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19. 15:59ㆍ서예일반
11. 김석신, 또 다른 자(字) <君先(군선)>
옛 사람들은 이름이 참으로 많았다. 태어나면서는 집안 어른이 지어주는 아명을 썼고, 15살에서 20살 사이에 상투를 트는 관례를 치르고 나면 자(字)를 지어 받았다.
그 위에 아취를 더하기 위해 만들어 쓰는 아호(雅號)나 자신의 거처나 서재 등에 붙이는 당호(堂號)가 있었다. 또 나라에 기여한 공적으로 나라에서 내려주는 시호(諡號)도 있다. 한편 대감, 장군과 같이 관직 이름이 바로 그 사람을 지칭하기도 했다.
이처럼 옛 사람들이 다양하게 쓴 이름은 요즈음의 별명이나 인터넷에서 쓰는 ID와는 또 다른 멋과 문화 그리고 역사성을 담고 있다.
빨갛게 맺은 아가위 나무가지에 마주 앉은 까치 두 마리를 그린 김석신(金碩臣)의 《쌍작도(雙鵲圖)》를 보자
《쌍작도》, 종이에 수묵담채, 31x36.5㎝, 개인소장
가을 서리에 잎은 몇 남지 않았지만 산사나무 열매는 맛이 들었다. 짝을 만나서인가, 열매를 찾아서인가. 둘은 가까운 가지에 껴안듯 앉아 ‘까악 까악’ 지저귀고 있다. 먹의 농담과 색감, 화제 그리고 인장 모두가 그림의 일부처럼 느껴지게 하는 공간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먼저 화제 부분을 살펴보면 오른쪽 위에 ‘길이 간직하여 쓰다’라는 뜻의 ‘<永保用之(영보용지)>란 인장이 찍혀 있고 다음에 그림의 내용을 이야기해 주는 화제가 적혀 있다.
野棠無植自實肥(야당무식자실비)
들녘의 아가위나무는 심지도 않았는데 절로 익었네.
그리고 화제 왼쪽아래에 ‘蕉園(초원)’이란 관서가 있고 <君先(군선)>이란 인장이 찍혀 있다.
<영보용지>
김석신의 본관은 개성이며 자는 군익(君翼), 호는 초원으로 알려져 있다. 당상관의 무관 벼슬인 첨추를 지낸 김응리(金應履)의 둘째 아들로 김득신(金得臣)의 친동생이며, 김양신(金良臣)의 친형이다.
그러나 그는 후사가 없었던 큰아버지 김응환(金應煥)의 양자가 되었고, 도화서 화원으로 사과(司果) 벼슬을 지냈다. 또한 이 집안은 김득신의 아들 김건종(金建鐘)과 김하종(金夏鐘) 역시 도화서 화원으로 말하자면 3대에 걸쳐 화맥을 이은 집안이었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의하면 김석신의 자를 ‘군익’이라고 하였다. 친동생인 김양신의 자가 ‘자익(子翼)’인 것을 보면 자의 돌림자가 ‘익(翼)’자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의 인장을 통해 김석신은 ‘君先(군선)’이란 또 다른 자를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은 원래《고승한담도(高僧閑談圖》《묵죽도(墨竹圖)》《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가 함께 들어있던 화첩에서 분리된 그림이다. 아래는 관서와 인장은 없지만 김석신의 《쌍작도》와 함께 있던《묵죽도》이다.
김석신의《묵죽도》, 종이에 수묵담채, 31x36.5㎝, 개인소장
이처럼 작품을 통해 문헌 기록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림과 글씨에 찍힌 인장은 중요하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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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참고자료>
* 김석신(金碩臣, 1758-?): 자는 군익(君翼), 호는 초원(蕉園)
* 김득신(金得臣, 1754-1822): 자는 현보(賢輔), 호는 긍재(兢齋)
처음에 홍월헌(弘月軒)이란 호도 사용했다.
* 김양신(金良臣, 생몰년 미상): 자는 자익(子翼), 호는 일재(逸齋)
* 김응환(金應煥, 1742-1789): 호는 복헌(復軒). 담졸당(擔拙堂)이란 호도 사용했다.
* 김하종(金夏鐘, 1793-?): 호는 유당(蕤堂) 그 외에 유재(蕤齋), 설호산인(雪壺山人)이란 호도 사용했다.
