. 그것이 변화해서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鵬)이라하며 이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를 못한다. 이 새가 한번 기운을 내어 날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옮겨가려고 하는데 남쪽 바다란 천지(天池)를 말한다.
다섯 섬이나 들어가는 박을 가지고 있다면 왜 그것을 배로 만들어 양자강이나 동정호에 띄울 생각을 하지 않고 너무 평퍼짐하여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거요?
당신은 지금 큰 나무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소용이 되지 않는 것에 심려하고 있소. 어째서 아무 것도 없는 고장, 광막한 들에 그것을 심어 그 곁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왔다갔다 하거나 그 아래에서 유유히 노닐다가 잠들지를 못하오?
<三籟>
너는 사람의 피리 소리는 들었을 것이나 땅의 피리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너는 땅의 피리 소리는 들었다 해도 하늘의 피리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대지가 내뿜는 숨을 바람이라고 이름한다. 이 바람이 일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일단 일어나게 되면 모든 구멍들이 노여움의 소리를 내게 된다. 선창하는 것이 우우하고 소리를 내면 뒤따르는 것이 오오 하고 화답한다. 산들바람이 불면 상냥하게 화답을 하고 거센 바람에는 큰 소리로 화창한다. 격심한 바람이 지나가면 모든 구멍들도 조용해진다. 수많은 것들에 바람이 불어 각기 다른 소리를 내지만 각기 자기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다.
모두 제각기 자기 소리를 택하고 있는데, 성난 듯 사나운 소리를 나게 하는 것은 누구겠느냐?
地籟지뢰 땅이 울리는 갖가지의 소리
天籟천뢰 하늘의 자연(自然)현상(現象)에서 나는 소리
萬籟만뢰 자연계(自然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소리
三籟삼뢰 천뢰(天籟)ㆍ지뢰(地籟)ㆍ인뢰(人籟)의 통틀어 일컬음
儒家에서의 피리는 세상을 平天下시킬 규약이다. 우주의 율동이 陽으로 첫발을 내딪는 그 파장을 감지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모든 단위의 기본으로 삼는 것이다. 만파식적이 의미하는 바다.
"수많은 것들에 바람이 불어 각기 다른 소리를 내지만 각기 자기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다. 모두 제각기 자기 소리를 택하고 있는데 성난듯 사나운 소리를 나게 하는 것은 누구겠느냐?"
그런데,
장자에서 만나는 피리는 또 색다른 사유다. 우주-지구-만물을 울림통(穴)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들의 무수한 각기 다름을 <존재>로써의 다름이게 하는, 나타나게(飛) 하는 神의 존재를 바람(風)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람만큼 無極의 사유를 상징하기에 마땅한 것이 또 있을까?
지구의 丑未(土)軸은 생명활동의 작용으로 삼태극(木-土-金)의 黃土로 존재성이 아닌 운동성을 나타낸다. 이것이 正易에선 火와 자리를 바꾸였다. 火는 우주의 심장이고 君主이며 정신작용이다. <사상의학>에서도 心은 上位에 있으며 脾와 腎(寒熱), 肺와 肝(浮沈)의 관계로 인체를 해석하고 있다.
태극의 숫자는 3이다.
무극은 아무것도 없는 것도 아니요,
뒤섞여 있는 혼탁한 상태도 아니라고 했다.
무극이 動하는 상태가 태극인데, 이것이 이미 3으로 존재한다.
태극 안에 이미 무극(无極)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장자에서는 이 无極을 바람으로 표현했다.
만물의 존재를 울림통으로 표현했다.
당신의 태생적인 울림통의 형태를 바꾸려 하지 않고 바람으로 부딪쳐 당신을 가장 당신답게 존재하게 하는 그 작용을 神이며, 운명이라 하고 있다. 그러므로 神은 无極이 되는 거다. 기울어지는 극점이 없으니 無心하다.
당신의 울림통의 소리는 당신의 몫일 뿐이다.
==> 天道, 만파식적(龠)과 우주의 시계 黃鐘(황종) http://blog.daum.net/pulsup/16
그것은 아프리카의 검은 피부의 성모님과 한국의 한복입은 성모님의 상징물과 맥을 같이 하는데, 그런 상징물의 변화는 이미 한국의 가톨릭 뿐만 아니라 로마교황청의 종교적 사유가 다른 종교적 집단과 다르게 새로운 철학적인 진화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수많은 것들에 바람이 불어 각기 다른 소리를 내지만 각기 자기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다. 모두 제각기 자기 소리를 택하고 있는데 성난듯 사나운 소리를 나게 하는 것은 누구겠느냐?"
<사이비>라는 말에 대한 색다른 <결>을 느낀다. 그리스도교와 노장사상의 만남은 전세계를 휩쓸었던 폭력적인 平天下의 사유인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이기도 할터이다. 이제 조금씩 가톨릭적 신앙고백과 화해할 준비가 되어가고 있는 듯 싶다.
昔者 莊周夢爲蝴蝶 栩栩然蝴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蝴蝶與 蝴蝶之夢爲周與
周與蝴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어느 날 장주(莊周)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날아 다니는 나비가 되어 즐거울 뿐,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하였다. 얼마 후 문득 꿈에서 깨어보니, 자신은 틀림없는 장주였다. 그러니 장주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그 나비가 꿈을 꾸면서 장주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장주와 나비는 분명히 뚜렷한 구별이 있다. 이를 일러 사물의 변화라고 하는 것이다.
