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28. 11:21ㆍ성리학(선비들)
예송논쟁의 의의
1. 논쟁의 배경
태극기 vs 한반도기
17대 대선을 한 해 앞뒀던 2006년, 모 유명 뉴라이트 논객은 다음 대선이 '태극기 대 한반도기의 대결'이 되리라 전망했다.
태극기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보수 세력을, 한반도기가 남북 긴장 완화를 중시하는 진보 세력을 상징한단 건 긴 설명 없이도 알 만하다. 기호와 상징이 언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크다. 그 언어 체계 안의 사람들은 상징을 통해 별 무리없이 행간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달리 보면 체계 밖의 사람들은 쉽사리 알기 어렵단 뜻도 된다. 남북한 현대사에 어두운 외국인이라면 색깔과 문양이 다른 천 조각들로 정치적·이념적 피아를 가르려는 발상에 어이없어 할지도 모른다.
3년복 vs 1년복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임금이 죽었는데 죽은 임금의 어머니는 살아 있었다.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위해 상복을 입었다. 여기서 '상복을 3년 입는 게 옳은가, 1년 입는 게 옳은가'의 논쟁이 일었다. 그냥 논쟁이 아닌 정권 교체가 수반된 정치 투쟁이었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상복을 입는 기간이 뭐가 그리 중요하기에 정권까지 왔다갔다했는지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관점에서 3년복이냐 1년복이냐는 지금의 태극기냐 한반도기냐의 차이만큼 중요하다.
3년이냐 1년이냐로 왕권이 갖는 위상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효종
죽은 임금은 조선 17대 왕 효종(재위 1649~59년)이다. 한창나이인 41살이었다.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 손에 죽은 맏형 소현세자 대신 임금이 됐다. 그 무렵 조선 왕실의 사정은 결코 편치 못했다. 아버지 인조는 쿠데타로 광해군을 밀어내고 왕좌에 앉은 인물이다. 광해군의 명·청 중립 외교와는 달리 인조는 일방적인 친명 노선을 취했고, 그 결과 정묘·병자호란을 맞았다. 패전은 참담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 두 아들 내외는 청나라에 인질로 가야 했다. 인질 생활은 9년 가까이 이어졌다. 갖은 고생 끝에 귀향한 세자를, 아버지 인조는 청나라의 첩자가 된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귀향 두 달 만에 세자는 독살되고 며느리는 처형됐다. 손자 셋은 제주도에 유폐됐다. 그중 둘은 어려서 죽었다.
백성들은 전쟁에서 지고 가족 간 살륙이 벌어진 왕실을 존경하지 않았다.
인자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아버지의 묘호를 인조仁祖라 떠받든, 효자의 묘호는 효종孝宗이 됐다.
[효종릉 영릉寧陵, 효종과 비 인성왕후 장씨의 무덤이다]
서인과 남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귀족 세력이 강해지는 법이다. 조선의 귀족은 사대부다. 조선 사대부는 크게 경기·충청에 기반을 둔 세력과 영남에 거점을 둔 세력으로 나뉜다. 경기·충청 사대부는 서인이라 불렸고 영남 사대부는 남인이라 불렸다. 서인의 시조는 오늘날 5000원권의 주인공인 율곡 이이다. 남인의 시조는 1000원권의 주인공 퇴계 이황이다. 5000원과 1000원이란 금액 차이는 양대 정파 간 힘의 차이기도 했다. 집권 세력인 쪽은 대개 서인이었다. 남인은 만년야당 신세였다.
사대부 안에서도 힘 있는 주도세력이었던 서인西人은 왕권 견제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반면 세가 약했던 남인南人은 왕실을 지지함으로서 서인을 견제코자 했다.
