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31. 11:29ㆍ한시
鷄鳴(계명)이란 이름의 소금강(小金剛) 金井山 (금정산)
금정산(金井山)은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치닫는 太白山脈(태백산맥)의 남쪽 끝에 솟은 산으로 그 주봉인 고당봉(姑堂峰,801.5m), 장군봉(將軍峰727m), 계명봉((鷄鳴峯605m), 上鷄峯(638m), 원효봉(元曉峯687m), 의상봉((義湘峯)620m), 파리봉, 미륵봉, 대륙봉 등 600m 내외의 봉우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으로는 洛東江(낙동강)과 수영강의 분수계를 이루고 있으며, 낙동강 지류인 화명천을 바라보고 『ㄷ』자형을 하고 있다.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1486)의 東萊縣(동래현) 산천조에 의하면, "金井山은 東萊縣 북쪽 20리에 있는데 산정에 돌이 있어 높이가 3장(丈) 가량이다. 그 위에 샘이 있는데 둘레가 10여척이고 깊이가 7촌(寸) 가량으로 물이 늘 차 있어 가물어도 마르지 않으며 색이 黃金과 같다. 금어(金魚)가 五色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 샘에서 놀았으므로 산 이름을 金井山이라 일컫고 그 산 아래 절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라 이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金井山의 傳說
安樂禪師와 趙相國의 不忘壇(안악선사와 조상국의 불망단)
安樂禪師(안락선사)는 일찍부터 梵魚寺에 입산하여 곧은 뜻과 신심을 가지고 학문을 닦고 부지런히 수행하였으며 보시 행을 발원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남을 위하여 바쳤다. 조선시대 排佛崇儒(배불숭유) 정책으로 佛敎가 받은 迫害(박해)는 필설로 이루다 형언할 수 없다. 조선중엽에 이르러 그것은 극에 달했는데 승려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일개 사찰에 부여된 부역이 종이 붓, 노끈, 짚신, 지게 등 여러 가지로 梵魚寺(범어사)에 철마다 부여된 부역의 수만도 40여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무렵의 승려들은 자신들의 공부는 전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나라에 부여된 부과에 종사하기도 바빴다.
安樂禪師(안락선사)는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뼈아프게 개탄하시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부역만은 면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설사 금생에 안 되면 내생에라도 부역을 면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으리라 마음먹고 원력을 세웠다. 그는 布施精神(보시정신)을 가지고 자기가 가진 財物(재물)을 모두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나라의 고급 관리가 되리라. 그 관리의 특권으로 梵魚寺 스님들의 부역을 혁파하리라 생각하고 그날부터 힘이 닿는 대로 무주상보시(無住想普施)의 큰 원행을 스스로 실천하였다.
지금의 기찰부근의 東萊에 들어가고 나가는 길목, 큰 소나무 밑에 우물을 파서 행인들의 식수를 제공했으며, 수박등을 심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無限定 布施하였다. 또 기장으로 지나가는 칼치재에 초막을 지어 그 곳에서 地被(지피)신을 삼아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신을 시주하는 등 온갖 일로서 많은 사람을 구제하시다가 마지막 몸뚱이까지도 보시하고자 돌아가실 때에는 범어사 뒷산 밀림 속에서 삼일동안 헤매다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이가 되었다 고한다. 스승이 돌아가시기 전에 스스로 宿命通(숙명통)을 못 하였으므로 세 가지의 증명할 일을 남겨 놓기로 하였다.
첫째는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어 올 때는 모든 관리가 다 일주문 앞에서 말에 내리는 데 자신은 梵魚橋 앞에 내리겠고
둘째는 자신이 쓰던 방을 봉해 두었다가 스님 스스로가 열 것이며
세째는 사찰의 어려움을 물어서 해결할 것을 약속하리라는 것이다.
스님이 돌아가시고 선사의 눈물겨운 원력이 성취될 날만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느 날 巡相國이라는 중앙의 높은 벼슬을 지내는 사람이 온다는 전갈을 받고 범어사 모든 대중들은 어산교(魚山橋)까지 나가서 행렬을 지어 기다렸던 것이다. 이 사람은 일주문까지 말을 타고 올라가는 상례를 깨고 어산교(魚山橋) 앞에 와서 말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찰을 자세히 돌아본 뒤 개문자시폐문인 (開門者是閉門人)이란 스님의 친필 유목이 몇 십 년의 세월 속에 얼룩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지스님의 차 대접을 받고 사찰의 어려움을 묻고 40여종의 부역을 혁파해줄 것을 약속하고 돌아가서 그 즉시 동래부사에게 명하여 시행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 증거로서 지금 어산교에서 옛날 길로 500m쯤 내려가면 다섯 개의 비석이 있는데 그 한가운데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嚴革祛寺幣永世不忘亶)이라는 비가 그것이다.
