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5. 09:11ㆍ서예일반
Ⅵ. 서체 변천의 종결
1. 楷書의 변천과 완성
先秦시대의 한자는 甲骨文이후 완전한 문자의 기능을 하면서 여러 형태로 변천하였으며 秦나라 이후에는 시대별로 통일된 서체를 중심으로 하여 점차 변천하였다. 楷書로서 길고 긴 한자의 변천이 막을 내릴 때까지 서체는 正體와 草體의 두 갈래로 나누어 발전하였다. 淸나라 시대의 劉熙載는『書槪』에서 “書凡兩種: 篆, 分, 正爲一種, 皆詳而靜者夜; 行, 草爲一種, 皆簡而動者也.”(서체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篆書, 隸書, 楷書를 하나로 하며 모두 자세히 알 수 있으며 정적인 글씨다. 또 하나는 行書와 草書로 모두 간략하고 동적인 글씨이다.)라 하여 서체를 正體와 草體로 분류하였다. 草體는 비교적 개인적인 목적에서 사용되었고 正體는 각각 시대별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草體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본래의 사용 목적을 그대로 유지하며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正體는 한 서체가 새롭게 완성되면 그 이전의 서체는 특수한 목적이나 개인적으로 사용 될 수밖에 없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楷書가 완성된 이후에는 篆書, 隸書는 예술 활동 등 개인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甲骨文과 金文 등의 大篆은 象形性을 뛰고 있어 글자가 나타내는 뜻을 알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통일이 되지 않고 복잡하여 기록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문자의 목적성에 적합하지 않는 단점이 있다. 小篆은 문자가 통일되었으나 여전히 기록이 불편한 단점은 해결하지 못하였으므로 새로운 변화는 당연한 결과였다. 隸書가 완성되고 통일되어 의사 전달이 완전하고 기록의 불편함이 많이 개선되어 단일 서체로는 楷書를 제외하고 가장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그러나 隸書는 筆劃에 꾸밈이 많을 뿐 아니라 한자의 運筆과 布置의 특성에 잘 부합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한자의 필순과 書順의 방향은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이며 布置의 순서는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루어진 문자이다. 이러한 규칙은 다른 문자에서도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오른손으로 붓을 이용하여 글씨를 쓰는 관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隸書의 가로로 뻗어나는 형세와 波勢의 꾸밈, 그리고 위쪽을 향하여 收筆하는 筆劃과 자형은 오른팔의 운동 특성과 한자의 運筆 순서, 布置의 질서에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따라서 行草와 마찬가지로 세로로 쓰기에 편리한 正體가 필요하였으며 이러한 욕구에 부응하여 세로의 筆勢를 취한 楷書가 탄생하게 되었다.
楷書는 唐나라 시대까지 眞書, 正書, 隸書, 今隸, 章程書 등 여러 이름이 있었으며 宋나라 시대 이후 楷書로 통일되어 불리고 있으나 간혹 眞書나 正書로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正書와 眞書, 章程書라는 개념은 行書와 草書에 상대되는 것이며 隸書는 八分, 今隸는 漢隸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이와 같은 까닭은 楷書가 탄생하고 명칭이 고정되지 않았을 때 다른 서체와 구별하기 위해 상대되는 개념의 단어인 正書, 眞書, 隸書, 今隸 등의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魏晋南北朝와 隋唐시대에는 楷書를 漢隸와 구분하지 않고 隸書라는 이름으로 해서와 행서 모두를 지칭하기도 하였으며 또 漢隸를 八分, 楷書를 隸書로 부르는 등 楷書의 명칭과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다. 張懷瓘은『書斷』의 八分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本謂之楷書, 楷者, 法也, 式也, 模也.”(楷書라 말하는 용어의 楷자는 法, 式, 模와 같은 뜻이다.)라 하여 ‘楷’자를 ‘楷’, ‘法’, ‘式’, ‘模’와 같은 뜻으로 `풀이하였다. 