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31. 11:37ㆍ알아두면 조은글
꿈속을 거닐다-몽유도원도- 安平大君(안평대군)
題閣老畵幅 安平大君 (李瑢)(.제각노화폭 안평대군 (이용)
萬疊靑山遠, 三間白屋貧,
만첩청산원 삼간백옥빈
竹林烏鵲晩, 一犬吠歸人.
죽림오작만, 일견폐귀인.
만첩청산 아득한 속에 초가삼간 초라하다.
대숲에 까막까치 해는 저문데
지나가는 사람보고 개가 짖는다.
꿈속을 거닐다
이 그림을 안견(安堅)이 그리게 된 사연은 이렇다. 1447년 4월 20일 밤이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무릉도원을 거닐고 있는 꿈을 꾸었다. 박팽년(朴彭年)과 함께 봉우리가 우뚝한 산 아래에 이르렀더니, 수 십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갔다. 그러자 갈림길이 나왔다. 잠시 망설이고 있자니, 한 사람이 나타나 말했다.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원에 이릅니다."
두 사람은 말을 몰아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러자 첩첩산중에 구름과 안개가 서려 있고, 복숭아나무 숲에는 햇빛이 비쳐 노을이 일고 있었다. 또 대나무 숲에 있는 집은 사립문이 반쯤 열렸는데, 사람도 가축도 없었다. 냇가에 빈 배만이 물결에 따라 흔들리는 매우 쓸쓸한 곳이었다. 안평대군은 박팽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녕 이곳이 무릉도원이다."
마침 최항(崔恒)과 신숙주(申叔舟)도 뒤따라와 함께 시를 지으며 내려왔고, 그러던 중 잠에서 깨어났다. 안평대군은 곧 안견을 불러 꿈에서 본 도원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러자 안견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생각하며 꿈의 내용을 단 3일만에 그려 바쳤다. 그것이 바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그림이 완성되고 3년이 지난 1450년 정월 초하룻날 밤이었다. 치지정(致知亭)에 오른 안평대군(安平大君)은 그림을 다시 펼쳐 놓고는 첫머리에 '夢遊桃源圖(몽유도원도)'라 제첨(題簽)을 쓰고, 이어 칠언절구의 시를 감색(紺色) 바탕의 비단에 빨간 글씨로 썼다.
世間何處夢桃源 野服山冠尙宛然
세간하처몽도원 야복산관상완연
著畵看來定好事 自多千載擬相傳
저화간래정호사 자다천재의상전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은자들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다
천년을 이대로 전하여 봄직하지 않는가.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시를 짓자, 그를 따르던 집현전(集賢殿)의 학자와 문사 20여명, 그리고 고승 한 명이 그림을 칭찬하는 글과 시를 지어, 모두 23편의 그림을 찬양하는 글들[撰文]이 곁들여졌다. 문사로는 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정인지(鄭麟趾)·박영(朴英)·김종서(金宗瑞)·서거정(徐巨正)·성삼문(成三問)·김수온(金守溫) 등으로 모두 대군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다.
안견(安堅)의 그림과 이들의 시문은 현재 두 개의 두루말이로 나뉘어 표구되어 있는데, 박연(朴壖)의 시문까지가 첫 번째 두루마기에(8.57m), 김종서(金宗瑞)의 찬시부터 최수의 찬시까지가 두 번째 두루말이에(11.12m) 실려 있다. 이들의 시문은 모두 자필로 쓰여져 문학성은 물론 서예 분야에서도 큰 가치를 지닌다. 이로서 몽유도원도는 그림과 시와 글씨가 함께 어울러진 조선 초기의 기념비적인 걸작이 되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안견(安堅)만은 살아남은 일화가 「백호 전서(白湖全書)」에 전한다. 안견(安堅)은 충남 서산의 지곡(地谷) 사람으로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의 총애를 받으며 산수화를 열심히 그렸다. 안평대군은 시문을 몹시 좋아해 당대의 선비들과 두루 사귀었고, 특히 안견(安堅)의 그림을 좋아하여 그가 잠시도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안견(安堅)도 자기를 알아주는 대군을 위해 몽유도원도를 비롯하여 많은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 와중에 안견(安堅)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려는 정란의 기운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목숨을 건지고자 대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안평대군은 안견을 끈질기게 곁에다 두고 싶어했다. 생각다 못한 안견이 꾀를 내었다. 중국에서 용매먹(龍煤墨)을 구해 오자, 안평대군은 안견을 불러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안견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잠시 안채로 들어갔다가 돌아 온 대군은 깜짝 놀랐다. 귀하게 여기던 용매먹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안평대군은 즉시 종과 여종을 꾸짖었다.
