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양호 북새기략 /백두산고〔白頭山考〕

2020. 10. 8. 11:22工夫

백두산고〔白頭山考〕

 

백두산은 무산부(茂山府) 서쪽 306리에 있다. 옛 이름은 불함산(不咸山)이다. 중국 사람은 장백(長白), 동방 사람은 백두(白頭)라고 부르니, 산이 아주 높고 사계절 항상 얼음과 눈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산해경(山海經)》에 “넓은 황야 가운데 산이 있는데, 불함산이라고 하며,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라고 하였다.

《진서(晉書)》에 “숙신씨가 불함산 북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불함산에 대해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역사[東史]에 따르면 북옥저(北沃沮)와 말갈(靺鞨)이 모두 불함산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우리나라 경내에 불함산이 있었던 듯하나, 어느 산이 옛 불함산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백두산을 불함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근거에 따른 것인가.

《위서(魏書)》에 “물길국(勿吉國)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나라 말로는 ‘태백(太白)’이다. 호랑이, 표범, 곰, 이리 등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이 이 산을 용변으로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산을 지나가는 자들은 모두 용기에 담아서 간다.”라고 하였다.

《요지(遼志)》에 “장백산이 냉산(冷山) 동남쪽 1000여 리에 있다. 그 산 속의 금수들은 모두 하얗다. 사람이 감히 들어가지 않는데, 그곳을 더럽혀 뱀에게 물리는 해를 입을까 두려워서이다.”라고 하였다.

《금사(金史)》 〈세기(世紀)〉에 “그 북쪽으로 혼동강(混同江)과 장백산(長白山)이 있다. 혼동강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한다. 이른바 ‘백산(白山)과 흑수(黑水)’가 바로 이것이다. 대정(大定) 12년(1172)에 장백산신(長白山神)을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에 봉하고, 그 산 북쪽에 묘우(廟宇)를 세웠다. 명창(明昌) 연간에 다시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에 책봉하였다.”라고 하였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 동북쪽 1000여 리에 있으니, 옛 회령부(會寧府)의 남쪽 60리이다. 너비는 1000리, 높이는 200리이다. 그 정상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라고 하였고, 《성경통지(盛京通志)》에 “장백산은 곧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니, 선창(船廠) 동남쪽 1300여 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명통지(明統志)》에 “동쪽으로 흘러 아야고하가 된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살펴보건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압록강,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토문강(土門江), 북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혼동강이라고 하니, 아야고하라는 이름의 강은 없다. 옛날과 지금의 호칭이 다르기 때문이다.

《청일통지(淸一統志)》에 “장백산은 길림오라성(吉林烏喇城) 동남쪽에 있으니 너비가 1000여 리에 이른다. 동쪽으로 영고탑(寧古塔)으로부터 서쪽으로 봉천부(奉天府)에 이르기까지 여러 산이 모두 이 산에서 발맥(發脈)한다. 산 정상에 못이 있는데, 압록, 혼동, 토문 세 강의 발원지이다. 금(金)나라 때 세운 묘우는 훼손되었고, 본조(本朝)에서 높여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으로 삼고 성 서남쪽에 있는 온덕항산(溫德恒山)에서 망제(望祭)를 지낸다. 강희(康煕) 17년(1678)에 대신(大臣) 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등을 보내 산에 올라 형세를 살피도록 하였다. 그들이 산에 가서 산록 한 곳을 보니 사방 둘레로는 숲이 빽빽한데 그 가운데 둥글고 평평한 곳에서는 초목이 나지 않았다. 숲을 나와 10리쯤 가니 향기 나는 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산 중턱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쳐다볼 수가 없었는데, 여러 대신이 꿇어앉아 황제의 칙지를 읽자 바로 구름과 안개가 걷혀 산의 형세가 훤히 드러났다. 오를 만한 산길로 반쯤 갔을 때 섬돌 같은 대[石砌臺]가 있었는데, 평평해서 사방을 바라보기 좋았다. 그곳에서 보니 산 정상은 둥그런 형상이고 눈이 쌓여 하얬다. 정상에 올라 보니, 다섯 봉우리가 빙 둘러 솟아 있는 것이 마치 관아 같고, 남쪽의 한 봉우리가 조금 낮아 마치 문 같았다. 가운데의 못은 아득히 먼데, 산벼랑과의 거리가 50길쯤 되고, 둘레는 40여 리쯤 되었다. 산의 사방에서 수많은 물줄기가 세차게 흐르니, 바로 큰 세 강의 발원이다. 강희 23년(1684)에 주방협령(駐防協領) 늑출(勒出) 등을 다시 보내 둘러보고 산의 형세를 살피도록 하였는데, 그 너비와 길이는 《명통지》에 쓰인 바와 대략 같았다. 그 정상에는 별다른 나무가 살지 않고 흰 꽃을 피운 풀들이 많았다. 남쪽 산자락이 굽이굽이 뻗어 가다가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그중 서남쪽 방향의 산줄기는 동쪽으로 압록강을, 서쪽으로 통가강(通加江)을 끼었으며, 그 산줄기가 끝나는 곳에서 두 강이 만난다. 다른 한 줄기는 산의 서쪽을 돌아 북쪽으로 수백 리를 뻗었는데 여러 물줄기에 의해 갈라지므로 구지(舊志)에서는 통틀어 분수령(分水嶺)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서쪽으로 흥경(興京)에 이르기까지 나무가 우거지고 숲이 깊어 하늘과 해를 가리는 곳을 두고 지역민은 납록와집(納綠窩集)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흥경문(興京門)으로 들어가 개운산(開運山)을 이룬다. 납록와집에서 북쪽으로 한 산줄기가 40여 리 뻗었는데, 지역민은 이를 가이민주돈(歌爾民朱敦)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다시 서쪽 방향으로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들어가 천주(天柱)와 융업(隆業) 두 산을 이룬다. 산줄기가 구불구불 뻗어 있어 지역에 따라 산(山)이라고도 하고 영(嶺)이라고도 하여 그 이름은 같지 않으나, 모두 이 장백산에서 갈라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통지》에는 “선창 동남쪽 1300여 리에 있다.”라고 하였으나, 지금 살펴보건대 이 산은 실제로 주(州 길림오라성)의 동남쪽 600리에 있다.주-D009

혹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고도 하니, 이는 오늘날의 백두산이다.

 

백두산도(白頭山圖)

삽화 새창열기

 

백두산은 동북쪽에 웅장하게 솟아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하늘로 높이 치솟아 있고, 천 리가 하나같이 푸르다. 멀리서 바라보면 정상이 마치 높은 상에 흰 항아리를 엎어 놓은 것 같다. 대택(大澤 천지)의 동쪽에는 돌사자가 있는데, 색이 누렇고 꼬리와 갈기가 움직이는 듯하다. 중국 사람들이 망천후(望天犼)라고 부른다.

산세(山勢)는 경태방(庚兌方 서쪽)으로부터 오고 산체(山體)는 남쪽을 등지고 북쪽을 바라본다. 그 북쪽은 숙신(肅愼), 남쪽은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이다. 그 동남쪽은 평탄하여 미미하게 맥이 있는데 세 번 웅크리고 산줄기를 이루어 손사방(巽巳方 동남쪽)으로 내려와 분수령이 되니, 곧 삼한(三韓) 산천(山川)의 시조이다.