<萬物齊同>
物无非彼 物无非是 自彼則不見 自是則知之
故曰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모든 사물은 저것이 아닌 것이 없고, 이것이 아닌 것이 없다. 저쪽에서 보면 보이지 않으나, 자기가 보면 환히 알게 된다. 따라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또한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곧 저것과 이것이 함께 생겨난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렇기는 하나,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삶이 있다. 가능한 것은 불가능하게 되고 불가능한 것은 가능하게 된다. 옳음에 의지하여 그릇됨이 있고 그릇됨에 의지하여 옳음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같은 상대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늘의 이법에 비추어 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옳음에 의지하는 셈이다.
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果且有彼是乎哉 果且无彼是乎哉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无窮 是亦一无窮 非亦一无窮也 故曰莫若以明
이와같은 경지에서는 이것은 곧 저것이며 저것은 또한 이것이다. 저것도 한 가지 시비의 판단이며, 이것도 한 가지 시비의 판단이다.
그런데 과연 저것과 이것의 개념은 애당초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저것과 이것의 개념은 없는 것일까. 저것과 이것의 대립이 해소된 경지를 도추(道樞)라고 한다. 지도리는 고리의 한가운데에 걸려 무한히 돌게 된다. 절대적 경지에서 보면 옳음도 무궁한 변화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그름도 무궁한 변화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밝은 지혜에 따르는 것보다 나은 게 없다고 함은 이를 말한 것이다.
<兩行>
凡物無成與毁 復通爲一
唯達者 知通爲一 爲是不用 而寓諸<庸>
<庸>也者用也 <用>也者通也
<通>也者得也 適得而幾矣 因是已
已而不知其然 謂之道
만물은 완성도 파괴도 없이 통틀어 하나가 된다. 오직 도에 통달한 이 만이 만물이 결국 하나가 되는 이치를 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분별심을 내세우지 않고 모든 것을 자연의 작용에 맡긴다. 이 자연의 작용(庸)은 곧 용(用)이며, 용은 통(通)과 뜻이 같다. 통은 바로 득(得)과 뜻이 같으며, 이는 도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도의 극치에 이른 이는 자연의 이법에 따를 뿐, 자기가 그렇게 한다는 의식조차 없는 것이다.
是以聖人和之以是非 而休乎天鈞 是之謂兩行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옳고 그름을 잘 조화하므로, 천균(天鈞)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이를 일러 양행(兩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天命>
老聃死 秦失弔之 三號而出 弟子曰
非夫子之友邪 曰然 然則弔焉 若此可乎
노담이 죽자, 그의 친구인 진실이 조상을 하는데, 형식대로 세 번 울고 돌아가려 하자, 제자들이 웬 일인가 싶어 물어 보았다. "손님께선 우리 선생님의 친구가 아니십니까?" 하니, "그렇소" "그런데, 겨우 이런 정도의 인사로 좋을까요?" 라고 묻자,
曰 然 始也 吾以爲其人也 而今非也 向吾入而弔焉
有老者哭之 如哭其子 少者哭之 如哭其母
彼其所以會之 必有不蘄言而言 不蘄哭而哭者...
是遯天倍情 忘其所受
"그렇소, 처음엔 나도 그 사람을 인물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리 생각지 않네. 좀전에 내가 조문할 때, 노인들은 마치 자기 아들이라도 잃은 듯이, 또 젊은 사람들은 마치 친부모라도 잃은 듯이 울며 슬퍼하고 있더군. 그가 이 처럼 많은 조상객들이 몰려 들도록 한 것은,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울며불며 하는 것은 이는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고 진실을 거스르며, 하늘에서 받은 본분을 잊은 것이다.
古者謂之遁天之刑 適來 夫子時也
適去 夫子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古者謂是帝之懸解
옛날에는 이를 하늘을 거스르는 죄악이라고 일렀다. 그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은 그 때가 되었기 때문이요, 그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주어진 운명을 따르는 것이라네. 때에 안주하고 운명에 따르면 슬픔이나 기쁨이 끼여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러한 경지를 하늘의 속박에서 해방됨이라고 말하였음이라."
<화합>
形莫若就 心莫若和
雖然 之二者有患 就不欲入 和不欲出
形就而入 且爲顚爲滅 爲崩爲蹶
心和而出 且爲聲爲名 爲妖爲孼
겉으로는 그를 따르고 마음으로는 그와 화합하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여기에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따르면서도 그에게 굴복치 말아야 하고, 화합하면서도 남에게 드러내지 않아야 합니다. 겉으로 그를 따르는 것이 너무 지나치면 자빠지고 망하게 됩니다. 마음으로 그와 화합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게 되면 평판이야 높아지지만, 그것이 곧 재앙의 원인이 됩니다.
彼且爲嬰兒 亦與之爲嬰兒
彼且爲無町畦 亦與之爲無町畦...
彼且爲無崖 亦與之爲無崖
達之入於無疵
그러므로 그가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하거든 당신도 함께 어린 아이가 되십시오. 그가 버릇없이 굴면 당신도 더불어 버릇없이 구십시오. 그가 방종한 짓을 하거든 당신도 함께 방종한 짓을 하십시오. 이렇게 그가 제멋대로 행하는 것을 막지 않으면서 차츰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도록 하십시오.
哀公曰 何謂才全
애공이 다시 물었다. "재덕이 온전하다 함은 무엇을 이르는 게요?"
