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용5

2018. 1. 9. 07:48간찰

1)새하곡(塞下曲):고대의 악부(樂府) 가운데 하나로, 북쪽 변경 지역의 풍정을 노래한 것이다. 횡취곡(橫吹曲)에서 나왔으며, 왕유(王維), 이하(李賀), 이백(李白)의 새하곡이 대표적이다.

2)장군께서……자였네:한(漢)나라 때의 명장인 이광(李廣)의 사적을 읊었다. 이광이 일찍이 흉노(匈奴)와 싸울 적에 이광을 따라갔던 중귀인(中貴人)이 흉노 3인의 사격을 받아 상해를 입고 돌아오자, 이광이 “이들은 반드시 수리를 떨어뜨릴 만한 활솜씨가 있는 자들이다.” 하고는, 곧장 그 흉노 3인을 추격하여 2인은 사살하고 1인은 생포함으로써 위엄을 크게 떨쳤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3)약야계(若耶溪):중국 절강성(浙江省) 회계현(會稽縣) 동남쪽에 있는 시내 이름인데, 춘추 시대 월나라의 미녀 서시(西施)가 그곳에서 빨래를 하였다 하여 아름다운 여인들이 모여 노니는 물가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4)고소대(姑蘇臺):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충신 오자서(伍子胥)의 말을 듣지 않고 미녀들과 놀기 위해 쌓은 대로, 부차는 이 대에서 미녀들과 놀다가 월나라에 패망하였다. 일설에는 부차의 선왕 합려(闔閭)가 쌓은 것이라고도 한다.

5)진천(秦川)……울고:진천은 오늘날의 섬서성(陝西省), 감숙성(甘肅省)의 진령(秦嶺) 이북으로, 춘추 시대에 진(秦)나라에 속했던 곳이라 이렇게 부른다. 이백(李白)의 오야제(烏夜啼)에 “누런 구름 낀 성에서 까마귀는 깃들려고, 날아와선 까악까악 나뭇가지 위에서 우네. 베틀 위에 앉아 베를 짜던 진천 여인은, 푸른 비단 연기 같은데 창 격해서 얘기하네.[黃雲城邊烏欲棲 歸飛啞啞枝上啼 機中織錦秦川女 碧紗如煙隔窓語]”라고 하였다. 分類補注李白詩 卷3

6)계문(薊門)……가을빛이네:계문은 북경(北京) 덕승문(德勝門)의 서북쪽 지역으로, 춘추전국 시대 연(燕)나라 땅이다. 계구(薊丘)라고도 하며, 지금은 토성관(土城關)이라고 한다. 왕창령(王昌齡)의 기목시어출유주(寄穆侍御出幽州) 시에 “계문에서 오는 편지 드물다고 말을 마소, 기러기는 형양까지 날아서 올 수 있다오.[莫道薊門書信少 鴈飛猶得到衡陽]”라고 하였다.

7)비단 글자:수를 놓아 글자를 쓴 것으로, 편지를 가리킨다. 전진(前秦) 때 소혜(蘇蕙)가 유배를 간 남편을 그리워하여 비단에다가 회문시(廻文詩)를 수놓아 보냈다. 晉書 卷96 列女列傳 竇滔妻蘇氏

8)권칙(權侙):1599~? 본관은 안동, 자는 자경(子敬), 호는 국헌(菊軒)이다. 권온(權韞)의 서자(庶子)이며, 이항복(李恒福)의 사위이다. 강홍립(姜弘立)을 수행하여 심하(深河)의 전투에 참여했는데, 강홍립은 오랑캐에게 항복하였으나 권칙은 적진을 탈출해 돌아와서 강로전(姜虜傳)을 저술했다. 1627년(인조5)에 일어난 이인거(李仁居)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어 소과에 급제하였으며, 1636년에는 통신사(通信使)의 제술관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문장에 뛰어나서 사람들이 ‘궁궐 밖의 대제학’이라고 칭하였다.

9)이호(李皥):어떤 인물인지 미상이다. 승정원일기 인조 4년(1626) 3월 9일 기사에 “토산 현감(兔山縣監) 이호가 하직하였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10)마천령(磨天嶺)에 오르다:이 시에 대해 남은경은 “1629년(인조7)에 33세의 정두경은 북평사(北評事)의 임무를 띠고 함경도 북새(北塞)로 떠나게 되었다. 이 시는 북새로 향하던 길에 올랐던 마천령 위에서 쓴 것이다. 이 시에 대해 장유(張維)는 ‘필력이 웅건하여 가히 우주를 떠받들 수 있다.’고 하였고, 홍양호(洪良浩) 역시 마천령이란 제목의 시를 쓰면서 ‘여기 오르니 동명이 생각난다. 서까래 같은 그의 붓을 어찌하면 얻을까?’라고 하여 정두경 시에 대한 찬사를 삽입하였다. 이 시의 시상 전개를 살펴보면, 시인의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함이 없이 눈앞의 자연이라는 객관적인 상황을 그대로 진술한 것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시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상황 그대로를 표현했을 뿐, 자신의 격앙되고 놀라운 감정은 자제하여 쓰지 않고 있다. 이렇게 시적 자아의 주관적 감정 표출을 하는 대신 ‘북해’라는 구체적 시어로 객관화시킨 것은 오히려 시적 효과를 극대화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산수시(山水詩)가 시상의 전개에서 시적 자아의 흥취나 감정의 삽입을 나타내는 데 비해, 정두경의 산수시는 감정을 배제한 객관적 상황의 서술을 통해 높은 기력(氣力)을 보이고 있다.” 하였다. 남은경, 東溟 鄭斗卿 文學의 硏究, 62쪽

11)驅:원주에 “어떤 데에는 ‘駐’로 되어 있다.” 하였다.

12)13수:초간본에는 모두 15수가 수록되어 있다. 빠져 있는 시는 “漢代張良學 分明老子原 辭封二萬戶 爲讀五千言”과 “渤海多風浪 關山遠別離 春天百花發 此豈一人私”이다.

13)정월이라……지내네:초봄에 강물에 얼음이 녹으면 수달이 잡은 고기를 제사 지내는 것처럼 늘어놓는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수달이 조상을 섬길 줄 안다고 여겼다. 예기》 〈왕제(王制)에 “수달이 물고기로 제사를 지낸 뒤에야 우인이 물고기를 잡으러 어량(魚梁)에 들어간다.[獺祭魚 然後虞人入澤梁]” 하였다.

14)간장검(干將劍):춘추 시대 명검을 잘 만들기로 이름 높은 오(吳)나라의 장인(匠人)인 간장이 만들었다고 하는 명검(名劍)의 이름이다.

15)오줌을……말라:유자(儒者)의 일, 문(文)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오줌을 눈 관’은 한 고조 유방(劉邦)이 유사(儒士)를 업신여기며 모욕을 준 고사를 말한다. 사기 권97 역생열전(酈生列傳)에 “패공(沛公)은 유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객 가운데에 유사의 관을 쓰고 오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그의 관을 벗기고는 그 안에 오줌을 누곤 하였다.”라고 하였다.

16)내……거를:부개자(傅介子)는 한 소제(漢昭帝) 때의 명신이고, 누란(樓蘭)은 서역(西域)의 나라 이름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대완국(大宛國)과 통하려 하였는데, 누란국이 가로막아 한나라의 사절(使節)을 공격하였다. 이에 소제 때 부개자를 보내어 누란을 쳐서 누란의 왕을 죽였다. 漢書 卷70 傅介子傳

17)산에……만났네:봄이 한창이어서 만물이 생동한다는 뜻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산량의 암꿩이 제때로구나, 제때로구나.[山梁雌雉 時哉時哉]”라고 한 일이 있다. 論語 鄕黨

18)녹수곡(綠水曲):악부(樂府)의 금곡(琴曲) 이름으로, 일명 녹수곡(淥水曲)이라고도 하고 백저가(白紵歌)라고도 한다.

19)영형가(詠荊軻):도잠(陶潛)이 지은 시의 제목으로, 전국 시대 연(燕)나라의 자객(刺客)인 형가(荊軻)가 연나라의 태자(太子) 단(丹)을 위하여 진왕(秦王)을 죽이려고 한 일을 읊은 시이다. 이 영형가에 대해 남은경은 “영형가는 전원시인으로 알려진 도연명의 시 가운데에서 독특한 시이며, 동시에 주자(朱子)에 의해서 ‘도연명의 본색을 나타낸 시’로 평가된 작품이다. 일본의 대시근문차랑(大矢根文次郞)은 ‘동진(東晉)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유유(劉裕)가 왕위를 찬탈하고 잔학한 행동을 일삼는 것을 보던 도연명은 이를 무도한 행동을 자행하던 폭군 진 시황(秦始皇)에 빗대어서 분노와 반항의 정신을 표출하였다. 이에 진 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나섰던 형가의 행동에 대해 높이 찬양하며 그 시대에도 형가와 같은 인물이 출현하길 기다리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남은경, 鄭斗卿 俠客詩의 內容과 意味, 290쪽

20)도잠(陶潛)께서……편뿐이네:이 시에 대해 남은경은 “정두경은 위대한 전원시인으로 알려진 도연명에 대하여 그의 시를 전원시로서 가치 부여를 한 것이 아니라, 형가를 노래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어, 문학에 대한 그의 지향과 형가적 인물에 대한 애착의 정도를 가늠하게 해 준다.” 하였다. 남은경, 鄭斗卿 俠客詩의 內容과 意味, 290쪽 또 “정두경은 도연명의 높은 기풍을 당대 사회에 대한 태도와 연결시켜 파악한 것이고, 이에 따라 그의 풍자적인 현실 참여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며, 그 문학에 대해 가치 부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였다. 남은경, 東溟 鄭斗卿 文學의 硏究, 36쪽

21)조룡(祖龍) 다리:진 시황(秦始皇)이 만들려고 하였던 다리를 말한다. 조룡은 진 시황을 가리킨다. 조(祖)는 시(始)의 뜻이고, 용(龍)은 군왕(君王)의 상(象)을 뜻하므로 이렇게 칭하는 것이다. 진 시황이 석교(石橋)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해가 뜨는 곳을 보고자 하자, 신인(神人)이 진 시황을 위하여 돌을 운반해 다리를 만들어 주려고 하였는데, 돌이 빨리 이동하지 않으므로 신편(神鞭)으로 치자 돌이 모두 피를 흘렸다는 고사가 있다. 三齊略記

22)전극항(全克恒):1590~1636.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덕고(德古)․덕구(德久), 호는 규천(虯川)이다. 전식(全湜)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서울을 지키라는 왕명을 받고 다시 돌아왔다가 전사하였다. 승정원일기 인조 9년(1631) 3월 14일 기사에 전극항이 전라 도사(全羅都事)에 임명된 기록이 나온다.

23)이정(離亭):길가에 있는 역정(驛亭)인데, 멀리 떠나는 사람과의 작별은 주로 역정에서 하므로 이를 이정이라고도 한다.

24)요조(繞朝) 채찍: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사회(士會)가 진(秦)나라로 망명 가 있었는데, 진(晉)나라에서는 진(秦)에서 사회의 계책을 쓸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계책을 써서 사회를 진(晉)나라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사회가 돌아올 때 진(秦)나라의 요조가 사회에게 채찍을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우리 진(秦)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여기지 말라. 나는 진(晉)나라의 계책을 알고 있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13年

25)푸른……잡아매었네:술을 사 와서 마신다는 뜻인 듯하다. 이백(李白)의 대주부지(待酒不至)에 “옥술병에 푸른 실을 매달았는데, 술 사 오는 것이 어찌하여 이리 더딜꼬.[玉壺繫靑絲 沽酒來何遲]”라고 하였다. 이백의 이 시에 대해 송계만록(松溪漫錄)에 이르기를 “이태백의 시에 ‘옥호에 청사를 달았는데, 술 사 오는 것이 왜 이리 더딜꼬.[玉壺繫靑絲 沽酒來何遲]’라고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청사(靑絲)란 것은 품질 좋은 백금(白金)이다. 술값까지 주어 보냈다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내가 한어 통사(漢語通事)에게 질문하였더니, 그렇다고 하였다. 과연 이렇게 읽으면 더욱 맛이 난다.” 하였다.

26)사람……훌륭하네:예(禮)를 안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지례(知禮) 고을의 수령으로 가는 최씨(崔氏)가 예를 몰랐던 춘추 시대의 명재상인 관중(管仲)보다 더 훌륭하다는 뜻이다. 이오(夷吾)는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명상(名相)인 관중의 이름이다. 관중은 환공(桓公)을 도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정치를 이룩하여 제후를 규합하고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 시대 오패(五霸)의 으뜸이 되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묻기를 “관중(管仲)은 검소했습니까?” 하자, 공자가 “관중은 삼귀(三歸)가 있었고 관사(官事)도 겸하지 않았으니 어찌 검소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다시 “그러면 관중은 예를 알았습니까?” 하고 물으니, 공자가 “임금이라야 병풍으로 문을 가리는데 관중도 병풍으로 문을 가렸으며, 두 나라 임금이 모여서 면담할 때라야 술잔을 올려놓는 자리를 만드는데, 관중도 술잔을 올려놓는 자리가 있었다. 그러니 관중이 예를 안다고 한다면 누군들 예를 모르겠는가.”라고 하였다. 論語 八佾

27)이자봉(李子封):누구인지 미상이다. 혹 찰방을 지낸 이호(李鄗)를 가리키는 듯하다.

28)쌍리어(雙鯉魚):두 마리의 잉어로, 서신(書信)을 말한다. 고악부(古樂府)인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 이르기를 “나그네가 먼 곳에서 여기 와서는, 두 마리의 잉어를 내게 주었네. 아이 불러 잉어를 끓이게 하니, 배 속에 비단에 쓴 편지 들었네.[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兒烹鯉魚 中有尺素書]” 하였다.

29)팽택 영(彭澤令):진(晉)나라의 은사(隱士)인 도잠을 가리킨다. 도잠이 팽택의 영(令)을 지냈으므로 이렇게 칭하는 것이다.

30)파산(巴山):중국 호북성(湖北省) 파동현(巴東縣) 서쪽에 있는 협곡의 이름으로 파협(巴峽)이라고도 한다. 그곳의 양쪽 산에는 원숭이가 많이 살아 처량한 울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31)조문수(曺文秀):1590∼1647. 서예가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실(子實), 호는 설정(雪汀)이다. 1624년(인조2) 문과에 급제하고 1647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는 설정시집이 있다.

32)유여일(柳汝一):유도삼(柳道三, 1609~?)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일(汝一), 호는 경암(敬庵)이다. 1632년(인조10)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635년 단천 군수로 있으면서 소송을 명쾌하게 처리하고 민생을 잘 보살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효종조에 승지를 지냈다.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하였다.

33)한(漢)나라의……여긴다네:유도삼이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과거 시험에 낙방하였다는 뜻이다. 가생(賈生)은 한나라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가의는 글을 잘 지었는데, 문제(文帝) 때 박사(博士)가 되어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服色)을 바꾸고, 법도(法度)를 제정하고, 예악(禮樂)을 일으켰다. 그 뒤에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로 옮겼는데, 양 회왕이 낙마(落馬)하여 죽자, 가의 역시 상심하여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33세였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34)오핵(吳翮):1615∼1653.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일소(逸少), 호는 백천당(百千堂)이다. 1646년(인조24)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지평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척화삼신전(斥和三臣傳), 만세감(萬世鑑), 백천당유고 등이 있다.

35)그……왔구나:오핵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계수나무를 꺾었다’는 말은 과거에 급제한 것을 말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오질(吳質)은 전설상의 선인(仙人)인 오강(吳剛)으로, 그의 자(字)가 질(質)이므로 오질이라고 칭한 것이다. 한나라 때 서하(西河) 사람으로, 일찍이 선도(仙道)를 배우다가 잘못을 하고 달 속으로 귀양 가서 항상 계수나무만 찍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오핵과 성이 같으므로 끌어다가 쓴 것이다.

36)서정리(徐貞履):1599~1664. 본관은 달성(達成), 자는 면중(勉仲)이며, 서성(徐渻)의 손자이고,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의 큰아들이다. 남원 부사(南原府使)와 공조 정랑을 지냈다.

37)그윽한……것일세:지음 친구를 찾아서 온다는 뜻이다. 옛날에 백아(伯牙)는 금(琴)을 잘 탔고, 종자기(鍾子期)는 소리를 잘 들었는데, 백아가 금을 타면서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아아(峨峨)하기가 태산(泰山)과 같구나.” 하였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양양(洋洋)하기가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였다. 그 뒤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다시는 금을 타지 않았다. 列子 湯問

38)팽려호(彭蠡湖):중국 남창(南昌)에 있는 호수로, 파양호(鄱陽湖)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큰 호수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39)풍악(楓岳)으로……부치다:이 시의 첫 수에 대해 남은경은 “홍만종은 장유(張維)와 이식(李植)의 시를 정두경의 시와 비교해 평하는 가운데, 이 시를 예로 들면서 ‘준일(俊逸)한 가운데 극히 한아(閒雅)하다. 이러한 풍신(風神)이나 골격(骨格)은 이태백(李太白)과 매우 흡사하니, 장유나 이식이 말하지 못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홍만종은 이 시를 평하면서 ‘빠르고 뛰어나다.’는 뜻의 준일(俊逸)함을 평어(評語)로 쓰면서, 그 가운데 지극히 한아한 정취가 있음을 높이 평가했다. 이는 정두경의 시 세계의 특징을 매우 정확히 지적한 것으로, 그의 많은 시에서 나타나는 맹렬한 기세와 빠른 속도감, 그 속에 깃들어 있는 한가(閑暇)함 또는 전아(典雅)함이야말로, 정두경의 시 세계의 개성적 요소인 것이다. 그리하여 정두경 시의 풍신이나 골격이 성당(盛唐) 시인인 이태백과 매우 흡사하다 평가되는 것이다.” 하였다. 남은경, 東溟 鄭斗卿 文學의 硏究, 97~98

40)석도안(釋道安):진(晉)나라 때 고승(高僧)으로, 불도징(佛圖澄)의 제자이다. 석가(釋迦)보다 존귀한 자가 없다 하여 석(釋)으로 씨(氏)를 삼았으니, 후세의 불도(佛徒)들이 석씨(釋氏)라고 칭호한 것이 석도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梁高僧傳 卷5 여기서는 금강산으로 가는 오산인(悟山人)을 가리킨다.

41)박장원(朴長遠):16121671.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중구(仲久), 호는 구당(久堂)․습천(隰川)이다. 1636년(인조14)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조 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개성부 유수로 재직 중에 죽었다. 저서로는 구당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42)도령(陶令):진(晉)나라의 은사(隱士)이며 시인인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팽택 영(彭澤令)을 지냈으므로 이렇게 칭하는 것이다. 자가 연명(淵明)이므로, 도연명(陶淵明)이라고도 칭하며, 집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서 있으므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도잠이 팽택현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군(郡)에서 독우(督郵)가 시찰을 나오게 되었는데, 아전이 도잠에게 독우가 오면 속대(束帶) 차림으로 맞이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도잠은 “나는 다섯 말의 쌀을 위하여 향리(鄕里)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히지 못하겠다.” 하고는, 관직을 떠나 전원으로 돌아갔다. 전원으로 돌아간 도잠은 음주(飮酒) 시에서 “동쪽 울 아래에서 국화꽃을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명구를 남겼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陶潛

43)민중집(閔仲集):민광훈(閔光勳, 1595~1659)으로,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중집(仲集)이다. 1628년(인조6)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의 수비가 허술하여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종묘서 영(宗廟署令)으로서 원손(元孫)을 데리고 인근 섬으로 피신하여 무사하게 하였다. 호조 참의를 지냈다.

44)아버지가……되었네:민광훈은 1628년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큰아들인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이 1649년(효종 즉위년)에 정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므로 한 말인 듯한데, 시가 지어진 연도를 추측해 볼 때 좀 맞지 않는다. 민광훈의 아버지 민기(閔機, 1568∼1641)는 1597년(선조3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바, 장원급제는 아니었다.

45)박길응(朴吉應):1598∼?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일(德一), 호는 진정재(眞靜齋)이다. 이안눌(李安訥)의 문인이다. 승지와 참판을 지냈다.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 학안록(學顔錄)을 지었다. 인조실록 26년(1648) 12월 17일 기사에 강원 감사 유석(柳碩)이 삼척 부사로 있는 박길응과 함께 황지(黃池)를 답사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46)백헌(白軒):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보(尙輔),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인조조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었으며, 영의정을 지냈다. 1650년(효종1)에 효종의 북벌 계획이 탄로 나 청나라의 압박으로 인해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 뒤에 다시 영원히 등용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위리안치에서 풀려나 벼슬에서 물러난 다음 광주(廣州)의 판교(板橋)와 석문(石門)에서 은거하였다. 저서로는 백헌집(白軒集)이 있다.

47)공의……떠나기에:공의 조카는 이경석의 조카인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정영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수(子修), 호는 서곡(西谷)이다. 아버지는 이경석의 동생인 이경직(李景稷)이다. 1636년(인조1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43년에 소현세자가 심양(瀋陽)으로 갈 때 사서(司書)로 시종하였다. 숙종조에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전서(篆書)와 주서(籒書)에 뛰어나 여러 작품을 남겼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총마(驄馬)는 대간(臺諫)의 관직에 있는 사람이 타는 말로, 후한(後漢) 때 환전(桓典)이 시어사(侍御史)에 제수되어 당시에 국정을 농단하던 환관(宦官)들을 조금도 꺼리지 않고 탄핵하였는데, 항상 총마를 타고 다녔으므로 경사(京師) 사람들이 모두 “총마를 탄 어사는 피해 가라.”라고 한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37 桓榮列傳 桓典

48)아름답게……하실는지요:이경석이 훌륭하게 자란 조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는 뜻이다. 사부(謝傅)는 동진(東晉) 중기의 명신(名臣)인 사안(謝安)을 가리키는데, 사안이 태부(太傅)를 지냈으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경석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옥수(玉樹)는 남의 집안의 훌륭한 자제를 예찬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이경석의 조카를 가리킨다. 옛날에 사안의 집안에는 자질이 우수한 자제들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지란옥수(芝蘭玉樹)가 뜰에서 자라난다고 하였다.

49)운한(雲漢):은하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경운한이라는 시가 있는데, 가뭄을 당해 노심초사하는 임금의 모습을 그린 시이다.

50)임우(霖雨)로다……거리:효종이 청나라의 견제로 인해 이경석을 정승으로 삼을 수가 없었으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할 것이라는 뜻이다. 임우는 장맛비로, 흔히 정승이 임금을 보필하여 나라의 어려움을 해결하도록 부탁할 때 쓰는 말인데, 서경 열명(說命)에 “큰 강을 건너게 되면 그대를 배와 노[舟楫]로 삼을 것이며, 큰 가뭄을 당하게 되면 그대를 장맛비[霖雨]로 삼을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또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훌륭한 신하를 얻는 꿈을 꾸고서 꿈속에서 본 모습을 그려 천하에 닮은 사람을 찾게 해, 부암(傅巖)이란 곳에서 제방을 쌓는 일을 하고 있던 부열(傅說)을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아 중흥의 업적을 이룩한 고사가 있으므로, ‘꿈속서도 애쓸 것’이라고 한 것이다.

51)조윤지(趙胤之):조석윤(趙錫胤, 1606∼1655)으로,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윤지(胤之), 호는 낙정(樂靜)이다. 장유(張維),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1628년(인조6)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50년(효종1)에 이경억(李慶億)을 신구하다가 파직되어 임천(林川)으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51년에는 정세규(鄭世規)를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영암(靈巖)으로 귀양 갔다가 뒤에 강계(江界)로 옮겨졌으며, 이듬해 풀려났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저서로는 낙정집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52)곁에……웃누나: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충신이었던 굴원이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어 국정(國政)을 행하다가 여러 대부들의 시기를 받아 조정에서 쫓겨나 강담(江潭)에서 노닐 적에 어부(漁父)가 쫓겨난 까닭을 묻자, 굴원이 “온 세상이 모두 흐린데 나만이 홀로 깨끗하고, 온 세상이 모두 취하였는데 나만이 홀로 깨어 있기 때문에 추방을 당했다.” 하였다. 그러자 그 어부가 그 말을 듣고는 빙그레 웃고 뱃전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창랑(滄浪)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을 것이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내 발을 씻으리라.” 하였다.

53)산음(山陰):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의 남동쪽에 있는 회계산(會稽山)의 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진(晉)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산음에 살았는데, 한밤중에 눈이 내리자 친구인 대규(戴逵)가 갑자기 생각났다. 이에 즉시 밤을 새워 배를 타고 대규가 사는 집 문 앞까지 갔는데,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나는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온 것이다.” 하였다. 世說新語 任誕

54)조 원외(趙員外):조수인(趙守仁)을 가리키는 듯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55)강홍익(姜弘益):자는 여수(汝受)이다. 효종실록 3년(1652) 2월 2일 기사에 김자점(金自點)의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 국청(鞫廳)에 참여한 공로로 도사(都事) 강홍익을 승진시키라는 내용의 기사가 나오며, 국역 택당집(澤堂集) 5 별집 제10권 호조 판서 증 우의정 이공(李公)의 시장(諡狀)에 강홍익이 이경직(李景稷)의 사위라는 기사가 나온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648년(인조26)에는 선공감 감역, 1652년(효종3)에는 전의 현감, 1658년에는 신계 현령(新溪縣令)을 지냈다.

56)이정(離亭):길가에 있는 역정(驛亭)인데, 멀리 떠나는 사람과의 작별은 주로 역정에서 이뤄지므로 이를 이정이라고도 한다.

57)오마(五馬):말 다섯 마리가 끄는 수레로, 태수가 부임할 적에 이 수레를 타고 갔으므로, 한 고을의 수령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58)윤지(胤之):조석윤(趙錫胤, 1606∼1655)의 자(字)이다. 252쪽 주51 참조.

59)밝은……있네:조석윤이 강계(江界)에 귀양 가 있다는 뜻이다. 반희(班姬) 부채는 조석윤을 의미한다. 반희는 한나라 성제(成帝) 때의 궁녀인 반 첩여(班婕妤)로, 반 첩여가 성제의 사랑을 받다가 조비연(趙飛燕)에게 참소당하여 총애를 잃자, 이를 상심하여 지은 원가행(怨歌行)에 “흰 비단을 새로 짜개니 깨끗하기 눈서리 같고, 이것으로 합환선을 만드니 둥실하기 밝은 달 같았네. 임금의 품속에 드나들면서 흔들어 실바람 내었나니, 항상 두려운 건 가을이 와서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빼앗아, 상자 속에 버려져서 은정이 중도에 끊어짐일세.[新裂齊紈素 皎潔如霜雪 裁爲合歡扇 團團似明月 出入君懷袖 動搖微風發 常恐秋節至 涼颷奪炎熱 棄捐篋笥中 恩情中道絶]”라고 하였다.

60)임한백(任翰伯):1605∼1664.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경익(景翼), 호는 남곡(南谷)이다. 1642년(인조20)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1644년에 사서(司書)로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에 볼모로 갈 때 배종하였다. 길주 목사(吉州牧使)를 지냈다. 시문에 뛰어난 재능을 지녀 당시의 팔대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61)어천(魚川):조선 시대 평안도 영변(寧邊)의 어천역(魚川驛)으로, 찰방이 주재하였다.

62)쌍리어(雙鯉魚):두 마리의 잉어로, 서신(書信)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235쪽 주28 참조.

63)박일성(朴日省):1599∼1671.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학로(學魯)이다. 1625년(인조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인조조에 장령 등을 지냈고, 효종이 즉위한 뒤에 고성 현감(高城縣監)을 지냈으며, 현종조에 승지 등을 지냈다.

64)동해에는……봤네:상대방이 있는 고성(高城)과 접한 동해 바다에서는 밀물 썰물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 잉어를 통해 편지를 보낼 수가 없는 탓에 상대방이 보내는 편지를 못 받아 보았다는 뜻이다.

65)장응일(張應一):1599∼1676.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경숙(經叔), 호는 청천당(聽天堂)이며, 장현광(張顯光)에게 입양되었다. 1673년(현종14)에 공조 참의로 있던 중 영릉(寧陵)의 변(變)의 진상을 밝히려 하다가 무고를 당하여 황간(黃澗)으로 귀양 갔다. 숙종조에 부제학, 대사간 등을 지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66)經:대본에는 ‘京’으로 되어 있는데,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67)백설(白雪) 노래:백설은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고아(高雅)한 가곡으로, 일반적으로 고상하고 아취 있는 곡이나 아름다운 시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68)행로난(行路難):세상길이 험난함을 읊으면서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악부가사(樂府歌辭)의 곡 이름이다. 송(宋)나라 포조(鮑照)가 처음 지은 뒤로 수많은 작품이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이백(李白)이 지은 행로난이 가장 유명하다.

69)다시금……가득하네:당나라 시인인 맹호연(孟浩然)이 눈이 내리는 속에 비쩍 마른 나귀를 타고 장안(長安)의 동쪽에 있는 패교(覇橋)에 가서 매화를 구경한 일이 있었으므로, 송나라 소식(蘇軾)의 시 증사진하충수재(贈寫眞何充秀才)에 “또한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서 나귀를 탄 맹호연이 이마 잔뜩 찌푸린 채 시 지으며 잔뜩 웅크리고 있는 거를.[又不見 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이라는 구절이 있다. 후대에는 이 시경(詩景)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 많이 나왔다.

70)강유(姜瑜):1597∼1668.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공헌(公獻), 호는 상곡(商谷)이다. 1624년(인조2)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1651년(효종2)에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되었으며, 1653년 강계 부사에 제수되었다. 현종조에 강릉 부사, 호조 참의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상곡집이 있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71)수항정(受降亭):평안도 만포(滿浦)에 있는 정자로, 오랑캐들로부터 항복을 받는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은 정자이다. 1531년(중종26)에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있던 장언량(張彦良)이 세웠다.

72)독서함엔……길이리:글공부를 부지런히 하면 평탄한 길을 가듯 입신양명의 길을 쉽사리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73)도령(陶令):진(晉)나라의 은사(隱士)이자 시인인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잠이 팽택 영(彭澤令)을 지냈으므로 이렇게 칭하는 것이다. 246쪽 주42 참조.

74)응진(應眞):범어(梵語)인 나한(羅漢)을 의역(意譯)한 말로, 진도(眞道)를 터득한 사람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승(僧)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응진이 석장(錫杖)을 날려 허공을 밟고 다닌다.[應眞飛錫以躡虛]”라는 표현이 있다.

75)이후응(李後膺):관향은 가평(加平), 자는 사규(士規)이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인 듯하나, 자세하지는 않다.

76)최유지(崔攸之):1603∼1673.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자유(子有), 호는 간호(艮湖)이다. 1646년(인조24)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효종조에 김제 군수를 지냈으며, 현종조에 장령, 집의, 교리 등을 지냈다. 강진의 수령이 된 해는 분명치 않으나 승정원일기 효종 7년(1656) 4월 29일 기사를 참고해 볼 때 1655년 무렵으로 보인다.

77)청조루(聽潮樓):강진현(康津縣) 객관(客館) 남쪽에 위치한 누대로, 현감(縣監) 오순종(吳舜從)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78)송명보(宋明甫):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인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을 가리킨다. 송준길은 자가 명보(明甫)이고 호가 동춘당(同春堂)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고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청좌와(淸座窩) 송이창(宋爾昌)의 아들로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문장과 글씨에 능했고, 영조(英祖)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동춘당집(同春堂集)어록해(語錄解) 등이 있다.

79)김구(金絿):1488∼1534.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菴) 또는 율곡병수(栗谷病叟)이다. 사림파의 일원으로서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과 친하게 지내다가 기묘사화 때 개령(開寧)에 유배되었으며 2년 뒤에 풀려나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자암집(自菴集)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80)장평자(張平子)의 시:평자는 후한(後漢)의 시인인 장형(張衡)의 자(字)이다. 시는 장형의 사수시(四愁詩)를 가리킨다.

81)이선경(李先慶):1617~? 본관은 한산(韓山), 자(字)는 비승(丕承)이다. 1654년(효종5)에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1672년(현종13) 별시(別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병조 좌랑을 지냈다.

82)종자기(鍾子期)가……부누나:거문고 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없으므로 타지 않는다는 뜻이다. 243쪽 주37 참조.

83)서정리(徐貞履):1599~1664. 본관은 달성, 자는 면중(勉仲)이며, 서성(徐渻)의 손자이고,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의 큰아들이다. 남원 부사와 공조 정랑을 지냈다.

84)최유연(崔有淵):1587∼?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성지(聖止)․성지(聖之)․지숙(止叔), 호는 현암(玄巖)․현석(玄石)이다. 1621년(광해군13)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1623년(인조1) 개시 문과(改試文科)에 갑과(甲科) 2등으로 급제하였다. 인조조에 지평과 승지를 지냈다. 학문이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현암유고(玄巖遺稿)가 있다.

85)노련(魯連)에겐……않았으며:노련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 사람인 노중련(魯仲連)을 말한다. 일찍이 노중련이 조(趙)나라에 머물러 있을 적에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다. 그때 조나라에 와 있던 위(魏)나라의 신원연(辛垣衍)이 조나라로 하여금 진나라 왕을 황제(皇帝)로 추대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노중련이 신원연을 만나서 진나라가 무도한 나라임을 역설한 뒤, “만일 진나라를 황제로 추대한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진나라 백성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며 중지시키니, 진나라 군사들이 퇴각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86)제갈량(諸葛亮)은……있었다네:제갈량이 남양(南陽)의 등현(鄧縣)에 숨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곳을 융중(隆中)이라고 불렀다. 유비(劉備)가 그곳으로 세 번을 찾아가 제갈량을 만나 함께 한나라 황실을 부흥하려고 하였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注

87)울타리에……마시고:관직을 떠나 전원으로 돌아갔다는 말이다. 전원으로 돌아간 도잠(陶潛)은 음주(飮酒) 시에서 “동쪽 울 아래에서 국화꽃을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명구를 남겼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陶潛

88)지당(池塘)에서……읊네: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시인인 사영운(謝靈運)이 시를 짓다가 막혔는데, 꿈속에서 사혜련(謝惠連)을 만나 보고는 영감이 생겨서 “연못에는 봄풀이 새로 돋았고, 버들에선 새들 울음소리 변하네.[池塘生春草 園柳變鳴禽]”라는 유명한 시구를 얻었다고 한다.

89)목겸선(睦兼善):1609∼?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달부, 호는 용재(容齋)이다. 1644(인조22)의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효종 때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현종조에 수찬,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90)오환(烏桓):본래 동호(東胡)의 별종으로, 한나라 때 흉노에게 멸망당하였는데, 나머지 종족들이 오환산(烏桓山)으로 도망쳐 들어가 살면서 산의 이름을 종족명으로 삼았다.

91)역수(易水)의……모르겠네:전국 시대 연(燕)나라의 자객(刺客) 형가(荊軻)가 진왕(秦王)을 죽이려고 떠날 때 역수 가에서 “차가운 역수 가에 바람결 쓸쓸한데, 장사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라는 노래를 부른 고사가 있다. 戰國策 燕策3

92)새상곡(塞上曲):고대의 악부(樂府) 가운데 하나로, 북쪽 변경 지역의 풍정을 노래한 것이다. 한나라의 횡취곡(橫吹曲)에서 나왔다.

여운필(呂運弼)은 이 시에 대해, “새상곡은 당대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신악부로, 왕창령과 이백 이래로 무수한 시인들이 의작을 남긴 변새시제(邊塞詩題)이다. 이 시는 지금의 몽고 지역에 있는 장수가 천산(天山)까지 사냥을 다니면서 호기를 부리는 모습을 제재로 하여, 번장의 웅대한 기상을 꾸밈없이 묘사하는 방식으로 호방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 대해서는 섬세한 묘사를 생략하고서도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듯이 느끼게 한다는 평가가 있다.” 하였다. 여운필, 東溟 鄭斗卿의 詩世界, 253

93)화문(花門):거연해(居延海)에서 북쪽으로 300리 되는 곳에 있는 산 이름으로, 당나라 초기에 보루를 설치하고서 오랑캐의 침입을 막았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회흘(回紇)에게 점령당하였다. 뒤에는 이로 인해 회흘의 대칭(代稱)으로 쓰이게 되었다.

94)천산(天山):감숙성(甘肅省) 청해(靑海)에 있는 산으로, 흉노족들이 기련산(祁連山)이라고 부르는 산이다. 흔히 서쪽 오랑캐들이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95)새하곡(塞下曲):새상곡(塞上曲)과 같으며, 왕유(王維), 이하(李賀), 이백(李白)의 새하곡이 대표적이다.

96)금미산(金微山):중국 변방의 산으로 진한(秦漢) 때 전쟁이 잦았던 곳이다. 금휘(金徽)라고도 하며 지금은 아이태산(阿爾泰山)이라 한다. 후대의 시문(詩文)에서 이 산을 변새(邊塞), 또는 변새의 전쟁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당(唐)나라 우세남(虞世南)의 시에 “봉화는 금미에서 나오고, 연이은 군영은 무위를 내도다.[烽火發金微 連營出武威]” 하였다. 全唐詩 卷19

97)靑海:원주에 “어떤 데에는 ‘千里’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98)묵특(冒頓)……돌아오네:묵특은 한(漢)나라 때 흉노(匈奴) 추장의 이름이다. 청해(靑海)는 중국 중부의 서쪽에 있는 지명이다. 황하의 발원이 되는 호수인 청해가 있어서 이렇게 이름 붙였으며, 서쪽 변경의 오랑캐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월지(月支)는 한나라 때 서역(西域)에 있던 나라로, 감숙성(甘肅省)과 청해현(靑海縣), 서령현(西寧縣) 일대에 있었다. 이 시에서 묵특이나 청해, 월지 등은 북쪽 변경의 풍정을 묘사하기 위해 끌어다가 쓴 것이다.

99)청루곡(靑樓曲):악부 잡곡가사의 곡 이름으로, 왕창령(王昌齡)과 우분(于濆)의 청루곡이 대표적이다. 청루는 푸른색으로 칠해 아름답게 장식한 누각으로, 흔히 기원(妓院)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100)나부(羅敷):전국 시대 미녀의 이름이다. 전국 시대 한단(邯鄲) 사람인 진씨(秦氏)에게 나부라는 딸이 하나 있어 같은 고을 사람으로 낮은 벼슬자리에 있는 왕인(王仁)의 아내가 되었는데, 왕인이 뒤에 조왕(趙王)의 가령(家令)이 되었다. 나부가 어느 날 밭두둑에 나가 뽕을 따고 있었는데, 조왕이 누대에 올라가 이를 바라보다가 나부의 미모에 혹하여 나부를 불러 술을 먹이고는 겁탈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나부가 쟁(箏)을 뜯으면서 맥상가(陌上歌)를 불러 거절하였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사또님은 아내가 있고, 나부는 남편이 있습니다.[使君自有婦 羅敷自有夫]” 하였으므로, 조왕이 겁탈하지 못하였다. 古今注 音樂

101)초궁사(楚宮詞):궁사(宮詞)는 옛날의 시체(詩體) 가운데 하나로, 궁중 생활의 자잘한 일들에 대해 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칠언절구의 시가 많으며, 당나라 때 크게 유행하였는데, 왕건(王建)의 궁사가 특히 유명하다. 초궁사는 초나라 궁중의 일을 읊은 것이다.

102)사냥 나간 군왕: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양왕(襄王)을 말한다. 양왕이 운몽택(雲夢澤)에서 사냥을 하다가 무산(巫山)의 신녀(神女)와 노닌 고사가 있다.

103)담로(湛盧):춘추 시대 월(越)나라 사람인 구야(歐冶)가 만든 명검의 이름인데, 월나라 왕이 이 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04)장화대(章華臺):춘추 시대 초나라 영왕(靈王)이 호북성(湖北省) 감리현(監利縣) 서북쪽에 지은 누대로, 많은 비용을 들여 화려하게 꾸몄다고 한다.

105)풍호자(風胡子):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칼을 잘 감정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106)한수(漢水)에다 방성(方城):한수는 양자강의 지류로, 초나라 수도인 영(郢) 땅 옆으로 흐르는 강이다. 방성은 초나라의 산 이름이다. 초나라 굴완(屈完)이 제 환공(齊桓公)에게 “우리 초나라는 방성으로 성을 삼고 한수로 못을 삼으니, 아무리 많은 군대가 있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4年

107)무산(巫山):사천성(四川省) 무산현(巫山縣)에 있는 산으로, 열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양왕(襄王)이 고당(高唐)이라는 누대에서 머물다가 꿈속에서 무산의 선녀(仙女)를 만나 놀았는데, 그 선녀가 이별하는 즈음에 말하기를 “첩은 무산의 남쪽 고구(高丘)의 산속에 사는데, 아침이면 떠가는 구름이 되고 저녁이면 내리는 비가 되어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양대(陽臺)의 아래로 내려옵니다.” 하였다고 한다.

108)장화대(章華臺)는……것이네:유성준은 이 시를 “밝고 화려함 멀리 흰 구름 새로 드러나고, 옥가마는 봄놀이 하는데 밤에도 돌아오지 않네. 한수의 넓은 지역이 모두 초 땅인데, 군왕은 오직 무산에 순행간다네.”라고 번역하였다. 유성준, 李朝 鄭斗卿詩의 道仙風考, 중국연구 제24집,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1999, 112쪽 이는 장화대와 방성(方城)이 고유명사임을 모르고서 잘못 번역한 것이다.

109)난대(蘭臺)에서……거는:난대는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누대 이름이다. 초나라 양왕(襄王)이 난대에서 노닐 때 송옥(宋玉)이 함께 모시고서 풍부(風賦)를 읊은 일이 있다. 文選 卷7 風賦 序

110)양춘백설(陽春白雪):전국 시대 초나라의 고아(高雅)한 가곡 이름인데, 일반적으로 고상하고 아취 있는 곡이나 아름다운 시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옛날에 노래를 잘 부르는 어떤 사람이 영(郢)에서 처음에 보통 유행가인 하리파인(下里巴人) 같은 것을 불렀더니, 같이 합창하여 부르는 자가 수백 명이 있었다. 그러나 격조가 높은 노래를 부르니 따라서 합창하는 자가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고, 양춘백설이라는 최고급의 노래를 부를 적에는 따라 부르는 자가 아주 없었다고 한다.

111)운몽택(雲夢澤):초(楚) 지방에 있는 호수 이름으로, 옛날에 초나라의 왕들이 이곳에서 사냥을 하며 놀았다.

112)소년행(少年行):악부(樂府) 잡곡가사(雜曲歌辭)의 곡 이름인데, 주로 젊은이들이 생명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중히 여겨 임협 유락(任俠游樂)하는 일을 노래하였다. 왕유(王維), 이백(李白), 두보(杜甫), 두목(杜牧)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113)맥상상곡(陌上桑曲):전국 시대 한단(邯鄲)에 살던 여인인 나부(羅敷)가 부른 맥상가(陌上歌)를 말하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사또님은 아내가 있고, 나부는 남편이 있습니다.[使君自有婦 羅敷自有夫]” 하였다. 277쪽 주100 참조.

114)추호 부인(秋胡婦人)……않는다네:아내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다른 여인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추호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인데, 그의 아내가 시집온 지 5일 만에 그는 진(陳)에 부임하였다. 그로부터 5년 뒤에야 돌아오다가 길가에서 뽕을 따는 부인을 보고 좋아하여 금(金)을 주자, 그 부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 버렸다. 추호가 자기 집에 와서 보니 아까 그 부인이 바로 자기 아내였다. 그 부인은 자신을 유혹한 사람이 바로 자신의 남편임을 알고는, 남편의 불효(不孝)와 불의(不義)를 꾸짖고 강물에 투신자살하였다.

115)종군행(從軍行):악부(樂府) 상화가사(相和歌辭)의 곡 이름으로, 대부분 변방의 정황과 군사들의 생활을 읊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좌연년(左延年)의 작품이며, 이후 많은 작가들이 이를 읊었는데, 당나라 왕창령(王昌齡)의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116)계문(薊門):북경(北京) 덕승문(德勝門)의 서북쪽 지역으로, 춘추전국 시대 연(燕)나라 땅이다. 계구(薊丘)라고도 하며, 지금은 토성관(土城關)이라고 한다. 시에서는 흔히 북쪽 변경 지역을 말할 때 끌어다가 쓴다.

117)장군께선……했네:장군은 후한(後漢)의 명장인 반초(班超)를 가리킨다. 반초가 어려서 턱 모양이 제비턱 같았는데, 관상가가 보고는 만리후(萬里侯)가 될 상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반초는 서역을 정벌하여 각지의 난을 평정하고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118)규원(閨怨):젊은 부인의 애원(哀怨)을 소재로 하여 읊은 시를 총칭하는 말로, 규원시(閨怨詩), 규원사(閨怨詞) 등이 있으며, 왕창령(王昌齡)과 유신(庾信)의 작품이 유명하다.

119)망행인곡(望行人曲):악부 횡취곡사(橫吹曲辭)의 곡 이름으로, 당나라 왕건(王建)과 장적(張籍)의 작품이 유명하다.

120)감천궁(甘泉宮):섬서성(陝西省) 감천산(甘泉山)에 있는 한나라 때의 궁전으로, 본디는 진(秦)나라의 궁궐이었는데, 한나라 무제(武帝)가 증축하였다. 한 무제가 이곳에서 제후 왕들의 조회를 받고 외국의 사신들에게 잔치를 열어 주었다.

121)꽃향기를……나네:고시(古詩)에 이르기를 “뜨락에는 고운 나무 자라나 있어, 잎 푸르고 꽃은 활짝 피어 있다네. 나뭇가지 잡고서는 꽃가지 꺾어, 그리운 님 있는 곳에 보내려 하네. 그 꽃향기 소매 가득 들었으나, 길 멀어서 보내 줄 길이 없구나. 이런 꽃이 귀할 것이 뭐가 있으랴, 이별 한만 되레 더욱 들게 하는걸.[庭中有奇樹 綠葉發華滋 攀條折其榮 將以遺所思 馨香盈懷袖 路遠莫致之 此物何足貴 但感別經時]” 하였다. 文選 卷15

122)어양(漁陽):하북성(河北省) 소속의 고을 이름인데, 진(秦)나라 때 진승(陳勝)이 이곳에서 수자리를 살다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당나라 때에는 안녹산(安祿山)이 이곳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123)진천(秦川)……끊기누나:진천은 섬서성(陝西省)과 감숙성(甘肅省)의 진령(秦嶺) 이북으로, 춘추 시대에 진(秦)나라에 속했던 곳이라 이렇게 부른다. 농수(隴水)는 섬서성의 농현(隴縣) 서북쪽에 있는 농산(隴山)에서 발원하는 물인데, 이 지역은 중국 서쪽 변경의 요해처이므로 흔히 변경 지방에 있는 물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124)명비원(明妃怨):악부(樂府) 금곡가사(琴曲歌辭)의 곡 이름으로, 명비는 한 원제(漢元帝)의 후궁인 왕소군(王昭君)을 가리킨다. 원제는 후궁이 매우 많았으므로 화공(畫工)을 시켜 궁인(宮人)의 초상을 그리게 하여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든 궁인을 골라서 자곤 하였으므로, 많은 궁인들이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바쳐 자기 초상을 잘 그려 주도록 하였다. 그런데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아 화공 모연수(毛延壽)가 그의 초상을 좋지 않게 그림으로써 끝내 원제의 사랑을 받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흉노(匈奴)의 선우(單于)가 입조(入朝)하여 미인(美人)을 요구하자, 원제의 명에 의하여 흉노의 선우에게 보내지게 되었는데, 융복(戎服)을 입고 말에 올라 비파(琵琶)를 타면서 변새(邊塞)를 나갔다. 흉노로 떠날 적에 원제가 그를 불러서 보니, 이전에 본 초상과는 매우 다른, 후궁 가운데 제일의 미인이었음을 알게 되어, 결국 뇌물을 받은 모연수 등 여러 화공은 기시형(棄市刑)에 처해졌다.

125)옥문(玉門):중국과 서역(西域)의 경계 지역에 있는 옥문관(玉門關)으로, 흔히 변경으로 가는 관문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126)우전(于闐):한나라 때 총령(蔥嶺)의 북쪽에 있던 나라로, 구살단나(瞿薩旦那), 굴단(屈丹), 환나(渙那)로 표기하기도 한다.

127)감천궁(甘泉宮)의……격했거니:한나라가 아득하니 먼 곳에 있다는 뜻이다. 감천궁은 섬서성(陝西省) 감천산(甘泉山)에 있는 한나라 때의 궁전으로, 한 무제(漢武帝)가 제후 왕들의 조회를 받고 외국의 사신들에게 잔치를 열어 주던 곳이다. 옥수(玉樹)는 한 무제가 감천궁의 밖에 신명전(神明殿)을 짓고 신들을 위하여 보옥으로 나무를 만들어 세운 것을 말한다.

128)연산(燕山):몽고 지방에 있는 연연산(燕然山)으로, 항애산(杭愛山)이라고도 불린다. 흉노족들의 관할 하에 있는 산인데, 중국의 변새(邊塞)에서 3천 리나 떨어져 있다고 한다. 전하여 중국의 북쪽 변경에 있는 산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129)화사(畫師):한나라 때의 화가인 모연수(毛延壽)를 가리킨다. 왕소군은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탓에 모연수가 그림을 추하게 그렸으므로 원제의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하고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갔다.

130)변방……있었으리:명비가 흉노에게 시집가지 않고 한나라 궁궐에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원제로부터 버림을 받고 쓸쓸하게 지냈을 것이라는 뜻이다.

131)미앙궁(未央宮):한(漢)나라의 유명한 궁전으로, 한 고조(漢高祖) 때 소하(蕭何)가 지었다. 그 터는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서북쪽에 있다.

132)상수(湘水)……난(蘭):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굴원이 조정에서 방축(放逐)되어 상강(湘江) 가에 머물 적에 난초로 띠를 매고 다녔다. 상수는 초나라에 있는 강의 이름이다.

133)명비(明妃)……있었으랴:여운필은 이 시에 대해 “이 시는 후궁인 왕소군을 흉노에게 시집보내는 한 원제(漢元帝)를 비판하는 가운데, ‘궁인에게도 그러하였으니 초야의 이름 없는 백성에게야 어떠하였으랴.’ 하는 개성적 의견을 덧붙였다. 결국 원제가 후궁뿐만 아니라 백성까지 바르게 대하지 않았으리라고 비판하고자 한 것이 주지이다.” 하였다. 여운필, 東溟 鄭斗卿의 詩世界, 279쪽 여운필의 이 시에 대한 이 해설은 잘못된 듯하다. 마지막 구절의 ‘유란(幽蘭)’은 초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을 가리키는 것으로, 시 전체의 뜻은, 가까이 있는 미인조차 못 알아보았으니, 멀리 있는 충신은 더더욱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134)달에……돌아오매:명비의 남편인 선우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온다는 뜻이다. 선우는 흉노족 군장(君長)의 칭호이다. 흉노족의 풍속에 선우는 아침에 군영에서 나와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면서 절을 하고, 저녁에는 달을 향해 절한다고 한다. 史記 卷110 匈奴列傳

135)옥……떨어지네:명비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는 뜻이다. ‘옥젓가락 같은 눈물’은 미녀가 줄줄 흘리는 눈물을 말한다.

136)음산(陰山):오늘날의 하투(河套) 이북과 대막(大漠) 이남에 있는 여러 산의 통칭으로, 흔히 중국 북방의 산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137)명월(明月)의……흐르누나:삼협(三峽)은 양자강(揚子江) 상류의 험난하기로 유명한 세 협곡으로,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의 합칭이다. 악부의 금곡가사(琴曲歌辭) 가운데 명월인(明月引)명월가(明月歌)가 있으며, 또 삼협류천가(三峽流泉歌)가 있다.

138)초인(楚引):옛날 금곡(琴曲)의 이름이다. 초나라 사람인 용구고(龍丘高)가 여러 해 동안 객지를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초 지방이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읊었다고 한다.

139)기주(蘷州):중국의 사천성(四川省) 동북방에 있는 지명으로, 지금의 봉절현(奉節縣) 지역이다.

140)말……시름이네:명비(明妃)가 흉노의 땅으로 갈 적에 비파를 들고 변방 땅을 지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비파를 뜯었다. 이에 한나라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 마상성(馬上聲)이라는 노래를 지었다.

141)계륜(季倫):진(晉)나라 때 부호(富豪)로 이름난 석숭(石崇)의 자이다. 석숭의 애첩인 녹주(綠珠)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당시의 권력자인 손수(孫秀)가 녹주를 빼앗으려고 하다가 실패하자, 석숭을 모함해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녹주는 석숭과 함께 놀던 누대에서 떨어져 자살하였다. 그 전에, 한나라 때 사람들이, 명비가 흉노에게 시집가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명군(明君)이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석숭의 애첩인 녹주가 춤을 잘 추었으므로, 석숭이 이 곡을 가르쳤으며, 또 스스로 명군이라는 노래를 지어 녹주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그 노래에 이르기를 “나는 본디 한나라의 여인이건만, 선우에게 시집가는 신세 되었네. 옛날에는 갑 속에 든 옥이었건만, 이제부턴 거름 속의 꽃 신세라네.[我本漢家子 將適單于庭 昔爲匣中玉 今爲糞土英]” 하였다. 舊唐書 卷29 音樂志2

142)황하(黃河)에……노래했네:이 시에 대해 여운필은 “이 시의 전구(轉句)까지의 내용은, 흥미와 비극성 등으로 인하여 악부시의 가장 인기 있는 제재가 되었던 왕소군 소사를 다룬 시에 흔히 나타나는 시적 정서이다. 그러나 결구(結句)에서 원제와 왕소군의 관계를 계륜과 녹주의 관계로 환치시킨 발상은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원제가 왕소군을 매정하게 보낸 일을 계륜이 녹주와 방탕하게 즐긴 뒤에 곤경에 처하자 원망하였던 일에 연결시킨 의견은 전대에서 찾기 어려운 독창적 착상이다.” 하였다. 여운필, 東溟 鄭斗卿의 詩世界, 280쪽 이 가운데 뒷부분의 해설은 녹주가 왕소군의 일을 노래로 지어 부른 고사를 모르고서 잘못 해설한 것인 듯하다. 녹주가 왕소군의 고사를 가지고 자신이 직접 노래를 지어 부른 고사가 구당서(舊唐書) 권29 음악지(音樂志) 2에 나온다.

143)궁원(宮怨):악부 상화가사의 곡 이름이다.

144)홍안(紅顔)……있네:얼굴이 수척해진 것이 음식을 못 먹어서가 아니라 임금 은총을 받지 못해 그렇다는 뜻이다. 옛날에 연(燕)나라 왕이 자신의 동생을 제(齊)나라에 볼모로 보내려고 하자, 태후(太后)가 이를 걱정하여 얼굴이 수척해졌다. 이에 제나라 사신인 진취(陳翠)가 태후를 뵙고 “태후께서는 어찌하여 그리 수척해지셨습니까?” 하자, 태후가 “선왕(先王)께서 내게 오리 고기 등 맛있는 음식을 주어서 수척할 일이 없는데, 지금 수척해진 것은 나의 아들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戰國策 燕策2

145)협객행(俠客行):악부 잡곡가사(雜曲歌辭)의 곡 이름으로, 이백(李白)과 원진(元稹) 등의 작품이 있다.

남은경은 정두경의 시에 나오는 ‘협객(俠客)’이라는 시어에 대해 “정두경의 한시 작품 중에는 협객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협(俠)이란 것은 ‘의기를 가지고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도와주는 것’으로, 협객이란 이러한 협기(俠氣)가 있는 사람을 뜻한다. 협객은 그의 시어로, 또는 시 제목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협객적 인물이 등장하는 시로는 협객편(俠客篇) 2, 협객행(俠客行) 7, 자객가(刺客歌)연가행(燕歌行), 영사(詠史), 장안(長安) 삼십운, 소년행(少年行) 등이 있다.” 하였다. 또 “정두경이 그려낸 협객의 모습은 같은 제목 하에 쓰여진 이백(李白)이나 원진(元稹), 온정균(溫庭筠) 등의 시에 나타나는 협객과 변별성을 보인다. 중국 악부시에 나타난 협객은 유협(遊俠)의 모습에 가깝다. 그들의 모습은 자신만만하고 낭만적인 색채가 강하다. 그러나 정두경이 그려낸 협객들은 장렬하지만 비극적 최후를 맞는 형가(荊軻) 등의 자객(刺客)이 중심인물로 많이 등장하여 보다 더 비극적이고 무겁다.” 하였다. 남은경, 鄭斗卿 俠客詩의 內容과 意味, 292298

146)축(筑)을……불렀거니:전국 시대 연(燕)나라의 자객(刺客) 형가(荊軻)가 태자(太子) 단(丹)을 위하여 진왕(秦王)을 죽이려고 떠날 때, 역수(易水) 가에서 “차가운 역수 가에 바람결 쓸쓸한데, 장사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라는 노래를 부르고 진나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알현 자리에서 진왕을 찌르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죽음을 당했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荊軻

147)연(燕)나라의 태자 단(丹):연나라의 태자인 단은 진(秦)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으면서 고초를 겪다가 간신히 연나라로 돌아온 뒤에 형가(荊軻)를 보내서 진 시황(秦始皇)을 척살(刺殺)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에 진 시황이 노(怒)하여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태자하(太子河)로 도망쳤다가 죽었다.

148)축(筑)을……마소:남은경은 이 시에 대해 “이 시는 연 태자 단의 자객으로서 진나라로 향해 떠나가는 형가가 역수 가에서 마지막 이별하는 장면을 그린 시이다. 정두경은 형가의 이야기에 대해 몹시 애착을 가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역수 가에서의 마지막 이별 장면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준 듯, 여러 차례 시의 소재로 차용되어 나타나고 있다.” 하였다. 또 “정두경은 왕자가 청나라로 끌려가게 된 당대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당대 상황을 해결할 능력 있는 인물을 그리워했는데, 정두경이 시 속에 등장시킨 인물은 바로 형가였다.” 하였다. 남은경, 東溟 鄭斗卿 文學의 硏究, 105․293쪽

149)한단(邯鄲)에서……취하였네:조(趙)나라의 호걸들이 노는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한단은 전국 시대 조나라의 서울이다. 총대(叢臺)는 한단에 있던 누대로, 몇 개의 대가 잇대어 있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조나라의 처사인 모공(毛公)은 노름꾼들 사이에서 숨어 지냈고, 설공(薛公)은 술을 파는 사람들 속에서 숨어 지내면서 그들과 교분을 맺었다.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이 조나라에 와서 머물러 있을 때 이들 두 사람을 상객(上客)으로 대우하였다. 史記 卷77 魏公子列傳

150)무령왕(武靈王)이……떠드누나:전국 시대 조나라 무령왕이 백성들의 용맹성을 고취시키고자 하여 자신이 직접 호복(胡服)을 입고 말타고 활쏘는 방법으로 백성을 교련시켰는데, 이로 인해 조나라는 국토를 많이 넓힐 수가 있었다. 동호(東胡)는 서북쪽 오랑캐 종족의 이름이다. 史記 卷110 匈奴列傳

151)한해(瀚海):몽고의 항원산(杭爰山)에 대한 음역(音譯)이다. 한나라 때 곽거병(霍去病)이 이곳에 여섯 번 출정하여, 멀리 사막을 건너고 봉선(封禪)을 행하며 한해에 등림(登臨)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여기서는 변경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152)살기……내걸었네:광류거(廣柳車)는 덮개가 있는 짐수레이다. 한 고조(漢高祖)가 과거에 여러 번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항우(項羽)의 장수 계포(季布)에 대해 현상금을 걸고 그를 숨겨 주는 자는 삼족을 멸할 것이라는 명을 내렸다. 복양(濮陽)의 주씨(周氏)가 계포를 숨겨 주고 있다가 발각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계포의 머리를 깎고 목에 사슬을 채우고 갈포 옷을 입혀 노예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런 다음 광류거에 실어 협객(俠客)인 노(魯)의 주가(朱家)에게 값을 받고 파는 형식으로 넘겨 주었다. 계포가 주가의 집 종이 되어 있을 때 등공(滕公)이 그의 훌륭함을 알고 한 고조에게 그를 채용하도록 설득하였다. 이에 한 고조가 사면령을 내리고 등용하자, 계포는 한 고조를 섬겨 명신(名臣)이 되었다. 史記 卷100 季布列傳

153)운중(雲中):옛 군(郡)의 이름으로,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땅에 속했고, 진(秦)나라 때 군을 두었다. 일반적으로 변방 지역을 말하는바, 여기서는 변방의 뜻으로 쓰였다.

154)소년행(少年行):악부(樂府) 잡곡가사(雜曲歌辭)의 곡 이름인데, 주로 젊은이들이 생명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중히 여겨 임협 유락(任俠游樂)하는 일을 노래한 것이다.

155)이사할……갚았다네:한 무제(漢武帝) 때의 협객(俠客)인 곽해(郭解)는 신체가 왜소하였으나 호협(豪俠)을 좋아하여 증오하는 인물이 있으면 반드시 살해하였다. 그러다가 뒤에 행실을 고쳐 공손해졌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문객(門客)이 유생(儒生)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곽해와는 무관한 일이었으나 국법을 확립해야 한다는 조정의 의논으로 대역무도죄(大逆無道罪)로 처형되었다. 그 후 춘추전국 시대부터 유행하던 협객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한다. 漢書 卷92 游俠傳 郭解

156)홀연……듣곤:오랑캐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뜻이다. 선우(單于)는 한나라 때 흉노족의 군장(君長) 칭호이다. 계문(薊門)은 북경(北京) 덕승문(德勝門)의 서북쪽 지역으로, 춘추전국 시대 연(燕)나라 땅이다. 대개 북쪽 변경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157)비장(飛將):한나라 때 이광(李廣)이 우북평(右北平)에 있자 흉노들이 ‘한나라의 비장군’이라 하며 몇 년 동안 감히 우북평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158)이사할……싸우네:이 시에 대해 남은경은 “이 시의 앞의 두 행은 유협(遊俠)이던 곽해(郭解)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남에게 베푼 바가 많았던 곽해는 그 보답으로 그가 빈한한 처지로 강제로 이사하게 되었을 때, 이에 필요한 돈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었다. 이토록 여러 사람의 추앙을 받았던 곽해는 어렸을 때는 용맹한 기질로 인해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곽해의 이야기 위에 시인 정두경은 하나의 덕목을 더 추가하여 완전하고 이상적인 협객의 모습을 구축해 내었다. 개인적인 어려움을 당한 인물을 위해 구원의 손길을 뻗쳤던 협객은 이제 국가적 어려움에 흔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신의를 지켰던 비장한 자객의 모습과 유교적 구속에 아랑곳없이 새로운 질서를 수호했던 유협(遊俠)의 모습, 그리고 국가적 위기에 적극적으로 일어섰던 전쟁 영웅으로서의 모습, 이는 정두경이 숭모하여 시화하였던 협객의 모습이다.” 하였다. 남은경, 鄭斗卿 俠客詩의 內容과 意味, 297

159)한궁사(漢宮詞):궁사(宮詞)는 옛날의 시체(詩體) 가운데 하나로, 궁중 생활의 자잘한 일들에 대해 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칠언절구의 시가 많으며, 당나라 때 크게 유행하였는데, 왕건(王建)의 궁사가 특히 유명하다. 한궁사는 한나라 궁중의 일을 읊은 것이다.

160)건장궁(建章宮):한(漢)나라 때 장안(長安)에 있던 궁전의 이름으로, 무제(武帝) 태초(太初) 연간에 건립하였고, 미앙궁(未央宮)의 서쪽에 있었다.

161)통천대(通天臺):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순화현(淳化縣)의 감천산(甘泉山)에 있는 감천궁(甘泉宮) 안에 있는 대인데, 높이가 30장으로, 멀리 바라보면 장안성이 다 보인다고 한다.

162)심양강(潯陽江)에……돌아오네:한 무제(漢武帝)가 일찍이 심양강 물속에 있는 이무기인 교룡(蛟龍)을 친히 활로 쏘아서 잡았다고 한다.

163)이연년(李延年)의 매씨:한(漢)나라 이연년의 누이로 절색(絶色)이었던 이 부인(李夫人)을 말한다. 이 부인은 무제(武帝)의 총애를 독차지하였으나, 일찍 죽고 말았다. 이에 무제는 그의 화상을 그려 감천궁(甘泉宮)에 붙여 놓고 항상 그리워했다. 이연년은 노래를 매우 잘했으며, 신성, 즉 신작 가곡을 지었다. 그 덕분에 협률도위(協律都尉)까지 되었으나 이 부인이 죽음에 따라 그에 대한 총애도 식어 결국에는 죄에 연좌되어 죽었다. 史記 卷125 佞幸列傳

164)누선(樓船):다락배로, 화려하게 꾸민 배를 말하는데, 전하여 뱃놀이를 하기 위해 타는 배를 말한다.

165)추풍곡(秋風曲):한 무제(漢武帝)가 지은 추풍사(秋風辭)를 말한다. 한 무제가 원봉(元封) 6년(기원전 105) 3월에 하동(河東)의 분수(汾水)에서 후토신(后土神)에게 제사를 지낸 뒤에 배를 타고 신하들과 술을 마시며 가을바람을 만나 추풍사를 지었는데, “퉁소와 북이 울리는데, 돛대 노래 일어난다. 젊음이 몇 대이냐, 늙음을 어이하리.”라는 등 인생의 무상함을 슬퍼하는 구절이 많이 들어 있었다. 漢書 卷6 武帝紀

166)오늘은……부르누나:포초(蒲梢)는 한 무제(漢武帝) 때 대완(大宛)을 정벌하고 얻었다는 천리마의 이름인데, 무제가 이 말을 얻고는 천마가를 지어 노래하기를 “서쪽 끝의 나라에서 천마가 옴이여, 만리 먼 길을 거쳐 덕이 있는 이에게 돌아왔네.[天馬來兮從西極 經萬里兮歸有德]” 하였다. 史記 卷24 樂志

167)泰一鋒:대본에는 ‘太一峰’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사기권12 효무본기(孝武本紀)에 의거해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68)대완(大宛):한나라 때 서역(西域)에 있던 나라 이름인데, 그 나라에서는 한혈마(汗血馬)라는 좋은 말이 난다고 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 이광리(李廣利)가 대완국을 정벌하면서 대완 왕의 머리를 베고 한혈마를 잡아 바쳤다. 漢書 卷6 武帝紀

169)북두성과……가리키네:대완 지방을 정벌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다는 뜻이다. 한나라 효무제(孝武帝)가 남월 지방을 정벌하면서 태일(泰一)에게 고하기 위해 두형(杜衡)나무로 일월(日月)과 북두(北斗)와 등룡(登龍)을 그린 깃발을 만들어 천일삼성(天一三星)을 형상하여 태일봉(泰一鋒)으로 삼고는, 이를 영기(靈旗)라고 이름하였다. 영기는 전기(戰旗)를 뜻하는 말로, 출정하기 전에 반드시 제사를 지내고서 깃발이 가리키는 곳에서 승리를 얻기를 기원한다. 史記 卷12 孝武本紀

170)목숙(苜蓿):서역 지방에서 나는 풀로, 식용으로 쓰이기도 하나 주로 말먹이로 쓰인다. 한나라 무제(武帝) 때 장건(張騫)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 목숙을 가지고 온 고사가 있다. 史記 卷213 大宛列傳

171)곤륜산(崑崙山):중국의 서쪽에 있다는 상상 속의 산으로, 서왕모(西王母)가 그곳에 살며, 산 위에는 예천(醴泉)과 요지(瑤池)가 있다고 한다.

172)칠월……돌아가네:한 무제(漢武帝)가 신선을 무척 좋아했는데 한번은 7월 7일 승화전(承華殿)에 있을 때 청조(靑鳥) 한 마리가 서쪽에서 날아와 전각 앞에 내려앉으므로 그 이유를 동방삭(東方朔)에게 물었더니 “이것은 서왕모가 오려는 징조입니다.” 하였다. 한참 만에 과연 서왕모가 오색 반룡(五色斑龍)이 끄는 뿌연 구름의 연(輦)을 타고 전각으로 와서 잔치에 참석하였다가 잔치가 끝난 뒤 돌아갔다고 한다. 漢武內傳

173)장양궁(長楊宮)의……바치누나:장양궁은 섬서성(陝西省) 주지현(周至縣)의 동남쪽에 있던 진한(秦漢) 때의 궁궐 이름으로, 유렵(遊獵)을 하던 곳이다. 사웅관(射熊館)은 곰을 잡아다가 놓고 사냥 놀이를 즐기던 곳이다. 한 성제(漢成帝)가 일찍이 웅비호표(熊羆虎豹) 등의 수많은 짐승들을 장양궁의 사웅관에 넣어 두고 사방으로 그물을 쳐 놓고는 호인(胡人)들로 하여금 그 짐승들을 손으로 때려잡게 하고 임금이 친히 그것을 구경하면서 중국의 호화스러운 유희를 과시하였다고 한다.

174)선우(單于)의……때로구나:흉노족의 군장인 선우는 밤 사냥을 즐기면서 호쾌함을 과시하는데, 사웅관에서의 사냥 놀이가 그보다 더 호쾌하다는 뜻이다. 선우는 흉노족의 군장(君長) 칭호이다.

175)바다……오네:박망후(博望侯)는 한나라 때의 신하인 장건(張騫)의 봉호(封號)이다. 한나라 무제(武帝)가 장건으로 하여금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가 은하수에 도착하여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고 한다. 또한 장건이 서역에서 돌아올 때 석류화(石榴花)를 가져왔다고 한다. 荊楚歲時記

176)서른여섯 궁궐:한나라의 궁궐 수가 아주 많은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반고(班固)의 서도부(西都賦)에 “이궁(離宮)과 별궁(別宮)을 합하여 모두 서른여섯 곳에 궁궐이 있다.” 하였다.

177)승로반(承露盤):이슬을 받기 위해 만든 동반(銅盤)을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가 신선술에 미혹되어 감로를 받아 마셔 수명을 연장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건장궁(建章宮)에다가 신명대(神明臺)를 세우고 동으로 선인장(仙人掌) 모양을 만들어 세워서 동반을 떠받치고서 감로를 받게 하였다. 漢書 卷25上 郊祀志

178)백량대(栢梁臺):한나라 때 장안(長安)에 있던 누대(樓臺)의 이름으로, 한 무제(漢武帝)가 여기에서 여러 신하들과 잔치를 하면서 함께 칠언시를 읊었는데, 한 사람마다 한 구씩을 읊고, 매 구를 운자(韻字)로 써서 읊었는데, 이것을 백량체(柏梁體)라고 하며, 이것이 칠언시의 시초라고 한다.

179)금문(金門)에는……돌아오네:금문은 금마문(金馬門)으로, 본디 학사(學士)들이 대조(待詔)하던 곳이었는데, 전하여 조정(朝廷)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동방삭(東方朔)이 낭관(郎官)으로서 금마문에 있었다. 동방삭은 본디 해학에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황제 앞에서 식사를 하고는 남은 음식을 모두 싸 가지고 가면서 옷을 온통 더럽히기도 하였으며, 추아(騶牙)라는 희귀한 동물이 나왔을 때에도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해 주어야만 설명해 주겠다고 한 일도 있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180)태액지(太液池)의……있는데:태액지는 한(漢)나라 때 장안(長安)에 있던 궁전인 건장궁(建章宮)의 북쪽에 있던 연못이다. 후대에는 흔히 궁궐 안에 있는 연못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방장산(方丈山)은 태액지의 못 가운데 만들어 놓은 가산(假山)을 말한다.

181)월왕(越王)……감상하네:월왕이 백한(白鷴)이라는 새를 바쳐서 궁녀들이 그 새를 데리고 논다는 뜻이다. 백한은 흰 꿩이라고 한다. 주 성왕(周成王) 때에 남방에 있는 월상씨(越裳氏)가 흰 꿩을 바친 일이 있다.

182)월굴(月窟)이나……하늘이네:서역 지방이 아득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월굴은 전설에 달이 나오고 들어가고 한다는 굴로, 서쪽에 있다고 한다. 유사(流沙)는 사막(沙漠)으로, 역시 서역 지방을 가리킨다.

183)이연년(李延年):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음악에 대해 잘 알아 협률도위(協律都尉)가 되어 천하의 음악을 정리하였다.

184)수항성(受降城):한 무제(漢武帝)가 장군 공손오(公孫敖)를 시켜 새외(塞外)에 쌓은 성으로, ‘오랑캐들의 항복을 받는 성’이라는 뜻이다.

185)포도궁(葡萄宮)의……잔치하네:포도궁은 한나라의 궁전 이름으로, 애제(哀帝) 때 흉노의 선우(單于)가 중국에 오면 이 궁전에서 머물게 하였다. 두보(杜甫)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에 이르기를 “경사 사람들은 모두 한혈마를 타고 있고, 회흘 사람들은 포도궁서 고기 실컷 먹는구나.[京師皆騎汗血馬 回紇餧肉葡萄宮]” 하였다. 선우는 한나라 때 흉노족의 군장(君長) 칭호이다.

186)일만……걷네:일만 집과 일천 문이 있는 곳은 한(漢)나라 때 장안(長安)에 있던 궁전인 건장궁(建章宮)을 말한다. 이 궁은 무제(武帝) 태초(太初) 연간에 건립하였고, 미앙궁(未央宮)의 서쪽에 있었다. 대진(大秦)은 로마제국을 말한다.

187)양아(陽阿):악부 잡곡가사(雜曲歌辭)의 곡 이름이다.

188)관왜궁(館娃宮):전국 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서시(西施)를 위해 지은 궁이다.

189)고소대(姑蘇臺):오왕 부차가 충신 오자서(伍子胥)의 말을 듣지 않고 미녀들과 놀기 위해 쌓은 대로, 부차는 이 대에서 미녀들과 놀다가 월나라에 패망하였다. 일설에는 부차의 선왕 합려(闔閭)가 쌓은 것이라고도 한다.

190)청상곡(淸商曲):청상악(淸商樂)으로, 본디 고대 한족(漢族)의 민간 음악인데, 여기서는 아름다운 음악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191)백저사(白紵辭):악부 오무곡(吳舞曲)의 이름이다. 백저가(白紵歌), 백저사(白紵詞)라고도 한다. 진(晉)나라의 백저무(白紵舞)에서 시작되었으며, 심약(沈約), 포조(鮑照), 이백(李白), 최국보(崔國輔) 등의 작품이 있다.

192)금정(金井)……내렸구나:금정은 우물 난간을 아로새겨 꾸민 것을 말하고, 녹로(轆轤)는 도르래나 활차(滑車)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물 긷는 도르래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장적(張籍)의 초비원(楚妃怨)에 “오동 잎이 황금정의 우물에 질 때, 가로지른 녹로에 단 두레박줄 당기누나.[梧桐葉下黃金井 橫架轆轤牽素綆]”라고 하였다.

193)달은……나네:당(唐)나라 시인 장계(張繼)가 지은 풍교야박(楓橋夜泊)에 이르기를 “달은 지고 까마귀 울 때 하늘 가득 서리인데, 강 단풍과 어화 서로 마주 대해 조는구나.[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眠]”라고 하였다.

194)서시(西施)……여인이라:야계(耶溪)는 약야계(若耶溪)로, 중국 절강성(浙江省) 회계현(會稽縣) 동남쪽에 있는 시내 이름이다. 춘추 시대 월나라의 미녀 서시가 그 근처에서 연밥을 따고 빨래를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195)용자번(龍子幡):꽃무늬를 수놓은 깃발을 말한다.

196)채련곡(採蓮曲):악부(樂府)의 청상곡사(淸商曲辭) 가운데 하나로, 연밥을 따는 모습을 읊은 노래인데, 주로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197)월계(越溪):월(越)나라의 미녀인 서시(西施)가 깁을 빨던 시내 이름인데, 후대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는 시내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다.

198)연……숨네:연밥을 따는 여인이 너무 고와 물고기들이 부끄러워서 숨는다는 뜻이다.

199)채희(蔡姬)……흐르누나:채희는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임금의 아내이다. 목란주(木蘭舟)는 결이 곱고 향기 좋은 목련나무로 만든 작은 배로, 흔히 조각배의 미칭으로 쓰인다. 야계는 월나라의 약야계(若耶溪)로, 미녀가 노는 시내를 말한다. 채희가 남편인 제나라 임금과 더불어 궁궐 안에 있는 연못에서 뱃놀이를 할 때 일부러 배를 흔들어서 제나라 임금을 놀라게 하였는데, 제나라 임금이 그러지 말라고 하였는데도 채희는 계속해서 흔들어 댔다. 이에 제나라 임금이 화가 나서 채희를 내쫓아 채(蔡)나라로 되돌려 보냈다. 春秋左氏傳 僖公3年

200)벽옥(碧玉):송(宋)나라 여남왕(汝南王) 첩의 이름인데, 본디는 미천한 여인이었으나, 여남왕이 몹시 총애하여 벽옥가(碧玉歌)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벽옥가는 악부 청상곡사(淸商曲辭)의 곡 이름이다.

201)풍 첩여(馮婕妤):한나라 풍봉세(馮奉世)의 딸로, 이름은 원(媛)이다. 원제(元帝) 때 궁으로 들어가 첩여(婕妤)가 되었다. 원제가 어느 날 범을 기르는 짐승 우리에 가서 짐승들을 싸움시켰는데, 궁녀들은 모두 앉아 있었다. 곰이 우리에서 뛰어나와 난함(欄檻)을 잡고 어전(御殿)에 올라가려 하니, 좌우의 귀인(貴人)들은 모두 놀라서 달아나는데, 풍 첩여가 홀로 곰을 가로막고 섰으므로 좌우 사람들이 곰을 때려 죽였다. 원제가 첩여에게 묻기를 “사람은 누구나 다 곰을 보면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곰을 가로막았는가?” 하니, 첩여가 대답하기를 “첩(妾)은 들으니, 맹수(猛獸)는 사람을 만나면 멈춘다고 하였습니다. 첩은 곰이 어좌(御座)에 이를까 염려되었으므로 몸으로 막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원제가 감탄하고는 인하여 소의(昭儀)로 올렸다. 그 뒤에 풍 첩여는 자신의 아들이 중산왕(中山王)에 봉해짐에 따라 중산태후(中山太后)가 되었으나, 부 황후(傅皇后)의 모함을 받아 자살하였다. 漢書 卷97下 外戚傳 孝元馮昭儀

202)진궁사(秦宮詞):진(秦)나라 궁중의 일을 읊은 것이다. 294쪽 주159 참조.

203)양산궁(梁山宮):진 시황(秦始皇)이 양산(梁山)에 지은 이궁(離宮)으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한성시(韓城市)에 있었다.

204)양 경리(楊經理):명나라의 장수인 양호(楊鎬)를 가리킨다. 양호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출신으로,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경략조선군무사(經略朝鮮軍務使)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들어와 울산에서 벌어진 도산성(島山城)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크게 패하였다. 중국으로 돌아간 뒤에 1619년(광해군11)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침략하자 다시 기용되어 요동(遼東) 등을 경략하였으나, 청나라에 패해 처형당하였다.

205)양 경리(楊經理)가……노래:남은경은 이 시에 대해 “정두경은 23세 때인 1619년에 명나라 양호(楊鎬) 장군이 요동통략(遼東統略)이 되어 후금(後金)에 대해 대원정(大遠征)을 떠났던 일을 찬양하는 이 시를 썼다. 이 시는 당대 국방 상황 서술과 명나라 장군 양호의 충성심과 뛰어난 기량에 대한 찬양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연작의 절구 시는 당대에 유명하였고, 훗날 효종(孝宗)에 의해 사랑받아 자주 언급되기도 하였다.”라고 하였으며, 그 주에서 “남용익(南龍翼)의 호곡시화(壺谷詩話)에 효종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또한 정두경의 ‘천산월초해운심(天山月初海雲深)’이라는 절구를 벽에 붙여 놓고 보았다. 이 시구는 양경리북정가 10수 중 제3수의 내용으로 보이는데, 그 시어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였다. 남은경, 東溟 鄭斗卿 文學의 硏究, 66쪽

206)계문(薊門):북경(北京) 덕승문(德勝門)의 서북쪽 지역으로, 춘추전국 시대 연(燕)나라 땅이다. 계구(薊丘)라고도 하며, 지금은 토성관(土城關)이라고 한다.

207)부용검(芙蓉劍):춘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순균검(純鈞劍)의 별칭이다. 검상(劍相)을 잘 보는 설촉(薛燭)이라는 사람이 순균을 가리켜 “뽑으면 마치 부용꽃이 처음 나오는 모양과 같다.[捽如芙蓉始出]”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후대에는 보검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208)대막(大漠):몽고 고원(高原)의 큰 사막으로, 한해(瀚海), 대적(大磧)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흔히 북쪽 변경 지역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209)연왕(燕王)……놓아뒀네:춘추전국 시대 연 소왕(燕昭王)이 어진 이를 불러 모으기 위하여 황금대(黃金臺)를 지은 고사를 말한다. 연나라가 제나라에 격파된 뒤에 소왕이 곽외(郭隗)의 계책에 따라 곽외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황금대를 만들어 놓고 어진 선비들을 불러 모으자, 악의(樂毅)가 위(魏)나라에서 오고, 추연(鄒衍)이 제(齊)나라에서 오고, 극신(劇辛)이 조(趙)나라에서 오는 등 선비들이 다투어서 연나라로 달려와 원한을 갚을 수 있었다. 史記 卷34 燕召公世家

210)천리마를……착용했네:임금이 어진 인재를 잘 대우하매 그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출전하는 것을 형용하였다. 연나라 소왕이 인재를 불러 모을 때 곽외가 연왕에게 죽은 천리마의 뼈를 사들이면 살아 있는 천리마를 가진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처럼, 못난 자신을 잘 대우하면 어진 인재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설득한 고사가 있다. 또 전국 시대의 협객인 형가(荊軻)가 날마다 연나라의 시장에서 개백정들과 어울려 놀았는데, 연나라 태자인 단(丹)이 형가를 맞아들여 국사(國士)로 대우해 주었다. 이에 형가가 단을 위하여 진(秦)나라로 들어가 시황을 죽여 은혜를 갚고자 하였는데, 형가가 떠나가는 것을 전송하는 사람들이 모두 백의관(白衣冠)을 착용하고 전송하였다.

211)음산(陰山):오늘날의 하투(河套) 이북과 대막(大漠) 이남에 있는 여러 산의 통칭으로, 흔히 중국 북방의 오랑캐 지역에 있는 산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212)단지……뵈고:출정한 장수가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뜻이다. 후한(後漢)의 반초(班超)가 오랑캐를 밤에 습격하면서 말하기를 “범의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범의 새끼를 얻지 못한다.[不入虎穴 不得虎子]” 하였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213)중국……없네:오랑캐들과 화친한다는 소문이 없다는 뜻이다. 오손(烏孫)은 한나라 때 서역(西域)에 있던 나라 이름이다. 한나라 무제(武帝)가 종녀(宗女)를 오손에게 시집보낸 고사가 있다.

214)누선(樓船):다락배로, 화려하게 꾸민 배를 말하는데, 전하여 뱃놀이를 하기 위해 타는 배나 전투하는 데 사용하는 배를 말한다. 여기서는 전선(戰船)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215)여섯 자라:발해에 떠 있는 삼신산(三神山)을 떠받치고 있다고 하는 여섯 마리의 자라를 말한다.

216)요하(遼河)……땅에:요동 지방을 가리킨다. 요하는 요동 지역에 있는 강의 이름이고, 갈석(碣石)은 하북(河北)이나 열하(熱河)에 있다고 하는 산 이름이다.

217)관산월곡(關山月曲):한(漢)나라 악부(樂府) 횡취곡(橫吹曲)의 이름인데, 대부분 이별을 가슴 아파하는 내용이다.

218)안문태수행(鴈門太守行):악부 상화가사 슬조곡(瑟調曲) 가운데 안문태수행(鴈門太守行)이 있다.

219)비장(飛將):흉노(匈奴)들이 한나라 때 장수인 이광(李廣)을 부른 칭호이다. 이광은 본디 활을 잘 쏘기로 이름 높았는데, 명을 받고 가서 우북평(右北平)에 주둔하자 흉노들이 이를 듣고는 “한나라의 비장군이 왔다.”라고 하면서 몇년 동안 감히 우북평으로 침입하지 못하였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220)떠나가신……하시려나:떠나가신 님은 어느 날에나 돌아올까라는 뜻이다. 대도두(大刀頭)는 대도환(大刀環)과 같은 말인데, 대도환은 돌아간다는 뜻인 환(還)의 은어이다. 큰 칼의 끝에 달린 고리인 환(環)이 돌아간다는 뜻인 환(還)과 음이 같으므로 취해서 쓴 것이다.

221)요성(妖星):요사스러운 별로, 여기서는 모두성(旄頭星)을 가리킨다. 이 별은 호(胡)를 관장하는 별이며, 이 별이 떨어지면 오랑캐의 장수(將帥)가 죽는다고 한다.

222)안문(鴈門):중국 산서성 패주 지방에 있는 관문의 이름인데, 북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이 관문에 앉아 쉬었다가 떠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흔히 중국의 서쪽 변경 지대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223)역사(驛使):급한 연락을 취하기 위해 역마(驛馬)로 보내는 심부름꾼을 말한다.

224)무얼……내어주리:종군을 마치고 속히 돌아오기를 기원한다는 말이다. 명월환(明月環)은 대도환(大刀環)과 비슷한 말로, 돌아온다는 뜻인 환(還)의 은어로 쓰는 단어이다. 큰 칼의 끝에 매단 고리가 보름달처럼 둥그므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백(李白)의 종군행(從軍行)에 “피리는 매화의 곡을 연주하고, 칼은 명월의 고리를 드러내도다.[笛奏梅花曲 刀開明月環]”라는 구절이 있다. 李太白詩集 卷5

225)이상질(李尙質):1597∼1635.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자문(子文)이며, 호는 가주(家洲)이다. 1629년(인조7)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32년에 암행 어사로 북관(北關)에 갔다가 돌아왔으며, 1634년에 인조(仁祖)의 생부인 원종(元宗)을 종묘에 배향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간하다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회양(淮陽)에서 죽었다.

226)습가지(習家池)서……되었는데:습가지는 중국의 양양(襄陽) 지역인 호북성(湖北省) 현산(峴山)의 남쪽에 있는 못이다. 진(晉)나라 때 산간(山簡)이 양양을 맡고 있으면서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시면서 놀았는데, 일찍이 술에 취하지 않은 채 돌아간 적이 없었으며, 그때마다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돌아갔다고 한다. 晉書 卷43 山濤列傳 山簡 산간이 술을 매우 즐겨 날마다 곤드레가 되도록 취했던 일을 두고 읊은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 “석양은 현산 서쪽으로 넘어가려 하는데, 백접리 거꾸로 쓰고 꽃 아래서 길 헤맬 제, 양양의 아동들은 일제히 손뼉 치면서, 길거리 가로막고 다투어 백동제를 노래하네. 옆 사람에게 묻노니 무슨 일로 웃는다나, 곤드레 되게 취한 산옹을 보고 웃는단다.[落日欲沒峴山西 倒著接䍦花下迷 襄陽小兒齊拍手 攔街爭唱白銅鞮 傍人借問笑何事 笑殺山翁醉似泥]” 하였다.

227)백동제(白銅鞮):남조(南朝) 양(梁)나라의 가요 이름으로, 백동제(白銅蹄)라고도 한다. 악부 잡가가사 가운데 이 백동제가 있다. 隋書 卷13 音樂志上

228)부상(扶桑):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나무 이름으로, 흔히 해가 뜨는 곳에 있는 우리나라나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229)부용검(芙蓉劍):춘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순균검(純鈞劍)의 별칭이다. 검상(劍相)을 잘 보는 설촉(薛燭)이라는 사람이 순균을 가리켜 “뽑으면 마치 부용꽃이 처음 나오는 모양과 같다.[捽如芙蓉始出]”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후대에는 보검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230)만리심(萬里心):장쾌한 뜻을 품고 먼 곳을 유람하고 싶은 마음을 말한다. 남조(南朝) 송(宋)나라 때 종각(宗慤)에게 그의 숙부(叔父) 종병(宗炳)이 속에 품고 있는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종각이 답하기를 “저는 큰 바람을 타고 만리의 큰 파도를 깨뜨리고 싶습니다.” 하였다. 宋書 卷76 宗慤列傳

231)정세구(鄭世矩):1585∼1635.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대방(大方)이다. 좌의정을 지낸 정언신(鄭彦信)의 손자이다. 전라 감사와 전주 부윤을 지냈다. 1627년(인조5) 2월에 주문사(奏聞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232)계북(薊北):북경(北京)의 계문(薊門), 즉 덕승문(德勝門)의 서북쪽 지역으로, 계구(薊丘)라고도 한다.

233)초(楚)나라 객:비방을 당해 초(楚) 지방으로 유배되어 객지를 떠돌았던 굴원(屈原)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고향을 떠난 나그네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234)연가(燕歌):전국 시대 연(燕)나라의 자객인 형가(荊軻)가 진(秦)나라로 들어갈 적에 역수(易水) 가에서 부른 “차가운 역수 가에 바람결 쓸쓸한데, 장사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라고 한 노래를 가리킨다.

235)곽진경(郭震卿):임진왜란 때의 승병장인 의엄(義嚴)으로, 휴정(休靜)의 제자이다. 속명은 곽수언(郭秀彦)으로, 진경은 아마도 자이거나 하사받은 이름인 듯하다. 1589년(선조22)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사건에 일부 승려들이 참가하면서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에 있던 그에게 함께 역모를 도모할 것을 권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재령 군수(載寧郡守) 박충간(朴忠侃)에게 고발하여 조정에서 이를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 스승인 휴정이 팔도의 승려들에게 승병으로 참여할 것을 권하였을 때, 황해도에서 500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왜적들과 싸웠다. 그는 전투에서뿐만 아니라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 공을 가상하게 여겨 벼슬을 제수하였고 그로 인해 열경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되자, 머리를 기르고 장가들어 은율(殷栗)에서 살았다.

236)동해……떠났다네: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義州)로 파천한 것을 말한다. 육룡(六龍)은 임금이 타는 수레를 말한다. 옛날에 임금이 타는 수레는 말 여섯 마리가 끌었으므로 이렇게 칭하는 것이다. 용만(龍灣)은 의주의 별칭이다.

237)제천(諸天)……하였구나: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절에서 나와 의병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제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 세계에 있는 모든 하늘을 말한다.

238)용도(龍鞱)……탔다네:불법(佛法)을 수행하는 것을 버리고 의병을 이끌면서 전쟁터에서 종사하였다는 뜻이다. 용도는 병서(兵書)를 말한다. 주(周)나라 여상(呂尙)이 지은 육도(六韜)라는 병서에 용도가 들어 있다. 녹거(鹿車)는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말로, 연각승(緣覺乘)을 비유하는 말인데, 자기 자신의 해탈을 위하여 불법을 수행하는 것을 비유한다.

239)하얀……가사로다:임금으로부터 벼슬을 하사받아서,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 승려 생활을 하지 못하고 환속하였다는 뜻이다.

240)하늘에서……하사했네:선조가 용만에 있을 적에 곽진경에게 시를 써서 하사해 주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慈悲元自度人間 何况邦家萬事艱 月印半江香一炷 心懷普濟智千般 直將忠義酬明主 莫向烟霞棲碧山 賈島劉公眞見得 古來豪傑更班班” 硏經齋全集 外集 卷57 宣祖賜僧義嚴詩

241)원문(轅門):출정 나간 장수가 주둔해 있는 군문(軍門)을 말한다.

242)지둔(支遁):진(晉)나라의 고승(高僧)으로, 시에 아주 뛰어났던 인물이다. 중의 신분이면서도 말과 학을 몹시 좋아하여 몇 필의 준마를 기르고 있었는데, 어떤 이가 도인(道人)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평하자 “나는 다만 말의 빼어난 신태(神態)를 사랑할 뿐이다.”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言語

243)장사들이……되었구나:의병들을 거느리고 싸워 왜적들을 물리쳐 한양을 수복하였다는 뜻이다. 옛날에 노 양공(魯陽公)이 한(韓)나라와의 싸움이 한창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마침 해가 저물자, 해가 저물지 않게 하기 위해 창을 잡고 해를 향하여 휘두르니, 해가 뒤로 90리나 물러났다는 고사가 있다. 淮南子 覽冥訓

244)제천(諸天)……일리라:불법(佛法)을 써서 왜적들을 제압함에 따라 왜적들이 준동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용상(龍象)은 물속의 용과 땅 위의 코끼리처럼 위력(威力)이 자재(自在)하다는 뜻으로, 보통 학덕이 높은 승려를 가리키는 불가(佛家)의 용어이다. ‘푸른 바다 속의 고래’는 왜적들을 가리킨다.

245)다라수(多羅樹)의……사양했네:곽진경이 공을 세우고서도 논공행상에 들어가는 것을 사양했다는 뜻이다. 다라수는 패다라수(貝多羅樹)를 말하는데, 안수(岸樹) 또는 고송수(高竦樹)라고도 한다. 이 나무의 잎에 불경(佛經)을 쓴다. 기린각(麒麟閣)은 공신들의 화상을 모셔 놓은 전각을 말한다. 한나라 선제(宣帝) 때 곽광(霍光) 등 공신 11명의 화상을 그려서 미앙궁(未央宮) 안에 기린각을 짓고 모시어 그들의 공적을 기렸다. 또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장군인 풍이(馮異)는 사람됨이 겸손하여 길을 가다가 다른 장군을 만나면 항상 한쪽 옆으로 피하였으며, 휴식을 취할 때 다른 장수들은 서로 모여 전공에 대해 떠들어 댔으나 풍이만은 항상 큰 나무 아래로 가 쉬고 있었다. 이에 군중 사람들이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 부르면서 좋아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17 馮異列傳

246)임금께서……못하였네:임금이 조정에 머물게 하였으므로 승려 생활을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옛날에 어떤 신승(神僧)이 신통한 술법이 있어, 매양 잔을 물에 띄워 그것을 타고 바다를 건너다니므로, 사람들이 배도 화상(盃渡和尙)이라 불렀다고 한다.

247)긴……하겠는가: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어 산속 생활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천문(天門)은 대궐의 문을 말하고, 공문(空門)은 불문(佛門)을 말한다.

248)당(堂)에……떠받드네:곽진경이 당호(堂號)를 대은당(戴恩堂)이라고 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249)봉래궁(蓬萊宮):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에 있던 궁전 이름인데, 흔히 대궐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250)공문(空門)……되었거니:불교에 귀의하였다가 환속하여 조정에서 벼슬하였다는 뜻이다.

251)순(舜)……보네:창오(蒼梧)는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순 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죽어 이곳 기슭에 묻혔으므로, 전하여 황제를 장사 지낸 곳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선조(宣祖)의 무덤인 목릉(穆陵) 쪽을 바라다본다는 뜻이다.

252)마니(尼) 구슬:마니는 보주(寶珠)를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 자체에는 빛깔이 없고 사물이 비치는 바에 따라 그 색상을 드러내는데, 본래는 공허하여 만물과 떨어져 있는 듯하지만, 인연에 따라 발현하는 불성(佛性)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253)6수:이 시가 초간본(初刊本)에는 모두 7수가 수록되어 있다. 대본에 수록되지 않은 시 한 수는 “百濟荒城有暮雲 山河曾此國三分 漢武將開滄海郡 長江還渡北來軍”이다.

254)백마(白馬)……못했다네: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백마강의 용을 낚은 탓에 백제의 호국룡이 없어져서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패했다는 뜻이다. 부여의 백마강 가에 조룡대(釣龍臺)라는 바위가 있는데, 당나라 군사가 백제의 왕성을 공격하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중, 갑자기 풍랑이 일어 진군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 바위에 걸터앉아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하여 강물 속에서 백제 무왕(武王)의 화신인 용을 낚아 올림으로써 용의 조화를 막고 풍랑을 멎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누선(樓船)은 다락배로, 화려하게 꾸민 배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전선(戰船)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255)어느……꿰었던가:당나라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마강의 조룡대(釣龍臺)에서 용을 잡아 죽인 전설을 말한다. 용매(龍媒)는 말을 가리킨다.

256)이공(李公)의……생각하네:이공은 부여(扶餘)에 살았던 이경여(李敬輿, 15851657)를 가리킨다. 이경여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이다. 광해군 때에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냈으며, 인조 때에는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양(瀋陽)에 억류되기도 하였다. 효종조에 영의정을 지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조정에서 물러나 있을 때에는 부여의 규암에서 지냈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술 깬 대부’는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이경여를 칭송하는 뜻으로 쓰였다.

257)조강(祖江):개풍군(開豐郡) 덕수(德水) 남쪽, 통진(通津) 동쪽 15리 지점에 있는 강으로,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이 합하는 곳을 가리킨다. 한강은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서 임진강과 합하며, 통진(通津) 북쪽에 이르러 조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1 제3권 한성부

258)수형전(水衡錢):임금에게 하사받은 돈을 말한다. 수형은 한(漢)나라 때 세무(稅務)를 맡은 벼슬 이름이다. 이 수형의 관아에 보관한 돈은 모두 임금의 사장(私藏)이므로,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돈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259)연미정(燕尾亭):강화군 강화읍 월곶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누정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물길이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갑곶(甲串)의 앞을 지나 인천 쪽으로 흐르는데, 그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오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260)장사꾼들……산이거니:장사꾼들은 해마다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산에 다시 산이거니[山上山]’라는 말은 다른 곳으로 나간다는 뜻인 ‘出’ 자의 은어(隱語)이다. 독고급(獨孤及)의 여한시어동심이칠사인불우……(與韓侍御同尋李七舍人不遇……) 시에 “오솔길이 어쩜 그리 적적만 한가, 주인장이 밖으로다 나가서라네.[三徑何寂寂 主人山上山]”라고 하였다.

261)탁타교(橐駝橋):개성에 있는 다리이다. 본래의 이름은 만부교(萬夫橋)였는데, 고려 태조 25년(942)에 거란이 고려와 수교하기 위해 사신과 낙타 50필을 바치자, 태조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배척하여 사신은 섬으로 귀양 보내고 낙타는 이 다리 밑에 매어 놓아 굶겨 죽인 뒤로 생긴 이름이다.

262)옛 칼을 읊다:남은경은 이 시에 대해 “정두경의 시 속에는 검(劍)을 소재로 한 작품도 많고, 검을 이용한 비유도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그의 시 속에 등장하는 검은 종류도 다양하여, 의천검(倚天劍), 용천검(龍泉劍), 막야검(鏌鎁劍), 창룡검(蒼龍劍), 연평검(延平劍), 칠보검(七寶劍), 충성검(衝星劍), 갑중검(匣中劍) 등 온갖 종류의 검이 나오고 있다. 이 시는 검 자체를 소재로 한 시이다.” 하였다. 남은경, 東溟 鄭斗卿 文學의 硏究, 103쪽

263)두수(斗宿)……쐈네:옛날 진(晉)나라 때 오(吳) 땅에 자색 기운이 하늘의 우수(牛宿)와 두수 사이로 뻗치는 것을 보고 장화(張華)가 뇌환(雷煥)을 풍성현(豐城縣)의 현령으로 보내 용천검(龍泉劍)과 태아검(太阿劍)을 얻은 다음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拾遺記 卷10

264)비장군(飛將軍):흉노(匈奴)들이 한나라 때 장수인 이광(李廣)을 부른 칭호이다. 309쪽 주219 참조.

265)한가로운……읊다:남은경은 이 시에 대해 “정신적인 자유로움을 갈망하던 정두경은 도교(道敎)에 대한 관심을 시로 쓴 경우가 많았다. 정두경은 그 가문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도교에 대한 친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교적 소재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이 시 이외에도 오언율시의 기청하자(奇靑霞子), 오언고시의 유선사(遊仙詞) 11수, 오언고시의 독장자(讀莊子), 칠언절구의 독도서(讀道書) 등이 있다.” 하였다. 남은경, 東溟 鄭斗卿 文學의 硏究, 89쪽

여운필은 “이 작품은 성시에 살고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성서(城西)에 은거하면서 저술에 몰두하던 인조 말기의 작품인 듯한데, 도성 안에 살면서도 신선처럼 살면서 도가적 사유에 빠져 있는 삶을 자술하고 있다. 노자(老子)의 글을 읽는다고 자랑스러운 듯이 말한 데에서 거리낌 없이 선취(仙趣)를 추구하는 시인의 기쁨을 엿볼 수 있다.” 하였다. 여운필, 東溟 鄭斗卿의 詩世界, 264

266)장안도(長安道):악부(樂府) 횡취곡사(橫吹曲辭)의 곡 이름이다.

267)붉은 대문:붉은 칠을 한 대문으로, 부귀한 사람의 집을 가리킨다.

268)한정(漢廷)에선……거네:한나라 무제(武帝)가 장안(長安)에 백량대(柏梁臺)를 짓고서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하면서 칠언시(七言詩)를 읊었는데, 한 사람마다 한 구씩을 읊고, 매 구를 운자(韻字)로 써서 읊었다. 이것이 칠언시의 시작이라고도 한다. 그때 시를 읊으면서 무제가 “일월성신은 사시토록 화평하다.[日月星辰和四時]”라고 읊었으며, 이에 대해 경조윤(京兆尹)은 “궁중 밖에 사는 공주는 죄를 다스릴 수가 없다.[外家公主不可治]”라고 하였다. 藝文類聚 卷56 詩

269)염여퇴(灩澦堆):양자강(揚子江) 삼협(三峽) 중에 하나인 구당협(瞿塘峽)의 입구에 솟아 있는 험한 바위의 이름으로, 겨울철에 강물이 줄어들면 수백 척이나 우뚝하게 드러나고 여름에 강물이 불면 수십 척이나 물에 잠기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말과 같으며, 뱃사공들이 무서워서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고 한다.

270)삼파(三巴):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일대 지역인 파군(巴郡), 파동(巴東), 파서(巴西)의 지역을 말한다.

271)촉백(蜀魄)……있네:촉백은 두견새를 말한다. 전설에 의하면 촉(蜀)나라 망제(望帝)가 그의 신하인 별령(鱉靈)의 아내를 간음하고서 왕위를 내놓고 도망갔다가 죽어 두견새로 화하였는데, 항상 한밤중에 피를 토하면서 불여귀(不如歸)라는 소리 비슷하게 운다고 하며, 두견새가 토한 피가 묻어 진달래꽃이 붉다고 한다. 여기서는 흰 진달래를 읊었으므로 그 당시에 꽃잎을 물들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272)이산규(李山圭):1607~1631.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계장(季章)이다.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서자(庶子)이며, 이항복(李恒福)의 사위이다. 학문과 문장에 아주 뛰어났으나, 서자라서 발신하지 못하였다. 이문학관(吏文學官)을 지냈으며, 25세의 나이로 죽었다. 택당집 별집 권7에 묘표(墓表)가 있다.

273)창석(蒼石) 선생:이준(李埈, 1560~1635)으로, 본관은 흥양(興陽)이고, 자는 숙평(叔平)이며, 호는 창석․서계(西溪)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며, 정경세(鄭經世)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 창석집(蒼石集)이 있다.

274)백사(白沙)……그대이네:이산규가 백사 이항복(李恒福)의 사위였다는 뜻이다. 동상랑(東床郞)은 사위를 말한다. 왕희지(王羲之)가 어려서부터 행실이 뛰어났는데, 치감(郗鑒)이라는 명망가가 왕씨 집안의 자제들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는 왕씨 집에 가서 사윗감을 찾게 하였는데, 다른 형제들은 모두 의관을 차려 입고 기다리는 데 반해 왕희지만은 배를 드러낸 채 동상(東床) 위에 누워 있었다. 이에 치감이 왕희지를 사위로 삼았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275)쌍오동의……끊어졌네:‘쌍오동의 우물’은 금정(金井)을 말한다. 녹로(轆轤)는 도르래나 활차(滑車)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도르래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장적(張籍)의 초비원(楚妃怨)에 “오동 잎이 황금정의 우물에 질 때, 가로지른 녹로에 단 두레박줄 당기누나.[梧桐葉下黃金井 橫架轆轤牽素綆]”라고 하였다.

276)조강(祖江):경기도 개풍군(開豐郡) 덕수(德水) 남쪽, 통진(通津) 동쪽 15리 지점에 있는 강으로,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이 합해지는 곳을 가리킨다. 320쪽 주257 참조.

277)동오(東吳)……띄우겠네:적벽(赤壁)은 동오 지방을 흐르는 양자강(揚子江) 가에 있는 지명이며, 주랑(周郞)은 삼국 시대 오(吳)나라의 장수인 주유(周瑜)를 가리킨다. 삼국 시대 주유가 이 적벽에서 바람을 이용한 화공(火攻)을 써 위(魏)나라 조조(曹操) 군사들이 탄 배를 불태워 대승을 거두었다.

278)오량(五兩):초(楚) 지방의 방언으로, 닭털을 장대 끝에 매어 풍향을 알아보는 기구를 말한다.

279)천태산(天台山)서……의심했네:천태산은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산이고, 적성(赤城)은 천태산의 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토석의 색깔이 붉어 항상 노을이 낀 것 같으며, 산의 모양이 성첩과 같이 생겼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이르기를 “적성의 노을을 들어서 표지를 세운다.[赤城霞起而建標]” 하였다. 文選 卷6

280)벽란도(碧瀾渡):예성강(禮成江) 위쪽에 있는 나루로, 개성에서 서쪽으로 36리 되는 곳에 있다. 고려 때의 중요한 나루로, 개성부터 황해도의 연안(延安), 해주(海州) 방면으로 통하는 큰길은 이곳을 경유했다.

281)옛날 노래:예성강곡(禮成江曲)을 말한다. 고려 때 중국의 상인 하두강(賀頭綱)이 바둑을 잘 두었는데, 일찍이 강가에서 아름다운 부녀자를 보고는 반해서 내기를 해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에 그 남편과 바둑을 두어 거짓으로 지고 나서 내기를 두 배로 걸자, 그 남편이 혹하여 자신의 아내를 내기에 걸었다. 하두강이 단판에 이겨 아내를 빼앗아 배에 싣고 가니, 그 남편이 뉘우치고 이 노래를 지었다. 부인이 갈 때에 옷 단속을 매우 단단하게 하니, 하두강이 범하지 못하였다. 배가 바다 가운데에 이르자 빙빙 돌면서 가지 않으므로 점을 치자, “절부(節婦)에게 감동되어 그러한 것이다.” 하였다. 이에 하두강이 부인을 돌려보내니, 부인 역시 돌아와서 예성강곡 후편을 지었다. 高麗史 卷71 樂志 禮成江

282)고려……격하였네:중국 명주(明州)의 정해(定海)에서 우리나라로 올 적에 배를 타고 흑산도(黑山島)에 도착했다가 다시 예성강(禮成江)으로 왔으므로 한 말이다.

283)급수문(急水門):예성강(禮成江)의 하구 근처에 있는, 물살이 아주 급한 곳을 말한다.

284)징파도(澄波渡)에 배를 대다:징파도는 연천군 왕징면 북삼리와 삼거리를 이어 주는 임진강의 나루 이름이다.

285)우화대(羽化臺):지금은 북한 지역인 경기도 연천군 중면 대사리의 임진강 가에 있었다고 전하는 우화정(羽化亭)이 있던 곳을 말한다.

286)숭의전(崇義殿):고려 태조(太祖) 이하 여덟 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의 임진강 가에 있다.

287)푸른……모르겠네:정확한 뜻은 미상이나, 대개 고려 왕실의 후손이 다 죽어 없어졌다는 뜻인 듯하다. 왕건(王建)의 선조가 당나라의 선종(宣宗)과 연결된다는 설화가 있는데, 선종이 황제가 되기 전에 중국의 강남 일대를 떠돌아다녔다는 전설이 있어 이 시에 나오는 회수(淮水)와 연결될 듯도 한데, 정확한 내용은 확인할 수가 없다. 용손(龍孫)은 왕실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이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중국으로 가던 중 서해 바다에서 용왕의 부탁을 받고 요괴를 쏘아 죽인 다음 용왕의 딸과 결혼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288)닭을……유유한데: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운 일을 말한다. 태봉(泰封)을 세운 궁예(弓裔)는 의심이 많고 성질이 조급하여 무고하게 많은 사람을 살육한 데 반해 시중(侍中)으로 있던 왕건은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해져 호걸들이 그에게 마음을 돌렸다. 그러던 중 당(唐)나라의 상인인 왕창근(王昌瑾)이 오래된 거울을 얻었는데, 거기에 쓰여 있기를 “삼수의 가운데 사유의 아래에, 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보내,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치리라.[三水中四維下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하였으며, 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나, 한 마리는 청목 가운데 몸을 감추고, 한 마리는 흑금 동쪽에 그림자를 드러내리라.[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現影黑金東]” 하는 등 모두 147자가 쓰여 있었다. 왕창근이 이를 심상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 궁예에게 바치니, 궁예가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 문인(文人)들로 하여금 풀이하게 하였다. 세 사람이 그것을 보고 서로 이르기를 “청목은 소나무이므로, 송악군(松岳郡) 사람으로서 용(龍)으로 이름한 자의 자손이 임금이 될 것이라는 말이니, 그것은 왕 시중(王侍中)을 두고 한 말이다. 흑금은 쇠[鐵]이니 지금의 철원(鐵原)으로, 이는 주상(主上)이 이곳에서 일어나 이곳에서 멸망한다는 징험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鴨綠)을 거둔다는 뜻이다. 지금 왕이 시기하여 사람 죽이기를 즐기니, 만약 사실대로 고하면 시중이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고, 우리들도 모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이내 거짓말로 아뢰었다. 그 뒤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은밀히 모의하여 궁예를 죽이고 왕건을 받들어 왕으로 삼아 고려를 세웠다. 東史綱目 卷5下 戊寅年

289)이 문순공(李文順公):고려 때의 문신이면서 명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며,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저서에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동명왕편(東明王篇), 국선생전(麴先生傳) 등이 있다.

290)백마산(白馬山):옛날 해평군(海平郡), 지금의 풍덕(豐德)에서 남쪽으로 15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고려 때에는 이 산을 우소(右蘇)로 삼았다. 일찍이 이규보(李奎報)가 좌보궐(左補闕)로 있던 중 탄핵을 받아 계양수(桂陽守)에 제수되어 가면서 이 산을 지나 조강(祖江)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강물이 본래 세찬 데다가 마침 폭풍을 만나서 고생을 하고 건넜으므로, 자신의 신세를 슬퍼하여 조강부(祖江賦)라는 글을 지었는데, 이 글은 동국이상국집 권1에 실려 있다.

291)자문(子文):이상질(李尙質, 1597∼1635)로,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자문이며, 호는 가주(家洲)이다. 1629년(인조7) 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32년에 암행 어사로 북관(北關)에 갔다가 돌아왔으며, 1634년에 인조(仁祖)의 생부인 원종(元宗)을 추숭하려는 것을 간하다 종성(鐘城)으로 유배되어 이듬해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회양(淮陽)에서 죽었다.

292)휴휴(休休):조휴(趙休, 1600~1654)로, 본관은 한양이고, 자는 휴휴이며, 조찬한(趙纘韓)의 큰아들이다. 용궁 현감(龍宮縣監)을 지냈다. 白軒集 卷35 龍宮縣監趙君行狀

293)술에……이별하다:송재소는 이 시에 대해 “이 시는 정두경의 기질이 잘 드러나 있는 시이다. 이 시에서 동명은 자신을 ‘협객’이라고 했다. 협객이란 원래 무(武)를 숭상하고 살인을 일삼는 부정적인 인물로 인식되어 왔으나, 사마천이 사기유협열전(遊俠列傳)에서 협객을 긍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협객의 형상은 유가적 선비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그런데도 동명이 스스로 협객으로 자처한 데에서 그의 정신적 지향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금포, 즉 비단 도포를 벗어 술집에 전당 잡히고 친구들로 하여금 진탕 취하게 하려는 행위에서도 그의 호방한 기상과 거침없는 기질을 읽을 수 있다. 이 시에 그려진 동명의 모습은 전형적인 양반 사대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하였다. 송재소,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의 시, 148~149쪽

294)천수원(天壽院):경기도 장단군 진서면에 있는 지명으로, 고려 예종 때 지은 천수사(天壽寺)가 있던 곳이다. 이곳은 개성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이곳에 천수원이 있었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1 제4권 개성부 상

295)이한(李):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정숙(靜叔)이며, 이시백(李時白)의 아들이다. 공주 목사, 충주 목사, 참의 등을 지냈으며,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기도 하였다.

296)범파정(泛波亭):홍천읍 갈마곡리에 있던 정자이다. 여러 문헌의 기록으로 볼 때 홍천의 북쪽에서 흘러드는 군업천과 홍천 동면에서 흘러나오는 성정천이 만나 합수를 이루는 지역 아래이거나 성정천 끝자락에 위치해 있던 정자인 듯하다.

297)오마(五馬):말 다섯 마리가 끄는 수레로, 태수가 부임할 적에 이 수레를 타고 갔으므로, 한 고을의 수령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298)사군탄(使君灘):사천성(四川省) 만현(萬縣)의 동쪽에 있는 시내 이름으로, 중국의 양량(楊亮)이라는 사람이 익주(益州)의 수령이 되어 가던 중 이곳에서 배가 전복되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백의 부득백로사송송소부입삼협(賦得白鷺鷥送宋少府入三峽)시에 “사람에게 놀란 백로 멀리 날아가다가, 곧장 사군탄 여울로 향하는구나.[人驚遠飛去 直向使君灘]” 하였다.

299)홍명구(洪命耉):1596∼1637.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원로(元老), 호는 나재(懶齋)이다. 8세에 능히 시를 지었으며, 1619년(광해군11)의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시골에 은거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후에 등용되어 1630년(인조8)에 안동 부사가 되었고,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지키다가,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勤王兵)을 거느리고 남하하던 중 김화(金化)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300)주천(酒泉)의……부르다:주천(酒泉)은 경상도 예천(醴泉)의 옛 이름이다. 휴휴(休休)는 용궁 현감(龍宮縣監)을 지낸 조휴(趙休)의 자이다. 339쪽 주292 참조.

301)옥산퇴(玉山頹):술에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용지(容止)에 “혜강(嵇康)의 자태가 마치 외로운 소나무가 홀로 선 것처럼 빼어나 그가 술에 취해서 넘어지면 옥으로 된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하였다.

302)영가부(永嘉府):안동(安東)의 옛 이름이다.