백두산 정상은 가운데가 움푹 꺼져 못을 이루었는데, 둘레는 4, 5십 리이고 깊이는 100여 길이다. 비가 와도 불어나지 않고 비가 안 와도 줄지 않으며, 푸른 파도가 도도하게 일렁이니 사람들이 감히 다가가 보지 못한다. 정상의 사방에 봉우리들이 각각 우뚝 서 있는데, 정오(正午 남쪽)의 한 줄기가 못 안으로 쑥 들어왔다가 곧장 수구(水口)로 향한다. 못을 따라 둘레를 헤아려 보면 1만 2000보(步)이고, 그 저변에서 봉우리까지를 세어 보면 1800보이며, 수구의 동서쪽 너비는 150보이고, 남쪽 산줄기가 들어온 길이는 300여 보이며, 상봉으로부터 사방 봉우리의 둘레를 모두 계산하면 8, 9십 리쯤 된다. 북쪽으로 툭 터져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이 되고, 동쪽으로 한 물줄기가 겹겹의 봉우리와 암석 사이로 숨어 흘러 비로소 토문강이 되니, 곧 두만강의 상류이다.

대택의 물은 신령한 원기(元氣)가 모여 이루어졌는데 수구가 북쪽으로 트여 있어 경박(鏡泊)으로 흘러가며, 대택 사방 봉우리의 큰 맥은 모두 저들의 소유이고 산 뒤로 면면히 이어진 작은 자락이 곧 우리의 소유이니, 저들은 온전하게 얻었고 우리는 치우치게 얻었다 하겠다. 완안씨(完顔氏 금나라) 이래로 흑수와 백산 사이에서 공업이 나타나지 않음이 없었으니, 저들이 번갈아 중국 땅의 주인이 된 것은 이 때문인가.

증봉(甑峯), 부봉(缶峯), 사모봉(思母峯)은 오라(烏喇)와의 거리가 700리이다. 호선동(虎扇洞)에 큰 마을이 있는데 바로 호장(胡將) 이대재(李大才)가 살던 곳이니, 백두산과의 거리는 300리이다. 청봉(靑峯) 옆에 양봉(兩峯)이 있는데 방명(方命)이라고도 하고 설령(雪嶺)이라고도 하니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다. 모두 소나무와 전나무가 우거진 곳이다.

황토동(黃土洞)과 성토동(星兔洞)은 탁 트여 광활하니 몇백 리나 되는지 모른다. 평원 가운데 우뚝 솟은 곳을 칠성봉(七星峯)이라고 하니 푸른 소나무와 늙은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고, 그 아래는 평탄하고 광활하여 끝이 없다. 또한 모두 인삼과 담비가 많이 나는 곳이다.

대택의 아래 10여 리가 되지 않는 곳에 연지봉(臙脂峯)이 있고 그 아래에 소백산(小白山)이 있다. 소백산 아래에 삼소지(三小池 삼지연(三池淵))가 있다. 또 그 아래에 침산(枕山)이 있는데 산의 형상이 베개 같아서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그 옆에 허항령(虛項嶺)이 있는데 길이 나 있어 혜산(惠山), 운화(雲化) 등의 여러 진(鎭)과 삼수(三水), 갑산(甲山) 가는 길로 바로 통하나 가파르고 험준하여 사람들이 감히 가지 못한다.

대택의 서북쪽 10리 아래에 구항연대수(九項淵大水)가 있는데, 저들은 ‘새음고눌하(賽音庫訥河)’라고 부른다. 그 연(淵)의 곁에 학성(鶴城)이 있는데 언제 축조한 것인지 모른다. 평탄하고 너른 벌판이 인삼 밭이자 담비 굴이라고 할 만큼 인삼과 담비가 많이 난다.

침산 아래에 포모산(抱慕山)이 있다. 이 산의 남쪽에 큰 내가 하나 있는데, 그곳은 수많은 봉우리 사이인데도 탁 트여 평평하나 갈대와 개자리가 아주 무성하다. 이곳이 아마 무산부(茂山府)가 처음 설치된 곳인 듯하다.

포모산 아래에 연화암(蓮花巖)이 있고, 연화암 아래에 검덕산(劍德山)이 있으며, 그 아래에 문새봉(文塞峯)이 있다. 경성(鏡城), 명천(明川), 길주(吉州)의 읍치와 각 진보(鎭堡)들이 그 사이에 얽히고설켜 바둑알처럼 펼쳐져 있다.

대편봉(大編峯) 아래에 황산(黃山)이 있고 그 아래에 남증산(南甑山)이 있으며, 그 아래에 이구산(尼丘山)이 있다. 회령(會寧), 종성(鍾城), 온성(穩城)의 읍치와 각 진보들이 그 밖에 나열해 있다고 한다.

천상수(天上水)는 흑룡강의 발원이다. 큰 들로 흘러나오면 좌우에 깎아지른 듯한 양봉(兩峯)이 서 있는데 후죽봉(帿竹峯)이라고 한다. 몇천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높다. 모두 호인(胡人)이 채집과 수렵을 하는 곳이다.

백두산 뒤의 평야에 두 갈래로 선 바위가 있는데, 모양은 후죽(帿竹)과 같고, 색깔은 옥과 같으며, 높이는 몇 길이나 되는지 모른다. 흑룡강의 원류가 그곳에서 나온다고 한다.

백두산에서 인묘간(寅卯間 동쪽)으로 200여 리 가면 무산 사지촌(社地村)에 이르는데, 여기부터 우리 경내로 들어간다.

북증산(北甑山)은 백두산 아래 곤방(坤方 남서쪽) 40여 리에 있다. 석성(石城)이 있는데, 그 둘레가 넓고 크며 문루와 관사의 터가 지금도 완연하다. 언제 지었는지 모르나, 폐지된 지는 수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홍흑석산(紅黑石山)은 동가강(佟家江) 북쪽 변에 있는데, 봉우리에 붉은 돌과 검은 돌이 있어서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병사봉(兵使峯) 앞에 철비(鐵碑)가 있고, 서출령(西出嶺) 위에도 철비가 있는데, 예전에 경계를 나눌 때 세운 것이라고 한다.

산에 마른 도랑이 있고, 그 도랑 남쪽 가에 돌덩이가 줄지어 쌓여 있다. 10무(武 반보(半步))에 한 무더기가 있기도 하고 20무에 한 무더기가 있기도 한데, 이것이 ‘경계를 정한 표석[定界標石]’이라고 한다. 도랑을 따라 서쪽으로 수십 무를 가다가 평지에서 꺾어 북쪽으로 5, 6십 무를 올라가면, 도랑이 끝나는 곳에 비석이 있다. 비석에 “오라 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조사하니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고 동쪽은 토문(土門)의 물길로, 서쪽은 압록강(鴨綠江)으로 삼아 여기에서 경계를 정하다. 강희 51년(1712) 5월 15일.”이라고 되어 있다. 비석 뒤로 수십 무를 올라가 보면, 동서쪽으로 각각 마른 도랑이 있는데 서쪽 것은 도탄(逃灘)이라고 하고 압록강으로 흘러가며, 동쪽 것은 토문(土門)이라고 하고 두만강과 선성(宣城)에서 만난다. 목극등이 돌아간 후 문서를 보내 이르기를 “비석을 세운 후에 토문의 원류를 따라 살펴보니, 물이 수십 리 흘러가다가 흔적이 보이지 않더니 바위틈을 따라 숨어 100리를 흐르다가 비로소 큰 물길이 나타났다. 사람들에게 물길이 없는 이곳이 국경인 줄 어떻게 알게 하여 감히 넘나들지 못하게 하겠는가.”라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토문의 원류가 끊어지는 곳에 흙이나 돌을 쌓아 울타리를 만들어 하류와 잇게 하자는 뜻으로 회신하였다고 한다. 비석을 세운 곳으로부터 동쪽으로 30리 거리에 목책과 토돈(土墩 흙 돈대)을 설치하여 천평(天坪)에까지 이르니, 곧 두만강이 솟아 나오는 곳이다.

