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명고시

2022. 9. 22. 07:14工夫

공자의 제자 염구는 원래 재산이 많은 권력자인 계강자(季康子)의 가신이 되었는데, 그의 재산을 늘려주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에 공자는 크게 노하여 제자들에게 “그는 더 이상 우리 문도가 아니다. 자네들은 북을 울려 그를 공격해도 좋다.(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可也)”고 하였다. [논어] 선진(先進) 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다산시문집]에는 `번옹 댁의 잔치 모임에 초청을 받았으나 가지 않았다[樊翁宅?集見招不赴]’ 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다산시문집] 제2권 詩)

 재상 집에 초대 받아 모두가 드높이고 / 黃閣招延衆所尊

 깊은 방 촛불 켜고 밤늦도록 요란하네 / 曲房銀燭五更喧

 창생은 어찌하고 동산기와 노니는가 / 蒼生莫奈東山妓

 이름난 북해 동이 술에 모두들 모여들고 / 名勝皆聞北海樽

 비단 자리 풍악은 흥겹기 그만인데 / 錦席歌笙容笑傲

 대울의 서릿달 그 자태도 곱구나 / 竹欄霜月也嬋媛

 무슨 일을 알고저 웅크리고 책을 펴나 / 攤書抱膝知何事

 부질없는 시름 잡아 성은에 보답코저 / 欲把閑愁答聖恩

 시의 제목이 9월 15일, 번옹 즉 채제공 댁의 잔치 모임에 초청받았으나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련(首聯)에 황각(黃閣)이라고 한 것은 한(漢) 나라 이후 재상의 집과 관서의 문을 노란색으로 칠했다고 하는 데에서 재상의 집을 뜻한다. 좌의정으로 있던 채제공의 집을 말한다. 채제공 집에서 열린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모두가 높은 사람들이고 그들은 밤늦도록 촛불을 밝혀놓고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함련은 중국 고사를 인용하여 풀기 어려운 구절이다. 진(晉) 나라 사안(謝安)이 벼슬을 하다가 동산(東山)에 은거하여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자, 당시 사람들이 “안석(安石 사안의 자)이 나오려 하지 않으니 장차 이 창생을 어찌할꼬” 하였는데, 40세에 다시 벼슬을 하여 창생을 구제하였다.

 이는 채제공이 우의정에서 파직된 후에 다시 백성을 위하여 벼슬한 것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晉書]卷79 謝安傳)

 북해의 술 동이란 후한 말기 북해상(北海相)을 지낸 공융(孔融)이 선비를 좋아하여 당시의 명사들이 항상 그의 집에 끊이지 않아 대접할 술동이를 비우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채제공이 사람들을 좋아하여 많은 명사들이 그의 집에 왔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後漢書]卷70 孔融傳)

 경련(頸聯)의 죽란(竹欄)은 대나무 울타리로, 다산의 명례방 집에 대울이 있어서 동료들과 죽란시사를 만들어 같이 음영(吟詠)을 하기도 하였다.

 대울에 걸린 서릿달은 청초하지만 스산하게 느껴진다. 그 집에 책을 펴고 시름을 달래는 것은 성은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는 미련(尾聯)의 결말이다.

 이 시만을 가지고는 도대체 이 잔치가 번암의 환갑 잔치인지 시회(詩會)인지 무슨 잔치인지 전후의 맥락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오세창이 우리나라 명가들의 글씨를 수집하여 묶은 『근묵(槿墨)』에 실려있는 이 시의 초고는 문집에 실려있는 시와는 다른 많은 정보가 더 추가되어 있다.

 『다산시문집』에 실려 있는 내용과는 경련은 약간 다르고 미련은 전혀 다른 시구로 바뀌어 있다. 그리고 시의 제목에 채제공 집에서 잔치가 열리게 된 이유와 자신이 이 시를 짓게 된 사연도 쓰여 있다.(그림1 참조)

미수 허목 유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채제공이 연천 은거당에 있는 영정을 서울에 모셔와 화원 이명기에게 부탁하여 그린 것이다.
미수 허목 유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채제공이 연천 은거당에 있는 영정을 서울에 모셔와 화원 이명기에게 부탁하여 그린 것이다.
 `시를 바쳐 용서를 구하다’

 제목은 `9월 15일 밤에 상국 댁에서 잔치 모임이 있어 초청을 받았는데, 마침 손님이 와서 가지 못하여 시를 바쳐 용서를 구하였다.[九月十五日夜 相國宅?集見招 適客至不赴 獻詩乞赦]’라고 되어 있다.

 경련의 `비단 자리 풍악은 흥겹기 그만인데[錦席歌笙容笑傲]’는 `錦席笙歌齊澹蕩[비단 자리 풍악에 모두가 흐드러지고]’로 바뀌어 있고, 미련은 `郊畿不遣宗臣去 鳴鼓歸來敢在門[근교 조종 신 떠나는데 가지 않으니/ 친구들 문 앞에 와 북치며 공박하네]’라고 완전히 바뀌어 있다.