303)이빈빈(李彬彬):조선 중기의 문인인 이빈(李彬, 1597~1642)이다.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빈빈(彬彬)이며, 호는 서주(西疇)이다. 저서로는 서주집(西疇集)이 있다. 1597년(선조30)에 영암(靈巖)의 옥천(玉川)에서 태어났으며, 백광훈(白光勳)의 외손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곱 살 때 “배꽃이 반쯤 피니 옥구슬을 꿴 듯하다.[梨花半開貫玉珠]”라고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동명(東溟)과 친분 관계가 있어 동명이 “백씨의 교룡의 필세, 이제는 외손에게 있구나.[白氏蛟龍筆 于今在外孫]”라고 하였다. 임형택, 우리고전을 찾아서, 한길사, 2007, 370쪽

304)숙상구(鷫鸘裘):한(漢)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입었던, 기러기와 비슷한 숙상이라는 새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 이름인데, 흔히 가난한 사람이 입는 옷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사마상여가 일찍이 부인 탁문군(卓文君)과 함께 고향인 성도(成都)로 돌아갔을 적에 워낙 가난했던 탓에 자기가 입고 있던 이 숙상구를 전당 잡히고 술을 사서 탁문군과 함께 마시며 즐겼다.

305)단오첩(端午帖):남은경은 이 시에 대해 “첩자사(帖子詞)는 유교관인 지배체제 하에서 찬미(讚美)와 규계(規戒)를 덧붙여 하나의 완결되고 정형화된 문학 양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정두경의 이 단오첩은 찬미와 규계라는 첩자사 특유의 양면성을 엄격히 지키고 있다. 제1구와 2구는 복식을 맡은 관리가 올리는 어의(御衣)인 푸른 빛깔의 도포를 통해 궁중 의식의 존엄성과 화려함을 묘사하고 있다. 제3구와 4구에서는 갑자기 시상(詩想)을 일변시켜 규계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는 문설(聞說)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상황을 불투명하게 만들면서 휼간(譎諫)의 목표를 성취하고 있다. 즉 밤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간신(諫臣)들이 제출한 간서(諫書)를 보는 임금에 관한 소문을 흘리는 것은, 임금의 존엄성과 수덕(修德)의 공을 재고시키면서도 아울러 군주에게 만기(萬機)에 더욱 진력할 것과 간쟁(諫爭)을 물리치지 말 것을 아울러 규간하는 효과를 거둔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하였다. 남은경, 東溟 鄭斗卿 文學의 硏究, 82쪽

306)한회일(韓會一):1580∼1642.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형보(亨甫), 호는 협소(愜素)이다. 국구(國舅)인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아들로,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오빠이다. 여주(驪州), 임천(林川), 연안(延安) 등의 수령을 지냈다.

307)한 사군(韓使君):여주 목사로 있는 한회일(韓會一)을 말한다.

308)마암(馬巖):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 옆에 있는 바위로, 여강(驪江)에서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나왔다 하여 이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2 제7권 경기 여주목

309)이십탄(二十灘):경기도 여주의 이포(梨浦) 나루 동쪽에 있던 여울 이름이다.

310)쌍리(雙鯉):두 마리의 잉어로, 서신(書信)을 말한다. 고악부(古樂府)인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 이르기를 “나그네가 먼 곳에서 여기 와서는, 두 마리의 잉어를 내게 주었네. 아이 불러 잉어를 끓이게 하니, 배 속에 비단에 쓴 편지 들었네.[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兒烹鯉魚 中有尺素書]” 하였다.

311)박사암(朴思庵):박순(朴淳, 1523∼1589)으로, 본관은 충주,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청하자(靑霞子)이다. 1553년(명종8)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1579년(선조12)에 영의정에 올라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받았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저서로는 사암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12)백학대(白鶴臺) 창옥병(蒼玉屛):백학대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는 대 이름인데, 박순이 1586년(선조19)에 이곳으로 와 머물 적에 학이 날아들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창옥병은 백운산에서 흘러오는 영평천의 물이 휘감아 도는 곳에 있는 절벽 이름으로, 이 절벽에는 뒤에 김수증(金壽增)이 박순의 제이양정벽(題二養亭壁) 시를 한 수 새겨 놓았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이따금씩 들려오는 외마디 산새 소리, 책상 머리 적막한데 서책들만 널려 있네. 어떡하나 백학대 앞 흐르는 저 시냇물, 산문 밖을 나가면 이내 흙탕물 될 것이니.[谷鳥時時聞一箇 匡床寂寂散群書 每憐白鶴臺前水 纔出山門便帶淤]” 하였다.

313)기미성(箕尾星)과……있거니:뛰어난 정승이었던 박순 같은 위대한 인물이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것을 의미한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부열(傅說)이 도를 얻어……죽은 뒤에 천상의 별이 되어서 동유성과 기미성을 걸터타고서 뭇별과 나란히 있다.[傅說得之……乘東維騎箕尾 而比於列星]” 하였다.

314)철쭉 노래:박순이 백운산으로 가던 중에 진달래가 지고 철쭉이 핀 것을 보고 장난삼아 지은 시에 이르기를 “동쪽 시내 철쭉꽃이 이제서 막 피었거니, 돌아가는 우리 선생 쓸쓸한 맘 위로하리.[東溪躑躅新成錦 應慰先生減興歸]” 하였다.

315)사공(謝公)께서……서글프네:사공은 진(晉)나라의 명신인 사안(謝安)을 가리키고, 동산(東山)은 절강성(浙江省) 상우현(上虞縣) 서남(西南)에 있는 산 이름인데, 사안이 이곳에 은거하였으며, 또한 기녀(妓女)를 데리고 유연(遊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316)배견와(拜鵑窩):박순이 1568년(선조19)에 영평에 왔다가 산천의 빼어남을 보고 머물러 살 적에 지은 집의 이름으로, 현재의 옥병서원(玉屛書院) 터에 있었다. ‘배견(拜鵑)’은 두견새에게 절한다는 뜻으로, 흔히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쓰인다. 두보(杜甫)가 촉(蜀) 땅에서 지은 두견(杜鵑) 시에 “두견새가 늦은 봄 날아와서, 슬프게 내 집 곁에서 울었지. 내가 보고는 항상 재배했나니, 옛 망제(望帝)의 넋임을 존중해서였네.[杜鵑暮春至 哀哀叫其間 我見常再拜 重是古帝魂]”라고 하였다.

317)자규(子規):두견새의 별칭이다. 전설에 의하면 촉(蜀)나라 망제(望帝) 두우(杜宇)의 혼백이 화하여 두견새가 되었는데, 항상 한밤중에 ‘불여귀(不如歸)’라고 하는 듯한 소리로 몹시 처절하게 운다고 한다.

318)김준룡(金俊龍):1586∼1642. 본관은 원주, 자는 수부(秀夫)이다. 1608년(선조41) 무과에 급제하였다. 1636년(인조14)에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그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관할 군사를 이끌고 용인의 광교산(光敎山)에서 청나라 군대와 싸워 공을 세웠다. 이후 김해 부사, 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319)큰……열었도다:‘큰 칼’은 매우 긴 장검인 의천검(倚天劍)을 형용한 것이다. 의천검이라는 말은 송옥(宋玉)의 대언부(大言賦)에 “네모난 땅으로 수레를 만들고 둥근 하늘로 덮개를 만들고 긴 검은빛이 번쩍이며 하늘 저편에 기대 섰다.[方地爲車 圓天爲蓋 長劍耿耿倚天外]” 한 데서 온 말이다. 이백(李白)의 임강왕절사가(臨江王節士歌)에 “장사는 분노하고 큰 바람이 이니, 어이하면 의천검을 얻어서 바다 건너며 큰 고래를 벨거나.[壯士憤 雄風生 安得倚天劍 跨海斬長鯨]”라고 하였다. 원수대(元帥臺)는 경성(鏡城)에 있는 대 이름이다.

320)오랑캐의……것이리:북쪽의 오랑캐들을 섬멸하는 공을 세울 것이라는 뜻이다. 선우(單于)는 한나라 때 흉노족의 군장(君長) 칭호이다. 한나라 효문제(孝文帝) 때 곽거병(霍去病)이 위청(衛靑)의 아래에서 표요교위(剽姚校尉)로 있으면서 흉노족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어 오랑캐 선우의 계부(季父)를 생포한 일이 있다. 이후에 곽거병은 흉노족과 여러 차례 싸워 흉노족을 사막 북쪽으로 몰아냈다.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

321)원수(元帥):함경북도 경성(鏡城)에 있는 대 이름이다.

322)어랑(漁郞):함경북도 경성의 남쪽에 있는 포구인 어랑포(魚郞浦)를 가리킨다.

323)강군백(姜君白):강학(姜翯, 1602~1637)으로,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군백(君白)이며, 호는 완암(浣岩)이다. 1627년(인조5) 문과 정시에 급제하였으며, 1636년에 영원 군수(寧遠郡守)로 있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3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324)노가(勞歌):노로가(勞勞歌)로, 이별의 노래를 말한다. 중국 강소성(江蘇省) 강녕현(江寧縣) 남쪽에 노로정(勞勞亭)이 있는데, 옛날 그곳은 송별하던 장소로, 떠나는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부르며 전별하였다. 事文類聚

325)유정(柳亭)……하네:가을날에 가는 사람을 전송한다는 뜻이다. 유정은 함흥(咸興) 근처에 있는 정자 이름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버드나무가 우거져 있는 곳을 가리킨다. 옛날 사람들은 먼 길을 떠나가는 사람을 전송할 적에 흔히 버드나무가 있는 곳에서 이별을 하면서 버드나무를 꺾어서 가는 사람에게 주었다.

326)자문(子文):이상질(李尙質, 1597∼1635)의 자이다. 311쪽 주225 참조.

327)음산(陰山)에……마소:변경 지대에서 밤에 길을 가면서는 암행 어사라고 하여 몰래 가다가는 화살에 맞을 수가 있으니, 조심하여 다니라는 뜻이다. 음산은 오늘날의 하투(河套) 이북과 대막(大漠) 이남에 있는 여러 산의 통칭으로, 흔히 중국 북방의 오랑캐 지역에 있는 산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장군은 한(漢)나라의 명장(名將)인 이광(李廣)을 말한다. 이광이 북평 태수(北平太守)로 있을 적에 사냥을 나가서 바위를 호랑이로 착각하고 화살을 쏘았더니, 화살이 바위에 그대로 꽂혔다고 하는데, 영평부(永平府)에서 동쪽으로 6, 7리쯤 되는 곳에 그때 쏜 바위인 사호석(射虎石)이 있다고 한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328)만세교(萬歲橋):함흥의 낙민루(樂民樓) 아래에 있는 다리이다.

329)직녀교(織女橋):오작교(烏鵲橋)를 말한다. 견우(牽牛)와 직녀(織女) 두 별이 부부 사이이면서도 은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가 1년에 한 번 칠월 칠석에 만나는데, 이때 그들이 은하를 건너올 수 있도록 까치들이 오작교를 만들어 준다고 한다.

330)스스로가……있네:눈처럼 날아서 님이 있는 곳에 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는 뜻이다. 남조(南朝) 송(宋)의 포조(鮑照)가 지은 영설(詠雪) 시에 “오랑캐 땅 부는 바람 변방의 눈 날리매, 천리 멀리 용산을 넘어오누나.[胡風吹朔雪 千里度龍山]” 하였다.

331)미무(蘼蕪):향기가 나는 풀로, 우리말로는 궁궁이라고 하며, 왕손초(王孫草)라는 별칭이 있다. 한시에서는 특히 멀리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나 원망 등을 표현할 때 이 풀을 끌어다가 쓴다.

332)요염한……언제런가:고악부(古樂府)의 양양악(襄陽樂)에 “큰 방죽서 노래하는 여러 계집아이들은, 꽃과 같이 아름다워 사내의 눈 놀래키네.[大堤諸女兒 花豔驚郞目]”라고 하였다.

333)도엽(桃葉):진(晉)나라 때 왕헌지(王獻之)의 애첩(愛妾)의 이름이다. 그는 자색이 뛰어났는데, 왕헌지는 그를 매우 사랑하여 도엽가(桃葉歌)를 짓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민 상서의 첩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334)진운(秦雲)……없으리니:서울로 떠나간 민 상서가 소식을 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진운은 진(秦)나라 서울 장안(長安)의 하늘에 뜬 구름으로, 곧 우리나라 서울 하늘의 구름을 비유한 것인데, 흔히 그리운 사람이 있는 곳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335)부령(富寧)의 형제암(兄弟巖):부령부에서 남쪽으로 20리쯤 되는 곳에 있다. 산기슭에 두 바위가 마주 보고 섰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으며, 작은 시내가 그 사이로 흘러내린다고 한다.

336)어찌하여……보나:서울을 그리워하다가 다시 형제들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언덕 머리 물새’는 영원(鴒原)을 뜻하는데, 이 말은 흔히 형제간의 우애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 상체(常棣)에 이르기를 “물새가 언덕에 있으매 형제가 위급함을 구원하는도다.[脊令在原 兄弟急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337)영랑호(永郞湖):강원도 속초시 북쪽에 있는 석호(潟湖)로, 신라 때 국선(國仙)인 영랑(永郞), 술랑(述郞), 안상(安詳), 남석(南石) 네 사람이 금강산에서 수련을 마치고 경주(慶州)로 돌아가던 중에 이 호수에 이르렀는데, 영랑은 맑고 잔잔한 호수와 웅장한 설악의 울산바위, 그리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범바위가 물속에 잠겨 있는 모습에 도취되어 경주로 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338)불이문(不二門):불교에서 말하는 불이법문(不二法門)으로, 상대 차별을 없애고 절대 차별 없는 이치를 나타내는 법문이다.

339)우통수(于筒水):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오대산의 장령봉 밑에서 나는 샘물로, 태백시 금대봉에 있는 검룡소(儉龍沼)와 함께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곳이다.

340)잔을……고요하니:진(晉)나라 때 기주(冀州) 출신의 어떤 승이 항상 나무로 만든 잔[盃]을 타고 물을 건너다녔으므로 사람들이 그 승을 배도 화상(盃渡和尙)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세세한 행실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신통력이 탁월하였다고 한다.

341)문수(文殊)께서……있으리라:인욕(人慾)을 억제하고 불법(佛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문수는 문수보살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현 상인(玄上人)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독룡(毒龍)은 독이 있는 용으로, 불가(佛家)에서는 흔히 이를 사람의 욕심에 비유하기도 한다.

342)임선백(任善伯):1596∼1656.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자는 경여(慶餘)이다. 1632년(인조10)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호조 좌랑으로서 강화를 사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효종 때에는 영흥 부사(永興府使)를 지냈다.

343)계림(鷄林)에……나뉘었네:자인현(慈仁縣)은 본디 경주부(慶州府)에 속했던 곳인데,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637년에 떨어져 나와 독립되었다. 이때 임선백이 초대 현감으로 나갔다.

344)주흘산(主屹山)은……일어나리:주흘산은 문경새재에 있는 산 이름이고, 용추(龍湫) 역시 문경새재에 있는 폭포 이름이다. 임선백이 자인으로 부임하면서 조령을 통해 내려갈 것이므로 한 말이다.

1)네 마리 말:사신으로 가는 사람이 타고 가는 수레를 끄는 말을 가리키는데, 흔히 나랏일을 완전무결하게 수행하려는 각오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 사모(四牡)에 이르기를 “어찌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겠는가마는 나랏일을 완전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豈不懷歸 王事靡盬]” 하였다.

2)유선증(兪善曾):1583~?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계성(季省)이다. 유계(兪棨)의 족숙(族叔)이다. 청도 군수(淸道郡守) 등을 지냈다.

3)푸른 실:푸른색의 실로 꼰 줄을 말하는데, 시문에서는 흔히 말고삐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4)심로(沈):1590∼?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원직(元直), 호는 죽사(竹沙)․죽계(竹溪)이다. 1635년(인조1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46년 헌납으로 있을 때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를 변호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남해에 유배되었다. 효종이 즉위한 뒤에 집의와 승지를 지냈다.

5)심제(沈):1597~? 본관은 풍산이고, 자는 자미(子美), 호는 사천(沙川)이다. 전주 부윤 등을 지냈으나, 자세한 이력은 미상이다.

6)척소(尺素):비단에 쓴 짤막한 편지를 말한다. 고악부(古樂府)인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 이르기를 “나그네가 먼 곳에서 여기 와서는, 두 마리의 잉어를 내게 주었네. 아이 불러 잉어를 끓이게 하니, 배 속에 비단에 쓴 편지 들었네.[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兒烹鯉魚 中有尺素書]” 하였다.

7)사군(使君):고을의 수령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심제(沈)가 호남 지방의 수령으로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8)윤명은(尹鳴殷):1601~1646.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이원(而遠), 호는 사정(思亭)이다. 1628년(인조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4년에 부수찬으로 있던 중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을 추숭하는 것에 반대하는 차자를 올렸다가 경성(鏡城)에 유배되었다. 1645년에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9)제포(綈袍):두꺼운 명주로 만든 솜옷인데, 친구 간의 우정을 말할 때 쓰는 말이다. 전국 시대 위(魏)나라의 수가(須賈)가 그의 옛 친구 범수(范睢)가 추위에 떠는 것을 보고 제포를 주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79 范睢列傳

10)양류곡(楊柳曲):절양류(折楊柳)로, 고대의 악부 가운데 하나인데, 버들가지를 꺾으면서 이별하는 아쉬운 정을 노래한 것이다.

11)윤관(尹瓘)……열었는데:윤관이 여진족을 물리치고 함경도 일대에 9성을 쌓았으므로 한 말이다. 윤관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107년(예종2)에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진하여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공험진(公嶮鎭), 숭녕(崇寧), 통태(通泰), 진양(眞陽)의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였는데, 이들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대막(大漠)은 본디 몽고 고원(高原)의 큰 사막으로, 한해(瀚海), 대적(大磧)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함경도 북쪽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12)비조(鼻祖)께서 세운 대:경성(鏡城)의 서쪽에 있는 원수대(元帥臺)를 말한다. 비조는 윤명은의 선조인 윤관을 가리킨다.

13)송 태수(宋太守):송국택(宋國澤, 1597∼1659)을 가리킨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택지(澤之),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을 추숭하는 데 반대하다가 수성도 찰방(輸城道察訪)으로 좌천되었으며, 이후 문천 군수(文川郡守)로 나갔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이후 승지, 예조 참의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사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14)임금……다스리리:수고롭게 정사를 돌보지 않더라도 백성들이 덕에 감화되어 잘 다스려질 것이라는 뜻이다. 한(漢)나라 때 급암(汲黯)이 동해 태수(東海太守)가 되었을 적에 문을 닫고 방 안에 누워서 백성을 다스렸는데도 1년 남짓한 사이에 동해군이 매우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漢書 卷50 汲黯傳

15)오마(五馬):말 다섯 마리가 끄는 수레로, 태수가 부임할 적에 이 수레를 타고 갔으므로, 한 고을의 수령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16)정유성(鄭維城):1596∼1664.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덕기(德基), 호는 도촌(陶村)이다. 1627년(인조5)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인조조에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효종조에 호조 판서, 현종조에 우의정을 지냈다. 저서로는 은대일기(銀臺日記)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7)금도장에 자색 인끈:고관이 차는 도장과 인끈으로, 정유성이 동래 부사로 내려가기 때문에 한 말이다.

18)동호부(銅虎符):한(漢)나라 때 지방관이 차던 신부(信符)로, 오른쪽은 경사(京師)에 두고 왼쪽은 군국(郡國)에 주어 군사를 출동하는 데에 썼다.

19)영일현(迎日縣)을……하네:정유성이 영일 정씨인 정몽주(鄭夢周)의 9대손이므로 한 말이다.

20)교인(鮫人)……돌아가리:교인은 전설 속에 나오는 사람으로, 바닷속에 산다고 하는 인어(人魚)를 말한다. 남해 물속에 사는 교인이 비단을 잘 짰는데, 물 밖으로 나와 인가에 머물면서 매일 비단을 짜다가, 작별할 무렵에 눈물을 흘려서 구슬을 만들어 주인에게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太平御覽 卷803 珍寶部 珠下

21)정뇌경(鄭雷卿):1608∼1639. 본관은 온양(溫陽), 호는 운계(雲溪)이다. 1630년(인조8)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정언(正言) 등의 언관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瀋陽)에 잡혀가자 자청해 수행했으며, 1639년 필선으로 승진해 심양에서 세자를 보위하던 중 간신인 정명수(鄭命壽) 등을 처벌하려다가 도리어 청나라 관헌에 잡혀 처형당하였다. 그때 32세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22)동룡(銅龍):세자를 칭하는 말로, 여기서는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소현세자를 칭한다. 한(漢)나라 때 태자(太子)의 궁문(宮門) 위에는 동으로 만든 용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칭하는 것이다.

23)수성(隋城):수원(水原)의 옛 이름이다.

24)곡조……겁나누나:악부 횡취곡사 가운데 대선우(大單于)소선우(小單于)의 곡이 있다. 선우(單于)는 한나라 때 흉노족의 군장(君長) 칭호이다.

25)가을……날리네:잠양(涔陽)은 지금의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지명이다. 초(楚)나라의 공자(公子)가 진(秦)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으면서 왕자사귀곡(王子思歸曲)이라는 노래를 지었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동정호의 나무숲엔 가을이 들고, 잠양 땅의 풀잎들은 다 시들었네. 천승의 나라인 초나라를 떠나와서, 함양 땅의 포의 신세 되어 있구나.[洞庭兮木秋 涔陽兮草衰 去千乘之家國 作咸陽之布衣]” 하였다.

26)계문(薊門)……마소:계문은 북경(北京) 덕승문(德勝門)의 서북쪽 지역으로, 춘추전국 시대 연(燕)나라 땅이다. 여기서는 청나라 심양(瀋陽)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다. ‘초나라 곡’은 춘추 시대 초나라 사람인 종의(鍾儀)가 연주한 곡으로, 흔히 타향에서 곤경에 처해 고향을 그리면서 연주하는 음악을 뜻한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임금이 군부(軍府)를 시찰하다가 포로로 갇혀 있는 종의를 보고서 “남관(南冠)을 쓰고 갇혀 있는 자가 누구냐?” 하니, 군리(軍吏)가 “초나라에서 포로로 잡혀 온 자입니다.” 하였다. 진나라 임금이 그로 하여금 초나라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자 종의는 고향을 그리면서 자기 나라 토속의 곡조를 연주하였다. 진나라 임금이 그 음악을 다 듣고는 슬퍼하면서 종의를 석방하게 하였다. 春秋左氏傳 成公9年

27)포의(布衣)……생각하리: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소현세자 등이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포의 입은 왕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을 뜻한다.

28)왕자사귀곡(王子思歸曲):초(楚)나라의 공자(公子)가 진(秦)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으면서 지었다고 하는 노래이다. 374쪽 주25 참조.

29)초왕(楚王)……세웠거니:초나라 임금이 운몽택(雲夢澤)에 행차하여 사냥을 한다는 뜻이다. 운몽택은 초(楚) 지방에 있는 호수로, 옛날에 초왕이 이곳에 와서 사냥을 하며 놀았다.

30)왕자께선……부러졌네:볼모로 잡혀가 있는 왕자가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큰 칼이 다 부러졌다’는 것은,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큰 칼인 ‘대도(大刀)’는 대도환(大刀環)으로, 돌아간다는 뜻인 환(還)의 은어인데, 큰 칼에 달린 고리인 환(環)이 돌아간다는 뜻인 환(還)과 음이 같으므로 취해서 쓴 것이다. 고리가 부러진 것은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漢書 卷54 李廣傳 李陵

31)함양(咸陽)에서……없네:본디는 왕자가 진(秦)나라의 서울인 함양에서 병들어 누워 있는데, 그 병을 낫게 할 길이 없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청(淸)나라의 서울인 심양(瀋陽)에 억류되어 있는 탓에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한(漢)나라 매승(枚乘)이 칠발(七發)을 지어 초(楚)나라 태자의 병을 치유하였는데, 제5발에 이르기를 “팔월 보름날이 되면 여러 공후(公侯) 및 먼 지역에서 사귄 형제들과 함께 광릉의 곡강으로 물결치는 것을 구경하러 갈 것이다.[將以八月之望 與諸侯遠方交遊兄弟 並往觀濤于廣陵之曲江]” 하였다.

32)여기에서……보네:심양에 억류되어 있는 왕자가 서울이 그리워서 서울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본다는 뜻이다. 강릉(江陵)은 춘추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도읍이었던 영(郢) 지역을 말하는바, 영은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강릉현(江陵縣) 북쪽 기남성(紀南城) 지역에 있었다. 여기서는 한양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33)진관(秦關):진나라의 변경 지역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왕자가 억류되어 있는 심양(瀋陽)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34)축(筑)에……녹거니와:‘연 땅 노래’는 비분강개한 노래를 뜻한다.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부탁을 받고 형가(荊軻)가 진 시황(秦始皇)을 죽이러 떠날 때 그의 절친한 벗 고점리(高漸離)가 축이라는 악기를 두드리며 “바람이 소슬함이여, 역수 물이 차도다. 장사가 한 번 떠남이여, 다시 돌아오지 않는도다.[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라고 노래하였다. 戰國策 燕策3

35)계문(薊門):북경(北京) 덕승문(德勝門)의 서북쪽 지역으로, 춘추전국 시대 연(燕)나라 땅이다.

36)공연스레……하네:볼모로 잡혀가 있는 왕자를 생각하게 한다는 뜻이다. 봄풀은 왕손초(王孫草)를 가리킨다.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지은 초사(楚辭)인 초은사(招隱士)에 “왕손께선 노니느라 돌아가지 않는데, 봄풀은 자라나서 우거졌도다.[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라고 하였다.

37)청한주(靑翰舟):새의 모양으로 장식을 새기고 푸른 칠을 한 배를 말한다. 당나라 피일휴(皮日休)의 초입태호(初入太湖)에 “청한주의 배 띄우기 정말 좋으며, 백옥적의 피리 불어 댈 만하구나.[好放靑翰舟 堪弄白玉笛]” 하였다.

38)상보(尙輔):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백헌(白軒)이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인조조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었으며, 영의정을 지냈다. 저서로는 백헌집(白軒集)이 있다.

39)천금(千金)의 말:아주 뛰어난 인재(人才)를 뜻한다.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제(齊)나라에 패한 뒤에 어진 자를 초빙하여 원수를 갚으려고 하자, 곽외(郭隗)가 천리마를 구하고자 해도 얻지 못하다가 죽은 천리마의 뼈를 500금을 주고 산 후 1년이 채 못 되어 천리마가 3필이나 찾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못난 자신부터 잘 대우해 주면 자신보다 훌륭한 인재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소왕이 곽외를 위해 궁을 지어 주고 스승으로 대우하니, 악의(樂毅)가 위(魏)나라에서 오고, 추연(鄒衍)이 제(齊)나라에서 오고, 극신(劇辛)이 조(趙)나라에서 오는 등 선비들이 다투어서 연나라로 달려와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戰國策 燕策1

40)두 마리 소:은거해 살면서 조정에 나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양 무제(梁武帝)가 도홍경(陶弘景)을 벼슬시키려고 간절히 청하여 부르니, 도홍경은 오지 않고 그림을 한 폭 그려서 보냈다. 그 그림에는 소 두 마리가 그려져 있는데, 한 마리는 자유스럽게 물가에서 풀을 뜯고 있고, 한 마리는 머리에다 금(金)으로 굴레를 씌워서 한 사람이 채찍을 들고 고삐를 쥐고 따르고 있었다. 양 무제가 그 그림을 보고서는 “이 사람이 오지 않겠구나.”라고 하였다.

41)은하수는……환해지네:두우(斗牛)는 28수(宿) 가운데 두수(斗宿)와 우수(牛宿)를 말하며, ‘신선 배’는 한나라 무제(武帝) 때 장건(張騫)이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을 때 타고 간 뗏목을 말한다. 전설에 의하면 장건이 뗏목을 타고 은하수에 올라가 직녀(織女)를 만나서 지기석(支機石)을 받아가지고 와 엄군평(嚴君平)에게 보였더니, 엄군평이 말하기를 “아무 날에 객성(客星)이 두우성(斗牛星)을 범하더니, 그대가 은하에 올라간 것이었군.” 하였다.

42)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중국 소수(瀟水)와 상수(湘水) 부근에 있는 여덟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린 그림을 말하는데, 팔경은 평사낙안(平沙落鴈), 원포귀범(遠浦歸帆), 산시청람(山市晴嵐), 강천모설(江天暮雪), 동정추월(洞庭秋月), 소상야우(瀟湘夜雨), 연사만종(煙寺晚鍾), 어촌낙조(漁村落照)이다. 夢溪筆談 書畫

43)군산(君山):동정호(洞庭湖) 가운데 있는 산 이름으로, 상군(湘君)이 노니는 곳이라 하여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44)한밤중에……하누나:반죽(斑竹)은 소상강(瀟湘江) 가에서 자라는 대나무로, 순(舜) 임금이 남방을 순행하다가 죽자, 순 임금의 비(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울다가 죽었는데, 그 눈물이 소상강 가의 대[竹]에 뿌려져서 아롱진 점이 되었다고 한다. 초사(楚辭) 원유(遠遊)에 “상령으로 하여금 비파를 타게 함이여, 해약으로 하여금 풍이를 춤추게 하도다.[使湘靈鼓瑟兮 令海若舞馮夷]” 하였다.

45)일천……있네:황제 딸은 요 임금의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말한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이 지은 초사(楚辭)》 〈구가(九歌) 상군(湘君)에 “황제의 딸이 북쪽 물가에 빠지니, 아름다운 그 모습 아련히 나를 슬프게 하네.[帝子降兮此渚 目眇眇兮愁予]”라고 하였다.

46)산음(山陰)의 밤:눈이 오는 밤을 말한다. 산음은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의 남동쪽에 있는 회계산(會稽山)의 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진(晉)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산음에 살았는데, 한밤중에 눈이 내리자 친구인 대규(戴逵)가 갑자기 생각났다. 이에 즉시 배를 타고 가 대규가 사는 집 문 앞까지 갔는데,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나는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온 것이다.” 하였다. 世說新語 任誕

47)초은편(招隱篇):한(漢)나라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지은 시편(詩篇)인 초은사(招隱士)를 말한다. 이 시는 관직에서 물러나 산림에 은거해 지내면서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을 노래하였다.

48)송연(宋淵):생몰년은 미상이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자심(子深), 호는 둔암(芚菴)이다. 권필(權韠)의 조카사위로 성혼(成渾)에게서 수업하였다. 문장과 덕망이 뛰어났으며, 이안눌(李安訥) 등과 교류하였다. 인조조에는 진산 현감(珍山縣監)을 지냈다. 강화군 선원면 연리(煙里)에 살았으며, 묘소 또한 연리에 있다. 유고(遺稿) 수편이 강화고금시선(江華古今詩選)에 전한다.

49)조강(祖江):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이 합하는 곳을 가리킨다. 한강은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서 임진강과 합하며, 통진(通津) 북쪽에 이르러 조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1 제3권 한성부

50)강도(江都) 맡은 이천석(二千石):강화 유수(江華留守)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아마도 강화 유수를 지냈으며, 동명과 친하였던 이안눌(李安訥)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천석은 고을의 수령을 가리키는 말로, 한(漢)나라 때 고을 수령의 녹봉이 이천 석이었으므로 이렇게 칭한다.

51)효렴선(孝廉船):효렴과(孝廉科)에 천거된 사람이 타고 있는 배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탄 배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송연(宋淵)이 타고 있는 배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다. 진(晉)나라 때 효렴으로 천거된 재사(才士) 장빙(張憑)이 당시의 고사(高士)이던 유담(劉惔)을 찾아가 하룻밤을 묵으면서 청담(淸談)을 나누고는, 이튿날 유담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돌아오는데, 유담이 그를 대단하게 여겨 다시 장 효렴(張孝廉)의 배를 찾으라고 명하여 그를 데리고 가서 간문제(簡文帝)에게 천거하였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75 張憑列傳

52)해타(咳唾):기침과 침이 모두 구슬이 된다는 뜻인 해타성주(咳唾成珠)로, 아름다운 시문(詩文)을 뜻한다. 莊子 秋水

53)여룡(驪龍):깊은 바닷속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검은빛의 용을 말한다. 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에 이르기를 “천금(千金)의 구슬이 저 깊은 바닷속 여룡의 턱 아래에 숨겨져 있다.” 하였다.

54)대청포(大靑浦):강화도에 있는 포구 이름이다.

55)연미정(燕尾亭):강화군 강화읍 월곶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누정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물길이,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갑곶(甲串)의 앞을 지나 인천 쪽으로 흐르는데, 그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오는 배가 이 정자 밑에서 닻을 내리고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56)오마(五馬):말 다섯 마리가 끄는 수레로, 태수가 부임할 적에 이 수레를 타고 갔으므로, 한 고을의 수령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57)거문고……졸리:지방관으로서 한가롭게 지내면서도 훌륭한 치적을 이룰 것이라는 뜻이다. 공자(孔子)의 제자인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의 수령이 되어 다스릴 적에 거문고를 뜯고 지내면서 당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는데도 선보가 잘 다스려졌다. 呂氏春秋 察賢

58)푸른……쓰소:고을의 수령으로서 백성을 사랑으로 대하면서 잘 어루만져 줄 것이라는 뜻이다. 후한(後漢) 때 유관(劉寬)이 남양 태수(南陽太守)로 있을 적에 관리와 백성이 혹 과실을 범하면 형벌을 내리는 대신 부들로 만든 채찍을 가지고 때렸는데 아프지는 않으면서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여 감화시킨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25 劉寬列傳

59)그대……있어:돌아가면서 자신을 남겨 두고 떠나간다는 뜻이다. 시경 강유사(江有汜)에 “강에는 샛강이 있는데, 그 사람은 가면서, 날 데려가지 않네.[江有沱 之子歸 不我過]”라고 하였다.

60)이 이사(李貳師):1641년(인조19)에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어 청나라로 가서 소현세자를 보필한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을 가리킨다. 378쪽 주38 참조.

61)화악(華岳):북한산을 가리킨다. 북한산은 이 외에도 정(鼎)에 발이 셋이 달려 있는 것처럼 생겼다고 하여 삼각산, 정악(鼎嶽)이라고도 하며, 아이를 업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부아악(負兒嶽)이라고도 칭한다.

62)주천(酒泉):경상도 예천(醴泉)의 옛 이름이다.

63)조휴휴(趙休休):조휴(趙休, 1600~1654)로, 본관은 한양이고, 자는 휴휴이며, 조찬한(趙纘韓)의 큰아들이다. 용궁 현감(龍宮縣監)을 지냈다. 白軒集 卷35 龍宮縣監趙君行狀

64)창오(蒼梧)에서 나는 죽엽(竹葉):창오는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에 있는 지명이다. 죽엽은 술 이름인 죽엽청(竹葉淸)을 말한다. 진(晉)나라 장화(張華)의 경박편(輕薄篇)에 “창오의 죽엽청이요, 의성의 구온차이다.[蒼梧竹葉淸 宜城九醞醝]” 하였다.

65)개령 태수(開寧太守):누구인지 미상이다.

66)동쪽으로……날리:한시에서 벗과의 이별을 표현할 때 상투적으로 쓰는 말이다. 옥대신영(玉臺新詠) 권9 양무제가사(梁武帝歌辭)에 “동쪽으로 백로가 날고 서쪽으로 제비가 난다.[東飛伯勞西飛燕]”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67)정관(井官):우물을 맡은 관원이라는 뜻인데, 김천(金泉)에는 술을 빚기에 아주 좋은 우물이 셋이 있다고 하는바, 여기서는 김천의 수령으로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섬봉일록초(蟾峰日錄抄)에 “김천은 주천(酒泉)이라는 별호가 있는데, 술을 빚으면 술 맛이 아주 좋기 때문에 이렇게 칭하는 것이다. 술을 빚는 물이 나오는 우물이 세 개가 있는데, 두 개는 우촌(郵村)에 있고, 하나는 섬봉(蟾峰)에 있다.” 하였다. 息山集 卷12 雜著

68)용추(龍湫)에……돌아오소:장마철이 되기 전에 서울로 올라오라는 뜻인 듯하다. 용추는 문경새재에 있는 작은 폭포 이름이다.

69)김충각(金忠慤):1577~1650.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자는 계성(季誠)이다. 직장(直長) 등을 지냈으며, 강릉에 살았다. 강릉의 향현사(鄕賢祠)를 짓기도 하였다.

70)호수에는……것이리라:가을바람이 불 때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아직 안 가고 있다는 뜻이다. 계응(季鷹)은 진(晉)나라 때 맑은 지조로 이름 높았던 장한(張翰)의 자(字)이다. 장한은 가을바람이 부는 것을 보자 오중(吳中)의 순챗국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말하기를 “인생살이에 있어서는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귀한 법인데, 어찌 벼슬에 얽매여서 수천 리 밖을 떠돌면서 명예와 관작을 노리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관직을 버린 채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張翰

71)호정(壺亭):정두원(鄭斗源, 1581∼?)의 호이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정숙(丁叔)이다. 정명호(鄭明湖)의 아들이다. 1616년(광해군8)의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631년(인조9)에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화포(火砲), 천리경(千里鏡), 자명종(自鳴鐘) 등의 현대적 기계와 함께 이마두(利瑪竇)의 천문서(天文書)와 《직방외기(職方外記)》, 《서양국풍속기(西洋國風俗記)》, 《천문도(天文圖)》, 《홍이포제본(紅夷砲題本)》 등 서적을 신부 육약한[陸若漢;Johannes Rodorigue]으로부터 얻어 가지고 이듬해 돌아왔다. 새로운 화약의 제조법도 이때 가지고 왔다고 한다.

72)이현달(李顯達):1591∼1645. 본관은 전주로 효령대군의 7대손이다. 1628년(인조6)에 의주 부윤에 제수(除授)되었으나, 경험이 부족한 신임 부윤으로서는 이 직임을 완수할 수 없다는 사헌부의 건의에 따라 체임되었다. 1637년 4월에 이조의 건의로 남한산성(南漢山城) 출입 때 호종(扈從)한 공로를 인정받아 원종훈(原從勳)에 책록되고, 14일에 북병사(北兵使)에 제수되었다.

73)와내(臥內)에서……주었거니:임금이 특별한 은혜를 내려 통제사의 직임을 제수해 주었다는 뜻이다. 와내는 대궐의 침전(寢殿)을 말하는데, 신하를 여기로 불러들이는 것은 특별한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곤외(閫外)는 국방상의 중요한 변경 지역을 말한다. 이현달이 통제사에 제수된 것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74)누선(樓船)……소속되었다네:전선(戰船)을 관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누선은 전쟁하거나 놀이하는 데 쓰기 위해 만든 큰 다락배로, 여기서는 전쟁하기 위한 배를 말한다. 중국의 고대 군직(軍職) 가운데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있어 수군을 관할하였다.

75)양곡(暘谷):전설 속에 나오는 해가 뜨는 곳으로,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 이르기를 “해가 뜨는 곳을 양곡이라고 한다.” 하였다.

76)용천검(龍泉劍):보검 이름이다. 진(晉)나라 때 오(吳) 땅에 자색 기운이 하늘의 우수(牛宿)와 두수(斗宿) 사이로 뻗치는 것을 보고 장화(張華)가 이 보검을 얻었다고 한다.

77)욕심내지……것이리:두보(杜甫)의 제장씨은거(題張氏隱居) 시에 이르기를 “욕심을 내지 않으니 밤에도 금은의 기운이 보이고, 해치지를 아니하매 아침에 사슴이 노는 것이 보인다.[不貪夜識金銀氣 遠害朝看麋鹿遊]”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

78)가끔씩은……꺾으리:일본의 사신들을 불러다가 연회를 베풀면서 외교적인 절충을 벌여 무력을 쓰지 않고 왜적들을 제압할 것이라는 뜻이다.

79)누각……있으리라:두우성(斗牛星)은 28수 가운데의 두 별로 두수(斗宿)와 우수(牛宿)이다. 진(晉)나라 때 오(吳) 땅에 자색 기운이 하늘의 두수와 우수 사이로 뻗치는 것을 보고 장화(張華)가 뇌환(雷煥)을 풍성현(豐城縣)의 현령으로 보내 용천(龍泉)과 태아(太阿) 두 검을 얻은 다음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拾遺記 卷10 칠보도(七寶刀)는 일곱 가지 보배로 장식한 보검을 말한다.

80)부상(扶桑):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나무 이름으로, 흔히 우리나라나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81)바다……품었다네:일본이 항상 난리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바다 고래는 사나운 성정을 가진 왜놈을 뜻한다.

82)연화사(蓮花寺):어디에 있는 절인지 미상이다.

83)원공(遠公):동진(東晉)의 고승 혜원 법사(惠遠法師)를 가리킨다. 혜원 법사는 여산(廬山)에 있는 동림사(東林寺)에서 18명의 학승(學僧)들과 더불어 수업(修業)하면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였다.

84)급고원(給孤園):절을 말한다. 옛날에 인도(印度)의 사위성(舍衛城)에 보시(布施)를 잘하는 장자가 있어서 사람들이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라고 불렀다. 이 사람이 부처의 설법을 듣고서는 감동하여 정사(精舍)를 세워 부처를 모시고자 하였는데, 정사를 세우기에 적당한 곳으로는 서다태자(逝多太子)가 소유한 지역뿐이었으므로, 그곳을 사려고 하자, 태자가 “그 지역에다가 금을 다 깔아 놓으면 팔겠다.” 하였다. 이에 장자가 보관하고 있던 금을 모두 꺼내 다 깔자, 태자가 그 성의에 감동하여 땅을 희사해 정사를 지었다. 그 뒤 부처가 아난(阿難)에게 설법하기를 “원지(園地)는 선시장자(善施長者)가 산 것이고, 수림(樹林)은 서다태자가 보시한 것이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정사를 건립하였으니, 서다림급고독원(逝多林給孤獨園)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佛國記

85)한(漢)나라의……되었네:이 시의 대상 인물인 원 상서(元尙書)가 겸손한 덕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한 말이다. 정위(廷尉)는 한나라 때의 명신(名臣)인 장석지(張釋之)를 가리킨다. 장석지가 정위로 있을 적에 왕생(王生)이라는 노인이 장석지의 덕을 드러내 주기 위하여 자신의 버선을 벗은 다음 장석지에게 버선을 신겨 줄 것을 청하자, 장석지는 그가 미천한 신분이었음에도 불고하고 그의 버선을 공손히 신겨 주었다. 어떤 사람이 왕생에게 “어찌해서 장 정위(張廷尉)를 모욕하는가?” 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일부러 모욕을 주어서 그의 겸손한 덕을 더욱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다.” 하니, 사람들은 왕생을 어질게 여기고 장석지를 더욱 존경하였다. 장석지는 이후 재상이 되었다. 史記 卷102 張釋之列傳

86)곽지흠(郭之欽):1601∼1661. 본관은 청주, 자는 흠로(欽魯), 호는 지포(芝浦)이다. 1646년(인조24)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효종조에 장령, 현종조에 사간, 집의 등 언관을 지냈다. 곽지흠의 자가 대본에는 ‘欽老’로 되어 있는데, 면암집(勉菴集) 권30 집의 증 이조 참의 지포 곽공 묘갈명(執義贈吏曹參議芝浦郭公墓碣銘)에 의거하여 ‘老’를 ‘魯’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87)하손(何遜):양(梁)나라 때의 대표적인 문장가로, 특히 시와 부에 뛰어났던 인물인데, 상서 수조랑(尙書水曹郞)을 지냈으므로 흔히 하 수조(何水曹)라고 칭하였다. 두보(杜甫)의 증좌복야정국공엄공무(贈左僕射鄭國公嚴公武) 시에 “비서로는 하손이요, 작전 참모는 자형이라.[記室得何遜 韜鈐延子荊]”라는 구절이 있다.

88)당포(唐浦)의……이별하다:당포가 어느 곳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도 지금의 당진(唐津) 근처를 가리키는 듯하다. 임 상사(林上舍) 역시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혹 동명의 내형(內兄)인 임류(林溜, 1602~1680)를 가리키는 듯도 하다. 임류는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사징(士澄)이다.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나, 정묘호란 이후에는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끊고 충청도 신창(新昌)의 도고산(道高山) 아래에서 은거하였다. 藥泉集 卷15 生員林公墓誌銘

89)내년……마소:내년 봄에 만나자는 약속을 강으로 올라오는 조수가 제때에 올라오는 것처럼 반드시 지키라는 뜻이다.

90)심자미(沈子美):심제(沈, 1597~?)로, 본관은 풍산(豐山)이고, 자는 자미이다. 전주 부윤 등을 지냈다.

91)계문(薊門):북경(北京) 덕승문(德勝門)의 서북쪽 지역으로, 춘추전국 시대 연(燕)나라 땅이다.

92)백두음(白頭吟):전한(前漢)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처 탁문군(卓文君)이 지은 오언시로, 사마상여가 무릉(茂陵) 여인을 집으로 데려오려고 하자, 탁문군이 사마상여와 부부의 인연을 끊으려고 하면서 지은 시이다.

93)푸른……것이리:‘푸른 물’은 악부(樂府)의 금곡(琴曲) 가운데 녹수곡(綠水曲)이 있으므로 한 말이고, 그윽한 난은 악부 금곡 가운데 유란(幽蘭)이 있으므로 한 말이다.

94)심휴문(沈休文):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시인인 심약(沈約)으로, 휴문은 그의 자이다. 당시 문단의 영수로서 사조(謝朓), 왕융(王融) 등과 함께 영명체(永明體)를 창출하여 후세 격률시(格律詩)의 서막을 열어 놓았다. 南史 卷57 沈約列傳여기서는 심제의 성씨가 심약과 같으므로 심제의 문장을 찬미하는 뜻으로 쓴 것이다.

95)서한(西漢)……읊었던가:사마상여(司馬相如)는 한나라 무제(武帝) 때의 대표적인 문장가로, 특히 부(賦)를 잘 지어 대인부(大人賦), 감천궁부(甘泉宮賦), 자허부(子虛賦), 상림부(上林賦) 등을 지었다. 자허부는 사마상여가 일찍이 양(梁)나라에 객유(客遊)하면서 제후(諸侯)의 유렵(遊獵)에 관해 서술하여 지은 문장으로, 공자자허(公子子虛), 오유선생(烏有先生), 망시공(亡是公) 등 3인의 가설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문답체로 서술한 것인데, 대략 절검(節儉)을 요지로 삼아 제왕(帝王)을 풍간(諷諫)했다. 무제가 이 자허부를 보고는 “짐은 어찌하여 이런 글을 짓는 사람과 같은 시대에 살지 못한단 말인가.” 하고 탄식한 일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96)구름……붓:능운필(凌雲筆)로, 시문(詩文)에 뛰어난 것을 표현할 적에 쓰는 말이다. 사마상여가 대인부(大人賦)를 지어서 신선(神仙)의 일을 서술하여 한 무제에게 바치니, 무제가 크게 기뻐하여 “표표(飄飄)하여 구름 위로 솟아오르는[凌雲] 기상이 있다.” 하였다.

97)유진삼(柳晉三):1598∼?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중(汝重), 호는 사천(泗川)이다. 1634년(인조12)에 해주에서 거행된 특별 시험에 뽑혀 이듬해 증광 별시의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여 급제하였다. 1664년(현종5) 곡산 군수(谷山郡守)로 있을 때 지나치게 술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 숙종조에 장령을 지냈다.

98)오흥 태수(吳興太守)……읊었던가:오흥 태수는 중국 남조 양(梁)나라의 시인인 유운(柳惲)으로, 유진삼과 성이 같기에 끌어다가 쓴 것이다. 유운은 시(詩), 척독(尺牘), 바둑, 거문고 등에 모두 능한 인물이다. 오흥은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현(縣) 이름이다. 유운의 시 가운데에는 강남곡(江南曲), 장문원(長門怨), 도의시(擣衣詩) 등 이별을 읊은 시가 특히 많다.

99)한회일(韓會一):1580∼1642.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형보(亨甫), 호는 협소(愜素)이다. 국구(國舅)인 한준겸(韓浚謙)의 아들로,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오빠이다. 여주, 임천, 연안 등의 수령을 지냈다.

100)백로……나뉘누나:한시에서 벗과의 이별을 표현할 때 상투적으로 쓰는 말이다. 옥대신영(玉臺新詠) 권9 양무제가사(梁武帝歌辭)에 “동쪽으로 백로가 날고 서쪽으로 제비가 난다.[東飛伯勞西飛燕]”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101)술……헤어졌네:술을 마실 적마다 여주에서 이별하면서 술을 마시던 일이 생각난다는 뜻인데, 한회일이 여주 목사를 지낸 적이 있으므로 한 말이다. 이십탄(二十灘)은 경기도 여주의 이포(梨浦) 나루 동쪽에 있는 여울 이름이다.

102)二:대본에는 ‘一’로 되어 있는데, 초간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03)어젠……끊었었네:맥상곡(陌桑曲)은 전국 시대 한단(邯鄲)에 살던 여인인 나부(羅敷)가 부른 노래이다. 나부라는 여인이 같은 고을 사람으로 낮은 벼슬자리에 있는 왕인(王仁)의 아내가 되었는데, 왕인이 뒤에 조왕(趙王)의 가령(家令)이 되었다. 나부가 어느 날 밭두둑에 나가 뽕을 따고 있었는데, 조왕이 누대에 올라가 이를 바라보다가 나부의 미모에 혹하여 나부를 불러 술을 먹이고는 겁탈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나부가 쟁(箏)을 뜯으면서 맥상가(陌上歌)를 불러 거절하였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사또님은 아내가 있고, 나부는 남편이 있습니다.[使君自有婦 羅敷自有夫]” 하였으므로, 조왕이 겁탈하지 못하였다. 古今注 音樂

104)취향(醉鄕)에서……구가하네:술에 잔뜩 취해 요순 시대의 백성처럼 태평을 맘껏 누린다는 뜻이다. 취향은 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한 경지를 말한다. 당우(唐虞) 시대는 요 임금과 순 임금의 시대로, 태평성대를 말한다.

105)산동(山東)……봤네:술을 즐겨 마시는 영웅호걸들을 좋아했던 유방(劉邦)이 천자가 된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산동의 코 큰 사람’은 유방을 가리킨다. 유방은 코가 유난히도 높았으므로 융준공(隆準公)이라고도 불렸다. 유방은 본디 유사(儒士)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 가운데 유관(儒冠)을 쓰고 오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그의 관을 벗기고는 그 안에 오줌을 누어 모욕을 주곤 하였다. 史記 卷97 酈生列傳

106)윤이지(尹履之):1579∼1668.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소(仲素), 호는 추봉(秋峯)이다.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손자이고, 영의정을 지낸 윤방(尹昉)의 아들이다. 1616년(광해군8)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병자호란 때인 1637년(인조15) 2월 17일에 강화 부사에 제수되어 강화 수비를 맡았다. 1668년(현종9)에 판돈녕부사로 있던 중 죽었다. 저서로는 추봉집이 있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107)청녀(靑女):서리와 눈을 주관하는 전설 속의 여신(女神)으로,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 이르기를 “늦가을 9월에 이르면……청녀가 나와서 서리와 눈을 내린다.” 하였다.

108)상락주(桑落酒):옛날 좋은 술의 이름으로, 하동군(河東郡)에 사는 유타(劉墮)라는 사람이 황하의 물을 길어서 빚은 술이라고 한다.

109)강주(江州)에선……마소:고을 수령으로 있는 윤이지가 직접 술을 가지고 왔으므로 한 말이다. 강주는 진(晉)나라 때 사람인 왕굉(王宏)이 자사(刺史)로 있던 고을인데, 여기서는 강도(江都)를 가리킨다. ‘백의 입은 사람’은 술을 가지고 오는 사람을 가리킨다. 진나라 때 은사(隱士)인 도잠(陶潛)이 일찍이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을 맞아 마실 술이 없어 집 주변에서 국화를 따다가 앉아 쉬던 참에 먼 곳을 바라보니 백의를 입은 사람이 오고 있었는데, 바로 자사 왕굉이 보내는 술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었다. 도잠은 그 사람이 도착하자 곧바로 그 술을 마시고는 술에 흠씬 취하였다. 續晉陽秋

110)강여수(姜汝受):강홍익(姜弘益)으로 여수는 자이다. 255쪽 주55 참조

111)술에……생각나네:술에 잔뜩 취했던 일들이 생각난다는 뜻이다. 접리(接罹)는 백접리(白接䍦)를 말한다. 진(晉)나라 때 산간(山簡)이 양양(襄陽)을 맡고 있으면서 습가지(習家池)라는 못에서 술을 마시며 놀았는데, 일찍이 술에 취하지 않은 채 돌아간 적이 없었으며, 그때마다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돌아갔다고 한다. 晉書 卷43 山濤列傳 山簡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 “석양은 현산 서쪽으로 넘어가려 하는데, 백접리 거꾸로 쓰고 꽃 아래서 길 헤매누나.[落日欲沒峴山西 倒著接䍦花下迷]” 하였다.

112)䍦:대본에는 ‘罹’로 되어 있으나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13)송옥(宋玉)……당했네:송옥은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시인으로, 굴원의 제자인데, 그가 지은 대초왕문(對楚王問)이라는 글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영중(郢中)에서 처음에 하리파인(下里巴人)이라는 노래를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는데, 양아해로(陽阿薤露)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으며, 양춘백설가(陽春白雪歌)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었다. 이와 같이 격조 높은 곡조를 부를수록 그에 화답하는 사람이 더욱 적었다.”라고 하였다. 文選 卷45 여기서는 송순지와 송옥이 같은 송씨(宋氏)이므로 끌어다가 쓴 것이다.

114)지금……냈네:송순지의 화첩에 난초 그림이 있으므로 한 말이다. 상저(湘渚)는 송옥의 스승인 굴원(屈原)이 유배되어 있었던 상수(湘水)의 물가라는 뜻이다. 송옥은 모두 16편의 부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유란백설곡(幽蘭白雪曲)이 있다.

115)대유령(大庾嶺):중국의 오령(五嶺) 가운데 하나로, 한 무제(漢武帝) 때 유씨(庾氏) 성을 가진 장군이 이곳에다가 성을 쌓았으므로, 대유령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대여(大余)와 광동성(廣東省) 남웅(南雄)의 사이에 있으며, 영남과 영북의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곳에는 매화가 많으므로 ‘매령(梅嶺)’이라고도 한다.

116)나부산(羅浮山):광동성(廣東省)의 동강(東江) 북안(北岸)에 있는 산이다. 수(隋)나라 때 조사웅(趙師雄)이 갔다가 황홀한 경지에서 향기가 감도는 어여쁜 미인을 만나 즐겁게 환담하고 술을 마시며 하룻밤을 보냈는데, 그다음 날 아침에 보니 큰 매화나무 아래에 술에 취해서 누워 있었다는 매화 선녀의 전설이 있다.

117)창랑객(滄浪客):강호(江湖)를 물결처럼 떠도는 나그네라는 뜻으로, 은거해 사는 사람을 뜻한다.

118)적 정위(翟廷尉):한(漢)나라 때 정위를 지낸 적공(翟公)을 가리킨다. 적공이 벼슬자리에 있을 때에는 찾아오는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다가, 파직당하자 참새 그물을 쳐 놓을 정도로 문 앞이 한산하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복직된 뒤에 빈객들이 서로 앞다투어 찾아가려고 하자, 그 문에 큰 글씨로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데에서 교제하는 정을 알겠고, 한 번 가난해지고 한 번 부자가 되는 데에서 교제하는 태도를 알겠으며, 한 번 귀해지고 한 번 천해지는 데에서 교제하는 정이 드러난다.[一死一生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態 一貴一賤 交情乃見]”라고 써 붙이고는 손님을 일절 사절하였다. 史記 卷120 鄭當時列傳 論

119)역사를 읊다:남은경은 이 시에 대해 “관각문인(館閣文人)으로 활동하며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던 정두경은 영사시(詠史詩) 쓰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영사(詠史)라는 제목으로만 10수를 썼고, 전억석가(前憶昔歌) 7수후억석가 7수, 도합 14수가 있으니, ‘영사’를 표면적으로 표방하는 시를 24수나 남긴 것이다. 정두경의 사기(史記)에 대한 반복적인 독서는 중국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간의 역사 변화에 대한 나름대로의 잣대를 갖게 했던 듯하다.” 하였다. 남은경, 東溟 鄭斗卿 文學의 硏究, 83쪽

120)청제(靑齊):옛날 제(齊)나라 땅인 청주(靑州), 즉 산동반도 일대를 말한다.

121)백이관(百二關):본디는 험고한 지형을 가지고 있던 진(秦)나라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산동반도의 지형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사기(史記) 권8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이르기를 “진나라는 지형이 아주 험고한 나라로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바,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똑같이 100만의 군사가 있으면 200만의 군사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백이(百二)에 대해서는 이와는 다른 설이 있는데, 2명이 100명을 상대할 수 있다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

122)궁중……알았구나:전국 시대 진 소왕(秦昭王)이 사자를 제(齊)나라에 보내 옥련환(玉連環)을 주면서 “제(齊)나라에는 지혜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 고리를 풀 수가 있는가?”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에게 이를 풀어 보라고 하였으나, 푸는 자가 없었다. 그때 제왕(齊王) 법장(法章)의 왕후인 군왕후(君王后)가 방망이로 옥고리를 깨뜨려 버리고서 진나라 사신에게는 옥고리를 풀었다고 말하였다. 戰國策 齊策6

123)석교(石橋):옛날에 진 시황(秦始皇)이 바다를 건너서 해 돋는 곳을 보고자 하여 동해의 바닷가에 놓았던 돌다리이다.

124)어찌하여……봤나:진 시황이 사람의 속마음을 뚫어볼 수 있는 거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간사한 신하들의 마음을 비춰 보지는 않고 궁녀들의 마음만 비춰 본 것이 애석하다는 뜻이다. ‘황금 거울’은 진 시황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진경(秦鏡)을 가리킨다. 이 거울은 물건의 본질을 밝혀 주는 것이므로 아무리 변형하여도 본질 그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오장(五臟)을 비춰 보면 그 사람의 질병은 물론, 그 사람의 선악과 속셈까지도 다 드러나 보이는데, 여자가 사심이 있으면 곧 쓸개가 부풀고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진 시황은 이 거울을 가지고 궁녀들의 마음이 변했나, 안 변했나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西京雜記 卷3

125)송둔암(宋芚菴):송연(宋淵)을 가리킨다. 383쪽 주48 참조.

126)진여휴(秦女休):악부(樂府)의 잡곡(雜曲) 가운데 위(魏)나라 좌연년(左延年)이 지은 진여휴행(秦女休行)에 나오는 여인으로, 성이 진씨(秦氏)이고, 이름이 여휴(女休)이다. 나이 열다섯에 집안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칼을 들고 원수의 집으로 가 원수를 갚았다.

127)김동봉(金東峯):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을 가리킨다. 김시습은 동봉이라는 호 이외에도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ㆍ벽산(碧山)ㆍ췌세옹(贅世翁)이라는 호가 있다. 김시습이 일찍이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에 은거한 적이 있었는데, 후대에 박세당(朴世堂)이 동봉의 서쪽에 영당(影堂)을 짓고, 춘추로 제향하였다. 국역 서계집 4 제22권 연보

128)동봉자(東峯子)의……나네:김시습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속에 숨어서 오직 사슴과 벗을 삼으며 지낸 일이 탄식스럽다는 뜻이다.

129)달생(達生):생명의 본뜻을 깨달은 사람이나 진리에 통한 사람을 가리킨다. 장자(莊子) 달생(達生)에 “삶의 실정을 통한 자는 삶과 관계가 없는 것을 힘쓰지 않는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130)청루(靑樓):푸른색으로 칠해 아름답게 장식한 누각으로, 전하여 기원(妓院)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131)다시금……싶네:앵두가 푸른 잎과 섞여 있는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132)김계서(金繼緖):강릉 김씨(江陵金氏)의 인물인 듯한데, 자세한 것은 미상이다.

133)최광문(崔廣文):어떤 인물인지 미상이다.

134)대문……몇뿐이네:학당을 열고 글을 가르칠 적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으나, 죽어 장사 지낼 때에는 장사에 참여한 사람이 얼마 없었다는 뜻이다.

135)동악(東岳):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호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자민(子敏)이다. 이행(李荇)의 증손이고, 이식(李植)의 종숙(從叔)이다. 강도 유수(江都留守), 함경도 관찰사, 예조 판서, 공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에 아주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동악집(東岳集)이 있다. 이안눌이 살던 집은 지금의 동국대학교 구내에 있었는데, 현재는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이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136)이빈빈(李彬彬):조선 중기의 문인인 이빈(李彬, 1597~1642)을 가리킨다.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빈빈(彬彬)이며, 호는 서주(西疇)이다. 장수 현감(長水縣監)을 지냈다. 저서로는 서주집(西疇集)이 있다. 1597년(선조30)에 영암(靈巖)의 옥천(玉川)에서 태어났으며, 백광훈(白光勳)의 외손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곱 살 때 “배꽃이 반쯤 피니 옥구슬을 꿴 듯하다.[梨花半開貫玉珠]”라고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동명(東溟)과 친분 관계가 있어 동명이 “백씨의 교룡의 필세, 이제는 외손에게 있구나.[白氏蛟龍筆 于今在外孫]”라고 하였다. 임형택, 우리고전을 찾아서, 한길사, 2007, 370쪽

137)5수:초간본(初刊本)에는 모두 6수가 수록되어 있다. 대본에 수록되지 않은 시 한 수는 “旅宦京師託酒壚 玉鞍還欲載羅敷 鬼伯相催蒿里去 南來五馬不踟躕”이다.

138)새벽녘에……열리어서:대궐에서 명이 내려왔다는 뜻이다. 명광궁(明光宮)은 한 무제(漢武帝)가 건립한 궁전 이름으로, 미앙궁(未央宮) 서편에 있었는데, 후대에는 대궐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지거문(止車門)은 한나라 궁궐의 사마문(司馬門)으로, 이 문에 이르러서는 태자(太子)나 제왕(諸王)도 모두 수레에서 내려야 하므로 이렇게 칭하는 것이다.

139)오마(五馬)……받았었네:고을 수령에 제수되었다는 뜻이다. 오마는 말 다섯 마리가 끄는 수레로, 태수가 부임할 적에 이 수레를 타고 갔으므로, 한 고을의 수령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전성(專城)은 한 고을을 전담하여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이빈이 장수 현감이 되어 내려갔으므로 한 말이다.

140)생이별……힘겨웠네:지방으로 내려간 친구가 그리워서 견디기 힘들었다는 뜻이다. 초혼부(招魂賦)는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시인 송옥(宋玉)이 자신의 스승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난 것을 불쌍하게 여겨 지은 부이다.

141)낙성(洛城)에서……부르거니:서울에서 만시(輓詩)를 짓는다는 뜻이다. 낙성은 서울을 가리킨다. 해로(薤露)는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만가(挽歌)를 말한다. 고금주(古今注) 중권(中卷) 음악(音樂)에 이르기를 “해로는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소리이다. 전횡(田橫)의 문인(門人)에게서 나왔는데, 전횡이 자살하자 문인들이 슬퍼하여 그를 위해 비가(悲歌)를 지은 것으로, 사람이 목숨이 풀잎의 이슬방울같이 쉽게 사라지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하였다.

142)오직……곡하리라:반남 박씨로서 부마가 된 사람은 박미(朴瀰, 1592~1645)를 가리키는 듯하다. 박미의 분서집(汾西集) 권3에 만이장수빈빈(輓李長水彬彬)이 있다. 박미는,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연(仲淵), 호는 분서(汾西)이다. 선조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결혼하여 금양위(錦陽尉)가 되었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143)바닷가엔……그대로리:이빈의 상여가 그의 고향인 호남의 영암(靈巖)으로 떠나가므로 한 말이다.

144)호죽부(虎竹符):한(漢)나라 때 지방관이 차던 신부(信符)인 죽사부(竹使符)를 말하는데, 대나무로 신부를 만들어서 오른쪽은 경사(京師)에 두고 왼쪽은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에게 주었다. 여기서는 이빈이 고을 수령에 제수되었으므로 한 말이다.

145)어제……견디는데:수령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던 일이 생각나서 못 견디겠다는 뜻이다. ‘푸른 실’은 푸른색의 실로 꼰 줄을 말하는데, 시문에서는 흔히 말고삐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며, 특히 고을의 수령이 타고 가는 말을 뜻할 때 표현하는 말이다.

146)오색……가네:수령으로 전송한 지 얼마 안 되어 문상하기 위하여 상여(喪輿)를 전송한다는 뜻이다. ‘오색 수술 하얀 말의 수레’는 상여를 말한다. 옛 악부(樂府)의 유공가(庾公歌)에 “유공 상여 양주 향해 돌아가거니, 하얀 말이 수술 달린 수레를 끄네.[庾公還揚州 白馬牽流蘇]”라고 하였다.

147)고당(高堂)께서……잃었거니:아들이 어머니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한 말이다. 고당은 어머니를 가리킨다. ‘저물녘에 기댈 기약’은 어머니가 멀리 떠난 아들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말한다. 전국 시대 왕손가(王孫賈)가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나갔는데, 그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네가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오면 나는 대문에 기대어서[倚門] 바라보았고, 네가 저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마을 문에 기대어서[倚閭] 바라보았다.” 하였다. 戰國策 齊策下

148)하얀……슬퍼하는구나: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의 처지가 슬퍼할 만하다는 뜻이다. ‘하얀 꽃과 붉은 꽃’은 시경 백화(白華)를 말하는데, 이 시는 현재 없어진 시이며, 효자가 서로 경계하여 어버이를 잘 봉양하고자 하는 것을 읊은 시라고 한다.

149)천년토록……아니하네:어머니보다 일찍 죽어서 무덤에 묻혔다는 뜻이다. 한나라 때 사람으로 한서(漢書)를 지은 반고(班固)의 누이동생인 반소(班昭)가 시문(詩文)에 뛰어났는데, 그의 아들이 지방관으로 나가자, 아들을 따라가서 동정부(東征賦) 등을 짓기도 하였는데, 그 동정부에 이르기를 “영초 칠 년에, 나는 아들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네. 때는 바로 맹춘의 길한 날이었으매, 좋은 날을 가려서 길을 떠났다네.[惟永初之有七兮 余隨子兮東征 時孟春之吉日兮 撰良辰而將行]” 하였다. 後漢書 卷84 列女列傳 曹世叔妻 文選 卷5 東征賦

150)생각건대……있으리라:영균(靈均)은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굴원은 이름이 평(平)이고 자가 원(原)이며, 호가 영균이다. 이정보에 대해 왜 굴원을 끌어다 댔는지는 이정보의 이력을 알지 못하는 탓에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자귀(姊歸)는 중국의 지명으로 굴원의 고향이라고 한다. 굴원에게 이름이 여수(女嬃), 또는 수(須)라고 하는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굴원이 조정에서 추방되어 비분을 못이겨 죽으려고 할 때 이 누이동생이 권하여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굴원의 맘을 누그러뜨렸으므로, 그 고장 사람들이 그곳을 자귀라고 하였다고 한다. 通典 卷183 巴東郡

151)김 수사(金水使):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여러 가지 자료를 참조해 보면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을 가리키는 듯한데, 김우명이 수사(水使)를 지낸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청풍 김씨 가운데 수사를 지낸 어떤 인물을 가리키는 듯하다.

152)신라금(新羅琴):충청도 아산(牙山)에 있는 동림사(東林寺)라는 절의 대들보로 쓰였던 오동나무를 가지고 만든 금(琴)으로, 허국(許國)이 가지고 있다가 김우명(金佑明)의 소실이 소장하고 있었다. 동명집(東溟集) 권9의 신라금에 대한 노래[新羅琴歌]에 이르기를 “충청도에 아산이라 이름하는 군 있는데, 그 군 서쪽 있는 절은 동림사라는 절이라네.……만력 연간에 절의 대들보가 부러졌는데, 대들보엔 당나라 때의 연월이 새겨져 있었다네.……더군다나 그 나무는 바로 오동나무로, 호사가가 이것으로 붉은 현의 금을 만들었네.[忠淸之道牙山郡 郡西有寺名桐林……萬曆年中寺棟折 棟上刻有唐年月……況乃此木是梧桐 好事作琴朱其絃]” 하였으며, 식암유고(息庵遺稿) 권21 신라금명(新羅琴銘)에는 “신라금은 고 기사(奇士) 허국이 소장하고 있던 것인데, 동명 정두경이 장가(長歌)를 지어서 그 일을 서술하였다. 지금은 나의 숙부인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의 소실 집에 소장되어 있다.” 하였으며,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권15 신라금명(新羅琴銘)에는 “신라금은 전창도위(全昌都尉)가 소장했다가 다시 기사 허국이 소장하였는데, 정동명이 장가를 지어 그 일을 서술하였다. 그 뒤에는 다시 청풍부원군의 집에 소장되었다가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가 소장하였다.” 하였다.

153)지난……때:아주 오랜 옛날을 말한다. 한(漢)나라 때의 신선(神仙)인 왕원(王遠)이 마고(麻姑)를 초청하니, 마고가 봉래산(蓬萊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찾아보겠다고 하였다. 그 뒤에 마고가 와서는 스스로 말하기를 “그대를 만난 이래로 동해가 세 번 뽕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지난번에 봉래산에 가 보니 지난번에 만났을 적보다 물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니 어찌 다시 육지가 되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이 말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을 의미한다. 봉래도는 동해 바다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삼신산 가운데 하나이다. 神仙傳 王遠

154)겁회(劫灰):불교에서 말하는, 세계가 파멸할 때 일어난다고 하는 큰불의 재를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가 곤명지를 팔 적에 밑바닥에서 검은 재가 나와 동방삭(東方朔)에게 물어보았으나 동방삭도 몰랐다. 그 뒤에 서역(西域)의 중이 와서 이것을 보고는 “천지가 다 타고 남은 재이다.”라고 했다 한다.

155)우뚝……놨네:신라금을 동림사(東林寺)의 오동나무 대들보를 가지고 만들었으므로 한 말이다. 범전(梵殿)은 사찰을 가리킨다. 녹기금(綠綺琴)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옥여의부(玉如意賦)를 지어 양왕(梁王)에게 바치자 양왕이 기뻐하여 사마상여에게 하사했다는 거문고인데, 전하여 명금(名琴)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156)하얀……없네:오랜 세월이 지나 예전에 살던 사람들은 다 죽고 없다는 뜻이다. 옛날에 요동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일찍이 영허산(靈虛山)에서 선술(仙術)을 배우고 뒤에 학(鶴)으로 변화하여 고향에 돌아가서 성문(城門)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았는데, 때마침 어떤 소년이 활을 가지고 그를 쏘려고 하였다. 이에 높이 날아올라 공중을 배회하면서 말하기를 “새로 변화한 정영위가, 집 떠난 지 천년 만에 이제야 돌아왔네. 성곽은 예와 같은데, 사람은 간 곳 없어라, 어이해 신선 안 배우고 무덤만 즐비한고.[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冢纍纍]”라고 했다. 搜神後記

157)고당(高堂)……보았다네:동림사(東林寺)의 대들보로 쓰였던 오동나무는 신라 때의 나무라는 뜻이다. 고당은 여기서는 동림사를 말한다.

158)하늘……하는구나:무릉곡(武陵曲)은 악부 잡곡의 곡 이름인 무릉심행(武陵深行)을 가리키는데, 한나라의 장군인 마원(馬援)이 남쪽으로 정벌 나갔을 적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마 장군(馬將軍)은 한나라의 명장인 마원을 가리킨다. 마원이 남방의 교지국(交趾國)을 정벌할 때, 무더운 날씨에 독한 장기(瘴氣)가 풍겨 나와 솔개가 하늘을 날다가 물 위로 툭툭 떨어졌다고 한다. 東觀漢記 卷12 馬援

159)전에……해졌네:변방 성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면서 고생하였다는 뜻이다. 자류마(紫騮馬)는 검은 색깔의 갈기에 붉은 색깔의 몸을 한 말로, 좋은 말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흑초구(黑貂裘)는 검은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말한다.

160)그때에도……알겠구나:무관으로 있으면서 큰 공을 세워 높은 관직에 오르는 데 뜻을 두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였음을 알겠다는 뜻이다. 산수곡(山水曲)은 옛날에 백아(伯牙)가 탔다고 하는 고산유수곡(高山流水曲)을 말한다. 아양곡(峨洋曲)이라고도 한다.

161)관산월곡(關山月曲):한(漢)나라 악부 횡취곡사(橫吹曲辭)의 곡 이름인데, 대부분 이별을 가슴 아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162)솔솔……내네:옛날 악곡(樂曲)의 금곡(琴曲) 가운데 풍입송(風入松)이 있는데, 이 곡은 진(晉)나라의 혜강(嵇康)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또 고려(高麗) 시대에 연주되던 악장(樂章) 가운데에도 풍입송이 있는데, 이 노래는 작가, 연대 미상의 고려 가요로, 악장 가운데 속악 가사의 하나이며, 태평성대를 기리는 송도(頌禱)의 뜻을 담고 있다.

163)심지치(沈之治):어떤 인물인지 분명치 않으나, 최명길(崔鳴吉)과 주고받은 시가 많이 있으며,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 보면,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명종조에 형조 판서를 지낸 심광언(沈光彦)의 현손(玄孫)이고, 현감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164)벽락 시랑(碧落侍郞):진(晉)나라 때 사람인 심희(沈羲)를 가리킨다. 심희가 백성을 위해 재해(災害)를 없애 주고 병을 고쳐 주면서 정작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않자, 천신(天神)이 감동한 나머지 그를 하늘로 영접하여 벽락 시랑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神仙傳 沈羲 여기서는 심지치의 성씨가 심희와 같으므로 끌어다가 쓴 것이다. 대본의 선조(仙曹)는 본디 당나라 때의 상서성(尙書省)에 소속된 각 관청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하늘나라의 조정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165)운손(雲孫):먼 후손으로, 여기서는 심지치를 가리킨다.

166)조윤지(趙胤之):조석윤(趙錫胤, 1606∼1655)으로,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윤지(胤之), 호는 낙정(樂靜)이다. 장유(張維),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1628년(인조6)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로는 낙정집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67)권항(權伉):석주(石洲) 권필(權韠)의 큰아들이다. 청하 현감(淸河縣監) 등을 지냈다.

168)다행히도……이었다네:권필의 아들인 권항이 권필 못지 않은 문재(文才)가 있다는 뜻이다. 착륜(斲輪)은 장자(莊子)》 〈천도(天道)에 나온 말로, 바퀴살을 알맞게 깎는 것을 말하는데, 흔히 재주에 정통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169)산 이부(山吏部):진(晉)나라 때의 명신(名臣)으로, 이부 상서를 지낸 산도(山濤)를 가리킨다. 산도는 이부 상서로 있으면서 인재를 잘 선발하고 청렴을 지킨 것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인물을 품평하는 데 아주 뛰어나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산공계사(山公啓事)’라고 칭하였다. 晉書 卷43 山濤列傳

170)삼오(三吳):중국의 오흥(吳興), 오군(吳郡), 회계(會稽)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장강(長江) 동쪽 지방의 범칭으로 쓰인다.

171)오호(五湖):오월(吳越) 지방에 있는 호수로, 구구(具區), 요격(洮滆), 팽려(彭蠡), 청초(靑草), 동정(洞庭) 등을 말한다.

172)소봉(素封):벼슬살이를 하지 않는 사람이 전원(田園)에서 수확하는 이익이 많아 왕후에 봉해진 것이나 다름없이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권129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이르기를 “요즈음 관직의 녹봉도 없고 작읍의 수입도 없으면서 낙이 관직과 작읍이 있는 사람과 비등한 자들이 있는데 그들을 이름하여 소봉이라 한다.[今有無秩祿之奉爵邑之入 而樂與之比者 命曰素封]” 하였다.

173)목노(木奴):귤(橘)의 별칭이다. 당나라 때 사람인 이형(李衡)이 가족들 몰래 용양현(龍陽縣)에 귤(橘) 1천 그루를 심어 두고는 죽을 때에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용양현에 천 두(頭)의 목노를 남겼으니, 너에게 해마다 비단 1천 필을 바칠 것이다.” 하였다.

174)봉래전(蓬萊殿)서……가득하네:제주도의 귤이 임금에게 진상되었다는 뜻이다. 봉래전은 당(唐)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에 있던 궁전으로, 왕궁을 뜻한다.

175)매년……도달하네:제주도에서 해마다 아주 좋은 말을 진상품으로 바친다는 뜻이다. 용매(龍媒)는 준마(駿馬)를 가리키는 말로, 한서(漢書) 권22 예악지(禮樂志)에 “천마가 왔으니, 용이 오게 될 매개이다. 창합에서 노닐며, 옥대를 보는도다.[天馬徠 龍之媒 游閶闔觀玉臺]”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옥대는 천제(天帝)가 사는 곳을 말하는데, 전하여 임금이 있는 대궐을 가리킨다.

176)누운……날뛰누나:초서(草書) 획이 아주 힘찬 것을 표현한 것이다.

177)높이……보이네:뛰어난 글씨에 비견될 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산음(山陰)은 중국 절강성 회계현에 있는 지명으로, 명필로 이름난 왕희지(王羲之)가 살던 곳이다. 연지(硯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왕희지가 붓을 씻어 연못의 물이 모두 까맣게 변해 염색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안항(鴈行)’은 솜씨를 겨룰 만한 적수를 뜻한다. 왕희지가 늘 “내 글씨를 종요에게 비기면 항행(抗行)이 될 만하고, 장지초(張芝草)에게 비기면 안항이 될 만하다.”라고 하였다.

178)오궁(吳宮)에서……전해지리:오궁은 춘추 시대 오나라의 궁궐을 말하며, 백거(柏擧)는 지금의 호북성 마성현(麻城縣)에 있는 지명으로, 춘추 시대 이곳에서 오왕 합려(闔閭)의 군대가 초(楚)나라 소왕(昭王)의 군대를 크게 무찌른 일이 있다. 오나라의 장수인 손무(孫武)가 오왕 합려 앞에서 병법을 시범 보일 적에 궁중의 미인을 좌우 2대로 나누어 교련하면서 오왕이 총애하는 미인을 좌우 부대의 대장으로 삼았는데, 손무가 명령을 내려도 떠들면서 장난질을 칠 뿐 영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이에 손무가 두 미인의 목을 잘라 처형하자, 군령이 제대로 섰다. 그것을 보고 오왕이 손무를 전적으로 신임하여 손무를 대장으로 삼았으며 마침내 손무와 오자서(伍子胥)를 시켜 초나라를 쳐 백거에서 초나라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春秋左氏傳 定公4年

179)어인……들리나:병자호란에서 패한 뒤에 나라를 부강하게 할 정책은 시행되지 않고 학정(虐政)만을 일삼고 있다는 뜻이다. 백부구(白符鳩)는 악곡(樂曲)의 이름으로, 삼국 시대 오(吳)나라 사람들이 마지막 임금인 손호(孫皓)의 학정을 걱정하여 지은 노래이다.

180)육룡(六龍):태양을 가리킨다. 태양의 신이 타는 수레를 여섯 마리의 용이 끄는데, 희화(羲和)가 그 수레를 몰았다는 전설이 있다.

181)홀로……오르는가: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처량한 심정을 표현한 시구이다. 반희(班姬)는 한 성제(漢成帝)의 궁인인 반 첩여(班婕妤)를 말한다. 반 첩여가 시가에 능하여 총애를 받다가 조비연(趙飛燕)의 참소를 받고는 물러나 장신궁(長信宮)에서 지낼 때 자도부(自悼賦)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그 노래에 “화려한 궁전에 먼지 끼고 옥계단에 이끼 자랐거니, 군자께선 은혜 내림 끝까지 다하지 않네.[華殿塵兮玉階苔 君子恩未畢]”라고 하였다.

182)홍원구(洪元九):홍석기(洪錫箕, 1606∼1680)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원구(元九), 호는 만주(晩州)이다. 1641년(인조19)의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45년에 정언으로 있던 중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여러 곳의 수령을 지냈고 시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만주집존주록(尊周錄)이 있다. 시호는 효정(孝定)이다.

183)영안가(永安家):영안도위(永安都尉)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의 집을 가리키는 듯하다. 홍주원은,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건중(建中), 호는 무하당(無何堂)이다. 1623년(인조1)에 선조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졌다.

184)금장(錦帳):옛날 상서랑(尙書郞)에게 비단 휘장이 제공된 것으로 인해 상서랑을 금장랑(錦帳郞)이라고도 했는바, 즉 상서랑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는 예조의 낭관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는바, 아마도 정두경이 당시에 예조의 관원으로 있었던 듯하다.

185)진대(秦臺)에서……슬펐다오:홍석기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진대는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그의 딸인 농옥(弄玉)을 위하여 만들어 준 누각으로, 봉루(鳳樓)라고도 한다. 진나라 목공의 딸 농옥이 음악을 좋아하였는데, 소사(蕭史)가 퉁소를 잘 불어서 봉황이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이에 목공이 농옥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누각을 지어 주었는데, 이들 두 사람이 퉁소를 불면 봉황이 날아와서 모였으며, 이들 두 사람은 그 뒤에 봉황을 타고 날아갔다고 한다. 列仙傳 蕭史여기서는 홍석기가 부마인 홍주원의 집에 있으므로 끌어다가 쓴 듯하다.

186)향화(向化):지명인 듯한데, 어디인지는 미상이다.

187)음산(陰山)에서……사람:활을 잘 쏘는 사람을 뜻한다. 음산은 오늘날의 하투(河套) 이북과 대막(大漠) 이남에 있는 여러 산의 통칭으로, 흔히 중국 북방의 오랑캐 지역에 있는 산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한(漢)나라 때의 명장인 이광(李廣)이 일찍이 흉노(匈奴)와 싸울 적에 중귀인(中貴人)이 흉노 3인이 쏘는 활에 맞아 상해를 입고 돌아오자, 이광이 “이들은 반드시 물수리를 떨어뜨릴 만한 활솜씨가 있는 자들이다.” 하고는, 곧장 그 흉노 3인을 추격하여 2인은 사살하고 1인은 생포함으로써 위엄을 크게 떨쳤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188)동양위(東陽尉):선조의 부마인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을 가리킨다. 자는 군석(君奭)이고 호는 낙전당(樂全堂)․동회거사(東淮居士)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하여 동양위에 봉해졌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낙전당집, 낙전당귀전록(樂全堂歸田錄), 청백당일기(靑白堂日記)가 있다.

189)옥경(玉京)……들었다네:옥경은 옥황상제가 있는 곳으로 하늘나라를 말한다. 소사(簫史)는 옛날에 퉁소를 잘 불던 사람이다. 소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439쪽 주185 참조.

190)꿈을……울리누나:동양위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이미 떠나고 없어 만나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191)풍이(馮夷):전설 속에 나오는 황하(黃河)의 신인 하백(河伯)으로, 수신(水神)을 가리킨다.

192)도가(道家)의 서책을 읽다:남은경은 이 시에 대해 “이 시는 정두경의 도가 관련 시 가운데 하나이다. 정두경은 ‘도가서(道家書)’를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도(道)’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정두경은 이러한 사람들과는 달리, 참된 도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 내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시를 통해 볼 때 정두경은 소위 ‘도’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것은 부질없는 행동이고, 속세에 있는 범인들은 ‘도’를 보아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였다. 남은경, 東溟 鄭斗卿 文學의 硏究, 90쪽

윤미길(尹米吉)은 “동명은 이 시에서 신선이나 선계를 밖에서 구하려는 우매(愚昧)를 비난한다. 삼주수(三珠樹)도 동명의 눈에는 길가에 자라는 나무일 뿐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안에서 신선계(神仙界)를 찾고 현실을 초탈해서 살 수 있는 것이 필요하지, 부질없이 밖에서 선인을 찾으려 하거나, 현세를 부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노교(老敎)로써 현실과의 조화를 꾀하려 했던 것이 동명이다.” 하였다. 윤미길, 鄭斗卿 硏究, 원대논문집 제22집, 원광대학교, 1988, 304

193)잘못하여……했네:안기생(安期生)은 신선의 이름으로, 일찍이 하상 장인(河上丈人)을 따라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설을 배우고 동해(東海) 가에서 약을 팔았는데, 진 시황(秦始皇)이 동쪽을 순시할 때 그와 더불어서 3일 밤낮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뒤에 진 시황이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로 가서 그를 찾아보게 하였으나, 풍랑이 일어 찾아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12 孝武本紀

194)삼주수(三珠樹):전설에 나오는 나무로, 염화(厭火)의 북쪽 적수(赤水)의 위에서 자란다는 신선 세계의 나무인데, 잣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잎이 전부 구슬로 되어 있다고 한다.

195)홍 수부(洪水部):누구인지 분명치 않다. 수부(水部)는 공조(工曹)의 별칭이다.

196)두십천(斗十千):아주 좋은 술을 말한다. 십천은 만전(萬錢)의 돈을 가리킨다. 왕유(王維)의 소년행(少年行)에 “신풍의 맛 좋은 술은 한 말에 십천인데, 함양의 유협들은 대부분이 소년이로세.[新豐美酒斗十千 咸陽游俠多少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97)도잠(陶潛)……되었구나:동명 자신이 술을 사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도잠은 진(晉)나라의 은사인데, 여기서는 동명 자신을 말한다. 수형전(水衡錢)은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돈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홍 수부가 보내 준 돈을 말한다. 수형은 한(漢)나라 때 세무(稅務)를 맡은 벼슬 이름이다. 이 수형의 관아에 보관한 돈은 모두 임금의 사장(私藏)이므로, 임금의 돈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인다.

198)권칙(權侙):1599~? 자는 자경(子敬), 호는 국헌(菊軒), 권온(權韞)의 서자(庶子)이며, 이항복(李恒福)의 사위이다. 강홍립(姜弘立)을 수행하여 심하(深河)의 전투에 참여했는데, 강홍립은 오랑캐에게 항복하였으나 권칙은 적진을 탈출해 돌아와서 강로전(姜虜傳)을 저술했다. 1627년(인조5)에 일어난 이인거(李仁居)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어 소과에 급제하였으며, 1636년에는 통신사의 제술관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문장에 뛰어나서 사람들이 ‘궁궐 밖의 대제학’이라고 칭했다.

199)집……있네:집을 판 돈도 있고, 한나라 때의 문장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와 같은 글재주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권칙이 ‘궁궐 밖의 대제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문장에 뛰어났기 때문에 한 말이다. 한나라 때 사마상여가 부잣집 여인인 탁문군(卓文君)과 서로 사랑해, 사마상여가 탁문군을 집에서 도망쳐 나오게 한 다음 탁문군을 데리고 성도(成都)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갔는데, 집에 도착해서 보니 집 안이 텅텅 비어 있었으며, 단지 사방의 벽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사마상여가 먹고살 길이 없어 자기가 입고 있던 갖옷을 전당 잡히고 술을 사서 탁문군과 함께 마시며 즐겼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200)붉은 대문:붉은칠을 한 대문으로, 부귀한 사람의 집을 가리킨다.

201)몇……차지하였던가:오래도록 큰 집을 차지하고 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곽 장군은 한(漢)나라 소제(昭帝)․선제(宣帝) 시대의 대장군인 곽광(霍光)을 가리킨다. 곽광이 큰 공을 세우자, 무제가 아주 좋은 집을 지어 하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곽광이 죽은 뒤 선제 때에 곽씨 집안 사람들은 모반죄를 뒤집어쓰고 몰살당했다. 漢書 卷68 霍光傳

202)무 상인(無上人)이……전송하다:무 상인은 미상이며, 마니산(磨尼山)은 강화도에 있는 산이다.

203)항사(恒沙):항하사(恒河沙)와 같은 말이다. 인도(印度)의 동쪽을 흐르는 갠지스 강을 한음(漢音)으로 항하(恒河)라고 한다. 불경(佛經)에서 많은 수량을 말할 때에는 흔히 항하의 모래에 비유한다.

204)수정주(水晶珠):수정과 같이 맑은 구슬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앞의 마니산과 연결되어 마니주(尼珠)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마니주는 불교 용어로, 본디 용왕(龍王)의 뇌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하는데, 이것을 몸에 지니면 모든 일이 뜻대로 된다고 한다. 또한 마니주는 물속에서도 환하게 빛을 비춘다고 한다.

205)이행우(李行遇):1606∼1651.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사회(士會), 호는 수남(水南)이다. 1633년(인조1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38년에 수찬에 올랐다가 이어 함경도 암행 어사로 파견되었다. 이후 승지, 대사간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효종이 즉위한 뒤에도 승지, 부제학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동명의 재종매(再從妹)와 혼인하였다.

206)이자화(李子和):이시매(李時楳, 1603~1667)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화(子和), 호는 육은재(六隱齋)이다. 1629년(인조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경기 관찰사, 개성 유수, 한성부 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시를 잘 지었다.

207)앵무배(鸚鵡杯)의……술이거니:좋은 술잔과 좋은 술을 말한다. 앵무배는 앵무조개의 껍데기로 만든 아름다운 술잔으로, 당(唐)나라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 이르기를 “노자표여 앵무배여, 백 년 삼만육천 일에, 하루에 삼백 배씩 기울여야지.[鸕鶿杓鸚鵡杯 百年三萬六千日 一日須傾三百杯]” 하였다. 죽엽춘(竹葉春)은 술 이름인 죽엽청(竹葉淸)을 말한다. 진(晉)나라 장화(張華)의 경박편(輕薄篇)에 “창오의 죽엽청이요, 의성의 구온차이다.[蒼梧竹葉淸 宜城九醞醝]”라고 하였다.

208)청운로(靑雲路):출중한 인재가 벼슬길에 올라 전도(前途)가 트인 것을 말한다.

209)곡구(谷口)에서……일러라:훌륭한 재주를 가지고서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숨어 산다는 뜻이다. 곡구는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지명(地名)이면서 한(漢)나라 정박(鄭樸)의 호이기도 하다. 자진(子眞)은 정박의 자이다. 여기서는 동명 자신의 성씨가 정박과 같기 때문에 끌어다가 쓴 것이다. 한나라 성제(成帝) 때 정박이 대장군 왕봉(王鳳)의 초빙에도 응하지 않은 채 곡구에 집을 짓고 살면서 곡구자진(谷口子眞)이라고 호를 지은 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수묵(守黙)하며 수도(修道)하였는데, 이름이 경사(京師)에 진동하였다. 漢書 卷72 王貢兩龔鮑傳

210)이해(李澥):1591∼1670.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자연(子淵), 호는 농옹(聾翁)이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함릉군(咸陵君)에 봉해졌다. 1624년에 개성부 유수가 되었으며, 이후 형조 판서를 지냈다. 1652년(효종3)에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처음에 충정(忠靖)으로 시호를 받았다가, 숙종 때 충민(忠敏)으로 개시되었다.

211)심주(沁州):강화도의 별칭이다.

212)연미정(燕尾亭):385쪽 주55 참조

213)창오산(蒼梧山):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순(舜) 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죽어 이곳 기슭에 묻혔다고 한다.

214)차군(此君):대나무의 별칭이다. 진(晉)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사는 곳마다 대나무를 심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대나무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어찌 하루인들 차군(此君)이 없이 지낼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徽之

215)충성검(衝星劍):별을 쏘는 기운을 가진 검으로, 옛날의 명검을 말한다. 옛날 진(晉)나라 때 오(吳) 땅에 자색 기운이 하늘의 우수(牛宿)와 두수(斗宿) 사이로 뻗치는 것을 보고 장화(張華)가 뇌환(雷煥)을 풍성현(豐城縣)의 현령으로 보내 용천검(龍泉劍)과 태아검(太阿劍)을 얻은 다음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拾遺記 卷10

216)검은 용:옛말에 검은 용은 비를 부른다는 말이 있다.

217)홍 직장(洪直長)이……전송하다:인조실록 7년(1629) 9월 18일 기사에 “선원록(璿源錄)을 오대산에 보관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배행한 관원은 기록되어 있지 않는바, 홍 직장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선원록은 조선 왕실의 족보로, 1412년(태종12) 10월에 만들어졌으며, 이후 계속하여 증보되었다.

218)독룡(毒龍):독이 있는 용으로, 불가(佛家)에서는 흔히 이를 사람의 욕심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심술궂은 용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219)선리(仙李):신선 이씨(李氏)라는 뜻으로, 노자(老子)를 가리키는 말인데, 노자는 당나라를 세운 이세민(李世民)에 의해 이씨의 시조(始祖)로 추앙되었다. 여기서는 조선 왕실의 성씨가 이씨이므로 끌어다가 쓴 것이다.

220)윤이원(尹而遠):윤명은(尹鳴殷, 1601~1646)으로, 이원은 자이다. 368쪽 주8 참조.

221)장안성(長安城)에……없네:술값을 대주던 윤명은이 지방에 내려가 있어 동명 자신의 술값을 대주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후한(後漢) 화제(和帝) 때의 충신인 원안(袁安)이 낙양(洛陽)에 살 적에 마침 큰 눈이 내려서 한 자 가량이나 쌓였는데, 낙양 영(洛陽令)이 시찰하면서 살펴보니, 다른 사람들의 집에서는 모두 눈을 쓸고 나와 먹을 것을 구하러 돌아다니는데, 원안만은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後漢書 卷45 袁安列傳

222)수부(秀夫):서정연(徐挺然, 1588~?)의 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사봉(沙峰)이다. 1625년(인조3)의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라 도사, 예조 정랑, 북평사, 사복시 정 등을 지냈다.

223)소년행(少年行):악부(樂府) 잡곡가사(雜曲歌辭)의 곡 이름인데, 주로 젊은이들이 생명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중히 여겨 임협 유락(任俠游樂)하는 일을 노래하였다. 왕유(王維)의 소년행(少年行)에 “신풍의 맛 좋은 술은 한 말에 십천인데, 함양의 유협들은 대부분이 소년이로세.[新豐美酒斗十千 咸陽游俠多少年]”라고 하였다.

224)우리……나다니랴:동명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뜻이다. 쑥대처럼 나다닌다는 것은 여기저기 부지런히 쫓아다닌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권63 노자열전(老子列傳)에 “군자가 때를 얻으면 수레를 타고 때를 얻지 못하면 쑥대처럼 다닌다.[君子得其時則駕 不得其時則蓬累而行]”라고 하였다.

225)이로부터……나가니:병으로 인해 외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마상여는 한 무제(漢武帝) 때의 문장가인데, 일찍이 소갈병(消渴病)을 앓아서 한가로이 지냈다. 여기서는 곧 병을 앓고 있는 동명 자신을 사마상여에 비유한 것이다.

226)형부(刑部)의 오 상서(吳尙書):효종조에 형조 판서를 지낸 오준(吳竣, 1587∼1666)을 가리키는 듯하다. 오준은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여완(汝完), 호는 죽남(竹南)이다. 1618년(광해군10)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50년(효종1)에 예조 판서가 되었으며, 그 뒤 형조 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비롯하여 책문(冊文), 지문(誌文) 등 수많은 공사(公私)의 비명을 썼다.

227)정위(廷尉)가……출중했네:오공(吳公)은 한(漢)나라의 명신(名臣)으로, 문제(文帝) 즉위 초에 하남 태수(河南太守)로 있는 오공의 치적(治績)이 천하에 제일이라는 소문이 있자, 문제가 그를 불러 정위라는 관직을 제수했다. 漢書 卷48 賈誼傳정위는 형법(刑法)을 관장하는 관원이다.

228)명주(明主)께서……모르누나:임금이 어진 인재를 구하고 있는데도 오 상서는 어진 인재를 가까이 두고서도 추천할 줄 모른다는 뜻이다. ‘문 아래에 있는 낙양 사람’은 한나라 때의 명신인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가의는 본디 낙양 사람이었는데, 18세 때 인재라는 소문이 나자, 당시에 하남 태수로 있던 오공이 문하로 불러다 놓고 몹시 사랑하였다. 그 뒤에 정위가 되자, 한 문제에게 가의가 아주 뛰어난 인재라고 추천하니, 문제가 가의를 불러 박사(博士)로 삼았다. 漢書 卷48 賈誼傳

229)원직(元直):심로(沈, 1590∼?)로,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원직, 호는 죽사(竹沙)․죽계(竹溪)이다. 1635년(인조1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46년 헌납으로 있을 때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를 변호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 효종이 즉위한 뒤에 집의와 승지를 지냈다.

230)의복(倚伏):화(禍)와 복(福)이 서로 원인이 되어 변천하는 것을 말한다. 노자(老子)에 이르기를 “화는 복이 기대어 있는 바이고, 복은 화가 숨어 있는 바이다.” 하였다.

231)여섯……못이었네:웅대한 포부를 크게 펼칠 것이라는 뜻이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 갈 때에는 물결을 치는 것이 삼천 리요,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올라가 여섯 달을 가서야 쉰다.[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32)죽남옹(竹南翁):오준(吳竣, 1587∼1666)을 가리킨다. 458쪽 주226 참조.

233)대완마(大宛馬):대완국(大宛國)에서 생산되는 천리마를 말하는데, 이곳의 말들은 붉은 피 같은 땀을 흘린다고 한다.

234)두소릉(杜少陵):당(唐)나라의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보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읊은 시를 많이 남겼다.

235)윤이지(尹履之):1579∼1668.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소(仲素), 호는 추봉(秋峯)이다.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손자이고, 영의정 윤방(尹昉)의 아들이다. 1616년(광해군8)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45년(인조23)에 평안 감사가 된 뒤 함경 감사를 거쳐, 1650년(효종1)에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1668년(현종9)에 판돈녕부사로 있던 중 죽었다. 저서로는 추봉집이 있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236)마니주(尼珠):마니는 불교 용어로, 보주(寶珠)의 음역이며, 말니(末尼)라고도 한다. 당나라 두보(杜甫)의 증촉승려구사형(贈蜀僧閭丘師兄) 시에 이르기를 “오직 마니주가 있어서 탁수의 근원을 비출 수가 있다.[惟有尼珠 可照濁水源]” 하였다.

237)강남……깊으리라:원직(元直), 즉 심로(沈, 1590~?)가 남해(南海)로 귀양 가 있으므로 한 말이다.

238)폐관(閉關):문을 닫고 들어앉아 있으면서 손님을 사절한 채 왕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안연지(顔延之)의 유참군(劉參軍) 시에 “유령께선 폐관하길 잘하였거니, 정 숨긴 채 보고 들음 없게 하누나.[劉伶善閉關 懷情滅聞見]” 하였다.

239)이응시(李應蓍):1594∼166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서(君瑞), 호는 취죽(翠竹)․죽창(竹窓)이다. 1633년(인조1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46년 장령으로 있던 중 여색을 멀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경원(慶源)에 유배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에 풀려나 사간, 교리 등을 지내고 이후 대사간, 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

240)자문(子文):이상질(李尙質, 1597∼1635)로,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자문이며, 호는 가주(家洲)이다. 1629년(인조7)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32년에 암행 어사로 북관(北關)에 갔다가 돌아왔으며, 1634년에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을 종묘에 부묘(祔廟)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간하다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회양(淮陽)에서 죽었다.

241)여룡(驪龍)의……쏟네:이상질이 지은 시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여룡의 턱 아래에 있는 구슬’은 뛰어난 문장(文章)을 말한다. 여룡은 깊은 바닷속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검은빛의 용이다. 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에 “천 금(金)의 구슬이 저 깊은 바닷속 여룡의 턱 아래에 숨겨져 있다.”라고 하였다.

242)배를……부치다:영벽당(暎碧堂)은 용산(龍山)에 있던 당인 듯하다. 심지함(沈之涵)은 심집(沈鏶)의 아들로, 선공감 감역을 지냈다.

243)파릉도(巴陵渡):파릉은 양천(陽川)의 옛 이름으로, 지금 서울 양천구의 한강 주변을 말한다.

244)전창위(全昌尉):유정량(柳廷亮, 1591~1663)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룡(子龍), 호는 소한당(素閒堂),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유영경(柳永慶)의 손자로 1604년(선조37) 선조의 딸 정휘옹주(貞徽翁主)와 혼인하여 전창위에 봉해졌다. 1646년(인조24)과 1655년(효종6)에는 사은사(謝恩使)로, 1651년에는 진향사(進香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

245)푸른……올라가네:황제가 있는 곳으로 사신이 되어 간다는 뜻이다. 봉황루(鳳凰樓)는 대궐에 있는 누각을 가리킨다.

246)태사(太師)께선……별이라고:사신이 도착하였다고 아뢸 것이라는 뜻이다. 장건이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는 길에 황하의 근원을 찾아서 뗏목을 타고 달포를 지나 한 곳에 이르러 베를 짜는 한 여자와 소를 끌고 물을 먹이는 한 남자를 만났다. 돌아와서 엄군평(嚴君平)에게 그 사실을 물으니, 엄군평이 “아무 해 아무 달에 객성(客星)이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범했다.”라고 말했다는 고사가 있다. 博物志 卷10 雜說下

247)정장(亭障):변방 요새지에 설치해 놓은, 출입하는 사람을 살피는 관문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만리장성에 있는 산해관(山海關) 주위에 있는 정장을 뜻한다.

248)심원(沁園):공주(公主)의 정원(庭園)을 이른다. 후한(後漢) 때 심수공주(沁水公主)의 원전(園田)이 있었다. 전창위가 부마(駙馬)이므로 한 말이다.

249)박덕일(朴德一):박길응(朴吉應, 1598∼?)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일(德一), 호는 진정재(眞靜齋)이다. 이안눌(李安訥)의 문인이다. 1634년(인조12)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지와 참판을 지냈다.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 학안록(學顔錄)을 지었다. 1638년에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갔다.

250)연가(燕歌):비장(悲壯)한 곡조의 노래를 말한다. 전국 시대 연(燕)나라의 자객(刺客)형가(荊軻)가 진왕(秦王)을 죽이려고 떠날 때 역수(易水) 가에서 “차가운 역수 가에 바람결 쓸쓸한데, 장사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라는 노래를 부른 고사가 있다. 戰國策 燕策3

251)계문(薊門)……것이리:계문은 북경(北京) 덕승문(德勝門)의 서북쪽 지역으로, 춘추전국 시대 연(燕)나라 땅이었다. 여기서는 연경(燕京)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유신(庾信)의 연가행(燕歌行)에 “찬 기러기 울어 대며 요하의 물 건너가고, 뽕나무 잎 분분하게 계문에서 떨어지리.[寒鴈嗈嗈渡遼水 桑葉紛紛落薊門]”라고 하였다.

252)박중구(朴仲久):박장원(朴長遠, 1612∼1671)으로, 본관은 고령, 자는 중구, 호는 구당(久堂)․습천(隰川)이다. 1636년(인조14)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조 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개성부 유수로 재직 중에 죽었다. 저서로는 구당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253)고당(高堂)……거네:박장원이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을 수령으로 내려간다는 뜻이다. 고당은 어머니를 가리킨다. 채복(彩服)은 색동옷으로, 옛날에 효자(孝子)가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춤을 출 때 입었던 색동저고리를 말한다. ‘비단으로 옷을 만들었다’는 것은, 수령이 되어 고을로 내려가는 것을 뜻한다.

254)바다에선……돌아오리:박장원이 수령으로 가서 청렴한 정사를 펼침으로써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켜서 수령으로 내려보낸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라는 뜻이다. 옛날 후한(後漢) 때 합포군(合浦郡)에는 곡물은 나지 않고 바다에서 나는 진주가 가장 중요한 물산이었는데, 수령들이 탐학하여 진주를 마구 끌어 모으자, 진주가 마침내 인접한 교지군(交阯郡)으로 가 버려 더 이상 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맹상(孟嘗)이 수령으로 부임하여 예전의 폐단을 혁파하자 1년도 못 되어 진주가 다시 돌아왔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 孟嘗

255)맑은……외로우리:박장원이 서해 바닷가에 있는 고을의 수령으로 가는 것을 전송한다는 뜻이다. ‘쌍오리’는 지방의 수령을 뜻하는 말이다. ‘발해 바다’는 우리나라의 서해 바다를 가리키는바, 배천이 서해 바닷가에 있으므로 한 말이다. 후한 때 하동(河東) 사람 왕교(王喬)가 섭령(葉令)이 되었는데, 신술(神術)이 있어서 매달 삭망(朔望)에 대궐에 나와 조회에 참석하였다. 황제가,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태사(太史)로 하여금 몰래 엿보게 하였다. 그러자 태사가, 그가 올 때에는 두 마리의 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온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오리가 오는 것을 보고 그물을 펴서 잡으니, 단지 신발 한 짝만 있었다. 後漢書 卷82上 方術列傳 王喬

256)감로사(甘露寺):본디 중국 윤주(潤州) 단도현(丹徒縣)에 있는 절인데, 여기서는 개성에 있는 감로사를 가리킨다. 고려의 이자연(李子淵)이 원나라에 들어가 조회하면서 윤주의 감로사에 올라갔다가 강산(江山)의 아름다운 경치를 좋아하여 그를 따라간 뱃사공에게 말하기를 “네가 이곳의 형세를 자세히 살펴보고서 가슴속에 기억해 두라.” 하였다. 그 뒤 본국으로 돌아와서 그 뱃사공으로 하여금 윤주와 지형이 비슷한 곳을 찾게 하였는데, 그 뱃사공이 개성부의 오봉봉(五鳳峯) 아래에서 윤주와 비슷한 곳을 찾았다. 이에 이자연이 윤주의 감로사를 모방해서 이 감로사를 지었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1 제4권 개성부 상

257)박서(朴遾):1602~1653.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상지(尙之), 호는 현계(玄溪)이다. 충청도 온양(溫陽)에서 태어났다. 1630년(인조8)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47년에 병조 참판으로 사은 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1년(효종2)에 진향 부사(進香副使)가 되어 진향사(進香使) 유정량(柳廷亮), 서장관 이만영(李晩榮) 등과 함께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우참찬, 예조 판서, 병조 판서 등을 지냈다. 인조실록 23년(1645) 8월 25일 기사에 박서를 평안 감사에 제수한 내용이 나온다.

258)해숭위(海崇尉):윤신지(尹新之, 1582~1657)로,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우(仲又), 호는 현주산인(玄洲散人)․연초재(燕超齋)이다. 선조와 인빈(仁嬪) 김씨(金氏)의 소생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혼인하여 해숭위에 봉해졌다. 사람됨이 총명하였으므로 선조는 때때로 시를 지어 바치게 하고 총애하였다. 널리 사람을 사귀었으나 이름을 나타내기를 꺼렸으며 오로지 내수(內修)에 힘썼고, 현호(玄湖)에 복거(卜居)하면서 현주산인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시(詩), 서(書), 화(畫)에 능하였고 저서로는 현주집(玄洲集), 파수잡기(破睡雜記)가 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259)何曾私:원주에 “어떤 데에는 ‘無私豈’로 되어 있다.” 하였다.

260)城市且同:원주에 “어떤 데에는 ‘書劍在風’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261)이……것이리:신선(神仙)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도화동(桃花洞)에 사는 사람’은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신선처럼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262)원운(元韻):이 시가 현주집(玄洲集)6에는 억정군평(憶鄭君平)으로 실려 있다.

263)김원립(金元立):1590~1649.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탁(士卓), 호는 갈천(葛川)이다. 1627년(인조5) 전주 정시(全州庭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능주 목사(綾州牧使)로 있던 중 군사를 모아 북쪽으로 진격하여 이듬해 1월에 과천(果川)에 이르러 많은 적병을 죽였다. 1647년에 종성 부사(鍾城府使)가 되었으며, 이후 용인(龍仁)으로 낙향하여 제자를 기르며 노후를 보냈다.

264)술동이의……모르리라:종성 부사로 있는 동안 술을 마시면서 즐기기만 할 뿐, 변방의 시름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종성의 별호가 ‘수심하는 주’라는 뜻인 수주(愁州)이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다. 고려 때 여진(女眞)이 이 일대가 비어 있는 틈을 타서 들어와 살면서 수주라고 칭하였으므로, 종성의 별칭이 되었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6 제50권 함경도 종성도호부

265)유시정(柳時定):1596~1658. 본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시영(時英), 자는 안세(安世)․수부(秀夫)이다. 어려서 정철(鄭澈)의 문인인 권필(權韠)에게 배우고 다시 신흠(申欽)․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한편, 명사들과 사귀었다. 1612년(광해군4)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아버지가 해주옥사(海州獄事)에 관련됨으로 인해 춘천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의금부 도사가 되고 제용감 직장을 거쳐 목사에 이르렀다. 평소에 팔법(八法)을 잘하였고 글씨에 능하여 여러 비문의 글씨를 남겼다.

266)칼……알겠네:평양부의 일을 능숙하게 잘 처리할 것이라는 뜻이다. 장자 양생주(養生主)에,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하여 소를 잡는데, 문혜군에게 말하기를 “신의 칼이 19년을 지내오는 동안에 소를 잡아 분해한 것이 수천 마리이지만, 칼날이 새로 숫돌에 갈아 놓은 것 같습니다. 그 마디는 틈이 있고 이 칼날은 무디지 않으니 무디지 않은 칼로 틈이 있는 데를 찾아 들어가면 그 칼날을 놀리는 데 있어 반드시 여지가 생깁니다.” 하였다.

267)수계(修稧):본디는 고사(告祀)를 지내거나 푸닥거리를 하는 것으로, 3월의 상사일(上巳日)에 물가에서 행한다. 여기서는 종족이나 친구들 간에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갖는 모임을 뜻한다.

268)어느……쓰려는가:계 모임에 대해 왕희지와 같이 뛰어난 글씨로 서술해 줄 사람이 없어서 한스럽다는 뜻이다. 유시정이 글씨에 뛰어났으므로 한 말이다. 왕 우군(王右軍)은 동진(東晉) 사람으로 천하의 명필로 칭해지는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키는데, 우군장군(右軍將軍)이라는 벼슬을 지냈으므로 이렇게 칭한다. 왕희지는 장지(張芝)의 서법을 배웠으며,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모두 뛰어나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법가로 칭해진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269)김지남(金地南):1600~1650.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대뢰(大賚), 호는 구봉(九峯)이다. 1638년(인조16)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무장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동명 등 문장가들과 교유하였으며, 문장에 뛰어났고 경서(經書)에도 밝았다.

270)청왜(靑緺):인장을 매다는 푸른색의 인끈으로, 한나라 때 지방관으로 나가는 사람이 차던 것인데, 전하여 지방 고을의 수령이 되어 나가는 것을 뜻한다.

271)동정부(東征賦)를……데랴:어머니를 모시고서 함께 가므로 더욱 좋을 것이라는 뜻이다. 동정부는 한나라 때 사람인 반고(班固)의 누이동생인 반소(班昭)가 지은 부 이름이고, 대고(大家)는 여자에 대한 존칭(尊稱)으로, 흔히 반소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상대방의 어머니에 대한 존칭으로 쓰인다. 반소는 부풍(扶風) 사람인 조세숙(曹世叔)의 아내로, 박학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조세숙이 일찍 죽었는데 절행(節行)과 법도(法度)가 있었다. 일찍이 화제(和帝)의 부름을 받고 궁중으로 들어가 황후(皇后)와 귀인(貴人)의 스승이 되었으며, 반고가 한서(漢書)를 저술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뒤를 이어 완결하였다. 또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여계(女誡) 7편을 지었으며, 시문(詩文)에 뛰어나 동정부 등을 짓기도 하였는데, 그 동정부에 “영초 칠 년에 나는 아들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네. 때는 바로 맹춘의 길한 날이었으매, 좋은 날을 가려서 길을 떠났다네.[惟永初之有七兮 余隨子兮東征 時孟春之吉日兮 撰良辰而將行]”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84 列女列傳 曹世叔妻》 《文選 卷5 東征賦

272)장사(長沙):김지남이 수령으로 가는 무장(茂長)의 별호이다. 본디는 중국의 지명인데, 한나라 때의 문장가인 가의(賈誼)가 이곳으로 벼슬살이를 간 적이 있으므로, 김지남의 문장이 가의와 같이 뛰어났음을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특별히 장사라는 별호로 표기한 것이다.

273)여구(驪駒):일시(逸詩)의 편명으로, 옛날에 이별을 고하면서 부르던 노래인데, 흔히 이별가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274)오빈(吳䎙):1602~1685.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빈우(賓羽), 호는 농재(聾齋),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1632년(인조10)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44년에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650년(효종1)에 강계 부사(江界府使)가 되어 잠상(潛商)을 없애고 치적을 쌓았으나, 인평대군(麟坪大君)과 대립하여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1662년(현종3)에 공조 참의를 지냈다.

275)수항성(受降城):본디는 한 무제(漢武帝)가 장군 공손오(公孫敖)를 시켜 새외(塞外)에 쌓은 성으로, ‘오랑캐의 항복을 받는 성’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강계 지방의 성,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압록강 가에 있으며 수항정(受降亭)이라는 정자가 있는 만포(滿浦)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276)창을……때:군려(軍旅)에 있으면서 말에 탄 채 창을 비껴들고 시를 읊을 때라는 뜻으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 전쟁터에서 지은 호해한 글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당(唐)나라 원진(元稹)이 쓴 두보(杜甫)의 묘지명인 당고공부원외랑두군묘계명(唐故工部員外郞杜君墓係銘)에 “조조(曹操)와 조비(曹丕), 조식(曹植) 부자가 말안장 위에서 글을 지어 내고, 이따금씩 창을 비껴 쥐고 시를 읊었다.” 하였다.

277)하삭(河朔):옛날 황하(黃河) 이북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보통 북방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평안도 북쪽의 오랑캐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278)조윤지(趙胤之):조석윤(趙錫胤, 1606∼1655)으로,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윤지(胤之), 호는 낙정(樂靜)이다. 장유(張維)․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1628년(인조6)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로는 낙정집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효종실록 2년(1651) 10월 29일 조에 조석윤이 부안(扶安)에 유배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온다.

279)봄이……아끼리:임금께서 봄이 되기 전에 석방하는 명을 내릴 것이라는 뜻이다. 환(環)은 둥근 고리 모양의 옥을 말한다. 옛날에 신하가 죄를 지으면 변경에 방치해 놓고, 3년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하다가 환(環)을 보내면 부른다는 뜻이고, 한쪽이 끊어진 고리 모양의 구슬인 결(玦)을 보내면 쫓는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280)최계훈(崔繼勳):1601∼1657.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회(德會)이다. 1633년(인조1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청주 목사, 성주 목사 등을 지냈다.

281)북당(北堂)에서……새롭거니:부모님을 곁에서 모시면서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춤을 추는 것을 말한다. 북당은 부모가 거처하는 집을 말한다. 옛날에 초(楚)나라의 효자(孝子)인 노래자(老萊子)가 일흔 살이 되어서도 두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하여 어린애처럼 색동저고리를 입고서 춤을 추었으며 병아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며 논 고사가 있다.