그러자 그들은 한사코 모른다고 하며 안견에게 혐의를 돌렸다. 그러자 안견은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해 보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용매먹이 그의 품속에서 떨어졌다. 화가 난 안평대군은 안견을 내쫓고는 다시는 출입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안견은 아무 말도 안하고 물러 나갔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이 일어나고,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다음 사약을 내려 죽였다. 또 그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도 모두 모반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안견만이 화를 모면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비로소 안견의 예지에 감탄했다. 어떤 사람은 덕을 품고서도 더러운 행실을 저질러 화를 모면했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높은 식견과 멀리 보는 안목으로 세상을 살았다고 말했다.
몽유도원도(안견 그림)
몽유도원도 발문 (안평대군)
ꋮ安平大君 (李瑢)1418(세종 즉위년)∼1453(단종 1). 이름은 이용(李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居士)·매죽헌(梅竹軒)이다. 조선 세종의 8왕자 중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세종 10년(1428) 대광보국안평대군(大匡輔國安平大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11세 때에 좌부대언(左副代言) 정연(鄭淵)의 딸과 결혼하였다.
1430년 조선왕조 개국 후 처음으로 여러 왕자들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고, 1438년 함경도에 진(鎭)이 신설되자 왕자들과 함께 야인(野人) 토벌에 참가하였다. 세종이 붕어한 뒤 훈구대신인 김종서(金宗瑞) · 황보인(皇甫仁) 및 술수에 뛰어난 이현로(李賢老)와 제휴하여 인사행정의 하나인 황표정사(黃票政事)를 장악하고 측근의 문신을 요직에 앉히는 등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무신세력과 맞서 조정의 실력자로 등장했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면서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간 사이에 이징옥(李澄玉) 등을 시켜 경성(鏡城)의 무기를 서울로 옮기고 군사를 모으는 등 무력양성에 힘썼으나 수양대군이 귀국하여 황표정사를 폐지하자 실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듬해 9월 황표정사를 부활시키는 등 실권회복에 힘썼으나 다음달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 · 황보인 등이 살해된 뒤 강화(江華)로 유배되었다가, 교동(喬桐)으로 이배된 뒤 사사(賜死)되어 35년간의 짧은 생을 마쳤다. 영조 때(1747) 김재로(金在魯)의 상소로 복호(復號)되었으며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桃花(도화:복사꽃)는 미인의 상징이었다. '시경(詩經)'의 도요(桃夭)시의
'桃之夭夭 灼灼其華(도지요요 작작기화)'로부터 桃夭는 여자가 혼기가 된 것을 뜻하게 되었다. 진(晉)의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는 무릉(武陵)의 어부가 고기를 잡으러 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복사꽃숲을 만나게 되자 경치에 취하여 끝까지 갔다가 이 세상과는 다른 마을을 발견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로부터 武陵桃源(무릉도원)이라는 말이 생겼다. 또 桃李不言下自成蹊(도리불언하자성혜)는 복숭아와 오얏은 맛이 있어 그 나무 아래에는 자연히 길이 생긴다는 말로 덕있는 자는 무언 중에 사람을 심복시킴을 말한다.
공자는 가정의 화목에 대하여 대학에서 다음과 같이 시경을 인용했다.
桃之夭夭 灼灼其華 之子于歸 宜其室家 桃之夭夭 有賁其實
도지요요 작작기화 지자우귀 의기실가 도지요요 유분기실
之子于歸 宜其家室 桃之夭夭 其葉召召 之子于歸 宜其家人
지자우귀 의기가실 도지요요 기엽소소 지자우귀 의기가인
복사나무 앳되고 고음이여, 그 꽃이 떨기떨기 피었네.
시집가는 이 아가씨 그 집안 화목케 하리.
복사나무 앳되고 고음이여, 그 열매 탐스럽네.
시집가는 이 아가씨 그 집안의 복덩이.
복사나무 앳되고 고음이여, 그 잎 짙푸르네.
시집가는 이 아가씨 그 집안 화목케 하리.
