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농묵(濃墨) 재상과 담묵(淡墨) 탐화랑-유용(劉墉)과 왕문치(王文治)의 서예

2012. 5. 30. 17:53서예일반

농묵(濃墨) 재상과 담묵(淡墨) 탐화랑

-유용(劉墉)과 왕문치(王文治)의 서예

흑과 백은 중국 서예가 지닌 색채의 전부이다. 흑백의 대비는 먹의 농도, 글씨체의 변화 등의 특징과 어우러져 다양한 시각적 자극과 감응을 낳는다. 흔히 말하는 정신이 담긴 색채, 광택, 정취 등을 이뤄내는 조윤(조윤:메마름과 윤택함)과 농담이 낳은 효과는 이 자극과 감응이라는 예술적 효과가 인간의 미적 감각에 굴절되어 나온 반영이다.

청(淸)대 건륭(건륭)황제 시절 유용(유용)은 농묵(짙은 먹)을 즐겨 사용하고, 기백을 중시하여, 정신이 담긴 색채와 광택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반면, 유용과 동시대 인물인 왕문치(왕문치)는 담묵(옅은 먹)을 주로 쓰며 오로지 풍모만을 취했다. 그는 가벼운 필치와 텅 빈 여백 속에서 그 정취를 드러내, 유용의 농묵과 대비를 이루었는데, 왕문치와 유용은 당시에 이름을 나란히 했으며, <청사고(청사고)>에는 "서예가로서 문치의 명성은 동시대의 유용과 동등해서, 사람들은 "농묵 재상과 담묵 탐화랑"이라 일컬었다." 고 기재되어 있다.

"농묵 재상" 이든 "담묵 탐화랑" 이든 모두 첩학(첩학)의 범주에 속하며, 이는 당시 유행의 소산이다. 청대 초기에 글씨깨나 쓴다는 이들의 서예 풍격과 사제 관계는 대부분 "조맹부(조맹부)파"가 아니면 "동기창(동기창)파"였다. 강희(강희)황제는 동기창의 글씨를 좋아했고, 건륭황제는 조맹부의 글씨를 좋아했는데, 이에 아랫사람들은 저마다 황제의 취향을 따르기 바빴고, 당시 서예계에는 조맹부체와 동기창체가 성행하게 되었다.

청대 초중기 첩학의 유행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강희 황제는 동기창을 존경했고, 건륭 황제는 조맹부를 숭배함으로 인해, 이들의 글씨는 “간록서”, 즉, 벼슬을 얻기 위해 연마해야 하는 서체가 되었고, 조야의 모든 이들이 앞다퉈 간록서 연마에 몰려들었다. 둘째, 이미 출토된 북조(북조)시기의 비문들이 미처 중시 받지 못하여 연구분야로서 자리매김하지 못했다(즉, 비학(비학)이 아직 중시되지 않았다.). 셋째, 예원로(예원로), 황도주(황도주), 부산(부산), 왕탁(왕탁)등이 이끈 명말 “광포정서”라는 새로운 미학 사조가 청대 초중기의 태평성대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청대의 첩학은 유약(유약)한 “이왕<이왕:왕희지(왕희지), 왕헌지(왕헌지)부자>”의 풍격을 기준으로 계속 파생해 나갔으며, 옹방강(옹방강), 유용, 성친왕 영성(성친왕 영성), 철보(철보) 및 양동서(양동서), 왕문치 등의 서예 고수들이 대거 출현하였고, 그 중 민간에서 칭송받던 유용은 청대 첩학의 집대성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TV 연속극 <재상 류라과(劉羅鍋)>의 방영과 함께 유용이하는 이름에 대중에게 친숙해졌고, 비록 연속극에서 묘사한 유용과 역사상의 유용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유용이 서예의 대가임은 극중에서도 그대로 묘사되었다.

