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5. 09:12ㆍ서예일반
Ⅴ. 魏晉南北朝시대의 書論
1. 魏晋시대의 用筆論과 流美論
서예가 예술의 한 영역으로 자각되기 시작한 것은 漢나라 시대이며 때를 같이 하여 서예 이론이 탄생하였다. 魏晋시대에 모든 서체가 완전한 형태로 자리잡게 되자 書論도 점차 체계를 잡아가고 범위도 넓어진다. 기록과 전달, 그리고 禮樂의 효용이 서사 활동의 목적인 시대에서 창작하고 감상하는 예술 시대로 전환된 뒤에 요구하는 서예에 대한 심미적 범주는 더욱 광범위하고 구체적이다. 실용의 목적에서는 서체의 정확한 형상과 균일한 結字와 결구, 그리고 布置가 가장 중요한 심미적 요구였다. 그러나 창작하고 감상하는 예술로서의 서예는 筆法, 結字法, 布置와 章法 등 객관적이고 직접적인 서예 이론뿐 아니라 사상과 철학 등 작가의 주관적인 창작 요소에 관해 많은 수양을 요구하게 되었다.
曹魏시대는 書論이 발전할 수 있는 실천적 기초인 서체가 모두 갖추어진 시대이다. 그러나 수많은 전쟁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까닭으로 서예의 체계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남겨진 書論도 적을 뿐 아니라 그 수준도 漢나라 시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漢나라 시대의 書論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문헌에 전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唐宋시대의 문헌 속에 기록되어 있으며 진위의 고증도 쉽지 않다. 이 책에서는 書論들의 진위에 대한 고증은 잠시 미루어 두고 문헌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하는 전통적 방법으로 접근하여 그 대강을 분석하기로 한다. 曹魏시대 書論의 주요한 내용은 각종 서체의 특징을 묘사하고 작품을 창작하는 기법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曹魏시대의 가장 유명한 書論은 鍾繇의 이론으로 宋나라 시대의 陳思가 정리한『書苑菁華』에 수록되어 전한다.『書苑菁華‧卷首』의 秦, 兩漢, 魏나라 서예가의 用筆法을 설명하는 내용 가운데에 鍾繇의 ‘用筆’論과 ‘流美’論을 인용한 글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은 “豈知用筆而爲佳也, 故用筆者天也, 流美者地也, 非凡庸所知.”(어찌 用筆法이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으랴. 用筆은 하늘이고 流美는 땅이다. 비범한 사람은 이러한 도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어찌 용필이 이루어져야만 좋은 작품이 탄생함을 알 수 있으랴)로서 鍾繇의 서예 기법과 서예 미학에 관한 사상을 집약한 내용으로 평가된다.『書苑菁華』의 기록에 의하면 用筆論과 流美論은 秦나라 시대 蒙恬의『筆經』에서 말한 “若能用筆, 當自流美.”(用筆이 뛰어나면 유창하고 아름답게 된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蒙恬과 鍾繇가 用筆論과 流美論에 대하여 말한 것이 사실인지는 고증할 수는 없으나 기법과 미학의 관계를 설명한 이 내용은 書論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鍾繇는 筆法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서예가로 평가받고 있다. 鍾繇가 하루는 韋誕의 집에서 蔡邕의 筆法이 적힌 책을 보고서 얻어 보려 하였으나 거절당한 후 병을 얻었으며, 韋誕이 죽고 난 후 그의 묘를 파서 蔡邕의 筆法을 얻었다는 고사는 鍾繇가 얼마나 筆法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筆法의 연구에만 머물지 않고 運筆의 결과인 서예의 미를 심도 있게 탐구하였다. 서예 미를 ‘流美’ 즉 유창한 아름다움이라 설명한 것은 서예를 움직이지 않는 대상에서 움직이는 대상으로 본 것으로서 書論史에서 형태론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필묵의 운동으로 이루어지는 서예 작품은 시간의 연속성과 공간에서의 흐름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음률이 있는 평면 시각 예술이라 할 수 있다.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은『書議』에서 서예를 “無聲之音”(소리 없는 음률)이라 하여 움직임이 있는 예술로서의 서예를 가장 잘 평가하였다고 인정되며 이것은 鍾繇의 書論을 완성한 이론이라 평가 할 수 있다.
2. 魏晋의 書勢論과 尙意의 미학
1) 書勢論
曹魏시대의 書論은 漢나라와 시대부터 토론하기 시작한 書勢論을 더욱 발전시킨 시대이다. 이 시기에 書賦, 書狀, 書勢, 筆勢 등에 관하여 서술한 저작이 탄생하였으며, 대체로 문자의 형태를 묘사하거나 서체와 그 筆劃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 중심 내용이었다. 漢나라 시대 崔瑗의『草勢』와 蔡邕의『篆勢』로 시작하는 書勢論은 楊泉의『草書賦』, 成公綏의『隸書體』, 衛恒의『四體書勢』, 索靖의『草書狀』, 劉劭의『飛白書勢』, 衛鑠의『筆陣圖』, 등에서 각 서체의 筆劃과 형태의 미감을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기에 이른다. 이 가운데에서 서체의 형태를 가장 구체적으로 논술한 사람은 衛恒이며 筆勢와 그 심미적 특징에 대해 분석한 사람은 衛鑠이다.
