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장2

2017. 4. 19. 15:58서예일반

6. 신윤복, 누워서 구름을 보다 <臥看雲(와간운)>

 

 

두 마리 수탉이 서로의 움직임을 살피는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와 긍재 김득신을 이어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1826?)의 작품이다.

 

왼쪽의 한 마리는 팔색조만큼이나 화려한 깃털을 뽐내며, 붉은 벼슬을 갓처럼 쓰고 다리도 곧추세우고 있어 당당하지만, 오른 쪽 아래에 있는 또 한 마리의 수탉은 깃털이 검붉고 푸르뎅뎅하며, 두려움 때문인지 상대방의 동태를 살피는 것인지 고개를 떨군 채 외로 꼬고 있다.

 

또한 바닥의 흙모래가 어지러이 흩어진 모습은 두 마리의 수탉이 상대방을 살피느라 빙빙 돌다 만들어낸 자취인 듯하다

 

 

《산수도》종이에 수묵담채ㅣ 30.0X42.8㎝ㅣ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혜원은 화원 신한평의 아들로 그의 그림은 소재 선정과 구성, 인물의 포착과 표현, 섬세한 필선과 맑은 채색이 돋보이며, 남녀간의 애정을 은밀하게 다룬 세련된 감각의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그러나 이 그림은 섬세하고 정교한 묘사보다는 빠르고 거친 붓질로 수탉 두 마리가 만들어내는 불꽃 튀기는 긴장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혜원은 풍속화를 잘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그림을 통해서 화조화에도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탉은 큰 닭 또는 무리의 우두머리란 뜻에서 장닭이라고 하고 대계(大鷄)라고도 쓴다. 또 수탉 정수리에 돋은 벼슬이 마치 관을 쓴 모습처럼 보여 벼슬한다는 뜻으로 관계(冠鷄) 혹은 공계(公鷄)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수탉이 우는 소리(公鳴, 공명)를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친다는 공명(功名,공명)과 같은 뜻으로 읽었다. 또 대계(大鷄)의 ‘계(鷄)’ 자는 중국어에서 ‘길(吉)’ 자와 발음이 지(ji)로 같아 대길(大吉)의 뜻으로 읽는다. 그래서 수탉을 그린 그림은 ‘공명도(功名圖)’ 또는 ‘대길도(大吉圖)’가 된다

 

이 그림은 두 마리의 용맹스런 수탉이 다투는 모양을 그려내고 있는데, 수탉 두 마리가 서로 싸우는 투계도는 웅계(雄鷄)의 ‘수컷 웅(雄)’자를 가져와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함을 나타내는 영웅투지(英雄鬪志)로 읽는다. 이러한 해석은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닭의 용기를 영웅의 투지로 보는 데서 온 것이다.

 

또한 닭은 머리 위의 벼슬을 관(冠)으로 보아 문(文)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무(武)로, 적과 매섭게 싸우는 것을 용(勇)으로, 모이를 보면 소리로 무리를 부르는 것을 인(仁)으로, 새벽이면 때맞춰 울어 하루를 여는 것을 신(信)으로 보아 다섯 가지 덕을 갖춘 오덕군자(五德君子)라고도 부른다.

 

먼저 이 그림 오른쪽 위에 쓰여 있는 화제를 읽어보자.

고상한 행동은 교만과 허세가 있는 듯하고,
곁에서 엿보는 모습은 위태로움을 살피는 것 같네.

高行若矜豪 側睨如伺殆 愈 扶嶭居士
(고행약긍호 측예여사태 유 부알거사)


*愈는 이 글귀가 송나라 시인 한유(韓愈)의「투계(鬪鷄)」에서 온 것임을 말해 준다.

시선을 왼쪽으로 옮겨 낙관(落款)을 살펴보자.