『시경』, 「주남」편
사람이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복숭아꽃같이 아름다운 것이며, 시집가는 신부는 그 집안의 화목에 대한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결혼은 복숭아 열매처럼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며 그 집안에 짙푸른 잎사귀와 같이 건강한 행복을 가져와야 한다. 활짝 핀 복사꽃으로 시작되는 이 시는 그 탐스러운 열매와 그 무성한 잎사귀로 흥을 돋우면서 아리따운 처녀의 결혼을 축복한다. 그것은 확실히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비유이며 표현 기법도 소박하고 힘찬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夫天地者萬物之逆旅,
부천지자만물지역려
光陰者百代之過客,
광음자백대지과객
而浮生若夢, 爲歡幾何
이부생약몽, 위환기하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백대의 나그네라,
덧없는 인생 꿈 같으니
기쁨되는 일 얼마이리오
하였으나 또
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
개경연이좌화, 비우상이취월
좋은 자리 마련하여 꽃을 대하고
앉아 깃털 조각 술잔을 돌리며
달 아래 취한다
했으니 이 봄에 꽃구경 나서는 이들의 마음이 바로 이러하리라.
桃花源記 도화원기-陶淵明 도연명
晋太元中, 武陵人捕漁爲業. 緣溪行, 忘路之遠近,
진태원중, 무릉인포어위업. 연계행, 망로지원근,
忽逢桃花林. 夾岸數百步, 中無雜樹, 芳草鮮
홀봉도화림. 협안수백보, 중무잡수, 방초선
美, 落英 빈紛. 漁人甚異之. 復前行, 慾窮其林.
미, 낙영 빈분. 어인심이지. 부전행, 욕궁기림.
林盡水源,便得一山. 山有小口, 彷佛若有光.
림진수원,편득일산. 산유소구, 방불약유광.
便捨船, 從口入. 初極狹, 才通人. 復行數十步,
편사선, 종구입. 초극협, 재통인. 부행수십보,
豁然開朗, 土地平曠, 屋捨儼然, 有良田美池桑竹
활연개랑, 토지평광, 옥사엄연, 유량전미지상죽
之屬. 阡陌交通, 鷄犬相聞. 其中往來種作, 男女衣着,
지속. 천맥교통, 계견상문. 기중왕래종작, 남녀의착,
悉如外人. 黃髮垂초, 幷怡然自樂. 見漁人
실여외인. 황발수초, 병이연자락. 견어인
乃大驚,問所從來,具答之.便要還家, 設酒殺鷄作食.
내대경,문소종래,구답지.편요환가, 설주살계작식.
村中聞有此人, 咸來問迅. 自雲先世避秦時亂
촌중문유차인, 함래문신. 자운선세피진시란
率妻子邑人來此絶境, 不復出焉, 遂與外人間隔.
솔처자읍인래차절경, 부부출언, 수여외인간격.
問今是何世, 乃不知有漢, 無論魏晉. 此人一一爲具言所聞, 皆嘆완
문금시하세, 내부지유한, 무론위진. 차인일일위구언소문, 개탄완
余人各復延至其家. 皆出酒食. 停數日, 辭去. 此中人語雲:
여인각부연지기가. 개출주식. 정수일, 사거. 차중인어운:
"不足爲 外人道也."
"불족위 외인도야."
旣出, 得其船, 便扶向路, 處處志之. 及郡下, 指太守, 說如此.
기출, 득기선, 편부향로, 처처지지. 급군하, 지태수, 설여차.
太守卽遣人隨其往, 尋向所志, 遂迷, 不復得路.南陽劉子驥,
태수즉견인수기왕, 심향소지, 수미, 부부득로.남양유자기,
高尙士也 聞之,欣然規往.未果,尋病終.后遂无問津者.
고상사야 문지,흔연규왕.미과,심병종.후수무문진자.
<『陶淵明集』 卷6>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A.D 377-397년), 무릉(武陵)에 고기를 잡는 어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시내를 따라 가다가 어디쯤인지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배는 어느새 복숭아 꽃이 강 양켠으로 흐드러진 곳을 지나고 있었다. 수백보의 꽤 긴 거리를 그렇게 배는 흘러갔는데, 잡목은 보이지 않고 향기 드높은 꽃들이 선연히 아름답게 피어 있었으며 꽃잎들은 분분히 날리며 떨어지고 있어 어부는 아주 기이하게 여겼다.
