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선조 4. 송강 정철의 건저의 사건(1591년)

2017. 11. 28. 11:13성리학(선비들)

 

4. 송강 정철의 왕세자 책봉건의(건저의建儲議 사건(1591년(선조24))

 

 

       동인(경상右도 영남사림파): 내암 정인홍 / (화담학파) 아계 이산해, 이경전

여당 ┤

      동인(경상左도 영남사림파):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우성전

 

야당 - 서인(기호사림파): 우계 성혼, 송강 정철, 오음 윤두수, 월정 윤근수



1. 서문


4편 송강 정철의 왕세자 책봉 건의(건저의建儲議) 사건은 2~3편 기축옥사(정여립 역모사건)가 종결돼 가던 1591년(선조24) 무렵의 일이다. 그런고로 2~3편에서 나왔던 영남사림파 및 기호사림파의 주요 지도자들이 거의 다시 등장한다. 아직 기축옥사에 따른 충격파가 가시기 전이었던지라 옥사의 위관(委官, 최고수사관)이었던 송강 정철을 바라보는 아계 이산해의 시선도 좋을 리 없었다. 아계 이산해의 생각에 기축옥사는 기호사림파에 의해 창작된 정치 모략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아계 이산해 역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목적은 당연히 송강 정철를 위시로 한 기호사림파 제거였다.



2. 왕세자 책봉건의(건저의建儲議) 문제


이미 1편에서부터 지적돼 왔듯 14대 선조는 조선왕조 최초의 방계승통(傍系承統, 아들없는 임금의 후사로 들어가 代를 이음) 사례였다. 13대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명종의 사랑을 받던, 11대 중종의 庶손자요 명종에겐 조카가 되는 16살 된 하성군(선조)이 후계자로 내정된 것이다.


정통성이 부족한 지도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선조 역시 집권 기간 내내 왕권 강화에 절치부심했다. 어쩌면 기축옥사(정여립 역모사건)는 선조의 왕권 강화에 대한 강박감에 의해 확대됐다고도 볼 수 있다. 선조가 볼 때 정여립과 그에 동조한 일부 화담학파(서경덕의 제자), 남명학파(조식의 제자) 학자들의 사상은 지극히 불온했고 결코 좌시될 수 없는 불충이었던 것이다.

 

선조는 1567년 즉위 이래 영남사림파를 대거 등용하면서 기호 세력을 견제했고 이것이 동·서인 분당 및 정권 교체(1575년(선조8))로 이어졌다. 그런데 중 영남-기호사림파 간의 조정역을 자청했던 율곡 이이가 세상을 떠난 뒤(1584년)부턴 영남사림파의 정치적 기세가 지나치게 높아진 감이 있었다. 정여립은 이런 기세등등한 분위기 하에서 나온 이단아라 할 수 있다. 선조로선 역으로 야당인 기호사림파를 일부 등용하면서 여당인 영남사림파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화담·남명학파가 집권여당과 연결돼 있었던 점은 옥사 과정에서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왕위 승계 방식과 관련된 역모 사건이 끝난 직후였던 분위기 탓도 있고 하여 왕세자 책봉 문제가 정국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에게 아직 후사가 없단 데 있었다. 의인왕후 박씨는 불임이었던 관계로 끝내 후사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후궁들 소생의 왕자들은 무섭게 자라고 있었다. 선조는 후궁들과의 사이에서만 13남 10녀를 둘 정도로 자녀들이 많았다. 많고도 많은 왕자들 간에 후계 경쟁이라도 시작된다면 장차 정국 안정에 걸림돌이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했다.


자고로 권력의 미래가 불안하면 모든 나랏일이 풀리지 않는 법. 조정의 주요 관료들로선 미연에 방지하는 게 급선무였다. 당시 조정 중론은 물론 백성들 분위기 역시 공빈 김씨 소생의 17살 된 2남 광해군에게 기울어 있었다. 공빈 김씨 소생의 18살 된 1남 임해군도 있었으나 성격이 난폭하여 민심을 잃는 바람에 후계 경쟁에선 일치감치 밀려나 있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선조의 의중이었다.