무진년(1808년) 중동(음력 11월) 혜원 [와간운]
(戊辰 仲冬 蕙園) [臥看雲]

 

이 그림에는 혜원(蕙園)이란 서명은 있지만, 일반적으로 신윤복이 사용하던 <蕙園(혜원)>, <申潤福印(신윤복인)>, <笠父(입보)>란 인장은 없고, <臥看雲(와간운)>이란 인장이 찍혀 있다.

 

이 <와간운> 인장은 혜원의 <산수도>나 길쌈하는 내용이 담긴 <풍속도> 등에도 보이는 인장이므로 이 작품이 신윤복 작품임을 증명해준다.

 

또 <와운간>인장은 그의 스승이었던 단원 김홍도도 거의 유사한 인장을 사용했다. 여기에 쓰인 ‘이를 운(云)’자는 전서(篆書)에서 ‘구름 운(雲)’ 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臥看雲

臥看雲

申潤福印

笠父

一片雲

김홍도 화
유한지 제
신윤복

 

 

이 글귀는 당나라 왕유의 시「종남산 별장에서(終南別業, 종남별업)」의 한 구절을 확장하여 쓴 것이다.

가다 물 다 한 곳에 이르기도 하고,
앉아 구름이 이는 때를 보기도 하네.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행도수궁처 좌간운기시)

<와간운>은 여유롭게 누워서 떠가는 구름을 본다는 뜻으로, 누워서 그림을 보며 즐기는 와유(臥遊)의 느낌이 드는 말이다.

 

또 일편운(一片雲: 한 조각 구름), 취와일편운(醉臥一片雲: 술에 취해 한 조각 구름 위에 눕다), 자이백운(自怡白雲: 흰 구름이 이는 것을 보며 스스로 기뻐하다)과 모두 함축적 의미에서 뜻이 통하는 말이다.

 

이처럼 작품에 찍혀 있는 본관인(本貫印), 성명인(姓名印), 자호인(字號印), 당호인(堂號印), 별호인(別號印), 봉함인(封緘印), 감장인(鑑藏印)뿐만 아니라, 좋은 글귀나 시를 새긴 사구인(詞句印)을 통해서도 작가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그만큼 인장은 작품을 감상하고 진위를 감정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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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재 신한평(逸齋申漢枰, 1726-?)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
긍재 김득신(兢齋 金得臣, 1754-1822)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1826?)
기원 유한지(綺園 兪漢芝, 1760-1834)
왕유(王維, 자는 마힐(摩詰), 699?-759)
한유(韓愈, 자는 퇴지(退之), 768-824)

* 본관인(本貫印) : 자신의 시조의 터전인 본관[貫鄕, 관향]을 새긴 인장을 말한다.,
* 성명인(姓名印) : 가계(家系)를 나타내는 ‘성’과 개인 이름인 ‘명’을 새긴 인장을 말한다.
* 자호인(字號印) : 조선시대에는 보통 결혼 전인 15∼20세 즈음에 오늘날의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冠禮)를 치루고 집안 어른들이 내려주는 이름을 ‘자’라고 하고, 학자와 문인, 서화

                                가 등이 아취를 더 하기 위해 쓰는 이름을 ‘아호(雅號)’ 또는 ‘호’라고 한다. 이

                                런 ‘자’나 ‘호’를 새긴 인장을 말한다.
* 당호인(堂號印) : 자신의 사는 곳이나 서재에 아취를 더하기 위하여 붙인 이름을 새긴 인장을 말한다.
* 별호인(別號印) : 주로 쓴 ‘호’ 이외에 상황과 흥취에 따라 다양하게 쓴 다른 ‘호’를 새긴인장을 말한다.
* 사구인(詞句印) : 좋은 글귀나 시 등을 새긴 인장을 말한다.
* 봉함인(封緘印) : 편지를 쓰고 봉투를 붙이는 부분에 찍는 인장을 말한다.
* 감장인(鑑藏印) : 작품을 감상하거나 소장한 내력을 새긴 인장을 말한다.

 

 

7. 허련: 궁궐에서 임금을 모시다 <祗侯內庭(지후내정)>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8-1893)은 진돗개로 유명한 전라남도의 외딴 섬 진도 출신으로 1838년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에게 가르침을 받은 19세기의 남종 문인화의 거장이다.