巡相國 趙公(순상국 조공(조엄趙嚴 ,1719~1777)은 安樂禪師(안락선사)의 원력을 성취시킨 선사의 환생으로 因果應報談(인과응보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비석 옆에 석담(昔譚)의 우물로 일년에 두 번(음력2월,10월)은 공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불자들도 수시로 찾아와서 慈悲(자비)와 仁德(인덕)을 되새기며 밤 기도를 올리고 있다.
*조엄(趙嚴)1719(숙종 45)∼1777(정조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金井山(금정산)의 애기소(沼) 전설
전설에는 금실이 좋은 젊은 부부가 있었는데 오랫동안 태기가 없어 걱정이 되었다. 부부는 천지신명께 백일기도를 올리기로 하고 계곡의 넓은 소(沼)가 있어 이곳에서 정성껏 빌고 빌었다. 백 일째 되던 날 한 선녀가 나타나 하늘의 법도에는 두 부부에게는 아기가
없으나 선녀의 노력으로 점지해주되 태어난 지 3년만에 하늘로 데리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약속하면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약속하였다 한다. 이후 귀여운 옥동자를 분만하여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어언 3년이 되는 날까지 아기가 무사했으니, 이제는 아기를 데려가지 않겠구나 생각하고
선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 아기를 업고 소로 갔다. 주위의 경치에 정신을 팔려 시간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정신을 차려 주위를 보니 아기가 없어져 아무리 찾아보아도
흔적이 없었다. 달려온 남편이 아내를 달래고 있을 때 선녀가 아기를 안고 나타났다. 아기를 돌려달라고 했으나, ‘하늘의 법도는 어길 수 없는 일’ 이라며, 아기가 보고 싶거든 밤마다 이곳으로 나오면 선녀와 아기가 목욕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말한 후 사라졌다 한다.
계명봉(鷄鳴峯)에는 신비한 전설을 간직한 계명암(鷄鳴庵)이 있고, 이 암자에는 범어 3기의 하나인 자웅석계(雌雄石鷄)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형상이 수탉의 형상만 남아 있을 뿐 암탉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또한 鷄鳴峰(계명봉)에는 금정 8경의 하나인 계명추월(鷄明秋月)로도 유명하다. 계명봉의 가장 낮은 동쪽 봉우리에는 역사가 오래된 계명봉수대(鷄鳴烽遂臺)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약간의 석축과 불을 피울 수 있었던 터만이 남아 있다. 이곳은 약간 낮은 지대지만 사방으로 전망이 트여 먼 곳까지 전망할 수 있다. 이곳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주변 환경으로 보아 鷄鳴(계명)이란 이름이 금정산의 원명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우리의 가슴에 와 닿기도 하다. 鷄鳴이라는 명칭은 불교적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듯이 즉 새벽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으로 이것은 밤 기도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기도에 정진을 하 던 납자(衲子)들이 새벽 2시쯤이면 일어나 예불을 드리던 그때 맑은 하늘 날씨에 총총한 별을 보고 가늠했지만 흐린 날이 되면 하늘에서 닭울음소리가 시간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닭울음소리가 들려와 예불시간을 알려 주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하여 계명봉(鷄鳴峰)이라 했다고 한다.
