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5. 09:13ㆍ서예일반
4. 南北朝시대의 墨跡 서예와 서예가
1) 寫經
南北朝시대 대부분의 왕조에서는 불교를 숭상하였고 불사가 매우 성행하였다. 北朝에서는 사찰과 불상을 건립하는 등의 불사가 많아 塔碑와 造像記 뿐 아니라 대량의 불경을 번역하고 옮겨 쓴 寫經 서예 작품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南朝에서는 불교가 성행하였음에도 禁碑令의 전통으로 인하여 塔碑와 造像記등의 서예 자료도 적고 남아 있는 寫經 서예 작품도 北朝에 비하면 훨씬 적다. 고대 사회에서 불교를 전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곧 불경을 베껴서 전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도들은 불경을 베끼는 것이 공덕을 쌓는 하나의 좋은 방법으로 인식되어 寫經의 전통은 급속하게 번질 수 있었다.
寫經은 대부분 민간에서 이루어지거나 아무나 베끼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寫經師에 의하여 베껴진 서예 작품으로 문벌 귀족이나 사대부의 서예와는 형식과 성격이 많은 차이가 난다. 南北朝시대의 유명한 서예가의 작품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墨跡本은 매우 적다. 그러나 다행히도 寫經 서예가 많이 남아 있어서 당시의 墨跡 서예와 서체의 변천에 관하여 연구를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뿐만 아니라 寫經 서예 가운데에도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 많이 있으며 그것들은 배우고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南朝의 왕조 중에서 불교가 가장 성행한 시대는 梁나라이다. 梁武帝는 스스로 불교의 계율을 지킬 뿐 아니라 사찰을 세우고 불경을 번역하도록 하는 등 불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따라서 南朝의 寫經 서예는 梁나라 시대의 것이 가장 많을 뿐 아니라 수준도 가장 높다. 南朝의 寫經 서예는 筆劃이 부드럽고 우아하며 단아하다. 結字가 가지런하며 결구와 布置가 매우 규칙적으로 書家의 기교가 매우 뛰어 났음을 알 수 있다. 南朝시대의 유명한 寫經 작품으로 南齊시대 永明 원년(483)의『佛說歡普賢經』, 永明 10년(492)의『大方等大集經卷第十二』가 있고 南梁시대의『大般涅槃經卷第十一』,『華嚴經卷卄九』 등이 있다.
『大般涅槃經卷第十一』은 南梁의 天監 5년(506)에 譙良顒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며 쓴 불경으로 현재 영국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끝 부분에 불경의 명칭과 글씨를 쓴 연도와 쓴 사람, 그리고 쓴 이유와 과정에 관하여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寫經 작품의 서체는 楷書이며 글자의 크기와 결구가 가지런하고 布置가 균일하다. 起筆은 露鋒으로 필봉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으며 收筆은 거의 필호의 중간으로 처리하여 한 획 안에서 강약의 대비가 분명하며 기교도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晋나라 시대의 寫經 서예는 捺畫이 지나치게 굵고 무거워 둔탁한 느낌이 많으나 南朝시대의 寫經 서예는 성숙된 楷書로 우아하고 수려한 미감을 표현하고 있다.
『華嚴經卷第卄九』은 南梁의 普通4년(523)에 쓰여진 불경으로 끝 부분에 불경의 이름과 “梁普通四年太歲卯四月正法無盡藏寫”라는 款識가 있다. 20세기 초 新疆의 吐魯番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는 일본의 書道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이 작품의 서체는『大般涅槃經卷第十一』과 같은 楷書로 起筆과 收筆의 筆法이 비슷하다. 그러나 筆劃이 굵고 강하며 結字가 疏密하여 장중하고 건강한 느낌이 많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北朝시대의 寫經은 南朝와 비교 할 때 수량도 많을 뿐 아니라 서체와 서풍이 다양하며 심미적 범주도 훨씬 광범위하다. 北朝의 寫經 작품은 대부분 甘肅省 敦煌의 藏經洞에서 발견되었으며 거의 대부분 해외로 유출되어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에 많은 양이 소장되어 있다. 北朝시대의 寫經에도 연대와 쓴 사람의 이름, 그리고 寫經한 목적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 작품이 많이 있기 때문에 서체의 변천사뿐 아니라 寫經의 역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현재까지 발견된 寫經 서예를 근거로 할 때 北朝시대는 寫經이 각 왕조 전반에 걸쳐 보편적으로 행하여 졌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은 양의 寫經이 행하여 진 시대는 역시 北魏이다.
