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21. 16:49ㆍ즐거운 사자성어
澹泊明志 寧靜致遠 (담박명지 영정치원)
- 담박해야 뜻을 밝게 할 수 있고, 고요해야 멀리 이를 수 있다.
[한자풀이]
澹 편안할/맑은·담 泊 깨끗할/배댈·박
明 밝을·명 志 뜻·지
寧 편안할·영 靜 고요할·정
致 이를·치 遠 멀·원
중국 촉한(蜀漢)의 승상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이 54살 때 8살 된 아들 첨(瞻)에게 남긴 편지「계자서(誡子書)」의 구절을 줄인 성어다.
제갈공명은 아들에게 남긴 편지에서 마음을 가라앉혀 담박함과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덕을 길러 세상의 쓰임에 맞갖은 준비를 갖출 것을 당부했다.
夫君子之行 靜以修身 儉以養德 (부군자지행 정이수신 검이양덕)
非澹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비담박무이명지 비녕정무이치원)
夫學須靜也 才須學也 (부학수정야 재수학야)
非學無以廣才 非靜無以成學。(비학무이광재 비정무이성학)
慆慢則不能硏精 險躁則不能理性。 (도만칙불능연정 험조칙불능이성)
年與跱馳 意與歲去 (연여지치 의여세거)
遂成枯落 多不接世。(수성고락 다불접세)
悲嘆窮廬 將復何及。(비탄궁려 장복하급)
✿ 후반 부분은 아래와 같은 형태로도 전해진다.
非學無以廣才 非志無以成學。
淫慢則不能勵精 險躁則不能冶性。
年與時馳 意與日去,
遂成枯落 多不接世,
悲守窮廬 將復何及。
무릇 군자의 행실은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검소로써 덕을 길러야 하는 것이니,
담박함이 아니고는 뜻을 밝게 할 수가 없고, 차분히 고요해지지 않으면 먼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
무릇 배움은 모름지기 고요해야 하고, 재주는 모름지기 배워야만 하는것이니,
배움이 아니고는 재주를 넓힐 수가 없고, 고요하지 않으면 배움을 이룰 길이 없다.
문란하고 게으르면 정밀하게 궁구할 수가 없고, 사납고 조급하면 성품을 다스릴 길이 없다.
나이는 시간과 함께 내달리고, 뜻은 세월과 더불어 지나가 버릴것이니,
마침내는 비쩍 말라 영락해서 세상과 만나지 못하는 수가 많다.
궁한 집에서 구슬피 탄식한들, 그때 가서 장차 무슨 소용있겠느냐.
여기서 나온 성어가 '澹泊明志 寧靜致遠 (담박명지 영정치원)'다. '(마음이) 담박해야 뜻을 밝게 할 수 있고, (마음이) 고요해야 멀리 헤아릴 수 있다.'라는 의미다.
'澹泊(담박)'은 '맑은 물이 고요히 출렁이며 밝게 빛난다'라는 뜻이다. 때로는 澹(맑을·담)은 淡(맑을·담)으로 쓰기도 하는데, '淡泊(담박)'은 '욕심(慾心)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을 뜻한다. 寧靜(영정)은 '마음이 평안(平安)하고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신라시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이름은 이 구절을 따왔으며, 청나라 강희제도 영정치원(寧靜致遠)이란 글을 써 황실에 걸어 두었고, 안중근 의사는 중국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이 구절을 휘호로 써 마음 속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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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의 역사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은 46세의 늦은 나이에 아들을 하나 두었다. 옛날 중국에서는 아이가 태어난 지 3개월이 지나면 길일을 골라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제갈량은 아들의 이름을 '세상을 잘 보고, 잘 관찰하라'는 의미에서 瞻(볼·첨)이라고 지었다. 瞻은 ‘보다, 관찰하다’라는 뜻이다.
첨(瞻)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재능도 학습도 뛰어났다. 하지만 배경 좋은 집안의 자손으로써 교만함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대인관계에서 문제가 되곤 했다.
제갈첨의 자(字)가 사원(思遠)인데, 자는 성년식을 치룬 남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보통은 집안에 가장 큰 어른이나 명망 높은 귀한 손님의 몫이었다. 사원(思遠)은 ‘멀리 생각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남들의 눈에도 첨(瞻)은 교만하게 보였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234년때 일이다. 제갈량은 오장원으로 출정하기 전, 형 제갈근에게 편지를 썼다. 거기에 아래와 같은 문구가 있다.
제갈첨은 지금 벌써 여덟 살이 되었고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그가 조숙하여 중요한 인재가 되지 못할까 봐 걱정입니다.
- 진수, 「촉서」 -
사랑스러운 아들을 걱정하는 내용이 보인다. 총명하고 조숙한 어린 아들을 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가지는 마음 자락을 음미하고 짚어볼 수 있는 글이다.
형 제갈근에게 편지를 쓰고 난 다음에 따로 제갈량은 여덟 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썼다. 이것이 유명한 제갈량의 ‘계자서(誡子書)’이다. 한자로 총 86자다. 그 중에서 백미(白眉)는 ‘澹泊明志 寧靜致遠(담박명지 영정치원)’로 어쩌면 제갈량이 평생 심득한 팔자(八字)일 것이다. 이 문구는 후세의 수많은 선비들과 세인들에게 처세의 잠언(箴言)이 되었다.