衛恒의『四體書勢』는『晉書‧衛恒傳』에 실려 있으며 古文字, 篆書, 隸書, 草書의 4가지 서체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설명하고 각 서체의 미를 분석하였다. 古文字는 서체의 명칭이 아니기 때문에 古文의 ‘字勢’라 부르고 그밖에는 서체의 명칭에 따라서 ‘篆書勢’, ‘草書勢’, ‘隸書勢’라 부른다. 그 가운데 篆書에 관한 내용은 蔡邕의『篆勢』를, 草書는 崔瑗의『草勢』를 중심으로 하여 설명하였으며 古文字와 隸書의 書勢는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다.『篆勢』와『草勢』가 蔡邕과 崔瑗의 저작으로 확실히 고증되지는 않았지만 衛恒의 書勢論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서체의 미를 설명 할 때 대자연에 존재하는 만물의 형상을 빌어서 筆劃과 문자의 외형, 그리고 筆勢와 書勢를 형용하였다.
衛恒은 ‘六書’로서 古文字의 근본을 설명하였으며 그 개념을 ‘글자를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는 서체’, 즉 문자의 象形性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篆書는 筆法이 다양하며 글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형상을 思考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隸書는 筆勢와 結體의 변화를 강조하였고 草書는 상황에 따라 안배 할 수 있는 오묘한 이치를 중요하게 여겼다. 衛恒의 이러한 관점은 문자의 미감이 자연계의 물상과 통하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작가는 대자연에 존재하는 미를 서체의 특징과 잘 융화하는 능력을 요구한 것으로 이해된다.
『筆陣圖』는 唐나라 시대의 張彦遠이 曹魏시대 衛鑠(272-349)의 저술이라 주장하며『法書要錄』에 실은 후 宋나라 시대 陳思도『書苑菁華』에 실어 현재에 전하여 지고 있다. 그러나 唐나라 시대의 孫過庭은『書譜』에서『筆陣圖』를 王羲之의 저술로 보았으며 당시의 蔡希綜도『法書論』에서 王羲之의 저작으로 인정하였고 宋나라 시대의 朱長文도『墨池編』에서 王羲之의 書論이라 하였다. 明나라 시대의 楊愼과 李後主 등은『筆陣圖』를 南梁시대 羊欣의 저술로 보기도 하는 등 많은 주장이 있으나『筆陣圖』가 衛鑠의 저술이라는 진위가 완전하게 고증되지는 아니하였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전통적 관점에 따라 衛鑠의『筆陣圖』라 명칭 한다.
衛鑠은『筆陣圖』에서 서예의 기법과 창작, 그리고 심미적 특징에 대하여 논술하였으며 그 오묘함을 강조하였다. 문장의 머리에 “夫三端之妙, 莫先乎用筆; 六藝之奧, 莫重乎銀鉤.”(舌端, 劍端, 筆端 가운데서는 用筆이 으뜸이고, 禮, 樂, 射, 御, 書, 數 가운데에서는 서예가 가장 중요하다.)라 하여 서예의 중요성과 오묘함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善鑒者不寫, 善寫者不鑒”(뛰어난 감상자라도 글씨를 쓰지 못할 수 있고 뛰어난 서예가라도 잘 감상하지 못할 수 있다.)이라는 이론을 펴 창작과 이론의 영역이 분리될 수 있다는 기초를 제공하였다. 실제로 이론의 연구와 작품의 창작은 한 줄기에서의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서로 분리되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는 것으로『筆陣圖』의 이러한 견해는 서예 이론사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筆陣圖』에서는 일곱 가지 筆劃을 예로 들고 각 筆劃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심미적 범주와 특징을 요구하였다. 일곱 가지 筆劃의 심미적 요구는 西晉시대의 書勢論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집필, 運筆, 결구 등 서예의 기법과 창작하는 작가의 마음과 육체, 그리고 마음과 붓의 관계에 대하여 깊이 있는 탐색을 하였다.『筆陣圖』에서 말한 “意後筆前者敗, 意前筆後者勝.”(마음이 뒤에 있고 붓이 먼저이면 실패하고, 마음이 먼저이고 붓이 뒤에 가면 성공한다.) 의 이론은 王羲之의 書論에서 크게 발전하여 ‘尙意’의 사상으로 자리잡게 된다.『筆陣圖』에서 요구한 筆劃의 심미적 특징은 楷書의 臨書와 창작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여 아래에 기록해 둔다.