선조는 남모르게 여러 후궁들 중에서도 가장 총애했던 인빈 김씨 소생의 11살 된 4남 신성군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인빈 김씨 소생의 3남 의안군은 일찍이 요절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계 이산해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다른 관료들이 이 비밀을 감지하지 못했단 걸 무기 삼아, 모종의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3. 아계 이산해, 음모를 꾸미다


어느 날 아계 이산해(영의정)는 송강 정철(좌의정), 서애 유성룡(우의정) 등과 의정부議政府에 모였다. 논의의 주제는 정국의 당면 현안이었던 왕세자 책봉 문제였다. 일단 선조에게 왕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한단 데 의견이 일치됐다. 서애 유성룡이 왕세자 후보로 여론대로 2남 광해군을 거론했고 아계 이산해와 송강 정철의 뜻도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의정부의 뜻이 하나로 모이자 다음 경연(經筵, 오늘날의 국무회의)에서 3정승이 함께 건의하자며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3정승 간 합의가 있자 아계 이산해의 정치 공작이 시작됐다. 아들 이경전을 인빈 김씨의 오빠인 김공량에게 보내 송강 정철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추대한 뒤 장차 인빈김씨, 신성군 모자를 제거하려 한다며 무고한 것이다.


놀란 김공량은 궁궐로 달려가 인빈 김씨에게 이 소식을 고했고 인빈 김씨 역시 선조에게 달려가 모자를 살려달라며 울기 시작했다. 아닌 밤 중에 홍두깨 같은 일을 당한 선조는 난감해 하면서도 송강 정철이 그런 일을 꾸밀 리 없다며 인빈 김씨를 달래주었다. 하지만 선조 역시 가슴 한켠에서 의혹이 일기 시작했다.

                   [아계 이산해]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을 건의코자 3정승이 합의한 경연 석상에 아계 이산해는 병을 핑계로 출석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던 송강 정철은 이전의 합의대로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을 건의했다. 인빈 김씨 일로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던 선조는 뜻밖에 그녀의 말이 사실로 들어나자 그만 격분했다. 송강 정철의 건의를 왕실 가족을 향한 역모로 규정한 것이다. 송강 정철은 어안이 벙벙한 상황에서 곧장 귀양 가는 신세가 되었다. 3정승 합의의 당사자 중 하나였던 서애 유성룡도 경연 석상에 있었으나 완전히 얼어붙어 한마디도 도와주지 못했다.



4. 송강 정철을 어찌할 것인가, 강경론 對 온건론

 

기축옥사(정여립 역모사건) 때의 복수를 위해 칼을 갈던 영남사림파(더 정확히는 화담·남명학파)는 쾌재를 부르기 시작했다. 곧 화담·남명학파의 서슬 퍼런 탄핵이 이어졌다. 심지어 건저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비난도 등장했다.


국가의 대신으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를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그것이었다. (송강 정철은 술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건저의 음모의 설계자였던 아계 이산해는 아들 이경전을 시켜 이번 탄핵도 배후 조종했다. 송강 정철이 정여립의 귀양에 만족하지 않았듯 아계 이산해 역시 송강 정철의 귀양에 만족하지 않았다.


송강 정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때 뜻밖의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서애 유성룡을 위시로 한 퇴계학파(이황의 제자)가 송강 정철 처형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다. 송강 정철이 처형되면 동시에 기호사림파에게도 피바람이 불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서애 유성룡]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르는 법인데 퇴계학파는 정국 경색을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 서애 유성룡 자신이 이번 건저의 사건이 아계 이산해의 음모에서 비롯됐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3정승 간 합의가 유출된 건 차라리 둘째 문제였다. 진정 큰 문제는 하필 지극히 민감한 후계 구도건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바람에 왕실과 조정 분위기 모두 급격히 얼어붙기 시작했단 점이었다.


화담·남명학파는 송강 정철의 처형(강경론)을, 퇴계학파는 송강 정철의 귀양(온건론)을 주장하며 대립한다. 이렇게 집권여당이 둘로 나눠 갑론을박을 펼쳐준 덕에 야당인 기호사림파는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결국 송강 정철 처벌 문제는 귀양으로 하되 위리안치(圍籬安置, 귀양지에서도 한층 더 거주 이전을 제한하여 집 둘레를 가시덤불로 두르고 외부인의 출입도 막음)로 가중 처벌하는 선에서 매듭지어진다.


아울러 기축옥사 당시 비명횡사한 남명학파의 최영경이 신원됐고 화담학파의 이발·이길 형제 및 정개청 등의 신원도 논의되기 시작했다. 주범의 형량보다 종범의 형량이 더 무거울 순 없는 게 형법의 기본원리. 송강 정철과 함께 기호사림파의 지도부를 구성했던 오음 윤두수, 월정 윤근수 형제 등은 삭탈관직됐다.


