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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 왕희지(王羲之, ca. 303-361)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서첩(書帖), 종이에 먹가로 23 cm 세로 14.8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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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王羲之)(약 303~361),원적은 산동(山東)으로 명문 세가에서 태어나 서진(西晉) 말 부친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 우군장군(右軍將軍) 및 회계(會稽, 절강성 소흥(浙江省 紹興))의 내사(內史)벼슬을 하였으나 동진(東晉) 영화(永和) 년간 벼슬을 그만두고 중원의 명사(名士)들과 각 산과 물을 유람하였다. 시가(詩歌)와 음악, 서예에 열중하였다. 그가 서예를 배우는 과정은 동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과거의 순서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다양하게 여러 서체의 장점을 취하는 것이었다 특히 서체에 대해 정밀하게 탐구하여, 진(秦)의 전서(篆書), 한(漢)의 예서(隸書) 등 각 종류의 서로 다른 필법을 행초(行草)서체 안에 융합한 가장 훌륭한 서체를 만들어 당대(唐代) 사람들은 왕희지를 ‘여러 서법에 모두 뛰어나 일가를 이루어 만세의 스승이 되었다.(兼撮眾法, 備成一家,為萬世宗師) ’라고 칭송하였다.
이 작품은 행해서(行楷書)의 짧은 편지로 큰 눈이 온 후에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명대(明代) 감상가인 첨경봉(詹景鳳, 1520~1602)은 이 서적(書跡)의 필법이 둥글고 힘이 넘치면서 예스럽고 우아하며 뜻과 형태가 속세를 떠난 듯 유유자적 하다고 평하고,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행서(行書)에 매우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하였다. 용필(用筆)로 볼 때 이 서첩(書帖)은 둥글고 무딘 붓을 사용하여 점을 찍고 필획에서도 모두 필봉을 노출시키지 않고 있다. 글자체의 구성이 평온하고 균형을 이루며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 중에 질박하고 신중한 운치가 있다. 건륭(乾隆, 1736~1795) 황제는 이 작품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여 ‘천하에 둘도 없는, 자고이래로 이에 대적할 만한 것이 없다. (天下無雙,古今鮮對)’라고 찬양하였다. 건륭(乾隆) 11년(1746), 건륭제는 이 작품을 왕헌지(王獻之)의 “중추첩(中秋帖)”,왕순(王珣)의 “백원첩(伯遠帖)”과 함께 ‘삼희(三希)’라고 칭하고,’삼희당(三希堂)’안에 수장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