一 : 如千里陣雲, 隱隱然其實有形(橫畫은 하늘 멀리 늘어선 구름같이, 은은히 虛와 實의 변화가 있는 형세이어야 한다)
丶 : 如高峰墜石 ,磕磕然實如崩也(點은 높은 산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바위처럼 살아 움직이는 형세와 바위가 깨지는 듯한 기운이 있어야 한다.)
丿 : 墜斷犀象 (撇畫은 마치 무소의 뿔과 상아가 끊어지는 세력과 같아야 한다.)
ㄟ : 百鈞弩發 (戈畫은 무겁고 강한 활을 쏘는 힘이 있어야 한다.)
丨 : 萬歲枯藤 (竪畫은 수백 년을 산 등나무와 같아야 한다.)
乙 : 崩浪奔雷 (捺畫은 큰 파도가 솟아나고 번개가 치는 듯한 세력이 있어야 한다)
亅 : 勁弩筋節 (橫折鉤畫은 탄력성이 강한 활과 같은 질김과 힘이 있어야 한다.)
衛恒과 衛鑠의 書論을 포함하여 成公綏, 楊泉, 索靖 등의 書論 저술은 몇 가지 방면에서 서로 일관된 이론을 펼치고 있어 曹魏시대 書論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첫째, 새로운 서체의 가치와 지위를 인정하고 서체 발전의 원인과 그 현상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둘째, 서체의 심미적 특징을 자연계 만물의 형상을 빌어서 ‘體’, ‘勢’, ‘狀’, ‘賦’ 등으로 이름 붙여『草書賦』,『隸書體』,『四體書勢』,『草書狀』,『飛白書勢』 등에서 각종 서체의 형상에 대하여 묘술 하였다. 셋째, 작가의 주관된 ‘心’과 ‘意’를 만물의 미감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성분으로 여겨 사상과 감정이 필묵의 움직임과 筆法의 기교와 함께 잘 융화되기를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을 종합하면 이 시대의 서학자들이 비록 ‘體’, ‘勢’, ‘狀’, ‘府’로 나누어 저술하였으나 다같이 서예의 형태미를 설명한 ‘書勢論’임을 알 수 있다.
2) 王羲之의 尙意 사상
王羲之의 書論으로는『自論書』,『題衛夫人筆陣圖後』,『書論』,『筆勢論十二章幷序』,『用筆賦』,『記白雲先生書訣』 등 비교적 많은 저술이 전하고 있다. 王羲之의 書論이 당시의 책에는 거의 기록되어 전하지 않고 대부분 唐나라 시대 이후에 편찬된 책에 실려 있다.『論書』와『題衛夫人筆陣圖後』는 唐나라 시대 張彦遠의『法書要錄』에 실려 있으며『書論』,『筆勢論十二章竝書』,『用筆賦』,『記白雲先生書訣』 등은 宋나라 시대 陳思의『書苑菁華』와 朱長文의『墨池編』 등에 실려 있기 때문에 王羲之의 저술인지 아닌지 고증하기가 쉽지 않다.
현대 중국의 王鎭遠 등의 書學者들은 이 가운데에서『論書』만이 王羲之의 저술로 고증하고 나머지는 후대의 사람이 王羲之의 書論 사상을 참고로 저술한 내용이라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상의 書論들이 비록 王羲之가 직접 쓴 책이 아니라 하여도 王羲之의 書論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진 내용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학설이다. 그리고 그 書論 가운데에는 서예를 창작하고 감상하는데 중요한 내용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書論史에서도 높은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王羲之의 書論은 東晋시대의 사상과 심미적 요구를 서예의 범위 안으로 집약하여 표현하였다고 평가 할 수 있다. 西晉시대의 書論에서 이미 출현한 ‘心’과 ‘意’에 대한 사고는 王羲之에 와서는 意趣와 韻致를 중요하게 여기는 ‘尙意’와 ‘重韻’의 사상으로 발전한다. 書論에서 ‘心’, ‘意’, ‘韻’에 관하여 토론하기까지는 당시의 玄學을 기초로 한 淸談사상이 가장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尙意’와 ‘重韻’의 인식은 서예의 창작과 감상이 더 이상 서체 외형의 아름다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사상과 감정, 그리고 심미적 염원까지 표현하고 감상되어야 하는 예술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王羲之 書論의 핵심 사상이다. 또한 王羲之는『筆陣圖』에서 거론한 ‘意’와 ‘筆’, 즉 정신과 육체의 관계인 “意在筆前”(마음이 항상 붓보다 먼저 결정하여야 한다.)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창작 활동의 중요한 법칙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一波三過’, ‘擊石波’, ‘隼尾波’ 등의 구체적인 筆法을 예로 들고 각 서체와 筆劃의 적당한 運筆法 등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논술하였다.
