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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 왕탁(王鐸, 1592-1652) 초서(草書) 서첩(書帖) (제 3, 5, 6, 7쪽), 종이에 먹, 각각 28.3 x 36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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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탁의 자는 각사(覺斯), 호는 숭초(嵩樵), 십초(十樵), 치선도인(癡僊道人)으로 하남성 맹진(孟津)사람이다. 천계(天啓)2년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청나라가 들어선 후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는데 두 왕조에서 관직을 한 이유로 정치적인 면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왕탁은 하루는 옛 대가들의 글씨를 임모하고 또 그 다음 하루는 자유롭게 이를 쓰는 작업을 평생 지속했다고 한다. 그의 운필은 떨림의 운율이 있으며 진한 농묵(濃墨)부터 먹이 거의 다 말라버린 것까지 먹색의 변화가 많다. 그의 초서의 필법은 팔을 들고 올리는 흔들림에 의하고 있는데 황정견(黃庭堅)과 축윤명(祝允明)의 영향을 받았다. 왕탁은 이 자작시 오율시 다섯 수를 “시광작수수(詩狂作數首)”라고 부르며 더욱 격렬한 서체로 쓰고 있는데 이 작품은 대사의(大寫意) 서풍(書風)을 보여준다.
이것은 본래 긴 두루마리로 되어 있던 것을 훗날 서첩으로 다시 제작한 것으로 세 번째 시「위성(圍城)」이하의 열 글자 세 줄이 서첩으로 만들 때 순서가 바뀌었다. 숭정(崇禎) 16년(1643년)맹장산지원(寓孟莊山志園, 오늘날 하남성 위휘부(衛輝府) 소문산(蘇門山) 남쪽)에 머무르던 시기인 그의 나이 52세 때 완성이 되었는데 다섯 번째 시는 소주(蘇州) 부근에서 그의 벗들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쓴 작품이다. 이 폭은《원명서한(元明書翰)》제 육십 책(第六十冊)에서 발췌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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