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5

2017. 4. 19. 16:04서예일반

21. 안견의 <可度(가도)>

 

 

조선시대 그림 가운데 최고의 명작인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1418-1453)이 꿈속에 박팽년 등과 함께 본 무릉도원을 당시의 최고 화가인 현동자 안견(玄洞子 安堅, ?-?)에게 그리게 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1447년 음력 4월 20일에 그리기 시작하여 3일 만인 23일 완성하였으며, 내용상 당나라 도연명(陶淵明, 365-427 )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안평대군의 꿈에 초점을 맞추어 그렸다. 


두루마리에 포함된 그림의 앞에는 ‘몽유도원도’라고 쓴 제목과 안평대군의 시가 있으며, 다음에 그림 그리고 이어서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를 쓴 안평대군의 발문과 보한재 신숙주(保閑齋 申叔舟, 1417-1475), 백옥헌 이개(白玉軒 李塏, 1417-1456), 경재 하연(敬齋 河演, 1376-1453)과 학역재 정인지(學易齋 鄭麟趾, 1396-1478),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 1417-1456), 매죽헌 성삼문(梅竹軒 成三問, 1418-1456)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문사 21명의 제시가 붙어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그림이기는 하지만 그림을 조금 살펴보자

 

 

《몽유도원도》 비단에 수묵담채, 38.7x106.5㎝, 일본 덴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그림은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본 도원(桃源)의 모든 경치를 평면으로 담아냈다. 그림의 전개는 현실 세계에서 도원으로 들어가는 부분, 그 가운데 펼쳐지는 깎아지른 절벽과 빽빽한 숲, 굽이치는 시냇물과 구불구불한 길, 구름과 안개 낀 골짜기의 신비로운 경치 속에 펼쳐진 복숭아 밭, 대나무 숲속에 있는 인적 없는 띠집과 물결 따라 일렁이는 조각배 등 도원의 선경(仙境)이 차례차례 표현되어 있다.

 

보통 두루마리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개해 나가는데 이 《몽유도원도》는 반대로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그림이 전개되도록 구성하였다.

 

특히 현실 세계에서 선경에 이르는 과정을 앞에서 보는 시점, 올려다보는 시점, 내려다보는 시점을 적절하게 구사하여 그림에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또한 비단에 정밀하고 섬세한 필치와 맑은 채색을 얹어 도원의 환상적인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인장을 보면 15세기는 인장의 실물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서화속 자료 역시 매우 적은 편이다. 하지만《몽유도원도》에는 안견의 자인 <가도(可度)> 1방, 제발 끝에 안평대군의 호인 <낭간(琅玕)>과 ‘그 소리가 맑으면서도 길다’는 뜻의 글귀를 새긴 사구인(詞句印) <청월이장(淸越以長)> 2방이 찍혀 있다.

 

또 제시를 남긴 하연(河演)이 사용한 본관인(本貫印) <진양세가(晉陽世家)>, 성명인(姓名印) <하연(河演)>, 자인(字印) <연량(淵亮)> 등 3방의 인장이 찍혀 있어 15세기 인장 사용양식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인장 위에는 ‘본관이 지곡이고 자가 가도인 사람이 그리다’라는 뜻의 ‘池谷可度作(지곡가도작)’이란 관서가 쓰여 있다.

 

 

 

可度(가도) 

 

 

‘池谷可度作(지곡가도작)’   可度(가도)

 

15세기에는 인장이 보편화되지는 않았지만, <몽유도원도>와 《비해당 소상팔경 시첩》을 예로 들어보면, 본관인(本貫印), 성명인(姓名印), 자호인(字號印)과 더불어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사구인(詞句印)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 인장의 자법은 소전(小篆)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글자의 아래위가 길고 장법과 도법의 변화없이 평이하게 새긴 것이 특징이다.

 

안견의 본관은 지곡(池谷), 자는 가도(可度)와 득수(得守), 호는 현동자(玄洞子)와 주경(朱耕)을 사용하였으며, 화원 출신으로 세종 때 도화원(圖畵院) 종6품인 선화(善畵)에서, 정해진 녹봉이 없이 철마다 근무 성적에 따라 받는 체아직(遞兒職)인 정4품 호군(護軍)까지 이르렀다.

 

특히 안평대군이 소장한 옛그림을 섭렵하여, 중국 북송 때 대관(大觀)풍의 북종 산수화가인 곽희(郭熙)의 화법을 바탕으로 여러 화가의 장점을 자신의 필법으로 녹여낸 명작을 많이 남겼다.

 

아울러 안견은 산수뿐만 아니라 초상화, 사군자, 의장도 등에도 능해 일본 무로마치(室町, 1336-1573) 시대의 수묵산수화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시대 최고의 명작 <몽유도원도>는 일본에 있기 때문에, 마음껏 감상할 수 없으며 또 ‘국보’로 지정할 수도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22. 이암의 <琴軒 (금헌)>

 

 

조선시대 초기에 활동한 화가로 새나 짐승을 그린 영모화(翎毛畵)와 꽃과 새를 그린 화조화에 뛰어났던 이암(李巖,1507-1566)이란 화가가 있다. 화법은 남송시대 궁중화가인 모익(毛益, ?~?)을 본받았다고 하는데, 그의 그림에는 한국적인 정취와 생동감이 넘치는 독자적인 화풍이 엿보인다.