北朝시대 寫經 서예의 형태와 심미적 특징, 그리고 그 변화는 당시의 刻石 서예와 비슷하다. 초기 北魏의 寫經 서체는 隸書의 筆劃을 많이 첨가한 楷書로 묵직하고 웅장하며 질박한 맛을 표현하였다. 중기와 후기로 가면서 강건하고 기백이 넘치는 筆劃을 표현하였을 뿐 아니라 예술성도 매우 뛰어 났으나 말기에는 점차 온화하고 단아한 서풍으로 변하였다. 東魏의 寫經 서예는 그 수량이 매우 적으나 西魏에서는 刻石 서예보다도 수량이 많으며 수준도 北魏의 寫經에 버금간다. 北齊와 北周의 寫經은 筆法이 유창하며 行書의 흐름이 가미되어 세련된 맛이 있으나 筆劃이 방정하게 다듬어져 전체적으로 통일되어 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北魏 시대의 寫經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은『大般涅槃經卷第一』,『勝鬘義記』,『華嚴經卷第四十一』 등이 있으며 西魏와 北周의 寫經으로『金光明經卷第四』,『大般涅槃經卷第十六』,『大般涅槃經卷第三十』 등이 있다.
『勝鬘義記』는 北魏시대 正始 원년(504)의 寫經으로 끝 부분에 “正始元年二月十四日寫訖, 用紙十一張”이라는 款識가 있다. 寫經의 본분은 行書의 筆意를 많이 첨가한 楷書로 結字가 방정하나 유동성이 많이 엿보이는 결구와 布置로 전체적으로 흐름이 돋보인다. 그리고 寫經의 뒷면에는 ‘勝’, ‘鬘’, ‘義’, ‘起’ 등의 글자가 여러 번 반복되어 쓰여져 있다. 이것은 寫經을 연습한 것으로 筆劃이 굵고 웅장하며 結字가 疏密하여 당시의 造像記를 연상하게 한다. 造像記는 바위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 본래의 筆法을 알기 어려우나『勝鬘義記』의 발견으로 龍門 造像記의 筆法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2) 南朝시대의 서예가와 작품
南朝는 매우 많은 서예가를 배출하였을 뿐 아니라 예술적 수준도 뛰어난 시대이다. 唐나라 시대 竇臮의『述書賦』에 의하면 唐나라 시대까지 작품이 전하고 있는 유명한 서예가로 劉宋의 25명, 南齊의 15명, 南梁의 21명. 陳나라의 21명 등이 있었다. 근대 중국의 書學者인 馬宗霍은『書林藻鑑』에서 南朝시대를 “書家頗多, 上自天子, 下至臣庶, 互相陶醉, 浸成風俗”(서예가가 매우 많아 위로는 天子에서 아래로는 관료와 백성들까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풍속을 이루었다.)이라 하였으며 또한 각 시대별로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宋나라의 羊欣, 齊나라의 王僧虔, 梁나라의 蕭子雲, 晋나라의 智永을 들었다. 이들 羊欣, 王僧虔, 蕭子雲, 智永은 南朝 四大家로 불린다. 이 가운데 智永은 서예의 업적이 隋나라 시대에 크게 나타났으므로 隋나라 서예가로 보기도 한다. 이밖에도 宋나라에 孔琳之, 薄紹之, 謝靈運 등, 齊나라에 王慈, 王志, 蕭思話 등, 梁나라에 陶弘景, 蕭衍, 庾肩吾, 貝義淵 등의 많은 걸출한 서예가가 있다.
