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5. 09:29ㆍ알아두면 조은글
작가세계10 / 규당 조종숙
한글서체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40년 여행
들어가며
논어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을 가슴속에 새기면서 40년 넘게 서예에 전념해 온 여류서예가가 규당(圭堂) 조종숙(趙琮淑) 선생이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걷다보면 능력이 출중해 자신보다 앞서 나가는 사람도 있고, 이와는 반대로 자신보다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도 있다. 앞서건 뒤서건 모두 자신의 반면교사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선생은 이러한 자세로 지금까지 붓농사를 지어왔다.
서울토박이인 선생은 1932년 부농인 조공희씨의 4남 1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 일찍부터 인근에서 명필로 이름을 날린 그의 아버지는 많은 전적과 서예자료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6.25 때 모두 잃게 된다. 현재 『명가필보』6권만 겨우 전해오는데 거기에 아버지의 필적이 남아있다. 이러한 환경탓으로 무학여고를 마치고 이 방면으로 공부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3 때 6.25사변이 일어나 대학이 문을 닫는 바람에 전시종합대학을 수료할 수 밖에 없었다. 뒤이어 장충초등학교에서 새싹들을 지도하는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청소년기의 꿈이었던 서예가의 길을 접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62년 신혼생활을 하면서 서예에 입문하게 되었고,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먹을 갈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선생이 1962년 입문한 이후 42년 동안 일이관지(一以貫之: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음)의 정신으로 쉼없이 집념을 불살라 온 그의 서예역정을 3기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국전에 출품하던 학서기
선생의 본격적인 서예공부는 1962년 11월 어느날 여초 김응현, 일중 김충현 선생의 형제분들이 지도하던 동방연서회에 입문하면서 시작된다. 처음 안진경의 해서부터 익혔고, 몇 년을 공부한 뒤 행서와 예서 등을 익혀 나갔다. 동방연서회는 당시 정급고시를 채용하고 있어서 한문과 한글 등 15체를 마스터해야 1급에 이르는 과정을 두었는데 1급 과정을 마칠 때 까지 거의 결석을 하지 않았다. 뒤이어 일중선생의 일중묵연회에서 일중선생의 지도를 받을 때는 체본 위주의 지도방식 보다 하나씩 스스로 깨달아 나가도록 지도받았다. 그 당시 공부할 때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일찍부터 창작능력을 배양시키려는 스승의 의중에 감사한다고 말한다. 법첩이 귀하던 시기여서 어렵게 법첩을 구하면 쌍구를 떠서 점획과 결구의 특징을 분석하였다. 아무튼 한문의 여러 서체를 익힌 학서기의 연마과정은 국전이 막을 내릴 때까지 일중묵연회에서 20년 넘게 계속되었다.
이 시기 익힌 고전자료는 해서에서 안진경의 <근례비>, 행서는 <유석암첩>, 안진경의 <쟁좌위>, 왕희지의 <성교서>와 <난정서>, 예서는 <예기비>, <장천비>, <사신비>와 등완백의 글씨를 익혔고, 초서는 <서보>를 주로 임서하였고, 전서는 오창석의 <임석고문>을 익혀나간다.