그러나 그 선에서 건저의 사건은 외견상 종결됐다. 위리안치로 가중됐다지만 어쨌든 송강 정철은 살아났고 기호사림파로선 다행스런 일이었다. 우계 성혼은 그저 욕을 먹는 선에서 그쳤다. (우계 성혼은 기축옥사 당시 남명학파의 최영경을 구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기호사림파의 1세대 지도자였던 관계로 비난의 화살까지 피해가진 못했다. 격분한 선조는 우계 성혼과 송강 정철을 간혼독철(姦渾毒澈, 간사한 성혼 악독한 정철)이라 부르며 싸잡아 배척했다.) 퇴계학파 역시 정국 안정이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그러나 화담·남명학파는 그렇지 못했다.


왕조 국가에서 신하가 후계 문제에 관여했다가 화를 입는 건 크게 드문 경우가 아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역모 사건의 최고수사관이었던 송강 정철은 이제 그 역모죄를 자신이 뒤집어 쓰고 말았다. 그러나 송강 정철 역시 틀린 말은 한 건 아니었다. 송강 정철이 지은 죄라면 선조에게 당시의 여론을 그대로 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권력의 안정을 위해선 왕세자 자리를 채워둘 필요가 있었고, 1남에게 결격사유가 있다면 그다음 순서인 2남으로 하는 게 순리에 맞기도 했다.


마침 1년 뒤 임진왜란(1592~98년(선조25~31))이 발발하자 왕실과 조정은 분조(分曹, 국가 위기를 맞아 조정을 둘로 나눔)를 하게 됐다. 그러면서 분조의 수장인 왕세자로 광해군이 책봉됐던 것이다. 송강 정철 자신도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 다음달인 5월 곧바로 석방되고 관직에도 복귀했다. 그러나 화담·남명학파의 집중 견제는 계속 이어졌고 완전한 정치적 재기까진 이르지 못한 채 이듬해인 1593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5. 화담·남명학파, 분노하다


기축옥사 당시 화담·남명학파가 겪은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좌절감은 곧 건저의 음모로 이어졌다. 그런데 같은 영남사림파로 철썩 같이 믿고 있던 퇴계학파가 자신들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단 말도 있지 않은가? 건저의가 음모라면 기축옥사는 음모가 아니었나? 그런데 왜 퇴계학파는 기축옥사 때와 말이 다른가? 더는 퇴계학파를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이 화담·남명학파 진영 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화담·남명학파의 좌절감은 퇴계학파를 향한 배신감으로, 그리고 분노로 무섭게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도 양측 지도자들은 감정의 앙금을 푸는 데 무기력했다. 어찌 보면 무기력한 정도가 아니라 되레 갈등을 부채질한 측면까지 있었다. 남명학파의 내암 정인홍과 퇴계학파의 서애 유성룡, 그리고 화담학파의 (이미 죽었지만) 이발과 퇴계학파의 우성전 등은 개인적으로도 그다지 좋은 사이라 할 수 없었다. 특히 우성전은 엄연한 집권여당 측 중진임에도 건저의 파문에 연루돼 삭탈관직되기까지 했다. 이렇게 송강 정철 처벌 문제는 영남사림파를 영구히 분당시킬 일대 시발점으로 비화되고 만다.


앞으로 조선시대 붕당史에선 특정인의 처벌 문제로 붕당들이 강·온파로 분열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건저의 사건(1591년) 때 송강 정철 처벌 문제로 영남사림파(동인)의 남·북인 분당, 갑인환국(1674년(숙종원년)) 때 우암 송시열 처벌 문제로 기호남인의 청·탁남 분열, 경신환국(1680년(숙종6)) 때 기호남인 처벌 문제로 기호사림파(서인)의 노·소론 분당, 신임옥사(1721~22년(경종1~2)) 때 연잉군(훗날 영조) 처벌 문제로 소론의 준·완론 분열, 임오화변(1762년(영조38), 사도세자 폐출·사사 사건)에 대한 정치·역사적 평가 문제로 벽·시파 분열(1784년(정조8)) 등이 좋은 예다. 송강 정철의 처벌 문제는 그중에서도 첫번째 사례라 할 것이다. 그리고 온건파가 승리한 몇 안 되는 사례이기도 하다.



written by 하교길가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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