羊欣(370-422)은 泰山 南城(지금의 山東省 費縣) 사람으로 字는 敬元이며 晋나라와 劉宋에 걸쳐 생활한 뛰어난 서예가이며 서예 이론가이다. 관직은 義興太守을 지냈으며『宋書』와『南史』에 모두 자세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黃門郞을 지냈고 아버지는 佳陽太守를 지내는 등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가문 출신으로 학문과 서예를 연마하기에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또한 외숙인 王獻之를 스승으로 하여 어려서부터 서예의 기초를 착실하게 다질 수 있었다.『南史』의 기록에 의하면 羊欣은 12살 때에 당시 吳興太守인 王獻之에게 맡겨져 서예를 배웠으며 王獻之도 그를 무척 좋아하여 열심히 가르쳤다고 한다.
南朝에서는 거의 모든 서예가가 王羲之와 王獻之를 배웠으며 특히 劉宋에서는 王獻之를 배우는 사람이 많았다. 그 가운데에서 羊欣은 王獻之의 묘법을 직접 전수 받아 필명이 더욱 높았다. 竇臮는『述書賦』에서 “敬元親得法於子敬.”(羊欣은 王獻之의 書法을 직접 배웠다.)이라 하였으며 張懷瓘은『書斷』에서 “師資大令, 時亦衆矣. ......若親承妙旨, 入於室者, 唯獨此公”(王獻之를 스승으로 한 사람은 당시에도 많았다. ...... 그러나 직접 오묘한 법칙을 전승하고 깨달은 사람은 오직 羊欣 밖에 없다.)이라 하여 羊欣이 王羲之의 書法을 가장 잘 배웠다고 평가하였다. 전하는 설에 의하면 당시에는 “買王得羊, 不失所望.”(王獻之의 작품을 사려다 羊欣의 작품을 얻어도 바라던 목적을 잃은 것은 아니다.)이라는 말이 유행하였으며 唐나라 시대까지만 하여도 王獻之의 작품이라 알려져 있는 것 가운데 많은 양이 羊欣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張懷瓘은『書斷』에서 “今大令書中風神怯而瘦者, 往往是羊也.”(지금 王獻之의 작품이라는 것 가운데 품격과 神韻이 낮으며 여윈 것으로는 羊欣의 작품이 많다.)라 하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 羊欣의 墨跡 작품은 전하지 않으며『淳化閣帖』과『大觀帖』에『暮春帖』과『筆精帖』이 전하고 있으나 이것도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羊欣은 서예가로 명성이 높았지만 서예 이론가로서도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가 저술한『采古來能書人名』은 최초의 書藝家史論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秦나라 시대의 李斯로부터 晋나라 시대까지 69명의 서예가에 대하여 출생지, 스승, 뛰어난 서체, 심미적 특징 등에 관하여 연구하여 기록하고 있다.『采古來能書人名』이 발표된 후 南朝와 唐나라 시대에는 서예가의 生平을 연구하고 작품의 수준에 대한 평론이 점차 보편화되었다.