장파(長坡)에서 분수령까지는 지세가 평탄하니 통틀어 천평(天坪)이라고 부른다. 천평 위에서 보면 높고 큰 산들이 모두 무릎 아래에 있는데, 분수령에서 산꼭대기까지는 또 곧장 8, 9리를 더 올라가야 하니, 그 높음이 이와 같다. 천평은 우리나라 땅에 속하는 것이 무려 수백 리인 데다가 두만강과 토문강 북쪽, 압록강과 파저강(波瀦江) 서쪽, 혼동강 좌우의 땅에 이르기까지 천평이 아닌 곳이 없는데, 이 천평이 모두 백두산에 속하니, 그 넓음이 또한 이와 같다. 천평의 곳곳에 큰 못들이 흩어져 있는데, 사방을 바라보면 그 반짝반짝 빛나는 모양이 마치 하늘에 별자리가 펼쳐진 것 같다.

무산부로부터 한 갈래 길이 있는데 임강대(臨江臺)를 거쳐 삼산덕창(三山德倉)과 와가창(瓦可倉)에 이른다. 대편봉 아래에 옛 객사가 있고, 객사 옆에 못이 하나 있다. 대편봉에 올라 바라보면, 한 줄기 긴 산이 구불구불 뻗어 마치 병풍 같고, 분계강(分界江) 안쪽과 두만강 바깥에 걸친 너른 평야가 아득히 끝이 없으니, 숲이 우거지고 풀이 무성한 땅이 육진(六鎭)보다 더 넓다.

사모봉 서쪽으로 연이은 수백 리가 납진와집(納秦窩集)이다. 《통지(統志 대청일통지)》에 “길림오라성 남쪽 730리에 있다. 장백산 북쪽의 높은 첩첩산중에 나무가 우거진 깊은 숲이니, 여기에서 발원한 강들이 많다. 산에 숲이 우거진 것을 ‘와집(窩集)’이라고 한다. 《기가격편(幾暇格編)》에 ‘와집은 동쪽으로 해변에 이르고, 오라의 흑룡강 일대와 연접하며, 서쪽으로 악라사(鄂羅斯 러시아)에 이르니, 어떤 곳은 넓고 어떤 곳은 좁다. 숲과 나무가 우거져 비늘이나 빗처럼 빽빽하니 햇볕이 잘 들지 않는다. 소나무, 잣나무 등 각종 큰 나무들이 모두 같은 종류끼리 자라서 다른 나무들이 섞여 있지 않다. 숲속에 낙엽이 쌓여 항상 수 자쯤 되니 샘물이나 빗물이 이곳에서는 흐르지 못해 모두 진흙 수렁이 되므로 사람이 다니기가 매우 어렵다. 곰, 멧돼지, 담비, 흑서(黑鼠), 백서(白鼠), 회서(灰鼠) 등의 동물이 있는데, 모두 잣이나 도토리를 먹고 산다. 인삼 등의 각종 약재가 나는데 이를 변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남방의 호광(湖廣), 사천(四川) 지방과 비슷하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후죽봉(帿竹峯) 뒤에 또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북쪽으로 100여 리 연이어져 늑부선와집(勒富善窩集)이 된다.

납록와집(納綠窩集)은 곧 분수령에 숲이 우거진 곳이니 둘레가 수십 리이다. 심양성 남쪽과 흥경 경내의 여러 강이 여기에서 발원한 것이 많다.

산 북쪽에서 영고탑과의 거리는 600여 리라고 한다.

백두산의 원맥(元脈)이 동남쪽으로 30리를 달려 연지봉(臙脂峯)이 된다. 그 맥이 나뉘어 소백산(小白山)이 되고, 서남쪽으로 향하여 침봉(枕峯)이 되며, 침봉 남쪽에서 평판(平坂)으로 30여 리 내려와 허항령(虛項嶺)이 된다. 남쪽을 향해 가로퍼져 내려와, 4개의 맥이 그대로 4개의 동(洞)을 이루는데, 첫 번째는 임연수천(臨連水川), 두 번째는 자개수천(自開水川), 세 번째는 비비수천(飛飛水川), 네 번째는 검천(劍川)이라고 하며, 각 동의 물이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다. 보다회산(寶多會山)에서 내려온 맥이 남쪽으로 오씨천동(吳氏川洞)이 되니, 동 입구의 천변에 혜산보(惠山堡)를 설치하였다. 보다회산의 정맥(正脈)이 동쪽으로 달려 가리봉(加里峯)과 완항령(緩項嶺)이 되며, 가리봉과 완항령 사이의 한 맥이 남쪽을 향해 내려가다가 허천강(虛川江)의 허봉(虛峯)에서 멈추니, 산의 동쪽 동에는 운총보(雲寵堡)를, 산의 서쪽 동에는 동인보(同仁堡)를 설치하였다. 완항령에서 동남쪽으로 달려 또 영(嶺)을 이루니 이 영에서 남쪽 방향으로 내려간 한 맥이 갑산(甲山)에서 멈추어 읍의 진산(鎭山)이 된다. 설령(雪嶺)에서 그대로 동남쪽으로 달려가 두리산(頭里山)을 이루니 그 남쪽은 갑산이고 동쪽은 길주(吉州)이다. 이 산에서 나뉘어, 왼편으로 내려가 길주의 참두령(斬頭嶺)이 되고, 오른편으로 내려가 갑산의 감평령(甘坪嶺)이 된다. 이 두 영의 정간(正幹)이 남쪽으로 달려 단천(端川)의 황토령(黃土嶺)이 된다. 참두령 왼편의 한 맥이 구불구불 수십 리를 뻗어 동쪽으로 응봉(鷹峯)을 이룬다. 이 봉의 정상에서 한 맥이 북쪽을 향해 수십 리를 달려 서북진(西北鎭)이 된다. 진의 위쪽 수십 리쯤에 양파관(陽坡關)의 이양춘(李陽春) 터가 있고, 진의 북쪽에 장군파구보(將軍坡舊堡)가 있으며, 진의 서북쪽에 옥천(玉泉)과 서대(西大) 등의 두 동이 있다. 진에서 북쪽으로 장백산령(長白山嶺)과의 거리는 130여 리이고, 북쪽으로 옥천동과의 거리는 40여 리, 서쪽으로 서대동과의 거리는 30여 리이며, 장군파와의 거리는 10여 리, 읍(邑 길주)과의 거리는 40리이다. 장백산령과 서대동, 옥천동, 장군파 등으로 가는 길은 모두 길주에서 관할한다.

