岳麓書院

2019. 1. 8. 16:24松浩書室

1. 천년학부(千年學府) 악록(岳麓)서원

 

예는 초나라 땅.

뒤에는 주로 담주()로 불렸던 호남성의 장사시 악록산 기슭

상강(湘江)과 강 건너 장사시를 굽어보며 천년 세월이 넘도록 악록서원은 서 있다.

하남(河南) 등봉(登封)의 숭양서원(嵩陽書院)과 상구(商丘)의 응천서원(應天書院), 그리고 강서(江西) 구강(九江)의 백록동서원과 더불어 북송 시기 천하 4대 서원으로 일컬어지던 곳.

 

상강은 남악(南岳) 형산(衡山)의 정기를 모아 북으로 흐르다 장사를 거쳐 동정호(洞庭湖)에 흘러든 뒤 다시 북으로 물길을 터 장강(長江)을 이른다.

상강을 닮아 악록서원도 천여년의 세월을 흘러오면서

숱한 인물을 낳고 품어 청사에 그 이름을 올린다.

 

 

호상학의 장식(張栻),

주자학의 주희(朱熹),

양명학의 왕수인(王守仁),

경세치용 실사구시의 왕부지(王夫之),

그들이 터 닦고 일궈 놓은 곳.

 

근대에 이르면 인물을 쏟아 부은듯하다.

위원, 중국번, 좌종당, 담사동, 양계초, 채화삼, 그리고 모택동.

 

이 내륙 깊은 초 땅에서 중국의 근대 역사는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한가운데 악록서원이 있다.

 

1) 악록서원의 건립

 

승려 지선(智璿)이 지금 악록서원의 땅에 처음으로 배움터를 연 것은 오대(五代) (958년 전후)이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이다. ‘천년학부(千年學府)’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니 빈말이 아니다. 976년 담주 태수 주동(周洞)이 확장하여 서원으로 만들고, 그 뒤 1001년 담주 태수 이윤칙(李允則)이 진종(眞宗) 황제에게 청하여 많은 책을 하사 받는다. 이후 악록서원은 총 7차에 걸쳐 황제로부터 편액과 책, , 돈을 받으면서 그 명성을 더 해간다.

1015년 악록서원 원장이던 주식(周式)의 덕행이 널리 알려져 진종 황제는 서울로 불러 국자감주부(國子監主簿)의 자리를 내렸으나 끝내 돌아갈 것을 청해 이를 받아들이고서 악록서원이라 사액하였다. 이후 악록서원의 명성은 천하에 퍼져 북송 4대서원의 기반을 닦는다.

1167년 복건(福建)의 주희(朱熹)(1130~1200)는 악록서원 원장으로 있던 장식(張栻)(1133~1180)을 한 달 가까이 걸려 찾아온다. 주희는 이곳에 두 달여 머물면서 이른바 주장회강(朱張會講)’이 이뤄진다. 여기에서 주희의 민학(閩學)(道南學)과 장식의 호상학(湖湘學)이 만나게 된다. 정이(程頤)(1033~1107)에게서 갈라진 성리학의 두 물줄기가 그 원류를 따라 합해지게 된 것이다. 뒷날 이를 기려 청() 건륭제(乾隆帝)도남정맥(道南正脈)’이란 네 글자를 악록서원에다 친히 써서 하사한다. 이로써 악록서원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게 되고 지금도 이 편액은 강당에 금빛을 내며 자랑처럼 버티어 그 기억을 전하고 있다.

