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27. 13:36ㆍ성리학(선비들)
최치원
崔致遠
출생 | 857년 |
---|---|
사망 | 미상 |
신라 시대의 학자. 경주 최씨의 시조.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이다.
879년 황소의 난 때 고변의 종사관으로서 〈토황소격문〉의 기초를 작성해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94년 문란한 국정을 통탄해 하며 시무책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상소하고, 그 후 유랑하다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공부의 신
최치원은 경주 최씨의 시조로 신라의 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신라 말 ‘세 사람의 최씨’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릴 정도로 문장을 인정받았다. 특히 879년 황소(黃巢)의 난 때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의 기초를 작성해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최치원의 집안은 귀족 출신은 아니었다. 오히려 6두품으로 신라에서는 출세에 한계가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신라를 대표하는 학자를 많이 배출한 가문이었다. 아버지 최견일(崔肩逸)에 대해서 자세하게 전해지는 것은 없지만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은 열두 살이던 868년(경문왕 8)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당시 당나라는 친당파를 키워 당의 문물을 전파하기 위해 주변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인에게도 과거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했다. 최치원도 일종의 국비유학생으로 뽑혀 당나라로 가게 된 것이었다. 그가 당으로 갈 때 아버지는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않겠다.”라며 엄한 훈계를 내렸다고 한다. 최치원은 유학 7년 만에 예부시랑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했다.
과거에 합격한 최치원은 2년간 뤄양을 돌아다니며 시를 짓는 데 몰두했다. 그때 그가 쓴 작품이 《금체시(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雜詩賦)》 30수 1권 등이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지은 글을 추려 모은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 5권도 전한다.
최치원은 소도시의 현위로 만족하기에는 재능이 지나치게 뛰어났다. 그는 곧 고위 관리 시험에 도전하기로 하고 현위직을 그만뒀다. 하지만 수입이 끊긴 외국인이 고위 관리 시험을 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그는 이위(李蔚)의 문객(門客)이 되었고, 곧이어 회남 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 되었다. 당시 당나라는 수재와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한 상태였다. 왕선지에 이어 879년 황소가 난을 일으키자 최치원을 관역순관에 천거했던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으로서 난을 진압하게 되었다. 최치원은 자연스럽게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서기를 맡게 되었다.
이후 4년 동안 최치원은 고변의 군막에서 지내며 표(表), 장(狀), 서계(書啓), 격문(檄文)을 지었다. 그리고 879년에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으로 도통순관에 임명되었고 포상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까지 하사받았다. 문관으로서 그 자질을 황제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재직한 4년간 최치원이 지은 글은 1만 수가 넘었다. 특히 황소의 난에 부쳐 쓴 〈토황소격문〉은 명문으로 이름을 날리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계원필경(桂苑筆耕)》은 최치원이 귀국해 고변의 종사관 시절 지은 각종 글을 추려 모아 헌강왕에게 올린 것이다.
최치원의 글재주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그가 쓴 글의 목록이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당서》 〈열전〉에는 최치원의 전기가 빠져 있는데, 이는 당나라 사람들이 그의 문장을 질투했기 때문이라는 해석까지 나올 정도이다. 최치원은 이렇게 당에 머무는 17년 동안 고운(顧雲), 나은(羅隱) 등 이름 높은 문인들과 사귀면서 재주를 더욱 키웠다.
최치원이 귀국을 결심한 것은 그가 모시던 고변의 변화 때문이다. 고변이 본연의 업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신선이 되기를 바라며 도교 사원을 짓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이국 생활에 지쳐 있던 최치원은 당나라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885년(헌강왕 11), 그의 나이 29세였다. 헌강왕은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에 임명했다. 이듬해 최치원은 왕명에 따라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 같은 명문을 지었고, 당에서 쓴 글을 모아 국왕에게 헌정했다.
하지만 신라는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방의 호족이 득세하면서 왕권이 약해졌고, 재정도 바닥나다시피 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을 정도이다. 결국 최치원은 894년 시무책 10조를 지어 진성여왕에게 상소했다. 문란한 국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직언한 것이다. 이 일로 최치원은 6두품 최고의 관직인 아찬에 올랐지만 진성여왕의 개혁 의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듬해 최치원은 내란 시기에 사찰을 지키다가 전몰한 승병을 위해 해인사의 공양탑 기문(記文)을 지었다. 이 기문에서 최치원은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 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하여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흩어져 있다.”라며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묘사했다.
진성여왕이 문란한 정치 상황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선양하자 최치원은 신라 왕실에 실망을 느끼고 관직을 버렸다. 이후 경주의 남산,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合浦縣, 지금의 창원)의 별서 등 전국을 떠돌다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무리했다.
그가 쓴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화랑도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준다. 훗날 김부식은 《삼국사기》 권4, 진흥왕 37년 조에 최치원의 〈난랑비서〉를 인용해 후대에 남겼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이른다. 교를 설치한 기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실로 3교를 포함하여 뭇 중생을 접촉하여 감화시켰다.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아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주지(主旨) 그대로이며, 무위로 세상일을 처리하고 말없는 가르침으로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 그대로이며,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함은 석가모니의 교화와 같은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화랑도를 풍류로 일컫고, 유교·불교·도교의 3교를 포함해 중생을 교화하는 것임을 설명한 것이다.
최치원은 또한 신라왕을 칭하던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을 《제왕연대록》에서 모두 왕으로 바꿔 표기했다. 정월 보름에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먹이던 신라의 풍습을 통해 삼국의 관계를 풀이한 문장도 남겨 후대의 역사 연구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신라 고유의 풍속을 당나라 풍으로 바꾼 것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최치원은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창후(文昌侯)이다.
'성리학(선비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관尹瓘 (0) | 2018.04.27 |
---|---|
김생 金生 (0) | 2018.04.27 |
[스크랩] 예송논쟁의 의의 (0) | 2017.11.28 |
[스크랩] 선조 4. 송강 정철의 건저의 사건(1591년) (0) | 2017.11.28 |
[스크랩] 선조 3. 기축옥사와 호남사림(下)(1589~91년) (0) | 2017.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