왕권을 대하는 시각은 두 정파 간 학풍 차이에서도 기인한다. 서인의 학풍은 유학의 세부 갈래 중 주희(주자)가 제창한 성리학性理學을 따랐다. 그런데 주자가 살았던 12세기 북-남송 교체기는 거란·여진족 등 외세의 침입으로 황제가 둘씩이나 포로가 되는(정강의변, 1126년) 등 한족漢族이 일방적으로 밀리던 시기였다. 주자는 황제 1인의 능력으론 이 난국을 타개하기 어렵다고 보아, 재상이 중심이 된 집단 지도 체제를 선호했다. 즉 황제는 군림하되 통치는 사대부가 맡는 권력 구조가 성리학의 이상적 정치관이며 서인의 노선이다.
반면 남인의 학풍은 기본적으론 성리학을 따랐지만 공자·맹자 때부터 내려온 원시유학(공맹학)과도 가까웠다. 공·맹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 역시 주자의 송나라처럼 난세이긴 했으나, 그 원인은 외침이 아닌 내전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맹자의 관심은 내전 종식에 맞춰졌고 약해진 중앙 왕실을 내전의 원인으로 진단했다. 곧 강력한 군주가 나라의 중심에 서는 권력 구조가 원시유학의 이상적 정치관이며 남인의 노선이다. 철학자가 살았던 시대의 차이가 그대로 정치관·권력관의 차이로 이어진 걸 볼 수 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맏아들
유교 예법에서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3년상을 치른다. 오늘날에도 3일상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럼 자식이 부모에 앞서 죽으면 부모는 몇년상을 치를까? 부모가 자식상을 몇 년씩이나 치르냐는 반문도 있겠지만, 답은 1년상이다. 유교의 시조 공자 이래 원칙이다. 고려 때도, 조선 때도 1년상을 치뤘다. 명나라의 <대명률>을 배껴 만든 조선 최고법전 <경국대전>도 1년상을 규정하고 있다. 9대 왕 성종의 상 때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죽은 아들을 위해 1년상을 치른 바 있다.
그런데 1년상 원칙은 조선 후기로 오면서 조금 변형된다. 자식 중 맏아들과 맏아들이 아닌 자에 대한 대우를 달리하면서부터다. 조선은 임진·병자년의 혼란을 겪으며 지배층의 권위가 흔들리는데, 사대부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교를 보수화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한다. 이런 움직임은 사회적으로 양반과 상민 간 차별, 적자와 서자 간 차별, 남자와 여자 간 차별의 심화로 나타난다. 유산 상속이 조선 중기까지의 '자녀 균분상속'에서 '장자 단독상속'으로 바뀐 게 대표적인 예다.
장자 단독상속은 동양의 유교 문화권에서도 한국에서만, 그것도 조선 후기에만 보이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중국에선 자녀 균분상속이 흔들린 적이 없다. 일본의 경우 단독상속인 건 우리와 같으나 상속권자를 맏아들로 특정하진 않는다. 가문을 이을 능력만 입증한다면 둘째나 셋째 아들 등도 무방하다. 친자 중 쓸만한 이가 없다면 양자를 들이기도 한다. 딸은 안 되지만 사위는 상속권자가 될 수 있다. 양자의 경우에 준해 처가의 성씨로 바꾸면 된다. 그러나 조선 사대부들은 가문 재산의 분산 방지 및 승계의 정통성 제고를 위해 맏아들의 상속권만 인정했다. 3국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상속 형태라 하겠다.
장자長子 단독상속은 맏아들의 집안 내 위상을 아버지, 어머니에 준하게 끌어올린다. 독점적으로 제사를 모실 신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부모상 때 자식이 3년상을 치르는 것처럼 '맏아들의 상에 한해' 부모 역시 3년상을 치르도록 원칙을 변형시켰다.
