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인권변호사 조영래

2011. 12. 31. 18:56사람과사람들

조영래(趙英來, 1947년 3월 26일 ~ 1990년 12월 12일대한민국의 인권 변호사였다.

조영래는 경기고 재학 시절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동해 학교에서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다. 1965년 서울대학교 전체수석으로 법과대학에 입학[1]하였으며, 재학 중 김근태,손학규와 함께 한일회담 반대, 3선 개헌 반대 등 학생운동을 이끌어 나갔다.[2] 1969년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하였으며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연수원 재직 중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었으며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973년 4월 만기출소 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수배되어 6년간 쫓기는 생활을 했으며, 수배기간 동안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삶을 기록한 전태일 평전을 썼는데, 이는 1983년 저자를 익명으로 하여 출간되었다(제목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1980년 수배를 끝내고 사법연수원에 복귀한 후 1982년 이를 수료하였다. 1983년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설립한 이후 1984년 망원동 수해 주민들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시작하였고,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 씨를 변호하고 가해자 문귀동 경장에 대한 유죄판결을 이끌어내는 등의 활동으로 인권 변호사로서 큰 활약을 했다. 특히, 1986년 대한변협 인권보고서 발간의 산파역을 하였고, 같은 해 인권변호사들의 상설조직인 정법회의 창립 및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탄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90년 12월 11일 마흔셋의 나이에 으로 세상을 떴다.

 

어록

지금까지 충분히 실천은 못하였으나 4개월 동안 내가 수행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은 수가 없겠다. 만약 친절히 해서 일이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마침내 승인하게 되는 일이 만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심대한 패배가 될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혹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 1981년12월

 저서

 관련 도서

 출신학교

 참조

  1. 首席에 趙英來군”, 《동아일보》, 1965년 2월 15일 작성.
  2. 김재홍/전태일과 조영래 《동아일보》, 2000년 11월 7일 작성
출처 : 하루 하루 열심히
글쓴이 : 최선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