송최함일직랑출안경상(送崔咸一直郞出按慶尙)-고중지(高中址)
(경상도로 안찰 가는 직랑 최함일을 보내며-고중지(高中址)
金井山高高 巖巒似天目
금정산고고 암만사천목
下有東萊城 煙霞棲古木
하유동래성 연하서고목
世稱神僊居 地淸人不俗
세칭신선거 지청인불속
白日雲氣蒸 湯泉涌山谷
백일운기증 탕천용산곡
行旅館其傍 方冬得漱沐
행려관기방 방동득수목
野橋壓平湖 小亭依斷麓
야교압평호 소정의단록
云昔蘇嘏倦 來遊騎白鹿
운석소하권 래유기백록
客舍誰所營 壯觀天下獨
객사수소영 장관천하독
北軒名積翠 一面千竿玊
북헌명적취 일면천간숙
月夜梅梢寒 秋風橘柚熟
월야매초한 추풍귤유숙
東望孤雲臺 插海翠峯矗
동망고운대 삽해취봉촉
暫時寄遊賞 平生心意足
잠시기유상 평생심의족
我本箇中人 長江遶茅屋
아본개중인 장강요모옥
謬學功名流 塵土空碌碌
류학공명류 진토공록록
至今清夢裏 遙想滄浪曲
지금청몽리 요상창랑곡
再拜送皇華 爲我護松菊
재배송황화 위아호송국
금정산은 높고 높아
바위 봉우리가 천목산 같아라
그 아래는 동래성 있어
연기와 노을이 고목에 서려 있다
세상에서 일컫는 신선 사는 곳
땅은 맑고 사람은 속되지 않았다
대낮에도 구름 기운 찌는 듯 한데
온천은 산골짝에 샘 솟는다
나그네들 그 곁에 묵어 가면서
깊은 겨울에도 목욕한다
들녘의 다리는 호수에 눌러 있고
작은 정자는 아낄한 산기슭에 붙어있다
옛날의 이른바 소하 신선이
흰 사슴을 타고 와서 놀았다한다
객사는 그 누가 지은 것인지
장관은 천하에 독보적이로다
북쪽 마루의 이름은 적취인데
한 쪽에는 천간 옥이로다
달밤에 매화 가지 차갑고
가을바람에 귤과 유자 익어간다
동쪽으로 바라보면 고운대가 있고
바다에 솟은 푸른 봉우리 뾰죽도 하여라
잠깐 동안 노닐어 보아도
한평생 마음에 흐뭇하리라
나는 본래 그곳 사람
긴 강이 초가 집을 둘러 흘간다
잘못 공명을 쫓아 흘러와
진토에서 부질없이 허덕이었다
지금까지 맑은 꿈속에 있어
멀리 창랑 구비를 그리어 본다
다시 황화를 전송하여 인사를 하니
날 위하여 소나무와 국화는 꼭 보호해 두소서
금정산-산성마을 며칠, 그 넷 - 유병근 시
장바구니 속에는 밤새 잡혀온 바다가 있다
넙치 새끼 몇 마리 꼬리지느러미로 푸드덕거리는 싱싱한 물굽이 있다
치마폭에 잠기는 물비늘이 있다
비늘을 털고 오는 뱃고동 소리,
남태평양이며 캄차카 해역의 해무를 끼고 온다.
트로올 선단을 꿰어 찬 수염 텁수룩한 어로장은
깡술을 목안 깊이 털어 붓는다.
눈보라를 몰고 오는 하늘에 걸린 짐대 꼭대기의 물새를 본다.
물 속 깊이 노는 어군을 물새는 안다 깃털이
흰 물새는 놋쇠 왜가리 소리 좋은 갯마을에 간혹 보인다.
장대 위에 앉아 마을을 감싸는 솟대가 되고 있다
장바구니 속의 바다에도 솟대가 있다
먼 해무를 찾아 길 떠날 뱃고동 소리에 귀 세운다.
金井山 -이해웅
때로 절벽처럼
가슴 가운데 우뚝 일어서고
어느 때는
먼 지평선처럼 낮게 열리는
너 금정산아
도심의 소란스러움과
사람과 사람 사이
겨울 골목에서처럼 만나는
찬바람을 피하여
한사코 너의 어깨와
팔다리에 매달리며
가슴 속으로만 파고드는
숱한 인파를
낮엔 초록의 싱그러움과
송뢰로 품어주고
골짜기마다 어둠의 장막
길게 드리우는 야밤이면
개울물소리 한 소절
멍든 영혼 달래주며
하늘 가운데 보석들을 세게 하는
너 금정산아
우리에겐 네가
어머니다
그 가슴 속의 아늑함이다
땅 끝 아득히 눈물겹게 펄럭이는
푸른 깃발이다
조국의 끝자락이다
금정산 - 엄국현
금정산 산마을에 이사 와서
아침마다 금정산 바라보며
느릿느릿
천천히 걸어가는 버릇이 생겼다.
아내와 딸
책
안경
전세방
내가 가진 것은 대충 이런 것인데
가을날 아침을 걸어가며
금정산 이마를 찬찬히 바라보면
빨리 걸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솟는다.
