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천리마에게 소금 수레를 끌게 했던가? [誰敎騏驥伏鹽車]

2020. 11. 18. 16:39성리학(선비들)

창랑 홍세태는 평생을 불우하게 살다 간 천재 시인이었습니다. 대대로 역관 무인 등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이씨 집안의 노비였으므로 그 역시 노비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5살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시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까닭에 그의 이런 재능을 알아본 청성군 김석주와 동평군 이항이 은자 200냥을 내어 그를 속량 시켰다는 일화가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실려 있습니다.

 

성품이 강개하여 자신을 무시하거나 오만하게 구는 자에게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았으며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김창흡, 이규명 등과 신분을 초월한 망형지교를 맺었습니다. 23세 때 식년시 잡과에 응시하여 한역관(漢譯官)으로 선발되었고, 1682년 통신사 부사 이언강의 자제군관으로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일본 사행 길에는 시와 그림으로 실력을 마음껏 뽐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천한 신분과 강개한 성품은 평생의 족쇄가 되어 그의 앞길을 막고 가난에 허덕이게 했습니다. 물론 같은 중인 출신으로 내수사에 들어가 부를 축적했던 임준원의 도움도 받았고, 또 김석주, 김창협, 김창흡, 홍상한, 최석정 등 당시의 명문 세도가들로부터도 일정 부분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가난했고 늘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의 자전적 시 「염곡칠가」중 두 번째 노래에 가난에 대한 그의 안타까운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아내여, 아내여! 그대와 혼인한 후로 [有妻有妻自結髮]

온갖 근심 속에서도 금슬만은 좋았다오 [百事傷心但琴瑟]

씀바귀 먹고도 냉이 먹은 듯 성난 기색 없었으니 [食荼如薺無慍色]

그대 아니었으면 어찌 오늘의 내가 있었겠소 [微子吾能得今日]

손톱만큼도 보답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나니 [愧無寸報慰餘生]

다만 죽어 함께 묻히기만을 기약한다오 [獨有前期指同穴]

아아, 두 번째 노래여, 노래 참으로 슬프니 [嗚呼二歌兮歌正悲]

가련한 이내 뜻을 하늘은 아실는지? [此意可憐天或知]

 

창랑 홍세태의 초상화. 일본 타카츠키 칸논노사토 역사민속자료관 소장으로 1883년 아시카곤사이(安積艮齋)가 예전 초상화를 구해 모사한 것이다.

가난한 데다 자식 복마저 없었던 홍세태는 끝내 아들을 두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출가한 두 딸도 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불행도 그의 시작(詩作)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시는 어려운 글자나 전고를 사용하지 않고 화려한 수사와 미사여구를 구사하지 않았지만 일상 속에서 겪는 삶의 애환을 진솔하게 표현하여 보는 이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문집을 출간하기 위해 돈을 저축해두고 있었는데 이를 두고 이덕무는 "어찌하여 살아있을 적에 은전 70냥으로 돼지고기와 좋은 술 등을 사서 70일 동안 즐기면서 일생동안 주린 창자나 채우지 않았는가?" 하고 그 어리석음을 꾸짖었다고 하나 그 자신 『맹자』를 팔아서 식구들의 양식을 마련했던 아픔이 있는 사람인지라 어찌 그것이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겠습니까?

 

홍세태의 문집 『유하집』은 그의 사망 6년 후에 사위 조창회와 문객 김정우에 의해 14권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이 문집에는 부(賦) 3수, 시(詩) 1627수, 문(文) 42수 등 모두 1670여 수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생전에 직접 쓴 서문에는 식암 김석주와 농암 김창협 같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제대로 평가해줄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서문을 짓는다고 하였으니 그의 문학적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유하집』말미에 첨부된 정래교의 묘지명에 따르면, 홍세태는 1725년 을사년 정월 보름, 향년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양주 이말산 신혈리 남동쪽 언덕에 장사 지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인 이씨 역시 3년 후에 사망하여 남편 옆에 묻혔습니다. 후에 영조 때의 문신 조현명은 창랑 홍세태에 대해, "간이 최립과 더불어 조선의 빼어난 위항시인으로 한유, 유종원과 자웅을 겨룰만하다"라는 평을 남겼으며, 그의 묘가 아무런 표지도 없이 필부들의 무덤에 뒤섞여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여러 사대부들과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시인 창랑 홍세태의 묘'라고 새긴 묘표를 세워주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창랑 홍세태의 묘는 흔적도 없고 묘표 또한 간 곳을 알 수 없습니다. 평생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신분적 한계와 가난의 굴레를 오로지 뛰어난 문학적 성취 하나로 헤쳐나갔던 창랑 홍세태, 그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불의와 타협하고 굴복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묵묵히 참고 기다렸습니다. 흡사 소금 수레를 끌며 태항산을 오르는 천리마처럼 언젠가 백락을 만나 우렁찬 울음을 터트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끝으로 그의 시 「염곡칠가」 중 제1수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객이여, 객이여! 그대의 자(字)가 도장(道長)이라지 [有客有客字道長]

스스로 이르기를 평생의 뜻 강개하였다지만 [自謂平生志慨忼]

만 권의 책 읽은 게 무슨 소용 있나? [讀書萬卷何所用]

늙고 나니 웅대한 포부도 풀숲에 떨어졌네 [遲暮雄圖落草莽]

누가 천리마에게 소금 수레를 끌게 했던가? [誰敎騏驥伏鹽車]

태항산이 높아서 올라갈 수 없구나. [太行山高不可上]

아아! 첫 번째 노래여, 노래 부르려 하니 [嗚呼一歌兮歌欲發]

뜬구름이 밝은 해를 가리는구나 [白日浮雲忽陰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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