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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3.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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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 부수와 부수자 배분표

文字創製

倉頡과 沮誦

(1) 문자통일

전국시대에는 나라마다 다양한 서체가 있었다. BC 221년 천하를 통일한 秦은 ‘大篆’이라고도 하는 籒文사용하고 있었는데, 승상 李斯가 籒文기준으로 小篆을 만들어 이를 표준으로 정하고 나머지 서체들을 모두 폐지시켰다. 오늘의 중국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되는 사건이다.

※ 古文과 籒文사용된 시간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된 지역에 東西의 차이가 있다. 魯, 齊 등 儒家가 흥했던 지역에서 사용되던 문자.

※ 許書에서 말한 고문은 孔宅壁中에서 발견된 책에 쓰인 문자를 말한다.

● 丞相 李斯『倉頡篇』

- 한자 교과서. 1장 60자, 55장, 총 3,300자로 이루어졌다.

- 모두 습득하면 관리로 채용했다.

- 중앙집권, 철저히 문서를 통한 행정처리로 漢字가 중요한 역할.

- 고문자가 많아서 어려웠다.

前漢 宣帝(BC1-AD5년) 시 張敞이 齊人에게서 배워 杜林에게 전해준다.

● 中車府令 趙高『爰歷篇』

● 태사령 胡母敬『博學篇』

1. 焚書坑儒

BC213년 儒家들이 周의 봉건제를 은근히 찬양하였는데 이는 秦의 郡縣制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여겨 秦의 역사서, 博士官의 관할이 아닌 책들 중 醫藥, 卜筮, 樹種의 책만 남기고 모두 태워없애버렸다. 이들을 所持하는 것 뿐만 아니라 『詩經』, 『書經』 등을 토론만 해도 파묻어 죽였다.

秦이 멸망하고 漢나라가 수립된 후 민간에서 널리 문헌을 구했는데 모두 당시의 서체인 예서로 쓰여진 것들이었다. 前漢 武帝 때 董仲舒에 의해 유교가 국교로 선포되면서 박사관이 설치되었는데 이들 모두 예서를 사용했다. 또한 유학이 관리가 되는 도구로 전락하면서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는 고문학파가 등장할 여지를 만들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焚書는 어디까지나 ‘博士館의 職任으로 하는 바가 아닌’, 다시 말해서 민간에 있는 서적만 통제한 것이며, 박사관 즉 진나라 국립대학 교수가 관리하는 서적은 분서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모든 유가경전이 말살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유교교경전이 사라진 것은 힘만 센 항우가 아방궁이 아닌 함양궁을 불태울 때였다. 함양궁 안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책들이 아방궁과 함께 소실되어버린 것이다.

● 鄭邈의 隸書

- 진시황의 독재(언론탄압과 만리장성 및 아방궁 축조 등 각종 정책)로 인하여 죄인이 급증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신속한 사무처리를 위해 예서 탄생.

- 隸變<자형의 대혼란>

- 새로이 만든 것이라기 보다 암암리에 이리저리 사용되던 것을 국가에서 공인 한 것.

(2) 금문파와 고문파

前漢 景帝의 아들 魯의 恭王 餘가 공자의 옛 저택에서 죽간이나 목간에 고문으로 적힌 옛 경전을 대량으로 발굴했다. 이로써 예서로 쓰인 것을 ‘今文’, 孔宅壁中에서 발견된 책을 ‘古文’이라고 구별하게 되었고, 당시 경전은 출세의 도구였으므로 이후 두 학파간의 치열한 진위논쟁이 전개된다.

이 논쟁은 경전 연구의 방법이나 방향의 변화 양상뿐만 아니라 경학과 정치의 관련성까지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한대 경학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주요한 잣대가 된다.

● 측천무후

- 측천문자

● 宦官 史游『急就篇』 : 2,000여 자.

●『方言』(B.C.18년)

- 정식 명칭은 輶軒使者絶代語釋別國方言(유헌사자절대어석별국방언)

- 輶軒 : 輕便한 수레의 일종.

- 絶代語 : 세대, 시대가 단절된 말이니, 遠古 시대의 語言.

●『訓纂篇』(B.C. 1년)

- 平帝 元年(BC 1년) 한자에 정통한 인재 수백명을 모아 알고 있는 한자를 未央庭 한가운데 쓰게 한 후 이 가운데서 揚雄이 유용한 것만 모았다.