백두산의 남쪽 줄기가 갑산의 동쪽을 지나 두리산이 된다. 단천부 북쪽 300여 리에 이르러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한 줄기는 동북쪽으로 꺾여 장백산(長白山)을 이루니 우뚝 솟아 북도(北道 함경북도) 여러 산의 시조가 된다.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꺾여 단천부 북쪽의 황토령(黃土嶺)과 천수(天秀), 후치(厚峙), 황초(黃草) 등 여러 영(嶺)을 이루고 남쪽에서 철령(鐵嶺)이 되니 남도(南道 함경남도) 여러 산의 근본이 된다. 양 갈래 사이에서 뻗어 나와 토라산(吐羅山)이 되는데, 속칭 검의덕산(檢義德山)이라고 하며 산세가 높고 험준하기가 함경도에서 으뜸이다. 산의 정상에 오르면, 남쪽으로 안변(安邊), 동북쪽으로 회령(會寧)과 경흥(慶興), 서쪽으로 설렬한령(薛列罕嶺)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산이 눈 앞에 늘어서 있는 듯하다. 깊은 골짜기의 그늘진 곳에는 한여름에도 눈이 쌓여 녹지 않으며, 산 중턱에 은광이 있다. 동북쪽 갈래의 나머지 줄기가 마천령(磨天嶺)이 되며, 서남쪽 갈래가 북청의 북쪽을 지나는데 한 줄기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뻗어 가서 단천부 서쪽에 이르러 마운령(磨雲嶺)과 두리산(豆里山)이 된다. 좌우 영봉(嶺峯)의 정상이 높고 평평하여 모두 큰 언덕을 이룬다. 북인들이 평평한 언덕을 ‘덕(德)’이라고 하는데, 북로(北路)에 덕이라고 이름 지은 산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백두산 대택의 사면은 깎아지른 듯 서 있어 마치 문 같은데, 물이 이곳으로부터 나온다. 북쪽으로는 저쪽 땅 후죽봉 사이와 북증산 뒤로 흐르니, 곧 흑룡강의 발원이다. 백두산 진사방(辰巳方 동남쪽) 수 리쯤의 골짜기에서 물이 샘솟아 서남쪽으로 흐르니 이것이 압록강의 상류이다. 분수령 아래에 정계비가 있는데, 비 아래부터 목책을 수십 리 세우고 목책 아래 토돈을 쌓아 동쪽으로 대각봉(大角峯)에 이르니, 비석에서 대각봉까지의 거리는 40리이다. 대각봉 아래에서 물이 샘솟아 동쪽으로 저쪽 땅 진장산(鎭長山)과 우리 땅 남증산 사이를 흐르니, 곧 두만강의 상류이다. 삼산덕(三山德)을 지나면서 서북쪽의 하천과 합류한 후에 수세(水勢)가 꽤 커지고 점점 깊어진다. 백두산 동쪽에서 장파 서쪽까지, 허항령 북쪽에서 대각봉 남쪽까지에는 큰 들이 넓게 펼쳐져 있어 바라보면 끝이 없으니, 이른바 천평이다. 천평의 북쪽 대각봉의 아래에 감토(甘土), 입모(笠帽), 남증(南甑), 노은(蘆隱) 등의 산이 있다. 그 봉우리들이 땅 위에 우뚝 솟았는데, 연지봉으로부터 산세(山勢)가 있는 듯 없는 듯 이어지다가 그 맥(脈)이 장파에서 멈춘다. 허항령 북쪽 아래에 삼지(三池)가 있고, 그 아래 10여 리에서 개울이 샘솟아 북쪽으로 흘러 삼산덕을 지나 강으로 들어간다. 허항령에서 무산부까지의 거리는 250리이니, 이틀 밤을 노숙한 후에야 다다른다. 보다회산 뒤 봉우리에서 북쪽으로 구불구불 뻗어 100리를 가니, 중간에 진장성(眞長城)과 연암(蓮巖) 등의 지역이 되고, 조금 동쪽을 향해 둘러 가다가 그 정맥이 곧장 달려 강변의 삼산덕에서 멈춘다. 완항령과 가리봉 사이에서 동남쪽으로 추봉(錐峯)이 솟아 있다. 장백산 옥천동 뒤 봉우리에서 또 한 맥이 서북쪽으로 100여 리를 내려와 삼봉(三峯)에서 멈춰 연암과 결구(結口)하니 그 사이가 이른바 여진평(女眞坪)이다. 보다회산과 완항령 이하, 가리봉과 추봉 이상은 그 이수(里數)를 알지 못한다. 삼산(三山)의 맥이 가로퍼져 내려와 펼쳐진 들판이 아주 넓다.

대택의 물이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된다. 수백 리를 복류(伏流)하다가 남쪽으로 나와 혜산강(惠山江)이 되는데, 서북쪽으로 꺾여 흘러 삼수, 갑산, 후주(厚州)를 지나고, 우측으로는 변경 밖의 십이도구(十二道溝) - 저쪽 땅 - 를 지난다. 서쪽으로 꺾인 다음 남쪽으로 흘러 평안도 폐사군(廢四郡)의 강계(江界), 위원(渭原)의 경내에 들어와 독로강(禿魯江)과 합류한다. 초산(楚山)의 산양회(山羊會)에 이르러 변경 밖의 동가강(佟家江) - 저쪽 땅 - 과 만나고, 왼편에서 동건강(童巾江)과 만난다. 벽동(碧潼)과 창성(昌城)을 지나 의주(義州)에 이르니 적도(赤島) 동쪽에서 세 줄기로 나뉜다.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흐르다가 모여 구룡연(九龍淵)이 되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흘러 서강(西江)이 되며, 한 줄기는 가운데로 흐르니 소서강(小西江)이라고 한다. 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 다시 합쳐 하나가 되며, 수청량(水靑梁)에 이르러 또 나뉘어 두 갈래가 된다.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적강(狄江)과 합류하며,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대강(大江)이 된다. 위화도(威化島)를 돌아 암림관(暗林串)에 이르러 서쪽으로 흐르며, 미륵당(彌勒堂)에 이르러 다시 적강과 합하여 대총강(大總江)이 되어 서해(西海)로 들어가니, 이상은 동국(東國)의 경계이다. 중국 측의 경계로 보면, 강은 영길주(永吉州)에 속하는데 주 동남쪽 1300여 리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압록강이다. 서쪽으로 염난수(鹽難水)와 합하고, 서남쪽으로 동가강과 만나 500여 리를 흘러 봉황성(鳳凰城) 동남쪽을 돌아 바다로 들어가니, 강의 동남쪽은 조선 의주(義州)와의 경계가 된다. 주자(朱子)가 “여진(女眞)이 일어난 곳에 압록강이 있다.”라고 하였고, 《황여고(皇輿攷)》에 “천하에 세 개의 큰 강이 있는데 황하(黃河), 장강(長江), 그리고 압록강이다. 그러나 압록강은 외이(外夷) 지역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송사(宋史)》에 “고려에서 이 강이 가장 크니 물이 맑디맑다. 그 나라가 이 강을 믿고 의지하여 천혜의 해자로 여긴다. 강의 폭이 300보이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 압록강을 두고 한 말이다.

대택의 물이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이 되니 지금은 송화강(松花江)이라고 부른다. 장백산(長白山)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다가 낙니강(諾尼江), 흑룡강(黑龍江) 등을 만나고 바다로 들어가니, 곧 옛 속말수(粟末水)이다. 《위서(魏書)》에 “물길국(勿吉國)에 큰 강이 있다. 너비가 3리 남짓이며, 이름이 속말수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강이다. 강에 동서쪽의 두 발원이 있다. 동쪽 발원은 장백산 정상의 못에서 나와 세차게 흐르다가 천 길 폭포로 떨어지니, 속칭 토랍고(土拉庫)라고 한다. 두 줄기로 나뉘어 흐르는데, 동쪽 줄기는 대토랍고(大土拉庫), 서쪽 줄기는 소토랍고(小土拉庫)라고 하니, 수십 리를 가서 다시 만나 흐른다. 그 동쪽에 또 낭목낭고하(娘木娘庫河)와 합극통길하(合克通吉河)가 있는데 모두 산의 동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들어 간다. 서쪽 발원에도 두 줄기가 있는데, 동쪽은 액흑눌음하(額黑訥音河), 서쪽은 새음눌음하(賽音訥音河)라고 한다. 모두 장백산 서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쪽 발원에서 온 물줄기 및 여러 하천과 만나 하나가 된다. 또 북쪽으로 흐르면서 여러 강을 받아들인다. 주성(州城 길림오라성)의 동남쪽을 돌아 북쪽으로 흘러 경계를 벗어나며, 꺾여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백도눌성(白都訥城)의 서쪽을 돌아 흐른다. 또 북쪽으로 흘러 낙니강의 물을 만나고, 다시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흐르다가 남쪽에서 흘러온 호이합하(虎爾哈河)를 만난다. 또 동북쪽으로 600여 리를 흐르다가 서북쪽에서 흘러온 흑룡강과 만나고, 또 200여 리를 흐르다가 남쪽에서 온 오소리강(烏蘇哩江 우수리강)과 만난다. 또 조금 꺾여 북쪽으로 흐르면서 걸륵아(乞勒兒), 흑진(黑眞), 비아객(飛牙喀) 등 여러 부(部)의 땅을 돌아 동해(東海)로 들어간다. 발원하여 바다로 들어가기까지 모두 3500여 리이다. 요(遼)나라, 금(金)나라 이래로 강의 명칭이 하나가 아니고 기록에 오류가 많았다. 예를 들면 《금사(金史)》에서 말한 흑수(黑水)를 거란(契丹)이 혼동강(混同江)으로 지목하였는데, 이는 혼동강을 흑룡강으로 착오한 것이다.