서른 셋
오늘 죽어도 좋을
그 어떤 무엇도 가진 바 없고
사람들이 재빨리 내 앞을 스쳐 지나가면
출근길
놀라서 따라 걷는 내 꼴이 우스꽝스럽고
부끄러워하는 것도 버릇만 같아서
걸음이 이따금 헷갈리지만
府使 鄭顯德(부사 정현덕)시비
府使 鄭顯德.(부사 정현덕):1810∼1883). 조선 말기의 대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백순(伯純), 호는 우전(愚田).
1850년(철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1862년 부사과로 되었으며, 고종초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 서형순(徐衡淳)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왔다.
大院君(대원군)이 집권하자 그의 심복인물로서 東萊府使(동래부사)가 되어 일본과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大院君(대원군)의 뜻을 받들어 일본 메이지 신정부(明治新政府)의 국교 재개의 교섭을 서계문제(書契問題)를 이유로 끝내 거부하였다. 일본과의 암거래를 하는 무리를 엄중 단속하여 박승달(朴承達)을 외화 소지혐의로 참형에 처하였다. 그 뒤 吏曹參議(이조참의)가 되었다가 大院君(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 척족정권에 의하여 파면되어 유배되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자 형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대원군이 물러남으로써 이에 다시 파면되어 원악도(遠惡島)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釜山市 東萊區 溫泉洞 산 13 금강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다. 1868년(고종 5년)에 건립되었으며, 비의 크기는 높이 65cm, 너비 206cm로 되어 있다.
이 비의 개요를 살펴보면, 금강공원 내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 뒤쪽에 옮겨져 있는 이 시비는 태평원 시비와 유사한 체제로 되어 있는 시비로서 문장가요 명필인 부사 정현덕(鄭顯德)이 감회를 읊은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丁卯年我馬東 此邦民物見繁雄
정묘년아마동 차방민물견번웅
居人盡有昇平樂 老殊珠無捍蔽功
거인진유승평락 노수주무한폐공
紅藕池臺歌扇月 綠楊城郭酒旗風
홍우지대가선월 녹양성곽주기풍
鷄林古事依然在 萬萬波波一蓬中
계림고사의연재 만만파파일봉중
趣絶高城大海濱 百年煙火靜邊塵
취절고성대해빈 백년연화정변진
朝廷以我爲民牧 政績如何似古人
조정이아위민목 정적여하사고인
敢道蒲鞍能化僞 羞言卉服與爲隣
감도포안능화위 수언훼복여위린
君恩未報身空老 玉蓬梅花又送春
군은미보신공노 옥봉매화우송춘
정묘년에 내가 말을 타고 동으로 오니
이 고을 백성과 물자 번성하구나
주민은 모두 태평시절 즐기니
늙은 몸 자리만 지켜 공적은 없다.
붉은 연밥 연못 정자에 달을 노래하고
푸른 버들 성곽에 술집 깃발 날리우네
계림의 옛 이야기 의연히 있는데
만파식적은 한 피리 속에 들린다.
저 높은 성은 큰 바닷가에 있어
백년토록 변방 전진 고요하여라.
조정에선 나를 목사로 삼았으되
치적이야 어찌 옛사람 닮을 건가.
부들 채찍으로 교화한다 어찌하리
오랑캐와 이웃한다 말하기 부끄러워라.
임금 은혜 갚지 못한 채 몸은 헛되이 늙고
옥적과 매화꽃에 또 봄을 따르네.
동래부사 정현덕 영세불망비
獨鎭大衙門(독진대아문)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溫泉洞)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의 문. 1626년(인조 4)에 동래부의 동헌 충신당이 세워질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짐작되며, 1700년(숙종 26)과 1870년(고종 7)에 중수되었다. 원래는 동래부사청동헌의 입구에 있었으나 20세기초, 시가지정리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의 위치인 금강공원내에 다시 세워졌다. 사방이 개방되어 문짝은 없고 규모는 작으나 3문 형식의 흔하지 않은 아문이다.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5호
향파 이주홍(向破 李周洪)의 문학비
향파 이주홍(向破 李周洪·1906~1987)소설가·아동문학가. 호는 향파(向破). 경상남도 합천(陜川) 출생.