王僧虔(426-485)은 山東省 琅琊의 臨沂에서 태어나 劉宋과 南齊의 두 왕조에 걸쳐서 활동한 서예가이다. 그는 王氏 가문의 영향을 받아 학문과 서예의 기초를 닦았으며 타고난 총명함으로 일찍부터 벼슬길에 나아가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宋나라 시대에 吳興太守와 會稽太守 등 여러 고을의 太守와 吏部尙書, 尙書令 등의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齊나라에서도 侍中과 湘中刺史 등의 벼슬을 하였다. 王僧虔에 관한 기록은『南齊書』와『南史』에 모두 전하며 역대 여러 書論에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南齊書』에 “僧虔弱冠弘厚, 善隸書.”(王僧虔은 약관의 나이에 서법이 무르익어 있었으며 楷書에 뛰어 났다.)라 하여 王僧虔이 어릴 때부터 필명이 높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齊나라 高帝인 蕭道成이 王僧虔에게 자기와 王僧虔의 서예 중에서 누가 제일인지 묻자 대답하기를 “臣書第一, 陛下亦第一.”(신하 가운데에서 제일은 자신이며 帝王 중에서는 高帝가 제일이다.)이라 대답하였다는 일화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王僧虔의 지혜와 정치적 능력을 가늠해 볼 수 좋은 기록이다.
王僧虔은 서예 명문인 琅琊 王氏 가문에서 출생하여 고조부는 王導, 증조부는 王洽, 조부는 王珣이며 또한 王羲之의 4세 族孫으로 서예를 학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가정 환경에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王僧虔은 가법 가운데에서도 王獻之의 書法을 배워 楷書와 行書, 草書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梁武帝 蕭衍은『古今書人優劣評』에서 “王僧虔書如王謝家子弟, 縱復不端正, 奕奕皆有一種風流氣骨.”(王僧虔의 서예는 王씨 가문과 謝씨 가문의 자제와 같이 설령 단정하지 않더라도 활기가 있으며 모두 개성과 골기가 넘친다.)이라 하여 그가 비록 가법을 배웠으나 가법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王獻之처럼 자신만의 새로운 서풍을 추구하였다고 평론하였다.
劉宋 시대에 이미 王僧虔의 필명이 세상에 알려졌으나 齊나라 시대에 세상을 크게 진동시켰으며 그 명성은 羊欣을 능가하여 南朝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받았다. 唐나라 시대의 竇臮는『述書賦』에서 “僧虔密致豊富, 得能失剛. 鼓怒駿爽, 阻圓任强. 然而神高氣全, 耿介鋒芒. 發卷伸紙, 滿目輝光. 才行兼而雙絶, 名實副而特彰.”(王僧虔의 서예는 치밀하고 풍부하여 그 재능을 얻으면 강직함을 잃기 쉽다. 筆勢가 요동치며 기세가 왕성하여 험하고 원만함에 막힘이 없다. 그리고 품격이 높고 가운이 왕성하여 당대 최고의 수준이며 작품을 펼치면 눈앞이 찬란해진다. 지혜와 덕행을 동시에 갖추었으며 모두 매우 뛰어나고 명성과 실제가 함께 하여 특별히 빛난다.)이라 하여 王僧虔의 서예를 극찬하였다. 張懷瓘은『書斷』에서 王僧虔의 楷書와 行書, 그리고 草書를 妙品의 수준으로 평가하였다.
『宣和書譜』에 의하면 宋나라 시대의 궁중에 王僧虔의 楷書 작품인『御史帖』과『陳情帖』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작품은『淳化閣帖』과『大觀帖』에『陳情帖』과『御史帖』이『伯寵帖』과『謝憲帖』의 이름으로 각각 새겨져 있으며 唐나라 초기의 摹本으로『太子舍人帖』이 전하고 있다.『太子舍人帖』은『王琰帖』으로도 불리며 遼寧省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萬歲通天帖』속에 포함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唐나라 초기의 臨摹 수준이 최고로 발달한 시대에 臨摹한 작품으로 王僧虔의 筆意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太子舍人帖』은 筆勢가 기운차고 結字가 치밀하며 方筆과 圓筆을 혼용하여 강건한 미감이 돋보인다.