대택의 물이 동쪽으로 흘러 토문강(土門江)이 된다. 장백산(長白山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흘러 북방을 돌고 동남쪽으로 꺾여 여러 물을 만나 바다로 들어간다.

토문강은 백두산 묘방(卯方 동쪽)에서 발원하여 흐르다가 곤방(坤方 남서쪽)의 북증산 앞에 이르러 두만강이 되며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강희 54년(1715, 숙종41)에 혼춘(渾春)의 고이객제(庫爾喀齊) 등의 지역은 조선과 토문강만을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거주민들이 왕래하여 사고가 일어날까 우려된다는 이유로, 장수 안도립(安都立)과 타목노(他木弩)를 시켜 가옥과 점포를 즉시 허물게 하고, 영고탑에서 온 관병(官兵)의 둔장(屯莊)과 함께 모두 강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거주하도록 하였다. 이후 강을 연한 가까운 곳에 집을 짓거나 파종하는 일이 모두 엄격히 금지되었다고 한다.

동가강은 장백산(長白山 백두산) 남쪽 분수령에서 발원한다. 세 곳에서 샘솟은 물이 골짜기를 나와서 만나 하나가 된다.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합이민(哈爾民) 등의 여러 강을 받아들인다. 압록강이 동쪽으로부터 흘러와 만나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청일통지(淸一統志)》에 “강이 길림오라성 남쪽 802리에 있으니, 통가강(通加江)이라고도 한다.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을 만나니, 곧 옛 염난수(鹽難水)이다.”라고 하였다.

동가강의 한 지류가 흑룡강으로 들어간다. 물과 흙이 모두 붉어서 주온천(朱溫川)이라고 부르니, 아마 홍흑석산(紅黑石山)에서 흘러나온 듯하다.

동가강에서 진주(眞珠)가 많이 난다. 매년 북경에서 오라와 영고탑으로 하여금 군인을 차정하여 채취해 바치게 한다. 기축년 이후에 선성 장군(鄯城將軍)에게 군공이 있다 하여 동가강 이북 지역을 떼어 주니, 이제 선성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분계강(分界江)은 백두산 술해간(戌亥間 북서쪽)에서 발원하여 북증산 뒤의 할난(割難) 땅을 흘러 남해(南海)로 들어간다. 한 지류가 온성 경계에 이르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토문강과 분계강 사이의 거리는 110여 리이다.

분계강에서 벌가토강(伐加土江)까지는 70여 리, 벌가토강에서 동가강까지는 140여 리, 동가강에서 주온천까지는 15리쯤, 주온천에서 흑룡강까지는 305리쯤 된다고 한다.

흑룡강은 흑룡강성의 동쪽에 있다. 옛 이름은 흑수(黑水)이며, 완수(完水), 실건하(室建河), 알난하(斡難河)라고도 한다. 객이객(喀爾喀 할하)의 북쪽 경계인 긍특산(肯特山)에서 발원하니, 지역민들은 오눈하(敖嫩河)라고 한다. 여러 물줄기를 만나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니포초성(尼布楚城 네르친스크)을 지나 남쪽을 향해 내지(內地)로 들어간다. 또 동쪽에 고륜호(枯淪湖)가 있는데, 거기서 흘러나온 액이고납하(額爾古納河)가 서남쪽에서 와서 만나 흐르다가, 아극살성(雅克薩城) 남쪽에 이르러 꺾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흑룡강성 북쪽 90리에 이르러 정계리강(淨溪里江)의 물이 북쪽에서 흘러들어 오며, 흑룡강성을 돌아 동남쪽으로 흐른다. 북쪽에서 온 우만하(牛滿河)를 남쪽에서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흐르다가 혼동강과 만나 이로부터 합류한다. 또 동쪽으로 가다가 오소리강이 남쪽에서 흘러들어 오고, 동북쪽으로 꺾여 혁림하(革林河), 형곤하(亨滚河) 등의 여러 하천을 받아들이고 바다로 들어간다. 강희 22년(1683, 숙종9)에 장군(將軍)과 부도통(副都統)을 설치하여 성을 쌓고 지키게 하였다.

흑룡강은 백두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퍅개(愎介) 땅을 거쳐 혼동강과 합류해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좌우에 허전인(許全人)이 산다. 허전인은 까마귀 고기, 사슴 몸통, 소 다리를 먹는다. 퍅개인도 고기를 먹으며, 개 수레[狗子車]를 짐을 싣고 끄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두만강은 백두산 남쪽 갑산의 천평에서 발원한다. 동쪽으로 흘러 어윤강(魚潤江)이 되며, 우리 육진과 저쪽 땅을 돌아 흐른다. 허항령 북동쪽의 물과 후춘(後春) 남산(南山)의 물이 모두 이 강에 모인다. 남북으로 수삼백 리이며, 동서로 6, 7백 리이다. 경흥(慶興) 녹둔도(鹿屯島)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현재 강의 남쪽은 우리 땅에 속하고, 북쪽은 영고탑에 속한다.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슬해(瑟海)라고 부른다. 무이보(撫夷堡)의 서봉대(西烽臺)에 올라 바라보면 청흑색의 물빛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두만강에서 흑룡강까지, 남해(南海)로 가는 거리는 570여 리이다. 남해는, 저들이 지칭하는 남해를 말한다.