 

초상화는 물론 동물화에 매우 뛰어나 소로 유명한 퇴촌 김식(金埴, 1579-1662) 그리고 고양이에 탁월했던 화재 변상벽(和齋 卞相璧, 1730?-?)과 더불어 조선시대에 동물화를 잘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왕손으로 두성령(杜城令)을 제수 받았으며, 1545년 중종(中宗, 1488-1544)의 어진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암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정중(靜仲)으로 알려져 있지만, 호는 문헌기록 어디에도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모견도(母犬圖)》와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에 그 단서가 있다. 먼저 그림을 살펴 보자

 

 

《모견도》, 종이에 수묵담채, 73x42.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조구자도>, 종이에 수묵, 86x44.9㎝,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작품 모두 개를 주요 소재로 하였다.《모견도》는 나무 아래에서 어미 등에 기대 단잠을 자는 강아지와 젖가슴을 파고드는 강아지 두 마리를 그렸다. 모성(母性)을 주제로 한 듯 어미 개와 강아지가 한데 어우러진 정감 있는 표현이 돋보인다.

 

그리고《화조구자도》는 나무에 앉아 꽃에 빠진 새와 생사(生死)를 잊고 꿀을 찾아 날아드는 벌나비를 정교한 필치로 그려 서정적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나무 등걸 아래에는 단꿈에 젖은 강아지와 멀리 뭔가를 바라보는 강아지 그리고 몸통과 뒷다리만 보여 방아깨비인지 사마귀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름의 놀이에 빠진 강아지를 그려, 평화로운 정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두 작품에는 모두 비슷한 인장 2방이 찍혀 있는데, 위에 찍은 인장은 세발 달린 솥[정(鼎)] 모양이고, 아래에 찍은 인장은 알려진 것처럼 이암의 자인 <靜仲(정중)> 인장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읽어내지 못한 솥 모양의 인장은 무엇일까?

 

《모자도》의 솥 모양 인장은 획이 뭉개져 판독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화조구자도》의 솥 모양의 인장은 '거문고가 있는 집' 이란 뜻의 <琴軒 (금헌)> 으로 읽힌다.

 

두 인장은 같은 글자[인문(印文)]를 다르게 새긴 인장들로 인문을 판독하는데 상호 보완적 역할을 해준다.

 

《모자도》의 인장은 ‘軒(헌)’자가 명확하고, 《화조구자도》의 인장은 ‘琴(금)’자가 명확하다. 특히 미국 보스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암의《가상응도(架上鷹圖)》에 찍힌 인장을 보면 더 정확하다.

 

‘軒(헌)’자의 글자 모양이 특이하지만 인장에 많이 사용하던 자법(字法)으로, 조선시대 인장에 흔히 보이는 글자법이다

 

 

이 작품들에 찍힌 인장을 통해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암의 호가 바로 ‘琴軒 (금헌)’임을 알 수 있다. 琴軒 (금헌) 이란 호는 김뉴(金紐, 1436-1490) 외에도 몇 분이 사용한 예가 있다.

 

그림과 글씨 속의 인장은 이처럼 작가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작품의 진위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솥 모양의 인장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말 정도까지 조선시대 문사(文士)들이 많이 사용한 인장의 한 양식이라는 점도 알아둘 만한 내용이다

 

 

 

23. 조지운의 <墨豪(묵호)>, <鐵石心腸(철석심장)>

 

 

 

조선시대에는 대대로 화원을 지낸 집안은 말할 것이 없지만, 글씨와 그림을 잘 한 문인 집안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김시(金禔, 1524~1593)와 손자 김식(金埴, 1579~1662), 학림정(鶴林正)을 제수받은 이경윤(李慶胤, 1545~1611)과 아들 이징(李澄, 1581~?), 조속(趙涑, 1595~1668)과 아들 조지운(趙之耘, 1637~?), 윤두서(尹斗緖, 1668~1715)와 아들 윤덕희(尹德熙, 1685~1776) 그리고 손자 윤용( 尹愹, 1708~1740) 등이다.

 

조지운의 아버지 조속은 문인으로 경학(經學) 뿐만 아니라 시와 글씨를 잘 했다. 또한 그림은 매화와 대나무 그리고 산수에 뛰어났다.

 

특히 새나 짐승을 그린 영모(翎毛)와 꽃가지나 나뭇가지만 그리고 뿌리는 그리지 않는 절지(折枝)는 중국풍의 틀을 벗어던지고 조선 그림의 새 길을 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속에게는 그의 인장으로 확정할 수 있는 작품이 없다. 물론 호인 <滄江(창강)>이란 인장과, 전혀 읽을 수 없는 인장이 찍혀 있는 작품이 있기는 하다.