앞이 궁금하여 계속 나아가니 숲이 끝나는 곳에 수원(水源)이 있었고 그곳에 산이 하나 막아섰다. 거기에 작은 동굴이 있었는데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부는 배를 버리고 동굴입구로 들어갔다. 들어갈 때는 구멍이 아주 좁아 사람 하나 정도 들어갈 만하더니, 몇 십 발자국 나서자 시야가 훤하게 트여왔다.
너른 들판에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기름진 전답이며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나 대나무 등속이 눈에 들어왔다. 옛날의 (즉 진시황 이전의) 토지구획 그대로 개와 닭 소리가 한가로이 들리고 있었다. 그 사이를 사람들이 오가며 경작하고 있었는데 남녀가 입은 옷이 모두 이국풍이었다. 기름도 바르지 않고 장식도 없는 머리를 하고, 한결같이 기쁨과 즐거움에 넘치는 모습들이었다.
어부를 보더니 크게 놀라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했더니 집으로 초대해 술을 내고 닭을 잡아 음식을 베풀어 주었다. 낯선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돌아 모두들 찾아와 이것저것 물었다. 자기네들은 옛적 선조들이 진(秦) 통일기의 난을 피해 처자와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이 절경에 왔는데, 그 이후 다시 밖으로 나가지 않는 바람에 외부와 격절되고 말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이 대체 어느 시대냐고 묻기도 했다. 진(秦) 이후 한(漢)이 선 것도, 한(漢) 이후 위진(魏晉)시대가 온 것도 알지 못했다. 어부가 아는 대로 일일이 대꾸해주자 모두들 놀라며 탄식했다. 사람들은 교대로 돌아가며 그를 집으로 초대해 술과 음식을 내주었다.
그렇게 며칠을 머문 후, 어부는 이제 가봐야 겠다. 고 말했다. 마을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바깥세상에는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어부는 동굴을 나서서 배에 올라, 방향을 잡아 나가면서 곳곳에 표식을 해 두었다. 고을로 돌아와 태수에게 자초지종을 고했더니, 태수는 사람을 보내오던 길을 되짚어 표식을 더듬어 나가게 했으나 다시 그 길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남양(南陽)의 유자기(劉子驥)는 뜻이 높은 은자(隱者)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며 그곳을 찾아가려 했으나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 후로는 이 나룻터를 찾거나 묻는 이가 없었다. 한다.
곡구릉성(哭具綾城 구릉성을 곡하며)-신숙주(申叔舟)
一氣有聚散 生死如晝夜
일기유취산 생사여주야
天道固如是 不必空嘆咤
천도고여시 불필공탄타
此理素所講 念言不能舍
차리소소강 념언불능사
夫子我所師 德量逼造化
부자아소사 덕량핍조화
汪汪萬頃波 涯涘誰能訝
왕왕만경파 애사수능아
際遇贊明時 柱石在大廈
제우찬명시 주석재대하
刺口論是非 於君無小罅
자구론시비 어군무소하
有德必有壽 施獲於旣稼
유덕필유수 시획어기가
謂將享期頤 俄然禍所嫁
위장향기이 아연화소가
交情數十載 連袂常竝駕
교정수십재 련몌상병가
人事詎可恃 一夕忽彫謝
인사거가시 일석홀조사
耿耿懷宿昔 哀哀雙淚瀉
경경회숙석 애애쌍루사
滿城風雨惡 孤燈題楚些
만성풍우악 고등제초사
分明更五撾 獨坐不成臥
분명경오과 독좌불성와
한 기운에는 모이고 흩어짐이 있고
죽고 사는 것은 낮과 밤 같은 것이다.
천도가 본래 이러한 것이니
반드시 부질없이 탄식할 것 없도다.
이 이치는 처음부터 안 것이나
말할 것을 생각하니 버리지 못한다.
부자는 나의 스승
덕의 량이 조화옹에 가깝다
넓고 깊은 만경창파
그 끝을 누군들 능히 알 수 있으리오.
지우를 받아 밝은 시대를 도와
큰 집에 기둥과 주춧돌 노릇을 했다
기롱하는 사람들의 입이 시비를 의논하나
그대에게는 조그만 틈도 없었다
덕이 있으면 반드시 오래감이 있고
심으면 반드시 수확이 있느니라.
백세 사시라 생각했더니
갑자기 이 화가 닥쳤습니다.
