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釜山(富山)-東萊에 숨은 이야기들

2012. 12. 31. 11:28한시



동래산성 석성
 
 

釜山(富山)-東萊에 숨은 이야기들


慶尙南道 南東部에 있는 廣域市. 서울에 다음가는 大都市이며 우리나라 最大의 貿易港(무역항)이다. 주변 공업 도시의 후배지(後背地) 역할을 하며 섬유, 제당, 제재, 고무, 수산물 가공 따위의 경공업이 발달하였다. 名勝古蹟(명승고적)으로 金井山城(금정산성), 海雲臺(해운대), 松島(송도), 유엔 묘지, 太宗臺(태종대), 충렬사(忠烈祠)가 있고. 면적은 749.17㎢.이다


釜山의 由來

부산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부산포(富山浦)'란 이름이 였는데  지금의 '가마 부'(釜)자로 바뀐 것은 아마 15세기 무렵의 일로 짐작된다.


1480년에 간행된 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산천조'를 보면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山이 가마 꼴과 같아서 이렇게 이름 했고, 그 밑이 釜山浦"라고 하여 '가마 부'(釜)가 쓰이게 된 내력을 말하고 있다.


야인초 작사,박시춘 작곡,방태원 노래인
부산 행진곡

동서양 넘나드는 무역선의 고향은

아세아 현관이다 부산항구다

술취한 마도로스 남포동의 밤거리에는

꽃파는 젊은 아가씨들의 노래가 좋다.


우뚝선 영도다리 갈매기들 모이고

물에 뜬 매혼물도 부산항구다

메리켄 부두가에 내일 다시 만나주세요

파자마 입은 아가씨들의 인사가 좋다.


 

봄바람 동래온천 여름 한 철 송도여

달마중 해운대도 부산항구다

가느니 못 가느니 정열차에 베루가 운다

경상도 사투리 아가씨들의 이별이 좋다.

                      

東萊(동래)

朝鮮 明宗 때 도호부로 昇格(승격)되면서 큰 고을로 되고 壬辰倭亂 이후에는 雄州(웅주)로서 손색이 없었다. 東萊는 동해안 별신굿의 전승지다. 漁業이 성하고 颱風의 피해가 컸기에 무속이 성행 하였다. 금정산맥 끝에 沒雲島에 沒雲臺(몰운대)라는 樓臺보고 光海君 때 동대부사를 지낸 李安訥(이안눌:1571-1637)은 ‘몰운대’ 시에서 東萊의 仙趣(선취)를


秋晴瑤海曙光鮮, 鏡面扶桑影倒懸.

추청요해서광선, 경면부상영도현.


??碧天三島外, 瞳瞳紅日萬方前.움펑눈 요(穴+目)

요요벽천삼도외, 동동홍일만방전.


大包到此渾無地, 浩劫從今復氣年.

대포도차혼무지, 호겁종금부기년.


便欲凌風跨寥廓, 蓬萊頂上訪群仙.

변욕능풍과요확, 봉래정상방군선.


맑은 가을 고운 바다에 새벽빛 산뜻한데

거울 같은 동해물에 부상 그림자 거꾸로 박혔네.

삼신산 밖에는 푸른 하늘이 멀고

만방의 앞쪽에는 붉은 해가 흐릿하구나.

우주는 이곳에 이르러 더 나아갈 땅이 없나니

영겁은 이제부터 또 몇 년 뒤런가.

곧바로 바람 타고 허공으로 솟아올라

봉래산 정상으로 산신 찾아가련다.

東萊 溫泉은 三國遺事(삼국유사)에 記錄이 있다. 新羅王(신라왕)이 여러 번 이곳에 행차해 벽돌로 쌓고 구리 기둥을 세웠다 고한다. 高麗 때 東萊 溫泉을 노래한 李奎報(1168~1241)의 ‘박공과 함께 동래 욕탕지로 향하면서 즉석에서 짓다(同朴公將向東萊浴湯池口占;동박공장향동래욕탕지구점)라는 詩는


未信硫黃侵水源,  却疑暘谷浴朝暾.