따라서 唐나라 시대에 楷書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었으며 그 개념도 ‘法式’, ‘楷法’으로 정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楷書가 언제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漢나라 시대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고 인정되며 그 탄생 과정에 관하여 대개 두 가지의 학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楷書가 隸書를 근본으로 하여 변화한 것으로 隸書의 波磔과 굴곡이 평평해지고 偏方形의 結字가 정방형으로 바뀌어 탄생한 서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楷書는 行書를 근원으로 하여 탄생한 서체로 行書를 좀더 단정하게 쓰고 가로획에 起筆과 收筆을 하며 세로획과 捺畫을 꺾어 趯과 勾를 만들어 탄생한 서체라는 것이다. 또 宋나라 시대의『宣和書譜』 등의 기록에는 漢나라 시대의 王次仲이 隸書를 변형하여 창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楷書가 隸書에서 변천하였다거나 楷書에서 변천하였다고 하는 주장들이 모두 그 나름대로의 이유와 도리가 있다. 그러나 어느 서체도 마찬가지로 결코 한 서체를 모체로 하거나 한 사람에 의해 탄생되지는 않는다. 楷書가 탄생하기까지 당시에 존재하던 여러 서체가 근본이 되었으며 수많은 사람이 여러 세월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隸書와 行書 뿐 아니라 章草와 今草까지도 楷書의 근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을 근거로 할 때 楷書는 隸書와 行書 그리고 草書가 보편적으로 쓰이던 漢나라 후기와 三國시대를 전후하여 독립적 서체로 이루어 졌다. 서체는 민간에서 먼저 변천의 기초를 마련한 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이 보편적 현상이다. 隸書가 공식 서체인 시기에 민간에서는 이미 쓰기에 편리하도록 隸書의 波磔이나 굴곡의 변화를 버린 형태를 자주 볼 수 있다. 東漢시대의 刻石이나 簡牘 작품에서 波磔을 버린 글씨를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은 三國시대의 작품에서는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 淸나라 시대의 楊守敬은『學書邇言』에서 “楷法之興, 其在魏晋之間.”(楷書의 탄생은 曹魏 시대와 晋나라 시대 사이이다.)이라 하였으며 胡小石은『書藝略論』에서『流沙墜簡』가운데의『始建國四年簡』과『建武二十六年簡』을 근거로 新莽과 東漢 초기에 楷書의 결구와 筆劃으로 쓰여진 글씨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문장과 작품을 근거로 할 때 楷書는 東漢시대에 많은 싹이 자라고 있었으며 魏晋시대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楷書의 변천을 크게 발생기, 서체로의 완성기, 준법기, 예술성의 쇠퇴기로 나누어 설명 할 수 있다. 발생기는 漢나라 시대까지이고 서체의 완성기는 魏楷로 대표되는 魏晋南北朝시대이며 준법기는 唐楷로 대표되는 隋唐시대이다. 그리고 宋나라 시대 이후에는 行書와 草書에 예술 영역으로서의 자리를 양보하고 결국 臺閣體와 館閣體의 형태로 인쇄를 대신하는 것으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三國시대까지 楷書를 발전시키고 성숙시킨 인물로 曹魏시대의 鍾繇를 꼽을 수 있다. 鍾繇의 楷書는[薦季直表』,『賀捷表』,『宣示表』 등을 통하여 그 면모를 알 수 있으며 劉宋 시대의 羊欣의 書論으로도 그 수준을 가늠 할 수 있다. 羊欣은『采古來能書人名』에서 “鍾有三體: 一曰銘石之書; 二曰章程書; 三曰行狎書.”(鍾繇는 세 가지 서체가 있었다. 첫째는 銘石書이고 둘째는 章程書이며 셋째는 行狎書이다.)라 하여 鍾繇가 刻石 隸書와 行書 그리고 楷書에 매우 뛰어나다고 하였으며 章程書는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서체라 하였다. 근대의 문자학자인 唐蘭은『中國文字學』에서 章程書가 楷書라 하였으며 樓蘭에서 출토된 漢魏시대의 殘紙本 가운데 학생들을 가르치던 글씨가 초기의 楷書로 쓰여 있는 것을 볼 때 章程書는 楷書를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鍾繇의 작품이 비록 王羲之가 臨摹한 것 등을 새겨 놓았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원본과 많은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 하며 三國시대의 가장 뛰어난 楷書 작품으로 꼽는다. 北京大學의 문자학자인 裘錫圭 교수는『文字學槪論』에서 鍾繇의 서예를 직접 볼 수는 없지만 三國시대에 완전한 형태의 楷書를 쓴 사람은 그가 독보적이라 평가하여 楷書를 고정된 서체로 끌어올리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임을 시사하였다.