허련은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세차례나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며, 추사는 “그 사람됨이 매우 좋으며, 화법(畵法)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루한 습관을 떨쳐 버렸고, 압록강 동쪽에는 이런 작품이 없을 것”(『완당선생전집』)이라는 평가를 하였다.


이러한 평가는《세한도》를 그려 준 이상적과 마찬가지로 의리를 바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 제주의 서쪽 끝 대정 땅까지 방문하여 스승을 극진히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제자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허련은 조선 회화사상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자일 뿐만 아니라, 19세기 기록문학가로서 자신의 삶과 학예인과의 교류를 담은 『소치실록(小癡實錄)』, 『소치묵연(小癡墨緣)』등을 남기고 있다.

 

그 글을 보면 그가 1849년 음력 정월(1월) 보름날 창덕궁(昌德宮) 낙선재(樂善齋)에 들어가 헌종대왕 앞에서 임금이 쓰는 벼루에 먹을 갈아 손가락끝[지두(指頭)]으로 부채에 《매화도(梅花圖)》를 그리고, 황공망의 《산수도》를 감상한 후 소식의 작품 첩 끝에《고목죽석도(枯木竹石圖)》를 그린 내용이 실려 있다. 또한 허련은 헌종대왕으로부터 『시법입문(詩法入門)』이란 책을 받았다.


평민이나 다름없이 된 궁벽한 집안의 섬사람으로서 임금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서화를 품평한 일은 얼마나 가슴 뛰고 영광된 일이었을까?

 

 

허련 필《무량수》 1863 종이에 먹ㅣ 127.6X70.5㎝ㅣ개인소장

 

그런 소치가 63살 때, 그림이 아닌 《무량수(無量壽)》라고 크게 쓴 글씨를 무위라는 스님에게 준 일이 있다.

 

이 작품은 추사가 쓴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無量壽閣)》을 본떠 쓴 글씨로 좌우에는 단정한 맛이 나는 필치로 무위 스님에게 써준 내력을 적어 놓았다.

 

그런데 여기에 14년 전 궁중에서 임금을 모셨던 일화를 증언하는 인장이 찍혀 있다. 우선 글씨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추사 김정희필《무량수각》 1840 | 탁본| 원본 대흥사 소장

 

<祗侯內庭(지후내정)>

無量壽
무량수

무위 스님이 스승을 지극 정성으로 섬긴다고 하여
이 글씨를 써주니 아침저녁으로 축원하기 바란다.
계해년 7월에 소치

 

無爲事其師 極盡誠敬 書此贈之 爲昕夕念祝
癸亥七月 小癡老夫 <許鍊之印)> <小癡>

무위사기사 극진성경 서차증지 위흔석념축
계해7월 소치노부 <허련지인><소치>

 

여기에 나오는 계해년은 1863년으로 그의 나이 56살 때이다. 이 작품의 첫머리에 찍힌 <지후내정> 인장을 말 그대로 풀이하면, 지후는 ‘삼가 어른을 모시어 시중을 들다’는 의미이며 내정은 ‘궁궐 안에서 임금이 일상생활을 하던 곳’을 가리킨다. 즉 ‘궁궐에서 임금을 모시다’라는 뜻이다.

 

허련은 이 작은 인장 하나를 통해 자신의 전기 기록과 딱 들어맞는 생생한 역사적 사실과 감동을 오늘에 전하고 있다.


특히 이 인장은 서화 두루마리를 엇갈려 마는 모습을 본떠 특이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한 때 그가 사용한 <장작계산주(長作溪山主)>라는 인장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 <지후내정>에서 ‘벼 지(秪)’ 자처럼 보이는데 마땅히 ‘공경할 지(祗)’자로 써야 한다.