2. 예송논쟁
왕이 된 효종은 둘째인가, 첫째인가
다시 효종의 상으로 이야기를 돌려 보자. 효종의 어머니 자의대비는 소현세자의 상 때 이미 3년상을 치른 상황이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맏아들이니까.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니 조선 후기에 바뀐 예법으로도 1년상이다. 맏아들과 맏아들이 아닌 자를 달리 대하지 않던 조선 전기에 제정된 <경국대전> 규정으로도 1년상이다. 앞서 언급했듯 전례도 있다. 성종의 상 때 성종의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위해 1년상을 치른 것이다. 성종은 덕종(추존왕)의 둘째 아들이다. 이것저것 살펴봐도 문제될 게 없다.
집권여당 서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우암 송시열의 생각도 그랬다. 송시열은 산림으로 죽은 효종의 스승이기도 하다. 산림山林이란 유교 국가에서 사상적 최고지도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불교 국가의 왕사나 국사, 기독교 국가의 추기경 정도로 보면 된다. 국가 최고 석학의 의견도 그러하니, 별다른 논란 없이 1년상으로 가는 듯했다.
그런데 '효종 1년상'은 뜻밖에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당시엔 맏아들 3년상이 일반화돼 하다못해 여염집 맏아들이 죽어도 3년상을 받았다. 효종이 1년상을 받으면 명색이 한 나라 임금의 상인데 여염집 자식이 받는 예우보다 못한 꼴이 된다. 생전 효종은 스승 송시열을 언제나 극진히 예우했었다. 그랬던 제자의 가는 길을 스승으로서 너무 야박하게 치르려는 게 아니냐는 비난이 일었다.
더구나 효종의 조카이자 소현세자의 3남인 경안군이 살아있단 게 은연중 사람들의 마음을 짓눌렀다. 경안군은 할아버지 인조의 피 묻은 손에서 조용히 살아남아 이제 16살이 된 참이었다. 효종이 1년상을 받는단 건 그가 둘째 아들 출신이란 걸 새삼 상기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14년 전 억울하게 죽은 맏아들 부부의 자식이 살아있다. 세상은 왕좌의 주인을 누구라 생각할까, 왕실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인조·자의대비 ┌ 소현세자·민회빈 강씨 - 경안군(3남)
└ 효종 ·인성왕후 장씨 - 현종
왕가의 예법과 사대부가의 예법은 같아야 할까, 달라야 할까
야당이던 남인의 반론이 시작됐다.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인 건 사실이나 왕위를 이었다면 둘째 아들이란 흠결은 해소된 걸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보통의 사대부 집안이라면 둘째 신분으로 가문을 이어도 큰 무리가 없으나, 왕실에선 둘째가 이으면 잇는 순간 흠결 없는 첫째로 간주돼야 한다는 논리다. 다른 집안도 아닌 왕실에서 정통성 시비가 일면 치뤄야 할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 최악의 경우 쿠데타까지 맞을 수 있다. 왕실의 특수성을 감안해 효종을 첫째로 간주하고 3년상으로 하자, 고산 윤선도의 이론이다. <어부사시사> 등 중·고교 국어 교과서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그 윤선도다. 윤선도 역시 효종의 스승이었다.
남인의 논리 전개에 상당수 서인들이 공감했다. 왕조국가에서 왕실 문제는 한수 접어주려는 게 대다수 신하들의 생각이다. 국민주권 국가인 민국民國에서 국회의원들이 국민들 뜻에 거스르려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왕국王國은 군주주권 국가다. 대리인이 주권자에게 잘 보이려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산림 송시열은 누구 눈치를 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더구나 윤선도와의 사이도 가히 좋지 않았다. 남인의 주장에 코웃음 쳤다. 왕이 됐다고 둘째가 첫째 되는 그런 개족보가 어디 있는가. 윤선도는 왕실의 특수성을 운운하는데, 왕가의 예법이 사대부가의 예법과 달라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송시열이 요지부동이자 서인도 당론을 1년상으로 확정하고 만다.
[고산 윤선도]
대통령 vs 총리
서인과 남인의 충돌 지점은 효종을 그대로 둘째로 보느냐(그래서 1년상), 왕위를 이었기에 첫째로 보느냐(그러면 3년상)에 있다.