●『爾雅』

- 前漢 宣帝(B.C. 1-A.D. 5년) 무렵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

- 漢代 訓詁學. 秦의 통일 전 군웅할거로 천하가 분열되어 지역차, 시대차로 인한 불통으로 해석불가 字句가 생겨남.

- 최초의 훈고 집대성

●『七略』

- 成帝 7년 光祿大夫 劉向에게 궁중 소장 도서 정리

- 중국 최초의 서적 목록.

- 아들 劉歆이 완성.

-『漢書藝文志』의 기초가 됨.

- 劉氏는 한의 왕족, 王氏는 왕비의 일족

- 劉歆이『古文春秋左氏傳』을 애호하여 고문학파가 시작됨.

(3) 王莽(BC45-AD23)의 정권탈취

- 출세도구로 전락한 금문파 대신 유흠의 고문파를 중용했다.

- 유흠이 이때『古文周禮』를 발굴했다.

-『古文周禮』를 앞세워 유가의 이상향인 주왕조로의 회귀를 꿈꾼다.

-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古文을 이용했다.

- 15년만에 망했다.

(4) 白虎館會議

- 후한 章帝 4년(79년) 학자 및 백관, 황제 임석하에 토론.

- 고문파와 금문파간의 대토론회

- 班固가『白虎通德論』으로 정리.『白虎通』으로 약칭.

- 금문파의 학설을 전면적으로 채용했다.

- 고문파의 지위 격상.

- 이후 정권획득과 관련 없이 학문적 입장에서 논의된다.

※ 백호관은 후한 당시 주도읍이었던 낙양성(洛陽城) 북궁(北宮)의 부속건물 이름이었다.

● 賈侍中 賈逵

- 前漢 文帝 때의 저명한 문학가 賈誼의 末裔.

- 부친 賈徽도 유흠에게서 고문 좌전, 주례를 수업했다.

- 부친을 이어받았다.

● 許愼(30-124년)

『後漢書 : 儒林傳』

后漢許愼字叔重 汝南召陵人. 性淳篤 博學經籍. 馬融敬之. 時人爲之語曰五經無雙許叔重. 爲郡功曹擧孝廉. 再遷除艙?卒于家. 初愼以五經傳說臧否不同 撰爲『五經異義』又作『說文解字』. 皆傳于世.

●『五經異義』

- 오경 해석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 산일되어 전하지 않는다.

●『說文解字』(100년)

- 경서의 올바른 해석을 지시하기 위하여.

- 완성 AD 100년. 조정에 헌상 121년

- 표제자는 小篆, 해설은 隸書로 되어 있다.

- 수록 자수 : 14편, 540부, 9353文. 重(고문, 주문) 1,163자, 해설에 사용된 총글자 수 133,441字.

※ 현재 표제자로 사용된 글자는 9,426자.

- 예서체를 바탕으로 한 속설(엉터리 자원풀이)이 난무했다. 진시황의 통일(BC220년) 후 300여 년. 이미 전서를 아는 이가 드물었다.

- 唐代엔 과거시험의 필수 과목이 되었다.

- 남당 서현의 『설문해자 계전』과 북송 서현의 『설문해자』 15권

- 이후 800년간 맥이 끊겼다가 淸朝 實事求是로 부활.

(5) 『說文解字』의 意義

1. 部首 개념의 鼻祖

- 다른 글자의 意符로 사용된 글자는 모두 부수로 삼는다.

- 540(6×9×10)을 맞추기 위해 임의로 부수자의 수를 증가하기도 했다.

- 당시 진리로 통하던『易』의 상을 본받아 배열했다.

2. 聲訓(성훈) : 음이 같거나 비슷한 글자로 뜻을 풀이 한다.

- 土는 吐, 만물을 토해내기; 때문이다.

- 山은 産, 만물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 戶는 護,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이다.

- 東은 動, 자라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 거의 모두가 이런 식이다. 자의적인 해석이되기 쉬우나 당시의 시대상, 인생관이나 우주관이 많이 담겨져 있어서 흥미롭다.

3. 五行說(오행설) : 허신이『說文解字』를 쓰던 시대에는 오행설이 그들의 우주관이었다. 허신은 이 오행설을 문자에 적용하여 하나의 완벽한 체계를 갖추고자 했다. 一로 시작하여 亥로 끝난다.

1. 六書(육서) :

文[상형/ 지사]

字[회의/ 형성]

用[전주 /가차]

2. 12간지 해석 : 오행의 미신 그대로.

