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舍方知(사방지)

2012. 12. 31. 11:45알아두면 조은글

 

 

金宗直(김종직)의 舍方知(사방지)에 대한 글

 

縫羅深處幾潛身

봉라심처기잠신

 

脫却裙釵便露眞

탈각군채편로진

 

造物從來容變幻

조물종래용변환

 

世間還有二儀人

세간환유이의인

 

비단옷 깊숙이 몸을 감춰 오다가

치마 비녀 벗으니 참모습 드러났네

예부터 조물주는 변환술에 능하여

세상에 음양을 겸한 사람도 있다네

 

男女何煩問座婆

남녀하번문좌파

 

妖狐穴地敗人家

요호혈지패인가

 

街頭喧誦河間傳

가두훤송하간전

 

閨裏悲歌楊白華

규리비가양백화

 

남녀를 어찌 번거로이 산파에게 물을 것 있나 요망한 여우가 굴을 파서 남의 집을 까부셨다네 길가에서는 하간전을 시끄러이 외워대고 규방 안에서는 양백화를 슬피 노래하네

 

 

舍方知(舍方知)와 林性仇之(임성구지)

사방지는 조선실록에도 나오는 실존 인물로, 남자와 여자의 성을 모두 갖춘 양성(兩性) 인물로 기록돼 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임성구지(林性仇之)'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올린다.

명종 1548년 11월 18일 함경 감사의 장계에 따라 양성(兩性) 인간 임성구지를 외진 곳에 살게 하다. 함경 감사의 장계에는,“길주(吉州) 사람 임성구지(林性仇之)는 양의(兩儀)가 모두 갖추어져 지아비에게 시집도 가고 아내에게 장가도 들었으니 매우 해괴합니다.”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성구지의 일은 율문(律文)에도 그러한 조문은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라. 성종조(成宗朝)에 사방지(舍方知)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아울러 문의하라.”하였다. 영의정 홍언필이 의논드리기를, “임성구지의 이의(二儀)가 다 갖추어짐은 물괴(物怪)의 심한 것이니 사방지의 예에 의하여 그윽하고 외진 곳에 따로 두고 왕래를 금지하여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하니, 상이 따랐다.사방지(舍方知)는사방지란 자는 사천(私賤)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 어미가 여자아이의 의복을 입히고 연지와 분을 발라주고, 바느질을 가르쳤다. 장성하여서는 벼슬한 선비의 집안에 꽤나 드나들며 많은 여시(女侍)와 통하였다. 선비 김구석(金九石)의 아내 이씨(李氏)는 판원사(判院事) 이순지(李純之)의 딸인데, 과부로 있으면서 사방지를 끌어다 수놓는다고 핑계하고 밤낮으로 함께 있은 지가 거의 십년이 되었다. 

천순(天順) 7년 봄에 사헌부에서 이를 듣고 국문을 하였는데 그가 평소에 통하였던 여승[尼]에게 묻자, 여승이 말하기를 ‘양도(陽道)가 매우 장대하다.’ 하므로 여자아이 반덕(班德)에게 만져보게 하였더니 정말이었다. 상이 승정원 및 영순군(永順君)의 스승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에게 여러 가지로 시험하여 보게 하였다. 

하성위의 누이는 이씨의 며느리였다. 하성위 역시 혀를 내두르며 ‘어쩌면 그렇게 장대하냐.’ 하였다. 상은 웃으시고 특별히 추국하지 말라고 하시며 이순지의 가문을 더럽힐까 염려된다.’ 하시고 사방지를 이순지에게 주어 처리하게 하니 이순지는 다만 곤장 십여 대를 쳐서 기내(畿內)에 있는 노자(奴子)의 집으로 보내었다. 얼마후 이씨는 몰래 사방지를 불러들였는데 이순지가 죽은 후에 더욱 방자하게 굴어 그침이 없었다. 그 뒤에 재추(宰樞)가 한가한 이야기 끝에 아뢰니, 상이 사방지를 곤장을 쳐 신창현(新昌縣)으로 유배하였다.

 

 

사방지(감독 송경식·1988)조선시대, 흉악범과 광녀 사이에서 ‘양성’으로 태어난 ‘사방지’가 사대부가 마님들의 세계에서 일대 성적혼란을 일으키고 개인적 복수를 꾀한다는 내용. ‘스캔들:

 

金宗直(김종직 1431~1492조선 초기 성종(成宗) 때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盥) 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경남 밀양출신. 아버지 숙자(叔滋)와 어머니 밀양(密陽) 박(朴)씨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1453년(端宗 1) 진사에 합격하여, 이해에 창녕(昌寧) 조(曺)씨 울진현령(蔚珍縣令) 계문(繼門)의 딸과 결혼하였다. 1455년(세조1)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고, 145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박사를 거쳐 1463년 사헌부감찰로서 불사(佛事)를 간하다가 파직되었다. 1465년 영남병마평사로 기용되어 홍문관수찬․이조좌랑․예문관응교․수찬을 지냈다. 1471년(성종2)에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1476년 선산부사․홍문관응교․승문원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 등을 거쳐 1487년에 다시 외직으로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병조참판․공조참판․형조판서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많은 신진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고 자신도 부관참시 당하였다. 그는 문학․역사 등에도 관심이 많아 산일(散逸)된 작품을 수습한 문집에는 1,200여 편의 한시와 다수의 산문 작품이 전한다. 저서와 편서로는 점필재집(佔畢齋集)․유두류록(遊頭流錄)․당후일기(堂後日記)․청구풍아(靑丘風雅)․동문수(東文粹)․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선산지도지(善山地圖志)․영남지도지(嶺南地圖志)․이존록(彛尊錄) 등이 전하고 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선산의 금오(金烏)서원․함양의 백연(栢淵)서원․김천의 경렴(景濂)서원․개령(開寧:김천)의 덕림(德林)서원 등에 제향되고 있다. 처음 시호는 문충(文忠), 개시(改諡)는 문간(文簡)이다.

출처 : 재령이씨 인자 조 후손
글쓴이 : 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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