282)오마(五馬)……위해서네: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하여 성주(星州)의 수령이 되어서 나간다는 뜻이다. 오마는 고을 수령을 가리키는 말로, 옛날에 태수(太守)가 말 다섯 마리가 끄는 수레를 탔으므로 이렇게 칭하는 것이다. 전성(專城)은 한 고을을 오로지한다는 뜻으로, 수령이 되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예전에는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내직에 있다가 일부러 외직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283)봄철……비슷하리:수령으로 가는 최계훈이 어머니를 모시고서 가면 어머니가 동정부(東征賦)를 지을 것이라는 뜻이다. 동정부는 한나라 때 사람으로 한서(漢書)를 지은 반고(班固)의 누이동생인 반소(班昭)가 지은 부이다. ‘영초(永初) 사람’은 반소의 아들을 가리킨다. 반소에 대해서는 477쪽 주271 참조

284)약야계(若耶溪)서……만하구나:약야계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회계현(會稽縣) 동남쪽에 있는 시내 이름인데, 춘추 시대 월나라의 미녀 서시(西施)가 그곳에서 빨래를 하였다 하여, 아름다운 여인들이 모여 노니는 물가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채련사(採蓮詞)는 연밥을 따는 모습을 읊은 노래로, 악부(樂府)의 청상곡사(淸商曲辭) 가운데 하나인 채련곡(採蓮曲)을 말한다.

285)강락(康樂):남조(南朝) 송(宋)나라의 대문장가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사영운은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강좌(江左)에서 비견될 자가 없었으나, 성격이 편협하여 사람들과 잘 부딪쳤다. 조정에서 자신을 문장으로만 대우해 주는 데 불만을 품어 벼슬을 버리고 회계(會稽)로 물러나 살면서 몹시 화려한 장원(莊園)을 만들고는 마음껏 즐겼다. 宋書 卷67 謝靈運列傳

286)조윤지(趙胤之):조석윤(趙錫胤, 1606∼1655)으로, 윤지는 그의 자(字)이다. 조석윤은 1653년(효종4)에 대사헌으로 있던 중 서원리(徐元履)와 뜻이 맞지 않아 다투다가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밀려났다. 431쪽 주166 참조.

287)쌍어(雙魚):두 마리의 잉어로, 서신(書信)을 말한다. 367쪽 주6 참조.

288)수주(愁州):종성(鍾城)의 별칭이다. 고려 때 여진(女眞)이 비어 있는 틈을 타서 들어와 살면서 수주라고 칭하였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6 제50권 함경도 종성도호부

289)이 정자(李正字):누구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동명집 권5에 정묘년(1627, 인조5)에 홍주에 있으면서 정자 이적(李)의 부음을 듣다[丁卯在洪州聞李正字訃]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적(李)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적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미상이며, 승정원일기 인조 4년(1626) 3월 4일 기사에 이적을 승문원 정자에 임명한 기록이 나온다.

290)왕사(王謝):육조(六朝) 시대의 명문가인 왕씨(王氏)와 사씨(謝氏)로, 후대에는 고문 세족(高門世族)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291)이제……묻거니와: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죽어 무덤에 파묻는다는 뜻이다. 주미(麈尾)는 사슴의 꼬리털로 만든 먼지떨이인데, 진(晉)나라 때 청담(淸談)을 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손에 쥐고 휘두르면서 청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전하여 뛰어나고 고상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품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292)사현휘(謝玄暉):남제(南齊) 때의 시인 사조(謝朓)로, 현휘는 그의 자(字)이다. 사조는 글씨를 잘 썼고 시를 잘 지었는데, 오언시를 특히 잘 지었으며 시가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선성 태수(宣城太守)로 있으면서 많은 시를 지었으므로 흔히 사 선성(謝宣城)이라고도 칭해진다. 南齊書 卷47 謝脁列傳

293)조윤지(趙胤之):조석윤(趙錫胤, 1606∼1655)으로, 자는 윤지이다. 480쪽 주278 참조.

294)낭주(浪州):전라도 부안(扶安)의 별호이다. 대본에는 ‘朗州’로 되어 있는데,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4 제34권 전라도 부안현에 의거하여 ‘朗’을 ‘浪’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낭주(朗州)’는 전라도 영암(靈巖)의 별호이다.

295)곽흠로(郭欽魯):대본에는 ‘郭欽老’로 되어 있는데, 면암집(勉菴集) 권30 집의증이조참의지포곽공묘갈명(執義贈吏曹參議芝浦郭公墓碣銘)에 의거하여 ‘老’를 ‘魯’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흠로는 곽지흠(郭之欽, 1601∼1661)의 자인데, 동명집 이외의 곽지흠과 관련된 모든 기록에는 곽지흠의 자가 홈로(欽老)가 아닌 흠로(欽魯)로 기록되어 있다. 곽지흠은 본관은 청주, 호는 지포(芝浦)이다. 1646년(인조24)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효종조에 장령, 현종조에 사간, 집의 등 언관을 지냈다. 곽지흠은 1647년에 충원 현감(忠原縣監)에 제수되었다.

296)한강(漢江)……보소:한강의 근원지를 찾아보라는 뜻이다. 민강(岷江)은 본디 중국 사천성(四川省)의 민산(岷山)에서 발원하는 강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강원도에서 흘러오는 남한강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옛날 사람들은 시를 지으면서 한강의 근원을 흔히 충주 근처에 있는 월악산(月嶽山)으로 비정(比定)하여 읊곤 하였다.

297)남노성(南老星):1603∼1667. 본관은 의령(義寧), 자는 명서(明瑞), 호는 운곡(雲谷)이다. 1631년(인조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59년(현종 즉위년)에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개성 유수, 호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98)계문관(薊門關):북경(北京) 덕승문(德勝門)의 서북쪽 지역으로, 춘추전국 시대 연(燕)나라 땅이다.

299)의무려산(醫巫閭山):중국 유주(幽州)의 광녕우위(廣寧右衛) 서쪽 5리 지점에 있는 산으로, 중국의 사방을 진압하는 네 개의 큰 산 가운데 하나인데, 사산(蛇山), 반산(盤山), 첨산(添山), 백운산(白雲山), 안산(鞍山) 등 12개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讀史方輿紀要 卷37 山東條

300)안흥숙(安興叔):안응창(安應昌, 1593∼1673)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흥숙, 호는 우졸재(愚拙齋)․백암(栢巖)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음보(蔭補)로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저서로 추원록(追遠錄), 청교묵담(靑郊墨談)이 있다.

301)䍦:대본에는 ‘罹’로 되어 있으나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302)현수산(峴首山)서……있다오:진탕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는 뜻이다. 현수산은 중국 양양(襄陽)에 있는 산이며, 산간(山簡)은 진(晉)나라 때의 명사이며, 습가지(習家池)는 현수산 근처에 있는 연못 이름이다. 산간이 양양 고을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자주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시면서 놀았는데, 일찍이 술에 취하지 않은 채 돌아간 적이 없었으며, 그때마다 백접리를 삐딱하게 쓰고 돌아갔다고 한다. 후대에는 술에 잔뜩 취한 것을 표현할 적에 흔히 이 고사를 끌어다가 쓴다. 晉書 卷43 山濤列傳 山簡

303)오직……건너누나:승려의 법력(法力)이 뛰어난 것을 형용한 것이다. 진(晉)나라 때 기주(冀州) 출신의 어떤 승려가 항상 나무로 만든 잔[盃]을 타고 물을 건너다녔으므로 사람들이 그 승을 배도 화상(盃渡和尙)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세세한 행실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신통력이 탁월하였다고 한다.

304)심로(沈):459쪽 주229 참조.

305)비류강(沸流江):평안남도의 신양군과 성천군을 흐르는 강이다. 대동강의 제1지류로 양덕군에서 시작하여 대동강에 합류한다.

306)열두……있네:평안도 성천(成川)에 있는 흘골산(紇骨山)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는 뜻이다. 흘골산은 관서팔경(關西八景) 가운데 하나로, 성천 고을의 서북쪽에 있는 산인데, 열두 개의 봉우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중국의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과 똑같으며, 그 아래로는 비류강이 흘러 경치가 아주 좋다고 한다. 두우성(斗牛星)은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을 말한다.

307)벽락 시랑(碧落侍郞)……오르리라:심로가 수령으로 가서 백성들을 잘 돌보아 줄 것이라는 뜻이다. 벽락 시랑은 진(晉)나라 때 사람인 심희(沈羲)를 가리킨다. 심희가 백성을 위해 재해(災害)를 없애 주고 병을 고쳐 주면서 정작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않자, 천신(天神)이 감동한 나머지 그를 하늘로 영접하여 벽락 시랑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여기서는 심로의 성씨가 심희와 같으므로 끌어다가 쓴 것이다. 강선루(降仙樓)는 성천에 있는 정자로, 경치가 아주 좋다고 한다.

308)원공(遠公):진(晉)나라의 고승(高僧)인 혜원(慧遠)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동명 자신과 같은 유자(儒者)와 교분을 맺은 유 상인(留上人)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다. 혜원은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때 당시의 이름난 사대부들과 더불어 교유하면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여 어울렸으며, 사영운(謝靈運)이나 도잠(陶潛) 등과도 교유하였던 명승이다.

309)신선산(神仙山)서……숨기리:유 상인이 금강산으로 들어가 머물 것이라는 뜻이다. 신선산은 금강산을 가리키고, ‘아홉 용이 사는 못’은 금강산에 있는 구룡연(九龍淵)을 말한다.

310)담무갈(曇無竭):범어 Dharmodgata의 음역인데, 보통 법기보살(法起菩薩)로 많이 알려져 있다. 《신화엄경(新華嚴經)》 권45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동북쪽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는데, 그곳에서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1만 2000보살과 함께 항상 반야(般若)를 설법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311)제천(諸天):불교에서 말하는 천상 세계에 있는 모든 하늘을 말한다.

312)허 삼척(許三陟):허목(許穆, 1595∼1682)을 가리키는 듯하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이다. 현종실록 1년(1660) 9월 24일 기사에 허목이 삼척 부사에 제수된 것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허목이 삼척 부사로 있을 적에 썼다고 하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지금도 전한다.

313)홍만종(洪萬宗):1643∼1725.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시평가(詩評家)이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우해(宇海), 호는 현묵자(玄默子)․몽헌(夢軒)․장주(長洲)이다. 정두경(鄭斗卿)의 문인으로, 자신의 저술에서 정두경의 시와 관련된 많은 자료들을 남겼는바, 정두경의 연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문학평론집이라 할 수 있는 순오지(旬五志)에서 국문학의 가치에 대해 논하였고, 정철(鄭澈)의 시가 등 대표적인 작품에 대해 평을 가했다. 정통적인 시문(詩文)에는 별로 힘을 기울이지 않은 반면, 시화(詩話)․소설에 흥미를 가져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저서로는 순오지이외에도 역대총목(歷代總目), 시화총림(詩話叢林), 소화시평(小華詩評), 해동이적(海東異蹟), 명엽지해(蓂葉志諧) 등이 있다.

314)조수이(曺守而):조한영(曺漢英, 1608∼1670)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수이, 호는 회곡(晦谷)이다. 헌종조에 예조 참판, 경기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이 뛰어났다. 문집으로 회곡집이 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조한영은 현종 4년(1663) 8월 11일에 춘천 부사에 임명되고 현종 6년 3월 6일에 체차되었다. 그리고 창계집(滄溪集) 권17 고가선대부예조참판하흥군조공묘지명(故嘉善大夫禮曹參判夏興君曺公墓誌銘)에는 “경자년(1660, 현종1)에 어머니상을 당하였으며, 상을 마친 다음 외직을 구해 나가 춘천 부사가 되었는데, 다스린 지 1년 만에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315)수춘(壽春) 고을 명부(明府):춘천 부사로 있는 조한영을 가리킨다. 수춘은 춘천(春川)의 옛 이름이고, 명부는 지방관에 대한 경칭이다.

316)탄복랑(坦腹郞):‘배를 드러낸 신랑감’이라는 뜻으로, 흔히 다른 사람의 사위를 칭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홍만종을 가리키는데, 홍만종은 조한영의 여섯째 사위이다. 진(晉)나라 때 태위(太尉) 치감(郗鑒)이 왕도(王導)의 집안에서 사윗감을 고르려고 왕도의 집에 사람을 보냈는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잘 보이려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있었으나 왕희지(王羲之)만은 동상(東床)에서 배를 드러내 놓고 태연히 누워 음식을 먹고 있었으므로, 왕희지를 사위로 정했다는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雅量

317)소양정(昭陽亭):춘천에 있는 누각인 이요루(二樂樓)를 말한다. 이요루를 예전에는 소양정이라고 일컬었다.

318)내손(來孫):현손(玄孫)의 아들로, 5대손을 말한다.

319)홀로……못하리라:산속에 머물면서 불법을 닦아 도를 깨우치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옛날에 중국의 거사(居士)인 방온(龐蘊)이 도일 선사(道一禪師) 마조(馬祖)에게 가서 묻기를 “만법과 더불어 짝이 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어떤 사람입니까?[不與萬法爲侶者是什麽人]” 하자, 마조가 이르기를 “네가 한 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시고 나면 그때에 너에게 일러 주겠노라.[待汝一口吸盡西江水 卽向汝道]” 했다는 데서 온 말인데, 이 말은 만법에 관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傳燈錄 龐居士傳

320)백헌(白軒):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상보(尙輔)이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인조조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으며, 영의정을 지냈다. 저서로는 백헌집(白軒集)이 있다.

321)민 명부(閔明府):분명하지는 않으나 동명집 권9에 송민보령하(送閔保寧賀)라는 칠언고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민하(閔賀, 1602∼?)를 가리키는 듯하다. 민하는,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장길(長吉)이다. 1628년(인조6) 문과 별시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형조 정랑을 지냈다. 언제 보령의 수령이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642년 12월에 보령 군수로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22)영보정(永保亭):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에 있는 옛 충청도의 수영(水營) 안에 있던 정자이다.

323)강석규(姜錫圭):1628~1695.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우보(禹寶), 호는 오아재(聱齖齋)이다. 1660년(현종1) 증광시(增廣試) 병과에 합격하였으며, 1661년에 가주서로 있던 중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에게 임금의 명을 전하기 위해 청주(淸州)로 가던 중 말 앞을 범하는 자가 있어 곤장을 쳐 죽였는데, 그 일로 당시의 권신(權臣)이었던 허적(許積)의 뜻을 거슬러 갑산(甲山)에 유배되었으며, 다음 해인 1662년에 어머니 유 부인(柳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이후 평해(平海)로 옮겨졌다가 1670년에 석방되었다. 이후 통천 군수, 군자감 정 등을 역임하였다. 聱齖齋集 行狀, 韓國文集叢刊 續38輯

324)아침나절……기다렸네:귀양 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뜻이다. 강석규가 어머니 상을 당하였을 때 갑산(甲山)에 유배되어 있었다. 대부환(大夫環)은 귀양에서 풀려나는 것을 의미한다. 옛날에 대부(大夫)가 임금에게 죄를 얻고 국경에서 처분을 기다릴 때, 임금이 둥근 옥고리인 환(環)을 주면 그것은 돌아오라는 뜻이었는데, 환(環)과 환(還)의 음이 같기 때문에 이렇게 하였다고 한다. 또 한쪽이 일그러진 옥고리인 결(玦)을 주면 조정에서 떠나가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325)한……되셨구나:무덤 속에서도 아들이 돌아오나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망자산(望子山)은 ‘아들이 오는 것을 바라보는 산’이라는 의미로, 망부산(望夫山)이나 망부석(望夫石)과 같은 의미로 쓰인 듯하다.

326)홍종문(洪鍾聞):1605~?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추경(秋卿)이다. 1657년(효종8)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사헌부 감찰, 성균관 전적, 봉상시 판관을 거쳐 1664년(현종5)에 삼례 찰방(參禮察訪)에 제수되었다.

327)신석번(申碩蕃):1596~1675.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중연(仲衍), 호는 백원(百源)이다. 1633년(인조11)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 효종조에 유일(遺逸)로 천거를 받아 형조 좌랑, 진선(進善), 장령 등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신석번은 현종 4년(1663)에 상운 찰방(祥雲察訪)에 제수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경학(經學)에 밝았다. 문집에 백원집(百源集)이 있다.

328)남일성(南一星):1611~1665.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덕휘(德輝), 호는 의졸(宜拙)이다. 남구만(南九萬)의 아버지이다. 현종조에 내시교관(內侍敎官), 통례원 인의를 지냈으며, 현종 4년(1663)에 금성 현령(金城縣令)이 되었다가 병으로 해임되었다.

329)마관(馬官):찰방(察訪)의 별칭이다.

330)용매(龍媒):천리마를 가리키는데, 흔히 뛰어난 인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한서(漢書) 권22 예악지(禮樂志)에 “천마가 왔으니, 용이 오게 될 매개이다.[天馬徠龍之媒]”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331)윤심(尹深):1633∼1692.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현통(玄通), 호는 징암(懲庵)이다. 1660년(현종1)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64년 8월에 제주 시재 어사(濟州試才御史)가 되어 제주도에 갔다. 이후 숙종조에 경기 관찰사, 개성 유수, 병조 판서를 지냈다. 글씨에 아주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332)밝은……하소:어진 인재를 잘 뽑기 바란다는 뜻이다. 제주도에서 좋은 말이 많이 나므로 어진 인재를 말에 비겨서 말한 것이다.

1)위학(僞學):남송(南宋) 영종(寧宗) 때 한탁주(韓侂冑)가 권세를 멋대로 부리자 주자(朱子)가 그의 간악함을 상주(上奏)하니 한탁주는 이에 감정을 품고, ‘탐욕과 방자가 사람의 진정이고 청렴과 수양은 모두 거짓이다.’라는 논리로 도학(道學)을 위학으로 배척하고서, 주자의 관직을 삭탈하고 위학을 하는 무리의 등용을 금지하였다. 《宋史 卷37 寧宗本紀》

2)벽서(壁書)의 고변(告變):1547년(명종2) 9월에 양재역(良才驛) 벽에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수렴청정과 이기(李芑) 등의 비행을 비난하는 익명서(匿名書)가 나붙자 이를 발견한 정언각(鄭彦慤)이 이기․정순붕(鄭順朋) 등에게 알려 옥사를 일으킨 사건이다. 이 옥사로 인해 송인수(宋麟壽)․이약수(李若水) 등이 사사(賜死)되고, 노수신(盧守愼)․이언적(李彦迪) 등 30여 명이 유배되었다. 《明宗實錄》

3)한휴(韓休)가 아느냐:한휴는 당 현종(唐玄宗) 때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사람됨이 강직하여 시정(時政)의 득실을 숨김없이 다 말하니, 현종은 잘못이 있을 때마다 좌우에게 “한휴가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新唐書 卷126 韓休列傳》

4)육장(肉醬):고기 장조림이라는 뜻으로 사람을 초주검이 되도록 치는 것을 이른다.

5)관소(館所):외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유숙하는 숙소이다.

6)전주(銓注):문무관(文武官)을 선발할 때 이조와 병조에서 후보자 세 사람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것이다.

7)신방(新榜):새로 급제한 사람의 성명을 기록한 방목(榜目)이다.

8)안(安)은……안입니다:《논어》 〈양화(陽貨)〉에 “공자께서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것이 너에게는 편안하냐?’ 하니, 재아(宰我)가 대답하기를, ‘편안합니다.’ 하였다.[子曰 食夫滔 衣夫錦 於女安乎 曰安]” 하였다.

9)어수계합(魚水契合):물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임금과 신하 사이가 친밀하여 서로 믿고 의지하는 교분을 이른다.

10)순수정(純粹精):《주역》 〈건괘(乾卦) 상(象)〉에 “위대하다, 건이여. 강건하고 중정하고 순수함이 정함이요.[大哉 乾乎 剛健中正純粹精也]”라고 하였다.

11)목릉(穆陵):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선조(宣祖)와 비(妃) 의인왕후(懿仁王后) 및 계비(繼妃)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능이다. 동구릉의 하나이다.

12)퇴광(退壙):임금의 시신을 묻는 광중(壙中)에 관을 모시고 남은 앞쪽의 빈 곳으로, 죽은 사람과 함께 묻는 그릇이나 악기 따위를 넣은 돌함을 묻는 곳이다.

13)악정자(樂正子)는……근심하였는데:악정자는 이름이 춘(春)으로 증자(曾子)의 제자이다. 악정자가 마루를 내려가다가 발을 다친 일이 있는데, 다친 발이 다 나았는데도 3개월 동안 문밖을 나가지 않고 오히려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악정자는 “부모가 온전한 몸을 주셨으니 자식은 그 몸을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 효도인데, 지금 나는 효도를 못하기 때문에 근심하는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禮記 祭義》 효종도 몸을 잘 보호하지 않아 병이 생긴 것이 불효이기 때문에 악정자처럼 근심하고 있다는 뜻이다.

14)숙예철모성(肅乂哲謀聖)의 징험:용모가 공손하면 몸가짐이 점잖아 엄숙해지는[肅] 징험이 나타나고, 말이 도리에 맞으면 번거롭지 않아 ‘조리가 있는[乂]’ 징험이 나타나고, 밝게 보는 눈이 있으면 백성들의 마음과 사물의 이치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지혜로운[哲] 징험이 나타나고, 밝게 듣는 귀가 있으면 시비와 가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일을 헤아리는[謀]’ 징험이 나타나고, 슬기로우면 지난 일을 기억해 앞으로 올 일을 알고 정신을 보존해 신묘하게 응대할 수 있기 때문에 성(聖)의 징험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書經 洪範》

15)제갈량(諸葛亮)의 설(說):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에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가 되어 선악을 상벌(賞罰)함에 다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구절을 이른 것이다.

16)양촉(粱蜀):지금의 사천성(四川省)인 촉(蜀)이 옛날에 양주(梁州)에 속한 땅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17)가부를 조절하는[可否相濟]:어떤 사안에 대해 찬성론과 반대론을 절충하여 합일점을 도출해서 일을 이루는 것이다.

18)진하(陳賀):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신하들이 표문(表文)을 올려 하례하는 것이다.

19)밀차(密箚):주자가 송 영종(宋寧宗)의 생일인 서경절(瑞慶節)에 문무백관이 진하하기 위해 그 의식을 예행연습 하는 것을 보고서, 송 효종(宋孝宗)의 재궁(梓宮)이 빈전(殯殿)에 있는 이때에 진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으로 올린 〈걸서경절불수하차자(乞瑞慶節不受賀箚子)〉를 이른다.

20)악정자삼월우(樂正子三月憂):효종도 몸을 잘 보호하지 않아 병이 생기게 한 것이 불효이기 때문에 악정자처럼 근심하고 있다는 뜻이다. 24쪽 주 13) 참조.

21)주자(朱子)의 차자(箚子):〈신축연화주차일(辛丑延和奏箚一)〉의 첩황(貼黃)을 이른다.

22)대청(臺廳):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臺諫)이 상주(上奏)할 일이 있을 때 모이는 궁중의 청사이다.

23)재집(宰執):국정을 담당하고 있는 재상(宰相)을 이르는 말이다.

24)탕무반지(湯武反之):탕왕과 무왕은 본성을 회복하였다는 말이다. 《孟子 盡心上》

25)사(蜡):농사를 잘되게 한 팔신(八神)의 공에 보답하기 위해 12월에 지내는 제사인데, 팔신은 농업을 창시한 선색(先嗇)의 신(神), 농업을 처음으로 주관한 사색(司嗇)의 신, 곡식의 종자를 맡은 백곡(百穀)의 신, 고대에 전관(田官)을 지낸 농신(農神), 전지(田地) 사이의 농사(農舍)와 농로(農路)를 맡은 우표철(郵表畷)의 신, 들쥐와 멧돼지를 잡아먹는 고양이와 범의 신, 물을 저축해 준 제방(堤防)의 신, 물을 흐르게 한 수로(水路)를 말하는 수용(水庸)의 신, 곡식에 해를 끼치지 않은 곤충의 신 등이다. 《禮記 郊特牲》

26)백승(伯升):광무황제(光武皇帝)의 형 유연(劉縯)의 자(字)이다.

27)복원(濮園):송나라 영종(英宗)의 생부 복안의왕(濮安懿王)의 무덤이다.

28)대원군(大院君):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다.

29)상채(上蔡):송나라 사양좌(謝良佐)의 호이다. 정자(程子)의 제자이다.

30)물각부물(物各付物):사물에는 각각 특성이 있으니, 사물이 오면 나의 사지(私智)로 억측해 응대하지 않고 그 사물이 갖고 있는 특성대로 응대한다는 말이다.

31)건성(建成):당 고조(唐高祖)의 태자로 태종의 동복형(同腹兄)이다. 당나라 창업에 별로 공을 세우지 못하자 공이 많은 태종을 항상 시기하여 살해하려 하다가 도리어 태종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32)태백(泰伯)․중옹(仲雍):주 태왕(周太王)의 장자(長子)와 차자(次子)로 태왕의 뜻이 막내아들 계력(季歷)에게 있음을 알고는 계력이 위(位)를 물려받게 하기 위해 형만(荊蠻)으로 도망가서 단발문신(斷髮文身)하여 스스로 후사가 될 수 없음을 보였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33)교태(交泰):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만물이 태평함이다.

34)상채(上蔡)가……것:상채, 즉 사양좌(謝良佐)가 처음 정호(程顥)를 만났을 때 사서(史書)를 줄줄 외워 거론하며 한 자도 빠뜨리지 않자, 정호가 이를 완물상지(玩物喪志)라고 하니, 상채가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이 붉어졌다고 한다. 완물상지는 외물(外物)을 지나치게 좋아하면 마음속의 뜻을 상실한다는 말이다. 《近思錄 卷2 第27章》

35)취사(取士):과거(科擧)를 보여 사람을 뽑는 일이다.

36)몽학(蒙學):어린아이의 공부라는 말로 덜 익은 학문을 이른다.

37) 기사일:원문은 ‘甲子’인데, 효종실록에 근거하여 ‘己巳’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38) 갑술일:원문은 ‘己巳’인데, 효종실록에 근거하여 ‘甲戌’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39)징(澂)과 숙(潚)의 일:인조의 후궁 조 귀인(趙貴人)의 소생인 숭선군(崇善君) 징과 낙선군(樂善君) 숙을 이른다. 김자점(金自點)이 수원 부사(水原府使) 변사기(邊士紀)와 역적모의를 하면서 징이나 숙을 추대하기로 하였으나 발각되어 징과 숙은 절도에 유배되었다. 《국역국조보감 제37권》

40)경(敬):마음을 전일하게 가져 잡념을 없애는 송나라 유가(儒家)의 수양법이다.

41)주정(主靜):마음을 고요히 가져 외물에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이른다.

42)맹분(孟賁)……용사:옛날 위(衛)나라의 장사(壯士)인 맹분과 진(秦)나라 무왕(武王) 때의 장사인 오획(烏獲)을 말한다. 《한서(漢書)》 권57하에 “힘은 오획, 날래기는 경기(慶忌), 용맹은 분(賁)과 육(育)”이라는 말이 있다.

43)김홍욱(金弘郁):황해 감사로 있을 때 천재(天災)로 인해 효종(孝宗)이 구언(求言)하자 8년 전에 사사(賜死)된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의 억울함을 말하고 그 원한을 풀어 주라는 내용의 구언소(求言疏)를 올렸다가, 효종의 친국(親鞫)을 받던 중에 장살(杖殺)되었다.

44)강씨(姜氏)의 옥사:소현세자빈 강씨의 옥사를 이른다. 소현세자가 인조(仁祖)의 미움을 받다가 죽은 뒤에 강씨는 소용(昭容) 조씨(趙氏)의 무고로 조씨 저주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데다가 이듬해 어선(御膳)에 독약을 넣은 일이 벌어지자 독을 넣은 장본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사사되었다.

45)야기(夜氣):사물을 접하지 않는 밤에 되살아나는 양심을 이른다.

46)수선(首善)의 곳:서울을 이르는 말이다. 교화의 실시가 서울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서울이 사방의 모범이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균관(成均館)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47)습(襲):시신을 목욕시킨 뒤에 세 벌의 옷을 입히는 것이다. 사(士)의 경우는 소렴(小斂)에 19벌을 입히고 대렴(大斂)에 30벌을 입힌다. 《儀禮 士喪禮 疏》

48)계빈(啓殯):발인하기 위해 빈소(殯所)에서 관(棺)을 꺼내는 것이다.

49)합계(合啓)한 일:양사(兩司)가 합동으로 어의(御醫)의 처벌을 청한 것을 말한다.

50)수차(袖箚):임금을 만나 직접 올리는 상소문을 이른다.

51)계자(啓字):계(啓) 자를 새긴 나무 도장으로, 임금이 재가(裁可)하는 모든 문서에 찍는다.

52)청대(請對):긴급한 일이 있을 때 신하가 임금께 뵙기를 청하는 것이다.

53)당후일기(堂後日記):승정원 주서(注書)가 기록한 일기를 말한다.

54)군자는……않는다: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며 거상(居喪)하는 사람에게 슬퍼하지 말고 나와서 관직을 맡도록 강요하는 것을 탈정(奪情) 또는 탈상(奪喪)이라 하는데, 군자는 남의 슬픈 감정을 빼앗아 거상을 폐기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禮記 雜記下》

1)지나치게……수습하여야:마음을 수양하는 법으로, 너무 서둘지 않고 차근차근 물이 스며들 듯이 하는 것이다. ‘평평존재(平平存在)’는 이황(李滉)의 말로, 항상 화평한 마음으로 공부를 계속한다는 뜻인 듯하다. 《牛溪集 卷5 答韓瑩中書, 韓國文集叢刊 43輯》 ‘약략수습(略略收拾)’은 주자(朱子)의 말로, 지경공부(持敬工夫)에 너무 마음을 쓰지 않고 간략하게 자신을 살핀다는 뜻인 듯하다. 《朱子語類 卷62》

2)유문(留門):궁문(宮門)은 정시에 개폐(開閉)하는 것이 규정이지만, 꼭 나가야 할 사람과 들어올 사람이 있을 경우 문의 개폐를 유보(留保)하는 것이다.

3)계해년 초의 일:1623년 3월에 인조가 반정한 것을 말한다.

4)위육(位育):자기 위치에서 도리를 다하여 백성을 양육함을 말한다.

5)서산(書算):글 읽은 횟수를 세는 물건으로 한지(韓紙)에 밀을 먹여 봉투처럼 접고, 거죽에 두 층으로 다섯이나 혹은 열 개씩의 눈을 만들어 한 번 읽을 때마다 아래층의 눈을 하나씩 펴는데, 아래층의 눈은 1의 단위로 계산하고, 위층의 눈은 10의 단위로 계산한다.

6)천원(天元):북주(北周) 선제(宣帝)이다. 선제가 태자에게 전위(傳位)하고서 스스로 천원황제(天元皇帝)라고 칭하였다. 《通鑑節要 陳紀 乙亥年》

7)법가(法駕):천자가 타는 수레의 하나이다. 천자의 수레는 대가(大駕), 법가(法駕), 소가(小駕)등 세 종류가 있다. 대가는 공경(公卿)이 인도하고 대장군이 참승(參乘)하며, 태복(太僕)이 수레를 몰고 속거(屬車)가 81승(乘)이다. 법가는 여섯 마리의 말이 끌고 시중(侍中)이 참승하며 속거가 36승이다. 소가는 천자가 종묘에 갈 때 타는 수레로 시종과 노부(鹵簿), 즉 의장대(儀仗隊)가 위의 두 수레에 비해 간소하다.

8)이것:병이 위중한 천원이 후사를 부탁하려고 어정(御正) 곧 중대부(中大夫) 안지의(顔之儀)와 소어정(小御正) 곧 하대부(下大夫) 유방(劉昉)을 침전(寢殿)으로 불러들였는데, 이때 천원은 이미 말문이 막혀 말을 하지 못하였다. 유방은 태자는 어리고, 황후의 아비 양견(楊堅)이 두터운 명망이 있는 것을 보고는 내사(內史) 정역(鄭譯) 등과 공모해 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서, 조서를 위조해 양견을 총지병마사(總知兵馬事)로 삼은 일을 말한다. 마침내 양견은 주(周)나라를 멸망시키고 수(隋)나라를 세웠는데, 이가 수 문제(隋文帝)이다. 《資治通鑑 陳紀》

9)관시(館試):성균관에서 보이는 문과 초시(文科初試)로, 성균관에서 300일 동안 숙식하며 공부한 유생에 한해 응시 자격을 부여하는데, 그 정원은 50인이다.

10)해액(解額):회시(會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초시(初試) 입격자의 정원이다.

11)식당도기(食堂到記):성균관 유생들이 출근하여 식당에 출입한 횟수를 기록한 문부(文簿)이다.

12)이처럼:진(陳)나라 후주(後主)가 임춘(臨春), 결기(結綺), 망선(望仙) 등의 누각을 화려하게 짓고 정원에는 기이한 꽃과 아름다운 풀을 심고서, 비빈(妃嬪) 및 여학사(女學士)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군신이 술과 가무로 날을 보낸 일을 말한다. 《通鑑節要 陳紀 乙巳年》

13)한마디 말:선주(先主)가 죽을 때 제갈량에게 “사자(嗣子)의 사람됨이 임금으로 세워 도울 만하면 돕고, 도울 만하지 못하거든 그대가 임금이 되라.”고 한 말을 이른다.

14)허목(許穆)이……청하니:이 내용은 한국문집총간 98집에 수록된 《기언(記言)》 권64 〈상복의 잘못된 예를 바로잡기를 청한 상소[追正喪服失禮疏]〉에 실려 있다.

15)체이부정(體而不正):대행왕(大行王)의 혈통[體]은 이어받았으나 적장자[正]가 아니라는 말이다.

16)문자구이지학(文字口耳之學):문자만을 중시하여 그 속에 담긴 뜻은 연구하지 않고, 그저 귀로 듣고 입으로 말이나 하는 깊이 없는 학문을 이른다.

17)원당(願堂):선왕의 화상이나 위패(位牌)를 모셔 놓고 명복을 비는 법당(法堂)으로 조선조 때 궁중 또는 각 사찰에 설치하였다. 원당을 설치한 사찰을 원찰(願刹)이라 한다.

18)복역(覆逆):복역(復逆)과 같은 말로 신하가 부당한 왕명을 접수하지 않고 그 부당성을 지적해 반송(返送)하는 것이다.

19)반좌율(反坐律):무고로 남을 해친 자에게 무고를 당한 자가 받을 죄와 같은 죄로 처벌하는 것이다.

20)설(說):한국문집총간 106집에 수록된 《동춘당집(同春堂集)》 권4 〈이조 판서를 사직하는 소[辭吏判疏]〉에 “성상께서 반드시 이조 판서의 관직으로 신을 부르신다면 신도 감히 나아갈 수 없으니, 이른바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문을 닫는다.’는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말을 이른다.

21)윤대(輪對):문무관(文武官)이 윤번으로 들어가 임금의 질문에 응하는 일이다.

22)패위(佩韋)하고 패현(佩弦)한:전국 시대 때 위(魏)나라 사람 서문표(西門豹)가 급한 성질을 고치기 위해 항상 부드러운 가죽을 차고서 자신을 반성한 고사와, 춘추 시대 때 진(晉)나라 사람 동안우(董安于)가 느린 성질을 고치기 위해 항상 시위를 팽팽히 맨 활을 차고서 자신을 반성한 고사를 이른다. 《韓非子 觀行》

23)입계(入啓):임금께 구두로 아뢰거나 서장(書狀)으로 아뢰는 것이다.

24)정주(政注):관원을 뽑을 때 이조가 세 사람의 후보자를 추천하는 것이다.

25)삼찬(三竄):율곡을 무함한 죄로 귀양 간 허봉(許篈), 송응개(宋應漑), 박근원(朴謹元)을 가리킨다.

26)구경(九經):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9가지 기준으로, 수신(修身), 존현(尊賢), 친친(親親), 경대신(敬大臣), 체군신(體群臣), 자서민(子庶民), 내백공(來百工), 유원인(柔遠人), 회제후(懷諸侯)이다. 《中庸章句 第20章》

27)초개견마(草芥犬馬):임금이 신하를 견마처럼 여기면 신하는 그 임금을 국인(國人)처럼 여기고, 임금이 신하를 초개처럼 여기면 신하는 그 임금을 구수(寇讐)처럼 여긴다고 한 말이다. 《孟子 離婁下》

28)혹문설(或問說):한국문집총간 91집에 수록된 《고산유고(孤山遺稿)》 권3에 〈예설상하(禮說上下)〉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29)조부제(祧祔祭):종묘 본전(本殿)의 대진(代盡)한 신주를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신 다음 삼년상을 마친 신사자(新死者)의 신주를 태묘에 들여 모실 때 올리는 제사이다.

30)조위(祧位):종묘에서 영녕전으로 옮긴 대진(代盡)한 신위(神位)를 이른다.

31)악전(幄殿):제왕의 출어 때 차일을 치고 사방을 휘장으로 둘러막고서 임시로 꾸민 막사이다.

32)부묘(祔廟):졸곡(卒哭) 다음 날 신사자(新死者)의 신주를 그 조묘(祖廟)에 모시는 것이다.

33)방락(訪落):임금이 처음 즉위하여 비로소 신하들에게 정치를 자문하는 것이다. 《詩經 周頌 訪落》

34) 체군신(體群臣):임금이 신하를 자기 몸처럼 여긴다는 말이다. 115쪽 주 26) 참조.

35)개봉(改封):무덤에 흙을 더 얹고 떼를 입히는 것이다.

36)차의(此義):글의 뜻을 해석하는 일이다.

37)이락(伊洛):송나라의 성리학을 이른다. 정호(程顥)는 낙양(洛陽)에 살았고, 정이(程頤)는 이천백(伊川伯)에 봉해진 데서 유래한 말이다.

38)이익을……데:《대학장구(大學章句)》 전 10장에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의리를 이익으로 여겨야 한다.” 하였고,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인자(仁者)는 무고한 한 사람을 죽여 천하를 얻을 수 있다 해도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하찮은 노비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 것은 이익을 탐해 불인(不仁)을 범한 행위라는 말이다.

39)참상(慘喪):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은 상사(喪事)를 말한다.

40)수폐(受弊):현종(顯宗)의 온천 행차로 인해 도로를 닦는 등의 일로 동원되어 노역(勞役)하는 피해를 입은 것을 이른다.

41)힐리(頡利):돌궐(突厥)의 임금으로 성은 아사나(阿史那)이고 이름은 돌필(咄苾)이다. 당 태종 정관(貞觀) 4년에 토벌군의 공격을 받고 형세가 궁해지자 입조(入朝)를 청하는 표(表)를 올린 것을 이른다. 《舊唐書 卷194 突厥列傳》

42)새매를 품속에 숨겼다:태종이 새매 한 마리를 어깨에 올려놓고 있다가 위징(魏徵)이 오는 것을 보고서 그 매를 품속에 감추었는데, 위징이 일을 상주(上奏)하면서 고의로 시간을 오래 끄니 그 매가 품속에서 질식해 죽은 일을 이른다. 資治通鑑 卷193 唐紀9

43)둥지를……놓아준 것:흰 까치 한 쌍이 태종의 침전(寢殿) 위에 둥지를 짓고 살면서 암수가 서로 머리를 비비며 즐기니, 신하들이 모두 상서라고 하례하였다. 그러자 태종은 “나는 항상 수 양제(隋煬帝)가 상서를 좋아하던 것을 비웃었다. 상서는 현자를 얻는 것이니, 이것이 무슨 하례할 가치가 있느냐.”고 하고서 그 둥지를 헐고 까치를 야외에 놓아준 일을 이른다. 資治通鑑 卷193 唐紀9

44)혜패(慧孛):혜성(彗星)을 말하는데, 옛사람들은 혜성의 출현을 재해(災害)나 전쟁의 예조(預兆)로 여겼다.

45)우겸(于謙):명나라 성조(成祖) 때의 진사(進士)로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많은 업적을 쌓은 명재상이다. 영종(英宗)이 와랄(瓦剌)에 잡혀갔을 때 우겸은 당시 병부 상서(兵部尙書)로 있으면서 경제(景帝)를 황제로 세워 와랄의 승상 야선(也先)의 침공을 막았다. 영종이 복위한 뒤에 참소를 입어 해를 당하였다. 《明史 卷170 于謙列傳》

46)압존(壓尊):어른에 대한 공대(恭待)를 그보다 더 높은 어른 앞에서 줄이는 것이다.

47)식와(軾蛙):전국 시대 월나라 임금 구천(句踐)이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성난 개구리에게도 경례를 표한 고사를 말한다. 帝範 卷4

48)외시(隗始):전국 시대 연 소왕(燕昭王)이 현사를 맞아들이는 방법을 물으니 곽외(郭隗)가 “변변찮은 저부터 등용하시면, 저보다 훌륭한 사람은 부르지 않아도 절로 올 것입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34 燕昭公世家

1)방례(邦禮):국가의 예를 말한다. 여기서는 효종이 죽었을 때, 인조의 계비(繼妃)이자 효종의 모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에 관한 예를 말한다.

2)돈유(敦諭):임금이 정승이나 유현(儒賢)에게 권면의 뜻을 전하는 글이다.

3)피혐(避嫌):벼슬아치가 혐의가 있는 일에 대해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고 사직하는 것이다.

4)주회인(走回人)의……하였다:주회인은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도망해 돌아온 사람을 이른다. 안추원(安秋元)은 경기 풍덕(豐德) 사람으로 병자호란 때 포로가 되었다가 1666년(현종7) 도망해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그를 본토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부모 형제가 모두 죽고 살아갈 길이 없자 도로 청나라로 들어가다 잡혀 청나라 조정에서 이 일을 알게 되었다. 청나라 사신이 와서 안추원이 도망해 돌아온 사실을 알고도 청나라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좌의정 홍명하(洪命夏)를 사문(査問)하여 사형시킬 것을 고집하였으나, 현종의 간청으로 사형에서 1등(等)이 감하되었다. 《顯宗實錄 5年 8月 12日, 7年 1月 15日․6月 26日․7月 10日》

5)겸종(傔從)의 공로:겸종은 사신을 수행한 역관 김만직(金萬直)을 이른다. 허적(許積)이 안추원(安秋元)의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김만직을 시켜 청나라 환관을 통해 황제의 아들에게 뇌물을 써서 일을 잘 해결한 것을 이른다. 《顯宗實錄 8年 1月 12日》

6)소대(召對):왕이 경연관들을 불러 몸소 글을 강론하는 것이다.

7)곤복(坤復):10월의 괘(卦)인 곤괘(坤卦)의 초효(初爻)가 양(陽)으로 변해 11월의 괘인 복괘(復卦)가 되는 것이다.

8)서벽(西壁):벼슬아치가 출근하여 모여 앉을 때 서쪽 자리에 앉는 벼슬로 의정부의 좌우참찬, 승정원의 좌부승지 이하 홍문관의 교리에서 부수찬까지의 벼슬을 이른다. 여기서는 동춘이 의정부 좌참찬에 제수되었기에 이른 말이다.

9)용양(龍驤)의 반열:용양위(龍驤衛)는 조선 시대 군사 조직인 오위(五衛) 중의 하나로 여기에 소속된 대호군(大護軍) 이하 부사용(副司勇)까지의 벼슬아치들에게 녹봉을 주기 위해 둔 군직(軍職)의 체아직(遞兒職)이 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10)혼융무간(混融無間):섞여 융화되어 틈이 없음을 이른다.

11)소망지(蕭望之):한 선제(漢宣帝)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어린 원제(元帝)를 세우고서 옛 법도로 인도하여 바로잡았던 충신인데, 뒤에 환관 석현(石顯) 등의 무함으로 자살하였다.

12)홍공(弘恭):원제의 신임을 받은 환관으로 권세를 멋대로 부려 같은 환관인 석현과 함께 소망지 등 충신을 무함해 죽였다.

13)선선오악(善善惡惡):춘추 시대 제 환공(齊桓公)이 놀이를 나갔다가 폐허가 된 성곽을 보고 “이것이 누구의 성곽이며 어째서 망했느냐?”고 묻자, 야인(野人)이 “이는 곽씨(郭氏)의 성곽인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였기 때문에 망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환공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선행(善行)인데, 이곳이 폐허가 된 것은 어째서이냐?”고 묻자, 야인은 “선을 좋아할 줄만 알고 능히 행하지 않았으며, 악을 미워할 줄만 알고 능히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폐허가 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新書 雜事4》

14)송 효종(宋孝宗)처럼……것:목마(木馬)는 송나라 때 오랑캐의 부족인 백표신목마아(白豹神木馬兒)를 이른다. 송 효종이 신목마아를 토벌할 생각으로 활쏘기를 익힌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현종도 북벌(北伐)을 생각하여 활쏘기를 익힌 것이라면 좋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15)문직(文職):문관의 직책으로 동춘이 띠고 있는 의정부 좌참찬을 이른 듯하다.

16)품처(稟處):임금에게 아뢰어 분부를 받아 처리하는 것이다.

17)유마(由馬):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가는 사람에게 타고 갈 말을 내주는 것이다.

18)대감의……것:신수근(愼守勤)의 누이는 연산군(燕山君)의 비(妃)이고 딸은 후에 중종(中宗)이 된 진성대군(晉城大君)의 부인이었으므로 대감의 매부는 연산군을 말하고 대감의 사위는 중종을 말한다.

19)알묘입학(謁廟入學):문묘(文廟)에서 공자를 알현하고서 성균관에 입학하는 것이다.

20)정릉(貞陵):여기서는 능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바로 그 능의 주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가리킨 것이다.

21)이사(貳師):의정부 찬성이 겸임하는 세자시강원의 종1품 관직이다

22)길흉회린(吉凶悔吝)은……하나뿐이다:회린(悔吝)은 회한(悔恨)이다. 길흉과 회린이 모두 본인의 행동에 따라 생기니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뜻이다. 행동으로 인해 다양한 결과가 빚어지지만 그중에 흉한 것은 많고 길한 것은 적다는 말이다. 《周元公集 卷1》

23)영분(榮墳):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조상의 무덤에 가서 풍악을 잡히고 영예를 떨치는 일이다.

24)사물(四勿), 삼계(三戒), 절사(絶四):사물은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視] 말고 듣지도[聽] 말며 말하지도[言] 움직이지도[動] 말라.”는 경계의 말씀이며, 삼계는 여색․투쟁․탐욕을 경계함이고, 절사는 사의(私意)․기필(期必)․고집(固執)․이기(利己)의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다.

25)소릉(昭陵):문종(文宗)의 비(妃)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이다.

26)납약(臘藥):해마다 12월에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청심원(淸心元) 등의 환약이다.

27)어색(漁色):어부(漁夫)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다 취하듯이, 마음에 드는 여자를 다 취하는 것이다.

28)서달(書達):세자에게 올리는 글이다.

29)건극(建極):중정(中正)한 표준을 세우는 것이다.

30)야기(夜氣):사물을 접하지 않는 밤에 되살아나는 양심(良心)을 이른다.

31)상변(上變):역모(逆謀) 등의 변란을 고발하는 것이다.

32)복역(覆逆):어떤 일에 대해 거듭 아뢰어서 반대하는 것이다.

33)삭출(削黜):관직을 빼앗고 도성 밖으로 축출하는 것이다.

34)수길패흉 존순몰녕(修吉悖凶存順沒寧):주돈이(周敦頣)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오는 “군자는 인의를 닦기 때문에 길하고 소인은 이를 어기기 때문에 흉하다.[君子修之吉 小人悖之凶]”라는 말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나오는 “생존해서는 내 하늘을 순종해 섬기고 죽어서는 내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라는 말을 여덟 자로 줄인 것이다.

35)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景行行止):“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길[景行]은 많은 사람이 다닌다.”는 말인데, 후세에는 도덕이 높아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는 사람의 비유로 쓰인다. 《詩經 小雅 車舝》

36)계합(契合):군신 간에 의기가 투합하여 사이가 친밀함을 이른다.

37)철조시(撤朝市):조정의 정무와 시장의 거래를 정지하는 것이다.

38)치조(致弔)하고 치제(致祭)하였다:상주에게 조상하고 망인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다.

39)수비(遂非):잘못을 알면서도 그 잘못된 주장을 관철하려는 것이다.

40)역적 남(枏):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로 복선군(福善君)에 봉해졌다. 1608년(숙종6)에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의 옥사에 연루되어 형 복창군(福昌君), 아우 복평군(福平君)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41)장곡강(張曲江)의 고사(故事):곡강은 광동성(廣東省)에 속한 현(縣)의 이름인데,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상(名相) 장구령(張九齡)이 이곳 출생이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곡강공(曲江公)이라 호칭하였다. 고사는 장구령이 당 현종에게 안녹산(安祿山)은 반역할 상(相)이니, 그를 죽여 후환을 없애라고 하였으나 현종은 듣지 않았는데 안녹산의 반란을 평정한 뒤에 당 숙종(唐肅宗)이 그의 선견지명을 생각해 사도(司徒)에 추증(追贈)하고 이어 곡강으로 사람을 보내어 그의 무덤에 치제한 일을 이른다. 《舊唐書 卷99 張九齡列傳》

42)사액(賜額):임금이 사우(祠宇),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새긴 편액을 내려 주는 것이다.

43)부조(不祧):5대가 지나도 신주를 체천(遞遷)하지 않고 영구히 사당에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44)홍묘(洪廟):고종황제(高宗皇帝)의 능호가 홍릉(洪陵)이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45)유묘(裕廟):순종황제(純宗皇帝)의 능호가 유릉(裕陵)이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1)고아마홍(古兒馬紅):반역자 정명수(鄭命壽)의 청나라 이름이다. 정명수는 천인(賤人)으로 광해군 때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출정하였다가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그곳에 눌러 살면서 우리나라 사정을 밀고함으로써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 병자호란 때는 용골대(龍骨大) 등의 통역으로 나와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앞잡이 노릇을 하였고 청나라의 힘을 믿고 우리 조정을 압박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까지 올랐으며 병조의 관리를 구타하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

2)이형장(李馨長):정명수가 청나라의 힘을 믿고 우리나라에서 권세를 부릴 때 그의 수하 노릇을 하였다. 뒤에 신면(申冕)의 역옥에 연루되어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3)의순공주(義順公主)를……시집보냈다:의순공주는 종실인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의 딸이다. 청나라 구왕(九王)이 조선의 공주와 결혼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 금림군의 딸을 ‘의순공주’에 봉하고 원두표(元斗杓)를 호행사(護行使)로 삼아 영왕(穎王) 살합렴(薩哈廉)에게 시집보냈다. 《孝宗實錄》 대본의 원문에는 의신공주(義信公主)로 되어 있으나 위 자료에 의거해 바로잡았다.

4)새서(璽書):옥새가 찍힌 임금의 글을 말한다.

5)여름에는……맛보며: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산(會稽山)에서 오나라에 당했던 치욕을 씻기 위해 여름에는 화로를 끼고, 문에 쓸개를 달아 놓고서 출입할 때마다 그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의 일념을 불태웠다고 한다. 《吳越春秋》  섶을 거두지 않은 것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부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매양 섶 위에 앉아 자신을 괴롭히면서 복수의 일념을 일깨운 고사이다. 《十八史略》 동춘은 이를 구천의 고사로 잘못 알고서 인용한 듯하다.

6)편의종사(便宜從事):임금이 사절을 보낼 때 미리 일정한 지시를 주지 않고 일의 형편을 헤아려 처리하게 하는 것이다.

7)권강(勸講):임금 또는 세자를 모시고 경전(經傳)을 강의하는 것이다.

8)고신(告身):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말한다.

9)정쟁(廷爭):조정에서 임금의 잘못을 간하는 것을 말한다.

10)왕대비(王大妃):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를 말한다.

11)금액(金額):금으로 장식한 편액을 말한다.

12)세 성인:홍수를 다스려 천하를 태평하게 한 우왕(禹王)과 이적(夷狄)을 물리치고 맹수들을 몰아내어 백성을 안정시킨 주공(周公), 《춘추(春秋)》를 지어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두렵게 한 공자(孔子)를 이른다. 《孟子 滕文公下》

13)전체대용(全體大用):모든 행위를 미발(未發)의 체(體)와 이발(已發)의 용(用)으로 규정한 주자의 성리학을 이른다.

14)정일(精一):“형기(形氣)에서 나오는 인심은 사(私)로 흐르기는 쉽고 공(公)을 지키기는 어렵기 때문에 위태롭고, 의리에서 나오는 도심은 밝아지기는 어렵고 어두워지는 쉽기 때문에 은미하니 정밀하게 살펴 사(私)가 섞이지 않게 하고, 전일하게 지켜 정(正)을 순수하게 보존하여야 모든 행위에 과불급(過不及)이 없어 그 중도를 지킬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말을 축약한 것이다. 1649년(효종 즉위년) 11월에 동춘이 경연에서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序文)〉을 진강할 때, 이 말이 역대 성왕(聖王)이 전한 도통(道統)의 연원임을 역설하며 효종에게 이 도통을 자임할 것을 요구하였다.

15)소융밀물(昭融密勿):충성심을 밝게 드러내어 힘을 다해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16)천경지의(天經地義):천지 사이에 다시 바뀔 수 없는 도리를 이른다.

17)문채 사방에 미쳤네:원문의 방달(傍達)은 사방으로 통달하는 것이고 부윤(孚尹)은 옥(玉)의 색깔이니, 곧 아름다운 풍채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18)표방(標榜):사람을 품평하는 것이다.

19)검담의……잔잔한데:동춘의 인품이 맑고 조용함을 비유한 것이다.

20)수없이……달려왔네: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학문이 중국에서 발원하여 우리나라로 흘러온 것을 말한 것이다. 강한(江漢)은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로 공자를 비유한 것이고 무이(武夷)는 주자를 비유한 것이다.

21)옛날에……요희(姚姬)셨지요:영묘(寧廟)는 효종이다. 선광(宣光)은 국가를 중흥시킨 주 선왕(周宣王)과 한 광무(漢光武)이고, ‘요희(姚姬)’의 ‘희(姬)’는 ‘사(姒)’의 오자(誤字)인 듯하다. 요사(姚姒)는 정일(精一)의 심법을 전한 순(舜)과 우(禹)이다. 효종이 주 선왕과 한 광무처럼 국가를 중흥시키려는 뜻을 품고 제순(帝舜)과 우왕(禹王)이 전한 정일의 심법을 전승하였다는 말이다.

22)동덕(同德)을……주어서:동덕은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을 이른다. 효종이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을 구하여 자신의 뜻을 널리 펼치고자 하니 하늘이 훌륭한 보필을 주었다는 말이다.

23)만언(萬言)의……부식(扶植)하고:장문의 상소에서 《대학장구(大學章句)》와 《중용장구》의 내용들을 진술하여 무너지는 대의를 붙들어 세우고 국가를 경영하는 굉대(宏大)한 규모를 수립했다는 말이다.

24)자신이……것이었다네:동춘이 옛날 탕왕(湯王)의 현상(賢相)인 이윤(伊尹)과 주 무왕(周武王)의 현상인 여상(呂尙)처럼 모든 일을 스스로 담당하여 예로써 풍속을 고쳐 윤리를 지키도록 바로잡았다는 말이다.

25)경(卿)은……다스려서:동춘이 먼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 큰 줄거리만을 다스렸다는 말이다.

26)시귀(蓍龜)가 되었지:시(蓍)는 역점(易占)을 치는 산가지이고 귀(龜)는 점을 치는 귀갑(龜甲)이다. 옛사람은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 반드시 점을 쳐서 시행 여부를 결정하였으니, 시귀는 곧 중대한 일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뜻한다.

27)문원(文元)에게……절시(切偲)하였지:문원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시호이고 우로(尤老)는 우암 송시열이다. 사계에게 수학하고 우암과 서로 권면하여 학문을 성취하였다. 절시는 ‘절절시시(切切偲偲)’의 준말로 간절하게 타이르고 자상하게 권면함이다. 《論語 子路》

28)어떤……않았고:원문의 인치(磷緇)는 “갈아도 엷어지지 않고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는 말로 어떠한 역경이나 곤란에 처해도 지조를 바꾸지 않는다는 뜻이다. 《論語 陽貨》

29)절근(切近)에……두었네:절근은 ‘절문근사(切問近思)’의 준말로 자기에게 해당한 일을 간절히 묻고 자기의 능력으로 미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인(仁)을 실현하는 공부이다. 《論語 子張》 종사(從事)는 오로지 그 일에만 진력하는 것이다. 동춘은 늙어서도 이 공부에 힘써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 실려 있는 《심경(心經)》을 항상 책상 위에 두고서 읽었다는 말이다.

30)근폭(芹曝)을……되어:원문의 근폭유헌(芹曝攸獻)은 헌근(獻芹)과 헌폭(獻曝)으로, 자신의 건의가 변변치 못하다는 겸사이다. 헌근은 미나리를 바친다는 뜻인데 옛날에 미나리를 즐겨 먹던 가난한 농부가 그 지방 부호에게 미나리가 맛이 좋다고 자랑하여 그 부호가 맛을 보았는데 입만 쏘고 배만 아팠다고 한다. 헌폭은 햇볕을 바친다는 뜻인데 송나라의 농부가 따뜻한 봄 햇볕을 쪼이며 그 아내에게 “햇볕의 따뜻함을 사람들이 모르니 이 햇볕을 가져다가 임금께 바치면 반드시 상을 내릴 것이다.” 했다고 한다. 헌근과 헌폭은 후세에 자기가 보내는 물건이나 올리는 건의가 변변치 못하지만 지성에서 나왔다는 겸사로 쓰인다. 《列子 楊朱》 원문의 다반(茶飯)은 ‘항상’의 뜻이다. 이는 동춘이 올린 말이 항상 도움이 되었다는 말이다.

31)맑은……맞았음을:깨끗한 얼음 같고 봉황 같다고 칭찬한 비유가 동춘의 인품과 태도에 맞았다는 것을 성인에게 물어보아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란 말이다.

32)사교(邪敎)가……좋아하니:사교는 기독교를 이른다. 사교가 서양에서 들어와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하여 예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그 허황된 소리를 좋아하게 하였다는 말이다.

33)이천(伊川)의……되었네:춘추 시대 주(周)나라의 대부 신유(辛有)가 이천 땅을 지나다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들에서 제사 지내는 자를 보고서 “백 년이 되지 않아 이곳이 오랑캐의 땅이 될 것이다. 예(禮)가 먼저 없어졌다.” 하고 탄식하였는데, 얼마 뒤에 진(晉)나라가 융족(戎族)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원문의 복좌언리(服左言)는 오랑캐의 의복과 언어로 오랑캐를 뜻하는 말인데, 사교로 인해 이 강토가 오랑캐가 되었다는 말이다.

34)광세(曠世)의 감회: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감회이다.

35)심향(心香):정성스런 마음으로 사르는 향을 이른다.

36)명(明)의……협찬하니:원문의 경주(京周)는 주(周)나라 서울을 이르는데, 중화(中華)를 뜻하는 말이다. 명나라의 멸망을 개탄하여 청나라를 쳐서 치욕을 씻기를 기약하고서 은밀하게 북벌 계획을 세워 효종을 도운 것을 말한다.

37)수양(修攘):‘내수외양(內修外攘)’의 준말로 국내의 정치를 닦고서 외적을 물리치는 것이다.

38)사왕(嗣王):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顯宗)을 이른다.

39)앞을……않았으니:부계(符契)는 목편(木片)에 글을 새긴 뒤에 둘로 쪼개어 한쪽씩 간직하였다가 뒤에 서로 맞추어 증거로 삼는 것이다. 동춘이 임종하기 여덟 달 전인 1672년(현종13) 4월에 올린 소(疏)에 허적(許積)의 간사함을 논하였는데, 뒤에 허적이 그 자식 허견(許堅)의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됨으로써 동춘의 말이 실증된 것을 이른 것이다.

40)망감(亡鑑):거울로 삼을 만한 어진 신하를 잃는 것이다.

41)사액(賜額)의 은전:1695년(숙종21)과 1702년에 문의현(文義縣) 검담서원(黔潭書院)과 상주(尙州) 흥암서원(興巖書院)에 사액한 것을 말한 것이다.

42)온화한……소리이니:행위가 온화하고 인자하며 인품이 고결하고 지조가 굳음을 이른다.

43)백정(伯程):정자(程子)의 형제 중 그 형인 명도(明道) 정호(程顥)이다. 이천(伊川)이 지은 명도의 행장에 의하면 명도의 기상이 봄 햇살처럼 따뜻했다고 한다.

44)제문(祭文)을 지으시고:원문의 신제(宸製)는 임금이 지은 글을 이른다. 1758년(영조34)에 영조가 양정재(養正齋)에 거둥하여 동춘의 기문(記文)과 제액(題額)을 보고서 제문을 친히 지어 승지를 보내어 동춘의 가묘에 제사 지내게 한 일을 말한 것이다.

45)문묘에 배향:1756년(영조32)에 동춘을 문묘에 배향하였다.

46)주자의……빛났다네:주자의 학통이 조선으로 건너와서 석담(石潭) 율곡을 거쳐 사계(沙溪)에게 전해졌고, 그 적전제자(嫡傳弟子) 동춘이 주자의 도통을 승계하여 도덕을 고양하고 유학을 발전시킨 공업(功業)이 태양처럼 빛났다는 말이다.

47)청통(淸通)하고……같았다오:마음은 맑고 트였으며 인품은 온화하고 순수하며 성품은 강직하고 사심이 없어 속과 겉이 해맑기가 정제된 금처럼 순수하고 옥처럼 아름답다는 말이다.

48)아름다운……은현(隱現)이었다네:기린과 봉황은 전설 속의 영물로 세상에 도가 있으면 나타났다가 도가 없어지면 떠나서 숨는다고 한다. 동춘이 세상의 형편을 살펴 도를 행할 가망이 있으면 나왔다가 가망이 없으면 떠난 것을 기린과 봉황에 비유한 것이다.

49)강석(講席)에서……맞먹었다오:계옥(啓沃)은 내 마음을 열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임금의 마음에 부어 넣는다는 말로 성심을 다해 인도하는 것을 이른다. 동춘이 성심을 다해 효종을 인도하니 효종의 칭찬이 한 소열(漢昭烈)이 제갈량을 칭찬하는 것보다 융숭하였고, 예우가 은 고종(殷高宗)이 부열(傅說)을 예우한 것에 비길 정도였다는 말이다.

50)도우(道友)와……담당하며:도우는 지향하는 바가 같고 사상이 같은 벗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우암을 가리킨다. 원문의 공정(共貞)은 《서경(書經)》 〈낙고(洛誥)〉에 보이는 말로 함께 담당한다는 말이니, 우암과 함께 국정을 담당한 것을 이른다.

51)간절한……있고:존양(尊攘)은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의 준말로, 중화족인 명나라를 높이고 야만족인 청나라를 정벌하고자 한 염원이 간절했음을 귀신이 보증할 수 있다는 말이다.

52)명조(明朝)와……차자(箚子):명나라 조정이 청군에 쫓겨 남방으로 도망한 뒤로 그 소재를 모르다가 1657년(효종8)에 비로소 명나라 황실의 후예가 광동(廣東)과 복건(福建) 사이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동춘은 해로(海路)를 이용해 은밀히 사신을 보내어 명나라를 잊지 않고 있는 우리의 정성을 명나라 조정에 알리기를 청하는 차자를 올렸다. 《同春堂集 卷2 貼黃箚, 韓國文集叢刊 106輯》

53)진한……같았다오:진한 술을 마신 것처럼 취하게 하고 지초와 난초를 대한 것처럼 향기에 젖게 한다는 말로 그 고결한 인품이 사람을 심취시키고 감화시켰다는 말이다.

54)흥복(興復)을……이르니:흥복은 중흥(中興)이고, 계술(繼述)은 선왕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것이고, 원문의 원립(爰立)은 정승으로 세우는 것이다. 동춘이 현종을 독대한 자리에서 국가를 중흥시키기로 계획하고 계술을 도모하면 천운이 반드시 돌아온다고 진달하니, 현종이 동춘을 중용하고자 하였으나 정승에 제수하기 전에 동춘이 별세한 것을 말한 것이다.

55)비태 소장(否泰消長)……변천했다오:비태는 《주역(周易)》의 두 괘(卦)의 이름으로 천지가 교감하여 만물이 형통하는 것이 태(泰)이고 천지가 교감하지 않아 만물이 폐색(閉塞)하는 것이 비(否)로 세운의 성쇠를 뜻하고, 소장은 양(陽)인 군자의 도가 자라면 음(陰)인 소인의 도가 사그라지고 음이 자라면 양이 사그라지는 것으로, 흥망과 치란을 뜻한다. 성쇠와 치란은 반복하는 것이어서 세상 형편이 많이 변하였다는 말이다.

56)형작(泂酌):제사에 올리는 술을 이른다.

57)명량(明良)이……존주(尊周)했지:명량은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고, 계합(契合)은 뜻이 서로 부합함이고, 존주는 중화를 존숭하는 것이다. 효종과 동춘이 서로 뜻이 맞아 한마음으로 명나라를 위해 청나라를 정벌하고자 한 것을 말한다.

58)풍천(風泉):《시경》 〈회풍(檜風) 비풍(匪風)〉과 〈조풍(曹風) 하천(下泉)〉을 이른다. 모두 제후의 대부가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진 것을 탄식해 읊은 시인데, 망한 왕조를 그리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명나라의 멸망을 애상(哀傷)하는 뜻으로 쓰였다.

59)주자(周子)와 정자(程子)의 기상:주자는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이고 정자는 명도(明道) 정호(程顥)이다. 황정견(黃庭堅)은 “염계의 마음은 깨끗하여 속된 기운이 없는 것이 마치 ‘비가 갠 뒤의 온화한 바람과 밝은 달[光風霽月]’ 같다.” 하였고, 정이(程頤)는 “명도는 사람을 대할 때 마치 봄날처럼 따뜻하였다.” 하였다. 동춘의 기상이 깨끗하고 따뜻함을 이른 말이다.

60)문(文)이 문정(文正)에게 있었지:문은 사문(斯文)을 이른 것이다. 곧 유학(儒學)의 도통(道統)이 동춘에게 전해졌다는 말이다.

61)광감(曠感):‘광세지감(曠世之感)’의 준말이다. 242쪽 주 34) 참조.

62)모습은……감화시키니:공화(功化)는 공업과 교화이고, 여휘(餘徽)는 전인이 남긴 풍화(風化) 곧 도덕의 규범이다. 동춘은 비록 죽었지만 동춘이 남긴 공업과 교화는 없어지지 않아서 그 덕행과 언론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말이다.

63)구원(九原)에서……있으련만:만약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 돌아온다면 그 훌륭한 풍채를 접할 수 있으련만 그럴 수 없으니 한스럽다는 말이다.

64)법문(法門)의……발로라네:법문은 법도 있는 가문이란 말로 남의 가문에 대한 존칭이고, 원문의 육경(毓慶)은 가문에 경사를 가져올 자손이 태어난 것이다. 동춘의 가문에 훌륭한 자손이 태어난 것은 선행을 많이 쌓은 데서 온 결과라는 말이다.

65)마침……하리:원문의 석갈(釋褐)은 처음 출사하는 것이고, 봉자(丰姿)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난초의 싹은 뛰어난 젊은이를 비유하는 말이다. 동춘의 사손(嗣孫)을 만나 보니 그 모습이 난초의 싹처럼 아름다우므로 자라서 향기로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배양하겠다는 말이다.

66)위인(偉人):원문의 한기(閒氣)는 몇 세대에 한 번씩 태어나는 뛰어난 인물을 이른다.

67)풍천(風泉):망한 왕조를 그리는 뜻으로 쓰인다. 250쪽 주 58) 참조.

68)천 길……볼만해서였다네:봉황이 천 길 위를 날다가 덕의 빛을 보고서 내려와 앉듯이 동춘이 나와서 두 임금의 사부가 된 것은 현종과 숙종이 훌륭한 임금이 될 조짐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69)한결같은 마음은:원문의 일부심경(一部心經)은 한 질의 《심경》을 말한 것인데, 여기서는 책명(冊名)이 아닌 동춘의 용심(用心)으로 쓰인 듯하므로 이상과 같이 번역하였다.

70)요순 군민(堯舜君民)이었으나……되었네:동춘이 임금을 요순 같은 성군으로 만들고 백성을 요순의 백성들처럼 순박한 사람들로 만드는 데 마음을 다하였고, 숙종 초년에 서인(西人)의 실각으로 조정에서 물러나서는 초야에서 후학을 교육하였으므로 문묘에 배향되어 천추만세토록 제사를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71)계담민락(溪潭閩洛):‘계(溪)’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담(潭)’은 석담(石潭) 곧 율곡(栗谷) 이이(李珥), ‘민(閩)’은 주희(朱熹), ‘낙(洛)’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이다.

72)성경(誠敬)과 박약(博約):성실독경(誠實篤敬)과 박문약례(博文約禮)이다.

73)긍식(矜式):존경해 본받는 대상이다.

74)광풍제월(光風霽月):비가 갠 뒤의 화창한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으로 온화하고 깨끗한 심성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250쪽 주 59) 참조.

75)옥색금성(玉色金聲):옥빛처럼 변치 않고 징 소리처럼 맑다는 말로 고결한 인품과 굳은 지조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76)선민(先民)의 말:선민은 옛사람이다. 철종의 사제문(賜祭文)에 “화풍감우(和風甘雨), 옥색금성(玉色金聲)”이라고 품평한 말을 이른다. 244쪽 주 42) 참조.

77)구원(九原)의……누구이겠소: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다면 되살리고 싶은 사람이 동춘이 아니고 누구이겠느냐는 말이다.

78)과축(薖軸):《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의 ‘석인지과(碩人之薖)’의 ‘과(薖)’와 ‘석인지축(碩人之軸)’의 ‘축(軸)’을 합성한 말로 한가로이 지내는 모양이다.

79)관원……있어서라오:척척(戚戚)은 어느 정경이 떠올라 마음이 움직이는 모양이다. 순종이 이곳을 지나다가 동춘이 한가로이 지내던 정경이 떠올라 관원을 보내 제사 지내게 한다는 말이다.

80)마음과……받았습니다:난실(蘭室)은 부부가 거처하는 방이다. 동춘이 처가에서 지내며 장인 정경세(鄭經世)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을 이른 듯하다.

81)경(敬):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잡념을 없애는 공부로 성리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수양의 덕목이다.

82)의(義):처사(處事)의 당연으로 모든 일을 사리에 맞게 처리하는 공부이다.

83)성(誠):‘진실하여 거짓이 없는[眞實無妄]’ 것으로 천리(天理)의 본연이다. 사람은 천리처럼 진실무망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덕성을 수양하여 진실무망하게 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84)명(明):천명(天命)의 본연을 살펴서 참으로 지선(至善)의 소재를 아는 것이다.

85)진수(進修):‘진덕수업(進德修業)’의 준말로 도덕을 증진하고 공업(功業)을 수립하는 것이다.

86)제회(際會):군신이 의기가 투합하여 서로 호응함을 이른다.

87)당저(當宁)를 돕게 하고:당저는 현재의 임금을 이르는 말로 현종(顯宗)을 가리킨다. 효종 원년에 동춘을 세자시강원 진선(世子侍講院進善)으로 삼은 것을 말한 것이다.

88)애증(哀贈):죽음을 애도하며 추증한 관작을 이른다.

89)시귀(蓍龜):동춘이 곧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자문을 받는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말이다. 240쪽 주 26) 참조.

90)썩은……어려우므로:공자가 제자인 재여(宰予)에게 한 말로, 기질이 어둡고 나태한 자에게는 교육을 베풀 수 없다는 뜻이다. 《論語 公冶長》 여기서는 조상우가 겸사로 한 말이다.

91)공명선(公明宣)의……있고:공명선은 증자(曾子) 문하에서 증자가 부모를 섬기고 빈객을 접대하고 조정에서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을 보고 배웠다. 《小學 稽古》 조상우 자신은 동춘 문하에서 공명선처럼 잘 배우지 못했다고 겸양해 말한 것이다.

92)요옹(了翁)의……저버렸으니:요옹은 송 철종(宋哲宗) 때 사람 진관(陳瓘)의 호이며, 자는 영중(瑩中)이다. 진관은 당시에 간관(諫官)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무원(堥源) 사람 허월경(許月卿)이 그에게서 배운 후 벼슬길에 올랐으나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낙향하여 문을 닫고 저술하여 크게 학문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동춘의 알아줌을 받은 조상우 자신은 동춘을 저버리고 학문을 성취하지 못했다고 겸양해 말한 것이다. 《靑莊館全書 卷20 宋遺民補傳》

93)반함(飯含):염습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이나 쌀을 물리는 일이나 그 절차를 말한다.

94)초궁(楚宮)에……놓아:한 고조(漢高祖)의 이복동생 초 원왕(楚元王) 교(交)가 현자(賢者)를 매우 좋아하여 목생(穆生), 신공(申公), 백공(白公) 등을 중대부(中大夫)로 삼았다. 원왕은 술자리를 열 때마다 술을 못 마시는 목생을 위해 따로 단술[醴]을 차려 놓았는데, 뒤에 그 아들 왕무(王戊)가 즉위해서는 처음에는 차려 놓다가 뒤에는 잊고 차려 놓지 않으니, 목생이 드디어 떠났다. 《漢書 卷36 楚元王傳》 여기서는 효종이 극진히 대우하던 동춘을 현종도 극진히 대우하였다는 뜻으로 인용하였다.

95)사어(史魚)의 시간(尸諫):원의(原義)는 죽은 뒤에 시신(尸身)으로 간하는 것인데, 후세에 죽음을 무릅쓰고 충간(忠諫)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위(衛)나라 대부 사어가 영공(靈公)에게 어진 거백옥(蘧伯玉)을 등용하고 불초한 미자하(彌子瑕)를 물리치라고 자주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니, 사어가 죽을 적에 그 아들에게 “내가 죽거든 시신을 창문 아래에 놓아두라.”고 하였다. 영공이 조상하러 와서 이를 보고 그 까닭을 묻자 그 아들이 아비의 유언을 영공에게 고하니, 영공은 미자하를 물리치고 거백옥을 등용하였다고 한다. 《孔子家語 困誓》

96)회장(會葬)을 금한 것:송 효종(宋孝宗) 때 한탁주(韓侂冑)가 총애를 믿고 주자(朱子)를 역괴(逆魁)로 몰아 참형에 처할 것을 청하는 소장을 올렸으나 주자가 갑자기 몰(沒)하여 참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문인들을 다스리고자 하여 스승의 회장을 일절 금지시킨 일을 말한다. 《宋子大全 卷132 雜著 偶記, 韓國文集叢刊 112輯》

97)충청비(忠淸碑)를……명한 것:송 철종(宋哲宗) 원우(元祐) 원년에 사마광(司馬光)이 죽자 철종이 충청수덕비(忠淸粹德碑)를 내렸는데, 뒤에 장돈(章惇), 채변(蔡卞) 등이 사마광을 무덤에서 파내어 참시(斬屍)하기를 청하니, 철종은 허락하지 않고서 충청수덕비만을 넘어뜨리게 하였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원문은 ‘淸忠碑’인데, ‘忠淸碑’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98)반장(返葬):처음에 안장했던 연기(燕岐) 죽안리(竹岸里)에서 고향 회덕(懷德)으로 이장(移葬)한 것을 말한다.

99)사가(四哥):동춘의 넷째 손자 병익(炳翼)을 이른다.

100)상운 경성(祥雲慶星):복을 가져다주는 상서로운 구름과 경사스런 별이란 말로, 동춘이 아름다운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사문에 상서로운 일을 가져올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101)좌상(座上)에……향기였으니:동춘의 인품이 온화하기가 봄바람 같았으므로 좌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봄바람이 스며들고 아름다운 난초의 향기가 배어드는 것 같아 저절로 그 인품에 감화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102)학당(學堂)의……넘쳐났지요:동춘이 후학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배우기 위해 예물을 가지고 찾아오는 자가 동춘이 사는 마을에 넘쳐났다는 말이다.

103)요순을……밝았지요:동춘이 임금을 요순 같은 성군이 되도록 도왔고, 명나라가 망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청나라를 쳐서 복수하려 한 의기가 태양처럼 빛났다는 말이다.

104)경모(敬慕)하는……다름없어:상재(桑梓)는 선영(先塋)이 있는 고향이다. 동춘을 경모하는 정성이 동춘의 후손 못지않다는 말이다.

105)초례(椒醴):산초를 삶은 물로 빚은 단술이다.

106)계개(継開):‘계왕개래(継往開來)’의 준말로 성인의 뒤를 이어 후학을 열어 주는 것이다.

107)천경지의(天經地義):237쪽 주 16) 참조.

108)민이물칙(民彝物則):사람의 도리와 사물의 법칙을 말한다.

109)생사동전(生死同傳):사마광(司馬光)이 범진(范鎭)과 의기투합하여, “나와 너는 살아서는 뜻을 같이하고 죽어서는 같이 열전에 오를 것이다.[吾與子生同志死當同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5》

110)문화(文華):내실이 없이 형식만 갖추는 것을 말한다.

111)삼현(三賢):송나라의 유현 양시(楊時), 나종언(羅從彦), 이동(李侗)이다. 1682년(숙종8)에 우리나라 유현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할 때 이 세 사람도 함께 배향하였다.

112)역복(棫樸)의 교화:기강을 진작시켜 사람들이 귀부(歸附)하도록 교화를 펴는 것이다. 역복은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篇名)으로 문왕(文王)의 덕이 성대하여 인심이 귀부한 것을 읊은 시이다.

113)승무(陞廡):학덕이 있는 사람을 문묘에 배향함을 말한다.

114)시학(視學):임금이 친히 태학에 가서 학생들을 고시(考試)하는 것이다.

115)제우(際遇)가 밝게 드러나:어진 임금을 만나 의기가 투합하여 이룬 공적이 밝게 빛났다는 말이다.

116)의배(議配):묘정에 배향할 사람을 의정(議定)하는 것이다.

117)유소(儒疏):유생들의 연명 상소(聯名上疏)를 이른다.

118)저 두 신하:동춘과 우암을 이른다.

119)밀찰(密札):효종이 우암에게 내린 비밀 서찰이다.

120)태재(汰哉):분수에 지나침이다. 효종이 우암에게는 밀찰을 내렸으나 동춘에게는 내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효종의 동춘에 대한 신임이 우암에 대한 신임만 못하였으니, 동춘을 효종의 묘정에 배향하는 것은 분수에 지나치다는 말이다.

121)괄낭(括囊):《주역(周易)》 〈곤괘(坤卦) 육사(六四)〉에 “주머니 끈을 묶듯이 하면 허물도 없으며 칭찬도 없으리라.[括囊 无咎 无譽]” 하였으니 화를 피하기 위해 입을 닫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122)언손(言遜):《논어》 〈헌문(憲問)〉에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행동은 준엄하게 하되 말은 겸손하게 해야 한다.[邦無道 危行言遜]” 하였으니, 화를 피하기 위해 겸손하게 말하는 것이다.

123)마음과……여겼다:이 말은 동춘의 귀향을 만류하기를 청한 김익렴(金益廉)의 소에 내린 비답에 보인다. 《同春堂續集 卷8 年譜 孝宗 9年 2月 19日》

124)존현(尊顯)하신 일:숙종(肅宗)이 손수 흥암서원(興巖書院)의 편액을 써서 내리고 승지를 보내어 치제한 일을 말한 것이다.

125)문묘에 종향하는 전례(典禮):영종(英宗)이 관학 유생(館學儒生) 등의 청원을 받아들여 동춘의 문묘 배향을 윤허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한 일을 말한 것이다.

126)구당(舊堂):선대가 살던 옛집을 말한다.

127)찬(贊):문체(文體)의 하나로 인물을 논평해 찬양하는 글이다.

128)한세(閒世)의 대현(大賢):252쪽 주 66) 참조.

129)괴두(魁斗)의 바람:괴두는 문운(文運)을 맡은 별 이름이다. 세상의 문운을 주관할 대학자가 되리라는 바람이 성대하였다는 말이다.

130)병정(丙丁):호란(胡亂)이 일어난 병자년(1636, 인조14)과 이듬해 정축년을 이른다.

131)유악(帷幄):임금의 거처 또는 경연(經筵)을 이른다.

132)추양강한(秋陽江漢):선사(先師)를 그리는 것이다. 공자(孔子)가 돌아가신 뒤에 자하(子夏), 자유(子游) 등이 유약(有若)의 모습이 공자와 비슷하다 하여 공자를 섬기던 예로 그를 섬기고자 하여 증자(曾子)에게 강요하자, 증자가 반대하며, “비교하자면 공자는 장강과 한수에 씻고서 여름 햇볕에 말린 것이어서 더할 수 없이 깨끗하다.[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皓皓乎不可尙已]”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여기서 추양과 강한은 공자를 비유한 것이다. 추양은 주(周)나라 역(曆)의 7, 8월로 절기상 여름에 해당하는 하(夏)나라 역의 5, 6월이다.

133)금려(金礪):“내가 쇠라면 너를 숫돌로 삼겠다.[若金用汝作礪]”를 줄인 말로 신하를 나를 연마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書經 說命上》

134)쇄락(灑落):군신 사이가 화합하여 꾸밈이 없음을 이른다.

135)포수배(包羞輩):능력이 그 관직에 맞지 않아 부끄러운 생각을 품은 무리를 이르는데, 여기서는 동춘과 색목(色目)을 달리한 남인(南人)들을 이른 듯하다.

136)집편(執鞭)의 모정(慕情):선현에 대한 흠모를 나타내는 말로, 만약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나는 선생의 말고삐를 잡는 마부가 되더라도 이를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그 일을 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바치겠다는 뜻이다.

137) 수길패흉 존순몰녕(修吉悖凶存順沒寧):209쪽 주 34) 참조.

138) 선왕께서……계승하고:원문은 ‘其所以承先王艱大之投’인데, 앞뒤 문맥으로 보아 ‘投’를 ‘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39)예를……일:효종의 국상 때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을 논한 기해예송(己亥禮訟)을 이른다.

140)적점(積漸):점차적으로 조금씩 참소하여 상대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이다.

141)나직(羅織):무고한 사람을 무함하여 죄에 얽어 넣는 것이다.

142)폐고(廢錮):일생 동안 벼슬을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143)포선(鮑宣)이……상서(上書)하였고:한 애제(漢哀帝) 때 사예 교위(司隸校尉)였던 포선이 어떤 일로 하옥되자, 박사 제자(博士弟子) 제남(濟南)의 왕함(王咸)이 태학 아래서 기를 들고 말하기를, “포 사예(鮑司隸)를 구제하고자 하는 자는 이 기 아래로 모이라.” 하자 제생 1천여 인이 모였던 고사(故事)를 말한다. 漢書 卷72 鮑宣傳

144)구양(歐陽)이……구하였습니다: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던 대사도(大司徒) 구양흡(歐陽歙)이 여남 태수(汝南太守)로 있을 때의 일에 연루되어 하옥되자, 제생 1천여 명이 궐문 밖에서 기다리며 구양흡을 가엾게 여겨 용서해 줄 것을 빌었던 일을 말한다. 《後漢書 卷79上 儒林列傳 歐陽歙》

145)진(秦)나라……없다:진나라 장수 장감(章邯)은 항우(項羽)에게 밀려 전세가 불리하자, 사마흔(司馬欣)을 수도 함양(咸陽)으로 보내어 상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 오게 하였다. 사마흔이 함양으로 가서 군대가 지키는 사마문(司馬門)에서 3일을 기다렸으나 막강한 권한을 가진 환관(宦官) 조고(趙高)가 사마흔을 만나 주지 않고 믿지 않는 마음이 있자, 사마흔은 도망해 돌아와서 장감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

146)출납(出納):임금의 명을 받아 아래에 선포하고 신하의 말을 듣고 임금께 올리는 것이다.

1)군현(群賢)의 대성(大成)을 모아:여러 현인들이 대성한 학설, 사상, 품격 등을 종합해 자신의 학문 체계를 정립했다는 말이다.

2)서우화풍(瑞雨和風):단비와 화창한 바람인데, 온화한 인품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3)추상렬일(秋霜烈日):가을 서리와 여름 햇볕인데, 두려운 위엄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4)격양(激揚):‘격탁양청(激濁揚淸)’의 준말로 악류(惡類)를 배척하고 선류(善類)를 찬양함이다.

5)거경(居敬):마음의 잡념을 없애고 몸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다.

6)처가(處家):집안을 잘 다스림을 말한다.

7)양복(陽復):흉한 것이 가고 길한 것이 돌아옴을 말한다. 《周易 復卦 彖》

8)지부해함(地負海涵):대지는 만물을 지고 있고 바다는 백천(百川)을 받아들인다는 말로, 각종 학설과 사상을 받아들여 풍부한 지식을 쌓은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9)서여(緖餘):실을 뽑아낸 누에고치에 남은 실오리를 이르는 말로, 근본이 되는 사상이나 학설 이외의 여론(餘論)의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여기서는 선인이 전한 학통(學統) 또는 도통(道統)의 뜻으로 쓰였다.

10)춘추대의(春秋大義):중화(中華)를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의리를 이르는데, 동춘과 우암이 명나라를 위해 이적인 청나라를 토벌할 뜻을 가졌던 것을 말한 것이다.

11)정금미옥(精金美玉):심성은 정제한 금처럼 순수하고, 용모는 옥처럼 아름답다는 말이다.

12)염락관민(濂洛關閩):염은 주돈이(周敦頤)이고, 낙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이고, 관은 장재(張載)이고, 민은 주희(朱熹)이다.

13)광풍제월(光風霽月):동춘의 인품이 깨끗하고 따뜻함을 이른다. 250쪽 주 59) 참조.

14)춘생추살(春生秋殺):따뜻한 봄기운이 만물을 내고 매서운 가을 서리가 만물을 죽인다는 말로 선인(善人)은 봄 햇살처럼 따뜻하게 감싸고 악인은 가을 서리처럼 가차 없이 주살(誅殺)하는 것을 비유한다.

15)문답한 설화(說話):동춘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기별을 듣고 우암이 달려와서 동춘의 손을 잡고서 주고받은 말을 이른다. 이 말은 《동춘당속집(同春堂續集)》 권10 현종 13년 11월 기사에 자세히 보인다.

16)소분(掃墳):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조상의 산소에 가서 무덤을 쓸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17)제상(堤上):대전(大田) 소제(蘇堤)에 있는 남간정사(南澗精舍)를 이른다.

18)허물을 고친 것:윤선거(尹宣擧)가 강화(江華)에서 절개를 지켜 죽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관직에도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죄인으로 자처한 일을 이른다.

19)강도(江都)에서 지은 잘못: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윤선거는 가족과 함께 강화로 피란하여, 강화가 함락되면 순절(殉節)하기로 그 아내 이씨(李氏)와 약속하였다. 이듬해에 강화가 함락되자 아내 이씨는 자결하였으나 윤선거는 평민으로 변장하고서 강화를 탈출한 일을 이른다.

20)상린서봉(祥麟瑞鳳):인품이 출중함을 비유한 말이다.

21)정금미옥(精金美玉):순수한 심성과 아름다운 용모를 말한다. 298쪽 주 11) 참조.

22)여음순주(如飮醇酒):진한 술을 마신 듯이 그 인품에 취함을 말한다. 247쪽 주 53) 참조.

23)여대지란(如對芝蘭):지란을 대한 듯이 그 인품에 감화됨을 말한다. 247쪽 주 53) 참조.

24)지언(知言):그 사람의 말을 듣고서 그 사람의 심중을 아는 것이다.

25)극벌원욕(克伐怨欲):《논어》 〈헌문(憲問)〉에 나오는 말로, 이기기 좋아하고 교만하고 자랑하며 원망하고 탐욕을 부리는 것을 말한다.

26)인묘(仁廟):인묘의 ‘인(仁)’은 ‘현(顯)’의 오자(誤字)인 듯하다. 인조 재위 기간에는 경자년이 없다.

27)효묘(孝廟):효묘의 ‘효(孝)’는 ‘현(顯)’의 오자인 듯하다. 효종 재위 기간에는 경술년이 없다.

28)일(逸) 좌상(左相):초야에 은거하며 좌상의 직함만을 띤 것이다. 높은 도덕과 학문을 지닌 사람으로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을 유일(遺逸)이라 한다.

29)기사년: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에게로 넘어간 해이다.

30)보사훈(保社勳):1680년(숙종6)에 허견(許堅)의 역모를 막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훈명(勳名)이다.

31)□□의 아들:박세징(朴世徵)은 부친의 이름이 상란(尙蘭)이다.

32)임인무옥(壬寅誣獄):1722년(경종2)에 소론(少論) 김일경(金一鏡)이 목호룡(穆虎龍)을 시켜 노론(老論)이 이이명(李頤命)을 임금으로 추대하기를 모의한다고 무고하게 하여 옥사를 일으켜 노론을 제거한 사건을 이른다.

33)봉명조양(鳳鳴朝陽):봉황이 산 동쪽에서 운다는 말인데, 송규광(宋奎光)이 조정에서 바른말을 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34)홍득기(洪得箕)의 자는 □□:홍득기의 자는 자범(子範)이다.

35)시호는 □□이다.:이익(李翊)의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36)유성오(柳誠吾)의 자는 □□이고:유성오의 자는 근부(近夫)이다.

37)□□인이며 □□의 아들:이지렴(李之濂)은 함풍인(咸豐人)이며 부위(副尉) 초옥(楚玉)의 아들이다.

38)김만길(金萬吉)의 자는 □□이고:김만길의 자는 자적(子迪)이다.

39)나석좌(羅碩佐)의 자는 □□이고:나석좌의 자는 중보(仲輔)이다.

40)황윤(黃玧)의 자는 □□이고:황윤의 자는 집중(執中)이다.

41)김수환(金守煥)의……□□인으로:김수환은 광주인(光州人)이다.

42)□□의 아들이다:소두산(蘇斗山)은 동지중추부사 동명(東鳴)의 아들이다.

43)반계영(潘啓榮)의 자는 □□이다:반계영의 자는 중실(仲實)이다.

44)윤경래(尹慶來)의 자는 □□이다:윤경래의 자는 대유(大有)이다.

45)호력(胡曆):청나라에서 온 책력(冊曆)인 듯하다.

46)전질(傳秩)이 넓지 못하니: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상하의 문맥으로 보아 ‘수록한 내용이 광범위하지 못하다’는 뜻 같다.

47)전체대용(全體大用):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과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이른다. 235쪽 주 13) 참조.

48)심행수묵(尋行數墨):문자에만 매달려 문자 뒤에 숨어 있는 뜻을 찾지 않는 것이다.

1)신축고(辛丑稿):1901년(광무5), 매천이 47세 되던 해에 지은 시들이다.

2)유치공(柳稚恭):치공은 유덕기(柳德基)의 자이다. 본관은 선산이다.

3) 은성재(隱城齋)에……창수하다:은성재와 허군 동숙(許君東淑)에 대한 사항은 미상이다. 다만, 은성재는 본 대본의 10번째 시에 “대나무 섬이 마을 입구에 자리하니[竹嶼居村口]”라는 표현이 있고, 전주대학(全州大學) 호남학연구소(湖南學硏究所)에서 영인한 매천후집(梅泉後集) 권2에 실린 같은 제목의 시 중에 “죽도봉 서쪽으로 달은 아직 지지 않았네.[竹島峯西月未過]”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죽도봉 근처의 마을인 동외동(東外洞), 속칭 성동마을에 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허군 동숙은 매천후집의 같은 시 제목에 “허군의 집은 보은(報恩)에 있는데, 또한 나그네살이를 한 지 한 해가 지났다.”라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4) 고을 성: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낙안읍성(樂安邑城)을 가리킨다.

5)종각(宗愨)의 기상:웅혼한 기백과 원대한 뜻을 지니고 용맹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종각이 소년 시절에, “장풍을 타고 만리 물결을 헤쳐 보고 싶다.[願乘長風破萬里浪]”라고 포부를 밝힌 고사가 있다. 宋書 卷76 宗愨列傳

6)문자음(文字飮):시문(詩文)을 짓고 담론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을 이른 말이다. 당(唐)나라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취증장비서(醉贈張秘書)라는 시에, “장안의 여러 부잣집 아이들, 반 위에 좋은 음식 잔뜩 차렸지. 문자음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오직 기생의 붉은 치마에 취할 줄만 아는구나.[長安衆富兒 盤饌羅羶葷 不解文字飲 惟能醉紅裠]”라고 하였다.

7)오언성(五言城):오언시(五言詩)에 통달했음을 비유한 말이다. 당(唐)나라 때 시인 유장경(劉長卿, 709〜780)이 오언시에 능하여 오언장성(五言長城)이라 자칭한 데서 온 말이다. 新唐書 卷196 隱逸列傳 秦系

8) 해는……드러내었고:낮에는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던 해의 온전한 모양을 저물녘에는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9) 대나무 섬:전라남도 순천시 조곡동에 있는 산인 죽도봉(竹島峯)을 가리키는 것으로, 산대나무와 동백이 울창하게 숲을 이룬 봉우리 모양이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섬과 같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0)석주칠의각(石柱七義閣):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전라도의 관문이었던 석주관(石柱關)을 끝까지 지키다가 숨진 구례 출신 의사(義士) 7명의 무덤이 있는 곳의 누각이다. 석주관은 안음(安陰)의 황석산성(黃石山城), 진안(鎭安)의 웅치(熊峙), 운봉(雲峰)의 팔량치(八良峙)와 함께 영남과 호남을 통하는 4대 관문의 하나로,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1804년(순조4) 나라에서 왕득인(王得仁)을 포함한 7명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을 내렸다. 문화재청의 사적기에 의하면, “1946년에는 뜻있는 지방 유지들에 의해 칠의각(七義閣)과 영모정(永慕亭)이 세워졌다.”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문집에 의하면 매천 당시에 이미 칠의각이 존재했으므로 기술의 오류로 보인다.

11)웅어(熊魚)가 일단 결정되자:취하고 버릴 바에 대해 판단할 줄 안다는 의미로, 주로 의리를 택하는 것을 가리킨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생선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바이며 곰 발바닥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며 의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 하였다.

12)긴긴밤……있고:사장(沙場)은 병사들이 전투하다가 죽어 간 전장을 가리킨다. 무지개가 뻗쳐 있다는 것은 의사의 충정이 하늘까지 감응시켜 무지개가 떠오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국 시대에 자객 섭정(聶政)이 한괴(韓傀)를 죽일 때와 자객 형가(荊軻)가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의리를 사모하여 진왕(秦王)을 죽이려고 떠날 때에 모두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다고[白虹貫日] 한다. 戰國策 魏策4 史記 卷83 魯仲連 鄒陽列傳

13)남파(南坡):성혜영(成蕙永, 1844〜?)의 호이다. 왕석보(王錫輔)의 제자이다. 한양에서 육교시사(六橋詩社)에 참여하였는데, 매천을 만난 뒤에 당시 시사를 이끌던 추금(秋琴) 강위(姜瑋)를 소개하였다.

14)사평(沙坪) 나루:경남 하동 북천면 사평리에 있던 나루이다.

15)청안(靑眼):반갑게 벗을 맞이하는 모습을 형용하는 말로,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이 마음에 맞는 벗을 대할 때에는 눈동자를 푸르게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대할 때에는 희게 하였다고 한 고사에서 나왔다. 晉書 卷49 阮籍列傳

16)국화……대고:국화 향기를 머금었다는 의미의 ‘被菊氣’가 맞는 듯하나, 대본에 “披菊氣”라고 되어 있어서 일단 이렇게 번역하였다.

17)연명(淵明)보다 좋은 듯하네:연명은 진(晉)나라가 망하고 송(宋)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절의를 지켜 은거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시인(詩人) 도잠(陶潛)의 호이다. 자는 원량(元亮)이다. 스스로 음주(飮酒)라는 시에서,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고 유유히 남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고 하였고, 염계(廉溪) 주돈이(周敦頤)가 애련설(愛蓮說)에서,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좋아하였다.”라고 할 정도로 국화를 좋아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18)대숙륜(戴叔倫)의 시:대숙륜은 당(唐)나라 중기의 시인이다. 용주 자사(容州刺史) 등을 지냈다. 시는 당시 농촌의 생활상과 변경의 수자리 사는 병사들의 애환을 잘 묘사한 것이 특징으로, 백거이(白居易)가 제창한 신악부체(新樂府體)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차운한 시는 그의 시 제야숙석두역(除夜宿石頭驛)을 가리킨다.

19)초공(焦貢)의 역법:초공은 전한(前漢) 말기의 역술 이론가로, 초공(焦贛)이라고도 한다. 자는 연수(延壽)이며, 초씨역림(焦氏易林)이 유명하다.

20)임인고(壬寅稿):1902년(광무6), 매천이 48세 되던 해에 지은 시들이다.

21)인일(人日):음력 1월 7일을 말하는 것으로, 이날 일곱 가지 나물로 국을 끓여 먹고, 사람 모양의 각종 장식물을 만들어 병풍에 붙이는 등의 풍습이 있었다. 1월 1일부터 6일까지 각각 차례로 닭, 개, 양, 돼지, 소, 말을 점치고 나서, 7일에 사람을 점치고 8일에 곡식을 점치는데, 기후가 청명(晴明)하고 온화하면 번식(繁殖)과 안태(安泰)를 미리 알 수 있고, 기후가 음한(陰寒)하고 참렬(慘烈)하면 질병(疾病)과 쇠모(衰耗)를 미리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동방삭(東方朔)의 점서(占書)에 있었다고 한다. 事物紀原 卷1 天地生植部 人日

22)정관(貞觀):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로서, 서기 627년부터 649년까지의 재임 기간에 사용되었다. 태종은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위징(魏徵)과 같은 명신들의 보필을 받아,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각종 율령(律令)을 정비하였으며, 돌궐(突厥)과 토번(吐蕃)까지도 아우르는 성대를 이루었는데, 이때의 훌륭한 치적을 가리켜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한다.

23)십점(十漸):정사를 하는 데 있어서 저지르기 쉬운 열 가지의 잘못될 조짐이라는 뜻으로, 당(唐)나라의 명재상인 위징이 태종에게 이런 내용의 주소(奏疏)를 올렸다. 新唐書 卷97 魏徵列傳

24)비를 홀연 엎었다가:당나라 태종 17년(643)에 위징이 죽자 태종이 직접 비문(碑文)을 지어 내릴 정도로 애통해했는데, 세월이 흘러 위징이 천거한 후군집(侯君集)이 반역을 한 일 등이 있게 되자 차츰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여 그 비석을 엎어뜨렸던 고사를 가리킨다. 그러나 태종은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를 뉘우치면서, “만약 위징이 살아 있었더라면, 내가 이 전쟁을 일으키게 했겠느냐.” 하고는 그 비석을 다시 세우게 하였다. 新唐書 卷97 魏徵列傳 通鑑總類 卷10下 魏徴坐繆擧外碑

25)위현성(魏玄成):현성은 위징의 자(字)이다.

26)초은가라도 불러 볼:진(晉)나라의 명필 왕휘지(王徽之)가 산음(山陰)에 살 때, 큰 눈이 내린 밤중에 잠이 깨었는데, 달빛이 맑고 사방이 온통 희므로 그 아름다운 경치에 절로 흥이나 홀로 술을 마시면서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읊었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80 王徽之列傳

27)항아(嫦娥):중국 고대 전설의 여신으로, 달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전설에 의하면 활을 잘 쏘는 후예(后羿)의 아내였는데, 남편이 서왕모(西王母)에게서 훔쳐 온 불사약을 몰래 훔쳐 먹었다가 발각되어 달로 도망쳤다고 한다. 淮南子 卷6 覽冥訓

28)도끼질하는 이:당(唐)나라의 단성식(段成式)이 지은 유양잡조(酉陽雜爼) 권1 천지(天咫)에 “달의 계수나무는 높이가 500장(丈)인데 그 아래에서 어떤 사람이 항상 도끼로 찍어 대는데, 나무는 상처가 났다가 곧 다시 아문다. 그 사람의 성은 오(吳)이고, 이름은 강서(剛西)로, 선학(仙學)을 배우다가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귀양을 보내 나무를 벌채하게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29)등석(燈夕):일반적으로 정월 대보름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지만, 이날 행하는 관등놀이를 말하기도 한다.

30)역후(驛堠):이정표 삼아 도로 가에 세웠던 토단(土壇)이다.

31)불국(佛國):부처가 사는 극락정토(極樂淨土)를 가리킨다.

32)붉은……듯하고:전국 시대 제(齊)나라 혜왕(惠王) 때의 장수 전단(田單)은 즉묵(卽墨)에서 연(燕)나라 군대를 물리치기 위하여 한밤중에 소 1000여 마리에게 붉은 비단옷을 입히고 오채(五彩)의 용무늬를 그린 뒤 그 뿔에 칼날을 묶고 꼬리에도 기름 먹인 갈대를 묶은 뒤 불을 붙여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33)옛 전적……태우고:우형(虞衡)은 고대 중국에서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을 관리하던 관원이다. 순(舜) 임금이 익(益)으로 하여금 우형의 직임을 맡게 하고 불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익이 산택(山澤)에 불을 질러 태워 버리자 인간에게 해를 끼치던 금수(禽獸)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었던 고사가 있다. 孟子 滕文公上

34)시경을……던지네:전조(田祖)는 농사를 관장하는 전설상의 신으로, 처음으로 농사를 짓는 법을 개발했던 신농씨를 가리킨다. 시경 보전(甫田)에서 전록(田祿)을 소유한 공경(公卿)이 농사에 힘써서 방사(方社)와 전조의 제사를 받드는 것을 노래하였다.

35)들불에도……않던가:당(唐)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부득고원초송별(賦得古原草送別)에, “무성한 저 언덕 위의 풀이여, 한 해에 한 번씩 났다가 시드는구나. 들불로 태워도 다 타지 않아 봄바람 불 때면 다시 생기네.[離離原上草 一嵗一枯榮 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 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36) 박석초 해우(朴石樵海友):자세한 인적사항은 미상이다.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선봉진정보첩(先鋒陣呈報牒)에 동학군을 토벌할 때 참여한 구례 지방의 유학(幼學)이라는 내용이 있다.

37)봄……던지고:비녀장은 수레의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고정하는 큰 못으로, 이것이 없으면 수레를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한나라 때 진준(陳遵)은 술을 매우 좋아하여 말술을 마시곤 하였는데, 빈객들과 술을 마실 때면 도중에 떠나가지 못하도록 대문을 걸어 잠그고 비녀장을 빼서 우물 속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漢書 卷92 游俠傳 陳遵

38)사시(私謚):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붙여 주는 시호가 아니라, 사사로이 붙이는 시호이다. 나라가 망하였거나 시대 상황이 맞지 않아 시호가 내려지지 않았을 때는 저명한 학자나 문인, 친구 또는 개인, 단체 등이 자발적으로 시호를 붙여 주는 경우도 있었다. 진(晉)나라 때의 시인인 도잠(陶潛)의 사시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39)맹박(孟博):후한 때의 인물인 범방(范滂)의 자(字)이다. 청렴하고 지조 있는 관원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뜻있는 선비들과 친교를 맺고 환관들의 전횡에 반대하였다. 그 뒤 환관들이 이응(李膺) 등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관원을 일망타진하고자 당파를 조장한다는 죄목으로 이른바 ‘당고(黨錮)의 화(禍)’를 일으켰을 때, 당인으로 지목되어 33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范滂

40)맹박이……뜻:천하의 어지러움을 구제할 뜻을 말한다. 기주(冀州)에 기황(饑荒)이 들어 도적떼가 일어났을 때, 조정에서는 범방이 적임자라고 하여 청조사(清詔使)에 임명하자,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면서 강개하여 천하를 맑게 하겠다는 뜻을 품었다. 기주의 경계에 들어서자 그 고을 수령이 스스로 자신이 탐관오리임을 아는지라 멀리서 모습만 보고도 수령의 자리를 내어놓고 떠나갔다고 한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范滂

41)비파……사람:실정에 어두운 사람을 가리킨다. 제(齊)나라 임금이 우(竽)라는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을 좋아했는데, 어떤 사람이 자신의 능숙한 비파 연주 솜씨라면 제나라에서 벼슬자리를 얻을 수 있겠다고 여겨 비파를 안고 가서 대궐 앞에서 3년을 기다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임금은 우라는 악기를 좋아하는데, 비파 연주 솜씨가 아무리 뛰어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라는 비웃음만 샀다는 우화가 있다. 唐宋八大家文鈔 卷5 答陳生書

42)창자는……씻겼고:허기를 면하기 위해 매일 물로 배를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43) 눈썹은 …… 찡그렸네:아랫사람을 대할 때 신상필벌을 엄격하게 함으로써 아랫사람이 인정에 끌려 법도를 어기도록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전국 시대 한(韓)나라 소후(昭侯)가 그의 시자(侍者)에게 찢어진 바지를 주면서 잘 보관해 두라고 하자, 그 시자가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없는 자에게 주지 않고 왜 보관해 두라고 합니까?” 하였는데, 소후는 “밝은 임금은 신하에 대해서 한 번 웃고 한 번 찡그리는 것[一嚬一笑]조차도 아껴야 하는 법인데, 하물며 입다가 헤진 바지[弊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韓非子 內儲說上》

44)진동(陳東)의 상소:진동은 중국 북송(北宋) 흠종(欽宗) 연간의 태학생(太學生)으로, 자는 소양(少陽)이다. 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舊法黨)을 몰아내고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다시 시행하는 등 전횡을 일삼던 채경(蔡京) 등 6인을 육적(六賊)으로 지목하여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 금(金)나라 군대가 침입해 왔을 때 대항을 주장했던 이강(李綱)이 파직되자, 태학생들을 이끌고 상소를 올려 그의 복직을 청하기도 하였다. 宋史 卷455 忠義列傳 陳東

45)기구(耆舊):나이가 많고 덕이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습착치(習鑿齒)가 양양(襄陽)에 살았던 방덕공(龐德公)을 위시한 여러 고사(高士)의 전기를 모아 양양기구전(襄陽耆舊傳)을 지었던 예가 있다.

46) 峋:대본에는 ‘岣’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매천집정오는 번역 대본인 한국문집총간 제348집에 수록된 매천집7 뒤에 첨부되어 있다.

47)못……흩어지고:어진 수령이 사라지니, 백성이 슬퍼하며 의지할 곳을 찾아 흩어진다는 의미이다. 시경 홍안(鴻鴈)에, “기러기들 날아와서, 못 가운데에 앉았도다.[鴻鴈于飛 集于中澤]”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석에, “유민(流民)들이 기러기들이 못 가운데 앉아 있다고 스스로 말하여, 자기들이 살 곳을 얻어 집을 짓고 거주하는 것을 흥(興)한 것이다.” 하였다.

48)여우와……돌아오네:억눌려 있던 소인배가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를 친다는 말로, 여우와 토끼, 귀신은 모두 교활하고 음흉한 무리를 가리킨다.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억석(憶昔)이라는 시에 “낙양의 궁전은 불타서 없어졌고, 종묘에선 새로 여우 굴, 토끼 굴을 제거하네.[洛陽宮殿燒焚盡 宗廟新除狐兎穴]” 하였다. 시경 북풍(北風)에, “붉지 않다고 여우가 아닐 것이며, 검지 않다고 까마귀가 아닐 것인가.[莫赤匪狐 莫黑匪烏]” 하였는데, 주희의 주석에, “모두 불길한 동물이니,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는 바이다. 보이는 것이 모두 이러한 것들이라면 나라가 장차 위태롭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49)곽원진(郭元振):원진은 당나라 때의 명장이자 재상, 시인인 곽진(郭震, 656~713)의 자이다.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었다. 16살 때 태학생이 되었고,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통천위(通泉尉)가 되었다. 무후(武后)가 그가 지은 보검편(寶劍篇)을 읽어 보고는 크게 칭찬을 하였다. 양주 도독(凉州都督), 삭방군대총관(朔方軍大總管), 병부 상서(兵部尙書) 등을 지내면서 많은 공적을 이루었으며, 대국공(代國公)에 봉해졌다. 명황(明皇)이 여산(驪山)에서 강무(講武)할 때 군용(軍容)이 정비되지 않았다고 하여 신주(新州)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요주 사마(饒州司馬)로 부임하는 중에 병으로 죽었다. 전당시(全唐诗)전당문(全唐文)에 약간의 저작이 전한다. 新唐書 卷122 郭元振列傳

50)곽원진……어려웠으니:장사를 치를 수 있도록 비용을 대 주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다는 말인 듯하다. 곽진이 태학생일 때 집에서 거액의 학자금을 보내왔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 “5세(世)째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돈을 좀 빌려 주십시오.” 하자, 전혀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이 선뜻 빌려 주면서 그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22 郭元振列傳

51)유계(遺戒)가……미쳤구나:유계는 죽기 전에 남긴 훈계로, 여기서는 송(宋)나라 경문공(景文公)의 유계를 가리킨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집안 형편에 맞게 상례를 치르게 하였는데, 상복을 새로 마련하는 대신 평소에 입던 옷을 깨끗하게 빨아서 입히고, 관은 잡목을 쓰게 하였다. 또한 나라와 백성에게 공을 세운 바가 없으니 시호(諡號)나 증직(贈職)을 받으려 하지 말고, 대가에게 비문(碑文)을 지어 달라고 청하지 말며, 불가(佛家)나 도가(道歌)의 제례 의식을 행하지 말게 하였다. 여기서는 박해우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저절로 유계처럼 검소하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 듯하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51 景文遺戒

52)자손……계책:남원의 몰락한 양반으로 세거해 오던 매천의 집안은 조부인 황직(黃樴)에 이르러 전조화식(佃組貨殖)으로 많은 재산을 마련한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으며, 매천 또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梅泉集 卷6 王考手蹟跋

53)초(楚)나라의 웅역(熊繹):매천의 조부가 중시조에 해당한다는 의미이다. 웅역은 성왕(成王) 때 처음으로 초나라의 제후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초나라는 전욱(顓頊)의 후예로, 중간에 주나라 문왕(文王)에게 중용을 받았던 죽웅(鬻熊)이라는 자도 있었으나, 웅역에 이르러 비로소 제후가 되었으므로 웅역을 시조로 삼았다. 史記 卷40 楚世

54)필로(蓽路):땔감을 싣는 수레이다. 웅역이 처음 초(楚)나라 제후로 봉해졌을 때 그 지역이 궁벽한 형산(荆山) 쪽에 치우쳐 있어서 땔감을 실은 수레를 몰고 남루한 옷을 입은 채 초야에서 근검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40 楚世家

55)돌이……바라네:형식적인 비석보다는 정성을 기울이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시경 백주(柏舟)에 “내 마음은 돌이 아니라 굴릴 수 없고, 내 마음은 자리가 아니라 말 수가 없네.[我心匪石 不可轉也 我心匪席 不可卷也]” 하였고, 주희의 주석에 “돌이 비록 견고하지만 굴릴 수가 있고 돗자리가 비록 평평하지만 말 수가 있으니, 내 마음의 견고하고 평평함이 돌이나 돗자리보다 더하다는 말이다.” 하였다.

56)임 충민(林忠愍):충민은 조선 중기의 명장인 임경업(林慶業, 1594〜1646)의 시호이다. 자는 영백(英伯)이고, 호는 고송(孤松)이며, 본관은 평택(平澤)이다. 1618년(광해군10)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 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이 되었다. 1630년 평양 중군(平壤中軍)으로서 가도(椵島)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都督) 유흥치(劉興治)의 군대가 준동하는 것을 막았고, 공유덕(孔有德) 등 명나라의 반도(叛徒)를 토벌하여 명나라로부터 총병(摠兵) 벼슬을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산성을 굳게 지켜 적이 그곳을 피해서 가게 만들었으며, 청으로 돌아가던 요퇴(要魋)를 압록강에서 궤멸하고 잡혀가던 우리 백성을 구해 내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1640년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있을 때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주사 상장(舟師上將)으로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으나, 명군과 내통하여 청군에 대항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도중에 탈출하여 명나라로 망명한 후, 명군의 총병이 되어 청나라를 공격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이때 좌의정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에 연루설이 나돌아 청나라에서 송환되어 인조의 친국(親鞫)을 받다가 김자점(金自點)의 밀명을 받은 형리(刑吏)에게 장살(杖殺)되었다.

57)영당(影堂):초상화를 모신 사당을 말하는데, 교촌리 향교 옆 임경업을 모신 충민사(忠愍祠)를 말한다.

58)부사(浮槎):전남 순천시 낙안(樂安)의 다른 이름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0 全羅道 樂安郡 낙안의 석성(石城)은 임경업이 이곳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쌓은 것이라고 한다.

59)천랑(天狼):침략을 담당하는 별 이름으로, 적군이나 오랑캐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60)삼호(三戶)가 끝내 망진(亡秦)함을:청(淸)나라가 망하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 말엽에 진(秦)나라에서 초(楚)나라 회왕(懷王)을 속여서 초청한 뒤 억류하다가 죽이자, 초나라의 음양가(陰陽家) 남공(南公)이 “초나라에 3호만 남아 있어도 진나라를 멸망시킬 나라는 반드시 초나라일 것이다.[楚雖三戶 亡秦必楚也]” 하였는데, 과연 뒤에 초나라의 항우(項羽)가 삼호진(三戶津)을 건너와서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史記 卷7 項羽本紀

61) 여도(呂島):지금의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로 여도진(呂島鎭)이 있던 곳인데, 지금도 여도진성지(呂島鎭城址)가 남아 있다.

62)서양천 주보(徐養泉周輔):서주보의 자세한 인적 사항은 미상이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 제용감(濟用監)의 주부(主簿)로 있다가 10월 정변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는 내용이 있고, 운양집(雲養集)에는 화서양천참서(和徐養泉參書)라는 시가 있으며, 명미당집(明美堂集)에는 천향거사(泉香居士)라고 지칭하는 내용이 있다.

63) 서산(西山):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에 있는 팔영산(八影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도진성(呂島鎭城)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그렇게 불렸다.

64)규원(葵園):조선 말기의 학자인 정병조(鄭丙朝, 1863∼1945)를 가리킨다. 자는 관경(寬卿)이고, 호는 규원(葵園)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정만조(鄭萬朝)의 아우이다. 1882년(고종19)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894년에 동궁 시종관이 되었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 때 탄핵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蝟島)로 옮겨졌다가, 1907년에 특사로 풀려났다. 그 뒤 중추원의 촉탁으로 조선사(朝鮮史)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문집에 녹어산관집(漉魚山館集)이 있다. 당시 지도(智島)에는 규원의 형 정만조가 유배되어 있었다. 매천의 착오인 듯하다.

