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초서 대가 양사언

2017. 6. 1. 17:30草書

조선 전기의 초서 대가 양사언


초서 3대가의 마지막 사람인 양사언1)은 만폭동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는 글씨를 새긴 것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만폭동 봉래풍악원화동천



   황기로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과는 달리 봉래 양사언의 글씨는 형제나 아들들 같은 측근 몇 사람이 비슷하게 썼을 뿐 너무 독특해서 이후 세대에게 끼친 영향이 보이지 않습니다. 황기로의 글씨에 비해 양사언의 글씨는 따라 쓰기가 어렵습니다. 둥글게 돌리면서 강약만 있고 다른 변화가 없어서 탁본을 하면 그 멋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글씨를 쓰는 서법이 전혀 다르다고나 할까요. 

안타깝게도 봉래 양사언의 글씨는 남아 있는 것도 많지 않습니다. 



양사언 서찰 글씨 





평양 대동문 1층에는 봉래 양사언의 초서 현판,

2층에는 평안감사 박엽(1570-1623)이 쓴 해서 현판이 걸려 있다.



   포천에 금수정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습니다. 양사언이 장인에게서 물려받은 것인데, 이 아래쪽 바위에도 양사언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한 번 탁본을 해 온 적이 있는데 작업하기가 무척 어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위가 드러나 있으면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데, 물에 가라앉으면 잘 보여 특이합니다. 



포천 금수정





금수정 인근 바위에 새겨진 '경도瓊島'.



   양사언은 성격이 매우 활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글씨도 아주 활달합니다. 글씨라는 것이 대체로 그 사람의 성격을 따라가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미수 허목도 아주 독특한 성정을 지녔던 사람인데 그 글씨를 보면 성격이 드러날 정도로 맞아떨어짐을 볼 수 있어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덩치는 오히려 글씨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이, 덩치가 큰 사람이라도 성격이 소심하면 글씨가 조그맣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소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글씨를 쓰는 데에 있어서 소심한 성격은 방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성격이 소심하면 아무리 좋은 선생에게 배워도 좋은 글씨가 나오지 않습니다. 특히 초서의 경우는 성격에 좌우될 때가 많습니다. 대개 초서는 해서와 행서 배운 후에 옆에 본이 되는 글씨를 가져다 놓고 임모하며 배우게 마련인데, 임모로는 한계가 많습니다. 


   양사언은 돈녕부주 양희수의 아들인데, 어머니가 정실부인이 있는 아버지에게 후처로 들어가서 낳은 서자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음에 이르게 되자 양사언의 어머니는 정실부인의 소생인 큰아들 양사준에게 “내가 남편과 같은 날 자결을 해 죽으려고 하니 자신이 낳은 두 아들을 서자로 부르지 말고 적자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스스로 비수로 찔러 목숨을 끊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양사언의 아들 양만고의 글씨는 아버지와 비슷하지만 활달함이 그 아버지에 미치지 못합니다. 양만고의 글씨도 유명했지만 당대에서 그의 글씨는 아쉽게도 끊기고 맙니다.




양사언 <학성기우인鶴城寄友人> 95x55cm 자작시. 7언절구


山水情懷老更新 / 如何長作未歸人
碧桃花下靑蓮舍 / 瓊島瑤臺入夢頻
"산수의 정회는 늙을수록 더욱 새로우니/어찌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으리
복사꽃 아래의 푸른 연꽃 집에서/ 꿈결에 자주 경도瓊島와 요대로 들어갔다네"



   황기로가 진사까지만 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양사언은 40년간 관직에 있었고 ‘부사’직까지 역임했습니다. 부사라고 하면 종3품(도호부사) 또는 정3품(대도호부사)으로 현재의 광역시장 정도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군수는 종4품, 현령은 종5품. 현감 종6품 이렇게 내려갑니다. 조선시대에 벼슬했다 얘기할 정도가 되려면 정3품 당상관 정도는 되어야 할 겁니다. 아까 말했던 부사의 경우 대부분 당상관에 해당합니다. 부사 위에는 직급이 조금 복잡해서 목사 등의 벼슬이 있는데 지역에 따라 부사가 아닌 목사가 다스렸던 곳이 있습니다. 


   김구, 양사언, 황기로 세 사람이 조선 전반기 초서로 유명했던 사람이라고 했을 때 이 세 사람 중 가장 높게 칠 수 있는 것을 묻는다면 황기로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남아 있는 글씨도 많기 때문입니다. 글씨는 많이 보면 또 더 호감을 느끼게 마련이니까요. 만약 초서로서 둘을 꼽는다면 황기로와 양사언을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초서는 특히 한 글자 한 글자를 보지 않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고 작품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전체적 조형 감각도 뛰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치면 초서가 가장 어려울 것 같지만 따지자면 정자로 쓰는 해서가 제일 어렵습니다. 정확한 형태로 써야 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눈에 쉽게 띄기 때문입니다. 특히 비석 글씨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에 비하면 초서는 약간 잘못 써도 드러나지 않기는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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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사언(楊士彦, 1517(중종 12)~1584(선조 17)) 호는 봉래(蓬萊). 1546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을 거쳐 삼등·함흥·평창·강릉·회양·안변·철원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의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감상했다. 만폭동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 글씨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이성계 증조부의 묘에 화재가 일어나 책임을 지고 황해도로 귀양을 갔다가 2년 뒤 돌아오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40년간 관직에 있으면서도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한시가 뛰어났고 「미인별곡(美人別曲)」「남정가(南征歌)」등의 가사가 전한다. 이밖에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에 뛰어났으며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濠)와 함께 조선 4대 서예가로 일컬어진다.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