仲尼曰 死生存亡 窮達貧富 賢與不肖毁譽 飢渴寒暑
是事之變 命之行也 日夜相代乎前 而知不能 規乎其始者也
공자가 대답했다. "죽음과 삶, 못살고 잘 사는 것, 현명함과 우둔함, 비난과 칭양, 배고픔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는 세상사의 변화이며, 운수의 흐름입니다. 이런 것들은 밤낮으로 눈앞에서 일어나도 우리는 그 시작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故不足以滑和 不可入於靈府
使之和預 通而不失於兌
使日夜無卻 而與物爲春
是接而生時 於心者也 是之謂才全
따라서 이것들은 마음의 조화를 어지럽히지 못하고, 정신의 세계에 들어서지도 못합니다. 그러기에 마음의 조화를 지닌 채 밤낮으로 사물과 접촉하면서 그 변화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으면, 사물과 함께 따스한 봄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는 접촉하는 순간 화기애애한 봄기운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곧 재덕이 온전하다고 이르는 것입니다"
何爲德不形
"재덕이 드러나지 않는다함은 무엇을 말하는 게요?"
曰 平者 水停之盛也 其可以爲法也 內保之而外不蕩也
德者 成和之修也 德不形者 物不能離也
"물이 멈춘 상태를 수평이라 하며 이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는 속에 고요함을 지닌 채 겉으로 넘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덕이란 조화를 이룸이니,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거기서 떠나지 못하는 겁니다"
장자의 기록은 후학들에 의해 대중적인 사유들도 섞여 있기 때문에 삽입된 동일한 텍스트라고 합니다. 어쩌면 유가와 가장 극적인 대치점이기 때문일것입니다. 유가는 인간의 수신으로 세상을 평천하 할 수 있다는 사유를 가졌고 노.장은 세상의 흐름을 일률적으로 제어하려 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흘러가고 각자의 소리가 제 몸통의 모양에 따라 다양한 <피리소리>를 내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사유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 운명론적 시각은 유가에겐 <本>을 흔드는 사유이기 때문에 춘추에도 함께 동일한 텍스트로 제시되어 토론되었으리라 봅니다.
<無用之用> (1)
孔子適楚 楚狂接輿 遊其門曰
공자가 초나라에 갔을 때
광접여가 그 문을 오가며 노래를 불렀다.
鳳兮鳳兮 何如德之衰也
來世 不可待 往世 不可追也
봉새야, 봉새야, 너의 덕이 쇠했구나.
앞날은 기대할 수 없고, 지난 날은 돌이킬 수 없는 것,
天下有道 聖人成焉
天下無道 聖人生焉
方今之時 僅免刑焉
천하에 도(道)있을 때는 성인은 이룩하고,
천하에 도(道)없을 때는 성인은 그냥 살 뿐이지.
지금 이 시국이야 형벌이나 면하는게 고작이지.
福輕乎羽 莫之知載
禍重乎地 莫之知避
복은 깃털보다 가벼운데 이를 잡는 사람없고,
재앙은 땅보다 무거운데 이를 피하는 사람없네.
已乎已乎 臨人以德
殆乎殆乎 畫地而趨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라. 덕으로써 남 앞에 나서는 것은,
위태롭다, 위태롭다. 땅에 금을 그어 놓고 허둥대는 것은.
迷陽迷陽 無傷吾行
吾行郤曲 無傷吾足
가시나무, 가시나무. 내 가는 길 그르치지 말라.
돌아가는 내 발을 다치게 하지 말라.
山木自寇也
膏火自煎也
桂可食 故伐之
漆可用 故割之
산의 나무는 스스로 베이고,
등잔불은 스스로를 태우네.
육계는 먹을 수 있어 잘리고,
옻나무는 칠을 할 수 있어 껍질이 벗겨진다.
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也
세상 사람들은 다 쓸모있는 것의 용도는 알면서도,
쓸모없는 것의 용도는 알지 못한다네.
<無用之用> (2)
若然者 其用心也 獨若之何
그런 이의 마음의 경지란 대체 어떤 것일까요?"
仲尼曰 死生亦大矣 而不得與之變
雖天地覆墜 亦將不與之遺
審乎無假 而不與物遷 命物之化 而守其宗也
공자가 대답했다. "죽음과 삶은 중대한 일이지만, 그를 변하게 하지 못하고, 비록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꺼져도 그를 망하게 하진 못한다. 그는 형상을 초월한 도를 밝히고, 사물의 변화에도 결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사물의 변화를 천명에 맡긴 채, 도의 근본을 지키는 것이다"
常季曰 何謂也 仲尼曰
상계가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自其異者視之 肝膽楚越也
自其同者視之 萬物皆一也
夫若然者 且不知耳目之所宜
而遊心乎德之和 物視其所一
而不見其所喪 視喪其足 猶遺土也
"다르다는 입장에서 보면 우리몸의 간과 쓸개도 초와 월만큼이나 떨어져 있고, 같다는 입장에서 보면 만물은 모두가 하나일 따름이다. 이처럼 일체를 하나로 보는 이는 귀와 눈의 즐거움에 끌리지 않고, 마음을 덕의 조화속에 노닐게 한다. 그는 만물을 무차별한 하나로 보고 그 잃어버린 형상에는 마음을 쓰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발을 잃음을 마치 흙을 떨어버리듯이 여기는 것이다"
故聖人有所遊 而知爲孼 約爲膠 德爲接 工爲商
그러기에 성인은 마음을 노닐게 하고, 지혜를 재앙으로 보며,
규범을 갖풀로 여기고, 덕을 속박으로 알며, 기교를 장사로 생각한다.
聖人
不謀惡用知
不斲惡用膠
無喪惡用德
不貨惡用商
성인은 꾀하지 않으니 어찌 지혜를 쓰랴.