65)유랑(庾郞)은……견뎠으니:유랑은 남제(南齊) 때의 유고지(庾杲之)를 말하고, 삼구(三九)는 세 가지 부추[韮] 반찬을 말한다. 유고지는 매우 청빈하여 부추 나물 세 가지만 먹고 살았는데, 임방(任昉)이라는 사람이 장난삼아 말하기를, “누가 유랑더러 가난하다고 하는가. 어채(魚菜)를 항상 27가지나 먹는다오.” 한 데서 온 말이다. 세 가지를 27가지라고 한 이유는, ‘구(韮)’ 자의 음이 ‘구(九)’ 자와 같으므로 숫자로 치환하여 3에다 9를 곱하였기 때문이다. 南齊書 卷34 庾杲之列傳

66)파로(坡老)는……얘기했나:평소에 귀신에 관한 이야기 같은 농담을 즐겼다는 말이다. 파로는 송(宋)나라 때의 대문호이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동파(東坡)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소식이 유배를 당해 황주(黄州) 및 영외(嶺外)에 있을 때, 매일 같이 객들과 해학적인 이야기를 하기를 즐겼는데, 잘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귀신 이야기라도 지어서 하라고 권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少室山房筆叢正集 卷20》 《何氏語林 卷11

67)창려(昌黎)는……찾았었지:창려는 당(唐)나라의 대문호(大文豪)로서, 당송팔대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한유(韓愈)의 호이다. 자는 퇴지(退之)이다. 평소에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리는 등 극렬하게 불교를 배척하던 그는 황제의 미움을 받아 조주(潮州)의 자사로 좌천되었는데, 그곳 축융봉(祝融峯)에서 도를 닦고 있던 태전 선사(太顚禪師)를 만나 보고는 그의 높은 도력과 인품에 매료되어 깊은 교분을 쌓았다. 그로 인해 송(宋)나라의 성리학자 주돈이(周敦頤)는 제태전당벽(題太顛堂壁)이라는 시에서, “퇴지는 스스로 태전이 공자와 같다 하니, 원도(原道) 지어 불교, 도교 깊이 배척한 건 거짓이었나. 모르겠네, 태전의 어떤 면이 닮았기에, 정중한 여러 통 편지에다 옷까지 남겼었나.[退之自謂如夫子 原道深排釋老非 不識太顛何似者 數書珍重更留衣]” 하였다. 周元公集 卷2

68)수후(水候):해상을 관할하는 군진의 초소인 듯하나, 정확한 근거는 미상이다. 다만 1682년(숙종8)에 지도진(智島鎭)이 설치된 적이 있고, 매천이 지도를 향하면서 지은 발학포지당산진(發鶴浦至糖山津) 시에 “오래된 두 봉화대 솔숲 사이에 누워 있네.[年深雙堠臥松間]”라는 구절이 있는 것에 근거하여, ‘候’를 ‘堠’의 오자로 보아 해변에 세운 봉화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69) 경당(鯨塘):매천후집(梅泉後集) 권2의 시 제목에, “승평(昇平) 낙주(樂州)의 경계에 바다를 막아 저수지로 변한 곳이 있는데, ‘경당’이라고 한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천시 낙안면 인근의 저수지 이름인 듯하다.

70)구봉갑(邱逢甲)의 시:구봉갑(1864~1912)은 청나라 말기의 애국시인으로, 대만성 출신이며, 1889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다. 1895년 청일전쟁(淸日戰爭)의 패배로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으면서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기로 하자, 격분하여 조직적인 반항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만을 빼앗기는 현실을 슬퍼하며 지은 춘수(春愁) 등의 애국적인 시가 유명하다. 매천이 차운한 시는 그의 시집 영운해일루시초(嶺雲海日樓詩鈔)에 실려 있는, 동산감추사 차강보애중한제벽운(東山感秋詞次康步崖中翰題壁韻)>, <동산감춘시 차기해감추운(東山感春詩次己亥感秋韻)>, <세모감회 차감춘운(歲暮感懷次感春韻)>을 가리킨다.

71)상봉(桑蓬):상호봉시(桑弧蓬矢)의 준말로, 보통은 사내아이를 얻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남아로서의 원대한 포부를 펼쳐 보는 것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内則)에, “국군(國君)의 세자(世子)가 나면, 사인(射人)이 뽕나무 활[桑弧]에 쑥대 살[蓬矢] 여섯 개를 천지 사방으로 쏜다.” 하였고, 그 주에 “천지 사방은 남자가 일할 곳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72)괴안(槐安):순우분(淳于棼)이란 사람이 꿈속에서 괴안국에 가서 공주에게 장가들어 남가 태수(南柯太守)를 지내는 등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마당가 괴화나무[槐] 밑동에 개미굴이 있고 남쪽 가지에는 개미 떼가 몰려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인생이 덧없는 한때의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할 때 쓰이는 고사로, 당(唐)나라 이공좌(李公佐)가 지은 남가기(南柯記)에서 나왔다.

73)차례로:대본에는 ‘次茅’로 되어 있으나, 뜻이 통하지 않아 ‘茅’를 ‘第’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74)조공(曹公):매실을 가리킨다. 후한 말엽에 조조(曹操)가 군대를 거느리고 행군하던 중에 길을 잃었는데, 부하 군사들이 모두 갈증으로 괴로워하였으므로, 거짓으로 “이 산을 넘어가면 매림(梅林)이 있다.”라고 하자 군사들이 매실 생각에 입에 침이 돌아 갈증을 면했다는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假譎

75)청화(淸和):음력 4월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76)유당(酉堂):한말의 시인인 윤종균(尹鍾均, 1861〜1940)의 호이다. 자는 태경(泰卿)이고, 본관은 해남(海南)이다. 전남 순천(順天) 출생으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시 창작에 몰두하였다. 1890년(고종27)부터 매천에게서 율시(律詩)를 배워, 매천시파(梅泉詩派)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1906년 순천 승명학교(昇明學校)에서 교편을 잡았고, 1913년 ‘난국음사(蘭菊吟社)’라는 시 모임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저서로 유당시집(酉堂詩集)이 있다.

77)봉천암(鳳泉庵):전남 구례군 화엄사의 암자 이름이다.

78)유 수주(劉隨州):당나라 때의 시인인 유장경(劉長卿, 709〜780)을 가리킨다. 자는 문방(文房)이고, 지금의 중국 하북성 하간현(河間縣) 사람이다. 733년에 진사가 되었다. 권귀들의 미움을 받아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나 남파 현위(南巴縣尉)를 지냈으며, 수주 자사로 재임 중에 72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시어가 정련되고 구의(句意)가 청신(淸新)하였으며, 오언율시에 특히 능하여 오언장성(五言長城)이라고 자칭하였다. 유수주집(劉随州集)이 전한다.

79) 달빛……말라:달빛 좋아 흥취가 이는 날이면 가까운 곳에 얼마든지 걸어서 갈 수 있는 절이 있고 벗이 있으니, 꿈에서만 그리지 말고 찾아 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승천은 현재 중국의 호북성(湖北省) 황강(黃岡) 지역에 있는 승천사(承天寺)라는 절이다. 송(宋)나라의 대문호인 소식(蘇軾)이 황주(黃州)로 좌천되었을 때 지은 기승천사야유(記承天寺夜遊)라는 글에 “옷을 벗고 자려는데 달빛이 창에 들어오기에 흔쾌히 일어나 걸었다. 생각해 보니 함께 즐길 사람이 없는지라, 마침내 승천사에 이르러 장회민(張懷民)을 찾았다. 회민 역시 아직 잠들지 않고 있어서 함께 뜰 안을 거닐었다.…… 어느 밤인들 달이 없겠는가마는, 우리 두 사람처럼 한가한 사람들이 많지 않을 따름이니라.” 하였다. 東坡全集 卷101 志林55 記遊

80)보제루(普濟樓):전남 구례군 화엄사에 있는 누대 이름으로, 승려나 신도들의 집회에 이용되는 건물이다.

81)의관(議官) 고광문(高光文):1864〜1944. 한말 전라도 구례 연곡사(燕谷寺) 일대에서 활약했던 의병장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의 동생으로, 다른 이름은 광술(光述)이다. 형의 휘하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녹천의 군대가 패산하자, 1907년(융희1) 11월 남원(南原)에서 활동한 이평국(李平局)과 순창(淳昌)에서 활동한 강 사과(姜司果) 등과 함께 전남 곡성(谷城) 일대에서 군사를 규합하고 군수물자를 제조하는 등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하였다.

82)봉 토함:뛰어난 문재(文才)를 발휘하여 글을 짓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을 때, 봉황이 자신의 입 속에서 튀어나와 그 책 위에 내려앉는 꿈을 꾸었다는 고사가 있다. 西京雜記 卷2

83)용 논함:논설이 용고기[龍肉]의 맛과 같다는 뜻으로, 선가의 학설을 논하는 것을 말한다. 나호야록(羅湖野錄) 권3에, “진술고(陳述古)가 일찍이 동파(東坡)와 마주하여 선(禪)에 대해 논하였는데, 동파가 이르기를, ‘그 설이 마치 용고기를 먹는 것과 같다.’ 하고, 자신이 논한 것에 대해서는 마치 돼지고기를 먹으면 실로 훌륭하고 참으로 배가 부른 것과 같다고 하였다.” 하였다. 용고기는 후대에는 매우 가치가 있는 사물을 비유하는 말로 주로 쓰인다.

84)병 많던 심휴문(沈休文):휴문은 육조(六朝) 양(梁)나라 때의 저명한 문인이자 정치가였던 심약(沈約, 441〜513)의 자이다. 불교에 능통하였고, 음운(音韻)에 밝아 시의 팔병설(八病說)을 제창하여 근체시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궁체시(宮體詩)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일전(佚傳)된 청양기(靑陽記)라는 기록에 “심휴문은 바탕이 약하여 병이 많았다. 쌀알을 세어 가며 밥을 먹었고, 국은 한 숟가락 이상 먹지 않았다.” 하였다. 說郛 卷119下

85)위아(渭兒):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황위현(黃渭顯, 1891∼1966)을 가리킨다. 호는 난사(蘭史)이고,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매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중부(仲父)인 황련(黃璉)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919년 박경현(朴敬鉉)과 함께 3․1운동을 추진하였고 1927년부터는 구례신간회 활동을 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심한 고초를 당하였다. 1952년 광의면(光義面) 의장을 지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난죽사(蘭竹社)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동아일보 창간 20주년 기념 휘호를 쓰기도 하였다.

86)오시(烏枾):먹감을 가리키는 듯하다.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도문대작(屠門大嚼)에, “지리산(智異山)에서 난다. 검푸른 색에 둥글고 끝이 뾰족하다. 맛은 그런대로 좋으나 물기가 적다. 꼬챙이에 꿰어 말려 곶감으로 만들어 먹으면 더욱 좋다.” 하였다.

87) 봉정리(鳳亭里):전남 보성군 문덕면에 있다.

88)조인여(趙仁汝):인적 사항은 자세하지 않으나, 매천집(梅泉集) 권3에 송조원규인여귀근(送趙元奎仁汝歸覲)라는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인여는 조원규(趙元奎)의 자인 듯하다.

89)투할(投轄) 주인:투할은 수레가 움직일 수 없도록 비녀장을 빼서 우물에 던진다는 말이다. 43쪽 주37 참조.

90)단기처(斷機妻):길쌈하던 베틀의 베를 끊어 버리는 아내라는 뜻으로, 어진 아내를 가리키는 말이다. 악양자(樂羊子)가 공부하러 간 지 1년 만에 아내가 그리워 돌아오자, 처가 길쌈하던 것을 가리키며, “이 비단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자아낼 때부터 조그만 수고가 모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약 중간에 잘라 버린다면 비단은 완성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니, 양자가 그 말에 감동하여 7년 동안 돌아오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크게 성취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84 列女傳 樂羊子妻

91) 흉년을……캐묻고:속담에 “저녁노을이 고우면 가뭄이 든다.”, “저녁노을이 고우면 흉년이 든다.”고 한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인 듯하다. 원(元)나라 때 누원례(屢元禮)가 지은 전가오행(田家五行) <천문류(天文類) 논하(論霞)>에, “속담에 ‘아침저녁으로 놀이 지면 차(茶) 달일 물도 없게 된다.’ 하였으니, 가뭄을 주관하는 것이다. 이는 오래도록 비가 갤 노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92)다섯 마리 암탉:노인들이 먹을 육류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음을 말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다섯 마리의 암탉과 두 마리의 암퇘지가 새끼 칠 때를 놓치지 않게 하면, 노인들이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는 걱정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93)안우산(安牛山):조선 중기의 문신인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을 가리킨다. 자는 사언(士彦)이고, 호는 은봉(隱峯) 또는 우산이며,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았고, 정몽주(鄭夢周)와 조헌(趙憲)의 충절을 존모하였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광해군 때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등용하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전남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牛山里)에 은둔하면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효종이 즉위한 뒤 좌의정 조익(趙翼)의 천거로 공조 참의(工曹參議) 등을 지냈다. 저서에 은봉전서(隱峯全書)가 있다.

94)야사……하였네:안방준은 조선시대 의병사와 당쟁사 관련 저술을 많이 남겼는데, 진주서사(晉州敍事)를 비롯하여, 항의신편(抗義新編), 이대원전(李大源傳), 호남의록(湖南義錄), 삼원기사(三寃記事), 사우감계록(師友鑑戒錄), 혼정편록(混定編錄), 매환문답(買還問答), 기묘유적(己卯遺蹟), 노랄수사(老辣瀡辭) 등이 그것이다.

95)수옹(睡翁):송시열(宋時烈)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 1574〜1628)를 가리킨다. 자는 원유(元裕)이고, 호는 수옹(睡翁)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경헌(景獻)이다. 1617년(광해군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 유생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를 반대하여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었다가, 강릉 참봉(康陵參奉) 등을 지냈고, 정묘호란 때 화의가 성립되자 비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저서로 수옹일기(睡翁日記)가 있다. 안방준이 평소에 그의 인목대비에 대한 절의를 높이 인정하였고, 심지어 충효전가록(忠孝傳家錄)을 짓기까지 하였다.

96)동계(桐溪):조선 선조조(宣祖朝)의 문신인 정온(鄭蘊, 1569∼1641)이다.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 또는 고고자(鼓鼓子)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에 반대하였다가 고초를 겪었으며, 병자호란 때는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이루어지자 사직하고 덕유산(德裕山)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죽었다. 문집에 동계집(桐溪集)이 있다.

97) 동년(同年):과거에 함께 합격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제부용당계회도(題芙蓉堂契會圖)에 “팔방(八方)의 장보(章甫)를 모아서 하나의 과거장(科擧場)에서 선발하고 하나의 방(榜)에 기록하여, 동년(同年)이라 일컫고 형제라고 칭한다.” 하였다.

98) 평숙(平叔):언론인이자 교육자였던 송태회(宋泰會, 18721941)의 자이다. 호는 염재(念齋)이며, 전남 화순(和順) 출생이다. 1888년(고종25)에 진사시, 1900년 박사시(博士試)를 거쳐 성균관에서 수업하였다. 1901년부터 1907년까지 중국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활약하였다. 국권 피탈 후에는 낙향하여 1918년 전북 고창군(高敞郡)에 오산고보(吾山高普)를 설립, 학생들에게 민족 사상을 고취하였다.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는데, 순천의 송광사(松廣寺) 등지에 글씨 및 그림이 남아 있다.

99) 間:대본에는 ‘聞’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100)요갈(遼碣):발해(渤海)에 근접해 있는 요동(遼東)과 갈석(碣石) 지방을 아울러 일컫는 말로서, 송태회가 학문을 연구하던 곳을 가리킨다.

101)금초산(金焦山):중국 강소성(江蘇省) 진강시(鎭江市)에 있는 금산(金山)과 초산(焦山)을 가리키는 말이다.

102) 운곡(雲谷):지금의 전남 화순군 동면 운농리(雲農里), 속칭 운곡 마을을 가리킨다.

103) 조경선(曺敬善):당시 운곡 마을에 거주했던 조병선(曺秉善, 1853〜1923)을 가리키는 듯하다. 사마방목에 의하면 1885년(고종22)에 생원이 되었으며, 자는 경선(景善)이다.

104)상상(上庠):성균관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진사나 생원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105)함께 계해서(計偕書)를 지녔더니:함께 서울의 성균관에서 수학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매천은 1888년(고종25)에 성균관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다. 계해(計偕)는 지방의 관원이 회계를 보고하기 위해 중앙으로 올라갈 때, 지방의 우수한 인재가 서울의 최고 교육기관에서 다른 인재들과 함께 학업을 닦을 수 있도록 함께 데리고 가는 것을 말한다. 사기 권121 유림열전(儒林列傳)에 “합당한 자를 신중히 살핀 다음, 계리와 함께 태상(太常)으로 나아가 제자와 같이 수업하게 한다.” 하였고,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에 “계(計)는 회계 담당 관리[計吏]이고, 해(偕)는 함께 데리고 간다는 뜻으로, 계리와 함께 태상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의미이다.” 하였다.

106)오현당(五賢堂):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에 있는 광산 이씨의 재사(齋舍)로, 이선제(李先齊, 1390〜?), 이선제의 차남 이조원(李調元, 1433〜?), 이중호(李仲虎, 1512~1554), 이발(李潑, 1544〜1589), 이길(李洁, 1547〜1589)을 모신 곳이다. 1820년(순조20)에 강진의 수암서원(秀岩書院)에 이들을 배향하였는데 1868년(고종5)에 서원이 훼철되자, 이곳으로 옮겼다.

107)이남계(李南溪):남계는 이길의 호이다. 조선 선조 때 동인(東人)의 영수(領袖)였던 이발의 아우로서, 이발이 서인(西人)인 정철(鄭澈)과 대립하다가 1589년(선조22)의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제거될 때 함께 연루되어 멸문의 화를 당하였다.

108)송야(松爺)와 애상(厓相):송야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을, 애상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을 가리킨다.

109)누가 과연 원수이리:일반적으로 이발의 죽음이 정철에 의한 것이고, 유성룡은 이발을 구호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김장생(金長生)이 정철의 행장에서, “유성룡과 이양원(李陽元) 등 또한 그 노부인과 어린 아들을 어찌 살려 주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결국 구해 주지 못한 것은 사세(事勢)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발과 최영경(崔永慶)의 죽음을 모두 공에게 잘못을 돌리는 것은 어찌 편벽된 것이 아니겠는가.” 한 것이 그런 시각이다. 沙溪全書 卷9 松江鄭文淸公行錄

110) 厓대본에는 ‘崖’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기에 바로잡았다.

111) 나주(羅州)……토평비(討平碑):민종렬(閔種烈)에 대한 인적 사항은 자세하지 않다.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을 때 동학군에 대항하여 성을 굳게 지킨 공으로 호남 초토사(湖南招討使)에 임명된 사실이 고종실록에 보인다. 토평비는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를 가리키는 것으로, 동학군의 공격을 잘 막아 내어 궤멸시킨 민종렬의 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1895년(고종32)에 나주 관아 앞쪽에 세웠으며, 기우만(奇宇萬)이 비문을 지었다. 高宗實錄 32年 10月 28日

112)낭당(鋃鐺)……다급한데:낭당은 죄인을 묶어서 옥에 가둘 때 쓰는 쇠사슬이다. 나주 목사 민종렬과 담판을 벌였던 전봉준(全琫準)은 민종렬이 자신들의 요구를 끝내 거부하자 동학군에게 협조적이었던 전라 감사 김학진(金鶴鎭)을 사주하여 그의 파직을 청하는 요청을 조정에 하게 만들었고, 조정에서는 그의 청을 받아들여 파직시킨 뒤, 박세병(朴世秉)을 대신 나주 목사로 임명하였다.

113)금석(琴舃):거문고와 부석(鳧舃)으로, 지방 수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거문고와 관련해서는, 여씨춘추 찰현(察賢)에 “복자천(宓子賤)은 단보(單父)의 수령이 되어 거문고만 타고 당(堂)을 내려오지 않았으나 단보가 잘 다스려졌다.”라고 하였고, 송(宋)나라의 어진 재상인 조변(趙抃)이 지방 장관으로 있다가 임기가 차서 돌아올 때 처음에 가지고 갔던 거문고와 학 한 마리만 가지고 왔다는 고사가 있다. 宋史 巻316 趙抃列傳 부석과 관련해서는,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하동(河東) 사람 왕교(王喬)가 멀리 섭(葉) 땅의 수령이 되었는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레도 없이 대궐의 조회에 참석하므로 몰래 엿보게 하였는데, 오리 두 마리만이 동남쪽에서 날아오기에 그물로 잡아 보니 단지 신발 한 짝만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82 方術列傳 王喬

114)벼슬……더디네:민종렬이 파직을 당했으나 백성의 반대로 떠나가지 못하고, 결국 그대로 유임되었던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매천의 오하기문(梧下記聞)에, “민종렬이 파면을 당하자, 아전과 백성이 길을 막고 가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다.

115)임백호(林白湖):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임제(林悌, 1549〜1587)를 가리킨다. 자는 자순(子順)이고, 호는 백호(白湖) 또는 겸재(謙齋)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어, 1577년(선조10)에 문과에 급제했다. 예조 정랑을 지냈다. 스승인 성운(成運)이 죽자 벼슬을 멀리한 채 전국을 떠돌며 음풍농월하다가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호방한 기질과 뛰어난 시로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추앙을 받았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원생몽유록(元生夢游錄) 등의 한문 소설과 시조 및 700여 수의 한시가 전한다. 문집으로는 백호집(白湖集)이 있다.

116)용천(龍川):중국 남송(南宋) 때의 학자인 진량(陳亮)의 호이다. 자는 동보(同甫)이고,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효종(孝宗) 2년(1164)에 금나라와 화의를 맺을 때 홀로 반대하면서 중흥오론(中興五論)을 지어 바치는 등, 여섯 번이나 황제에게 상서하여 외침을 극복하고 나라를 중흥시킬 계책을 건의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宋史 卷436 儒林列傳 陳亮 宋名臣言行錄 外集 卷16

117)두목(杜牧):중국 당(唐)나라 때의 시인으로, 자는 목지(牧之)이고, 호는 번천거사(樊川居士)이다. 이상은(李商隱)과 함께 ‘소이두(小李杜)’라고 불릴 정도로 시에 조예가 깊었다. 고시(古詩)는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의 영향을 받아 사회와 정치에 관한 내용이 많다. 장편시는 필력이 웅장하고 장법(章法)이 엄정하며 감개가 깊다. 근체시(近體詩)는 서정적이며 풍경을 읊은 것이 많은데 격조가 청신(淸新)하고 감정이 완곡하고도 간명하다. 문집으로는 번천문집(樊川文集)이 있다.

118)영웅이여……드높나니:고종(高宗)이 1897년(광무1)에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것을 가리킨다. 임제는 병이 위독하여 장차 죽게 되었을 때 아들들이 슬피 울부짖자, “사해(四海) 안의 여러 나라 중에 황제를 칭해 보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예부터 그렇지 못했다. 이처럼 누추한 나라에 태어난 주제에 그 죽음이 애석할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면서, 곡을 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星湖僿說 卷9 善戱謔

119) 학포(鶴浦):전남 함평군 엄다면 학야리(鶴也里)로, 이곳에서 함평천과 영산강을 경유하여 신안군 지도읍 당산나루로 갈 수 있었다.

120) 철선(鐵線)이……웅웅대니:전봇대에서 웅웅대는 소리가 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121)경작을……남았으니:서로 품앗이로 도와 가며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고대 중국의 정전제(井田制)는 토지의 한 구역을 ‘정(井)’ 자로 9등분하여 8호의 농가가 각각 한 구역씩 경작하고, 가운데 있는 한 구역은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국가에 조세로 바치는 토지제도였는데, 그 가운데 토지가 바로 공전(公田)이다.

122) 울두홍(熨斗谼):울둘목의 한자 표기이며, 전남 해남군 화원반도(花源半島)와 진도(珍島) 사이에 있는 명량해협(鳴梁海峽)을 말한다. 경세유표(經世遺表) 군현분예(郡縣分隸)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힘을 입어서, 왜적이 울두홍을 넘지 못했다. 만약 그때에 왜적이 이곳을 넘었더라면 나주(羅州) 열두 섬이 맨 먼저 뱀과 돼지 같은 놈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123)김운양(金雲養):한말의 문신이자 개화사상가인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을 가리킨다. 자는 순경(洵卿)이고, 호는 운양(雲養)이며,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유신환(兪莘煥), 박규수(朴珪壽)의 문인이다. 1874년(고종11) 문과에 급제하였다. 영선사(領選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친청(親淸) 노선을 견지하였으며, 갑오경장에 관여하였다. 을미사변으로 탄핵을 받아 제주목(濟州牧)으로 종신 정배되었다가, 1901년 6월 다시 지도(智島)로 이배되었으며, 1907년 해금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해지자 기호학회(畿湖學會) 회장, 흥사단장(興士團長), 교육구락부(敎育俱樂部) 부장, 대동교총회(大同敎總會) 총장으로 활약하였다. 저서로는 운양집을 비롯하여, 임갑령고(壬甲零稿), 음청사(陰晴史) 등이 있다.

124)하탑(下榻):의자를 내려놓는다는 뜻으로, 특별히 마음에 맞는 손님을 후하게 예우하는 것을 가리킨다. 후한(後漢)의 진번(陳蕃)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으면서 다른 빈객은 일절 사절하고 서치(徐穉)가 올 때에만 특별히 의자를 내려놓았다가 그가 가면 다시 걸어 놓았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83 徐穉列傳

125) 저물녘……주고:진(晉)나라 환온(桓溫)이 중양절에 용산(龍山)에서 참모들과 모여 술을 마실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그가 중하게 여기던 참군(參軍) 맹가(孟嘉)의 모자를 떨어뜨렸다. 맹가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잠시 뒤 화장실에 가자, 환온은 그 모자를 주워 맹가의 자리에 가져다 두고 손성(孫盛)에게 시를 지어서 놀리게 했다. 맹가가 돌아와서 보고 웃으며 즉석에서 답시를 지었는데, 시가 매우 뛰어나서 모두가 탄복하였다. 晉書 卷98 王敦桓溫列傳

126)안호(鴈戶):정처 없이 떠도는 백성이 임시로 기거하는 집을 말한다. 正字通

127)갓끈……만하네:갓끈을 씻을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맑다는 의미이다.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으면 될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면 될 것이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 하였다.

128)김 장군(金將軍):조선 선조조의 의병장인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을 가리킨다. 자는 경수(景樹)이고,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광주 충효동 성안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3년(선조26)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후로 곽재우(郭再祐)와는 막역한 사이였으며, 함께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되어 30세의 젊은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가, 후에 신원되었다. 1965년 묘소를 이장할 때 시신과 의복이 썩지 않고 생시와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29) 석저장군(石底將軍):김덕령의 별호로서, 석저는 김덕령이 처음 기병한 곳으로 광주 충효동의 원래 이름이다.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왜놈들이 듣고 몹시 두려워하여 ‘석저장군’이라고 불렀으니, 대개 석저가 마을 이름인 줄 모르고 돌 밑에서 나온 줄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130) 포효하는……희롱하니:일찍이 대숲 속에 숨어 있는 맹호를 제거하기 위해, 먼저 활로 쏘아 화를 돋우고, 포효하며 달려 나오는 맹호를 창으로 찍어 버렸는데, 창이 맹호의 턱을 관통하여 그대로 땅에 박히는 바람에 맹호는 꼬리만 흔들 뿐 꼼짝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해동명신전(海東名臣傳)에 보인다.

131) 罵:대본에는 ‘買’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므로 바로잡았다.

132)섬멸한……먹기:짧은 시간에 수월하게 적을 섬멸할 수 있다는 의미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성공(成公) 2년 조에, “제후(齊侯)가 이르기를, ‘내가 우선 저들을 섬멸하고서 아침을 먹겠다.’ 하고, 말에 갑옷도 입히지 않은 채 내달렸다.” 하였다.

133)패금(貝錦):자개 무늬의 비단으로서, 시경 항백(巷伯)에 “조금 문채가 있는 것으로, 이 자개 무늬의 비단을 이루도다.[萋兮斐兮 成是貝錦]”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참소하는 사람이 남의 작은 잘못을 그럴듯하게 꾸며서 큰 죄가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을 가리킨다.

134) 서석산(瑞石山) 천주봉(天柱峯):서석산은 전남 광주의 무등산(無等山)을, 천주봉은 무등산의 입석대(立石臺)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일컫는다.

135) 용강(龍江):전남 광주 광산구의 황룡강(黃龍江)을 가리키는 것으로, 영산강의 제1지류이므로 영산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36) 왜……않았던고:한(漢)나라 고조(高祖) 때의 모신(謀臣)으로 큰 공을 세웠던 장량(張良)이 공신은 결국 토사구팽을 당한다는 이치를 간파하고 신선술을 익힌다는 핑계로 은퇴하여 숨어 살았던 것처럼 하지 않아서 결국 죽음을 당했다는 의미이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137)정 금남군(鄭錦南君):조선 인조(仁祖) 때의 무신(武臣)인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을 가리킨다.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하다가 이항복(李恒福)의 주선으로 학문을 배웠고, 그해 무과에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에 공을 세워 금남군에 봉해졌고, 1627년 정묘호란 때 부원수(副元帥)를 지냈다.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복서(卜筮)ㆍ의술(醫術) 등에 밝았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에 만운집(晩雲集),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금남집(錦南集) 등이 있다.

138)병등(兵燈)……잠들다가:정충신은 조부 때부터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이었고, 부(府)에 예속된 지인(知印)의 직책을 겸하고 있었다. 지인은 인장을 관리하는 천리(賤吏)이다.

139)풍운……올렸네:풍운은 난리를 뜻하니, 난리를 평정하여 조정에 천거되었음을 의미한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증헌납사기거전사인징(贈獻納使起居田舍人澄)이라는 시에서 자신을 천자에게 천거해 주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양웅에게 다시 하동부가 있으니, 오직 불고 불어 하늘 위로 올라가길 기다리네.[揚雄更有河東賦 唯待吹噓送上天]”라고 하였다.

140)권공(權公)이……앞섰으리라:권율이 이항복보다 먼저 정충신의 재능을 알아보았다는 말이다. 임진왜란 때 권율이 광주 목사(光州牧使)로서 군대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는데, 당시 17세였던 정충신이 적을 정탐하겠다고 자원하여 결국 임무를 완수하였으므로 권율이 크게 기이하게 여겼던 일을 가리킨다. 그 일이 있은 뒤, 선조(宣祖)의 행재소(行在所)에 보고를 올릴 때도 그를 믿고 맡겼다.

141)주문(朱門)과……이르렀네:화려한 명문가의 자손이 신분이 미천한 정충신과 어울려 지낸 것을 의미한다. 주문은 붉은색을 칠한 왕공(王公)이나 귀족(贵族)의 주택 대문을 말하고, 기맥(綺陌)은 번화한 도로나 풍경이 아름다운 교외의 도로를 말한다. 모두 신분이 귀한 대갓집과 도로를 가리킨다. 최장(崔張)의 최는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을 말하고,장은 장유(張維, 1587〜1638)를 말하는데, 이항복의 권유로 정충신과 교유를 맺었다.

142)사대부는……기승진(纪僧眞)일세:사대부는 남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제(齊)나라 무제(武帝) 때의 중서사인(中書舍人) 기승진이 사대부가 되고 싶어 무제에게 청하였는데, 무제가 “이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강효(江斆)에게 가보라.” 하므로, 강효에게 나아갔으나 그가 홀대하자, 승진이 기가 죽어 물러나 무제에게 고하기를, “사대부는 참으로 천자가 명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南史 卷36 江斆列傳

143)맹약……다투었네:맹약 먹물이 바랜다는 것은 공신으로서 맺은 맹약을 어기는 것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의 공신 이괄(李适, 1587∼1624)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역란을 일으킨 것을 가리킨다. 정충신은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황주와 서울 안산(鞍山)에서 이괄의 군대를 무찔러,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움으로써 진무 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144)남한의 일: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의해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측과 강화(講和)를 해서 훗날을 기약해야 한다는 측의 주장이 대립하다가 결국 강화론의 주장대로 항복한 일을 가리킨다.

145)완성(完城):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또는 창랑(滄浪)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38)에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해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에서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영의정으로서 각종 제도 개혁에 기여하였으며,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하였다. 양명학(陽明學)에도 조예가 있었다. 문집으로 지천집지천주차(遲川奏箚)가 있다. 척화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주장하여 당시는 물론 성리학적 명분론을 앞세우는 후세 사대부들의 비난을 받았다.

146)어장(魚麞)은……띠었네:임금으로부터 음식물이 내렸다는 뜻이다. 어장은 어물과 노루 고기로서 귀한 음식물을 가리킨다.

147)사후에는……못하였고:사후에 추증을 받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방간(方干)은 당(唐)나라 때의 시인으로, 자는 웅비(雄飛)이다. 시적인 재능이 출중하였으나, 언청이였던 탓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였고, 지인들이 여러 차례 조정에 추천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등용되지 못하였다. 죽은 지 10년 뒤에 재신(宰臣) 장문위(張文蔚)가 명유(名儒)로서 급제하지 못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5인을 추천할 때, 포함되어 급제를 하사받았다. 문인들이 현영선생(玄英先生)이라 사시(私諡)하였다. 御定全唐詩 卷648

148)풍연(馮衍):후한 초기의 사부가(辭賦家)로서, 자는 경통(敬通)이며,두릉(杜陵)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여러 책을 널리 탐독하였다. 행실이 개결하여 거취가 분명하였으나, 조정에서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여 은거한 채 시문을 지으며 일생을 보냈다. 後漢書 卷28 馮衍列傳

149)설탄(雪灘):설탄은 전북 남원군 대산면 섬진강 변의 지명이다.

150) 비 오듯……더하네: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151) 유당(酉堂):64쪽 주76 참조.

152)어느……뿐이네:인생이나 사업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로서, 여기서는 일정한 주거에 집착할 필요가 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澠池懷舊)라는 시에 “이 내 인생 가는 곳마다 그 무엇과 같을까, 나는 기러기가 눈 진창 위에 발자국 남김과 같으리라. 진창 위에 우연히 발자국을 남겼지만, 날아간 뒤에야 다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으랴.[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한 데서 온 말이다.

153)간전(艮田):전남 구례군의 섬진강과 백운산 자락 사이에 위치한 면 이름으로 만수동이 이곳에 있다.

154)형비(衡泌):형은 나무를 가로질러 만든 보잘것없는 문을, 비는 샘물을 말하는데, 안분자족(安分自足)하는 은자의 거처를 가리킨다. 은자가 은거하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경》 〈형문(衡門)이라는 시에서 유래하였다.

155)웃으며……하였다네:표은(豹隱)은 능력 있는 사람이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 도답자처(陶答子妻)에 “첩이 들으니 남산에 검은 표범이 있는데 안개비 속에서 이레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산 위에 가만히 있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털을 윤택하게 하여 문장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156) 아홉……먹네: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시문을 지어 주고받는 것을 의미한다. 한 쌍의 봉황은 매천 형제를 가리키고, 낭간(琅玕)은 봉황이 쪼아 먹는다는 죽실(竹實) 혹은 경실(瓊實)인데, 보통 아름다운 문장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157) 형제의……홀로이네:부모를 여의고 홀로 되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매천은 38세 되던 1892년(고종29)에 부친상을, 이듬해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158)오봉루(五鳳樓) 짓는 솜씨:훌륭한 문장 솜씨를 가리키는 말이다. 오봉루는 양(梁)나라 태조(太祖)가 낙양(洛陽)에 세운 높은 누각이다. 한포(韓浦)와 한계(韓洎) 형제는 송(宋)나라 때 문장으로 이름이 났었는데, 아우인 한계가 사람들에게 형의 문장 솜씨를 평하여 말하기를, “형의 문장은 허름한 초가집 같아서 겨우 비바람이나 가릴 뿐이지만, 나의 문장은 오봉루를 짓는 솜씨이다.” 하므로, 한포가 촉(蜀) 땅에서 생산되는 고급 종이를 주면서 시를 짓기를, “이 종이를 얻었으나 형은 전혀 무용하니, 네가 오봉루를 꾸미는 것이나 도우련다.[老兄得此全無用 助汝添修五鳳樓]” 하였던 고사가 있다. 古今事文類聚 别集 卷14

159)계묘고(癸卯稿):1903년(광무7), 매천이 49세 되던 해에 지은 시들이다.

160)위장(韋莊):당나라 말기의 시인으로, 자는 단기(端己)이다. 894년 과거에 급제하고, 3년 후 사천(四川)에서 모반한 왕건(王建)을 선무(宣撫)하기 위해 부관으로 파견되었다가 오히려 왕건이 전촉(前蜀)의 제위(帝位)에 오르자 그 재상이 되어 왕건을 돕다가 성도(成都)에서 죽었다. 당나라 말기 사회의 혼란상을 묘사하고 유랑생활의 감상을 읊은 시가 많다. 저서로 완화집(浣花集), 완화사집(浣花詞集), 편서로 우현집(又玄集)이 있다.

161)잔설(殘雪)을 막아 보는데:잔설은 백발을 말한다. 술기운을 빌려 시름을 잊어 머리가 세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로 보인다.

162)양주(羊酒):양고기와 술이라는 설도 있고, 유목민이 마시던 술 이름이라는 설도 있는데, 모두 자식을 낳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진귀하고 맛난 음식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사기 권93 노관열전(盧綰列傳)에 “고조와 노관이 같은 날 태어나니, 마을 사람들이 양주를 가지고 가서 양쪽 집안에 하례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163)웅비(熊羆)의 꿈:남아(男兒)가 태어날 꿈을 꾸는 것을 말한다. 시경 사간(斯干)에, “대인이 점을 치니, 곰 꿈은 남자를 낳을 상서이고, 뱀 꿈은 여자를 낳을 상서이다.[大人占之 維熊維羆 男子之祥 維虺維蛇 女子之祥]” 한 것에서 나왔다.

164)명장(名場)에……길었더니:오랜 세월 벼슬살이나 부귀영화를 추구하기 위해 세월을 보냈음을 뜻한다. 명장은 보통 과거 시험장을 가리키는데, 과거를 통하여 공명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165)계방(季方):매천의 막내아우인 황원(黃瑗, 18701944)의 자이다. 호는 석전(石田) 혹은 강호여인(江湖旅人)이며, 본관은 장수이다. 초년에는 김규석(金珪錫, 18431920)에게 수학하였으며, 17세 이후로는 형인 매천에게 시를 배웠다. 매천의 사후에 매천의 제자 왕수환(王粹煥) 등과 함께 매천의 유집을 정리한 뒤, 상해의 김택영(金澤榮)에게 보내 간행하여 비밀리에 국내로 들여와 배포하였다. 조카 황위현(黃渭顯)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44년에 순절하였다. 저서에 강호여인유고(江湖旅人遺稿)가 있다.

166)농와(弄瓦)의……꾸더니:황원이 그 전까지 딸만 3명이었던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농와는 길쌈할 때 쓰는 고드랫돌을 가지고 논다는 뜻으로, 여자아이를 낳는 것을 말한다. 시경 사간(斯干)에 “여자 아이를 낳아서는 땅에 재우며 포대기를 입히고 고드랫돌을 갖고 놀게 한다.[乃生女子 載寢之地 載衣之裼 載弄之瓦]” 하였다. 악몽(噩夢)은 놀라는 꿈이다.

167)광완(狂阮)이 소함(小咸)을 얻었구나:광완은 ‘미치광이 완적(阮籍)’이라는 뜻으로, 보통 숙부를 가리킨다. 소함은 ‘작은 완함(阮咸)’이라는 뜻으로, 조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중국의 위(魏)나라와 진(晉)나라의 정권교체기에 부패한 정치권력에 등을 돌리고 죽림(竹林)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중심인물인 완적과 완함이 숙질(叔姪) 관계였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49 阮籍列傳

168)문호(門弧):60쪽 주71 참조.

169)탕병(湯餠):국수를 말하는데, 고래로 아기가 출생한 지 3일째 되는 날 친척과 친지들이 모여 국수를 먹으며 장수를 축원해 주는 풍습이 있었다.

170)웅몽(熊夢):103쪽 주163 참조.

171)분매법(盆梅法):매화를 화분에서 키우는 방법을 뜻한다.

172)사민(四民):백성의 신분을 직업에 따라 분류한 것으로,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을 가리킨다.

173)뇌뢰(磊磊):기상이 우뚝하고 활달하며 뜻이 고상하고 원대하여 잗단 일에 구애받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뇌뢰(礌礌)라고도 쓴다. 진서(晉書) 권105 석륵재기(石勒載記)에 “대장부의 행사는 의당 뇌뢰락락하여 마치 일월처럼 명백해야 한다.[大丈夫行事 當礌礌落落 如日月皎然]”라고 하였다.

174)황황(遑遑):허둥지둥 바쁘게 세월을 보내는 것을 말한다.

175)책에서……보았던가:충신 또는 열사로 이름난 사람이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므로, 기록으로 전해지는 위인들의 행적들을 다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176)각촉(刻燭):초에 눈금을 그어 놓고 촛불이 그 눈금까지 타들어 가는 동안에 민첩하게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남제(南齊)의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이 어느 날 밤에 학사(學士)들을 모아 놓고 초에다 금을 그은 다음, 초가 그 금까지 타들어 가기 전에 사운시(四韻詩)를 짓게 하였는데, 소문염(蕭文琰)이 “그게 어려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고는, 사람을 시켜 동발(銅鉢)을 침과 동시에 운을 부르게 하고 그 동발의 음향이 사라지기 전에 시를 지었던 고사가 있다. 南史 卷59 王僧孺列傳

177)불죽(佛粥):석팔죽(腊八粥)이라고도 한다. 절에서 12월 8일에 석가모니의 성불(成佛)을 기념하기 위해 공양하는 죽을 말한다.

178)염대(粘對):근체시에서 평측을 살펴서 제자리에 맞게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염은 같은 구에서 평성은 평성끼리, 측성은 측성끼리 붙여서 사용하는 것을 말하고, 대는 짝이 되는 구에서 서로 반대가 되게 마주 놓는 기법을 말한다.

179)흡허(翕噓):도인법(導引法)에서 호흡하는 법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건강을 위한 일반적인 수련을 말한다.

180)영원(鴒原):형제 혹은 형제간의 정을 뜻한다. 시경 상체(常棣)에, “척령(鶺鴒)이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어려울 때에 돕도다.[脊令在原 兄弟急難]” 하였다.

181)세한(歲寒)의 정:일반적으로 세한은 변치 않는 절개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노년의 심사를 말한다.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시 호중송경십사군적광릉(湖中送敬十使君適廣陵)에, “젊을 때의 즐거움은 얻기 어렵고, 세한의 마음은 다른 것을 바라지 않네.[少壯樂難得 歲寒心匪他]” 하였다.

182) 대문 낮아:집이 가난하다는 의미이다. 송(宋)나라 시인 육유(陸游)의 동재잡서(東齋雜書)에 “문이 낮아 수레가 통과하지 못하고, 방이 좁아 무릎을 겨우 수용하네.[門低不通車 室隘劣容膝]” 하였다. 劍南詩藁 卷66

183)당풍(唐風) 첫째 장:당풍은 시경의 편명으로, 그 첫째 장인 실솔(蟋蟀)에는 1년 내내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다가 한 해가 저물 때가 되어서야 한껏 연회를 즐긴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184)뜬구름……멈추니:멀리 있는 친한 벗을 그리워할 때 쓰는 말이다. 진(晉)나라 시인 도잠(陶潛)의 시 정운(停雲) 서문에 “정운은 친우를 생각하는 것이다.[停雲 思親友也]” 하였다. 陶靖節集 卷1 停雲

185)붕우가……한가지네:벗들이 차츰 죽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표현한 말이다. 당(唐)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송장관부거시서(送張盥赴擧詩序)에 “옛날에 함께 급제했던 벗들과 어울려 노닐 적에는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서 마치 병풍처럼 대로(大路)를 휩쓸고 돌아다녔는데, 지금 와서는 마냥 쓸쓸하기가 새벽 별빛이 서로들 멀리서 바라보는 것 같기만 하다.[今來落落 如晨星之相望]”라고 하였다.

186) 晨星:대본에는 ‘晨皇’으로 되어 있는데, ‘皇’은 운자(韻字)로 볼 때 ‘星’의 오자가 분명하므로 바로잡았다.

187)노부(魯婦)처럼……불었고:자신의 역량으로는 어찌할 수 없지만, 나라의 현실을 걱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노(魯)나라 목공(穆公) 때 칠실(漆室)에 사는 한 노처녀가 기둥에 기대어 휘파람을 불었는데, 그 이웃 여자가 듣고서, “어째서 그리 슬피 휘파람을 부는가?”라고 물으니, “지금 임금은 늙었는데, 태자는 어린 것이 걱정이 되어서 그렇다.” 하였던 고사가 있다. 列女傳 漆室女

188)초신(楚臣)처럼……읊었네:10년 동안 나라의 운명을 근심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시문을 읊었다는 의미로서, 초신은 전국 시대 초나라의 충신이자 문장가인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그는 간신배의 모함으로 조정에서 쫓겨나 초야에 있으면서 나라를 걱정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의 사(辭)를 지어 초사(楚辭)라는 문체를 선구적으로 확립하였는데, 그의 어부사(漁父辭)에 “사람들은 모두 취하였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衆人皆醉 我獨醒]”라는 구가 있다.

189)유하(柳下):조선 후기의 시인인 홍세태(洪世泰, 1653∼1725)의 호이다. 자는 도장(道長)이고, 호는 창랑(滄浪) 또는 유하(柳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중인 신분이었으나, 시로 이름이 나서 김창협(金昌協) 등 사대부들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임준원(林俊元) 등 중인들과 시회를 함께 하며 교유하였다. 1675년(숙종1) 을묘 식년시에 잡과인 역과(譯科)에 응시, 한학관(漢學官)으로 뽑혀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제수되었으며, 30세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신분적인 좌절과 사회 부조리에 대한 반감을 시 속에 담았다. 위항문학의 발달에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는데, 중인층의 문학을 옹호하는 천기론(天機論)을 전개하였으며, 위항인의 시를 모아 해동유주(海東遺珠)라는 시선집을 간행하였다. 문집으로 유하집이 있다.

190)보리……쫓네:이 부분은 홍세태의 시 만월대(滿月臺)에 차운한 것이다.

191)포계(浦洎):송(宋)나라 때 문장으로 이름이 났던 한포(韓浦)와 한계(韓洎) 형제를 가리킨다. 101쪽 주158 참조.

192)기운(機雲):북조(北朝) 서진(西晋) 때의 저명한 시인인 육기(陸機)와 육운(陸雲) 형제를 가리킨다. 육기는 자가 사형(士衡)으로, 어려서부터 기이한 재주가 있어 문장이 세상의 으뜸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글씨에도 일가견이 있어 평복첩(平復帖)이라는 법첩을 남겼다. 육운은 자가 사룡(士龍)으로, 6살 때부터 시문을 지어, “이 아이는 용구(龍駒)가 아니면 봉추(鳯雛)일 것이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팔왕(八王)의 난 때 무함을 받아 형제가 함께 화를 당하였다. 晉書 卷54 陸機列傳, 陸雲列傳

193)방호(方壺):신선이 산다는 섬으로 방장(方丈)이라고도 한다.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다는 오도(五島)의 하나로 첫째는 대여(岱輿), 둘째는 원교(員嶠), 셋째는 방호, 넷째는 영주(瀛洲), 다섯째는 봉래(蓬萊)라 한다. 列子 湯問 여기서는 구례의 방호산(方壺山) 일대를 중의적으로 지칭한 듯하다. 방호산은 지리산의 이칭으로 사용되며, 매천은 이 방호산의 남쪽에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세워 후진을 양성한 적이 있다.

194)간학(艮壑):간전(艮田)의 골짜기라는 뜻으로 98쪽 주153 참조. 매천은 32세 되던 해에 광양(光陽)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195)만촉(蠻觸)의 싸움처럼:작은 이익이나 대단치 않은 일을 크게 여겨 서로 싸우는 것을 말한다. 장자 칙양(則陽)에, “달팽이의 왼쪽 뿔 위에 있는 나라를 촉씨(觸氏)라 하고, 달팽이의 오른쪽 뿔 위에 있는 나라를 만씨(蠻氏)라 한다. 때때로 서로 영토를 다투어 전쟁을 하는데, 쓰러진 시신이 수만 명이었다.” 하였다.

196)삼빙(三聘)의 예:임금이 현인을 초빙하는 예를 말한다. 탕 임금이 이윤(伊尹)을 세 차례 초빙하러 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孟子 萬章上

197)진동보(陳同甫):동보는 중국 남송(南宋) 때의 학자인 진량(陳亮)의 자이다. 81쪽 주116 참조.

198)걱정하여:이후 구절은 누락되어 있으며, 필사본(筆寫本) 매천집(梅泉集), 연활자본(鉛活字本) 매천시집(梅泉詩集), 석인본(石印本) 매천집 등 다른 판본들에는 이 시가 아예 빠져 있다. 홍세태(洪世泰)의 차담헌남한운(次澹軒南漢韻)이라는 시에 차운한 것이라면, 뒤쪽에 ‘心’, ‘岑’을 운자로 사용한 구절이 누락되었고, 일가정소집용음자(一架亭小集用陰字)라는 시에 차운한 것이라면, 뒤쪽에 ‘吟’, ‘心’을 운자로 사용한 구절이 누락되었다.

199)아침……차운하다:대본에는 이 제목이 없이 전편의 말미에 수록되어 있으나, 다른 판본들에서는 모두 조기차유하운(早起次柳下韻)이라는 제목을 달아 별도의 시로 분류하고 있는 것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200)갑진고(甲辰稿):1904년(광무8), 매천이 50세 되던 해에 지은 시들이다.

201)설경(舌耕):혀를 놀려 생계를 삼는다는 뜻으로, 후대에는 부지런히 독서하거나 강학하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때의 가규(賈逵)가 입으로 경문을 외워서 가르치자, 학생들이 원근을 가리지 않고 몰려드는 바람에 곡식이 창고에 가득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가규는 힘으로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혀로 경작을 한다.” 하였던 고사에서 나왔다. 拾遺記 卷6

202)소천(小川):조선 말기의 시인인 왕사찬(王師瓚, 1846〜1912)의 호이다. 자는 찬지(贊之)이고,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전남 구례에서 출생하였다. 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왕석보(王錫輔, 1816〜1868)의 아들이다.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면서 시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매천은 그를 ‘남방 3대 시인’으로 꼽았다. 저서로 이정집(梨亭集), 소천만고(小川漫稿)가 전한다.

203)추석(秋石):단약(丹藥)의 일종이다. 오줌을 받아 두었다가 물을 타서 100번 정도 휘저은 다음 찌꺼기를 가라앉혔다가 윗물을 버리는 작업을 10여 차례 하여 냄새가 사라지면 종이로 걸러 내어 볕에 말려 가루로 만들고, 첫아들을 낳은 산모의 젖으로 고루 버무려 고약 같이 만들어 햇볕에 말린다. 이렇게 9번을 되풀이하면 빛깔이 백분(白粉)처럼 되는데, 이것을 음련추석(陰煉秋石)이라고 한다. 음기를 기르고 화기를 내리는 데 효과가 있다. 醫學入門

204) 희양(曦陽):전라남도 광양(光陽)의 옛날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0 광양현(光陽縣) 조에, “본래 백제의 마로현(馬老縣)이던 것을 통일신라 때에 희양(晞陽)으로 고쳐서 승평군(昇平郡)에 소속시켰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하였다.

205) 상아(祥兒):매천의 장남인 황암현(黃巖顯, 1880∼1946)의 아명이 연아(鍊兒)이고, 매천속집(梅泉續集) 권1 답이덕일(答李德一)에 “큰아들은 임질(淋疾)이 걸려 한 달이 넘도록 차도가 없고, 상아(祥兒)는 한 번 간 뒤로 질탕하게 놀아 버리니, 참으로 꼴이 가증스럽다.”라고 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둘째 아들인 황위현(黃渭顯)의 아명인 듯하다.

206) 송평숙(宋平叔):송태회(宋泰會)이다. 76쪽 주98 참조.

207)좌사(左思):중국 서진(西晉)의 문장가로, 자는 태충(太冲)이다. 10년 동안 구상하여 삼도부(三都赋)를 지었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다가 당대의 문사 황보밀(皇甫謐)이 감탄하여 서문을 써 주자 너도나도 베끼는 바람에 낙양의 종이 값이 올랐다고 한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左思그는 생김새가 몹시 추하고 어눌하였는데, 한번은 반악(潘岳)이라는 미남자가 거리를 거닐 적에 여인들에게 환대를 받는 것을 보고, 그를 흉내 내어 거리를 걸어 보았으나, 여인들이 다투어 침을 뱉는 바람에 풀이 죽어 돌아왔다고 한다. 世說新語 容止

208)반육(潘陸):중국 서진의 문장가이자 미남자였던 반악(潘岳)과 육기(陸機)를 가리킨다. 모두 시문에 뛰어나 양(梁)나라 종영(鍾嶸)이 시품(詩品)에서, “육기(陸機)의 재주는 바다와 같고, 반악의 재주는 강과 같다.[陸才如海 潘才如江]”라고 평하였다.

209)진(晉)나라의 인물들:중국 위(魏)나라와 진나라가 교체되던 시기의 고사(高士)들인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 즉 혜강(稽康), 완적(阮籍), 완함(阮咸), 산도(山濤), 상수(向秀), 유령(劉伶), 왕융(王戎)을 가리킨다. 노장(老莊)의 정신을 숭상했던 이들은 항상 산음현(山陰縣)의 죽림에서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다.

210) 탕화(湯華):찻물이 끓을 때 생기는 꽃, 곧 거품을 말하는 것으로, 송(宋)나라의 문인이자 차 전문가인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 “말발(沫餑)은 탕(湯)의 꽃[華]이다. 꽃이 엷은 것을 ‘말(沫)’이라고 하고, 두터운 것을 ‘발(餑)’이라고 하며, 가벼운 것을 ‘화(花)’라고 한다.” 하였다.

211) 운각(雲脚):송나라 채양(蔡襄)이 지은 다록(茶錄)의 차말기[㸃茶] 조에, “차가 적고 탕이 많으면 구름[雲脚]처럼 흩어지고, 탕이 적고 차가 많으면 죽[粥面]처럼 엉긴다.” 하였다.

212)천협(川峽):중국의 익주(益州), 재주(梓州), 이주(利州), 기주(夔州) 등 천협사로(川峽四路)를 가리키는 것으로, 지금의 사천성이라는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213)노두(老杜)의 시내:노두는 당(唐)나라 때의 시인으로,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는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노두의 시내는 사천성(四川省) 성도시(成都市) 서쪽 교외 금강(錦江)의 지류인 완화계(浣花溪)를 말하는 것으로, 현실에 염증을 느낀 두보가 말년에 그 근처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성도는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차의 생산지이다.

214)삼소(三蘇)의 사당:삼소는 송(宋)나라 때의 문장가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일원이었던 소순(蘇洵)과 소식(蘇軾), 소철(蘇轍) 3부자(父子)를 가리킨다. 이들의 사당인 삼소사(三蘇祠)는 중국 사천성(四川省) 미산(眉山)에 있으며, 원래는 삼소가 살던 집인데, 명(明)나라 때 사당으로 고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두보의 사당이 있는 성도(成都)와는 약 80리 거리에 있다. 미산은 죽엽청차(竹葉靑茶)의 산지로 유명하다.

215)천태(天台) 안탕(鴈宕):중국 절강성에 있는 명산 이름이다. 이 구절부터 ‘종소문은 아이처럼 기를 만하네’까지는 매천이 중국에 가 있는 것을 상상하는 내용인 듯하다.

216)칠택(七澤) 삼상(三湘):중국 호남성에 있는 저수지와 강 이름이다.

217)서홍조(徐弘祖):1586〜1641. 명나라 말기의 지리학자로, 자는 진지(振之)이고,호는 하객(霞客)이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서(奇書) 읽기를 즐겼다. 고금의 사적(史籍), 도경(圖經), 지지(地志)를 널리 읽었다. 22세에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30년 동안 화북, 화동, 화남, 서남을 두루 답사하여 산수, 풍속, 산물 등 지리적인 특징을 자세히 살펴 기록으로 남겼다. 3차례나 도둑을 맞고 4차례나 양식이 떨어지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남긴 서하객유기(徐霞客游记)는 명대 지리학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218)종소문(宗少文):송나라 때의 서화가인 종병(宗炳)을 가리키는 말로, 소문(少文)은 그의 자이다. 금서(琴書)를 좋아하고 그림을 잘 그렸으며 노장학(老莊學)에 정통하였다. 형산(衡山)에 은거하면서 조정에서 불러도 일체 응하지 않았다. 노년에 병이 들어 명산을 유람하지 못하게 되자, 그동안 다녔던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 걸어 놓고는 누워서 감상하며 노닐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宋書 卷93 隱逸列傳 宗炳

219)신마(神馬):장자 대종사(大宗師)에 “조물자가 나의 꽁무니를 점점 변화시켜 수레바퀴로 만들고 나의 정신을 말로 변화시킬 경우, 내가 그 기회에 타고 노닌다면 어찌 다시 수레 같은 것이 필요하겠는가.[浸假而化予之尻以爲輪 以神爲馬 予因而乘之 豈更駕哉]”라고 하였다

220)호락(瓠落):장자(莊子)가 혜자(惠子)에게 말하기를 “지금 자네에겐 닷 섬들이 바가지가 있는데, 어찌하여 그것을 큰 통으로 만들어 강호에 띄울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것이 너무 커서 쓸 데가 없다고 걱정만 하는가?[今子有五石之瓠 何不慮以爲大樽而浮乎江湖 而憂其瓠落無所容]”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逍遙遊

221)황곡(黃鵠):속세를 벗어나 은거하는 높은 재주를 가진 현사(賢士)를 비유하는 말이다. 문선(文選) 권33 굴원(屈原)의 복거(卜居)에 “차라리 황곡과 날개를 나란히 할까? 장차 닭이나 오리와 먹이를 다툴까?” 하였고, 유량(劉良)의 주에, “황곡은 일사(逸士)를 비유한다.” 하였다.

222)조벽하(趙碧下):조선 고종(高宗) 연간의 서예 및 묵화의 대가인 조주승(趙周昇, 1854〜1903)을 가리킨다. 자는 장일(章日), 호는 벽하, 본관은 김제이다.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의 문하에서 글씨와 그림, 시조와 거문고 등을 배워 깊은 경지에 들었고, 중국에 건너가 시서(詩書)의 대가들과 교유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그의 글씨와 난 그림을 평하여 창난벽죽(倉蘭碧竹)이라 칭송하였다. 전주의 관성묘(關聖廟) 현판을 쓴 뒤 관우(關羽)가 데려가려는 꿈을 꾼 뒤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23)송송재(宋松齋):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서예가인 송일중(宋日中, 16321717)을 가리킨다. 자는 문명(文明), 호는 송재,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전북 김제(金堤)에서 태어나, 1669년(현종10)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713년(숙종39) 82세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벽골제(碧骨堤)가 무너졌을 때 관청의 도움 외에도 사재를 털어 수리하여 송공거(宋公渠)라는 칭송을 받았다. 글씨에 뛰어나 숙종(肅宗)과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의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頤齋遺藁 卷21 副護軍松齋宋公行狀

224)이창암(李蒼岩):조선 후기의 서예가인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을 가리킨다. 자는 윤원(允遠)이고, 호는 창암(蒼巖)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전북 정읍에서 출생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당대의 명필로 알려졌던 이광사(李匡師)의 법첩을 보고 배웠으며, 서예에만 몰두하여, 병중에도 하루에 1,000자씩 써서 벼루를 3개나 구멍을 낼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다. 특히 초서와 행서에 능했으며, 그의 서체는 창암체로 불렸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그의 글씨를 인정하여 직접 묘비문을 써서 주었다고 한다. 호남과 경남 일대의 사찰 편액에 그의 글씨가 많이 남아 있다.

225)인간……주었는가:그 좋던 솜씨는 세상에 남아 있는 누구에게 전수하였느냐는 의미이다.

226)유칠(柳七):북송(北宋) 때의 대표적인 사인(詞人)인 유영(柳永)을 가리키는데, 형제간의 서열이 일곱 번째였으므로 유칠이라고 불렸다. 젊어서부터 “천만금도 다 필요 없으니, 유칠의 마음을 얻으면 그 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만년에 곤궁하여 죽었을 때는 장례 치를 돈 조차도 없어서 기생들이 십시일반으로 추렴하여 장례를 치러 주고, 제사와 묘소 관리도 기생들이 서로 돌아가며 돌보았는데, 이후로 풍속이 되었다고 한다.

227) 평강(平康)의 풍월(風月):일반적으로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던 곳, 또는 기생들이 읊조리는 풍월을 가리킨다. 평강은 당(唐)나라 장안(長安)에 있던 기생들의 집단 거주지로서, 당시 풍류를 아는 장안의 젊은 협객이나 새로 과거에 합격한 진사들이 주로 이곳에서 즐겨 놀았다고 한다. 후대에는 기생들의 거처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開元天寶遺事 卷2

228) 梁:대본에는 ‘上’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229) 峋:대본에는 ‘岣’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230) 영균(靈均):전국 시대 초(楚)나라 회왕(懷王) 때의 충신이자 문장가인 굴원(屈原)의 자(字)이다. 그는 삼려대부(三閭大夫)로서 직간을 하다가 조정에서 모함을 받아 좌천된 후,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읊은 이소(離騷) 등을 짓고 상강(湘江)에 투신, 자살하였는데, 초사(楚辭)라는 장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의 작품들은 중국 운문사에서 시경에 버금가는 지위를 차지하였다. 史記 卷84 屈原列傳

231)지하의(芰荷衣):은자(隱者)의 복장을 말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연꽃 잎사귀로 웃옷 해 입고, 부용으로 아랫바지 만들어 입네.[製芰荷以爲衣兮 集芙蓉以爲裳]”라고 하였다.

232)백안천(百眼泉):곳곳에서 솟아나는 샘물로서, 안천은 보통 눈물, 샘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의 시 <우제(偶題)>에 “산허리 바위에 천년된 시내 있으니, 바위의 안천은 하루도 마를 날이 없네.[山腰石有千年澗 石眼泉無一日乾]” 하였다.

233)등라(藤蘿):산 위의 절간을 뜻하는 시어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등라 저 너머에 절간이 분명히 있을 텐데, 아무래도 깜깜해야 꼭대기까지 오르겠군.[諸天合在藤蘿外 昏黑應須到上頭]”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杜少陵詩集 卷12 涪城縣香積寺官閣

234) 김 의관 효찬(金議官孝燦):한말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던 김효찬을 가리킨다. 자는 대겸(大兼)이고, 호는 남파(南坡)이고, 본관은 김녕(金寧)이며, 전남 순천(順天) 출신이다. 시집으로 남파시집(南坡詩集)이 있다.

235)관직 쓰지 않았네:아무 벼슬 아무개라고 표현하지 않고, 시인 아무개라고 표현했다는 뜻이다.

236)전제(筌蹄)가……하리:일시적으로 찾아든 복이 아닌지 잘 살피라는 의미이다. 전(筌)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이고, 제(蹄)는 토끼를 잡는 올가미로,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임시로 사용했다가 버려지는 물건을 말한다. 장자 외물(外物)에 보인다.

237)오거담(吳蕖潭):거담은 조선 말기의 학자인 오계열(吳啓烈, 1832〜1904)의 호이다. 자는 도범(道範)이고,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조실부모하였다.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도의(道義)의 이치를 터득하였으나, 질병으로 인해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였다. 정사(正邪)에 대한 호오(好惡)가 분명하였다고 한다.

238)문 앞 오솔길:한(漢)나라 때의 장후(蔣詡)가 왕망(王莽)이 나라를 찬탈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인 두릉(杜陵)에 은거하면서, 문정(門庭)에 세 개의 오솔길[三逕]을 내고 각각 소나무, 국화, 대나무를 심고서, 벗인 구중(求仲)과 양중(羊仲) 두 사람만 내왕할 수 있도록 하였던 고사가 있다. 흔히 은자가 거처하는 곳을 가리킨다. 蒙求集註 卷上 蔣詡三逕

239)우 효자 달홍(禹孝子達弘):조선 말기의 효자로, 부모의 변을 직접 맛보아 건강을 살폈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주는 등 효성이 지극하여, 1893년(고종30) 조정에서 정려를 세우라는 명이 내렸고, 1897년에 광양시 광양읍 인서동에 세워졌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贈職)되었다.

240)난호(欒狐):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대표적인 경대부(卿大夫) 집안인 난극(欒卻)과 호속(狐續)을 병칭한 것으로, 진나라가 망하면서 쇠락하여 모두 노예의 신분이 되었다. 여기서는 우달홍이 몰락한 가문의 자손임을 표현한 것이다.

241) 죽순:삼국 시대 오(吳)나라의 효자(孝子) 맹종(孟宗)의 고사이다. 맹종의 늙고 병든 어머니가 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맹종이 안타까운 마음에 대숲에 들어가서 슬피 울었는데, 갑자기 땅 위로 죽순 두어 줄기가 나왔으므로 가지고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드려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藝文類聚 卷89

242) 잉어:진(晉)나라 때의 효자 왕상(王祥)의 고사이다. 왕상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繼母)의 학대를 받으며 살았으나 늘 효도를 지극히 하였다. 한번은 추운 겨울날 계모가 산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므로 왕상이 얼음을 깨고 직접 들어가 물고기를 잡으려 하자, 얼음이 갑자기 녹으면서 잉어 두 마리가 뛰어 나왔다고 한다. 晉書 卷33 王祥列傳

243)청상(靑箱)의 경서:조상 대대로 전해지는 학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남조 송나라 때 왕준지(王准之)의 증조부인 왕표지(王彪之)는 박학다식하여 조정의 의식에 밝았고, 강좌의 고사에 대해서도 밝았는데, 이런 것들을 모두 기록하여 푸른 상자에 보관하여 대대로 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왕씨(王氏)의 청상학(靑葙學)’이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宋書 卷60 王准之列傳

244)보배 나무는……고르다네:보배 나무는 남의 자제를 높여서 부르는 말로서, 후손들이 조상의 음덕을 고루 받고 있다는 의미이다.

245)방옹집(放翁集):송나라 때의 대표적인 시인 육유(陸游, 1125〜1210)의 문집인 검남시고(劍南詩稿)를 가리킨다. 육유의 자는 무관(務觀)이고, 호는 방옹(放翁)이다. 진사시에 실패하고 지방관과 말직을 전전하는 등, 불우한 일생을 보냈다. 일생동안 1만 수(首)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 금(金)나라의 침입을 받는 현실과 전장의 비애를 잘 담아내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한가로운 전원생활의 기쁨을 당시풍(唐詩風)의 서정으로 담아내기도 하였다.

246)사고(蜡鼓)와 나정(儺鉦):의식에 쓰이는 북과 징으로, 사와 나는 모두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여러 신들에게 농사의 작황과 그 밖의 여러 일들을 고하는 제사를 말한다.

247)향복(響卜):섣달 그믐날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길흉(吉凶)을 점치는 일을 가리킨다.

248)을사고(乙巳稿):1905년(광무9), 매천이 51세 되던 해에 지은 시들이다.

249)고현중(高玄中):미상이다.

250)화권(花劵):집을 빌려 사는 데 드는 임대료를 말한다.

251)학량(鶴糧)을 세네:여유와 운치가 있는 생활을 표현한 듯하다. 당나라 시인 피일휴(皮日休)의 가일독처기노망(暇日獨處寄魯望)이라는 시에, “동산 채소는 미리 승려 몫을 나누게 하고, 창고 곡식은 먼저 학의 양식을 계산하게 하네.[園蔬預遣分僧料 廩粟先教算鶴糧]”라고 하였다. 참고로 은거하여 청빈하게 살아가는 이의 식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곡식 낱알을 셀 정도로 가난함을 표현하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

252)오군(五君)은……이겼다오:산왕(山王)은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산도(山濤)와 왕융(王戎)을 합칭한 말이다.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문장가였던 안연지(顔延之)가 일찍이 영가 태수(永嘉太守)로 폄척되어 나가게 되자 몹시 분개한 나머지, 오군영(五君詠)이란 시를 지어 죽림칠현 가운데 완적(阮籍), 혜강(嵇康), 유령(劉伶), 완함(阮咸), 상수(向秀)의 일만을 서술하고, 산도와 왕융은 귀성(貴盛)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빼 버렸던 데서 온 말이다. 宋書 卷73 顔延之列傳

253)윤경천(尹敬天):미상이다.

254)남경렬(南景烈):미상이다. 매천집(梅泉集)권3에는 유제남경렬벽상(留題南璟烈壁上)이라고 하여 ‘景’이 ‘璟’으로 되어 있다.

255)명사(冥司)의……있으랴:명사는 천상에서 관직을 담당하는 기관이고, 선적(選籍)은 선발된 관원의 명부이다. 하늘에서도 틀림없이 중요한 직책에 쓰일 것이라는 말이다.

256)이경재(李耕齋):조선 말기의 문인이자 학자인 이건승(李建昇, 1858〜?)을 가리킨다. 자는 보경(保卿)이고, 호는 경재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1891년(고종28) 증광시(增廣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다.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의 아우이다. 을사조약 이후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경술국치 때 만주로 망명하였다.

257)지당(池塘)의……부르고:이건승에게 이건방(李建芳, 1861∼1939) 같이 재주가 뛰어난 재종형제가 있음을 가리킨 것이다. 지당의 봄풀은 남조(南朝) 송(宋)나라 사영운(謝靈運)의 고사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문재(文才)를 보였던 족제(族弟) 사혜련(謝惠連)을 매우 아꼈는데, 어느 날 시를 짓다가 마땅한 시구를 얻지 못해 하루 종일 고민을 하던 차에, 문득 꿈에서 사혜련을 보고는 ‘지당에 봄풀이 생겨났네.[池塘生春草]’라는 절묘한 구절을 얻었다는 고사가 있다. 宋書 卷67 謝靈運列傳

258)부안명성(鳬鴈明星):남편을 잘 인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시경 여왈계명(女曰鷄鳴)에, “그대는 일어나 밤을 보소서. 계명성(啓明星)이 찬란할 것이니. 장차 이리저리 다니면서, 오리와 기러기를 주살로 잡아오시길.[子興視夜 明星有爛 將翺將翔 弋鳬與雁]” 하였다.

259)바다에……거문고:성련선생(成連先生)이 제자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3년 동안 배우고도 성취하지 못하자, 자연의 소리를 통해 성정(性情)을 도야하게 하려고 자신의 스승 방자춘(房子春)이 있는 동해(東海)의 봉래산(蓬萊山)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는 일을 가리킨다. 결국 백아는 그곳에서 홀로 이치를 터득하고 대가가 되었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578

260)구륜(尻輪):엉덩이가 변화해서 수레바퀴가 된다는 말로서, 정신을 뜻한다. 자여(子輿)가 병이 들자 자사(子祀)가 문병을 가서 묻기를 “자네는 그 병을 미워하는가?” 하니, 자여가 대답하기를 “아닐세. 내가 어찌 미워하겠는가. 병이 점점 더 심해져서 나의 엉덩이가 수레바퀴로 변하면 정신을 말[馬]로 삼아 그대로 타고 다닐 것이니, 어찌 멍에를 멜 필요가 있겠는가.” 한 고사가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보인다.

261)요부(堯夫)가……끄네:송(宋)나라의 유학자 소옹(邵雍)의 자이다. 사시(私諡)는 강절선생(康節先生)이다. 이정지(李挺之)에게서 도가(道家)의 학문을 배웠고 상수학(象數學)이라는 학설을 정립하여 역학(易學)의 대가가 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가 있다. 아거(兒車)는 작은 수레를 가리키는 것으로, 소옹이 봄가을로 외출을 할 때면 작은 수레를 타고 마음 내키는 대로 가곤 했는데, 사대부 집안에서 서로 다투어 맞이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御定淵鑑類函 卷387

262) 변고:조선이 1905년(광무9) 11월 17일, 음력 10월 21일에 일본의 압박에 못 이겨 조선의 자주적인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한 것을 가리킨다. 을사늑약 또는 을사조약이라고 하는 것으로, 일본이 조선을 보호해 준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식민지가 되는 조약이었으므로, 전국적으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263)유란헌(幽蘭軒):금(金)나라의 제9대 황제였던 애종(哀宗)이 목을 매어 자결한 곳으로, 여기서는 금나라를 가리킨다. 애종은 1234년 몽골과 남송(南宋) 연합군에 의해 채주(蔡州)가 완전히 포위되자 군대를 이끌던 황족(皇族) 완안승린(完顔承麟)에게 양위한 뒤 자결하였다. 말제(末帝)인 완안승린 역시 양위를 받은 지 반나절 만에 몽골군에 살해됨으로써, 결국 금나라는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였다. 金史 卷18 哀宗本紀

264)만세정(萬歲亭):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숭산(嵩山)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산 위에서 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렸으므로, 그곳에 만세정을 지었다는 고사가 있다. 여기서는 한나라를 가리킨다. 太平御覽 卷194

265)칠묘(七廟):원래는 주(周)나라 때 천자(天子)의 종묘(宗廟)로서, 태조(太祖)의 종묘와 삼소(三昭)․삼목(三穆)을 총칭하는 것이었는데, 후대에 와서는 일반적인 임금의 종묘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266)제산(齊山)의 늙은 송백(松柏):전국 시대 말기 진 시황(秦始皇) 때 제(齊)나라 임금 전건(田建)이 제후(諸侯)와 연합하여 진나라를 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는 빈객들의 말을 듣지 않고 진나라의 꼬임에 빠져 진나라로 들어갔다가 공(共) 땅의 송백 사이에 갇혀 지내다가 결국은 굶어 죽고 말았다. 그러자 제나라 백성이 임금을 원망하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소나무여! 측백나무여! 전건을 공 땅에 머물게 한 자가 빈객이던가?[松耶柏耶 住建共者客耶]” 하였다. 戰國策 齊策6

267)열수(洌水):한강(漢江)의 이칭이다.

268) 홍진(紅塵)……널렸구나:국권을 빼앗기는 난세 속에서 고관대작으로 행세하던 자들이 항의하며 자결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서 활개 치고 있다는 의미이다. 홍진은 어지러운 세상을, 잠신(簪紳)은 양반이나 지위가 높은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매천속집(梅泉續集) 권1 <답박금사항래(答朴錦士恒來)>라는 편지에, “지난겨울 국변(國變) 이래로, 순국한 제공들이야 일월처럼 빛이 나니 당연히 차치하더라도, 그 나머지 300여 군의 대소 관리들은 끝내 한 사람도 벼슬을 버리고 뜻을 이룬 자가 없었다.”라고 개탄한 내용이 있다.

269)10월의 변고: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을 가리킨다. 162쪽 주262 참조.

270) 조상(趙相):조병세(趙秉世, 1827∼1905)를 가리킨다. 자는 치현(穉顯)이고, 호는 산재(山齋)이며,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음관(蔭官)으로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1859년(철종10)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대사헌, 이조 판서, 좌의정 등을 지냈다.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으로 나라가 혼란하고 일제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물러나 가평에서 은거하였다가, 뒤에 다시 중추원 의장과 의정부 의정을 역임하고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1896년 폐정개혁을 위하여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경, 백관과 함께 입궐하여 정청(庭請)의 소두(疏頭)로서 조약의 무효화, 5적신의 처형 등을 주청하다가 일본 헌병에 의해 강제로 고향으로 옮겨졌는데, 도중에 가마 안에서 음독, 조카 조민희(趙民熙)의 집에 음력 12월 1일 당도하여 죽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271) 팔애(八哀):당(唐) 나라의 시인 두보(杜甫)가 지은 <팔애시(八哀詩)>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의 현신(賢臣)이었던 왕사례(王思禮), 이광필(李光弼), 엄무(嚴武), 왕진(王璡), 이옹(李邕), 소원명(蘇元明), 정건(鄭虔), 장구령(張九齡) 등 8인의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애도시이다.

272)최면암(崔勉菴):면암은 문신이며 학자이자 의병장인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호이다. 자는 찬겸(贊謙)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1855년(철종6)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일본과의 통상 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렸으며, 단발령에 반대하였다. 경기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리고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이끌고 관군 및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한 후,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 생활하던 중에 유소(遺疏)를 구술(口述)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집에 면암집(勉菴集)이 있다.

273)이영재(李寧齋):영재는 문신이자 문장가인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호이다. 자는 봉조(鳳朝) 또는 봉조(鳳藻)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1866년(고종3) 15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으며,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문명을 떨쳤다. 하곡(荷谷) 정제두(鄭齊斗)가 세운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전승자였으며, 병인양요 때 전사한 조부의 영향으로 척양(斥洋)과 척왜(斥倭)를 주장하였다. 향리인 강화에서 은거하다가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택영은 그를 고려와 조선의 문장가 9인 중의 하나로 선정하였다. 저서 당의통략(黨議通略)은 당파를 초월한 공정성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문집으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이 전한다.

274) 민영환(閔泳煥):1861∼1905. 자는 문약(文若)이고, 호는 계정(桂庭)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1877년(고종14)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고, 1878년 대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21세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서구 선진국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신문명을 눈으로 체험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 시정(時政)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파직되었고, 친일파와 대립하다가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양력 11월 30일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저서로 해천추범(海天秋帆), 사구속초(使歐續草), 천일책(千一策) 등이 있다.

275)여곽(呂霍) 대신 속죄하였네:외척으로서 당시 명성황후를 비롯한 외척들의 폐해에 대해 대신 속죄한다는 의미이다. 여곽의 여(呂)는 한나라 여후(呂后)이며, 곽(霍)은 선제(宣帝)의 곽황후(霍皇后)의 친정을 말한 것인데, 여후는 여주(女主)로서 한나라를 망칠 뻔하였고, 곽황후의 어머니는 허황후(許皇后)를 독살하였다.

276)생귀(生貴)가 심하게 되니:고모가 명성황후 민씨이므로 왕실의 외척이 된 것을 가리킨다. 민영환은 17세에 벼슬에 올라 21세에 이미 당상관이 될 정도로 외척으로서의 특혜를 누렸다. 생귀는 스스로 자신의 귀한 신분을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외척으로서 세도를 부릴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107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에 보면, 후한 때 전분(田蚡)이 무제의 어머니인 왕태후의 아우라는 것 때문에 일약 높은 벼슬에 올라 세도를 부렸을 때를 가리켜 “생귀가 심하였다.[生貴甚]”라고 표현하였다.

277)유신(維新):일반적으로 구법을 혁신하여 새로운 정사를 펼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1894년(고종31) 7월 초부터 1896년 2월 초까지 약 19개월 동안 3차에 걸쳐 추진된 강오경장(甲午更張)을 가리키는 듯하다.

278)사명(使命)을 받고서는:외교관의 임무를 맡은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이후, 1897년에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6개국 특명전권공사를 겸직하였다.

279)현로(賢勞):훌륭한 재주를 지닌 자가 홀로 어려운 일을 감당하여 고생을 할 때 쓰이는 말로, 시경 북산(北山)에 “넓은 하늘 아래 모두가 임금의 땅이요, 사해(四海)의 안이 그 누군들 신하 아닌 이 없건마는, 대부의 일 처리 균등치 못한지라 나만 일하면서 혼자만 훌륭하네.[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大夫不均 我從事獨賢]”라고 한 것에서 나왔다.

280)납약(納約):서두르지 않고 임금을 계도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주역 감괘(坎卦) 육사(六四)에 “맺음을 들이되, 통한 곳으로 하면 끝내 허물이 없으리라.[納約自牖終无咎]” 하였는데, 군주를 선도(善道)로써 깨우치고자 하면 군주가 밝게 아는 것과 관심이 있는 곳으로부터 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281)츤박(櫬縳)의 신세:항복하여 포로가 된 신세라는 뜻이다. 춘추 시대 때 초(楚)나라가 허(許)나라를 포위하다 제후들의 압박으로 물러난 뒤에 여전히 허나라에 대해 분한 마음을 지니고 있자, 채(蔡)나라 목후(穆侯)가 허나라의 희공(僖公)을 중재하여 초나라에 항복하게 하였는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 6년 조 가을 기사에는 이때의 상황에 대해, “허남은 손을 뒤로 묶고 입에 옥벽을 물었으며, 대부는 상복을 입고 사는 관을 들고 따랐다.[許男面縛銜璧 大夫衰絰 士輿櫬]”라고 묘사하였다.

282)용사(龍蛇)의 난리:1592년(선조25)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가리킨다. 용사(龍蛇)는 용과 뱀의 해, 즉 임진년(壬辰年)과 계사년(癸巳年)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283)송공(宋公):임진왜란 당시 동래 부사(東萊府使)였던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을 가리킨다. 자는 덕구(德求)이고, 호는 천곡(泉谷) 또는 한천(寒泉)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1570년(선조3) 진사에 입격하고, 1576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호조 정랑 등을 지냈다. 동래 부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성에서 항전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조복(朝服)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은 채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284) 홍만식(洪萬植):1842∼1905. 자는 백헌(伯憲)이고, 호는 호운(湖雲)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866년(고종3)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동부승지를 거쳐 여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이조 참판까지 지냈다. 그러나 1884년 아버지 홍순목(洪淳穆)이 의복제도의 개정을 반대하다가 삭탈관직을 당하자 관직을 사직하였다. 1894년 관직에 복직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리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음독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음독자살하였다. 숭정대부 참정대신(參政大臣)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285)역적의 형:개화당(開化黨)의 중진이었던 동생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이 신설된 우정국(郵征局)의 개국 축하연 날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과 함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사대당(事大黨)을 제거하고, 신정부를 조직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신정부가 와해되자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286)금앵(金罌):금앵(金甖)이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사약(賜藥)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독극물(毒劇物)을 말한다. 남사(南史)45 왕경칙열전(王敬則列傳)에 의하면, 남조(南朝) 제(齊)나라 때 명제(明帝)가 구신(舊臣)들의 모반을 의심하여 장괴(張瓌)를 평동장군(平東將軍)으로 삼자, 회계 태수(㑹稽太守)로 있던 노장 왕경칙이 두렵게 여겨, “동쪽에 지금 누가 있는가? 이는 나를 평정하려는 것일 따름이다. 동쪽인들 어찌 쉽게 평정할 수 있겠는가. 나는 끝까지 금앵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주석에 “금앵은 짐주(鴆酒)를 뜻한다.” 하였다.

287) 조병세(趙秉世):165쪽 주270 참조.

288)원립(爰立):재상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서경 열명 상(說命上)에 “이에 세워서 재상으로 삼아 왕이 그 좌우에 두셨다.[爰立作相 王置諸其左右]” 하였다.

289)대원(臺垣):감찰 기능을 지닌 사헌부를 가리킨다. 조병세는 1877년(고종14)에 대사헌을 지냈다.

290)황각(黃閣):임금을 보필하여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일반 정사를 책임졌던 조선 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인 의정부를 달리 일컫는 말로서, 도당(都堂) 혹은 묘당(廟堂)이라고도 한다. 영의정 이하의 정승들을 지칭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291)서리와 새매:초목을 얼려 죽이는 서릿발이나, 새매처럼 악인들을 엄하게 처벌하는 사헌부의 관원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손보(孫寶)가 경조 윤(京兆尹)이 되었을 때, 입추일(立秋日)에 후문(侯文)을 동부독우(東部督郵)로 삼으면서 신칙하기를, “오늘 새매가 비로소 사냥을 시작하니 마땅히 천기를 좇아 간악한 무리를 취하여 된서리 같은 주벌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하였고, 당(唐)나라 두목(杜牧)의 노영제감찰어사등제(盧頴除監察御史等制)라는 글에서, “한(漢)나라에서는 어사를 제수하는 것을 대체로 입추 때에 하는데, 이는 풍상이 비로소 엄해지고, 새매가 처음으로 사냥하기 때문이다.[漢家授署禦史 多於立春 蓋以風霜始嚴 鷹隼初擊]” 하였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10 取姦惡

292)한……설거주인걸:아무리 설거주(薛居州)처럼 훌륭한 선비일지라도 혼자의 힘으로는 소인(小人)들 속에 싸여 있는 임금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한탄한 것이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임금의 처소에 있는 자들이 모두 설거주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선한 일을 하겠는가. 한 명의 설거주가 홀로 송왕에게 어찌할 수 있겠는가.[在王所者 王幼卑尊 皆非薛居州也 王誰與爲善 一薛居州 獨如宋王何]” 하였다.

293)진괘(晉卦)의……접견함:임금이 하루에 세 번 신하를 접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대신(大臣)이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아 자주 임금을 면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역 진괘에 “진은 나라를 편안히 하는 제후에게 말을 하사하기를 많이 하고, 낮에 세 번 접견(接見)하도다.[晉 康侯用鍚馬蕃庶 晝日三接]” 하였다.

294)양강(楊江):경기도 가평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조병세가 은퇴하여 머물던 고향 마을이 있었다.

295)중서성(中書省) 벼슬:조선의 의정부의 정승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조병세는 고향 가평으로 물러나기 전인 1889년(고종26)에 우의정, 1893년에 좌의정을 지냈다.

296)충익공(忠翼公):조태채(趙泰采, 1660〜1722)의 시호이다.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이며, 본관은 양주이다. 1686년(숙종12)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호조, 공조, 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동지사(冬至使),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른바 ‘노론사대신’의 한 사람으로 훗날 영조가 되는 세제(世弟)의 책봉을 건의하여 실현시켰으나, 소론의 반대로 철회되자 사직하고, 소론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진도(珍島)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었다. 1725년(영조1)에 복관되었으며, 과천(果川)의 사충서원(四忠書院), 진도(珍島)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이우당집(二憂堂集)이 있다.

297) 최익현(崔益鉉):165쪽 주272 참조.

298)왕염오(王炎午):1252〜1324. 송(宋)나라의 절의지사로 자는 정옹(鼎翁), 호는 매변(梅邊)이며, 강서성(江西省) 안복현(安福縣) 사람이다. 1274년에 태학 상사생(太学上舍生)이 되었고, 송나라의 수도인 임안(臨安)이 원(元)나라에 함락되자 가산을 털어서 문천상(文天祥)이 이끄는 근왕군(勤王軍)을 지원하였다. 문천상의 막료로 일하다가, 얼마 못 가서 모친의 병 때문에 돌아갔다. 문천상이 원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혀서 압송될 때, 그가 회유와 고문에 못 이겨 절의를 바꿀까 염려하여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문을 지어 자결하기를 재촉하였다. 吾汶藁 卷10 附錄

299)문 신국(文信國):신국은 송나라 말엽의 승상이자 애국지사인 충렬공(忠烈公)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의 봉호(封號)이다. 자는 송서(宋瑞) 혹은 이선(履善)이고, 호는 문산(文山)이다. 이종(理宗)과 익왕(益王)을 섬겼고, 임안이 함락된 뒤에도 송나라 단종(端宗)을 받들고 근왕군을 일으켜 원군(元軍)과 싸웠으며, 위왕(衛王) 때 조양(潮陽)에서 패전하여 원군의 포로가 되어 연경(燕京)에 3년 동안 억류되었다. 온갖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자신의 충절(忠節)을 나타내고 죽었다. 그 당시 그의 첩이었던 안씨와 황씨도 그를 따라 순절(殉節)하였다. 宋史 巻418 文天祥列傳

300)일양(一陽)이 잠식되는 때:군자가 소인에게, 임금이 신하에게 핍박을 당하는 때를 말하는 것으로, 6개의 효(爻) 중에 맨 위의 하나만 양이어서 음의 세력이 극도에 달하여 양을 핍박하고 있는 것을 상징하는 주역의 박괘(剝卦)에서 나온 말이다.

301)산두(山斗):태산북두(泰山北斗)의 준말로서, 학술이나 명망이 태산이나 북두칠성처럼 높고 찬란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302)주뇌(周雷):명(明)나라 말기의 충신 주표(周鑣)와 뇌연조(雷縯祚)를 가리킨다. 주표의 자는 중어(仲馭),호는 녹계(鹿溪)이고, 뇌연조의 자는 개공(介公)이며, 모두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이자성(李自成)과 청나라에 의해 북경(北京)이 함락당하고 의종(毅宗)이 죽자, 명나라 유민들은 남경으로 옮겨서 계속 투쟁을 하였는데, 이때 마사영(馬士英) 등이 신종(神宗)의 손자인 복왕(福王)을 옹립하여 황제로 세우고 정권을 잡으면서, 평소에 감정이 있던 주표와 뇌연조에 대해 복왕이 아닌 노왕(潞王)을 적극적으로 추대하려고 했었다는 명목을 씌워 하옥하고, 황제의 명을 사칭하여 자결하게 만들었다. 明史 卷274 姜日廣列傳 東林列傳 卷10 周鑣雷縯祚合傳

303)강고심(江古心):송나라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강만리(江萬里, 1198〜1275)를 가리킨다. 자는 자원(子遠), 호는 고심(古心)이며, 도창현(都昌縣) 사람이다. 가학을 이어 정주학(程朱學)에 조예가 깊었다. 도종(度宗) 때 좌승상(左丞相)을 지냈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당시의 권신이었던 가사도(賈似道)의 미움을 받았다. 1274년에 시세가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 지산(芝山)에 지수정(止水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는데, 다음 해에 원나라 군대가 대거 침략하여 그가 있는 곳까지 들어오자 아들 등과 함께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宋史 卷418 江萬里列傳

304)굴정칙(屈正則):전국 시대 초(楚)나라 회왕(懷王) 때의 충신이자 초사(楚辭)의 비조인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굴원의 이름은 평(平)이고, 원(原)은 자이다. 정칙은 굴원의 어릴 적 이름이라고 한다.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모함을 받아 유배된 후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읊은 이소(離騷) 등을 짓고 상강(湘江)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305)자애(自愛):자결을 뜻하는 ‘自裁’라는 시어를 사용해야 하나, 표현이 직접적인 데다, ‘裁’ 자가 평성이므로 ‘愛’ 자로 바꾸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글자 그대로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고 자결하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도 있다.

306) 黑:대본에는 ‘極’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307)백신들이……하직하였네:백관이 나라가 흔들리자 임금을 떠나가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308)규성(奎星):문장을 주관한다고 하는 별로서, 흔히 뛰어난 문사(文士)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이건창을 가리킨다.

309)좋은……때문이네:좋은 저택은 나라를, 뭇 아이들은 소인배를 가리킨다. 진(晉)나라 때 회계왕(㑹稽王) 도자(道子)가 어린 나이에 황제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는데, 소인배에게 정사를 일임하는 바람에 나라가 어지럽게 되자, 당시 고결하고 충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육납(陸納)이 대궐을 바라보며 탄식하기를, “좋은 집을 어린아이가 쳐서 부수려고 하는가.[好家居 纎兒欲撞壊之邪]” 하니, 조정의 선비들이 모두 그 충성심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晉書 卷77 陸納列傳

310) 빙상(冰霜):얼음과 서리로서, 몸가짐과 의지가 깨끗하고 늠름한 얼음이나 서리와 같이 확고하고 고결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311)동경에 이두(李杜)가 있었더라면:동경은 후한의 수도 낙양을 말한다. 이두는 후한 때의 명신들인 이응(李膺)과 두밀(杜密)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응은 ‘천하의 모범[天下楷模]’, 두밀은 ‘천하의 보필[天下良輔]’이라는 추앙을 받았다. 환관(宦官)의 전권(專權)을 반대하다가,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에 환관들로부터 이른바 ‘당고(黨錮)의 화’를 당한 끝에, 이응은 옥사(獄死)하고 두밀은 자결하였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312)구정(九鼎)을 선뜻 옮겨가지: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국권을 빼앗는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春秋時代) 때 초(楚)나라가 육혼(陸渾)에 있는 군대를 공격하면서 주(周)나라의 국경에서 사열식을 하였는데, 그때 주나라를 취할 뜻이 있어서 우(禹) 임금이 제작했다는 구정(九鼎)의 대소경중(大小輕重)에 대해 물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3年

313) 彼:대본에는 ‘我’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314) 평양대(平壤隊)평양진위대(平壤鎭衛隊)를 가리킨다. 진위대는 근대적 군대 편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1895년(고종32) 칙령으로 설치한 지방의 군대이다. 처음에는 평양과 전주에 설치하였다가 전국적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1907년(융희1) 고종의 헤이그밀사사건을 구실삼은 일제의 강압으로 해산되었다. 당시 군병들 중 상당수는 군대 해산에 항거하여 의병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315)김봉학(金奉鶴):시에서 언급된 전후 사실로 보아 1905년에 순국한 김봉학(金奉學, 18701905)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황해도 황주 출신으로, 평양진위대(平壤鎭衛隊)에서 상등병(上等兵)으로 근무하다가 부대가 서울로 소환되어 시위대에 배속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해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을 통탄하면서 아편을 삼키고 자결하였다. 고종이 그 소식을 듣고 특별히 정3품 통정대부 법부 참서관(法部參書官)을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李海鶴遺書 卷9 金奉學傳

316)이사룡(李士龍):1612〜1640.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로,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1640년(인조18)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병을 청하였을 때 포사(砲士)로 징발되었는데, 금주위(錦州衛)에서 명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와 대전하면서 위해를 가하지 않기 위해 공포로 응전하였다. 결국 청군에게 발각되어 위협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죽음을 청하여 의롭게 죽었다. 뒷날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추증되고, 성주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317)기자(箕子)의 나라:우리나라를 가리킨다. 기자는 고대 중국 은(殷)나라의 성인(聖人)인 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름은 서여(胥餘)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고조선으로 도망하여, 고조선의 왕이 되어 백성에게 예의(禮儀), 전잠(田蠶), 방직(紡織), 팔조법금(八條法禁) 등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318)양구(陽九)에 들어:횡액을 만나는 것을 뜻한다. 명의고(名義考) 권2 백육양구(百六陽九) 조에, “1원(元)에 해당하는 4,617년 중에는 아홉 번의 횡액이 있는데, 양액(陽厄) 다섯 번이 한해(旱害)가 되고, 음액(陰厄) 네 번이 수해(水害)가 된다. 처음 원(元)에 들어가는 106년에 액이 있으니, 이전 원의 여기(餘氣)이다. 그러므로 무릇 재이(災異)를 말할 경우에는 혹은 ‘세제양구(世際陽九)’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백육지회(百六之㑹)’라고도 한다.” 하였다.

319)을사년 겨울: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였던 1905년을 가리킨다.

320) 塞:대본에는 ‘寒’으로 되어 있으나, ‘塞’의 오자가 분명하므로 바로잡았다.

321)환공(驩共)의 신세:요(堯) 임금 때의 대표적 악인(惡人)인 환도(驩兜)와 공공(共工)을 가리킨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순(舜) 임금이 공공을 유주(幽州)로 유배시키고, 환도(驩兜)를 숭산(崇山)으로 추방하고, 삼묘(三苗)를 삼위(三危)에서 죽이고, 곤(鯀)을 우산(羽山)에서 죽였다. 네 사람을 처벌하자, 천하가 다 복종하였으니, 이는 불인(不仁)한 자를 처벌했기 때문입니다.” 하였고, 주희(朱熹)의 집주(集註)에 “공공은 관명(官名)이요. 환도는 인명(人名)이니, 두 사람이 빌붙어 함께 작당(作黨)을 하였다.” 하였다.

322)당위(唐衛):송(宋)나라 말기 때의 위사였던 당기(唐琦)를 가리킨다. 금나라 장수 파배(巴拜)가 성을 빼앗자, 당기가 돌을 소매에 숨겨 길가에 숨어 있다가 금나라 장수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체포하여 심문하니, “네 머리를 박살내 버리고, 죽어서 조씨(趙氏)의 귀신이 되고자 하였을 따름이다.” 하면서, 죽을 때까지 굴복하지 않고 나무랐다고 한다. 宋史 卷448 忠義列傳 唐琦

323)시전(施全):남송(南宋) 때의 군사(軍士)이다. 당시 송나라는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져서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포로로 끌려가는 바람에 흠종의 동생인 고종(高宗)이 남쪽에서 송나라를 재건하여 대항하고 있었는데, 재상으로 실권을 행사하던 진회(秦檜)는 화의를 주장하고 악비(岳飛) 등 주전론자들을 핍박하여 공분을 사고 있었으므로, 시전이 그를 칼로 찔러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하여 죽음을 당했다. 宋史紀事本末 卷17

324)김창강(金滄江):창강은 문신이자 문장가인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의 호이다. 자는 우림(于霖)이고, 당호는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이며, 본관은 화개(花開)이다. 17세에 성균 초시(成均初試)에 합격하고, 1891년(고종28)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이후 편사국 주사(編史局主事), 중추원 서기관(中樞院書記官), 문헌비고 속찬위원(文獻備考續撰委員), 학부 편집위원을 지냈다. 을사조약 이후, 중국으로 망명, 양자강(揚子江) 하류의 남통(南通)에서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 장건(張)의 협조로 출판소의 일을 보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시로는 매천과 문으로는 이건창(李建昌)과 병칭되었다. 고문(古文)에 관심이 많아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를 편집하였으며, 한국소사(韓國小史), 한사경(韓史綮), 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등 우리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도 병행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그의 역사 인식이 잘 드러난 오호부(嗚呼賦)가 있으며, 시문집으로 창강고(滄江稿)소호당집(韶濩堂集)이 있다.

325)10월의 변고: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과 강압적으로 체결한 을사조약으로, 자주적인 외교권의 박탈과 통감부의 설치 등이 주요 내용이다. 162쪽 주262 참조.

326)황곡(黃鵠):141쪽 주221 참조.

327)정운(停雲)의 그리움:정운은 뭉쳐서 흩어지지 않는 구름으로, 멀리 있는 친한 벗을 생각할 때 쓰는 말이다. 117쪽 주184 참조.

328)선관(蟬冠):초선관(貂蟬冠)이라고도 하는데, 한나라 때 시종관(侍從官)들이 쓰던 관이다. 김택영이 조선에서 벼슬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329)좌임(左袵):오랑캐로 전락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관중(管仲)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에,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것은 오랑캐의 풍속이다.”라고 하였다.

330)잘 드는……잘랐으니:김택영이 상해 인근 지역으로 망명한 것을 가리킨다. 오송(吳淞)은 오송강(吳松江)으로, 소주하(蘇州河)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중국 소주(蘇州)와 상해(上海) 간의 중요한 수로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어떻게 하면 병주 땅의 잘 드는 칼을 빌려다가, 오송의 강물 반을 잘라내 가져 볼까.[焉得幷州快剪刀 剪取吳松半江水]”라는 표현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9 戲題王宰畫山水圖歌

331)두우(斗牛):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북방에 해당하는 두성(斗星)과 우성(牛星)이다. 여기서는 북방을 가리킨다.

332)봉래도(蓬萊島):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상의 섬으로, 삼신산(三神山), 즉 영주산(瀛洲山), 방장산(方丈山)과 함께 동해 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漢書 卷25 郊祀志

333) 萊:대본에는 ‘菜’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므로 바로잡았다.

334)도원동(桃源洞):전설상의 낙원인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때 무릉(武陵)의 어부가 복사꽃이 흘러 내려오는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니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절세 선경이 있었다고 한다.

335)유종(遺種)…… 아니라네:유종은 남은 종자라는 뜻으로, 망해서 없어진 나라의 백성, 즉 유민(遺民)을 뜻한다. 나라야 망하든 말든 내 자신은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336)서대(西臺)의……것이요:서대는 자릉대(子陵臺)로서, 송(宋)나라 단종(端宗) 때의 절사(節士)였던 사고(謝翶)의 유적이다. 그는 문천상(文天祥)이 원(元)나라에 대항해 군사를 일으키자 향병(鄕兵) 100여 명을 거느리고 합류하였으며, 문천상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서대에 올라 그의 신주를 마련한 뒤 통곡하면서 초혼(招魂)의 노래를 부르고, 이어서 서대통곡기(西臺慟哭記)를 지었다. 晞髮集

337)요리총(要離塚):요리는 춘추 시대 오(吳)나라의 의기가 드높은 자객이다. 후한 때의 고사(高士)인 양홍(梁鴻)이 자신을 알아주는 오나라의 고백통(皐伯通)의 집으로 가서 세 들어 살면서 저술을 하다가, 어느 날 병이 나고 지치자 “연릉(延陵) 계자(季子)는 자식을 영박(嬴博)의 사이에 장사 지내고, 고향 마을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 부디 그대는 내가 죽은 뒤 내 자식이 나를 운구하여 돌아가지 않도록 해 달라.” 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에 고백통이 그 부탁을 들어 주기 위해 무덤 자리를 알아보다가, “요리는 열사이고 양홍은 청고하니, 가까이 있게 할 만하다.” 하고는 요리의 무덤 곁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梁鴻

338)우공(寓公):제후(諸侯)가 나라를 잃어버리고 다른 나라에 기식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보인다.

339)강남을 읊을 때면:북주(北周)의 문인(文人) 유신(庾信)이 일찍이 양(梁)나라에 벼슬하여 우위장군(右衛將軍)이 되고 무강현후(武康縣侯)에 봉해졌다가, 뒤에 난리를 만나 이리저리 유랑하면서 어지러운 시국을 슬퍼하고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는 내용의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읊었던 고사가 있다. 周書 卷41 庾信列傳

340) 영재(寧齋):166쪽 주273 참조.

341)단혈(丹穴)의 봉황새:단혈은 전설상의 산 이름이다. 산해경(山海經)에, “단혈의 산에 새가 있는데, 모양은 학과 같다. 오색으로 문채가 있는데, 봉(鳳)이라고 한다. 머리의 문채는 덕(德)이고, 날개의 문채는 순(順)이고, 등의 문채는 의(義)이고, 가슴의 문채는 인(仁)이고, 배의 문채는 신(信)이다. 이 새는 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춤을 추는데,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안정된다.” 하였다.

342)송풍령(松風嶺) 시:원시의 제목은 십일월이십육일송풍정하매화성개(十一月二十六日松風亭下梅花盛開)로, ‘송풍령’은 착오이다.

343)등위산(鄧尉山) 동갱산(銅坑山):등위산은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의 서남 70 리 지점에 있고, 동갱산은 등위산의 서남쪽에 있다. 모두 매화나무가 많아 꽃이 피면 온통 눈이 내린 듯했다고 한다.

344)황곡(黃鵠):141쪽 주221 참조.

345)장방술(長房術):비장방(費長房)의 비술이라는 말로, 신선의 비술을 뜻한다. 후한(後漢) 때 선인(仙人) 호공(壺公)이 시장에서 약을 팔다가 장이 파하면 사람들 모르게 병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우연히 다락 위에서 본 비장방이 따라 들어가 보니, 그 속에 별천지(別天地)가 펼쳐져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82 方術列傳 費長房

346)소갈(消渴)로 문원(文園)처럼 시름했네:소갈은 당뇨병을 말하고, 문원은 효문원 영(孝文園令)을 지낸 한(漢)나라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사마상여는 평소에 소갈을 앓고 있었는데, 병이 심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섬서성(陝西省) 무릉(茂陵)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347)하늘이 둥글지 않으니:조선 땅이 외지고 좁다는 것을 말한다.

348)병오고(丙午稿):1906년(광무10), 매천이 52세 되던 해에 지은 시들을 모은 것이다.

349)범석호(范石湖):석호는 송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범성대(范成大, 11261193)의 호이다. 자는 치능(致能)이다. 29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지방관을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금(金)나라에 사절로 갔을 때 부당한 요구에 굴하지 않고 소신을 관철하였다. 남송의 시인 4대가의 한 사람으로, 청신(淸新)한 시풍으로 전원의 풍경을 읊은 시가 유명하다. 저서에 석호거사시집 등이 있다. 宋史 巻386 范成大列傳

350)동경(東京):경주(慶州)의 이칭으로, 고려 때 서경(西京)인 평양(平壤), 남경(南京)인 한양(漢陽)과 함께 3경으로 불렸다.

351)신라의……막았었지:신라 소지왕(炤知王) 10년(488) 1월 15일에 왕이 경주(慶州)의 금오산(金鰲山) 동쪽 기슭에 있는 천천정(天泉亭)에 거둥하였을 때, 까마귀가 쥐와 더불어 이상한 행동을 보이다가 날아가므로 뒤쫓게 하니, 갑자기 까마귀는 사라지고 한 노인이 못[池] 속에서 나와 봉투를 전하였는데, 그 속에 “빨리 거문고 갑(匣)을 쏘라.”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왕이 곧 입궁(入宮)하여 활로 거문고 갑을 쏘았더니, 그 속에는 왕비와 간통하면서 그날 왕을 시해하려고 했던 승려가 숨어 있었다. 이에 감동한 백성이 1월 16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제사를 드렸고, 그 못은 글이 나온 못이라고 하여 ‘서출지(書出池)’라 불렀다고 한다. 三國遺事 卷1 紀異 射琴匣

352)오야제(烏夜啼):남조(南朝) 송(宋)나라 때 왕의경(王義慶)이 지은 가사이다. 대장군인 팽성(彭城)의 왕의강(王義康)이 좌천되어 예장군(豫章郡)으로 옮겨지게 되자, 강주(江州)의 수령으로 있던 왕의경이 찾아가 서로 곡을 하였다. 문제(文帝)가 그 소식을 듣고서 괴이하게 여겨 소환하자, 왕의경이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기첩(妓妾)이 까마귀가 밤에 우는 것을 듣고 재각(齋閣)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내일 응당 사면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날 과연 사면되고, 그해에 남연주 자사(南兖州刺史)로 옮겨갔으므로 왕의경이 이 노래를 지었다. 舊唐書 卷29 音樂志 淸樂

353)소 먹이기:소가 밥을 먼저 먹으면 그해에는 풍년이 들고,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 지고, 목화씨를 먼저 먹으면 목화 농사가 잘된다는 말이 있었다.

354)도소주(屠蘇酒):설날에 마시는 약주의 한 가지로, 이 술을 마시면 사기(邪氣)와 질병을 물리친다고 한다.

355)치롱주(治聾酒):귀가 먹는 것을 막아 준다는 술로, 정월 대보름 아침에 온 가족이 마신다. 이명주(耳明酒), 명이주(明耳酒), 총이주(聰耳酒)라고도 한다.

356)침상……들리고:귓병 때문에 예민해져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은중감(殷仲堪)의 아버지 은사(殷師)가 일찍이 귓병을 앓았는데, 누워 있을 때 침상 아래로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를 듣고도 소가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世說新語 紕漏

357)갯버들은……놀라네:버들은 가을이 되면 시드는 나무로, 체질이 허약하거나 나이도 많이 먹지 않았는데 미리 늙어 버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유의경(劉義慶)이 지은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포류의 자질은 가을을 바라보기만 해도 떨어지고, 송백의 자질은 서리를 겪을수록 더욱 무성해진다.[蒲柳之姿 望秋而落 松栢之質 經霜彌茂]” 한 것에서 나왔다.

358)두강(杜康):중국의 황제(黃帝) 때의 재인(宰人)으로, 맨 처음 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후대에는 술의 이칭으로 쓰였다.

359) 운곡노인(雲谷老人):송(宋)나라의 대학자로 신유학(新儒學)을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를 가리킨다. 자는 원회(元晦) 혹은 중회(仲晦)이고, 호는 회암(晦庵) 또는 운곡산인(雲谷山人)이며,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이통(李侗)의 제자이다. 성리철학을 확립시켜 유학사와 동아시아 사상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유학 경전에 대한 주석은 후세 학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남강군(南康軍)의 지사(知事)로

361) 間:대본에는 ‘聞’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362)공연히……만들었네:공연히 달을 점을 치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뜻으로, 배교(环珓)는 윷처럼 던져서 그 결과에 따라 점을 치는 도구이다.

363)이마에……채:존경이나 경사를 표하거나, 간절히 바라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송사(宋史) 권336 사마광열전(司馬光列傳)에, “황제가 붕어하자 대궐에 나아가 임하였는데, 위사(衞士)들이 바라보고는 모두들 손을 이마에 얹고 말하기를, ‘저분이 사마상공(司馬相公)이시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364) 종규(鍾馗):표범 머리에 부리부리한 눈, 철면(鐵面)에 고슴도치 같은 털 등의 무서운 형상을 지닌 귀신으로, 민간신앙에서 악귀를 쫒기 위해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붙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종규는 당(唐)나라 고조(高祖) 때 문무를 겸비하고 강직했던 인물로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자 분격하여 전각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는데, 훗날 현종(玄宗)이 병이 났을 때 꿈에 나타나 귀신을 때려잡아 그 병을 낫게 해 주었으므로 현종이 화가인 오도자(吳道子)를 시켜 그 광경을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6 夢鍾馗

365)오궁(五窮):당(唐)의 한유(韓愈)가 자신을 궁하게 만드는 지궁(智窮), 학궁(學窮), 문궁(文窮), 명궁(命窮), 교궁(交窮) 등 다섯 궁귀(窮鬼)를 몰아내기 위해 지은 송궁문(送窮文)을 말한다. 昌黎先生集 卷36

366)매복(梅福):한나라 때의 고사(高士)로, 자는 자진(子眞)이다. 상서(尙書)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밝아 군(郡)의 문학(文學)이 되었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갔다. 그 뒤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자 처자를 버리고 구강(九江) 지방으로 간 뒤로는 종적이 묘연했다. 얼마 후 회계(會稽)에서 매복을 본 사람이 있는데, 성명을 바꾼 채 오나라 시장의 문을 지키는 병졸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漢書 卷67 梅福傳

367)포탁(抱柝):포관격탁(抱關擊柝)의 준말로, 관문을 지키고 딱따기를 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모두 직위가 낮은 관리의 일인데, 마지못해 벼슬을 하고 있는 경우에 주로 쓰는 표현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처하며, 녹봉(祿俸)이 많은 것을 사양하고 적은 것에 처함은 어떻게 하여야 마땅한가? 관문을 지키고 목탁(木柝)을 치는 일이다.[辭尊居卑 辭富居貧 惡乎宜乎 抱關擊柝]” 하여, 벼슬에 욕심이 없는 현자(賢者)가 집이 가난하여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벼슬을 할 경우에는 이런 직책이나 맡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368)유종(劉宗):유씨(劉氏) 성을 가진 한(漢)나라의 종통(宗統)을 말한다. 한나라는 평제(平帝)의 아들 유영(劉嬰) 때에 이르러 왕망(王莽)에 의해 망하고, 유수(劉秀)가 다시 후한(後漢)을 건국하였다.

369)관녕(管寧):삼국 시대 위(魏)나라 주허(朱虛) 사람으로 자는 유안(幼安)이다. 한말(漢末) 황건적의 난 때 요동으로 피난을 갔는데 따르는 자가 매우 많았으며 관녕의 덕화에 백성이 감화되어 다투거나 송사하는 일이 없었다. 난이 평정되자 본군으로 돌아갔는데 조정에서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항상 검은 모자[皁帽]를 썼으며, 나무 걸상에 단정히 앉아 글을 읽다 보니 무릎이 닿은 곳이 닳아서 구멍이 뚫렸다는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德行》 《三國志 魏書 卷11 管寧傳

370)동경(東京):한나라의 수도인 낙양을 말한다.

371)수선대(受禪臺):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대로서, 위(魏)나라 왕 조비(曹丕)가 한(漢)나라 헌제(獻帝)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았던 곳이다. 앞에는 한나라의 공경과 장군 등 지도층이 황제를 받아들이라고 힘써 권한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 있다.

372) 한나라 공경:일반적인 한나라 공경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특히 화흠(華歆)을 가리킨다. 관녕은 어렸을 때부터 그와 막역한 사이였는데, 함께 글을 읽다가 화흠이 문밖에 지나가는 고관(高官)의 행차를 구경하러 가자 즉시 그와 자리를 나누어 앉으면서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 훗날 화흠이 조비를 섬겨 위나라의 고관이 되었다가 병을 핑계로 관녕에게 자신의 벼슬을 양보하였으나, 관녕은 끝내 거절하였던 고사가 있다.

373)장한(張翰):진(晉)나라의 고사(高士)로, 자는 계응(季鷹)이다. 일찍이 대사마 동조연(大司馬東曹掾)이 되어 조정에 있다가 가을이 되어 자신의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챗국과 농어회가 그리워지자, “인생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중요한데, 어찌 수천 리 밖에서 벼슬하면서 명예와 작위를 구하겠는가.” 하고는, 즉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가 버렸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張翰

374)가시밭 속 구리 낙타:진(晉)나라 사람 색정(索靖)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색정은 선견지명이 있어서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진나라의 서울인 낙양(洛陽) 궁궐 문 앞에 있는 구리로 만든 낙타를 보면서 말하기를 “네가 결국에는 가시밭 속에 있는 꼴을 보게 되겠구나.” 하였다고 한다. 晉書 卷60 索靖列傳

375) 도잠(陶潛):진(晉)나라 때의 시인(詩人)이자 고사(高士)였다. 33쪽 주17 참조.

376)술 노래를 불렀네:도잠이 술과 관련된 시인 음주(飮酒) 20수를 지은 것을 말한다.

377) 왕사(王謝):동진(東晉)의 대표적인 귀족으로, 승상을 지낸 왕도(王導)와 사안(謝安)을 가리킨다. 모두 오의항(烏衣巷)에 살면서 부귀를 누렸으므로, 후세에는 부귀한 집안의 자제들을 가리킬 때, ‘오의자제(烏衣子弟)’ 또는 ‘오의랑(烏衣郞)’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卷79 謝安列傳

378)왕관곡(王官谷)에서 홀을 떨어뜨리다:당나라의 사공도(司空圖)가 벼슬을 버리고 왕관곡에 은거할 당시, 소종(昭宗)이 누차 불렀으나 나오지 않다가 유찬(柳璨)이 조서(詔書)로 부르자 할 수 없이 나오게 되었는데, 일부러 노쇠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홀을 땅에 떨어뜨리니, 유찬이 실망하여 그를 다시 돌려보냈다는 고사가 있다. 資治通鑑 卷265

379)사공도(司空圖):당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표성(表聖)이다. 869년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수차례 황제의 부름을 받았으나, 은거하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주전충(朱全忠)이 당나라를 무너뜨린 뒤에 또다시 불렀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908년 애제(哀帝)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하었다. 시의 의경(意境)을 24품(品)으로 나누어 운문으로 읊은 시품(詩品)은 후대의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사공표성문집(司空表聖文集)등이 전한다.

