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19. 10:40ㆍ알아두면 조은글
조선의 과거제도-식년시, 증광시, 정시는 무엇이 다른가?
가끔 과거는 3년에 한 번씩 치르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과거의 역사에서 3년에 한 번씩 과거를 치르는 방식은 명나라 초기에 처음 제도화되었다. 조선은 건국 직후 이 제도를 도입하여 500여 년 동안 빠짐없이 3년에 한 번씩 과거를 시행하였다. 이 과거는 식년시(式年試)라고 한다. 식년시란 식년, 곧 간지가 자(子)·묘(卯)·오(午)·유(酉)로 끝나는 해에 시행하는 시험이란 뜻이다. 식년시는 모두 165회가 시행되었다. 과거를 3년에 한 번씩 치른다는 것은 곧 식년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식년시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특별시험이 있었다. 이 시험은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왕명(王命)으로 시행하였기 때문에 시험 시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특별시험은 처음에는 모두 ‘별시(別試)’로 일컬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증광시(增廣試), 별시(別試), 알성시(謁聖試), 정시(庭試), 춘당대시(春塘臺試), 외방별과(外方別科) 등으로 구분되었다. 특별시험도 조선초기부터 시행되었는데, 전체 시행 횟수는 583회로 식년시보다 훨씬 더 많았다. 과거제가 폐지되는 고종 31년(1894)까지 시행된 식년시와 특별시험을 합치면 모두 748회로 연평균 1.5회가 된다.
그렇다면 식년시와 특별시험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또 증광시, 별시, 알성시, 정시, 춘당대시, 외방별과 등의 다양한 특별시험은 서로 어떻게 다른 것일까? 아래에서는 문과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식년시는 3년에 한 번씩 시행하는 시험으로 문과와 무과, 생원·진사시, 잡과를 함께 실시하였다. 온 나라의 인재를 선발한다는 취지로 전국에서 동시에 초시를 시행하고, 서울에서 회시를 실시하여 합격자를 뽑았다.
식년시 문과는 성균관의 관시(館試), 서울의 한성시(漢城試), 지역별 향시(鄕試)로 나누어 초시를 시행한 후 240명을 선발하고, 2차 시험인 회시(會試)에서 33명을 선발하였다. 전시(殿試)에서는 국왕이 합격자 33명의 등수를 정하였다. 우리가 흔히 조선시대 문과제도로 알고 있는 시험은 실은 이 식년시 문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특별시험은 특정한 사유가 있을 때 시행하는 시험으로, 증광시, 별시, 알성시, 정시, 춘당대시, 외방별과 등 종류가 다양하였다. 각 시험은 그 연원이 달랐을 뿐 아니라 시험 방식도 서로 달랐다.
증광시는 원래 국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시험으로 그 방식은 식년시와 동일하였다. 문과, 무과, 생원·진사시, 잡과를 함께 시행하는 것은 물론 초시도 전국에서 시행하였고, 선발인원도 같았다. 증광(增廣)이라는 말은 당나라 태종이 학교를 늘려 생원(生員)을 더 뽑았다는 고사(故事)에서 취하였다고 하는데, 다른 특별시험에 비해서 많은 인원을 선발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대증광시의 경우 식년시보다도 선발인원이 많았다.
이에 비해 별시, 정시, 알성시, 춘당대시, 외방별과는 문과와 무과만 실시하였고, 생원·진사시와 잡과는 시행하지 않았다. 선발인원도 식년시나 증광시보다 적었다. 또 특정 지역에서 시행하는 외방별과를 제외한 나머지 시험은 모두 서울에서만 실시하였다. 즉, 별시, 정시 등은 식년시나 증광시에 비하여 규모가 작은 시험이었다.
처음 시행한 특별 문과는 태종 1년(1401)에 태종의 즉위를 기념하여 시행한 시험이었다. 이 시험은 식년시에 준하여 초시-회시-전시 세 단계로 시험을 치르고 초시(初試)도 서울과 지방에서 나누어 시행하였다. 이처럼 국왕의 즉위를 기념하여 식년시에 준하여 시행하는 시험이 증광시로 불리게 되었다.