깎아내지 않으니 어찌 갖풀이 필요하랴.
읽음이 없으니 어찌 덕이 소용되랴.
사고팔지 않으니 어찌 장사를 하랴.
四者天鬻也 天鬻也者 天食也
旣受食於天 又惡用人
이 네가지는 하늘의 양육이다.
하늘의 양육이란 하늘이 먹을 것을 내린다는 뜻이다.
이미 하늘이 먹을 것을 내리는데 어찌 인위가 필요하랴.
有人之形 无人之情 有人之形 故群於人
无人之情 故是非不得於身
성인은 사람의 형체는 지녔으나, 사람의 욕정은 없다.
사람의 형체를 지녔으므로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만,
사람의 욕정을 벗어난 까닭에 시비도 없는 것이다.
眇乎小哉 所以屬於人也
謷乎大哉 獨成其天
성인도 사람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는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도를 체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크나큰 존재이다.
回曰 敢問心齋
안회가 물었다. "마음의 제계란 어떤 경지를 이르는 것입니까?"
仲尼曰 若一志
无聽之以耳 而聽之以心 无聽之以心
而聽之以氣 聽止於耳 心止於符
也者 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 虛者 心齋也
공자가 대답했다. "너는 뜻을 하나로 하여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도록 하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요 마음은 사물에 응할 따름이다. 그러나 기는 공허하여 모든 사물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도는 이 텅빈 곳에 깃든다. 이 텅빈 상태가 곧 마음의 재계이다"
<縣解(현해)>
古之眞人 不知說生 不知惡死
其出不訢 其入不距 翛然而往
翛然而來而已矣
不忘其所始 不求其所終
受而喜之 忘而復之
是之謂不以心損道 不以人助天
옛날의 진인은 삶을 기뻐할 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도 몰랐다. 이 세상에 태어남을 호소하지 않고, 죽음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가고 무심히 올 뿐이다. 자신의 삶이 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잊지 않고, 죽은 다음의 일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주어진 삶을 누리다가 죽을 때가 되면 일체를 잊고 자연으로 되돌아 갈 따름이다. 이는 마음으로써 도를 해치지 않고, 인위로써 하늘을 돕지 않음이니.
是之謂眞人 若然者
其心忘 其容寂 其顙頯
凄然似秋 煖然似春
喜怒通四時 與物有宜 而莫知其極
其一也一 其不一也一
其一與天爲徒 其不一與人爲徒
天與人不相勝也 是之謂眞人
진인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그 마음이 무심하고, 그 얼굴은 고요하며, 그 이마는 넓고 우뚝하다. 또한 가을날의 서릿발처럼 차가운가 하면, 봄날처럼 따뜻하기도 하다. 이처럼 감정의 흐름이 사철을 통해 만물과 조화를 이루어 그 끝을 모르는 것이다. 그는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에 어떤 차별을 두지 않는다. 여기서 같다고 함은 사람이 자연을 따른다는 뜻이요, 같지 않다고 함은 인위를 쫒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연과 사람이 서로 다툴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이런 사람을 진인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夫藏舟於壑 藏山於澤 謂之固矣
而夜半有力者負之而走
昧者不知也
藏小大有宜 猶有所遯
若夫藏天下於天下 而不得所遯
是恒物之大情也
무릇 배를 골짜기에 숨기고 산을 못 속에 감춰두면 안전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한밤중에 힘센 자(시간의 흐름을 뜻함)가 그것을 지고 달아날 수가 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헤아리지 못한다. 작은 것은 큰 것 속에 숨기면 알맞기는 하나 잃어 버릴 수가 있다. 만약 천하를 천하에 숨겨 둔다면 잃어 버리지 않으리라(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방임한다는 뜻). 이는 바로 만물의 위대한 진리이다.
特犯人之形而猶喜之 而猶喜之
若人之形者 萬化而未始有極也
其爲樂 可勝計邪
故聖人 將遊於物之所不得遯而皆存
善夭善老 善始善終
人猶效之 又況萬物之所係
而一化之所待乎
사람들은 이 무한한 대자연 속에서 어쩌다 인간의 형체를 지니고 태어난 것을 기뻐한다. 하지만 인간의 형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갖가지로 변하게 마련이다. 만약 우리가 이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기쁨은 헤아릴 수 없게 된다. 그러기에 성인은, 아무것도 잃을 염려가 없는 경지에서 노닐며,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시인하는 것이다. 일찍 죽는 것도 좋고 오래 사는 것도 좋으며, 시작도 좋고 종말도 좋다고 한다. 그러니 만물이 매어있고 모든 변화를 낳는, 도(道)에 대해서는 어떠하겠는가.
且夫得者 時也 失者 順也
安時而處順 哀樂 不能入也
此古之所謂縣解也 而不能自解者 物有結之
且夫物不勝天久矣 吾又何惡焉
무릇 사람이 태어남은 때를 만나는 것이며, 죽음은 그 때를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때에 안주하고 때에 순응한다면 슬픔과 즐거움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를 옛사람은 현해라고 했다. 그런데 스스로 풀려나지 못함은, 바깥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물이 하늘의 섭리를 이기지 못함은 변함없는 진리이니 내가 어찌 싫어 하겠는가.
夫大塊載我以形 勞我以生
佚我以老 息我以死
故善吾生者 乃所以善吾死也
무릇 자연은 나에게 형체를 주었고, 삶으로써 나를 애쓰게 하며, 늙음으로 나를 느긋하게 하고, 죽음으로 나를 휴식케 하니 내가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다면, 죽음도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야 할게 아닌가.
