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장4

2017. 4. 19. 16:01서예일반

16. 정학교의 <以虛受人(이허수인)> 

 

 

 

괴석란(怪石蘭).괴석죽(怪石竹),종이에 수묵담채, 129.1x29.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세기 말에서 20세기초까지 활동한 서화가 가운데 몽인 정학교(夢人 丁學敎, 1832-1914)가 있다. 그는 글씨도 잘 썼지만 그림도 잘 그렸다.

 

담백하면서도 예리한 필치로 바위의 특성이 간결하게 포착한 개성적인 괴석도는 특히 유명하다. 그리고 전각(篆刻)에도 능했다.

 

정학교 특유의 괴석에 난과 대나무를 곁들여 그린 괴석란(怪石蘭)와 괴석죽(怪石竹)의 한 쌍으로 된 대련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정학교의 작품은 글씨도 그렇지만 그림도 위아래로 길며 또한 시원하면서도 산뜻한 필치가 특징이다. 대련 형식으로 된 이 그림에는 여러개의 인장이 찍혀 있다.

 

우선 괴석과 난을 그린 그림을 보면 화제 왼쪽에 <寉喬私印(학교사인)>과 <化慶(화경)>이란 인장이 찍혀 있고 또 왼쪽 모서리에 <以虛受人(이허수인)>이란 인장이 찍혀 있다.

 

그리고 괴석에 대나무를 곁들인 그림은 화제 아래에 ‘능숙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의 <非曰能之(비왈능지)> 인장이 그리고 왼쪽 모서리에 ‘스스로 즐기다’라는 의미의 <聊以自娛(요이자오)>란 인장이 찍혀 있다.

 

이 가운데 <이허수인>인장은 ‘마음을 비우고 사람을 받아들이다’라는 뜻으로 『서경(書經)』의「상서」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인장은 글자를 잘 모르면 읽기도 어렵지만 엉뚱하게 보고 풀이하는 경우도 있다

 

 

실수였는지 오세창의 『근역인수』에는 이 도장을 옮겨 실으면서 왼쪽으로 90도 틀어지게 실었다. 1968년 국회도서관에서 출간하면 석문(釋文)을 할 때 몽중몽인(夢中夢人), 즉 ‘꿈 가운데서 꿈꾸는 사람’이란 뜻으로 읽어 놓았다.

 

몽인(夢人)이란 호를 쓴 정학교에게는 관서속에 자신을 ‘몽중몽인’이라고 표현한 작품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인장은 몽인이 이(以)자가 위쪽으로 향하게 똑바로 찍은 것으로, <이허수인>으로 읽어야 한다.

 

화제를 살펴보자. 괴석란 그림의 화제는 은은한 향기를 자랑하는 난을 읊고 있고, 괴석죽 그림의 화제는 송나라의 미불(米芾)이 바위 앞에서 절을 했다는 고사를 떠오르게 한다. 화제를 잘 읽어보면 그림의 정취가 가슴 속에 스미는 듯하다.

 

使我臨風重懷想 사아임풍중회상
幽蘭嘉禾共婆娑 유란가화공파사

내가 바람결에 서서 거듭 그리움과 상념에 잠기는 것은
그윽한 향의 난과 알차게 여문 벼가 함께 가벼이 나부끼는 모습 때문이다.

千載風流誰可擬 천재풍류수가의
令人猛憶米南宮 영인맹억미남궁

천년의 풍류를 누구와 비길 수 있을까마는
사람들에게 미남궁(미불)을 몹시 그리게 하네.

 

추사 김정희도 우봉 조희룡도 때에 따라 아호와 당호를 다양하게 썼지만, 정학교는 동음이자를 써서 이름과 자호를 여러 가지로 썼다.