태종은 재위 14년(1414)과 16년(1416)에도 특별시험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두 시험의 방식은 태종 1년 때와는 달랐다.
태종 14년의 시험은 국왕의 성균관 방문을 기념하는 시험이었다. 이때에는 의례에 참석한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 관료를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고 저녁에 답안을 걷었다. 하루에 모든 시험을 다 끝낸 것이다. 이처럼 국왕이 성균관을 방문하여 성인(聖人)을 알현하고 치르는 시험은 알성시로 관행화되었다. 알성시의 시험 방식은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점차 하루에 모든 시험과 합격자 발표까지 마무리짓는 방식이 정착되었다. 시험 일정을 국왕의 친림이라는 의식에 맞추어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림 1] 『대사례도(大射禮圖)』 중 「(御射圖)」(1743)영조는 재위 19년(1743) 성균관에서 대사례를 거행하고, 이를 기념하는 문무과를 설행하였다. 이런 시험을 알성시라고 한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2001,『조선시대 기록화의 세계』25쪽
태종 16년의 시험은 문신(文臣)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인 중시(重試)와 함께 시행하였다. 초시-전시 두 단계로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초시는 서울에서만 실시하였다. 서울의 유생과 조관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시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시와 전시 두 단계로 시행하는 시험은 뒤에 별시로 일컬어 졌다. 조선전기에는 국가에 경사가 있어 특별시험을 시행할 때는 대개 별시를 시행하였다. 특히 중시와 함께 시행하는 문과는 반드시 별시를 시행하였다. 별시는 조선전기에 식년시와 함께 가장 많이 시행된 시험이었다.
이상에서 보듯 조선전기 특별시험은 증광시, 별시, 알성시가 있었는데, 각각의 시험 방식은 서로 달랐다. 즉, 증광시는 초시-회시-전시, 별시는 초시-전시, 알성시는 전시만 치르는 시험이었다. 이처럼 시험 방식이 다른 것은 각각의 시험을 시행하는 의의가 달랐던 데서 비롯되었다. 증광시는 국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의례로 성대하게 치렀으나 별시는 서울의 유생과 관료를 위한 시험으로 그 단계를 축소하였다. 알성시는 성균관 방문을 기념하는 시험으로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소규모로 치렀다. 그 후 응시자는 전국 유생으로 확대되는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시험은 전례를 따라 그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이에 더하여 새로운 방식의 시험이 등장하였다. 먼저 임진왜란 중에 알성시처럼 하루에 시험을 끝내는 정시(庭試)라는 시험을 도입하였다. 정시는 본래 학교에서 수학 중인 유생이나 문신을 궁궐로 불러 치르던 시험으로 정식 과거는 아니었다. 그런데, 선조는 임진왜란 중에 민심을 위무한다는 취지로 몸소 시험장에 나가 정시와 같은 방식으로 과거를 시행하였다. 이로부터 정시가 과거의 한 종류가 되었다. 또 효종대에는 국왕이 춘당대에 나가 무사들의 기예를 관람하고 문무과를 함께 실시하였다. 이 시험은 춘당대시(春塘臺試)라고 하였는데, 역시 하루 만에 시험을 마무리 지었다. 두 시험은 알성시와 마찬가지로 국왕이 친림하는 의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시험 방식도 알성시의 예를 따라 하루 만에 시험과 합격자 발표를 모두 마무리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한편 세조대 이래 국왕이 지방을 방문할 때에는 그 지역의 유생을 위한 특별시험을 시행하였다. 또 인조대부터는 평안도, 함경도, 강화도, 제주도 유생을 위하여 특별히 중신(重臣)이나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특별시험을 시행하였다. 이를 외방별과(外方別科)라고 하였다. 이 시험도 국왕이 친림하거나 使者를 파견하는 시험으로 하루 만에 마무리되었다.
