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쌍계석문

2015. 6. 8. 09:06한국의 글,그림,사람

최치원의 글씨로 전해지는 지리산 쌍계사 입구의 '石門'

 

최치원의 글씨로 전해지는 지리산 쌍계사 입구의 '雙磎'

 

이상향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찾는 이상향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현실의 내가 과거의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향을 만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들은 이상향을 찾아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그렇게 그들이 찾고자했던 이상향을 그들은 지리산에서 찾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상향을 찾기 위해 지리산으로 찾아 들었다.

문헌상 이상향을 찾아 처음으로 지리산에 나타나는 인물이 신라시대의 최치원이다.
그는 중국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885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의 신라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고국에서 그가 설 자리는 없다. 그는 부정에 과감히 맞써 싸우지 못하고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전국을 유랑을 한다.

그리고 이상향인 청학동을 찾아 지리산으로 찾아 들은 것이다. 그러나 세속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한 편의 시로서 읊었다. 그가 쌍계사에 있으면서 호원상인에게 보낸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終日低頭弄筆端(종일저두농필단) 종일토록 머리를 숙이고 붓끝을 희롱하니
人人杜口話心難(인인두구화심란) 사람마다 입 다물어서 마음속 말하기가 어렵구나
遠亂塵世雖堪熹(원세녹세수감희) 속세를 멀리 떠나는 건 비록 즐겁지만
爭奈風情未肯蘭(쟁나풍정미긍란) 풍정이 없어지지 않으니 어찌할 것인고
影鬪晴霞紅葉徑(영투청하홍엽경) 맑은 노을, 단풍길 그림자가 다투고
聲連夜雨白雲湍(성연야우백운단) 비 오는 밤에 흰 구름 여울에 소리가 이어진다
吟魂對景無覇絆(음혼대경무패반) 읊조리는 마음과 경치에 얽매임이 없으니
四海深機憤道安(사해심기분도안) 너른 바다의 깊은 기틀을 생각하노라.
지성인의 고뇌와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시 한 수이다.
쌍계사 주변의 화개동에 여장을 푼 그는 숱한 자취를 남기고 지리산의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시대의 이인로도 이상향인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 나선다.
이인로가 살던 1200년대의 고려시대는 무신란과 몽고의 침략을 거치면서 난세로 접어들던 시기이다.
지식인들은 허무와 갈등으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무신정권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속세를 떠난 지식인들이 잇는 반면 현실과 타협하여 관직에 오른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인로는 속세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지리산 청학동으로 찾아 든 것이다.
지상의 낙원이라는 청학동.
그가 화엄사와 화개를 거쳐 신흥사에 여장을 풀고 지리산을 바라보니 가는 곳마다 선경이 아닌 곳이 없었다고 한다.
수많은 기암괴석과 골짜기 그리고 복사꽃과 살구꽃과 어우러진 초가집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그는 한 편의 시를 남긴다.

지리산에서 노닐다(遊智異山)
頭流山逈暮雲低(두류산형모운저) 두류산 저 멀리에 저녁구름 나직한데,
萬壑千巖似會稽(만학천암사회계) 수많은 골짜기와 바위, 회계산과 비슷하다.
策杖欲尋靑鶴洞(책장욕심청학동) 지팡이 들고 길을 나서 청학동 찾으려는데,
隔林空聽白猿啼(격림공청백원제) 건너편 숲 속에서 흰원숭이 울음만 들려오네.
樓臺縹渺三山遠(누대표묘삼산원) 누대는 아늑하고 삼신산은 멀리 보이고,
苔蘇微茫四字題(태소미망사자제) 이끼 낀 빗돌속에 네 글자가 희미하게 보이네.
試問仙源何處是(시문선원하처시) 도원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落花流水使人迷(낙화유수사인미) 꽃잎 뜬 시냇물이 길을 잃게 하는구나.

그러나 그가 그렇게 갈망하던 청학동을 찾지 못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벼슬길에 올랐다.
많은 선비들이 이상향을 찾아 지리산 청학동으로 나섰지만 누구도 청학동을 찾지 못했다.

지리산을 너무 좋아했던 남명 조식선생은 지리산을 15번이나 등정했다고 한다.

그는 '청학동'이라는 시를 읊었다.

靑鶴洞 (청학동)
獨鶴穿雲歸上界(독학천운귀상계) 한마리 학은 구름을 뚫고 하늘 나라로 올라 갔고,
一溪流玉走人間(일계류옥주인간) 구슬이 흐르는 한 가락 시내는 인간 세상으로 흐르네.
從知無累翻爲累(종지무누번위누) 누 없는 것이 도리어 누가 된다는 것을 알고서
心地河語不者(심지하어불자) 산하를 마음으로 느끼고서 보지 않았다고 말하네.

조선 성리학의 태두 정여창은 고운 최치원을 기리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雙溪寺裏憶孤雲(쌍계사리억고운) 쌍계사 안에서 고운선생을 생각하나
時務紛紛不可聞(시무분분불가문) 당시의 일이 분분하여 들을 길이 없구나
東海歸來還浪迹(동해귀래환랑적)고국에 돌아와서도 사방으로 방랑을 하니
祗綠野鶴本鷄群9지록야학본계군) 푸른 들판의 학이 닭무리에 끼였구나.

최치원을 학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닭무리로 비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