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로 한국의 풍류(지리산)

2015. 6. 8. 09:04한국의 글,그림,사람

<韓國(한국)의 風流(풍류)>

韓國의 선비들이 가장 尙友(상우) 삼고 싶었던 中國의 文人은 陶然明(도연명)이 아닐까 싶다. 陶然明은 東洋을 代表한다고 말할 수 있는 詩人과 農夫(농부)였다. 西洋이라면 로버트 프로스트가 該當(해당)하겠지만 말이다.

林語堂(임어당)의 定義(정의)에 따른다면 도연명은 人生과 自然을 가장 아름답게 調和(조화)시킬 줄 알았던 문인이었다. 理想(이상)과 現實(현실)을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시킨 문인이라고 말해도 마찬가지이리라.

“옛 사람 책을 읽으면

그 時代를 알 수 있고

그의 사람됨을 상상하면

환히 눈으로 보는 듯해

말 없이도 交遊(교유)할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孟子(맹자)가 말한

尙友(상우)라는 것이다…….”

이 글은 臥陶軒記(와도헌기)의 序頭(서두) 부분이다. 臥陶軒은 陶然明을 생각하며 누워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陶然明은 李仁老 뿐만이 아니라 退溪(퇴계)의 尙友이기도 했다면 얼마나 행복한 文人인가? 진정한 행복은 사후에 결정된다는 결정적인 본보기가 아닐 수 없으리라.

“돌아가리로다. 陶然明이 옛날에 돌아갔거니와 나 또한 돌아가리로다. 垓字(해자)의 사슴을 얻은들 무엇이 기쁘며 塞翁(새옹)이 말을 잃은들 무엇이 슬프리….”

이는 和歸去來辭(화귀거래사)의 서두 부분이다. 陶然明의 歸去來辭는 세상의 모든 歸去來辭를 대표하는 歸去來辭 중의 歸去來辭라고 할 수 있다. 李仁老는 그러한 歸去來辭에 和答(화답)하는 뜻으로 또 하나의 歸去來辭를 지은 것이었다.

陶然明이 世俗(세속)에 물드는 일을 극도로 꺼려했듯이 李仁老 또한 世上을 超脫(초탈)해 神仙(신선)처럼 노닐기를 소원했다. 中國의 竹林七賢(죽림칠현)을 본떠 竹林高會(죽림고회)를 만든 일은 단적인 증거라고 하겠다.

竹林高會의 구성원은 吳世才(오세재) 林椿(임춘) 趙通(조통) 등으로 이들을 海左七賢(해좌칠현) 또는 忘年友(망년우)라 불렀다. 망년우는 나이를 잊은 친구라는 뜻이었다.

(두류산형모운저한데)

萬 壑 千 巖 似 會 稽 (만학천암사회계라)

策 杖 欲 尋 靑 鶴 洞 (책장욕심청학동하니)

隔 林 空 聽 白 猿 啼 (격림공천백원제라)

樓 臺 三 山 遠 (누대표모삼산원하고)

苔 蘇 依 稀 四 字 題 (태선의희사자제라)

試 問 仙 源 何 處 是 (시문선원하처시꼬)

落 花 流 水 使 人 迷 (낙화유수사인미라)

“地異山(지리산) 아득하다 저문 구름 낮게 깔려

골짜기와 바위들 會稽山(회계산)인양 곱구나

지팡이 짚고 靑鶴洞(청학동) 찾자 하니

숲 저편 쓸쓸히 원숭이 울음 들려오네

樓臺(누대)는 아득해라 깊은 산 멀고 먼데

이끼 아래 새겨진 네 글자 희미하네

묻노라 신선의 땅 어디메뇨

낙화 물에 떠 시름 겹게 하네.”

이 시의 제목은 遊地異山(유지리산)이다. 이 시만으로 부족했던지 靑鶴洞記(청학동기)를 썼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 지리산에는 청학동이 있다고 한다. 좁고 험한 길을 몇 리 들어가면 문득 농사짓기 알맞은 들판이 열리는데 청학이 살고 있어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거다. 옛날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들어간 사람들이 살았는데 지금도 가시덤불 속에 무너진 담과 집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쯤에서 잠깐 靑鶴(청학) 이야기를 해보자. 拾遺記(습유기)를 보면 청학의 이야기가 나온다. 幽州(유주)의 遺墟(유허)인 羽山(우산)에 살며 사람의 얼굴에 새의 부리를 하고 여덟개의 날개와 하나의 다리를 지닌 靈異(영이)의 새다. 땅을 밟지 않으며 太平聖代(태평성대)에만 운다고 한다.

“韓半島에서 세계의 기운이 會通(회통)하여 思想統一(사상통일) 宗敎統一(종교통일) 南北統一(남북통일)의 시대가 열린다. 세계 文化의 꽃은 한반도에서 피어나니 이를 일러 大明이라 한다.”