[그림 2]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 중 「낙남헌(洛南軒) 방방(放榜)」 정조는 재위 19년(1795) 화성을 방문하여 문무과를 설행하고 낙남헌에서 합격자를 발표하는 방방(放榜)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 시험도 외방별과의 일종이다. ⓒ국립중앙박물관, 2002,『朝鮮時代 風俗畵』11쪽.
이상에서 보듯 조선시대 특별시험은 시험 종류와 시험 방식이 다양하였다. 그 차이는 각각의 시험이 시행되는 사유가 달랐던 데서 비롯되었다. 과거는 의례(儀禮)의 성격을 지니고 그 의례에 맞추어 시험 방식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험 방식을 기준으로 보면 세 단계로 치르는 증광시, 두 단계로 치르는 별시, 한 단계로 치르는 알성시·정시·춘당대시·외방별과로 대별되어 종류가 간단해 진다. 이 중 정시는 응시자가 늘어나 영조대 초반에 초시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친림하는 경우는 이전과 같이 하루 만에 시험을 마무리하였다.
특별시험은 시행 사유에 따라 전례를 참작하여 시험 종류를 결정하였다. 이 중에는 관행화된 시험도 있었는데, 국왕의 즉위를 기념할 때는 항상 증광시를 시행하였고, 국왕의 성균관 방문을 기념할 때는 알성시를 시행하였으며, 중시 때는 별시, 관무재 때는 춘당대시를 시행하였다.
이외에 국가나 왕실의 경사를 기념하는 경과(慶科)는 그때그때 시험 종류를 결정하였다. 경과는 당초 국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시험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사유가 점점 늘어났다. 국왕과 왕비의 부묘(祔廟), 왕세자의 책봉, 입학, 가례(嘉禮), 원자(元子)나 원손(元孫)의 탄생, 중국의 황제 즉위, 왕실의 상존호(上尊號), 역모의 토벌, 왕실의 건강 회복 등도 경과를 시행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에 따라 경과를 시행하는 횟수도 늘어났다. 이것은 응시자들의 증가로 과거 시행에 대한 요구가 증대한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전기의 경과는 대부분 별시를 시행하였다. 선조대 오랜 숙원이었던 종계변무(宗系辨誣)나 전례없는 국왕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할 때에만 증광시를 시행했을 뿐이다. 조선후기에는 증광시, 별시, 정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였는데, 대개 큰 경사나 여러 경사를 합치는 경우는 증광시,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정시를 시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증광시를 시행할 때에는 대개 국가의 경사를 온 백성과 함께 한다는 명분이 근거가 되었다. 정시를 시행할 때에는 시험에 소요되는 시일과 비용을 줄이고, 지방 유생들이 오랫동안 서울에 체류하는 부담을 줄인다는 것이 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시험의 종류나 시행 횟수가 반드시 경사의 크기나 횟수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 전례를 따르기는 하였으나 특별히 증광시를 시행하는 경우는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된 경우가 많았다. 즉, 정권이 교체된 후 신진관료를 충원하려고 할 때나 역모사건을 처리한 후처럼 민심을 수습하려고 할 때는 증광시를 시행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이런 저런 이유를 내세워 별시나 정시를 자주 시행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할 때 과거를 자주 시행하는 경향이 있었다. 역대 왕 중에서 상대적으로 과거를 자주 시행한 왕으로는 영조, 고종, 광해군, 세조를 꼽을 수 있다. 과거의 시행은 그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이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보듯 조선시대 문과에는 다양한 종류의 시험이 있었다. 각 시험은 방식이 다를 뿐 아니라 과목이나 출제 경향에도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응시자는 각 시험의 특성에 맞추어 응시 전략을 세워야만 했다. 또 시기에 따라 자주 시행한 시험의 종류는 달랐다. 식년시와 알성시는 500년 동안 꾸준히 시행되었으나 조선전기에는 별시, 조선후기에는 증광시와 정시가 더 자주 시행되었다. 이러한 차이도 유생들의 응시 전략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과거제도-생원·진사만 문과를 볼 수 있는가?