 

長作渓山主          小癡


      許鍊之印

 <지후내정> 인장은 또 다른 예서 작품과 산수화첩인《연운공양(烟雲供養)》에도 보인다.(烟자 오른쪽 위에 찍혀 있다) 그리고 《무량수》글씨에 함께 찍혀 있는 <허련지인>과 <소치)> 인장은 그가 47살 되던 1854년 즈음부터 80세때인 1887년까지, 그러니까 가장 오랜 기간 그리고 가장 많이 사용한 인장이다.

 

 

《연운공양첩》종이에 수묵담채ㅣ 26x31.8㎝ㅣ 개인소장

 

여기에 나오는 무위 스님은 대흥사에서 초의 선사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초의 선사가 범어로 써 준 작품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무위 안인(安忍) 스님의 속성은 김(金)씨로 1831년 16세에 두륜산 대흥사에서 출가했으며 기억력이 뛰어나 수천 수의 게송(偈頌)을 외우고 글씨도 잘 썼다고 한다.


허련이 무위 스님에게 써준 ‘무량수’란 불교에서 아미타불을 가리키며, 아미타는 산스크리트어로 ‘무한한 수명’을 뜻하는 아미타유 또는 ‘무한한 광명“을 가리키는 아미타브하에서 온 말로 소리로는 아미타(阿彌陀), 뜻으로는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이라 풀이한다.

 

아미타불은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바람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뜻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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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 1804-1865)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8~1893)
무위 안인(無爲 安忍, 1816-1888)
헌종대왕(憲宗大王, 1827-1849)
황공망(黃公望, 호는 대치(大痴) 자는 자구(子久), 1269~1354)

 

 

 

8. 김홍도, 얼음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 <冰心(빙심)>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종이에 수묵담채ㅣ 27.9X37.0㎝ㅣ 개인소장

 

두루마기를 걸친 채 망건 위에 성긴 머리칼을 겨우 틀어 올려 상투를 지었다. 그 위에 네모반듯한 사방관을 쓰고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오른발 위에 왼발을 얹어 놓고 줄이 넷인 당비파(唐琵琶)를 타고 있는데 맨발이다. 스스로 연주하는 가락에 빠졌는지 눈동자의 초점이 가운데로 몰렸지만 이미 자신조차 잊은 듯 몰아지경이다.

 

오른쪽엔 가까운 곳으로부터 포갑을 씌운 책과 그림을 그려 놓은 듯한 두루마리 또는 빈 종이를 기대 놓았다. 또 그 앞쪽에는 중국 가요(哥窯)에서 구운 것인지, 금이 간 듯 구워낸 귀가 달린 항아리와 그 곁엔 향로 또는 세 발 달린 솥과 그 앞쪽에는 불로초라 불리는 영지(靈芝)와 서화 족자가 꽂힌 나팔꽃 봉오리 모양의 은나라 때의 술잔인 고(觚) 또는 화병이 있다.

 

그 둘레에는 한 곡 타고 난 뒤 파초 잎에 시 라도 한 수를 쓰려는지 붓과 먹이 얹힌 벼루가 있으며, 왼쪽 뒤에는 풍류를 돋우기 위해 목을 축이려는지 술 또는 물이 담긴 호리병이 있다.

 

또 왼쪽 아래를 가로 질러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고 밖으로는 시비를 단 칼에 자르려는 의지의 표현인지 칼이 놓여 있으며, 비파를 타는 것이 싫증나면 타는 악기에서 부는 악기로 풍류를 바꾸려는지 생황(笙篁)이 있다.

 

이 그림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문방사우와 골동을 배치하고, 빠른 붓질에 엷은 채색을 곁들인 아취가 물씬 풍겨나는 그림이다.

 

 

김홍도,《백매도(白梅圖)》

 

이 그림은 3천냥의 그림 값을 받아 2천냥으로 매화분(梅花盆)을 사고 8백냥으로 술을 사 친구들과 매화를 감상했다는 단원의 삶을 보여주는 자화상으로 볼 수도 있다. 아니면 18, 19세기에 광풍처럼 몰아친 문인들의 서화골동 수집의 단면을 보여주는 그림으로도 볼 수 있다. 제시(題詩)를 살펴보자.