그 뿌리엔 왕실을 보는 두 정파의 완전히 다른 시각차가 깔려 있다. 송시열의 도무지 왕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저 태도는 신하 중심의 정치를 추구하는 성리학과 서인의 권력관이기도 하다. 서인에게 왕실은 기본적으로 '제1 사대부'였다. 왕가는 사대부가와 격이 완전히 다른 게 아닌, 단지 여러 사대부 가문들 중 서열 1위란 뜻이다. 그렇기에 왕가의 예법과 사대부가의 예법을 구분할 수도, 구분해서도 안 됐다.
'귀족과 구분되는 왕 자체'가 아닌 '제1 귀족'이라면 왕의 권력은 크게 축소된다. 비유컨대 오늘날 대통령제의 대통령과 의원내각제의 총리만큼 차이가 크다. 대선으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총선으로 뽑히는 의원들과는 '그 출신'이 다르다. 아무리 영향력 있는 의원이라도 대통령을 대신할 순 없다. 하지만 의원내각제의 총리는 다르다. 총리는 어디까지나 총선에서 뽑힌 의원 신분일 뿐이며, 의원들 간의 호선으로 총리가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곧 의원내각제의 총리는 '제1 의원'이며 동료 의원들에 의해 언제든 교체될 수 있다. 이웃나라 일본의 총리가 좋은 예다.
서인은 왕을 '제1 사대부'로 봤다. 왕은 특별하지 않다. 의원내각제의 총리와 비슷하다.
남인은 왕을 '사대부와 구분되는 왕 자체'로 봤다. 왕은 특별하다. 대통령제의 대통령과 비슷하다.
왕실을 대하는 이런 시각차는 역사상 곳곳에서 나타난다. 가령 로마제국은 초대 아우구스투스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까지 황제를 '프린켑스'(princeps, 로마 시민 중 제1인자)라 불렀다. 제정 초기엔 황제에 반감을 보이던 공화파가 적잖았고, 제위에 오르려면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승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로마제국 정체를 '공화정 형식의 원수정'이라 한다. 내용상은 독재정이지만, 형식적으론 로마 공화정의 전통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이런 명칭이 붙은 것이다. 이땐 적어도 황제의 형식상 신분은 '시민'이었다.
하지만 3세기 중반 군인 황제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황실의 권력은 비대해졌고 원로원은 유명무실해졌다. 이를 반영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부터 황제의 호칭은 '도미누스'(dominus, 주인님)로 바뀐다. 이후의 로마제국 정체를 '동방적 전제군주정'이라 부른다. 황제는 이제 형식상으로도 시민이 아닌 '황제 자체'가 된 것이다.
3. 논쟁의 경과
뒤집어진 결과
예송논쟁은 현종 원년(1659년)의 1차예송과 현종 15년(1674년)의 2차예송 두 차례 있었다. 현종은 효종의 외아들이다. 왕위에 오를 무렵 현종은 불과 19살의 풋내기였던지라 송시열이나 윤선도 등 당대의 석학들이 벌이는 예법 논쟁을 이해할 수도, 관여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현종 원년의 1차예송은 집권여당인 서인의 당론대로 효종 1년상으로 치뤄졌다.
그대로 잊혀지는 듯했던 상복 논쟁은 불행히도 15년 뒤 재현됐다. 이번엔 인성왕후 장씨(효종의 부인, 현종의 어머니)가 죽은 것이다. 곤란한 건 시어머니인 자의대비(효종의 어머니, 현종에겐 할머니)가 아직도 살아있어 또다시 아들 내외의 상복을 입어야 할 처지가 됐단 데 있었다.