3. 문자해설의 正統 確立

- 당시 유행하던 隸書가 아닌 小篆의 자형을 사용했다.

- 여기에 실려 있는 주문과 고문이 갑골문해석의 단초가 되었다.

※ A Certain Irony : 갑골학의 권위자 胡厚宣,

‘갑골문의 발견·연구에 의해『說文解字』 가운데 적어도 10분의 2, 3은 정정되어야 한다.’

『說文解字』에 오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때문에『說文解字』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해독된 갑골문의 숫자가 2,000여 자에 불과하다. 이 중『說文解字』와 풀이가 상충되는 한자가 그리 많지 않다.

둘째로, 갑골문 역시 자의적인 소설로 쓰여진 풀이가 많다. 아마도 갑골문의 존재를 과시하려고 『說文解字』를 이용하려는 측면이 있다.

셋째로, 무엇보다『說文解字』가 없었더라면 갑골문의 해독이 불가능했거나 더욱 황당해졌을 것이다.

● 鄭玄(127-200)

- 허신의『五經異義』는 금문과 고문의 대립을 지양하는 기초를 확립.

- 정현이 통합을 완성.

●『釋名』(220년, 東漢 延康 1年)

- 東漢, 劉熙

- 사물들이 그러한 명칭을 얻게 된 까닭.

- 中國古代第一部音訓詞典.

●『爾雅音義』

- 魏나라 孫炎(220∼265)

- 反切法 開始·採用

● 呂忱의『字林』

-『說文解字』이 후 170년

- 西晉 武帝(재위 265-290년) 무렵

- 12,824자(설문보다 3.471자 증가)

- 『설문』과 동일한 내용이 많다(按『說文解字』540部首 排列,已佚).

- 可補《說文》之不足。此書於元朝已散佚,清朝有辑本。

-『說文解字』의 증보격.

●『爾雅注』

- 郭璞(276-324)

●『千字文』

- 南朝 梁나라 武帝 周興嗣(470-521)

●『玉篇』

- 540부수였으나 차례는 조금 달랐다.

- 16,917자 수록

-『자림』이후 270년, 梁나라 顧野王(519~581)이 24세 때 완성

- 한자의 형태를 규범화- 정확한 훈고

- 다양한 古籍인용

- 검색의 편리

- 이후 여러 차례 간략화를 겪어 현재의 214 부수가 된다.

● 安師古(581-645)

- 『五經正義』교정

- 『大唐儀禮』100권, 재상 방현령과 합작.

- 『急就篇注』

- 『匡謬正俗』8권

- 『安氏正本』, 경전의 오류를 바로 잡은 책

●『顔氏字樣』

- 安師古(581-645)가 『安氏定本』을 쓴 후 문자의 기준을 정하려고 楷書의 여러 이체자를 별지에 써서 시비를 정한 책으로 字樣書의 시초인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安氏字樣』이라고 불렀다.

- 해서의 표준 자체

- 전하지 않는다.

- 예서에서 해서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또 한번의 혼란을 겪는다.

『안씨가훈』<書證篇>에 표현된 당시의 혼란상

‘從正則懼人不識, 隨俗則意嫌其非, 略是不得下筆也.’

●『干祿字書』

- 安師古 동생의 손자인 安元孫(660-732?)

- 干祿 : 벼슬하여 祿을 구한다.

- 과거시험 표준자체, 俗體, 通體, 正體로 구별한 실용서.

-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章, 表, 書, 判 등 공문을 쓸 때 주의해야 하는 자형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지은 책

- 조카인 安眞卿의 글씨로 돌에 새겨졌다.

●『切韻』(601년)

- 陸法言

●『五經正義』

당태종 李世民(재위 626-649년) 남북조의 사상 통일과 과거제 확립을 위해 국가의 공식적인 입장에서 유교경전을 정리하고 해석하는, 이른바 正義가 필요했다. 정관 4년 안사고에게 오경을 교정케 하였고, 國子祭酒 孔潁達(547-648)을 책임자로 많은 학자들이 참여시켜『五經正義』를 완성했다.

- 包括《周易正義》《尚書正義》《毛詩正義》《禮記正義》《春秋左傳正義》

●『五經文字』(776년, 唐代宗大历十一年)

- 오경 본문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 唐 代宗 10년(755년)에 張參(714-786?)이 오경의 본문을 교정.

- 오경에 보이는 글자체의 正誤를 구별.