 

예를 들면 이름 정학교를 丁寉喬(정학교)라고도 썼으며 자성(子聖) 이외의 자였던 화경(化境)에 대해서도 化徑, 華逕, 華徑, 化慶 등과 같이 다양하게 표기했다. 호는 몽인(夢人), 몽중몽인(夢中夢人), 향수(香壽), 당호는 장춘관(長春館) 같은 것을 썼다.

그림 뿐아니라 글씨도 잘 쓴 정학교는 요즈음 논란이 되고 있는 광화문(光化門)의 편액을 썼다고 전한다. 그는 매화와 글씨에 능했던 학수(學秀)의 형이며 또한 우향 정대유(又香 丁大有, 1852-1927)의 아버지이다.

 

특히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과 함께 글이 약했던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1897)의 작품에 화제를 대신 쓴 일은 너무도 유명하다.

 

 

17. 변지순의 <山巍巍水洋洋(산외외수양양)

 

 

18세기 말에서 19세기 후반에 걸쳐 살았던 조선시대의 문인과 서화가 가운데에는 생년과 몰년 그리고 본관 등은 알려지지 않은 채 작품과 단편적인 기록만 전하는 작가들이 많이 있다. 그 중 해부 변지순(海夫 卞持淳, 18C말-19C중반)도 마찬가지이다.

 

 

산수도(山水圖), 종이에 수묵담채, 106.9x60.9㎝, 개인 소장

 

먼저 그의 그림을 살펴보자. 나지막한 산자락 물가, 게딱지처럼 붙은 띠집을 향해 우산을 쓴 사람이 흙다리를 건너고 있다.

 

산은 물안개가 서렸는지 등성이가 희미하고, 배는 비를 피하려는 듯 물가에 바짝 붙여 놓았다. 바위와 물풀, 나무의 줄기 모두 삼가지를 쭉쭉 찢어 놓은 듯 까슬한 필치로 그렸다. 맑은 먹과 짙은 먹을 아우르고, 물기 먹은 수양버들을 담청으로 표현하여 물가의 풍경을 잘 표현하였다.


예전부터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했는데 화제(畵題)를 살펴보자.

 

岸柳靑靑 유안청청
江水漫漫 강수만만
淡烟微雨 담연미우
不甚分明 불심분명
朝鮮 海夫 조선 해부

언덕 버들 푸릇푸릇한데,
강물은 출렁출렁.
옅은 안개 가랑비가
심히 분명하지 않은가?

 

물기 머금어 담록(淡綠)으로 빛나는 버들가지 위로 바람이 불어오니 물결은 출렁이고 안개는 산을 휘감아 돈다. 또 안개인지 이슬비인지 산과 들을 가르고 어부는 비바람을 거슬러 집으로 돌아가는 정감어린 풍경이다.

 

화제는 바로 그림을 이야기 하고 그림은 바로 이같은 시경(詩境)을 나타내고 있으니, 바로 이는 시와 그림(詩畵)이 하나가 된 경지라 할 수 있다.

 

 

 

18. 이명기의 <秋空一鶴(추공일학)> <成之(성지)>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겉모습을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사람의 정신과 내면의 깊이까지 담아내는 것을 전신사조(傳神寫照)라고 한다.

 

이는 동양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 가장 중시하던 가치이다. 이는 중국 동진(東晋)때 고개지(顧愷之)가 말한 ‘형상으로써 정신을 그린다’는 이형사신(以形寫神)과 같은 뜻이다.

 

 

<채제공 초상 시복본(蔡濟恭 肖像 時服本>, 1792년경,
비단에 채색, 120x79.8㎝, 수원시(보물 제 1477호)

 

화산관 이명기(華山館 李命基, 1756~1802이후)는 조선 후기에 초상화를 잘 그렸던 화가로 본관은 개성이며, 아버지 이종수(李宗秀)와 장인 복헌 김응환(復軒 金應煥, 1742~1789)도 당대의 이름난 화원 화가였다.