兩晋과 南北朝시대는 楷書가 왕성하게 일어나 서체로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예술적 자태를 크게 뽐낸 시대이다. 楷書를 서체의 위치와 예술적 가치를 높이는데 가장 공헌을 많이 한 서예가로는 王羲之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서체로서 완성된 형태를 갖추고 각 분야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도록 발전시킨 왕조는 北魏이며 그 楷書는 魏楷로 불리고 있다. 王羲之는 鍾繇의 楷書를 계승하여 성숙, 발전시켰으며 楷書를 서체로서 완전한 독자적 형태를 갖추게 한 인물로 평가된다. 胡小石은『書藝略論』 “(鍾繇)眞書亦帶分勢; 王出於鍾, 而減去分勢.”(鍾繇의 楷書는 隸書의 筆勢와 字勢를 가지고 있으며 王羲之는 鍾繇를 계승하였으나 隸書의 筆勢와 형세를 모두 버렸다.)라 하여 王羲之가 楷書를 완성시키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 인물임을 시사하였다. 鍾繇 이전의 楷書는 楷書의 형태가 갖추고 있었으나 隸書나 行書의 筆劃과 형태를 함께 갖추고 있었으며 계속 변화하고 발전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王羲之 이후에는 楷書가 독자적 筆劃과 형태로 완성되고 고정되어 더 이상 그 특성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예술적 서풍만 시대와 서예가에 따라 변할 뿐이었다.
王羲之의 서예는 南朝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楷書는 자연스럽게 공식 서체의 자리를 확보하여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번져 나갔다. 北朝에서도 안정된 정치체제가 구축된 후 漢化정책으로 남쪽의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南朝에서 사용되고 있는 楷書를 공식 서체로 사용하였다. 南朝에서는 禁碑令의 전통 때문에 刻碑에 새겨진 楷書가 적으나 北朝에서는 楷書를 사용하여 墓誌, 造像記, 摩崖, 石碑 등의 영역에서 수많은 서예 작품을 남기고 있다. 北朝의 楷書는 질박하고 웅장하며 강건한 미감을 특성으로 하여 南朝의 단아하고 수려한 미감과 함께 예술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唐나라 시대의 孫過庭은『書譜』에서 “眞不通草, 殊非翰札. 眞以點畫爲形質, 使轉爲情性.”(楷書를 쓸 때 草書의 법칙에 통달해 있지 아니하면 편지글과 같은 유창함이 없게 된다. 楷書는 點과 畫으로서 형체의 본질을 삼고 點劃의 호응으로서 내재된 정취를 이룬다.)이라 하여 楷書의 심미적 표준에 대하여 書論史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기고 있다. 王羲之의 楷書를 포함한 南北朝시대의 楷書가 바로 楷書의 예술성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꼽힌다. 따라서 이 南北朝시대를 楷書가 서체로서의 완성되고 예술성의 표현이 가장 뛰어난 시대로 평가한다.