 

조지운의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운지(耘之), 호는 매창(梅窓)이며 매곡(梅谷), 매은(梅隱)이라고도 썼다. 아버지의 화풍을 계승하면서 간결하고 소박하여 문인의 아취를 한껏 풍기는 매화 그림을 잘 그렸다.

 

참봉 벼슬을 지낼 때 우의정 허목(許穆, 호는 미수(眉叟), 1595 ~1682)의 부탁으로 부채 그림을 그렸는데, 선비가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서인 노론의 공격을 받고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잘 그려 중국에 사신으로도 다녀왔다고 전한다. 그럼 조지운의 그림을 살펴 보자.

 

 

《매상숙조도(梅上宿鳥圖)》, 종이에 수묵, 109×56.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바람이 왼쪽에서 부는 것인지, 새가 앉아 무게를 못이기는 것인지 나뭇가지들이 모두 오른쪽으로 휘었다. 대나무와 매화가지가 화면을 셋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 매화가지 위에 머리를 가슴에 묻은 새가 졸고 있다. 추위와 눈보라 속의 매화가지에 앉아 있는 이 새는 자연의 새가 아니라 선비 즉, 조지운 자신이 아닐까?

 

이 그림은 지조와 절개의 상징인 매화와 대나무 사이에서 당쟁과 이욕(利慾) 다툼으로 얼룩진 세속을 잊고 바른 마음을 가다듬으며, 한 마음으로 한 곳을 향하고 있는 일심정좌(一心靜坐)한 선비의 모습이 느껴진다. 늘 절개를 지켜 변함이 없다는 ‘독야청청(獨也靑靑)’과도 통할 듯하다.

 

대나무는 짙은 먹으로, 매화와 새는 옅은 먹으로 그려 맑고 산뜻한 분위기를 풍긴다. 반원을 그리며 오른 쪽으로 쏠린 구도에, 왼쪽으로 휘어진 매화 한 가지가 고요를 깨뜨리는 구도의 반전이 상쾌하다.

 

그림 오른 쪽 위에 ‘운지가 그리다’라는 뜻의 ‘耘之筆(운지필)’이란 관서와 인장 2방이 찍혀 있다. 위의 인장은 조지운의 또 다른 호인으로 생각되는 <墨豪(묵호)>이며, 아래 인장은 ‘굳센 의지나 지조가 있는 마음’이란 뜻의 사구인(詞句印) <鐵石心腸(철석심장)>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耘之筆’이라고 쓴 것이 친필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박세당( 朴世堂, 호는 서계(西溪), 1629~1703)과 그의 아들 박태보(朴泰輔, 호는 정재(定齋), 1654 ~1689)가 다음과 같이 남긴 글에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운지가 평소 붓과 먹물로 하얀 종이에 그린 그림은 맑고 깨끗하고, 힘차고 뛰어나며 그 풍류가 천고에 빛날 텐데, 다만 그 이를 다시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나는 군께서 지은 ‘옥축으로 갈무리한 그림은 속절없이 보배롭고, 술동이에 남은 술은 영영 줄지 않는다〔화장옥축만견진 주류화준장불감(畫藏玉軸漫見珍 酒留華樽長不減)〕’이라는 시에 곡하노니, 이것이 운지를 아는 이들이 깊이 슬퍼할 바이다.

 

운지는 그림을 그릴 때 고심하여 구상한 적이 없고 붓을 잡으면 곧바로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불똥이 튀고 번개가 치듯 거침없이 이리저리 휘둘러 빠르기가 마치 신과 같았다.

 

그런데도 짙고 옅음, 거칠고 미세한 것이 제 각각 알맞았으니, 단번에 백장의 종이에 붓을 휘둘러 쓴 당나라 회소(懷素)의 신묘한 초서가 전대에 명성을 독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 하겠다.

 

이 화첩은 신공미(申公美, 신확[申瓁, 1652~1698])가 수장하고 있는 것인데, 나에게 그 만년의 붓놀음이 이와 같았음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耘之平日毫墨點染楮素者, 瀟洒遒逸, 其風流足以照映千古, 獨其人不可復見矣. 吾哭君詩, 畫藏玉軸漫見珍, 酒留華樽長不減, 此可爲相識所深悲也. 耘之於畫, 未嘗苦心凝思. 探筆便爲, 左拂右掠, 焱馳電逝, 捷疾如神. 濃淡麤細, 各盡其態, 蓋一揮百紙之妙, 藏眞草書, 不得獨擅於前也.此帖. 申公美所得, 要余爲之識其晩年弄筆如是云爾.
『서계선생집(西溪先生集)』권8,「운지화첩발(耘之畫帖跋)」

 

 “조운지가 매화를 그리고 자는 새도 곁드렸으니, 새 무겁고 가지 가벼워 하늘거린다.
잠시 새 날려 가지 일어나게 되면, 번성한 꽃은 흔들려 많이 떨어지게 돼.”

