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8. 10:29ㆍ世說新語
김장환(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 ≪세설신어≫는 후한(後漢) 말에서 동진(東晉) 말까지 약 200년 동안 실존했던 제왕과 고관 귀족을 비롯하여 문인ㆍ학자ㆍ현자ㆍ승려ㆍ부녀자 등 70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의 독특한 언행과 일화 1130조를, <덕행(德行)>편부터 <구극(仇隙)>편까지 36편에 주제별로 수록해 놓은 이야기 모음집이다. 내용이 상당히 방대하여 당시의 문학ㆍ예술ㆍ정치ㆍ학술ㆍ사상ㆍ역사ㆍ사회상ㆍ인생관 등 인간 생활의 전반적인 면모를 담고 있다. 따라서 중국 중고시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필독서이다. 우선 문학예술의 측면에서 ≪세설신어≫는 그 자체로도 깔끔하기 이를 데 없는 훌륭한 산문 작품이다.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1)과 같은 수사학적인 유미주의가 극성하던 당시의 문학 풍토에서 이처럼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은 한 줄기 청신한 바람이었다. 인물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언어는 고도의 간결미와 함축미를 지니고 있어서 위진 시대 언어 예술의 높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세설신어≫에는 문학적으로 다듬어진 수많은 고사성어가 산재되어 있는데, 오늘날에도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등용문(登龍門)ㆍ난형난제(難兄難弟)ㆍ점입가경(漸入佳境)ㆍ망매지갈(望梅止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세설신어≫는 중국 고전소설사상 지인소설(志人小說)2)이라는 독특한 유파를 정립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모방작을 만들어내면서 이른바 세설체(世說體) 필기소설의 시조로 존중받고 있다. 학술사상의 측면에서 ≪세설신어≫는 위진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사조인 현학(玄學)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이다. 현학은 형이상학적인 심오한 철리를 논하는 학문으로 주로 청담(淸談)3) 형태로 표현되었는데, 청담의 주된 내용은 ≪주역≫ㆍ≪노자≫ㆍ≪장자≫의 이른바 삼현(三玄)을 기본 대상으로 하고 여기에 불학(佛學)과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성행했던 인물 품평이 더해졌다. ≪세설신어≫에는 하안(何晏)ㆍ왕필(王弼)과 같은 청담 대가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고 청담의 다양한 주제와 방법 등이 집약되어 있어 청담의 보고라는 명성을 얻고 있으며, 인물 품평을 통해 드러난 수준 높은 사유 활동의 면면은 중국 미학사상 한 장을 차지하기에 충분하다. 당시의 문사들은 현학과 청담에 능해야만 비로소 명사로서 행세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려면 청담 논변과 현학적인 언어 응대가 집약되어 있는 ≪세설신어≫와 같은 책을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세설신어≫는 ‘명사들의 교과서’가 되었던 것이다. 사학의 측면에서 ≪세설신어≫는 실존 인물에 대한 기록인 만큼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당대(唐代)에 정사인 ≪진서(晉書)≫ 열전을 편찬할 때 ≪세설신어≫의 기록을 토대로 삼았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영가(永嘉)의 난4)을 비롯하여 왕돈(王敦)ㆍ소준(蘇峻)ㆍ환현(桓玄)의 난 등 진대에 발생했던 중대한 역사 사건들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술되어 있어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 밖에 수많은 위정자들의 통치 행위와 문벌 지배계층 간의 정치적 대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당시의 정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 밖에 도교의 영향으로 생겨난 풍수ㆍ미신ㆍ점술 사상과 오석산(五石散)이라는 일종의 마약을 상습적으로 복용하던 지식인들의 풍습 및 결혼에 대한 풍속 등이 반영되어 있어서 당시의 사회 상황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치 사회적으로 몹시 혼란한 시대를 살았던 당시 지식인들의 다양한 처세 태도나 인생관도 접해볼 수 있다. ≪세설신어≫는 문헌학적으로도 귀중한 자료이다. 양(梁)나라의 유효표(劉孝標: 462~521)가 ≪세설신어≫에 주를 달 때 400여 종에 달하는 서적을 인용했으나 오늘날 그 대부분이 없어지고 ≪세설신어주≫를 통해서만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유효표의 ≪세설신어주≫는 배송지(裴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注)≫,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 이선(李善)의 ≪문선주(文選注)≫와 함께 역대 중국의 4대 명주(名注)로 손꼽힌다. ≪세설신어≫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사실을 알 수 있는 구체적인 문헌상의 기록은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처음으로 보이지만, 그 이전에 최치원(崔致遠)이 그의 시에 ≪세설신어≫의 이야기를 전고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전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고려시대 이규보를 비롯한 여러 문인학자들이 즐겨 애독하고 그들의 시문에 폭넓게 수용한 예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기풍은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따라서 국내의 한문학 연구에도 매우 유용한 자료라고 여겨진다. 