380)세 가지 의휴(宜休):세 가지 마땅히 물러나야 할 이유를 말한 것으로, 사공도가 중조산(中條山) 왕관곡에 은거할 때 삼휴정(三休亭) 또는 휴휴정(休休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 기문에 “첫째, 재주를 헤아려 보면 마땅히 쉬어야 하고, 둘째, 분수를 헤아려 보면 마땅히 쉬어야 하고, 셋째, 늙어서 눈이 흐리니 마땅히 물러나야 한다.” 한 것을 가리킨다. 舊唐書 卷190下 文苑列傳 司空圖

381) 落:대본에는 ‘到’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382)묘역……빨랐던고:사공도가 왕관곡에서 은거할 때 미리 무덤과 관을 준비해 두었는데, 좋은 날을 만나면 손님을 불러다 무덤 안에 앉혀 놓고 함께 시를 짓고 술을 마셨던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94 貞行列傳 司空圖

383)당가(唐家)의 지상산(地上山)을 사랑해서였다네:사공도가 빨리 묘소를 준비한 것은 당나라가 망하기 전에 당나라 땅에 묻히고 싶어서였다는 의미이다.

384)양진(梁震):당(唐)나라 말기, 오대(五代) 때 형남(荆南)의 재사였다. 당나라 말기에 진사에 급제하고, 후량(后梁)이 당나라를 대신한 뒤에는 주전충(朱全忠)을 위해 힘을 쏟기를 원하지 않아 은거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형남의 실권자 고계흥(高季興)의 강압에 의해 할 수 없이 그를 도왔으나, 그가 주는 관직은 받지 않고 늘 자신을 ‘전(前) 진사’라고만 칭하였다. 고계흥이 죽고 난 뒤에 즉시 은거하였다.

385)최노(崔盧):위진(魏晉) 시대부터 당대(唐代)까지 오랜 기간 동안 조정의 고관을 독점하였던 산동(山東)의 최씨(崔氏)와 노씨(盧氏) 집안을 말한다.

386)가현옹(家鉉翁):호는 칙당(則堂)이다. 음직으로 벼슬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를 지냈다. 원나라의 대군이 차츰 밀려들어 오자 승상 오견(吳堅)과 가여경(賈餘慶) 등이 수령들에게 격문을 보내 항복하게 하였는데, 가현옹만은 항복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얼마 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으며, 그곳에서 송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여러 달 동안 음식을 끊었다. 춘추(春秋)에 조예가 깊어 하간(河間)에서 제자들을 길렀으며,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춘추집전상설(春秋集傳詳說)이 있다. 宋史 卷421 家鉉翁列傳

387)문산(文山):175쪽 주299 참조.

388)첩산(叠山):송나라 말엽의 문장가이자 애국지사인 사방득(謝枋得, 12261289)의 호이다. 자는 군직(君直)이다. 1256년에 문천상과 함께 진사에 급제하였다. 직언을 좋아하여 가사도(賈似道)에게 미움을 받아 쫓겨났다가 1267년에 사면되었다. 1275년에 신주(信州)를 맡았을 때, 원나라 군대가 침공하여 성이 함락을 당하자, 당석산(唐石山)에 은둔하여 제자를 가르치며 살았다. 송나라가 망한 뒤, 원나라 조정에서 누차 출사를 권했으나 굳게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원나라 지방관이 억지로 호송하여 북경에 억류해 두었으나, 굴복하지 않고 단식하다가 죽었다. 문인들이 문절(文節)이라고 사시(私諡)를 올렸다. 문집에 첩산집(叠山集)이 있다. 宋史 卷425 謝枋得列傳

389)사고(謝翶):송(宋)나라 단종(端宗) 때의 절사(節士)이자 시인이다. 187쪽 주336 참조.

390) 땅……거친데:시간이 매우 오래 지났다는 뜻으로, 왕조가 바뀐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형용한 말이다.

391)고염무(顧炎武):명(明)나라 말기, 청(淸)나라 초기의 사상가로서, 자는 영인(寧人)이고, 호는 정림(亭林)이다. 양명학(陽明學)이 공리공론을 일삼는 데 환멸을 느끼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實學)에 뜻을 두었다. 명나라가 망할 즈음 의용군에 참가하여 만주족에 저항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청나라가 들어선 뒤에는 죽을 때까지 출사하지 않았다. 경학(經學), 사학(史學), 문학(文學) 각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서를 남겼으며, 대표작으로 일지록(日知錄)이 있다. 그의 실증적(實證的) 학풍은 청조의 고증학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명말 청초의 3대 유학자 중의 하나로 꼽힌다.

392)위희(魏禧):명(明)나라 말기, 청(清)나라 초기의 문장가이다. 자는 숙자(叔子) 혹은 빙숙(冰叔)이며,호는 유재(裕齋)이다. 명나라 말기에 제생(諸生)이었으나, 명나라가 망하자, 벼슬에 뜻을 접고 취미봉(翠微峰)에 역당(易堂)을 지어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문집에 위숙자집(魏叔子集)이 있다.

393)송연재(宋淵齋):문신이자 학자인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을 가리킨다.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아 성균관 좨주(祭酒)에 기용된 뒤 대사헌에까지 올랐다. 1905년(광무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상소 10조를 바치며 진언하였다가, 다음날 일본 헌병대에 의해 고향 대전 회덕으로 이송당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무계만집(武溪謾輯)이 있고, 문집으로 연재집(淵齋集)이 간행되었다.

394)앵주(罌酒):170쪽 주286 참조.

395)즙산(蕺山):즙산은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유학자 유종주(劉宗周)가 강학하던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에 있던 지명으로, 여기서는 유종주가 창시한 즙산학파를 가리킨다. 유종주는 기본적으로는 왕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을 높였으나, ‘신독(愼獨)’에 대한 설을 내어 왕양명의 ‘치양지(致良知)’ 설의 폐단을 극복하는 등, 많은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황종희(黄宗羲)가 있다.

396)동림(東林)의……않았고:동림은 중국 명나라 말기의 동림학파(東林學派)를 가리키며, 동림당(東林黨)이라고도 한다. 명나라 말기의 어지러운 정치, 사회적 현실 속에서, 학문은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내걸었으며, 정치적으로는 환관 세력의 부정부패에 대립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한 정치적 탄압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즙산학파의 창시자 유종주와 그 제자인 황종희의 부친 황존소(黃尊素)가 모두 동림당의 일원이었다. 여기서는 송병선이 율곡학파의 계승자임을 밝힌 것이다.

397)주준(朱浚)은……손자다웠네:중회(仲晦)는 송(宋)나라의 대학자 주희(朱熹)의 자이며, 주준은 주희의 증손자로 자는 심원(深源)이다. 그는 원나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어찌 주회암(朱晦庵)의 자손으로 실절(失節)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약을 먹고 죽었다고도 한다. 昭忠録 閩中理學淵源考 卷15 여기서는 주희와 주준의 관계처럼 송병선이 동방의 주자라고 불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9대손으로서 실절하지 않고 자결하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398)인경(麟經):역사서인 춘추를 달리 일컫는 말이다. 공자(孔子)가 춘추를 기술하면서 애공(哀公) 14년 조의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기린을 잡았다.[西狩獲麟]”라는 대목에서 절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399)존왕(尊王):주(周)나라 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중화사상으로, 조선 후기에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존주(尊周)의 의리가 팽배하였다.

400)대초무(大招巫):혼을 부르는 의식에 응하여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이다. 대초는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초사(楚辭) 작가인 경차(景差)가 지은 노래로, 소리 높여 혼을 부르는 내용이 담겨 있다.

401)소미성(少微星):태미성(太微星)의 서쪽에 있는 4개의 별을 지칭하는 것으로, 처사(處士)나 대부(大夫)를 상징한다고 전해진다. 이 별이 밝게 빛나면 현사(賢士)가 등용되는 것이고, 다른 별에 의해 가려지거나 빛을 잃게 되면 처사나 대신들에게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한다. 晉書 卷11 天文志

402)상방검(尙方劍):임금이 신하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의미에서 내려 주는 보검으로,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의 직신 주운(朱雲)이 황제와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황제의 신임을 믿고 정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를 베어 죽여야 하니 상방검을 내려 달라고 청하였던 고사가 있다. 漢書 卷37 朱雲傳

403)지수정(止水亭):송(宋)나라의 승상 강만리(江萬里)가 벼슬에서 쫓겨나 지수(止水)에 못을 파고 지수정이란 정자를 짓고 살다가 원(元)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와 성이 함락되자 못에 투신자살하였다. 宋元學案 卷81

404)주문(朱門):송나라의 유학자 주희(朱熹)의 학파를 말한다.

405)방희직(方希直):희직은 명나라 초기의 대신이자 저명한 학자인 방효유(方孝孺, 1357〜1402)의 자이다. 호는 손지(遜志)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주자학자인 송렴(宋濂)의 제자이다.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혜제(惠帝)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당시 연왕(燕王)이던 영락제(永樂帝)가 반역하여 조카 혜제의 황위(皇位)를 빼앗은 뒤, 그에게 즉위 교서를 짓게 하였는데, 붓을 집어던지며 거절하였다. 반역 초기에 요광효(姚廣孝)가 “그는 필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죽인다면 천하의 독서하는 종자가 사라지게 될 것이니, 죽이지 마십시오.”라고 하여 연왕의 다짐을 받은 적이 있던 터라, 영락제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그의 10족을 차례차례 그의 앞에서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였는데, 끝내 붓을 들지 않자 노한 나머지 그와 그의 10족을 멸하였다. 明史 卷141 方孝孺列傳

406)흙이……같네:소가 논을 갈 때 차진 흙 때문에 쉽게 나아가지 못하므로, 힘을 쓰느라고 허리를 구부린 모습이 마치 자벌레가 기어갈 때 등을 구부린 모습과 같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407)석……면했네:소식(蘇軾)의 시에, 빈궁한 생활을 한탄하면서 “요즈음 석 달 동안 소금도 없이 밥 먹었네.[邇來三月食無鹽]”라는 표현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9 山村五絶

408)정시해(鄭時海):1872〜1906. 한말의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자는 낙언(樂彦)이고, 호는 일광(一狂)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전북 고창군 무장면 출신으로 기우만(奇宇萬)과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의 명을 받아 영남의 의병을 규합하였으며, 최익현이 전라도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소모장 겸 중군장(召募將兼中軍將)의 직책을 맡았다. 순창성 밖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회군하는 도중 일본군과 합세한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鎭衛隊)와 충돌하여 전사하였다.

409)골짜기……옮겨가도:세상에 불변의 완전한 것이 없듯이 어떤 사람이 홀연히 죽어 가는 것을 표현할 때 주로 쓰는 말인데, 여기서는 국권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나라로 완전히 넘어간 것을 가리킨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배를 산골짝에 감추고 산을 못 속에 감춘다면 단단히 감췄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밤중에 힘이 있는 자가 그것을 짊어지고 달아나 버리면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한다.”라고 한 데에서 나왔다.

410) 當:대본에는 ‘常’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411)상산(常山)의 혀: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의에 입각하여 상대를 꾸짖는 것을 말한다. 당(唐)나라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상산 태수(常山太守)로 있던 안지추(顔之推)의 5대손 안고경(顔杲卿)이 그에게 대적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되었는데, 안녹산이 그에게 “내가 너를 추천하여 상산 태수가 되게 하였는데, 네가 어찌 나를 배반하느냐?” 하니, “천자의 은혜를 입었을 뿐이거늘, 네놈을 배반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서 혀가 끊어질 때까지 준열하게 꾸짖다가 죽은 고사에서 나왔다. 新唐書 卷192 忠義列傳 顔杲卿子

412)군흉들……없었네:정시해가 포로로 잡혀서 호통을 칠 겨를도 없이 전장에서 바로 죽어 간 것을 가리킨다.

413)열두 사람:면암집(勉菴集) 부록 권4 연보(年譜) 병오년(1906) 4월 20일자 기사에, “전주 관찰사 한진창(韓鎭昌)과 순창 군수 이건용(李建鎔)이 왜병을 거느리고 와서 의병을 습격하니, 의병은 마침내 무너지고 의사(義士) 정시해(鄭時海)가 전사하였다.……방 안을 점검하니, 21명 중에서 9명은 이미 간 곳을 알 수 없고, 다만임병찬(林炳瓚), 고석진(高石鎭), 김기술(金箕述), 문달환(文達煥), 임현주(林顯周), 유종규(柳種奎), 조우식(趙愚植), 조영선(趙泳善), 최제학(崔濟學), 나기덕(羅基德), 이용길(李容吉), 유해용(柳海瑢) 등 12명이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 유종규는 정시해의 장사 때문에 나가고, 양재해(梁在海)는 앞서 선생의 명령으로 밖에 나가서 정탐하다가, 선생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오니 다시 12명이 되었다.” 하였다.

414)조양(潮陽)에서……날에도:송(宋)나라의 승상 문천상(文天祥)이 원(元)나라의 군대에 대항하는 근왕군(勤王軍)을 이끌고 조양현에서 주둔하다가, 원나라 대군의 공격을 받아 군대가 궤멸되고 자신은 포로가 되었던 일을 가리킨다. 175쪽 주299 참조.

415)적성강(赤城江):전북 순창군에 있는 강 이름으로, 섬진강의 상류에 해당한다.

416)국상(國殤):초(楚)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구가(九歌) 중의 한 수로, 나라를 지키다가 죽은 장수와 병사들의 영웅적인 기개와 장렬한 정신을 칭송하는 일종의 제가(祭歌)이다. 후대에는 국가를 위하여 전사한 장수와 병사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楚辭 九歌

417) 금붕(錦綳):비단 묶음이라는 뜻으로, 죽순(竹筍)을 가리킨다.

418) 낭간(琅玕):푸른 대나무 빛을 형용하는 말로, 대나무를 가리킨다.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정부마댁연동중(鄭駙馬宅宴洞中)> 시에, “주인 집 어둑한 골에 가는 연무 끼었나니, 손님 머무르는 여름 샅은 푸른 낭간 같도다.[主家陰洞細煙霧 留客夏簟靑瑯玕]” 하였다.

419)장 수양(張睢陽)은……하였고:장수양은 당(唐)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태수 허원(許遠)과 함께 수양성(睢陽城)을 지키다가 순절한 장순(張巡)을 가리킨다. 수양성이 적에 의해 함락되자, 서쪽을 향해 절을 하면서 이르기를, “신은 이제 힘이 다하였습니다. 살아서는 폐하께 보답할 수 없었으니, 죽어서는 마땅히 떠돌이 귀신[厲鬼]이 되어 적들을 죽이겠나이다.” 하였던 고사가 있다. 舊唐書 卷187 忠義列傳 張巡 資治通鑑 卷220

420)문문산(文文山)은……했네:175쪽 주299 참조. 환생하여 오랑캐를 무찌르겠다고 한 것은 미상이다.

421) 상아(祥兒):135쪽 주205 참조.

422)면옹(勉翁)이……소식:면옹은 최익현(崔益鉉, 1833〜1906)으로 1906년 7월 대마도에 유배된 일을 말한다. 165쪽 주272 참조.

423)문산(文山):175쪽 주299 참조.

424)조이경(趙而慶):1879∼1931.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의 유학자이자 의병인 조영선(趙泳善)을 가리킨다. 이경은 그의 자이고, 호는 배헌(拜軒)이다. 본관은 옥천(玉川)이며, 전남 곡성 오지리(吾枝里)에서 태어났다. 면암(勉菴) 최익현의 문인이다. 최익현이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그 진영으로 들어가 정읍(井邑), 순창(淳昌), 곡성 등 지리산(智異山)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관군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태형(笞刑) 100대의 형을 받았다. 문집으로 배헌집(拜軒集)이 있다.

425)웅어(熊魚):29쪽 주11 참조.

426)저울에 눈금이 있네:저울처럼 득실이 분명하게 판단이 된다는 의미이다.

427)일고(一鼓):춘추 시대 노(魯)나라가 제(齊)나라와 전쟁을 할 적에 노나라의 용사(勇士) 조말(曹沫)이 장공(莊公)에게 제나라가 북을 세 번 쳐서 용기가 다할 때를 기다려 응전하기를 권유하면서 말하기를, “전쟁이란 용기로 하는 것이라, 한 번 북을 치면 군사들의 용기가 나고 두 번 쳤을 때는 용기가 줄어들고, 세 번 쳤을 때는 용기가 다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莊公10年

428)경초(勁草):굳센 풀이라는 뜻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절의가 변치 않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소우(蕭瑀)를 칭찬하면서 하사한 시에 “질풍 속에서 굳게 버티는 초목을 알 수 있고, 난리 속에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알 수 있다.[疾風知勁草 板蕩識誠臣]”라는 표현이 나온다. 舊唐書 卷63 蕭瑀列傳

429)남관(南冠):초(楚)나라의 관으로, 포로가 되어 남의 나라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뜻한다.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9년 조에, “진후(晉侯)가 군부(軍府)를 순시하다가 종의(鍾儀)를 보고서 유사(有司)에게 묻기를, ‘남관(南冠)을 쓴 채 묶여 있는 자가 누구냐?’ 하니, 유사가 대답하기를, ‘정인(鄭人)이 잡아 바친 초수(楚囚)입니다.’ 하였다.”라고 한 고사가 있다.

430)표평(漂萍):물 위를 이리저리 떠다니는 부평초라는 뜻으로, 한곳에 안정되게 있지 못하고 타향에서 떠도는 신세를 형용한 말이다.

431)장동창(張同敞):명나라 말기의 충신으로, 자는 별산(别山)이다.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군무(軍務)를 총괄하며 전투가 있을 때면 항상 여러 장수들보다 앞장서서 싸웠다. 계림(桂林)에 대군이 몰려들었을 때 붙잡혀 항복을 권유받았으나, 따르지 않고 의관을 정제한 채 칼날을 받았는데, 전혀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432)임병찬(林炳瓚):1851〜1916. 한말의 의병장으로, 자는 중옥(中玉)이고, 호는 돈헌(遯軒)이며, 본관은 평택(平澤)이다. 1889년(고종26)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이 되었다가 낙안군수 겸 순천진동첨절제사(樂安郡守兼順天鎭同僉節制使)로 전임되었다. 1905년(광무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병을 모집, 200여 명을 인솔하고 담양(潭陽)으로 가던 도중 순창(淳昌)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체포되었다. 1909년(융희3)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돌아와, 1910년 왕의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도 순무대장(全羅南道巡撫大將)이 되어 항일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191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거문도(巨文島)에 유배되었으며, 1916년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저서에 돈헌문집 등이 있다.

433)맥술정(麥述丁):원나라 초기에 참지정사(参知政事)를 지냈으며, 강서(江西) 전투에서 문천상에게 대패한 뒤로 문천상에 대한 원한이 있었다. 원나라 세조가 문천상을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거부하자, 그를 죽이기를 극력 주장하였다. 申齋集 卷13

434) 단청(丹靑):단청은 초상화이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 곽광(霍光), 소무(蘇武) 등 공신(功臣) 11인의 초상화를 그려 기린각(麒麟閣)에 걸어 놓고 기렸던 고사가 있다. 漢書 卷54 李廣蘇建傳

435)하 사마(河司馬):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미상이다. 사마는 소과(小科)에 급제한 진사(進士)나 생원(生員)을 가리킨다.

436)붉은 샘:신선 세계에 있는 샘을 말하는 것으로, 상대가 은거하는 곳에 있는 샘물을 비유한 말이다. 한(漢)나라의 동방삭(東方朔)이 어릴 때 우물에 빠져 지하로 떨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안내하여 선초(仙草)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중간에 붉은 샘이 막혀서 건널 수가 없게 되자 신발 하나를 동방삭에게 주어 마침내 그 샘을 건너서 선초가 있는 곳에 이르러 캐서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酉陽雜俎 卷19

437)종뇌(宗雷):남조(南朝) 송(宋)나라의 고사(高士) 종병(宗炳)과 뇌차종(雷次宗)을 가리킨다. 종병은 141쪽 주218 참조. 뇌차종은 자가 중륜(仲倫)이다. 젊어서 여산(廬山)에 들어가 고승 혜원(慧遠)을 섬겼으며, 18인의 명사들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였다. 학문에 밝았으며, 삼례(三禮)와 모시(毛詩)에 특히 밝았다. 말년에는 종산(鍾山) 서암(西巖) 아래에 초은관(招隱館)을 짓고 살았다. 宋書 卷93 隱逸列傳 雷次宗

438) 伴:대본에는 ‘共’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439)방호(方壺):신선이 산다는 섬으로 방장(方丈)이라고도 한다.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다는 오도(五島)의 하나로 첫째는 대여(岱輿), 둘째는 원교(員嶠), 셋째는 방호, 넷째는 영주(瀛洲), 다섯째는 봉래(蓬萊)라 한다. 列子 湯問

440) 共:대본에는 ‘伴’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441)박맹옥(朴孟玉):미상이다.

442)멈춘 구름:117쪽 주184 참조.

443)옷을 거꾸로 입었었지:벗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옷을 거꾸로 입은 줄도 모른 채 달려 나가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송나라 시인 육유(陸游)의 객고문다불능접왕왕독좌지만희작(客叩門多不能接往往獨坐至晚戯作)이라는 시에, “집이 가난하여 오래도록 술과 음식 차리는 것 소홀하고, 객이 와도 더는 옷을 거꾸로 입지 않았네.[貧舍久疎羅酒漿 客來不復倒衣裳]”라고 하였다. 劍南詩藁 卷38

444)옥수(玉樹):옥과 같이 보배로운 나무라는 뜻으로, 남의 자제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보수(寶樹) 또는 경수(瓊樹)라고도 한다.

445)충사(蟲沙):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말하는 것으로,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후집(後集) 권37에, “주나라 목왕이 남쪽으로 정벌할 때 일군이 모두 죽으니, 군자는 원숭이나 학이 되고, 소인은 벌레나 모래가 되었다.[周穆王南征 一軍盡化 君子爲猿爲鶴 小人爲蟲爲沙]”라고 하였다.

446) 동계초당(東溪草堂):동계는 영조 때의 선비 신광택(申光宅)의 호이며, 초당은 현재 전남 광주 산수동과 계림동 일대의 동계천 주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천집(梅泉集) 권6에 <동계초당기(東溪草堂記)>가 있다.

447)서대초(書帶草):줄기가 질긴 풀이름으로, 한(漢)나라 때 정현(鄭玄)이 불기산(不其山) 아래에서 학생들을 모아 가르칠 때, 그 산 아래에 이 풀이 많이 났으므로, 문하생들이 그 풀을 가지고 책을 묶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古今事文類聚 後集 卷32

448)거문고……끊어지니:친한 벗이 죽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춘추 시대 때 거문고의 명인인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연주할 때면 그의 벗 종자기(鍾子期)만이 그 음률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고 서로 즐거워하였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거문고의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를 하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列子 湯問

449)총계생(叢桂生):총생(叢生)하는 계수나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은사를 부르는 노래를 의미한다. 회남소산왕(淮南小山王) 유안(劉安)이 지은 초은사(招隱士)에 “계수가 총생함이여, 산의 깊은 곳이로다.[桂樹叢生兮山之幽]” 하였는데, 한(漢)나라 왕일(王逸)의 주에, 계수나무는 굴원의 충성심을, 산이 깊은 것은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450)세한(歲寒)의 마음: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처럼 굳은 지조를 가리킨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하였다.

451)코를 잡고 읊네:남이 쉽게 따를 수 없는 고상한 시문을 뜻한다. 옛날 낙양(洛陽) 서생들의 음영(吟詠)하는 성조는 그 음색이 본디 무겁고 탁했는데, 동진(東晉) 때 사안(謝安)은 본래 비질(鼻疾)로 인해 음성이 탁해져서 낙양 서생들의 성조에 능했다. 당시 명사들이 대부분 그 성조를 좋아하면서도 따를 수가 없었으므로, 혹자는 손으로 코를 가리고 읊조려서 그 성조를 흉내 내기도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452)소금(素琴):조선 말기의 시인인 왕사천(王師天, 1842〜1906)의 호이다. 자는 칙지(則之)이고, 본관은 개성(開城)이다. 구례에서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매천의 스승인 왕석보(王錫輔, 1816〜1868)의 큰아들이며, 왕사각(王師覺), 왕사찬(王師瓚)과는 형제간이다. 김택영(金澤榮)이 이들 네 부자의 시를 묶어 개성가고(開成家稿)라는 문집을 발간하였다. 생전에 많은 시를 지었으나 현재는 50여 편만 전해지고 있다. 문집으로 소금유고(素琴遺稿)가 있다.

453)칠실(漆室)처럼 나라를 근심하다가:춘추 시대 노(魯)나라 목공(穆公) 때 임금은 늙고 태자는 어려서 국사가 매우 위태로우므로 칠실이라는 고을에 사는 과년한 처녀가 기둥에 기대어 한숨을 쉬면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였다는 고사를 가리킨다. 후에는 주로 자기 신분에 맞지 않는 근심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列女傳 漆室女

454)정학산 인기(鄭鶴山寅驥):자세한 사항은 미상이다. 매천이 박준필(朴準弼)과 함께 호남의 쌍봉(雙鳳)으로 추켜세울 만큼 문사에 뛰어났다.

455) 천추의……하였더니:문장 또는 자신의 사후의 일을 기대하였다는 의미이다.

456)용마루의 달:벗을 그리는 정이 간절함을 말하는 것으로, 당나라 두보(杜甫)의 몽이백(夢李白)이라는 시에 “지는 달빛이 용마루에 가득하니. 그대 낯빛인가 의심하게 되네.[落月滿屋梁 猶疑照顔色]”라고 한 것에서 나왔다.

457)서후부(書後訃):편지를 받고 얼마 안 가서 부음이 이르는 것을 말한다.

458)서창곡(徐昌穀):창곡은 명나라 때의 문장가이자 서예가인 서정경(徐禎卿, 1479〜1511)의 자이다. 당시풍의 시로 일가를 이루었다. ‘오중사재자(吳中四才子)’의 한 사람이며,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 변공(邊貢), 강해(康海), 왕구사(王九思), 왕정상(王廷相) 등과 함께 “문(文)은 진한(秦漢)을 본받고, 시(詩)는 성당(盛唐)을 본받는다.”라는 문학운동을 제창하여 ‘전칠자(前七子)’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도교에 심취하여 양생술에 힘썼으나, 33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저서로는 적공집(迪功集), 담예록(談藝錄) 등이 있다.

459)하중묵(何仲默):중묵은 명나라의 문장가인 하경명(何景明, 1483〜1521)의 자이다. 호는 대복(大復)이다. 1502년 진사에 급제하여,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 등을 역임하였다. ‘전칠자(前七子)’의 한 사람이며, 이몽양과 함께 ‘하이(何李)’로 병칭되었다. 저서로는 하대복선생집(何大復先生集), 하자잡언(何子雜言), 대복론(大復論) 등이 있다.

460)고용주(高墉柱):1865〜1930. 한말, 일제 때의 유학자이자 교육자이다. 자는 현중(玄仲)이고, 호는 봉계(鳳溪)이며, 본관은 장택(長澤)이다. 왕사찬(王師瓚, 1846〜1912)과 매천에게 사사하였다. 성균관 박사를 지냈으며, 전주양영학교, 구례보통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스승 매천이 자결하자 그가 집필하던 매천야록(梅泉野錄)의 1910년 8월 29일부터 9월 10일까지의 기록을 대신 보충하여 기록하였다.

461)희양(熙穰):사람들이 분주하게 이익을 좇아 오가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사기(史記) 권129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천하가 희희(熙熙)함은 모두 이익을 위해 오는 것이요 천하가 양양(壤壤)함은 모두 이익을 위해 가는 것이다.” 하였다. ‘壤’과 ‘穰’은 통용되었다.

462)첨윤(詹尹):초(楚)나라 때의 태복(太卜) 정첨윤(鄭詹尹)을 가리키는 것으로,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하여 굴원(屈原)이 자신의 진퇴를 알아보려고 찾아갔다고 한다. 楚辭 卜居

463)행장(行藏):행(行)은 세상에 나와 도(道)를 행하는 것이고, 장(藏)은 초야에 은둔하는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에 “써 주면 도(道)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 하였다.

464)소씨네……아내:소진(蘇秦)이 진(秦)나라에 가서 유세를 하였으나 실패하고 돈이 떨어지고 갖옷이 너덜너덜한 채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는 베틀에서 내려오지 않고 형수는 밥을 지어 주지 않았으며, 부모는 말을 걸지 않았던 고사가 있다. 戰國策 秦策1

465)등위산(鄧尉山) 동갱산(銅坑山):193쪽 주343 참조.

466)김우림(金于霖):184쪽 주324 참조.

467)계응(季鷹):진(晉)나라의 문신이자 고사(高士)인 장한(張翰)의 자이다. 그가 오군(吳郡) 사람이고, 성 역시 장씨이므로 장건(張)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468)장 한림(張翰林) 계직(季直):계직은 청나라 말기의 사상가이자 정치가, 교육가인 장건(張謇, 1853〜1926)의 자이다. 호는 색암(嗇庵)이며, 중국 강소성 남통(南通) 사람이다. 1876년에 오장경(吳長慶)의 막하에 들어 원세개(袁世凱)와 함께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오장경의 군대가 난을 평정한다는 명분으로 파견되었을 때 수행하여 조선에 건너와 조선의 지식인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다. 1885년 중국 순천부(順天府)에서 열린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1894년 자희태후(慈禧太后)의 환갑을 기념하는 과거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한림원 수찬(翰林院修撰)에 임명되었다. 그 후로도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열강이 침입하고 국사가 날로 어긋나는 것을 보고는 의연히 벼슬을 버리고 실업교육(實業敎育)을 통한 구국활동에 매진하였다.

469) 憐:대본에는 ‘隣’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470) 면암(勉菴):165쪽 주272 참조.

471)벽계(蘗溪):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서 태어난 이항로(李恒老, 1792∼1868)를 가리킨다. 이항로의 초명은 광로(光老)이고, 자는 이술(而述)이며, 호는 화서(華西)이다.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1808년(순조8) 한성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로는 과거를 포기한 채 향리에서 강학을 하여 최익현,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등을 길렀다. 동부승지, 공조 참판 등을 지냈다.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로 꼽힌다.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화서집,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472)남의……높아졌네:남의 집은 국가를 말하고, 불을 끈다는 것은 국가의 화급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이다. 최익현이 1873년(고종10)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을 때 사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하자 당시 친정(親政)을 생각하고 있던 고종이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호조 참판에 임명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473)정씨(程氏)의 삼혼(三魂):정씨는 송(宋)나라 때의 유학자인 이천(伊川) 정이(程颐)이다. 삼혼은 그 제자 중에서 조정(趙鼎)은 존혼(尊魂), 왕거정(王居正)은 강혼(强魂), 양시(楊時)는 환혼(還魂)이라고 불렀던 것을 가리킨다. 宋名臣言行錄 别集下 卷4 趙鼎

474)조정(趙鼎):남송(南宋)의 재상이자 문장가이다. 자는 원진(元鎭)이고, 호는 득전거사(得全居士)이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106년에 진사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쳐 두 차례나 재상에 올랐다. 걸출한 정치적 능력과 고상한 인품으로 인해 남송의 현상(賢相)을 거론할 때는 그를 첫 번째로 꼽았다. 금(金)나라에 땅을 떼어 주고 화친을 하자는 진회(秦檜) 일당에게 맞서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한 다음 전쟁을 통해 실지(失地)를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좌천되어 유배를 당했다. 죽기에 앞서 스스로 명정(銘旌)을 쓰기를, “몸은 기미성(箕尾星)을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지만, 기상은 산하가 되어 이 나라를 장대하게 하리라.[身騎箕尾歸天上 氣作山河壯本朝]” 하고는 밥을 먹지 않고 죽었다. 宋史 卷360 趙鼎列傳

475)고정(考亭):송나라의 유학자 주희(朱熹)의 호이다. 201쪽 주359 참조.

476)희원(希元):송나라의 유학자인 진덕수(眞德秀, 1178〜1235)의 자이다. 호는 서산(西山)이며, 본성은 신(愼)이다. 1199년에 19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었고, 1205년에 박학굉사과(博學宏词科)에 합격하였다. 주자의 정통을 이었으며, 주자학이 국가의 공식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치를 궁구하는 것보다는 성인들이 전해 온 심법으로서의 경(敬)을 중시하였다. 그의 저서 대학연의(大學衍義)심경(心經)은 후대의 제왕들과 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심경은 조선의 학자들이 심학을 공부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宋史 卷437 儒林列傳 眞德秀

477)남관(南冠):235쪽 주429 참조. 최익현은 1905년(광무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74세의 고령으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하고, 체포되어 3년형을 언도받고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

478)적석(赤舃):원래는 임금이나 제후가 정복을 입을 때 신는 신을 말하지만, 후대에는 고관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여기서는 최익현이 1902년(광무6)에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으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479)눈 속 움막:타국에 갇혀 있는 곳을 말한다. 한(漢)나라의 충신인 소무(蘇武)가 무제(武帝) 때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의 선우(單于)로부터 항복하라는 회유와 협박을 받고도 끝내 굴하지 않은 채 큰 움[大窖] 속에 갇혀 쌓인 눈을 녹여 마시고 전모(氈帽)를 뜯어 먹으면서도 끝까지 한나라 사신의 정절(旌節)을 지키다가 19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던 고사가 있다. 漢書 卷54 蘇武傳

480)만 길 무지개 뻗쳤네:29쪽 주12 참조.

481)여귀(厲鬼) 되길 기약했으리니:231쪽 주419 참조.

482)영광(靈光):한(漢)나라 때의 전각인 영광전(靈光殿)을 말하는 것으로, 보통 쉽게 없어지지 않고 우뚝하게 홀로 남은 훌륭한 물건이나 사람을 가리킨다. 경제(景帝)의 아들 공왕(恭王)이 일찍이 노(魯) 땅에 영광전을 지어 놓았는데, 한나라 중엽에 도적떼가 일어나 서경(西京)의 미앙궁(未央宮)과 건장전(建章殿) 등은 모두 파괴되었으나 영광전만은 우뚝이 남아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六臣註文選 卷11 魯靈光殿賦

483)동타(銅駝)가 땅에 쓰러지니:211쪽 주374 참조.

484)화학(華鶴)이 하늘 찌르니:화학은 요동(遼東)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은 학(鶴)을 말한다. 한(漢)나라 때 요동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는데, 천 년 뒤에 학으로 변하여 다시 고향으로 날아와 화표주에 앉았다. 마을의 소년들이 보고 활을 쏘아 잡으려고 하자, 훌쩍 날아 공중에서 배회하다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날아올라 갔다고 한다. 搜神後記 卷1

485)유표(遺表):대신을 지낸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임금에게 올리는 표문을 말한다. 최익현은 대마도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단식을 하며 죽기로 각오하고, 국제 정세로 볼 때 일본이 망할 것은 틀림없으니 포기하지 말고 나라의 자립을 위해 노력할 것을 청하는 내용의 유소(遺疏)를 함께 갇힌 임병찬(林炳瓚)에게 구술(口述)로 전했다.

486)과하(過河)를……외쳤네:죽음을 맞이하였다는 말이다. 송(宋)나라의 대표적인 항전파(抗戰派)로서, 금(金)나라와의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던 종택(宗澤)은 피란 가 있던 고종(高宗)에게 서울인 변경(汴京)으로 돌아와 민심을 수습하여 실지(失地)를 회복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20여 차례나 올렸으나 간신들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자 울분으로 등창이 생겨 죽게 되었는데, 집안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직 “강을 건너 쳐들어가야 한다.[過河]”는 말만 세 번 부르짖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또한 유표(遺表)에서도 여전히 임금이 변경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였다고 한다. 宋史 卷360 宗澤列傳

487)큰 새가……이르고:후한(後漢)의 양진(楊震)이 간신들의 모함으로 좌천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독약을 먹고 죽었는데, 장사 지내는 날 큰 새가 날아와 관 앞까지 천천히 걸어간 다음 멈춰 서서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554

488) 교묘한……돌아오네:소인배가 다시 판을 치게 되었다는 의미인 듯하나, 정확한 고사는 미상이다. 당(唐)나라의 명장 곽자의(郭子儀)의 집 앞에 있던 못에 교룡이 살면서 해악을 끼치고 있었는데, 곽자의가 살아 있을 때는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가 곽자의가 죽은 뒤에 다시 돌아왔다는 설이 있으나, 근거를 찾지는 못하였다.

489)난성(蘭成):북주(北周)의 문장가 유신(庾信, 513581)의 어릴 적 이름이다. 자는 자산(子山)이다. 육조 시대의 최후를 장식하는 시인으로, 당대(唐代) 율시(律詩)의 선구가 되었으며, 서릉(徐陵)과 함께 서유체(徐庾體)로 일컬어졌다. 모국 양(梁)나라가 망하고 난 뒤, 북주의 무제(武帝)가 그의 재주를 아껴 극진한 예우를 해 주었으나, 모국 양나라를 그리는 마음이 사무쳐 그 비통한 심정을 시가로 노래하였으며, 대표적인 작품이 애강남부(哀江南賦)이다. 저서로 유자산문집(庾子山文集)이 있다.

490)사장(沙場)에서 과혁(裹革)할 일:사장은 병사들이 전투하다가 죽어 간 전장을 가리킨다. 과혁은 가죽에 싼다는 뜻으로,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뒤 말가죽에 싸여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사나이라면 마땅히 전쟁터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체가 싸여 돌아와 묻혀야 한다.”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491) 裹:대본에는 ‘裏’라고 되어 있으나, ‘裹’의 오자이므로 바로잡았다.

492) 복 외치고:사람이 죽었을 때, 그 혼이 떠돌지 못하도록 초혼(招魂)하는 의식을 말한다.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시자(侍者) 1인이, 죽은 이가 평상시에 입었던 웃옷[上服]을 가지고 왼손으로는 목단[領] 부분을, 오른손으로는 허리부분을 잡은 채, 앞쪽 처마[前榮]를 통해서 지붕의 중앙[中霤]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웃옷으로 초혼(招魂)을 하면서, ‘아무개는 돌아오라.[某復]’고 세 번 외친다.” 하였다.

493)천정(天定):어긋났던 천도가 원래대로 회복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사기(史記) 권66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 “사람의 수가 많은 경우에 하늘을 이길 수도 있지만, 하늘이 정해지면 또한 사람을 무너뜨리는 법이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이라고 하였다.

494)시시(柴市)의 아픔:혹독하게 형벌을 받아 죽는 것을 가리킨다. 최익현은 일본 대마도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단발을 거부하고 단식을 하며 버티다가 결국 병을 얻어 죽었다. 시시는 송(宋)나라 말기의 재상(宰相)이자 충신인 문천상(文天祥)이 적들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사형을 당했던 북경(北京)의 시시를 가리킨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495)냉산(冷山):외국의 감옥을 뜻한다.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의 충신인 홍호(洪皓)가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15년 동안 냉산에 갇혀 있다가 돌아왔는데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송나라의 소무(蘇武)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宋史 卷373 洪皓列傳

496) 국화(國華):나라의 광영, 보배, 또는 나라를 빛낼 만한 위업을 남긴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497)장혈(藏血)이……때라네:충성이 지극하여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자 외물(外物)에 “장홍(萇弘)이 촉 땅에서 죽으니, 그 피를 보관하였는데, 3년이 지나서 벽옥으로 변해 있었다.” 하고, 성현영(成玄英)의 주석에, “장홍이 참소를 받고 추방을 당하여 촉 땅으로 돌아왔는데, 충성을 다하고도 참소를 받는 것이 스스로 한스러워 마침내 배를 갈라 죽었다. 촉 땅의 사람들이 감동하여 그 피를 상자에 담아 두었는데, 3년 만에 변하여 벽옥이 되었으니, 이는 정성이 극에 달한 것이다.” 하였다.

498)술……가득하네:술을 마시며 애통하게 최익현을 추모하고 있는 매천 자신도 이미 늙어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서대(西臺)는 존경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곳을 말하고, 사 참군(謝參軍)은 문천상(文天祥)이 원(元)나라에 대항하는 군대를 일으켰을 때 그 막하에서 자사참군(諮事參軍)을 지냈던 사고(謝翶)를 가리킨다. 187쪽 주336 참조.

499)정미고(丁未稿):1907년(융희1), 매천이 53세 되던 해에 지은 시들이다.

500)어량(漁梁):보통 조수 간만의 차가 큰 갯가나 오목하게 들어간 만(灣) 같은 곳에 물만 드나들 수 있도록 나무 장대를 촘촘하게 세워 물고기가 밀물을 타고 들어왔다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어살(漁箭)을 말한다. 섬진강의 경우에는 대나무로 닭장처럼 얽어 설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501)준치에……있으랴:송(宋)나라의 팽연재(彭淵材)가 다섯 가지 한스러운 것을 꼽기를, “첫째는 준치에 가시가 많은 것이고, 둘째는 귤이 신맛을 띠는 것이고, 셋째는 순채의 성질이 냉한 것이고, 넷째는 해당화에 향기가 없는 것이고, 다섯째는 증자고가 시에 능하지 못한 것이다.[一鰣魚多骨 二金橘帶酸 三蓴菜性冷 四海棠無香 五曾子固不能詩]”라고 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502)축경편(縮頸鯿):물고기 이름인 사두축경편(槎頭縮頸鯿)의 준말로, 사두편(槎頭鯿)이라고도 한다. 등이 활처럼 휘고 청색을 띠고 있으며 회 맛이 특히 좋다고 하는데, 당(唐)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현담작(峴潭作)과 두보(杜甫)의 해민(解悶)에서 언급하면서 유명해졌다.

503)대한의……버렸던고:1889년(고종26)에 일본과 통어장정(通漁章程)을 체결하여 조선 근해에서의 일본의 어획을 용인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이후로 일본 어부들은 고흥군 봉래면 창포(滄浦)에 대거 거주하면서 우수한 설비를 바탕으로 참장어 등 어류를 거의 독점적으로 포획하였다고 한다.

504) 우주를 슬퍼하네:천하의 운기(運氣)가 순리적으로 흐르지 않고 막히는 바람에 세상에 온갖 재난이 발생하고 세도가 날로 비색해지게 됨을 슬퍼한다는 의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홍호(洪鎬)의 <제이공백명문(祭李公伯明文)>에, “우주가 비색함을 슬퍼하고, 윤상이 인몰됨을 강개해 했네.[悲宇宙之晦塞 憤倫紀之堙沒]”라고 하였다.

505)교산(蛟山):교룡산(蛟龍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북 남원시에 있는 산이다. 산기슭에서 정상까지는 돌을 깎아 쌓은 교룡산성(蛟龍山城)이 있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병 1만여 명이 이곳에서 산화하였다.

506)칠리정(七里亭):경남 함양읍 죽곡리 서편에 있던 정자로, 고종 때 위고(渭皐) 노근수(盧近壽, 1845〜1912)가 세웠다. 지금은 무너지고, 터와 현판만 남아 있다.

507)명장(名場)의 사업:과거를 통해 현달하는 것을 말한다.

508)걸화서(乞花書):꽃가지 또는 꽃모종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는 편지를 말한다.

509)엄릉뢰(嚴陵瀨):은거하는 곳을 뜻한다.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의 동강(桐江)에 있는 지명으로 엄뢰(嚴瀨)라고도 하는데, 후한(後漢)의 은사(隱士)인 엄광(嚴光)이 은둔하여 낚시질한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엄광은 어려서 광무제(光武帝)와 친한 사이였는데, 광무제가 즉위한 뒤 높은 벼슬을 내리며 부르자 곧 이름을 바꾸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여 낚시질하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

510) 금문(金門):중국 한(漢)나라 때 궁궐의 궁문(宮門)이었던 금마문(金馬門)을 가리키는 것으로, 금규(金閨)라고도 하였다. 대궐이나 임금과 가까운 곳을 말한다. 文選 別賦

511)세한(歲寒):세상의 험한 환경을 가리킨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하였다.

512) 쇠 벼루 갈아 뚫던: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오대(五代) 진(晉)나라 상유한(桑維翰)이 처음 과거를 보려다가 주사(主司)에게 내침을 받자, 어떤 이가 그에게 과거를 보지 말고 달리 벼슬을 구하도록 권하니, 그가 쇠 벼루를 주조하여 남에게 보이면서 “이 쇠 벼루가 뚫리면 다른 길을 알아보겠다.”라고 말하고서 열심히 노력하여 끝내 진사에 합격하였던 고사가 있다. 新五代史 卷29 晉臣列傳 桑維翰

513)수겁춘(首劫春):환갑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의미는 미상이다. 일반적으로 겁은 천지가 한 번 개벽할 정도의 아주 오랜 시간을 말한다.

514)세아(洗兒):아이가 출생한 지 3일째 되는 날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고, 아이의 몸을 씻기는 풍습으로, 당(唐)나라 때 유행하였다. 안녹산(安祿山)이 양귀비(楊貴妃)의 양자가 되어 갓난아이 분장을 하고 궁녀들이 멘 가마를 타고 궁궐을 돌다가 물속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 시늉을 하였다는 고사가 있는데, 자치통감(自治通鑑) 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10년 조에, “상께서 후궁들이 기뻐서 웃는 소리를 듣고 그 까닭을 물으니, 좌우에서 귀비(貴妃)가 3일에 녹아(祿兒)를 씻기는 것 때문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상께서 직접 가서 보고는, 기뻐서 귀비에게 세아금은전(洗兒金銀錢)을 하사하였다.” 하였다.

515)양좌(羊左)처럼……어긋났네:벗이 함께 살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양좌는 춘추 시대 때 연(燕)나라 사람으로 매우 친한 사이였던 양각애(羊角哀)와 좌백도(左伯桃)를 가리킨다. 초(楚)나라 임금이 선비들을 잘 대우한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길을 떠났다가 길에서 눈보라에 갇히고 양식도 떨어져 가자 좌백도는 자신의 옷과 양식을 모두 양각애에게 양보하면서 죽은 나무에 난 구멍 속에 들어가 추위를 피하다 죽었다. 할 수 없이 홀로 떠나간 양각애는 초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높은 지위에 오른 뒤, 좌백도의 시신을 찾아 새로 묻어 주고는, 자신도 자결하여 그 곁에 묻혔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23

516) 북문에……있으랴:시절이 수상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이다. 혜호(惠好)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말한다. 학정(虐政)을 풍자한 시경 북풍(北風)에 “북풍이 차갑게 부는 데다 함박눈도 펑펑 내리도다.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이와 손잡고 함께 떠나가리라.[北風其涼 雨雪其雱 惠而好我 攜手同行]” 하고, 주희(朱熹)의 주에, “북풍우설(北風雨雪)을 말하여 국가의 위란(危亂)이 장차 이르러 기상(氣象)이 서글프고 참혹함을 비유하였다.” 하였다.

517) 금수의 자취:금수는 오랑캐, 즉 청나라나 일본 등의 외세를 뜻하는 것으로, 송(宋)나라 구규(丘葵, 1244〜1333)의 시에, “거북 규범, 말 그림 같은 상서가 모두 안 보이니, 짐승과 새 발자국만 참으로 분분하네.[龜範馬圖俱寂寂 獸蹄鳥跡正紛紛]”라고 하였다. 釣磯詩集

518)결하승(結夏僧):결하하는 승려라는 뜻이다. 결하는 비구들이 여름 장마철에 90일 동안 한곳에 머물면서 정진 수행하는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하안거(夏安居) 또는 우안거(雨安居)라고도 한다.

519)부모는……있네:기역(箕域)은 기자(箕子)의 영역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가리키고, 우역(禹域)은 우(禹) 임금의 영역이라는 뜻으로 중국을 가리킨다.

520) 호봉 상인(虎峯上人):호봉은 조선 후기의 선승(禪僧)인 응규(應奎)의 호이다. 전남 광주 봉은사(奉恩寺)에 주석(住錫)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1810년(순조10)에 해남의 표충사 총섭(表忠祠摠攝)으로 나가 화엄경(華嚴經) 80권을 필사(筆寫)한 뒤, 판각하여 인출하였다.

521)모연(募緣):착한 인연을 맺을 사람을 모집한다는 뜻으로, 절에서 기와를 갈거나 건물을 짓는 등의 불사(佛事)를 행할 때, 소요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신도들에게 재물을 보시하도록 권하는 것을 말한다.

522)인개족(鱗介族):보통은 비늘 가진 물고기와 딱딱한 껍질을 지닌 수중 생물들을 통틀어 가리키지만, 그와 같이 비천한 소인배나 오랑캐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후한서(後漢書) 권48 양종열전(楊終列傳)에, “광무(光武)가 서역국(西域國)과 단절하여, 개린(介鳞)으로 하여금 우리의 의상으로 바꿔 입지 못하게 하였다.” 하고, 이현(李賢)의 주석에, “개린은 먼 오랑캐를 비유하니, 그 사람들이 물고기나 자라와 차이가 없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하였다.

523)행각(行脚):승려가 일정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며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524)만일회(萬日會):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불교의식의 하나로, 1천 일 또는 1만 일 동안 아미타불을 부르며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 혹은 염불계(念佛契)라고도 한다.

525)여섯 때:불교에서 말하는 낮 세 때[晝三時]와 밤 세 때[夜三時]를 합친 것으로, 낮은 신조(晨朝), 일중(日中), 일몰(日沒)이고, 밤은 초야(初夜), 중야(中夜), 후야(後夜)이다. 이때마다 예불(禮佛)을 한다. 阿彌陀經

526)파책(波磔):예서(隸書) 필법의 한 특징으로, 가로획의 끝 부분이 아래로 꺾였다가 위로 향하여 올라가는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그냥 일반적인 서예의 기법을 가리킨다.

527)회소(懷素):725〜785. 당(唐)나라 때의 서예가이자 승려이다. 왕희지(王羲之)의 서법을 연구하여, 동시대의 장욱(張旭)과 함께 초서로 이름이 높았다. 술에 취하여 흥이 오르면, 붓을 놀려 물이 흐르는 듯이 유연한 초서(草書), 즉 광초(狂草)를 즐겨 썼다고 한다. 필적으로 자서첩(自敍帖), 성모첩(聖母帖), 장진첩(藏眞帖) 등의 법첩이 남아 있다.

528)구준(勾皴):산수화를 그리는 기법의 하나로, 구(勾)는 사물의 윤곽을 묘사하는 방법이고, 준(皴)은 산 바위의 종류, 질감, 음영 등을 표현하여 산의 중후함을 나타내는 기법이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산수화의 기법을 말한다.

529)거연(巨然):907960. 중국 오대(五代) 때의 승려로, 산수화에 능하여 남종화(南宗畵)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산 속의 길, 누정(樓亭), 인물(人物) 같은 대상의 묘사에 뛰어났으며, 평담(平淡)하고 천진(天眞)한 화풍으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530)광릉(光陵):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와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 1418∼1483)의 능이다. 여기서는 세조를 가리킨다.

531)제작(制作):예법을 제정하고 음악을 짓는다는 뜻의 제례작악(制禮作樂)의 준말로, 예기 명당위(明堂位)에 “주공께서 예법을 제정하고 음악을 지으며 도량형을 반포하자 천하가 크게 복종하였다.” 하였다. 여기서는 나라의 제도를 정비하여 교화를 새로 펴는 것을 말한다.

532)추피(麤皮)냐 노골(老骨)이냐:추피는 주름이 가득한 피부로서, 당나라 두보의 시풍을 표현한 말로 보인다. 매천의 기수석정노우(寄壽石亭老友)라는 시에, “자못 의아하였네, 황진의 무리들이, 힘써 주름 가죽을 보존하려 애쓰는 것을.[頗訝黃陳輩 力竭麤皮存]”이라 하고, 그 주석에, “군(君)이 두보의 칠언율시를 좋아하므로, 내가 항상 힐박(詰駁)하였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梅泉集 卷3 韻海內存知己天涯若比鄰十字寄壽石亭老友 노골은 늙은 뼈, 늙은이라는 의미로, 황정견(黃庭堅)의 시풍을 표현한 말로 보인다. 명(明)나라 왕세정(王世貞)의 산곡서창려시(山谷書昌黎詩)에, “평소에 산곡의 글을 보면 험측(險側)한 것으로 기세를 삼고, 횡일(横逸)한 것으로 공력을 삼아, 노골이 자빠지는 듯한 태가 자주 튀어나왔다.[老骨顚態 種種槎出]” 하였다.

533)소란스러울 때:사아(槎枒)는 초목이나 바위 등이 들쭉날쭉하거나, 말이 정돈되지 못하는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의 추피(麤皮)와 노골(老骨), 즉 두보의 시풍과 황정견의 시풍을 배우는 경향이 제각각이었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참고로 사아는 송(宋)나라 시인들, 그중에서도 주로 강서시파(江西詩派)의 폐해를 지적할 때도 쓰이는데, 청(清)나라 전영(錢泳)의 이원총화(履園叢話)에, “훗날 풍정원(馮定遠)이 산곡(山谷)의 시를 논한 것을 보니, ‘강서시파의 거칠고 속되며 정제되지 못한[槎枒] 병통이 한번 붓 끝에 들면, 곧 아홉 마리 소로도 뽑아낼 수 없으니, 반드시 의산(義山), 서곤(西崑) 같은 시체(詩體)들을 가지고 물리쳐야 한다.’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534)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호이다. 자는 계온(季昷) 혹은 효관(孝盥)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1453년(단종1)에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5)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함양 군수, 형조 판서, 지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등 많은 제자를 길렀다. 사후인 1498년(연산군4),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한 후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佔畢齋集),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등이 있다.

535)택지(擇之):이행(李荇, 14781534)의 자이다. 호는 용재(容齋) 혹은 청학도인(靑鶴道人)이고,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1495년(연산군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종의 폐비인 윤씨(尹氏)의 복위를 반대한 죄로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풀려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중종의 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반대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승승장구하여 이조 판서, 우의정에 올라 대제학을 겸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찬술에 참여하였으며, 김안로(金安老)를 논박하다가 함종(咸從)에 귀양 가서 죽었다.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처음 시호는 문정(文定)이었으나, 후에 문헌(文獻)으로 개시(改諡)되었다. 문집에 용재집(容齋集)이 있다.

536)사화(士華):남곤(南袞, 1471〜1527)의 자이다. 호는 지정(止亭) 혹은 지족당(知足堂)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1489년(성종20)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다. 1494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사가독서를 하였다. 성종 때 대신 윤필상(尹弼商)을 탄핵하였다가 투옥되었고, 갑자사화 때 직언을 하다가 서변(西邊)에 유배되었다. 1518년(중종13)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하였다. 대사헌, 이조 판서,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당대에 손꼽히던 문장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정(沈貞) 등과 기묘사화를 주도하여 신진사류를 해친 탓에 후대에까지 소인배로 지목되었으며, 만년에 자괴감을 못 이겨 자신의 저작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문집에 지정집, 저서에 유자광전(柳子光傳), 남악창수록(南岳唱酬錄) 등이 있다.

537)경수(瓊樹)에……마시라:경수는 보배로운 자질을 지닌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을 비유한 말로, 박은이 뛰어난 시재에도 불구하고 일찍 죽어 간 것을 말한다.

538)읍취헌(挹翠軒):박은(朴誾, 1479∼1504)의 호이다. 자는 중열(仲說)이고, 본관은 고령이다. 15세 때 이미 문장에 능통하였으며, 당시 대제학이었던 신용개(申用漑)가 사위로 삼았다. 1495년(연산군1) 17세로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가독서를 하였다. 1498년 20세의 약관으로 유자광(柳子光)을 논박하는 소를 올렸다가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갑자사화 때는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어 26세의 나이로 사형을 당했다. 3년 뒤 신원되고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히며, 친구인 이행(李荇)이 그의 시를 모아 읍취헌유고를 간행하였다.

539)제백추지(帝魄秋枝):눌재집(訥齋集)4 숙오산문두견유감(宿鼇山聞杜鵑有感)이라는 시에, “가을 나뭇가지에서 두견새가 화답하네.[帝魄秋枝款款賡]”라는 구절이 있다.

540)건릉(健陵)의 칭찬:건릉은 정조(正祖)의 능호이다. 정조는 일득록(日得錄)에서 조선의 역대 시인들을 평하면서, “우리나라의 시율(詩律)로는 대부분 석주(石洲), 동악(東岳), 읍취헌(挹翠軒), 간이(簡易)를 꼽는데, 간이는 꾸밈이 앞서고, 읍취헌은 더러 고매(高邁)한 수준에까지 이르기도 하지만 사소한 흠도 있으며, 동악은 태반이 수창조(酬唱調)이고, 석주는 너무 부드럽고 곱다. 유독 박눌재가 이들의 장점을 겸비하였으니, 응당 으뜸이 될 것이다.” 하는 등, 누차 박상(朴祥)의 시재를 칭찬하였다. 弘齋全書 卷162

541)눌재(訥齋):박상(朴祥, 1474∼1530)의 호이다. 자는 창세(昌世)이고,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496년(연산군2) 진사가 되고, 150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05년에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를 지냈다. 성품이 강직하여 권세자의 폐해를 거침없이 논박하였으며, 1515년(중종10) 순창 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박원종(朴元宗) 등 훈신(勳臣)이 임금을 협박하여 국모를 내쫓은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다. 1526년 문과 중시에 장원을 하고, 이듬해 나주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저서로는 눌재집이 있다.

542)서곤체:당(唐)나라 말기의 시인인 이상은(李商隱)의 시풍을 추종하던 송(宋)나라 초기의 시인 양억(楊億)과 유균(劉筠) 등의 시체를 가리킨다. 이들은 감상적이고 미려한 시구를 선호하였으며, 서로 수창하는 일을 즐겨 당시에 지었던 시문을 모아 서곤수창집(西崑酬唱集)을 엮었는데, 서곤체라는 명칭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543)임기(林芑)의 주석:임기(?〜1592)는 호가 수호자(垂胡子)이며, 정사룡(鄭士龍)의 문하에서 시를 배운 제자이다. 박학다식하기로 당대에 손꼽힐 정도라서 많은 사람들이 시문에 사용된 고사의 출처를 문의하였다고 한다. 그가 단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주석은 후대에까지 널리 애용되었다. 제호시화(霽湖詩話)에 의하면 정사룡이 죽기 전에 자신의 시집에 주석을 달아 줄 것을 청하였는데, 중첩되는 고사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1권만 달고 말았다고 한다.

544)호음(湖陰):정사룡(鄭士龍, 1491∼1570)의 호이다. 자는 운경(雲卿)이고,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509년(중종4)에 생원이 되고, 이해 별시 문과에 합격하였다. 1514년에 사가독서하였고, 1516년에 황해도 도사로서 문과 중시에 장원하였다. 1534년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44년 다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4년(명종9) 대제학이 되었으나 1558년 과거의 시험문제를 누설한 혐의로 파직되었다. 그의 시재는 중국에서까지 격찬을 받았으며, 특히 칠언율시에 능하였다. 글씨에도 능했으나, 탐학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저서로는 호음잡고(湖陰雜稿)가 있다.

545)장강(瘴江):독기 서린 강가라는 뜻으로, 주로 유배지의 습한 풍토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546)염매(鹽梅)의 사업:임금을 잘 보필하는 정승으로서의 역할을 가리킨다. 염매는 음식의 양념이 되는 소금과 매실(梅實)로,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내가 국을 끓이려고 하거든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 주오.[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하였던 고사가 있다. 書經 說命下

547)봉덕(鳳德)이 쇠하였다네:이미 시문의 격조가 떨어졌음을 뜻한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은자(隱者) 접여(接輿)가 공자의 수레 앞을 지나면서 노래하기를 “봉새여, 봉새여, 어찌 그리 덕이 쇠한고.[鳳兮鳳兮 何德之衰]”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微子

548)소재(齋):노수신(盧守愼, 1515〜1590)의 호이다. 자는 과회(寡悔)이고, 본관 광주(光州)이다. 1543년(중종38) 식년 문과에 장원을 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인종이 즉위한 후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이기(李芑)를 논핵하여 파직시켰다. 을사사화 때 순천(順天)으로 유배되었으며,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진도(珍島)로 이배되어 19년 동안 귀양살이하였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이후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기축옥사 때 정여립(鄭汝立)을 천거한 죄로 파직되었다. 문장과 서예에 능하였고, 양명학(陽明學)에 조예가 있었으며, 휴정(休靜) 등과도 교유가 있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문집에 소재집이 있다.

549)백옥봉(白玉峯):옥봉은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의 호이다. 자는 창경(彰卿)이고, 본관은 해미(海美)이다.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13세에 상경하여 양응정(梁應鼎)과 노수신(盧守愼) 등에게서 수학하였다. 1564년(명종19) 진사가 되었으나 현실에 나설 뜻을 버리고 강호에서 자적하였다. 1572년(선조5) 명나라 사신이 오자 백의(白衣)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시재(詩才)와 글씨로 사신을 감탄시켰다. 선릉 참봉(宣陵參奉) 등을 지냈다. 송시(宋詩)의 시풍을 버리고 당시(唐詩)의 시풍을 따랐으므로,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칭해진다. 글씨는 왕희지의 서체를 빼닮았다. 이산해(李山海), 최립(崔岦) 등과 더불어 조선 팔문장(八文章)으로 꼽힌다. 저서로는 옥봉집이 있다.

550)낭잠(郞潛):불운하여 오래도록 낮은 벼슬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안사(顔駟)는 문제(文帝) 때 말직인 낭관이 되었으나 늙어 백발이 되도록 승진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무제(武帝)가 그를 발견하고, “노인은 언제 낭관이 되었는가? 왜 그리도 늙었는가?” 하니, “신은 문제 때 낭관이 되었으나, 문제께서는 문(文)을 좋아하셨는데 신은 무(武)를 좋아했으며, 경제(景帝)께서는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셨는데 신은 모양이 추하였으며, 폐하께서는 젊은이를 좋아하시는데 신은 이미 늙었습니다. 그 때문에 삼대가 지나도록 지우를 입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던 고사가 있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44 顔駟不遇

551)전혀 고실(故實) 없어도:시문에 전고를 사용하지 않거나, 쓰인 표현이 출처가 없는 것을 가리킨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때의 종영(鍾嶸)의 시품(詩品)에, “‘맑은 새벽에 언덕머리에 오르다.’라는 시구는 전혀 고실이 없다.[清晨登隴首 羌無故實]” 하였다.

552)오절(五絶)은……종사이리:오절은 오언절구를 말한다. 이정귀(李廷龜)는 옥봉집 서문에서 백광훈을 당나라의 천재 시인 이하(李賀)에 비하면서, 특히 절구에 능하였다고 평하였다.

553)외가가 없을 때:외가가 미천하여 내세울 만큼 변변하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이달(李達)은 서출이었는데, 어머니가 천민인 기생첩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이 서자 황상(黃相)을 놀리며 지은 조소덕(嘲小德)이라는 시에, “능히 잠부론(潛夫論)을 지었을 정도이니, 외가가 없는 것이 무슨 문제이랴.[解著潜夫論 不妨無外家]” 하였는데, 동한(東漢)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정치가, 문학가로 잠부론을 지은 왕부(王符)가 서출인 것에 빗댄 것이다.

554)위명(威明):후한의 이름난 장수로서, 왕부를 크게 인정한 황보규(皇甫規)의 자이다. 황보규는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워 귀한 신분이 되었다가 은퇴하여 고향 안정으로 돌아왔을 때, 왕부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 일어나 미처 의관을 정제하지도 못한 채 허둥지둥 그를 맞이하였는데, 그보다 앞서 안문 태수(鴈門太守)가 왔을 때는 제대로 예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천석의 태수 보기를 일개 선비만도 못하게 하였네.[徒見二千石 不如一逢掖]” 하였던 고사가 있다. 古今事文類聚 别集 卷24

555)손곡(蓀谷):이달(李達, 1539〜1612)의 호이다. 자는 익지(益之)이고,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정사룡(鄭士龍)과 박순(朴淳) 등의 문인(門人)으로, 문장과 시에 능하고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다. 벼슬은 서출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한리학관(漢吏學官)에 그쳤다.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잘 지어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칭해졌다.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다. 저서에 손곡시집(蓀谷詩集)이 전한다.

556)구봉(龜峯):송익필(宋翼弼, 1534∼1599)의 호이다. 자는 운장(雲長)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성리학 및 예학에 깊은 조예를 이루었다. 김장생(金長生), 정엽(鄭曄), 서성(徐渻) 등의 스승이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을 막후에서 지휘하였다. 원래 노비의 집안이었다가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이 안처겸(安處謙)을 고변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랐는데, 1586년(선조19)에 그것이 조작임이 밝혀져 형제들이 도로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성명을 바꾸고 도피생활을 하다가, 1589년 기축옥사 때 다시 회복되었다. 그 후 조헌(趙憲)의 상소에 관여한 죄로 아우와 함께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가,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이후 벗이나 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죽었다.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선조대의 8문장가로 칭해졌다. 시는 이백(李白)을 표준으로 하였고, 문장은 좌구명(左丘明)과 사마천(司馬遷)을 위주로 하였다. 저서로는 구봉집이 있다.

557)영원(寧遠)의 가아(家兒):임진왜란 때 원병을 이끌고 파견되었던 명(明)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가리키는데, 이여송의 아버지가 영원후(寧遠侯)에 봉해졌으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558)영원의……추켜세워:이여송이 최립(崔岦)의 시를 매우 극찬한 것을 가리키는 듯한데,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정조(正祖)의 일득록(日得錄) 문학조(文學條)에 “제독 이여송이 중국으로 돌아갈 때에 문사(文士)들이 각자 이별시를 지었는데, 석주(石洲) 권필(權韠)의 시에 ‘송별의 말은 속에서만 맴돌 뿐이라, 이별의 술잔 손에 들고 일부러 천천히 마시네.[別語在心徒脈脈 離杯到手故遲遲]’ 하니, 제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맨 마지막 간이(簡易)의 시에 ‘하주에서 위세를 떨치매 요동 땅이 절로 안정되었고, 평양에서 승전하니 한성의 왜적들은 그대로 사라졌네.[威起夏州遼自重 捷飛平壤漢仍空]’ 하였는데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한 것을 근거로 삼을 수 있다.

559)간이(簡易):최립(崔岦, 1539∼1612)의 호이다. 자는 입지(立之)이고, 호는 간이 혹은 동고(東皐)이며, 본관은 통천(通川)이다. 1555년(명종10) 17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탁월한 문장 실력으로 외교 문서 작성에 많이 관여하였으며, 세 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역학(易學)에도 밝아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을 지었다. 그의 산문과 차천로(車天輅)의 시, 한호(韓濩)의 글씨는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의고문체(擬古文體)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문집으로 간이집이 있고, 시학서(詩學書)로 십가근체시(十家近體詩)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등이 있다.

560) 초당(草堂):허엽(許曄, 1517∼1580)의 호이다. 자는 태휘(太輝)이고,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허봉(許篈), 허균(許筠),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아버지이다. 나식(羅湜)과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진사시를 거쳐 1546년(명종1)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53년에 사가독서하였고, 이후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1568년(선조1)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향약의 설치 및 시행을 건의하였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시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되어 당시 사류의 지도급 인물이 되었다. 벼슬을 30년간이나 지냈으면서 생활이 검소하여,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저서로는 초당집(草堂集) 등이 있다.

561)보수(寶樹):보배로운 나무라는 뜻으로, 남의 자제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옥수(玉樹), 경수(瓊樹)라고도 한다.

562)경번(景樊):여류 시인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자이다. 본명은 초희(楚姬)이고, 호는 난설헌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허엽의 딸이고, 허봉의 동생이며, 허균의 누이이다. 8세에 이미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 신동으로 불렸다.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다. 불행한 시집 생활과 친정의 옥사 등으로 인해 불우한 삶을 살다가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통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숙종37)에는 일본에서도 간행되었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다.

563)월상(月霜) 흔적:달빛 아래 내린 서리의 흔적을 말하는 것으로, 허난설헌이 꿈에서 지은 “부용 스물일곱 뿌리여, 달빛 속 찬 서리에 붉은 꽃이 떨어지네.[芙蓉三九朵 紅墮月霜寒]”라는 시구를 가리킨다. 그의 동생 허균은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죽었을 때, 나이가 27살이었다. 3에 9를 곱한 숫자와 딱 부합되니, 미리 정해진 운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이 시가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것으로 보았다. 蘭雪軒詩集 附錄 惺所覆瓿藁 卷26

564)봉황지(鳳皇池)에……했지:최립(崔岦)이 권필(權韠)에게 준 시에, “듣기로 지존께서 원고를 구해들이라 하셨다니, 봉황지에 직접 드는 것보다 훨씬 나은 걸.[見說至尊徵稿入 全勝身到鳳凰池]” 한 것을 가리킨다. 簡易集 卷8 寄權大雅 봉황지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 때 금원(禁苑) 안에 있던 못인데, 중서성(中書省)을 그 옆에 설치하여 중요한 일을 맡게 하고 황제를 곁에서 보좌하게 하였으므로, 중서성을 봉황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대에는 재상의 집무실, 한림원(翰林院), 대궐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565)화계(花溪)의 방:당(唐)나라의 대시인 두보(杜甫)와 같은 경지를 가리킨다. 화계는 중국 성도(成都)에 있는 완화계(浣花溪)의 준말로, 두보가 만년에 은거했던 초당이 이곳에 있었으므로, 두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566)황진(黃陳):송(宋)나라 때의 시인인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를 가리킨다. 두보를 배웠던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선두 주자로서, 우리나라 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567)석주(石洲):권필(權韠, 1569∼1612)의 호이다. 자는 여장(汝章)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는 뛰어난 시재를 인정받아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었으며,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외척 유희분(柳希奮) 등의 폐해를 과거 답안에 적었다는 이유로 임숙영(任叔英)이 삭과(削科)되자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풍자하여 비방하였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귀양 가던 도중 장독으로 동대문 밖에서 44세의 나이로 죽었다.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하는 시를 잘 썼다. 석주집과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이 전한다.

568) 한위(漢魏):중국의 한나라와 위나라를 말하는 것으로, 산문으로는 당나라와 송나라의 고문이 발생하기 이전, 운문으로는 당나라의 근체시가 발생하기 이전의 시기에 해당하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정두경(鄭斗卿) 등 일군의 문장가들은 당송 이전, 한위 시대의 시문에 심취하여 악부체(樂府體)의 시를 짓는 등의 활발한 시도를 하였다.

569) 동명(東溟):조선 후기의 문장가이자 학자인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의 호이다. 자는 군평(君平)이고,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다. 조부 정지승(鄭之升), 증조부 정담(鄭䃫), 종증조부 정렴(鄭), 정작(鄭碏)이 모두 시인으로 이름이 났다. 14세 때 별시 초선(初選)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1626년(인조4) 문장으로 유명한 중국의 사신의 접대에 포의의 신분으로 참여하였다. 1629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부수찬과 정언 등을 지냈으나, 이후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 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문장으로는 사마천(司馬遷), 시로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닮았다는 평을 듣는다. 저서로는 동명집 26권이 있다.

570)석실산(石室山)……무리: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뛰어난 자손들을 가리킨다. 석실은 김상헌이 은거하던 곳으로, 사후에 석실서원이 세워져 노론 및 안동 김씨 세도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김상헌의 증손자 대에 이르면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문장가인 김창협(金昌協, 1651〜1708), 김창흡(金昌翕, 1653〜1722) 등이 배출되었으며, 세상에서는 이 형제들을 ‘육창(六昌)’이라고 불렀다.

571)사문(斯文)만……아니었네:유학만 아우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사문은 유학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자가 위(衛)나라 광(匡) 땅을 지날 때 그곳 사람들이 이곳에서 포악한 짓을 일삼던 노(魯)나라 양호(陽虎)로 착각하여 포위하였는데, 공자가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달래면서 “하늘이 사문을 없애 버릴 것이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 한 것에서 나왔다. 論語 述而 묘군(卯君)은 아우를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김창흡을 가리킨다. 송나라의 문장가 소식(蘇軾)이 묘년(卯年)에 태어난 아우 소철(蘇轍)을 묘군이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蘇東坡詩集 卷37 子由生日云云

572)농암(農巖):김창협(金昌協)의 호이다. 자는 중화(仲和)이고, 호는 농암 혹은 삼주(三洲)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1669년(현종10) 19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682년(숙종8)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진도(珍島)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아버지의 죄가 풀리고, 그에게 대제학(大提學) 등의 벼슬이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성리설은 대체로 이이(李珥)보다는 이황(李滉)에 가까웠으며,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다. 문집에 농암집, 저서에 농암잡지(農巖雜識),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등이 있다.

573)조두난복(粗頭亂服):머리가 헝클어지고 의복이 단정치 못하다는 뜻으로, 선가(仙家)에 가까운 시풍을 지녔음을 말한 것이다.

574)치승(淄澠):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치수(淄水)와 승수(澠水)를 아울러 일컫는 말로, 서로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것을 가리킨다. 백공(白公)이 공자에게 묻기를, “만약 물에다 물을 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이르기를, “치수와 승수를 섞어 놓더라도 역아(易牙)는 맛을 보아 알 수 있다.” 하였다. 列子 說符

575)삼연(三淵):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호이다. 자는 자익(子益)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이단상(李端相)의 제자이다. 1673년(현종14) 진사가 되었다.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가 진도(珍島)의 배소(配所)에서 사사되자, 형 김창집(金昌集), 김창협과 함께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성리학에 뛰어나 형 김창협과 함께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유배된 형 김창집이 사사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그해에 죽었다. 심성론(心性論)은 형 김창협이 호론(湖論)인 것과는 달리 낙론(洛論)을 지지하였다. 성리설은 형과 마찬가지로 이황과 이이를 절충하는 경향이 있었다. 문집에 삼연집, 저서에 심양일기(瀋陽日記), 문취(文趣) 등이 있다.

576)초당(草堂)을 배웠다 하네:두보(杜甫)의 시풍을 배웠다는 의미이다. 두보가 만년에 중국 성도(成都)에 있는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였는데, 이후로 초당은 두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577)고광순(高光洵):1848〜1907. 한말의 의병장으로 자는 서백(瑞伯)이고, 호는 녹천(鹿川)이며,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1895년(고종32)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이후로도 계속 항일의병활동을 지속하다가, 1907년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소속되어 지리산 연곡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578)충사(虫沙):238쪽 주445 참조.

579)국상(國殤):229쪽 주416 참조.

580)명문가:고광순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고경명의 둘째 아들인 학봉(鶴峯) 고인후(高因厚)의 12대 사손(祀孫)이다.

581)해석시권(海石詩卷):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재찬(金載瓚, 1746〜1827)의 시문을 모은 책을 가리키는 듯하다. 김재찬의 자는 국보(國寶)이고, 호는 해석(海石)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774년(영조50)에 진사가 되고, 그해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799년(정조23)에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오고, 1800년(순조 즉위년)에 실록청 지사(實錄廳知事)로서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평정하였다.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냈다. 저서에 해석유고(海石遺稿), 해석일록(海石日錄) 등이 있다.

582) 구슬 구멍 개미:야담(野談)에 공자(孔子)가 진(陳)나라에 갔을 때 그 나라 대부가 군사를 동원하여 포위한 뒤, 구곡주(九曲珠)를 주며 “그 구멍 사이를 실로 꿰면 풀어 주겠다.” 하였는데, 아무리 해도 꿸 수 없어 낙담하던 차에, 개미 허리에 실을 매고 다른 구멍 쪽에 꿀을 발라 두면 된다는 뽕 따는 아낙의 충고를 듣고 마침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繹史 卷86

583)가시……조각:원래는 신기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을 속여서 이용하는 행위를 말하지만, 여기서는 매우 정교한 솜씨를 지닌 것을 가리킨다. 전국 시대 연(燕)나라 임금이 교묘한 솜씨를 지닌 자들을 좋아하여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이웃 송(宋)나라 사람이 그런 점을 이용해 가시 끝에다 원숭이를 조각할 수 있다고 속여서 반년 동안 호의호식하다가 도망쳤다는 고사가 있다. 韓非子 外儲說左上

584)선양(仙羊)이……못하니:선양은 뿔이 갈고리처럼 굽은 양인 영양(羚羊)으로, 전설에 의하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반드시 높은 나뭇가지에 뿔을 걸고 잠을 잔다고 한다. 흔히 흥취를 위주로 하여 꾸민 흔적을 남기지 않는 훌륭한 시문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埤雅 釋獸

585)삼당(三唐):조선 중기의 시인들인 이달(李達),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을 일컫는 말로,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의 시풍이 풍미하던 당시의 시단에서 성당(盛唐)의 시풍을 제대로 체득하였으므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586) 같은……곡조:표현이나 곡조는 작가마다 다르지만, 그 솜씨나 공효는 동일한 경지에 올라 있다는 의미로, 당나라의 문장가인 한유가 진학해(進學解)라는 글에서 전한(前漢) 때의 뛰어난 문장가였던 양웅(揚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솜씨를 비교하면서 “곡조는 달랐지만, 솜씨는 같았다.[同工異曲]”라고 한 데서 나왔다.

587) 최백(崔白):삼당시인 가운데서 호남 출신인 최경창과 백광훈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588)정지소 서화(鄭止素曙和):미상이다. 전남 광양의 광양 향교(光陽鄕校)에 그가 1892년(고종29)에 쓴 <교궁수리기(校宮修理記)>가 남아 있다.

589)원충(猿虫):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말한다. 238쪽 주445 참조.

590)시호(豺虎):교활하고 사나운 승냥이와 호랑이를 말하는 것으로, 소인배 또는 강한 적군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591)정월 봄소식:나라의 소식 또는 황실의 소식을 말한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편찬할 때 주(周)나라 왕실을 높이고 대일통(大一統)의 사상을 표시하기 위해 노(魯)나라 은공(隱公) 원년 조에 ‘원년춘 왕정월(元年春王正月)’이라고 쓴 것에서 나왔다.

1)무신고(戊申稿):1908년(융희2), 매천이 54세 되던 해에 지은 시들이다.

2) 사장(沙場):병사들이 전투하다가 죽어 간 전장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남쪽으로 정벌할 때 일군(一軍)이 모두 죽으니, 군자는 원숭이나 학이 되고, 소인은 벌레나 모래가 되었다.[君子爲猿爲鶴 小人爲蟲爲沙]” 한 것에서 나왔다.

3)옛날처럼……없으리라:1907년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고종이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전장에서 죽어 갔기 때문에, 평년에 달을 보는 기분과는 달리 비장함을 느낀다는 뜻이다.

4)누군가가……같으니:전혀 상관없는 대상에게서 횡재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이 현실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관곡은 접대를 위해 제공하는 숙소와 식량, 또는 관청에서 주는 식량을 말한다.

5) 금재(錦齋):인물의 호(號)인지 건물명인지 분명치 않다. 다만 매천후집(梅泉後集) 권2에 늦봄 상순에 남원에 들렀는데, 이파(二坡) 장용일(張鏞一)에게 초대를 받아 금리재(錦里齋)에서 이틀을 묵었다라는 시 제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 이름인 듯하다.

6)우로(雨露)의 정:돌아가신 부모를 그리는 마음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서리와 이슬이 내렸을 때 군자가 그것을 밟게 되면 반드시 슬픈 마음이 일어나니, 추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봄에 우로가 내려 적셨을 때 군자가 그것을 밟게 되면 반드시 놀라는 마음이 있어서 장차 어버이를 다시 뵈올 듯이 한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 春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如將見之]” 하였다.

7) 응령(鷹嶺) 마을: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 일대를 칭하는 것으로, 응령역(鷹嶺驛)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삭녕 최씨(朔寧崔氏)의 집성촌이 있었다.

8) 최형중 병두(崔衡仲炳斗):조선 말기의 문사(文士)인 최병두(崔炳斗, 1846〜1905)를 가리킨다. 호는 성덕(聖德)이며, 본관은 삭녕(朔寧)이다.

9)나은(羅隱):당(唐)나라 말기 여항(餘杭) 사람으로, 시에 재능이 있었는데, 자부심이 강해 남을 잘 인정하지 않고 풍간(諷諫)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과거에서 누차 낙방하였다. 舊五代史 卷24 羅隱列傳

10)예형(禰衡):후한(後漢) 때의 사부가(辭賦家)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다. 성격이 강직하고 오만하여 권세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훗날 조조(曹操)에게 밉보여 피살되었다. 당시의 어지러운 시국 상황을 반영한 앵무부(鸚鵡賦)가 대표작이며, 조장형문(弔張衡文) 등의 작품이 있다. 後漢書 卷110下 禰衡列傳

11)무위(婺緯):나라를 걱정하여 자신의 집안을 돌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춘추 시대 주(周)나라의 한 과부가 베틀에 올라 베를 짜면서 씨실[緯]이 부족한 것은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주나라가 망하지나 않을까를 염려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春秋左氏傳 昭公24年

12)귀웅(鬼雄):귀신 중에서도 힘이 있는 우두머리 귀신이란 뜻으로, 초사(楚辭) 구가(九歌) 국상(國殤)에, “몸은 이미 죽었으나 정신은 신령하니, 혼백이 굳세어 귀웅이 되리로다.[身旣死兮神以靈 魂魄毅兮爲鬼雄]” 하였다.

13)문경(門逕):문 앞의 길이라는 뜻으로, 흔히 은자가 거처하던 곳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의 장후(蔣詡)가 왕망(王莽)이 나라를 찬탈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인 두릉(杜陵)에 은거하면서, 문정(門庭)에 세 갈래 오솔길[三逕]을 내고 각각 소나무, 국화, 대나무를 심고서, 벗인 구중(求仲)과 양중(羊仲) 두 사람만 내왕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蒙求集註 卷上 蔣詡三逕

14)초당(草堂):보통 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집을 뜻하나, 여기서는 무덤을 가리킨다.

15)미공(眉公):명(明)나라 때의 유명한 문장가이자 서화가였던 진계유(陳繼儒, 1558〜1639)를 가리킨다. 자는 중순(仲醇)이고, 지금의 상해(上海) 송강(松江)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재주로 이름을 날렸으나, 이내 유자(儒者)의 의관을 태워 버리고 관도(官途)의 뜻을 포기한 뒤, 곤산(崑山) 남쪽에서 82세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유유자적하면서 은거하였다. 저서에 보안당비급(寶顔堂秘笈), 미공전집(眉公全集) 등이 있다.

16)야망편(野望篇):들판의 경물을 바라보며 그 감회를 읊은 시를 말하는 것으로, 당(唐)나라의 대시인 두보(杜甫)가 지은 야망(野望)이 유명하다.

17)벽사롱(碧紗籠):푸른 깁으로 싼 휘장을 말한다. 송(宋)나라 때 위야(魏野)가 구준(寇準)과 함께 어느 절에 가서 놀면서 각각 시를 써 붙여 놓았는데, 뒤에 다시 함께 그 절을 찾아가 보니, 구준의 시는 푸른 깁으로 싸서 잘 보관하였으나 자신의 시는 먼지가 잔뜩 낀 채 그대로 있으므로, 그들을 따라갔던 관기(官妓)가 민망하여 붉은 소매로 그 먼지를 털어 내었는데, 위야가 다시 시를 지어 쓰기를, “만약 늘 붉은 소매로 떨 수만 있다면, 응당 푸른 깁으로 싸 놓은 것보다는 나으리라.[若得常將紅袖拂 也應勝似碧紗籠]”라고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青箱雜記 卷6

18) 淅:대본에는 ‘浙’로 되어 있으나, 운부군옥(韻府群玉)의 표제어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19) 懾:대본에는 ‘攝’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20)청복(淸福):권력이나 재물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처한 환경에 만족하며 유유히 살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주로 벼슬에서 물러나 초야에 은거할 수 있는 행운을 말한다.

21)만종(萬鍾)의 봉록:제후들이 받는 것과 같은 엄청난 봉록을 말하는 것으로, 민간에 “책 속에 절로 만종의 봉록이 있느니라.[書中自有萬鍾祿]”라는 저자 미상의 시구가 전한다.

22)도룡(屠龍) 기술: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기술을 말한다. 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에 “주평만(朱泙漫)이 지리익(支離益)에게 용을 잡는[屠龍] 기술을 배우느라 천금이나 되는 집안의 재산을 탕진하였다. 마침내 3년 만에 그 기술을 완전히 터득했으나, 정작 그것을 써먹을 길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23)서쪽으로 별이 흘러:음력 7월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하늘에 있는 대화심성(大火心星)이 음력 7월이 되면 서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시경 칠월(七月)에 “칠월에는 심성이 흐르네.[七月流火]”라고 하였다.

24)두초당(杜草堂):당(唐)나라의 대시인 두보(杜甫)가 거처하던 초당(草堂)을 가리키는 것으로, 두보의 조추고열퇴안상잉(早秋苦熱堆案相仍) 시에, “매번 밤마다 전갈로도 충분히 시름겨운데, 가을이 온 뒤에도 매미까지 기승이네.[每愁夜中自足蝎 况乃秋後轉多蠅]” 하였다.

25)부생(浮生):덧없는 인생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매천 자신을 가리킨다.

26)명왕(名王):원래는 흉노(匈奴)의 제왕(諸王) 중에서 소왕(小王)보다 신분이 높은 귀족들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일본의 대신들을 말한다.

27)노포(露布):전투에서 승리한 뒤에 그 전과를 기록하여 보고하는 글을 말하는데, 밀봉하지 않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57 李雲列傳

28)황양(黃楊):나무 이름으로, 자라는 속도가 몹시 느려 1년에 1치 정도만 자라는데, 윤달이 드는 해에는 그나마 다시 3치가 줄어든다고 한다. 송(宋)나라 시인 양만리(楊萬里)의 구일국미화(九日菊未花) 시에, “전설에 황양이 윤년에 횡액을 당한다 하였네.[舊説黄楊厄閏年]” 하였다. 廣羣芳譜 卷50

29)재……길도다:운이 다한 궁궐에 액운이 많음을 표현한 말이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곤명지(昆明池)를 축조하기 위해 땅을 팔 적에 바닥에서 온통 흑회층(黑灰層)이 나왔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서역의 승려를 초빙하여 물어보니, “천지의 운[大劫]이 다할 때 타고 남은 재입니다.” 하였다. 御定騈字類編 卷138 黑灰

30)규필(圭蓽):궁벽한 시골집의 사립문을 말하는데, 흔히 가난한 선비가 사는 집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31)긴 봄날:화창한 봄날이 계속되는 것처럼 장수하며 즐기는 것을 가리킨다. 장춘(長春)은 신선주(神仙酒)를 뜻하기도 한다.

32)소봉(素封):일개 평민이면서도 전원에서 부유한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기(史記) 권129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요즈음 벼슬을 통한 녹봉도 없고 작읍(爵邑)에서 나는 수입도 없으면서 그에 맞먹는 즐거움을 누리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을 일러 ‘소봉’이라고 한다.” 하였다.

33)충거(衝車):큰 통나무를 장착한 충돌용 수레로, 성벽을 허물거나 성문을 부수는 데 쓰였다.

34) 노처인(盧處仁):처인은 조선 말기의 문사(文士)인 노천수(盧天壽)의 자이다. 이정직(李定稷)의 석정집(石定集) 권7 잡저(雜著) 노처인복신택문(盧處仁卜新宅文)에 의하면, 전라북도 익산에 거주하다가 무주군 안성면 금평리(琴坪里)로 이주하였다고 하며, 이정직을 선생이라고 호칭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보인다.

35)금마(金馬):전북 익산의 옛 이름이다.

36)겸산(兼山):조선 말기의 무신인 백낙륜(白樂倫)의 호이다. 본관은 수원이며, 자세한 사항은 미상이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1885년(고종22)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1886년에 황해도 병마절도사, 1895년에 남원부 관찰사(南原府觀察使)에 제수되었다.

37)시를……기억했지:자신이 살던 구례의 시인들을 인정해 주었다는 뜻인 듯하다. 당시 구례에는 매천 이외에도 시인으로 유명했던 왕석보(王錫輔), 왕사천(王師天), 왕사찬(王師瓚), 유제양(柳濟陽) 등이 일기회(一器會), 남호아집(南湖雅集) 등의 시회(詩會)를 조직하여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38)황록(隍鹿):해자(垓子) 속의 사슴이란 말로, 인생의 득실이 꿈속의 일과 같이 허무함을 비유한 말이다. 정(鄭)나라의 어떤 사람이 땔나무를 하다가 사슴을 잡았는데, 누가 훔쳐 갈까 싶어 물 없는 해자[隍] 속에 숨겨 놓았다. 그러나 곧 그 장소를 잊어서 찾지 못하자 “내가 꿈을 꾼 모양이로군.”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우연히 그 말을 들은 사람이 그곳으로 가서 사슴을 찾아내어 집으로 가지고 가 버렸다. 그러고는 아내에게 “그 사람이 꿈을 꾸었으나,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이제 내가 사슴을 얻었으니, 그는 참으로 꿈을 꾼 사람일세.” 하니, 아내가, “어쩌면 당신이 그 나무꾼이 사슴을 잡은 꿈을 꾼 것인지도 모르지요.” 하였다. 列子 周穆王

39)오악(五岳):조선의 대표적인 명산을 말하는 것으로, 주로 백두산(白頭山), 금강산(金剛山), 묘향산(妙香山), 지리산(智異山), 북한산(北漢山)을 일컫는다.

40)기유고(己酉稿):1909년(융희3), 매천이 55세이던 해에 지은 시들을 모은 것이다.

41)피폐(皮幣)로……그르치니:나라를 부지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외세인 청나라와 일본을 끌어들였으나, 그것이 도리어 조선을 망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 것을 뜻한다. 피폐는 폐백(幣帛)으로 바치는 피혁(皮革) 따위를 말하는 것으로, 자국보다 세력이 강한 나라에 바치는 공물(貢物)을 가리킨다.

42)동타(銅駝):구리로 만든 낙타를 말하는 것으로, 진(晉)나라 사람 색정(索靖)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던 색정은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진나라의 서울인 낙양(洛陽) 궁궐 문 앞에 세워져 있던 구리로 만든 낙타[銅駝]를 보면서 말하기를 “네가 결국에는 가시밭 속에 있는 꼴을 보게 되겠구나.” 하였다고 한다. 晉書 卷60 索靖列傳

43)창강(滄江):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의 호이다. 자는 우림(于霖)이고, 호는 창강(滄江)이며, 당호는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이다. 개성(開城)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화개(花開)이다. 17세에 성균 초시(成均初試)에 합격하고, 1891년(고종28)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이후 편사국 주사(編史局主事), 중추원 서기관(中樞院書記官), 문헌비고 속찬위원(文獻備考續撰委員), 학부 편집위원을 지냈다. 을사조약 이후, 중국으로 망명, 양자강(揚子江) 하류의 남통(南通)에서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 장건(張)의 협조로 출판소의 일을 보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시로는 매천과 문으로는 이건창(李建昌)과 병칭되었다. 고문(古文)에 관심이 많아 여한구가문(麗韓九家文)을 편집하였으며, 한국소사(韓國小史), 한사경(韓史綮), 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등 우리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도 병행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그의 역사 인식이 잘 드러난 오호부(嗚呼賦)가 있으며, 시문집으로 창강고(滄江稿)소호당집(韶濩堂集)이 있다.

44)바다에 집을 띄우고:배를 집으로 삼아 물 위를 떠돌며 사는 것을 말한다. 당나라 때의 선인(仙人) 장지화(張志和)가 안진경(顔眞卿)에게 “나의 소원은 배를 집 삼아 물 위에 살면서 소계(苕溪)와 삽계(霅溪)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願爲浮家泛宅 往來苕霅間]”라고 하였다. 新唐書 卷219 隱逸列傳 張志和

45)금초산(金焦山):중국 강소성(江蘇省) 진강시(鎭江市)에 있는 금산(金山)과 초산(焦山)을 가리키는 말이다.

46)우역(禹域)을 잊었거니와:우역은 중국 고대의 성군인 우(禹) 임금의 영역, 즉 중국을 가리킨다. 매천은 창강과 중국으로 이거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미처 이루지 못한 적이 있다.

47)기봉(箕封):기자(箕子)가 봉해진 지역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또는 평양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48)오송로(吳淞路):중국 상해시 북부에 있는데, 김택영이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49)사곡(沙谷):강화군 화도면(華道面) 사기리(沙器里)를 가리킨다.

50)이경재(李耕齋):조선 말기의 문인이자 학자인 이건승(李建昇, 1858〜?)을 가리킨다. 자는 보경(保卿)이고, 호는 경재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891년(고종28) 증광시(增廣試)에 진사(進士)로 입격하였다.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의 아우이다. 을사조약 이후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경술국치 때 만주로 망명하였다.

51)영재(寧齋):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호이다. 자는 봉조(鳳朝) 또는 봉조(鳳藻)이고, 호는 영재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1866년(고종3) 15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으며,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문명을 떨쳤다. 하곡(荷谷) 정제두(鄭齊斗)가 세운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전승자였으며,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전사한 조부의 영향으로 척양(斥洋)과 척왜(斥倭)를 주장하였다. 향리인 강화에서 은거하다가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택영은 그를 고려와 조선의 문장가 9인 중의 하나로 선정하였다. 저서 당의통략(黨議通略)은 당파를 초월한 공정성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문집으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이 전한다.

52)일기(一紀):12년을 달리 표현하는 말인데, 보통 10여 년 정도를 가리킨다.

53)이군삭거(離群索居):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유익한 사우(師友)들의 곁을 떠나 혼자 외로이 지내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자하(子夏)가 아들을 여의고 상심하여 실명(失明)을 하였을 때, 하늘이 죄 없는 자신에게 불행을 주었다고 원망을 하였는데, 조문을 왔던 증자(曾子)가 그의 잘못을 꾸짖으니, 자하는 “내가 벗들을 떠나 혼자 산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 모양이 되었다.”라고 뉘우쳤다고 한다.

54)무정댁(茂亭宅):무정은 조선 말기의 문신인 정만조(鄭萬朝, 18581936)의 호이다. 자는 대경(大卿)이고,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강위(姜瑋)의 제자로, 1889년(고종26) 알성 문과에 급제한 뒤 내부 참의(內部參議)와 궁내부 참의관(宮內部參議官)을 지냈다. 1895년의 8월 역변(逆變), 10월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이듬해 4월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12년 만인 190712월에 사면되어 복관되었다. 이어 규장각 부제학이 되고, 헌종과 철종 연간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성균관(成均館)의 후신인 경학원(經學院)의 대제학, 명륜학원(明倫學院) 총재를 겸임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하였고, 이왕가실록 편찬위원(李王家實錄編纂委員)을 맡아 고종실록순종실록의 편찬을 주재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특히 변려문(騈儷文)에 뛰어났으며, 글씨도 잘 썼다. 문집에 무정전고(茂亭全稿)가 있다.

55)도원량(陶元亮):원량은 진(晉)나라가 망하고 송(宋)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절의를 지켜 은거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시인(詩人) 도잠(陶潛)의 자이다. 스스로 잡시(雜詩)라는 시에서,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고 유유히 남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고 하였고, 염계(廉溪) 주돈이(周敦頤)가 애련설(愛蓮說)에, “진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은 유독 국화를 좋아하였다.”라고 할 정도로 국화를 좋아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56)조모(皁帽):검은 모자라는 뜻이다. 대본에는 ‘白帽’로 되어 있으나, 오자로 판단되어 원래의 고사에 따라 고쳐 번역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창강의 신세가 황건적의 난 때 요동으로 피란했던 관녕(管寧)과 비슷했으므로,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57)관유안(管幼安):유안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사람인 관녕의 자이다. 어렸을 때 화흠(華歆)과 나란히 앉아 글을 읽다가 화흠이 문밖에 지나가는 벼슬아치를 보러 가자 관녕은 즉시 그와 자리를 나누어 앉아 친구로 여기지 않았을 정도로 개결하였다. 한(漢)나라 말기 황건적의 난 때 요동으로 피란을 갔는데, 따르는 자가 매우 많았으며, 백성이 그의 덕화에 감화되어 다투거나 송사하는 일이 없었다. 항상 검은 모자[皁帽]를 쓰고, 80세가 넘도록 항상 나무 걸상에 꿇어앉아 글을 읽다 보니 무릎이 닿은 곳이 닳아서 구멍이 뚫렸다고 한다. 世說新語 德行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58)흘간산(紇干山):중국 산서성(山西省) 대동시(大同市)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 흘건산(紇乾山) 또는 흘진산(紇眞山)이라고도 한다. 이 산 정상에는 여름에도 늘 눈이 쌓여 있을 정도로 몹시 춥다고 한다. 당(唐)나라 소종(昭宗)이 주전충(朱全忠)의 반란을 피해 화주(華州)로 파천(播遷)하였을 때, “흘간산 꼭대기의 얼어 죽은 참새야, 어찌하여 좋은 곳으로 날아가 즐기지 않았더냐.[紇干山頭凍殺雀 何不飛去生處樂]”라는 속담을 떠올리며 비통해했다는 말이 있다. 太平御覽 卷45 紇乾山 資治通鑑 卷264 唐紀 昭宗 天佑元年 여기서는 창강이 거처하는 환경을 말하는 듯하다.

59)종용당(從容堂):1647년(인조25)에 충남 금산(錦山)의 선비들이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산화한 의병들의 충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중봉(重峯) 조헌(趙憲)과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영규대사(靈圭大師) 등 700명의 위패를 모셨다. 일제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68년에 복원하였다.

60)양봉(兩峯):두 분의 ‘봉(峯)’ 자 호를 가진 분이라는 뜻으로, 중봉 조헌과 제봉 고경명을 가리킨다.

61)투할(投轄):수레의 바퀴를 고정하는 비녀장을 빼서 던져 버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한 뒤를 가리키는 듯하다. 일반적으로는 말술 마시기를 좋아했던 한(漢)나라 때 진준(陳遵)이 빈객들과 술을 마실 때면 도중에 떠나가지 못하도록 대문을 걸어 잠그고 비녀장을 빼서 우물 속에 던져 버렸다고 하는 고사를 원용하여, 객을 붙들어 두고 함께 주흥을 실컷 즐긴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漢書 卷92 陳遵傳

62)비린(批鱗):비늘을 건드린다는 뜻으로, 신하가 직간(直諫)을 하다가 군주를 범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를 지휘했던 의병장 중봉 조헌이 이전에 수차례 상소를 올려 극언을 하였다가 선조(宣祖)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고 유배되었던 일을 가리킨다.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에 “용은 평소에 순하여 길들일 수 있으나, 턱 밑에 있는 역린(逆鱗)을 건드리면 갑자기 성을 내어 화를 당한다.” 하였는데, 용은 군주를 상징하므로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63)해학(海鶴):조선 말기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계몽운동가인 이기(李沂, 1848〜1909)의 호이다. 자는 백증(伯曾)이고,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전북 김제(金堤)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시재(詩才)로 이름을 날렸으나, 과거에 수차례 낙방한 뒤로는 실학자들의 저술을 연구하는 데 치중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문명을 목도하고 감명을 받아 단발하였다. 귀국 후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냈다. 1906년(광무10)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계몽활동을 하였으며, 을사오적의 처단을 위해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실행에 옮기려 하다가 체포되어 전라도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1년 뒤에 풀려났다. 석방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호남학회(湖南學會)의 간부로서 계몽적 글들을 발표했다. 1909년(융희3)에는 단군교(檀君敎)를 창립하는 데 가담했고, 그해 7월 서울의 여사(旅舍)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해학유서(海鶴遺書)가 있다.

64)의류(依劉)한……어려웠고:오랜 세월 세력가에게 의탁하였으나,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의류는 세력이나 명망이 있는 사람에게 의탁하는 것을 말한다. 삼국지(三國志) 권21 위서(魏書) 왕찬전(王粲傳)에, “황문 시랑(黃門侍郞)에 제수되었으나, 서경(西京)이 소란하였으므로, 마침내 나가지 않고 형주(荊州)로 가서 유표(劉表)에게 의탁하였으나, 유표는 그의 외모가 보잘것없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소홀히 대하고 중용하지 않았다.” 하였고, 당(唐)나라 시인 허혼(許渾)의 시에, “대궐에 조회하고자 하여 잠깐 유표에게 의탁한다.[欲朝金闕暫依劉]” 하였다. 全唐詩 卷536

65)매옥(買沃):옥주산(沃州山)을 매입하였다는 뜻으로, 은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때 고승인 축잠(竺潛)이 섬산(剡山)에 은거할 적에, 고승 지둔(支遁)이 옥주(沃洲)의 작은 고개를 매입하기를 청하였는데, 축잠이 “오고 싶다면 주기는 하겠으나,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산을 사서 은거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니, 지둔이 몹시 부끄러워했던 고사가 있다. 당나라 시인 유장경(劉長卿)의 송방외상인(送方外上人) 시에, “옥주산을 매입하지 말라. 당시 사람들은 이미 그곳에 있음을 안다네.[莫買沃洲山 時人已知處]” 하였다. 會稽志 卷15

66)채택(蔡澤):전국 시대 연(燕)나라 사람으로 변설에 능하였다. 조(趙)나라, 한(韓)나라, 위(魏)나라를 다니며 유세하였으나 모두 중용되지 못하다가, 진(秦)나라에 들어갔을 때 당시 재상인 범수(范睢)가 그를 알아보고 자신의 후임으로 소왕(昭王)에게 추천하여 객경(客卿), 승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史記 卷79 范睢蔡澤列傳

67)송경(宋牼)이……어쩌랴:채택을 추천해 준 범수 같은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송경은 선진(先秦) 때의 사람으로, 송견(宋鈃) 또는 송영(宋榮)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와 진나라가 전쟁을 벌이려고 할 때, 그 싸움을 말리기 위해 초나라 제후를 찾아가던 길에 맹자(孟子)를 만났는데, 맹자는 그가 그 싸움이 이롭지 못하다는 것을 가지고 설득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차라리 인의(仁義)를 가지고 설득하기를 권했던 고사가 있다. 孟子 告子下

68)닷 섬들이 빈 박:나름대로 훌륭한 용도가 있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물을 가리킨다. 혜자(惠子)가 어느 날 친구인 장자(莊子)에게, “위(魏)나라 왕이 보내 준 박 씨를 심었더니, 다섯 섬들이 박이 열렸네. 그렇지만 호리병처럼 쓰자니 물 무게를 지탱하기 어렵겠고, 쪼개어 바가지를 만들자니 너무 넓어서 쓸 수가 없겠더군. 속이 텅 비고 크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어 부수어 버렸네.”라고 하자, 장자가 사물의 특성을 적절하게 이용하지 못한다고 반박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자네에겐 다섯 섬들이 바가지가 있는데, 어찌하여 그것을 큰 통으로 만들어 강호에 띄울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것이 너무 커서 쓸 데가 없다고 걱정만 하는가.” 하였다. 莊子 逍遙遊

69)의병 격문:이기가 1894년(고종31) 동학혁명(東學革命) 때 전봉준(全琫準)을 방문하여 서울로 진격하여 조정의 부패한 관료들을 제거하라고 격려하였으나, 농민군의 폐해가 심하게 나타나자 도리어 군중을 모아 그들을 토벌하는 선봉에 섰던 일이 있는데, 그때의 일을 지칭하는 듯하나 명확하지 않다. 참고로 1895년 안동부(安東府)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그는 그런 수구적인 방식의 의병 활동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안동부 관찰사 이남규(李南珪)의 막료가 되어 모병과 군사 조련을 담당하여 의병 토벌에 큰 공을 세웠던 적이 있다.

70)흰머리……기이했네:이기가 노년에 자진해서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는 등의 기행을 한 것을 가리킨다. 매천의 이 시구에 대해 간재(艮齋) 전우(田愚)는 “근래에 이기라는 자가 있어서 시문에 능하였는데, 아비가 죽었을 때 상복을 버리고 검은 옷을 입었으며, 연전에 학보(學報)에서는 사람들에게 독서하지 말 것을 권하면서 즐겨 유림(儒林)을 욕하였다. 이자야 진실로 나무랄 것이 못 되나, 마침내 어떤 문사(文士)가 그 사람에 대한 만사(輓詞)를 지으면서, ‘흰머리 단발하는 등, 늙을수록 기이했네.[剃刀雪落老愈奇]’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가소롭다.”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艮齋集 後編 續 卷4 答孫周夏

71)연제(燃臍):배꼽을 태우는 것으로, 원흉이 처벌받아 죽는 것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동탁(董卓)이 처벌받아 그 시신이 저자에 버려졌는데, 평소에 비만했던 터라 뜨거운 날씨로 인해 지방이 녹아 흥건히 흘러나왔다. 그 주위를 경계하던 아전이 동탁의 배꼽 위에 불을 붙이니, 여러 날 동안 환하게 타올랐다고 한다. 後漢書 卷102 董卓列傳

72)설지(囓指):손가락을 깨문다는 뜻으로, 부모를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증삼이 한번은 공자를 따라 초나라에 가 있을 때 갑자기 마음이 섬뜩하여 즉시 하직하고 돌아가 어머니를 찾아뵙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어머니는 “너를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깨물었다.[思爾齧指]”라고 하였다. 뒤에 공자가 이 일에 대하여 “증삼의 효성이 만리 밖까지 감응하였다.[曾參之孝精感萬里]”라고 하였다. 說郛 卷117下

73)저포(樗蒲)로……갔네:저포는 저(樗)와 포(蒲)의 열매로 만든 일종의 주사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도박에 사용되었다. 유지(柳枝)는 기생을 일컫는 말이다. 이 구절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박과 기생을 벗 삼아 노년을 보냈다는 뜻으로 추정되나, 그와 관련된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74)두목(杜牧):당(唐)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목지(牧之)이고, 호는 번천(樊川)이다. 같은 만당(晩唐) 시기의 시인인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불리며, 시풍이 두보(杜甫)와 비슷하다 하여 소두(小杜)로도 칭해진다. 서정성이 뛰어난 시를 많이 지었고,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능하였는데, 시어의 조탁(彫琢) 못지않게 내용을 중시했다. 번천문집(樊川文集)이 전한다.

75)진등(陳登):위(魏)나라의 고사(高士)로, 자는 원룡(元龍)이다. 그가 죽은 뒤 유비(劉備)가 허사(許汜)와 함께 형주(荆州)에서 천하의 인물을 논하면서, “원룡 같은 문무(文武)와 담지(膽志)는 고인들 중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라고 안타까워했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또한 이때 허사가 옛날 난리를 만나 진등을 찾아갔을 때 진등은 큰 침상에 올라가서 자면서 자신은 아래의 작은 침상에서 자게 하는 등 손님으로 예우하지 않았던 것을 불평하니, 유비가 “그대는 국사(國士)의 명망을 지니고도 집안을 잊고 나라 걱정에 몰두하지 않았으니, 그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와 얘기를 나누었겠는가. 나 같았으면 자신은 백척루(百尺樓) 위에 올라가 눕고, 그대는 맨땅에 눕게 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三國志 卷7 魏書 陳登傳

76)초서(草書) 등잔:이기가 생전에 초서로 써 준 종이로 등롱(燈籠)을 바른 등잔을 말한다.

77)과혁(裹革)의 뜻:과혁은 가죽에 싼다는 뜻으로,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뒤 말가죽에 싸여 돌아오려고 했던 마음이란 뜻이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사나이라면 마땅히 전쟁터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체를 싸 가지고 돌아와 장사 지내야 한다.”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실제로 마원이 죽은 뒤에 그 가족들은 모함하는 자들에게 빌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하고 간소하게 장사를 지냈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78)하늘 근처:임금이 있는 대궐 또는 조정을 가리킨다.

79)강회(江淮):중국의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 유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과 안휘성(安徽省) 일대가 해당된다. 여기서는 김택영이 망명해 있던 곳을 일반적으로 표현하였다.

80)통주(通州):남통주(南通州)를 가리키며, 지금의 중국 강소성 남통시(南通市) 지역이다. 김택영이 이곳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

81)동국의……탓:1894년(고종31) 갑오경장 때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택하기로 하면서,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삼았다.

82)시헌법(時憲法):조선조 후기에 쓰였던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을 말한다. 그 이전에 쓰이던 역법과 달리, 서양의 수치와 계산 방법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는 태양력에 대비되는 일반적인 음력의 개념으로 쓰였다.

83)수세(守歲):가는 해를 지킨다는 뜻으로, 섣달 그믐날 잠을 자지 않고 버티면서 가는 해를 보내고 오는 해를 맞는 풍습이다. 민간에서는 이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84)진한(辰韓)이……말고:고국에 대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진한은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점묵은 한 점 먹물을 말하는 것으로, 나라의 문화가 비루하거나, 영토가 좁거나, 세력이 미약한 것 등을 형용하는 말이다.

85)경술고(庚戌稿):1910년(융희4), 매천이 56세 때 지은 시들을 모은 것이다.

86)곡일(穀日):음력 초하룻날부터 시작하여 여덟 번째 되는 날로, 이날 전답에 거름을 내면 풍년이 든다고 하여 봄 농사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하였다.

87)문성(文星):문장을 담당하는 별로, 보통 문장이 뛰어난 상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형주송이대부칠장면부광주(衡州送李大夫七丈勉赴廣州) 시에, “북풍이 시원한 기운을 따라오니, 남두가 문성을 피하는구나.[北風隨爽氣 南斗避文星]”라고 상대의 문재를 칭찬한 구절이 있다. 全唐詩 卷233

88)오월(吳越):원래는 중국의 항주(杭州) 일대를 근거로 했던 5대 10국 시대의 나라 이름이다. 창강 김택영이 머물렀던 상해가 이 지역에 해당하였으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89)강회(江淮):339쪽 주79 참조.

90)당년에는……탓에:1905년(광무9) 봄에 창강에게서 함께 중국의 소주 일대로 망명하자는 편지를 받고, 그에 응해 준비를 하였으나 집안에 상사가 있어 미처 실행하지 못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매천의 김창강이 이 나라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짓다[聞金滄江去國作] 시의 소서(小序)에 “나는 편지를 잡고 탄식을 하면서 마침내 집안사람들에게 고하지 않고 몰래 여비[資斧]를 마련하여, 가을이 오면 북쪽으로 올라가 보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6월 초에 갑자기 종가(宗家)의 종질(從姪)이 죽었는데, 종질은 본래 혈혈단신으로 가까운 친족이 없었으므로, 그 자식과 과수(寡嫂)가 나에게 생활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떠나려던 계획은 절로 취소되었다.” 하였다.

91)업(鄴) 땅의 응유(應劉):업은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의 도읍지이다. 응유는 왕찬(王粲), 공융(孔融), 진림(陳琳), 완우(阮瑀), 서간(徐幹)과 함께 건안칠자(建安七子)로 불렸던 응창(應瑒)과 유정(劉楨)을 말하는데, 문제(文帝)가 태자(太子)로 있을 적에 이들을 총애하여 항상 동궁에 불러 놓고 주연(酒宴)을 베풀고 즐겼다 한다.

92)매마(枚馬):한(漢)나라 때의 저명한 문장가인 매승(枚乘)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병칭한 말이다. 한나라 경제(景帝)의 아우 양효왕(梁孝王)이 문사들을 우대하여, 화려하게 정원을 꾸며 놓고 사마상여, 추양(鄒陽), 매승, 엄기(嚴忌) 등 뛰어난 문인들을 초대하여 노닐었던 고사가 있다. 漢書 卷57 司馬相如傳

93)필필(筆筆):역사에 관해 기술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께서 춘추를 지으실 때, 쓸 것은 쓰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시니, 자하(子夏)의 무리가 감히 한 글자도 돕지 못하였다.[至於爲春秋 筆則筆 削則削 子夏之從不能贊一辭]” 하였다.

94)낭산(狼山)에는……터:낭산은 김택영이 망명 가 있던 남통주(南通州)에 있는 명산이다. 푸른 흔적은 김택영이 매천에게 보낸 원시인 기황매천(寄黃梅泉)에, “두류산 짙은 푸른빛이 푸른 바다에 떨어져 조류 따라 만리 밖 나의 문에 이르렀네.[頭流積翠落滄溟 萬里隨潮到我扃]” 하였던 것을 따다 쓴 표현으로, 상대의 문장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95)역사책 완성하여:김택영은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 우리 역사를 정리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 한국소사(韓國小史), 한사경(韓史綮), 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등을 저술하였다.

96)심김(沈金):심은 남조 송(宋)나라 때의 사가(史家)이자 문장가인 심약(沈約)으로, 송서(宋書), 진서(晉書), 제기(齊紀), 고조기(高祖紀) 등의 중요한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김은 고려 때의 사가이자 문장가로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을 가리키는데, 김택영은 그의 온달전(溫達傳)을 높이 평가하여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넣어 놓더라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다.”라고 하였고, 삼국사기를 교정하여 교정삼국사기를 중국에서 간행하기도 하였다.

97)남동(南董):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사관이었던 남사(南史)와 진(晉)나라의 사관이었던 동호(董狐)의 합칭으로, 남사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대로 썼다.[據實直書]”라는 평을, 동호는 “서법은 숨기는 일이 없었다.[書法不隱]”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정론직필(正論直筆)로 이름이 높았다.

98)이곳에서……대신하네:천추의 일은 ‘천추토록 전해질 일’, ‘사후(死後)의 일’, ‘축수할 일’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나, 여기서는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시 우제(偶題)에 나오는 “문장은 천고의 일이라, 득실은 내 마음속으로만 하는 것이네.[文章千古事 得失寸心知]”라는 시구를 근거로 ‘문장을 짓는 일’로 풀이하였다.

99) 계방(季方):매천의 막내아우인 황원(黃瑗, 1870〜1944)의 자이다. 호는 석전(石田) 혹은 강호여인(江湖旅人)이며, 본관은 장수이다. 초년에는 김규석(金珪錫, 1843〜1920)에게 수학하였으며, 17세 이후로는 형인 매천에게 시를 배웠다. 매천의 사후에 매천의 제자 왕수환(王粹煥) 등과 함께 매천의 유집을 정리한 뒤, 상해의 김택영(金澤榮)에게 보내 간행하여 비밀리에 국내로 들여와 배포하였다. 조카 황위현(黃渭顯)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44년에 순절하였다. 저서에 강호여인유고(江湖旅人遺稿)가 있다.

100)석우(石尤) 구모(颶母):모두 바다에서 부는 거센 회오리바람을 말한다. 석우는 무역을 하기 위해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 우씨(尤氏)를 그리워하다가 죽게 되었을 때, 당시에 남편을 붙잡지 못했던 것을 한탄하면서, “내가 당시에 낭군을 만류하지 못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은 뒤에 큰 회오리바람이 되어 장사꾼들이 장사하러 가는 것을 막을 것이다.” 한 고사를 가리키는데, 이후로 상인들은 출발하기에 앞서 바다에서 거센 바람이 불면 “석우풍(石尤風)이 분다.”라고 하면서 출발을 연기하였다고 한다. 御定淵鑑類函 卷6

101)연진(延津):연평진(延平津)을 가리키는 것으로, 진(晉)나라 때 뇌환(雷煥)이 풍성 영(豐城令)으로 있으면서 용천(龍泉)과 태아(太阿) 두 명검을 얻어, 하나는 장화(張華)에게 주고 하나는 자신이 찼는데, 장화와 뇌환이 모두 죽은 뒤에는 두 자루 보검도 연평진의 못으로 날아 들어가 두 마리 용이 되었다고 한다. 晉書 卷36 張華列傳

102)화택(火宅):불교어로, 온갖 고난이 모여 있는 속계(俗界)를 비유하는 말이다.