미신유황침수원,  각의양곡욕조돈.


地偏幸免楊妃汚,  過客何妨暫試溫

지편행면양비오,  과객하방잠시온


유황이 수원에 스며들었다곤 믿지 않았지만

문득 양곡에서 아침 해가 목욕하는 듯하여라.

땅이 외져 양귀비가 더럽히지 않았으니

길손이 잠시 몸 데운들 어떠리.

지편신색양비오(地偏辛色楊妃汚)‘땅이 외진 곳이라 양귀비도 더럽히지 못했다’는 것은 양귀비가 알았더라면 먼저 다 써버렸을 만큼 東萊溫泉水(동래온천수)가 맑고 깨끗하다는 비유다


東萊雜詩(동래잡시) - 雪谷(설곡) 鄭?(정포)(포=言+甫) 


落日逢僧話  春郊信馬行

낙일봉승화  춘교신마행


煙消村巷永  風軟海波平.

연소촌항영  풍연해파평


老樹依岩立  長松擁道迎

노수의암입  장송옹도영


荒貸漫無址  猶說海雲名

황대만무지  유설해운명


저문 날에 중을 만나 이야기 하고

봄 들판을 말에 맡겨 가노니

연기 사라지매 마을 골목이 길고

바람이 부드러워 바다가 잠잠하다.

늙은 나무는 바위를 기대섰고

큰 소나무는 길을 끼고 맞이한다.

거친 누대는 멀리 터도 없는데

그대로 아직 해운대라 부른다.


정포(鄭?,1309-1345)는 忠惠王(충혜왕) 때 잘못된 정치를 상소하다 벼슬자리에서 쫓겨나고 울산으로 귀양온 적이 있는데, 그가 東萊溫川(동래온천)을 찾은 것은 아마도 이때쯤이라 여겨진다. 그는 후일 죄를 면하여 풀려났으나 풍토병인 장려(??)로 이년이나 고생했고 몸도 몹시 허약해져 東萊溫川(동래온천)을 찾아가 요양하며 그 감회를 東文選(동문선)에 '동래잡시(東萊雜詩)'가전하고 있는데 溫泉浴(온천욕)의 즐거움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湯泉傳自昔  浴室至今存

탕천전자석  욕실지금존

 

水脈來非遠  槽欄尙帶溫

수맥래비원  조란상대온


二年困??  半日洗?煩

이년곤장려  반일세효번


此樂除曾點  無人可與論

차락제증점  무인가여론


예부터 전해 오는 온천이여

욕실도 아직 그대로 있구나.

물 솟는 자리도 멀지 않아

욕조의 언저리 항상 따뜻하네.

2년이나 지치고 곤한 몸도

반나절 목욕으로 씻은 듯 하네

이 상쾌한 마음 증점이 아니면

그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同知密直司事(동지밀직사사)를 지낸 박효수(朴孝修):?~1377.)도 동래온천에서 목욕을 즐긴 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洞方深處開石塘  淨?十斛盈汪汪

동방심처개석당  정양십곡영왕왕

 

深可齊腰僅二尺  溫烟暖霧蒸其傍

심가제요근이척  온연난무증기방


晝燭紅燈照水底  半?香袖扶入湯

주촉홍등조수저  반선향수부입탕


愧煩纖手洗?背  垢?鱗甲消雪霜

괴번섬수세태배  구니린갑소설상

 

快如麻姑爬?處  熱汗發面流淸漿

쾌여마고파양처  열한발면류청장

 

浴罷徐徐拭白巾  晞髮頹然臥一床

욕파서서식백건  희발퇴연와일상

 

身輕骨爽若換髓  何羨飄飄鶴背翔

신경골상약환수  하선표표학배상

 

頓忘身世得甘寢  恍惚夢遊無何鄕

돈망신세득감침  황홀몽유무하향

 

覺後還爲行路客  驛騎塵上汚衣裳

각후환위행로객  역기진상오의상

 