隋唐시대 이후에는 더 이상 새로운 서체가 탄생되지 않고 楷書가 공식 서체의 자리를 지키고 그 밖의 여러 서체는 개인적 용도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唐나라 시대에는 楷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예술 창작의 중요한 서체로 자리잡았다. 이 시대의 서예가는 楷書를 기본적 창작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서풍은 단정하고 규칙적이며 典雅하여 엄숙한 심미적 특징을 표현하였다. 唐楷가 晋楷나 魏楷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서예가나 작품의 개성보다는 법칙을 중시하여 규범화되어 있는 것이다. 唐나라를 歐陽詢, 虞世南, 褚遂良, 薛稷 등 初唐 四大家와 顔眞卿, 柳公權 등의 활약으로 楷書가 완성되어 서풍이 다채롭고 성대하여 장관을 이룬 시대라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친 규범성으로 말미암아 심미적 특징이 통일되었으며 작가와 작품의 개성이 표현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晋楷나 魏楷에 비하여 예술성이 뒤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예사를 살펴 볼 때 하나의 서체가 완성되고 완전하게 통일되고 난 후에는 새로운 서체가 탄생하였다. 小篆이 완성되어 규범화 된 다음 隸書가 탄생하였고 또 隸書가 규범화 된 후에 楷書가 탄생한 것과 같이 한 서체가 완성되고 법칙화 되는 것은 곧 그 서체가 쇠퇴되어 가는 시작이었다. 唐나라 시대에 楷書가 규범화 된 후 비록 새로운 서체가 탄생하지는 않았으나 宋나라 이후의 楷書는 行書와 草書에 비해 그 예술적 수준이 점점 낙후하며 淸나라 시대까지 흘러 내려갔다. 宋나라 시대부터 淸나라 시대까지 楷書는 문서를 기록하거나 과거 시험에 답안을 쓰기 위하여 공부하는 대상일 뿐 창작 대상으로서의 자리는 行書와 草書에 양보하였다. 元나라와 明나라 시대의 臺閣體, 淸나라 시대의 館閣體로 자리 잡은 楷書는 인쇄를 대신하는 수단이었으며 새로운 창작 대상이 되기까지는 碑學의 탄생을 기다려야 했다. 淸나라 후기 金石學과 문자학 등의 학문이 성행함에 따라 金石學者와 서예가들은 점차 刻石 서예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閣帖이 아닌 刻石 작품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碑派가 늘어갔다. 碑派의 서예가는 唐나라 시대 이전의 刻石 서예를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배웠으며 魏楷와 篆隸를 臨書하고 창작하는 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碑學이 성행한 淸나라 후기부터 楷書는 새롭게 다른 서체와 동등한 예술 창작의 대상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2. 行書의 탄생과 성숙
行書는 草體와 正體, 古體와 今體의 서체 분류 방법에서 草體와 今體에 속한 서체로 今體 가운데 사용 범위가 가장 넓은 서체이다. 行書는 비록 서체는 있지만 일정하게 고정된 형태의 법칙이 없기 때문에 어느 서체와도 자유스럽게 결합 할 수 있다. 隸書와 결합하면 隸行, 楷書와 결합하면 楷行이 되고 草書의 맛을 많이 간직하고 있으면 行草가 되는 등 그 활동 범위가 매우 넓다. 또한 篆書, 隸書, 楷書와 비교하면 쓰는 것이 빠르고 간편하며 草書 보다는 덜 간편하나 알아보기가 쉽기 때문에 편지나 저술 활동 뿐 아니라 창작의 대상으로도 가장 환영받았다. 行書는 그 자체의 다양한 융통성과 예술성, 그리고 편리함으로 魏晋시대에 완성된 뒤부터 한번도 쇠퇴하지 않고 지금까지 쓰이는 특징이 있다.
行書라는 이름은 西晉시대 衛恒의『四體書勢』에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하게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알기는 어렵다. 예전에는 東漢시대의 劉德昇이 行書를 만들고 楷書에서 변천한 서체라 인식하였다. 唐나라 시대의 張懷瓘도『書斷』에서 “行書者, 後漢潁川劉德昇所造也, 卽正書之小譌. 務從簡易, 相間流行, 故謂之行書.”(行書는 東漢시대의 潁川 사람인 劉德昇이 만든 것으로 楷書를 조금 변화시킨 것이다. 行書가 쓰기에 간편하고 쉬워 민간에 많이 유행하여 그것을 行書라 불렀다.)라 하여 劉德昇이 楷書를 변화하여 行書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증학이 발전하고 서예 이론이 확립된 후부터는 行書의 탄생에 관하여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였다.