王僧虔은 서예가로서의 수준도 당대 최고이나 서예 이론가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을 뿐 아니라 南北朝시대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현재까지 전하는 그의 서예 이론은『書賦』,『論書』,『筆意贊』,『答高帝論書啓』 등 여러 편이 있다. 서예 이론에 관한 내용은 다음 항목에서 자세히 다루려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王僧虔의 서예사적 업적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에게로 이어져 대대로 빛을 발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王慈(451-491)와 王志(460-513)는 齊나라와 梁나라 시대에 매우 걸출한 서예가로 꼽힌다. 王慈는 楷書에 뛰어났다고 전하며 唐나라 초기의 摹本인『萬歲通天帖』속에 草書 작품인『得栢酒帖』,『奠體安和帖』,『郭桂陽帖』이 전하고 있다. 王志는 草書와 楷書에 뛰어났다고 전하며『萬歲通天帖』속에『一日無申帖』이 전하고 있다. 이들 두 사람의 서예는 筆法이 비슷하며 結字와 布置가 자유 분방한 것이 특징으로 筆勢가 날카로우며 강렬한 미감이 돋보인다.
陶弘景(456-536)은 丹陽의 秣陵(지금의 江蘇省 南京) 사람으로 字가 通明이며 號는 華陽陶隱居로 隸書와 草書에 뛰어났다고 한다. 劉宋시대에 태어나 齊나라와 梁나라의 세 왕조에 걸쳐서 생활하였다. 그는 서예와 의학, 그리고 거문고와 바둑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도학자로서도 명망이 높았다.『梁書』와『南史』에 陶弘景의 일생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서예가로서의 기록은 張懷瓘의『書斷』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梁書』의 기록에 의하면 35세 때에 이미 관직에 회의를 느끼고 산 속으로 들어가 독서와 養生, 그리고 거문고와 바둑으로 생활하였다고 전한다.
張懷瓘의『書斷』에 의하면 陶弘景은 鍾繇와 王羲之의 서예를 배웠으며 특히 骨氣를 잘 얻었고 서풍이 강건하며 예리하다고 평가하였다. 梁武帝 蕭衍은『古今書人優劣評』에서 “陶隱居書如吳興小兒, 形狀雖未成長, 而骨甚峭快.”(陶隱居의 서예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형태는 비록 성숙하지 않았으나 골기가 매우 튼튼하고 筆勢가 통쾌하다.)라 하였으며 唐나라 시대의 李嗣眞도『書後品』에서 陶弘景의 서예가 骨力의 기운이 뛰어났다고 평가하였다. 陶弘景의 서예는 骨力의 기운과 筆勢의 통쾌함이 가장 큰 특징으로 평가받는다. 南朝시대의 刻石 서예 가운데 筆勢가 가장 통쾌하다고 평가받는『瘞鶴銘』은 비록 작가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陶弘景의 작품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그와 같은 학설의 근거 가운데 하나로 작가와 작품의 심미적 특징을 예로 들기도 한다.
『宣和書譜』의 기록에 의하면 宋나라 궁중에『華陽洞天帖』,『屈畫帖』,『茅山帖』,『帶名帖』,『茅山仙跡』 등 陶弘景의 작품이 있었으나 현재까지 전하는 墨跡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停雲館帖』,『秀餐軒帖』 등의 작품이『淳化閣帖』에 실려 있을 뿐이다. 그리고 梁武帝 蕭衍과 함께 鍾繇와 王羲之의 서예에 관하여 토론한 내용을 기록한 書論인『與梁武帝論書啓』가 전하여 지고 있어서 陶弘景의 서예사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蕭子雲(486-548)은 南蘭陵(지금의 江蘇省 常州) 사람으로 字는 景喬이고 서예가이자 문학자이며 사학자로 명망이 높았다.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났으며 14세에 齊나라의 新浦縣侯에 봉해지는 등 어린 나이에 벼슬길에 나갔다고 전하여진다. 梁나라에 이르러서는 약관의 나이에『晉書』를 편찬하는 임무를 맡고 26세에 110권에 달하는『晉書』를 완성하는 업적을 쌓기도 하였다. 梁武帝 때에는 侍中에 이르렀으며 國子祭酒의 벼슬에 올라 사람들은 ‘蕭祭酒’라 불렀다고 한다.