동방 깊은 곳에 돌 연못이 있어

맑은 물 10곡이 가득하게 출렁이네

깊이는 허리를 채울 정도이라 겨우 2척이나

더운 안개 더운 김이 주위를 찌는구나

낮의 촛불이 붉은 등이 되어 물밑을 비추는데

미인이 옷을 반쯤 걷고 부축하여 탕에 들었지

부끄럽게도 고운 손으로 늙은 등을 씻어주는데

때와 비늘같은 껍데기가 눈서리같이 사라지는구나

시원하기는 마고가 가려운 곳을 긁는 것 같고

뜨거운 땀이 얼굴에 나타나 맑은 미음처럼 흘러내리네

목욕을 마치고 서서히 흰 수건으로 닦으면서

머리를 말리고 쓰러지듯 평상에 누웠더니

몸이 가볍고 뼛속까지 상쾌하여 골수를 바꾼 듯하구나

어찌 학을 타고 나부끼듯 나는 것을 부러워하리

나의 신세를 몽땅 잊고 단잠에 들어

꿈에 황홀하게 어딘지 모르는 곳을 노닌다

깨어나 다시 길을 가는 나그네가 되었으니

역마가 티끌위를 달려 의상을 더럽히네


 

동래에서 재생들을 작별하며(留別東萊諸生)-전숙몽(田叔蒙)


萊郡居民卽地仙  半年無事共盤旋

래군거민즉지선  반년무사공반선


望煙南浦行鹽戶  泛月東湖棹酒船

망연남포행염호  범월동호도주선


積翠海雲春爛?  長松花路草??

적취해운춘란만  장송화로초천면


身輕更得朝天去  謝子相携浴檻泉

신경경득조천거  사자상휴욕함천


동래 고을 사람들 땅 위의 신선이나

반 년 동안 무사히 함께 돌아다녔었지

안개 낀 남포 바라보며 소금 집을 찾아

달빛 동호에 배 뛰어 술 실은 배도 저었다

푸른 해운대에 진달래꽃 만발하고

긴 소나무 꽃길에 풀이 우거졌도다.

가벼운 몸으로 다시 서울로 떠나니

고마워라, 그대들 함께 온천에 와 목욕하였다


 

                       

                                                      동래 온정개건비

 


溫井改建碑(온정개건비)

 

溫井(온정)은 溫泉을 말하는 것으로, 이 비는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 1713∼?)가 동래온천을 수리한 공로를 기록하고 있다. 동래온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三國遺事(삼국유사)에서 볼 수 있는데 신라의 재상 忠元公(충원공)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에는 물이 계란을 익힐 만큼 뜨거웠으며 병자가 목욕을 하면 병이 잘 나아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던 곳이라고 적고 있다. 높직한 석축 위에 비를 세웠는데 네모진 받침돌 위로 모서리 양끝을 사선으로 처리한 직사각형 비몸을 세운 형태이다. 비문에 의하면 이 온천은 조선 肅宗(숙종) 17년(1691) 건물을 짓고 돌로 두 개의 탕을 만들어 놓았다. 그 후 건물이 낡고 탕이 막혀 이용하기에 불편하여, 새로 부임한 부사 강필리(姜必履)가 이를 수리하여 남탕과 여탕을 나눈 9칸짜리 건물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화려해 마치 꿩이 나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비는 영조 42년(1766) 10월에 건립되었다.


溫井改建碑(온정개건비)의 내용은

井在治北五里 源金井引 入湯浴之?百疾 古碑剝罔徵 康熙辛未 石作兩湯覆以屋 屋老湯? 姜公必履以醫國手 甦萊民 明七事興百廢 爰相治井 命監改作 ?東故地 易酉坐壬 寫島城材 以七月上弦基 八月卄四柱 九月初七梁凡九間 區男女湯 爽麗如?飛 作守家 立大門內樹碑 噫 微公無此井 微監無此舍 銘曰

公治邑 民賴活 公修井 人無疾 千萬古 口又碣

聖上四十二年 丙戌 十月望 礪山 宋光迪 書


온정은 읍 북쪽 5리에 있는데 금정산에서 발원한다. 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면 온갖 질병이 낫는다. 옛날의 비석은 글자가 벗겨져서 징거를 할 수가 없다. 강희 신미년(1691)에 돌로 두 개의 탕을 만들고 건물로 덮었는데 건물이 낡아지매 탕이 막혀 버렸다.