조선시대 과거에는 문과·무과·잡과·생원진사시가 있었다. 그러나 사료상에서 ‘과거’라고 하면 흔히 문과와 생원·진사시를 일컫는다. 더 좁게 문과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흔히 과거라고 하면 문과와 생원진사시를 떠올리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문과와 생원·진사시는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이 때문인지 생원·진사시에 합격해야 문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문과와 생원·진사시는 별개의 시험으로 반드시 생원·진사가 되어야 문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국가에서 유교적 교양을 갖춘 유생(儒生)을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생원·진사는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유생으로서 군역(軍役)을 면제받았으며, 국학인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성균관은 장래에 국가를 짊어질 동량(棟樑)을 양성하는 곳으로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학식이 뛰어난 관료들을 파견하여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성균관에서 수학한다는 것은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보다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문과 초시 때는 관시(館試)가 따로 실시되었다. 일반 유생들은 거주지별로 한성시(漢城試)나 도별 향시(鄕試)에 응시하였으나 성균관에서 일정 일수 이상 수학한 유생은 성균관에서 치르는 관시(館試)에 응시할 수 있었다.
관시는 같은 초시인 한성시나 향시에 비해 응시 인원은 적고 선발 인원은 더 많았다. 또 조선초기에는 성균관 유생에게만 알성시나 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문과에 급제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부여되었다.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문과 급제자 중에서 생원·진사가 차지하는 비율은 75%를 웃돌았다. 문과 급제자 10명 중 7-8명은 생원·진사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생원·진사가 되어야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오해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머지 25%는 생원·진사가 아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생원·진사가 아닌 유학(幼學)으로 문과에 급제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오성과 한음 이야기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 있다. 이항복은 1580년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덕형은 같은 해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동무가 되어 개구지게 놀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기록은 두 사람이 문과 급제를 계기로 교유하게 된 것으로 전한다.
[그림 1] 이항복(李恒福)의 초상화(17세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항복은 유학(幼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문관의 영예직을 두루 거쳤다. ⓒ국립중앙박물관 편, 2011,『초상화의 비밀』120쪽 수록
1582년(선조 15) 이이(李珥)는 이항복과 이덕형을 국왕 선조의 강학(講學)을 도울 인재로 추천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함께 추천된 이정립(李廷立, 1556-1595)과 함께 3이(李) 혹은 삼학사(三學士)로 세간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같은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 이조좌랑, 사가독서(賜暇讀書), 대제학 등 문과 출신자의 엘리트 코스를 두루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는 공통점도 있다. 여기에 덧붙여 두 사람이 생원·진사가 아닌 유학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주목되는 바이다.
조선전기 문과급제자들의 관력(官歷)을 보면 한림(翰林)이나 문형(文衡)과 같은 문관의 영예직 담당자들 가운데는 생원·진사의 비중이 더 높았다. 사회적으로 생원·진사들을 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유학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그런 풍조를 비웃기라도 하듯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사실 이항복이나 이덕형이 생원·진사가 되지 못한 것은 그들이 너무 일찍 문과에 급제한 탓이기도 하였다. 이항복은 스물다섯 살, 이덕형은 스무 살에 급제하였는데, 이 시기 생원·진사들의 평균나이는 31.1세였다. 이들은 미처 생원·진사가 될 틈도 없이 문과에 급제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더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생원·진사가 아니면서 문형(文衡)을 맡은 인물로는 이외에 태종대의 권제(權蹄, 1387-1445), 선조대의 윤근수(尹根壽, 1537-1616) 등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문과급제자 중 생원·진사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한림이나 문형 등의 문한직이나 고위 관료 가운데서는 그 비중이 더 높았다.
18세기에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18세기 문과급제자 중 생원·진사의 비율은 겨우 40%를 넘는 정도였다. 이때부터 문과 급제자 중에서 유학 등 생원·진사가 아닌 사람들이 생원·진사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 격차는 갈수록 커졌다. 문과와 생원·진사시 사이에 괴리가 생긴 것이다.