- 160부수로 줄여서 明나라 梅膺祚의『字彙』에 영향을 주었다.

- 이체자의 역사적 변천 추적.

- 3,253자를 대상으로 했다.

●『新加九經字樣』

- 57년 후 太和 7년 文宗이 唐玄度에게 하명하여 구경 자체를 교정.

-『五經文字』의 보충, 의심스러운 곳, 빠진 곳.

- 해서의 가장 권위있는 모범으로 추앙됨.

- 76부수로 되어 있고 421자를 수록.

●『一切經音義』(808년)

- 一切經 : 불교 大藏經.

- 音義 : 注其義.

● 李陽氷

- 唐 서예인, 李白이 59세 때 이양빙의 집에 머물다 62세에 죽었다.

- 篆書의 명인. 秦 李斯의 후계자로 자처,

-『說文解字』의 小篆을 전부 교정.『說文解字』 고난의 시작

[唐]『說文解字注』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唐代 寫本의 一部가 있을 뿐이다.

- 아주 근엄한 서체로 정갈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당시『說文解字』를 어떻게 여겼는지 느낄 수 있다.

(6) 楷書의 정리와 규범화

- 당태종 李世民(599-649) <蘭亭集序>

- 王羲之

- 身言書判

● 『龍龕手鑑』(971년)

- 4卷, 分242部, 收字26,430餘字, 注163,170餘字.

- 融合儒家ㆍ佛家和契丹族一些詞彙, 內容豊富, 在中國辭書史上有特殊地位.

●『廣韻』(北宋, 1008년)

- 절운 후 400년

- 陣彭年·邱雍이 왕명으로.

- 『절운』의 증정본

●『類篇』(宋代)

-『옥편』의 증보판

- 544부수. 重文을 포함하여 31,319자

-

●『字通』

- 南宋의 李從周

- 부수를 楷書의 點劃에 의거하여 89부로 나누었다.

●『四聲篇海』(金나라)

- 579부수로 36字母에 따라 배열.

- 金 韩孝彦

● 徐鉉(大徐:916-991)

- 북송 雍熙 3년(986년) 황제의 조칙으로 여러 학자들과『說文解字』교정. 小篆 書體와 說解 異同을 바로 잡았다.

- 新附字 78字<후일 단옥재는 다시 모두 삭제>

● 徐鍇(小徐:920-974)『說文解字繫傳(설문해자계전)』 40권.

- ‘小徐本’으로 불린다.

- 傳은 경전의 해석에 사용되는 말,『說文解字』를 易經의 지위로 높여서 傳을 건다는 뜻으로 지은 제목.

- 李陽氷의 억설 배제

- 『說文解字』의 원형 복원

- 『說文解字篆韻譜(설문해자전운보)』

● 『中原音韻』(1324년)

- 元朝 주덕청(周德淸)

(7) 右文說

- 형성자의 성부는 대개 뜻을 겸하여 갖는다.

- 11-12세기 송나라

- 因聲求義 : 소리에 근거하여 의미를 찾는다.

- 宋 鄭樵(1104-1160) 『象類書』

- 文과 字로 구별, 330母를 形의 主, 870子를 聲의 主, 1200문이면 모두 표현된다.

- 王念孫(1744-1832) 『廣雅疏證』, 1796년.

● [宋] 李燾(1544-1625년) 『說文解字五音韻譜(설문해자오음운보)』

- 오행설에 입각한 540부수로 배열되어 찾기가 어려운 점을 해결하려고 운서의 향식으로 재배열.

- 540부수자를 운서 형식으로 배열한 후, 그 부수 안의 글자들 역시 운서의 형식으로 재배열했다.

- 東으로 시작해서 甲으로 끝난다.

- 글자의 설해는 大徐本을 이용했다.

- 검색이 편리하므로 대단히 유행하여, 始一終亥 하는 원래의 대서본을 제치고 원본으로 오인하게 되었다.

● 顧炎武(1613-1682)

- 經讀自考文始, 考文自知音始.

- 音學五書:<音論> <詩本音> <易音> <唐韻正> <古音表>

●『字徽(彙)』(1615년, 書成於明神宗萬曆四十三年)

- 명나라의 매응조(梅膺祚)가 편찬한 자전.

- 설문해자의 540부수를 214부수로 줄임.

- 표제자를 획수가 적은 글자부터 많은 글자 순으로 배열하여 처음으로 <획수를 검색에 사용>

- 오늘날 자전의 전범

●『正字通』江永(1681-1762)

- 張自烈(1597-1673年).