『梁書』와『南史』등의 기록에 의하면 蕭子雲은 篆, 隸, 楷, 行, 草를 모두 잘 썼으며 楷書는 특별히 뛰어나 많은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善效鍾元常王逸少, 而微變字體”(鍾繇와 王羲之의 본받아 조금 변화시켰을 뿐이다.)라 하여 겸손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鍾繇와 王羲之를 배우는 동시에 王獻之를 흠모하여 전통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南史』의 기록에 의하면 梁武帝 蕭衍은 蕭子雲의 서예를 특별히 좋아하였으며 “筆力勁駿, 心手相應, 巧逾杜度, 美過崔瑗, 當與元常並驅爭先.”(筆力이 굳세고 뛰어나며 손과 마음이 서로 잘 호응하여 기교는 杜度를 능가하고 아름다움은 崔瑗을 넘어서 마땅히 鍾繇와 선두를 다툰다.)이라 하여 마음이 뜻하는 대로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였다고 하였다.
南梁의 袁昻은『古今書評』에서 “書如上林春花, 遠近瞻望, 無處不發.”(글씨가 마치 동산의 봄꽃과 같이 피지 않은 곳이 없어 멀리서나 가까이 에서나 모두 볼 수 있다.)이라 하여 당시의 사람들이 蕭子雲의 서예를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설명하였다.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은『書斷』에서 蕭子雲은 小篆 飛白書를 창조하였고 意趣가 경쾌하다고 평가하였으며 歐陽詢도 매미의 날개에 비유하여 먹색의 농담이 조화를 잘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宣和書譜』에는 宋나라 궁중에 蕭子雲의 草書『千字文』과 楷書 작품『進寫古人啓』,『顔回問孝』 등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지금은 볼 수 없다. 지금까지 전하는 작품은『淳化閣帖』에『舜問帖』,『列子帖』,『國氏帖』 등이 있다.『舜問帖』과『列子帖』 등의 楷書 작품은 隸書의 筆意가 엿보이며 結字가 偏方形에 가깝고 행간을 넓게 布置한 筆劃과 結字, 그리고 章法이 鍾繇와 王羲之의 小楷와 매우 비슷하다.
3) 北朝시대의 서예가와 작품
北朝는 刻石 서예가 매우 발달한 시대이나 대부분 글씨를 쓴 사람과 새긴 사람의 이름을 남기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역사책이나 역대 書論에서도 北魏 시대의 서예가에 대하여 기록한 흔적이 적을 뿐 아니라 墨跡과 閣帖本도 거의 남겨져 있지 않다. 따라서 수많은 刻石 서예가 전하고 있으나 알려져 있는 당시의 서예가는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 학자인 馬宗霍은『書林藻鑑』에서 崔浩, 盧諶, 顔之推, 劉珉, 冀俊, 趙文深, 鄭道昭, 鄭述祖 등을 北朝시대의 서예가로 꼽았다. 이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서예가는 鄭道昭와 鄭述祖 부자이며『吊比干文』의 작가로 전해지는 崔浩의 명성도 비교적 높다.