 

<氷心(빙심)>
종이 창 흙으로 지은 집, 한 삶 벼슬 없는 선비로, 그 안에서 시를 읊으리.
紙窓土壁, 終身布衣, 嘯詠其中 檀園
(지창토벽, 종신포의, 소영기중 단원)
<金弘道(김홍도)>

 

이것은 명나라의 진계유(陳繼儒, 1558-1639)의 시《암서유사(岩栖幽事)》나오는 글귀다. 진계유의 시는 ‘나는 언제나 세상에서 기이한 책 만 권을 소장해, 기이한 비단으로 책을 씌우고, 기이한 향으로 쬐면서, 띠집과 갈대발, 종이창과 흙으로 지은 집에서, 한 삶을 벼슬 없이 살며, 그 가운데서 시를 읊고자 한다

(余每欲藏萬卷異書, 襲以異錦, 熏以異香, 茅屋蘆帘, 纸窗土壁, 终身布衣, 啸咏其中)’는 내용인데 여기서 한 구절을 따온 것이다.

 

시선을 제시의 오른쪽 위로 옮겨 호리병 모양의 낙관을 살펴보자. ‘얼음같이 맑고 깨끗함 마음’을 말하는 ‘冰心’이란 두인(頭印)이 찍혀 있다. 이 말은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왕창령(王昌齡, 698-755?)의 시「부용루송신점(芙蓉樓送辛漸)」에서 나온 말이다. 왕창령의 시를 보면 이렇다.

강에 찬 비 내리는 밤 오나라 땅에 들어와서,
새벽녘에 나그네 전송하니 초나라 산도 외롭구나.
낙양의 친구들이 내 안부를 묻거든,
한 조각 얼음 같이 맑고 깨끗한 마음 옥항아리 안에 있다고 해주오.

寒雨連江夜入吳,    한우연강야입오
平明送客楚山孤,    평명송객초사고
洛陽親友如相問,    낙양친우여상문
一片冰心在玉壺.    일편빙심재옥호

 

 

이 시를 읽어보면 왜 글귀를 줄이고 호리병 안에 ‘冰心’이란 두 글자만 새겼는지 알 수 있다. 이 ‘빙심’이란 글귀는 조선시대의 여러 문인, 화가들이 인문(印文)의 소재로 자주 사용했는데 <일편빙심(一片冰心)> <일편심(一片心)> <빙호(冰壺)> <옥호(玉壺)> <옥호빙(玉壺冰)> <옥호빙심(玉壺冰心)> <천고빙심(千古冰心)> 등의 인장은 조금씩 인문이 다르긴 하지만 다 같은 의미이다.

 

안산에 있을 때 어린 단원을 지도했다고 하는 단원의 스승 강세황 역시 <일편빙심재옥호(一片冰心在玉壺)>란 인장을 썼다. 

 

그리고 ‘檀園(단원)이라고 쓴 밑에는 그의 이름 <金弘道(김홍도)>만을 양각으로 새긴 인장을 찍었다.

 

산수, 인물, 도석, 풍속화, 사군자 등 모든 그림에 뛰어난 화가 단원 김홍도는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능(士能)이며 별호로 단구(丹邱), 서호(西湖), 취화사(醉畵士, 醉畵史), 고면거사(高眠居士), 첩취옹(輒醉翁) 등을 썼다.

 

당호는 손아귀에 들어갈 만한 아름다운 수석(水石)을 가졌는지 일권석산방(一卷石山房)이라고 했다. 단원이 사용한 대표적인 인장을 몇 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이 작품이 단원의 자화상이든, 또는 고동서화 수집에 빠졌던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그림이든 세상을 벗어나 마음을 맑게 닦는 고상한 취미를 가진 선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족하다.

 

그리고 그 취미와 고상함이 너무 지나쳐 더불어 사는 삶과 맑은 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는 말이다.