몇 년간 열심히 노력한 결과 1965년 제3회 신인미술전람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때는 유석암의 글씨와 왕희지의 글씨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우리는 이 시기의 작품을 1968년 신인전 장려상 수상작인 <동정춘색부(洞庭春色賦)>(그림 1)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작품 속에는 왕희지와 유석암의 필의가 섞여 있다. 이러한 경향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17회, 20회, 21회, 22회, 28회, 29회에 출품하여 6번의 입선을 하였다. 1973년 21회 국전에는 왕희지의 <성교서>(그림 2)를 임서하여 입선하였고, 22회(1974)에는 당나라 해서풍으로 <적벽부>(그림 3)를 출품하여 입선한다. 이렇듯이 학서기 선생의 작품경향은 여러 서가의 서풍을 착실히 임서하면서 자신의 개성미를 다듬어 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60년대 초 입문한 이후 80년대 초 국전을 마칠 때 까지 학서기는 당나라의 해서와 왕희지의 행서 및 여러 서체들을 법첩을 중심으로 임서해 나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기 위해 촌음을 아껴가면서 정진한 본인의 노력이 원동력이 되었지만, 이를 뒤에서 지켜보면서 말없이 도와준 남편 김병욱씨의 절대적인 외조도 큰 몫을 차지하였다. 선생의 남편은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뒤 공인회계사로 활동하면서도 항상 곁에서 먹을 갈아주는 등 수 십년 동안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였다. 아름다운 장미가 꽆을 피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물과 햇볕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학서기의 단단한 기초를 다지기 위해 작가는 하루 종일 서예에만 매달리는 각고의 노력을 하였고, 이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해 준 남편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있었기에 국전에서 4번 입선을 한 뒤 5번 낙선의 고배를 마시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여 입선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
한글전문작가로 거듭난 변화기
국전시대가 막을 내리고 1982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이 열리자 선생은 20여 년 매진해 온 한문서예에 대한 열정을 접고, 한글서예로 자신의 새로운 예술세계를 열겠다는 각오로 출품하여 우수상을 수상한다. 그 동안 한문을 연찬해 온 필력으로 한글서예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가려는 계획아래 한문에서 한글로 서체를 바꾸는 대담한 생각을 실천한다. 82년 우수상 수상작인 <오우가>(그림 4)는 일중선생의 필의를 반영한 궁체흘림으로 세로줄만 맞추었고 세로획의 기필과 수필을 날카롭게 하지 않은 단아한 특징을 보여준다. 1983년 묵향회 회장을 맡으면서 묵향회전에 출품한 <성구>(그림 5)는 한글작품을 발표하던 초기의 작품이다. 같은 해(83년)에 미술대전에서 한글로 특선을 하게 되면서 공모전을 마치면서 한글서예가로 이름을 알린다.
한문에서 한글로 전문영역을 바꾼 것은 여성으로서 성정을 표현해내기 쉽고, 우리 국민이면 누구든지 이해하고 있는 한글로 우리의 조형과 우리의 마음을 담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의 경우, 한글서예를 하기 전에 이미 20년 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한문서예를 해 왔고, 작품의 내용을 알고 작품을 제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청명 임창순 선생의 문하에서 6년 동안 사서삼경을 수학하였다. 묵향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는 논어를 전회원이 읽을 수 있도록 독려하였는데, 서예를 단순한 서사기능 위주의 교육이 아닌 인격함양과 수신의 측면에서도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이론과 실기를 병행해야 자신의 서예양식을 온전히 키워나갈 수 있다는 선생의 서예관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선생 스스로 논어 가운데 문질빈빈(文質彬彬:내용과 형식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가치가 있다는 의미)해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수신의 요체로 삼고 있다.
이 시기 선생의 한글작품을 보면, 한글서예를 접했을 때 일중선생의 한글교본을 보고 공부한 흔적이 남아있다. 그림 4와 5는 이런 범주에 드는 작품이다. 초대작가로 등단한 이후에는 차츰 한글 자료를 모으고 이 자료들을 응용하여 다양한 한글글꼴을 계발해야한다는 일념으로 작업하고 있다. 따라서 80년대 선생의 작품세계는 공모전에 출품할 때는 공모전을 통해 한글서예에 대해 기본적인 것을 체계적으로 연마하였고, 공모전을 마치고 초대작가가 된 뒤에는 자신의 개성미를 다듬어 나가는 모색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한글미학을 찾아서