17세기와 18세기의 다른 경향은 그 흐름을 좇아가 보면 17세기 후반부터 조짐이 보인다. 이때부터 유학의 급제가 가파르게 늘어난 반면 생원·진사는 선발 인원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답보상태를 보이다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영조대 후반에는 그 숫자가 다시 늘어나기도 하였으나 이것은 선발인원의 증가로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같은 시기 유학의 급제는 더 많이 늘어났다.
그렇다면 17세기와 18세기 사이에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일까?
현재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충분한 답이 제시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생원·진사와 유학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논의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실제 시험의 과정을 보면 이 논의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17세기에는 생원·진사시 응시자 숫자가 빠르게 증가하였는데, 숙종대 한성시 응시자 수는 11,000 여명에 이르렀다. 그 답안을 10개 전후의 등급으로 나누어 채점하였는데, 당락이 결정되는 차하(次下)를 전후해서는 동점자가 수십 수백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우열을 따져 200명을 선발하기는 하였으나 워낙 동점자가 많았기 때문에 합격자와 탈락자 사이에 근원적인 능력의 차이가 있었다고 논하기는 어렵다. 또 조선전기와 달리 지방 교육이 활성화된 반면 성균관 교육은 유명무실화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생원·진사들이 우수한 교육을 받았던 것도 아니다. 교육이나 학문의 측면에서 생원·진사와 유학 사이에 우열을 논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시험 종류에 따라 생원·진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큰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18세기 선발 인원이 가장 많았던 식년시, 증광시, 정시에서 생원·진사가 차지한 비율을 보면 식년시는 10%, 증광시는 70%, 정시는 50% 정도였다. 생원·진사들은 식년시에서는 그 비중이 미미하였으나 증광시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각 시험의 시험과목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식년시는 여러 과목을 시험하였지만 18세기에는 회시 초장의 강경(講經) 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었다. 사서삼경을 토를 달아 암송하고 그 뜻을 풀이하는 시험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17세기부터 나타나는데, 결과적으로는 식년시를 암송시험이라 하여 경시하는 풍조를 낳았다. 이 때문에 생원·진사들은 아예 식년시에 응시하지 않고 제술 시험 준비에 치중하였다.
영조대에는 성균관의 생원·진사 중에 강경을 공부하는 자가 적다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1736년(영조 12) 성균관에 거재하던 생원·진사 94명 중 강경을 공부하는 유생은 15명에 불과하였다. 생원·진사의 10-20%만이 식년시 응시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실제 18세기 식년시 급제자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평안도 출신의 유학들이었다.
반면 증광시는 사서의(四書疑), 논(論), 부(賦), 표(表), 대책(對策) 등 다양한 과목에서 급제자를 뽑았다. 그 중에서 표와 대책은 다른 과목에 비해 어렵다는 이유로 점수를 두 배로 주었기 때문에 증광시에서는 표나 대책을 잘 짓는 유생이 더 유리하였다. 이와 달리 정시는 시기마다 출제 경향이 달랐으나 영조대 이후에는 부(賦)를 주로 출제하였다. 부는 누구나 쉽게 지을 수 있는 문장 형식으로 상대적으로 변별력이 약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즉, 생원·진사들은 변별력이 높은 증광시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으나 변별력이 낮은 정시에서는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이런 경향이 나타난 요인 중 한가지가 수험 전략의 문제였다. 유학은 생원·진사시와 문과에 함께 응시하였기 때문에 생원시·진사시·문과의 시험 과목을 모두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따라서 문과 과목 중에서는 진사시 과목과 겹치는 부(賦)를 보다 집중적으로 익히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반면 생원·진사들은 문과에만 응시하였기 때문에 부 외에도 배점이 높은 표와 대책을 보다 집중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하여 생원·진사들은 유학에 대한 우위가 약화되는 가운데서도 표와 책이 출제되는 증광시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세기에는 유학들의 문과 급제가 더욱 늘어나 생원·진사의 비중은 25% 이하로 줄어들었다. 시험 종류를 불문하고 생원·진사들의 비교 우위가 사라지고 문과와 생원·진사시는 완전히 괴리되어 버렸다. 그러나 증광시에서는 생원·진사가 여전히 45% 정도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다. 증광시는 여전히 생원·진사들에게 보다 유리한 시험으로 남아 있었다.
