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초서 대가 황기로

2017. 6. 1. 17:28草書

조선 전기의 초서 대가 황기로


    사실 초서의 기본은 왕희지이며, 이후 당나라 때의 회소와 장욱 등이 유명한 초서 서예가로 꼽히곤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장욱 보다는 회소의 영향이 더 큰데, 조선 전기 명나라 때의 장필을 활발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종 때 쯤 급격히 수용된 장필의 글씨는 조선 전기의 초서 글씨에 어느 정도는 모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중 제일 많이 장필을 받아들인 사람이 황기로입니다. 




회소(懷素, 725~785)  자서첩自敍帖





장욱(張旭, 675~750?) 《고시사첩古詩四帖》중. 요녕성박물관





장필(張弼, 1425~1487) 초서칠절시축草書七絕詩軸




 고산 황기로(黃耆老, 1521(중종 16)~미상)1)

   회소, 장욱, 장필을 이어받아 자기 나름대로의 서체를 구사한 황기로의 글씨는,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합니다. 




황기로 <이군옥시李羣玉詩> 오죽헌 보물 제1625-1호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5~1575?)가 당나라 이군옥(李羣玉)의 오언율시를 쓴 것이다.

이 필적은 황기로의 사위 옥산(玉山) 이우(李瑀, 1542~1609)의 후손인 이장희(李璋憙, 1909~1998)가

수집한 것으로 그의 장손에 의해 기증되었다. 




   굵었다 가늘어지고 꺾이고 휘돌고, 운동세가 많고 변화로운 짜임새를 가진 글씨입니다.

  황기로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을 율곡 이이의 동생인 옥산 이우2)와 결혼시키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서인인 사위를 얻은 것입니다. 예전에 이문건3)의 일기가 발견되어 살펴봤는데, 이이와 이우의 아버지인 이원수와 황기로, 이문건 이 세 사람이 아주 친밀한 친구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황기로는 구미에, 이문건은 화암(괴산 인근)에 살면서 왔다갔다 하며 충청 부근에서 만나 어울렸습니다. 옥산 이우 집안이 대대로 그의 글씨체인 옥산체를 쓰는데, 이것이 황기로 글씨와 유사합니다. 사위가 장인 글씨를 본받아 쓴 셈입니다. 

고산 황기로의 글씨는 그의 고향 구미 금오산에 남아있는 그의 정자 고산정, 매학정 등에도 남아있습니다.




매학정에 있는 황기로 글씨 <차왕고운次王考韻>



   금오산은 황기로 집안의 땅이었지만 사위에게 물려주었는지 덕수 이씨 집안의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언젠가 옥산 이우의 증손자 글씨를 보았는데, 이 글씨도 황기로의 글씨와 매우 유사했습니다. 

황기로의 글씨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특히 빛이 났던 것은 성호 이익의 집안으로 전해지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황기로가 구미 사람이어서 영남의 남인들에게 영향을 준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성호 집안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청선 이지정, 이지정의 조카인 매산 이하진, 이하진의 아들인 옥동 이서와 성호 이익 네 사람이 중요합니다. 이 중에서 이지정이 황기로의 글씨를 거의 그대로 씁니다. 장필도 참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지정(李志定, 1588~1650) <초서 두보시 거촉 草書杜甫詩去蜀> 고려대학교 박물관





이하진(李夏鎭, 1628~1682) 〈오언절구〉《천금물전千金物傳》



   옥동 이서는 이를 받아들여 자기 글씨로 완성하여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회소 글씨에 왕희지 글씨를 덧붙였다고 스스로 생각한 듯 합니다. 



옥동 이서의 글씨



   황기로의 동생 황영로도 비슷하게는 썼으나 형보다는 잘 쓰지 못했습니다. 각이 덜진 듯한 느낌의 글씨입니다.

황기로 글씨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경차”인데, 글씨도 좋고 내용도 좋습니다. 글씨의 특징과 매력을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미세하게 떨리는 책받침 부분과 사람 인(人)의 삭 꼬부라지는 획도 기막힌 맛이 있으며, 꽃 화(華)자 가운데 흔들어 내려오는 부분도 멋들어진 웨이브를 보여줍니다. 





황기로 <경차敬次> 26×110cm 동산방화랑 보물 1625-2


다른 사람의 시를 차운하여 짓고 쓴 초서인데,

말미에 '청천, 영천, 귤옹, 송강, 서하의 시가 있어서 몇번 씩 반복함에 그칠 수 없어 시를 짓는다'고 써 있다.





<경차> 부분





   이하진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장필 글씨의 임모본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성호 이익 집안에서 내려오는 글씨의 특징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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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는 고산(孤山)·매학정(梅鶴亭). 1534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고향에 은거하여 여러 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초서를 잘 써서 ‘초성(草聖)’으로 불렸다. 『근묵(槿墨)』 등에 진적이 전하며, 『동국명필(東國名筆)』·『대동서법(大東書法)』 등에 필적이 모각되어 있다. 이밖에 1549년 이백(이백)의 「초서가행」을 쓴 초서필적이 석각(석각)되어 전하는데, 당나라 회소(懷素)의 『자서첩(自敍帖)』중 광초(狂草)를 방불한다. 금석으로 충주의 이번신도비(李蕃神道碑, 1555)가 있다.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초서로는 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제1인자라는 평을 받아왔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미쳐 비슷한 풍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아우인 영로(榮老)도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2)  이우(李瑀) 1542(중종 37)~1609(광해군 1)) 호는 옥산(玉山). 율곡 이이의 동생. 비안현감과 괴산·고부군수를 거쳐 군자감정에 이르렀다. 시·서·화·금(琴)을 다 잘하여 4절(四絶)이라 불렸다. 그림은 초충·사군자·포도 등을 다 잘 그렸는데, 어머니의 화풍을 따랐다. 

3)  이문건(李文楗, 1494(성종 25)~1567(명종 22)) 호는 묵재(默齋).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13년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화를 입자, 문인들이 화를 염려해 조상하는 자가 없었으나 그의 형제는 상례를 다했다 한다. 이에 남곤·심정의 미움을 받아 1521년 옥사에 연루되어 그의 형 충건은 청파역에 정배되었다가 사사되고, 그는 낙안에 유배되었다. 1527년 사면되어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주서, 승문원박사를 거쳐 정언·이조좌랑에 이르렀다.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성주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