※ 冰(빙)은 氷(빙)의 본 글자이다.

 

 

9. 강세황, 삼대에 걸쳐 기로소에 든 집안 <三世耆英(삼세기영)>

 

 

‘18세기 예단의 총수’로 불리던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은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었으며 스스로도 시와 글씨, 전각뿐만 아니라 산수, 화조, 인물 등 모든 그림에 뛰어났다. 이런 표암의 정취 넘치는 그림 한 점이 있다.

 

 

《새와 방아깨비》, 종이에 수묵담채|28.5x18㎝| 일민미술관소장

 

성근 풀잎 사이에 핀 국화 두 송이는 작지만 청아하다. 민들레는 꽃으로 홀씨를 지어 온 세상에 내려주고 꽃받침만 남아 있다. 말 그대로 가을이 고요히 내려앉은 들판이다.

 

새는 앞으로 대딛던 발길을 멈춘 채 머리를 홱 돌렸다. 먹잇감을 쪼려는 듯 벌린 부리, 곧은 다리와 날카로운 발톱, 노리는 눈과 치켜든 꼬리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곁엔 방아깨비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이미 알아챈 것일까? 머리 더듬이와 눈이 두려움에 새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듯도 하다.

 

이 상황만 보면 삶과 죽음의 갈림길 즉, 새는 삶이고 방아깨비에게는 죽음이다. 이 그림은 화보(畵譜)를 본떠 그린 것으로 표암의 제시(題詩)와 그림이 함께 있는《표옹선생서화첩(豹翁先生書畵帖》속에 들어있는 한 폭이다.

 

표암이 죽기 4년 전인 1787년 즉 75살 때 그린 이 그림은 먹의 엷고 짙음과 은은한 번짐, 맑은 채색에 군더더기 없는 시원하고 산뜻한 붓질과 여백미(餘白美)가 돋보인다. 여기에 그는 ‘豹翁(표옹)’이라 쓰고 <三世耆英(삼세기영)>이란 인장을 찍었다.

 

삼세기영이란 삼대에 걸쳐 기로소에 들어간 집안이란 뜻이며 ,기로소는 조선시대 나이든 신하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명예 기관이다.

 

대개 학덕이 높을 뿐만 아니라 벼슬이 정2품 이상이고 나이가 70세 이상이거나, 정3품 당상(堂上)으로서 80세 이상인 사람이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표암의 할아버지 설봉 강백년(雪峰 姜栢年, 1603-1681)은 1673년에, 아버지 백각 강현(白閣 姜鋧, 1650-1733)은 1719년에 각각 기로소에 들어갔다.

 

표암 자신도 71살이 되던 1783년(정조 7년)에 3대 연이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 인장이 바로 그러한 역사적 사실과 표암 가문의 영광을 증명하는 인장인 셈이다.

 

청백리(淸白吏)에 뽑히고 영의정에 추증된 할아버지, 한성부 판윤을 지낸 아버지 그리고 자신까지 3대 내리 명망 있는 벼슬을 지내고 장수하여 기로소에 들어갔으니 그 기쁨과 영광이 얼마나 컸을까?

표암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三世耆英(삼세기영)> 인장을 새겨 여러 작품에 찍은 것이다

 

 

표암은 강현이 64세에 낳은 막내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가난과 건강 때문에 32세부터 6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처남인 해암 유경종(海巖 柳慶種, 1714-1784)의 집안이 있는 경기도 안산에서 연객 허필(煙客 許佖, 1709-1761) 등과 교유하며 벼슬 없이 지냈다.

 

영조가 1773년(61세) 영릉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임하고, 1776년(64세)에 나이 든 유생에게 보이는 기구과(耆耈科)에 수석을 하였다.

 

다시 1778년(66세)에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수석을 하였으며, 1784년에는 72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건륭황제의 천수연(千壽宴) 때에는 부사(副使)로 연경을 다녀왔다.