 

그는 초상화의 명수였지만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산수, 초충, 채접(彩蝶: 채색 나비)도 잘 그렸다. 산수는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은데 그의 작품 가운데《초당독서도(草堂讀書圖)》라는 그림을 살펴보자.

 

 

<초당독서도(草堂讀書圖)>, 종이에 수묵담채,
103.8x48.5㎝,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깎아지른 벼랑 아래 바위에 기대 지은 띠집이 있다. 소나무는 바위틈에 뿌리를 내렸지만, 솔잎은 짙푸르고 가지는 척척 휘늘어져 훤칠하다.

 

띠집은 옆으로 큰 창을 냈고 창에는 곱게 접은 막을 걷어 올렸다. 옆지붕 처마밑 박공(牔栱)을 △ 모양으로 트고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바람이며 별빛, 달빛이 들도록 했다.

 

처마 모서리엔 비나 눈이 오면 그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귀기둥(우주[隅柱])을 세웠고, 뜰 앞 너머엔 거센 물살이 휘도는지 난간을 두었다.

 

띠집 안엔 건(巾)을 쓴 선비가 책을 읽다가 조는지 생각에 잠겼는지 눈을 내리감고 있으며, 문밖 아이는 손을 모으고 쪼그린 채 화로 곁에서 물끓는 소리에 잠겨 있다.

 

초상화를 그릴 때와 달리 거침없는 필선으로 쓱쓱 그어 바위와 띠집과 소나무를 이루고, 그 위에 옅은 청록(靑綠)을 얹어 선비가 띠집에서 글을 읽는 맑디맑은 정경을 잘 표현하였다.


화제를 살펴보면 이렇다.

讀書多年, 種松皆作老龍鱗 독서다년, 종송개작노용린
글 읽은지 여러 해, 어린 소나무 모두 용비늘처럼 늙었네.

이 글귀는 당나라 왕유(王維, 699?-759)의 시 ‘봄날 배적과 신창을 지나며, 여일인을 찾았는데 만나지 못하다(春日與裴迪過新昌訪呂逸人不遇)’ 가운데 ‘지게문 닫고 글쓴 지 여러 해, 어린 소나무 모두 용비늘처럼 늙었네.(閉户著書多歲月,種松皆老作龍鳞)’라는 구절의 앞 구를 바꿔 쓴 것이다

 

 

이 화제를 쓴 첫 머리에 <秋空一鶴(추공일학)> 인장이 찍혀 있고, ‘華山館(화산관)’이라고 호를 쓴 아래에 <成之(성지)>란 인장이 찍혀 있다.

 

<추공일학>은 ‘가을 하늘을 나는 한 마리 학’이란 뜻인데, 그림의 정경과 어울리는 인장이다. 그렇다면 <成之>란 인장은 무엇일까?

 

조선 후기 특히 18, 19세기에 서화에 인장을 찍는 방법은 시나 좋은 글귀를 새긴 사구인(詞句印)을 화제의 머리에 두인(頭印)으로, 성명인(姓名印)과 자호인(字號印), 본관인(本貫印)을 성명이나 자호의 아래의 찍는 것이 정형화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그 동안 이명기의 자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성지> 인장은 마땅히 이명기의 자인(字印)이어야 한다.

 

‘성지(成之)’는 ‘무엇을 이루다’라는 뜻으로, 이성록(李成祿, 1559-?)이나 청당 민성호(靑棠 閔晟鎬, 1810-?) 등 여러 사람들이 자(字)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서화에 찍힌 인장을 통해 문헌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작가의 별호(別號)나 자(字), 본관(本貫) 등을 규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화 속의 인장은 작지만 사료(史料)로서의 의미가 크다.

 

이명기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1791년 정조 어진인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 주관화사(主管畵師)로 활약하였고,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십우헌 서직수(十友軒 徐直修, 1735-?)의 초상화는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와 함께 그리기도 하는 등, 임금뿐 아니라 역대 대신과 정승들의 영정(影幀)이나 초상화를 많이 모사하였다.

