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장건(張騫)

2013. 11. 20. 09:10사람과사람들

 

  장건(張騫, ? ~ 기원전 114년)은 자는 자문(子文)이며

지금의 산시 성 성고현(城固縣) 사람으로

기원 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탁월한 탐험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한나라 때 서역으로 가는 남북의 도로를 개척하였으며,

서역의 한혈마, 포도, 석류, 복숭아 등의 물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기원전 139년 한나라 건원 4년, 당시 한나라는 변방을 어지럽히는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

대월지에 대한 동맹을 맺으려 사자를 모집하였다.

장건이 지원을 해서 지원자 100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역으로 가서 대월지국으로 향하였다.

  이전에 대월지월지라고 불리었는데,

흉노모돈 선우(冒頓單于)와 그 아들 노상 선우에게 패한 후,

서쪽으로 옮겨 이름을 대월지로 바꾸었다.

특히 노상 선우는

월지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으므로,

월지는 흉노를 원망하고 있었고,

한나라는 흉노 서방의 대월지와의 협공을 위해 장건을 대월지로 파견한다.

 수난

둔황 막고굴 제323굴 북벽의 장건출사서역도, 당나라초기(618~714년

  당시 서역 지방은 흉노의 세력권이었으므로,

장건이 한의 세력권인 감숙성으로 나가자마자 흉노에게 잡히고 만다.

 

  흉노의 군신 선우는

장건이 대월지로 가는 사자임을 알아채고,

“월씨는 우리들의 북쪽에 있다.

어떻게 한이 그곳에 사자를 보낼 수 있는가?

만약 내가 한의 남쪽 월나라에 사자를 보낸다면

한은 그것을 허용할까?”라고 말하며,

장건을 십여 년동안 구류하였다.

 

흉노에서 장건은 처도 얻고

그 사이에 아이도 낳았지만,

한나라의 사자로서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대완국

  그 후 흉노의 땅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흉노 서쪽에 있는 대완에 이르렀다.

대완은 익히 한나라의 강성함을 알고 있었기에

장건을 환대하고 대월지까지 길을 안내해 주었다.

  대월지흉노에게 패배한 연후에,

오손에 쫓겨서 더욱 서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장건은 강거로 들린 후에 드디어 대월지에 도착하였다.

 대월씨

  장건은 흉노와의 원수지간인 월지의 왕에게 한과의 동맹을 설명하였지만,

월지 왕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월지는 새로운 땅에 정착하여 풍부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 흉노와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흉노에 대한 복수심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다.

 귀향

  실의에 빠진 장건은

귀향 노선을

곤륜산맥을 타서, 강 일족의 지배지를 통과하는 것을 선택했지만,

또 다시 흉노에게 붙잡힌다.

 

일년 남짓 지나 군신 선우가 사망한 틈을 타서 탈출,

기원전 126년에 마침 한나라로 귀환했다.

 

출발할 때에 100명 남짓 있던 수행원은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동맹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장건이 가지고 돌아온 서역에 대한 지식은 지극히 귀중한 것이었고,

그때까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서역의 사정을 듣고,

한은 새로운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이 공로에 의해 장건은 태중대부가 된다.

 흉노 원정

  기원 전 123년,

무제는 대장군 위청으로 하여금

흉노 정벌 원정군을 출발시킨다.

여기서 장건은 경험과 지리 지식을 활용하여 크게 공헌하였고,

위위(衛尉) 박망후(博望侯)로 제수받게 된다.

그러나 기원전 121년의 원정에서 기일을 맞추지 못한 것을 문책받아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천산남로

  장건이 서역을 여행하는 도중에

촉(사천) 명산의 대나무와 옷감을 현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손에 넣었는 지 묻자, 인도의 상인으로부터 샀다고 했다.

이것에 의해 촉으로부터 윈난미얀마를 통하는 인도로 연결된 루트가 있는 것을 알고서,

장건은 무제에게 윈난을 한에 복속시키라는 건의를 몇 번이나 한다.

이 루트를 통하여 서역으로 연결된 루트를 개척한다.

 

한나라는 흉노에 대항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오손(烏孫)과의 동맹을 생각하고

기원 전 119년에 장건을 오손의 사자로 보낸다.

 사망

  기원 전 114년, 사망.

사후에 장건이 제시했던 계략이 서서히 열매를 맺고 시작하고,

서역 여러 나라는 한과 교역을 하게 되었고,

한은 흉노에 대해 유리한 입장을 가지게 된다.

 

흉노 [匈奴]

  BC 4세기말부터 AD 1세기말까지 몽골 고원과 동투르키스탄 일대를 지배했던 유목기마민족.

 

  주대(周代)에 중국의 북방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 험윤(獫狁)·훈죽(熏粥)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다.

역사

   BC 318년 흉노는

중국 전국시대의 제후국인 한(韓)·위(魏)·조(趙)와 함께 진을 공격했으며,

그뒤 중국 땅을 빈번히 침입했다.

 

이에 중국내의 여러 나라들은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각 성벽을 쌓았는데,

이것이 뒷날에 만리장성이 되었다.

 

흉노족이 강성해지기 시작한 것은

이들이 선우[單于]라고 불리는 단일 지도자 밑에서

광범위한 부족연합을 형성한 후부터이다.

 

즉 흉노는 진의 시황제 때의 장군 몽염(蒙恬)에게 격파당해 세력이 위축되기도 했으나,

두만(頭曼)이라는 선우가

진나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다시 세력을 확보했다.