주희는 장식이 죽은 뒤인 1194년 형호남로전운사지담주(形湖南路轉運使知潭州)의 벼슬을 받아 다시 담주 땅을 밟으며 강학을 통해 자신의 성리학을 널리 전파한다. 그 뒤 주희의 학을 이은 진덕수(眞德秀)(1178~1235)와 위료옹(魏了翁)(1178~1237)이 담주 지사로 와 강학하면서 주자학을 전파하는가 하면, 진부량(陳傅良)(1137~1203)은 자신의 사공학(事功學)을 강학을 통해 퍼트리기도 한다. 1314년 원의 오징(吳澄)(1249~1333)도 악록서원을 들러 그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양명학도 악록서원에 발을 딛는다. 1507년 왕수인(1472~1528)이 태감(太監) 유근(劉瑾)을 비판하다 귀주(貴州) 용장(龍場)의 역승(驛丞)으로 내쫓겨 가는 길에 악록서원을 들리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도 이곳을 들려 자신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가르친다. 이 심즉리설은 이른바 용장에서의 깨달음인 것이다. 양명학이 맨 처음 설파된 곳, 바로 양명학의 초전법륜(初轉法輪)’이 행해진 곳이라고나 할까. 뒷날 양명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나홍선(羅洪先)(1504~1564)이 또 이곳에 머무르면서 스승의 학을 전파하여 한때 양명학이 크게 일어나기도 한다. 마침내 명말청초에 이르러 악록서원의 이러한 풍부한 사상적 전통을 자양분으로 삼아 왕부지(王夫之)(1619~1692)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탄생한다.

 

왕부지 

악록서원의 위치가 실로 돋보이는 것은 비단 이러한 전통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악록서원은 뒤로 오면서 그 빛과 명성을 더하게 된다. 일찍이 서양에 관심을 기울여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쓴 위원(魏源)(1794~1857),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주도한 증국번(曾國藩)(1811~1872)과 좌종당(左宗棠)(1812~1885), 변법유신(變法維新)의 선봉에 섰던 담사동(譚嗣同)(1865~1898)과 양계초(梁啓超)(1873~1929)(時務學堂을 세움, 뒷날 악록서원에 병합), 오늘날 사회주의 중국을 만들어간 채화삼(蔡和森)(1882~1931)과 모택동(毛澤東)(1893~1976)이 모두 악록서원을 거쳐간다.

 

1903(광서29) 악록서원은 청말 유명한 경학자 왕선겸(王先謙)(1842~1917)을 마지막 원장으로 전국적인 근대 교육 제도 개혁에 따라 호남고등학당(湖南高等學堂)으로 개편되며, 호남고등사범학교(湖南高等師範學校)와 호남공립공업전문학교(湖南公立工業專門學校)로 바뀌었다가 1926년 성립 호남대학(湖南大學)으로 다시 1937년 국립 호남대학으로 된다. 이에 악록서원은 지금 호남대학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악록서원은 현재 독립 연구소로 인정받아 독자적으로 석사생을 배출하고 있다.

 

담사동 

 

악록서원은 천여 년의 시간 동안 크게 7차에 걸친 병화를 입고 그때마다 다시 지어진다. 지금 건물은 대부분 오삼계(吳三桂)등이 일이킨 삼번(三藩)의 난이후 청 강희제(康熙帝) 때 지어진 것으로 이후 2차에 걸친 병화를 거치면서 크게 수리한 것이다. 서원 건물은 맨 앞 두문(頭門)으로부터 중앙 일직선으로 혁희대(赫曦臺), 대문(大門), 이문(二門), 강당(講堂), 어서루(御書樓)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악록산 기슭에 지어졌기 때문에 뒤로 갈수록 높아진다. 그리고 정면에서 왼쪽과 오른쪽에 양 건물군이 있는데 모두 학생들의 숙사로 쓰였던 곳으로, 1903년 호남고등학당으로 개편되면서 크게 고쳐진뒤 각각 교학재(敎學齋)와 반학재(半學齋)로 불려지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좌묘우학(左廟右學)’(중심 건물인 어서각을 기준)의 구조에 따라 오른쪽 위, 어서각 옆에 염계사(燫溪祠), 숭도사(崇道祠) 등의 사묘(祠廟) 건축군이 있으며, 다시 그 오른쪽에는 문묘(文廟)가 있다. 그리고 중앙에서 왼쪽, 그러니까 교학재와 어서루 사이에는 비랑(碑廊)이 만들어져 있고 그밖으로 정자와 원림(園林)등이 조성되어 있다.