王羲之는 작가의 心意가 서예의 창작 활동 가운데 점과 획의 구체적 형태 속에 함축되어 표현된다고 인식하였다. 점과 획의 구성으로 이루어지는 서예는 단순한 외형의 묘사가 아니라 ‘意趣’가 표현되어야 하며 그 意趣는 작가의 사상과 심미적 요구를 筆劃의 형상을 빌어서 나타나는 내면의 세계이다. 王羲之 書論을 근거로 하면 그는 서예를 창작하고 비평하며 이론을 전개 할 때 한 점, 한 획이라도 각각 서로 다른 意趣를 심미적 요구의 기본적 요소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예는 작가의 감정과 정서를 표현 할 수 있는 예술로 이해하여 작품의 창작 속에 문자의 객관성과 작가의 주관적 심의가 서로 통해야 함을 강조하였다.『書論』중에 “書須存思”(서예의 작품 속에는 사상이 있어야 한다), “字字意別”(글자마다 意趣의 구별이 있어야 한다.)이라는 말로서 서예 미의 근본은 意趣임을 설명하였다. 孫過庭과 劉熙載 등이『書譜』와『書槪』에서 王羲之의『黃庭經』,『東方朔畫讚』,『蘭亭序』 등의 여러 작품이 서로 다른 감정 상태에서 창작하였기 때문에 심미적 특징도 다르게 표현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이것은 바로 王羲之 자신이 이론뿐만 아니라 작품의 창작에서도 자신의 ‘意趣’論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증거가 된다.
창작과 감상의 내면적 요구 이외에 王羲之 書論의 가장 중요한 이론은 작가의 마음과 육체와의 관계를 설명한 “意在筆前”論이다. 衛부인의『筆陣圖』에서 처음으로 제기한 ‘意’와 ‘筆’의 문제를 王羲之는『題衛夫人筆陣圖後』와『書論』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書論』에서 “書貴乎沈靜, 令意在筆前, 字居心後, 未作之始, 結思成矣.”(서예 작품을 창작 할 때는 안정되고 조용한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생각이 붓보다 먼저이고 글자가 마음의 뒤에 와서 글자를 쓰기 전에 구상이 반드시 완성되어야 한다.)라 하여 창작할 때 작가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이것은 작가에게 창작하기 전에 먼저 筆劃과 자형, 그리고 결구와 章法 등을 면밀히 고려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王羲之 書論의 창작론과 작가론은 모두 작가의 주관적 요소인 ‘心意’를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심미적 요구는 당시의 玄談사상을 기초로 한다. 玄談사상에서 출발한 王羲之의 심미적 요구는 書論에서 意와 韻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결국 작가의 주관적 요소인 ‘意趣’를 창작과 감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따라서 창작하기 전에는 마음으로 작품의 전체를 구상하고 작품 속에는 작가의 마음을 담아야 하며 감상할 때는 작품의 내면에 존재하는 작가의 함축된 정신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창작과 감상에 대한 王羲之 書論의 핵심임을 알 수 있다.
3. 南北朝시대의 書品論과 창작론
魏晋시대의 書論은 서체를 분석하고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거나 창작하고 감상하는 태도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 주요한 내용이었다. 南北朝시대에는 魏晋시대에 이루어 놓은 창작과 이론을 기초로 하여 서체를 분석하는 방법에서 그 서체를 바탕으로 창작한 작가를 위주로 평가하는 방법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漢나라 후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인물을 평가하는 전통에서 비롯되었으며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의 작품을 숭상하는 시대적 배경이 서예가와 작품을 평가하는 書論을 탄생하게 하였다. 南北朝시대의 書論 중에서 작가와 작품을 위주로 평론한 것으로 羊欣의『采古來能書人名』, 王僧虔의『論書』, 袁昻의『古今書評』, 蕭衍의『書評』, 庾肩吾의『書品』 등이 있으며 그밖에 虞龢의『論書表』, 王僧虔의『筆意贊』, 陶弘景의『論書啓』, 蕭衍의『觀鍾繇書法十二意』와『草書狀』,『答陶隱居論書』 등 南朝의 書論과 江式의『論書表』, 王愔의『古今文字志目』, 顔之推의『顔氏家訓』 등 北朝의 書論이 있다.