今之大冶鑄金 金 踊躍 曰 我且必爲鏌鋣
大冶 必以爲不祥之金
今一犯人之形 而曰 人耳人耳
夫造化者 必以爲不祥之人
今一以天地爲大鑪 以造化爲大冶
惡乎往而不可哉 成然寐 蘧然覺
지금 노련한 주물사가 쇠를 불려 주물을 만들려는데 쇠가 날뛰면, ‘나는 반드시 막야와 같은 보검이 되리라’고 외친다면, 주물사는 반드시 상서롭지 않은 쇠라고 여길 것이네. 이와 마찬가지로 어쩌다가 내가 한번 사람의 형체를 지녔다고 해서, ‘꼭 사람으로만, 꼭 사람으로만’라고 한다면, 조물자는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여길게 아닌가. 이제 천지를 커다란 용광로로 생각하고, 조물자를 노련한 주물사로 여긴다면, 나야 어떤 형태로 변하든 좋지 않은가. 편안히 잠들고 조용히 깨어날 따름일세.
<縣解> (2)
縣解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떠오른다.
漢字는 상징과 비유로 표현되어진 문자다.
때론 縣解라는 두 글자 만으로도 아름다운 한편의 詩가 된다.
상징화 기호화된 意味素들이
역사성을 갖고 긴 장편의 서사시를 읊조린다....
두근두근.... 멋지다!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
懸(현)의 고자(古字). 죄인(罪人)의 목을 거꾸로 나무에 건 모양의 글자로 首(수☞목)자를 거꾸로 한 글자에 系(계☞걸어잡아맴) 및 木(목☞나무)을 보탠 글자. 목을 거꾸로 나무에 걸다→높이 걸다의 뜻을 나타내며, 나중에 중앙정부에 연결된다는 뜻에서, 행정(行政) 구역(區域)을 나타내는 말로 쓰임 県(县) 縣(현)의 약자(略字). 木(목) + 실사(糸☞실타래)部 + 目(목)으로, 나무에서 머리 또는 끈으로 목을 거꾸로 건 모양에서, '걸다'의 뜻을 나타냄
<坐忘(좌망)>
何謂坐忘 顔回曰 墮枝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仲尼曰
同則無好也 化則無常也
而果其賢乎 丘也請從而後也
"좌망이란 무엇이냐?" 안회가 대답하기를, 자기 육신을 버리고, 총명(聰明)이 소용없게 되는 것, 즉 형체와 지각(知覺)에서 벗어나 큰 도(道)와 일체가 되는 것, 이것이 앉아 있으면서 잊는 좌망입니다" 그러자 공자는 말했다. "도와 일체가 되면 사물(事物)에 대한 좋고 싫고 사랑스럽고 미운 감정이 없어지고, 도와 동화(同化)되면 모든 집착과 구속에서 벗어나게 된다. 너는 과연 현명하구나. 나도 이제 너를 따라 배우기로 하겠다"
孔子曰 魚相造乎水 人相造乎道 ...
相造乎水者 穿池而養給
相造乎道者 無事而生定
故曰 魚相忘乎江湖 人相忘乎道術
공자가 말했다. "고기는 물에서 자라고 사람은 도에서 자란다. 물에서 자라는 고기는 못을 파주면 살 수 있고, 도에서 자라는 사람은 세상 일을 버리므로 마음이 안정된다. 따라서 고기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사람은 도의 세계에서 피아의 차별을 잊는다고 한다"
吾師乎 吾師乎
[敕+韭]萬物而不爲義
澤及萬世而不爲仁
長於上古而不爲老 覆載天地
刻彫衆形而不爲巧 此所遊已
내 스승, 나의 스승인 도는, 만물을 잘게 썰어 하나로 돌아가게 하건만 스스로 의롭다 하지 않고, 영원토록 은혜를 베풀면서도 어질다 하지 않는다.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해 오건만 늙었다 하지 않고, 하늘을 덮고 땅을 실어 갖가지 모양을 만들면서도 스스로 솜씨 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도는 이런 일을 자유롭게 노니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夫道 有情有信 無爲無形 可傳而不可受 可得而不可見
自本自根 未有天地 自古以固存 神鬼神帝 生天生地
在太極之上 而不爲高 在六極之下 而不爲深
先天地生 而不爲久 長於上古 而不爲老
무릇 도란 정이 있고 실재하지만 작위하는 것도 아니요 또한 형체도 없다. 그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할수는 있지만 물품처럼 받을 수는 없고, 체득할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다. 스스로 만물의 바탕이 되고 뿌리가 되며, 천지가 생기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였다. 그것은 귀신과 상제를 신령하게 했으며, 하늘과 땅을 낳았다. 태극보다 더 위에 있어도 높지 않고, 육극보다 더 아래에 있어도 깊지 않다.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겼건만 오래다 하지 않고, 태고보다 더 오래 되었지만 늙었다 하지 않는다.
狶韋氏得之 以挈天地
伏羲氏得之 以襲氣母
維斗得之 終古不忒
日月得之 終古不息
희위씨는 이 도를 얻어 하늘과 땅을 들고 다녔으며,
복희는 이 도를 얻어 원기(元氣) 속에 들어 갔다.
유두는 이 도를 얻어 영구히 어그러짐이 없고,
해와 달은 이 도를 얻어 영원토록 그 운행을 그치지 않는다.