103)종문(宗文):당나라의 시인 두보의 맏아들 이름으로, 여기서는 상대의 아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104)영조(靈照):당나라 때 양주(襄州)의 도인이었던 방온(龐蘊)의 딸로, 여기서는 상대의 딸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방온이 장차 입적하려고 자리를 만들고 영조에게 정오가 되면 알려 달라고 했는데, 영조가 눈치를 채고 일식이 있다고 속여 아비를 밖으로 나오게 한 다음 아비 대신 그 자리에 앉아 합장하고 죽었던 고사가 있다. 景德傳燈錄 卷8 襄州居士龐蘊

105)팔선(八仙):전설상의 여덟 신선으로, 설이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종리(鍾離), 장과로(張果老), 여동빈(呂洞賓), 이철괴(李鐵拐), 한상자(韓湘子), 조국구(曹國舅), 남채화(藍采和), 하선고(何仙姑)를 가리킨다.

106)단약(丹藥)을……말고:한(漢)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단약을 완성하여 복용한 뒤 신선이 되어 가족들과 함께 승천(昇天)할 때, 그 집의 닭과 개도 그릇에 남아 있던 단약을 핥아먹고 하늘에 올라가서, 개는 천상에서 짖고 닭은 구름 속에서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34

107)기승(驥蠅):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능력이나 지위로 인해 덩달아 이득을 보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안연(顔淵)이 비록 독실하게 학문을 닦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천리마 꼬리 끝에 붙었기 때문에 그 행실이 더욱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하였다.

108)금항(金缸):옛날 궁전의 벽에 가로 대는 목재에 장식했던 금붙이로, 귀한 물건을 가리킨다. 

109)비승(祕丞):비서원(祕書院)의 벼슬인 승(丞)을 가리킨다. 비서원은 왕명의 출납과 기록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1895년(고종32)에 승선원(承宣院)을 비서감(祕書監)으로 고쳤다가, 그해 비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10)박주현(朴周鉉):1844〜1910.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내수(內壽)이고, 호는 송곡(松谷)이며,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김병학(金炳學)의 문인으로, 1876년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883년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였다. 이후 승문원 부정자, 성균관 전적, 홍문관 시독, 비서원 승 등을 지냈다. 사간원에 있을 때는 양복을 입을 수 있도록 한 복제 개정에 반대하기도 하였다. 러일전쟁 후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송병선(宋秉璿)과 함께 나라의 앞날을 논의하는 등, 일본에 맞서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그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저서에 송곡유고(松谷遺稿)가 있다.

111)기천(杞天)을 바라봤지:중국 기(杞) 지역에 살던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것을 걱정하여 침식을 잊었다는 고사가 있다. 列子 天瑞 여기서는 남들과 다른 선견지명으로 나라의 존망을 걱정했던 것을 말한다.

112)꿈……베꼈고:나라가 망해 가는 즈음에 옛날 서책을 옮겨 적는 일을 했다는 의미로, 박주현이 춘추관 기주관을 역임한 것을 가리킨다. 춘명(春明)은 옛날 장안(長安)의 성문인 춘명문(春明門)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대궐 또는 도성을 가리킨다. 선부군송곡공가장(先府君松谷公家狀)에 의하면, 이헌직(李憲稙)이 그를 조정에 추천하면서, “근래에 기주관의 직임은 번거롭다는 이유로 모두들 회피하고 있는데, 박 아무개는 오래도록 성실하게 노고를 다하였다.” 하였다. 참고로 이 표현은 청나라 초기에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의 연혁과 제도 등을 상세하게 기록한 손승택(孫承澤)의 춘명몽여록(春明夢餘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113)영미(潁尾)에서 한전을 일구었네:고향에서 은거하면서 묵은 밭이나 일구었다는 의미이다. 영미는 영수(潁水)의 끝자락이라는 뜻으로, 송(宋)나라 때의 문장가 구양수(歐陽脩)가 다른 사람에게서 귀한 선물을 받고서 지은 시에, “결국에는 자리 걷고 베개 들고 떠나서 맑은 영수 끝자락에 집을 짓고 전답 사서 살지 않겠나.[終當卷簟携枕去 築室買田淸潁尾]”라고 하였다. 文忠集 卷8 古詩二十一首

114)회벽(懷璧):옥구슬을 품었다는 뜻으로,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음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환공(桓公) 10년 조에 “주(周)나라 속담에 ‘필부가 무슨 죄가 있으랴, 옥구슬을 품고 있는 것이 죄일 뿐이지.[匹夫無罪 懷璧其罪]’라고 하였다.” 하였다.

115)착편(著鞭):채찍을 잡는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맡아 남보다 앞장서서 공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동진(東晉)의 유곤(劉琨)이 젊었을 때부터 벗 조적(祖逖)과 의기투합하여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원을 수복할 뜻을 지니고 있었는데, 조적이 먼저 기용되었다는 말을 듣자 “내가 창을 베고 누워 아침을 기다리면서 오랑캐 섬멸할 날만을 기다려 왔는데, 나의 벗 조적이 나보다 먼저 채찍을 잡지 않을까 늘 걱정하였다.”라고 하였다. 世說新語 賞譽下

116) 卄:대본에는 ‘共’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117) 요기(妖氣)가……가니:매국노들의 발호로 대한제국의 운명이 다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요기는 소인배 또는 매국노를 가리키고, 황제의 별은 자미원(紫微垣)에 속하는 별로, 황제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명(明)나라 남지(藍智)가 마애비(磨崖碑)라는 시를 지어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몽진(蒙塵)하는 상황을 읊으면서, “이때 요상한 기운이 당나라 기업(基業)에 침범하여, 황제의 별이 한낮에 서남쪽으로 옮겨 갔네.[是時妖孽侵唐基 帝星白日西南移]”라고 하였다.

118)짧은……없었으니:쓰러져 가는 나라를 위해 조그만 힘도 보태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119)살신성인……아니라네:국난을 당해 자결함으로써 지식인으로서의 도리는 다하였지만, 나라에 도움이 되는 충성을 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지사와 인인은 살기 위하여 인을 해친 경우는 없고, 목숨을 버려 인을 이룬 경우는 있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人 殺身以成仁]” 하였다.

120)윤곡(尹穀):송(宋)나라 담주(潭州) 장사(長沙) 사람으로, 평소 강직하고 염정(廉正)한 것으로 명성이 있었다. 몽고(蒙古) 군대가 쳐들어와서 담성(潭城)을 포위하였을 때 막료로서 성을 방어하는 데 참여하였는데,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처자(妻子)에게 뒤따라 죽을 것을 명한 뒤,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 단정히 앉아 자결하였다. 宋史 卷450 尹穀列傳

121)진동(陳東)처럼 못했던고: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진동처럼 간신배들을 몰아낼 것을 극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뜻이다. 진동은 중국 북송(北宋) 흠종(欽宗) 연간의 태학생(太學生)으로, 자는 소양(少陽)이다. 당시 채경(蔡京) 등 6인이 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舊法黨)을 철저하게 몰아내고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다시 시행하는 등 전횡을 일삼자, 육적(六賊)으로 지목하여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 금(金)나라 군대가 침입해 왔을 때 대항을 주장했던 이강(李綱)이 파직되자, 태학생들을 이끌고 상소를 올려 그의 복직을 청하기도 하였다. 宋史 卷455 陳東列傳

122) 이단농 건초(李丹農建初):한말의 문신이며 학자인 이건초(李建初)로, 자는 태린(泰隣)이고 단농은 호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후기의 학자인 어당(峿堂) 이상수(李象秀, 1820〜1882)의 아들이다.

123)창공의 기러기:뜻이 고상하여 속세의 이해를 초월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당나라 장구령(張九齡)이 감우(感遇)라는 시에서 자신을 외로운 기러기에 비유하면서, “이제 나는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노니나니, 주살 든 자인들 어찌 쏘아 잡길 기대하리.[今我遊冥冥 弋者何所慕]” 하였다. 唐詩三百首 卷1

124)기노사(奇蘆沙):조선 말기의 성리학자인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가리킨다. 자는 대중(大中)이고, 호는 노사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8, 9세에 이미 경사(經史)에 능통했고, 34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입격하였다. 증광시(增廣試)에 낙방하자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조선 성리학의 6대가(大家)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정신적 지주였다. 대표적인 저술로 납량사의(納凉私議), 이통설(理通說), 외필(猥筆) 등이 있으며, 특히 외필은 당시 지식인들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집으로 노사집(蘆沙集)이 있다.

125)한……돌리셨네:혼자의 몸으로 시대적으로 만연해 있는 불교와 도교 등 이단의 설을 물리치고 유학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 것을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온갖 냇물을 막아 동쪽으로 흐르게 하여, 거꾸로 흐르던 미친 듯한 물결을 원래대로 돌렸으니, 선생은 유학(儒學)에 대해 노고가 있다고 이를 만합니다.[障百川而東之 廻狂瀾於旣倒 先生之於儒可謂勞矣]” 하였다.

126)보배로운……굴복하니:신령한 거울처럼 맑아 사술(邪術)이나 사설(邪說)이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듯하다. 요정(妖精)은 요괴, 즉 소인배를 말하는 것으로,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선제(宣帝)가 지닌 보배로운 거울은 요괴를 비춰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요정이 거울 속에 들어 있다고 풀이하는 설도 있다.

127)장미 이슬에 씻네:상대의 시문을 고귀하게 여겨서, 읽기 전에 장미에 내린 이슬을 받아 모아 둔 깨끗한 물에 손을 씻는다는 뜻으로, 당(唐)나라의 문호(文豪) 유종원(柳宗元)이 한유(韓愈)가 부친 시를 받고서, 먼저 장미에 맺힌 이슬로 손을 씻은 다음에 읽었다는 고사가 있다. 御定淵鑑類函 卷10

128)파방(罷榜):과거의 합격이 취소되는 것으로, 김택영(金澤榮)이 지은 매천의 본전(本傳)에, “태황제(太皇帝) 20년에 특별히 보거급제시(保擧及第試)를 설행하였는데, 황현이 초시(初試) 초장(初塲)의 책제에 대책(對策)을 내니, 시관(試官) 한장석(韓章錫)이 그 문장을 보고 크게 놀라 1등으로 뽑았다가, 얼마 뒤 시골 사람인 것을 알고는 고쳐서 2등으로 삼았다. 전정(殿庭)에서 보는 회시(會試)에서는 파방을 통보받았다.” 하였다.

129)쥐……꾸짖으랴:차원 높은 학문을 하는 자신에게는 과거 시험같이 지엽적이고 기능적인 것에 능하지 못한 것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기기(騏驥), 화류(驊騮)와 같은 명마들은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 능력에 있어서는 고양이만 못하다.” 하였다.

130)갈……기약하네:붕새의 여정처럼 인생이 많이 남은 자신으로서는, 아직도 날기를 준비하는 곤(鯤)으로 있기를 희망한다는 뜻인 듯하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북쪽 바다[北冥]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붕(鵬)이 된다.……이 새는 바다의 기운이 움직이면 장차 남쪽 바다[南冥]로 날아가려 한다.” 하였다.

131)백설가(白雪歌):양춘곡(陽春曲)과 함께 병칭되는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가곡(歌曲) 이름으로, 곡조가 고아(高雅)하고 심오하여 화답할 수 있는 사람이 적었다고 한다. 문선(文選)송옥대초왕문(宋玉對楚王問)에, “어떤 사람이 영중(郢中)을 지나다가 하리곡(下里曲)파인곡(巴人曲)을 부르니 화답한 자가 수천 명이고, 양아곡(陽阿曲)해로곡(薤路曲)를 부르니 화답한 자가 수백 명이고, 양춘곡백설가를 부르자 화답한 자가 수십 명을 넘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132)영재(寧齋):326쪽 주51 참조.

133)관검(冠劍):옛날 관원들이 머리에 썼던 모자와 허리에 찼던 검을 말하는 것으로, 문관과 무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134)세한(歲寒)의 뜻: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처럼 굳은 지조(志操)를 가리킨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하였다.

135)보도(報桃):상대가 자신의 작은 정성에 후하게 답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시문에 대한 답을 해 주었을 때 쓴다. 시경 목과(木瓜)에, “내게 목도를 던져 줌에 옥구슬로 보답하고도 보답했다 여기지 않는 것은 오래도록 좋게 지내고자 해서이다.[投我以木桃 報之以瓊瑤 匪報也 永以爲好也]”라고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에, “사람이 나에게 하찮은 물건을 선물하였을 때 나는 마땅히 중한 보물로써 보답을 하되 오히려 보답했다고 여기지 않아야 할 것이요, 다만 오래도록 좋게 지내서 잊지 않고자 하여야 할 따름이다.” 하였다.

136)손 선생은……공부하였다네:위에서 4구씩 의미를 짓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뒤쪽 2구가 빠진 듯하다. 손 선생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 덕분에 노력하여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매천도 이건창이 자신을 예우해 주기 때문에 신이 나서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의미이다. 손 선생은 북송(北宋) 초기의 학자 손복(孫復)으로, 자는 명복(明復)이고, 호는 수양자(睢陽子)이며, 특히 춘추에 밝았다고 한다. 범중엄(范仲淹)이 수양(睢陽)에서 학관(學官)으로 있을 때 그가 집이 가난하여 학업에 몰두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네는 돈이나 구걸할 사람이 아니네. 월봉을 받는 학직(學職)에 보임시켜 줄 터이니 공부에만 전념하게.”라고 하면서 춘추를 가르쳐 주었는데, 10여 년 뒤에 범중엄이 조정에 있을 때 “태산 아래에 손명복 선생이 학생들에게 춘추를 강의하고 있는데, 도덕이 고매하다.”라는 소문이 들리므로 불러 보니, 바로 옛날 그 손복이었다고 한다. 宋名臣言行錄 前集 卷10

1)이석정(李石亭):석정은 김제(金堤) 출신의 시인이자 문장가인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의 호이다. 그는 재주가 비상하여 성리(性理), 서화(書畫), 음양(陰陽), 복서(卜筮), 의약(醫藥), 산수(算數) 등에도 조예가 깊었고, 시문(詩文)에 있어서는 매천 황현, 해학(海鶴) 이기(李沂)와 함께 호남 삼걸(湖南三傑)로 병칭된다. 문집으로 석정집(石亭集)이 있다. 김정환, 梅泉詩派 硏究, 경인문화사, 2007

2)이석정(李石亭)에게 답한 편지:두 사람의 교유는 이정직이 1895년(고종32) 구례(求禮)에 사는 매천을 방문함으로써 시작되었고, 이후 다년간 수창(酬唱)하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돈독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상반된 문학관으로 인해 수차례 문학 논쟁을 벌였는데, 이 편지는 바로 그 대표적인 논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논쟁의 주 쟁점은, 이정직이 고문(古文)을 본받아야 한다는 법고론(法古論)을 주장하는 반면, 매천은 글 쓰는 이의 개성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창신론(創新論)을 주장한 것이다. 기태완, 매천 황현과 석정 이정직의 문학논쟁, 한문학보 제13집, 2002

3)풍기(風氣):윤경희(尹景禧)는 “풍기란 작가가 생존했던 당대의 조류와 역사적 조건, 즉 그 시대의 정치 현실과 역사적 상황”이라고 전제하면서, 아무리 탁월한 작가라도 자신의 시대적 여건인 풍기를 완전히 벗어난 공간에서 창작 활동을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들은 “당대의 현실에 다가가 자기 시대의 모순과 갈등을 절실하게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였기에 시문의 전범으로 존중된다.”라고 하였다. 윤경희, 황현의 문학사상, 일정 송민호박사 고희기념논총, 계명문화사, 1991

4)서(誓)와 고(誥):서경의 육서(六誓)와 육고(六誥)를 말한다. 육서는 감서(甘誓)탕서(湯誓)태서(泰誓)목서(牧誓)비서(費誓)진서(秦誓)의여섯 편을 말하고, 육고는 주고(酒誥)소고(召誥)낙고(洛誥)대고(大誥)강고(康誥)탕고(湯誥)의 여섯 편을 말한다.

5)나무를……하겠는가:이 구절은 자(字)가 자운(子雲)인 양웅(揚雄)의 저서 법언(法言)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법언을 보면 ‘斷木爲棋 梡革爲鞠 亦皆有法焉’까지만 양웅의 말이고, ‘況於文乎’는 구양수(歐陽脩)가 법언의 말을 인용하여 문장에서의 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 말이다. 歐陽脩集 卷68 與石推官第二書 구양수집에는 이 구절이 ‘而況書乎’라고 되어 있는데, 구양수의 이 글을 인용한 홍재전서(弘齋全書)에는 ‘歐陽子述揚子雲之言曰 斷木爲棊 梡革爲鞠 莫不有法 而况於文乎’라고 되어 있다. 弘齋全書 卷56 雜著3 示史記英選監印諸人 바로 뒷구절이 ‘由此觀之’로 연결되는 것을 보면, 매천은 이 글 전체를 양웅의 말로 착각한 듯하다. 여기서는 자연스러운 글의 흐름을 위해 매천이 파악한 대로 번역하였다.

6)공수자(公輸子):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나무를 잘 다루는 명장(名匠)으로, 이름은 반(班)이다. 일설에는 반(般)이라고도 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공수자의 정교한 솜씨로도 규구를 쓰지 않으면 네모와 원을 완벽하게 그릴 수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규(規)는 원을 그리는 그림쇠이고 구(矩)는 각을 그리는 데 쓰는 곱자인데, 건축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도구이자 법도라고 할 수 있다.

7)그것이……있겠습니까:그 사람이 들고 있는 규구가 바로 공수자가 사용했던 옛 법이라고 말한다면 맞는 말이지만, 그 법을 이용하는 사람이 꼭 공수자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즉 옛 법을 공수자처럼 정교하게 운용하는 것은 규구 자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규구를 잡은 사람의 정교한 솜씨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장에서도 옛 법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각자 나름대로 정묘하게 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8)남풍(南豐):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증공(曾鞏)을 말하는데, 그가 남풍 출신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남풍 선생이라 불렀다.

9)잠계(潛溪):명나라 때의 석학 송렴(宋濂)의 호이다. 그는 포강(浦江) 사람으로 자는 경렴(景濂)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항주(杭州) 동명산(東明山)에 은거하여 10여 년간 저술에 몰두하였고, 원사(元史)를 편찬하고 명(明)의 예악을 제정하였다.

10)손지(遜志):명나라 때의 학자 방효유(方孝孺)의 호이다. 그는 영해(寧海) 사람으로 자는 희직(希直)․희고(希古)이다. 송렴의 수제자로 한림원 시강 등을 역임하였다.

11)회록(懷麓):명나라 때의 문장가 이동양(李東陽)의 별호이다. 그는 다릉(茶陵) 사람으로 자는 빈지(賓之)이고, 호는 서애(西涯)이다. 효종(孝宗) 때 문연각 태학사(文淵閣太學士)가 되었다. 시문은 전아하고 유려하였으며 특히 악부(樂府)에 뛰어났다.

12) 양명(陽明):명나라 때의 사상가 왕수인(王守仁)의 호이다. 그의 자는 백안(伯安)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13)이헌길(李獻吉):헌길은 명나라 때의 문장가 이몽양(李夢陽)의 자이다. 그는 경양(慶陽) 사람으로 호는 공동자(空同子)이다. 시와 고문에 능하여 명나라 십재자(十才子) 중에 최고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시는 맹목적으로 두보의 시를 모방하고 문장은 사기(史記)를 모방하려 하였다. 이 점에 대해 우리나라 학자 이덕무(李德懋)도 “끝내 옛사람의 발밑만 더듬은 결과밖에 안 되므로 안목을 가진 장자(長者)들로 하여금 업신여기게 하고 또 애석히 여기게 하였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국역 청장관전서 2 제5권 영처잡고(嬰處雜稿) 쇄아(瑣雅)

14)이헌길조차도……말았습니다:우맹(優孟)은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유명한 배우(俳優)이다. 당시에 정승 손숙오(孫叔敖)가 그에게 잘해 주었는데, 손숙오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이 가난에 시달리는 것을 알고는, 손숙오의 흉내를 연습한 뒤에 손숙오의 의관을 착용하고 임금에게 나아가 설득하여 그 자손에게 땅을 봉해 주게 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여기서는 우맹이 손숙오의 의관을 쓰고 가장(假裝)하였으니 남의 흉내나 내는 가짜라는 의미이다. 결국 이헌길이 평생 두보 등을 모방하려 한 것도 남의 의관을 쓰고 남의 모습을 흉내 낸 가짜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15)정(正)이……됩니다:그 문장을 따르는 사람이 있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고정적으로 명명되는 하나의 틀, 즉 ‘법’이 생기게 된다는 말이다.

16)황보식(皇甫湜):당나라 목주(睦州) 신안(新安) 사람으로 자는 지정(持正)이다. 헌종(憲宗) 원화(元和) 원년(806)에 진사가 되었고 관직이 공부 낭중(工部郎中)에 이르렀다. 한유에게 고문을 배워 이고(李翶), 장적(張籍)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7)황노직(黃魯直):노직은 황정견(黃庭堅)의 자이다. 그는 홍주(洪州) 분녕(分寧) 사람으로 호는 산곡(山谷)이다. 소식(蘇軾)의 제자이며,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18)구양영숙(歐陽永叔):영숙은 구양수(歐陽脩)의 자이다. 호는 취옹(醉翁)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며, 한유의 고문에 영향을 받아 송대 고문의 품격을 높였다고 일컬어진다.

19)육방옹(陸放翁):방옹은 육유(陸游)의 호이다. 그는 산음(山陰) 사람으로 자가 무관(務觀)이다. 만 수(首)에 달하는 시를 남겨 중국 시사(詩史)에 최다작 시인으로 꼽히며, 당시풍(唐詩風)의 서정을 부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예술을……말씀하셨습니다:이정직의 법고론(法古論)을 요약하면, 옛 법을 본받을 때 자구(字句)와 편장(篇章)의 법뿐만 아니라 그 글의 기풍과 정신적 경지까지 추구해야 하며, 그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옛사람과 같은 통달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은 옛글의 형태만 모방하는 데 그쳐 의고주의(擬古主義)에 빠지거나 아예 법을 버리고 개성을 추구하다 보니 글이 너무 잗달고 늘어지는 병폐가 생기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석정이정직유고(石亭李定稷遺藁) 서제가문영후(書諸家文英後), 김제문화원, 2001

21)고적(高適):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발해(渤海) 사람이며 자는 달부(達夫)이다. 변새시(邊塞詩)에 뛰어났다.

22)잠삼(岑參):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강릉(江陵) 사람이며 고적과 함께 대표적 변새시인이다.

23)왕유(王維):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자는 마힐(摩詰)이며 산수와 전원을 읊은 시를 많이 썼다.

24)맹호연(孟浩然):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양양(襄陽) 사람이며 자연의 정취를 읊은 시가 많다.

25)이유(二劉)와 삼공(三孔):이유는 송나라 때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유창(劉敞)과 유반(劉攽) 형제를 말한다. 유창은 자가 원보(原父)이고 유반은 자가 공보(貢父)이다. 학식이 있고 문장에 능하여 서한(西漢)의 풍치가 있다고 일컬어지며 해학(諧謔)에도 능했다 한다. 국역 성호사설 6 제15권 인사문(人事門) 공시공비(公是公非) 삼공은 송나라 때 문명을 떨쳤던 공문중(孔文仲), 공무중(孔武仲), 공평중(孔平仲) 형제를 말한다.

26)계곡(谿谷)과 택당(澤堂):계곡은 장유(張維)의 호이고 택당은 이식(李植)의 호이다. 이들은 이정귀(李廷龜), 신흠(申欽)과 함께 조선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꼽힌다.

27)군수(郡守)……서(序):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 이봉상(李鳳相)은 고종 32년 을미년(1895) 3월 1일에 구례 현감에 제수되고, 고종 34년 정유년(1897) 4월 25일에 구례 군수에서 의원면직(依願免職)되었다. 김소영은 매천 산문의 표현형식 연구(한문학보 제18집, 2008)에서 이 작품의 저작 시기를 ‘1895년, 41세 때의 작품’이라고 하였는데, 이 글은 이봉상이 군수를 그만두고 떠날 때 쓴 글이다. 따라서 승정원일기에 근거하면 1897년에 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8)유품(流品):일반적으로는 관리의 품계를 이르는 말로 정1품에서 종9품까지를 통칭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사대부 집안 출신이 아닌 자로서 관리가 되어 품계를 받은 경우를 칭하는 말로 쓰인 듯하다.

29)파격적인……시행했는데: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새 관리 임용 제도가 실시되어 문벌에 관계 없이 인재를 등용하게 된 것을 말한 것이다. 김소영, 매천 산문의 표현형식 연구, 한문학보 제18집, 2008

30)수령을……한다:김소영은 위 논문에서 ‘문답, 즉 대화 형식의 도입’을 매천의 산문 표현 특징의 하나로 지적하고 이 대목을 예시하고 있다. 그는 그 밖의 매천의 산문 표현 특징으로 ‘의론(議論)의 적극적 전개’, ‘다양한 풍자 수법’, ‘근대적 신용어(新用語)의 수용’ 등을 제시하였다.

31)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모두 당 태종(唐太宗) 때의 재상들이다.

32)만수동(萬壽洞):매천은 32세 되던 해인 1886년(고종23)에 광양현 서석(西石) 마을에서 구례군 간전면(艮田面) 만수동으로 이사하였고, 1890년에 그곳에 구안실(苟安室)이라는 서재를 짓고 제자를 강학하고 시문을 창작하였다. 한편 속수구례지(續修求禮誌)에 따르면 “만수동은 백운산(白雲山) 동쪽 기슭 고암(鼓巖), 즉 북바위 아래에 있다.”라고 되어 있다. 黃秀貞, 梅泉詩의 이해를 위한 傳記 硏究, 고시가연구 제10집, 한국고시가문학회, 2002

33)소죽:대본에는 ‘牛飮’으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飮’을 ‘飯’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매천집정오는 번역 대본인 한국문집총간 제348집에 수록된 매천집 권7 뒤에 첨부되어 있다.

34)촛불을……활용하였고:초(楚)나라 사람이 연(燕)나라 정승에게 보내는 국서(國書)를 쓸 때, 방에 불이 밝지 않자, 촛불을 가진 자에게 “촛불을 들라.[擧燭]”라고 하였는데, 글을 받아 적는 자가 그 말까지 국서에 써넣었다. 그런데 연나라 정승은 그 말을 현인(賢人)을 등용하라는 말로 여기고는, 매우 기뻐하며 현인을 등용하였고 그 결과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韓非子 外儲說

35)활……생각했다:여씨춘추(呂氏春秋) 이용(異用)에, “인자는 물엿을 얻으면 병든 사람과 노인을 봉양하는 데 쓰지만 도척과 장교(莊蹻)는 그 물엿으로 남의 자물쇠를 연다.[仁人之得飴 以養疾侍老也 跖與企足得飴 以開閉取楗也]”라는 내용이 있다. 즉, 자물쇠 구멍에 물엿을 넣어 자물쇠 여는 소리가 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매천집에서는 ‘물엿’이 아니라 ‘활을 붙이는 아교’라고 하였는데, 아교와 도척이 관련된 고사는 끝내 찾지 못하였다. 물엿이나 아교가 비슷한 성질이 있는 점을 감안하면, 매천이 여씨춘추의 고사를 조금 변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36)서로……없다:‘촛불을 들라’는 말과 ‘현인 등용’은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이지만 연나라 재상은 그것을 잘 활용하여 나라를 다스렸고, 활 붙이는 데 쓰는 아교는 자물쇠를 여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물건이지만 도척은 그것을 활용하여 도적질을 하였듯이, 자신과 전혀 상반된 부지런한 성격을 지닌 노성무(盧性茂)로 인해 매천 자신이 생활 방식을 바꾸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는 말이다.

37)널리……방법:논어 옹야(雍也)에, “군자가 널리 글을 배우고 예로 요약한다면 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라는 공자의 말이 있고, 논어 자한(子罕)에는 안연(顔淵)이 “우리 선생님은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는 분이기에, 학문으로 나를 넓혀 주시고 예로써 나를 단속하게 해 주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라는 말이 있다.

38)제호(醍醐)는……잊으며:우유를 정제하면 유(乳), 낙(酪), 연유(煉乳), 생수(生酥), 숙수(熟酥)의 단계를 거쳐 제호가 되는데, 이 중에서 제호의 맛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제호 또는 ‘제호상미(醍醐上味)’를 가장 높은 부처의 경지를 의미하는 말로 쓴다. 여기서는 제호라는 최고의 맛이 나기까지 유(乳)와 낙(酪)의 단계를 거치지만 일단 맛이 완성되면 그 이전 단계는 잊어버리듯이, 사장(詞章)에서도 잡박한 단계를 거쳐 일가를 이루는 경지에 오르면 그 잡박한 과정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39)왕소금(王素琴):소금은 왕사천(王師天, 1842〜1906)의 호이다. 왕사천은 매천의 스승인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의 둘째 아들로, 매천과는 함께 여행하며 시문을 토론하고 수창(酬唱)한 각별한 사이였다. 김정환, 梅泉詩派 硏究, 경인문화사, 2007, 14〜15쪽

40)악전(偓佺)이나 팽조(彭祖):악전은 요(堯) 임금 때 괴산(槐山)에서 약초를 캐 먹고 살았다는 신선이며, 팽조(彭祖)는 도인(導引)의 양생술(養生術)로 800년을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列仙傳 卷上 偓佺․彭祖

41)어찌……것이다:이 구절의 의미는, 옛날에는 신선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는 것이 논리적 모순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현재 신선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도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그래서 ‘신선은 없다’고 단정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42)천지보다……해도:이백(李白)의 악부시 비룡인(飛龍引)에, 신선을 형용하여 “하늘보다 뒤에 늙고 해와 달과 별보다 늦게 시드네.[後天而老凋三光]”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번역문의 해와 달과 별이 대본에는 ‘二光’으로 되어 있는데, 전주대 호남학연구소에서 1984년에 편찬한 매천전집(梅泉全集)의 대본으로 쓰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검열본(檢閱本)에 의거하여 ‘二’를 ‘三’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43)공문거(孔文擧):문거는 후한 때의 학자 공융(孔融, 153〜208)의 자이다.

44)중장공리(仲長公理):공리는 중장통(仲長統, 180〜220)의 자로, 은거하는 삶의 즐거움을 그린 낙지론(樂志論)의 저자이다.

45)반 정원(班定遠):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서역을 정벌하여 50개 이상의 나라를 복속시킨 공으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진 반초(班超, 33~102)를 말한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46)남자라면……방법이다:진(晉)나라 때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은 보병(步兵)을 관할하는 관부의 창고에 담가 놓은 술이 300섬이나 저장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보병 교위(步兵校尉)를 자청한 뒤에 유령(劉伶)과 함께 그 창고에 들어가 실컷 술을 마셨다고 한다. 世說新語箋疏 任誕 그리고 진나라 때의 공신인 유의(劉毅)는 유유(劉裕) 등과 수백만 전(錢)의 판돈을 걸고 저포(樗蒲)라는 도박을 하였다고 한다. 詩詞典故詞典, 中國 書海出版社, 1990년, 499쪽, 劉毅樗蒲 여기서는 남자라면 당연히 만리를 평정하는 공을 세워야 하고 아니면 진나라 때의 현자들처럼 술과 놀이로 인생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47) 금년:1902년 광무 6년이다.

48) 희원(希元):황윤관(黃潤觀)의 아들은 여섯으로 정모(廷模), 영모(永模), 준모(俊模), 긍모(兢模), 기모(錤模), 진모(晉模)인데, 이중에 누가 희원인지는 찾지 못하였다. 희원은 자인 듯하다. 勉菴集 續集 卷2 通德郞龍坡黃公墓表

49)위와 같이 말하였다:위와 같이 말했다는 것은 자치통감강목이 2부나 있다는 소문을 가리킨다.

50) 용파공(龍坡公):용파는 황윤관(黃潤觀, 1816〜1877)의 호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자는 성구(聖九)이다. 勉菴集 續集 卷2 通德郞龍坡黃公墓表

51)돌아가신……한다:이 구절은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9장에 보인다.

52)3년……있다:이 구절은 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53)맹장자(孟莊子)가……것:논어 자장(子張)에, “내가 선생님께 들으니, ‘맹장자의 효도 중에 다른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버지의 신하와 아버지의 정사를 바꾸지 않은 일은 아무나 하기 어렵다.’라고 하셨다.”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보인다.

54)고옥산(顧玉山):옥산은 원말(元末) 명초(明初) 때의 고덕휘(顧德輝)의 호이다. 자는 중영(仲瑛)이고 곤산(昆山) 사람이다. 집안이 부유하여 ‘옥산가처(玉山佳處)’라는 별장을 지어 놓고 빈객들과 시주(詩酒)를 즐겼으므로 사방의 문장가들이 모두 그의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明史 卷285 文苑列傳 顧德輝

55)동정 옹씨(洞庭翁氏):동정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옹씨로 명나라 때 상업으로 부자가 된 집안인데,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켜 말한 것인지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56)운림(雲林):원말 명초 때의 시인 예찬(倪瓚)의 자호(自號)이다. 자는 원진(元鎭)이며 무석(無錫) 사람이다. 시와 산수화에 능하였고 당대 명사들과 교유하였으며, 말년에 청한각(淸閑閣)과 운림당(雲林堂)을 짓고 전원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明史 卷298 隱逸列傳 倪瓚

57)철애(鐵崖):원말 명초의 문장가 양유정(楊維楨)의 호이다. 자는 염부(廉夫)이다.

58)동현재(董玄宰):현재는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의 유명한 서화가인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의 자이다. 호는 사백(思白)이며 또 다른 호는 향광거사(香光居士)이다.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59)장천여(張天如):천여는 명나라 숭정(崇禎) 연간의 문장가인 장부(張溥, 16021641)의 자이다. 호는 서명(西銘)이다.

60)구안(苟安):여기서의 ‘구(苟)’의 의미는, 표면적으로는 집 규모의 구차함이나 보잘것없음을 말하지만, 이면적으로는 ‘충분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외형적으로는 구차해 보여도 충분히 만족한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아래에 나오는 ‘구’ 자의 의미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61)공자(孔子)가……하였고:논어 학이(學而)에 나오는 말이다.

62)이만하면……훌륭하다:논어 자로(子路)에, “공자가 위(衛)나라 공자(公子) 형(荊)을 평가하기를, ‘그는 집안 살림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다. 처음 살림을 나서 재물을 소유하게 되자, 「이만하면 모였다.」라고 하였고, 조금 더 장만하게 되자, 「이만하면 충분히 갖추었다.」라고 하였고, 부유하게 되자, 「이만하면 충분히 훌륭하다.」 하였다.’[子謂衛公子荊 善居室 始有曰 苟合矣 少有曰 苟完矣 富有曰 苟美矣]”라고 하였다. 즉, 공자는 맹목적으로 부귀를 추구하지 않고 항상 현재에 만족하며 겸허한 태도를 지닌 공자 형을 칭찬한 것이다.

63)동복현(同福縣)의 적벽(赤壁):현재 전남 화순군(和順郡) 이서면(二西面) 창랑천(滄浪川) 일대의 절벽을 말한다. 적벽이란 명칭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동복으로 귀양 온 최산두(崔山斗)가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붙였다고 한다.

64)천하의……것이다:천하의 지극한 질박이란 모래와 물결과 적벽 같은 천지가 빚은 질박한 자연물을 말하고 천하의 지극한 허상이란 그런 자연물이 조화를 부려 빚어내는 아름답지만 실체가 없는 허상을 말한다.

65) 강가에 자그마한 정자:전남 화순군의 적벽에 있는 물염정(勿染亭)을 말한다.

66)삼연(三淵):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호이다. 자는 자익(子益)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67)말……구절:삼연집습유(三淵集拾遺)10 적벽차중씨운(赤壁次仲氏韻)의 첫 구인데, 이 시는 김창협(金昌協)의 물염정(勿染亭)이라는 시에 차운한 것이다.

68)구층암(九層菴):현재 구례군(求禮郡) 마산면(馬山面) 황전리(黃田里) 화엄사(華嚴寺) 경내에 있는 암자이다.

69)지위:대본에는 ‘品弟’로 되어 있는데, 전주대 호남학연구소에서 간행한 매천전집(梅泉全集)의 대본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검열본(檢閱本)에 의거하여 ‘弟’를 ‘第’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70)그들:대본에는 ‘其從’으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從’을 ‘徒’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71)공부할……탄식:도잠(陶潛)의 시 주속지, 조기, 사경이 등 세 사람에게 주는 시[示周續之祖企謝景夷三郞]에, “말 시장이 가까워 공부할 수 없네.[馬隊非講肆]”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陶淵明集 卷2

72)서까래:대본에는 ‘椽桶’으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桶’을 ‘桷’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73)증자고(曾子固):자고는 송나라 때의 문장가 증공(曾鞏)의 자이다.

74)유향(劉向):전한(前漢)의 학자로, 자는 자정(子政)이다. 열녀전(列女傳), 설원(說苑) 등의 저서가 있다.

75)신서(新序):유향이 편찬한 책으로 10권이다. 춘추 시대부터 한대(漢代)까지의 일사(逸事)를 기록하였다.

76)양홍(梁鴻):후한(後漢) 때의 현사(賢士)로, 평릉(平陵) 사람이다. 부인 맹광(孟光)과 서로 공경했다는 거안제미(擧案齊眉)의 고사가 있는데, 이 부부는 패릉(覇陵)의 산속으로 들어가 평생 은거하며 살았다.

77)서치(徐穉):후한 예장(豫章) 사람이고 자는 유자(孺子)이다. 그 역시 평생 벼슬에 응하지 않은 채 은거하고 살았으므로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로 일컬어졌다.

78)임포(林逋):967〜1028. 북송 때의 시인으로, 평생 은거하며 매화와 학을 길렀으므로 매처학자(梅妻鶴子)의 고사가 있다.

79)위야(魏野):960〜1019. 북송 때의 시인으로, 자는 중선(仲先)이다. 저서로 초당집(草堂集)이 있다.

80)선비……것일까:김소영은 이 구절을 예시하며 반어적 수법을 통해 당대의 유학자들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반어적 수법을 매천 산문의 한 특징으로 제시하였다. 김소영, 매천 산문의 표현형식 연구, 한문학보 제18집, 2008

81)서석산(瑞石山):광주 무등산(無等山)의 옛 이름이다.

82)그에게……글뿐이니:실제로 동계처사에게 성리학에 관한 글이 없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다. 이 구절 또한 성리학에 관한 글을 남겨야 학자로 대접받는 당시 세속의 기준을 비판하려는 반어적 표현법이다.

83)약초……증거:대본에는 ‘藥囊畫師之徵’으로 되어 있다. 의미상 ‘은일지사가 살았던 증거’라는 뜻으로 쓰인 듯하나 이에 대한 전거는 찾지 못하였다.

84)양영학교기(養英學校記):양영학교는 전주(全州)에 설립된 신학교이다. 그 설립 연대에 대해 하우봉은, 당시 사설 신학교의 설립 연대로 보아 빨라도 1905년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우봉, 黃玹의 歷史意識에 대한 硏究, 전북사학 제6집, 1985 그리고 이 기문(記文)에 대해 연구자들은 매천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적인 입장이 잘 드러나 있는 글로 보았는데, 김소영은 “자문자답의 형식으로 독자에게 시대적 화두에 호기심을 집중하게 하였다.”라고 이글의 표현적 특징을 규정하면서 “서양에서 받아들여야 할 대상을 ‘기(器)’로 국한하여 동도서기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라고 정리하였다. 김소영, 매천 산문의 표현형식 연구, 한문학보 제18집, 2008 한편 임형택은 이 글에 드러난 매천의 의식을 정의하면서 “매천은 주체적, 국민주의적인 개혁, 개방의 길을 모색했다.”라고 했으며, 이 글을 통해 매천의 “지식인으로서의 자각과 함께 근대성을 읽어낼 수 있다.”라고 언명하였다. 임형택, 黃梅泉의 批判知性과 寫實的 詩風, 한국한문학연구 제18집, 1999

85)제 환공(齊桓公)이나……방식:제 환공과 진 문공(晉文公)은 춘추 시대에 무력으로 패권을 잡은 임금이지만, 그들이 천하의 제후국들을 통제하던 방식은 그래도 인의(仁義)를 명분으로 하는 존주대의(尊周大義)였다.

86)허유(許由)처럼……정도이다:허유는 요(堯) 임금이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 하자, 귀를 더럽혔다고 하면서 영수(潁水)에서 귀를 씻었던 은자이며, 노중련(魯仲連)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로, 진(秦)나라가 황제로 자처하는 꼴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겠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여기서는 서양 열강들이 하는 짓을 보면, 허유나 노중련이 그랬던 것처럼 식자들이 결코 상종하려 하지 않을 정도로 폭압적이라는 말이다.

87)수(垂)나 장(斨):순(舜) 임금 때의 신하들로, 그 당시 최고의 장인(匠人)이었다. 書經 舜典 대본에는 ‘垂’으로 되어 있는데 서경집전(書經集傳)에 의거하여 ‘’을 ‘斨’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88) 순자강(鶉子江):섬진강(蟾津江)의 별칭이다.

89) 그……이르는데:장흥군에서 나와 순천과 곡성을 경유하여 압록 나루에 이르는 남쪽 근원의 물을 보성강(寶城江)이라 한다. 섬진강은 남원에서 발원한 본류와 보성강이 압록에서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강이다.

90)강이 길다는 시구:시경 한광(漢廣)에, “남쪽에 교목이 있는데 쉴 수 없으며 한수에 노니는 여자가 있는데 갈 수 없구나. 한수가 넓어 헤엄쳐 갈 수 없으며 강수가 길어서 뗏목 탈 수 없구나.[南有喬木 不可休息 漢有游女 不可求思 漢之廣矣 不可泳思 江之永矣 不可方思]”라는 구절에서 온 것이다.

91)민산(岷山)이나 아미산(峨嵋山):중국 촉(蜀) 땅에 있는 두 산의 이름인데,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92)그 밖의 것:대본에는 ‘乎外’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乎’를 ‘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93)이렇게……말았다:대본에는 ‘白髮遞如許’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遞’를 ‘遽’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94)삼묘(三泖)의 호수:묘(泖)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호수 이름인데, 상묘(上泖), 중묘(中泖), 하묘(下泖)로 구분하기도 하고 통칭하여 삼묘라고 하기도 한다. 원나라 때의 시인 예찬(倪瓚)이 이 호숫가에 은거하면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95)연암속집(燕巖續集) 발문(跋文):이 글에 대해 정양완은 “연암 문장에 대한 매천의 예찬이지만 매천의 고문론(古文論) 내지는 문장론(文章論)이라고도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면서, 소재, 용어, 사상, 그리고 문장 구성에 있어 아무런 구애받음 없이 자유롭게 글을 써야 한다는 주장에서 독창적이고 참신한 자기 문학 세계를 펼치고자 하는 그의 지향이 보인다고 역설하였다. 정양완, 散文을 통해서 본 梅泉의 文學精神, 震檀學報 61집, 1986

96)연암(燕巖):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호이다.

97)한신(韓信)과 백기(白起):한신은 한(漢)나라 때의 전략가이며, 백기는 전국 시대 진(秦)나라의 병법가이다.

98)김우림(金于霖):우림은 구한말 사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의 자이다.

99) 대승암(大乘庵):전남 순천의 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巖寺)에 있는 암자 이름이다.

100)운공(雲公):조선 말기 대승암의 강주(講主)로 있었던 승려 경운(擎雲)을 말한다. 법호는 경운이고 법명은 원기(元奇)이다. 속성은 김씨(金氏)로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함명(涵溟)의 법손이며, 익운(益運)의 제자이다. 불경의 깊은 뜻에 달통하였고 글씨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101)조계산(曹溪山):전남 순천의 승주에 있는 산 이름이다.

102) 김효찬(金孝燦):자는 대겸(大兼)이고 호는 남파(南坡)이고 본관은 김녕(金寧)이며 순천 출신이다. 저서로는 남파시집(南坡詩集)이 있다.

103)독석집(獨石集):선조 연간의 문신인 황혁(黃赫, 1551∼1612)의 문집이다. 황혁은 자가 회지(晦之)이며 호가 독석(獨石)이다. 황정욱(黃廷彧)의 아들이며 기대승(奇大升)의 문인이다.

104)옛날에……있는데:독석집의 초간본은 생질인 이후원(李厚源)이 정리한 것을 외손 유시번(柳時蕃)이 1670년(현종11)에 목판으로 간행하였고, 그 후에 현손 황휘(黃暉)가 증보 재편한 것을 6대손 황선(黃璿)이 1727년(영조3)에 목판으로 중간(重刊)하였다.

105)당촌(塘村):매천의 8대조인 황위(黃暐, 1605∼1654)의 호이다. 자는 자휘(子輝)이며 정홍명(鄭弘溟)의 문인이다.

106)계곡(谿谷):장유(張維, 1587〜1638)의 호이다.

107)지천집(芝川集):선조 연간의 문신 황정욱(黃廷彧, 1532∼1607)의 문집이다. 황정욱은 자가 경문(景文)이고 호가 지천(芝川)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08)그……서술하였는데:계곡 장유의 지천집 서(芝川集序)를 보면, 황정욱의 아들 황혁(黃赫)이 1612년(광해군4)에 진릉군(晉陵君)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로 옥사(獄死)할 때 황정욱의 시문(詩文)까지 금중(禁中)에 압수되었고, 그 뒤에 사위 이욱(李郁)에게 발견되어 그 아들 이후원(李厚源)에 의해 정리될 때까지의 험난한 과정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芝川集 芝川集序, 韓國文集叢刊 41輯 완남(完南)은 황정욱의 외손인 이후원의 봉호(封號)로, 그는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정사 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다.

109)두……때문에:황혁의 독석집은 저자가 무고를 받아 옥사할 때 그 환란의 와중에 산일되었던 것을 이후원이 1차 정리하였고 그 뒤에 다시 현손 황휘(黃暉)가 증보하여 편정하였다. 여기서의 두 공은 이후원과 황휘를 말한다.

110)조부(祖父):황직(黃樴)을 말한다. 황수정은, 매천이 조상으로부터 받은 큰 유산을 제시하면서, 첫째는 황희(黃喜) 정승의 청백리 정신, 둘째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황진(黃進)의 애국정신과 병자호란 때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황위(黃暐)의 의병 정신, 셋째는 바로 조부가 남겨 준 피땀 어린 유산을 들고 있다. 황수정, 梅泉詩의 이해를 위한 傳記 硏究, 고시가연구 제10집, 한국고시가문학회, 2002

111)선인수적(先人手蹟)의……쓰다:대본에는 ‘題先人手蹟卷首’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데, ‘首’ 자의 옆에 ‘後’ 자가 적혀 있다. 이 글은 형식상 발문이기에 ‘後’ 자로 교감한 것으로 보인다.

112)선친:매천의 아버지 황시묵(黃時黙)을 말한다.

113)막냇동생 원(瑗):황원(黃瑗, 18701944)의 자는 계방(季方)이며 호는 석전(石田) 또는 강호여인(江湖旅人)이다. 황시묵(黃時黙)의 셋째 아들이며 매천의 막냇동생이다. 매천 사후 매천집의 간행을 주도하였고 신간회(新幹會) 활동 등 항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1944년에 집 뒤의 방광저수지(放光貯水池)에 투신 자결하였다.

114)육선공집(陸宣公集):당(唐)나라 육지(陸贄, 754〜805)의 주초(奏草), 주의(奏議), 제고(制誥)를 모은 문집이다. 육지는 당나라 덕종(德宗) 때의 재상으로 소주(蘇州) 가흥(嘉興) 사람이며, 자는 경여(敬輿)이고 시호는 선공(宣公)이다.

115)여사제강(麗史提綱):유계(兪棨, 1607〜1664)가 지은 23권 23책의 편년체(編年體)로 된 고려 시대를 다룬 역사서이다.

116)끝까지……점:육지는 정원(貞元) 8년(792)에 재상에 임명되었으나 2년 뒤에 모함을 받아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고, 다음 해 충주(忠州)의 별가(別駕)로 좌천되었는데, 이를 말한다.

117)경림고(瓊林庫)와……않았다:신당서(新唐書)157 육지열전(陸贄列傳)을 보면, 덕종이 경림고와 대영고 등 내고를 설치하여 천하의 공물을 별도로 보관하고 관장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118)당촌 부군(塘村府君):당촌은 황위(黃暐)의 호이다. 자는 자휘(子輝)이며, 정홍명(鄭弘溟)의 문인이다.

119)식견이 부족하여:대본에는 ‘聞識諛劣’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諛’를 ‘謏’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20)춘추전(春秋傳)에……있다:춘추 시대 노나라 대부 숙손표(叔孫豹)가 진(晉)나라에 갔을 때, 범선자(范宣子)가 길이 남을 것에 대해 물으니, “최상의 것은 덕을 남기는 것이고, 그다음은 공을 세우는 것이고, 그다음은 말을 전하는 것이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라고 대답하였는데, 이를 말한다. 春秋左氏傳 襄公24年

121)포의(布衣)의……감동시켰고:황위(黃暐)가 병자호란 때 남원(南原)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올라오다가 과천(果川)에서 적군을 만나 승전한 것을 말한다.

122)권간(權奸)의……않았다:당시 척화(斥和)에 앞장섰던 김상헌(金尙憲)이 주화론자(主和論者)들에게 배척당하는 것을 보고 황위가 상소하여 변론하다가 파직된 것을 말한다.

123)무민공(武愍公):무민은 매천의 10대조인 황진(黃進, 1550〜1593)의 시호이다. 황진은 자가 명보(明甫)이고 황희(黃喜)의 5대손이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항전하다가 전사하여 창렬사(彰烈祠)와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124)사우(師友)……있고:황위는 정홍명(鄭弘溟, 1592〜1650)의 문인으로, 그의 시문과 풍모가 뛰어난 것은 훌륭한 사우(師友)의 학덕에서 유래했다는 말이다. 정홍명은 자가 자용(子容)이고 호가 기암(畸庵)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철(鄭澈)의 아들이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25)양웅론(揚雄論):정양완은 이 양웅론의 논지가 “법고(法古)는 하되 모방과 답습은 하지 않고 독창(獨創)과 창신(創新)을 외치는 매천의 문학 정신과 일맥상통한다.”라고 하였다. 정양완, 散文을 통해서 본 梅泉의 文學精神, 震檀學報 61집, 1986

126)자지(子之)도……있다:자지는 전국 시대 연(燕)나라 임금 쾌(噲)의 정승이다. 그런데 쾌가 소대(蘇代)의 계략에 빠져서 자지에게 정권을 넘기고 도리어 그의 신하가 되었던 일이 있다. 史記 卷34 燕召公世家 여기에서 “자지도 요순과 같아질 수 있다.”라는 것은, 바로 그 행적으로만 보면 순(舜)이 요(堯) 임금에게 선양(禪讓)을 받고 우(禹)가 순 임금에게 선양을 받은 것과 같다는 말이다. “조조(曹操)도 문왕(文王)과 같아질 수 있다.”라는 것은, 조조는 스스로 제위(帝位)에 오르지 않고 헌제(獻帝)를 옹립하였는데, 이 행적만 보면 주나라 문왕이 끝까지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섬긴 일과 같다는 것이다.

127)탕왕(湯王)과……않았고:탕왕과 무왕은 요순의 도를 본받았으나 요순이 선양(禪讓)했던 행적은 본받지 않고 당시 상황에 맞게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는 말이다.

128)주공(周公)은……않았다:이윤(伊尹)은 상(商)나라 탕왕 때의 명재상이다. 그는 탕의 손자 태갑(太甲)이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라 무도(無道)한 짓을 하자 동(桐) 땅으로 추방했고 잘못을 고친 뒤에야 복위시킨 일이 있다. 반면에 주공은 그런 이윤의 행적은 본받지 않고 도를 본받아 어린 임금 성왕(成王)을 끝까지 잘 보필하였다는 말이다.

129)양웅(揚雄):기원전 53~18. 전한 말기의 학자이며, 한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이다. 자는 자운(子雲)이다.

130)왕망(王莽):기원전 45~25. 한나라 평제(平帝) 때 권력을 잡고 전횡하다가 이후 제위를 찬탈하여 신(新)나라를 세웠다.

131)공자께서도 양화(陽貨)를 보셨고:양화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실권자였던 계씨(季氏)의 가신으로, 공자가 양화를 만난 일이 논어 양화에 보인다.

132)남자(南子)도 만났으며:남자는 춘추 시대 위(衛)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으로, 공자가 남자를 만난 일과 관련된 내용이 논어 옹야(雍也)에 보인다.

133)공산(公山)이……하셨고:공산은 계씨(季氏)의 가신인 공산불요(公山弗擾)를 말한다. 논어 양화에 보면, 공산불요가 계씨를 배반하고 공자를 불렀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부르는 자가 어찌 괜히 부르겠는가. 만일 나를 등용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 하면서 가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134)필힐(佛肸)이……하셨으니:필힐은 조간자(趙簡子)의 가신으로 중모(中牟) 땅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고는 공자를 불렀는데, 공자가 가려고 했다는 기록이 논어 양화에 보인다.

135)왕망:대본에는 ‘王奔’으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奔’을 ‘莽’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36) 필힐:대본에는 ‘佛胖’으로 되어 있는데 논어집주(論語集註)에 의거하여 ‘胖’을 ‘肸’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37)예(羿):하(夏)나라 때 활쏘기의 명인 이름이다.

138)조보(造父):주(周)나라 목왕(穆王) 때의 마술(馬術)의 명인 이름이다.

139)왕통(王通):584~617. 수(隋)나라 때의 학자로, 자는 중엄(仲淹)이고 사시(私諡)는 문중자(文中子)이다. 20세 때 수 문제에게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을 바쳤다가 채택되지 않자, 하분(河汾)으로 물러나 강학에 힘썼다.

140)공문(孔門)의 왕망(王莽)이라고 지목하였다:하씨어림(何氏語林) 권18에, “송나라 때에는 장주를 도가의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로 지목하고 왕통을 공문의 왕망으로 지목하였다.[宋世嘗目莊周爲道家之儀秦 王通孔門之王莽]”라는 기록이 있다.

141)속경(續經)을 자부했으면서:왕통이 공자의 경전을 이었다고 자부한 것을 말하는데, 예론(禮論), 악론(樂論), 속서(續書), 속시(續詩), 원경(元經), 찬역(贊易) 등, 이른바 ‘왕씨육경(王氏六經)’이 그런 배경에서 나온 책들이다.

142)양견(楊堅):수 문제(隋文帝)의 이름이다. 그는 남북조(南北朝) 시대 북주(北周)의 어린 임금 정제(靜帝)를 폐하고 제위를 찬탈한 뒤에 국호를 수(隋)라 칭하였고, 후에 남조(南朝)의 진(陳)나라까지 멸망시키며 천하를 통일하였다.

143)십이책(十二策):왕통이 20세에 수 문제에게 바친 태평십이책을 말한다.

144)양소(楊素):수(隋)나라 때의 대신으로 화음(華陰) 사람이며 자는 처도(處道)이다. 개황(開皇) 10년(590)에 형주(荊州)와 강남(江南)의 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을 진압하고 후에 초국공(楚國公)에 봉해졌다.

145)백리해론(百里奚論):정양완은 매천이 백리해론을 쓴 이유를 언급하면서 “나라의 녹을 먹은 사대부로서 국망(國亡)에 이르기 전 미연(未然)에 방지 못한 큰 죄에다, 사리사욕에만 급급하여 국망은 아랑곳하지 않은 죄를 백리해라는 인물을 빌려 통렬히 논박하였다.”라고 평가하였다. 정양완, 散文을 통해서 본 梅泉의 文學精神, 震檀學報 61집, 1986

146)맹자(孟子)를……대목:백리해가 우(虞)나라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 진(晉)나라가 우나라에 이웃 나라를 치겠다는 명분으로 길을 빌려 달라고 협박하였다. 그런데 백리해가 끝내 길을 빌려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간언하지 않고 우나라를 떠나 진(秦)나라로 감으로써 결국 우나라는 진나라에 멸망당하였다. 이에 대해, 맹자는 “우공(虞公)은 간해도 듣지 않을 인물이라 간하지 않았고 우공이 망할 줄을 알고 떠났으므로 지혜롭다.”라고 평가하였다. 이에 반해 매천은 백리해의 처신에 문제가 있다고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147)직언하고:대본에는 ‘譽諤’으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譽’를 ‘謇’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48)관중(管仲)……능력:관중은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을 도와 제후의 패자(覇者)가 되게 하였고, 안영(晏嬰)은 춘추 시대 제나라 장공(莊公)과 경공(景公) 때의 명재상이었으며,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은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했던 일등공신이었으니, 이들 모두 천하를 이끌 만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149)길을……상황:당시 우(虞)나라는 강대국인 진(晉)나라가 괵(虢)나라를 친다는 명분으로 길을 빌려 달라고 협박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명분일 뿐이고 실제로는 우나라를 멸망시키려는 계략이었다. 孟子 萬章上

150)자사(子思)가……하였는데:자사는 공자(孔子)의 손자 공급(孔伋)의 자이다. 이 일은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자세히 나온다.

151)배구(裴矩)와……무리:배구는 수 양제(隋煬帝)를 섬기다가 나중에 당(唐)나라에 귀순하여 민부 상서(民部尙書)까지 올랐던 인물이며, 풍도(馮道)는 오대(五代) 시대에 당(唐)ㆍ진(晉)ㆍ거란(契丹)ㆍ한(漢)ㆍ주(周) 등, 오조(五朝)의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여기서는 지조 없이 시류에 편승하여 변신을 거듭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을 말한다.

152)관중(管仲)이나 자산(子産):관중은 춘추 시대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보좌하여 제후의 패자(覇者)가 되게 하였고, 자산(子産)은 정(鄭)나라의 대부(大夫) 공손교(公孫僑)의 자(字)로, 40여 년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내정과 외교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153)미봉책이나……것이다:관중이나 자산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지 못하고 인의(仁義)를 표방하는 패도를 행하여 일시적인 효과를 거두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천하의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으므로 공자가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칭찬했다는 것이다. 공자는 관중에 대해서 “제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하면서 무력을 쓰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니, 누가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라고 칭찬하였고,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섶을 왼쪽으로 여미는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공로를 인정한 바 있다. 論語 憲問 그리고 공자가 자산에 대해서는 “그에게 군자의 도(道)가 네 가지 있는데, 몸가짐이 공손하였고, 윗사람을 섬기는 데 공경스러웠고, 백성을 돌보는 데 은혜로웠고, 백성을 부리는 데 올바르게 하였다.”라고 칭찬한 적이 있다. 論語 公冶長

154)자잘한……자들:자신의 절조를 지키느라 세상의 혼란을 외면하고 은거한 은일지사(隱逸之士)들을 말한다.

155)장저(長沮)와……노인:장저와 걸닉(桀溺)은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은자들로, 공자에게 자신들처럼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권한 내용이 논어 미자(微子)에 보인다. 삼태기를 멘 노인은 논어 헌문(憲問)에 보이는데, 공자가 위(衛)나라에 있을 때, 공자가 거처하던 집 문 앞을 지나가면서 공자가 세상을 구제하려는 데 골몰하고 있다고 기롱한 은자이다.

156)가차……매도하였다:장저와 걸닉이 공자를 비난하자, 공자가 탄식하기를, “새나 짐승들과 무리 지어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살지 않고 누구와 함께 살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 굳이 바꾸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들을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고 새나 짐승들과 함께하려는 무리로 규정한 바 있다. 論語 憲問

157)사호(四皓):진(秦)나라 때 상산(商山)에 은거하던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네 노인을 말한다. 高士傳 卷上 四皓

158)한 번……안정시켰으니:한 고조(漢高祖)가 태자(太子) 영(盈)을 폐하고 척 부인(戚夫人)의 아들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세우려 하자, 여후(呂后)가 사호(四皓)를 불러와 태자를 보좌하게 하였다. 이에 사호가 나와 태자를 적극적으로 보필하자, 고조는 척 부인에게 “태자를 바꾸고 싶으나 사호가 도우니 우익(羽翼)이 형성되었다.” 하고는 태자를 폐하지 못했다고 한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159)여씨(呂氏)의 난:여씨는 한 고조(漢高祖)의 부인 여후(呂后)를 말한다. 그녀가 고조 사후에 어린 혜제(惠帝)를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여씨 일족을 왕으로 봉하는 등, 각종 전횡을 일삼은 것을 말한다.

160)신생(申生)이나 부소(扶蘇)의 일:신생은 춘추 시대 진 헌공(晉獻公)의 태자이다. 헌공의 총애하는 부인 여희(驪姬)가 자기 아들 해제(奚齊)를 태자로 삼으려고 계속 신생을 참소하자 신생은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그 후 진나라는 문공(文公)이 즉위할 때까지 혼란에 빠지게 된다. 春秋左氏傳 莊公28年, 僖公5年 부소는 진 시황(秦始皇)의 태자이다. 진 시황이 죽자 조고(趙高)가 승상 이사(李斯)와 공모하여 조서(詔書)를 고친 뒤에 태자를 폐하고 호해(胡亥)를 이세(二世)로 세웠다. 通鑑節要 卷3 後秦紀

161)주창(周昌)과……상태였고:주창은 고조가 태자를 폐하려 하자 어사대부(御史大夫)로서 간쟁하여 강력하게 말렸고, 숙손통(叔孫通)은 “목을 찌른 피로 땅을 더럽히겠다.”라고 하면서 간언하였으나 고조가 들어주지 않았다. 漢書 卷42 周昌傳 史記 卷99 叔孫通列傳

162)유후(留侯)가……상황이었다:유후는 장량(張良)의 봉호(封號)이다. 장량이 계책을 내놓아도 한 고조가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장량이 여후에게 제시한 대책이 바로 사호를 불러와 태자를 보좌하게 하는 것이었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163)범승(范升)이……것:주당(周黨)은 후한(後漢) 때 태원(太原) 광무(廣武) 사람이며 자는 백황(伯況)이다. 그는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연간에 의랑(議郞)으로 징소(徵召)되어 나왔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고, 광무제가 인견(引見)하자 자신의 뜻을 지키고 싶다고 아뢴 뒤에 드디어 평생 민지(澠池)에 은거하였다. 그는 광무제가 인견했을 때 부복(俯伏)하기만 하고 배알(拜謁)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박사(博士) 범승이 “신하로서의 예의가 없다.”라고 탄핵한 것을 말한다. 後漢書 卷83 周黨列傳 번영(樊英)은 후한 순제(順帝) 때 사람으로 자는 계제(季齊)이다. 계속 징소하였으나 나오지 않다가, 순제가 예를 갖추어 부르자 나와서 오관 중랑장(五官中郞將)이 되었다. 하지만 응대할 때 특별한 대책과 지략이 없었으므로 이고(李固)가 기롱하기를, “훌륭한 이름이 있으면 그 실제에 걸맞기 어렵다. 번영은 크게 특이한 점이 없어 비방하는 말이 퍼지게 되었으니, 어찌 명성이 너무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後漢書 卷82上 樊英列傳 여기서는 은자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벼슬에 나왔을 때에는 그 행실이 명실상부하지 못한 점이 있음을 비판한 것이다.

164)암현(巖顯):매천의 맏아들 황암현이다. 그런데 이 자설에 따르면, 이 이름은 그가 관례를 치르고 나서 자와 함께 받은 것으로 보인다.

165)연아(鍊兒):암현의 아명(兒名)이다.

166)부암(傅巖)의……것:은(殷)나라 고종(高宗) 때의 재상인 부열(傅說)이 재상이 되기 전에 부암이라는 곳에서 성벽을 쌓는 일을 하다가 등용되었으므로, 그 고사를 인용하여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167)이윤(伊尹)은……잡았으니:이윤이 들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것은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이윤은 유신의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요순의 도를 즐겼다.[伊尹耕於有莘之野 而樂堯舜之道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그리고 강태공이 고기를 잡았다는 것은 그가 나이 70이 되도록 위수(渭水)에서 낚시질하며 때를 기다린 것을 말한다. 史記 卷32 齊太公世家 이들은 뒤에 각각 탕왕(湯王)과 문왕(文王)에게 발탁되어 그들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데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168)서미(胥靡):서미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국역 성호사설 10 제29권 시문문(詩文門) 서미(胥靡)에 보면, “한유(韓愈)가 서미를 정의하여 ‘사형을 면한 죄인이다.’ 하였고 설문(說文)에 ‘서미(縃靡)’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뜻은 ‘죄수를 묶는 포승줄’인 듯하다.”라고 말하면서, 부열(傅說)이 담을 쌓는 일꾼이 된 것은 대개 형도(刑徒)로서 사역(使役)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양신(楊愼)이 열자(列子)에 있는 사례를 들어 “서(胥)는 예(隸)요 미(靡)는 말(末)이니, 말례(末隸)는 미천한 사람이라는 뜻이다.”라고 한 것은 글자의 의미로 볼 때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국역 홍재전서 11 제95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2 서경(書經) 3에서는, 부열처럼 어진 사람이 형벌을 받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미천한 신분, 즉 노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169)생각의……한다: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것의 반이다. 생각의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학문을 위주로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덕이 닦일 것이다.[惟斅學半 念終始 典于學 厥德脩 罔覺]”라는 구절에게 온 말이다.

170)장경(長卿)……지었고:장경은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이다. 그의 이름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신하이고 문경지교(刎頸之交)로 유명한 인상여(藺相如)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顔氏家訓 風操

171)원탄(元歎)……지었으며:원탄은 후한 때의 학자 고옹(顧雍)의 자이다. 채옹(蔡邕, 132~192)은 후한 때의 학자이며 자가 백개(伯喈)이다. 이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었는데, 스승 채옹이 고옹을 훌륭하게 여겨 자기 이름자를 쓰도록 허여하였으므로 이름을 ‘雍’이라 했다고 한다. 고자(古字)에 ‘옹(邕)’과 ‘옹(雍)’은 통용되는 글자였다. 世說新語 雅量

172)선무(宣武)……지었고:선무는 환온(桓溫)의 시호이다. 그는 동진(東晉) 때의 장군으로 황제(皇帝) 혁(奕)을 폐위시키고 간문제(簡文帝)를 옹립한 뒤에 찬탈을 꾀하다가 병사하였고, 온교(溫嶠)는 동진 명제(明帝) 때 시중(侍中)을 지낸 인물로 자는 태진(太眞)이다. 환온이 태어나서 돌이 안 되었을 때, 온교가 아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기골이 있으니, 한번 울려 보시오.” 하였는데, 환온의 우는 소리를 들어보고는 “참으로 영물(英物)이다.”라고 찬탄했다고 하며, 온교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하여 마침내 이름을 ‘온(溫)’이라 했다고 한다. 世說新語箋疏 容止

173)희문(希文)……지었으며:희문은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자이다. 그는 북송 때의 신하로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수나라 때의 학자 왕통(王通)을 흠모하여 왕통의 자인 중엄(仲淹)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174)순부(純夫)……지었다:순부는 송(宋)나라 원우(元祐) 연간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범조우(范祖禹)의 자이다. 순보(淳甫) 혹은 순부(淳夫)라고도 한다. 등우(鄧禹)는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의 공신으로 대사도(大司徒)를 지낸 인물이다. 범조우의 어머니가 금갑옷을 입은 등우가 찾아오는 꿈을 꾼 날 범조우를 낳았으므로 이름을 ‘조우(祖禹)’라 하고 초자(初字)를 ‘몽득(夢得)’이라고 했다 한다. 古今事文類聚 後集 卷5

175)고종(高宗)이……꿈:은나라 고종이 글을 지어 고하기를, “꿈에 상제(上帝)께서 나에게 어진 보필을 내려 주셨으니, 그가 나의 말을 대신할 것이다.[夢帝賫予良弼 其代予言]” 하고는, 꿈에 나타난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그려서 천하에 널리 찾게 하였는데, 부암에서 성벽을 쌓는 일을 하는 부열이 그 모습과 똑같았으므로 마침내 그를 불러들여 재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書經 說命上

176)마문연(馬文淵):문연은 후한 때의 장군 마원(馬援, 기원전 14〜49)의 자이다.

177)집오리:대본에는 ‘’으로 되어 있으나 후한서 권24 마원열전(馬援列傳)에 의거하여 ‘鶩’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78)마문연(馬文淵)이……하였다:마원이 조카들에게 당부하는 글에 보면, “용술(龍述)은 신중하고 위엄 있는 사람이므로, 그를 본받으면 행실을 갖춘 선비는 될 수 있다. 이를 비유하면 이른바 ‘고니를 새기다가 잘못되면 그래도 집오리는 된다.’라는 격이어서 괜찮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보(杜保)는 호협(豪俠)한 사람이므로, 그를 본받다가는 천하의 경박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이를 비유하면 이른바 ‘호랑이를 그리다가 잘못되면 도리어 개처럼 되어 버린다.’라는 격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말한 것이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여기에서는 너무 고원(高遠)한 것을 추구하다가 이루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세우고 매진하다가 다 이루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성취를 거두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179) 안해사(安海史):해사는 안중섭(安重燮, 1808〜1883)의 호이다. 또 다른 호는 연상(蓮上)이다. 자는 순화(舜華)이며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고 문집으로는 연상집(蓮上集)이 있다. 

180)활시위와……있고:전국 시대 위(魏)나라 서문표(西門豹)는 성미가 급한 까닭에 그것을 고치기 위하여 느슨한 가죽을 몸에 차고 다녔고, 춘추 시대 진(晉)나라 동안우(董安于)는 성미가 느슨한 까닭에 팽팽한 활시위를 차고 다니며 자신을 반성했다고 한다. 韓非子 觀行

181)자식의……있으나:‘연(淵)’과 ‘침(沉)’은 송나라 때의 학자 채원정(蔡元定)의 두 아들인 채연(蔡淵)과 채침(蔡沉)을 가리킨다.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은 경박하지 않고 깊이가 있기를 바라는 뜻으로 지었는데, 그 훈계의 글은 송사(宋史) 권434 유림열전(儒林列傳)에 있다.

182)백이(伯夷)와……풍모: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백이의 풍도(風度)를 들은 사람들은 그의 감화를 받아서 탐욕스럽던 사람도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들도 뜻을 확고히 세우게 된다.”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즉, 백이와 숙제처럼 맑은 절조를 지닌 사람들은 남의 마음에 감화를 주어 그들의 행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풍모를 지녔다는 말이다.

183)도를……유하혜(柳下惠):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백이는 성인 가운데 맑은 분이고, 이윤은 성인 가운데 도를 자임한 분이고, 유하혜는 성인 가운데 조화로운 분이고, 공자는 성인 가운데 때에 맞게 하신 분이다.[伯夷聖之淸者也 伊尹聖之任者也 柳下惠聖之和者也 孔子聖之時者也]”라는 말이 있다.

184)해사는……아닐까:해사가 호에 ‘해(海)’ 자를 쓴 것은 큰 바다의 의미를 취하여 자신의 편협한 성격을 바꿔 보려 했다는 뜻이다. 이에 비해 매천은, 군자는 덕이 큰 것도 중요하지만 행실의 맑음이 더 중시된다고 하면서 물의 맑은 속성을 호(號)의 의미로 취하기를 권하고 있다. 그러면서 매천은 다시, 이 또한 결국 물의 두 측면 중에 한 면을 가지고 다른 한 면을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자문(自問)하고 있다. 그 아래에 다시 매천의 ‘바다’에 대한 변증법적인 통찰이 해답으로 제시되고 있다.

185) 연와(然窩):매천의 고모부 최우정(崔遇禎)의 호이다.

186)서쪽……있지만:주역(周易) 기제괘(旣濟卦) 구오(九五)에, “동쪽 인근 마을에서 거창하게 소를 잡아 성대하게 제사하는 것보다는 서쪽 인근 마을에서 조촐하게 제사를 지내고 실제로 그 복을 받는 것이 훨씬 낫다.[東隣殺牛 不如西隣之禴祭 實受其福]”라는 구절에서 온 말인 듯한데, 여기에서는 ‘동린(東隣)’이 ‘서린(西隣)’으로 바뀌었고, 그 의미도 ‘인근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은 남의 일이므로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도(中道)에 맞는다.’라는 말로 쓰였다.

187)한집에……것이며: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지금 한집에 같이 사는 사람이 밖에 나가 싸운다고 할 때에는, 그를 구하기 위해 산발한 채 갓끈만 매고 나가도 괜찮지만, 한동네나 이웃에서 서로 싸우는 자들이 있을 때, 산발한 채 갓끈만 매고 나가 말린다면, 이는 미혹된 행동이다. 이런 경우에는 비록 문을 닫고 있어도 괜찮다.[今有同室之人鬪者 救之 雖被髮纓冠而救之 可也 鄕鄰有鬪者 被髮纓冠而往救之 則惑也 雖閉戶 可也]”라는 구절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맹자에서는 자신이 싸움을 말리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반면에, 여기에서는 자신이 싸우고 있는데 한집에 사는 사람이 문을 닫은 채 무관심한 경우를 두고 말하였다. 이럴 경우 무관심하게 행동한다면 중도에 맞지 않으며, 그럴 때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위의 주186과 더불어 모든 일에는 각각의 상황에 맞는 중도가 있으므로 획일적으로 중도를 규정할 수는 없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188)어른과……것입니다:증점(曾點)이 한 말은 논어 선진(先進)에 나온다. 공자가 자신의 뜻을 말해 보라고 하자, 증점이 말하기를, “늦봄에 봄옷이 장만되면 어른 5, 6인과 아이 6, 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쐰 뒤에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그가 한 말은 천지 만물과 일체가 된 성인(聖人)의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아직 뜻은 크지만 실천이 잘 안 되는 광자(狂者)인 증점의 처지에서는 넘볼 수 없는 수준이다. 여기에서는 말도 말하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중도(中道)가 각각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189)모든……때:논어집주(論語集註) 안연(顔淵)의 주석에 나오는 정자(程子)의 사물잠(四勿箴) 중 언잠(言箴)에 보면, “말은 일에 있어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므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우호를 맺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니, 결국 길흉(吉凶)이나 영욕(榮辱)은 말이 부르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190)요순(堯舜)……것이며:요순 시대에도 정책을 토론할 때 획일적으로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일 없이 사안에 따라 신중히 말하면서 의견을 개진하였기 때문에 군신 간에 서로 화합하였다는 것이다. 書經 益稷

191)공자와……대해서도:대본에는 ‘闕里之師而’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는 ‘而’가 ‘弟’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앞 구절의 ‘唐虞之世而’와 대구를 이루고 있으므로 ‘弟’로 보기보다는 대본에 있는 대로 ‘而’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여 그대로 번역하였다.

192)공자와……하였고: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사(賜)야, 너는 나를, 많이 배워 기억하는 사람이라 여기느냐?” 하자, 자공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아닙니까?” 하였다. 이에 공자가 말하기를,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이치로 모든 사물을 꿰뚫었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보면, 공자와 문답을 할 때 제자들이 자유롭게 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저는……대답: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보면, 공자가 제자 칠조개(漆雕開)에게 벼슬을 하도록 권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아직 벼슬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하니, 공자가 기뻐하였다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보면 공자 앞에서 제자들이 기탄없이 자기 소신을 밝히는 발언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향원(鄕原):자기 속마음을 감추고 시류에 영합하면서 덕이 있는 사람으로 행세하며 인심을 얻는 위선자를 말하는데, 공자는 이런 자를 일러 덕(德)을 해치는 적(賊)이라고 규정하였다. 孟子 盡心下

195)달갑게……가르침:달가워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여 상대를 분발하게 하는 것도 가르침의 한 방도라는 말이다.

196)사마덕조(司馬德操):덕조는 삼국 시대 촉(蜀)나라 사람 사마휘(司馬徽)의 자이다. 당시 수경선생(水鏡先生)이라 불린 인물로, 제갈량(諸葛亮), 방통(龐統)과 교유하며 은거하였다.

197)방사원(龐士元):사원은 삼국 시대 촉나라 사람 방통(龐統)의 자이다.

198)은은하면서도……사람:중용장구(中庸章句) 제33장에, “군자의 도(道)는 은은하지만 날로 빛이 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지만 날로 색이 바랜다.”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199)서개(徐鍇):남당(南唐) 시대 광릉(廣陵) 사람으로, 자는 초금(楚金)이다. 형 서현(徐鉉)과 함께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설문계전(說文繫傳), 설문해자운보(說文解字韻譜)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

200)강왈광(姜曰廣):명(明)나라 강서(江西) 신건(新建) 사람이다. 자는 거지(居之)이고 호는 연급(燕及)이다.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를 지냈고 천계(天啓) 6년(1626, 인조4)에 조선에 사신으로 온 적이 있다.

201)서왈인(徐曰仁):왈인은 명나라 사람 서애(徐愛)의 자이다. 그는 왕수인(王守仁)의 제자로 스승의 어록인 전습록(傳習錄)을 편찬하였다.

202)양왈집(梁曰緝):왈집은 양희(梁熙, 1622〜1692)의 자이다. 청(淸)나라 하남(河南) 언릉(鄢陵) 사람이며 별호(別號)가 석차(晳次)이다. 순치(順治) 10년(1653)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나서 어사(御史)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203)서경에도……추었다:서경 익직(益稷)에, “순(舜) 임금이 창작한 음악인 소소 아홉 악장을 연주하자, 봉황이 찾아와서 춤을 추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204)할계(鶡鷄):새 이름으로 꿩과 비슷한 모양의 새이다.

1)일립정(一笠亭):매천이 구안실(苟安室)을 짓고 난 뒤 다시 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구안실의 동편에 새로 세운 한 칸짜리 집인데, 지붕이 삿갓 모양으로 생겨서 그렇게 명명했다고 한다.

2)구안실(苟安室):매천은 32세이던 1886년(고종23)에 구례군 간전면(艮田面) 만수동(萬壽洞)으로 이사하고 나서, 4년 뒤에 강학하고 시문을 창작할 공간을 마련하는데, 그 서재 이름이다.

3)단계(端溪)인지 흡주(歙州)인지:단계는 단계연(端溪硯)을 말하는데, 중국 광동성(廣東省) 단계 지방에서 나는 돌인 단계석(端溪石)으로 만든 벼루를 말한다. 흡주는 흡주연(歙州硯)을 말하는데, 중국 안휘성(安徽省) 흡주 지방에서 나는 돌로 만든 벼루를 말한다.

4)구욕안(鸜鵒眼)과 금사(金絲):구욕안이란 벼룻돌 안에 구욕(鸜鵒)이라는 새의 눈알 모양의 무늬가 박혀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있으면 벼루 중에 최고의 명품이라고 한다. 금사는 벼룻돌 면에 금실이 박혀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 또한 명품에 속한다고 한다.

5)이런……함을:여기에서 말한 ‘이런 의미’란 작은 것도 크게, 짧은 것도 길게 활용될 수 있는 묘리를 말하는데, 이런 이치를 터득한 사람이 노자(老子)라는 말이다. ‘용과 같은 노자’라는 말은, 공자(孔子)가 노자를 평가하기를 “내가 오늘 노자를 만나 보니 용과 같았다.[吾今日見老子 其猶龍邪]”라고 칭찬한 데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63 老子列傳 ‘당기려면 반드시 놓아야 한다’는 말은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36장에, “놓으려면 반드시 당겨야 하고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강하게 해 주어야 한다.[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라는 말을 변용한 것이다.

6)송천사(松川寺)에……있었다:송천사는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에 있던 사찰인데, 원래의 이름은 옥룡사(玉龍寺)였다. 고려 시대 최유청(崔惟淸)이 쓴 옥룡사선각국사비(玉龍寺先覺國師碑)가 있는데 이 비는 지금도 남아 있다.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수학했고 가장 오랜 기간 머물렀던 사찰이다.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이 쓴 백운산송천사선각국사비명(白雲山松川寺先覺國師碑銘)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석도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매천이 말한 비석은 이 비를 가리키는 듯하다.

7)백패(白牌)에 붉은 시권(試券):백패는 생진과(生進科)에 입격한 사람에게 성적의 등급과 성명을 기록하여 내주던 흰 종이에 쓴 증서를 말한다. 붉은 시권이란 과거 응시자의 필적을 식별하지 못하도록 원 답안지를 주묵(朱墨)으로 다시 베껴 쓴 것인지 아니면 시권에 채점하느라 주묵을 친 것인지 상세하지 않다.

8)호은(湖隱):조선 말기의 학자인 고박주(高璞柱)의 호이다.

9)팔영산(八影山):전라남도 고흥(高興)에 있는 산 이름이다.

10)당자서(唐子西)가……하였는데:자서는 송(宋)나라 때의 문장가 당경(唐庚, 1071〜1121)의 자이다. ‘벼루의 수명은 세(世)로 계산한다’는 말은 그가 쓴 가장고연명(家藏古硯銘)에, “붓의 수명은 날짜로 계산하고 먹의 수명은 달로 계산하고 벼루의 수명은 세로 계산한다.[筆之壽 以日計 墨之壽 以月計 硯之壽 以世計]”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古文眞寶後集 卷10

11)삼정(三井)의……있으리:고대 전설에 단사정(丹砂井)이라는 샘이 있었는데, 이 샘 밑에는 단사(丹砂)가 묻혀 있어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이 모두 장수하였다 한다. 抱朴子 仙藥 여기서는 삼정연의 삼정이 운치가 있음을 단사정의 고사를 인용하여 표현한 것이다.

12)즉묵(卽墨)에……가상쿠나:즉묵은 산동성(山東省) 청도(靑島)에 있는 현(縣)이다. 당(唐)나라 사람 문숭(文嵩)이 벼루를 의인화(擬人化)하여 지은 즉묵후 석허중전(卽墨侯石虛中傳)에 보면, 벼루의 공적을 인정하여 즉묵후(卽墨侯)에 봉(封)한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를 말한 것이다. 文房四譜 卷3 硯譜

13)혈죽(血竹)에 대한 명:1905년(광무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양력 11월 30일 당시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이었던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패도(佩刀)로 자결하였다. 그 뒤에 피 묻은 옷을 지하실에 간직해 두었는데, 8개월이 지난 이듬해 봄에 그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아났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일러 혈죽이라 불렀다 한다. 당시 이 대나무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항일의 의지가 전국으로 불타올랐는데, 매천도 민영환의 충정을 기려 이 명을 지은 것이다.

14)이 나라에……주어서:대본의 ‘祚宋’은 남송(南宋) 말기에 원(元)나라의 침공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송나라에 다시 복을 내려 달라.”라고 기원하던 데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국운을 다시 융성하게 해 주기를 바라는 뜻으로 쓰였다.

15)적신들:을사조약을 체결할 때 서명한 다섯 대신인 박제순(朴齊純), 이지용(李址鎔), 이근택(李根澤), 이완용(李完用), 권중현(權重顯)을 말한다.

16) 남파(南坡):성혜영(成蕙永)의 호로, 하동(河東) 사람이며 매천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17)장욱(張旭)이……하였고:장욱은 초성(草聖)으로 불렸던 당(唐)나라 때의 명필(名筆)인데, 술을 좋아하여 크게 취할 때마다 모발(毛髮)에 먹을 묻혀 휘갈겨 썼으므로 신필(神筆)이라 칭하였다. 新唐書 卷202 張旭列傳 여기에서는 남파의 그림이 장욱처럼 신필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비유한 것이다.

18)맹만년(孟萬年)이……하였는데:만년은 위진(魏晉) 시대 진(晉)나라 사람 맹가(孟嘉)의 자이다. 환온(桓溫)의 참군(參軍)으로 있을 때, 환온이 묻기를, “기악(伎樂)을 듣는데 현악기는 관악기만 못하고 관악기는 육성만 못한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점점 자연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한다. 世說新語箋疏 識鑑 여기서는 성혜영의 그림이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그려 자연스러움에 더 가깝다는 비유로 인용한 것이다.

19)현묘(玄墓)와……있네:현묘는 소주(蘇州) 서호(西湖) 가에 있는 산 이름이고, 그 서쪽에 동갱(銅坑)이란 곳이 있는데, 모두 매화(梅花)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甫田集 巻17 玄墓山探梅倡和詩敍그 명승지가 만 리를 옮겨 와서 우리나라 성혜영의 그림 속에 있다는 말이다.

20)손가락이……했는데: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지금 어떤 사람의 무명지가 굽어 펴지지 않는다고 할 때, 그것이 아프거나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닌데도, 만약 그 무명지를 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진(秦)나라나 초(楚)나라까지의 먼 길도 마다 않고 갈 것이다. 그것은 손가락이 남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남과 같지 않은 것은 부끄러운 줄 알면서 마음이 남과 같지 않은 것은 부끄러워할 줄 모르니, 이를 일러 경중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두고 말한 것이다. ‘부끄러워 말라’는 말은 ‘신체가 남과 다른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남과 다른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21)누가……없구려:이 구절은 여자처럼 곱상하고 술을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며, 두건이나 신도 신지 않은 채 거문고를 타고, 매화를 그리면서 일생을 보내는 남파의 외모와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22)55세의……자찬(自贊):이 자찬은 매천이 절명하기 한 해 전인 1909년(융희3)에 쓴 것이다. 이에 대해 김소영은 “세상과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높고 큰 뜻을 지리산 두메에 묻고서 재야인을 고수하는 면모를 상상하게 한다.”라고 하면서 “동서양의 각종 서책을 읽고 연구에 몰두하면서, 나아가 일생 동안 자신의 가슴속에 응결된 울화를 저술에 쏟아 후세에 남길 감계(鑑戒)로 승화시킨 뜻이 보인다. 갈망하던 망명의 길을 접고 절명(絶命)을 통해 후세에 절의(節義)를 남길 것을 다짐한 듯하다.”라고 평가하였다. 김소영, 매천 황현의 산문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년, 19쪽 그러나 이 자찬은 55세의 나이에 매천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고뇌로 쓴 자화상이다. 세상과 함께하지도 그렇다고 우국지사의 길을 가지도 못하며, 문장가로 일가를 이루거나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지도 못한 채, 단지 뜻이 컸던 옛사람들이나 거론하고 있는, 진퇴양난에 처한 구한말 지식인으로서의 혼돈을 표현하였다고 판단된다.

23)먼……채: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에 김택영(金澤榮)이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함께 갈 것을 권유하자 매천은 그와 함께 망명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결국 집안 문제로 가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 대목은 이런 사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인 듯하다. 이때 매천의 상황에 대해서는 황수정의 梅泉詩의 이해를 위한 傳記 硏究(고시가연구 제10집, 한국고시가문학회, 2002, 282쪽)가 참고 된다.

24)국사에……상소:이 상소는 고종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한 광무(光武) 연간에 남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지만, 매천의 시대 인식과 시국관이 잘 드러나 있다. 매천은 당시 정황을 갑오개혁 이전의 수준보다 더 심각하다고 진단하고 내치(內治)와 민생(民生)에 중점을 두는 시무책 아홉 가지를 제안하였다. 그 논지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민심 수습과 통합 방안인데, 언로(言路)를 열고 실정(失政)의 책임자를 문책하는 것이며, 둘째는, 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인데, 법질서를 강화하고 인사 제도를 확립하며 재정을 절약하고 토지제도를 정비하라는 제안이며, 셋째는, 군기(軍紀) 확립과 국가의 보위를 역설하는 내용이다. 김소영, 매천 황현의 산문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년, 21〜22쪽

25)갑오년의 변란:1894년(고종31) 6월 21일에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궁궐을 점령한 사건을 말하는데, 이를 통상 갑오변란(甲午變亂)이라고 한다. 이후 민씨(閔氏) 정권은 붕괴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섭정하여 제1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성립시키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하게 된다. 이에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한 유생(儒生)들은 갑오변란과 일본의 사주를 받은 친일적 개화 정권의 개혁 정책을 민족 존망의 위기로 받아들이고 상소를 올리는 한편 의병을 모집하는 활동까지 전개하였다. 김상기, 조선말 갑오의병전쟁의 전개와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3권,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편, 지식산업사, 1989

26)체직(遞職):대본에는 ‘變’으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7)갑오년……것입니다:김항구는 매천의 이런 시각에 대해 “유교적 구질서의 재확립과 개량을 통하여 당시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하면서 이 상소는 매천이 동도서기(東道西器)적 관점의 틀에서 시무책을 제시한 것으로 보았다. 김항구, 黃玹의 新學問 受容과 ‘壺陽學校’ 設立, 文化史學 21호, 2004

28)은(殷)나라……선왕(宣王):은나라 고종(高宗)과 주(周)나라 선왕은 모두 쇠퇴해 가던 나라를 중흥시킨 임금이다.

29)천리……않겠습니까: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위정자가 선을 좋아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잘난 체하고 거만한 줄 내 이미 알고 있었다.’ 할 것이니, 잘난 체하고 거만한 음성과 얼굴빛이 사람을 천리 밖에서 막는 것이다. 선비가 천리 밖에서 걸음을 멈추면 참소하거나 아첨하고 면전에서 비위나 맞추는 사람들이 모여들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임금이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면 멀리에서도 이를 알고 언로가 막힐 것을 걱정할 것이라는 말이다.

30)유백증(兪伯曾)이나 이명준(李命俊):유백증(1587〜1646)은 인조 연간의 신하로, 자가 자선(子先)이고 호는 취헌(翠軒)이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서슴없이 간언을 하다가 여러 번 좌천되거나 파직되었다. 이명준(15721630)도 인조 연간의 신하로, 자가 창기(昌期)이고 호는 잠와(潛窩)이다. 그가 죽자 인조가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고 왕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남이 하기 어려운 간언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국역 국조보감 435권 인조 9

31)봉륜(封倫)과……다하였으니:봉륜은 발해(渤海) 사람으로 자가 덕이(德彝)이다. 수나라에서 내사사인(內史舍人)을 지냈던 인물인데, 수나라가 망하자 당나라에 항복하였고 태종(太宗)을 섬겨 상서복야(尙書僕射)에까지 오를 정도로 충성을 다하였다. 新唐書 卷100 封倫列傳 배구(裴矩)는 자가 홍대(弘大)이며 시호는 경(敬)이다. 수 양제(隋煬帝)의 총애를 받다가 뒤에 당나라에 귀순, 충성을 다 바쳐 민부 상서(民部尙書)에까지 올랐다.

32)관중(管仲):춘추 시대 제 환공(齊桓公)의 재상으로 이름은 이오(夷吾)이다. 환공을 도와 제후의 패자로 만들었다.

33)상앙(商鞅):전국 시대 진 효공(秦孝公)을 도와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부국강병책을 써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을 구축했던 인물이다.

34)천맥(阡陌)을 개간(開墾)했던 정책:밭 사이로 난 길 중에 남북으로 난 것을 천(阡), 동서로 난 것을 맥(陌)이라 하는데, 상앙이 이를 개간하여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을 쓴 일을 말한다.

35)공자(孔子)도……하였습니다:논어 안연(顔淵)에 있는 말인데, 이에 대해 주희(朱熹)는 “백성은 신의가 없으면 존립하지 못한다.”라고 풀이하였다. 그러나 일설에는 “백성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라고 보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의미로 풀이해야 논리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판단하여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

36)느슨해졌을……법입니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0년 조에 있는 말이다.

37)어윤중(魚允中):1848〜1896. 자는 성집(聖執)이고 호는 일재(一齋)이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1894년(고종31)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이 되었다가 1896년(건양1)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향 보은(報恩)으로 피신하던 중에 산송 문제(山訟問題)로 사사로이 원망을 품은 자에게 용인(龍仁)에서 살해되었다.

38)조인승(曺寅承):1827〜1896.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1895년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으로 춘천부 관찰사(春川府觀察使)가 되었는데, 을미사변으로 봉기한 의병 이항로(李恒老)와 이소응(李昭應)에게 살해되었다.

39)오늘날의 의논하는 자들은:대본에는 ‘今之議咸’으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咸’을 ‘者’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40)이른바……격이니:서경 대우모(大禹謨)에는 순(舜) 임금이 간척(干戚)이라는 춤을 춘 지 90일 만에 적국인 삼묘(三苗)가 감화되어 항복한 고사가 나온다. 그리고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흉노를 치러 출정했다가 평성(平城)에서 7일이나 포위되는 수모를 당한 뒤 진평(陳平)의 계책으로 흉노의 왕후 알씨(閼氏)에게 뇌물을 주고 간신히 탈출한 일이 있다. 漢書 卷94 匈奴傳 이 두 가지 일을 빗대어 후한(後漢) 사람 최식(崔寔)은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세상의 변화와 함께 잘 추이(推移)하여 나아가지만, 속된 선비는 변통할 줄을 몰라서 방패와 도끼를 들고 추는 춤으로 평성의 포위망을 풀 수 있다고 여긴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2 崔寔列傳 여기에서의 의미는, 법도 상황을 고려하여 적절하게 적용해야지 너무 고지식하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즉, 풍속이 순후하여 관대하게 만들어진 서양의 법을 엄중한 법 집행이 요구되는 조선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41)이른바……일:자사(子思)가 위나라 임금에게 구변(苟變)이란 인물을 천거하자, 임금은 그가 관리로 있을 때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면서 계란 두 개를 얻어먹었기 때문에 등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자사가 말하기를, “지금 군주께서 이런 전국 시대에 장수를 선발하시면서 계란 두 개 때문에 뛰어난 장수를 버리시니, 이는 이웃 나라에 알려지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했다는 데에서 온 말이다. 通鑑節要 卷1 周紀 安王 외국에 알려지면 수치스럽고 비웃음을 당할 일이라는 뜻이다.

42)궁궐을……역사(役事):고종이 경운궁(慶運宮)을 수리하도록 한 일을 말한다. 1897년(광무1) 2월에 고종이 경운궁을 수리하도록 지시하고 인화문(仁化門)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還御)하였으며, 5월에 경복궁(景福宮) 만화당(萬和堂)을 경운궁으로 옮겨 지었다. 8월에 고종은 다시 경운궁 수리를 독촉하여 조성한 뒤 10월에 원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였다.

43)최근의……것입니다:김소영은 이 구절에 대해 “파탄 난 재정 형편을 무시한 채 정궁을 건설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지만, 외국 공관들이 몰려 있는 새 궁궐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신변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는 고종의 구차한 의도를 꿰뚫어 보고 이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임금의 자강(自强) 의식이 부족한 점에 대한 직척을 ‘반문(反問)’ 형식으로 담아냈다.”라고 평가하였다. 김소영, 매천 산문의 표현형식 연구, 한문학보 제18집, 2008

44)홍릉(洪陵)을 조성하는 역사:홍릉은 서울 청량리에 조성되었던 고종(高宗)의 비(妃)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이다. 1895년(고종32) 음력 8월 20일 경복궁의 건청궁(乾淸宮) 옥호루(玉壺樓)에서 일본의 암살단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는 1897년(광무1) 음력 11월 21일 홍릉에 안장되었다.

45)당 태종(唐太宗)이……못하셨습니까:소릉(昭陵)은 당 태종의 비 문덕황후(文德皇后)의 능이다. 태종은 황후를 장사 지낸 뒤에 황후가 그리워 후원에다 망루를 세우고 자주 올라가 바라보았다. 한번은 위징(魏徵)과 함께 올라가서 소릉을 가리키며 보라고 하였는데, 위징은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당 태종이 저기에 있지 않느냐고 말하자, 그제야 위징이 대답하기를, “신은 폐하께서 헌릉(獻陵)을 말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소릉은 신이 진작부터 보고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헌릉은 태종의 어머니 능이다. 결국 어머니는 생각하지 않고 부인만 생각하는 태종의 태도를 우회적으로 꼬집은 것인데, 이 말을 듣고 태종은 울면서 그 망루를 허물었다고 한다. 舊唐書 卷71 魏徵列傳 여기에서는 황후를 잊지 못하고 홍릉 조성에 집착하는 고종의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46)고려……사례:공민왕(恭愍王)이 죽은 부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영전(影殿)을 지으려고 대대적으로 토목공사를 일으켜 신하와 백성의 원망을 샀던 일을 말한다. 高麗史節要 卷29 恭愍王

47)한……잘라서:대본에는 ‘剖寸紙’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에는 ‘剖’가 ‘割’로 되어 있다.

48)지난 갑오년:1894년(고종31)에 일어난 갑오변란(甲午變亂)을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138쪽 주25 참조.

49)이들……못하였습니다:혜소(嵇紹)는 진(晉)나라 사람으로 혜강(嵇康)의 아들이다. 자는 연조(延祖)이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영흥(永興) 초기에 하간왕(河間王) 옹(顒) 등이 모반하였을 때 끝까지 혜제(惠帝)를 지키다가 황제 곁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는데, 혜제는 나중에 그 피 묻은 옷을 간직하였다고 한다. 晉書 卷89 忠義列傳 嵇紹 여기서는 황제의 신변에 중대한 변이 일어났을 때 민씨 일족 중에 한 사람도 황제 곁을 지킨 자가 없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50)진(秦)나라……무관심하였으니:한유(韓愈)의 쟁신론(爭臣論)에 나오는 말이다. 한유가 간의대부(諫議大夫) 양성(陽城)을 비판하기를, “그는 일찍이 정사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아니하고 마치 정사의 잘잘못을 보기를 월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의 살찌고 수척한 것을 보듯이 하였다.[未嘗一言及於政 視政之得失 若越人視秦人之肥瘠]”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결국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무심하게 대한다는 말이다. 古文眞寶後集 卷3

51)민영익(閔泳翊)의……않고:민영익(18601914)은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우정국(郵政局)의 연회에 참석했다가 귀와 팔에 부상을 당하였다. 당시 외무 협판(外務協辦)으로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穆麟德;Mölldorf]가 미국인 의사 알렌[安連;Allen]에게 치료를 부탁해 상처를 치료해 준 뒤에 그를 데리고 중국으로 갔는데, 이 당시 민영익은 아버지 민태호(閔台鎬)의 상중(喪中)이었다. 梅泉野錄 卷1 甲午年

52)국상(國喪):명성황후의 상을 말한다.

53)심순택(沈舜澤)의……인물입니다:대학장구(大學章句) 전 10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우뚝 솟은 저 남산에 바위가 우람하다. 위세 등등한 태사 윤씨, 백성들 모두 너를 본다.’ 하였는데, 그래서 위정자는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편벽된 짓을 하면 천하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태사 윤씨는 태사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주(周)나라의 권력을 농단한 윤씨를 말하는데, 심순택이 바로 그런 인물이라는 말이다.

54)차례로:대본에는 ‘次茅’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茅’를 ‘第’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55)세……정사였고:서경》 〈순전(舜典)에 “3년에 한 번씩 성적을 고과하고 세 번 고과한 다음 능력 없는 자를 내치고 현명한 자를 승진시키니, 여러 일들이 모두 제대로 되었다.[三載考績 三考 黜陟幽明 庶績咸熙]”라는 구절에서 온 말로, 요순 시대에는 3년에 한 번씩 세 번 고과를 하여 진퇴를 결정할 정도로 오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56)창(倉)이나……치세였습니다: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에 창고(倉庫)를 관리하는 자리에 오래 있었던 자들에게 그 관명(官名)을 따라 ‘창(倉)’이나 ‘고(庫)’를 성씨(姓氏)로 내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漢書 卷86 何武傳 이렇게 관리의 재임 기간을 늘려 전문성을 제고시킨 결과 문제와 경제(景帝) 때의 태평 치세를 이룰 수 있었다는 말이다.

57)이래서는……있겠습니까:공수(龔遂)와 황패(黃覇)는 모두 한(漢)나라 때 백성을 잘 다스린 대표적인 관리들이다. 공수는 발해군(渤海郡)을 잘 다스렸고 황패는 하남 태수(河南太守)의 승(丞)으로 있으면서 백성과 아전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이 구절은 역대 최고의 재상이었던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이 연이어 정승을 맡고 백성을 잘 다스린 공수와 황패가 연이어 수령으로 부임한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재임 기간이 짧아 금방 체직(遞職)되는 구조에서는 일을 제대로 하여 치적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58)한……것:아교를 사용하여 흐린 물을 맑게 한다는 고사가 있는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한 치의 아교로는 흐린 황하(黃河)의 물을 맑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있어도 혼자의 힘으로는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뜻이다. 抱朴子 嘉遯

59)김종직(金宗直):1431〜1492. 성종 연간의 문신으로, 자는 계온(季昷)이고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60)황희(黃喜)와 허조(許稠):황희(1363〜1452)는 태종과 세종 연간의 신하로 자는 구부(懼夫)이고 호는 방촌(厖村)이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허조(1369〜1439) 역시 태종과 세종 연간의 신하로 자는 중통(仲通)이고 호는 경암(敬菴)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61)심열(沈悅):1569〜1646. 인조 연간의 신하로 자는 학이(學而)이고 호는 남파(南坡)이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62)순(舜)……것입니다:아홉 관직을 아홉 신하에게 임명할 때 각각 전문성을 살려 임용했다는 말인데,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서경 순전(舜典)에 자세히 보인다.

63) 옛날……경우:삼국 시대 오(吳)나라 장수 여몽(呂蒙)이 민가에 들어가 물건을 구하거나 취하지 말라는 군령(軍令)을 어긴 휘하의 군졸을 눈물을 흘리며 참수하자, 군중(軍中)의 기강이 잡혀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줍지 않았다고 한다. 三國志 卷54 周瑜魯肅呂蒙傳

64)임오년: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과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구식 군대가 일으킨 변란인 임오군란(壬午軍亂)을 두고 말한 것이다.

65)전분육등(田分六等)과 연분구등(年分九等):1444년(세종26)에 확정한 제도로 토지를 그 질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눈 것을 전분육등이라 하고 농사의 흉풍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과세하는 것을 연분구등이라 한다.

66)진전(陳田)과 기전(起田):진전은 농사짓지 않고 묵히는 전답을 말하고 기전은 농사짓고 있는 전답을 말한다.

67)속담의……말:꼭 되어야 할 일은 되지 않고 안 되어야 할 일은 된다는 말이다. 즉 고기가 설익었다는 것은 민생이 파탄 나고 국가 재정이 줄어드는 것을 비유한 것이고, 꼬챙이가 탔다는 것은 관리들이 은결을 착복하는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말한 것이다.

68)그래서……것입니다:김소영은 매천 산문의 특징 중에 하나로 속담(俗談)과 비유(比喩)의 활용을 들면서 이 구절을 예시하였다. 그는 이 구절이 “속담의 삽입으로 백성의 생존은 안중에 없고 재정의 파탄도 무시하고 있는 피폐한 국정 현황을 보다 분명하고도 적확하게 강조하여 표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라고 평가하였다. 김소영, 매천 황현의 산문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년, 226쪽

69)유부(兪跗)와 편작(扁鵲):유부는 황제(黃帝) 때의 명의(名醫)이고 편작은 전국 시대의 명의이다.

70)통역을 맡은 사람:대본에는 ‘鞮衆’으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衆’을 ‘象’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71)위 문공(衛文公)이……것:위 문공은 춘추 시대 위나라 임금으로 이름은 훼(燬)이다. 적(狄)의 침입으로 위나라가 멸망하자, 제 환공(齊桓公)이 적을 정벌하고 초구(楚丘)에 성을 쌓은 다음 위나라를 다시 세우고 문공을 임금으로 세워 주었다. 이에 문공은 근검의 솔선수범을 보이기 위해 대포(大布)의 옷을 입고 대백(大帛)의 관을 쓰고서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하여 위나라를 다시 부흥시켰다. 대포와 대백은 거친 베와 비단이다. 春秋左氏傳 閔公2年

72)초 장왕(楚莊王)이……것:춘추 시대 초 장왕이 3년 동안 정사를 다스리지 않고 음악만 즐기자, 소종(蘇從)이 들어가 간(諫)하였는데, 이에 감동한 장왕은 손수 종과 북의 끈을 끊고는 정사에 전념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다고 한다. 史略 卷1 春秋 楚

73)연 소왕(燕昭王)이……것:전국 시대 연 소왕이 곽외(郭隗)에게 인재 천거를 부탁하자, 그가 말하기를, “옛날 어떤 임금이 천리마를 구하려고 사자(使者)에게 1000금(金)을 주었는데, 죽은 천리마의 뼈를 500금에 사 오자, 1년도 안 되어 천리마가 세 마리나 이르렀다고 합니다. 지금 왕께서 어진 인재를 구하려 하신다면 이 곽외부터 등용하십시오. 그러면 저보다 나은 이가 어찌 천리 길을 멀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소왕이 곽외를 스승으로 섬기자, 과연 악의(樂毅), 추연(鄒衍) 같은 인재가 모여들어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다고 한다. 史記 卷34 燕世家

74)제 위왕(齊威王)이……것:춘추 시대 제 위왕이, 백성은 제대로 돌보지 않고 자기 측근에게 뇌물을 주어 좋은 평판을 얻은 아 대부(阿大夫)와 아 대부를 칭찬했던 측근들에게 팽형을 가하여 죽인 일을 말한다. 通鑑節要 卷1

75)왕봉주(王鳳洲):봉주는 왕사각(王師覺, 1836〜1895)의 호이다. 자는 임지(任之)이고 구례(求禮)에서 출생하였다. 매천의 스승 왕석보(王錫輔)의 첫째 아들인데, 매천은 그에게도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시에 재능이 뛰어났으며, 서울에서 과거 시험을 준비하다가 시국의 혼란을 목도하고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1870년(고종7) 유제양(柳濟陽)을 비롯한 10여 명의 시인과 일기회(一器會)라는 시회(詩會)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76)집안이……듯했네:증자(曾子)가 위(衛)나라에서 누더기를 걸치고 신발을 끌며 상송(商頌)을 부르는데, 며칠 동안 끼니를 굶었는데도 그 소리가 천지에 가득할 정도로 쩌렁쩌렁하여 마치 금석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고 한다. 莊子 讓王 여기서는 왕사각이 증자처럼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호방한 의기를 지녔음을 비유한 것이다.

77)엄준(嚴遵)이나 정박(鄭樸)과 나란하였고:엄준은 자가 군평(君平)으로 한(漢)나라 때 성도(成都)에서 점치는 일을 하면서 평생 은거한 사람이고, 정박은 호가 곡구(谷口)이고 자가 자진(子眞)으로 한나라 성제(成帝) 때 곡구에 살면서 수도했던 은자이다. 漢書 卷72 王貢兩龔鮑傳 여기서는 왕사각이 엄준이나 정박처럼 벼슬에 뜻을 버리고 구례에서 은거하였다는 말이다.

78)맹교(孟郊)와 가도(賈島)에도 필적하였지:맹교는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자는 동야(東野)이고 무강(武康) 사람이다. 시작에 몰두하여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여 시를 짓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도도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자는 낭선(浪仙)이고 범양(范陽) 사람이다. 그 역시 시어의 조탁에 심혈을 기울였고, 맹교와 마찬가지로 한유(韓愈)에게 인정을 받았던 당대 최고의 시인이다. 新唐書 卷176 韓愈列傳 孟郊․賈島 여기서는 왕사각이 맹교와 가도처럼 시재(詩才)가 뛰어났다는 말이다.

79)그……마땅했어라:왕사각이 엄준이나 정박과는 은자의 정신이 소통되어 세상사에 대해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삶의 태도를 지녔고, 맹교나 가도와는 시인으로서의 성정이 소통되어 세상사에 대해 비통과 고뇌를 읊는 시인의 태도를 지닐 수 있었다는 말이다.

80)천지를……삼았네:죽어 무덤에 들어갔다는 말이다.

81)공이……시들이었네:진사도(陳師道, 1053〜1101)는 북송 때의 시인으로 자는 무기(無己)이고 호는 후산(後山)이다. 황정견(黃庭堅, 1045〜1105) 역시 북송 때의 시인으로 자는 노직(魯直)이고 호는 산곡도인(山谷道人)이다. 진사도와 황정견은 모두 강서시파(江西詩派)의 대표 시인들인데, 왕사각이 이 두 시인의 시를 즐겨 읽고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다.

82)가정……올라갔었지:가정(嘉靖)과 융경(隆慶)은 명(明)나라 세종(世宗)과 목종(穆宗)의 연호이며, 칠재자(七才子)란 그때에 활동했던 일곱 시인, 즉 이반룡(李攀龍), 왕세정(王世貞), 서중행(徐中行), 종신(宗臣), 사진(謝榛), 오국륜(吳國倫), 양유예(梁有譽)를 말한다. 이들의 시는 너무 의고(擬古)에 치우쳐 자구를 맞추는 데에만 전력하고 정신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매천도 왕사각과 함께 시를 토론할 때 칠재자의 그런 측면을 비판하고 시의 원형인 시경 풍아(風雅)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갔다는 말이다.

83)성균관……때:매천은 그의 나이 34세가 되던 1888년(고종25) 2월에 부모의 권유로 성균관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입격하였다. 황수정, 梅泉詩의 이해를 위한 傳記 硏究, 고시가연구 제10집, 한국고시가문학회, 2002, 270쪽

84)비장들……주었나:이광(李廣)은 한 무제(漢武帝) 때 흉노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이다. 그의 부하 비장(裨將)들은 그 공으로 모두 봉후(封侯)가 되었으나 이광은 끝내 봉해지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漢書 卷54 李廣傳 여기에서는 왕사각의 능력이 출중한데도 불운하여 세상에 쓰이지 못했음을 말한 것이다.

85)제나라……아니했던가:제 선왕(齊宣王)은 피리[竽]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이 그 궐문에서 슬(瑟)을 연주하며 3년 동안 벼슬을 구해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왕은 피리를 좋아하는데 그대는 슬을 타니, 슬을 아무리 잘 타도 왕이 좋아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였다 한다. 韓昌黎集 卷18 答陳商書 이는 세상과 맞지 않으면 아무리 유능해도 쓰일 수 없다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세상과 맞지 않아 쓰이지는 못했으나 왕사각의 능력은 탁월했다는 뜻이다.

86)맑은……가랴:한유(韓愈)의 시에, “서책을 품고 황도를 떠나, 눈물을 머금고 맑은 파수 건너네.[懷書出皇都 銜淚渡淸灞]”라는 시구가 있다. 이 시는 한유가 정원(貞元) 11년(795)에 박학굉사시(博學宏詞試)에 급제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경사(京師)를 떠나 낙양(洛陽)으로 간 것을 읊은 시이다. 韓昌黎集 卷2 縣齋有懷 여기서는 왕사각이 서울에서 과거 시험을 준비하다가 시국의 혼란을 목도하고 구례로 돌아온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87)파초에……잊으셨지:왕사각이 세상사의 이해득실에는 연연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옛날 정(鄭)나라 사람이 땔나무를 하러 가서 사슴을 잡았는데, 남이 볼까 싶어 파초 잎으로 덮어 두었는데 그 자리를 잊어버리고는 옆에 있던 사람에게 말을 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자리를 찾아내어 사슴을 가져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周穆王

88)내가……사셔서라네:매천은 1886년(고종23)에 광양(光陽)에서 구례(求禮) 간전면(艮田面)의 만수동(萬壽洞)으로 이사를 하는데, 그 이유는 왕사각이 그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수정, 梅泉詩의 이해를 위한 傳記 硏究, 고시가연구 제10집, 한국고시가문학회, 2002, 263〜264쪽

89)곧이어……뱉었네:두보의 장인산(丈人山) 시에, “청성에 살게 되면서부터 청성 땅에 침을 뱉지 아니하였네.[自爲靑城客 不唾靑城地]”라는 구절이 있는데, 두보의 정착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漢詩大成 6 杜甫全詩集 上卷 여기서 ‘청성 땅에 침을 뱉었다’는 것은 왕사각이 살던 마을을 버리고 떠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90)봉황의……트셨지:봉황은 벽오동(碧梧桐)에 둥지를 튼다고 전해지는데, 봉황같이 큰 인물인 왕사각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거처를 정했다는 말이다.

91)다섯……한가지였네:다섯 귀신이란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에 나오는 지궁(智窮), 학궁(學窮), 문궁(文窮), 명궁(命窮), 교궁(交窮)으로 사람에게 붙어 곤궁하게 만드는 다섯 궁귀(窮鬼)를 말한다. 古文眞寶 卷3 왕사각도 이런 곤궁을 초래하는 일들로 인해 걱정과 근심이 해마다 이어졌다는 말이다.

92)공께서……진동했었지:왕사각이 죽은 해가 을미년(1895, 고종32) 2월인데, 이해 음력 8월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난다.

93)유안세(劉安世)의……흡사하였네:유안세는 자가 기지(器之)이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며 원성(元城) 사람이다.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직간을 잘하였고, 송 휘종(宋徽宗) 때 당화(黨禍)로 일곱 차례나 귀양을 가는 등 수많은 역경을 겪었는데, 그때마다 흔들림 없이 지조를 지켰다고 한다. 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여기서는 유안세처럼 난세에 역경을 겪으면서도 큰 명망이 있었던 것이 오히려 좋은 운명이란 뜻으로 왕사각도 그와 비슷하다는 말이다.

94)공이……멈추네:방장(方丈)과 봉래(蓬萊)는 발해(渤海) 동쪽에 있는 신선이 산다는 산 이름이고, 붉은 노을 문양의 일산은 구름 모양의 깃발이나 옥으로 만든 수레 등과 함께 신선의 의장(儀仗)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왕사각이 죽어 신선 세계에 살다가 소상이 되어 제사에 참석하려고 내려왔다는 말이다.

95)집……답답해하리:왕사각의 혼령이 신선 세계에서 내려와 소상의 제사에 참석했을 때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제사 지내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슬퍼하며 우는 그들의 모습이 놀랍고 죽은 뒤의 세계를 모르는 그들의 용렬함에 답답해할 것이라는 말이다.

96)영재(寧齋) 이공(李公):영재는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봉조(鳳朝) 혹은 봉조(鳳藻)이다. 김택영(金澤榮)에 의해 여한십가(麗韓十家) 중에 최후의 인물로 평가받을 만큼 문장이 뛰어났고 강직한 성품으로 충간을 하다가 여러 차례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다.

97) 가의(賈誼)와 동중서(董仲舒):가의는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의 대문인으로 최연소 박사(博士)가 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으며, 동중서는 전한 무제(武帝) 때의 대학자로 유학이 한나라 정교(政敎)의 중심이 되게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98) 소동파(蘇東坡) 황정견(黃庭堅):동파는 송나라 때의 대시인이자 문장가인 소식(蘇軾)의 호이고, 황정견은 자가 노직(魯直)이고 호는 산곡(山谷)으로 소식의 제자이며 강서시파의 시조이다.