 

그뒤 선우의 자리에 오른 모돈(冒頓)은

몽골 전지역을 지배하고, 북중국 일대에 대한 침입을 재개했다.

 

이에 중국을 재통일한 (漢)의 고조는

흉노의 정벌에 나섰으나, 도리어 흉노에게 크게 패했다.

 

그뒤로 한 고조는 흉노의 선우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

해마다 많은 양의 견직물·술·쌀 등을 공물로 바치는 동시에

흉노의 선우를 형으로 하는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이후 흉노는 서방경략에 나서

동투르키스탄 일대의 오아시스 국가들을 모두 지배하에 두고

그 국가들에게 동서교역의 안전을 지켜주는 대가로 교역의 이익을 나눠주었다.

 

이후 흉노는 한과의 화약을 무시하고

몇 번이나 한나라를 침입했으며,

그럴 때마다 한은 굴욕적인 조건으로 화평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한은 무제 때에 이르러 흉노를 무력적으로 격파하기 시작했다.

중앙 아시아에 토벌대를 파견하는 한편,

서역의 여러 나라들과 동맹관계를 맺어 흉노를 동서양방향으로 협공했다.

 

한나라의 공격을 받은 흉노는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세력이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았으며,

흉노를 공격했던 한나라는 지나친 군비지출로 인해 국력이 피폐해졌다.

 

그뒤 BC 60년경 흉노에서는

선우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나 5명의 선우가 병립했다가,

 2명의 선우가 대립하는 등 혼란을 거친 뒤

다시 통일되어 한나라와 화평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한나라가 망하고

왕망(王莽)이 신(新)나라를 세운 뒤

흉노의 선우에 대한 대우를 소홀히 하자,

흉노는 다시 중국을 침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48년 광무제가 중국을 통일하여 후한(後漢)을 세웠는데,

그 직후 흉노에서는 다시 내분이 일어나 남북으로 분열했다.

 

이에 남흉노는

후한에 귀복하여

중국 북방경계지역인 간쑤[甘肅]·산서[陝西]·산시[山西] 등지로 이주했다가

나중에 5호16국시대에 이르러

전조(前趙)·후조(後趙)·북량(北凉)·하(夏) 등을 세웠다.

 

반면 북흉노는

선비(鮮卑)·남흉노·후한의 잇달은 공격과,

기근·질병 등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점차 몽골 고원의 서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여

2세기 후반 경에는 키르기스 초원지대로 이동함으로써

중국과는 더이상 접촉하지 않게 되었다.

 

5세기 이후 이들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다만 7세기에 몽골 평원을 지배했던 유목민족인 돌궐족은

스스로 흉노족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또한 흉노족의 많은 풍습이

투르크의 것과 일치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일부역사학자들은 서부지방의 흉노족이 투르크족의 조상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한편 흉노족이 5세기에 로마 제국을 침략했던 훈족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훈족 ).

문화

    흉노의 경제기반은 방목형 목축업이었고, 주요가축은 양·말·소 등이었다.

이때 가축은 사유재산이었고, 목지는 공동소유물이었다.

주거지는 천막형 가옥이 일반적이지만,

선우 등의 귀족은 중국식의 궁전을 짓고 살았다.

국가체제는 부족연합체로서, 1년에 3번 선우의 지휘 아래 모든 부족장이 모여 국사를 논했다.

여러 부족장 중에 허련제씨(虛連題氏)족이 선우의 자리를 세습했다.

아버지나 형이 죽으면, 아들이나 동생이 친어머니를 제외한

아버지·형의 처첩과 결혼하는 풍습도 있었다.

 

만리장성 [萬里長城]

 Great Wall of China.

중국 역대 왕조가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대성벽.

  보하이 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약 6,400km(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다.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명대 특히 그 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동쪽은 보하이 만 연안의 산하이관[山海關]부터

중국 본토 북변을 서쪽으로 향하여 베이징[北京]과 다퉁[大同]의 북방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황허 강[黃河]을 건너며,

산시 성[陝西省]의 북단을 남서로 뚫고 나와

다시 황허 강을 건너고,

실크로드 전구간의 북측을 북서쪽으로 뻗어 자위관[嘉峪關]에 다다른다.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이다.

 

베이징의 북서쪽 바다링[八達嶺] 부근부터 쥐융관[居庸關]을 경유하여

다퉁의 남쪽 안먼관[雁門關]에 이르는 부분은 2중으로 축성되어 있는데,

2,700km가 전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다.

 

산하이관부터 황허 강에 이르는 부분은 매우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외면은 구워서 만든 연한 회색의 기와로 덮여 있다.

이것을 전(塼)이라고 하는데

내부는 점토를 붙여 딱딱하게 만들었다.

 

  바다링 부근은 높이 약 9m, 너비는 윗부분이 약 4.5m, 아랫부분이 9m가량이며,

총안(銃眼)이 뚫려 있는 톱날 모양의 낮은 성벽이 위쪽에 설치되어 있고

약 100m 간격으로 돈대(墩臺)가 설치되어 있다.

 

이에 비해 황허 강 서쪽 부분은

전을 사용하지 않고

햇빛에 말린 벽돌을 많이 사용해 매우 조잡하다.

청대에 들어와 보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곳도 있다.

출처 : 시너먼
글쓴이 : 시너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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