趙侯畫梅添宿鳥, 鳥重枝輕垂裊裊. 乍敎鳥擧枝起時, 翻動繁英落多少.
『<정재집(定齋集)』권1, 「조후지운묵매가. 증종질필건(趙侯之耘墨梅歌. 贈從姪弼健)」

 

 

24. 광무황제 고종의 鳳凰(봉황)인, <珠淵(주연)>, <昔御堂(석어당)>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청나라와 사대적 조공관계를 끊고 황제에 오른 분이 광무황제 즉  고종(高宗, 1852~1919)이다. 말하자면 그는 1863년부터 1897년까지는 조선의 왕으로, 1897년 환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한 이후부터 1907년 순종(純宗, 1874~1926)이 융희황제(隆熙皇帝)에  오를 때까지 대한제국의 광무황제(光武皇帝)로 군림했다.  


고종은 돌아가신 뒤 부른 묘호(廟號)이다. 이름 즉 휘(諱)는 형(熙)이며, 초명은 재황(載晃)이고 아명은 명복(命福)이다. 자는 성림(聖臨), 처음 자(字)는 명부(明夫), 호는 주연(珠淵)이다.   

 

황제가 돌아가신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공덕을 기리며 지어올린 묘호(廟號)가 ‘고종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인데,  이렇게 긴 묘호를 줄여 부른 칭호가  바로 고종이다.


조선 역사상 최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였지만 고종은 봉건과 근대 사회의 격동기 속에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비운의 황제로 기억되고 있다.

 

정비는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1851~ 1895)이며 융희황제 순종의 어머니이다, 계비는 숙명여학교와 진명여학교 등 자주적 근대 여성 교육기관의 설립을 후원한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1911)로, 영친왕 은(英親王 垠, 1897~1970)의 어머니이다.

 

흘러간 역사는 오늘과 미래의 거울로 삼으면 되는 일이고, 이제 고종의 글씨 한 점을 살펴보자

 

 

《無量壽覺(무량수각)》, 1908, 비단에 먹, 33.5 x 104.5㎝, 개인소장

 

無量壽覺                   무량수각
二年九月念五日爲書   이년구월염오일위서
珠淵                          주연

 

무량수(無量壽)는  아미타(阿彌陀)의 다른 말로 달리 무량광(無量光)이라고 하며 수명과 빛이 끝이 없다는 뜻이다. 이 무량수를 써서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고 할 때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는 건물을, 무량수불(無量壽佛) 또는 무량수각(無量壽覺)이라고 할 때는 아미타 부처님을 가리킨다. 

 

이 글씨의 오른쪽 머리 부분을 자세히 보면 봉황 모양의 인장이 찍혀 있다. 또 왼쪽 끝에는 주연이라고 쓴 뒤엔 호인 <珠淵> 과 덕수궁에 있는 건물 이름인 <昔御堂(석어당)>을 당호인으로 찍었다

 

 

 

상상의 동물인 봉황은 기린, 거북, 용과 함께 사령(四靈)이라고 하는 네 가지 신령한 동물의 하나이다. 그 모습은 동서남북의 사신(四神) 가운데 남쪽을 상징하는 주작(朱雀)과도 비슷한데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헌마다 그 모양이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봉황의 모습은 앞은 기러기, 뒤는 기린, 목은 뱀, 꼬리는 물고기, 이마는 황새, 깃은 원앙새, 무늬는 용, 등은 호랑이, 턱은 제비, 부리는 닭을 닮았고 오방색(파랑, 빨강, 하양, 검정, 노랑)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또한 빛나는 몸에 다섯 가지의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오동나무에 깃들며, 예천(醴川)을 마시고, 천년에 한번 열리는 대나무 열매만을 먹고 산다고 한다.

 

특히 천자를 상징하는 동물로 많이 쓰였는데, 천자가 타는 수레를 봉여(鳳輿) 또는 봉련(鳳輦)이라고 했다. 봉황이 새겨진 이 인장은 고종의 몇몇 작품에도 두인(頭印)으로 사용한 것이 확인된다.

 

석어당이 들어있는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 뒤, 13년 동안 이곳에 살면서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4년 큰 불이 난 뒤 1905년부터 정전인 중화전(中和殿), 즉조당(卽阼堂), 석어당(昔御堂) 등이 차례로 다시 세워졌다. 이 때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면서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었고, 영친왕은 1897년에 이곳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석어당》편액, 덕수궁

 

석어당이란 ‘옛날에 임금께서 머무시던 집’ 이란 뜻으로,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에 타 머물 곳이 없자 선조(1552~1608)가 성종(1457~1494)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의 집에 머물렀던 일에 연유해 붙인 이름이다.

 

현재의 건물 역시 1904년 화재 이후 1906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덕수궁 내에서 유일한 2층 건물이다. 이 재건 공사 때 고종은 《경운궁》《즉조당(卽阼堂)》《석어당》등의 편액 글씨를 썼다.