兩晋과 南北朝시대의 북쪽은 북방의 여러 민족이 번갈아 통치하게 되자 수많은 문벌 世族들은 한족의 왕조를 따라 남쪽으로 옮겨 살았다. 북쪽에 그대로 눌러 살았던 문벌 세족 중에서 가장 전통 있는 가문은 崔씨와 盧씨 가문으로 서예도 이 두 가문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崔씨 가문의 서예가로 崔玄伯, 崔挺, 崔辯, 崔光, 崔亮 등과 가장 유명한 崔浩가 있으며 盧씨 가문에는 北魏시대의 書博士인 盧玄을 비롯하여 盧諶, 盧誕 등의 서예가가 유명하다. 이들 서예가들은 모두 문인 서예가로 南朝의 서예가와 같이 鍾繇와 王羲之를 배웠으며 서풍도 北碑의 웅장하고 강건한 미감과는 달리 단아하고 수려한 南朝의 서예와 같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鄭道昭(455-516)는 河南省의 開封 사람으로 字는 僖伯이고 號를 中岳先生이라 하였으며 北朝시대의 가장 걸출한 서예가로 꼽힌다.『魏書』와『北史』에 자세한 기록이 있으며 北魏의 崔씨 집안과 함께 명문 세족으로 전한다. 鄭道昭의 아버지는 鄭羲로 孝文帝 때에 中書令를 지냈으며 鄭道昭는 그의 막내아들이라 전하고 있다. 관료의 집안에서 성장한 鄭道昭는 어려서부터 학문과 서예를 닦을 수 있었으며 일찍이 벼슬에 나아가 國子祭酒와 光州刺史, 靑州刺史 등의 관직을 지냈다. 서예가로서는 크게 알려 진 것이 없으며 전하는 墨跡 작품도 없어서 淸나라 시대까지는 큰 명성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淸나라 후기에 山東省의 雲峰山과 天柱山 일대에서 그가 쓴 수많은 刻石 작품이 발견되고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됨에 따라 北朝시대의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평가받게 되었다.
淸나라 시대까지 중국 서예사는 漢族이 통치한 왕조와 문인 사대부를 중심으로 쓰여졌으며 墨跡 서예와 閣帖 작품을 서예의 전부로 이해하였다. 南北朝시대의 서예도 南朝와 閣帖을 중심으로 학습하고 평론하였기 때문에 전하는 墨跡과 閣帖이 없는 北朝시대의 서예가인 鄭道昭는 일 천년을 넘게 역사의 뒤에 묻혀 있어야 했다. 淸나라 후기 고증학과 금석학 등 새로운 학문이 크게 발전함에 따라 書藝學界도 일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일 천여 년 동안 중국 서단을 통치해 온 帖學에 염증을 느낀 많은 금석학자와 서예 이론가들은 北朝시대의 刻石 서예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들 碑學 이론가들의 뒤를 이어 새로운 書派인 碑派가 碑學 이론을 근거로 창작 활동을 하게 되고 帖派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北朝시대의 가장 뛰어난 서예가인 鄭道昭의 이름과 刻石 작품들이 새로운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淸나라 후기의 書學者인 包世臣과 금석 학자인 葉昌熾 등이 처음으로 鄭道昭의 서예에 대해 거론하고 雲峰山 등의 작품을 높이 평가한 후 그의 위치는 돌연 北朝시대 최고의 위치로 올라가게 되었다. 包世臣은『藝舟雙楫』에서 鄭道昭에 대하여 소개하고 雲峰山의 여러 刻石이 그의 글씨라 고증하였으며 그 심미적 특징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비록 包世臣이 雲峰山의 刻石 중에서 鄭道昭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였으나 고증이 미숙한 것도 있으며 각 작품의 특징을 분석하지 않아 鄭道昭를 알리는데 완벽하지는 못하였다. 葉昌熾는『語石』에서 “鄭道昭[雲峰山上下碑』及[論經詩』諸刻, 上承分篆, ...... 其筆力之健, 可以剸犀兕, 搏龍蛇. ...... 唐初歐虞褚薛諸家, 皆在籠罩之內. 不獨北朝第一, 自有眞書以來, 一人而已. ...... 余謂鄭道昭, 書中之聖也.”(鄭道昭의 雲峰山『鄭文公碑』와『論經詩』등 여러 刻石 서예는 隸書와 篆書의 筆法을 이어 받았다. ...... 그 필력의 강건함은 무소의 뿔을 자르고 용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이다. 初唐四大家들도 모두 鄭道昭의 범위 안에 있으며 北朝 최고일 뿐 아니라 楷書가 생긴 이래로 최고이다. ...... 나는 鄭道昭를 書聖이라고 말한다.)라 하여『鄭文公碑』와 여러 刻石의 예술적 수준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을 뿐 아니라 王羲之보다 뛰어난 서예가로 평가하였다. 이 후부터 鄭道昭와 그 작품은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서도『鄭文公碑』는 南碑의『瘞鶴銘』,『爨寶子碑』와 더불어 南北朝시대의 가장 뛰어난 刻石 서예로 평가받게 되었다.