늙은이의 명줄이 길구나 여길 수도 있지만, 자의대비는 실은 인조의 두번째 아내로 아들인 효종 내외보다 대여섯 살이나 어렸기에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왕실엔 가급적 많은 자손이 필요하여 왕의 새장가는 어린 여자와 하는 게 관례인지라 새 왕비가 왕자들보다 어린 경우는 흔했다.
[우암 송시열]
며느리 상은 아들 상의 완벽한 반복이 됐다. 효종을 둘째로 보느냐 첫째로 보느냐 시각차가 효종비를 둘째 며느리로 보느냐(9개월상) 첫째 며느리로 보느냐(1년상)로 연결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현종이 더는 풋내기가 아닌 임금 노릇을 15년이나 한 34살의 정치가가 됐단 점이다. 현종은 왕가를 사대부가와 다를 바 없이 여기는 집권여당의 분위기를 탐탁찮아 했다.
1차예송이 서인과 남인의 싸움이었다면 이번엔 서인과 임금 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서인으로선 효종비의 상을 1년으로 허용하면 15년 전의 결정도 동시에 번복해야 했기에 끝내 동의해 주지 않았다. 특히 송시열은 요지부동이었다. 서인 중 일부가 임금 편을 들었지만 주류 대부분은 송시열의 제자들이었다. 결국 집권여당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현종은 군주 직권으로 '효종비 1년상'을 선포해 버린다. 15년 전 남인의 이론이 이번엔 승리한 것이다. 강력히 반발한 서인들은 모조리 처벌됐고, 야당이던 남인이 자연스레 집권하게 된다. 인조반정 이후 51년 만의 정권 교체였다.
예송의 의의
예송논쟁은 당쟁과 관련된 사건 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판을 들었던 주제다. 그중 대표적인 게 비열한 권력 투쟁이었단 시선이다. 권력 투쟁은 분명 비열한 면이 있고 예송논쟁이라고 다르진 않다. 하지만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권력 투쟁은 있었다. 굳이 조선의 경우만 비판할 이유는 없다. 더구나 조선의 사대부는 권력 투쟁도 붓으로 했기에, 칼로 투쟁했던 중세 유럽의 기사나 일본의 사무라이와는 달리 피를 부르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설령 패자가 처형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어디까지나 지배층에 국한된 얘기였을 뿐, 반란 등 대규모 내전으로 국민 전체가 화를 입는 일은 결코 없었다. 조선이 철저한 문민 지배를 실현시켰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민중의 삶, 더 정확히 민생과 괴리된 정치 투쟁이었단 비판도 많다. 예송논쟁이 민생과 관련 없단 지적 자체는 옳다. 민생은 분명 매우 중요한 국가적 책무란 점도 맞다. 하지만 국가의 모든 대소사가 민생과 관련된 일이여만 하는 건 아니며, 다른 중요한 사안도 많다. 이를테면 이 글의 서두에 나온 태극기와 한반도기 논쟁 같은 게 그렇다. 국가 정체성 문제는 국민들 살림살이와 별 관련 없지만 분명 중요한 문제다. 광복절을 기억하고 기리는 게 당장 오늘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 없다 하여 광복절이 중요하지 않다는 근거가 될 순 없다.
예송논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권력을 주권자인 국민의 손에 두느냐 정치 엘리트들의 손에 두는냐'의 투쟁이다. 강력한 신하들을 견제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왕들의 모습은 대통령직선·지방자치·주민소환 등 정치 엘리트를 감시하는 수단을 하나라도 더 확보하려 노력하는 국민들 모습과 닮아 있다.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반한 정당이 권력을 잃듯 주권자인 왕의 뜻에 반한 붕당이 권력을 잃었단 점도 상통한다. 그렇기에 예송을 정파 간 소모전이나 하릴없는 말장난 정도로 여기는 시각은 공부가 부족한 것이다. 예송논쟁은 국교인 유교 이념에 근거한 학술 논쟁이었으며, 국가 권력은 누구의 것인지 치열히 고민했던 정당한 권력 투쟁이었다.
written by 하교길가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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