 

 

    

 

《경운궁》편액, 덕수궁              《즉조당》편액, 덕수궁

 

앞서 《무량수각》글씨로 돌아가면, 관서에 있는 ‘2년 9월 25일 위해서 쓰다’의 2년이 어느 2년을 가리키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봉황> 인장이 찍혀 있는 다른 글씨(아래 2점)의 풍격과 비슷한 점 그리고 태황제로서 순종의 연호인 융희를 생략한 것으로 가정한다면, 순종 즉위 2년인 1908년에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시 2년이 광무 2년을 가리킨다면 1898년이 된다)

 

 

 

《保家莫如孝友(보가막여효우》              《爲官心存君國(위관심존군국)》

 

1908년 설에 관해서는, 봉황인이 찍힌 세 작품과 1894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보덕사(報德寺)에 고종이 남긴《少石詩境(소석시경)》편액과 아버지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1820~1898)과 함께 쓴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의 대적광전 주련(柱聯)을 비교해 보면, 아무래도《무량수각》글씨는 1908년에 쓴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佛身·色相(불신·색상)》주련,  《소석시경》편액, 보덕사
 1,2쪽(고종), 3쪽 이하(흥선대원군), 해인사   

 

광무황제 고종의 《무량수각》글씨 머리에는 성군이 출현하여 나라가 태평하면 홀연히 나타난다는 봉황이 앉아 있는데, 어쨌든 고종의 글씨에 봉황 모양의 인장이 찍혀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 상관성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1967년 1월부터 봉황문이 들어간 표장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25. 이인문의 <上下千古(상하천고)>

 

 

산수화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이 그려진 장르라 할 수 있다.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산수화를 첩으로 꾸며 감상하는, 이른 바 방 안에 비스듬히 누워 이름난 경치나 옛 유적을 그린 그림을 보며 즐긴다는 뜻의 와유(臥遊)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와유는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송나라의 화가이며 이론가로 『화산수서(畵山水序)』를 지은 종병(宗炳, 375-443)의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즉, 늙고 병이 들면 이름난 산을 두루 보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나이 들어 누워서 보기 위하여 유람했던 곳 모두를 그림으로 그려 방에 걸어두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에서는 18세기에 들어 산수를 유람하면서 느낀 감동과 역사적 사실을 시와 글로 쓰고 그림을 곁들이는 와유첩(臥遊帖)을 만드는 것이 유행하였다.

 

진경 산수화의 대표격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은 물론이며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의《송도 기행첩》,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의《금강 사군첩》이 전한다. 또 김홍도 화첩을 본떠 오재 김계온(寤軒 金啓溫, 1773-1823)이 만든《와유첩(臥遊帖)》도 남아 있으며, 육완당 이풍익(六玩堂 李豊瀷, 1804-1887)의《동유첩(東遊帖)》도 유명하다.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古松流水館道人 李寅文, 1745-1824이후)의 그림 열 점과 글씨가 포함된 화첩이 있는데, 거기에는 선비가 소나무 아래에서 폭포를 바라보는 그림, 소나무 아래에서 얘기를 나누는 그림, 벗을 찾아가는 그림, 집으로 돌아가는 그림이 들어 있다.

 

우리는 보통 조선 강산의 실경(實景)을 그린 정선의 산수를 진경산수(眞景山水)라고 하는데, ‘진경(眞景)’이란 말은 강세황이 정선의 화첩에 쓴 글에서 ‘겸재 정선은 동국의 진경을 가장 그렸으니(鄭謙齋, 最善東國眞景)’라는 말에서 나왔다.

 

결국 ‘실경(實景)’의 ‘實’과 ‘진경(眞景)’의 ‘眞’은 모습으로서의 실상(實相)과 진상(眞相)이라는 뜻으로 보면 같은 말이다.

 

그러나 이인문의 그림은 시대의 흐름과 달리 모양보다도 내용과 정신에 치중하여 그려낸 사의(寫意)적인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 풍이 강하다.

 

그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경과 삶을 통해 자신의 가슴 속에 이상화된 자연과 사람을 운치있게 그려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인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산수도(山水圖)》첩, 종이에 수묵담채, 27.6 x 31.9㎝,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야트막한 산에 기댄 띠집 안에 선비 둘이 앉았는데, 벗을 기다리는 듯한 선비는 몸을 틀어 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 아래 기역자로 꺽인 너와집 창너머엔 선비의 자제가 책을 읽는 듯 정좌(靜坐)하고 있다.

 

키 작은 나무가 울이 되어 집을 감싸고, 가을인 듯 잎은 성글고도 붉었다. 나귀를 탄 선비는 집 앞에 거의 이르렀는데, 지게문도 사립문도 없이 나무 스스로 문이 되었다.

 

심부름하는 아이는 나뭇가지 양쪽에 짐을 지고 있는데, 힘에 겨운 듯 허리도 다리도 꾸부정하다. 왼쪽에는 술과 안주를 담은 듯한 상자를 매달았고, 오른쪽에는 줄 풍류를 잡으려는지 거문고 모양의 물건을 얹었다.

 

그냥 산수라고 하기보다는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처럼, 마음이 맑고 학문이 높은 벗을 찾아가는  ‘방우도(訪友圖)’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차분하고 까슬한 붓질과 맑은 채색 그리고 정감어린 내용으로 보면 우리가 진경산수라고 하는 그림에 못지 않다. 