조선의 과거제도-문과에서는 어떤 과목을 시험 보는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즉위 교서에서 과거를 통해 경학(經學)을 익히고 실천하는 인재를 등용할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의 과거는 고려에 비해 경학의 비중을 높였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경학에 능한 것만으로는 문과에 급제하기 어려웠다. 문과는 문한(文翰)과 교육을 담당할 문반 관료를 선발하는 시험으로 사실은 문장에 보다 높은 비중을 두었다. 즉, 문과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경학은 물론 역사, 제도와 문물, 문장 등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토대로 정해진 형식에 맞추어 글을 지을 수 있는 자질을 갖추어야만 했다.
조선시대 관직 가운데에는 문관만 담당할 수 있는 관직들이 있었다. 국왕문서와 외교문서의 작성을 담당하는 예문관과 승문원, 학술 자문과 서적의 편찬·출판을 담당하는 홍문관·교서관·규장각, 세자와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과 성균관, 실록을 편찬하는 춘추관의 관원은 모두 문관으로 충원되었다. 승정원의 경우도 사초(史草)를 작성하는 주서(注書)는 문관만이 담당할 수 있었다. 이런 관직은 학술과 문장(文章)에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자리로 폭넓은 학술적 경륜과 문장력을 기본자질로 요구하였다. 문과는 바로 이런 업무를 수행할 전문가를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문과의 시험 과목은 문관의 역할에 맞추어 학술과 문장을 폭넓게 평가할 수 있는 과목으로 채워져 있었다. 태조는 즉위 교서에서 초장은 강경(講經), 중장은 표(表)·장(章)·고부(古賦), 종장은 책문(策問)으로 시험한다고 선포하였다. 이것이 조선시대 문과 시험 과목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 후 몇 차례의 조정을 거친 후 식년시의 시험과목은 초장의 의의(疑義)·논(論)과 강경(講經), 중장의 부(賦)와 표(表), 종장의 책문(策問)을 중심으로 정리되었다.
[그림 1] 순조 14년 안윤직이 작성한 사서의(四書疑) 시권 사서의는 문제가 길기 때문에 ‘문운운(問云云)’이라고 적고 문제는 생략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제공
강경과 의의(疑義)는 모두 경학에 대한 이해 수준을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강경은 본문의 현토(懸吐)를 겸한 암송, 글자와 문장의 뜻을 해석하는 구두시험으로, 사서삼경에서 각각 한 장(章)을 뽑아 암송하고 해석하게 하였다. 이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사서삼경을 달달 외우고 그 뜻까지 다 해석할 수 있어야 했다. 만약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바로 ‘불통(不通)’을 받아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에 비해 의의는 사서와 오경에서 몇 구절을 뽑아 그 의미를 논술하게 하는 시험으로, 사서의(四書疑)와 오경의(五經義) 시험이 있었다. 사서의는 사서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평가하는 시험으로 사서 가운데 서로 관련이 있는 구절들을 함께 제시하고 의문점을 논파하게 하였다. 오경의는 오경 중 한 책에서 몇 구절을 내고 그 뜻을 묻는 시험이었다. 강경이 본문의 암송에 비중을 둔 시험인 데 비하여 의의는 내용의 이해에 비중을 둔 시험이었다. 오경의는 뒤에 폐지되었다.