동래온천장의 금강공원 안에서 남쪽으로 우회하는 길가 바위에 오석(烏石)으로 기단(基壇 )이 차려진 그 위에 장방형 자연석에 새겨진『해같이 달같이만』의 동시비(童詩碑)가 세워져 있다. 거기 새겨지기로는 다음과 같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내었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하고
불러보면
금시로 따스해 오는
내 마음
아버지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내었느지
모르겠어요
아···버···지···하고
불러보면
오오- 하고 들려오는 듯
목소리
참말 이 세상에선
하나밖에 없는
이름들
바위도 오래 되면
깎여지는데
해같이 달같이만 오랠
엄마 아빠의"
맨 마지막에 이주홍(李周洪) 글, 글씨로 돼 있다. 이는 자작의 이 동시를 본인이 좋아하여 생전에 써 두었던 그대로를 바위에 새긴 것이다
崔啓洛(최계락)의 시비
최계락 [崔啓洛, 1930~1970]경상남도 진양(晉陽)에서 출생하였다. 진주고등학교 졸업하고 잡지 소년세계 국제신보 등에 근무하였다.
동래 온천장에 있는 금강공원내 케이블카 기점이 있는 아래쪽 길 위에 자연석 바위 위에 네모진 오석으로 된 아담한 비가 있다. 그 비가 비면에 새겨진 그대로, 최계락 시비다. 이 시비는 1971년 7월 3일 국제신보사와 부산문인협회가 아동문학가이자 소설가인 이주홍씨 의 글씨로 세운 것이다. 비면에 새겨진 시는 최계락의 童詩『꽃씨』로,
꽃씨 속에는
파아 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빠알가니 꽃도 피어서 있고
꽃씨 속에는
노오란 나비 떼 가 숨어 있다"라고 하였다
문학비 정면에는,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 것은 사람이 갈 길은 아니다"로 돼 있다
국청사영세불망비(國淸寺永世不忘碑)
이 비석은 본래 國淸寺(국청사)의 중건과 선정을 행한 東萊府使(동래부사) 鄭顯德(정현덕)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1872년 국청사(國淸寺)에 주석하던 명신(明信), 평윤(平允) 스님에 의해 국청사(國淸寺) 입구에 세워졌다. 그러나 1982년 연못 확장공사 이후 비석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대웅전 오른쪽 寮舍(요사:승려들이 식사를 마련하는 부엌과 식당, 잠자고 쉬는 공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채 뒤쪽에서 비석의 상체가 두 쪽이 난 상태로 발견, 시멘트로 발라 원래 자리로 복원 작업하여 세워졌다.
鄭顯德(정현덕)은 1867년(고종 4)에 부임해 6년여 동안 동래읍성 수축과 군사조련 등 유사시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했을 뿐 아니라 위성척사론자로서 특히 공이 컸다. 도한 일본을 견제하며 호국의 얼이 서린 국청사에 토지를 희사하고 사찰을 중건한데는 남다른 호국의지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또한 그는 조선 말기의 문장가, 서예가, 외교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이치영이 글씨를 쓴 이 영세불망비의 크기는 높이 103cm, 너비 39cm, 두께 14cm이다.
비석 앞면에는‘부사정공현덕영세불망비(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라 음각 되어 있고 좌우편에 4언시가 있다.
相鄕趾美 重建佛宇
상향지미 중건불우
逢海宣恩 廣置寺屯
봉해선은 광치사둔
동래고을에 아름다운 미풍전통을 이어받아
불교사찰을 중건하고
동래에 은혜를 베풀어
사찰에 많은 땅을 희사하였다
금성마을과 국청사(國淸寺) 전설
산성마을이 폐허로 버려져 있을 때 경남 양산군 철마면(현재 기장군)에 살던 힘이 좋기로 소문난 김 장사(壯士)가 이곳에 들어와 마을을 일구었다. 그는 한꺼번에 수 십 명의 장정들을 상대로 힘겨루기 시합을 벌이기도 했고, 혼자서 팥 한 섬을 김해에서 지고 오기도 했다. 더구나 그는 호랑이가 뒤에서 잡아당겨도 꼼짝달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하의 김 장사도 처음 국청사 자리에 거주지를 마련했다가 밤마다 전쟁 중에 죽어간 이들의 신음소리와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무서워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국청사가 세워진 뒤에도 법당에서 염불을 하면 전쟁 중에 죽어가는 신음소리 , 날짐승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나서 기도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1982년 스님들이 지장보살 보원삼층탑을 세우고 떠도는 넋들을 극락세계로 천도한 이후부터는 청정한 기도도량이 됐다 전해지고 있다
절충장군 행별장 김시색 영세불망비
折衝將軍 行別將 金時索永世不忘碑
行別將 金時索永世不忘碑
금정산성버스 종점 앞 실내천에서 발견된 행별장 김시색 영세불망비(行別將 金時索永世不忘碑)는 지름 약 2.5m, 무게 10여 t의 화강암에 양각으로 새긴 길이 1.7m, 너비 60.45cm의 자연석 비석이다
螭首部(이수부) 가운데는 나무모양, 양쪽에는 파문이 음각되어 있다. 이 비석에는 해서체로 건립시기인『光武 11年 丁未 2월(1907년)』과
折衝將軍 行別將 金公時索永世不忘碑
절충장군 행별장 김공시색영세불망비
절충장군 김시색공이 별장으로 부임한 것을 기린다.