벗은 벗을 기다리고, 벗은 벗을 찾아 먼 길을 마다하지 않으니,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라는 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의 첫 머리에는 <上下千古(상하천고)>란 사구인이 찍혀 있고, 그 옆에 예서(隸書)로
‘고송유수관이 그리다(古松流水觀道人寫[고송유수관도인사])’라고 관서를 하고,

그 아래에 <李寅文印(이인문인)>이란 음각 성명인과 <文郁(문욱)>이란 양각 자인을 찍었다.

이인문은 호에 ‘館(관)’과 ‘觀(관)’을 함께 쓰는데 모두 누각을 말하며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을 가리킨다.

 

 

 

 

상하천고(上下千古)’란 말은 『채근담』에 나오는 말로 ‘천 년의 시간을 오르내린다’라는 뜻이다. 이 글의 큰 뜻은 마음의 변화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 본연의 성품이 흔들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能以此胸襟眼界, 呑吐六合, 上下千古.

인능이차흉금안계 탄토육합 상하천고
事來如漚生大海, 事去如影滅長空, 自經綸萬變, 而不動一塵矣.

사래여구생대해 사거여영멸장공 자경륜만변 이부동일진의

 

이처럼 마음과 눈만으로도 천지사방을 삼켰다 뱉었다 하고, 천 년의 시간을 오르내린다.


일이 닥쳐올 때는 큰 바다에 거품이 이는 듯하고 일이 지나갈 때는 넓고 먼 하늘에 그늘이 사라지듯 하며, 스스로 만 가지 변화를 만들어 내면서도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게 한다.

 

이인문은 산수뿐만 아니라 신선이나 불교의 고승과 나한을 그린 도석인물화, 깃이 있는 새나 털이 있는 짐승을 그린 영모화, 포도 그림  등 모든 그림에 뛰어났다.

 

그는 도화서 화원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욱(文郁), 호는 유춘(有春),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觀]道人), 자연옹(紫煙翁)을 썼다.

 

기량이나 격조 면에서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와 쌍벽을 이루었던 18세기 말을 대표하는 동갑내기 화가이다.

 

 

26. 아암 혜장의 <日出而作日入而息(일출이작일입이식)>

 

 

조선시대 19세기에는 학예단의 종장(宗匠) 추사 김정희가 있고, 선문(禪門)에는 조선의 차문화를 일으킨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이 있다.

 

조선 차문화 중흥이라고 했지만 그 뒷면에는 두륜산 대둔사에 있던 초의 스님의 선배인 아암 혜장(兒菴 惠藏, 1772-1811)이 있었다. 그는 차를 잘 만들었으며 다산 정약용은 그에게 「걸명시(乞茗詩)」와 「걸명소(乞茗疏)」를 지어 보낸 일도 있다.

 

특히 1805년 4월에 정약용이 그에게 보낸 「혜장상인에게 차를 청하며 부치다(寄贈惠藏上人乞茗)」에 답한 편지가 있는데 이 편지에서 정약용은 백련사 서편의 석름봉(石廩峯)에서 좋은 차가 난다는 사실을 말한 뒤, 배쇄(焙曬 : 불에 덖어 햇볕에 말리는 일)를 법도에 따라 해서 우려냈을 때 맑은 빛깔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혜장은 답장에서 이미 4월도 지나 5월이 가까워 찻잎이 쇠어 차를 따기에 제철이 아님을 말하고, 그렇지만 정성껏 덖어서 볕에 잘 말려 괜찮은 차가 만들어지면 받들어 보내겠다고 하였으며, 제자인 수룡 색성(袖龍 賾性, 1777-?)도 정약용에게 차를 보낸 일이 있다.


그럼 아암 스님의 글씨 한 점을 살펴보자

 

 

《연명마힐(淵明摩詰)》, 종이에 먹, 28.5 x 96㎝, 개인 소장  

글 내용은 다음과 같다.

身在淵明記裏 신재연명기리      몸은 도연명의 글 속에
家居摩詰圖中 가거마힐도중    집은 왕유의 그림 가운데

 

작품의 오른쪽 윗 부분에는 <日出而作日入而息(일출이작일입이식)>이란 인장이, 왼쪽 아래에는

<兒嵒(아암)>이란 인장이 찍혀 있다

 

 

첫 머리의 인장은 ‘해 뜨면 나가 일하고, 해 지면 들어와 쉰다’는 뜻으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태평세월에 땅을 치며 노래했다는 「격양가(擊壤歌)」에 나오는 글귀이다.「격양가」는 중국 고대의 요 임금 때에 한 노인이 지은 것으로 전한다.

 


 

이 글은 순리에 따르면서, 다스림의 힘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정치라는 뜻이 담겨 있다.

<兒嵒(아암)>의 ‘嵒(암)’자는 ‘바위, 땅 이름’이란 뜻이 있는데, 인장을 새기거나 호를 쓸 때 ‘巖(암) 자와 함께 쓰며, 암자나 초막(草幕)을 뜻하는 ‘庵(암)’자를 바꿔 쓴 것으로 보인다.