-『字彙』의 잘못된 점과 부족한 점을 보충.

- 한 글자에 反切은 하나만 사용.

● 江永(1681-1762)

- 『古韻標準』, 『音學辨微』, 『四聲切韻表』를 지었다.

- 戴震의 스승.

● 戴震(1723~1777)

- 건륭 27년 錢汝誠이 실시한 한 鄕試에서 합격하여 坐師로 모시게 되었다. 청초 고증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四庫全書 편찬에도 관여하였다,『聲韻考』,『聲類表』를 지어 顧炎武 이래의 고대음운학을 계승하였는데, 단옥재는 그를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 段玉裁(1735~1815) 『說文解字注』

※ 注 : 경전의 해석에 사용하는 말, 설문을 높여서 경전으로 간주한 것.

- 江蘇省 金壇縣 사람.

-『六書音均表(육서음운표)』

- 건륭 25년 錢汝誠을 坐師로 한 鄕試에서 합격하여 ‘擧人’이 된 단옥재는 다음 시험인 會試를 준비하면서 북경에 있는 錢汝誠의 집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顧炎武의 音學五書를 만나 고대음운학의 기초를 닦게 되었다.

- 건륭 26년 회시에 불합격하여 3년마다 치러지는 다음 시험을 준비하며 景山萬善殿官學의 敎習(국립학교 교사)가 되었다. 후일『六書音均表』의 일부가 되는『詩經均譜(시경운보)』,『群經均譜(군경운보)』의 기초를 잡다.

- 건륭 40년 서로 압운되는 문자의 群을 部라고 하는데 고염무는 17부, 강영은 13부로 나누었으나 단옥재는 17부로 나누어 5종류의 표로 완성했다. 훗날『說文解字注』의 권말에『六書音均表(육서음운표)』로 실었다.

- 戴震에게서 古音學을 배우다.

- 건륭 41년(42세)『說文解字讀』 시작

- 건륭 45년(46세) 고향으로 돌아 가다

- 건륭 51년『說文解字讀』완성.

- 건륭 57년(1792년) 소주로 이사.

- 가경 2년(1799년)『汲古閣說文訂』을 완성. 여러 종류의 宋本과 明刊本 운서, 송대의 각종 字書에 인용된『說文解字』의 구절을 참조하여 大徐本의 異同을 校勘하며 기초를 다졌다.

- 가경 12년(73세, 1807년) 30년 만에『說文解字注』완성

- 가경 18년(1813년)『說文解字注』인쇄 시작<經韻樓장판>

※ 經韻樓 : 단옥재의 서재 이름

汲古閣

- 江蘇省 常孰에 사는 毛晉의 서제 이름

- 아들 毛钞와 함께 귀중서를 수집·復刊한 것이 ‘汲古閣本’이다.

- 제5차 수정본의 간행으로『說文解字』大徐本의 원형 회복.

●『說文解字段注考正(설문해자단주고정)』

- 馮桂芬(풍계분:1809-1874)

- 인용문의 출처를 인용된 순서대로 기록.

●『皇淸經解續編』

- 王先謙(1842-1917), 阮元(1764-1849)의 『皇淸經解』를 증보.

- 淸代의 방대한 총서.

● 주준성(朱駿聲)의 『說文通訓定聲(설문통훈정성)』(1850년)

- 18권. 1850년. 부록 검운(檢韻) ·설아(說雅) ·고금운준(古今韻準)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수록된 문자를 고음십팔부설(古音十八部說)에 따라 분류하고, 각 문자에 대하여 本訓을 설명하였다.

- 성(聲:字音)을 근간으로 하였으며 자형을 중시했던 종래의 자전 내용과 체재를 일변시켰다.

- 특히 육서(六書)의 전주와 가차에 대하여 독창적인 해석과 정리.

- 한자의 용법에 반영된 고대중국어의 ‘파생어와 음통(音通)의 현상’ 등을 풍부한 용례로 제시하여, 언어학으로 중국어와 한자의 관계를 구명했다.

●『說文解字詁林(설문해자고림)』

- 丁福保(1874-1952년)

- 여러 종류의 해설을 한 곳에 모음.

- 대서본, 대서본 校訂, 소서본 校勘記, 단주, 桂馥『說文解字義證』, 王筠『說文解字句讀』, 朱駿聲『說文解字通訓定聲』, 갑골문, 금문 등 원저에서 발췌 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