12. 조정규의 그림자 속 <影裏(영리)>
고기잡이를 나서는 임전 조정규(琳田 趙廷奎, 1791-?)가 그린 《출어도(出漁圖)》를 보자. 한 번의 붓질로 가볍게 그은 선과 붓을 뉘어 쓱 문지른 바위와 뱃전에 부딪치는 물보라. 맑은 먹빛과 옅푸른 빛이 산뜻하고 맑은 느낌을 준다. 화면의 반 이상을 비워둔 공간은 넓고 무한한 바다와 풍어(豊漁)의 꿈을 나타내는 듯하다.
뱃머리에는 그물을 달아 올리는 도르레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에는 돛대 주위에 있는 두 사람이 마치 배 뒷머리에 있는 사공의 말을 기다리는 듯이 시선을 모으고 있다. 곧 배를 띄울 모양이다
《출어도》, 종이에 수묵담채, 7.6x23㎝, 개인소장
화원 그림이지만 속태를 훌쩍 벗어나 보이는 이 작품에는 오른쪽 아래에 두 방의 인장이 찍혀 있다. 위의 것은<影裏(영리)>이고 아래 것은<趙廷奎印(조정규인)>이다.
<영리>를 ‘그림자 뒷편’이란 뜻으로 보면 좋은 글귀를 따서 인장으로 새긴 사구인(詞句印)인 듯하다. 아니면 그가 쓴 또 다른 호(號)일 가능성도 있는데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조정규인>
조정규는 화원으로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성서(聖瑞)이며, 조선시대 마지막 화원이었던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晉, 1853-1920)의 할아버지다.
그는 첨절제사(僉節制使) 벼슬을 지냈으며, 산수, 인물과 더불어 어해도를 특히 잘 그렸고, 조석진에게 이어져 조선 말기와 근대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조석진의 외손자인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 1899-1976)이 그 화맥을 이었으며, 그는 관념적인 산수가 아니라 엄격한 사경(寫景)을 바탕으로 한 한국적 풍치가 물씬 풍기는 산수를 잘 그려 집안의 화맥을 이었다.
그림자 속이란 <영리>란 인장의 뜻을 좀 더 분명히 파악하자면 조정규의 전기가 더욱 소상해 밝혀져야 하는데 아직은 무리인 듯하다. 조선 말기 화원으로서의 삶에 대한 자신의 한계를 염두에 두고 ‘그림자 속’이란 자조 또는 겸양의 글귀를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추측일 뿐이다.
13. 김수규의 <士․益(사·익)>
조선시대 후기에 활동한 화가로 활호자 김수규(活毫子 金壽奎)가 있다. 언제 태어났는지 또 어느 때 세상을 떠났는지, 이른바 생몰연대는 미상(未詳)이지만 대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를 배경으로 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비온 뒤의 풍경 속에 집으로 돌아가는 어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사옹귀조도(蓑翁歸釣圖)》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우기이지만 비가 오락가락하는지 온 들판이 습기로 축축하고, 나무로 엮은 다리 아래를 흐르는 물살이 거세다. 그 다리 위를 도롱이를 걸친 두 사람이 낚싯대를 비껴 매고 다리를 건너고 있다.
바구니를 넉넉히 채웠는지, 아니면 끼니때가 된 것인지 산 중턱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거칠게 쓱쓱 그은 선으로 산을 이루고, 푸른 색과 먹을 툭툭 찍어 나무를 이루었다. 화제를 읽어 보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분명하다
《사옹귀조도》 비단에 수묵담채 25x34.5㎝ 개인소장
비가 올 듯하지만 온 산은 개었고
도롱이 걸친 늙은이 낚시 거둬 돌아오네 활호자
雨氣千山晴, 蓑翁捲釣歸 活毫子
(우기천산청, 사옹권조귀 활호자)
화제 왼쪽에 있는 낙관(落款)을 살펴보면, <士(사)><益(익)>으로 돼있다. 마치 두 방의 인장이 찍힌 듯이 보이지만 원래는 하나의 인재(印材)를 반으로 나누어 나란히 새긴 한 도장으로 파악해야할 것으로 여겨진다.