 

이런 표암에게 《새와 방아깨비》에 찍은 <삼세기영> 이외에 타원형과 음각의 <삼세기영> 인장이 두 방 더 있다

 

 

《삼세기영지가》, 김정희, 종이에 먹|21x113㎝|개인소장

 

표암의 <삼세기영> 인장은 추사 김정희와도 관련이 있다. 추사가 쓴 글씨 중에, 표암의 손자인 약산 강이오(若山 姜彛五, 1788-?)에게 《삼세기영지가》라고 써준 편액 글씨가 있다.

 

추사가 약산의 매화도에 대해 좋은 평을 한 사실, 그리고 소당 이재관(小塘 李在寬, 1783-1837)이 그린 약산의 초상화(보물 1485호)에 추사가 직접 찬문을 남긴 것을 보면 추사와 표암 후손 집안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추사는 표암과는 당색(黨色)이 다르고 살았던 시대도 달랐지만 학문과 예술의 대선배로 표암이 남긴 큰 자취를 기억하면서 이런 글귀를 써준 것으로 생각된다.

 

 

이재관,《약산진영》, 비단에 채색 |63.9 x 40.3cm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기영세가》, 김정희, 나무에 새김|성북동 수연산방(이태준 옛집) 

 

이태준이 추사 글씨를 좋아했다는 것은 그의 수상록 여기저기에서 보이는데 「모방」이란 글속에는, 추사 글씨를 좋아해 표구사까지 뒤지고 다녔던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 1904-1967)이 본 떠 놓은 추사 글씨 24자를 먹으로 채우는데 이틀 저녁 세 시간 이상의 걸렸다는 얘기가 실려 있다.

 

또 「매화」라는 글에서는 ‘散脚道人無坐性 閉門十日爲梅花(산각도인무좌성 폐문십일위매화; 앉을 성품 못되어 이리저리 서성이는 노인, 문 닫고 십일 동안 매화 피길 기다린다)란 완서(阮書) 한 폭을 얻은 후로는 어서 겨울이 되어 이 글씨 아래 매화 한 분을 이바지하고 폐문 십일을 해보려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었다’ 라고 쓰기까지 했다.

 

이렇게 보면 난과 조선 백자와 추사 글씨를 좋아하며 장인적 글쓰기를 했던 이태준의 옛집에 표암과 인연이 있는 추사의 ‘기영세가’라는 모각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것이다

 

 

10. 강세황, 기로소의 으뜸<耆魁(기괴)>

 

 

벼랑에서 떨어지는 폭포나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초탈한 선비의 모습을 그린 산수 인물화를 ‘고사관폭도(高士觀瀑圖)’ 또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라고 한다.

 

또 당나라 때 대시인 이백의「여산 폭포를 바라보며(望廬山瀑布)」라는 시에서 유래했다고 하여 ‘이백관폭도’라고도 한다. 또 남종화의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중국의 화보에도 이런 그림이 여럿 등장한다.

 

 

《산수도》, 종이에 수묵담채|59x33㎝| 개인소장

 

표암 강세황의 작품 가운데 선비 두 사람이 폭포 곁에서 서로 얘기를 나누는 그림이 있다.
벼랑 끝자락 너럭바위 위에 두 선비가 마주 앉아 있다. 바위 틈에 뿌리내린 나무는 마디마디 굽었지만 군더더기를 모두 떨쳐낸 뼛심이 느껴진다.

 

무심하게 흐르는 강 너머엔 몇 겹, 몇 구비나 될지 모를 골짜기를 굽이치며, 작은 이슬조차 한데 모아 힘차게 내리쏟는 폭포가 강에 바로 잇닿아 있다.


 

『당시화보』,《아미산월가》

 

산과 폭포를 바라보고 있는 선비는 강론에 열을 올리는지 구부정하지만 수염이 치켜 올라갔으며, 한 선비는 선배나 스승의 담론에 귀 기울이는 것인지 앉아 있는 품새가 올곧다

 

 

엷은 먹과 맑은 채색으로 그린 이 작품은 벼랑과 강 위로 드리운 나무, 너럭바위와 두 선비, 그 사이에 유유히 흐르는 강, 건너편 계곡의 끝자락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빈 하늘은 위쪽으로 물은 아래쪽으로 넓고 깊어지는 구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간의 무한한 확장을 느끼게 해준다.