 

특히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세 번의 귀양살이 중에 쓴 시를 경상북도 장기(長鬐)에서 <삼천첩(三遷帖)>으로 꾸미면서, 앞뒤에 있는 초충도 2폭은 이명기가 그린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는 산수, 인물, 초충, 채접(彩蝶)을 모두 잘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상의 평가는 산수화는 초상화에 미치지 못하고, 그림의 인물과 바위, 필법 등이 김홍도의 화풍을 많이 따랐다고 평가하고 있다.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 1814-1888)이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신태(神態: 초상)를 잘 그린 화가로 이명기를 앞에 두고 김홍도, 김건종(金健鍾, 1781-1841), 패인 이팔룡(浿人 李八龍, ?-?)을 든 것으로 보면, 간접적으로 그가 당시 초상화의 최고 명수로 평가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 김양기의 <十日畵一水(십일화일수)>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인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에겐 마흔 여덟살이 넘어 얻은 늦둥이가 있었다. 1791년 원유관(遠遊冠)을 쓴 정조대왕의 어진(御眞) 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1792년부터 1795년까지 충북 연풍현감(延豊 縣監, 지금의 괴산군 연풍면과 장연면)으로 재직할 때, 조령산 상암사에 있는 불상 개금과 불화 조성에 큰 시주를 하고 치성을 드려 얻은 아들인데, 바로 그가 긍원 김양기(肯園 金良驥, 1792 또는 1793-?)이다.

 

이 아들의 첫 이름, 즉 아명(兒名)은 ‘연풍 현감을 할 때 얻은 복록(福祿)’이란 뜻으로 연록(延祿)이라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먼저 그림을 살펴보자.

 

 

《음중팔선도(飮中八仙圖) : 소진(蘇晋)》19C 전반,
종이에 수묵담채, 99x47.5㎝, 개인소장

 

왼쪽을 보면, 가을인지 붉은 이파리 몇을 단 키 큰 나무 아래 낮은 평상을 놓고 민가리개를 둘러 쳤다. 상 위에는 두루마리 셋을 예쁘게 매듭지어 놓고, 왼쪽에는 지통(紙筒)을 오른쪽에는 손잡이가 있는 여러 단의 합(盒)이 놓여있다.

 

술이 거나하면 누우려는 것인지 앞에는 목침(木枕) 비슷한 것도 있다.시녀(侍女)는 뒷편에서 술병을 들고 서있고, 두 아이는 손잡이 달린 항아리에 술을 붓고 있다. 한 가운데 선비는 의자에 앉아 글을 읽다가 술기운에 스르륵 잠이 든 것인지, 오른 다리는 슬쩍 올리고 온갖 시름을 내려놓은 듯 선경(禪境)에 들었다.

 

그 앞으로 구멍이 뚫리고 기묘한 형상으로 주름진 괴석이 있고 옆엔 파초가 잎을 펼치고 있다.

오른쪽의 대(臺)에 얹힌 틀에는 연화좌대(蓮花座臺) 위에서 대중에게 연꽃을 보이는 수불(繡佛 : 수 놓은 부처)이 모셔져 있다.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 깨달음을 얻게 하는 염화미소(拈華微笑)를 행하는 모습인데, 그 앞 작은 탁자엔 향로와 잔이 놓여 있어 예불을 위해 마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림의 내용은 이렇지만 이것만으론 무엇을 그린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화제를 잘 살펴보면 그 실마리가 풀릴 듯도 하다.

 

蘇晋長齋繡佛前 소진장재수불전
醉中往往受逃禪 취중생생수도선
肯園                 긍원

소진(蘇晋)은 오랫동안 수 놓은 부처[수불(繡佛)] 앞에서,
술 취해 가끔 선(禪)으로 달아나길 좋아했다.