99) 노산(魯山)……용모:노산은 당나라 때 노산 영(魯山令)을 지낸 원덕수(元德秀)를 말한다. 자는 자지(紫芝)이며 하남(河南) 사람이다. 사람됨이 청결하고 순박하며 가식이 적어, 방관(房琯)은 항상 그를 보고 감탄하기를, “자지의 얼굴을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명리(名利)의 마음이 사라지게 한다.”라고 하였다. 新唐書 卷194 元德秀列傳

100)원례(元禮)처럼……있었지:원례는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 이응(李膺)의 자이다. 당시 선비들이 그의 인물됨을 평가하여 ‘천하의 모범 이원례[天下模楷李元禮]’라 칭할 정도였고, 풍도와 기개가 있었으므로 선비 중에 그의 인정과 대접을 받은 자가 있으면 용문(龍門)에 올랐다고 일컬을 정도였다. 後漢書 卷67 李膺列傳

101)벽동(碧潼)과……등:고종실록(高宗實錄) 15년(1878) 6월 21일에, “이건창(李建昌)을 벽동군(碧潼郡)에 찬배(竄配)하였다.”라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는 충청우도 암행 어사로서 충청 감사 조병식(趙秉式)의 비행을 낱낱이 들추어냈다가 무함을 받아 유배된 것이다. 그 뒤 고종 30년(1893) 8월 23일에, “부호군 이건창에게 원찬(遠竄)의 형전을 시행하라.”라는 전교가 내려져서 보성(寶城)으로 유배되는데, 그가 호서와 호남의 동학(東學)을 성토하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 조정의 명령이 내린 뒤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02)겁화(劫火):산스크리트어의 칼파그니(kalpagni)를 번역한 말로, 세상이 파멸될 때 일어나는 불이다. 불교에서는 세상이 성(成), 주(住), 괴(壞), 공(空)을 되풀이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괴’의 마지막이 되면 큰불과 바람과 물이 일어나는데, 그 큰불이 겁화이고, 바람이 겁풍(劫風)이며, 큰물이 겁수(劫水)이다. 그렇게 되면 수미산(須彌山) 주위의 큰 바다도 흔적 없이 사라진다고 한다.

103)癭:대본에는 ‘癯’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癭’으로 바로잡았다.

104)이름난……주었지:이건창은 능력에 비해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영달을 꾀하는 성격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특히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로는 각 부(部)의 협판(協辦)이나 특진관(特進官) 등에 제수되어도 모두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05)거룻배를……영광이었네:1896년(건양1)에 해주 관찰사(海州觀察使) 자리를 계속 사양하다가 고군산도(古群山島)로 세 번째 유배를 간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이는 죄를 지어서 간 유배가 아니라 벼슬을 사양하다 그리된 것이므로 오히려 그의 청고한 뜻이 드러난 셈이라는 말이다.

106)바닷가에……우러렀어라:경성(景星)은 태평 시대에만 나타난다는 별로, 덕성(德星) 혹은 서성(瑞星), 대성(大星)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고군산도의 부녀자들이 이건창을 마치 경성이 다시 나타난 것처럼 우러러보고 존경했다는 말이다.

107)瞻:대본에는 ‘膽’으로 되어 있는데, 의미가 통하지 않아 바로잡았다.

108)유배가……들었지:이건창은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가 임금의 특지(特旨)로 한 달 만에 풀려났는데, 이를 말한 것이다.

109)공만……요절했나니:논어 옹야(雍也)에, 공자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仁)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動的)이고 인한 사람은 정적(靜的)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낙천적이고 인한 사람은 장수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건창은 오래 살아야 마땅함에도 47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 안타깝다는 말이다.

110)맹꽁이들 이리저리 날뛰는구나:세상이라는 웅덩이 속에서 설치는 소인배를 맹꽁이에 비유한 말이다.

111)공의……왔지:이건창은 1898년(광무2) 6월에 사망하였는데, 매천이 강화(江華)에 있는 이건창의 무덤을 찾은 것은 그다음 해 4월이다.

112)면암(勉菴) 최 선생(崔先生):면암은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호이다. 자는 찬겸(贊謙)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13)영해(嶺海)를……갔고:최익현은 1873년(고종10) 11월에 시폐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내용이 과격하고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3년을 보냈고, 유배에서 풀려난 그다음 해인 1876년에 다시 병자지부소(丙子持斧疏)를 올려 일본이 요구한 수호(修好)와 통상(通商)을 결사 반대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는 명을 받고 소흑산도(小黑山島)로 유배된 바 있다.

114)나라가……들어가셨습니다:1905년(광무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항일 투쟁을 촉구하는 한편, 1906년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순창(淳昌)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 싸움에서 패하여 체포된 뒤에 일본 대마도(對馬島)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일절 음식을 거부하고 단식하면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병사하였다.

115)중봉(重峯):조헌(趙憲, 1544〜1592)의 호이다. 자는 여식(汝式)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왜군과 전투를 벌여 분전하다가 결국 전사하였다.

116)동계(桐溪):정온(鄭蘊, 15691641)의 호이다. 자는 휘원(輝遠)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병자호란 때에는 화의론(和議論)을 극력 반대하였고 항복이 결정되자 칼로 자결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결국에는 덕유산(德裕山)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죽었다.

117)소자의……말았으니: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보면, 공자가 진(陳)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가기를 선언하는 이른바 ‘재진지탄(在陳之歎)’이 나온다. “이제는 돌아가야겠다. 노나라에 있는 내 제자들이 광간하여, 문리(文理) 성취는 볼만해도 중도(中道)로 마름질할 줄을 모른다.[歸與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라는 대목인데, 노나라로 돌아가서 이 제자들의 광간함을 잘 마름질해 주어 중도에 맞는 선비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광간은 뜻은 크지만 실천력이 부족한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면암 선생이 돌아가시어 매천 자신의 그런 면을 질정해 주고 재단해 줄 사람이 없다고 탄식한 것이다.

118)천년의 공론(公論):이 제문의 맨 앞 단락에 나오는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福善禍淫]”라는 구절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19)왕소금(王素琴):소금은 왕사천(王師天, 1842〜1906)의 호이다. 왕사천은 매천의 스승인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의 둘째 아들로, 매천과는 여행을 함께하며 시문을 토론하고 수창(酬唱)한 각별한 사이였다. 김정환, 梅泉詩派 硏究, 경인문화사, 2007, 14〜15쪽

120) 내……고모였기에:매천의 백모는 개성 왕씨(開城王氏)로 왕학준(王學準)의 따님이고 매천의 스승인 왕석보의 누이이다.

121)年足兄事:대본에는 ‘年兄足事’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122)내……걸렸지:전주대 호남학연구소에서 편찬한 매천전집(梅泉全集) 가장초외(家狀抄外) 추록보유(追錄補遺)를 보면 매천은 23세부터 10년간 음위(陰痿)라는 병으로 매우 힘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23)하늘에……머물렀었네:지리산에 올라갔다가 섬진강에서 배를 타고 남해(南海)로 가서 금산(錦山) 남쪽 봉우리에 있는 보리암(菩提庵)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124)수성(壽星):남극 노인성(老人星)인 카노푸스(canopus)를 말하는데, 예로부터 장수를 상징하는 별로 일컬었다.

125)다락……살폈네:남해에서 다시 통영(統營)의 한산섬으로 가서 이순신(李舜臣)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김해(金海)로 가서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옛터를 돌아본 다음 다시 부산(釜山), 동래(東萊)의 저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126) 몽당붓을……뒀지:매천은 이 여행의 기록을 일기 형식으로 적어 천지일록(天池日錄)을 남겼다고 한다.

127)경인년과……머물렀었지:매천은 1886년(고종23) 12월에 광양에서 스승이기도 한 봉주(鳳洲) 왕사각(王師覺)이 있는 구례 만수동(萬壽洞)으로 이사하였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890년 경인년에 서재 구안실(苟安室)을 완성하고 그 이듬해 신묘년(1891)까지 구안실에 머물면서 시작(詩作)과 교육에 전념하는데, 이해 6월에 구안실기(苟安室記)를 짓기도 하였다. 황수정, 梅泉詩의 이해를 위한 傳記 硏究, 고시가연구 제10집, 한국고시가문학회, 2002

128)서쪽……있었지:대본의 ‘서소(西笑)’는 보통 서울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환담(桓譚)의 신론(新論)에, “사람이 서울 장안의 음악을 들으면 문을 나가서 서쪽을 향하여 웃는다.[人聞長安樂 則出門西向而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종남(終南)’도 서울의 남산(南山)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쓰이는 것을 감안하면, 매천과 왕사천의 이번 여행은 서울로 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신묘년(1891)을 전후한 시기에 두 사람이 서울을 다녀간 어떠한 기록도 찾지 못하였고, 뒤에 나오는 광산(光山), 즉 광주(光州)나 완산(完山)으로 이어지는 여정에 관련된 다른 기록도 찾지 못하였으므로 이 여행의 행로와 목적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번역하였음을 밝힌다. 다만 이번 여정은 이 제문의 전후 내용으로 보아, 서울로 간 것이 아니라 호남[終南]의 절이 있는 어떤 지역을 들렀다가 광산에 가서 왕사천이 과거를 보고 다시 행장을 꾸려 완산으로 여행을 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129)지방에서 치르는 과시(科試):대본의 ‘성위(省闈)’는 원래 예조(禮曹)의 주관 아래 궁중에서 치르는 과거를 칭하는 말인데, 원(元)나라 이후에는 지방의 각 성(省)에서 치르는 과거도 아울러 일컫는 말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광산(光山), 즉 광주(光州)에서 치러지는 과거를 보러 가는 것으로 짐작하고 번역하였으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130)지방에서……괴화(槐花):옛날에는 괴화가 노랗게 피는 음력 7월경에 과시(科試)를 치렀으므로, 당(唐)나라 때의 속어(俗語)에 “괴화가 누렇게 피면 과거 보는 선비가 바쁘다.[槐花黃 擧子忙]”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지금이 바로 지방 도회지에서 과시를 보는 때임을 말한 것이다.

131)광산(光山):산천의 풍광(風光)을 뜻하는 말로도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광산 지역을 둘러본 것으로 판단하고 지명으로 번역하였다.

132)行李:대본에는 ‘行季’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季’를 ‘李’로 바로잡았다.

133)달……월곡리(月谷里)라네:황수정의 논문에 따르면, 매천은 48세이던 1902년(광무6) 11월에 왕사천, 왕사찬, 이기(李沂)의 권유로 만수동에서 다시 구례 광의면(光義面) 월곡리로 이사하고, 집의 이름을 ‘성인당(成仁堂)’ 또는 ‘대월헌(待月軒)’이라 하였다고 한다. 황수정, 梅泉詩의 이해를 위한 傳記 硏究, 고시가연구 제10집, 한국고시가문학회, 2002

134)인자(仁者)……가까워서지:매천이 월곡으로 이사 온 것은 인근 마을에 왕사천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황수정의 위 논문에 따르면, 실제로 황현의 마지막 거주지였던 월곡은 그의 스승 왕석보가 거주했던 천변(川邊) 마을과 지척에 있으며, 천변에는 또 동학이자 친구인 왕사천, 왕사찬 등이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한다.

135)방덕공(龐德公)과……나눴네:방덕공은 후한(後漢) 때의 인물로 현산(峴山)의 남쪽에 은거하면서 유표(劉表)의 초청에도 응하지 않고 제갈량(諸葛亮)이나 서서(徐庶) 등과 교유했던 은자이다. 사마휘(司馬徽)는 자가 덕조(德操)이고 도호(道號)가 수경선생(水鏡先生)으로, 역시 제갈량 등과 교유하며 은거한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함께 돈독한 우의를 나누었다. 三國志 卷37 蜀書 龐統傳

136)군자……것:예기(禮記) 단궁(檀弓)에, “군자의 죽음을 종(終)이라고 하고 소인의 죽음을 사(死)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137)통한……없지만:여기에서 통한 분이란 죽은 왕사천을 가리킨다. 왕사천은 평소 성격이 화통하여 죽음에 대해서 초연한 생각을 가진 인물이므로 심하게 슬퍼하는 것은 도리어 누가 된다는 말이다.

138)이해학(李海鶴):해학은 이기(李沂, 1848〜1909)의 호이다. 자는 백증(伯曾)이고,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민중계몽운동에 앞장섰고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단을 도모하는 등,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139)제후로……그러했지:주발(周勃)과 관영(灌嬰)은 큰 능력이 없었어도 한(漢)나라의 개국 공신으로 강후(絳侯)와 영음후(潁陰侯)에 봉해졌고 대신(大臣)으로서 모든 영화를 누렸다. 여기에서는 용렬해도 현달한 사람의 사례로 이 두 사람을 든 것이다. 가의(賈誼)는 발군의 능력으로 20세 때 문제(文帝)에게 발탁되어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르렀고, 예악 정책을 과감하게 건의하는 등 한나라의 문물제도 정비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문치(文治)를 모르는 주발과 관영 같은 대신들의 시기를 받아 장사왕(長沙王) 태부(太傅)로 좌천된 뒤로는, 더 이상 뜻을 펼치지 못한 채 33세의 나이로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여기에서는 능력은 뛰어나도 운명이 박한 사람의 사례로 든 것이다.

140)김일제(金日磾)와……번영했고:김일제와 장탕(張湯)의 집안은 한나라 때의 세족(世族)으로, 무제(武帝) 때부터 평제(平帝) 때까지 다수의 고관을 배출하며 번영을 누린 집안으로 유명하다.

141)엄군평(嚴君平)과……영락했네:군평은 한나라 때의 은자인 엄준(嚴遵)의 자이다. 그는 성도(成都)에서 점치는 일을 하면서 일생 동안 은거하였다. 자진(子眞)은 한나라 성제(成帝) 때 곡구(谷口)에 살면서 은거했던 정박(鄭樸)의 자이다. 이들은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뜻을 펼치지 못하고 시골에서 영락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받았다는 말이다.

142)왕량(王梁)은……받았는데:후한의 광무제(光武帝)가 왕업을 다시 회복한 뒤에도 참위설(讖緯說)을 믿고는 그 설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왕량은 북방 지역의 야왕(野王) 땅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그곳이 북방의 상징인 현무(玄武)의 땅이라는 이유로 그를 대사공(大司空)에 임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後漢書 卷52 王梁列傳

143)환담(桓譚)과……고생했나:환담은 후한 광무제 때의 신하로 자는 군산(君山)이다. 광무제가 도참설에 의거하여 관직을 제수하고 정책을 펴려 하자, 당시 의랑급사중(議郞給事中)이던 그는 “참서(讖書)는 경(經)이 아니다.”라고 직간하였다. 그 일로 미움을 받아 노년에 육안군(六安郡)의 승(丞)으로 좌천되어 가다가 길에서 병들어 죽었다. 後漢書 卷58 桓譚列傳 풍연(馮衍) 역시 광무제 때의 사람으로 자는 경통(敬通)이다. 처음에는 왕망(王莽) 밑에서 벼슬하다가 그만두고 뒤에 광무제를 섬겼는데, 광무제가 외척을 처벌할 때 그 역시 죄를 얻었다가 풀려난 뒤로는 평생 두문불출하고 지냈다 한다. 後漢書 卷28 馮衍列傳

144)굴원(屈原)이……그래서지:천문편(天問篇)은 초사(楚辭)의 편명이다. 초(楚)나라 굴원이 조정에서 쫓겨나 산택(山澤)을 방황할 때, 우주의 모든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하늘에 묻는 내용의 글이다. 楚辭 卷3 天問 여기서는 예로부터 능력 있는 사람들이 좌절하고 용렬한 사람들이 현달하는 현실에 대해 고금의 사람들이 비분강개해 왔으며, 굴원이 천문편을 지은 것도 하늘에 대해 그런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145)왕맹(王猛) 마주(馬周):왕맹(325〜375)은 자가 경략(景略)이고 북해(北海) 사람이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전진(前秦)의 승상을 지낸 인물이다. 젊은 시절 동진(東晉)의 대장(大將) 환온(桓溫)을 찾아가 알현하는 자리에서 여유롭게 이[蝨]를 잡으면서 유창하게 천하를 담론했을 정도로 기백이 출중했던 사람이다. 晉書 卷114 王猛列傳 마주는 당 태종(唐太宗) 때의 문신으로 자가 빈왕(賓王)이고 임평(荏平)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가난하게 살았지만 학문을 좋아하여 시경춘추에 조예가 깊었고, 벼슬이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이르렀다. 新唐書 卷98 馬周列傳

146)번천(樊川) 용천(龍川):번천은 두목(杜牧, 803〜853)의 호이다. 자는 목지(牧之)로 만당(晩唐)의 대시인이다.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불리기도 하고, 시작이 두보(杜甫)와 비슷하다 하여 소두(小杜)로도 불린다. 新唐書 卷166 杜牧列傳 용천은 송나라 때의 학자 진량(陳亮)의 호이다. 자는 동보(同甫)이다. 그는 사공학파(事功學派)로서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주자학의 관념성과 비현실성을 비판하였고 주희(朱熹)와 왕패(王覇)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宋元學案 卷56

147)왕찬(王粲)처럼……짓고:왕찬은 자가 중선(仲宣)이며, 후한 말기에서 삼국 초기의 산양(山陽) 사람이다. 객지를 떠돌아다니다가 형주(荊州)의 성루(城樓)에 올라가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는데, 고향 생각과 때를 만나지 못한 시름을 토로한 이 글이 그의 대표작이다. 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 여기서는 이기(李沂)도 호구를 위해 사방을 떠돌다가 왕찬의 등루부와 같은 시를 지으며 시름을 달랬다는 말이다.

148)진림(陳琳)의……했었지:진림은 후한 광릉(廣陵) 사람이며 자는 공장(孔璋)이다. 일찍이 원소(袁紹)를 위해 조조(曹操)를 질책하는 격문을 지었는데, 원소가 패한 뒤에 조조에게 가자, 조조가 그의 재주를 아껴 기실(記室)로 삼았다고 한다. 또 한번은 조조가 두풍(頭風)을 앓아 누워 있다가 진림이 작성한 격문을 보고는 갑자기 일어나 말하기를, “이 글이 내 병을 낫게 하였다.[此愈我病]” 하고는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 三國志 卷21 魏書 陳琳傳 여기에서는 이기가 당시의 현실 문제를 다룬 전제망언(田制妄言) 같은 글을 지어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에게 건의한 것 등을 두고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149)이……하였지:이기는 1904년(광무8)에 홍필주(洪弼周), 이범창(李範昌) 등 수백 인과 연명으로 상소하여 일제(日帝)에 동조한 이하영(李夏榮), 현영운(玄映運) 등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고, 1905년에는 홍필주,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등과 일본에 건너가 조선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 항의를 하였으며, 같은 해 11월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민중계몽운동과 항일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李海鶴遺書 海鶴李公墓誌銘 박종혁, 해학 이기의 사상과 문학, 아세아문화사, 1995

150)熾:대본에는 ‘熸’으로 되어 있는데, 의미가 통하지 않아 교감하였다.

151)이웃……지적했네:1904년에 네 차례에 걸쳐 올린 논일인소구진황지소(論日人所求陳荒地疏)를 통하여 일제가 황무지 개척권을 강요하는 데 대해 그 부당성과 대책을 건의하는 등, 일제가 조선 침략을 노골화하는 것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여 고종이나 대신들에게 건의한 글이 다수 있다. 특히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에서 강화 회의가 열리게 되었을 때,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조약 체결에 반대하기 위해 우리 측 대표로 참석하게 해 줄 것을 외부 대신 이하영(李夏榮)에게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직접 미국에 건너가 회의에 참석하려 하였는데, 일본 공사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李海鶴遺書 海鶴李公墓誌銘 박종혁, 해학 이기의 사상과 문학, 아세아문화사, 1995 참창성(欃槍星)은 예로부터 전쟁과 병란을 상징하는 혜성을 말하는데, 그것이 태양을 침범했다는 것은 일제의 조선 침략을 비유한 말로 쓰인 것이다.

152)배를……기세였지:미국의 강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이기는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1905년 9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과 정계 요인에게 서신을 보내어 조선 침략의 부당성을 당당하게 설파하였는데,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李海鶴遺書 海鶴李公墓誌銘 박종혁, 해학 이기의 사상과 문학, 아세아문화사, 1995

153)고위……보내었네:고위 인사 설득할 땐 가볍게 보라 했다는 말은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에는 그 지위를 하찮게 여기면서 그 부귀와 권세는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한다.[說大人則藐之 勿視其巍巍然]”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거침없이 요인에게 서신을 보냈다.”라는 말에서 ‘요인’은 대본의 ‘名王’을 번역한 것인데, 원래 명왕은 흉노족의 우두머리 중에서 이름 높은 사람을 칭하는 말로, 여기에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기는 일본으로 건너가 그에게 2차에 걸쳐 서신을 보내 일본의 배약(背約)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한 바 있다.

154)고향으로……여겼네:이기는 일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1905년(광무9) 11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장례만 치르고 곧바로 상경(上京)하는 바람에 지방 유림(儒林)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나라가 망하면 인륜도 무의미하다고 반박하고는, 대한자강회 활동과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서의 교육 사업, 그리고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 조양보(朝陽報)에 논설을 발표하는 등의 언론 활동까지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李海鶴遺書 海鶴李公墓誌銘 박종혁, 해학 이기의 사상과 문학, 아세아문화사, 1995

155)자객열전(刺客列傳)……찾았었지:사기(史記) 권86 자객열전에서 형가(荊軻)가 진 시황(秦始皇)을 암살하려 하는 대목 등을 보고 착안하여, 1907년(순종1) 3월에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자신회(自新會)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고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 것을 말한다. 李海鶴遺書 海鶴李公墓誌銘 박종혁, 해학 이기의 사상과 문학, 아세아문화사, 1995

156)시전(施全)……하였고:시전은 남송(南宋) 임안(臨安) 전당(錢塘) 사람으로, 고종(高宗) 20년(1150)에 전사소교(殿司小校)로 있으면서 참마도(斬馬刀)를 지니고 망선교(望仙橋)에서 재상(宰相) 진회(秦檜)를 죽이려고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여 저자에서 책형(磔刑)을 당해 죽었다. 宋史 卷473 秦檜列傳 여기에서는 을사오적을 암살하기 위해 시전 같은 암살자를 훈련시켰다는 말이다.

157)施全:대본에는 ‘㢮全’으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는 ‘弛全’으로 정정하였다. 그러나 송사(宋史) 권473 진회열전(秦檜列傳)에 의거하여 다시 ‘施全’으로 바로잡았다.

158)온후(溫侯)……하였지:온후는 후한(後漢) 말기 여포(呂布)의 봉호이다. 자는 봉선(奉先)이며 병주(幷州) 오원(五原) 사람이다. 그는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사주로 동탁(董卓)을 창으로 살해하고 분무장군(奮武將軍)에 임명되고 온후에 봉해졌다.

159)하늘은……애달프다:이기는 을사오적을 처단할 목적으로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였으나 암살의 거사가 실패하는 바람에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였다.

160)떨어지는……물어:‘떨어지는 솔개’라는 말은 후한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정벌하러 갔을 때, 남방의 찌는 듯한 무더위와 독기(毒氣)로 인해 솔개가 힘없이 물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평소에 그의 종제(從弟) 소유(少游)가 “짧은 인생에 무리하게 큰 뜻을 품지 않고 고향에서 마음 편히 살다 가는 것이 좋다.”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탄식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것이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여기서는 이기가 1907년(순종1) 을사오적 암살 미수 사건으로 7년형을 선고받고 남쪽 지방 진도(珍島)로 유배되어 간 것을 ‘떨어지는 솔개에게 길을 물었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61)궁벽한……했네:이기가 진도에 유배 가서 곤궁한 섬 생활을 하면서도 서울 도회에서 생활할 때처럼 전혀 개의치 않고 평소대로 지냈다는 말이다.

162)풍파가……풀려났지:이기는 진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1907년 겨울에 고종(高宗)의 특별 사면으로 석방되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63)그러나……생각했네:전국 시대 초(楚)나라 노양(魯陽)이 한(韓)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이던 중에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창으로 해를 끌어당겨 삼사(三舍)의 거리만큼 뒤로 물러나게 했다고 한다. 淮南子 覽冥訓 여기에서는 이기가 기울어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방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배에서 풀려난 뒤로는 활동을 접고 조용히 여생을 보낼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었다는 말이다.

164)또다시……나아갔지:이기는 유배가 풀려 상경한 뒤에 호남학회(湖南學會)를 조직하고 호남학보(湖南學報)의 논설에 심혈을 기울이는 등,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는 말이다.

165)내……떠났는가:도산(道山)은 전설상의 신선이 산다는 산으로, 보통 ‘도산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매천이 병중에 갑자기 이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탄식한 말이다.

166)넓적다리……났으리라:넓적다리가 살찐 것을 한했다는 말은 유비(劉備)의 고사이다. 유비가 일찍이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의탁해 있을 때, 하루는 변소에 갔다가 넓적다리에 살이 찐 것을 보고는 돌아와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유표가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내 몸은 항상 말안장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넓적다리의 살이 홀쭉했었는데, 지금은 말을 타지 않아서 넓적다리의 살이 많이 찌고 말았다. 세월이 달리는 말처럼 빨라서 몸은 늙어 가는데, 공업(功業)을 아직 이루지 못해서 슬퍼 우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여기에서는 이기가 이 세상에서 공적을 이루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했을 리는 없고 이 세상의 혼탁함이 싫증이 나서 세상을 버렸을 것이라는 말이다.

167)그렇지만……펄럭이네:이기의 영혼은 한 마리 학처럼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갔을 테지만 지상의 육신을 담은 영구(靈柩)는 객지의 빈소에 남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기는 1909년(순종3) 5월 25일 서울의 객사(客舍)에서 식음을 끊는 방법으로 자진(自盡)하여 가매장되었다가 2년 뒤인 1911년이 되어서야 김제(金堤) 선영으로 이장(移葬)되었다.

168)연장(年長)으로……되었지:이기는 1848년생이고 매천은 1855년생이므로 이기가 7세 연장이다. 그래서 원문에서는 ‘견수(肩隨)’라고 표현한 것이다. 견수란 “다섯 살 정도 연장자와 동행할 때에는 연장자의 어깨보다 조금 뒤에서 따라 걸어간다.[五年以長則肩隨之]”라는 말로,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나온다. 그리고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이 삼밭에 나면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아진다.[蓬生麻中 不扶而直]”라는 말이 있는데, 좋은 사람과 사귀면 절로 바른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매천이 연장자인 이기와 20여 년간 교우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고 의지하였다는 말이다.

169)宦:대본에는 ‘官’으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宦’으로 바로잡았다.

170) 潁:대본에는 ‘頴’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물이름이 분명하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71)구양수(歐陽脩)와……약속:구양수가 단계(端谿)의 녹석침(綠石枕)과 기주(蘄州)의 죽점(竹簟)을 얻은 뒤에 매우 기뻐하며 시를 짓기를, “결국에는 자리 걷고 베개 들고 떠나서 영수 가에 집 짓고 밭을 사서 살리라.[終當卷簟携枕去 築室買田淸潁尾]”라고 하였다. 文忠集 卷8 古詩二十一首 두보는 사천성(四川省) 기주(夔州)에 있는 양수(瀼水)의 산천을 좋아하여 그곳의 동쪽과 서쪽으로 세 번이나 거처를 옮겨 가며 살았다고 한다. 杜甫全詩集 自瀼西荊扉且移居東屯茅屋 四首 그리고 세 갈래 길[三逕]이란, 한(漢)나라 때 사람인 장후(蔣詡)가 벼슬에서 물러나 두릉(杜陵)에 은거하면서 대밭 아래에 만든 세 갈래 오솔길을 말하는데, 이 길을 절친한 벗인 구중(求仲), 양중(羊仲)하고만 거닐었다고 한다. 蒙求 蔣詡三逕 이 세 가지 고사는 모두 물러나 조용히 전원생활을 즐긴다는 의미로 쓰인 것인데, 여기서는 과거에 매천이 이기와 그런 곳에서 노년을 함께하자고 약속했다는 말이다.

172)백발의……말하랴:거공(駏蛩)은 거허(駏驉)와 공공(蛩蛩)이라는 두 짐승이다. 이들은 항상 궐(蟨)이라는 짐승과 함께 공생 관계를 이루는데, 궐이 감초(甘草)를 구하여 두 짐승을 부양해 주는 대신, 두 짐승은, 잘 달리지 못하는 궐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등에 업고 달아난다고 한다. 淮南子 道應訓 여기에서는 항상 의지가 되던 친구 이기가 죽었으므로 더 이상 의지할 사람이 없게 되었음을 탄식한 말이다.

173)증 좌참찬 부군:황희(黃喜)의 조부(祖父) 황균비(黃均庇)를 말하는데, 좌참찬에 증직되었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174)경(瓊):장수 황씨의 시조 황경(黃瓊)으로,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부마(駙馬)였으며 벼슬은 시중을 지냈다.

175)공유(公有):황공유는 고려 명종(明宗) 때 전중감(殿中監)을 지냈고 무신 이의방(李義方)의 난을 피해 고향인 장수로 내려가서 세거(世居)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176)감평(鑑平):시조 황경(黃瓊)의 15세손으로 덕망 있는 학자였다고만 전해진다.

177)석부(石富):황석부는 황경의 18세손이며 황희(黃喜)의 증조부로 사후에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이로부터 세차(世次)가 분명히 전해지므로 후손들이 중시조로 삼았다고 한다.

178)익성공(翼成公):익성은 황희(黃喜)의 시호이다. 자는 구부(懼夫)이고 호는 방촌(厖村)이다.

179)최 경문공 홍윤(崔景文公洪胤):최홍윤은 고려 고종(高宗) 연간의 문신으로 시호가 경문이다.

180)방촌집(厖村集):조선 초기의 문신인 방촌 황희의 시문집이다. 고본은 남아 있지 않고 현존하는 것은 1935년 황의창(黃義昌)이 편집 간행한 14권 7책의 목활자본이다.

181)신상 숙주(申相叔舟):신숙주(1417〜1475)의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범옹(泛翁)이며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

182)방촌묘지(厖村墓誌):보한재집(保閑齋集) 권17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영경연예문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잉령치사 증시익성 황공 묘지(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領經筵藝文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仍令致仕贈諡翼成黃公墓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183)범희문(范希文)의……말:희문은 북송(北宋) 때의 문신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자이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로는 범문정공집(范文正公集) 24권이 있다. 여기에 인용된 구절은 소학집주(小學集註) 가언(嘉言)에 나오는 말이다. 그는 “우리 선조들이 덕을 쌓은 백여 년 만에 비로소 나에게서 효험이 있어 큰 벼슬에 이르렀으니, 만약 나 혼자만이 부귀를 누리고 종족을 돌보지 않는다면 훗날 어떻게 조상을 지하에서 뵐 수 있겠으며, 무슨 낯으로 집안 사당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라고 아들들에게 훈계하고는, 은사(恩賜)와 녹봉(祿俸)을 친족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184) 영릉(英陵):세종(世宗)의 능호(陵號)이다.

185)별호:대본에는 ‘而號’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而’를 ‘別’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86)남원(南原)의……풍산(楓山):현 남원시 대강면(帶江面) 풍산리(楓山里) 산촌마을 뒷산이다.

187)나옹(懶翁):1320〜1376.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왕사(王師)의 법호이다. 선종(禪宗)의 고승으로서 조선 시대에 지공(指空), 무학(無學)과 함께 삼대화상(三大和尙)이라 일컬었다.

188)점지해 준 곳:대본에는 ‘所下’로 되어 있는데, 전주대 호남학연구소에서 편찬한 매천전집(梅泉全集)에 의거하여 ‘下’를 ‘卜’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89)옛날부터……한다: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황희의 부친 황군서(黃君瑞)는 나옹대사가 잡아준 명당에 아버지의 무덤을 쓴 후에 개경(開京)으로 이사하여 황희를 낳았다고 한다.

190)유하계(柳下季)의……훼손되거나:이와 관련된 고사는 전국책(戰國策) 권11 제책(齊策) 4에 보인다. 제 선왕(齊宣王)이 안촉(顔斶)을 만나 묻기를, “왕이 귀한가, 선비가 귀한가?” 하니, 안촉이 대답하기를, “선비가 귀하지 왕은 귀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선왕이 다시 묻기를, “그런 고사가 있는가?” 하니, 안촉이 대답하기를, “있습니다. 옛날 진(秦)나라가 제(齊)나라를 공격할 때, 진나라 임금이 명령을 내리기를, ‘유하계의 무덤 50보 안의 언덕에서 나무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고 모두 사형에 처한다.’라고 한 반면에, ‘제왕(齊王)의 목을 베어 오는 자는 만호후(萬戶侯)에 봉하고 황금 1000일(鎰)을 내린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보면 살아 있는 왕의 머리가 죽은 선비의 무덤 주변 언덕만도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유하계의 무덤 근처에서 나무를 못하게 한 것은 나무꾼들이 무덤을 훼손하는 것을 염려해서인데, 여기서는 선조의 무덤도 표지가 없으면 그럴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191)매령(梅嶺)의……걱정:이와 관련된 고사는 세설신어전소(世說新語箋疏) 상서(傷逝)에 보이는데, “진(晉)나라에서는 대대로 왕공(王公)과 귀인(貴人)들이 죽으면 매령에 무덤을 쓰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진숙릉(陳叔陵)은 생모 팽씨(彭氏)가 죽자, 매령에 무덤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임금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고는, 고(故) 태부(太傅) 사안(謝安)의 무덤을 파내어 그 널을 버리고 그곳에 자기 어머니를 매장하였다.”라고 하였다. 위와 마찬가지로 무덤에 표지가 없으면 도굴될 염려가 있다는 말이다.

192)방촌(厖村) 상공(相公):황희(黃喜)를 말한다.

193)9대조 휘 진(進):황진(1550〜1593)의 자는 명보(明甫)이고 황희의 5대손이다.

194)선조(宣祖)……떨쳤고:황진은 1593년(선조26) 6월에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9일 동안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195)7대조 휘 위(暐):황위(1605〜1654)의 자는 자휘(子輝)이며 호는 당촌(塘村)이다.

196)인조(仁祖) 정축년에 근왕(勤王)하였다:황위가 병자호란 때 남원(南原)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올라가다가 과천(果川)에서 적군을 만나 승전(勝戰)한 것을 말한다.

197)금상(今上):고종(高宗)을 말한다.

198)마고(麻姑):구례군 문척면(文尺面)에 있는 지명이다. 마고라는 지명은 지리산 노고단(老姑壇)의 여자 산신(山神)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지리산에는 그녀가 반야봉(般若峯)의 산신 반야(般若)를 짝사랑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199)형님이 일찍 돌아가셨는데:형님은 황흠묵(黃欽黙)을 말하는데, 자는 성원(聖源)이고 호는 매원(梅園)이다. 순조(純祖) 을유년(1825, 순조25)에 태어나서 철종(哲宗) 갑인년(1854, 철종5) 12월 30일에 졸하였다. 長水黃氏世譜 卷4

200)담(壜):황담(1851〜1893)의 자는 운오(雲五)이고 호는 석오(石五)이다.

201)형수인 왕씨(王氏):개성 왕씨(開城王氏) 학준(學準)의 따님이다.

202)이를 갈 나이:대본에는 ‘齕’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아 ‘齔’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203)극도휘(郄道徽):도휘는 진(晉)나라 때 태위(太尉)를 지냈던 극감(郄鑒)의 자이다. 고평(高平) 금향(金鄕) 사람이다. 서진(西晉) 말기 회제(懷帝) 영가(永嘉) 연간에 흉노족이 침입하였을 때, 극감은 시골에서 굶주리며 몹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극감이 명성과 덕이 있다 하여 음식을 나눠 주었다. 그때 형의 아들인 매(邁)와 생질(甥姪)인 주익(周翼)이 모두 어렸는데, 항상 음식을 주는 곳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그러자 마을 사람이 말하기를, “모두 굶주리고 궁핍하지만 그대가 어질기에 음식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까지 다 나눠 주면 함께 생존할 수가 없다.” 하였다. 이에 극감은 혼자 가서 음식을 먹고 양쪽 뺨 안에 밥을 넣어 와서는 그것을 토해 두 아이에게 먹여 그들을 모두 살렸다. 그 뒤 생질인 주익은 극감이 죽자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그를 위해 심상(心喪) 삼년복을 입었다. 太平御覽 卷421 人事  

204)등백도(鄧伯道):백도는 진나라 때 사람 등유(鄧攸)의 자인데, 양양(襄陽) 출신으로 건흥(建興) 연간에 하동 태수(河東太守)를 지냈다. 등백도는 당시 석륵(石勒)의 난리가 터지자,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란을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적을 만나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형세상 둘 다 구할 수 없게 되자, 자기 아들을 나무에 묶어 놓고 조카와 도망가 끝내 조카를 살렸다고 한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鄧攸

205)나에게……사람이다:황시묵을 극도휘나 등백도에 못지않다고 평가한 말은 아첨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합당한 평가라는 말이다.

206) 남계(藍溪):구례 광의면 지천리 남전(藍田) 마을 앞에 있는 시내 이름이다.

207)영규(英規):박영규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사위로, 왕건이 후백제를 칠 때 내응하여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였다. 그 공으로 좌승(佐丞)에 제수되었고, 그 뒤로 품계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208)문숙공(文肅公) 석명(錫命):문숙은 박석명(朴錫命)의 시호이다. 박석명은 태종(太宗)이 즉위한 뒤에 좌명 공신(佐命功臣)에 책봉되었고,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에 올랐으며,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해졌다.

209)공정왕(恭定王):명(明)나라에서 내려 준 태종(太宗)의 시호이다.

210)공희왕(恭僖王):명나라에서 내려 준 중종(中宗)의 시호이다.

211)원종(元宗):박원종(14671510)의 자는 백윤(伯胤)이고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중종반정이 성공하여 정국 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해졌다.

212)정현(鄭玄)과……하겠는데:정현(127〜200)은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로 재야에서 연구에 몰두하여 한나라 경학을 집대성하였고 교육에 평생을 바쳐 정현학파를 이룬 인물이며, 명복(明復)은 북송(北宋) 초의 학자 손복(孫復)의 자로, 태산(泰山)에 은거하여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 활동을 하여 태산학파(泰山學派)를 이룬 인물이다. 여기서는 박성민(朴聖民) 이하 3대가 시골에 은거하며 제자를 가르친 것을 높이 기려 말한 것이다.

213)광일(光一):1655〜1723.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손재(遜齋)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고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 등과 교유하며 학문 연구에 힘썼다. 저서로 손재집(遜齋集)이 있다.

214)문수동(文殊洞):지리산(智異山) 길상봉(吉祥峯) 아래에 있는 동네 이름이다.

215)증(增):대본에는 ‘增’으로 되어 있는데, 황매천(黃梅泉) 및 관련인사(關聯人士) 문묵췌편(文墨萃編)에는 ‘璔’으로 되어 있고, 장수황씨세보(長水黃氏世譜)에는 ‘垠’으로 되어 있다.

216)하는 바이다:황매천(黃梅泉) 및 관련인사(關聯人士) 문묵췌편(文墨萃編)에는 이 구절 뒤로 “광무 5년 신축년 모월 모일에 손자 현은 삼가 쓴다.[光武五年辛丑某月日孫男玹謹記]”라는 구절이 더 있다.

217)이 풍헌전(李風憲傳):안병렬(安秉烈)은 논문 黃梅泉의 小說硏究 (漢文學論集 第二輯, 檀國大學校 漢文學會, 1984)에서 “전(傳) 역시 성격상 ‘소설’의 범주 속에 넣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윤경희(尹景喜)는 黃玹의 傳 硏究 (어문논집 35, 고려대 국어국문학연구회, 1996)에서 “황현의 전(傳)을 소설의 단계에까지 이른 문학작품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리이다.”라고 전제하면서 소설의 본질은 허구(虛構)임에 반해 황현의 전은 허구보다는 역사적 사실성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리고 윤경희는 위 논문에서, “황현의 전(傳)들은 대부분 유교의 규범적 가치에 부합되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충효(忠孝)나 인의(仁義) 등의 윤리 의식으로 세상을 감계시키려는 매천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218)풍헌(風憲):조선 시대 지방 수령의 자문과 보좌를 위해 향반(鄕班)들이 조직한 기구가 향청(鄕廳)인데, 풍헌은 그 안에서 각 면(面)의 수세(收稅), 차역(差役), 금령(禁令), 권농(勸農), 교화(敎化) 등의 행정 실무를 주관하던 직임이다.

219)향정(鄕正):향청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임원의 하나이다.

220)만산(萬山):산 이름이다.

221)오늘날……뿐이다:이 구절과 위의 ‘반평생을 굶주렸으니, 악한 생각이 싹트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는 구절에 대해, 윤경희의 黃玹의 傳 硏究에서는, 지방관의 학정과 가렴주구의 착취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민생의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았다.

222)한룡(韓龍)은……되자:윤경희는 또 黃玹의 傳 硏究 (어문논집 35, 고려대 국어국문학연구회, 1996)에서 “황현의 전에는 인물 제시에 있어서 관향(貫鄕)을 반드시 밝히고 시간을 표현함에는 되도록 구체적 시간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사실성에 입각하려는 의도는 매천의 투철한 역사 의식에서 비롯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223)표훈사(表訓寺):지금의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사찰이다.

224)보현사(普賢寺):지금의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의 묘향산에 있는 사찰이다.

225)천우현(千禹鉉)의 일을 기록함:이 글의 서술 의의에 대해 정양완(鄭良婉)은 “운현궁의 겸인(傔人) 출신이라 예우와 존경을 받지 못한 천우현 같은 사람도 사대부(士大夫)다운 죽음의 길을 택하는데, 온갖 혜택을 누릴 대로 다 누리고도 행실은 실천하지 못하는 시위소찬의 사대부들을 꾸짖으면서 사대부들의 본심(本心)에의 복귀를 촉구하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양완, 散文을 통해서 본 梅泉의 文學精神, 震檀學報 61집, 1986

226)사립 호양학교(壺陽學校):이 학교는 매천이 1907년(순종1)에 발기하여 1908년 8월에 개교하게 되는데, 의연금 720원으로 세워진 호남에서는 최초의 신문화학교로 구례 광의면(廣義面) 지천리(芝川里) 하동(下洞)에 설립되었다. 황수정, 梅泉詩의 이해를 위한 傳記 硏究, 고시가연구 제10집, 한국고시가문학회, 2002 그리고 호양학교 설립 시기와 개교 과정 및 이후의 운영에 대한 내용이나 호양학교 설립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서는 김항구(金項勼)의 黃玹의 新學問 受容과 ‘壺陽學校’ 설립(文化史學 21호, 2004)을 참조할 수 있다.

227)소(疏):일반적으로는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데, 여기서는 상류층 인사들에게 의연금 모금을 호소하기 위해 배포한 글이다.

228)호양학교를……하겠습니다:‘간두진보(竿頭進步)’는 원래 전등록(傳燈錄)에 “백 척의 장대 끝에서 한 걸음을 더 걸어야만 시방 세계에 완전한 몸이 될 수 있다.[百尺竿頭進步 十方世界是全身]”라고 한 말에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학교를 세우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229)팔난삼재(八難三災):팔난은 여덟 가지 어려움인 배고픔[飢], 목마름[渴], 추위[寒], 더위[暑], 물[水], 불[火], 칼[刀], 전쟁[兵]이고, 삼재는 수재(水災), 화재(火災), 풍재(風災)인데, 세상에서 겪게 되는 온갖 고난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230)훌륭한……싶다면:대본에는 ‘如欲重生之遺種’으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重’을 ‘衆’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31)진주(眞珠)……보답:남해(南海)의 바다 밑에 사는 인어[鮫人]가 물속에서 나와 어떤 사람의 집에 기숙하다가 떠날 때가 되자, 보살펴 준 은혜를 갚고자 집주인에게 그릇 한 개를 달라고 청한 다음, 진주 눈물을 흘려 그릇에다 진주를 가득 채워 놓고 떠났다 한다. 夢求 卷上 淵客泣珠 여기에서는 인재를 육성하는 일에 성금을 내놓는다면 학생들이 나중에 그 은혜에 더 큰 보답을 할 것이라는 말이다.

232)동한(東漢)의……있고:주준(廚俊)이란 후한(後漢) 때의 팔주(八廚)와 팔준(八俊)을 말한다. 팔주는 재물을 희사하여 사람들의 위급함을 구해 준 것으로 유명한 도상(度尙), 장막(張邈), 왕고(王考), 유유(劉儒), 호모반(胡母班),진주(秦周), 번향(蕃嚮), 왕장(王章)을 말하고, 팔준이란 동시대에 재능과 명망이 뛰어났던 이응(李膺), 순욱(荀翌), 두밀(杜密), 왕창(王暢), 유우(劉祐), 위랑(魏朗), 조전(趙典), 주우(朱㝢)를 말한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序 여기서는 후한 때의 명사들이 후원해 주는 인사들의 도움으로 대성했음을 상기시켜 상류층으로 하여금 의연금을 내도록 종용한 것이다.

233)봉성관(鳳城館):구례 읍성(邑城) 안에 전패(殿牌)를 봉안했던 객사(客舍) 건물의 이름이다. 전패는 지방 객사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 자를 새겨 세워 놓은 목패(木牌)를 말하는데, 공무로 내려가 그곳에 묵는 관원은 반드시 그 앞에서 배례(拜禮)를 하였고, 고을 수령도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거기에 전배(展拜)를 하였다.

234)천자(天子)는……서리고:천자는 대궐에 있지만 만리를 내다보는 안목이 있기에 구례가 강호(江湖) 밖에 멀리 있는 지방이라 해도 이곳 전패를 모셔 둔 객관의 뜰에는 천자의 위엄이 서려 있다는 말이다. 이 봉성관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가 세워져 있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235)남면(南面)을……마련하니:봉성관을 새로 중수한 뒤에 남면하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세운 것을 두고 한 말이다.

236)주(周)나라……장소였다:주례(周禮) 태재(大宰)에 보면 “정월 초하루에 도성과 지방에 법령을 게시하여 만민들이 보게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도성에는 궁문 밖의 높은 누대에 게시하고 지방은 객관의 높은 곳에 게시한 것으로 보인다.

237)고을마다……하며:고을마다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행할 때 모두들 이 객관에 모여 행하는 것을 당연시한다는 말이다.

238)사방의……곳이다:공무로 지방에 출장 가는 관원은 모두 이 객관에 머물 수 있도록 법전에 규정되어 있다.

239)근래에……모셨다:1897년(광무1) 10월 12일에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올리고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모든 칭호나 명호가 바뀔 때 ‘전패(殿牌)’라는 명칭도 ‘궐자패(闕字牌)’ 또는 ‘궐패(闕牌)’로 개칭된 것을 말한다.

240)위의(威儀)가……있겠는가:객관에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가 모셔져 있기는 하지만 임금이 사는 대궐과 격이 똑같을 수는 없으므로, 그 객사의 문을 응문(應門)과 고문(皐門)으로 칭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중국 황제의 궁궐 문은 고문(皐門), 고문(庫門), 치문(雉門), 응문(應門), 노문(路門)의 순으로 되어 있다.

241)체례(體例)가……듯하다:이 객관은 궁궐과 비교해서는 격이 낮지만 그래도 일반 누관(樓觀)과는 달라서 누관이 갖추지 못하는 좌무(左廡)와 우무(右廡)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242)봉성(鳳城):구례의 옛 이름이다.

243)진산(鎭山)은……흘러왔고:구례의 지리산은 멀리 백두대간(白頭大幹)이 흘러왔다고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칭하는데, 이를 말한 것이다.

244)호남을……같다:전라도를 얼굴이라고 가정했을 때 구례는 얼굴 한 가운데 검은 점이 있는 것처럼 호남의 중앙에 위치에 있다는 말이다.

245)지역이……같고:북송(北宋)의 구양수(歐陽脩)가 저주 지사(滁州知事)로 있을 때, 저주가 강호를 끼고 있는 절경인 데다 정사가 한가로웠으므로 취옹정(醉翁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백성과 함께 즐기며 취옹정기(醉翁亭記)를 지었던 것처럼 구례라는 지역도 그와 비슷하다는 말이다. 唐宋八家文

246)습속이……많다:소남(邵南)은 당나라 때 안풍(安豐)에 은거하였던 동소남(董邵南)을 말한다.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면서 주경야독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韓昌黎文集 卷2 古詩 嗟哉董生行 이곳 구례에는 동소남처럼 은거하며 주경야독하는 순후한 인물이 많다는 말이다.

247)눈……여겼고:봉성관이 중수되기 전에는 차마 눈을 뜨고 의식을 행할 수 없을 정도로 건물이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는 말이다.

248)군수……많았다:충남 금산의 삼남공원에 있는 박항래공행적비에 의하면, 박항래(朴恒來, 1853〜1933)는 26세 때인 1879년(고종16)에 무과에 급제하여 1885년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가자되었고, 이후 전주 영장(全州營將), 나주 영장(羅州營將), 대구 영장(大邱營將), 총어영 기사장(摠禦營騎士將), 내금위장(內禁衛將),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등을 거쳤다. 여기서는 그 동안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치적이 많았다는 말이다.

249)범이……봉해졌고:범이 날아 고기를 먹듯 용맹했다는 것은, 후한(後漢) 때 한 관상가(觀相家)가 반초(班超)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제비의 턱에 범의 머리라 날아서 고기를 먹는 상이니, 이는 곧 만리후에 봉해질 상이다.[燕頷虎頭 飛而食肉 此萬里侯相也]”라고 했다는 데에서 온 말이다. 반초는 그의 말대로 서역(西域)의 50여 나라를 평정하여 큰 공훈을 세워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고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47 班梁列傳 여기서는 박항래가 반초처럼 무관으로서 용맹을 떨쳤다는 말이다. 박항래가 후(侯)에 봉해졌다는 말은 무관으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반열에 오르고 수령으로 제수된 것을 말하는 듯하다. 충남 금산의 삼남공원에 있는 박항래공행적비에 의하면, 그가 수령으로 처음 부임한 곳이 바로 구례이고, 부임한 해는 1897년 12월이다.

250)소……배웠다:자유(子游)가 무성(武城) 고을의 수령이 되었을 때 그 고을에서 예악을 가르쳐서 사람들이 모두 현악(弦樂)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공자가 무성에 가서 그 소리를 듣고는 흐뭇해서 농담 삼아 말하기를,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割鷄焉用牛刀]”라고 하였다. 論語 陽貨 자유가 군자의 도를 배워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잘 다스렸듯이 박항래 또한 정사를 잘 행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251)드디어……말하기에:군수가 봉성관이 쇠락하여 무너지려 하는 것을 살펴보고 고을 사람들에게 자문해 보니 임금의 전패를 모신 곳이라 이대로 무너지도록 둘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일은 소홀히 할 수 없다 말하기에’라는 구절은, 대본에는 ‘是孰可忍’으로 되어 있는데, 의미가 통하지 않아 ‘忍’을 ‘忽’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252)공사를……갖추었다:공수반(公輸班)은 춘추 시대의 이름난 장인(匠人)이고, 수(倕)는 요(堯) 임금 때의 뛰어난 장인이다. 여기서는 군수가 봉성관을 중수하면서 장인과 같은 안목으로 공사를 잘 감독하였다는 말이다.

253)궁궐의……하였고:‘다지기를 타앙타앙 하고 깎아 내길 사악사악 하였다’는 것은 시경 면(綿)에 나오는 구절로, 주(周)나라 고공단보(古公亶父)가 기주(岐周)로 천도하여 궁궐을 짓는 대목이다. 여기서는 궁궐은 아니지만 임금의 상징인 전패를 모시는 곳이기에 궁궐의 제도보다는 소략하게 하되 성의를 다해 중수하였다는 말이다.

254)건물을……다하였다:‘우소소 미초초(羽翛翛尾譙譙)’는 시경 치효(鴟鴞)에 나오는 대목인데, 치효에는 ‘우초초 미소소(羽譙譙尾翛翛)’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건물을 중수하는 데에 열성과 노력을 다했음을 말한 것이다.

255)남쪽으로……있다:매천 자신이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호남(湖南) 구례의 산속에 은거하며 뜻을 지키고 있다는 말이다. 동산(東山)은 절강성(浙江省) 상우현(上虞縣) 동남쪽에 위치한 산인데, 진(晉)나라 때 사안(謝安)이 이곳에 은거하였으므로 보통 은거의 뜻으로 쓰인다.

256)술병을……마시고:고양(高陽)의 술이란 초한(楚漢) 때의 역이기(酈食其)가 패공(沛公)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고양의 술꾼[高陽酒徒]’이라고 말했던 데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97 酈生陸賈列傳 여기서는 매천 자신이 술을 좋아하고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257)약을……들었다:공자(孔子)의 제자 복자천(宓子賤)은 현덕이 있었으므로 공자에게 군자다운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선보(單父)라는 고을을 다스릴 때, 항상 거문고만 타고 당(堂) 아래를 내려가지 않았는데도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呂氏春秋 論 卷21 여기서는 구례 군수 박항래가 현덕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소리를 매천이 들었다는 말이다.

258)내……없었고:심주(沈周)는 명(明)나라 때의 은자(隱者)로 호는 석전(石田)이다. 시(詩)․서(書)․화(畫)에 모두 뛰어나서 명대(明代) 사가(四家)에 꼽히는 인물이다. 한번은 그가 살고 있는 고을의 군수가 자기 집의 담벽에 그림을 그릴 화공(畫工)을 징발하게 되었는데, 심주를 미워한 마을 사람이 그의 이름을 부역자의 명단에 넣어 버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부역을 나가게 되자, 어떤 사람이 교유하는 귀족에게 부탁하여 부역을 면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하였다. 그때 심주가 말하기를, “가서 부역하는 것은 도리이지만 귀족에게 부탁하는 것은 욕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가서 끝까지 부역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한다. 明史 卷298 隱逸列傳 沈周 여기서는 매천이 힘이 약하여 봉성관을 중수하는 부역에 나가 도와줄 수 없었다는 말이다.

259)집에……어려웠다:노숙(魯肅)은 삼국 시대 오(吳)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경(子敬)이다. 집이 부유하여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는데, 그의 집에는 각기 쌀 3천 섬이 저장되어 있는 창고가 두 개나 있었다고 한다. 三國志 卷54 吳書 周瑜傳 여기서는 매천이 양식도 없는 처지여서 중수 비용에 보탤 성금도 낼 수 없었다는 말이다.

260)학……어딘가:열선전(列仙傳) 권상(卷上) 왕자교(王子喬)에 보면,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인 교(喬)가 신선이 되어 구산(緱山)에서 백학(白鶴)을 타고 피리를 불며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방호산(方壺山)은 발해(渤海) 동쪽의 신선이 산다는 섬에 있는 산으로 일명 방장(方丈)이라고도 한다. 列子 湯問 여기서는 봉성관에서 동쪽을 바라다보면 신선이 살고 있을 듯한 신령한 산이 보인다는 말인데, 신선과 산은 임금과 대궐을 비유하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261)숭산(嵩山)의……듯하여라:한 무제(漢武帝)가 숭산에 올랐는데, 신하들이 말하기를, “산이 만세를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라고 하였다. 漢書 卷6 武帝紀 숭산이 한 무제에게 축수의 뜻으로 만세를 불렀듯이 여기서도 그런 만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는 말이다.

262)순자강(鶉子江):섬진강의 별칭이다.

263)제성(帝星)이……빛나나니:자극(紫極)은 제성이 있는 하늘을 말한다. 제성은 북극성(北極星)을 말하며, 여기에서 제성이 찬란히 빛난다는 말은 임금의 은택이 크게 미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264)이로……놓았고: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주(紂)를 쳐서 전쟁을 끝낸 뒤에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전쟁에 쓰던 말은 화산(華山)의 남쪽 기슭으로 돌려보내고 소는 도림(桃林)의 들에 풀어 놓았다고 한다. 書經 武成 여기에서는 우리나라가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로는 더 이상 전쟁이 없이 태평이 이어져 왔음을 말한 것이다.

265) 강희(康熙)……지었는데:봉성관은 강희 14년인 1675년(숙종1)에 처음 건립되었다.

266)궁궐의……되고:봉래(蓬萊)는 발해 동쪽의 신선이 산다는 섬에 있는 산으로, 봉래궁(蓬萊宮), 봉래전(蓬萊殿)이라 하여 임금이 사는 궁궐을 칭할 때에도 쓰인다. 列子 湯問 여기서는 봉성관이 중수된 것이 임금의 은덕이므로 임금을 생각하고 꿈도 꾸게 된다는 말이다.

267)길주(吉州)에서 영숙(永叔)이 태어났기에:영숙은 북송 때의 문신인 구양수(歐陽脩)의 자인데, 그가 태어난 곳이 길주이다.

268)영천(潁川)에서……청했기에:후한(後漢) 때 구순(寇恂)이 영천에서 선정을 베풀고 기한이 차서 떠나게 되자, 백성이 광무제(光武帝)의 행차를 가로막고 말하기를, “원컨대 폐하께서 구군(寇君)을 1년만 더 빌려 주소서.”라고 했다고 한다. 後漢書 卷16 寇恂列傳

269)소천시집(小川詩集) 서(序):소천은 왕사찬(王師瓚, 1846〜1912)의 호이다. 본관은 개성(開城)이고 자는 찬지(瓚之)이며 매천의 스승인 왕석보(王錫輔)의 아들이다. 이 글의 제목이 국역 황매천(黃梅泉) 및 관련인사 문묵췌편(文墨萃編)에는 제소천시권후(題小川詩卷後)로 되어 있고, 광무 10년 병오년(1906) 11월 11일, 즉 매천의 나이 51세 때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270)고변(高騈):당나라 유주(幽州) 사람이고 자는 천리(千里)인데, 신선에 관련된 시나 기발한 표현의 시를 많이 남겼다.

271)잠삼(岑參):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강릉(江陵) 사람이고, 고적(高適)과 함께 변새 시인(邊塞詩人)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272)전기(錢起):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오흥(吳興) 사람이고 자는 중문(仲文)이다. 자연을 제재로 한 청신(淸新)한 시를 많이 썼고 특히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뛰어났다.

273)유우석(劉禹錫):772〜842.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자는 몽득(夢得)이다. 풍자시와 회고시를 많이 썼으며, 시풍은 청신하고 유창하였다.

274)황정견(黃庭堅)과……받아들이니:황정견(1045〜1105)은 북송 때의 시인으로 자는 노직(魯直)이고 호는 산곡도인(山谷道人)이다. 강서시파(江西詩派)의 대표 시인이고, 진사도(陳師道, 1053〜1101)는 북송 때의 시인으로 자는 무기(無己)이고 호는 후산(後山)이다. 또한 강서시파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수레 끌채에 매인 망아지 같다는 것은 어떤 것에 속박을 당하여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인데, 요즘 사람들은 황정견이나 진사도의 시에 매몰되어 그 아류를 자처하고 다른 뛰어난 시들은 아예 보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275)이의산(李義山):의산은 당나라 때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자이다. 두목(杜牧)과 함께 만당(晩唐)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276)원화(元和)와……시풍(詩風):원화는 당 헌종(唐憲宗)의 연호이고 장경(長慶)은 당 목종(唐穆宗)의 연호이다. 이 연간의 시인으로는 원진(元稹)과 백거이(白居易)가 대표적이므로 이들의 시체를 원백체(元白體)라 칭한다. 이들은 ‘신악부(新樂府)’ 운동을 제창하였고, 평이하고 유창한 시풍을 지녔다. 이들의 시는 백성의 고통과 현실 정치를 반영한 풍자시가 많다.

277)소자첨(蘇子瞻):자첨은 소식(蘇軾, 1037〜1101)의 자이다. 북송 때의 문장가로 사천성(四川省) 미산(眉山) 사람이다.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며, 이름은 식(軾)이다.

278)유장경(劉長卿):중당(中唐) 때의 시인으로 자는 문방(文房)이다. 수주 자사(隨州刺史)를 지내어 유 수주(劉隨州)라고도 불리며, 오언시에 능하여 ‘오언장성(五言長城)’으로도 불린다.

279)윤곡(尹穀):송(宋)나라 장사(長沙) 사람으로 몽고병(蒙古兵)이 쳐들어와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분신(焚身) 자결하였다. 宋史 卷450 尹穀列傳

280)약……읊었던가:매천은 한일합병 소식을 듣고서 1910년 8월 6일 절명시 4수를 남기고는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는데, 이를 말한 것이다.

281) 학이태 형지(郝爾泰衡之):학이태라는 인물에 대한 사적을 찾지 못하였고 단지 저서로 열하칠현유기(熱河七縣游記)가 있음을 확인하였을 뿐이다. 中國邊疆行紀調査記報告書等邊務資料叢書, 蝠地書院出版有限公司, 2009, 10冊

282)왕성순(王性淳):1868〜1923. 본관은 개성이고 자는 원초(原初)이며, 호는 우아당(尤雅堂)․경암(敬菴)이다.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를 간행하였다.

283)박호산(朴瓠山):호산은 박문호(朴文鎬, 1846〜1918)의 호이다. 호산(壺山), 풍산(楓山)이라고도 하며, 자는 경모(景模)이다.

284)송태회(宋泰會):1872〜1941.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자는 평숙(平叔)이며, 호는 염재(念齋)․염생(恬生)이다. 전남 화순(和順) 출생이다.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재직하였고 고창군(高敞郡)에 오산고보(吾山高普)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민족 사상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285)방호산(方壺山):발해(渤海) 동쪽의 신선이 산다는 섬에 있는 산으로 일명 방장(方丈)이라고도 한다.

286)매천 선생 찬(梅泉先生贊):황매천(黃梅泉) 및 관련인사(關聯人士) 문묵췌편(文墨萃編) 영인(影印) 원문(原文)에는 ‘梅泉先生眞贊’으로 되어 있다.

287)윤종균(尹鍾均):1861〜1941. 자는 태경(泰卿)이고 호는 유당(酉堂)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전남 순천(順天) 출신이다. 매천(梅泉)에게 율시를 배웠고 난국음사(蘭菊吟社)라는 시사(詩社)를 만들었으며, 묘원(卯園) 허규(許奎)와 함께 매천시파(梅泉詩派)의 좌장 역할을 하였다. 저서로 유당시집(酉堂詩集)이 있다.

288)문사(文詞)가……웅장하였고:사룡(士龍)은 서진(西晉) 시대의 문장가인 육운(陸雲)의 자이다. 그는 오군(吳郡) 오현(吳縣) 사람으로 형 육기(陸機)와 함께 낙양(洛陽)으로 들어가 문명을 떨쳤으므로 ‘이륙(二陸)’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晉書 卷54 陸機列傳․陸雲列傳 여기서는 매천이 24세에 서울에 올라가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 등과 교유하며 문명을 떨친 것을 육운과 비교하여 말한 것이다.

289)말세(末世)라……같았다:표성(表聖)은 당나라 말기 시인 사공도(司空圖, 837908)의 자이다. 그는 산서성(山西省) 하중(河中) 우향(虞鄕) 사람이다. 주전충(朱全忠)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고 908년 당 애제(唐哀帝)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식음(食飮)을 전폐하다가 죽을 만큼 절개가 곧았다. 시 또한 기품이 있어 당나라 말기에 으뜸으로 꼽혔다. 舊唐書 卷190下 文苑列傳下 司空圖 여기서는 매천의 기품이 사공도처럼 대단하였음을 기린 것이다.

290)맑게……지녔네:후한(後漢) 때의 황헌(黃憲)은 자가 숙도(叔度)인데, 곽태(郭泰)가 그를 평가하기를, “숙도는 너무나 드넓어 마치 천 이랑의 물결과 같은 사람이라, 맑게 하려 해도 맑아지지 않고 흐리게 하려 해도 흐려지지 않으니, 참으로 헤아릴 수 없다.[叔度汪汪如千頃陂 澄之不淸 淆之不濁 不可量也]”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83 黃憲列傳 여기서는 매천의 도량이 매우 넓고 컸음을 말한 것이다.

291)유약한……행실이었네:맹자가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백세(百世)의 스승이니,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가 이런 분이다. 백이의 풍도를 들은 사람들은 욕심 많은 자들이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들이 뜻을 세우게 되며, 유하혜의 풍도를 들은 사람들은 각박하던 자들이 후덕해지고 속이 좁던 자들이 관대해지게 된다.”라고 하였다. 孟子 萬章下여기서는 매천의 행실이 백세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말이다.

1)김창강(金滄江):창강은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의 호이다. 본관은 화개(花開)이고 자는 우림(于霖)이며 당호는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이다. 매천, 이건창(李建昌)과 더불어 구한말 삼대 문장가로 꼽힌다. 저서로는 한국소사(韓國小史)한사경(韓史綮)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등이 있고, 시문집으로 소호당집(韶濩堂集)이 있다.

2)근간에……간행하고는:1911년 매천의 동생 황원(黃瑗, 1870〜1944)이 중국 남통(南通)의 김택영에게 유문(遺文)을 편정해 줄 것을 부탁하자, 김택영이 7권 3책으로 편정한 뒤에 상해(上海)에서 연활자(鉛活字)로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매천집(梅泉集) 원집(原集)의 초간본이다. 梅泉集 解題, 韓國文集叢刊 348輯

3)암현(巖顯):매천의 맏아들 이름이다. 자는 원필(元弼)이고, 호는 백초(白樵)이다.

4)국운(國運)이……열어:김택영은 1905년(광무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해 8월에 인천항을 통해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남통(南通)에서 장건(張謇, 1853〜1926)의 주선으로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책을 교열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소호 금천씨(小昊金天氏)는 중국 상고 시대 전설상의 임금인 황제(黃帝)의 아들 현효(玄囂)를 말한다.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가 소호 금천씨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는데, 황개기(黃開基)는 김택영이 중국에 망명하였으므로 그 설과 관련지어 이렇게 말한 것이다.

5)매천의……후손인데:중국에서는 황씨(黃氏)의 연원을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에 두고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6)엿처럼……지켰으니:매천이 한일합병 소식을 듣고 아편을 술에 타서 마시고 자결한 일을 말한다.

7)낭산(狼山):남통시(南通市) 남쪽 교외에 있는 산 이름이다.

8)송옥(宋玉)의 초혼(招魂):송옥은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제자로, 굴원의 추방을 안타깝게 여겨 구변(九辯) 등을 지은 인물이다. 초혼은 굴원의 넋을 부르는 내용으로 초사(楚辭)에 실려 있다.

9)남통(南通):중국 양자강(揚子江) 하류에 있는 도시 이름으로 현 강소성(江蘇省) 남통시이다.

10)휴령(休寧):중국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지명으로 현 황산시(黃山市) 휴령현이다.

11)황개기(黃開基):1870∼1917. 자는 근석(根石)이고 호는 노산(鲁山) 혹은 몽담(夢曇)이다. 문집으로 몽담유초(夢曇遗草)가 있다.

12)이건방(李建芳):1861∼1939.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이건창(李建昌)의 종제(從弟)이다. 자는 춘세(春世)이며, 호는 난곡(蘭谷)이다.

13)원(瑗):황원(1870∼1944)은 매천의 막냇동생이다. 자는 계방(季方)이며 호는 석전(石田)이다.

14)어쩌나……무너졌었네:19108월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한 것을 말한다.

15)세족(世族)들이……쳤지: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세족들이 일본에 빌붙어 순종함으로써 나라를 넘겨 주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세족이란 을사오적(乙巳五賊)을 가리킨다.

16)오직……절명하였네:매천은 한일합병 소식을 들은 뒤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는 다량의 아편을 술에 타서 마시고 자결하였는데, 이를 말한다.

17)모년 모월 모일:매천의 1주기는 음력으로는 1911년 8월 7일이며 양력으로는 1911년 9월 10일이다.

18)이건승(李建昇):1858〜?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보경(保卿)이며 호는 경재(耕齋)이다. 이건창(李建昌)의 동생이다.

19)기자(箕子)와……있으리:기자는 은(殷)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숙부(叔父)로 주왕의 폭정을 간언하다 유폐(幽閉)되었는데, 주 무왕(周武王)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풀어 주자, 주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은나라 유민(遺民)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주하였다. 도잠(陶潛)은 진(晉)나라 때의 은사(隱士)로, 팽택 영(彭澤令)이 되었다가 석 달 만에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와서는 평생 은거하며 살았다. 여기서는 기자와 도잠처럼 목숨을 바치지 않고도 자신의 뜻을 지킬 방법이 있는데, 어찌하여 굳이 목숨을 버렸는지 혹자들은 비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20)숭산(嵩山)엔……걸리었는데:한 무제(漢武帝)가 숭산에 오르자, 신하들이 말하기를, “산이 임금을 위해 만세를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였다. 漢書 卷6 武帝紀 여기에서 숭산이 다른 임금을 위해 만세를 부른다는 것은 나라가 망하여 다른 임금을 위해 축수(祝壽)하는 지경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문밖에 붉은 해가 걸렸다는 것은 일장기(日章旗)를 비유하여 한 말인 듯하다.

21)양(梁)나라……하였네:최씨(崔氏)와 노씨(盧氏)는 육조(六朝) 양나라․진(陳)나라 때부터 당(唐)나라 때까지 관동(關東)의 문벌로 권력을 누리며 번성한 두 집안을 말한다. 舊唐書 卷61 竇威列傳 竇惲 여기서는 고종 때 이들처럼 권력을 장악하여 부정부패를 일삼은 안동 김씨(安東金氏), 여흥 민씨(驪興閔氏) 등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22)술에다가……마셨네:매천이 음독자살한 것을 말한다.

23)우리에게……같아라:상종(霜鐘)이란 중국 풍산(豐山)에 있는 천연의 옛 종(鐘)을 말하는데, 당(唐)나라 교담(喬潭)의 상종부(霜鐘賦)에 보면, 가을이 되어 하늘이 맑게 개고 선선한 바람이 불면 상종은 치지 않아도 저절로 운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조선의 선비로서 충절을 보여 준 매천의 고결한 정신이 마치 맑은 가을 하늘에 울리는 상종처럼 청정하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24)주역(周易)에서……법이니:주역 예괘(豫卦) 육오(六五)에, “정하되 병이 있으나 항상 앓고 죽지 않는다.[貞疾恒不死]”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임금의 자리에 거하여 신하의 제재를 받고 있으나 끝까지 그 지위는 잃지 않는다는 뜻으로, 비유하면 항상 고질의 병을 앓고 있기는 해도 죽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25)북쪽에는……있고:1910년(융희4) 4월에 채응언(蔡應彦)이 이끄는 의병이 함경도 안변 마전동의 순사주재소를 공격한 일을 두고 말한 것인지, 아니면 한일합병 조약 직전에 청진, 함흥 등에 주둔한 일본군을 야밤에 서울로 이동시킨 일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26)청성(靑城)의 변(變):김소영은 이에 대해 “여기서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합방되어 나라가 망한 것을 지칭한다. 청성은 송(宋)의 제천(祭天) 재궁(齋宮)의 명칭으로, 송조(宋朝)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은 금(金)에 의하여, 금의 말제(末帝)는 원(元)에 의하여 모두 청성에서 포로가 되었고 나라가 망했다. 따라서 송․금의 멸망 사건을 ‘청성지화(靑城之禍)’라 칭한다.”라고 하였다. 김소영, 매천 황현의 산문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30쪽

27)경재(耕齋):이건승(李建昇)의 호이다. 265쪽 주18 참조.

28)영재(寧齋):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봉조(鳳朝) 혹은 봉조(鳳藻)이다. 김택영(金澤榮)에 의해 여한십가(麗韓十家) 중에 최후의 인물로 평가받을 만큼 문장이 뛰어났고, 강직한 성품으로 충간(忠諫)을 하다가 여러 차례 유배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다.

29)농암(農巖):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중화(仲和)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농암집(農巖集)이 있다.

30)김상국(金祥國):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창산(滄山)이다. 매천의 문인으로, 매천 사후에 매천선생묘지명(梅泉先生墓誌銘)을 지었다.

31)형의 선장(先丈) 원고:이건방의 생부는 이상안(李象晏)이고 양부는 이상기(李象夔)인데 둘 다 문집이 확인되지 않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32)큰 것은……격:‘시공지찰(緦功之察)’은 원래 중한 복제(服制)를 제쳐 놓고 가벼운 복인 시마(緦麻)와 소공(小功)만을 따진다는 말인데, 일반적으로 사소한 일을 지나치게 따지는 것을 비유할 때 쓰인다.

33)상아(祥兒):매천집 권6의 암현의 자설[字巖顯說]에 매천의 맏아들 황암현(黃巖顯)의 아명을 연아(鍊兒)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상아(祥兒)는 매천의 둘째 아들 황위현(黃渭顯)의 아명일 것으로 판단된다.

34)동함체(東咸體):운목(韻目)에서 평성(平聲)은 ‘동(東)’에서 시작하여 ‘함(咸)’으로 끝나는데, 이 평성 시운(詩韻)을 전부 넣어 짓는 형식을 말하는 것인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 매천집에서는 이런 각운(脚韻)의 시를 찾지 못하였다. 혹 ‘동함(東咸)’의 ‘함(咸)’ 자를 ‘파(坡)’ 자의 오자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긴다. 매천이 소식(蘇軾)의 시를 차운한 대표적인 시로는 권3의 이산이 동파의 취성당설 시에 화운하여 부쳤기에 답시를 쓰다[酬二山和東坡聚星堂雪詩韻見寄]가 있다. 이산(二山)은 유제양(柳濟陽)의 호이다.

35)원진(元稹)과……있겠습니까:당(唐)나라 때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낙양(洛陽)의 향산(香山)에 석루(石樓)를 지어 놓고 원진, 유우석(劉禹錫) 등과 자주 어울리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舊唐書 卷166 元稹白居易列傳 그리고 한(漢)나라 때 사람인 장후(蔣詡)는 벼슬에서 물러나 두릉(杜陵)에 은거하면서 대밭 아래에 세 갈래 오솔길을 만들어 놓고는, 항상 이 길을 절친한 친구인 양중(羊仲), 구중(求仲)과 거닐었다고 한다. 昭明文選 卷30 田南樹園激流植授 여기서는 원진과 백거이처럼 가까이 살면서 항상 만나고 양중, 구중과 함께했던 장후처럼 자주 이덕일과 만나 함께 정을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말이다.

36)송평숙(宋平叔):평숙은 송태회(宋泰會, 1872∼1941)의 자이다. 본관이 여산(礪山)이고, 호는 염재(念齋)․염생(恬生)이다. 전남 동복(同福) 출생으로,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재직하였고 고창군(高敞郡)에 오산고보(吾山高普)를 설립하여 민족 사상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나서 매천이 지은 제병화십절(題屛畫十絶)의 병풍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현재 염재송태회서첩(念齋宋泰會書帖)이 남아 있다.

37)적벽(赤壁):현재 전남 화순군(和順郡) 이서면(二西面) 창랑천(滄浪川) 일대의 절벽을 말한다. 적벽이라는 명칭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동복(同福)으로 귀양 온 최산두(崔山斗)가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붙였다고 한다. 송태회가 적벽 인근 동복 사평(沙坪)에 살고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38)안해사(安海史):해사는 안중섭(安重燮, 1808∼1883)의 호이다. 또 다른 호는 연상(蓮上)이다. 자는 순화(舜華)이고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곡성(谷城) 사람이다.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고 1880년(고종17)에 증광시 진사 3등으로 입격하였다. 문집으로는 연상집(蓮上集)이 있다.

39)동당시(東堂試)에……지났는데:매천이 29세 때인 1883년(고종20)에 보거과(保擧科) 초시(初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했으나 궐정시(闕庭試)에서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낙방한 것을 말한다. 梅泉集 解題, 韓國文集叢刊 348輯

40)조조(鼂錯)나……재주:조조는 전한(前漢) 때의 학자로 복생(伏生)에게 사사받았고 둔전책(屯田策) 등 각종 정책을 제시한 인물이며, 동중서(董仲舒)는 전한 무제(武帝) 때의 대학자로 유학이 한나라 정교(政敎)의 중심이 되게 하는 정책들을 입안했던 인물이다.

41)사문유취(事文類聚):송나라 축목(祝穆)이 편찬하고 원나라 부대용(富大用)과 축연(祝淵)이 증보한 유서(類書)이다. 고금의 천문, 지리, 문물, 제도, 시문 등을 유별로 수록하였다.

42)유원총보(類苑叢寶):인조 때 김육(金堉, 1580〜1658)이 편찬한 책으로 47권 30책이다. 사문유취운부군옥(韻府群玉) 등을 참고하여 편찬한 유서이다.

43)운파(雲坡):김정기(金禎基, 18831963)의 호이다. 자는 명우(明佑)이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전라북도 임실(任實) 사람이다. 저서로는 운파문집(雲坡文集)이 있다.

44)전경(全經)과 전사(全史):십삼경(十三經)과 이십삼사(二十三史)를 말한다.

45)단지……말입니까:김택영이 당시 중국 강소성 남통(南通)에 있었는데 거기서 보낸 편지가 10일 만에 도착하였으니 놀랍다는 말이다.

46)엄복(嚴復):1853~1921. 청말(淸末) 민국(民國) 초기의 사상가로, 자는 기도(幾道)이다. 청일전쟁(淸日戰爭) 이후 원강(原强) 등 개혁론을 주장하는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고, 토마스 헉슬리의 진화(進化)와 윤리(倫理), 몽테스키외의 법의(法意) 등 서양의 근대 사상을 소개하는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47)오여륜(吳汝綸):1840∼1903. 청말의 교육가이며 문장가로, 자는 설보(挈甫) 또는 설보(挈父)이고 안휘성(安徽省) 동성(桐城) 사람이다. 동성파(桐城派) 후기 작가로서 저서로 오여륜왕집(吳汝綸王集)이 있다.

48)지난번에……하셨는데:김택영이 중국에 망명하여 지은 조선의 편년체 사서인 한사경(韓史綮)을 말한다.

49)신임옥사(辛壬獄事):신축년(1721, 경종1)부터 임인년(1722) 사이에 일어났던 옥사로, 훗날 영조인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소론이 노론 사대신(四大臣) 등을 살육한 옥사이다.

50)현구기문(玄駒記聞):사도세자(思悼世子)의 출생과 죽음, 사도세자를 둘러싼 조정의 대립 등을 다룬 책으로, 정조(正祖) 때 박종겸(朴宗謙, 1744〜1799)이 지은 2권 2책의 필사본이다.

51)영재(寧齋)와 운양(雲養):영재는 이건창(李建昌)의 호이고, 운양은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호이다.

52) 건릉조(健陵朝):건릉은 정조(正祖)의 능호(陵號)이다.

53)김하재(金夏材)의 옥사(獄事):김하재(1745∼1784)는 본관이 광산(光山)이며 자는 양숙(養叔)이다. 1784년(정조8) 영희전(永禧殿) 고유제(告由祭)의 헌관으로 분향(焚香)을 한 후에 정조(正祖)의 실덕(失德)과 사림(士林)을 장살(杖殺)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쪽지를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재학(李在學)에게 주었다가 이 사실이 탄로 나서 대역부도 죄인(大逆不道罪人)으로 주살된 옥사를 말한다.

54)형이……누구누구입니까:김택영(金澤榮)이 고려와 조선의 문장가 9인을 선정하고 그들의 산문을 선별하여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라는 이름으로 정리한 것을 말한다. 그 뒤 1921년에 김택영의 제자 왕성순(王性淳, 1868〜1923)이 자기 스승의 문장까지 덧붙여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로 간행하였다. 구가는 김부식(金富軾), 이제현(李齊賢), 장유(張維), 이식(李植), 김창협(金昌協), 박지원(朴趾源), 홍석주(洪奭周), 김매순(金邁淳), 이건창(李建昌)이다.

55)추금(秋琴):강위(姜瑋, 1820~1884)의 호이다. 그의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중무(仲武)․위옥(葦玉)․요장(堯章)이다. 황현(黃玹),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과 더불어 한말(韓末) 사대(四大) 문장가의 한 사람이다.

56)열조시집(列朝詩集)과 명시종(明詩綜):열조시집은 명대(明代) 2천여 명의 시인의 시를 선집해 놓은 총 81권의 책으로, 청나라 전겸익(錢謙益, 1582〜1664)이 편찬하였다. 명시종은 청나라 주이준(朱彛尊, 1629〜1709)이 편찬한 명나라 시집으로 총 100권이다. 이 두 책에는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57)임백호(林白湖)……않겠습니까:매천 자신의 시가 중국에서 간행되어 통행된다면, 열조시집이나 명시종 같은 책에 임백호 등 제가(諸家)의 시가 우연히 들어가서 수백 년 동안 회자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백호는 조선 중기 때의 시인 임제(林悌, 1549~1587)의 호이다. 본관은 나주이고, 자는 자순(子順)이며, 대곡(大谷) 성운(成運)의 문인이다.

58)참서(參書) 이민응(李敏應):1876~1955.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경행(敬行)이며 호는 수춘(壽春)이다. 학부 참서(學部參書)를 지냈다.

59)어찌……않겠습니까:선친의 묘지와 매천 자신을 위한 전(傳) 모두를 써 주기를 바란다는 염원을 말한 것이다.

60)제 막냇동생:황원(黃瑗)을 말한다.

61)경재(耕齋):이건승(李建昇)의 호이다. 265쪽 주18 참조.

62)엄기도(嚴幾道):기도는 엄복(嚴復)의 자이다. 286쪽 주46 참조.

63)양임공(梁任公):임공은 양계초(梁啓超, 1873~1929)의 호이다. 또 다른 호로 음빙실주인(飮氷室主人)이 있다. 자는 탁여(卓如)이고, 광동성 신회(新會) 사람이다. 저서로 음빙실전집(飮氷室全集),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 등이 있다.

64)조자곡(趙紫谷):자곡은 조창준(趙昌駿, 1834〜1910)의 호이다. 본관은 옥천(玉川)이며, 자는 경언(景彦)이다. 이곡연집(二谷聯集)에 그의 문집이 실려 있다.

65)조카……것:이경(而慶)은 조영선(趙泳善, 1879〜1931)의 자이다. 호는 배헌(拜軒)이며 본관은 옥천이고 곡성(谷城) 사람이다. 저서로 배헌집(拜軒集)이 있다. 국역 황매천(黃梅泉) 및 관련인사(關聯人士) 문묵췌편(文墨萃編) 그는 1906년(광무10)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일으킨 의병 부대에 참여하여 싸우다가 최익현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는데, 여기에서 의기가 훌륭하다는 것은 바로 이 일을 말한다.

66)위당(韋堂)의……배출하였으니:위당은 곡성 사람 조장섭(趙章燮)의 호이다. 그의 조카인 두 명의 열사는 최익현과 함께 투옥되었던 조영선과 조우식(趙愚植)을 말한다. 김소영, 매천 황현의 산문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67)유군(柳君):당시 최익현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된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유해용(柳海瑢, 1884〜1938)을 말한다. 자는 덕용(德容)이고 호는 강재(剛齋)이며 본관은 고흥이다. 김소영, 매천 황현의 산문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68)12인의……어떻겠습니까:매천은 이렇게 최익현의 의병 활동을 서술한 여러 기록들을 수집하여, 동의록(同義錄)을 작성하고 이를 다시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반영하여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역주 매천야록 하, 문학과 지성사, 2005, 323∼325쪽

69)조이경(趙而慶):이경은 조영선(趙泳善)의 자이다. 294쪽 주65 참조.

70)면암(勉菴)……계시니:최익현은 1906년(광무10) 윤4월에 의병을 일으켜 순창(淳昌)에서 왜병과 맞서 싸웠는데, 결국 패하여 동지 12인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임병찬(林炳瓚)과 함께 대마도로 압송되어 구금되었다.

71)문산(文山)이나……괜찮고:문산은 남송 때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의 호이다. 그는 남송이 멸망한 뒤에도 익왕(益王)을 황제로 받들고 끝까지 항전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북경(北京)의 감옥에서 3년간 갇혀 곤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 사형을 당하였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첩산(疊山)은 남송 때의 신하인 사방득(謝枋得, 1226~1289)의 호이다. 그 역시 나라가 망한 뒤 북경으로 끌려갔으나 끝까지 절의를 지키고자 단식하다가 굶어 죽었다. 宋史 卷425 謝枋得列傳 여기에서는 최익현이 문천상이나 사방득처럼 나라를 위해 절의를 지키다 이국에서 순국하여도 가치 있고 훌륭하다는 말이다.

72)운이……괜찮습니다:소 중랑(蘇中郞)은 한(漢)나라 무제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유폐되어 모진 고초를 겪은 뒤 19년 만에 돌아온 소무(蘇武)를 말한다. 漢書 卷54 蘇武傳 충선(忠宣)은 송나라 고종(高宗) 연간의 신하인 홍호(洪皓)의 시호이다. 그는 통문사(通問使)로 금나라에 사신 갔다가 유폐되어 냉산(冷山)에서 15년간 지낸 뒤에 귀국하였다. 宋史 卷373 洪皓列傳 여기에서는 최익현이 소무나 홍호처럼 고초를 겪다가 돌아와도 그 충의가 빛날 것이라는 말이다.

73)형의 숙부:조창준(趙昌駿)을 말한다.

74)면암(勉菴)의 장례(葬禮) 기일:면암 최익현은 1906년(광무10) 11월 17일에 대마도에서 순국하여 이듬해 4월 1일에 노성(魯城) 월오동면(月午洞面) 지경리(地境里) 무동산(舞童山)에 장사 지냈다. 勉菴集 附錄 卷4 年譜

75)이옥(而玉):이 편지를 받는 조영선(趙泳善)의 자가 이경(而慶)인 점으로 미루어 보면, 이옥은 그의 형제로 판단되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찾지 못하였다.

76)특히……않겠습니까:대본에는 ‘果能十分加意杏’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아 ‘杏’을 ‘否’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77)동의록(同義錄):최익현의 의병 활동을 서술한 책으로, 면암 최익현의 막하(幕下)로 참여했던 조영선(趙泳善)과 임현주(林顯周)의 자료를 토대로 매천이 작성한 책이다. 김소영은 이 글에 대해 “매천이 의병 활동 기록인 동의록 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라고 하면서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을 담고자 하는 매천의 정열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으로 제시하였다. 김소영, 매천 황현의 산문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155∼156쪽

78)경당(警堂):임현주(林顯周, 1858∼1934)의 호이다. 본관은 평택(平澤)이고 남원 출생이며, 자는 희서(希瑞)이다. 최익현의 문인으로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12의사(義士) 중에 한 사람이다. 봉기 후에 순창에서 싸우다가 최익현과 함께 체포된 뒤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여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 뒤 구례 문척면(文尺面) 오봉산(五峰山) 아래에 오봉정사(五鳳精舍)를 짓고 교육에 전념하였으며, 오봉정사 위에 ‘봉산사(鳳山祠)’를 세워 최익현과 주희(朱熹)를 배향하였다.

79)영당(影堂):임현주 등 면암 최익현의 제자들이 주도하여 세우려고 한 최익현의 영당으로 판단되는데, 임현주가 그 영당에 대한 글을 매천에게 지어 달라고 부탁한 듯하다. 변려체(騈儷體)라고 한 것을 보면 상량문(上梁文)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조이경(趙而慶)에게 보낸 정미년(1907, 융희1) 7월 18일자 편지의 상량문에 대한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80)둘째……하였습니다:매천의 둘째 아들은 황위현(黃渭顯)으로, 매천의 동생인 황련(黃璉)의 양자로 갔다. 추측건대, 매천이 둘째 아들네를 계속 돌보고 있다가 이때 양가(養家)와 함께 분가를 시킨 것으로 보인다.

81)선생:면암 최익현을 가리킨다.

82)상주(喪主)인……제군(諸君):최익현의 아들인 최영조(崔永祚)와 최영복(崔永福) 등을 가리킨다.

83)송우(松友):호(號)나 자(字)에 ‘송(松)’ 자가 들어가는 친구이거나 아니면 호나 자가 송우(松友)인 사람을 가리키는 듯한데, 누구인지는 찾지 못하였다. 기우만(奇宇萬)의 문집인 송사집(松沙集) 권10에 답족질송우(答族姪松友)라는 글이 있는 것이 확인되나 기백도(奇柏度)가 매천과 교유하였는지는 상고하지 못하였다.

84)안해사(安海史):해사는 안중섭(安重燮, 1808∼1883)의 호이다. 282쪽 주38 참조.

85)성급하게……저버렸으니:매천의 나이 29세 때인 1883년(고종20) 보거과(保擧科)의 궐정시(闕庭試)에서 낙방한 일을 말하는 것인 듯하다.

86)매장(梅丈):호(號)에 매(梅) 자가 들어가는 어른을 말하는 듯한데, 누구를 지칭하는지 찾지 못하였다.

87)왕길(王吉)……일화:전한(前漢) 때 왕길과 공우(貢禹), 소육(蕭育)과 주박(朱博)은 매우 절친한 사이였는데, 서로를 추천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갔기 때문에 당시 장안(長安)에서는 “소주가 인끈을 매자 왕공이 관을 썼다.[蕭朱結綬 王貢彈冠]”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漢書 卷78 蕭望之傳

88)유인수(柳仁叟):인수는 유인수(柳寅秀, 1860〜1927)의 자이다. 다른 이름은 병채(炳埰) 또는 병태(炳泰)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전남 곡성(谷城) 사람인데, 매천과는 20년 지기(知己)이다. 의병 이석용(李錫庸, 18781914)에게 군자금을 지원하였고, 의병의 거점 조직인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의 곡성 지역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89)자신의……보물:성리학(性理學)에서 말하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본성(本性)과 이에 대한 지향을 가리킨다.

90)종인(宗人) 재묵(在黙):황재묵의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전남 보성(寶城) 사람이다. 황매천(黃梅泉) 및 관련인사(關聯人士) 문묵췌편(文墨萃編)에 실려 있는 황재묵이 쓴 여왕수환권봉수박창현서(與王粹煥權鳳洙朴暢鉉書)의 말미에서 자신을 전일(前日)의 과명(科名)이 재묵이고 이름은 황간(黃柬)임을 밝히고 있다.

91)대곡(大谷):현 전남 보성군(寶城郡) 조성면(鳥城面) 대곡리(大谷里)를 말한다.

92)영숙(永叔) 선생:누구인지는 끝내 찾지 못하였으나, 황재묵(黃在黙)의 부친이거나 가까운 친척일 것으로 짐작된다. 영숙 선생이 환갑을 맞았으므로 매천이 일가로서 이를 축수하는 편지와 시를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93)찬……가니:유종원(柳宗元)의 강설(江雪) 시에 “사방 산엔 새들의 날갯짓도 끊어지고 모든 길엔 인적이 하나도 안 보이네. 조각배엔 도롱이 삿갓 쓴 노인 앉아 찬 강에 내리는 눈을 홀로 낚고 있네.[千山鳥飛絶 萬逕人蹤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라는 구절에서 온 것으로, 여기서는 작중 화자가 꿈속에 은자(隱者)를 찾아간다는 설정을 하여 이 시의 대상인 영숙 선생이 청고(淸高)한 기풍을 지녔음을 표현한 것이다.

94)서편으로……들리누나:서편으로 학이 난다는 대목은 소식(蘇軾)의 후적벽부(後赤壁賦)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식이 적벽(赤壁) 강에서 저녁에 서쪽으로 날아가는 학 한 마리를 보았는데, 그날 밤 꿈에서 도사(道士)를 만나고서야 서쪽으로 날아간 그 학이 바로 도사의 현신(現身)임을 알았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철적(鐵笛)은 주로 은자나 고사(高士)들이 잘 부는 피리라고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학과 철적 소리는 영숙 선생이 청신한 은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음을 상징화한 것이다.

95)이사길(李士吉):기우만(奇宇萬)의 문집인 송사집(松沙集) 권8에 이사길에게 답함[答李士吉]이라는 편지가 있는데, 여기서의 이사길과 동일인일 것으로 판단된다. 이름은 도봉(道鳳)이고 자가 사길(士吉)인 듯하다.

96)새도……떨어진다:새는 나는 곳마다 깃이 떨어진다는 속담과 같은 말로 자주 이사를 하면 세간이 줄어들고 좋지 않다는 뜻이다.

97)장중울(張仲蔚)처럼……살림:장중울은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박학다식하고 천문(天文)과 시부(詩賦)에 능했음에도 몸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은 채 늘 빈한하게 살았다. 그리고 그가 일절 바깥으로 외출을 하지 않다 보니, 그의 집 마당에는 사람의 키를 넘을 만큼 쑥대가 우거졌다고 한다. 高士傳 中 張仲蔚

98)풍속이……지혜: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마을의 풍속이 인후(仁厚)해야 좋으니, 잘 가려서 인후한 마을에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하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99) 계방(季方):매천의 막냇동생 황원(黃瑗, 1870∼1944)의 자이다. 그의 호는 석전(石田) 혹은 강호여인(江湖旅人)이다.

100)맏이:매천의 큰아들 황암현(黃巖顯)을 말한다.

101)금사(錦士) 박항래(朴恒來):금사는 박항래(1853∼1933)의 호이다. 전북 금산(錦山) 출신으로 26세 때인 1879년(고종16)에 무과에 급제하여 1885년에 절충장군에 가자되었다. 이후 전주 영장(全州營將), 내금위장(內禁衛將), 자성 부사(慈城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구례 군수로 있을 때 매천과 교분이 두터웠다.

102)왕소금(王素琴):소금은 왕사천(王師天, 1842∼1906)의 호이다. 매천의 스승인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의 둘째 아들로, 매천과는 여행을 함께 다니며 시문을 토론하고 수창(酬唱)하였다. 김정환, 梅泉詩派 硏究, 경인문화사, 2007

103)공수(龔遂)와 황패(黃覇):모두 한(漢)나라 때 백성을 잘 다스린 관리들이다. 공수는 선제(宣帝) 때 발해 태수(渤海太守)로 있으면서 큰 치적을 남겼고, 황패는 무제(武帝) 때에는 하남 태수(河南太守)의 승(丞)으로, 선제 때에는 영천 태수(潁川太守)로 있으면서 백성을 잘 다스렸다. 漢書 卷89 循吏傳 龔遂․黃覇

104)지난겨울 나라의 변란:1905년(광무9) 11월 17일의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말한다.

105)족하께서……터이지만:김소영은 이 구절을 예시하면서 “이처럼 자신의 언사를 두고 스스로도 ‘날이 선 부리[尖喙]’라 자인하였을 정도로 세태에 대한 비판이 유달리 강하였다.”라고 언명하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매천의 고분고분하지 않고 기가 센 성격은 자연스럽게 글쓰기에 투영되었고 당시의 세태와 맞물려 직척(直斥)의 수법이 오히려 효과적인 표현 방법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매천의 산문 표현법의 주요 특징의 하나로 직척의 수법을 들었다. 김소영, 매천 황현의 산문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203쪽

106)산을……것:1902년(광무6) 11월에 매천의 나이 48세에 만수동(萬壽洞) 산중에서 평야 지대인 월곡리(月谷里)로 이사한 것을 말한다.

107)송 태공(宋太公):송태회(宋泰會, 1872∼1941)의 아버지 송긍면(宋兢勉, 1839〜1922)을 가리킨다. 송긍면의 호는 호산(壺山)이다. 송태회에 대해서는 280쪽 주36 참조.

108)성균관……것:송재회는 1888년(고종25)에 무자 식년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고, 송태회도 그해에 성균관 진사시에 입격하였는데, 사마방목(司馬榜目)에는 송채택(宋蔡澤)으로 되어 있다. 채택은 송태회의 아명인 듯하다. 國朝文科榜目 高宗 戊子年 式年試

109)귀진천(歸震川)과 전목재(錢牧齋):진천은 명(明)나라 때의 문장가인 귀유광(歸有光, 1506~1571)의 호이다. 자는 희보(煕甫)이고 강소성(江蘇省) 곤산(崑山) 사람이다. 당시 전후(前後) 칠자(七子)의 복고주의(復古主義)에 반대하고 당송(唐宋) 고문을 제창하였다. 목재는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문장가인 전겸익(錢謙益, 1582~ 1664)의 호이다. 자는 수지(受之)이고 강소성 상숙(常熟) 사람이다. 박학하고 시작(詩作)에 뛰어났으나 건륭제(乾隆帝)로부터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낙인 찍혀 일체의 저작이 판금(販禁)되기도 하였다.

110)성남파 혜영(成南坡蕙永):남파는 성혜영(1844〜?)의 호이다. 자는 채오(彩悟)이며 또 다른 호는 차란(次蘭)이다. 경남 하동(河東) 수촌리(水村里) 출신으로, 강위(姜瑋)를 맹주로 하는 육교시사(六橋詩社)에 참여하였고 강위가 타계한 후에 하동으로 돌아가 칩거하였다. 성혜영은 매천에게 중앙 시단(詩壇)의 동향을 상세하게 전해 준 최초의 인물로 평가된다. 奇泰完, 梅泉詩 硏究, 성균관대 박사학위 논문, 1998, 13

111)육방옹(陸放翁)……겪었는데:방옹은 남송 때의 시인 육유(陸游, 1125~1210)의 호이다. 자는 무관(務觀)이며, 절강성(浙江省) 산음(山陰) 사람이다. 각지의 지방관으로 전전하면서 불우한 일생을 보냈으며 북송을 멸망시킨 금나라에 대한 항전(抗戰)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후촌(後村)은 유극장(劉克莊, 1187~1269)의 호이다. 자는 잠부(潛夫)이고 복건성(福建省) 출신으로 남송이 멸망할 무렵의 시인이다. 철애(鐵崖)는 원말 명초의 시인 양유정(楊維楨, 1296~1370)의 호이다. 자는 염부(廉夫)이고 절강성 산음 사람이다. 원말의 병란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고 강남에 은거하였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나라가 멸망할 무렵이나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의 인물들이므로 상란(喪亂)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다.

112)만약에……것이다:오늘날 우리 문단에 큰 인물이 부족한 실정에서 만약 성혜영의 시가 출판되어 세상에 유포되었다면 그런대로 남송 때의 육방옹이나 유후촌이 차지한 한시사(漢詩史)의 위치에 상응할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13)자신이……것이다:성혜영은 강위(姜瑋)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스승과 교유하던 인물들인 위당(威堂) 신헌(申櫶, 18101884), 향농(香農) 신정희(申正熙) 부자와 약산(約山) 김병덕(金炳德, 1825∼1892) 등 여러 고관과도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매천이 강위를 통해 이들과 교유하며 수창(酬唱)했던 점을 감안하면 성혜영도 이들과 교류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가 성혜영은 결국 벼슬에는 나아가지 못한 채 강위가 타계하자 고향인 하동으로 내려가 칩거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강호에 은거하여 피리 불며 사는 즐거움을 누렸다.”라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이어 그의 이런 행적이 철애(鐵崖)의 행적과 유사하다고 비교하고 있는바, 양유정이 태정(泰定) 4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도 10년 동안 쓰이지 못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병란으로 강남에 은거한 뒤로 ‘호산풍월복인(湖山風月福人)’으로 칭해졌고 은자(隱者)가 분다는 철적(鐵笛) 불기를 좋아하여 철적자(鐵笛子)로 칭해졌던 점을 보면, 성혜영의 행적과 유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姜瑋全集 上, 成次蘭蕙永詩集序, 아세아문화사, 389쪽 明史 卷285 楊維楨列傳

114)양덕조(楊德祖):대본에는 ‘楊德操’로 되어 있는데, 후한서(後漢書) 권80 예형열전(禰衡列傳)에 의거하여 ‘操’를 ‘祖’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15)내가……없었는데:후한 때의 예형(禰衡)은 뜻이 커서 남을 잘 인정하지 않았는데, 당시의 인물을 평하기를 “대아(大兒)는 공문거(孔文擧)이고 소아(小兒)는 양덕조(楊德祖)이다. 그 외에는 모두 용렬하여 거론할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공융(孔融)과 양수(楊修) 두 사람을 최고의 인물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문거는 공융의 자이고 덕조는 양수의 자이다. 後漢書 卷80 禰衡列傳 여기서는 성혜영과 매천이 당대 최고의 인물로 영재와 창강을 꼽았다는 말인데, 영재는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호이고 창강은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의 호이다.

116)왕소천(王小川)을……지었는데:소천은 왕사찬(王師瓚, 1846~1912)의 호이다.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찬지(瓚之)이며, 매천의 스승인 왕석보(王錫輔)의 아들이다. 왕소천(王小川)을 축수하는 서문을 지었다는 것은 전주대 호남학연구소에서 1984년에 편찬한 매천전집(梅泉全集) 권2에 있는 수왕소천육십일세서(壽王小川六十一歲序)를 말한다.

117)석정(石亭):김제(金堤) 출신의 시인이자 문장가인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의 호이다.

118)을사년:대본에는 ‘乙巳’로 되어 있는데, 전주대 호남학연구소에서 편찬한 매천전집에는 ‘甲辰’으로 되어 있다. 갑진년은 1904년(광무8)이다. 성혜영의 생년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하여 어느 것이 옳은지 상고할 수 없다.

119)고각루(鼓角樓):이 누각이 어떤 용도로 쓰였고 구례의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는 찾지 못하였으나, 이 중수기(重修記)의 내용에 따르면 관사(官舍)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례 군수 박항래가 1897년(광무1)에 부임해 와서 이듬해에 이 누각을 중수하였으나 그 뒤 1916년에 이 누각이 헐리게 되자, 구례의 유림과 문인들이 기금을 모아 사들여서 1917년에 구례군 토지면 용두리(龍頭里) 용두마을로 옮겨 세우고 용호정(龍湖亭)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이후 매천 문하에서 한시를 배운 매천시파(梅泉詩派)의 시인인 권봉수(權鳳洙, 1872~1940), 허규(許奎, 1861~1931), 오병희(吳秉熙, 1871~1939), 이병호(李炳浩, 1870~1943) 등이 용호정시계(龍湖亭詩契)라는 시회(詩會)를 조직하고 용호정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김정환, 梅泉詩派 硏究, 제3장 매천시파의 성원과 활동상, 경인문화사, 2007

120)한(漢)나라의 공수(龔遂)와 황패(黃覇):320쪽 주103 참조.

121)범연귀(范延貴)가……한다:괴애(乖崖)는 송나라 때의 신하인 장영(張詠, 9461015)의 호이다. 송나라 복주(濮州) 사람으로 자는 복지(復之)이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그는 익주(益州), 항주(杭州), 승주(升州) 등의 자사(刺史)로 나가서 가는 곳마다 치적을 세웠다고 한다.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외집(外集) 권14 문고미정(聞鼓美政)에 보면, 범연귀가 공무를 띠고 금릉(金陵)을 지나다가 그 고을을 다스리는 장영을 만났는데, 장영이 범연귀에게 묻기를, “그대는 연로(沿路)를 다니면서 훌륭한 관원을 본 적이 있는가?” 하니, 범연귀가 대답하기를, “얼마 전에 제가 원주(袁州)를 지나다가 평향(萍鄕)을 다스리는 수령 장희안(張希顔)을 보았는데, 그가 참으로 훌륭한 관원이었습니다.” 하면서 위와 같은 사례를 하나하나 들어 설명하였다. 이에 장영이 말하기를, “희안도 훌륭하지만 그대도 훌륭한 관원이다.” 하고는 그날로 조정에 두 사람을 천거하였다. 그 뒤에 장희안은 발운사(發運使)가 되고 범연귀는 각문지후(閣門祗候)가 되어 모두 훌륭한 관리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122)만마관(萬馬關):전주에서 남원(南原)으로 가는 길에 슬치재를 못 가서 있는 전주의 관문으로, 근처에는 또 슬치재를 넘나드는 길손들이 묵던 노바우 역관도 있었다. 새전북신문 2004년 3월 5일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4월 15일 기사에 보면, 전주부의 만마관은 육로(陸路)로 통하는 요해처이니 그 성을 완전히 축조하고 곁에 관아(官衙)를 설치하여 남고진장(南固鎭將)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돌아가며 지키도록 해 달라는 전라 감사 이호준(李鎬俊)의 장계에 대해 윤허하는 내용이 나온다.

123)박긍농 준필(朴肯農準弼):대한제국기 진안(鎭安) 출신으로 전주에서 세무 주사를 역임한 박준필과 동일인인 듯하다. 1907년(융희1) 호남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진농수창집(雲農酬唱集)을 한용원(韓龍源)과 함께 공저하였다.

124)정학산 인기(鄭鶴山寅驥):황성신문 1906년 11월 14일자에 따르면 전주 사립 함육학교(涵育學校) 교사를 역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125)경(經)에……하였고:시경 포유고엽(匏有苦葉)에 나오는 구절인데, 논어 헌문(憲問)에서는 은자(隱者)가 이 시를 인용하여 자신의 처세관을 설명하면서 공자를 비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물의 깊이에 따라 적절한 방법을 택해 물을 건너듯 주어진 상황에 따라 처신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126)전(傳)에……하였는데:맹자 이루 상(離婁上)에도 나오고,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도 나오는 말이다. 맹자에서는 물을 주체로 보아 물의 맑은 정도에 따라 대우받는 것이 다르다는 뜻으로 쓰였는바, 물 스스로 자정(自淨)을 하면 사람들이 깨끗한 갓끈을 씻고 자정을 못해 더러우면 사람들이 더러운 발을 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부사의 의미를 취하여 세상이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그 상황에 따라 처신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즉, 여기에서의 ‘물’은 ‘세상’과 ‘세태’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127)여량(呂梁)의……분명하다:길이가 3천 길이나 되고 물거품이 40리나 이어지는 여량의 폭포를 공자(孔子)가 구경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내가 그 폭포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가 한참 만에 무사히 나오는 것이었다. 이에 공자가 그 사내에게 묻기를, “그대는 무슨 도술(道術)이 있는가?” 하니, 사내가 답하기를, “저는 충신(忠信)으로 들어갔다가 충신으로 나올 뿐입니다.” 하였다고 한다. 列子 說符 여기에서는 현실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김찬영의 능력이 충신한 태도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마음의 깊은 수양이 쌓여 그런 경지에 올랐을 것이라는 말이다.

128)초(楚)나라……없다:초나라 사람이 연(燕)나라 정승에게 보내는 국서(國書)를 쓸 때, 방에 불이 밝지 않자, 촛불을 가진 자에게 “촛불을 들라.[擧燭]”라고 하였는데, 글을 받아 적는 자가 그 말까지 국서에 써넣었다. 그런데 연나라 정승은 그 말을 현인(賢人)을 등용하라는 말로 여기고는, 매우 기뻐하며 현인을 등용하였고 그 결과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韓非子 外儲說 여기서는 매천의 추측과 달리 김옹이 전혀 다른 생각의 틀 속에서 그렇게 행동하는지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129)풍산(楓山)의 선산(先山):현 남원시 대강면(帶江面) 풍산리(楓山里) 산촌마을 뒷산이다.

130)우후공(虞候公) 현묵(顯黙):승정원일기에 따르면 황현묵은 수문장(守門將),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절충장군에 가자되고 통제영 우후(統制營虞候)에 임명되는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31)참찬공(參贊公):황희(黃喜)의 조부(祖父) 황균비(黃均庇)를 말하는데, 좌참찬에 증직되었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132)패옥(佩玉)……하더라도:패옥 소리가 울리는 마을은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사는 지역을 말하고 상에 가득 쌓인 홀은 높은 벼슬자리에 오래 있음을 말한다.

133)익성공(翼成公):황희(黃喜, 1363∼1452) 정승의 시호이다.

134)호안공(胡安公)과 열성공(烈成公):호안(胡安)은 황희의 아들 황치신(黃致身, 1397∼1484)의 시호이고, 열성(烈成)은 역시 황희의 아들이며 황치신의 동생인 황수신(黃守身, 1407∼1467)의 시호이다. 황치신은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아가 호조 판서까지 올랐으며, 황수신도 문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영의정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135)무민공(武愍公)과 문정공(文貞公):무민은 매천의 10대조인 황진(黃進, 15501593)의 시호이다. 자는 명보(明甫)이고, 황희의 5대손이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항전하다가 전사하여 창렬사(彰烈祠)와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문정(文貞)은 선조 연간의 문신 황정욱(黃廷彧, 1532∼1607)의 시호이다. 자는 경문(景文)이고 호는 지천(芝川)이다. 1584년(선조17)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를 다한 공으로 광국 공신(光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봉해졌다.

136)위봉루(威鳳樓)와 산호정(山呼亭):위봉루는 고려 시대 송도 궁궐에 있던 누각(樓閣) 이름이다. 문무백관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과거의 전시(殿試)를 보고 방방(放榜)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산호정은 송도 궁궐의 금원(禁苑)에 있던 정자이다.

137)공자가……하였으니:논어 계씨(季氏)에 있는 말이다.

138)이충무전서(李忠武全書):14권의 간본(刊本)으로 1795년(정조19)에 정조의 명으로 편찬하였다. 群書標記 6 命撰2

139)본……때:이원춘(李元春)은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왜적이 남원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구례 현감으로서 출전하여 싸우다가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140)동비(東匪):동학군(東學軍)을 말한다.

1)백모(伯母) 왕 유인(王孺人):매천의 백모는 개성 왕씨(開城王氏)로, 왕학준(王學準)의 따님이고 매천의 스승인 왕석보(王錫輔)의 누이이다.

2)계사년에 죽은 종형(從兄):황담(黃壜, 1851〜1893)을 말한다. 자는 운오(雲五)이고 호는 석오(石五)이다.

3)선친:황시묵(黃時黙)을 말한다.

4)선비(先妣):풍천 노씨(豐川盧氏)이다.

5)홀로……며느리:손자는 황신현(黃莘顯)이고, 며느리는 한양 조씨(漢陽趙氏)이다.

6)태황제(太皇帝):고종(高宗)을 말한다. 1907년(융희1)에 고종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일 때문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讓位)를 하게 되었다. 이후 고종은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게 되었는데, 이 글을 쓴 시점이 1907년 이후이므로 고종을 태황제라고 호칭한 것이다.

7) 현식(顯植)으로……입격하였다:오현식(1866〜?)은 자가 준유(俊裕)인데, 1880년(고종17) 증광시 진사시에 등외로 입격하였다.

8) 경순(璟淳):오경순은 자가 재덕(在德)이다.

9)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증직하고:이 글의 제목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의 증직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상고할 수 없어 그대로 번역하였다.

10) 치일(致一)은……세워서:이 비석은 구례군 마산면(馬山面) 사도리(沙圖里) 상사(上沙) 마을에 있는데, 1910년에 건립하였고 비문은 곽종석(郭鍾錫, 18641919)이 썼다.

11)금호(錦湖):임형수(林亨秀, 1504∼1547)의 호이다. 자는 사수(士遂)이고 나주 출신이다.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 제주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파면되었고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절도(絶島)에 안치(安置)된 뒤에 사사되었다. 저서로는 금호유고가 있다.

12)최시옹(崔是翁):1646∼1730. 본관이 삭녕(朔寧)이고 자는 한신(漢臣)이며 호는 동강(東岡)이다. 윤증(尹拯)과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좌의정 박세채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와 지평을 지냈다. 저서로 동강유고(東岡遺稿)가 있다.

13)회헌(晦軒):안향(安珦, 1243∼1306)의 호이다. 자는 사온(士蘊)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14) 익후(益垕)라는……증직되었으니:안익후(1685〜?)는 자가 군성(君聖)이고 1728년(영조4) 무신란(戊申亂)에 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고,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버지는 안홍망(安弘望)으로 구산진 별장(龜山鎭別將)을 지냈다.

15)증조:대본에는 ‘祖’로 되어 있으나 사리상 ‘증조(曾祖)’가 되어야 하므로 ‘祖’ 앞에 ‘曾’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16)성인(聖人)은……말씀하였는데:논어 위정(爲政)에 보면, 자유(子游)가 공자에게 효에 대해 묻자, “오늘날의 효는 단지 물질적으로 봉양을 잘하는 걸 의미하는데, 개나 말에게도 물질적으로는 잘해 줄 수 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개나 말에게 해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대답하였고, 자하(子夏)가 효에 대해 묻자, “부형 앞에서 좋은 얼굴 하기가 어려우니, 그걸 잘하는 게 효이다. 일이 있을 때 자제들이 부형의 노고를 대신하고, 술과 밥이 있을 때 부형에게 드시게 하는 것, 너는 이것을 효라고 여겼느냐.”라고 대답하고 있다. 여기에서 공자의 대답을 살펴보면, 몸을 봉양하는 물질적 효도보다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의 뜻을 살펴 받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여 두 방법 사이에 우열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맹자이루 상(離婁上)에 보면, 증자(曾子)의 아들 증원(曾元)이 항상 증자에게 술과 고기를 올리는 것을 보고는 부모의 입과 몸을 봉양한 자라고 평가하고, 아버지 증석(曾晳)을 봉양할 때 술과 고기가 남으면 누구에게 줄 것인지 항상 묻던 증자에 대해서는 부모의 뜻을 봉양하였다고 평가하고는 “부모를 섬기는 데는 증자와 같이 하는 것이 옳다.”라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효도의 두 가지 방법에 대한 우열을 분명히 거론하고 있다.

17) 두류산(頭流山):지리산(智異山)의 이칭으로 백두대간이 흘러왔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18) 병희(秉熙):오병희(1871〜1939)의 자는 광국(光國)이고 호는 취헌(翠軒)이다. 본관은 보성(寶城)이고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에서 태어나 매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매천 사후에 구안실(苟安室) 터를 사서 삼호정(三乎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살면서 운산시계(雲山詩契)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위(衛)나라의 부장(祔葬):춘추 시대에 합장(合葬)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노(魯)나라는 하나의 광중(壙中)에 같이 관(棺)을 묻었고 위(衛)나라는 두 관을 서로 다른 광중에 묻었다. 이에 대해 공자가 평가하기를, “위나라 사람들의 합장은 광중을 분리하고 노나라 사람들의 합장은 광중을 같이하는데, 노나라 방식이 더 좋다.[衛人之祔也 離之 魯人之祔也 合之 善夫]”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下

20)두 지역:보성과 하동(河東)을 말한다.