 

[주-D001] 백두산고(白頭山考) : 백두산에 관한 당대의 지리 정보를 종합한 글이다. 백두산의 역사, 지형, 산맥, 계곡, 생태 등의 정보와 백두산에서 발원한 강에 대한 정보를 서술하였으며, 이를 집약하여 구현한 지도인 〈백두산도(白頭山圖)〉가 수록되어 있다. 백두산의 지리 정보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수록된 정보들은 조선 영역에 대한 것과 청나라 영역에 대한 것으로 대별되는데, 청나라 영역에 대한 것은 다시 조선에서 생성 전승된 정보와 《성경통지》, 《대청일통지》 등 청나라 지리서에서 파악한 정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처럼 지리 정보의 출처가 상이하므로 인해 서로 다른 내용과 성격의 정보가 함께 수록되어 있기도 한데, 이 점에 유의하여 〈백두산고〉를 독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의 백두산 인식과 북방 영토 인식, 역사 인식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주-D002] 우리나라 역사에 …… 모르겠다 : 이종휘의 〈동방지명지변(東方地名之辨)〉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보인다. 〈동방지명지변〉에는 “불함산은, 역사서에 의하면 북옥저와 말갈이 모두 불함산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현재의 우리나라 경내에 있었던 듯하나 어느 산이 옛 불함산이었는지는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修山集 卷14 東國輿地雜記 東方地名之辨, 韓國文集叢刊 247輯》[주-D003] 대정(大定) …… 책봉하였다 : 《금사》 〈세기〉가 아니라 〈예지(禮志)〉를 인용한 것이다. 《金史 卷35 志16 禮8》 《大淸一統志 卷45 吉林 山川》[주-D004] 지금 …… 때문이다 : 편찬자의 의견인 듯 서술되어 있으나 《성경통지》나 《대청일통지》의 내용에 의거하여 서술한 것이다. 《盛京通志 卷27 山川3》 《大淸一統志 卷45 吉林 山川》[주-D005] 성 …… 지낸다 : 원문은 ‘在城西南溫德恒山望祭’라고 되어 있다. 문연각본 사고전서에 수록된 《성경통지》에는 “성 서남쪽 9리에 온덕형산 망제가 있으니 봄과 가을 두 번의 제사를 길림 장군과 부도통이 주관한다.[在城西南九里溫德亨山望祭, 春秋兩祭吉林將軍副都統主之.]”라고 되어 있고, 《대명일통지》에는 따로 ‘망제산(望祭山)’ 항목을 두어 “성 서남쪽 9리에 있으니 곧 온덕형산이다. 매년 봄과 가을 이곳에서 장백산신에게 망제를 지낸다. 옹정 11년(1733)에 망제전을 세웠다.[在城西南九里卽溫德亨山, 每歲春秋於此望祭長白山之神. 雍正十一年建望祭殿.]”라고 되어 있으므로, 이를 고려하여 번역하였다.[주-D006] 분수령(分水嶺) : 백두산 남쪽의 분수령, 곧 조선 산천의 시조로 인식되고 정계비가 세워진 분수령과는 다른 곳이다. 《대청일통지》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청나라에서는 백두산 서북쪽의 산령(山嶺)을 분수령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백두산고〉에도 백두산 남쪽과 서북쪽의 분수령이 혼용되었으므로 구분하여 읽어야 한다.[주-D007] 이곳에서 …… 이룬다 : 개운산(開運山)은 흥경(興京)에, 천주산(天柱山)과 융업산(隆業山)은 성경(盛京)에 있는 산이다. 청 태조가 창업한 두 도성의 주산으로서 존숭되었다. 강희제는 백두산의 맥이 천주산과 융업산, 개운산을 거쳐 뻗어 가서 산동(山東)의 태산(泰山)을 이룬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聖祖仁皇帝御製文集 第4集 卷27 泰山山脈自長白山來》[주-D008] 통지에는 …… 있다 : 문맥으로 볼 때 편찬자의 의견인 듯 서술되어 있으나 《성경통지(盛京通志)》의 내용에 의거하여 서술한 것이다. 문연각본 사고전서에 수록된 《성경통지》에는 “살펴보건대 구지(舊志)에는 ‘선창 동남쪽 1300여 리에 있다.’라고 하였으나, 지금 살펴보건대 이 산은 실제로 길림성 동남쪽 600리에 있다.[按舊志謂在船廠東南一千三百餘里, 今考此山實在吉林城東稍南六百里.]”라고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백두산이 선창 동남쪽 1300여 리에 있다고 한 것은 ‘구지’인데, 이 구지는 《성경통지》의 구 판본인 듯하다. 《성경통지》는 만주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종합 지리서이다. 1684년(강희23) 처음 편찬되었고, 1734년(옹정12), 1736년(건륭1), 1778년, 1852년(함풍2)에 수정본이 편찬되었다. 군사적 이유로 유출이 금지되던 《성경통지》를 조선은 17세기 말에 확보함으로써 비로소 당시 청나라 측의 만주 지역 지리 정보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배우성, 18세기 청의 지리지․지도와 백두산의 수계, 역사와 경계 65, 부산경남사학회, 2007, 31쪽》[주-D009] 산해경(山海經)에 …… 있다 : 《산해경》부터 《청일통지》까지의 문헌 인용 주석은 편찬자가 개개 서적을 각각 인용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대청일통지》와 《성경통지》의 장백산 서술 내용을 재인용하여 재편한 것이다. 《大淸一統志 卷45 吉林 山川》 《盛京通志 卷27 山川3》[주-D010] 백두산도(白頭山圖) : 〈백두산고〉에 수록한 지리 정보를 종합해 작성한 지도로, 백두산과 그 발원 하천에 대한 편찬자의 지리 인식이 나타나 있다. 어긋난 두 면을 바로잡아 붙였다.[주-D011] 망천후(望天犼) : ‘하늘을 바라보는 후(犼, 吼)’라는 뜻으로, 중국 전설 속의 신수(神獸)이다. 조천후(朝天吼)라고도 하며, 주로 중국 전통 돌기둥 양식인 화표(華表)의 최상단에 조각하였다. 한편으로는 백두산 천지 동편에 있는 주요 봉우리의 이름이다.[주-D012] 두만강의 상류이다 : 《삭방풍토기》에는 뒤에 “분계강(分界江)은 서출령(西出嶺)의 아래에서 발원하여 처음에는 하나의 개울을 이루어 흐르다가 종성(鍾城)의 경계에 이르러 강이 되고 온성(穩城)의 경계에 이르러 토문강(土門江)에 합류한다.”라는 내용이 더 있다.[주-D013] 경박(鏡泊) : 경박호(鏡泊湖)를 말하며, 필이등호(畢爾騰湖)라고도 한다. 영고탑 서남쪽 100리에 있다. 신령스러운 대택의 물이 조선 쪽으로 흘러오지 않고 반대편으로 흘러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등에 의하면 당시 조선에서는 여진인이 경박호에서 일어나 금나라를 세워 중국을 차지하였다고 인식하기도 하였다. 《大淸一統志 卷45 吉林 畢爾騰湖》 《星湖僿說 卷1 天地門 東國地圖》[주-D014] 그 옆에 …… 못한다 : 허항령로(虛項嶺路)는 무산과 백두산 일대가 점차 개발되어 감에 따라 무산과 갑산을 잇는 지름길로 정착되어 왕래가 빈번해졌다. 《고승희, 조선 후기 함경도 상업 연구, 국학자료원, 2003, 59쪽》[주-D015] 대택의 …… 아래에 : 《삭방풍토기》에는 앞에 “장백산(長白山) 한 맥(脈)은 우리나라 산천(山川)의 중조(中祖)이다.”라는 내용이 더 있다.[주-D016] 대택의 …… 부른다 : 원문은 ‘大澤西北十里之下有九項淵大水也 彼名賽音庫訥河’인데, 《삭방풍토기》에는 “대수(大水)이다. 저들은 ‘새음고눌하’라고 부른다.[大水也. 彼名賽音庫訥河.]”가 없이 구항연(九項淵)이라는 못에 대한 정보를 서술해 두었다. 그런데 《북새기략》을 편찬할 때 추가되면서, ‘구항연대수’라는 하천에 대한 서술로 바뀌었다. 실제로 《북새기략》에 수록된 〈백두산도(白頭山圖)〉에는 구항연대수를 백두산에서 발원해 서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으로 묘사해 놓았다. 그러나 조선과 중국의 여타 자료에서는 구항연, 구항연대수, 새음고눌하에 대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다만 《북행수록(北行隨錄)》과 《북로기략(北路紀略)》에 “구항연수는, 저들은 새음고눌하라고 부르는데, 부봉과 연지봉 사이에서 나와 오라의 경계를 지나 서쪽으로 4, 5백 리를 흘러 여러 물길을 만나고 혼동강에 합류한다.