 

2) 악록서원 소개

(1) 천년학부

 

 

악록서원을 들어서다 보면 맨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천년학부(千年學府)’라는 현판이다. 지난 번 강서의 백록동서원을 들렸을 때 천년학부라는 현판 앞에서 느꼈던 역사적 위압감, 하지만 조금도 싫지 않았던 그 느낌의 기억이 다시금 생생히 떠오른다. 오대(五代)때 처음 배움의 터를 열고, 북송 때 이미 천하(天下)사대서원(四大書院)’으로 일컬어졌다 하니 그동안 천 년이란 세월이 흘렀나 보다. 천년학부네 글자는 당나라 때 이곳 출신의 저명한 서법가(書法家) 구양순(歐陽洵)(557~641)의 수적(手迹)을 집자(集字)한 것이다. 두문이 세워지고 이 현판이 걸린 것은 근년의 일이다.

 

두문을 들어서다 보면 양 기둥에 걸려 있는 대련(對聯)이 다시 방문객의 눈길을 끈다. “천여 년 초나라 땅 인재는 바로 이 악록서원에서 낳고 길러졌으며, 근세기 이곳에서 길러진 상학의 영광은 태양과 그 빛을 다툴 만하다.” 그렇다. 악록서원은 그냥 헛되이 천 년이란 시간을 흘러온 것이 아니다. 수많은 초 땅의 인재를 낳고 길러 천하의 인물로 만들어낸 곳이며, 그 번성함은 뒤로 갈수록 더하였다. 이제 천하 제일 서원이라는 명예를 악록서원에다 돌려주는게 마땅하지 않을까?

 

(2) 혁희대

 

두문을 들어서면 바로 혁희대(赫曦臺)가 나온다. 혁희대는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고 악록산 꼭대기 부근에 있었다. 여기에 처음 대를 세운 이는 장식(張栻)이고, ‘혁희라 이름 붙인 이는 주희(朱熹)이다. 악록서원 원장으로 있던 장식을 근 한달이나 걸려 찾아온 주희는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이른 아침이면 항상 그와 함께 낚시한 뒤 악록산 꼭대기에 올라 일출을 보았다고 전하니, 일출 때 눈앞에 펼쳐진 산과 강, 인과의 모습들이 아침마다 햇빛에 씻긴 듯 깨끗하고 생기발랄하여 붙인 이름이리라.

주희는 두달여 이곳에 머물면서 악록서원과 상강(湘江) 건너 맞은편에 있던 성남서원(城南書院)을 오가며 장식과 함께 성리설을 토론하고 강의한다. 이것이 이른바 역사적인 주장회강(朱張會講)’이며 이들의 강의를 들으러 학생들이 떼지어 모여든 상황을 역사는 도림삼백중(道林三百衆), 악록일천도(嶽麓一千徒)”란 말로 전하고 있다. 양시(楊時)와 나종언(羅宗彦), 이동(李侗)을 통해 이정(二程)의 성리학을 계승한 주희와 사량좌(謝良佐)와 호안국(胡安國), 호굉(胡宏)을 통해 이정의 성리학을 계상한 장식은 이때 큰 만남을 가진다. 흔히 이를 가지고 주희의 학설을 중화(中和) 구설(舊說)과 신설(新說)로 나누는데, 주희가 처음에는 장식의 견해에 동의하여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이 일어나기 전에는 달리 공부할 길이 없고, ‘선찰식(先察識), 후존양(後存養)’할 것을 따랐다가 뒷날 이를 버리고 스승 이동에게서 내려온 희노애락이 일어나기 전의 공부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후에도 두 사람간의 우정과 예의는 변함이 없었다. 장식의 제의에 따라 두 사람은 남악 형산을 유람한뒤 헤어지는데, 두 달여의 시간이 오히려 모자랄 정도였다. 이때 그들은 149수의 시를 지어 장식이 서를 쓰고 주희가 기()를 달아 ?남악창수집(南嶽唱酬集)?으로 남긴다.