사서의(四書疑) 문제는 대개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출제되었다. 아래 문제는 명종 12년(1557) 식년시 한성시 초시에 출제된 문제로 응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이의 『율곡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대학』에 이르기를 ‘그 뜻을 성실히 한다’ 하였고, 『중용』에 이르기를 ‘성실한 자는 하늘의 도요, 성실히 하려는 자는 사람의 도이다’ 하였다. 그 이른바 성실[誠]이라는 것의 천심(淺深)을 말할 수 있는가?『맹자』에 이르기를 ‘몸을 돌이켜보아 성실하다’ 하였으나,『논어』에서는 홀로 성실을 말하지 않았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이른바 ‘충신(忠信)’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학자가 용공(用功)함에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마쳐야 하는가? 그 설명을 듣고자 한다.”[大學曰 誠其意 中庸曰 誠者 天之道 誠之者 人之道 其所謂誠者 有淺深之可言歟 孟子曰反身而誠 論語獨不言誠 何歟 所謂忠信 抑何意歟 學者用功 何始何終 願聞其說](번역문, 이래종,「疑義의 形式과 그 特性」『대동한문학』39, 대동한문학회에서 인용)
이 문제는 ‘성(誠)’에 대해 묻는 것으로 사서에서 ‘성(誠)’에 대해 언급한 것을 제시하고, ‘성(誠)’에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는지, 『논어』에서는 왜 ‘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지, ‘성’과 ‘충신(忠信)’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공부는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나는지 하는 네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논설하도록 하였다. 사서에 각각 나타난 성(誠)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이를 종합하여 그 의미를 논변하도록 한 것이다.
문제를 받아 든 응시자는 서론, 본론, 결론을 갖춘 형식으로 답안을 작성하는데, 본론에서 문제가 제기한 내용들에 대해 조목조목 의문을 논파하고, 이를 종합한 결론을 내리도록 되어 있었다.
논ㆍ표ㆍ부는 모두 경서나 역사서, 문집 등에서 구절을 따서 문제를 출제하였다. 그러나 과목마다 정해진 문체가 있어서 문장의 형식을 달리하였다. 정해진 형식에서 어긋나면 ‘위격(違格)’이라 하여 불합격으로 처리하였다.
논(論)은 주어진 주제에 대해 논평하는 글로, 산문이다. 표(表)는 황제에게 올리는 글로 사륙변려문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작성되었는데, 이는 외교문서나 국왕문서의 작성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賦)는 운문 형식에 대한 숙련도와 문학적인 표현력을 평가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정해진 형식 속에서 적절하게 관련 고사나 글귀를 인용하며 논리는 명료하고 문장은 우아하게 구사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논·표·부는 역사서에서 출제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출제되었다.
바람을 돌려 벼를 일으키다[反風起禾] – 부(賦)
불의후(不義侯)에 봉하다[封不義侯] – 논(論)
진나라 조정의 신하들이 육국(六國)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다[擬秦朝群臣賀平六國] – 표
이상과 같은 문제를 받아들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올랐을까? 일단 문제로 제시된 구절의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역사서나 문학서 등을 통해 중국의 고사를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위에서 예시한 ‘바람을 돌려 벼를 일으키다[反風起禾]’라는 구절은『서경(書經)』,『사기(史記)』 등에서 취한 것으로 주나라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에 관련된 고사다. 주공이 죽은 후 크게 가물어 흉년이 들었는데, 성왕이 뒤늦게 주공의 은덕을 깨우치자 하늘이 바람을 돌려 벼를 일으켰다는 내용이다. 응시자들은 문제로 출제된 구절 뿐 아니라 전후의 맥락을 통해 그 문제의 내용을 파악해야 했다.
[그림 2] 숙종 10년(1684) 이후영(李後榮)의 식년시 문과 전시 시권 中 부(賦)의 시권(부분) ‘반풍기화(反風起禾)’라는 문제와 ‘부(賦)’라는 과목이 적혀 있다. 문장 형식이 요구하는 어조사 ‘혜(兮)’와 운자(韻字)가 잘 드러나도록 답안을 작성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제공.