 

이 시구는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당나라 두보(杜甫, 712-770)의「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서 ‘소진(蘇晋)’을 읊은 부분으로 ‘수 놓은 부처 앞에서 술 취해 가끔 선(禪)으로 달아나길 좋아했다’는 시구의 내용이 그림과 일치한다.

 

이런 종류의 그림을 일반적으로 고사인물도(高士人物圖)라고 하는데 그림의 내용과 화제를 잘 살펴보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그림을 눈으로만 보는 간화(看畵)가 아니라 그림을 읽는다는 ‘독화(讀畵)’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소재에 관련된 화제를 쓴 첫 머리에 <十日畵一水(십일화일수)> 인장이 찍혀 있고, ‘肯園(긍원)’이라고 호를 쓴 아래에는 <金學驥印(김학기인)>과 <肯園(긍원)>의 인장 2방이 찍혀 있다.

 

<십일화일수>는 두보가 지은 시 「왕재가 그린 산수화에 재미로 지은 노래(戱題王宰畵山水圖歌)」의 첫 머리에 나오는 ‘십일화일수 오일화일석(十日畵一水,五日畵一石)’에서 가져온 말이다.

 

‘열흘에 물 한 줄기를 그리고, 닷새에 산 하나 그리다’라는 뜻으로 그림을 그릴 때 정밀한 관찰과 운필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두보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장 애송하던 당나라 시인으로  유일하게 1481년 한글로 번역한『두시언해(杜詩諺解)』가 간행되었다. 김양기가 그린 이 그림의 내용과 인장 글귀(印文)의 내용을 통해서도 두보 시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애호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십일화일수>라는 글귀는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8-1893) 등과 같은 19세기 학예인들이 즐겨 사용한 인문(印文) 가운데 하나였다

 

 

위대한 화가 김홍도의 아들 김양기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변변하게 알려진 것이 없어 궁금증만 더하고, 또 부친의 작품과 수준 차이가 심해 쉽게 폄하되기도 한다. 그는 아버지의 화풍을 이어 산수, 화조, 풍속화 등을 잘 그렸지만 세상은 아버지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흔히 세간에 ‘아비만한 자식은 없다’는 말처럼 워낙 부친이 거장(巨匠)이었기에 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던 듯도 하다.

 

그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천리(千里), 호는 긍원(肯園), 낭곡(浪谷)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그림으로 전하는 많은 작품에는 이런저런 다양한 호(號)를 사용하고 있어 혼란을 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을 통해 어느 때인지 김양기가  ‘김학기(金學驥)’란 다른 이름을 사용했음은 틀림없다. 
 
김양기에 대한 기록이 워낙 없는데, 다행히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에는 김양기가 청나라 주학년(朱鶴年, 1760-1834)의 작품을 본뜬 그림에 대해 쓴 시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김정희 문하에 출입하며 가르침을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走題金畵史千里 仿朱野雲荷鴨圖便面 주제김화사천리 방주야운하압도편면

野雲原筆頗瀟爽  야운원필파소상
花葉相當鳧則兩  화엽상당부즉량
千里巧思刪汰之  천리교사산태지
鳧一葉一還也奇  부일엽일환야기 
雖是無花但有葉  수시무화단유엽
更覺無花格還別  갱각무화격환별
書龕八萬四千偈  서감팔만사천게
卽薪即火拈眞諦  즉신즉화염진체

 

김화사 천리(김양기)가 주야운(주학년)의 <하압도>를 본뜬 편면에 주제하다.

주야운의 그림은 조촐하고 상쾌하여,
꽃과 잎이 마주 보고 오리도 두 마린데.
김천리는 거기서 또 절반을 빼버리고,
오리 하나 잎 하나라 도리어 기이하네.
이게 비록 꽃은 없고 잎만 붙었지만,
다시금 생각하니 꽃 없는 게 별격이네.
서감의 팔만사천 게어(偈語)를 벌여놓고,
신화(薪火)에 나아가서 진체(진실무망)를 찾았네.