라는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별장이란 숙종 33년 1707년 금성산성의 중성을 쌓은 이후 정3품인 동래부사가 금정산성을 관할하는 책무를 주어 파견한 종 8품의 관리다.
비문 양쪽에는
垈蒙壬碩 結損辛苦
대몽임석 결손신고
頌溢萬口 恩流三部
송일만구 은류삼부
땅에 많은 지하수의 혜택을 입어서,
농토에 물대기 어려운 고초를 들어주었으니
칭송하는 소리가 넘치고
은혜가 삼부에 흐르고 있네
라는 4언시가 음각 되어 있는 선정비가 있다.
<출처 : 주영택 향토사학자>
비석 앞면에는 <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라 음각 되어 있고 좌우 편에 4언시가 남아 있다.
相鄕趾美 重建佛宇
상향지미 중건불우
逢海宣恩 廣置寺屯
봉해선은 광치사둔
동래고을에 아름다운 미풍전통을 이어받아
불교사찰을 중건하고
동래에 은혜를 베풀어
사찰에 많은 땅을 주었다.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
이 비는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동래성을 조선 영조 7년(1731)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다시 쌓은 공을 칭송하고 성을 쌓는 일을 분담하여 맡았던 사람들의 직책과 성명을 기록한 것이다. 신해년(1731) 1월에 성터를 측량하기 시작하여 4월에 성벽을, 5월에 성문을, 7월에는 문루<門樓>를 완성하였는데, 52,000여명의 장정을 동원하였는데 쌀 4,500여 섬과 베 1,550필, 13,400여냥어치의 재물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전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동래읍성이 석축으로 둘레 3,090척에 높이 13척이며 성안에 6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였는데, 새로이 완성된 동래성은 둘레 2,880보로 8리 가량되며, 성의 길이가 예전보다 길어졌다고 했다. 성을 쌓는 일이 끝난 뒤 정부사<鄭府使>는 성안에 조미<租米> 4,000여섬을 비축하여 두고 수성창< 守成倉>이라 하였으며 수첩군관<守堞軍官> 200인을 차출하여 성을 지키도록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 비석은 영조 11년(1735)에 남문 밖 농주산<弄珠山>에 세운 것을 영조 41년(1765)에 옮겨 세웠다가 순조 20년(1820)에 다시 남문자리에 옮겼던 것을 일제시대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비문은 황산도<黃山道> 찰방<察訪> 김광악<金光岳>이 짓고 송광제<宋光濟>가 썼으며 전<篆>은 현풍현감<玄風縣監> 유우기<兪宇基>의 글씨이다
빼놓을 수 없는 문학의 현장.
정서(鄭敍, ? - ? ) 호, 과정(瓜亭).
인종비(仁宗妃)의 동생의 남편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벼슬은 내시낭중(內侍郎中)에 이르렀다.
의종 5년(1151)에 참소를 받아 동래에 유배, 명종 원년 (1170)에 유배에서 풀려남.
과정(瓜亭) 정서는 고려 예종 때 동래지방에 귀양와서 자신의 억울하고 참담한 심회를 왕에게 하소연한 '정과정' 노래를 지었다. 과정이 있던 터, 곧 남구 망미동에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다. 그 가사는
내 님믈 그리사와 우니다니 내가 임(임금)을그리워하여 울고 지내니
山(산) 졉동새 난 이슷하요이다. 산에서 우는 소쩍새와 나는 비슷합니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달 아으 (저에 대한 혐의가 사실이)아니며 거짓인 줄을,
殘月曉星(잔월 효성)이 아라시리이다. 천지신명이 알 것입니다.