90년대를 넘어서면서 선생은 한글의 새로운 조형성에 대해 연구와 창작의 두 바퀴를 더욱 힘차게 굴리고 있다. 1996년의 작품인 <세월>(그림 6)에서는 세로획의 기필을 획일화시키지 않으면서 점획의 굵기도 변화를 주고 있다. 이 때부터 바햐흐로 개성을 찾는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1999년의 작품인 <봉서>(그림 7)에서는 원숙한 점획과 부드럽게 이어지는 서선의 연결을 통해 고전연구의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다양한 목판본에 대한 연구의 끈을 더욱 단단하게 잡아당기는데 1999년의 작품 <수신가>(그림 8)가 그 예이다. 2000년의 작품 <불효가>(그림 9)도 고전을 작품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의 작품관도 “고전을 충실하게 익힌 뒤 그 속에서 창신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작가는 더 이상 연구하려고 하지 않는데 선생은 이와 반대로 최근에도 한글서예의 새로운 조형미를 찾기 위해 고전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그 연구의 결과물로 2000년 출판된 『우리글 서체를 찾아서』라는 편저를 내었다. 이는 고전자료를 통해서 미래의 글꼴을 창작해 보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조형의지는 2002년의 작품 <화합>(그림 10)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90도를 유지하고 있는 세로획을 아래로 그으면서 규격화된 획일성에서 벗어나고자 여러 각도로 벌려놓고 있다. 2003년의 작품 <화합>(그림 11)에서는 판본고체에 한문의 용필에서 얻은 필획미를 대입하여 독자적인 조형미감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한글과 한문을 섞어서 처리한 낙관부분은 오랜시간 한문을 연찬해 온 솜씨탓에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즉 한글과 한문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은 지금까지 폭넓게 공부해온 성과인 셈이다. 2004년의 작품 <이해인님의 봄일기>(그림 12)는 ‘규당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40여 년간 한문과 한글을 붓 하나로 관통해 온 선생의 조형미감이 오롯이 녹아있는 작품으로 글자의 대소강약과 점획의 굵고 가늘기가 잘 어울려 보인다. 이와 같이 최근 발표하고 있는 작품에서는 고전(궁체)을 섭렵한 뒤 거기에 선생의 새로운 조형시각(민체)을 가미한 ‘규당체’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선생의 연구 및 창작성과는 1990년 신사임당 상과 2003년 외솔(최현배)상을 수상함으로써 서단 내외에서 인정받고 있다. 또한 각종 단체의 지도자로 서단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세종한글서예큰뜻모임의 초대회장으로서 우리 한글서예의 다양한 미를 찾는 바탕을 마련하였고, 미술협회 부이사장으로 취임하여 한국미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동분서주하고 있다.
한편 선생의 인간적이고 가정적인 면모는 주위에 잘 알려져 있다. 일요일이나 공휴일은 외부인과의 모임을 자제하고 가족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가정이 화목해야 예술도 독자적인 자기세계를 열어나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바쁜 작가생활 중에 딸을 시집보낼 때 손수 한 바늘씩 바느질을 한 웨딩드레스를 입힌 일로 여러 사람의 칭송를 받고 있다. 선생은 이에 대해 ‘아내가 좋아하는 일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직접 먹을 갈면서 격려해 준 남편의 정성을 자식들에게 돌려주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현재 선생의 딸은 어머니의 예맥을 이어 문인화단에서 문인화가로 활동하고 있고, 맏아들은 이비인후과 의사로, 작은 아들은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는데, 가족의 성취를 모두 작고한 남편의 공로로 돌리는 그의 마음씨가 곱기만 하다.
나가며
조종숙 선생은 어린시절 꿈꾸었던 서예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60년대 초 신혼때에 서예에 입문한 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는 세월을 인내하면서 노력해 온 중진작가이다. 그는 입문 후 20년 동안 한문서예의 진수를 깨닫기 위해 몰입하였고, 80년대 이후 한국적인 미감을 살리는 길은 한글서예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자각을 하게됨으로써 한글전문작가로서의 위상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남의 글씨의 소중함’을 아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서단의 지도자로서 서단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고, 한편으로는 개성적인 조형시각으로 개성이 담긴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땀을 흘리고 있다.
그는 세계 속에 우리서예의 정체성을 뚜렷이 알리는 일은 한글서예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고전속에서 새로운 한글서예의 아름다움을 찾는 서예여행을 즐기고 있다. 앞으로 제주도 저지리 문화예술인 마을에 세워진 선생의 작업공간에서 새로운 한글의 조형미학을 연구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싶다고 한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선생에게 있어 꿈이 무엇이냐”는 필자의 물음에 “글씨를 잘 쓰는 작가로 남고 싶다”라고 말한다. 파릇파릇한 오월의 신록처럼 그의 꿈이 자라서 우리를 감동시킬 그 날이 다가오길 기원해 본다.
정태수(서예세상 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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