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9. 09:21ㆍ사람과사람들
장조화 "쓰레기 줍는 노인"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당신
▲ 장조화 ‘어머니의 희망’ 1954년. 종이에 색. 중국 개인
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아기
젊은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다.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에는 사랑스러움이 그득하다. 일을 하다 잠시 아기를 안아주러 온 걸까. 젊은 엄마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신발도 벗지 않은 상태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아기가 잠든 사이 부지런히 일을 하려는데 어느 새 깼는지 엄마를 찾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외면하지 못해 잠시 방에 들어왔다. 혼자 누워 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신이 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엄마와 눈을 마주친다. 세상의 그 어떤 미소가 이렇게 예쁠 수 있을까. 세상의 그 어떤 소리가 아기 소리만큼 고울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엄마에게 아기는 삶의 의미이고 희망이자 세상의 모든 것이다.
화선지 위에 아무런 배경 없이 오로지 엄마와 아기만 그려져 있어도 이 그림은 더 이상의 붓질이 필요 없다. 아무리 큰일이 닥쳐도 엄마 품에 안기면 모든 일이 해결되었던 아기의 어린 시절처럼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로 엄마와 아기만 있으면 충분하다. 값비싼 옷장도 요란한 장식물이 없어도 넘치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그린 중국 근대 수묵인물화의 대가 장조화(蔣兆和· 1904~1986)는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부모님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유랑민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녔다. 갖은 고생을 하며 독학으로 그림을 그린 그는 스물여섯의 나이로 대학교수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런 화가에게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의 모습은 잃어버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게 했을 것이다. 너무 오래된 과거라서 이젠 기억조차 희미한 어린 날의 행복을, 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회복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기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은 특정 종교의 예배 대상이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성모자(聖母子)’상이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마의 훈기는 아무리 매서운 겨울 추위도 훈훈하게 녹여버릴 수 있는 마법의 기운이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봐 준 엄마의 자식이다.
팔순쯤 되었을까. 등에 망태기를 짊어지느라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멍하니 서 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은 몇 차례 누볐을 무거운 외투 속에 꼭꼭 감추었다. 바구니를 걸친 두 손은 찬 기운을 피해 소매 속에 넣었다.
초점이 없는 시선 속에는 넝마주이를 하며 살아온 힘겨운 세월이 투영되어 있다. 가족은 없는 걸까. 가만히 앉아 있어도 삭신이 쑤시고 아플 나이에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 어떤 설명보다 절절하게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허리 굽은 할머니가 서 있다
장조화는 ‘어머니의 희망’ 같은 따뜻한 작품도 그렸지만 유랑민(流浪民)을 그린 작품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린 시절 본인이 직접 유랑생활을 하면서 본 사람들의 모습을 대학교수가 되어서도 줄기차게 그렸다.
출세한 후 행여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알까 봐 덮어버리거나 미화시키려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밝음과 어두움이 뒤섞인 자신의 인생을 건성으로 묻어버리지 않고 통투(通透)하게 바라보며 삶의 본질을 찾아내겠다는 다짐 속에서만 가능한 작업이다. ‘쓰레기 줍는 노인’이 그 어떤 고운 여인보다 더 진실하게 와 닿는 이유다.
당시 힘겹게 살아가는 노인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은 1941년판 ‘장조화 화집’에 실린 작품으로 최근에 출판된 화집에는 ‘已失(이미 사라짐)’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已失’의 의미가 작품 자체가 없어져버렸다는 뜻인지 혹은 소장처를 알 수 없다는 뜻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1930년대의 중국 상황을 대변해 주는 이 명작을 우리는 더 이상 직접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빛바랜 화집 속에서만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에 나온 82세 된 할머니는 자식이 여섯 명이나 되지만 다들 벌어먹고 사느라 바빠서 1년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을 때도 있다고 서운해 했다. 다리가 아파 약으로 연명한다는 어떤 할아버지는 자식들과 인연 끊어진 지가 오래되어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고 서러워했다.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소문은 이제 풍문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태가 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 해도 자식들에 대한 원망을 품고 사는 부모들이 많을 것이다. 어떻게 기른 자식인데 이럴 줄 몰랐다는 둥, 자식 길러놔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둥 배신감을 느끼는 부모의 하소연은 이 집 저 집에서 계속된다.
그러나 자식들이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너무 오랫동안 ‘효’라는 이데올로기에 억눌려온 자식들은 ‘효’라는 말만 들어도 급격한 피로감을 느낀다. 부모도 중요하고 형제간도 중요하지만 우선 당장은 나부터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언제 잘릴 지 모르는 회사를 다니며 노후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이 나라의 가장에게 부모는 짐이고 무거움이다.
나를 귀하게 길러준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불안하고 미래가 아득한 상황에서 부모의 불평불만은 또 하나의 스트레스이자 회피하고 싶은 멍에다. 나 살기도 힘든데 그 사정도 모르고 걸핏하면 어디가 아프다, 뭐가 필요하다면서 볼 때마다 손을 벌리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머리부터 지끈지끈 아픈 것이 자식의 심정이다. 아들의 심정이 이럴진대 며느리의 심정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자식 관계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부모가 자식을 그리워함은 원시적이고 맹목적이다. 어떤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본능이다. 분석될 수도 없고 규명할 수도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자식은 부모의 이 감정을 탓해서는 안된다.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고 정리할 수도 없을 때는 그냥 순순히 항복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노인 복지 정책에 대해서도 우리는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부모 자식 관계가 더 껄끄러워지기 전에 나라에서 알아서 노인돌보미서비스 같은 것을 실시해줘야 한다고 큰소리로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서비스가 실시된다 해도 부모가 자식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혼자 사는 1인 가구 수가 400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누군가 지켜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외롭게 죽어가야 하는 ‘고독사(孤獨死)’는 앞으로도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겨울이다. 날씨가 차가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마음까지 얼어붙은 계절이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부모님께 연락한 지가 오래되었다면 지금 당장 전화를 걸어보자.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지겹게 되풀이하더라도 짜증 내지 말고 들어주자. 우리 어머니는 내가 자라면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도 모두 참고 들어주시지 않았던가. 이제는 내 차례다
[출처] : 조정육 : 동양화 말을 걸다 / 주간조선
'사람과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韓國現代美術代表作家 100人選集(1) - 朴泳善 (0) | 2013.07.26 |
---|---|
[스크랩]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자비를 베푸소서)상* (0) | 2013.07.26 |
퇴계이황2 (0) | 2012.12.31 |
퇴계이황 (0) | 2012.12.31 |
[스크랩] 세월은 가도 가슴에 남아 있는 노래들 -윤석중(尹石重)- (0) | 2012.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