이를 토대로 이 문제를 출제한 의도가 무엇인지, 어떤 방향에서 글을 지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고사와 관련된 자구(字句)들을 적절하게 인용하며 문장을 완성해야 한다. 정해진 문장 형식에 맞추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역사서를 비롯한 온갖 서적에서 출제되는 문제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령 영조는 ‘영렬천(靈冽泉)’이라는 문제를 낸 적이 있었는데, 응시자 대부분은 영렬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지 못했다. 영조는 경희궁 태령전의 영렬천을 염두에 두고 출제하였으나 응시자들은 이를 대보단이나 창경궁 통명전의 열천(冽泉)으로 파악하였다. 이런 경우에는 출제 의도에 맞는 글을 지을 수 없었다.
응시자들이 문제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에 대비하여 문제에 대한 설명인 해제(解題)를 함께 제시하기도 하였다. 영조 11년 ‘나라를 세우다[肇開鴻業]’라는 문제를 출제하였는데, 누가 보아도 그 의도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용비어천가’라는 해제를 함께 제시하였다. 이 글귀가 『용비어천가』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답안을 작성할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책문은 경학과 역사, 시무(時務) 등에 대한 질문을 통해 주로 국가 운영에 대한 식견을 물었다. 다른 시험과 달리 장문의 문장으로 조목조목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출제되었다. 따라서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일개 유생에 불과한 응시자들이 치도(治道)에 대하여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답안을 작성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령 명종 13년(1558) 별시 초시에는 ‘천도(天道)’에 대해 묻는 책문이 출제되었다. 이 책문은 ‘천도는 알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다[天道難知亦難言也]’는 구절로 시작하는 476자의 장문이었다. 그 가운데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서 한 번은 낮이 되고 한 번은 밤이 되는데, 더디고 빠른 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日月麗乎天 一晝一夜 有遲有速者 孰使之然歟]’를 시작으로 천문·기상·재이와 관련된 20여개의 질문을 던져 유생들이 조목조목 대답하도록 유도하였다. 이 문제는 천도(天道)와 재이(災異), 인사(人事)의 관계를 묻는 것이었다.
이 시험에서는 율곡 이이(李珥)가 장원을 하였는데, 그의 답안은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上天之載 無聲無臭]’로 시작하는 2,484자의 장문이었다. 그는 ‘만화(萬化)의 근본은 오직 음양뿐입니다’이라는 말로 첫 번째 물음에 답한 뒤 조목조목 제기한 문제들을 논변하고, 만물의 조화는 국왕의 신독(愼獨)에 달려 있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하였다. 이 글은 흔히 ‘천도책(天道策)’으로 일컬어진다.
책문은 장문에 걸친 질문과 이에 대한 응답을 통하여 응시자의 식견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전기에는 여러 과목 중에서도 책문이 제일 중시되었다. 그러나 답안을 장문으로 작성해야 한다는 특성 때문에 시험 시간이 짧은 알성시나 정시에서는 출제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에는 책문의 비중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식년시를 제외한 나머지 시험은 식년시 과목 중에서 일부 과목을 제외한 형태였다. 증광시에는 강경, 별시에는 의의와 강경이 제외되었다. 정시·알성시에는 의의·강경과 논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으로 한 문제를 출제하였는데, 주로 부나 표를 출제하였다. 이외에도 잠(箴)·명(銘)·송(頌) 등 여러 과목이 출제되기는 하였지만 출제 빈도로 보면 부·표·책문이 문과의 핵심 과목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이 출제되었을 때 유생들은 모두 답안을 작성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는 못했다. 평소에 익히지 않은 글귀가 출제되거나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들이 출제된다면 답안을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또 제한된 시간 안에 문장의 형식과 내용을 제대로 갖추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실제 응시자 중에 어느 정도가 답안을 제출하느냐 하는 것은 문제의 난이도에 따라 달랐다. 가령 정조 18년 정시 때에는 응시자 17,914명 중 11,402명, 64%가 답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정조 23년(1799) 알성시 때에는 응시자 57,393명 중 12,593명, 22%만이 답안을 제출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19세기 전반까지는 응시자의 50%이상이 답안을 제출한 사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시험장에서 그러하듯 조선시대 유생들도 문제가 출제되는 순간 쾌재를 부르기도 하였고, 긴 시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고 느끼며 좌절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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