넉시라도 님은 한대 녀져라 아으 넋이라도 임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저를) 헐뜯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過(과)도 허믈도 千萬(천만) 업소이다. 저는 결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말힛마리신뎌 그것은 뭇사람의 참언이었습니다.
살읏븐뎌 아으 슬프도다. 아아
니미 나랄 하마 니자시니잇가. 임께서 저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마소서 임이시여. 마음을 돌이켜 들으시어 다시 사랑해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실려 전한다. 정서는 동래 정씨 시조인 정문도의 증손자이자, 고려 인종비 공예태후 동생의 남편으로 내시낭중 벼슬을 지냈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 朴仁老(1561∼1642)의 가사작품 <船上歎(선상탄)>과 연관지을 수 있는 산상탄가사비가 민락동 현대아파트 단지 내에 조성되어 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동남 해역을 방어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의 군선이 정박하던 곳이다. 박인로는 전선을 타고 적진을 바라보는 심정을 이 작품에 구구절절 분노와 개탄으로 아로새기고 있다. 이외의 문학비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 시비가 전포동 보광원에 건립되어 있고, 용두산공원 시비의 거리에는 장응두의 <원>을 비롯한 5개의 시비가 제작되어 있다. 또한 조선후기 동래부사 정현덕의 <태평원>시비가 동래구 복천동에 이전 보존되어 있고, 낙동강 제방에는 금수현의 <그네>노래비와 이은상의 <낙동강>시비 등 여러 문학비가 건립되어 있다. 유치환의 시비는 영도 남여상과 에덴공원에 조성되어 있다.
그 밖의 노래비로서는 조용필 노래비가 해운대 해수욕장 송림공원에, 40계단 노래비가 동광동 쪽 용두산공원 진입로에 각각 건립되어 있다
<船上歎(선상탄)>
고모령신의 유래. (고당봉(高幢峰))
금정산 고당봉(高幢峰)은 그 정상의 봉우리다. 백두대간이 동해를 따라 흘러와 마지막 용틀임을 하여 세워놓은 영봉이다.
해발 801.5m의 이 암봉은 영험한 명당으로 예부터 그 이름이 높다. 새 천년 햇살이 가장 먼저 비치는 것도 우연한 행운만은 아닌 듯하다. 이 암봉에 서면 부산시가와 부산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와 그 아름다움을 가리켜 소금강(小金剛)이라 한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고당봉(高幢峰)의 신령스러운 영험은 신라시대부터 알려졌다. 의상 원효 두 대사다.
신라 文武王(문무왕)은 재위 18년(678년) 義湘大師(의상대사)와 함께 금정산 고당봉(高幢峰) 금샘을 찾아온다. 범천에서 오색구름을 타고 온 금빛 물고기가 노니는 곳에서 칠일칠야기도, 왜적을 물리쳤다. 같은 해 元曉大師(원효대사)는 고당봉(高幢峰) 彌勒庵(미록암)에서 도술로 왜적들을 일거에 격퇴시킨 것으로 전해온다.
왕은 10만 왜병선을 물리친 것을 기뻐하여 고당봉(高幢峰) 아래 梵魚寺를 창건케 했다.
고당봉(高幢峰)에는 범어사 중흥과 인연이 깊은 고모당이 있고, 용호암 용왕샘 등이 있다. 금샘 건너편에 의상망해(義湘望海)와 원효석대(元曉石臺)가 있다. 두 대사가 동해를 바라보며 국태민안을 기원한 명당이다.
고당봉(高幢峰)은 우리나라 10대사찰 중 하나인 범어사에서 산길을 따라 2.5㎞를 걸어 올라가면 1시간이 걸리며 금정산성 북문에서 0.9㎞의 거리에 있어 바로 올려다 보인다. 금정산의 최고봉이면서 금샘(金井)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금정산 정상의 이름이 왜 고당봉이며, 그 이름은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금정산의 주봉 이름이 여러개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쓰여졌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고당봉의 이름은 지금까지 무려 7가자지의 이름으로 불리거나 씌어져 왔다. 1740년 편찬된《동래부지》에 나오는 지도에는 '고암(姑岩)'으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사람마다 그 이름을 고암(姑岩), 고당봉(姑堂峰), 고담봉(高潭峰), 고단봉(高壇峰), 고당봉(高堂峰), 고당봉(姑黨峰), 고당봉(高幢峰)이라 하여 어느 것이 진짜 명칭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고당봉의 정확한 명칭을 찾기 위해 금정구청에서는 1994년 8월 '금정산표석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학자와 향토사학자들을 의뢰하여 그 이름 찾기 고증작업이 추진되었다.