지금 지리산 청학동에는 更定儒道(갱정유도) 신도들이 전통 生活方式을 固執(고집)하며 信仰村(신앙촌)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좌우지간 갱정유도 創始者(창시자)인 姜大成(강대성)의 霹靂(벽력)치는 듯한 天機漏洩(천기누설)을 들어보라. 일찌기 이보다 가슴 벅찬 민족적 使命感(사명감)과 自負心(자부심)을 깨달았던 이가 또 있었을까? 姜甑山(강증산) 한 사람만 빼놓고 말이다.

강대성은 孤雲(고운)의 脈(맥)을 잇는 風流道人(풍류도인)이었다. 실로 한국의 풍류도에는 世界史的으로나 文明史的으로 驚天動地(경천동지)할 엄청난 天命(천명)이 假託(가탁)되어 있었던 거다.

이제 實用主義者(실용주의자)들이 時代錯誤的(시대착오적)인 退嬰(퇴영)을 일삼고 있음도 이처럼 원대한 천명을 꿈에도 깨달을 길이 없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守舊勢力(수구세력)의 冷戰回歸(냉전회귀)는 南北和解(남북화해)와 통일의 滔滔(도도)한 흐름에 일시적으로 발생한 逆流現象(역류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강대성의 예언이 실현되려면 反統一(반통일) 反民族(반민족) 事大主義者(사대주의자)들의 뿌리인 親日派(친일파)부터 청산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자면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癌細胞(암세포)와 같아서 民族背反(민족배반)의 역사가 언제라도 되풀이되는 법임에랴.

실로 오늘날 進步(진보)와 保守(보수)의 死生決斷(사생결단) 生存試合(생존시합)의 본질도 바로 이것이었던 거다.

千古仙遊處 (천고선유처)

蒼蒼獨有松 (창창독유송)

但餘泉底月 (단여천저월)

髣髴相形容 (방불상형용)

“천년 전 신선이 놀던 곳

푸른 소나무 한 그루 뿐

다만 샘물에 떨어진 달이

비슷하게 얼굴을 떠올려주는듯.”

이 시의 제목은 寒松亭(한송정)이다. 新羅(신라)때 네 花郞(화랑)이 놀던 곳으로 세상에서는 이들을 四仙(사선)이라 불렀다. 자고로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를 靑丘(청구)의 나라라고 불렀다. 청구는 ‘신선이 사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신선의 나라 국민들이 마지막 分斷(분단)국가로 남아 냉전이나 일삼으면서 世界人들의 指彈(지탄)이나 받아서야 될 법한 일이겠는가?

不貴人所貴 (불귀인소귀)

不貪人所貪 (불탐인소탐)

江山風與月 (강산풍여월)

是我百年貪 (시아백년탐)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것 귀히 여기지 않고

사람들이 탐하는 것 탐내지 않네

강산의 바람과 달만이

백년 동안 탐하고자 하는 바일 뿐.”

이 시의 제목은 贈崔上舍起南(증최상사기남)이다. 歸去來(귀거래)하는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으면 이같이 노래했으랴?

“굽이굽이 돌길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바윗가 나무들 울창히 暮色(모색)에 물들었네

절이 푸른 절벽 속에 숨어 있음을 알겠거니

산들바람에 실려오는 저녁 종소리.” -원문 생략-

이 시의 제목은 煙寺晩鐘(연사만종)이다. 옛 사람들은 경치를 읊음을 두고 寫景(사경)이라 했다. 그림처럼 그려낸다는 뜻임은 물론이다.

待客客不至 (대객객부지)

尋僧僧亦無 (심승승역무)

唯餘林外鳥 (유여임외조)

款曲勸提壺 (관곡권제호)

“손님 기다려도 오지 않고

스님 찾아도 역시 없네

오직 숲 속의 새만이

술 들라고 권주가 읊는 듯.”

이 시의 제목은 ‘書天壽寺僧院壁(서천수사승원벽)’이다. 趙通(조통)이 梁州(양주) 원님으로 부임하러 갈 때 이인로는 咸淳(함순)과 함께 餞送(전송)하기 위해 天壽寺(천수사)에 갔다. 조통이 늦어지자 절의 벽에다 이 시를 장난삼아 써놓았다. 20년이 지나 住持(주지) 스님이 이인로를 찾아와 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인로는 껄껄 웃으며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 시를 自身의 文集(문집)에 포함 시켰다고 한다.

“富貴(부귀)로서 높낮이를 정하지 않느니 문장뿐이다. 훌륭한 문장은 해와 달 같아서 눈에 있는 자 다 본다. 가난한 선비라도 무지개 같은 빛을 후세에 드리울 수 있는게 문장이다. 다만 재능과 사상이 일치하지 않으면 둔한 말에 채찍질함과 같다. 때문에 옛 사람들은 뛰어난 재주라도 갈고 닦은 다음에 무지개 같은 빛을 千古(천고)에 전했다.”

이인로 會心(회심)의 문장론은 오늘날에도 무지개 같은 빛을 발하는 金科玉條(금과옥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