 

 

지금의 자리에 대를 세운 이는 악록서원 원장으로 있던 나전(羅典)이며(1790), 1821년 원장 구양후균(歐陽厚均)이 주희가 쓴 혁희대비(赫曦臺碑)의 원적(原迹)을 발견한 뒤 이 대를 혁희대로 개명하였다. 지금 혁희대 위에는 지난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3수의 시가 큰 액자 속에 담긴 채 서 있다. 첫째 수가 주희와 장식이 화답하며 지은 악록산 혁희대에 올라연구(聯句)이고, 둘째 수는 왕수인의 혁희대를 바라보며이며, 셋째 수는 모택동의 벗 주세조에게 화답함이다.

 

(3) 악록서원 대문

 

혁희대를 돌아들면 악록서원(嶽麓書院)’이라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는 대문이 나온다. 이 대문은 송나라 때 처음 지어졌으며, 지금의 것은 1509년에 세워진 것이다. 대문 위에 걸려 있는 편액의 악록서원네 글자는 원래 송 진종(眞宗)의 어서(御書)였다.

 

진종 황제는 당시 주식(周式)이란 이가 도덕행의로 명성의 자자하자 불러 들여(1015) 국자감주부(國子監主簿)의 자리를 내리고 서울에 머물 것을 명하였으나 끝내 그가 머물고 있던 서원으로 되돌아갈 것을 고집하자 이를 윤허하고서 악록서원네 글자를 친히 써서 사액하였다. 원래의 이 편액은 항일전쟁 중 일본 비행기의 폭격에 의해 불타버렸고, 송 진종의 수적(手迹)에 따라 명나라 때 석각한 편액이 전해 오던 것을 1984년 복제하여 이곳에다 다시 걸었다

 

대문 양 기둥에는 초나라 땅 인재들이 이곳에서 번성하리라라는 내용의 대련이 걸려 있다. 악록서원의 사람 자랑은 그치질 않는다. 그래도 아무런 흉허물이 되지 않을지니! 이 대련은 원장 원명요(袁名曜)와 학생 장중계(張中階)가 지은 것이다. 청 가경(嘉慶) 연간에 서원을 크게 수리한 후 학생들이 원장 원명요에게 대련을 지을 것을 요청하자, 그가 유초유재(惟楚有材)’를 먼저 말하고 학생 중 장중계가 우사위성(于斯爲盛)’이라 응대하여 이뤄진 것이다. ‘유초유재?좌전?「양공 26수초유재(雖楚有材), 진실용지(晋實用之)”에서 따온것이고, ‘우사위성?논어?「태백당우지제(唐虞之際), 어사위성(於斯爲盛)”에서 따온 것이다.

 

(4) 이문

 

대문 뒤에 다시 이문(二門)이 이어진다. 대문 뒤편에는 원래 예전(禮殿)이 있었으나, 1527년 문묘를 확장해 지으면서 문을 세웠다. 항일전쟁 때 일본 비행기의 폭격에 의해 사라진 것을 일본인 학자 아즈마 시게지가 제공한 사진에 따라 1984년 중건하였다. 문 정면에는 명산단석(名山壇席)’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양기둥에는 납우대록(納于大麓), 장지명산(藏之名山)”이란 대련이 걸려있다. 그리고 이문 뒤쪽에는 소상괴시(瀟湘槐市)’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소상은 호남땅을 가리키고 괴시는 한나라 때 독서인들이 모이던 장소이고 보면, 악록서원은 곧 호남지방 학자와 선비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뜻이 되겠다.