南北朝시대의 서가론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王羲之와 王獻之의 서예에 대한 평론이다. 劉宋과 南齊시대의 羊欣과 王僧虔은 王獻之의 계승하고 그 書論에서도 王獻之의 서예를 매우 높게 평가하여 이 시대에서는 王羲之보다 王獻之의 서예가 더 유행하였다. 羊欣은『采古來能書人名』에서 王獻之의 서예를 “骨勢不及父, 而媚趣過之.”(골격의 세력은 아버지의 서예에 미치지 못하지만 풍치의 아름다움과 개성 있는 취향은 아버지를 능가한다.)라 하여 王獻之의 새로운 심미적 추구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南梁과 陳나라 시대를 거치며 王羲之의 위치가 王獻之를 능가하였으며 唐나라 이후에는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되어 書聖의 위치에 올랐다. 梁武帝 蕭衍은『觀鍾繇書法十二意』에서 “子敬之不迨逸少, 猶逸少之不迨元常.”(王獻之가 王羲之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王羲之가 鍾繇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이라 하여 王獻之의 위치를 王羲之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하였으며 이 이론은 唐나라 초기에 王羲之를 숭상하고 王獻之를 낮게 평가하는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南北朝시대에 서예 작품을 평론하는 매우 독특한 방법은 자연계의 만물을 비유의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서예의 형세를 만물의 형상과 비교하여 평론하였다. 비유의 대상은 해와 달, 바람과 구름, 산과 내, 초목과 짐승 뿐 아니라 사람과 신선 등 형체가 있는 것과 음악과 계절의 변화 등 추상적 대상까지도 포함되었다. 梁武帝는『古今書人優劣評』에서 王羲之의 서예를 “王羲之書, 字勢雄逸, 如龍跳天門, 虎臥鳳闕”(王羲之의 서예는 筆勢가 웅장하고 빼어나 마치 용이 하늘로 도약하고 봉황이 궁궐에 누워 있는 듯 하다.)이라 하였으며 袁昻은『古今書評』에서 “書如上林春花, 遠近瞻望, 無處不發.”(글씨가 마치 동산의 봄꽃과 같이 피지 않은 곳이 없어 멀리서나 가까이 에서나 모두 볼 수 있다.)이라 한 것 등은 모두 서예를 자연과 비유한 매우 유명한 예이다.
南北朝시대의 書論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또 하나의 이론은 창작론이다. 曹魏시대의 기법론과 兩晋시대의 書勢論 및 尙意論에서 출발하여 작품 자체의 미를 탐구하는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 南北朝시대의 書論은 ‘살찌고 마름’, ‘질박하고 화려함’, ‘강건함과 부드러움’, ‘천부적 소질과 노력’, ‘내면의 정기와 외형’ 등의 심미적 범주에 대하여 깊이 있는 연구를 하기에 이른다. 그 가운데 가장 깊이 있는 이론으로 書論史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王僧虔이다. 그는『筆意贊』에서 “書之妙道, 神彩爲上, 形質次之, 兼之者方可紹於古人.”(서예의 오묘한 도리는 작품 내면의 정기를 으뜸으로 하며 필묵의 형태는 그 다음이며 두 가지를 겸비하여야 옛 성현을 계승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이라 하여 작품내면의 정기와 외형에 대한 창작론의 근본을 확립하였다.
이상에서 설명한 南北朝시대 書論의 흐름은 거의 南朝시대의 書論과 작가를 중심으로 하였다. 北朝시대의 書論은 전하고 있는 저술이 적을 뿐 아니라 대체로 서예가와 서체를 판별하는 등 내용의 수준도 南朝의 書論에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 중에서 비교적 유명한 書論家는 顔之推이다. 그는『顔氏家訓‧雜藝篇』에서 서예와 회화 등의 예술 사상을 기록하였으나 ‘雜藝’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예를 크게 중시하지는 않았다. 아래에서는 南朝시대 書論家의 書論에 대하여 간략하게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羊欣의『采古來能書人名』은『古來能書人名錄』이라고도 불리며 秦나라 시대부터 東晋까지의 서예가 69명에 대하여 그들의 뛰어난 서체를 간략하게 서술한 책이다. 이 書論은 唐나라 시대 張彦遠의『法書要錄』에 실려 있으며 내용의 머리에 王僧虔이 羊欣의 이론을 기록하였다고 적혀 있다. 羊欣의『采古來能書人名』은 서예가의 활동 시대와 뛰어난 서체 등에 대하여 매우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으나 書論史적 의의는 비교적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처음으로 역대 서예가들을 시대별로 정리하고 그들의 서예를 직접적으로 평가하여 우열을 정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漢나라 이후에 사람의 덕성과 재능을 품평하는 관습에서 유래하였으며『畵品』,『詩品』 등과 함께 발전하여 후대의 書論이 書品論으로 발전하는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된다. 