강필리공은 나라의 어지러움을 다스리는 솜씨로써 동래의 백성을 소생시켜 칠사를 밝히고 백폐를 구하였는데 이에 온정을 다스려서 감관에 명령하여 고쳐 짓도록 했다. 비스듬한 동쪽 옛터에 유좌를 고쳐 임좌로 앉히고 성안의 재목을 모두 운반해 와서 7월 상현에 개기하고 8월 24일에 입주하고, 9월 7일에 대들보를 올렸다. 모두 9간인데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였고 상쾌하고 화려하기가 마치 꿩이 날듯이 으리으리하였다. 지키는 집을 짓고 대문을 세우고 안에는 비를 세웠다. 아아, 강공이 아니면 이 온정이 없었을 것이요 감관이 아니면 이 옥사가 없었을 것이다. 銘을 짓는다.

공께서 고을을 다스리니 백성들이 힘입어 살게 되고 공께서 온정을 수리하니 사람들의 질병이 없어졌다. 천만년이 되도록 입으로 또 비석으로 전하리라


이섭교비(利涉橋碑)

이 碑石(비석)은 1694년(肅宗(숙종 20)에 지금의 東萊區(동래구) 수안동에서 연산동으로 갈 때 건너야 하는 수영천에 놓인 나무다리를 이섭교라는 3개의 아치를 연결한 돌다리로 고쳐 쌓은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이섭교는 그 모양이 通度寺(통도사) 입구의 (三星半月橋)(삼성반월교)와 비슷하다고 한다. 3개의 아치를 연결한 형태여서 이 다리를 안경다리라 부르기도 했다. 불교에서는 마음심 모양이라 한다. 또한 동래에서 부산진으로 갈 때는 광제교(廣濟橋), 수영으로 갈 때는 利涉橋(이섭교)를 건너야 하는 까닭에 이를 각기 부산다리, 수영다리 등으로 불렀다.


비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深?淺揭 人皆病涉 則此橋之所以作也 然以板爲橋  易朽腐 故逐年因舊貫 改作 實爲民弊病矣 曾在廣梯之役 欲?口是也 有意未遂 甲戌冬 府中數三人 慨然追前之志 招集化禪 募緣財力 運石之役 民自來? 翌年春訖其功 此實踵前將營未畢志而成後 不日成功之矣 豈非金振漢始基之 而辛萬齋成之者乎 所謂江流而石不轉 濟盈而不濡軌 則登?橋者 亦當嘆美而頌功 永有辭於千億矣

  崇禎後乙亥季春日 別座釋尙裕


물이 깊으면 옷자락을 띠 댄 데까지 걷어 올리고 물이 얕으면 옷을 아랫도리까지 걷어 올려 사람 모두가 어렵게 물을 건넜는데 이것이 이 다리를 만들게 된 까닭이다. 그러나 판자로 다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쉽게 썩었다.

그러므로 해마다 전날의 방법을 따라 고쳐서 지었지만 실로 백성들에게 큰 폐해가 되었다. 일찍이 이 다리를 넓히는 역사를 하는 것이 다들 옳다고 하였으나 뜻을 가진채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갑술년(1634) 겨울에 동래부의 몇 사람이 개연히 전날의 수리하고자하는 뜻을 이어 화주를 불러 모으고 기부금을 모으니 돌을 옮기는 부역에 백성들이 스스로 달려와 일하며 다음해의 봄에 그 일을 완전히 끝낼 수 있었다. 이는 실로 지난날 끝내지 못한 뜻을 불과 며칠만에 성취한 것이다. 김진한이 이 일을 처음으로 시작한 자가 아니겠으며 신만재가 이 일을 이룩한 자가 아니겠는가. 이른바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고 도선장이 넘쳐도 수레바퀴는 젖지 아니한즉 이 다리에 오르는 자는 의당 그 공을 탄미하고 칭송할 것이며 무수한 세월이 흘러도 그 사례하는 말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백학,백록의 다리를 고친 동래온천의 전설


우리나라의 溫泉에 관한 傳說중 역사가 가장 깊은 것은 東萊 溫泉이다. 보통 溫泉의 發見은 白鶴(백학), 白鹿(백록)이라는  얘기들이다.

