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 / 김태길교수

2019. 3. 20. 14:37알아두면 조은글

어떤 친구로부터 내 성질이 다정다감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향수에 가까운 느낌에 젖었다. 


실로 오랫만에 듣는 다정다감하다는 묘사였다.




어린이 시절에 나의 경우는 동무들에 대한 애착이 심한 편이었다.


5,6세 어린 나이로 꽤 먼곳까지 동무를 찾아서 마실가기"를 좋아했다.




때로는 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밤 "마실"을 가기도 하였다.


계집애같이 다정다감한 기질과 그래도 사내 코빼기라고 


무서움을 타지않는 산마을 머슴애의 


적극성이 결합되어서 그런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매정하고 쌀쌀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한 때는 염인증(厭人症)에 걸려서 일부러 사람을 피하기도 하였다.




왜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 


생활의 내력을 더듬어보아야 밝혀질 일이겠지만


아마 사람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어떤 실망 또는 환멸에 


부딪쳐서 반동심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에 대한 실망가운데서 가장 컷던 것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이었다.


처음에는 세상 인심에 대해서 


그 믿을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 자신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를 깨달았을 때 


인간이라는 종족이 통틀어서 슬픈 존재라는 


느낌이 온통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떤 심리 변화를 거쳐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쨋든 다정다감하고 따스함이 지배했던 


어린이시절과는 대조적인 위인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情이라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 정의 심리가 몹시 미묘하고 까다롭다고 보는 까닭에 


차라리 가두어 두거나 멀리하고 싶은 생각에 


밀리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뜨거운 정열의 심리가 차거운 이지의 심리로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뜨거운 요소와 차거운 요소가 


마음바닥에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젊은 시절에는 뜨거운 마음이 위로 솟다가 


나이가 들며 세파에 시달리는 가운데 차거운 마음이 


차츰 위로 떠오르는 것이 일반적 추세일 것이다.




정이라는 것,그것이 없으면 세상이 삭막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정 놈 때문에 항상 피곤하고 번거롭다




정이 많은 까닭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미워한다.


어쨋든 나 자신의 옛날과 견주어보면서 


도무지 모를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생각된다.




나를 보고 다정 다감하다고 말한 친구는 


나의 젊은이 시절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사람이다.




그의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던 것은 


아마 나의 옛모습이 어디엔가 남아 있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김태길교수 수필(198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