유용(1719-1804)의 자는 숭여(崇如), 호는 석암(石庵)이며, 산동성(山東省)제성현(諸城縣)사람으로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를 지냈고 사후 문청(文淸)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해서에 뛰어났다. 서예에 매우 조예가 깊었던 건륭 황제는 서예가들에게 엄격한 규범을 요구했으며 유독 관각체(館閣體)를 좋아했는데 이 같은 황제의 애호는 서예 예술의 개성을 말살해 오히려 퇴보를 유발했다. 유용은 글씨를 잘 썼지만 이러한 유행을 따르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조맹부체를 연마하는 것으로 서예에 입문하여 후에는 위진시대의 서예를 본받아 종요의 글씨를 익혔으며 동기창의 서법에서 정수를 취하고 안진경과 소식 등 여러 사람들의 서첩을 본으로 삼았다. 그의 글씨는 먹빛이 짙고 중후했으며 풍만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개성이 있었는데 중후기에는 예 사람의 틀에서 벗어나 짙은 먹과 색채로 독보적인 풍모를 빚어내며 자신만의 서체를 완성했고 그의 서예가로서의 명성은 ‘천하를 덮을 정도’로 유명해져 그의 정치적인 능력이나 문학적 재능은 이에 가려지기까지 이르렀다.

청대 전영(錢泳)은 [서학]을 통해 ‘오늘날 국내 서예가로서 칭송받고 있는 세 사람이 있으니 첫째는 제성의 유문청공(유용)이요 둘째는 전당의 양산주시중(양동서)이요 다른 한 사람은 단도의 왕몽루태수(왕문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용의 서예에 대해 후세 가람들은 첩학의 집대성자라 했으나 이는 물론 행서와 초서에 한해서 지칭한 말이다. 유용은 행서와 초서로서 집대성자라는 여예를 얻었다. 그렇다면 유용의 행서와 초서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유용의 행서와 초서의 가장 큰 특징은 ‘검은 빛’, ‘짙음’, ‘중후함’이다. 여기서 검다는 것은 먹빛의 검음을 말한다. 그의 먹빛은 유난히도 검었다. 그러나 검은 먹을 슨 것은 유용이 처음이 아니다. 소식 이전의 서예가들은 모두들 먹의 검은 빛을 강조하고 검은 빛을 숭항해 옅은 먹을 스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서 유용의 글씨가 검다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검기 때문인데 당시 사람들은 그의 검은 글씨를 조롱하듯 흑돼지라 부르기도 했을 정도이다. 먹빛이 검은면 필연적으로 먹이 짙어지고 짙고 무게있는 필치는 검은 색조를 더욱 가중시킨다. 그렇게 검고 짙음 속에 담겨진 도 하나의 특징이 바로 중후함인데 이렇게 짙은 먹에 검고 중후함이 더해져 빈틈없이 검은 먹빛이 탄생되어 동새대의 왕문치가 사용한 담묵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바로 농묵 재상의 서예풍모이다.

수백 년이 지난 후 역사를 회고함에 있어 당시의 유행을 따르거나 선인의 풍격을 답습한 서예가들은 무수히 많은 서예가들 속에서 잊혀 지기 마련이다. 유용처럼 독특한 개성과 풍격을 지닌 이들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유용은 검음으로써 개성을 드러냈으며 짙은 먹빛으로 거칠고 둔한 듯한 매력을 발산했고여기에 중후함을 더해 결국 많은 이들의 인정을 받았다.

왕문치(1730-1802)의 자는 우경(禹卿)이며 호는 몽루(夢樓)이며 강소성 단도현 사람이다. 건륭 황제 시기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원 시독을 지냈으며 운남성 요안부 지부를 역임했다. 그의 글씨는 동기창을 바탕으로 하며 장즉지(張卽之)와 이옹을 종주로 삼았고 주로 아름다운 글씨를 추구하였는데 사람들은 옹방강, 유용, 양동서와 함께 옹유양왕(翁劉梁王)이라 칭하기도 한다. 청대 양소임(梁紹壬)은 그에 관해 [양반추우합수필(兩般秋雨盒隨筆)]에 ‘이 시대의 서예가중 재상 유용은 기백을 중시했으며 왕몽루 태수는 오로지 풍모만을 취해 농묵 재상 담묵 탐화랑이라는 평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왕문치의 서예는 아름다우면서도 우아하고 법도가 엄격하며 모든 작품이 아름답고 소탈한 깨끗하고 명쾌한 느낌을 준다. 또한 작품의 격조는 농후하지 않고 담백하며 기백이 아닌 운치가 서려 있고 행간에서는 왕희지와 조맹부의 품격을 느낄 수 있으나 안진경이나 소식의 기세는 찾아보기 어렵다. 글자체는 애써 독특한 모양을 만들어 내지 않고 자연스러운데 보기에는 평범하지만 이 정도의 경지에 이르기란 결코 쉽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그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출처 : 중국과 서예
글쓴이 : 금릉산방인 소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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