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당4대가

2012. 6. 20. 08:13서예가

初唐四大家

 

歐陽詢 ·虞世南 ·楮遂良 ·薛稷


 1. 시대적 배경

 

 중국역사상 당나라는 찬란한 문화예술의 번영을 이루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서예 또한 황금시대를 누리면서 많은 서예가들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서 초기의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 설직을 ‘초당사대가’ 라고 한다.


 2. 구양순(歐陽詢:557-641)

 

 당나라의 대표적 서가로는 먼저 구양순을 꼽을 수 있다. 구양순은 초당의 서예가로 담주(潭州) 임상(臨湘)사람이다. 그는 태종 때 벼슬이 태자솔경령(太子率率令)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의 서체를 ‘솔경체(率更體)’라고도 하며, 혹은 ‘구체(歐體)’라고도 한다.  그는 처음 이왕의 글씨를 배웠으나, 이후에는 험경수경(險勁瘦硬)함으로 독자적인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여러 서체에 뛰어났으며, 그 가운데 해서가 가장 훌륭하여 해서에서는 ‘천하제일’의 영예를 얻었다. 그의 해서용필의 특징은 험경정발(險勁挺拔)하고 방필을 주로 하며 배세(背勢)의 형세이다. 그리고 결구는 평정한 가운데 험초(險峭)함이 있으며, 자형은 대략 장방형을 이룬다.

 현존하는 그의 필적을 보면 체태(體態)가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화도사비(化度寺碑)는 가장 응렴(凝斂)하고, 예천명(醴泉銘)은 비교적 관서(寬舒)하며, 온언박비(溫彦博碑)는 엄정(嚴整)하고, 황보탄비(皇甫誕碑)는 지극히 준각(峻刻)하다. 이 네 개의 비가 후세의 해법(楷法)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이 밖에도 요변묘지(姚辯墓誌), 소자심경(小字心經), 천자문, 방언겸비(房彦謙碑), 몽전첩(夢奠帖),복상독서첩(卜商讀書倢) 등이 전한다. 또한 구양순은 서예이론 방면에서도 조예가 깊었다. 논서(論書)로는 팔결(八訣), 삼십육법(三十六法), 전수결(傳授訣), 용필론(用筆論) 등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3. 우세남(虞世南:558-638)

 

 우세남은 왕희지의 후손인 지영(智永)에게 글씨를 배웠는데, 그의 글씨는 소산(蕭散)하고 쇄락(洒落)하며, 서체에 힘이 있고 아름답다. 구양순과 함께 남조의 진(陳)나라 때 태어나 수대에서 이미 서명(書名)이 높았으  며, 그와 구양순의 서풍은 약간 다른면이 있다. 구양순의 행필은 규범적이면서도 짜임새가 근엄하고 험악한 가운데 힘이 있는 반면에, 우세남이 개발한 새로운 서체는 구양순이 따를 수 없는 점이 있다. 서예를 좋아했던 당 태종은 일찍이 우세남에게 과법을 배웠으며, 동시에 그와 더불어 열심히 서예문제를 토론하여 초당의 서예를 이끄는 데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는 구양순에 비해 전해지는 필적이 적으며, 가장 유명한 것으로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가 있다. 이 비는 70세 이후에 쓴 것으로, 초당시대에 건립된 후 오래가지 못하고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으며, 그 이후로 번각본 몇 종류가 전해오고 있다.

그 밖의 대표작으로는 파사론서소해(破邪論序小楷), 여남공주묘지명고묵적(汝南公主墓誌銘稿墨跡) 등이 전한다.

 

 4. 저수량(楮遂良:596-658)

 

 저수량은 수(隋)나라에서 태어나 당으로 들어간 인물이다.

그의 영향은 구양순과 우세남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의 서체는 독창적인 경지가 매우 많은데, 평론가 중에는 그를 북파라고도 하고, 남파라고도 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의 글씨는 풍성하고 여유로운 자태가 있으며, 법칙이 온아하며 미려함이 많다. 왕주(王澍: 1668-1743)는 저수량의 글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저하남의 글씨는 당나라 일대에 인재들을 도야하게 만들었다.

험경함은 설요가, 통쾌함은 안진경이, 견탁함은 유공권이, 섬미함은 종소경이, 유윤함은 여향이, 종일함은 위서오가, 걸음이 빨라도 척촌을 잃지 않는 것은 설직이 본받았다’


 사실상 저수량의 글씨에는 구양순과 우세남의 두 대가 보다 창의의 성분과 방향의 명확성이 더욱 많이 내포되어 있다. 저수량의 글씨로는, 이궐불감기(伊闕佛龕期), 맹법사비(孟法師碑),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등이 유명하다.


 5. 설직(薛稷:649-713)

 

설직은 저수량과 나란히 ‘저 · 설’로 불려졌는데, 그의 자는 사통(嗣通)이고, 포주(蒲州)사람이다. 관직은 태자태보(太子太保)와 예부상서(禮部尙書)까지 올랐다.

그의 서법은 저수량(褚遂良)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나라 중종(中宗) 때에는 한(漢)·위(魏) 시대의 비각(碑刻)을 매우 중시했는데, 평론가들이 "설직이 저수량의 서법을 익혔을 뿐 아니라 새롭고 기이한 경지를 열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설직이 비각의 필법을 잘 흡수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은 〈신행선사비 信行禪師碑〉이다. 그는 저수량파의 으뜸가는 인물이었으나, 구양순(歐陽詢)·우세남(虞世南)·저수량과 같이 새로운 서법의 일파를 창시하지는 못했다. 그의 동생 설요(薛曜)도 저수량의 서법을 익혀서 독자적인 풍격을 이루었다. 설요의 작품인 〈하일유석종시서 夏日遊石淙詩序〉는 억세면서도 굴곡이 많은데, 이는 유공권(柳公權)과 송(宋:960~1279) 휘종(徽宗)의 서법 풍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설직은 또한 그림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학(鶴) 그림을 잘 그려서, 이백(李白)·두보(杜甫)가 모두 시를 지어 그의 그림을 칭송했다. 〈당조명화록 唐朝名畵錄〉에서는 그의 그림을 신품(神品)으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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