包世臣과 葉昌熾가 鄭道昭와『鄭文公碑』 등의 작품을 극찬한 후 淸나라 후기의 많은 書學者와 金石學者들이 雲峰山등 四山일대를 뒤져서 刻石을 찾고 또 정리하여 연구 발표하였다. 吳式芬의『捃古錄』, 陸增祥의『八琼室金石補正』, 方若의『校碑隨筆』 등에 수록된 雲峰山, 天柱山, 太基山 등에 새겨져 있는 北朝시대의 刻石 서예는 40점이 넘는다. 그 대부분이 鄭道昭와 鄭述祖 부자의 글씨이며 다만『太基山銘告』등 몇몇 작품만 鄭道昭의 제자들의 글씨라 전한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雲峰山의 42점 刻石을 ‘神品上’의 위치에 놓으며 神韻은 鄭道昭가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鄭文公碑』의 심미적 특징을 包世臣은 ‘駿逸’, 葉昌熾는 ‘神運’, 龔自珍은 ‘浩逸’이라 하였으며 康有爲는 ‘神韻’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단어들은 예술 작품의 심미적 경지를 가장 높은 차원으로 평가한 것으로 鄭道昭의 서예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하다.
鄭道昭의 작품으로 전하는 刻石 가운데 유명한 작품은『鄭文公碑』를 포함하여『論經書詩』,『觀海童詩』,『石闕題字』,『仙境詩』,『東堪石室銘』 등이다. 이들 작품은 모두 摩崖刻石으로 圓筆과 方筆을 혼용하였으며 筆劃의 길이와 結字도 바위의 형세에 맞추어 자연스럽고 웅장하며 질박하다. 결구와 布置는 넓고 시원하게 처리하였으며 평범한 듯 하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이 돋보이는 것이 鄭道昭 글씨의 특징이다.
鄭述祖(485-565)는 鄭道昭의 아들로 字는 恭文이며 아버지의 筆法을 계승하였다고 전하여진다. 魏晋南北朝시대의 서예가는 대부분 문벌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과 같이 鄭道昭의 가문도 서예의 명문으로 이름이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淸나라 후기의 歐陽輔는『集古求眞』에서 “鄭道昭, ...... 北方之聖手也. 其子述祖亦善書, 兼工八分. 當與王氏父子幷駕齊驅, 分道揚鑣, 爲南北書家宗祖.”(鄭道昭는 北朝의 書聖이다. 그의 아들인 鄭述祖 역시 서예에 뛰어났으며 隸書를 잘 썼다.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가 나란히 뛰어난 것과 같이 서로 다른 길에서 이름이 드높았으며 南北朝시대 서예가의 근원이 되었다.)라 하여 鄭道昭 부자와 王羲之 부자를 서로 대등하게 비교하여 평가하였다.
현재까지 전하는 鄭述祖의 작품은『修孔廟碑』,『天柱山銘』,『題雲居館石刻』,『重登雲峰山記』,『文公碑題記』 등으로 雲峰山 일대에 새겨져 있다. 이들 작품의 筆法과 서체는 鄭道昭의 서예와 비슷하나 필력이나 예술적 수준은 아버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이다. 王羲之 부자를 평가할 때 전체적으로는 王獻之가 아버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나 王獻之도 자신만의 개성 있는 작품을 창조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鄭述祖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그의 筆法을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王獻之의 수준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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