제갈량은 유비를 주군으로 모신 후 2인자로서 평생 조심스럽게 삼가는 성격의 소유자로 살았다. 아들 첨(瞻)이 8자의 문구의 뜻을 제대로 깨우쳐 자신처럼 삼가고 침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뜻과는 다르게 첨(瞻)은 자라면서 교만(驕慢)함을 버리기 힘든 성장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첨은 열일곱 살 때 장가를 들었다. 아버지를 잘 둔 덕분에 공주(유비의 손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벼슬에도 올라 기도위로 임명되었다. 다음해에는 우림중랑장이 되었으며, 곧 이어서 여러 차례나 승진을 하여 야성교위, 시중, 상서복야가 되었다. 게다가 아버지 제갈량처럼 군사가 되었다. 학문과 재능, 총명함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이유로 촉한의 수많은 백성들에게 많은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마침내는 촉한의 2대 황제 유선(劉禪)으로부터 아버지가 누렸던 모든 작위를 고스란히 이어받게 된다. 첨의 정치 영향력이 최대한 커진 거다.
그해 겨울이 유달리 추웠었던 263년 봄, 위나라 장군 등애(鄧艾)가 촉(蜀)을 공격했다. 장성해서 서른일곱의 나이에 아버지의 모든 지위를 물려받은 첨(瞻)은 황제의 명을 받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전선으로 향했다. 병사들과 함께 부현에 주둔했는데 촉한의 선봉대가 그만 무너져 패했다. 할 수 없이 군사를 물렸다. 그 때 등애로부터 첨에게 편지가 당도했다. 내용인즉,
“만일 항복하면 반드시 표를 올려 낭야왕으로 삼겠다.” - 진수, 「촉서」 -
편지를 보자마자 첨(瞻)은 흥분해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편지를 가지고 온 등애가 보낸 사자의 목을 베어 버린다. 이윽고 전투가 다시 시작 되었다. 부하 참모가 첨에게 신속하게 나아가 험요한 곳을 점거하여 적들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충고했으나, 첨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결국 제갈첨은 싸우다 장렬하게 죽고 만다.
첨(瞻)이 흥분하지 않고 침착했더라면 싸움의 양상은 패하더라도 다시 반격의 기회를 찾는 기회로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사를 치르는 동안 첨의 마음은 고요하고 맑지 못했다. 여덟 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澹泊明志 寧靜致遠’의 교훈을 새겼더라면 좀 더 냉철하게 전황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 제갈량이 죽은 후 30년 동안 아버지 명성 덕분에 승승장구하게 된 첨(瞻)은 아버지의 유훈을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제갈량이 처음 사회에 나온 때는 스물여섯으로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가 계기가 됐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를 따라 헤매다가 맨몸으로 융중에 정착한다. 융중에서 낮에는 직접 농사를 짓고, 밤에는 독서와 천하를 연구한 끝에 '천하삼분계책'을 탄생시켰다. 이후로 제갈량은 군주 유비의 신뢰를 한 몸에 받게 되었지만 제갈량은 늘 삼가고 신중했다.
제갈첨 또한 어린나이인 여덟 살 때 부친을 잃었다. 그 또한 젊은 나이에 명성을 얻고 부마까지 되었으나 혼자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닌 아버지 후광 때문이었다. 재능과 총명함은 뛰어났으나 인격 수양이 덜 된 허명(虛名)을 얻은 것에 불과했다. 집안 명성을 배경으로 하여 서른일곱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고질적인 교만함을 고치지 못했다.
아이 때 똑똑하고 조숙한 자식은 성장하며 목이 뻣뻣한 말처럼 교만(驕慢)해지기 쉽다. 교(驕: 교만할·교)라는 한자의 부수 말(馬)이 담긴 의미가 바로 그런 거다. 「노자」 9장에는 이런 명언이 등장한다. '富貴而驕 自遺其咎(부귀이교 자유기구)’ ‘부귀하면서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게 된다’라는 뜻이다.
제갈량이 사방에 귀(傾聽: 경청)를 열어놓고 사람을 상대했다면 제갈첨은 사방에 입(開口: 개구)을 열어놓았을 뿐이었다. 첨은 아버지 제갈량이 알려준 유훈대로 살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거울로 삼지 않고, 미래에 대한 준비 없이 살았던 것이다.
고대중국의 사상가 묵자(墨子)는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君子不鏡於水 而鏡於人]’라고 말했다. 물은 자기애(自己愛) 즉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거기에서 장·단점을 취하고 버릴 수 있고 길흉화복을 예측할 수 있지만, 자기를 거울로 삼으면 교만함만 커질 뿐이다.
현명한 아버지를 거울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제갈첨은 생명을 다하지 못하고 불운하게 전사하고 만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첨이 ‘澹泊明志 寧靜致遠’의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유비가 '삼고초려'할 때 제갈량이 초옥에서 낮잠에서 깨어나 읊은 시를 되새겨 본다.
草堂春睡足,(초당춘수족)
窓外日遲遲。(창외일지지)
大夢誰先覺,(대몽수선각)
平生我自知。(평생아자지)
초당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도
창문 밖에는 아직도 햇살이 남아 있네.
큰 꿈은 누가 먼저 알겠는가?
내 평생의 꿈은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 것을!
원대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누군가 하나쯤은 동지(同志)를 구해야 한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제갈량이 유비에게 그런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교만함은 혼자 걷는 길이다. 멀리 가려면 함께 걷는 것이 좋다. 힘이 덜 든다. 더 멀리까지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