 

 

(5) 강당

 

이문을 지나면 탁 트인 공간이 나오면서 정면에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편액을 내건 건물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강당이다. 서원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이 건물은 강의와 큰 행사가 치러지던 가장 중요한 곳이다. 이 건물은 오대 시기(958전후)지선(智璿)등 두 승려가 맨 처음 지은 것을 976년 담주(潭州) 태수(太守) 주동(朱洞)이 증축하였으며, 당시에는 성덕당(成德堂)’이라 불리다가 뒤에 정일당(靜一堂)’혹은 충효렴절당(忠孝廉節堂)’으로 불리었다. 기록에 의하면 8차에 걸쳐 다시 지어지고 30여 차에 걸쳐 수리를 했다고 한다. 지금 건물은 1687(淸 康熙26) 순무(巡撫) 정사공(丁思孔)이 중건한 것이다.

 

강당에는 세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맨 앞의 것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이고, 이어 학달성천(學達性天)’도남정맥(道南正脈)’순으로 걸려 있다. ‘실사구시 민국 초 호남공업전문학교 교장 빈보정이 지은 것인데, 1917년 호남공업전문학교가 악록서원에 귀속되면서 편액이 이곳에 걸리게 되었다. ‘실사구시라는 말은 ?한서?「하간헌왕유덕전(河間獻王劉德傳)에 있는 수학호고(修學好古),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연원을 두고 있지만 호남 지방 학문의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며, 특히 근대 중국의 교육지표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렇게 악록서원에 연원을 두고 있는 '실사구시라는 교육지표는 모택동과 등소평을 거치면서 지금은 온 중국의 학교를 뒤덮고 있다. 모택동도 젊은 시절 한때 이 뜰을 거닐었으리라 생각하며 다시금 그 편액을 쳐다보니 이미 조금 전 바라본 그것이 아니다.

학달성천도남정맥편액은 우선 보아도 예사롭지 않다. 온통 금빛이다. 악록서원의 영광을 말해 주는 듯하다. 먼저 학달성천편액은 1687년 청나라의 강희제(康熙帝)가 성리학에 대한 존숭을 나타내기 위하여 악록서원과 백록동서원, 그리고 성리학 창시자의 사당에다 몸소 써서 하사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지금도 금빛을 띠고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체현하여 천일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데에 배움의 목표가 있음을 말해주는 학달성천이란 말 속에는 성리철학의 핵심이 응축되어 있다. 원래 편액은 전란 중에 없어져 버렸고, 지금의 것은 1984년 강희제의 수적 가운데 집자하여 새로 만든 것이다.1743년 청의 건륭제(乾隆帝)는 다시 악록서원에다 성리학을 전한 공적을 기려 도남정맥이라는 편액을 내린다. ‘도남이란 말은 북송 시기 유명한 성리학자 정이(程頥)가 자신의 고족(高足) 제자중 한 사람인 양시(楊時)가 공부를 마친 뒤 고향인 남쪽으로 돌아가게 되자 나의 도가 남쪽으로 가는구나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그런데 양시의 성리학은 나종언(羅從彦)과 이동(李侗)을 거쳐 복건의 주희에게 전해져 성리학을 집대성하기에 이른다. 이를 흔히 민학(閩學) 혹은 도남학(道南學)이라 부른다. 한편 정이의 또 한 명의 고족 제자인 사량좌(謝良佐)는 스승의 학을 호남 형산(衡山)에 사는 호안국(胡安國)에 전하며, 이는 다시 그의 아들 호굉을 거쳐 장식에게 이른다. 흔히 이를 호상학(湖湘學)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호상학의 정맥이 흐르는 이 악록서원에다 왜 도남정맥이라 사액했을까? 주희가 두 차례 다녀가고, 그 뒤 주자학이 크게 번성한 때문일까? 아무래도 장식의 호상학에다 도남정맥이라는 명예를 준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의 편액은 원래 것이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이 편액을 마구 부수는 것을 본 어느 노인이 가져다 숨겨 놓았다가 뒤에 되돌려준 것이라 한다. 면면히 이어져 온 도는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강당 모습은 우리나라 서원과 다르다. 중국 서원은 대부분 벽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마루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서원 같으면 나무로 된 넓은 마루가 있을 법한데 이곳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 눈으로 보자면 좀더 현대적이다. 벽돌로 지어진 강당 가운데 조금 높게 강단이 마련되어 있고, 강단 뒷벽에는 녹산전도(鹿山全圖)가 석각되어 있다. 그 속에는 악록서원과 뒤로 악록산, 앞으로 상강과 장사포구의 모습까지 새겨져 있어 더 없이 친절하다. 돌에는 문자만 새길 줄 알았던 우리와 좋은 대비가 된다. 강당의 양쪽 벽에는 주희의 필적 충()()()()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고, 이밖에도 정제엄숙비(整齊嚴肅碑)와 악록서원학규비 등이 둘러쳐져 있다. 기둥 여덟 곳에는 대련이 걸려 있는데 좌종당(左宗棠), 풍우란(馮友蘭), 장대년(張岱年), 진영첩(陳榮捷) 등 귀에 익은 이름들이 보여 무척 반갑다. 잠시 그 강단 위에 섰을 사람들과 아래에서 그의 강의를 들었을 사람들을 그려본다. 앞에는 호랑이 같은 스승이 앉아 있고, 천장에는 금빛 찬란한 황제의 편액이 내리누르고, 옆에는 선현석학들의 말씀이 귓가에 쟁쟁하고. 그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의 교실 풍경은 너무 가벼워진 게 아닌지. 어차피 배움이란 본받고 따르는 것이 아니던가!