김수규는 활호자란 호 이외에 순재(淳齋), 기서(箕墅)라는 호가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 찍힌 <士 · 益(사익)> 인장은 그의 자로 읽어야 하는가, 호로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가 사용한 또다른 이름인가. 역대 서화가들에 관한 전기 자료를 모아놓은 『근역서화징』에는 그가 황기천(黃基天, 호는 능산(菱山), 1760-1821)과 친해 황이 그의 그림에 많은 화제를 남겼다고만 할 뿐 다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사익>은 조선시대의 많은 문인, 화가들이 자(字)로 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중기무렵의 김우급(金友伋, 1574-1643)와 김연(金演, 1655-?)같은 선비가 사익(士益)이란 자를 사용했다.
김수규의 자(字)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고려하면 <사익>은 김수규의 자로 판단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덧붙이자면 19세기에 활동했던 화가 김수철(金秀哲, 호는 북산(北山))에 대해서도 어느 자료에서는 자를 사익(士益)이라 했다. 이는 분명히 김수철 그림에 나오는 <士盎(사앙)>이란 인장을 <사익>으로 잘못 읽은 오류인 듯하다
북산 김수철의 <사앙(士盎)> 인장
14. 조희룡의 <寶雪(보설)>
조선 후기의 화가 조희룡(호는 우봉(又峰), 1789-1866)은 스스로 매화벽이 있다고 자처할 정도로 매화를 좋아했고 또 즐겨 그렸다.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매화 꽃잎이 흰눈처럼 흩날리는 모습을 한 선비가 창가에 앉아 즐기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화서옥도》와, 붉은 홍매가 화면 가득 빼곡하게 그려진 《홍매도》는 그의 이름과 함께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다.
그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산수, 괴석, 묵죽, 묵란도 등 14폭 화첩 속에 들어 있는 그의 또다른 《묵매도(墨梅圖)》를 한번 살펴보자
《묵매도》, 종이에 수묵, 23.2x34㎝, 개인소장
왼쪽 위에서 갈려나온 가지가 X자형으로 엇갈리며 화면을 반으로 나누고 꽃잎으로 수놓은 아래에 화제를 널찍하게 쓰고 인장을 찍었다. 꽃잎은 윤곽선 없이 묽은 먹으로 툭툭 찍고, 꽃받침과 꽃술은 짙은 먹으로 아기자기하게 그렸다.
추위를 견디고 옛 등걸에 꽃을 피우는 매화의 모습보다는 화사한 기운이 감도는 감각적인 화풍으로 당시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그림과 비슷한 점이 많다. 조금 긴듯 하지만 화제를 천천히 읽어보자.
暗香浮動月黃昏 (암향부동월황혼)
堂上一樹春 (당상일수춘)
東風何事入西隣 (동풍하사입서린)
兒家常閉門 (가아상폐문)
雪肌冷 玉容眞 (설비랭 옥용진)
香腮粉未匀 (향시분미균)
折花欲寄嶺頭人 (절화욕기영두인)
江南日暮雲 (강남일모운)
--錄坡公梅花集句 (녹파공매화집구)
해질녁 달빛 아래 은은한 향기 떠도는데,
마루 위 한 그루에 봄이 왔네.
동쪽 풍습 무슨 일로 서쪽 이웃에 들어왔나?
고향의 집은 늘 문이 닫혔네.
눈 같은 살갗 차갑고, 옥 같은 모습 참되니,
향기로운 뺨엔 가루가 고르지 않네.
꽃 꺾어 고갯마루 사람에게 주려하니,
강남의 날 저무는데 구름이 이네.
--동파의 매화 집구를 적음
마지막에 ‘錄坡公梅花集句(녹파공매화집구)’라고 송나라 소동파의 글 한 구절을 적었다고 했는데 원 제목은 「완랑귀[매사](阮郞歸[梅詞])」이다.
또 이 그림은 평양에 살며 노안도(蘆雁圖)를 잘 그렸던 양기훈(호는 석연(石然))의 소장품이었는지 마지막 폭에 그가 손가락 끝으로 그린 지두(指頭) 산수화 한 폭이 붙어 있다.
이 화첩의 제목은 ‘철적도인 조희룡선생 화첩(鐵篴道人趙熙龍先生畵帖)’이라 되어 있는데 ‘철적도인’은 조희룡의 별호를 말한다. ‘篴(적)’자는 피리 ‘笛(적)’의 옛 글자이다.
화제 첫머리에 <小艸(소초)>란 인장이 찍혀 있고 끝에는 <寶雪(보설)>이란 인장이 찍혀 있다. ‘草(초)’와 ‘艸(초)’는 같은 글자로 일반적인 ‘소초’의 뜻은 아기 풀의 싹이지만 달리 작게 흘려 쓴 글씨 즉, 잔글씨로 쓴 초서란 뜻도 된다.