袁昻의『古今書評』, 庾肩吾의『書品』, 唐나라 시대 李嗣眞의『書後品』, 張懷瓘의『書斷』, 淸나라 후기의 包世臣과 康有爲 등의 書論이 모두 羊欣의 방법을 계승하였으며 이는 중국 書論의 중요한 비평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羊欣은『采古來能書人名』에서 서체의 창조와 변천에 대하여 서술하였을 뿐 아니라 서예가의 성격과 서체와의 연관성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서예가의 개성, 학문, 수양 등은 그의 성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이론은 사람을 알면 서예의 심미적 특징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는 漢나라 시대 揚雄이『法言·問神』에서 “言, 心聲也, 書, 心畵也.”(말은 마음의 소리요 글은 마음의 그림이다.)라 한 이론을 계승하여 淸나라 시대 劉熙載가『藝槪‧書槪에서 “書, 如也. 如其學, 如其才, 如其志, 總之曰如其人而已.”(서예는 如이다. 그 사람의 학문과 재능 그리고 지향과 같은 것으로 종합하여 말하면 서예는 그 사람이다.)라 하는 이론을 낳게 하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羊欣이 서예의 심미적 범주로 인용한 개념은 ‘마름’과 ‘살찜’, ‘힘’과 ‘풍치’로서 서예를 사람의 외모와 내면의 정기에 비유하였다. 胡昭와 鍾繇의 서예를 “二子俱於學德昇, 而胡書肥, 鍾書瘦.”(두 사람이 모두 劉德昇의 서예를 배웠으나 胡昭의 서예는 살찌고 鍾繇의 서예는 말랐다.)라 하였고 王獻之의 서예를 “骨勢不及父, 而媚趣過之.”(힘은 王羲之에 미치지 못하나 풍치는 능가한다.)라 하여 ‘마름’과 ‘살찜’, 그리고 ‘힘’과 ‘풍치’를 심미적 범주로 인용하였다. 이후 이러한 개념은 중국 書論史에서 서예 미학의 한 영역으로 자리 메김 하였다. 南齊의 王僧虔은『論書』, 梁武帝 蕭衍은『觀鍾繇書法十二意』에서 羊欣이 인용한 ‘마름’과 ‘살찜’, 그리고 ‘힘’과 ‘풍치’를 심미적 범주로 하여 서예를 평론하는 등 많은 書論에서 이 개념으로 서예를 평론하였다.
『論書表』는 문장의 끝에 “六年九月中書侍郞臣虞龢上”이라는 기록으로 劉宋 泰始 6년(470)에 당시의 中書侍郞이던 虞龢가 明帝에게 올린 書論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虞龢는 會稽 余姚(지금의 浙江省) 사람으로 劉宋시대의 서예가이다.『唐書‧藝文志』에 虞龢가『法書目錄』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으며 唐나라 시대 竇蒙의『述書賦注』에도 당시에 虞龢의『論書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전하고 있는『論書表』는 宋나라 시대 朱長文의『墨池編』에 전문이 실려 있으며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의 서예를 평론한 것을 주요한 내용으로 한다. 당시에 서예 작품을 수집하여 궁중에 소장하는 일을 하게 된 虞龢는 王羲之 부자의 작품 뿐 아니라 羊欣의 작품 등 유명한 서예가의 작품을 수준에 따라 차례를 정하고 정리한 후『論書表』를 지어 明帝에게 올렸다.
『論書表』에는 王羲之 등의 서예를 평론한 것 이외에도 당시에 전하고 있는 書論을 기록하였으며 文房四寶와 궁중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의 표구법과 그 규격 등에 대하여 서술하기도 하였다. 王羲之와 羊欣 등이 말한 서예에 관한 이야기는 후대 書論家들이 많이 인용하는 내용이며 표구법과 규격, 그리고 종이를 사용하고 拓本하는 등의 기록은 서예와 연관된 문화를 이해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虞龢는 서예의 심미적 요구가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王羲之의 서예를 ‘질박함’으로 王獻之의 서예를 ‘수려함’으로 표현하였다. 그는『論書表』에서 “夫古質而今姸, 數之常也; 愛姸而薄質, 人之情也. 鍾張方之二王, 可謂古矣, 豈得無姸質之殊? 且二王暮年皆勝於少, 父子之間又爲今古.”(옛날은 질박하고 현재는 수려한 것이 보편적 규칙이다. 수려한 것을 좋아하고 질박한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鍾繇와 張芝가 王羲之와 王獻之에 비하면 옛날이라 할 수 있는데 어찌 질박함과 수려함이 서로 다르지 아니하겠는가? 또한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의 서예도 나이가 많을 때의 작품이 젊을 때의 작품보다 뛰어나며 부자 지간에도 예와 지금의 차이가 있다.)라 하여 ‘질박함’과 ‘수려함’으로 鍾繇와 張芝, 그리고 王羲之 부자의 서예를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虞龢의 이론을 근거로 하면 당시에 王獻之의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작가 정신과 수려하다고 평가받는 작품이 王羲之 보다 높게 평가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虞龢는 서예의 발전과 사람이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감정을 긍정하는 관점에서 자신의 서예 미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이론은 중국 書論史에서 옛것을 받들고 당대의 것을 무시하는 일반적 경향과는 다르다. 그러나 좀더 객관성 있는 평론을 유도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작가 정신을 배양 할 수 있는 이론으로 평가된다.