 

(6) 어서루

강당 뒷벽으로 난 문을 나서면 언덕 위에 어서루가 우뚝 서있다. 송 건축 스타일의 삼층 누각식 건물이다. 이곳은 교육, 제사와 더불어 서원의 3대 기능 중 하나인 책을 보관하던 곳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로 도서관이다. 계단을 걸어올라 어서루 앞에 서면 서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황제가 남면하고서 앉아 만조백관을 굽어보는 듯하다. 건물이 처음 지어진 것은 북송 때(999咸平 2)로 당시에는 서루(書樓)라고 불렀으며, 그 후 여러 차례 다시 짓고 이름도 장경각, 존경각 등으로 고쳐 불렀다. 1687년 순무 정사공이 조정에 청하여 책을 하사받고서 지금의 땅에서 어서루를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내려오다 1938년 일본 비행기의 폭격에 의해 만 4천 권에 달하는 책과 건물이 모두 불타 버렸다. 현존 건물은 1986년 이전 건물을 본 따 다시 지은 것이다.

 

(6) 사묘 건물군

 

어서루에 서서 내려다보면, 전통적인 좌묘우학(左廟右學)’의 배치에 따라 어서루 왼편에는 사묘 건물들이 있다. 먼저 성리학의 개창자 주돈이(周敦頥)(濂溪 1017~1073)를 제사 지내는 염계사(濂溪祠)가 맨 위에 있고, 그 아래로 주돈이를 이어 성리학의 기초를 놓은 정호(鄭澔)정이(程頥) 형제를 제사 지내는 사잠정(四箴亭), 이정의 학을 이은 주희와 장식을 제사 지내는 숭도사(崇道祠), 학술적으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지만 서원에 공적이 많은 이를 제사 지내는 육군자당(六君子堂), 그리고 이곳에서 공부한 명말청초의 대 철학자 왕부지(王夫之)(船山, 1017~1073)를 제사 지내는 선산사(船山祠)가 있다. 악록서원에서 제사가 가장 성했을 때는 청 가경(嘉慶) 후기로, 각종 사묘 건축이 30개 가까이 되고 제사 인물 수가 많게는 100인에 달하여 전국 서원 가운데서 가장 많았다고 한다. 문틈을 비집고 사묘 안을 들여다보니 제사가 끊긴 지는 이미 오래된 것 같다. 그래도 우리나라 서원은 제사는 열심히 지내는데 말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서원이 애물단지나 구경거리 신세로 전락한 것은 마찬가지이니 더하고 덜할 것 하나 없다. 그나마 선산사(船山祠) 건물이 호남대학 출판부 건물로 쓰이고 있어 좀 나을 법도 하지만 이 방문객의 씁쓰레함을 덜어 주지는 못하였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 악록서원에는 주향하는 인물이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처럼 퇴계 선생의 도산서원과 같은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만큼 중국 서원은 사학으로서의 특징이 약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설립이나 운영 