堪坏得之 以襲崑崙
馮夷得之 以遊大川
肩吾得之 以處大山
皇帝得之 以登雲天
감배는 이 도를 얻어 곤륜산의 신이 되었고,
풍이는 이 도를 얻어 신이 되어 황하에서 노닐었다.
견오는 이 도를 얻어 태산의 신이 되었고,
황제는 이 도를 얻어 하늘에 올랐다.
顓頊得之 以處玄宮
禺强得之 立乎北極
西王母得之 坐乎少廣
莫知其始 莫知其終
전욱은 이 도를 얻어 현궁의 임금이 되었고,
우강은 이 도를 얻어 북쪽 바다의 신이 되었다
그리고 서왕모는 이 도를 얻어 소광산에 앉았으니,
아무도 그 시작과 종말을 알지 못한다.
彭祖得之 上及有虞 下及五伯
傅說得之 以相武丁 奄有天下
乘東維 騎箕尾 而比於列星
팽조는 이 도를 얻어 순임금 때부터 오패 때까지 장수하였다.
부열은 이 도를 얻어 무정의 정승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다가,
죽은 후에는 동유에 올라 기성과 미성을 달려 뭇 성좌에 끼게 되었다.
지금 읽고 있는 莊子 外篇말이야...
이 장자 철학의 핵심은 분별심을 버려라...라는 것인데,
말하자면 法을 세우니 그릇됨(非)과 죄가 생겼다는 것이고,
德을 애쓰는 일이 오히려 인위와 허세를 낳았단는 것인데..
外篇에선 두드러지게 이 '욧점'에 대한 모순이 느껴지네.
儒家를 너무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어서
그들과의 비유를 통해 공자와 장자의 다른 점을 역설하는데..
ㅎ 그것이 곧 분별이며 시비가 아닌가?!!
장자(하편)(잡편)
小人의 쓰임은 私心이어야 義로운 것이다.
안타깝지만,
촛불잔치는 사회구조를 개혁할 수 없다.
私心을 품은 中人들이 大衆의 私心을 자극하여
자신들의 私心을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仁義 先王之蘧廬也 止可以一宿而不可久處 覯而多責
명예는 모든 사람의 것으로 많이 가지려 하면 안 되고,
인의는 옛 성왕들의 주막으로서 하룻밤 정도 묵어가는 것은 좋지만
오래 묵을 곳은 못 되며 머물게 되면 책망이 많아지오.
天下之水 莫大於海
萬川歸之 不知何時止而不盈
眉閭泄之 不知何時已而不虛
천하의 물 중에서, 바다보다 큰 것은 없고, 수많은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언제 그칠지 모르지만 차는 일도 없다오. 미려(眉閭), 즉 큰 바다 밑에 있는 구멍에서 물이 새어나가, 언제 그칠지도 모르지만 말라 없어지는 일이 없다오.
< 방황(彷徨)>
들에 사는 귀신의 이름이 방황이라네요. ㅎ 그렇군요.
동북방위에 사는 그 삿된 귀신의 이름이 배아와 해롱이었군요.
물고기(魚)와 용(龍) 처럼 펄떡펄떡 날뛴다는 말인가 보네요.
방위풍수에서는 동북방(艮方)을 위험한 기운이 서려있는 곳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艮의 방위는 태양(日)이 나무뿌리(氏)로부터 솟아 오르는 곳으로 사람으로 치면 아기가 잉태되어 자궁에 살짝 착란한 상태라 보겠네요. 아주 위험하고 위태한 곳이죠. 이곳은 生死가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병이 든자와 허약한 자는 이곳에 거처하지 않게 합니다.
曰 有 沈有履 灶有髻 戶內之煩壤 雷霆處之
東北方之下者 倍阿鮭蠪躍之
西北方之下者 則泆陽處之
水有罔象 丘有峷 山有夔 野有彷徨 澤有委蛇
"있습니다. 진흙탕물에는 이(履)라는 귀신이 있고, 부뚜막에는 결(髻)이라는 귀신이 있고, 집안의 쓰레기 통에는, 뇌정(雷霆)이라는 귀신이 있습니다. 또 동북간의 아래쪽에는, 배아(倍阿)와 해롱(鮭蠪)이라는 귀신이 날뛰고 있고, 서북간의 아래쪽에는, 일양(泆陽)이라는 귀신이 살고 있습니다. 또 물에는 망상(罔象)이 있고, 구릉에는 신(峷)이 있고, 산에는 기(夔)가 있으며, 들에는 방황(彷徨)이 있고, 늪에는 위이(委蛇)가 있습니다"
故天下皆知求其所不知 而莫知求其所已知者
皆知非其所不善 而莫知非其所已善者 是以大亂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줄은 알고 있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추구할 줄은 모른다. 모두가 좋지 않게 여기는 것을 비난할 줄은 알아도, 자기가 이미 좋다고 생각한 것을 비난할 줄은 모른다. 이리하여 세상은 크게 혼란해 지는 것이다.
