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漢詩와 書藝 / 田家(전가) - 柳宗元(유종원)

2013. 1. 9. 10:52한시

 

田家(전가)-柳宗元(유종원)

시골집-柳宗元(유종원)

 

籬落隔煙火(이락격연화) 울타리 사이로 밥 짓는 연기 보이고,

農談四鄰夕(농담사린석) 농사 얘기로 사방 이웃에 어둠이 내리네.

庭際秋蛩鳴(정제추공명) 마당가에서는 가을 귀뚜라미 울고,

疎麻方寂歷(소마방적력) 성긴 삼대는 마침 쓸쓸하게 보이네.

蠶絲盡輸稅(잠사진수세) 명주실을 모두 세금으로 바쳐 버려,

機杼空倚壁(기저공의벽) 베틀은 공연히 벽 옆에 서 있다네.

里胥夜經過(이서야경과) 이장은 밤에도 집집을 돌아다녀,

鷄黍事筵席(계서사연석) 닭 잡고 밥 지어 술자리를 마련하네.

各言官長峻(각언관장준) 모두 말하길, 관청 나리 엄하기만 하고,

文字多督責(문자다독책) 문서는 하나같이 세금 독촉뿐이라네.

東鄕後租期(동향후조기) 동쪽 마을에선 세금 기일을 놓쳐,

車穀陷泥澤(거곡함니택) 수레가 진창에 빠진 듯 곤경에 처했다네.

公門少推恕(공문소추서) 관청에선 백성 사정 헤아려 주지 않고,

鞭朴恣狼藉(편박자랑자) 매질을 무턱대고 우리에게 해대네.

努力愼經營(노력신경영) 힘써서 신중하게 일들을 처리하여,

肌膚眞可惜(기부진가석) 우리 살갗 정말로 아껴야 한다네.

迎新在此勢(영신재차세) 새로운 관리 이 해에 온다 하니,

惟恐踵前跡(유공종전적) 오로지 두렵다네, 지난 자취 뒤쫓을까.

 

籬 울타리 리, 귀뚜라미 공 杼 북저, 胥 서로 서, 黍 기장 서, 瑴 닥나무 곡, 扑 칠 복,

飢 주릴 기, 踵 발꾸치 종

 

- <유하동집(柳河東集)> 권 43에 실려 있는 같은 제목의 시 3편 가운데 두 번째 것이다.

- 籬落隔煙火(이락격연화) : 이락은 섶이나 대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친 울타리. 락은 울타리라는 뜻. 격연화는 밥을 짓는 연기와 불이 울타리 사이로 보이는 것.

-  庭際秋蛩(정제추공) : 정제는 뜰의 모퉁이. 제는 모퉁이, 변두리, 끝, 가. 공은 귀뚜라미.

- 疎麻方寂歷(소마방적력) : 소마는 성긴 삼대라는 뜻으로, 밭에 남은 삼대들을 가리킨다. 적력은 적막하다는 뜻으로 쓸쓸하게 보이는 것.

- 蠶絲盡輸稅(잠사진수세) : 누에를 쳐 생산해 낸 명주실은 모두 다 조세로 바쳐 남아 있지 않음. 수세는 세금으로 바치는 것.

- 里胥夜經過(이서야경과)  : 이서는 동리의 일을 맡아 보는 사람. 서는 하급관리로 아전. 야경과는 밤에도 돌아다님.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밤에도 관리들이 찾아오는 것.

- 鷄黍事筵席(계서사연석) :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술자리를 마련함. 계서는 닭을 잡아 국을 끓이고 기장을 안쳐 밥을 짓는다는 뜻으로, 남을 관대히 대접함을 뜻한다. 사연석은 술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하다의 뜻. 연석은 연석(宴席)과 같다.

- 東鄕後租期(동향후조기) : 동향은 동쪽의 마을. 후조기는 조세를 내어야 하는 기일에 늦는다는 뜻으로, 기일에 맞추어 조세를 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 公門少推恕(공문소추서) : 公門은 관청. 少는 하지 않다의 뜻. 推恕는 사정을 생각하여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

- 鞭朴恣狼藉(편박자랑자) : 鞭朴은 관리들이 백성들을 매질하는 것. 鞭은 채찍질하는 것. 朴은 두드리거나 치는 것. 朴은 박(撲)과 같은 글자로 쓰이기도 한다. 恣는 멋대로, 함부로. 狼藉는 이리가 풀을 깔고 누워 짓뭉개 놓듯이 멋대로 짓밟고 어지럽히는 것. 여기저기 흩어져서 어지러움. 원문에는 자(藉)가 적(籍)으로 되어 있으나 잘못 쓰인 듯하다.

- 經營(경영) : 도모하다. 꾀하다. 계획을 잘 세워 일을 하는 것.

- 肌膚眞可惜(기부진가석) : 肌膚는 피부와 살갗. 공연히 관원들에게 매를 맞아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

- 迎新(영신) : 새로 내임하는 관리들을 맞게 됨. 또는 올해의 새로운 추수를 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

- 踵前跡(종전적) : 踵은 발뒤꿈치. 앞 사람의 발뒤꿈치를 따라감. 새로 부임한 관리들이 전의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심하게 세금을 거두어 가는 것을 말한다.

 

출처 : 고문진보 전집/이장우외 2인 옮김/을유문화사

 

柳宗元[유종원(773~819)]-

 

자 자후(子厚). 장안(長安) 출생. 유하동(柳河東)·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른다. 관직에 있을 때 한유(韓愈)·유우석(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었다. 혁신적 진보분자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획하였으나 실패하여 변경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좌절과 13년간에 걸친 변경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한유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적이었다. 한유가 전통주의인 데 반하여, 유종원은 유·도·불(儒道佛)을 참작하고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천설(天說)》《비국어(非國語)》《봉건론(封建論)》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 우언(寓言) 형식을 취한 풍자문(諷刺文)과 산수(山水)를 묘사한 산문에도 능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하였는데, 그 자구(字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정채함은 특히 뛰어났다. 시는 산수의 시를 특히 잘하여 도연명(陶淵明)과 비교되었고,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 등과 당시(唐詩)의 자연파를 형성하였다. 송별시 ·우언시(寓言詩)에도 뛰어나 우분애원(憂憤哀怨)의 정을 표현하는 수법은 굴원(屈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저서에 시문집 《유하동집(柳河東集)》(45권) 《외집(外集)》(2권) 《보유(補遺)》(1권) 등이 있다.


출처 : 紫軒流長
글쓴이 : 紫軒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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