새로운 서체가 한사람의 노력만으로 탄생할 수 없음은 草書, 隸書, 楷書 등의 예로서 충분히 설명되었다. 行書도 다른 서체와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에 의해 이미 존재하는 서체의 불편함을 조금씩 개선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을 것이다. 漢나라 시대 이전에 篆書나 隸書같은 正體 문자의 書寫 행위에서 쉽고 간편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草書와 行書 그리고 楷書가 탄생하고 또 완성되었다. 東漢시대의『武威醫簡』과『永元兵器簡』등의 簡牘에 기록되어 있는 草體의 글씨는 草書를 몰라도 읽을 수 있는 서체로 곧 초기의 行書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77년 安徽省 亳縣에서 출토된 東漢의 桓帝와 靈帝시대의 磚文은 거의 行書의 運筆法으로 쓰여져 있어서 隸書가 가장 성행한 桓帝와 靈帝시대에 이미 行書가 상당히 발전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漢나라 시대의 行書는 隸書를 간략하게 하거나 유창하게 쓰는 과정에서 波磔을 생략하고 筆劃을 연결하는 습관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현상은 위에서 예를 든 작품 이외에도 수많은 漢簡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으로 行書의 탄생이 한 사람의 창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오랜 기간 자연스럽게 변화하며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隸書가 성행 한 漢나라 시대에는 草書도 매우 성숙되어 있었으며 草書와 隸書의 筆法은 서로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隸書를 쓸 때 草書의 장점인 흘림의 빠르기를 취하고 草書를 쓸 때는 隸書의 정확한 筆劃을 취할 수 있었다. 隸書의 정확성과 草書의 빠른 서사의 장점을 겸비하고 글씨를 쓰는 과정에서 탄생한 서체가 곧 초기의 行書로 隸行이라 할 수 있다.
漢나라 시대의 隸行은 아직 완전히 성숙한 서체라 하기는 어렵고 변천하는 과정에 있는 行書라 할 수 있다. 行書가 탄생하는 과정에서는 草書와 隸書의 역할이 매우 컸으며 완전하게 성숙하는 과정에서는 楷書와 함께 도움을 주고받으며 완성된다. 張懷瓘이『書斷』에서 行書를 “正書之小譌”(楷書가 조금 변한 것이다.)라 말한 것은 바로 行書가 楷書의 도움으로 완성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漢나라 시대 후기에 隸書가 점차 쇠퇴하며 공식 서체의 자리를 楷書에게 양보하게 되었으며 魏晋시대 이후에는 楷書가 완전히 성숙하고 공식 서체의 위치도 굳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隸書와 결합하여 아직 완전한 위치를 확보하지 못한 초기의 行書는 자연스럽게 楷書와 결합하였으며 우리가 보편적으로 말하는 형태의 서체로 자리잡았다.
行書는 魏晋시대에 완성되고 성행하였으며 그 대표적 서예가로는 曹魏 시대의 鍾繇와 東晋시대의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를 꼽을 수 있다. 劉宋의 羊欣은『采古來能書人名』에서 “鍾有三體, 一曰銘石書, 二曰章程書, 三曰行狎書.”(鍾繇는 銘石書, 章程書, 行狎書의 세 가지 서체에 뛰어나다.)라 하여 鍾繇가 行書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張懷瓘은『書斷』에서 王愔의 말을 인용해 “晋世以來, 工書者多以行書爲著名. 昔鍾元常善行狎書是也, 爾後王羲之獻之幷造其極焉.”(晋나라 이래로 서예에 뛰어난 사람은 대부분이 行書로서 이름을 얻었다. 예전에 鍾繇가 行狎書에 뛰어난 것이 바로 이것이며 그후 王羲之와 王獻之가 다같이 行書에 매우 뛰어났다.)라 하여 晋나라 시대의 서예가는 모두 行書에 뛰어났으며 鍾繇가 잘 쓴 行狎書가 바로 行書이고 그것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은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라 하였다. 