이 책은 청대(淸代)에 간행된 왕선겸(王先謙)의 사현강사본(思賢講舍本) ≪세설신어≫(上海: 上海古籍出版社影印, 1984)를 저본으로 했으며, 당대(唐代) 사본(寫本) ≪세설신서잔권(世說新書殘卷)≫, 송대(宋代) 간본(刊本) (臺北: 世界書局影印, 1974), 명대(明代) 원경(袁褧)의 가취당본(嘉趣堂本) (臺北: 中華書局影印, 1975)을 참고했다. 원전은 상ㆍ중ㆍ하 3권 36편에 총 1130조의 고사가 실려 있다. 사실 ≪세설신어≫는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에 그리 녹록한 책이 아니다. 그 짧은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철학적인 사고의 깊이와 숨 가쁜 역사의 호흡을 비롯하여, 곳곳에 숨어 있는 비유와 암시, 유머와 기지, 조롱과 독설, 함축적이고 추상적인 품평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등장인물 내면의 심리 상태 등등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설신어≫에 담겨 있는 다양한 인물 묘사 수법과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언어 기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어느 때보다도 가볍고 얕은 언사가 난무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세설신어≫는 진정으로 맛있는 말과 멋있는 말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우리의 사유 수준을 한층 높여줄 것이다. 36가지 주제에 담긴 인물 품평의 세계 ≪세설신어≫는 고사 전체가 인물 품평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물 품평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즉 전체 1130조의 고사를 36가지의 키워드로 인물의 다양한 면모를 품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 품평은 당시 청담의 주요한 과제 중 하나로서, 종종 인물의 일생을 좌우할 만큼 그 영향력이 막대했다. ≪세설신어≫에는 인물 품평에 관한 다양한 유형과 방법이 제시되어 있으며 그 품평어는 고도로 함축된 언어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품평의 실제 방법은 품평자가 대상 인물의 본성ㆍ재능ㆍ식견 등 다양한 특성을 직접적으로 서술하여 품평하는 경우, 대상 인물의 특성을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비유하여 품평하는 경우, 두 사람이나 그 이상의 대상 인물에 대하여 그들의 언행ㆍ재능ㆍ품덕ㆍ위의(威儀)ㆍ진퇴 등을 통하여 우열과 고하를 비교하여 품평하는 경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세설신어≫의 인물 품평 특성은 청담이 풍미하던 당시의 시대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의 미학적 심미의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이기도 하다. 이러한 심미의식에 대한 촉진은 자연스럽게 섬세한 감수성을 발달시켰다. 위진남북조 시대가 극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음악ㆍ건축ㆍ회화ㆍ서예ㆍ문학론 등의 발달과 각종 문화 교류 및 충돌을 통해 역동적인 제2의 백가쟁명(百家爭鳴) 시대’로 평가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각주 1) 위진남북조 때 유행한 문체. 넉 자 및 여섯 자의 구절로 대구(對句)를 이루고 평측(平仄)을 맞춘 정형화된 문장. 2) 위진남북조 소설을 분류할 때 지괴소설(志怪小說)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하는 용어로 노신(魯迅)이 처음 명명했다. 일부 학자들은 일사소설(軼事小說)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실제 인물의 특정한 언행과 면모를 짧은 편폭에 핍진하게 묘사해 내는 필기소설을 말한다. 3) 위진 시대 선비들이 노장철학을 숭상하여 속세를 벗어나 펼친 고상한 담론. 4) 서진(西晉) 말 영가연간(307년 ~ 312년)에 일어났던 대란. 팔왕(八王)의 난(300년) 이후에 대두된 왕족 상호간의 권력 쟁탈과 중원의 황폐를 틈타, 흉노족 유연(劉淵)이 한왕(漢王)을 자칭하고 갈족(羯族)의 석륵(石勒)과 왕미(王彌)를 귀속하여 하남(河南)과 산동(山東)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확장했으며, 312년에는 유연의 아들 유총(劉聰)이 수도 낙양(洛陽)을 침공하여 회제(懷帝)를 평양(平陽)에 유폐시켰다가 살해하고 민제(愍帝)를 장안(長安)에서 옹립했다. 서진은 이 난 때문에 사실상 붕괴되었으며 화북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