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3. 14:44ㆍ서예일반
漢興而有草書, 不知作者姓名. 至章帝時, 齊相杜度號善作篇. 後有崔瑗崔寔亦皆稱工. 杜氏殺字甚安, 而書體微瘦. 崔氏甚得筆勢, 而結字小疏. 弘農張伯英者, 因而轉精甚巧. 凡家之衣帛, 必書而後練之. 臨池學書, 池水盡墨. 下筆必爲楷則, 號怱怱不暇草書. 寸紙不見遺, 至今世尤寶其書, 韋仲將謂之草聖. 伯英弟文舒者次伯英. 又有姜孟穎梁孔達田彦和及韋仲將之徒, 皆伯英弟子, 有名於世, 然殊不及文舒也. 羅叔景趙元嗣者, 與伯英並時, 見稱於西州, 而矜巧自與, 衆頗惑之. 故伯英自稱上比崔杜不足, 下方羅趙有餘. 河間張超亦有名, 然雖與崔氏同州, 不如伯英之得其法也.
한나라가 흥함에 초서가 있었는데, 작자와 성명을 알지 못했다. 장제(章帝, 76-88) 때에 이르러 제상인 두도가 글을 잘 쓴다고 불렸다. 뒤에 최원과 최식이 있어 또한 모두 공교하다 일컬어졌다. 두도는 글씨를 마무리하는 것은 심히 안정되고 글씨의 형체는 조금 파리했다. 최원은 깊이 필세를 얻었으나 결자가 조금 성글었다.
홍농 사람인 장지는 이로 말미암아 정미함으로 바꾸어 더욱 공교해졌다. 무릇 집의 옷과 비단에 반드시 글씨를 쓴 뒤에 표백하여 세탁했다. 연못에 임하여 글씨를 공부하여 연못물을 다 검게 했다. 붓을 내림에 반드시 모범이 되기 때문에 “바빠서 초서를 쓸 겨를이 없다.”라고 했다. 작은 종이도 버림을 당하지 않아 지금 세상에 이르러 더욱 그 글씨를 보배롭게 여기니 위탄은 이를 일러 ‘초성’이라 했다. 장지의 동생 장창(張昶)은 장지의 버금이다.
또한 강후(姜詡)ㆍ양선(梁宣)ㆍ전언화 및 위탄의 무리가 있었는데, 모두 장지의 제자로 세상에서 유명하였으나 장창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
나휘(羅暉)와 조습(趙襲)은 장지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서주에서 칭찬을 받아 공교함을 뻐기고 스스로 자부하였으나 뭇사람들이 자못 이를 의심하였다. 그러므로 장지는 스스로 “위로는 최원과 두도에 비하여 부족하고, 아래로 나휘와 조습과 견주면 남음이 있다.”라고 했다. 하간 사람인 장초 또한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비록 최원과 같은 고을 사람이지만 장지가 그 법을 얻은 것만 같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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