南齊시대의 가장 걸출한 서예가로 꼽히는 王僧虔은『論書』,『筆意贊』,『書賦』,『答齊太祖論書啓』 등 여러 편의 書論을 남기고 있다.『答齊太祖論書啓』는『全齊文』에 목록만 보이고『論書』는 羊欣의『采古來能書人名』의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며『書賦』는 晋나라 시대 陸機의『文賦』의 형식을 이어 받아 창작 할 때의 태도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이 가운데 書論史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書論은『筆意贊』으로 宋나라 시대 陳思의『書苑菁華』에 실려 있다.
『筆意贊』은 매우 짧은 문장으로 序文과 본문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본문에서는 서예의 기법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書論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書論의 精髓는 서문의 몇 십자로 그의 창작론을 집약하여 서술하였으며 역대 書論 가운데 창작론의 가장 높은 경지로 평가된다.『筆意贊』의 핵심 내용은 작품의 ‘神彩’와 ‘形質’에 관하여 논한 것으로 “書之妙道, 神彩爲上, 形質次之, 兼之者方可紹於古人.”(서예의 오묘한 경계는 작품 내면의 정기를 으뜸으로 하며 필묵의 형태는 그 다음이며 두 가지를 겸비하여야 옛 성현을 계승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라 하여 작품의 내면에 있는 精氣가 외형의 아름다움 보다 중요하며 두 가지가 겸비되어야 훌륭한 작품이 된다고 하였다. ‘神彩爲上’의 이론은 당시 謝赫이 회화에서 요구한 ‘氣韻生動’의 심미적 범주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생명력 있는 정신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王僧虔이 ‘神彩’와 ‘形質’에 대한 창작론을 전개하면서 함께 제시한 書論은 창작의 과정과 방법의 특징으로 작가의 마음과 육체, 그리고 서예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창작의 과정과 방법으로『筆意贊』에서 “必使心忘於筆, 手忘於書, 心手達情, 書不忘想, 是謂求之不得, 考之卽彰.”(창작 할 때 마음에는 손에 쥔 붓을 잊게 하고 손은 글씨 쓰는 것을 잊게 하여 마음과 손이 함께 어울러지게 하여야 하며 妄想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상태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세히 고찰하면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이라 하여 마음을 주체로 하여 서예를 창작하는 과정에 육체와 붓을 주체와 객체를 연결하는 다리로 삼아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이론은 그가『書賦』에서도 일관되게 요구하는 창작론으로 중국 書論에서 마음과 손의 문제를 다룬 ‘心手相應’ 즉 마음과 손이 혼연일체가 되는 경지를 요구한 것이다.
王僧虔의 書論 중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은 천부적 소질과 노력을 다룬 ‘天然’과 ‘工夫’의 작가론이다. 그는 서예가를 평론할 때 소질과 노력의 두 가지 잣대를 사용하였으며 이는 후대의 작가론이 ‘天然’과 ‘工夫’론으로 발전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소질이 뛰어나다고 반드시 성공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노력만으로 모든 것이 극복된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예가에게는 소질과 노력이 동시에 갖추어져야 한다는 작가론은 마음과 손이 일체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작품의 精氣와 형체가 다함께 뛰어 날 것을 요구한 창작론과 일맥상통하는 이론으로 王僧虔의 중요한 書論 사상이다.
梁나라 武帝인 蕭衍(464-549)은 서예를 좋아하여 작품을 수집하고 서예가들과 서예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였다고 전한다. 당시의 유명한 서예가인 陶弘景, 袁昻, 蕭子雲 등과 토론하며 자신의 서예사상과 이론을 확립하였고『觀鍾繇書法十二意』,『草書狀』,『答陶隱居論書』,『古今書人優劣評』 등의 書論 저술을 남기고 있다.『觀鍾繇書法十二意』와『答陶隱居論書』는 唐나라 시대 張彦遠의『法書要錄』에 陶弘景의『與梁武帝論書啓』,『論書啓』와 함께 실려 있다.『草書狀』은 宋나라 시대 陳思의『書苑菁華』에 실려 있으며『古今書人優劣評』은『淳化閣帖』에 隋나라 시대의 불승 서예가인 智果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蕭衍의 書論은 당시의 書學者인 陶弘景, 袁昻, 蕭子雲의 書論과 많은 부분의 내용이 일치하거나 서로 연관성이 있다.『古今書人優劣評』은 袁昻의『古今書評』과 내용과 형식이 비슷하고『答陶隱居論書』는 陶弘景과 서예를 논한 것이며『觀鍾繇書法十二意』는 蕭子雲의『論書啓』와 내용이 서로 통하고 있다. 따라서 蕭衍과 당시의 서예가들은 함께 서예 미학을 연구하고 토론하여 각각 자신들의 書論을 남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蕭衍이 자신의 서예 미학을 집중적으로 표현한 書論은『觀鍾繇書法十二意』이다. 筆劃과 결구에 관한 법칙을 집약하여 설명하였으며 서예의 오묘한 맛은 筆劃과 결구 등 글자의 외형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예 이외의 학습을 강조하였다. 