世俗之人 皆喜人之同乎己而惡人之異於己也
同於己而欲之 異於己而不欲者
以出乎衆爲心也 夫以出乎衆爲心者
曷常出乎衆哉 因衆以寧所聞 不如衆技衆矣
세속의 사람들은, 남이 자기에게 동조하는 것을 기뻐하고 남이 자기와 다른 것을 미워한다. 자기에게 동조하기를 바라고 자기와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뭇사람보다 앞서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뭇사람보다 앞서려는 마음을 지녔다고 해서, 어찌 뭇사람보다 늘 앞설 수가 있겠는가. 뭇사람과 같음으로써 편안한 것이고, 내가 듣는 것은 뭇사람의 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上必无爲而用天下 下必有爲爲天下用 此不易之道也
故古之王天下者 知雖落天地 不自慮也
辯雖彫萬物 不自說也 能雖窮海內 不自爲也
윗사람은 반드시 무위로써 천하를 다스리고, 아랫사람은 반드시 유위로써 천하를 위해 쓰여야 하는데, 이는 바꿀 수 없는 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에 천하의 제왕인 자는, 천지를 감쌀 만큼 지혜가 있어도, 스스로 나서서 꾀하려 하지 않았고, 만물에 두루 미칠 정도의 언변이 있어도, 스스로 나서서 말하려 하지 않았고, 세상을 움직일 능력이 있어도, 스스로 나서서 하려 하지 않았다.
天不産而萬物化 地不長而萬物育 帝王无爲而天下功
故曰莫信於天 莫富於地 莫大於帝王 故曰帝王之德配天地
此乘天地 馳萬物 而用人羣之道也
하늘이 낳으려 하지 않아도 만물은 변화되고, 땅이 키우려 하지 않아도 만물은 자라고, 제왕이 무위로 있어도 천하는 이루어 진다. 그래서 "하늘보다 신묘한 것은 없고, 땅보다 풍요로운 것은 없고, 제왕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왕의 덕은 천지와 짝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지를 운용하고, 만물을 구사하며, 뭇사람을 부리는 도인 것이다.
古之至人 假道於仁 託宿於義 以遊逍遙之墟
食於苟簡之田 立於不貸之圃
"옛날의 지인(至人)은 , 인(仁)에서 길을 빌리고, 의(義)를 주막 삼아, 아무런 얽매임이 없는 경지에서 노닐었으며, 밭에서 나는 소박한 것을 먹고, 함부로 베풀지 않고 살았다.
逍遙 无爲也 苟簡 易養也 不貸 无出也
古者謂是采眞之遊
아무런 얽매임이 없으면, 하는 일이 없고,
소박하면 살아 가기가 쉽고, 베풀지 않으면,
나가는 것이 없는데,
옛날에는 이것을 일러 진리를 파악한 자의 놀이라고 하였소
夫播穅眯目 則天地四方易位矣
蚊虻噆膚 則通昔不寐矣
夫仁義憯然乃憤吾心 亂莫大焉
겨를 뿌려 눈에 들어 가면, 천지 사방의 위치가 바뀌어져서 알 수가 없고, 모기나 등에가 살갗을 물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오. 저 인의도 내 마음을 심란케 하여 아프게 만드는 것으로, 이보다 더 큰 어지러움은 없소.
<福도 禍도 피하면 근심이 없다>
故曰 夫恬惔寂漠虛无无爲 此天地之本而道德之質也
故聖人休焉 休則平易矣 平易則恬惔矣
그래서 말하기를, "무릇 염담, 적막하고 허무, 무위한 것은, 곧 천지 자연의 평안함과 도덕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성인은 쉰다" 하였고, 쉬면 평안하게 다스려 지고, 평안하게 다스려 지면 욕심이 끊어져 깨끗해 진다고 한 것이다.
平易恬惔 則憂患不能入 邪氣不能襲
故其德全而神不虧
故曰 聖人之生也天行 其死也物化
靜而與陰同德 動而與陽同波
평안하게 다스려 지고 욕심이 없어져 깨끗해 지면, 우환이 끼여들 수 없고, 요사스런 기운이 침범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덕은 온전해 지고 정신에도 결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성인은 살아서는 천지 자연에 맡겨 행동하고, 죽어서는 만물의 변화를 따르는데, 조용하게 있을 때는 음(陰)과 덕을 한가지로 하고,움직일 때는 양(陽)과 흐름을 한가지로 한다.
不爲福先 不爲禍始 感而後應 迫而後動
不得已而後起 去知與故 循天之理
故曰无天災 无物累 其生若浮 其死若休
无人非 无鬼責
복을 부를 원인이 되는 일을 하지 않고, 화를 부를 실마리가 되는 일도 하지 않으며, 느끼고 나서야 응하며, 급박하게 닥쳐야 움직인다. 부득이한 때라야 비로소 일어나고, 지혜와 인위를 버려, 하늘의 이치를 따른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늘의 재앙이 없고, 만물에 얽매임이 없으며, 남의 비난을 받지 않고, 귀신의 나무람도 받지 않는다. 그 살아서는 물 위에 떠있는 것 같고, 그 죽어서는 쉬고 있는 것 같다.
不思慮 不豫謀 光矣而不燿 信矣而不期
其寢不夢 其覺无憂 其神純粹 其鬼不罷
虛无恬惔 乃合天德
생각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미리 꾀하지 않으며, 빛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믿더라도 기대하지 않는다. 잠을 자도 꿈꾸는 일이 없고, 깨어 나서도 아무런 근심이 없다. 그 정신은 순수하고, 그 혼백은 피로하지 않다. 허무 염담하여, 하늘의 덕과 합치되는 것이다.