東萊 溫泉도  白鹿이 와서 잠자고 가는 곳을 파보니 따뜻한 샘이 솟아올랐다고 한다. 지금 東萊 溫泉場서도 역사가 긴 여관인 "백록관"이라는 이름도 이에 유래된다고 한다.


-백록(白鹿)의 전설-

아주 먼 옛날 일이다. 어느 해 겨울, 유난히 많은 눈이 내렸을 때이다. 며칠이나 쉼없이 내리는 눈으로 어디를 바라보아도 눈, 하얀 눈의 천지였다. 어느 날, 밤이 깊어지자 눈으로 뒤덮인 금정산 숲 속에서 불현듯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사슴은 천천히 들판으로 내려와 이곳 저곳을 살피다가 한 곳에 자리를 정하고 몸을 눕혔다. 사슴은 그 곳에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이 되어서야 다시 숲 속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날 밤에도 역시 사슴이 다시 나타나 어제 누웠던 그 자리를 찾아가서 다시 밤을 새우고 사라졌다. 사슴은 밤만 되면 들판으로 내려와 그 자리를 찾아가 자곤 했다.

눈이 그치고 날씨가 풀렸다. 사람들은 들판으로 나가 사슴이 머물었던 자리를 찾아보았다. 사람들은 아직도 덜 녹은 눈이 남아있는, 주변과는 달리 마른땅으로 남아 있는 한 곳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 곳에는 눈이 내린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마른 풀잎 사이에서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부근을 차근차근 살펴보다가 샘처럼 얕고 둥글게 패인 땅속에서 맑은 물이 끓어오르듯 솟구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그 물에다 손가락을 담가 보았다. 물은 방금 가마솥에서 끓여낸 물처럼 뜨거웠으며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백학(白鶴)의 전설-

지금으로부터 천 수백 년 전 신라 때의 일이다. 동래 고을에 오른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절름발이 노파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노파는 집 근처에 있는 논에 백학 한 마리가 날아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 노파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백학을 동정하며 한참 동안 시선을 백학에서 떼지를 않았다. 백학은 다음 날도 역시 그곳에 와 서 있었다. 그리고는 사흘째 되는 날 백학은 이상하게도 다리를 절지 아니하고 그 근처를 몇 바퀴나 돌다가 힘차게 날아가 버렸다. 이것을 본 노파는 아무래도 기이한 생각이 들어 백학이 있던 곳으로 가 보았다. 그 곳에는 움푹 파인 작은 웅덩이 하나가 있었는데 안에는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고, 그 물에서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노파는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을 물 속에 담가 보았더니 뜨거웠다. 다시 손을 물 속으로 가만히 넣었더니 뜨끈뜨끈한 것이 참을만했고 감촉도 유난히 미끈거렸다. 노파는 이 물이 보통 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 얼른 두 다리를 물 속에 담갔다. 금세 따뜻한 온기가 온 몸에 퍼지면서 그 때까지 쑤시던 통증이 일시에 사라지는 듯한 상쾌함을 느꼈다. 노파는 그 후로 며칠을 계속하여 그 웅덩이로 가서 다리를 담그고 편히 쉬었다. 수일 후 오른쪽 다리가 거짓말처럼 부자유함이 없이 마음대로 움직이게 되었다. 노파의 다리가 고쳐진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곧 노파의 말을 듣고 그 웅덩이를 찾아가 병을 고치곤 했다. 소문은 마을을 넘고 온 나라로 알려졌다.