 그리고 미련에 대한 주석으로 `이날 미옹의 유상이 도성 문을 나가는데 일이 있어서 가지 못하였다. 상공께서 북을 쳐 공박하라는 말씀이 있어서 7, 8구에서 언급하였다.(是日眉翁遺像出都門 有故不赴 相公有鳴鼓攻之〃敎 故第七第八及之)’고 하고 `竹欄散人 丁若鏞 再拜’라고 맺었다.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시만으로는 그 전후의 정황을 전혀 알 수가 없지만 원래의 시고 내용을 통하여 상공 채제공의 집에서 열린 잔치는 미수 허목의 유상을 보내는 잔치라는 것, 그 잔치 자리에 초청된 다산이 가지 않자 채제공이 정약용의 동년배들로 하여금 그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정약용이 이에 대해 사죄를 하는 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채제공이 75세, 정약용이 33세 때의 일이다.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로서 정조의 신임을 받아 좌의정에까지 올랐지만, 항상 노론 벽파의 공격의 목표가 되어 있었다.

 미수 허목 유상을 모셔다가 이모본을 만들고 다시 원래의 유상과 이모본 한 본을 순흥의 소수서원에 보내는 행사가 이날 열렸던 것이다.

 원래 미수 허목의 82세 유상이 연천(漣川)의 허목 유거인 은거당(恩居堂)에 있었다.

 채제공이 정조의 지시로 이 유상을 모셔다 서울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구거(舊居)에 봉안하고 이모하여 정조에게 올렸다.(『樊巖先生集』卷18 詩 ○稀年錄[中]) 정조는 이를 어람한 후 비단을 내려 한 벌을 더 이모하여 궁궐에 보존하고, 은거당에 있던 유상은 연천으로 보내고 새로 이모한 유상은 순흥의 소수서원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유상이 도성 문을 나가는 날, 이를 주관한 채제공의 집에서 잔치를 벌인 것이다.

 채제공 이하 남인 사대부 관료들은 빠짐없이 참석을 하여야 하는 잔치이다.

 정약용은 손님이 왔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러자 채제공은 젊은 문도들에게 정약용을 비판하라고 하였고 정약용은 이에 대한 변명으로 이 시를 써서 용서를 빈 것이다.

 시고의 말미에 `죽란산인 정약용 재배’라고 써서 `산인(散人)’ 즉 벼슬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 또 명례방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암집』에는 허목 유상을 이모한 경위가 좀더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1794년(정조18) 정조가 허목에 대하여 느낀 바가 있어서 칠분(七分) 소진(小眞)을 보기를 바랐고, 채제공에게 명하여 찾아서 올리도록 하였다.

 채제공이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가을 7월에 연천 은거당에서 선생의 82세 때의 진영을 모셔서 서울로 들어와 당세에서 그림을 잘 그린다는 이명기에게 모사하게 해서 올렸다.

 정조는 유상을 보고 별도로 비단을 준비하여 화원(?員) 이명기(李命基)에게 명하여 그 진영을 이모하여 첩으로 만들어 대내(大內)에 두고, 올린 것은 도로 그의 후손에게 내려주었다.

 또 사림의 의견이 소수서원에는 안 문성공(안향), 주 신재(주세붕), 이 오리(이원익) 선생의 영정이 모두 있으니 허목의 진영도 순흥의 소수서원에 추가로 봉안하는 것이 옳다고 하여 새로 이모한 영정을 그곳으로 보내도록 한 것이다.([樊巖集]卷59 雜著 敬書眉?許先生小眞) 이제 미수 허목의 유상은 연천 은거당, 대내, 순흥 소수서원 등 3곳에 봉안되게 된 것이다.

 다산이 `당 단합대회’에 빠진 이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채제공은 잔치를 벌였는데 동당(同黨)의 33살 된 신예 정약용은 다른 일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당 장악력이 강한 채제공은 이를 좌시하지 않고 동료들에게 공박하도록 하자 이에 변명하는 시를 써서 올린 것이다.

 미수 유상의 소수서원 봉안은 정치적으로 근기 남인과 영남 남인, 남인 세력의 확장과 관련하여 의미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수백 명의 유림이 참배한 그 잔치에 다산이 왜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는지 아직도 궁금한 점이 많다. 번암은 자기 당의 보스로서 당 장악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젊은 다산은 당 단합대회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이 시기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숭봉 문제로 김종수(金鍾秀) 등 벽파와 대립하고 있었고 또 서학과 관련하여 벽파의 공격으로 채제공, 이가환 등 남인 시파는 궁지에 몰려있었다.

 정조의 비호로 채제공의 시파 정권은 유지되었지만 마치 추운 겨울에 얇게 언 얼음을 밟고 시내를 건너는 형국이었다. 정약용은 2년 전 부친상을 당하여 거상(居喪)하다가 그해 가을 막 비변사 낭청으로 관직에 복귀하던 무렵이었다.

 자신을 `죽란산인’이라고 자처한 것은 아직 정식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시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세자의 죽음, 서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시파와 벽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와 대결 상황에서 이 시를 음미하면 왜 정약용이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이 소집한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 더 많은 상상을 하게 된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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