 

그림을 그린 뒤, 왼쪽 위에 화제와 자신의 호인 ‘豹菴(표암)’이라고 쓰고 <耆魁(기괴)>라는 인장을 찍었다. 표암이 쓴 화제 ‘奔飛下雜樹 洒落出重雲(분비하잡수 쇄락출중운)’은 당나라 시인 장구령(張九齡, 678-740)의 시「호구망여산폭포수(湖口望廬山瀑布水)」에서 따온 것이다. 잠시 원문을 보면 이렇다.

「호수 어귀에서 여산 폭포수를 바라보며 湖口望廬山瀑布水(호구망여산폭포수)」

萬丈紅泉落(만장홍천락) 만 길이나 되는 붉은 샘물이 떨어지니,
迢迢半紫氣(초초반자기) 까마득히 높은 하늘 반이나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奔飛下雜樹(분비하잡수) 물살은 빠르게 날아 온갖 나무로 떨어지고,
洒落出重雲(쇄락출중운) 층층 구름에서 시원하게 쏟아진다.
日照紅蜺似(일조홍예사) 햇살 비치니 무지개 뜬 듯,
天淸風雨聲(천청풍우성) 하늘은 맑은데 비바람 소리 들린다.
靈山多秀色(영산다수색)신령한 산에는 빼어난 경치 많으니,
空水共氤氳(공수공인온)공중에 치솟은 물이 천지의 기와 어울린다.

 

장구령의 시는 여산 폭포의 장쾌한 모습을 읊은 것이지만 표암은 그중에서 폭포물이 쏟아지는 장면 묘사의 한 부분만 따온 것이다. 그리고 이 다음에 ‘기로소의 우두머리’란 뜻의 <기괴>인장을 찍었다.

 

이 인장도 역시 할아버지 설봉 강백년(雪峰 姜栢年, 1603-1681), 아버지 백각 강현(白閣 姜鋧, 1650-1733)과 함께 표암 자신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한 것이다.

 

따라서 <삼세기영> 인장과 마찬가지로 71살이 넘은 시기부터 사용한 인장이다. 이 인장을 찍힌 다른 그림으로, 다른 화첩에 들어 있는《기려도(騎驢圖》,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가

 

 

《기려도》, 종이에 수묵담채 58.5x33.5㎝ 개인소장

 

표암은 이 인장 이외에 새김이 날카로운 또 다른 <기괴> 인장도 사용하였으며, 또 70살 넘어서 쓴 인장 중에는 <豹菴老子(표암노자)>라고 새긴 것도 있다. 특히 표암은 전각을 즐겼으며, 작품에 사용한 인장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 대체 이 두 선비는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물을 통해 사람과 삶을 비유하는 사유 체계를 갖고 있으며, ‘관폭도’는 이런 동양의 자연관과 인생관에 바탕을 두고 발생했다.

 

특히 남송의 화원 화가인 마원(馬遠)과 하규(夏珪), 명나라의 절파(浙派) 화가들이 많이 그렸으며 조선 후기회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당시화보(唐詩畵譜)』에도 이백의《아미산월가(蛾眉山月歌》와 함께 실려 있다.

 

참고로 동양에서 물과 함께 많이 인용되는 고전 몇 가지를 살펴보면 공자는『논어』에서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仁者樂山 知者樂水)’고 했고 노자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흘러가니, 따라서 물의 성질은 도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라고 했다.

 

또 장자 역시 ‘군자의 사귐은 맑기가 물과 같다.(君子之交淡如水)’고 하며 물의 성질을 사람살이에 비유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표암 그림속의 두 인물 역시 흘러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며, 자연의 이법과 순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