 
 

東萊野遊(동래야유)

옛날 東萊 지역에는 巫俗(무속)이 성하였는데 申晸(신정,1628-1687)은 擬李嘉祐聞江南人家賽神之作(의이가우문강남인가새신지작)라는 글에는


?山舊俗好淫祀, 家家四節迎神至  나무이름 장(풀초+長)

장산구속호음사, 가가사절영신지 


日吉辰良穆將愉, 蘭肴桂?仍焦? 미주 서(酉+胥) 타래붓꽃 려(풀초+? 力3개)

일길신량목장유, 난효계서잉초려


楊??鼓五音陳, 滿堂幢節何?紛 떡갈나무포(木+包) 어루만질부(手+付) 어지러울빈(실사+賓)

양포부고오음진, 만당당절하빈분 


回飇?起捲油幕, 皇皇欲降雲中君  문득 훌(炎+欠)

회표훌기권유막, 황황욕강운중군 


少巫嬋媛振華衣, 婆娑起舞芳??  눈이펄펄내릴 비(雨+非)

소무선원진화의, 파사기무방비비 


翁婦紛然拜且祈, 身無疾秉年無饑

옹부분연배차기, 신무질병연무기


遠客中宵聽不寐, 殊方土謠眞堪異

원객중소청불매, 수방토요진감이


千古荊蠻事偶同, 爲吟九歌興長? 한숨 위(口+胃)

천고형만사우동, 위음구가흥장위


장산(동래) 풍속이 귀신 섬기기 좋아하여

집집마다 철마다 신을 맞아들이네.

일진이 좋다 기뻐하면서

좋은 술과 안주에 남방 과일까지 바치고

북채로 북을 쳐대 음악을 연주하며

집에 가득 깃발과 부절이 어지러워라

회오리 비림이 일어나 장막을 걷으매

운중군이 허둥허둥 내려오는 듯한데

젊은 무당이 아름다운 옷을 펄럭이면서

너울너울 춤추자 향기가 부슬부슬

늙은 부부는 굽신굽신 절하며 빌어서

한 해 내내 병 없고 주리지 않게 해 달라하네.

나그네는 밤새 듣느라고 잠 못 이루나니

타향의 민요가 참으로 기이하도다.

먼 옛날 荊楚(형초)지역과 우연히 같기에

九歌(구가)를 읊고서 길게 탄식하노라


이렇게 동래는 동해안 별신굿의 전승지역이며 어업이 성하고 태풍의 피해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東萊野遊(동래야유)

左水營(좌수영) 수사가 합천 草溪(초계) 밤마리(율리:栗里)의 대광대패를 대려다가 연희를 시킨데 서 비롯되었다고도 하고, 한편으로 수영사람이 큰 장터인 밤마리에서 보고 온 후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들놀음’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야유(野遊)의 하나인 東萊野遊(동래야유)는 부산지방의 수영야유를 본뜬 것으로서, 음력 정월 대보름에 동래시장 앞 네거리에서 수백 개의 등불을 밝혀놓고 놀이판을 벌여온 것으로 전한다.


이 놀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지금으로부터 약 1세기 전 경상우도(右道)에서 좌도(左道)로 전입되었다는 설이 있고, 이 지방의 오랜 민속극(民俗劇)인 대동(大同)놀음에 오광대(五廣大) 놀이의 일부가 편입되었다는 설도 있다. 옛날부터 이 지방 평민들 사이에 전승되어 왔으며, 그 가운데는 지방의 하급관리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1967년 12월 21일 重要無形文化財(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동래들놀음' 이라고도 부르며 외지에서는 '東萊野遊(동래야유)'라고 알려져 있는데 현지에서는 야유(野遊)를 야류라고 부른다.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을 전후하여 장터나 타작마당·시냇가 같은 야외에서 연희되며, 그해의 연중무사(年中無事) 및 豊年(풍년)을 기원한다.


동래 노파(東萊,?:늙은여자 구)


동래 노파는 본래 동래(東萊)의 사창(私娼)이었다. 선조 25년(1592)에 왜구(倭寇)가 보물과 부녀를 크게 약탈해 간 일이 있었는데, 노파는 당시 30여 세의 나이로 왜국에 잡혀가 10여 녀을 지냈다. 그 후 선조 39년(1601) 봄에 우리 나라 사행(使行)이 돌아오는데 왜구는 이미 화친(和親)을 했기 때문에 그 편에 지난날에 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게 되어, 노파 또한 돌아오게 되었다.