주체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사학으로서 서원이 가지는 독특한 역사적 지위가 그만큼 약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 서원은 관학의 보조적 역할을 많이 하였으며, 쉽게 관학에 통합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처럼 어느 한 선현의 체취를 강하게 느끼면서 그를 배우고 본받아 하나의 학파와 학맥으로 전승되는 데서 오는 은 중국 서원에서는 찾기 어렵다. 악록서원도 예외가 아니다. 더욱이 악록서원 안에는 공자를 모시는 문묘가 있어 서원의 맛을 크게 해치고 있다. 한국의 경우 공자는 관학인 성균관과 향교에서만 받들지 사학인 서원에서는 제사 지내지 않는다.

 

(7) 문묘

 

문묘는 사묘 건물들 뒤쪽에 있다. 서원 정면에서 보면 오른쪽 끝 부분이다. 문묘는 원래 공묘라 불렀는데, 739년 당 현종이 공자를 문선왕이라 봉하면서 공묘가 문선왕묘가 되었고, 이를 줄여 문묘(文廟)라고 부르게 되었다. 악록서원에서 공자를 제사 지낸 것은 서원 설립 초기부터이다. 일찍이 북송 시기에 이미 예전(禮殿)을 짓고 그 안에 선사(先師) 10철의 상을 조각하고 72현의 모습을 그려 봉안하였다. 명나라 때인 1505년 대성전이라 고쳐 부르고, 150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청나라 때인 1624년 중수한 뒤 정식으로 문묘라고 불렀다. 지금 문묘 안에는 대성전 이외에 양무(兩廡)와 대성문, 석패루(石牌樓)등이 있다.

 

대문과 이문을 거쳐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는 강당이 있고 좌우 양쪽으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바로 학생들의 숙사인 교학재와 반학재이다. 이 재사 건물은 서원 시작 때 이미 지어진 뒤 여러 차례 다시 지어지면서 확장되었다. 현존 건물은 1853년 원장 정선경(丁善慶)이 새로 지은 뒤, 1903년 서원을 근대식 학교로 개편할 때 고쳐 지은 것으로 이때 비로소 교학재와 반학재라 부르기 시작했다.

 

(8) 비랑

 

교학재와 반학재에서 어서루로 걸어 올라가는 계단에는 비랑(碑廊)이 서 있다. 이 비랑은 1992년에 세운 것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온 비각이 13, 악록서원 문헌사료 비각 27, 별비 1개로 꾸며져 있다. 대대로 전해오는 유명한 비각 중에는 당나라 때 새긴 녹산사비(麓山寺碑), 명나라 때 새긴 정자사잠비(程子四箴碑), 청나라 때 새긴 충효염절비(忠孝廉節碑), 도중용비(道中庸碑), 주희시비(朱熹詩碑) 등이 있다. 그리고 교학재와 어서루 사이의 비랑 바깥쪽에는 멋스런 정자를 짓고 그 둘레에다 원림을 꾸며놓아 당시 선비학자들의 일상생활과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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