鍾繇가 行書를 서예의 새로운 창작 영역으로 그 위치를 높였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 전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王羲之가 臨書한 鍾繇의 작품을 唐나라 시대에 다시 臨摹하고 이것을 또다시 宋나라 시대에 새겨 놓은『墓田丙舍帖』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이 行書의 맛을 많이 간직하고 있기는 하지만 臨摹와 새기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치는 도중에 鍾繇 行書의 원래 모습이 많이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行書가 가장 성행한 시대는 王羲之와 王獻之를 대표로 하는 東晋이다. 그후 南朝와 隋唐을 거치고 宋, 元, 明, 淸을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예가들에게 창작의 대상으로 사랑 받고 있다. 東晋시대의 귀족들은 玄學과 淸談사상을 기초로 하여 생활하였으며 서예의 창작에서도 풍치와 神韻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行書 작품이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심미적 특징은 韻致이다. 후대의 평론가들은 東晋시대는 行書를 근거로 ‘尙韻’이라 평하고 唐나라 시대는 楷書를 기준으로 ‘尙法’이라 평하고 있다. 王羲之와 王獻之의 行書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하며 비록 臨摹本이나 閣帖本이긴 하지만 전하고 있는 작품도 매우 많다. 王羲之의『蘭亭序』를 비롯하여『姨母帖』,『快雪時晴帖』,『喪亂帖』 등과 王獻之의『卄九日帖』,『中秋帖』 등이 대표적 行書 작품이다. 이들 부자의 업적은 行書의 예술 수준을 최고의 위치로 끌어올린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行書를 草書와 결합하여 새로운 서체인 行草를 탄생 시켜 후대의 서예가에게 창작 활동의 영역을 넓게 하였다.
南朝의 宋, 齊, 梁, 陳과 隋唐시대에는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의 行書가 서예계를 완전하게 통일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행하였다. 劉宋의 羊欣, 南齊의 王僧虔, 梁武帝 蕭衍, 齊나라와 隋나라에 걸쳐서 활동한 智永 등과 唐나라 시대의 歐陽詢, 虞世南, 褚遂良, 陸機 등이 모두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의 서풍을 계승하였다. 張懷瓘은『書斷』에서 당시를 “但聞二王, 莫不心醉.”(王羲之와 王獻之의 작품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심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라 하여 王羲之와 王獻之 부자의 서예가 얼마나 유행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唐나라 시대에는 王羲之의 行書를 배웠으나 자신의 독창적인 개성을 표현한 서예가가 탄생하는 성과를 거둔 시대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서예가는 李邕과 顔眞卿으로 이들 두 사람의 行書는 王羲之 부자의 서예를 배웠으나 결국 王羲之의 법에서 빠져 나와 개성 있는 자신의 창작 세계를 매우 잘 표현하였다고 평가된다.
五代와 宋나라 이후에는 王羲之 부자의 行書 서풍이 독주하는 물결의 흐름에 顔眞卿의 서풍이 가세하였다. 宋나라 이후에 王羲之 부자의 서예를 중심으로 閣帖을 새겨 臨書하는 커다란 흐름에 顔眞卿의 行書가 비록 쌍벽은 이루지 못하였지만 많은 영향을 끼쳤다. 五代의 楊凝式, 宋나라의 蘇軾, 黃庭堅, 米芾 등은 王羲之를 근본으로 배웠으나 顔眞卿의 영향을 받은 서예가이다. 元나라와 明나라 중기까지는 行書 뿐 아니라 모든 서예가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明나라 후기와 淸나라 초기에 張瑞圖, 黃道周, 王鐸, 傅山, 鄭板橋 등의 서예가가 나타나 새로운 行書의 서풍을 창조하였다. 이들은 行書의 筆法에 狂草의 筆法이나 난초와 대나무를 치는 筆法을 더하여 行書를 창작하였으며 평론가들은 이러한 서체를 낭만파 行書라 부르고 있다. 淸나라 중기를 거치면서 중국 서단에는 碑學이라는 커다란 물결이 밀어닥치게 되고 行書의 창작도 碑派와 帖派로 나누어져 이루어지게 된다. 碑派의 行書 창작은 王羲之를 근본으로 하는 기존의 방법에서 魏楷의 특징을 行書에 첨가하여 창작하는 방법으로 전환되었다. 碑派의 작가로는 包世臣과 康有爲를 대표로 하며 그들은 行書에서도 魏楷와 마찬가지로 강건하고 중후한 미감을 숭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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