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작곡가 金順南

2019. 4. 23. 14:23사람과사람들

현실과 민중 민족 이름 음악혼 불태운 천재작곡가 金順南



김순남(1917~1983?)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김순남은 서울낙원동에서 태어나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1938년 동경고등학원 본과 작곡부에 입학하여 거기서 일본 프롤레타리아 음악의 정신적 지주인 하라다로(原太郞)를 만나 음악을 민중의 삶속에서 찾고자하는 사상적영향을 깊게 받는다.
1942년 동경제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해방직후 조선음악건설본부를 결성 첫해방가요 '건국행진곡'을 작곡햇으며 일제잔재 청산과 진보적 민족음악건설을 주장했다.
그의 이름과 작품은 월북때문에 남한에서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1988년 해금조치로 빛을 보앗다. 김순남의 딸인 성우 김세원씨는 "아버지는 이상을 쫓았던 예술가였으며 이념적으로나 음악적으로 너무 앞서 갔다"면서 "북한으로 간 아버지가 이상의 좌절을 겪을때 얼마나 고독햇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자유독립 우리나라 깃발 날려라" 도적처럼 몰래 찾아온 해방앞에서 우리민족은 '건국행진곡'을 소리높여 불렀다.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고 외치는 소리의 축재였다.
이노래의 작곡가 김순남 그역시 예술인들의 '나라만들기'열망이 정치적 활동으로 분출하고 결국 월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밟게된다.
그는 해방공간의 음악분야에서 실천적 좌표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임화의 시에 그가 곡을 붙인 '인민항쟁가'는 그주제가가 되엇다.
노래 잘하고 피아노 잘치기로 소문난 이 낙원동 '화장품집 아이'는 운명적으로 임화의 이념적 동지이자 창작의 친구가 되엇다.

같은 서울출신의 모던 보이로 작은키에 술잘하기로 이름난 이들은 음악과 문학의 재능을 서로 떠받쳐 주면서 해방공간의 나라만들기 이념을 정서적으로 고양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햇다.
이즈음 김순남이 작곡한 '해방의 노래'와 '농민가'는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했고 김소월의 시에 붙인 '산유화'는 지친 일상을 어루만져 주었다.
김순남은 일본유학시절 사숙햇던 하라 다로나 바르톡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등의 음악가들로부터 민족음악의 가치를 깨닫고 민족양식을 현대적으로 변용하는 방식을 배웠다.

그는 뱃노래 가락이나 상여꾼의 노래등에서 차용한 전통가락을 치열하면서도 역동적으로 가사에 실어보냄으로서 혁명적인 송가를 만들곤 했다.
노랫말에 대한 그의 문학적 감각도 작용했다.
김순남에게는 장인 특유의 기질적 특성이 존재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음악의 정치적투쟁과 계급이론화에 반대했고 이를 역선전하는 우익음악 단체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견질했다.
그는 음악본연의 독자성과 전문성을 중시했고 이를 구체화하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제도권 음악인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이유였다.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김순남을 평가한 미군정 음악고문관 알라이 헤이모위츠는 "진정한 창조적 천재에 대해 취하는 전단이나 어린애같은 차별 박해는 국민문화의 파멸과 위축을 빚어낼뿐"이라고 개탄했다.
1947년 좌익운동이 완전히 비합법화되자 인민항쟁가로 대중을 선도했고 남로당원이었고 민전위원 조선음악가동맹 작곡부장이었던 김순남에게 체포령이 내려진다.
그러나 그에게 월북은 사상적 신념에 따른 비장한 결행이라기보다는 잠깐의 '외출'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를 떠나보내는 환송회가 축제분위기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는 "나 애일 이북간다"는 말을 남기고 지인 4명과 함께 서울을 떠났다.
김순남은 '자장가'에서 "새봄이 돌아오면 아버지도 온단다"라고썼지만 영원히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고 말았다. 체포령속에서 해방동이 딸을 그리며 영혼에서 샘솟는 부성애를 4곡의 '자장가'에 쏟아 부은 그였다..
그는 박헌영을 따라 1948년 여름 해주에 정착한후 평양음악학교 교수이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며 헌법위원 역사연구보존위원이 되엇다.
대동강을 끼고있는 모란봉공원 앞의 2층집에서 평양생활을 시작햇다.
이때의 제자엿던 비목의 작곡가 장일남은 김순남의 '남'자를 자신의 맨끝자 이름으로 바꾸었을 정도였다. 김순남에 대한 당시 북한사람들의 존경은 대단해 그를 '樂聖'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1949년 9월 소련 10월혁명 기념행사에 참가하기위해 소련을 방문한 김순남은 쇼스타코비치를 만나는 감격을 누렷고 이것이 계기로 1952년 여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난다.
작곡가 김순남의 이상은 민족음악을 현대음악의 보편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데 있엇다.
그러나 그의 유학생활은 얼마가지 못햇다.
당시 사상문예투쟁이 본격화됨녀서 북한음악계도 숙청의 폭풍을 예감하고 잇었다.
1952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우너회 제5차 전원회의는 자연주의 형식주의등 부르주아문학 예술의 낡은 사상잔재를 비판하고 외국유학생들에 대한 귀국조치를 내렷다.

김순남은 휴학계를 내고 1953년 귀국한다.
1954년경부터 당조직의 사상투쟁 강화와 주체확립을 위한 반종파투쟁이 강화되면서 남로당계 예술인들 특히 김순남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시작된다.
리히림은 '인민항쟁가'가 베토벤처럼 6도이상의 비약을 쓰고 있어서 부르주아적 방법이라고 비판한다.
이후 김순남의 모든 직함과 창작권리는 박탈당한다.
1960년대 초반 평양을 떠나 함남 신포에서 송진을 달이거나 주물공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돌아라 사랑하는 기대야'등 작곡을 했다.
이때의 체험은 '현실 속에서 재운것(조선음악 64년4월)에 게재돼 있고 이무렵 그의 복권이 이루어진듯하다. 요양과 귀향이 되풀이 되었고 만년에는 문예창작지침과 개인의 창작생활에서 오는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많은 내적고통을 얻었던것으로 전해진다.

1983년경 신포기업소에서 삶을 마감한것으로 추측되지만 정확한 연대와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실과 민중 민족의 이름위에 음악혼을 불태운 걸출한 음악가의 인생에는 빛나는 천재성과 개인적선택에 내재한 비극성이 변주곡으로 울리고 있다.


일본 프롤레타리아 음악의 정신적 지주인 하라다로(原太郞)가 일본 극단 와리좌의 창립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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