 

김양기가 음중팔선 중 한 사람인 소진(蘇晋)을 그린 이 그림은 그가 애용하던 인장 <십일화일수> 이외에도,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그의 또 다른 이름 ‘김학기(金學驥)’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는 정보를 담고 있어 김양기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 정수영의 <所好者道也(소호자도야)>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로 기행(紀行)과 탐승(探勝)을 하며 시서화로 일생을 보냈던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이 소나무 두 그루를 그린 작품이 있다. 이 그림은 《지우재묘묵첩(之又齋妙墨帖)》에 들어있는 여러 점 가운데 한 폭으로 조선시대 문인서화가들이 그림을 어떤 방법으로 익혔는지 살펴볼 수 작품이라 흥미롭다.

 

 

쌍송도(雙松圖), 종이에 수묵담채, 24.8x16.3㎝,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지우재묵묘첩》

 

먼저 그림부터 보면, 꾸불꾸불한 소나무 두 그루를 엇갈리게 그렸는데 마치 두 마리 용이 다투듯이 하늘로 오르는 느낌이 나는 그림이다. 또 깔끔한 필선과 맑고 산뜻한 채색에 안정된 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청나라 때 편찬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의 「수보(樹譜)」가운데 있는 북송 때 화가 이성(李成, 919-967)의 그림을 본떠 그리고 거기에 담채를 얹은 작품이다.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화제만 없을 뿐 구도와 수지법(樹枝法) 등에서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의 「수보(樹譜)

 

화제의 내용은 이렇다.

李營丘松, 多作盤結, 如龍蟠鳳翥
이영구송 다작반결 여용반봉저

이영구(이성)의 소나무는 서리서리 얽혔으며,
용이 서리고 봉황이 날아오르는 것 같다.

 

또한 같은 화첩에 들어있는 작품에 ‘뜻으로 당시화첩을 임모했다(意臨唐詩畵帖)’고 한 것으로 보면, 정수영이 자신만의 거칠고 구불구불한 특유의 실경산수를 이루기 전에 중국 화보를 통해 그림을 익히던 시기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조선시대 화가들은 『개자원화전』이나『고씨화보(顧氏畵譜)』, 『당시화보』 등을 통해 화의(畵意)뿐만 아니라 시의(詩意)를 익혔다.

 

특히 정수영은 그림마다 각기 다른 많은 인장을 사용한 작가로 유명한데, 이 작품에는 작품에 비해 조금 크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것이 도이다’라는 뜻의 <所好者道也(소호자도야)>라는 인장을 찍었다. 이 글귀는『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에서 포정(庖丁)이 소를 잡을 때 문혜왕의 물음에 답한 글에서 가져온 말이다

 

 

문혜왕이 “훌륭하다. 어떻게 하여 재주가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가 있는가?” 라고 묻자,

포정은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로 재주보다 앞서는 것입니다.(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처음 제가 소를 잡았을 때는 보이는 것이 모두 소였습니다.

그러나 삼 년 뒤에는 완전한 소가 보이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정신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은 멈추고 정신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천연의 조리를 따라 틈과 틈을 가르고, 큰 구멍을 따라 칼을 찌릅니다. 소의 본래 구조에 따라 칼을 쓰게 되어 힘줄이나 질긴 근육에 칼이 닿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 큰 뼈에 칼이 닿는 일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는 ‘나와 대상의 구분없이 자연의 원리를 따르다’ 또는 ‘순리에 따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정수영의 초명은 수대(遂大), 자는 군방(君芳),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조선 초기의 문신이었던 학역재 정인지(學易齋 鄭麟趾, 1396-1478)의 후손으로, 지리학에 정통한 실학자로『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제작한 농포자 정상기(農圃子 鄭尙驥)의 증손자이다.

 

그는 대담한 구성과 필치로 개성이 강한 조선적인 화경(畵境)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작품에 다양한 인장을 사용해 그림의 풍격을 한층 끌어올린 작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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