[九項淵水, 彼人稱爲賽音庫訥河, 出於缶峯臙脂峯之間, 過烏剌界, 西流四五百里會諸水, 合混同江.]”라고 언급하였으나, 이는 《북새기략》의 〈백두산도〉에 기재된 구항연대수 주변 정보인 ‘구항연대수피명새음고눌하(九項淵大水彼名賽音庫訥河)’, ‘연지봉(然脂峯)’, ‘부봉(缶峯)’, ‘오라계(烏喇界)’, ‘차수서류사오백리회저수합혼동강(此水西流四五百里會諸水合混同江)’ 등을 조합해 만든 문장으로 보인다. 이 《북새기략》의 영향을 받아 후대에 생성된 지리 정보인 것이다. 《北行隨錄 北略擬議上 山川》 《北路紀略 黑龍江》[주-D017] 대편봉(大編峯) : 그 위치와 명칭으로 보아 대각봉(大角峯)을 가리키는 듯하다. 〈백두산도(白頭山圖)〉에는 ‘대편봉(大偏峯)’으로 되어 있다. 《山經表》 《大東輿地圖》[주-D018] 후죽(帿竹) : 과녁을 매다는 대나무를 말한다. 《日省錄 正祖 10年 8月 25日》 두 줄기가 곧게 서 있는 모양을 비유한 듯하다.[주-D019] 비석에 …… 있다 : 1712년(숙종38)에 세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의 비문을 인용한 것이다. 비문의 원문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비석에는 “오라 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조사하니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고 서쪽은 압록으로 삼고 동쪽은 토문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해 둔다. 강희 51년 5월 5일.[烏喇摠管穆克登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 康熙五十一年五月五日.]”이라고 되어 있다.[주-D020] 목극등이 …… 한다 : 여기에는 목극등이 돌아간 후 문서를 보내서 물길이 없는 곳의 국경 표지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고 조선 측에서 목책과 토돈을 쌓겠다고 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목극등이 국경 표지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것은 돌아가기 전인 1712년 5월 23일 무산부(茂山府)에 머무를 때이고, 목책 설치에 대해 처음 거론한 것도 목극등이었다. 다만 목극등에게 토돈과 돌무더기 설치를 제안한 것은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 감사 이선부(李善溥)였다. 《北征錄 5月 23日》 《肅宗實錄 38年 6月 3日》[주-D021] 산에 …… 곳이다 : 1712년 조선과 청나라 간의 정계에 따라 설치된 목책과 토돈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백두산 정계와 목책ㆍ토돈 설치의 배경, 경위, 실상 등에 대해서는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경세원, 2000, 48~73쪽 참조.[주-D022] 기가격편(幾暇格編) : 강희제(康熙帝)가 지은 잡저(雜著)인 《강희기가격물편(康熙幾暇格物編)》을 말한다. 그의 문집인 《성조인황제어제문집(聖祖仁皇帝御製文集)》 제4집 권26에 수록되어 있다. 문연각본 사고전서에 수록된 《대청일통지》를 확인해 보면 이 ‘기가격편’이 ‘성조인황제어제문집’으로 되어 있다.[주-D023] 산에 …… 하였다 : 《대청일통지》에서 납목와집(納穆窩集)에 대해 서술한 내용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납진와집(納秦窩集)에 대한 서술 내용 중에서 발췌한 것은 ‘길림오라성 …… 많다’까지일 뿐이고, 납목와집 서술부에서 와집(窩集)에 대한 설명을 발췌하여 추가 서술한 것이다. 《大淸一統志 卷45 吉林 山川》[주-D024] 가리봉(加里峯) : 《대동여지도》와 《동여도(東輿圖)》에는 가덕봉(加德峯)으로 되어 있다.[주-D025] 영(嶺) : 《동여도》 등의 자료와 문맥을 살펴볼 때 설령(雪嶺)을 가리키는 듯하다.[주-D026] 두리산(頭里山) : 《산경표(山經表)》,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산(圓山)이라고도 한다.[주-D027] 이양춘(李陽春) 터 : 이만영(李晩榮)의 〈적명천시일기(謫明川時日記)〉에 의하면, 서북진(西北鎭) 북쪽의 이양춘 터는 예전에 촌장 이양춘 등이 속세를 피해 촌락을 이루고 살다가 서북진 사람에게 발견된 후 촌민을 거느리고 홀연히 떠나 터만 남은 곳이라고 한다. 이만영이 속설(俗說)을 바탕으로 이를 기록해 두었으며, 서북 만호 이덕립(李德立)이 이 속설을 듣고 가서 확인해 보니 과연 옛터가 완연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雪海遺稿 卷2 謫明川時日記, 韓國文集叢刊 續30輯》 남구만의 〈진북변삼사잉진지도소(陳北邊三事仍進地圖疏)〉, 정약용의 《대동수경(大東水經)》,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에도 이양춘 터는 서북진 주변의 주요 지리 정보로 기록되어 있다.[주-D028] 두리산(豆里山) : 갑산과 길주 사이의 두리산과는 다른 산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마운령을 옛날에는 둘외대령(豆乙外大嶺)이라고 하였다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9 咸鏡道 端川郡 山川》[주-D029] 백두산의 …… 때문이다 : 《단천읍지》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輿地圖書 咸鏡北道端川邑誌 山川》[주-D030] 여진평(女眞坪) : 성해응(成海應)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 의하면, 은룡덕 봉대(隱龍德烽臺)에서 바라보이는 둘레가 700리에 이르는 지역이라고 한다. 동북쪽으로 무산(茂山)을, 서북쪽으로 갑산평(甲山坪)을 접하였으며, 예전에는 야인(野人)의 근거지였으나 지금은 비어 있다고 하였다. 《硏經齋全集 卷58 蘭室譚叢》[주-D031] 십이도구(十二道溝) : 압록강 상류의 대안에 있는 열두 하천에 대해 청나라 측에서 지칭하는 말로, 두도구(頭道溝)부터 십이도구 또는 십삼도구까지 있었다. 숙종 대에는 청나라 측과 함께 범월 사건 등을 처리할 때 그들이 말하는 여러 도구가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 혼란을 겪었으나, 청나라의 지리서와 지도를 확보함에 따라 점차 그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갔다. 《배우성, 만주에 관한 지식과 조선 후기 사회, 역사학보 208, 2010, 243~249쪽》[주-D032] 영길주(永吉州) : 청나라의 만주 통치는 주방팔기(駐防八旗)를 근간으로 하였으나, 점차 만주에 민(民)이 유입됨에 따라 주현제(州縣制)도 일부 병존하였다. 1726년(옹정4) 길림오라 지역에 설치되었다. 《구범진, 淸代 ‘滿洲’ 지역 행정체제의 변화, 동북아역사논총 14, 동북아역사재단, 2006》[주-D033] 황여고(皇輿攷) :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 의하면 명나라의 장천복(張天復)이 《명일통지》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편찬한 지리서인데, 사고전서에 수록되지는 않았다. 《四庫全書總目 卷72 史部28 地理類存目1》 박지원(朴趾源)과 한치윤(韓致奫)도 압록강, 금강산, 한라산, 지리산 등에 대해 논하면서 천하의 세 개의 큰 강과 여덟 개의 신산(神山)에 대한 내용을 인용하였다.[주-D034] 주자(朱子)가 …… 하였으며 : 《주자어류(朱子語類)》,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에는 “여진이 일어난 곳에 압록강이 있다. 