<소초> 인장은 조희룡이 작품의 두인(頭印)으로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 뜻은 ‘자잘하게 그림이나 글씨의 초안을 잡다’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글자 모양은 다르지만 고람 전기(古藍 田琦, 1825-1854)의 《계산포무도》가 들어 있는 화첩의 마지막 폭에 있는 《묵란도》에 형당 유재소(蘅堂 劉在韶, 1829-1911) 가 쓴 화제에도 첫머리에 같은 글귀의 인장이 찍혀 있다.
두 번째로 화제 끝에 오른쪽으로 빗겨 찍은 <보설>이란 인장인데 조희룡은 향설관(香雪館)이란 당호를 사용했다.
추사 김정희의 스승인 청나라의 담계 옹방강(覃谿 翁方綱, 1733-1818)은 소동파를 존경하는 뜻으로 보소재(寶蘇齋)라는 당호를 썼다. 그리고 옹방강의 제자인 난설 오숭량(蘭雪 吳嵩梁, 1766-1834)이 향소관(香蘇館)이라는 당호를 썼다.
김정희 역시 옹방강을 존경하는 뜻에서 보담재(寶覃齋)란 당호를 쓴 것으로 보면, ‘보’자는 ‘보배롭게 여기다’라는 뜻으로 봐야할 것같다. 이는 조희룡이나 오숭량이 당호에 쓴 향(香) 자를 ‘향기롭게 하다’ 또는 ‘아름답게 하다’라는 의미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보설’이란 인장과 ‘향설관’이란 당호의 의미는 생전에 동파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를 존경했던 원나라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당호인 ‘송설재(松雪齋)’에서 ‘설’자를 따와 그를 존경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증거를 굳이 찾으라면 청나라 때 호석사(胡石査, 1831-?)라는 사람이 조맹부의 산수화를 얻고서 그 당호를 ‘보설(寶雪)’이라고 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조희룡의 본관은 평양(平壤)으로 자는 치운(致雲)이며, 호산(壺山), 철적(鐵笛), 매수(梅叟), 십연재(十硯齋), 향설재(香雪齋), 낭현관(琅嬛館), 자염(紫髥) 등 많은 호를 사용하였다.
그는 어느 의미에서 김정희의 폄하와 그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김정희에게 옹방강을 통한 소동파의 맥이 흐르고 있었다면, 조희룡에게는 조맹부의 맥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희룡의『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襍存)』에 실려 있는 글을 음미해 보면 그 답의 일부를 얻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조문민(*문민은 조맹부의 시호)이 글씨를 쓸 때, 비록 장난삼아 쓰는 경우라도 금석에 새기는 것처럼 하였다. 매화를 그리고 난초를 치는 일이 비록 작은 재주이지만 늘 붓을 댈 때면 문득 천추의 생각을 하게 된다.
(趙文敏作字, 雖戱寫, 亦如欲刻金石. 寫梅寫蘭, 雖小技, 每落筆, 輒作千秋. 조문민작자, 수희사, 역여욕각금석, 사매사란, 수소기, 매낙필, 첩작천추)”
15. 금리의 <一丘一壑(일구일학)>
조선시대에는 그림은 남겼지만 생몰년은 물론 본관이나 가계 등을 알 수 없는 화가가 다수 있다.『근역서화징』에도 ‘다만 성명만 있거나 자나 호만이 여러 책 속에 뒤섞여 나오거나 또는 본인의 진적을 보아도 어느 시대의 누구인지 자세히 알 수 없는 사람은 아래와 같이 기록해놓고 많이 아는 군자를 기다린다’라는 설명과 함께「대고록(待考錄)」에 넣어 두었다.
하지만 「대고록」이외에 『근역서화징』본편에 수록된 작가 중에도 이런 경우가 더러 있다. 금리(錦里)라는 호를 쓴 두 사람도 그중에 속한다.
금리(錦里)라는 호를 쓰는 두 화가 중 한 사람은 1787년에 태어났고 예서를 잘 쓴 전승조(全承祖)이다. 또 다른 사람은 1792년(또는 1793년)에 태어난 이의수(李宜秀)로 그는 의원(宜元)이란 이름도 썼으며, 자는 중노(仲老) 또는 공열(公烈)이라고 했고, 산수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현재 기준으로 삼을 만한 작품, 즉 기준작이 없는 형편이다.