古之存身者 不以辯飾知
不以知窮天下 不以知窮德
危然虛其所而反其性已 又何爲哉
옛날에 몸을 편안히 보존한 자는 변설로써, 지혜를 꾸미지 않았고, 지혜로써 천하를, 속속들이 규명하여 알려 하지 않았다. 혼자 바른 입장을 지키면서 그 본성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그밖에 또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道固不小行 德固不小識 小識傷德 小行喪道
故曰 正己而已矣 樂全之謂得志
본디 도는 작은 행위가 아니고, 덕도 본디 작은 지식은 아니다. 작은 지식은 덕을 손상시키고, 작은 행위는 도를 손상시킨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이다"라고 한다. 이는 온전함을 즐기는 것으로 이것을 가리켜 뜻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南方有鳥 其名爲鵷鶵 子知之乎
夫鵷鶵 發於南海而飛於北海
非梧桐不止 非練實不食 非醴泉不飮
남쪽에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을 원추(鵷鶵)라고 하는데, 자네는 알고 있는가? 저 원추는, 남해를 출발하여 북해로 날아 가지만,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무르지 않고, 대의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맛이 나는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네.
綆短者不可以汲深
주머니가 작으면 큰 것을 담지 못하고,
두레박 줄이 짧으면 깊은 물을 긷지 못한다
<서(胥)>
烏足之根爲蠐螬 其葉爲胡蝶
胡蝶胥也化而爲蟲 生於竈下
바곳의 뿌리는 굼벵이가 되고,
그 잎사귀는 나비가 되고,
나비는 ‘서(胥)’라고 하지만 변화되어 벌레가 되고, 부뚜막 아래서 생겨난다.
몸은 마른 나무의 가지와 같고, 마음은 식은 재와 같습니다.
남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자기를 충실히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행동은 자연스러워야 하고, 마음은 거리낌이 없어야 하고,
아이처럼 순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물건이나 이익과 피해 때문에 남과 다투지 않으며,
남들에 비해 괴상한 짓을 하지도 않고,
어떤 모의도 하지 않고,
어떤 일도 이루려 들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갔다가 아무 거리낌없이 돌아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걷지만 자기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합니다.
몸은 마른 나무의 가지와 같고, 마음은 식은 재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재난도 닥칠 수 없고, 행복도 찾아올 수 없습니다.
재난도 행복도 있지 않은데
어찌 사람의 재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有乎生 有乎死 有乎出 有乎入
入出而無見其形 是謂天門
天門者 無有也
도는 삶에도 작용하고 죽음에도 작용하며, 생겨나는 데도 작용하고 없어지는 데도 작용한다. 없어지고 생겨나게 하면서도 그 형체는 드러나지 않는데, 이것을 천문(天門)이라 부른다. 천문이란 존재로서는 무(無)인 것이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친구들 사이의 관계인 오륜(五倫)과, 아저씨들, 형제들, 일가들, 조카들, 스승, 친구들 사이의 관계인 육기(六紀)도 어떻게 구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巧者勞而知者憂
기교가 많은 자는 수고로울 것이며,
아는 것이 많은 자는 걱정이 많은 법이다.
爲外刑者 金與木也 爲內刑者 動與過也
宵人之離外刑者 金木訊之 離內刑者 陰陽食之
사람이 밖으로부터 받는 형벌은 쇠와 나무로 만든 형구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안으로부터 받는 형벌은 마음의 동요와 지나침 때문이다. 소인으로서 밖으로부터 형벌을 받는 자는 쇠와 나무로 만든 형구에 의해 신문을 당하지만, 안으로부터의 형벌을 받는 사람은 음양의 두 기운의 부조화에 의해 잠식을 당한다.
<9가지 시험>
君子遠使之而觀其忠
군자는 멀리 놓고 부리면서 충성됨을 살피고,
近使之而觀其敬
가까이 놓고 부리면서 공경함을 살피는 것이다.
煩使之而觀其能
그에게 번거로운 일을 시켜 능력을 살피고,
卒然問焉而觀其知
갑자기 질문함으로써 지혜를 살피는 것이다.
急與之期而觀其信
급작스럽게 약속을 함으로써 신용을 살피고,
委之以財而觀其仁
재물을 맡겨봄으로써 어짊을 살피는 것이다.
告之以危而觀其節
위태로움을 얘기해줌으로써 절의를 살피고,
醉之以酒而觀其則
술로 취하게 함으로써 그의 법도를 살피는 것이다.
雜之以處而觀其色
남녀가 섞여 지내게 함으로써 호색함의 정도를 살피는 것이다.
詩以道志
시경은 사람들의 뜻을 서술한 것이고,
書以道事
서경은 사건들을 서술한 것이며,
禮以道行
예경은 행동에 대해 서술한 것이고,
樂以道和...
악경은 조화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易以道陰陽
역경은 음양의 변화에 대해 서술한 것이고,
春秋以道名分
춘추는 명분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樂>
黃帝有咸池
황제에게는 함지라 하는 음악이 있었고,
堯有大章
요임금에게는 대장이라는 음악이 있었고,
舜有大韶
순임금에게는 대소라는 음악이 있었고, ...
禹有大夏
우임금에게는 대하라는 음악이 있었고,
湯有大濩
탕임금에게는 대호라는 음악이 있었고,
文王有辟雍之樂
문왕에게는 벽옹이라는 음악이 있었고,
武王周公作武
무왕과 주공은 무라는 음악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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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編에선 지루하다 싶더니 雜編에선 좀이 쑤심. ^^
잡편,
장자의 가장 마지막편이 되는 33장 천하편 재밋네.
비주류 사상을 짧게 간추려 정리했는데...
그중에 惠施(혜시)와 같은 잡변에 능한자들의 이야기가
오늘날 일베들과 다를바 없다는 생각이 드네.
辭는 역사 雜스러워 정미로울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 진리!
여전히 사람사는 세상은 옛날과 오늘날이 다르지 않다는 것도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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