노파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었는데, 난리에 서로 간 곳을 몰랐다. 돌아와서 그 어머니의 소재를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난리에 또한 잡혀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다. 원래 모녀가 같이 왜국에 있으면서도 10년 동안을 서로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노파는 사적으로 그 친족들과 작별하면서,
"맹세코 어머니를 보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는다."

하고, 다시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렀다. 거리에서 걸식하는 등 왜국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여 전국을 누벼서 어머니를 찾았다. 모녀는 다 늙었는데 어머니는 70여 세로서 아직 정정하였다. 왜인은 모두 크게 놀라 찬탄하고 어질게 여겨서 눈물까지 흘렸다. 이 말이 전송되어 국중에 들리자 그 추장은 어머니와 함께 송환하기를 허락하였다.

노파는 어머니를 모시고 이미 고향에 돌아왔으나 재산도 직업도 없어서 살아갈 길이 없었다. 노파는 곧 언니와 더불어 어머니를 업고 강우(江右)로 가서 함안(咸安) 방목리(放牧里:지금은 가야읍(伽倻邑)에 거주하였다. 그 어머니가 천연으로 작고하니, 자매가 서로 의지하고 살았다. 날마다 품팔이를 해서 생활을 하였는데, 무릇 옷 한 가지, 음식 한 가지가 생기면 언니에게 먼저 주고 자신은 뒤에 가졌다.

노파는 80여 세에 죽었는데, 동리 사람들이 모두 `동래 노파`라고 불러서 그대로 호가 되었다 한다. 아! 여자로서 능히 바다를 건너, 만리 타국의 험난한 바닷길에서 모녀가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돌본 것이다. 자고로 남자도 하지 못할 일을 능히 해서 세상에 뛰어난 절행(節行)을 세워 오랑캐로 하여금 감화하게 하였으니, 아, 어질도다.



장산국(?山國) 건국설화


아득한 옛날부터 고씨들이 장산(?山)기슭에 있는 장자벌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

다. 고선욱(高仙玉)은 홀어머니와 함께 토막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소나

기비가 그치자 먼 하늘에서 仙人이 영롱한 칠색무지개를 타고 하늘에서 이곳 마을에

하강하였다. 仙人은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분향기에 이끌려 고선옥(高仙玉)의 토막집을 찾았다. 仙人은 고선옥(高仙玉)에게 냉수를 청하자 물그릇에 냉수를 청하여 물그릇에 물을 떠서 주면서 얼굴을 돌려 외면하였다. 仙人은 물그릇을 거울삼아 외면한 처녀의 얼굴에

비춰 보았다. 仙人은 仙女보다 아름답고 옥처럼 빛나는 고선옥(高仙玉)의 모습에 매혹되었

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의 祝福을 받으면서 잔치를 베풀었다. 세월이 흘러 이들 사이에는 아들 열명과 딸 열명이 출생하여 장성하여서는 모두 20곳 마을에 흩어져 살았다. 제마다 安氏 鄭氏 朴氏 李氏 金氏 崔氏로 창성하여 그 마을을 다스렸다.

仙人은 마을에 土城을 쌓아 그 씨족들을 다스리는 大族長이 되었다. 仙人은 回婚(회혼)때(결혼 60년)가 되자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등천하였다. 그때부터 고선옥(高仙玉)은 高氏族을 다스리는 고씨할매가 되었다. 고씨할매는 날마다 아들 딸을 순산하였던 제왕반에 제단을 차려 놓고 옥황상제께 仙人의 하강을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외거리 절에 가서 불공도 드렸다. 또 산정에 있는 큰 바위(영감 할매 바위)에 올라가서 하늘을 바라보며 仙人의 하강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고씨할매는 그 바위 밑에서 仙人을 기다리다 지쳐서 돌아가셨다. 20곳 마을에 살던 아들 딸들은 고씨할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그 씨족들을 이끌고 와서 바위를 다듬어 상여를 만들고(상여바위)정상에 큰 묘를 만들어 안장하였다.