 

아암의 글씨는 당시 호남 지방에서 유행하던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의 서풍을 따르고 있으며, 인장은 당시 정약용의 문하에서 전각을 했던 치원 황상(巵園 黃裳, 1788-1870)이 새긴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아암 혜장의 속성은 김, 초명은 팔득(八得), 자는 무진(無盡)이며, 호는 연파(蓮坡), 아암(兒庵)이다. 일찍이 대둔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변려문에 능하였으며, 저서에 『아암집』이 있다.

 

이 글귀는 몽인 정학교(夢人 丁學敎, 1832-1914)가 남긴 예서 대련도 있어, 19세기 도연명의 시문과 왕유의 남종 문인화에 대한 조선 학예인들의 관심을 살펴볼 수 있다.


 

 

정학교,《연명마힐(淵明摩詰)》대련, 종이에 먹, 각124.2 x 28.8㎝, 개인 소장

 

 

 

27. 남계우의  <樂琴書(낙금서)>, <窓分蕉綠(창분초록)> 

 

 

조선시대에 나비를  잘 그린 화가 가운데서도 일호 남계우(一濠 南啓宇, 1811-1890)는 단연 으뜸이다. 남계우의 본관은 의령(宜寧), 초명은 영시(永詩), 자는 일소(逸少), 호는 일호(一濠)이며, 서인 소론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 1629-1711)의 5대 후손이다.

 

그는 시와 격조 있는 문인화를 잘 했고 특히 나비 그림를 잘 그려 남나비[남접(南蝶)]라고 불리었다. 또한 전각을 잘하여 96방의 인장이 실린 『일호당도서기(一濠堂圖書記』를 남기고 있다. 먼저 그림을 살펴보자

 

 

《화접도(花蝶圖》, 종이에 채색, 167x21㎝, 개인 소장

 

왼쪽으로 빗겨 자란 연분홍빛 장미는 가냘픈 줄기지만 꽃봉오리는 소담스럽다. 그 아래 자줏빛  붓꽃은 잎새를 좌우로 가르고 하늘을 향해 꽃을 피웠다.

 

 흰나비는 장미에 앉으려고 날개를 접고 있고, 다른 두 마리는 그 아래 장미와 붓꽃을 향하고 있는 듯 하다.

 

맨 위의 호랑나비는 날개를 활짝 펼쳐 높푸른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다. 네 마리의 나비 모두 그 표정과 방향이 달라 그림이 살아 숨쉬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호랑나비》

 

일반적으로 남계우의 나비 그림은 맨 위에 나비에 관한 시나 글을 쓰고, 가운데에는 다양한 모습의 나비를 그리고 아래에는 바위와 꽃을 그리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청아한 글씨로 쓴 시와 글은 나비에 대한 많은 정보와 작가의 정감을 전해주는게 보통이다. 특히 그림에 맞는 시와 맑은 글씨, 정확한 관찰을 통한 사실적인 묘사, 섬세한 필선과 화려한 채색은 남계우의 나비 그림이 조선시대 최고임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그림이 담고 있는 뜻은 살펴보면, 나비는 목숨[壽(수)], 장미는 ‘청춘을 오래 간직한다’는 장춘(長春)이다. 붓꽃은 한자로 계손(溪蓀)이라고 하는데 ‘손을 잇는다’는 ‘계손(繼孫)’이란 뜻이 담겨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남계우의 나비 그림은 수명과 장수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음에는 틀림 없다.

화제를 살펴보자

 

 

이 화제 오른쪽 첫머리에 인장 두 방이 찍혀 있는데, 첫 번째는 <樂琴書(낙금서)>이고, 두 번째는 <窓分蕉綠(창분초록)>이다

 

 

<낙금서>는 중국 동진때 도연명의「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가져온 글귀이며,

 

 

<창분초록>의 ‘窗(창)’은 ‘窓(창)’ 자의 본 글자로, ‘창문이 파초의 초록을 나누다’라는 뜻인데, 중국 송나라 때 양만리(楊萬里, 1127-1206)의 시 「한가로이 사는 초여름 오후 잠에서 깨어 : 한거초하오수기(閒居初夏午睡起)」에서 가져온 말이다.

 

 

또한 이 두 방의 인장은 남계우가 남긴 긴 폭의 글씨 오른쪽 위 두 번째와 세 번째에도 똑 같이 찍혀 있어 참고가 된다.

 

 

《소동파 초입여산(蘇東坡 初入廬山)》, 종이에 먹, 27.3x310.5, 개인 소장

 

남계우 이전에도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1707-1769), 우봉 조희룡(又峰 趙熙龍, 1789-1866)이 초충과 나비 그림을 잘 그렸다.