전(傳)에 이르기를 ‘천하의 세 곳에 큰 강이 있으니 황하, 장강, 그리고 압록강이다.’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편찬자는 ‘전에 이르기를’ 이하의 내용은 《황여고(皇輿攷)》를 인용한 것으로 서술하였고, 주희의 저술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압록강은 외이 지역에 있다.”라는 구절을 추가하였다. 그러나 《황여고》는 명나라 때의 저술이므로 주자가 말한 ‘전’이 《황여고》는 아닌 듯하다.[주-D035] 장백산(長白山) : 대개 조선에서는 함경도 중부에 있는 산을, 청나라에서는 백두산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백두산고〉에서는 두 가지 모두 쓰였는데, 청나라 지리서에서 발췌한 경우에는 백두산을, 조선의 지리 정보에 따른 경우에는 함경도 중앙의 장백산을 지칭한다. 청나라 지리서를 인용했다는 언급이 없을 경우에도 백두산의 의미로 사용하였을 경우 대개 청나라 지리서의 내용을 발췌한 서술로 볼 수 있다. 위의 장백산은 백두산을 의미하는데, 인용 사실을 밝히지 않았지만 《대청일통지》의 내용을 발췌한 서술로 확인된다. 《大淸一統志 卷45 吉林 山川 混同江》[주-D036] 흐르다가 : 《대청일통지》에는 이 뒤에 ‘영고탑 북쪽을 돌아’라는 내용이 더 있다. 《大淸一統志 卷45 吉林 山川 混同江》[주-D037] 걸륵아(乞勒兒) …… 부(部) : 흑룡강 하류 지역에 분포하던 부족명이다. 걸륵아는 기릉(奇楞), 기륵이(奇勒爾), 기린(麒麟) 등으로, 흑진(黑眞)은 혁철(赫哲), 허전(許全) 등으로, 비아객(飛牙喀)은 비아합(非牙哈), 퍅개(愎介)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佟冬 編, 中國東北史 4, 吉林文史出版社, 1998, 1407~1461쪽》[주-D038] 대택의 …… 것이다 : 《대청일통지》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大淸一統志 卷45 吉林 山川 混同江》[주-D039] 북방을 돌고 : 《대청일통지》에는 “조선의 북쪽 경계를 돌아”라고 되어 있다. 《大淸一統志 卷45 吉林 山川 圖們江》[주-D040] 장백산(長白山)에서 …… 들어간다 : 《대청일통지》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大淸一統志 卷45 吉林 山川 圖們江》[주-D041] 토문강은 …… 들어간다 : 《삭방풍토기》에는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東南流入海]”라고 하는 내용이 없었으나, 《북새기략》을 편찬하면서 추가되었다. 《북새기략》을 편찬하면서 토문강과 두만강에 대한 정보가 다소 상충하게 되었으나, 《삭방풍토기》는 뒤에 “분계강(分界江)은 서출령(西出嶺)의 아래에서 발원하여 처음에는 하나의 개울을 이루어 흐르다가 종성(鍾城)의 경계에 이르러 강이 되고 온성(穩城)의 경계에 이르러 토문강(土門江)에 합류한다.”라는 내용이 더 있다. 이것으로 보아 저자 홍양호는 토문강을 두만강의 상류 또는 두만강과 같은 강으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주-D042] 강희 …… 한다 : 《대청일통지》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大淸一統志 卷421 朝鮮 山川 土門江》[주-D043] 동가강은 …… 들어간다 : 《성경통지》나 《대청일통지》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大淸一統志 卷45 吉林 山川 佟家江》[주-D044] 분계강(分界江)은 …… 한다 : 백두산 정계로 북방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면서 분계강을 상정하여 이를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도 함께 확산되어 갔다. 홍양호의 경우 분계강을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가는 강, 또는 온성에서 두만강으로 합류하는 강으로 인식하였다. 《삭방풍토기》에 “분계강(分界江)은 서출령(西出嶺)의 아래에서 발원하여 처음에는 하나의 개울을 이루어 흐르다가 종성(鍾城)의 경계에 이르러 강이 되고 온성(穩城)의 경계에 이르러 토문강(土門江)에 합류한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조선 후기에 대체로 분계강은 해란하(海蘭河)를 지칭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해란하는 온성에서 두만강으로 합류하나 백두산에서 발원한 강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의 분계강 인식에 대해서는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경세원, 2000, 261~268쪽 참조.[주-D045] 분계강에서 …… 한다 : 조선에서 ‘벌가토’는 두만강 건너편의 야인 거주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쓰였다. 이는 여진어 ‘burhatu’를 한자로 음차한 것인데, 조선에서는 건을가퇴(件乙加退), 건가퇴(件加退), 건가퇴(件加堆), 벌가토(伐加土) 등으로 음차하였고, 청에서는 복아합토(卜兒哈兔), 포이합도(布爾哈圖) 등으로 음차하였다. 이처럼 조선과 청나라가 여진어를 한자로 음차하는 방식이 달랐으므로, 조선 음차 방식의 지명을 포함한 지리 정보는 조선에서 생성된 것이고, 청나라 음차 방식의 지명을 포함한 지리 정보는 청나라에서 생성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분계강에서 흑룡강에 이르는 거리 정보는 조선에서 생성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대청일통지》에서는 벌가토강에 해당하는 포이합도하를, 영고탑성 남쪽 400리에 있으며 성 동남쪽의 이름 없는 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여러 하천과 합쳐진 후 해란하(海蘭河)와 만나 갈합리하(噶哈哩河)로 들어가는 하천으로 설명하였다. 《大淸一統志 卷45 吉林 山川 布爾哈圖河》 《배우성, 만주에 관한 지식과 조선 후기 사회, 역사학보 208, 2010, 249~256쪽》[주-D046] 흑룡강은 …… 들어간다 : 《대청일통지》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大淸一統志 卷48 黑龍江 山川》[주-D047] 강희 …… 하였다 : 행정 구역인 흑룡강에 대한 설명이다. 《대청일통지》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大淸一統志 卷48 黑龍江 建置沿革》[주-D048] 퍅개(愎介) : 흑룡강 하류 지역의 지명이자 부족명이다. 청나라에서는 비아객(費雅喀, 飛牙喀), 비아합(非牙哈) 등으로 표기하였고, 조선에서는 퍅개(愎哈)라고도 표기하였다. 한족, 만주족, 몽고족 계열에 속하지 않는 민족이라고 한다. 《佟冬 編, 中國東北史 4, 吉林文史出版社, 1998, 1451쪽》[주-D049] 허전인(許全人) : 흑룡강 하류 일대에 사는 허저족을 말한다. 혁철(赫哲), 흑진(黑眞), 흑근(黑筋, 黑斤) 등으로도 쓴다. 현재는 중국 소수 민족 중 하나이며, 러시아에서는 나나이(Nanai)족이라고 부른다.[주-D050] 남산(南山) : 남북(南北)인 듯하다. 후춘에는 남산이라고 불린 산이 없을뿐더러, 특정 산에서 나오는 몇몇 하천이 두만강에 모여든다는 의미의 문맥도 아닌 듯하기 때문이다. 두만강 상류에는 백두산 북동쪽 일대의 여러 하천이, 하류에는 후춘 지역 일대의 여러 하천이 모여든다. 두만강으로 흘러드는 여러 하천에 대해서는 《수도제강(水道提綱)》을 발췌한 《해동역사(海東繹史)》 〈지리고(地理考)〉가 참고가 된다. 《海東繹史 續 卷14 地理考14 山水2》

ⓒ 한국고전번역원 | 손성필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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