지금도 그 제왕반 바위, 상여바위, 영감할매 바위가 있고 그 묘가 있다. 그 때부

터 마을 사람들은 고씨 할매의 넋을 고을의 질병을 막아 주고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모시고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 마을의 후손들은 마

을 뒷산에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정월 보름날에 고당 할머니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 제사는 마을에서 가장 깨끗하고 신망 있는 부부를 택해서 제관으로 선택하고 제관

은 궂은 일을 보지 않고 당일에는 찬물에 목욕을 하고 제수물은 흥정하지 말고 값대

로 치러 마련토록 하였다.

제관은 마을에 살고 있는 각 성씨 이름을 봉송하면서 동태민안을 기원하고 재앙

과 질병이 없도록 시주종이를 불살라 비는 풍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 마을

사람들은 들에서 식사를 할 때는 반드시 첫 숟가락에 밥을 떠서 "고시례"(高氏禮)라

고 고씨 할매에게 예를 올렸다. 그래야만 식후에 탈이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

들이 없는 부인이 제왕반에 가서 촛불을 켜고 기도한 후 외가리절에 가서 공을 드리면

옥동자를 낳고, 영감할매 바위에 가서 공을 드리면 부부의 정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이 전설에서 선인이 무지개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것은 장산 넘어 먼 하늘

가에서 무술과 지혜가 뛰어난 남자가 왔다는 것을 신격화 하였고 고씨 할매와 그

딸 고선옥(高仙玉)은 원시 사회의 제사를 맡은 祭官(제관) 할매와 신딸로서 큰딸(크슬아기=구술아기)의 뜻을 전하고 제왕바위는 신당의 뜻이고, 10남 10녀가 이웃 마을에 흩어져 살

았다는 것은 그 선인은 대추장(큰촌장)이 되어 그 씨족들로 하여금 20개 마을을 다

스리게하여 씨족공동사회를 형성하였다는 뜻이고 외가리 절은 그당시 이미 금관가야

국과 친교하여 불교가 전파되어 있었다는 뜻이고, 상여바위와 고씨묘는 왕비의 석곽

묘를 뜻하고 영감할매 바위는 선인과 고선옥을 수호신으로 숭배하였다는 뜻이고, 고

씨례는 고수례의 풍습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전설은 장산국(?山國)의 건국신화로 생각된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동래의 동쪽 십리지점에 장산국의 옛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장산기슭에 있는 재송동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장산국(?山國)이라는 작은 나라 이름은 이곳에 있는 장산(?山)이라는 산 이름과 같고 이산을 상살미, 자류미라는 속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속명은 큰산, 높은산, 동쪽산의 뜻의 옛말로 해석된다.


장산국(?山國)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래현조에서 "옛 장산국은 일명 내산국(來山國)으로, 대군을 일으켰는데, 삼십명으로 가야국(伽倻國)을 쳤다. 그리고 신라는 이를 쳐서 거칠산군(居山國)을 두었다."라고 적혀 있고, 동국사를 살펴보면 신라 4대 탈해왕 23년에 이웃 국경에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漆山國)이 있어 신라왕은 이 두 나라가 걱정이 되어 거도장군을 변관으로 삼아 항상 장토야(기장)에서 말을 모아 달리게 하여 말타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하여 두 나라가 여기에 대비가 없도록 해놓고 거도장군이 습격하여 거칠산국(居山國)을 멸망시켰다. 거칠산국(居漆山國)은 아마 장산군의 일명 일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장산국(?山國) 또는 내산국(萊山國)이라 하다가 신라가 점령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이라는 나라 이름은 망미동(望美洞)에 있는 황령산(荒嶺山)의 옛 이름은 거칠뫼(거칠산山)에서 그 유래를 찾고 있다. 東萊鄭氏 시조 정회문(鄭繪文)의 조상이 장산국(?山國) 을 세웠다고  전한다.

 

            

                                                                    동래산성 석성

출처 : 재령이씨 인자 조 후손
글쓴이 : 운봉(雲峰:밀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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