 

또한 송석 이교익(松石 李敎翼, 1807-?)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남주원(南周元), 임당 백은배(琳塘 白殷培, 1820-?), 유리 항아리에 갖가지 나비를 넣고 관찰한 후 그렸다는 우관 고진승(藕館 高鎭升, 1822-?), 사호 송수면(沙湖 宋修勉, 1847-1916), 추범 서병건(秋帆 徐丙建,1850-?), 이당 이경승(怡堂 李絅承, 1862-1927), 김석희(金奭熙), 석하 정진철(石下 鄭鎭澈, 1908-1967) 등으로 나비 그림의 맥이 이어졌으며, 현대에는 정진철의 아들 석운 정은영(石雲 鄭恩泳, 1931-1990)이 그 마지막 전통을 이었다

 

 

28. 신윤복의 <胸中長有四時春(흉중장유사시춘)>

 

 

조선시대 풍속화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는 신윤복(申潤福, 1758-1826?)이 그린 <미인도(美人圖)>가 요즘 인기라고 한다. 이 그림은 물론 왕과 사대부를 그린 어진(御眞)이나 초상화도, 효녀와 열부 그리고 남편의 벼슬에 따라 작호(爵號)를 받은 여인도, 여염집 아낙네를 그린 것도 아니다.

 

 

미인도》, 비단에 담채, 114x45.5㎝, 간송미술관 소장

 

요즈음 눈으로 보아도 한 눈에 풍류를 파는 기생임을 알 수 있다. 멋을 위해 덧붙인 머리칼인 다리[가체(假髢)]와 살짝 푼 옷고름, 밑동이 짧은 삼회장 저고리와 은밀함이 넘쳐나는 한껏 부푼 치마, 초승달처럼 가는 눈썹, 그리움에 잠긴 듯 멍한 눈동자, 이슬이 맺힌 듯한 콧날, 빨간 앵두 입술, 흰 살결과 복사꽃 같은 볼, 가녀린 손과 살짝 내딛은 왼발은 요염하기 짝이 없다.

 

신분은 기생이지만, 뭇 사내들이 지분거려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만큼 새침한 표정이다. 

 

이 <미인도>의 주인공은 당시 한양 바닥의 내로라하는 풍류객들을 가슴 설레게 하던 여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림 왼쪽 위의 화제를 그림과 연관지어 읽어보면 이렇다.


 

 

반박(盤礡)은 ‘두 다리를 뻗고 앉다’는 뜻으로 '옷을 풀어 헤치고 두 다리를 뻗고 앉다' 라는 해의반박(解衣盤礴)에서 가져온 말이다. 이는 『장자(莊子)』의「전자방(田子方)」에 나오는데 내용은 이렇다.

 

 송나라 원군이 그림을 그리게 하였더니, 뭇 화공들이 몰려들어서 서로 읍(揖 :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올리고 허리를 공손히 구부렸다가 몸을 펴면서 손을 내리는 인사법)을 하고 서서 붓을 빨고 먹을 갈고 하는데, 반은 밖에 있었다.

 

그때 한 화공은 늦게 왔는데도 달려 오지도 않고 천천히 들어와, 읍을 하고는 서지도 않은 채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원군이 사람을 시켜 그를 살펴보게 했더니, 그는 옷을 벗고 두 다리를 쭉 뻗고 훌렁 벗은 채로 있었다. 원군이 말하기를 ‘됐다. 이 사람이 참다운 화공이다’라고 하였다.

 

 

 

그림 속에는 3개의 인장이 찍혀 있는데 화제 첫머리에는 <胸中長有四時春(흉중장유사시춘)>이라는 인장을 찍었고, 뒤에는 혜원이란 호 다음에 <申可權印(신가권인)>과 <時中(시중)>이란 인장을 찍었다

 

 

<흉중장유사시춘>은 ‘가슴 속엔 언제나 늘 봄같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중국 송나라때 장식(張栻, 1133-1180)의 시 「진택지의 봄날이란 절구 네수에 화답하다(和陳擇之四絶)」에서 가져온 말이다.

 

조선에서도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 성재 신익상(省齋 申翼相, 1634-1697), 옥동 이서(玉洞 李漵, 1662-?), 담인 신좌모(澹人 申佐模, 1799-1877) 등과 같은 문인들이 이 글귀가 들어간 시를 지었다.

 

이로 보면 그림과 화제, 인장이 한데 어우러진 즉, 시서화인(詩書畵印)이 딱 들어맞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가권’은 신윤복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는 자(字)로 덕여(德如), 입보(笠父)를 쓴 것으로 전하는데 이 작품에 나오는 인장 가운데 ‘시중’도 신윤복이 썼던 자로 생각된다.

 

군자는 중용(中庸)을 지키고, 소인은 이에 어긋난다는 관점에서 보면 때에 맞추어 중용을 실천한다는 시중(時中)이란 뜻으로 쓴 말일 것이다.

 

어느 소설에 신윤복이 등장한 뒤로 미술관은 이 작품을 보려는 관람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반가워할 일인지, 전염병같은 증후군인지, 감각적인 것을 좋아하는 현대의 흐름인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미술관에는 몇 시간씩 줄을 서서 밀치며 볼 정도로 관람객이 몰아 닥치는데, 고미술시장은 오늘도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다. <미인도> 속을 들춰보며 미술 시장의 현실을 곱씹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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