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19. 10:48ㆍ알아두면 조은글
시치미를 떼다
1. 어원설
‘시치미를 떼다’라는 말은 매 사냥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우리 나라는 삼국 시대에 이미 매 사냥을 하였다고 합니다. 고려 때 몽고는 우리 나라의 우수한 사냥매인 ‘해동청’을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고 합니다. 고려에서는 공물로 바칠 매를 잡아 기르기 위하여 사냥매 사육 담당 부서인 ‘웅방’이라는 관청을 두었고, 이러한 까닭으로 매 사냥은 귀족들에게까지 매우 성행하였다고 합니다.
매 사냥은 주로 북쪽 지방에서 많이 하였는데, 사냥매의 주인을 ‘수알치’라고 합니다. ‘수알치’는 사냥매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자기 매의 꼬리 쪽에다 쇠뿔을 얇게 깎아 만든 이름표를 달았는데, 이 이름표를 평안 북도 말로 ‘시치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인을 잃은 매를 잡으면 이 시치미를 떼어 버리고 슬쩍 가로채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처럼 시치미를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된다고 하여 ‘시치미를 뗀다’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 말은 주로 알고도 모른 체하는 사람이나 하고도 안 한 체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입니다.
2. 어원설
시침(始針)은 시치미라고도 한다. 시침은 본바느질을 하기 전에 본바느질이 제자리를 지키게 하기 위해 군데군데 임시로 뜨거나, 박음선을 표시하기 위해 임시로 꿰매는 것으로서 가봉(假縫)이라고도 한다. 이런 행위를 '시침질'이라 하고, 시침을 한 실을 '시침실'이라고 한다.
시침실은 본바느질인 박음질이 끝나면 흔적이 남지 않도록 바로 뜯어버린다. 그래서 무슨 일을 저지르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뻔뻔한 표정을 지을 때 '시치미(를) 뗀다'고 말하게 되었다.
378705.jpg옛날 우리 농촌에서는 대부분 집에서 직접 누에를 치거나 삼 ·모시· 목화 등을 길러서 명주· 삼베· 모시베· 무명 등을 자가생산했다. 이렇게 집안에서 물레를 돌려 실을 잣거나 베틀에 올라 옷감을 만드는 작업을 길쌈이라고 한다. 길쌈이 끝나고 겨울이 되면 여인들은 식구들이 입을 옷을 밤을 새워가며 바느질을 해서 손수 만들어 입었다. 이때 시장기라도 달랠 겸 낮에 숨겨둔 누룽지 조각이라도 먹고 있는데 이웃 사람이 마실을 오면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척 하느라 옷감에 붙은 시침[시치미]을 떼면서 슬그머니 말꼬리를 다른 데로 돌리게 된다. 마실 온 친구가 자기도 그런 경험이 있으니 이걸 모를 리 없다. 숨겨둔 누룽지 조각을 빼았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깍쟁이 여편네야. 내가 모를 줄 아니? 시치미를 떼는 척 하지마!"
국어사전을 보면 매의 주인을 밝히기 위해서 주소를 적어 매의 꽁지 위의 털 속에다 매어둔 네모진 뿔이 '시치미' 또는 '시침'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어원 학자들은 옛날 매사냥이 나라에서 장려할 정도로 성행했을 때 매의 꽁지에 매어둔 시치미를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시치미 떼다'는 말이 나왔다고 해석하고, 학계에서도 이것이 마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해석은 매사냥이 옛날에 아무리 성행했다 하더라도 매사냥은 매를 최소한 2년 이상 길들여 부릴 수 있는 봉잡이와 같이 한 조를 이루는 사람들이 즐기던 놀이였고, 매 꽁지에 이름표를 매는 것은 사냥을 할 때 쓰는 보라매가 멀리 달아나서 찾지 못하는 특수한 경우를 대비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실생활에서 두루 쓰이고 있는 이 말의 어원이 된다는 것이 수긍하기 어렵다.
등잔 밑에서 자주 쓰던 물건을 잃었으면 등잔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 옷을 만들 때 꼭 필요한 바느질의 한 가지인 시침질은 옛 여인들이 깊은 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등잔 밑에서 늘상 하던 일이었고, 지금 이 순간도 어딘가에서 누군가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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