여기서도 의견이 여러 가지 나왔으나, 토론과 검정을 거쳐 '고당봉(姑堂峰)'과 '고당봉(高幢峰)'의 두 가지 의견이 나왔다. 장시간의 토론 끝에 "우리나라는 모든 산에는 산신이 있고, 고려 때까지 내려오는 모든 산신은 여신이었다. 금정산의 고당봉(高幢峰)도 할미신이므로 할미고(姑), 집 당(堂)의 고당봉(姑堂峰)이 옳다"는 丁仲煥博士(전 동아대교수)의 주장이 있었다.
또한 이에 맞선 朱永澤씨(향토사학자)의 주장도 그 타당성이 충분한 것이다.
그는 금정산 8경에 '고당귀운(高幢歸雲)'이 있는 사실 등을 근거로 금정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가 義湘大師(의상대사)의 뜻에 따라 고당봉(高幢峰)으로 명명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 고당봉이란 이름이 있기에 그 아래 범어사를 창건하게 되었음을 '고당(高幢) 주령은 一山의 靈을 진하여 諸佛(제불)의 도장을 스스로 지었으며····' 라는 기록을 근거로 들기도 하였다. 또 다른 근거로는 [범어사 창건사적]에 의상대사가 대왕과 함께 금샘이 있는 곳을 찾아가 7日 7夜을 독경한 곳이 바로 금정산 고당봉이며, 법의 당을 높이 세워 움집한 사부대중을 위해 일승법문을 강설한다는 뜻을 보더라도 '고당봉(高幢峰)이라는 명칭이 옳다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1902년 발간된 [궤범어사서기궤유전] 산령축에 의하면, "지금부터 40년 전에 밀양인 박씨가 결혼에 실패 하고 불가에 귀의하면서 범어사에서 화주보살이 되어 여생을 보내면서 불사로 사부대중들의 칭송이 대단했다. 어느날 스님께서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에 姑母靈神(고모령신)을 모시는 산신각을 지어 고당제를 지내주면 높은 곳에서 수호신으로 범어사를 지켜주겠다’고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이에 큰스님은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1년에 두 번의 제사를 지내니 아주 번창한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고당의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할미 당집이다. 이러한 영험을 알고 전국 무당과 보살들이 밤낮 기도를 올리는 거점으로 사람들에 의해 영험한 금정산의 정기를 받기위한 수단으로 고당이 고당봉으로 와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정중환 박사는 우리 고유의 샤마니즘의 민속신앙속에서‘고당봉(姑堂峰)’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신라·고려시대의 불교는 호국의 뜻이 더 위에 있음을 지적, 범어사도 의상대사가 도력으로 왜구의 침략을 막아낸 설화가 전해오는 것과 같이 고려의 팔만대장경도 호국정신의 발로였음을 지적하였다.
금정구청에서는 이러한 토론과 격론을 거쳐 대부분의 역사(민속)학자 및 향토사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공식적으로 고당봉 정상에는 고당봉(姑堂峰)으로 확정되어 표석비를 세웠다고 한다.
고당봉 정상석 뒤쪽에 시가 새겨져 있다
돌우물 금빛고기 옛전설따라
금정산 산머리로 올라왔더니
눈앞이 아득하다 태평양물결
큰포부 가슴속에 꿈틀거린다
鷺山 李殷相 짓고(노산 이은상)
東州 李英相 쓰고(동주 이영상)
金井區廳長 세움(금정구청장)
'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尋隱者不遇(심은자불우 )-魏野(위야) (0) | 2012.12.31 |
---|---|
[스크랩] 海雲臺 엘레지 (0) | 2012.12.31 |
[스크랩] 금샘(金井)에`하늘 나라의 고기(梵魚)`살았다는 梵魚寺(범어사). (0) | 2012.12.31 |
[스크랩] 釜山(富山)-東萊에 숨은 이야기들 (0) | 2012.12.31 |
[스크랩] 朝鮮 八景에 하나인 우두산(牛頭山,伽倻山)의 이야기 (0) | 2012.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