서로 사귄지 수십 년에
옷깃을 함께하고 수레를 나란히 하였습니다.
사람의 일을 어찌 믿으리까
하루 저녁에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도다.
초초히 옛날을 생각하니
서글퍼 두 줄기 눈물이 쏟아집니다.
성에 가득 비바람은 험악한데
의로운 등잔 밑에 초혼사를 쓰고 있습니다.
오경이 분명한데
홀로 앉아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신숙주(申叔舟)1417(태종 17)∼1475(성종 6).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
南浦(남포남포에서)-金宗瑞(김종서)
送客江頭別恨多 管絃凄斷不成歌
송객강두별한다 관현처단불성가
天敎風伯阻征旆 一夕大同生晩波
천교풍백조정패 일석대동생만파
강가에서 손을 보내니 이별의 한 깊어라
곡조가 처량하여 노래 다 부르지도 못 하네
하늘이시여, 바람불어 출정하는 깃발을 막아주소서
저녁녘 대동강엔 물결이 이네
* 김종서(金宗瑞, 1390-1453)는 세종 때 6진을 개척하였고 어린 단종을 보필하다가 죽은 문신이다.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본관은 순천이다. 44살에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6진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지내고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었다. <고려사>를 개찬하였고, 61살에 좌찬성이 되어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했다. <세종실록>,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감수하였고, 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이 되어 황보인 등과 어린 왕을 보필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에 의해 아들과 함께 격살되었다.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신으로 문종의 유명(遺命)으로 단종을 보필한 재상 중 대호(大虎)라고 불리었다. 시조 2수가 전한다.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장백산(長白山)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떻다 능연각상(凌烟閣上)에 뉘 얼굴을 그릴꼬.
제산수병(題山水屛산수 병풍을 보고)-김수온(金守溫)
描山描水摠如神 萬草千花各者春
묘산묘수총여신 만초천화각자춘
畢竟一場皆幻境 誰知君我亦非眞
필경일장개환경 수지군아역비진
산과 물 그리는 솜씨, 신과 같아
온갖 꽃과 풀 화려하여라
그러나 끝내는 모두 꿈인 것을
그대와 나도 모두 진여가 아님을 어찌 알랴
* 김수온(金守溫1409(태종 9)∼1481(성종 12). 본관은 영동(永同), 자는 문량(文良), 호는 괴애(乖崖) · 식우(拭췚), 증 영의정 김훈(金訓)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나 인현동 1가에서 거주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로 발탁되어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찬에 참여하였다. 오위(五衛)의 군직인 부사직(副司直)으로 있을 때 왕명을 받아 《석가보(釋迦譜)》를 증수하였다. 이는 세종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가의 전기를 만든 것인데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였다.
〈원각사비명(圓覺寺碑銘)〉을 찬하고 문집인 《식우집(拭췚集)》을 남겼으며 《치평요람(治平要覽)》 《의방유취(醫方類聚)》 등 많은 편찬사업에 공헌하였다. 그는 벼슬이 재상(宰相)에 이르고 세종 ·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학문에만 몰두하고 빈곤을 면치 못하여 살림이 구차하였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少日(소일젊은 날)-徐居正(서거정)
少日豪談奮雨髥 年來斂鑰遠人嫌
소일호담분우염 년래렴약원인혐
徒前宦路羊腸險 抵老才名鼠尾尖
도전환로양장험 저로재명서미첨
詩不驚人吟又改 酒能忘我醉還添
시불경인음우개 주능망아취환첨
欲書折簡招碁伴 凍筆如錐不可拈
욕서절간초기반 동필여추불가념
젊을 때에는 호방하여 말 탈 때 두 수염을 떨쳤는데
몇 년 전부터는 칼날을 거두어 남의 눈치도 멀리한다.
지금까지의 벼슬길은 양의 창자처럼 험했지만
늙어가니 재주와 명성은 쥐꼬리처럼 뾰족해졌네.
시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못하니 읊고 또 고치고
술은 나를 잊게 하니 취하고 또 마신다.
편지를 써서 바둑 친구를 불러 친구하려하나
언 붓이 송곳 같아서 집을 수조차 없구나.
徐居正(서거정1420(세종 2)∼1488(성종 19).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 정정정(亭亭亭)이다. 아버지는 목사(牧使)서미성(徐彌性),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로서 조선 전기의 문신 · 학자이다.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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