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중글씨

2012. 3. 15. 08:55서예일반


一中의 글씨

개회식의 잡담 속에서 일중의 '백씨수병'(伯氏壽屛)을 보며 ‘글씨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다시 했다. 맏형님 문현의 회갑을 기려 작은 아우 창현(호 백아)이 글을 짓고, 큰 아우 일중이 글씨를 쓴 열폭 병풍이었다. 백아 다음이 여초 응현인데, 5형제 중 여초까지 위로 네 분은 모두 글씨를 잘 쓰고 한문을 익히 배웠다. 백아는 한학에 더욱 깊고, 일중과 여초는 글씨(書法)로 각각 정상에 이르는 경지를 확립했다.

할아버지 동강(東江) 선생은 ‘일중’이라는 호를 지어주며 “일중은 충(忠)이고, 이중(二中)은 병(患)이라”고 가르쳤다 한다. 동양에서의 ‘중’(中庸, 中和, 中節)은 엉거주춤한 ‘양시양비론’이 아니라 굳건한 중심을 가누며 밸런스를 지키는 일이다.

손과정(孫過庭, 唐)의 글씨이론(書譜)에 “처음에는 반듯하고 쉬운(平正) 글씨를 익히고, 다음에는 힘써 험절(險絶:굳세고 분방함)을 추구하며, 험절을 잘 익히고 나서는 다시 평정으로 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일중·여초 형제를 비교하자면, 여초는 더 치열한 험절을 겪고 닦으면서, 일중은 근엄하고 강직한 평정 가운데 꾸준히 닦으면서, 서로 고도한 완성도를 지향·성취했다. ‘글씨는 사람’처럼 각각 천성에 따른 것이다.

일중의 행서들은 안진경(顔眞卿, 唐)의 행서(爭座位帖, 祭姪文稿)의 영향이 짙으면서도, 꽤 격정이 보인다는 ‘제질문고’에 비해 원만하고 온화한 ‘중’의 면모를 보인다. 내가 일중의 이런 행서를 처음 본 것은 1975년의 한국서예가협회전에 출품된 '귀거래사'였다. 나는 그때 일중의 무르익은 듯한 글씨들을 보며 ‘조용하면서도 엄격한 뜻있는 변모’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밖에 간혹 유석암(石菴 劉墉, 淸)이나 조지겸(趙之謙, 淸)의 뜻이 깃들인 행서도 있다.

일중이 한문을 수학하던 12살 때부터 배운 것은 안진경의 해서와 궁체, 이어 한나라 예서(漢隸)의 탑본글씨였다. 탑본은 조부와 친한 영운 김용진이 준 것이었다. 일중의 초기 예서(42년 '沃州憶木食洞')는 더 예스러운 장천비(張遷碑)의 글씨인데, 그뒤 한예(漢隸)의 최고의 완성미를 이루었다는 예기비(禮器碑), 그리고 그보다 조금 삐치는 획(파임)이 긴 조전비(曺全碑)적인 예서들을 많이 썼다. 한글 글씨는 궁체, 고체를 개척·확립하며, 더러 판본체의 글씨도 썼다.

일중은 각체의 글씨를 두루 잘 썼으나, 예서와 아울러 또한 흥미를 느끼는 것이 여러 경향의 해서이다. 우선 두드러진 것이 안진경 노년의 글씨체들이다. 더욱 큰 글자를 쓴 편액의 매우 훌륭한 안진경체 해서들이 있다. 일중의 또하나의 좋은 해서가 87년에 쓴 금의(琴儀)의 신도비(神道碑)이다. 안진경의 40대의 해서에 육조에 꿋꿋한 뜻이 융해된 듯한 일중의 개성적인 해서이다. 또한 이번에는 출품수가 적었지만 더욱 북비(北碑)적인 해서도 많다. 그 모든 옛 글씨의 요소들은 물론 그의 천품과도 같은 ‘중’의 도가니 안에서 다시 제련되어 나온 일중의 글씨들이다.

문득 일중의 근엄과 균형이 호방하게 깨지는 듯한 드문 예(83년 ‘紹軒’ 등)가 또 있다. 취중에 쓴 분망한 본능이 일회적으로 분출된 듯한 글씨(83년 초서 ‘紹軒’ 등)들이다. 안진경의 글씨에도 파체(破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