아무런 배경 없이 난초 한 포기를 그린 그림이 있다. 자세히 보면 한 가운데에 접혔던 자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화첩에서 떨어져 나온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전승조 작품으로 전하고 있지만 기준작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그림 자체는 물론 화제나 인장만으로 누구의 작품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이런 경우에는 화첩에 함께 있던 작품이나 제첨(題簽, 화첩 제목글) 아니면 각 작품에 찍혀 있는 관서(款署)와 인장이 단서가 되기도 하지만 현재로선 이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화풍이나 글씨 그리고 인장의 양식과 시대적 경향으로 보아 19세기 전반기의 그림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묵란도(墨蘭圖), 종이에 수묵, 40x27㎝, 개인소장
우선 화제부터 읽어 보면 이는 소동파의 시 「양차공의 춘란에 쓰다(題楊次公春蘭)」를 옮겨 적은 것이다. 그리고 시 뒤에 금리(錦里)라는 자신의 호를 썼다.
春蘭如美人(춘란여미인)
不採羞自獻(불채수자헌)
時聞風露香(시문풍로향)
蓬艾深不見(봉애심불견)
丹靑寫眞色(단청사진색)
欲補離騷傳(욕보이소전)
對之如靈均(대지여영균)
冠佩不敢燕(관패불감연)
춘란은 아름다운 사람과 같아, 꺾지 않아도
부끄러이 스스로 향기 드리네.
때때로 바람 이슬의 향기 전해오지만,
쑥대 속 깊이 뭍혀 보이지 않네.
단청의 색깔로 참 빛을 그려,
이소경의 경전을 보충하려 하나.
굴원[영균]을 대하는 것 같아서,
벼슬아치로는 감히 사사로이 못하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농담을 아우른 난 잎 하나를 오른쪽으로 길게 뻗어 그렸고, 그 가운데 마른 쑥대가 있어 화제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 난은 하나의 꽃대에 꽃 한 송이가 피는 난(蘭)이다. 참고로 한란(寒蘭)처럼 하나의 줄기 마디마디에서 여러 개의 꽃이 피는 것을 혜(蕙)라고 한다.
난초는 쑥대 속에 뒤섞여 있어도 그 은은한 향기를 감출 수 없는데 이는 마치 높은 뜻에도 불구하고 모함을 받아 멱라 강가를 헤멘 굴원의 지조와 같다고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화제 첫머리에는 <一丘一壑(일구일학)>이란 인장을 찍고 끝에는 <錦里之人(금리지인)>이라고 찍었다. <금리지인>은 호에서 딴 인장이다. <일구일학>은 ‘언덕과 골짜기’란 의미인데 원래는『한서(漢書)』「서전(敍傳)」에 나오는 글귀이다.
「서전(敍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漁釣于一壑(어조우일학),
則萬物不奸其志(즉만물불간기지),
棲遲于一丘(서지우일구),
則天下不易其樂(즉천하불역기락)
골짜기에서 낚싯대 드리우니,
만물이 그 뜻을 범하지 않고,
언덕에 한가히 사니,
세상이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네.
이글은 언덕 위에 집을 짓고 한가로이 골짜기에서 낚싯대나 드리우는 생활을 하는 이른바 자연과 하나가 된 자유로운 삶에 대한 예찬이다. 일구일학에는 따라서 ‘속세를 벗어난 거처’ 또는 ‘산수 자연에 마음을 의지하련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달리 세상 밖에 몸을 둔다는 의미에서 방외소요(方外逍遙)나 방정구학(放情丘壑)과도 통하는 말이다. 그래서 인지 19세기 전반기의 정치 소용돌이에서 절친한 친구이면서도 당론이 달랐던 추사 김정희와 황산 김유근이 나란히 이 어귀로 인장을 새겨 썼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그림은 있지만 작가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글씨와 인장은 그 실마리를 풀어가는 단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처럼 인장과 글씨 그리고 그림 자체는 분석이 가능해도 두 사람 모두의 기준작이 없고 보면 더 이상 작자를 확정하는 일이 불가능할 때도 있다. 전승조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야말로 학식이 높은 박아군자(博雅君子)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림이다.
[출처] 그림과 글씨 속의 인장 이야기 11회 ~ 15회 |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