鍾繇의 書法을 가로획, 세로획, 間架, 결구, 布置 등 열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字外之奇, 文所不書.”(글자 밖의 기묘함은 문자로 써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 하여 鍾繇의 書法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서예의 외형 이외에도 오묘한 이치가 있음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鍾繇와 王羲之 부자의 서예를 새로운 시각으로 평가하여 王獻之를 숭상하던 당시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劉宋과 南齊 시대에는 羊欣과 王僧虔 등의 서예가가 王獻之를 숭상하여 그의 위치가 王羲之를 능가하였다. 陶弘景이『論書啓』에서 “世皆高尙子敬.”(세상의 모두가 王獻之를 숭상한다.)라고 한 것과 蕭衍 자신이 “元常逸跡, 曾不睥睨.”(鍾繇의 좋은 서예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라 한 것은 王獻之가 숭상되고 鍾繇가 낮게 평가된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蕭衍은『觀鍾繇書法十二意』에서 “子敬之不迨逸少, 猶逸少之不迨元常.”(王獻之가 王羲之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王羲之가 鍾繇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이라 하여 鍾繇가 王羲之보다 뛰어나며 그 이치는 王獻之가 王羲之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평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張芝와 鍾繇의 서예는 다함께 王羲之 서예의 원류이며 玄妙한 경지에 오른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이론은 唐나라 이후에 張芝, 蔡邕, 王羲之, 王獻之가 四賢으로 숭상되는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梁武帝를 포함한 여러 書論家들이 활동한 시대에 또 하나의 뛰어난 書論인『書品』이 탄생하였다.『書品』은 당시의 유명한 서예가이며 시인인 庾肩吾(487-551)가 漢나라 시대부터 南梁까지 楷書와 草書에 뛰어난 123명(문장에는 128명이라 적혀 있다.)의 서예가를 ‘九品論’의 방법으로 평론한 書論으로 唐나라 시대 張彦遠의『法書要錄』에 실려 있다. 그가 사용한 ‘九品論’은 서예가를 상, 중, 하의 三品으로 크게 나누고 또 각 品마다 ‘上之上’, ‘上之中’, ‘上之下’ 등의 三品으로 분류하여 평가하는 방법이다.『書品』은 羊欣의『采古來能書人名』, 王僧虔의『論書』, 袁昻의『古今書評』 등의 방법을 계승하였으며 唐나라 시대 李嗣眞의『書後品』, 張懷瓘의『書斷』, 宋나라 시대 朱長文의『續書斷』, 淸나라 시대 包世臣의『國朝書品』 등 후대의 書品論을 탄생하게 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書品』에서 선택한 ‘九品論’의 방법은 당시의 詩論과 畵論인 鍾嶸의『詩品』, 謝赫의『畵品』과 성격이 비슷하여 魏晋시대 이후의 정치제도인 ‘九品中正制’의 영향으로 유행한 형식으로 생각된다.
庾肩吾가『書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가론과 작품론은 ‘천부적 소질과 노력’, 즉 ‘天然’과 ‘工夫’이다. 그의 이론은 王僧虔이『筆意贊』에서 요구한 작품 내면의 정기와 형태, 소질과 노력, 즉 ‘神彩’와 ‘形質’, ‘天然’과 ‘工夫’의 심미적 요구를 종합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庾肩吾가 말하는 ‘天然’은 천부적 소질로 王僧虔의 이론인 ‘神彩’와 ‘天然’을 합하였고 ‘工夫’는 작가의 노력으로 王僧虔의 이론인 ‘形質’과 ‘工夫’의 개념을 합하여 설명하였다. 따라서 역대 서예가의 작품 가운데 ‘天然’과 ‘工夫’가 모두 최고인 작품을 ‘上之上品’의 위치에 놓았고 이것은 ‘神彩’와 ‘形質’이 함께 겸비된 작품임을 설명하였다.
『書品』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張芝, 鍾繇, 王羲之를 꼽았고 소질과 노력의 관계를 “張工夫第一, 天然次之. 鍾天然第一, 工夫次之. 王工夫不及張, 天然過之, 天然不及鍾, 工夫過之.”(張芝는 노력이 제일이며 소질이 그 다음이며 鍾繇는 소질이 제일이며 노력이 그 다음이다. 王羲之는 노력이 張芝에 못 미치나 소질은 능가하고, 소질이 鍾繇에 못 미치나 노력은 그를 능가한다.)라 하여 세 사람을 동등한 수준으로 평가하였다. 庾肩吾의 書論은 서예가의 천부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만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으며 이는 수많은 書論家들이 가장 강조하는 작가론이기도 하다. 孫過庭은『書譜』에서 “有學而不能, 未有不學而能者”(공부를 하여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나 배우지 아니하고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라 하여 학습과 노력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천부적 소질은 서예가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노력이 없이는 타고난 소질이 어떠한지 알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작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력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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