21)효제역전과(孝弟力田科)에……만하다:효제역전과는 한대(漢代)에 관리를 선발할 때의 시험 과목으로 백성에게 효제(孝弟)의 덕행을 장려하고 농사에 힘쓰게 하고자 혜제(惠帝) 때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고후(高后) 여씨(呂氏) 때에 ‘효제역전’이라는 관직을 두었고, 문제(文帝) 때에는 효제(孝弟), 역전(力田), 삼로(三老)의 향관(鄕官)을 두어 군현의 교화를 담당하는 직임을 맡겼다고 한다. 漢書 卷2 惠帝紀, 卷3 高后紀, 卷4 文帝紀 여기서는 호군 오공이 효제의 덕행이 있고 농사에 힘을 쏟으며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고을 사람들에게 솔선수범한 것이 한나라 때 효제역전과를 두었던 취지에 부합하고 지방의 교화를 담당했던 삼로의 직임에 비견되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22)엄숙한……넘쳐흘렀네:1892년(고종29)에 오석연(吳錫演)에게 부호군의 직함이 내려진 것을 가리키는데, 이 직함은 수직(壽職)으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23)회헌(晦軒):안향(安珦)의 호이다. 자는 사온(士蘊)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24) 부화(復和)는 현감이고:승정원일기 영조 42년(1766) 12월 18일 기사에 안부화가 곡성 현감(谷城縣監)으로 제수된 기사가 보인다.

25) 양생 창권(梁生昌權):양창권은, 본관은 남원이며 전라도 진안군(鎭安郡) 일동면(一東面) 노촌리(蘆村里) 사람이다.

26)하룡(夏龍):양하룡(1699∼1784)의 자는 운보(雲甫)이고 호는 만휴당(晚休堂)이다.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경학요지(經學要旨)훈몽지남(訓蒙指南) 등이 있다.

27) 진덕동(陳德洞) 아무개:덕동은 진위(陳偉)의 호이다. 자는 태허(太虛)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松沙集 卷44 德洞陳公行狀

28) 최양묵(崔養黙) 아무개:양묵은 최봉의(崔鳳儀, 1649〜1733)의 호이다. 자는 구성(九成)이고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문인이다. 耳溪集 卷30 養黙齋崔公墓碣銘

29)시골의……있다:의례(儀禮) 사관례(士冠禮)를 보면, 향선생(鄕先生)의 정의가 있는데, 그 지방 출신 대부(大夫)로서 벼슬에서 물러나서 시골에 내려와 서당을 세우고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을 말한다. 후에 그런 사람이 죽으면 그 서당에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 구절은 한유(韓愈)의 송양거원소윤서(送楊巨源少尹序)에 “옛날에 이른 바 ‘향선생으로 죽으면 서당에 제사한다.’라는 것이 바로 이 사람이다.”라는 구절에서 온 말인 듯하다.

30) 백전산(柏田山):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과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사이에 있는 백운산(白雲山)을 일컫는다.

31)금의공자전(金衣公子傳):이 전(傳)은 사물을 의인화(擬人化)하여 전기(傳記) 형식으로 적은 가전체(假傳體)이다. 윤경희(尹景喜)는 “가전은 일반적으로 무정(無情)의 사물을 의인화하여 그 사물의 행적(行蹟)을 사실(史實)에 의거(依據) 인간을 징계(徵戒)하는 형식이다. 황현의 금의공자전 또한 이런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黃玹의 傳 硏究, 語文論集 35, 고려대 국어국문학연구회, 1996금의공자전은 꾀꼬리를 의인화한 것으로, 꾀꼬리의 다양한 이칭(異稱)과 그와 관련된 다양한 중국 역대의 고사(故事)를 원용하여, 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과 유사한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32)황제(黃帝)의……한다:꾀꼬리의 색깔이 황색이므로 황제(黃帝)와 결부시킨 것이다.

33)율류(栗留):꾀꼬리의 이칭이다.

34)소호씨(少昊氏)……당하였다:중국 태고 시대 소호씨가 다스릴 때에는 새의 이름을 빌려 관직의 명칭을 삼았는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17년 조에 보면, 상구씨(爽鳩氏)는 사법(司法)을 담당하는 사구(司寇)이고 축구씨(祝鳩氏)는 교육을 담당하는 사도(司徒)와 같은 관직명이라고 하였다. 상구는 매이고 축구는 비둘기이다. 매는 사냥할 때에 숲속을 샅샅이 살펴보는데 법률을 집행할 때에도 그런 신중함과 밝은 눈이 필요하므로 사법의 직명으로 붙이게 된 것이며, 비둘기는 울 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는 것이 마치 축원하는 듯하고 효성이 지극한 새이므로 교육의 직명으로 붙이게 된 것이다. 꾀꼬리가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 울음 소리의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며, 그가 배척을 당했다는 것은 소호씨 때의 관직명에 꾀꼬리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35)주 무왕(周武王)이……주었고:예기 악기(樂記)에,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와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황제의 자손을 계(薊)에 봉하고 요 임금의 자손을 축(祝)에 봉하고 순 임금의 자손을 진(陳)에 봉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36)여황(麗黃):역시 꾀꼬리의 이칭으로 문선(文選)동경부(東京賦)에 보인다.

37)창경(倉庚)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는:시경 칠월(七月)에 “봄에 햇볕이 비로소 따뜻해져 꾀꼬리가 울거든[春日載陽 有鳴倉庚]”이라는 구절에서 처음으로 꾀꼬리를 ‘창경’이라는 이칭으로 표현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38)춘령(春令)의……명하였다:춘령은 사전적으로 ‘봄에 행하는 정령(政令)’이란 뜻과 ‘봄’ 혹은 ‘봄날’의 뜻이 있는데, 꾀꼬리는 주로 봄에 날아오기 때문에 봄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춘령의 직임을 행하도록 명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39)공자(孔子)가……찬탄하였고:시경 면만(綿蠻)의 세 장에서 ‘꾀꼴꾀꼴 꾀꼬리[綿蠻黃鳥]’라는 구절이 세 번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40)초(楚)나라가……하였다:춘추(春秋) 희공(僖公) 12년 조에, “여름에 초나라가 황나라를 격멸하였다.[夏 楚滅黃]”라고 한 구절을 두고 말한 것이다.

41)섭 천사(葉天師):천사(天師)는 도사(道士)를 말하는데, 섭 천사는 당나라 현종(玄宗)에게 총애를 받았던 도사 섭법선(葉法善)을 말한다.

42)의춘원(宜春苑):한 무제(漢武帝) 때 세운 궁전으로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의 남쪽에 있다.

43)이원(梨園):당나라 현종 때 악공(樂工)과 기생(妓生) 300명을 뽑아 음악과 노래를 가르치던 원(園)의 이름이다. 장안의 금원(禁苑) 안에 있었는데, 이들을 일러 이원제자(梨園弟子)라고 하였다. 新唐書 卷22 禮樂志

44)이귀년(李龜年):당 현종 때의 음악가로 음률(音律)에 능통하였다.

45)공봉(供奉) 이백(李白):공봉은 당 현종 때의 관직인 한림 공봉(翰林供奉)을 말하는데, 응제(應製)를 담당하는 직임이다. 당시에 이백이 이 직임에 있었다.

46)청평사(淸平詞) 3장:당 현종이 침향정(沈香亭)에서 양 귀비(楊貴妃)와 모란을 구경하다가 새로운 가사로 악보를 만들고자 저자의 술집에서 만취해 있던 이백을 불러 짓게 한 시가인데, 양 귀비의 아름다움을 3수로 표현하였다.

47)황번작(黃幡綽):당나라 현종 때의 배우로, 개원(開元) 초에 궁중에 들어와 30년간 현종을 모셨다. 성격이 익살스럽고 대답을 잘하여 시정(時政)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 있었으며, 안녹산의 난 때에는 반군에 조력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난이 평정된 뒤에 구금되기도 하였으나 현종이 불쌍히 여겨 풀어 주었다고 한다. 開天傳信記

48)유주 자사(柳州刺史)에……바이다:꾀꼬리가 버드나무에 깃들기 때문에 ‘유주 자사’라고 표현한 것이며, 강가의 버들가지에서 노닐기 때문에 ‘지강공(枝江公)’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49)사광(師曠)이나……있어:사광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태사(太師)로, 오음(五音)과 육률(六律)에 대한 청력이 뛰어났던 인물이고, 진 평공(晉平公)에게 비유를 들어 넌지시 간언을 잘하였다고 한다. 그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당시 진(晉)나라에 말을 하는 돌이 있었는데, 임금이 사광에게 “돌이 어떻게 말을 하느냐?”라고 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때에 맞지 않은 일을 하여 백성의 원망을 사면 말하지 못하는 물건도 말을 합니다. 지금 궁실(宮室)이 높고 사치하니, 돌이 말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간언하였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昭公8年 그리고 한 무제(漢武帝) 때 유창한 변설과 재치로 총애를 받았던 동방삭(東方朔)도 무제의 사치를 간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漢書 卷65 東方朔傳

50)한휴(韓休)와 장구령(張九齡):한휴는 당나라 현종 때의 신하로, 임금에게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있으면 간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한번은 좌우의 신하들이 현종에게 말하기를, “한휴가 입조(入朝)한 이후로는 폐하께서 하루도 즐거운 날이 없었는데, 왜 그를 내쫓지 않으십니까?” 하자, 현종이 말하기를, “나는 비록 수척해졌으나 천하가 반드시 살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舊唐書 卷98 韓休列傳 장구령도 현종 때 직간하기를 좋아했던 대표적인 신하이다. 현종의 탄신일에 다른 신하들은 귀한 물건을 올려 축하하는데, 그는 고금 정치의 잘잘못을 발췌한 천추금감록(千秋金鑑錄)을 올렸을 정도이고, 안녹산은 반역할 상(相)이니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간쟁한 바도 있다. 舊唐書 卷99 張九齡列傳

51)우리는……보전하고:안자춘추(晏子春秋) 외편(外篇)에 보면, 제 경공(齊景公)이 안자(晏子)에게 천하의 아주 작은 생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안자가 대답하기를, “동해(東海)에 어떤 벌레가 모기의 눈썹 위에 둥지를 짓고 사는데, 날아와서 새끼를 치고 왔다 갔다 하는데도 모기는 이를 알지 못합니다. 저는 그 이름을 모르겠고 동해의 어부는 그것을 초명(焦冥)이라 부릅니다.”라고 한 말이 있다. 여기서는 개미들이 종족마다 각각 영역을 나누고 땅속에 작은 집을 짓고 산다는 말이다.

52)정벌의……일으킨다:달팽이 뿔 안의 난리라는 것은 장자(莊子) 칙양(則陽)에, “달팽이의 왼쪽 뿔에는 만(蠻)이라는 나라가 있고 오른쪽 뿔에는 촉(觸)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두 나라가 땅을 두고 전쟁을 하여 죽은 시체가 1만이나 되었다.”라는 우화를 말한다. 여기서는 개미 종족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나면 아주 작은 영역을 놓고 전쟁을 벌인다는 말이다.

53)큰……한뿌리이고:개미 종류 가운데 왕개미를 비부(蚍蜉)라고 하는데 이를 속칭 ‘말[馬]’이라고 하고, 개미 중에 작은 것을 의(螘)라고 하는데 이를 속칭 ‘바구미[蛘]’라고 한다. 그래서 왕개미를 의마(蟻馬), 작은 개미를 의양(蟻蛘)이라고 하기도 하는 것이다. 爾雅注疏 卷9 釋蟲 여기서는 명칭은 달라도 모두 똑같은 개미 종족이라는 말이다.

54)개미는……것이며:‘개미는 수시로 흙을 나르는 일을 익혀 간다’는 말은 예기》 〈학기(學記)에 있는 말로, 개미가 흙을 나르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점점 큰 개밋둑을 쌓아 올리듯이, 사람도 가까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남까지 사랑하는 데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뜻을 말하고 있다. ‘내 아이를 먼저 사랑하고 나서 남의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은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먼저 내 집의 노인을 존경하고 나서 남의 집 노인을 존경하며, 내 집 아이를 사랑하고 나서 남의 집 아이를 사랑한다면 천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55)왕개미가……말이다:사전상으로 ‘개미의 구원[蚍蜉援]’이라는 말은 작은 후원, 혹은 소수의 구원병을 일컫는 말인데, 여기서는 개미가 어려울 때 서로 도와준다는 의미로 전용하였다. 韓昌黎集 卷13 張中丞傳後敍

56)양고기의……일:장자 서무귀(徐无鬼)에, “양고기는 개미가 그리워 모여들지 않지만 개미는 양고기가 그리워 모여든다. 이는 양고기에서 누린내가 나기 때문이다.[羊肉不慕蟻 蟻慕羊肉 羊肉羶也]”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자잘한 명예나 이익을 쫓아 달려드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57)씽씽매미의……말인가: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씽씽매미는 여름 한 철에만 생겨났다가 없어지기 때문에 봄과 가을을 모르는데, 저 8천 년이나 오래 묵은 춘(椿)나무를 어찌 알겠느냐.”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씽씽매미의 일생이 한 철이듯이 우리 개미의 일생도 매우 짧다는 말이다.

58)머리가……일이다:칼자루를 잡는다는 것은 사기(史記)83 추양열전(鄒陽列傳)에, “명월주(明月珠)나 야광벽(夜光璧)을 캄캄한 밤에 도로에서 사람에게 던져 주면 칼자루를 잡고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까닭 없이 구슬이 앞에 이르렀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에서 온 것이다. 여기서는 같은 개미끼리 작은 이익이나 영토 때문에 계속 칼을 겨누고 대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59)비록……뿐이다:쇠파리 같은 소인들의 참소라는 것은 시경 청승(靑蠅)에, “앵앵거리는 파리가 울타리에 앉았구나. 화락한 군자여, 참소를 믿지 말지어다. 앵앵거리는 파리가 가시나무에 앉았구나. 참소하는 이 끝이 없어 온 나라를 교란하네.[營營靑蠅 止于樊 豈弟君子 無信讒言 營營靑蠅 止于棘 讒人罔極 交亂四國]”라는 구절에서 온 말로, 소인배나 간사한 무리를 쇠파리에 비유하고 있다. 지금 우리 두 종족 사이에 분쟁이 있는 것은 참소하는 소인배의 농간 때문이라는 말이다.

60)마지막에는……꾸몄다:둑을 허물려는 잔꾀란 “큰 둑도 개미구멍에서 무너진다.”라는 속담을 인용하여 상대 종족이 우리 종족 전체를 무너뜨리려는 잔꾀를 부렸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무를 흔들어 대려는 계책을 꾸몄다는 것은 한유(韓愈)의 조장적(調張籍)시에, “왕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 하니, 제 역량을 모르는 게 가소롭구나.[蚍蜉撼大樹 可笑不自量]”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5 여기서는 적들이 자신의 역량도 모르고 우리와 같은 큰 종족을 상대로 맞붙으려는 정신 나간 계책을 꾸미고 있다는 말이다.

61)암암리에……있다:홰나무 아래 개미구멍이란, ‘당(唐)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 홰나무의 남쪽 가지 아래에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괴안국(槐安國)에 가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깨어 보니, 홰나무 아래에 커다란 개미구멍이 있었다’는 남가몽(南柯夢)의 고사를 말한 것이다. 여기서는 우리 종족 간의 싸움을 엿보다가 이득을 취하려는 다른 종류의 벌레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다.

62)도는……떼:도는 맷돌이라는 것은 천지(天地)가 운행하는 것을 말하고, 기는 개미 떼란 커다란 운명의 굴레 속을 떠도는 하찮은 미물이라는 말이다. 이 “개미가 맷돌을 따라 돈다.[蟻旋磨]”라는 고사는 진서(晉書)11 천문지 상(天文志上)에 나온다.

63)모래알……대단하나:모래알 같은 군사들이란 전쟁에서 죽는 군사들을 말한 것이다. 예문유취(藝文類聚)에, “전쟁에서 죽은 장교들은 원숭이나 학이 되고, 군사들은 벌레나 모래알이 된다.”라는 말이 있다. 藝文類聚 卷90 鳥部上여기서는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 전쟁에 나가서 군사들이 죽지나 않을까 크게 걱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64)북문(北門)으로……위로되었다:북문으로 출정하는 것은 고대에 흉문(凶門)인 북문을 밀고 나가면서 반드시 죽겠다는 결의를 보여 주던 의식을 말한다. 淮南子 兵略訓 임금이 장수의 수레를 밀어 주는 것은 퇴곡(推轂)의 고사로, 옛날에 제왕(帝王)이 장수를 파견할 때 수레의 바퀴통을 밀어 주면서 “곤내(閫內)는 과인이 다스릴 것이니 곤외(閫外)의 일은 그대가 제어하라.”라고 하며 전권(全權)을 위임하던 일을 말한다. 史記 卷102 馮唐列傳 서캐와 이가 서로 달래 준다는 것은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는 재앙을 만나 죽으려 할 때 서캐와 이가 서로 슬퍼하며 위로해 준다는 말이다. 淮南子 說林訓

65)쇠똥구리가……정도다:우리 군대의 위력은 귀신도 놀라고 적군도 두려워할 만큼 강력하다는 말이다.

66)달리는……날래고:춘추 시대 진(秦)나라 군사들이 주(周)나라 서울의 북문을 지날 때, 전차의 좌우에 탔던 군사들이 투구를 벗고 달리는 전차에서 뛰어내려 천자에게 경의를 표하고는 곧바로 다시 올라탔는데, 그 전차의 수량이 300승(乘)이었다[左右免冑而下 超乘者三百乘]고 한다. 春秋左氏傳 僖公33年

67)무거운……힘세며:빗장을 드는 것[翹關]은 당(唐)나라 때 무과(武科) 시험 과목의 하나였다. 인정(人政) 권17 선인문(選人門)에 보면, “관(關)의 길이가 1장(丈) 7척(尺)에 지름이 3촌(寸) 반인데, 이것을 열 번 든 뒤에 다시 관을 들고 나오되 한 자도 지나침이 없어야 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여기서는 우리 군사들이 무거운 빗장을 들어 올릴 만큼 힘이 세다는 말이다.

68)진디등에처럼……있으리라:소수의 날랜 군사만으로 공격해도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진디등에는 모기와 비슷한 아주 작은 흡혈 곤충의 일종이다. 핏물로 절굿공이가 떠내려간다는 것은, 서경 무성(武成)의 주 무왕(周武王)이 목야(牧野)에서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할 때, 상대 진영 군사들의 핏물이 “시내를 이루어 절굿공이를 떠내려가게 했다.”라는 구절을 말한다.

69)적장을……있나니:제갈량(諸葛亮)이 남만(南蠻)을 쳐서 그 지역의 추장 맹획(孟獲)을 일곱 번 사로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주어 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여기서는 우리의 장수도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70)무기는……법이다:결국 전쟁은 인명이 살상되므로 하지 않는 것이 좋으니 항복을 하라는 말이다. 노자(老子) 31장(章)에, “잘 만든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다.[夫佳兵者 不祥之器]”라고 하였고,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전쟁을 잘하는 자는 극형을 받아야 하고, 제후들을 연결시켜 전쟁을 부추기는 자는 그다음 형을 받아야 하며, 황무지를 개간하여 백성에게 토지를 떠맡기고 세금을 무겁게 거두는 자는 그다음 형을 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71)호접진(胡蝶陣)과 팔문금쇄진(八門金鎖陣):둘 다 진법(陣法)의 이름이다. 호접진은 부채 모양으로 친 진을 말하는데,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이 이 진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팔문금쇄진은 조조(曹操)가 창안한 진법인데, 여덟 방향으로 통로가 나도록 군사를 배치하여 그 문으로 들어온 적군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진법을 말한다.

72)사면(四面):대본에는 ‘四而’로 되어 있으나 뜻이 통하지 않아 ‘而’를 ‘面’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73)용마채(舂磨寨):당나라 희종(僖宗) 광명(廣明) 원년(880)에 황소(黃巢)가 난을 일으켜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을 점거하였다가 곧이어 이극용(李克用)에게 쫓겨 진주(陳州) 근처로 후퇴하였는데, 그때 그가 허(許)와 여(汝) 등의 부근 10여 주(州)의 백성을 잡아다 뼈째로 맷돌에 갈아 군사들의 양식으로 공급하였다고 하는데, 그런 짓을 벌인 곳을 일러 용마채라고 한다. 新唐書 卷225下 黃巢列傳

74)대흥사(大興寺):전남 해남군(海南郡) 삼산면(三山面) 두륜산(頭輪山)에 있는 사찰이다.

75)모연소(募緣疏):여러 사람의 힘을 널리 구하는 글이다. 교량(橋梁), 사묘(祠廟), 사찰(寺刹), 불상(佛像) 및 불가와 도가에서 쓰는 의식(衣食)과 기용(器用) 따위는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 마련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소(疏)를 찬술하여 모집하는데, 그런 글을 모연소라고 한다. 이런 글은 변려문(騈儷文)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林下筆記 卷2 瓊田花市編 募緣疏

76)세상의……환희:불법에 의지하여 수도(修道)한 뒤에 얻게 되는 깨달음 또는 부처의 세계를 가리키는 듯하다.

77)귀의(歸依)해야 할 장소:불경을 읽고 도를 닦는 도량(道場)을 말한다.

78)당번(幢旛):불전에 세우는 깃발로, 부처의 위력을 표시하고 도량임을 나타내는 도구이다.

79)종경(鐘磬):대본에는 ‘鐘磐’으로 되어 있으나 뜻이 통하지 않아 ‘磐’을 ‘磬’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종경은 불교에서 쓰는 법기(法器)의 하나이다.

80)마군(魔軍)들이……되었고:마군은 마외(魔外)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천마외도(天魔外道)의 준말로 불도(佛道)를 흔들어 방애하는 마귀를 말한다. 그리고 환속한 무본(無本)이란 당(唐)나라 때의 시인 가도(賈島)를 가리키는데, 그의 법명이 무본이다. 그는 승려로 있다가 한유(韓愈)의 권유로 환속하였다. 여기서는 대흥사에 재액이 계속 들어 승려 중에 반수 이상이 환속하였다는 말이다.

81)절에……대규(戴逵):초학집(初学集)81 북선사흥조모연소(北禪寺興造募緣疏)에 보면 “북선사는 당나라 때의 건원사(乾元寺)인데, 대규가 그 아들과 함께 집을 희사하여 이 절을 지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82)육바라밀(六波羅蜜):열반(涅槃)의 피안(彼岸)에 이르기 위한 보살의 여섯 가지 수행을 말하는데,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이다.

83)분다리(芬陀利):백련화(白蓮華)를 말한다. 연꽃에는 청색, 황색, 적색, 백색의 네 종류가 있는데, 백련화가 가장 고귀하므로 깨달음의 묘법(妙法)을 비유하거나 염불하는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84)장난삼아……깨우쳤고:송(宋)나라 때의 고승(高僧) 불인(佛印)이 금산사(金山寺)에 있을 때이다. 시를 주고받던 사이인 소식(蘇軾)이 찾아오자, 불인이 말하기를, “그대는 여기에 왜 왔는가? 여기는 앉을 곳이 없다.” 하였다. 이에 소식이 장난삼아 말하기를, “화상(和尙)의 육신을 빌려 선상(禪床)을 만들어 앉고 싶다.” 하니, 불인이 말하기를 “산승(山僧)도 심기일전(心機一轉)의 한마디가 있으니, 그대는 당연히 소청을 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옥대(玉帶)를 풀어놓아 산문(山門)을 지키게 해 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소식이 옥대를 풀어 상 위에 두니, 불인이 말하기를, “육신은 본래 공(空)이고 오온(五蘊)은 있지 않은데, 그대는 어느 곳에 앉고 싶은가?” 하였다고 한다. 遯齋聞話 여기서는 옥대를 풀어 놓고 행한 선문답(禪問答)을 통해 사람들이 깨우침을 받는다는 말이다.

85)사람들이……것:이 구절과 관련한 고개지(顧愷之)의 단청에 대한 고사는 찾지 못하였다. 다만 고개지가 와관사(瓦官寺)의 유마힐(維摩詰) 상을 그리고 3일이 안 되어 그 그림을 구경하고 보시를 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 대목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宣和畫譜 卷1 道䆁

86)패다라(貝多羅) 아래:패다라는 야자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이다. 옛날 인도에서는 이 나뭇잎에 바늘 같은 것으로 불경(佛經)을 썼으므로 보통 불경의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사찰의 뜻으로 쓰인 듯하다.

87)삼화토(三化土):삼불토(三佛土)의 하나이다.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화현(化現)하는 땅을 말한다.

88)오봉산(五峯山):구례군 문척면(文尺面)에 있는 산 이름이다.

89)학(鶴)을……있는가:선비들이 모여 소원을 말하는데, 어떤 사람은 양주 자사(揚州刺史)가 되고 싶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재물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갔으면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은 허리에 돈 10만 관을 차고 학을 타고 양주로 날아가서 자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한다. 古今事文類聚 後集 卷42 騎鶴上揚州 여기서는 여러 가지 복을 한 사람이 다 누리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90)고기를……있다:장자 외물(外物)에 나오는 말이다.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는다는 것은 도를 깨쳤으면 그리로 이끌어 준 방편은 버려야 한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부귀를 이루고 신선이 되는 두 가지를 다 이루는 경우는 없고 그중에 하나를 성취하는 경우는 있다는 말이다.

91)토금리(土金里):구례군 문척면 내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92)물과……발한다:토금리는 경관이 수려하고 도가에서 단약(丹藥)을 만드는 데 재료로 쓰이는 납과 수은 같은 광물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 지역이라는 말이다.

93)천관(天冠)의 기맥(氣脈):여기서의 천관은 장흥(長興)의 천관산(天冠山)을 가리키는 듯한데, 이 천관산이 풍수지리적으로 어떻게 구례의 오봉산과 기맥이 이어지는지는 상고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지리산 줄기가 섬진강에서 끊어지고 천관산 줄기가 조계산(曹溪山)과 백운산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의미인 듯하다.

94)홍애(洪崖)와……듯하고:홍애와 부구(浮邱)는 모두 신선의 이름이다. 문선(文選)권21 유선시(遊仙詩)에 “왼쪽으로는 부구의 소매를 당기고 오른쪽으로는 홍애의 어깨를 친다.[左挹浮丘袖 右拍洪厓肩]”라는 시구가 있는데, 이곳 구례 오봉산에 밤이 되면 신선을 만날 수 있을 만큼 신령한 곳이라는 말이다.

95)운이……것이다:이곳은 신선이 나올 만한 신령한 곳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좋은 운을 만나게 되면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릴 집안이 나올 수도 있는 복지(福地)라는 말이다. 최노(崔盧)의 집안은 육조(六朝) 양(梁)나라․진(陳)나라 때부터 당(唐)나라 때까지 산동(山東)의 문벌로 권력을 누리며 번성한 최씨(崔氏)와 노씨(盧氏) 두 집안을 말한다. 그리고 정이(鄭李)의 집안은 당대(唐代)에 최씨, 노씨 집안과 함께 현달하였던 사성(四姓) 중에 두 명문세족(名門世族) 집안이다.

96)묵적(墨翟)의……많았었다:묵적의 굴뚝이란 묵적이 집에서 한가롭게 쉴 틈도 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으므로 굴뚝이 검어질 틈이 없었다는 고사를 말한 것이다. 文選 卷45 答賓戲 여기서는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임시로 거처하는 사람들이 많고 정착민들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97)누가……기다린다:오의항(烏衣巷)은 동진(東晉) 때 왕씨(王氏)와 사씨(謝氏) 등의 거족(巨族)이 살면서 번성해진 지역이다. 여기서는 왕씨와 사씨의 집안이 번성했던 오의항처럼 여기에도 인물이 나오면 크게 번성할 수 있는 길지(吉地)라는 말이다.

98)이곳에도……들려왔다:누구를 서당의 선생으로 맞이하고 이곳 출신의 누가 과거에 급제했는지는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하지만 박식한 선생을 맞이한 뒤로 이 마을에도 문풍이 열렸고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이 한 번 나오자 뒤를 이어 급제 소식이 거듭 들려 왔다는 말이다. 급제 축하 잔치[鹿鳴宴]는 향시(鄕試)의 창방(唱榜) 뒤에 지방관이 시관(試官)과 급제자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고 시경 녹명(鹿鳴) 시를 노래하던 것을 말한다. 隨園隨筆 卷10 科第類 鹿鳴宴 여기서는 그런 공식적인 행사로서의 연회가 아니라 이웃 사람들이 마을 잔치로 베풀어 준 것을 말한다. 파천황(破天荒)은 당나라 때 형주(荊州)에서 계속 대과(大科)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형주를 황무지라는 뜻의 천황(天荒)이라고 불렀는데, 뒤에 유태(劉蛻)가 대과에 급제하자 천황을 깨뜨렸다는 의미로 ‘파천황’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과거에 급제한 것을 일컫는 말이다. 北夢瑣言 卷4

99) 호박에……당기듯:호박이 검불을 달라붙게 하고 자석이 바늘을 끌어당기듯이 친구 간에 서로 의기가 투합하거나 사물이 자연스레 서로 감응하는 것을 말한다. 論衡 亂龍

100)주인인……충분하니:한(漢)나라 때의 동방삭(東方朔)이 무제(武帝)에게 올린 글에 “신은 나이 13세에 글을 배워서 겨울철 석 달 동안 문사(文史)를 익혔는데 그때 익힌 지식이 실제에 응용하기에 이미 충분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漢書 卷65 東方朔傳 여기서는 이 집의 주인인 정해면도 짧은 기간 동안 공부하여 터득한 학식이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펴기에 충분할 만큼 대단함을 말한 것이다.

101)어릴……전해졌고:후한(後漢) 때의 현자(賢者) 진식(陳寔)이 여섯 아들과 함께 순숙(荀淑)의 집을 찾아갈 때, 장남인 원방(元方) 진기(陳紀)에게는 수레를 몰게 하고 계방(季方) 진심(陳諶)에게는 지팡이를 들고 따르게 하고 손자 장문(長文) 진군(陳群)은 아직 어리므로 수레를 함께 타고 가서 순숙과 그의 여덟 아들과 함께 모여 토론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하늘에서는 덕성(德星)이 모이는 상서(祥瑞)가 보였다고 한다. 이를 보고는 태사(太史)가 임금께 아뢰기를, “500리 안에 반드시 현인들이 회합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한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칭송하고 존숭한 나머지 이들의 초상화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後漢書 卷62 荀淑列傳 世說新語 德行 여기서는 정해면이 진식의 자제들과 손자처럼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재주가 뛰어나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는 말이다.

102)공명(功名)이……잡았으며:흑왕(黑王)은 송나라 때의 사람 왕덕용(王德用)을 말한다. 그는 얼굴이 검고 목 이하는 희었으므로 당시에 흑왕상공(黑王相公)으로 칭해졌다. 장수로서 전공을 많이 세워 인종(仁宗) 때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가 되었으므로, 당시에 그의 명성이 자자하였고 남다른 모습이 신하의 상(相)이 아니라는 풍문이 돌았다. 이에 어사중승(御史中丞) 공도보(孔道輔)가 탄핵하기를, “얼굴은 예조(藝祖)와 같고 집은 건강(乾岡)으로 지었다.”라고 하였는데, 예조는 송 태조(宋太祖)를 말하고 건강(乾岡)은 집의 좌향(坐向)을 궁궐의 좌향인 건좌(乾坐)로 하였다는 말이니, 장차 반역을 범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宋史 卷278 王德用列傳 여기서는 공명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왕덕용이 발신(發身)을 위해 집을 지을 때 좌향을 건좌로 했다는 말이다.

103)흥망(興亡)이……했겠는가:연공(燕公)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재상 장열(張說)로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졌으므로 그렇게 칭한 것이다. 그가 무덤에 보토를 한 고사는 찾지 못하였다.

104)큰……식사하는:집이 커서 종을 울려 가족을 모으고 솥을 늘어놓고 음식을 해 먹는 부귀한 생활을 말한다. 古文眞寶後集 卷2 滕王閣序

105)속……걸:속이 빈 경쇠를 걸어 놓은 것처럼 집이 가난하여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國語 魯語上

106)집짓기를……완성하였다:귀신이 조화를 부린 듯이 단기간에 집이 완성되었다는 말이다.

107)동쪽에서……때:집이 위치한 지역의 산봉우리에 봄이 와서 꽃이 만개하였다는 말이다. 문봉(文峯)은 대본의 ‘한림지봉(翰林之峯)’을 번역한 것인데, 이 집의 주인이 학문의 성취가 있으므로 그 일대 산봉우리를 그렇게 칭한 것으로 보인다.

108)이만하면……훌륭하고:집의 규모가 이 정도면 충분히 갖추어졌고 아름답다고 만족해하는 말이다. 이것은 공자가 위(衛)나라 공자(公子) 형(荊)을 평가하기를, “그는 집안 살림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다. 처음 살림을 나서 재물을 소유하게 되자, ‘이만하면 모여졌다.’ 하였고, 조금 더 장만하게 되자, ‘이만하면 충분히 갖추었다.’ 하였고, 부유하게 되자, ‘이만하면 충분히 훌륭하다.’ 하였다.[善居室 始有曰 苟合矣 少有曰 苟完矣 富有曰 苟美矣]”라고 한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論語 子路

109)이제……되었다:이 말은 시경 사간(斯干)에, “여기에서 편안히 거하고 저기에서 편안히 처하며 여기에서 즐거이 웃고 저기에서 즐거이 말하네.[爰居爰處 爰笑爰語]”라고 한 구절에서 나온 것으로, 집을 낙성하고 난 뒤의 즐거운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110)정위(精衛)가……의지했고:신농씨(神農氏)의 딸이 동해에서 놀다가 빠져 죽었는데, 그 원혼이 정위라는 새가 되어 서산(西山)의 나무와 돌을 물어다가 동해를 메우려고 했다는 고사가 있다. 山海經 北山經 여기서는 집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할까 의심하면서도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으며 지켜봤다는 말이다.

111)우공(愚公)이……놀랐다:북산(北山)의 노인이 왕옥산(王屋山)을 옮기려고 날마다 삼태기를 가지고 산을 파서 날랐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를 말한다. 列子 湯問 여기서는 산을 옮기는 것처럼 집을 완성하기 어렵다고 여기면서도 그것이 금방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말이다.

112)이곳에서……것이니:진(晉)나라 헌문자(獻文子) 조무(趙武)의 새집이 준공되자 대부들이 가서 축하하였다. 그 자리에서 장로(張老)가 말하기를, “규모가 크고 화려하여 아름답도다. 제사 때에도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사 때에도 여기에서 곡읍을 하고, 연회 때에도 여기에서 국빈과 종족을 모아 즐기리로다.[美哉輪焉 美哉奐焉 歌於斯 哭於斯 聚國族於斯]”라고 하니, 헌문자가 장로의 말을 되풀이하면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자, 군자들이 축사와 답사를 모두 잘했다고 칭찬하였다. 禮記 檀弓下 여기서는 이 집에서 가족들이 애환을 나누며 살 것이라는 말이다.

113)위씨(魏氏)……황모란:옛날 낙양(洛陽)의 요씨(姚氏) 민가(民家)와 위인보(魏仁溥)라는 재상의 집에 진귀한 모란꽃이 피었는데, 요씨 집에는 노란 모란꽃이 피고 위인보의 집에서는 붉은 모란꽃이 피었다고 한다. 洛陽牧丹記 花釋名 여기서는 이 집의 정원에 붉은 모란꽃과 노란 모란꽃이 많이 피어 있다는 말이다.

114)회남(淮南)……울린다:한(漢)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신선이 되어 승천할 때, 그가 먹다가 남긴 선약(仙藥)을 핥아 먹고 그 집의 닭과 개도 뒤따라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論衡 道虛 여기서는 이 집의 하늘 위에서 신선을 따라 올라간 닭과 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말하여, 이곳이 신령스러우며 은자가 거처할 만한 곳임을 드러내고 있다.

115)소산(小山)의……보네:회남왕 유안에게 초빙된 문객 중에 소산이라 일컫던 부류들이 있었는데, 여기에 속한 문사(文士)가 지은 초은사(招隱士)라는 시부(詩賦)의 첫 행에 “계수나무 떨기로 나니 산 더욱 그윽하다. 구불구불 길게 뻗어 가지 서로 얽혔구나.[桂樹叢生兮山之幽 偃蹇連蜷兮枝相繆]”라는 구절이 있는데, 은자가 사는 곳의 산속 풍경을 읊은 것이다. 楚辭 招隱士 그때 소산의 문사가 읊었던 은자의 거처는 세월이 오래되어 황폐하게 되었을 것이나 이곳의 선경(仙境)은 다시 초은시를 짓고 노래할 만큼 신비롭고 아름답다는 말이다.

116)은대(銀臺)와……않았으리:은대는 신선 서왕모(西王母)가 사는 거처의 이름이며, 옥문(玉門)은 선궁(仙宮)을 말한다. 고산(孤山)은 서호(西湖)의 산 이름인데, 북송 때의 처사(處士) 임포(林逋)가 이곳에서 20년 동안 은거하면서 매화와 학을 기르며 살았다고 한다. 宋史 卷457 林逋列傳 여기서는 이곳의 비경을 살펴보니 은자가 살 만한 선경이므로 평생 은거했던 임포처럼 이곳에서 조용히 은거할 것이라는 말이다.

117) 김현주(金顯柱):일성록(日省錄)에 따르면 1893년(고종30) 5월 1일에 선전관이 되었고 1900년(광무4) 7월 13일에 함경도관찰부 주사(咸鏡道觀察府主事)로 임용된 기사가 있다.

118)부평초처럼……해서였고:수행하는 승려는 뽕나무 아래에서 쉴 때에도 같은 나무 아래에서는 세 번 이상 자지 않는데, 오래 머물다 보면 미련이 생길까 두려워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後漢書 卷30下 襄楷列傳여기서는 이 집 주인인 김현주가 벼슬을 그만두고 여러 곳을 전전했는데, 이는 한곳에 계속 머물다 보면 집착이 생길까 두려워서 그리했다는 말이다.

119)길몽(吉夢)을……부합됐다:한유(韓愈)의 전중소감마군묘명(殿中少監馬君墓銘)에 “어린 아들은 아름답고 예쁘며 조용하고 빼어나서 옥가락지나 옥귀고리와 같고 난초의 싹이 돋아난 것과 같으니, 그 집안의 아들에 걸맞았다.[幼子娟好靜秀 瑤環瑜珥 蘭茁其芽 稱其家兒也]”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4 여기서는 이 집 주인의 길몽은 훌륭한 아들을 얻을 상서로운 징조라는 말이다.

120)빈객으로……않았고:누호(樓護)는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의 인물로, 자는 군경(君卿)이다. 변론에 뛰어나면서도 항상 명절(名節)에 맞게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였고, 당시 권력가인 왕씨(王氏) 집안의 다섯 제후들과 어울리면서도 항상 위풍당당하였다고 한다. 漢書 卷92 游俠傳 樓護 여기서는 이 집의 주인이 젊은 시절에 권세가들과 어울리면서도 풍모가 당당하였다는 말이다.

121)만리후(萬里侯)에……드러났다:반초(班超, 33~102)는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서역(西域)을 정벌하여 50개 이상의 나라를 복속시킨 공(功)으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진 인물이다. 하루는 그에게 한 관상가(觀相家)가 말하기를, “그대는 제비의 턱에 범의 머리라 날아서 고기를 먹는 상이니, 이는 곧 만리후에 봉해질 상이다.[燕頷虎頭 飛而食肉 此萬里侯相也]”라고 하였는데, 후일에 그 관상대로 되었던 것이다. 後漢書 卷47 班梁列傳 班超 여기서는 이 집 주인이 그런 남다른 관상에 품고 있는 뜻이 컸다는 말이다.

122)종……싫어하였고:종 울리고 누수 다한 나이란 벼슬에서 물러나는 치사(致仕)의 때를 말한 것인데, 삼국 시대 위(魏)나라 사람 전예(田豫)가 임금에게 치사를 청하면서 “나이 70이 넘었는데도 자리에 있는 것은 마치 종이 울리고 물시계의 누수가 다 떨어졌는데도 쉬지 않고 밤새껏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年過七十而以居位 譬猶鐘鳴漏盡而夜行不休]”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三國志 卷26 魏書 田豫傳 그리고 도성에 이는 먼지 밟기 싫어하였다는 것은 도성의 번화하고 잡다한 생활에 싫증이 나 있었다는 말이다.

123)물……깨어났다:물 빠지고 서리 찬 가을이란 인생의 노년기를 말하는 듯하고 남쪽 가지 허황한 꿈이란 당(唐)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 홰나무의 남쪽 가지 아래에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괴안국(槐安國)에 가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깨어 보니, 홰나무 아래에 커다란 개미구멍이 있었다는 남가몽(南柯夢)의 고사를 말한 것이다. 여기서는 인생의 황혼기가 되자 허황한 영화를 쫓는 것이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124)드디어……본받아:송나라 때의 구양수(歐陽脩)는 자신이 한때 수령을 지냈던 영주(潁州)를 매우 사랑하여 사영시(思潁詩)를 지은 바 있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그곳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文忠集 卷44 思潁詩後序 여기서는 이 집의 주인도 은퇴한 뒤에 구양수처럼 시골로 물러나 전원생활을 할 생각을 품었다는 말이다.

125)호남(湖南)의……희망했다:하서(河西)는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호이다.  자는 후지(厚之)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로는 고향 장성(長城)으로 내려가서 조정의 부름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이 집의 주인이 은퇴한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서 선생이 살았던 호남으로 내려가 그 후예가 되고자 하였다는 말이다.

126)우뚝……전한다:푸른 주머니 속의 비서(祕書)란 곽박(郭璞)이 곽공(郭公)에게서 전해 받았다는 푸른 주머니 속의 비서를 말한다. 이 책 속에는 오행(五行), 천문(天文), 복서(卜筮), 의술(醫術)에 관한 6권의 서적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晉書 卷72 郭璞列傳 여기서는 곽공의 비서에는 풍수지리상의 길지(吉地)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는데, 그런 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집 주인이 살았던 백운산 산기슭의 집터는 봉황이 새끼를 거느린 형상의 길지라는 말이다.

127)푸른 절벽:대본에는 ‘翠璧’으로 되어 있으나 의미상 ‘구슬’이 아니라 ‘절벽’의 의미가 되어야 하고 ‘단애청벽(丹崖靑壁)’이라는 성어(成語)도 있으므로 ‘璧’을 ‘壁’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28)금술잔과……부합된다:금술잔은 좋은 터전이라는 뜻의 금잔지(金盞地)와 같은 뜻이며, 옥배(玉盃)도 비슷한 의미일 것으로 판단된다. 이곳의 터가 좋기는 하지만 훗날 부귀(富貴)를 성취할 분명한 길지(吉地)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붉은 벼랑과 푸른 절벽을 보면 이곳이 군자가 은거하기에 적합한 곳임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진(晉)나라 때 사람 송섬(宋纖)이 주천(酒泉)의 남산(南山)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주천 태수 마급(馬岌)이 그를 만나러 찾아갔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러자 마급이 탄식을 하면서 그곳의 석벽(石壁)에다 “붉은 벼랑이 백 장이고 푸른 절벽이 만 심이라네.[丹崖百丈 靑壁萬尋]”라는 시를 적어 두고 돌아갔다고 한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宋纖

129)양수(瀼水)……같다네:소릉(少陵)은 두보(杜甫)의 호이다. 두보는 사천성(四川省) 기주(夔州)에 있는 양수의 산천을 좋아하여 그곳의 동쪽과 서쪽으로 세 번이나 거처를 옮겨 가며 살았다고 한다. 杜甫全詩集 自瀼西荊扉且移居東屯茅屋 四首 법 공조(法功曹)는 후한 때의 은자인 법진(法眞)을 말한다. 그는 성격이 염정(恬靜)한 은자였는데, 태수가 그를 만나 보기를 청하자 하루는 복건(幅巾)을 쓰고 나아가서 만났다. 그 자리에서 태수가 공조(功曹)가 되어 자기를 도와주기를 청하자, 법진이 말하기를, “앞으로 만약 저를 수하(手下)의 관리로 쓰고자 하신다면 저는 장차 북산의 북쪽과 남산의 남쪽에 은거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공조는 지방 군현의 서사(書事)를 맡은 하급 관리를 말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法眞 여기서는 집 주인이 두보나 법진처럼 이곳으로 옮겨 와 살게 되었다는 말이다.

130)가도(賈島)가……있고:당나라 시인 가도의 시에 “병주에서 머문 지 십 년이 지나도록 늘 고향 함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무단히 다시금 상건수를 건널 제 돌아보니 병주가 고향처럼 느껴지네.[客舍幷州已十霜 歸心日夜憶咸陽 無端更渡桑乾水 却望幷州是故鄕]”라는 도상건(渡桑乾)이라는 시가 있는데, 타향도 오래 머물면 고향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全唐詩 卷472

131)토구(菟裘)와……만하였다:토구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지명이다. 춘추좌씨전은공(隱公) 11년 조에 “내 장차 토구 땅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늙으리라.”라고 한 은공의 말에서 나온 것으로, 이후로는 은거(隱居)의 의미로 쓰였다.

132)장 천사(張天師)……법이며:장 천사는 후한 때의 도사인 장도릉(張道陵)의 36대손 장종연(張宗演)이 지원(至元) 13년(1276)에 보한천사(輔漢天師)의 봉호를 받은 이래 민간에서 장도릉과 그 후손을 칭하는 말로 쓰였다. 장도릉 집안이 대대로 도사의 가업을 이어 온 것을 보면 도가에서도 자손을 낳아 기르고 사후에는 자손에게 의지한다는 말이다.

133)왕방평(王方平)이……있다:후한 때 사람 채경(蔡經)이 도사인 왕방평을 모시고 집을 떠났다가 10여 년 만에 돌아와서는 말하기를, “칠월 칠석에 왕군(王君)이 올 것이니, 수백 곡의 밥을 준비하여 따르는 권속들을 먹이도록 하라.”라고 하였는데, 과연 칠석이 되자 이들 일행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神仙傳 여기에서는 이 집의 주인이 이곳에 은거하여 살고 있는데, 도사들도 다 있는 자식이 아직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134)경관(京管)……완전무결하였고:경관은 역술가인 경방(京房)과 관로(管輅)를 말한다. 경방은 한나라 때 사람으로 초연수(焦延壽)에게 역학(易學)을 배웠고 경씨역전(京氏易傳)을 저술하였으며, 관로는 위(魏)나라 평원(平原) 사람이고 자는 공명(公明)이며 점서(占筮)의 명인이다. 여기서는 유명한 역술가에게 새집을 짓기 위한 기공(起工) 날짜를 택일하였다는 말이다.

135)반수(班倕):춘추 시대 유명한 장인(匠人)인 공수반(公輸班)과 요(堯) 임금 때의 뛰어난 장인인 수(倕)를 합칭한 말이다.

136)마을……있었으니:송나라 때 사람 풍경(馮京)의 아버지는 장사꾼이었는데, 장년(壯年)이 되도록 자식이 없었다. 어느 날 그가 서울로 가려 하자, 부인이 돈을 주면서 첩을 구해 자식을 낳아오게 하였다. 그가 서울로 올라가서는 첩을 사서 약정서를 쓰고 팔려 온 이유를 물었는데, 첩이 울면서 말하기를, “아버지가 독량관(督糧官)인데, 양곡이 축이 나서 몸을 팔아 갚으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 말을 듣자 측은한 생각이 들어 그냥 그녀에게 돈을 주어 돌려보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의 일을 아내에게 다 고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낭군의 마음씨가 이러한데, 어찌 후사가 없을까 걱정하겠소.” 하였는데, 수개월 뒤에 과연 아내가 임신을 하였다. 그 뒤 아이를 낳으려고 할 때,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이 북 치고 피리 불며 장원 급제자를 맞이하는 꿈을 꾼 뒤에 풍경을 낳았다고 한다.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人事類 性行 操行鄕里辨證說

137)정원……되었다:진(晉)나라 때의 명사(名士)인 사안(謝安)이 자제들에게 묻기를, “왜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 하자, 조카인 사현(謝玄)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마치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자기 집의 정원에서 자라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고 한다. 晉書 卷79 謝玄列傳 여기서는 좋은 길몽을 꾸었으니 훌륭한 아들을 보게 되리라는 말이다.

138)소명윤(蘇明允):명윤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순(蘇洵)의 자이다. 호는 노천(老泉)이다.

139)소요부(邵堯夫)가……얻었다:요부는 송나라 때의 학자인 소옹(邵雍)의 자이다. 시호는 강절(康節)이다. 소옹은 40세 때 왕윤수(王允修)의 누이에게 장가들어 2년 뒤에 아들 소백온(邵伯温)을 낳았고, 그 뒤에 다시 둘째 아들 소중량(邵仲良)을 낳았다.

140)남모르는……것이다:음덕이 귀가 우는 것과 같다는 것은, 남이 모르게 은혜를 베푸는 음덕은 마치 귀가 우는 이명(耳鳴)과 같아서 자기만 알고 남은 모르는 것이다. 이 집 주인 부부가 그동안 음덕을 베풀었으므로 이 땅을 빛낼 귀한 아들을 얻는 것으로 하늘의 보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141)하늘가……듯하여라:당나라 현종(玄宗) 때 재상을 지낸 장구령(張九齡)의 어머니는 아홉 마리의 학이 하늘에서 정원으로 날아와 내려앉는 꿈을 꾸고 장구령을 낳았다고 한다. 事文類聚 卷5 人倫部 誕子 여기서는 이 집 주인 부부가 아들을 잉태하는 길몽의 징조가 있다는 말이다.

142)의남초(宜男草):풀 이름으로 훤초(萱草)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임신한 부인이 허리에 차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차고 다녔다고 한다.

143)시경의……나아오네:잡패(雜佩) 삼장은 시경 <여왈계명(女曰雞鳴)>을 말하는데, 그 시의 마지막 장에 “그대가 초대한 분이라면 패물 풀어 선물하고 그대가 사랑하는 분이라면 패물 풀어 드리며 그대가 좋아하는 분이라면 패물 풀어 보답하리.[知子之來之 雜佩以贈之 知子之順之 雜佩以問之 知子之好之 雜佩以報之]”라고 하여 ‘잡패(雜佩)’ 구절이 세 번 나온다. 그리고 오리와 기러기 구(句)는 <여왈계명>의 첫 장에 “닭이 울었다고 아내가 말하자 남편은 먼동이 튼다고 말하네. 그대는 일어나 밖을 내다보세요. 하늘에는 계명성이 찬란할 테니 이제는 천천히 밖으로 나가서 주살로 오리와 기러기를 잡으세요.[女曰雞鳴 士曰昧旦 子興視夜 明星有爛 將翱將翔 弋鳧與雁]”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여왈계명>의 부부처럼 이 부부도 금슬이 아주 좋아서 화합이 잘되고 있으며, 그 결과로 행하는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말한 것이다.

144)가인괘(家人卦)가……되었네:주역가인괘는 가정에 질서가 잡혀서 집안이 잘 다스려짐을 말한 괘이고, 대장괘(大壯卦)는 크게 장성하여 길하고 형통함을 말한 괘이다. 이 집 주인 부부가 화목하므로 이제 길하고 형통한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145)산동(山東)에……그러하리라:한서(漢書) 권69 조충국전 찬(趙充國傳贊)에 보면 “진한(秦漢) 이래로 산동에서는 재상이 나왔고 산서에서는 장수가 나왔다.[秦漢以來 山東出相 山西出將]”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이런 길지에서 음덕을 베푼 부부가 훌륭한 아들을 낳으면 장차 그 자손이 크게 현달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146)이상한……깨누나:시경 <사간(斯干)>에 “곰이나 큰곰의 꿈을 꾼 것은 사내아이 낳을 상서로운 꿈이고 큰 뱀이나 뱀의 꿈을 꾼 것은 계집아이 낳을 상서로운 꿈이라네.[維熊維羆 男子之祥 維虺維蛇 女子之祥]”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 집 주인 부부의 다정한 금슬로 사내아이를 잉태할 길몽을 꾸었다는 말이다.

147)재덕이……키우고:옛날에 황후의 모든 행동을 기록하는 여사(女史)가 있었는데, 만약에 허물이 있는데도 기록하지 않으면 사형으로 처벌하였다. 詩經 靜女 註 여기서는 딸을 낳으면 모든 행동거지가 허물이 없는 현덕한 여자로 키우기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148)이곳……권한다:논어 미자(微子)에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 함께 밭을 갈고 있는데 공자가 그곳을 지나다가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터를 물어보게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는 이 집안의 자손이 번성하고 이 지역을 빛내어 학문과 덕행을 물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원한다는 말이다.

149)희남문(曦南門) 청조루(聽潮樓):청조루는 전라도 광양성(光陽城)의 문루(門樓)이다. 1925년 간행된 광양읍지(光陽邑志)에 따르면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때에 농민군 진압에 나선 좌수영(左水營)의 군사들에 의해 전소된 것을 1901년(광무5)에 군수 이중익(李重翼)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150)강호(江湖)에……절경이고:창문(閶門)은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의 서문(西門)인데,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세운 것이다. 창문의 밖에는 동서로 가로지른 호수가 있는데, 수천 그루의 버들이 절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151)오초(吳楚)……자리했다:악양루(岳陽樓)는 호남성(湖南省) 악양현(岳陽縣)에 있는 누각이다. 앞으로는 파릉(巴陵)의 동정호(洞庭湖)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므로 오초 지역을 제압하듯 서 있다고 한 것이다. 누각 뒤로는 번화한 거리가 벌여 있다.

152)중요한……점이다:성문의 본래 역할은 풍경을 위해서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방어와 경비의 목적도 중요한데, 창문과 악양루의 경우에는 풍경의 아름다움만으로 이름이 났다는 말이다.

153)집 안의……최상이다:광양은 앞에 바다가 보이므로 집 안의 책상에 앉아서도 유람을 하듯 고래와 붕새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문의 누대가 경계와 방비의 본래 목적을 유지하면서도 앞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도 조망할 수 있는 기능까지 할 수 있도록 청조루를 세우게 되었다는 말이다.

154)아녀자도……추앙한다:강목부(綱目賦)는 최산두(崔山斗)가 지은 부(賦)의 이름이다. 신재(新齋)는 최산두의 호인데, 자는 경앙(景仰)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그는 대대로 광양에 살았고 윤구(尹衢), 유성춘(柳成春)과 더불어 호남 삼걸(湖南三傑)이라 일컫는다. 문장이 호방하였고, 그중에서도 <강목부>는 당대에 널리 회자되었다고 한다. 海東雜錄 卷1 本朝 崔山斗 여기서는 유명한 광양 사람으로는 <강목부>를 지은 신재 최산두가 있다는 말이다.

155)남쪽……때문일까:과거에는 광양도 변경의 요충지로서 성곽이 둘러 있었는데, 희남문 청조루가 처음 세워질 때까지는 성곽의 터는 있으나 성문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화려함보다는 간략함을 추구하던 중고 시대의 풍조 때문이 아니라 아래 내용과 같은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156)성곽에서……것이다:성곽에는 성과 함께 성문도 중요하므로 둘 다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157)연못……당하였다:춘추 시대 송(宋)나라 성문에 불이 났는데, 옆에 있는 연못의 물을 퍼서 불을 끄는 바람에 물이 고갈되어 고기들이 모두 죽게 되었다고 한다. 太平廣記 卷466 水族4 여기서는 죄 없는 백성이 토벌 과정에서 화를 당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158)갑(甲)에게……대었고:매영(梅營)은 여수(麗水)에 있었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을 일컫는 말로, 그 일대에 매화가 많아서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관군이 동학군을 토벌하면서 여수를 비롯한 호남 일대의 농민들을 살육하고 불을 많이 질렀는데, 이를 말한 것이다.

159)불로……되었다:서경 <윤정(胤征)>에 “곤륜산에 불이 나면 옥과 돌이 모두 탄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난리가 나면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모두 화를 당한다는 비유로 한 말이다. 여기서는 토벌하는 과정에서 화재로 청조루가 불타서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는 말이다.

160)발해 태수(渤海太守)……처결했다:공수(龔遂)는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 발해 태수로 있으면서 큰 치적을 남긴 관리이다. 조광한(趙廣漢)도 한나라 선제 때 사람인데, 그가 영천 태수로 갔을 때 토호들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도록 유도하고 몰래 상대의 잘못을 들추어내게 하는 방법으로 고을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漢書 卷76 趙廣漢傳 여기서는 광양에 수령으로 온 관리가 정사를 잘 처리하고 폐단을 시정하는 정책을 펴서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는 말인데, 청조루 중건 당시의 군수 이중익을 말한다.

161)공사에……사용했고:한비자(韓非子) <십과(十過)>에 보면, 화살을 만들기 위해 울타리로 심은 고(楛)나무를 뽑아 쓰고 화살촉을 만들기 위해 집의 구리 기둥을 떼어 썼다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는 기존의 보관 비품들을 다 꺼내어 건축 자재로 충당하였다는 말인 듯하다.

162)토규(土圭)로……측량했고:토규는 주(周)나라 때 해 그림자의 길이를 재어 토지를 측량하던 기구이다. 여기서는 건물을 세우기 위해 정확하게 땅을 측량하였다는 말이다.

163)허공에……정도이고:현공판(懸空板)은 성 위의 공중에 설치한 판(板)이고 호심란(護心欄)은 성 위에 있는 사람의 신체를 가리는 난판(欄板)으로, 둘 다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장치이다. 여기서는 성루(城樓)를 만들면서 적을 방비하는 장치들을 설치하였다고 말하여, 이 성루가 성문이 가져야 하는 두 가지 요소 중에 방어의 기능을 제대로 갖추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164)발을……자극한다:‘발을 걷고 보는 비와 구름 머무는 마룻대’란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그림 그린 마룻대엔 아침에 남포의 구름이 흘러가고 붉은 주렴 저녁에 걷으니 서산에 비가 내린다.[畫棟朝飛南浦雲 珠簾暮捲西山雨]”라는 구절을 줄이고 변용한 것이다. 원시의 의미대로 하자면 ‘권우렴 비우동(捲雨簾飛雨棟)’으로 표현해야 하지만 이를 변용하여 새로운 느낌이 들도록 배치하였는데, 이를 통해 개성을 강조하는 매천 작법의 실례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이 성루가 시인이 올라와서 보면 창작의 감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여, 성문이 가져야 하는 두 가지 요소 중에 아름다운 경관의 기능도 지녔음을 강조하였다.

165)이 문……충분하다:지금 이 성루의 완성은 난폭한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성문 본래의 역할을 행하게 되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고을 수령의 뛰어난 정사로 인해 이루어진 치적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166)누대에……처지이다:왕찬(王粲)은 후한 말기와 삼국 초기의 인물로, 객지를 떠돌다 형주(荊州)의 성루(城樓)에 올라가 고향을 그리며 때를 만나지 못한 시름을 토로한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 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백란(伯鸞)은 후한 부풍(扶風) 평릉(平陵) 사람 양홍(梁鴻)의 자이다. 그는 아내 맹광(孟光)과 함께 고향을 떠나 패릉(覇陵)의 산중에 들어가 은거하며 농사짓고 살았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梁鴻 매천은 자신을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살았던 왕찬이나 양홍 같은 신세라고 말하고 있는데, 광양은 매천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지만 지금은 타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167)어찌……자랑하랴:북송 때의 구양수(歐陽脩)는 길주(吉州) 여릉(廬陵) 사람인데, 그가 쓴 <취옹정기(醉翁亭記)>에 “태수는 누구인가? 여릉 사람 구양수이다.[太守謂誰 廬陵歐陽脩也]”라고 하여 자신이 여릉 출신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古文眞寶後集 卷6여기서는 매천 자신이 광양 태생이지만 구양수처럼 출신지를 밝힐 수 있을 만큼 당당한 처지는 아니라는 말이다.

168)상건(桑乾)……느낀다:412쪽 주130 참조. 타향도 오래 머물면 고향처럼 느껴진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고향 광양을 떠나 구례에 머물고 있지만 거기에 오래 살다 보니 그곳도 고향으로 생각된다는 말이다.

169)화표주(華表柱)에……기쁘고:요동(遼東)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이 되어 떠났다가 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요동 성문의 화표주에 내려앉았다가 다시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搜神後記 卷1 여기서는 매천이 다시 고향 광양에 돌아와 살펴보니, 옛 성곽의 모습이 별고 없이 있는 게 기쁘다는 말이다.

170)진펄……하노라:진펄 밟은 기러기가 날아간다는 것은, 돌아가는 기러기가 다시 올 때를 생각하여 눈 녹은 진펄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날아가는데, 다시 눈이 와서 덮이면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소식(蘇軾)의 시구에서 온 말이다. 分類東坡詩 卷16 和子由澠池懷舊 여기서는 매천이 다시 광양을 떠나게 될 것이므로 이 글을 써서 이름을 남기고자 한다는 말이다.

171)장로(張老)……올린다:406쪽 주112 참조.

172)변경……살아가네:요(堯) 임금 때의 격양가(擊壤歌)에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면서 내 샘 파서 물 마시고 내 밭 갈아 밥 먹으니, 임금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 있으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라는 말이 있다. 요 임금의 교화가 미치는 줄도 모를 만큼 태평한 시절임을 말한 것인데, 여기서도 전쟁이 종식된 지 오래되었고 수령의 치적으로 덕화가 미쳐서 백성이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173)한동안……끊겨서라네:변방의 북소리란 전쟁을 의미하는 말로, 여기서는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소와 양이 들판에 넘쳐난다는 말이다.

174)일월……기수(氣數)라네:해와 달이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의 분도(分度)에 모이는 것을 ‘일월합벽(日月合璧)’이라 하고, 금성ㆍ목성ㆍ수성ㆍ화성ㆍ토성의 오성이 구슬을 꿴 듯 한 방위에 연달아 나타나는 것을 ‘오성연주(五星連珠)’라고 한다. 상원(上元)의 기수라는 것은 연월일이 모두 갑자(甲子)인 때로, 이때에 바로 일월합벽과 오성연주의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는 매우 상서로운 운수이며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징조라고 한다. 여기서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시작된 것을 비유한 말인 듯하다.

175)민가(民家)마다……퍼진다:한(漢)나라 때 사람 염범(廉范)이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있을 때이다. 그곳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화재가 자주 났는데, 이전 태수는 밤에 불을 켜지 못하게 하여 여자들이 길쌈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염범이 부임해서는 방화수(防火水)를 준비하게 하고 불을 켜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백성이 기뻐하며 노래하기를, “우리 염숙도여, 왜 이리 더디 오셨는가. 불을 금하지 않으시어 백성 편케 되었구나. 평생 속옷도 없다가 이젠 바지가 다섯 벌이네.[廉叔度 來何暮 不禁火 民安作 平生無襦 今五袴]”라고 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31 廉范列傳 여기서는 수령의 어진 정사로 백성이 편안한 생활을 누리며 송가(頌歌)를 부르고 있다는 말이다.

176)금학(琴鶴)……칭송하네:금학 풍류란 송(宋)나라 때 조변(趙抃)이 성도(成都)의 전운사(轉運使)로 부임할 적에 거문고 하나와 학 한 마리만 가지고 갔다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夢溪筆談 人事1 여기서는 이 고을의 수령이 매우 청렴하여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177)성……누구인가:후영(侯嬴)은 전국 시대 위(魏)나라의 은사이며 신릉군(信陵君)의 빈객이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이문(夷門)을 지키는 미관말직에 있었는데, 신릉군이 그의 현덕을 전해 듣고는 직접 가서 맞이해 와 상객(上客)으로 삼았다고 한다. 史記 卷77 魏公子列傳 여기서는 이곳의 성문을 지키고 순라를 도는 사람 중에도 후영과 같은 인물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178)구준(寇準)이……일었고:구준은 북송 때의 명재상이다. 자는 평중(平仲)이고 거란(契丹)을 친 공로로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졌으므로 구 내공(寇萊公)이라 불렸다. 그가 대명부(大名府)를 맡아 지킬 때에 요(遼)나라 사신이 와서 구준에게 말하기를, “상공(相公)은 명망이 높은데 어찌하여 중서성(中書省)에 있지 않고 여기 있습니까?” 하니, 구준이 말하기를, “임금이 북문의 방비는 구준이 아니면 안 된다 하시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宋史 卷281 寇準列傳 여기서는 구준이 변경을 지킬 때 오랑캐가 침범하지 못했듯이 이곳에도 튼튼한 방비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179)유량(庾亮)이……희망한다:진(晉)나라 때의 유량이 무창 도독(武昌都督)으로 있을 때, 밝은 달밤에 부하들이 풍월을 즐기고 있는 남루(南樓)에 올라가서 주연을 함께하며 격의 없이 즐겼던 일을 말한다. 世說新語 容止 여기서는 앞으로 이 누대에서 달구경 하면서 전쟁 없이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180)상사(上沙):구례 마산면(馬山面) 사도리(沙圖里)에 있는 상사 마을을 말한다. 이곳은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공부했던 곳이라고 한다.

181)흰……났고:진(晉)나라 때 배해(裴楷)가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자, 혜제(惠帝)가 왕연(王衍)을 보내 병문안을 하였는데, 왕연이 벽을 향해 누워 있다가 돌아보는 배해의 눈을 한 번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두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이 마치 바위에 내려치는 번갯불과 같았다.[雙眸閃閃 若巖下電]”라고 했다고 한다. 世說新語 容止 여기서는 이 집 주인의 용모와 눈빛이 남달랐음을 말한 것이다.

182)백……않았고:후한 때 문무를 겸하고 지략이 뛰어났던 진등(陳登)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허사(許汜)가 그의 인물됨을 평가하기를, “전에 그를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는 주객(主客)의 예의도 없이 자기는 큰 침상에 올라가서 자고 손님은 아래 와상에 눕게 하더라.” 하니, 유비(劉備)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취할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소인(小人) 같았으면 자신은 백 척의 누대에 올라가 눕고 그대는 땅바닥에 눕게 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三國志 卷7 魏書 陳登傳 여기서는 주인의 의기가 진등처럼 대단함을 말한 것이다.

183)어찌하면……생각했다:두보(杜甫)의 시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에 “어찌하면 천만 칸의 너른 집을 얻어서는 천하의 한사들을 크게 감싸 주어서 다들 기쁜 얼굴로 풍우에도 끄떡없이 산처럼 편안하게 살게 할 수 있을까.[安得廣厦千萬間 大庇天下寒士俱歡顔 風雨不動安如山]”라는 구절을 변용한 것이다. 杜少陵詩集 卷10 여기서는 이 집 주인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큰 뜻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184)비바람을……편안했고:왕통(王通)은 수(隋)나라 용문(龍門) 사람으로 자는 중엄(仲淹)이고 사시(私諡)는 문중자(文中子)이다. 그에게 당시의 권신(權臣)인 양소(楊素)가 벼슬을 권유하자, 그가 말하기를, “나에게는 선인이 남겨 준 오두막이 있으니 비바람을 피하기에 충분하고, 땅뙈기가 조금 있으니 죽을 끓여 먹고 살기에 충분하고, 글을 읽고 도를 담론하니 스스로 즐기기에 충분하다.[通有先人之敝廬 足以庇風雨 薄田足以供餰粥 讀書談道 足以自樂]”라고 사양하고는 하분(河汾), 즉 하수(河水)와 분수(汾水) 사이에서 강학(講學)에 주력하였다고 한다. 御批歷代通鑑輯覽 卷47 龍門王通獻策不報 여기서는 물려받은 집이 비바람을 가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주인이 그곳에서 자족하며 살고 있다는 말이다.

185)집의……내었다:평천(平泉)은 당(唐)나라 때의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장인 평천장(平泉莊)을 말하는데, 이덕유는 평천수석기(平泉樹石記)를 지을 정도로 이곳의 수석(樹石)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평천산거계자손기(平泉山居戒子孫記)에서 “후대에 이 평천을 파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며, 평천의 나무 하나 돌 하나를 남에게 주는 자는 훌륭한 자제가 아니다.[後代鬻平泉者 非吾子孫也 以平泉一樹一石與人者 非佳子弟也]”라며 자손을 경계하는 글을 남겼다. 事文類聚 續集 卷9 居處部 園池 여기서는 주인이 선친의 뜻을 지켜 집을 잘 보존하였다는 말이다.

186)적미(赤眉)와 청독(靑犢) 무리:모두 한(漢)나라 말기에 일어났던 적도(賊徒)들을 일컫는 말이다.

187)술이……없었고:회남자(淮南子) 범론훈(氾論訓)에 “지금 낙숫물 방울도 충분히 항아리를 채워 넘치게 할 수 있지만, 강하의 큰물도 새는 술잔은 채울 수 없나니,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은 것이다.[今夫霤水足以溢壺榼 而江河不能實漏巵 故人心猶是也]”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새는 술잔처럼 계속되는 비적들의 요구를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재물이 바닥이 났다는 말인 듯하다.

188)정강성(鄭康成)처럼……모면하고:강성은 후한 말기의 학자 정현(鄭玄, 127~200)의 자이다.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으로 천도했을 때 공경들이 모두 정현을 조(趙)의 상(相)으로 삼았는데, 길이 끊겨 가지 못하였다. 이때 정현은 황건적(黃巾賊)을 피해 서주(徐州)로 피신하여 난리를 모면하였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189)풍경통(馮敬通)처럼……돌아왔다:풍경통이 대본에는 ‘馮仲通’으로 되어 있는데, 후한서 권28상 풍연열전(馮衍列傳)에 의거하여 ‘仲’을 ‘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경통은 후한 때의 인물인 풍연(馮衍)의 자이다. 처음에는 왕망(王莽)을 섬기다가 뒤에 광무제(光武帝)를 섬겼는데, 광무제가 외척을 처벌하는 과정에 그가 연관되자, 곧바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평생을 은거하였다.

190)드디어……넉넉했고:청낭(靑囊)의 비서(祕書)는 곽박(郭璞)이 곽공(郭公)에게서 전해 받았다는 청낭, 즉 푸른 주머니 속의 비서를 말하는데, 천문․지리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晉書 卷72 郭璞列傳 여기서는 그러한 지리서(地理書)를 상고하여 살펴보니 이 집터가 재운(財運)이 있는 길지(吉地)라는 말인 듯하다.

191)남아……왔고:재산이 얼마 되지 않다 보니 건축 비용을 줄이기 위해 넓은 길에 있는 어떤 집을 구해 그 재목을 해체하여 옮겨 와 지었다는 말인 듯하다.

192)눈을……만하였고:진서(晉書) 권84 왕공열전(王恭列傳)에 “왕공이 언젠가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눈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맹창(孟昶)이 울타리 사이로 이 광경을 엿보고는 참으로 신선 세계의 사람이라고 찬탄했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새로 지은 집의 난간이 풍경을 감상하며 시를 읊기에 매우 좋다는 말이다.

193)달빛……만하였다:한(漢)나라 때 장후(蔣詡)가 벼슬에서 물러나 두릉(杜陵)에 은거할 때, 대밭 아래에 세 갈래 오솔길을 만들고는 이 길을 절친한 벗인 양중(羊仲)과 구중(裘仲)하고만 거닐었다고 한다. 文選 卷26 奉答內兄希叔 여기서는 이 집의 처마 아래가 절친한 사람들과 산보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말이다.

194)그렇지만……한다:주역》 〈겸괘(謙卦) 단(彖)에 “귀신은 가득 찬 것을 해치고 겸손한 것에 복을 준다.[鬼神害盈而福謙]”라는 말이 있으며, 양웅(揚雄)의 해조(解嘲)에 “고명한 집은 귀신이 반드시 그 방을 엿본다.[高明之家 鬼瞰其室]”라는 말이 있다. 文選 卷45 解嘲 여기서는 항상 겸손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집주인에게 경계의 말을 한 것이다.

195)재물은……잘하였고:405쪽 주108 참조. 여기서는 맹목적으로 부귀를 추구하지 않고 위(衛)나라 공자(公子) 형(荊)처럼 항상 현재에 만족하며 겸허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집 주인에게 경계의 의미로 말한 것이다.

196)부귀는……것이다:한(漢)나라 때 사예교위(司隸校尉)로 있던 합관요(蓋寬饒)가 당시의 귀족인 평은후(平恩侯) 허백(許伯)의 집 낙성식에 가서 얼큰하게 술이 취하자, 새집을 쳐다보며 말하기를, “참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부귀는 한곳에 머물지 않고 소홀히 하면 사람을 바꾸는 것이 마치 많은 사람이 거치는 여관과 같습니다. 오로지 신중하고 삼가야만 이를 오래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군후께서는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太平御覽 卷181 居處9 여기서는 부귀할수록 신중하고 삼가야 한다고 집 주인을 경계한 것이다.

197)안영(晏嬰)이……말하였고:안영의 집이 시장에 가까워 시끄러울뿐더러 너무 좁아서 살기에 적합하지 않자, 제 경공(齊景公)은 안영이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이에 집을 새로 지어 주었다. 안영이 돌아와서 이를 보고는 경공에게 감사를 표한 뒤에 즉시 그 집을 헐고 민가를 지어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원래 거주하던 백성에게 되돌아와 살게 하면서 말하기를, “속담에 ‘집터를 점치지 않고 오직 이웃을 점친다.’ 하였다. 여러분이 먼저 이웃을 점쳐 이곳에 살아왔으니, 그 점을 어기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군자는 잘못된 예(禮)를 행하지 않고 소인은 상서롭지 못한 일을 범하지 않는 것이 옛 제도이다. 내가 어찌 감히 그 제도를 어기겠는가.”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昭公3年 여기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부귀를 추구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므로 안영의 사례를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198)장로(張老)의……평하였다:진(晉)나라 대부 조무(趙武)의 새집이 준공되자 대부들이 가서 축하하였다. 그 자리에서 장로가 말하기를, “규모가 크고 화려하여 아름답도다. 제사(祭祀) 때에도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사(喪事) 때에도 여기에서 곡읍(哭泣)하며, 연회 때에도 여기에서 국빈과 종족을 모아 즐기리로다.[美哉輪焉 美哉奐焉 歌於斯 哭於斯 聚國族於斯]”라고 하였는데, 장로가 이런 말을 한 의도는 새집이 지나치게 화려한 것이 싫었으므로 그 자손들이 다시 이런 화려한 건축을 하는 일이 없도록 예방하고자 한 것이었다. 조무가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장로의 말을 되풀이하며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자, 군자들이 축사와 답사를 모두 잘했다[善頌善禱]고 칭찬하였다. 禮記 檀弓下 여기서는 매천 자신이 축하의 뜻과 함께 경계의 의미로 한 이상의 말들을 주인이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199)대대로……보존하리라:현성(玄成)은 한나라 원제(元帝) 때의 승상 위현성(韋玄成)을 말한다. 아버지 위현(韋賢)과 할아버지 위맹(韋孟)까지 삼대가 경학에 밝아 명망이 높았고 모두 현달하였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손에게 황금 한 바구니를 물려 주는 것보다 경전 하나를 가르치는 것이 낫다.[遺子黃金滿籯 不如一經]” 하였다. 漢書 卷73 韋賢傳 문정공(文靖公)은 이 집 주인의 조상 중에 문정이라는 시호를 지닌 사람으로 짐작되나 주인의 성명을 알 수 없으므로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여기서는 이 집 주인의 집안이 대대로 학문을 한 집안이므로 이를 이어 학문을 깊이 있게 해 나간다면 이 집의 멋진 경관이 문정공의 청빈한 뜻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200)서문표(西門豹)의……바이다:전국 시대 위(魏)나라 서문표는 자신의 성미가 급하자 이를 고치려고 부드러운 가죽을 몸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韓非子 觀行 여기서는 새집 낙성을 축하하는 의미와 함께 경계가 되는 말도 덧붙였으니 이해해 달라는 말이다.

201)신선인……그윽하리:옥보고(玉寶高)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의 사람으로 사찬(沙飡) 공영(恭永)의 아들이다. 지리산의 운상원(雲上院)에서 50년 동안 거문고의 기법을 익혔다. 그리고 금오산(金鰲山)의 금송정(琴松亭)은 그가 거문고를 연주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가 직접 새로운 곡조 30곡을 만들어 연주하니,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그 거문고를 현학금(玄鶴琴)이라고 하였다. 전하는 말로는 그가 신선의 도(道)를 얻어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8 제21권 경상도 경주부 이 구절이 대본에는 ‘手招仙人玉寶 援琴學寫松風’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援琴學’의 ‘學’자는 이상의 근거로 볼 때 ‘鶴’의 오자로 판단된다. 동쪽으로 달이 밝게 떠 있는 지리산을 바라보니 그곳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던 옥보고가 생각났고, 그를 불러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면 송풍곡(松風曲)이 아름다울 것이라고 상상한 것이다. 송풍곡은 거문고 곡조 이름이다.

202)도선 국사(道詵國師) 옛 암자:지금 상사(上沙) 마을의 남쪽을 바라보니 도선 국사의 옛 암자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 암자는 구례군 문척면(文尺面) 죽마리(竹麻里)에 있는 사성암(四聖庵)을 가리킨다. 이곳은 연기 조사(緣起祖師), 원효대사(元曉大師), 도선 국사, 진각 국사(眞覺國師)가 수도하던 곳이다.

203)모래사장에……없는가:이곳 구례 마산면(馬山面) 사도리(沙圖里)의 상사(上沙)는 모래사장이 있어서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사도리는 도선 국사가 그 모래사장에서 산천(山川)의 형세를 그렸다고 하여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204)작년에……하네그려:오의항(烏衣巷)은 동진(東晉) 때 왕씨(王氏)와 사씨(謝氏) 등의 거족(巨族)이 살면서 번성해진 지역이다. 당(唐)나라 때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오의항이란 시를 읊기를, “주작교 근처에는 야생화만 피어 있고 오의항 어귀에는 쓸쓸히 해가 진다. 그 옛날 왕씨, 사씨 살던 집의 제비들 이제는 평범한 민가로 날아든다.[朱雀橋邊野草花 烏衣巷口夕陽斜 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라고 하였는데, 이 시는 한때는 거족들이 살면서 번성했던 오의항이 지금은 쇠락하여 쓸쓸해진 것을 보면 인생이 무상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는 작년의 제비가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오의항을 연상하였고 지금 이 집안도 예전의 오의항처럼 번성하고 앞으로도 그러하기를 축원하고 있는 것이다.

205)산천……논하리라:이 집의 아름다운 경관에 심취하여 시인들이 모여들 것이고 주인은 그들과 시를 읊고 논하며 즐거이 세월을 보낼 것이라는 말이다.

206)모계정사(茅溪精舍):함안(咸安)과 안동(安東) 등에도 동명의 정사가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모계정사는 구례(求禮)의 매천이 살았던 지역 인근에 있었던 정사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자료는 찾지 못하였다.

207)평여(平輿)의……추앙하고:후한 때의 평여 사람인 허소(許劭)와 허건(許虔) 형제를 두고 여남(汝南) 사람들이 평여의 못에 두 마리 용이 났다고 칭송하였다. 後漢書 卷68 許劭列傳 여기서는 이 집 주인을 두고 인근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는 말이다.

208)너른……않았고:너른 집에서 한사(寒士)를 감싸 준다는 것은 두보(杜甫)의 시에서 나온 구절로, 가난한 사람들을 포용하고자 하는 큰 뜻을 지녔다는 말이다. 427쪽 주183 참조. 배부름과 따뜻함에 뜻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논어 학이(學而)에 “군자가 먹을 때 배부르길 바라지 않고 거처할 때 편안하길 바라지 않으며, 일에는 민첩하고 말은 신중히 하며, 도(道)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 옳고 그름에 대해 질정(質正)을 받는다면 학문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구절에서 나온 말로 이 집 주인이 부귀에 뜻을 두지 않았다는 말이다.

209)택경(宅經)으로……만하였고:택경은 주택의 길흉에 관한 책이다. 집터를 잡는 법을 기술한 책으로 총 2권으로 되어 있고 황제(黃帝)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는 새집을 짓기 위해 원래 살던 집터의 길흉을 따져 보니 집을 지을 만하였다는 말이다.

210)너른……없었고:털이 없는 거북이라는 말은 소식(蘇軾)의 시에, “거북의 등에서 털을 긁어 보았자 언제나 털 담요를 만들 수 있으랴.[刮毛龜背上 何時得成氈]”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蘇東坡詩集 卷21 東坡八首여기서는 재정적 여유가 전혀 없음을 말한 것이다.

211)항아리……돌려보냈다:옛날에 가난한 사람이 항아리 하나를 애지중지하며 밤에도 끌어안고 자곤 하였는데, 어느 날 저녁 항아리 하나를 밑천 삼아 부자가 되는 생각에 젖어서는 기쁨에 겨워 춤을 추다가 항아리를 밟아 깨뜨렸다는 고사가 있다. 事文類聚 前集 卷36 民業部 여기서는 주인이 집을 짓기 위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집을 지을 결정을 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212)원래……없었다: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혜초 장막이 텅 비어 밤 학이 원망하고, 산사람이 떠나가자 새벽 원숭이가 놀란다.[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라는 구절이 있다. 산사람이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 산을 떠나자 은둔할 때 같은 산에 살던 학과 원숭이가 떠난 사람을 원망하며 조롱한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원래 살던 집의 산속에 사는 학과 원숭이가 주인이 떠나간 뒤에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고 조롱한다는 비유를 들어 원래의 집터에 다시 집을 지을 기약이 없이 허송세월만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13)재목:대본에는 ‘財’로 되어 있으나 의미상 ‘材’가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材’로 고쳐서번역하였다.

214)우명(牛鳴)의……때문이다:우명은 소의 울음 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를 말한다. 여기서는 젊은 시절에 노년을 함께하자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려고 지금 서로 가까운 지역에 살게 되었다는 말이다.

215)백거이(白居易)와……아니며:당(唐)나라 때의 시인 백거이는 낙양(洛陽)의 향산(香山)에 석루(石樓)를 지어 놓고 자주 원진(元稹), 유우석(劉禹錫) 등과 어울리며 풍류를 즐겼으며 원진과는 이웃하여 살았다고 한다. 舊唐書 卷166 白居易列傳 여기서는 서로 이웃하여 살지는 못하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도 않다는 말이다.

216)순숙(荀淑)과……같았다:403쪽 주101 참조. 순숙과 진식(陳寔)의 만남처럼 은둔하여 살아가는 우리의 관계도 그와 같이 돈독하고 의미 있다는 말이다.

217)세상……사누나:후한(後漢) 때 사람 왕군공(王君公)이 소를 매매하는 거간꾼 노릇을 하며 성(城)의 담장 동쪽 시장에 숨어 살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 피해 담장의 동쪽에 사는 왕군공[避世牆東王君公]”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逢萌 여기서는 이 집 주인이 깊은 산속이 아니라 시정(市井) 가까이에 사는 은자라는 말이다.

218)유거(幽居)가……같은가:이 집이 두보가 머물던 사천성(四川省) 기주(夔州) 양수(瀼水)의 서쪽에 있는 거처와 비슷하다는 말이다.

219)북산(北山)의……있누나:후한 때의 은자인 법진(法眞)에게 그 고을 태수가 공조(功曹)가 되어 자기를 도와주기를 청하자, 그가 말하기를, “앞으로 만약 저를 수하(手下)의 관리로 쓰고자 하신다면 저는 장차 북산의 북쪽과 남산의 남쪽에 은거하겠습니다.” 하였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法眞 여기서는 이 집 주인이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고 있다는 말이다.

220)온……하리:후한 때 사람 장해(張楷)가 홍농산(弘農山)에 은거하였는데, 그는 도술을 잘하여 5리를 안개로 뒤덮이게 할 줄 알았다고 한다. 後漢書 卷36 張楷列傳 여기서는 이곳이 운무가 덮여 있어 속세의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비경(祕境)이라는 말이다.

221)약하춘(若下春):오흥(吳興)의 오정현(烏程縣)에서 나는 명주(名酒)의 이름이다. 仇池筆記 卷上

222)백 년의……기대한다:규성(奎星)과 벽성(壁星)은 모두 문운(文運)을 관장한다는 별이다. 대대로 문풍을 이어온 이 집안이 이후로도 더욱 문운이 흥성하기를 기원한다는 말이다.

223)지난번에……때:매천의 시문을 김택영이 편정(編定)하여 1911년에 중국 남통시(南通市)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시집 5권, 산문 2권을 모두 3책으로 간행한 것을 말한다.

224)영재(寧齋) 이 학사(李學士):이건창(李建昌, 1852〜1898)을 말한다. 영재는 그의 호이다.

225)박초정(朴楚亭):초정은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호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차수(次修)이며, 또 다른 호는 정유(貞蕤)이다. 북학파들과 교유하였고, 1776년(영조52)에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공동 시집을 내어 청나라까지 문명을 떨쳤다. 저서로는 북학의(北學議), 정유집(貞蕤集) 등이 있다.

226)강겸(江謙):1876〜1942. 교육가(敎育家)로, 안휘성(安徽省) 무원(婺源) 사람이다. 자는 역원(易圓), 호는 양복(陽復)이다. 어려서 자양서원(紫陽書院), 문정서원(文正書院) 등처에서 글을 읽었고, 통주사범학교장(通州師範學校長), 청조(淸朝)의 자정원 의원(資政院議員), 안휘성 교육회 회장(安徽省敎育會會長), 남경고등사범학교 교장(南京高等師範學校校長)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음운학(音韻學)에 밝았으며, 만년에는 불교(佛敎)에 정진하여 무원에 불광사(佛光社)를 창건했다.

227)김창강(金滄江):1850〜1927. 조선 말기의 학자인 김택영(金澤榮)을 가리킨다. 자는 우림(于霖), 창강은 그의 호이다. 고종(高宗) 연간에 진사(進士)가 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사직했다. 1905년(광무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이후에는 국가의 장래를 통탄하다가 1908년(융희2) 중국에 망명하여 통주(通州)에 살았는데,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서 청(淸)나라의 학자인 강유위(康有爲), 정효서(鄭孝胥) 등과 교유하였다. 바로 이때에 당시 통주사범학교 교장이던 강겸에게 매천집(梅泉集)에 대한 서문(序文)을 부탁했던 것이다. 여한십가(麗韓十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228)황 열사(黃烈士):황현(黃玹, 1855〜1910)을 가리킨다. 본서(本書)의 저자로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우국지사(憂國之士)이다.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다. 특히 시문(詩文)에 뛰어났는데, 고종(高宗) 연간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했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향리(鄕里)에 은퇴하여 지내다가 1910년(융희4) 한일합병(韓日合倂) 때 국치(國恥)를 통분하여 마침내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음독 자결(飮毒自決)하였다.

229)스스로……죽은:이 고사(故事)는 본디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말하기를 “저 진(秦)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자칭하고 죄악으로써 천하에 정치를 행한다면, 나는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내가 차마 그 백성은 될 수가 없다.[彼卽肆然而爲帝 過而爲政於天下 則連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전하여 여기서는 단지 망국(亡國)을 개탄하고 자결한 데에 비유한 것이다.

230)박문호(朴文鎬):1846〜1918. 충북 보은(報恩) 사람으로, 호는 호산(瓠山) 또는 호산(壺山)이다. 매천, 김택영(金澤榮)과 교유(交遊)하였고, 문장에 뛰어났다.

231)계방(季方):매천의 아우인 황원(黃瑗)의 자이다.

232)망형교(忘形交):형적(形迹)에 얽매이지 않고 의기(意氣)가 투합(投合)한 절친한 친구 사이를 말한다.

233)내가……실정이니:손명복(孫明復) 선생은 북송(北宋) 시대의 경학자(經學者)인 손복(孫復)을 가리킨다. 명복은 그의 자이다. 그는 일찍이 태산(泰山)에 살면서 제자들에게 춘추(春秋)를 가르쳤고, 뒤에 범중엄(范仲淹), 부필(富弼) 등의 천거로 국자감 직강(國子監直講), 전중승(殿中丞) 등을 역임하였다. 범중엄이 일찍이 수양(睢陽)에서 학교(學校)를 관장하고 있을 때, 손 수재(孫秀才)라는 사람이 범중엄을 찾아뵙고 돈을 구걸하므로 범중엄이 1000전(錢)을 선뜻 내주었다. 그다음 해에 또 왔으므로 역시 전과 같이 1000전을 내주면서 그에게 묻기를 “왜 이렇게 자주 요구하느냐?”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방도가 없습니다. 하루에 100전씩만 얻는다면 좋은 음식을 봉양해 드릴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범중엄이 말하기를 “그대의 사기(詞氣)를 관찰해 보니 걸객(乞客)은 아니로구나.” 하고, 그에게 학직(學職)을 맡겨 매월 3000전씩을 주면서 춘추를 가르쳤다. 그는 불철주야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그다음 해에 범중엄이 수양을 떠나게 되자 그 역시 그곳을 떠나 버렸다. 그로부터 10년 뒤에 태산 아래 손명복 선생이란 분이 춘추를 학자들에게 가르치는데 도덕(道德)이 아주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불러다가 만나 보니 바로 옛날 범중엄에게 돈을 구걸하던 손 수재였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宋明臣言行錄 前集 卷10전하여 여기서는 곧 박문호(朴文鎬)가 매천에 대하여 젊었을 때만을 알 뿐, 그 후의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뜻으로 비유한 것이다.

234)인생(人生)의……것이거니와:관(棺) 뚜껑을 덮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말한다. 진(晉)나라 유의(劉毅)의 말에 “장부의 종적은 군소배들과 한데 섞일 수 없는 것이니, 관 뚜껑이 덮인 다음에야 일생 사업의 시비가 정해진다.[丈夫蹤跡 不可尋常混群小中 蓋棺事方定]”라고 하였다.

235)왕석보(王錫輔):1816〜1868. 구례(求禮) 출신으로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윤국(胤國), 호는 천사(川社)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닦아 학문이 일찍 성취되었는데, 일찍이 과거(科擧)를 보러 갔다가 잡된 선비와 탐관오리들의 추잡한 작태를 보고는 즉시 과거를 포기하고 하향(下鄕)하여 일생을 후진(後進) 교육에 힘썼다. 특히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236)강위(姜瑋):1820〜1884. 조선 말기의 시인(詩人)으로 자는 중무(仲武), 호는 추금(秋琴), 고환자(古懽子)이다. 김택영(金澤榮), 매천과 함께 한말(韓末) 3대 시인으로 일컬어졌다. 특히 율시(律詩)에 능했는데, 김택영과 매천이 그의 시풍(詩風)에 영향을 입었다고도 한다. 벼슬은 감역(監役)에 그쳤다.

237)이건창(李建昌):1852〜1898. 문신(文臣)이고, 학자이며 자는 봉조(鳳朝), 호는 영재(寧齋)이다. 1866년(고종3)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1874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가서 여러 문장가들과 교유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그다음 해에는 충청 우도 암행 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로 나갔으며,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에는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특히 고문(古文)에 능했다.

238)태황제(太皇帝):이미 선위(禪位)한 고종황제(高宗皇帝)를 일컬는 말이다.

239)을사년 10월의 변(變):1905년(광무9) 10월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조약(條約)을 체결한 사건을 말한다. 이 조약의 원명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며,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240)오애시(五哀詩):두보(杜甫)의 팔애시(八哀詩)를 모방하여 지은 시이다. 즉 을사년(1905, 광무9) 음력 10월, 왜인(倭人)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어 나라를 빼앗기자, 보국(輔國) 민영환(閔泳煥), 판서(判書) 홍만식(洪萬植), 정승 조병세(趙秉世)가 잇달아 자결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던바, 이들 3인과 그 밖에 아직 자결하지 않은 최익현(崔益顯), 그리고 이미 작고한 이건창(李建昌)을 더하여 다섯 사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오애시의 자서(自序)에 의하면 “을사년 10월의 변고 때에 조 정승 이하 3인이 자결하였으므로, 내가 그 소식을 듣고 감동하여 사모한 나머지, 고인의 팔애시를 모방하여 애도의 시를 지으면서 여기에 최면암을 언급한 것은 그에게도 바라는 뜻이 있어서이고, 이영재를 언급한 것은 지금 인물들이 너무 보잘것없어 그를 추모한 것이다.[乙巳十月之變 趙相以下三公死之 余聞而感慕 倣古人八哀以作詩 其泛及崔勉菴者 望之也 及李寧齋者 以今人物之眇少而追慕之也]”라고 하였다. 오애시매천집(梅泉集) 권4 을사고(乙巳稿)에 나온다.

241)십절도시(十節圖詩):매천이 일찍이 역대 은사(隱士)와 충신(忠臣) 10인의 행적을 각각 절구(絶句) 1수씩 읊고 또 10인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려서 10폭의 화병(畫屛)을 만들고 이를 효효병(嘐嘐屛)이라 일컬으며 항상 좌석 한쪽에 펼쳐 놓고 보았던바, 각 절구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한(漢)나라 매복(梅福)을 읊은 옥사채약(玉笥採藥), 위(魏)나라 관녕(管寧)을 읊은 요동천탑(遼東穿榻), 진(晉)나라 장한(張翰)을 읊은 고향순로(故鄕蓴鱸), 동진(東晉)의 도잠(陶潛)을 읊은 황경송국(荒徑松菊), 당(唐)나라 사공도(司空圖)를 읊은 왕관추홀(王官墜笏), 오대(五代) 시대 당(唐)의 양진(梁震)을 읊은 형저기우(荊渚騎牛), 송(宋)나라 가현옹(家鉉翁)을 읊은 하간교수(河間敎授), 송나라 사고(謝翶)를 읊은 서대통곡(西臺慟哭), 명(明)나라 고염무(顧炎武)를 읊은 정림재서(亭林載書), 명나라 위희(魏禧)를 읊은 취미결사(翠微結社)이다. 여기서 특히 십절(十節)이라고 한 것은 곧 10인의 절행(節行)을 의미한다. 梅泉集 卷4 題畫屛十絶

242)7월 25일의 소식:이해 양력 8월 22일에 한일합병조약(韓日合拼條約)이 조인(調印)되었고, 29일에 한일합병조약의 발표와 합께 순종(純宗)이 양국 조서(讓國詔書)를 내린 사건을 가리키는바, 여기서 말한 음력 7월 25일은 바로 양력 8월 29일에 해당한다. 이로써 한국이 망한 것이다.

243)절명시(絶命詩):매천이 1910년 8월 한일합병 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한 것을 통분(痛憤)하여 음독 자결(飮毒自決)하기 직전에 지은 시이다. 모두 절구 4수로 되어 있다. 梅泉集 卷5

244)구류(九流):한대(漢代)의 아홉 학파(學派), 즉 유가(儒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를 말한다.

245)백씨(百氏):제자백가(諸子百家)와 같은 뜻이다.

246)위희(魏禧):명말 청초(明末淸初)의 문인(文人)으로 자는 숙자(叔子), 호는 유재(裕齋)이다. 명나라 말기에 제생(諸生)의 업(業)을 그만두고 취미봉(翠微峯)에 들어가 집을 짓고 은거했는데, 형 위제서(魏際瑞), 아우 위례(魏禮)와 함께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청 성조(淸聖祖) 연간에는 박학홍사(博學鴻詞)로 천거되었으나 병을 칭탁하여 거절하였다. 저서에 위숙자문집(魏叔子文集), 시집(詩集), 일록(日錄), 좌전경세초(左傳經世鈔) 등이 있다. 淸史稿 卷489

247)후방역(侯方域):명말 청초의 문인으로 자는 조종(朝宗)이다. 특히 한유(韓愈), 구양수(歐陽脩)의 고문(古文)과 시(詩)를 열심히 배워 익혀서 당대에 명성이 높았다. 저서에 장회당문집(壯悔堂文集), 사억당시집(四憶堂詩集)이 있다. 淸史稿 卷489

248)호 충간(胡忠簡):남송(南宋) 시대의 직신(直臣) 호전(胡銓)을 가리킨다. 자는 방형(邦衡), 호는 담암(澹庵), 충간은 그의 시호이다. 고종(高宗) 연간에 진사(進士)가 되고 이어 추밀원 편수관(樞密院編修官)으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금(金)나라와의 주화파(主和派)인 왕륜(王倫), 진회(秦檜), 손근(孫近) 등을 참수(斬首)하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진회의 노염을 사서 원지(遠地)에 유배되었다가 진회가 죽은 뒤에 풀려나와 복관(復官)되었고, 뒤에 벼슬이 공부 시랑(工部侍郞)에 이르렀다. 저서에 담암집(澹庵集)이 있다. 宋史 卷374 胡銓列傳

249)진동보(陳同甫):남송(南宋) 시대의 학자 진량(陳亮)을 가리킨다. 자는 동보, 호는 용천(龍川),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일찍이 효종(孝宗) 연간에 중흥 오론(中興五論)을 올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물러가 학문에만 전념하여 많은 글을 저술하다가, 뒤에 다시 상서(上書)하여 시사(時事)를 극력 논변하였다. 광종(光宗) 때에 진사 제일(進士第一)로 뽑혔고, 벼슬은 첨서건강부판관(簽書建康府判官)을 지냈다. 주희(朱熹)와는 교의(交誼)가 깊었다. 저서에 삼국기년(三國紀年), 구양문수(歐陽文粹), 용천문집(龍川文集) 등이 있다. 宋史 卷436 儒林列傳 陳亮

250)방손지(方遜志):명(明)나라 학자인 방효유(方孝孺)를 가리킨다. 자는 희고(希古), 호는 손지,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태조(太祖) 연간에 한중부 교수(漢中府敎授)가 되어 제생(諸生)을 가르쳤고, 촉 헌왕(蜀獻王)의 초빙을 받아 세자사(世子師)가 되었는데, 그의 집을 정학(正學)이라 불러서 제자들이 그를 정학 선생이라 불렀다. 혜제(惠帝) 때에 시강학사(侍講學士)가 되었는데, 후일의 성조(成祖), 즉 연왕(燕王)이 모반(謀叛)하여 군대를 일으켜서 도성(都城)을 함락하고 방효유를 체포하여 성조의 등극(登極)을 반포하는 조서(詔書)를 초하도록 강요하였으나 이를 끝까지 거부하여 책형(磔刑)을 당하였다. 저서에 손지재고(遜志齋稿), 후성집(侯成集), 희고당고(希古堂稿) 등이 있다. 明史 卷141 方孝儒列傳

251)사옥(社屋):토지신(土地神)을 제사 지내는 곳에 지붕을 덮는다는 뜻으로, 전하여 망국(亡國)을 의미한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망국의 사에는 지붕을 만들어 덮어서 하늘의 양기를 받지 못하게 한다.[喪國之社 屋之 不受天陽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52)태교(胎敎)의……먹었다:열녀전(列女傳)에 이르기를 “옛날에 부인이 임신을 했을 때는 잠잘 때에 몸을 기울게 하지 않으며, 앉을 때에 몸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지 않으며, 설 때에 한쪽 발만 딛고 서지 않으며, 야릇한 맛이 나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고기를 썬 것이 반듯하지 않으면 먹지 않으며, 좌석이 반듯하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古者 婦人妊子 寢不側 坐不邊 立不蹕 不食邪味 割不正 不食 席不正 不坐]” 하였다.

253)한장석(韓章錫):1832〜1894. 조선 말기의 문신(文臣)으로 자는 치수(穉綏), 호는 미산(眉山),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872년(고종9)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888년 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그 후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김윤식(金允植), 민태호(閔台鎬)와 함께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에 미산집(眉山集)이 있다.

254)이소(二所):같은 일을 여러 곳에서 나누어 하는 경우에 둘째 분소(分所)를 말한다. 이를테면 과거(科擧)의 초시(初試), 복시(覆試)에서 응시자를 두 군데의 시소(試所)에 나누어 시험을 보이는 경우, 두 과장(科場)을 각각 일소(一所), 이소로 불렀다.

255)정범조(鄭範朝):1837〜1897. 자는 우서(禹書), 호는 규당(葵堂),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철종(哲宗) 연간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각 조(曹)의 판서(判書) 등을 역임하고 고종(高宗) 때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256)정만조(鄭萬朝):1858〜1936. 자는 대경(大卿), 호는 무정(茂亭)이다. 강위(姜瑋)의 문인(門人)으로 문장에 능했고, 글씨도 잘 썼다. 고종 연간에 일찍이 교섭통상아문 주사(交涉通商衙門主事)가 되었고, 그 후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이후 궁내부 참의관(宮內府參議官), 규장각 부제학(奎章閣副提學) 등을 역임하고 경학원 대제학(經學院大提學)에 이르렀다. 저서에 무정전고(茂亭全稿)가 있다.

257)신기선(申箕善):1851〜1909. 자는 언여(言汝), 호는 양원(陽園),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1877년(고종14) 정시 문과에 급제한 이후 참의경리내무아문사무(參議經理內務衙門事務),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부호군(副護軍) 등을 역임하고,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여도(呂島)에 유배되었다가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등용된 이후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의 공부(工部), 내부(內部), 법부(法部), 학부(學部) 등의 대신(大臣)을 역임하고, 참정(參政)에 이르렀다. 저서에 농정신편(農政新編), 유학경위(儒學經緯) 등이 있다.

258)이도재(李道宰):1848〜1909. 자는 성일(聖一), 호는 심재(心齋),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882년(고종19)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호군(護軍)을 지내고 1894년 갑오경장 이후로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전봉준(全琫準)을 생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고, 그 후 군부(軍部), 학부, 내부의 대신(大臣)을 거쳐 시종원경(侍從院卿)에 이르렀다.

259)매복(梅福):한(漢)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자진(子眞)이다. 일찍이 상서(尙書), 춘추(春秋)에 정통하여 군문학(郡文學)이 되고 이어 남창위(南昌尉)에 보임되었으나 뒤에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다가, 왕망(王莽)이 집권하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집을 떠나 버렸는데, 그의 죽은 곳을 알 수 없어 세상에서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漢書 卷67 梅福傳

260)관녕(管寧):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자는 유안(幼安)이다. 일찍이 황건적(黃巾賊)의 난리를 피하여 요동(遼東)으로 건너가서 생도(生徒)들을 가르치며 40년 가까이 지내면서 명제(明帝)로부터 태중대부(大中大夫), 광록훈(光祿勳) 등의 제수(除授)가 있었으나 일절 응하지 않았으며, 특히 청빈(淸貧)을 달게 여겨 항상 검은 모자[皁帽]만 착용하고 지냈다고 한다.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261)장한(張翰):진대(晉代)의 문인(文人)으로 자는 계응(季鷹)이다. 일찍이 낙양(洛陽)에 들어가 동조연(東曹掾)으로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을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자기 고향인 강동(江東) 오중(吳中)의 순챗국[蓴羹]과 농어회[鱸鱠]를 생각하면서 “인생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귀중하거늘, 어찌 수천 리 타관에서 벼슬하여 명작을 구할 수 있겠는가.[人生貴得適志 何能羈宦數千里 以要名爵乎]” 하고, 마침내 수레를 명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張翰

262)도잠(陶潛):동진(東晉)의 처사(處士)로 자는 연명(淵明)이다.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으로 있을 때, 마침 군(郡)의 독우(督郵)가 현(縣)을 순시하게 되어, 아전이 도잠에게 의관(衣冠)을 갖추고 독우를 뵈어야 한다고 하자, 그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오두미(五斗米)의 하찮은 녹봉 때문에 허리를 굽혀서 향리(鄕里)의 소인을 섬길 수 없다.” 하고, 팽택 영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현령의 인끈을 풀어 던지고 전원으로 돌아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어 자신의 뜻을 부쳤다. 또 평소 문장을 지을 때마다 반드시 연월(年月)을 기록했으되, 동진의 마지막 임금인 안제(安帝) 의희(義熙) 연간까지는 분명하게 모두 연호를 썼으나, 동진을 찬탈한 송 무제(宋武帝) 영초(永初) 연간부터는 모두 연호를 쓰지 않고 간지(干支) 만을 기록하여, 동진을 찬탈한 유송(劉宋)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저서에 도연명집(陶淵明集)이 있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陶潛 南史 卷75 隱逸列傳 陶潛

263)사공도(司空圖):당(唐)나라 때 시인(詩人)으로 자는 표성(表聖), 호는 내욕거사(耐辱居士), 지비자(知非子)이다. 일찍이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예부 낭중(禮部郎中)이 되었다가 난리를 피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중조산(中條山) 왕관곡(王官谷)에 정자를 짓고 은거하면서 그 정자를 삼휴정(三休亭), 휴휴정(休休亭)이라 칭하였다. 뒤에 주전충(朱全忠)이 당(唐)나라를 찬탈(簒奪)하여 그를 예부 상서(禮部尙書)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애제(哀帝)가 시해를 당하자 마침내 단식하고 죽었다. 저서에 시품(詩品)이 있다. 舊唐書 卷190下 文苑列傳 司空圖 新唐書 卷194 司空圖列傳

264)양진(梁震):오대(五代) 시대 공주(邛州) 사람으로 호는 형대거사(荊臺居士)이다. 당나라 말기에 진사가 되었던 터라, 양(梁)나라 발해왕(渤海王) 고계흥(高季興)이 일찍이 그를 자기 막료(幕僚)로 등용하려 했으나 그는 “나는 늙어서 다시 남을 섬길 수 없다.[吾老不復事人]” 하고, 당신(唐臣)으로 자처하여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끝내 전(前) 진사(進士)로 자칭하였다. 山堂肆考 卷107 北夢瑣言 卷7

265)가현옹(家鉉翁):남송(南宋) 말기 사람으로 호는 측당(則堂)이다. 음보(蔭補)로 천거를 받아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사진사 출신(賜進士出身)으로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이르렀다. 원나라에 송나라가 망하자 수개월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조석(朝夕)으로 통곡하였으며, 뒤에 원나라 조정(朝廷)에서 그의 절의(節義)를 가상히 여겨 존관(尊官)으로 대우하려 했으나 끝까지 거절하였다. 특히 춘추(春秋)에 정통하여 만년에는 하간(河間)에서 제자들에게 춘추를 가르쳤다. 저서에 춘추상설(春秋詳說), 측당집(則堂集)이 있다. 宋史 卷421 家鉉翁列傳

266)사고(謝翶):남송 말기 사람으로 자는 고우(皐羽), 호는 희발자(晞髮子)이다. 본래 뜻이 크고 기개가 높았다. 일찍이 원병(元兵)이 임안(臨安)에 쳐들어왔을 때 그가 승상(丞相) 문천상(文天祥)의 군문(軍門)에 들어가 자의참군(諮議參軍)이 되었다가 떠났는데, 그 후 문천상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서대통곡기(西臺慟哭記)를 짓고 사방으로 산수를 유람하다가 생을 마쳤다. 저서에 희발집(晞髮集), 천지간집(天地間集), 포양선민전(浦陽先民傳), 절동서유기(浙東西遊記) 등이 있다. 宋元學案 卷56

267)고염무(顧炎武):명말 청초(明末淸初)의 학자로 자는 영인(寧人), 호는 정림(亭林)이다. 성품이 매우 개결(介潔)하였다. 일찍이 노왕(魯王) 때에 귀장(歸莊)과 의병(義兵)을 일으켜 병부직방낭중(兵部職方郎中)이 되었다가, 명나라가 망한 뒤에는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전토(田土)를 개간하여 유사시에 대비하기도 했다. 청 성조(淸聖祖) 연간에는 박학홍사(博學鴻詞)로 천거되고 또 명사(明史)를 수찬(修撰)하라는 부름이 있었으나, 어머니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모두 응하지 않았다. 저서에 일지록(日知錄), 좌전두해보정(左傳杜解補正), 석경고(石經考), 음학오서(音學五書) 등이 있다. 明人小傳 卷4 淸史稿 卷487

268)위희(魏禧):자세한 내용은 56쪽 주21 참조.

269)소자첨(蘇子瞻):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자첨은 그의 자이다.

270)육무관(陸務觀):육유(陸游)를 가리킨다. 무관은 그의 자이다.

271)홍범식(洪範植):1871〜1910.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이다. 1888년(고종25) 진사(進士)가 되고, 뒤에 혜민서 참서(惠民署參書), 태인 군수(泰仁郡守) 등을 역임하고, 1909년(융희3) 금산 군수(錦山郡守)가 되었다가 다음 해 한일합병이 되자 자결하였다.

272)김석진(金奭鎭):1843〜1910. 자는 경소(景召), 호는 오천(梧泉)이다. 1860년(철종11)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벼슬이 형조 판서,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1905년(광무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상소하여 조약에 찬성 날인한 오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주장하였고,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음독 자결하였다.

273)이만도(李晩燾):1842〜1910.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이다. 1866년(고종3) 정시 문과에 장원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집의(執義)로 있을 때 일본과의 수호조약(修好條約)을 반대하여 화를 당한 최익현(崔益鉉)을 변호하다가 파직되었고, 그 후 다시 기용되어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올랐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소하여 조약에 찬성한 오적신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1910년 한일합병의 소식을 듣고는 유서(遺書)를 써서 고결(告訣)한 뒤 단식한 지 24일 만에 순국(殉國)하였다. 이만도의 최종 관직은 공조 참의이고, 순종실록(純宗實錄)에 의하면, 1910년 8월 24일자로 이만도를 정2품으로 가자(加資)한 내용이 있을 뿐 참판(參判)을 지낸 일이 없으니, 참판이라 칭한 데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저서에 향산집(響山集)이 있다.

274)장태수(張泰秀):1841〜1910. 자는 성안(聖安), 호는 일유재(一逌齋)이다. 1861년(철종12)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고종(高宗) 연간에 병조 참의(兵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등을 역임하고, 1895년 단발령(斷髮令)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고 사직했다가, 그 후 다시 임용되어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이르렀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는 일본 정부가 주는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하였고, 마침내 일본 헌병들에게 세 아들이 붙잡혀 가는 것을 보고는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275)정재건(鄭在楗):1843〜1910. 자는 계주(啓周), 호는 소송(小松)이다. 1888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전적(典籍), 지평(持平),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고, 시국이 혼란해짐을 보고 사직하여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다가,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나라의 운명을 한탄하고 자결하였다.

276)이재윤(李載允):1849〜1911. 자는 성집(聖執)이다. 1877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벼슬이 우승지(右承旨)에 올랐으나, 동학혁명(東學革命) 이후 시국이 점점 혼란해짐을 개탄하고 사직하여 향리에 은거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매국노 오적신을 참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7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원세개(袁世凱)를 방문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에 대한 구원을 요청하였고,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기울어진 사직(社稷)의 운명을 한탄하다가 그다음 해에 뒤뜰에서 목매어 자결하였다.

277)송익면(宋益勉):1847〜?.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의하면, 1870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고, 또 다른 자료에 의하여, 그가 교리(校理)를 지낸 일 및 전(前) 의관(議官)이라 칭한 것과 전남 지방 의병(義兵) 15인이 일찍이 동복(同福)에 있는 그의 집에서 군자금(軍資金)을 모금한 일 등을 알 수 있으나, 기타 사항은 자세하지 않다.

278)김지수(金智洙):1845〜1911. 자는 심일(心一)이다. 1900년(광무4) 중추원 참의(中樞院參議)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고,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일본이 주는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하고 두문불출하여 지조를 굳게 지키다가 다음 해에 자결하였다.

279)정동식(鄭東植):?〜1910. 자는 경필(敬必)이다. 1876년(고종13)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 등을 역임하고 첨정(僉正)에 이르러 일본과의 강화(講和) 및 관리들의 부패를 통탄하고 사직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토적문(討賊文) 등을 남겨 놓고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자결하였다.

280)이학순(李學純):1843〜1910. 자는 경실(敬實), 호는 회천(晦泉)이다. 천성이 청렴 강직한 선비로 연산(連山)의 대명산(大明山) 아래 살았는데, 한일합병 이후에는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고 은사금도 거절하여 일본의 헌병대장의 회유와 협박을 받고도 끝내 굽히지 않아 투옥되었다가 잠시 병보석의 기회를 이용하여 음독 자결하였다.

281)오강표(吳剛杓):1843〜1910. 자는 명여(明汝), 호는 무이재(無貳齋)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시 관찰사 이도재(李道宰)를 통하여 토적소(討賊疏)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도재가 거절하여 이루지 못하고, 공주(公州)의 명륜당(明倫堂)에 가서 대성통곡한 다음 아편을 먹고 자결하려 했으나 한정명(韓鼎命)의 구원으로 소생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 한일합병의 비보(悲報)를 듣고는 절명사(絶命詞)를 남기고 같은 해 10월에 공주의 명륜당 강학루(講學樓)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282)이근주(李根周):1860〜1910. 자는 문약(文若), 호는 청광(淸狂)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었을 때는 홍성(洪城)에서 목사(牧使) 이승우(李勝宇), 승지 이설(李楔), 김복한(金福漢) 등과 의병을 일으켜 각지에서 활약했고,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자결하였다.

283)김영상(金永相):1836〜1910. 자는 승여(昇如), 호는 춘우정(春雨亭)이다. 본래부터 태인(泰仁)에 거주하여 유학자(儒學者)로 명성이 높았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국가의 운명을 개탄하고 두문불출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는 일본이 주는 은사금을 거절하고 나라의 독립을 역설하다가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군산(群山)의 감옥에서 9일 간 단식 끝에 순절하였다.

284)조장하(趙章夏):1847〜1910. 자는 경헌(敬憲), 호는 이재(履齋)이다. 조선 말기의 거유(巨儒)인 임헌회(任憲晦)의 문인(門人)이다. 1910년 한일합병의 소식을 듣고는 의관을 정제한 다음 단식을 결행하여 끝내 순절하였다.

285)반성(潘姓):내시(內侍) 반하경(潘夏慶)을 가리킨다. 그는 고종 때 내시로 승전색(承傳色)을 지내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사퇴하고 파주(坡州)에 은거하였다. 1910년에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몹시 통분한 끝에 유서(遺書)를 남기고 대로(大路)에서 할복 자결하였다.

286)윤곡(尹穀):남송(南宋) 말기 담주(潭州) 사람으로 자는 경수(耕叟), 호는 무실(務實)이다. 천성이 강직하여 사우(士友)들이 평소 그를 엄하게 여겼다. 중년에야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상덕추관(常德推官), 지숭양현(知崇陽縣), 지형주(知衡州) 등을 역임했는데, 가는 곳마다 청렴 정직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모친상을 당한 이후로는 집에서 제생(諸生)을 교수(敎授)하면서 유자(儒者)의 행검(行檢)을 엄격히 준행하였다. 뒤에 원병(元兵)이 담주의 성(城)을 급격히 쳐들어오자, 수신(帥臣) 이불(李芾)의 참모(參謀)가 되어 성을 사수(死守)하던 중 불행히도 원병(援兵)이 이르지 않자, 그는 일이 이미 글렀음을 깨닫고 처자(妻子)들과 결별하여 말하기를 “나는 한미한 선비로 국은을 입어 여러 주군을 다스렸으니, 의리상 적에게 굽힐 수 없다. 너희들은 반드시 내가 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吾以寒儒受國恩 典方州 誼不可屈 若輩必當從吾已耳]” 하고, 아우 악수(岳秀)만을 불러 성을 나가서 살아남아 윤씨(尹氏)의 제사를 받들게 하니, 악수가 울면서 결별하였다. 그는 마침내 땔나무를 문 앞에 가득 쌓고 불을 질러 온 가족과 함께 분사(焚死)하였다. 그가 순절하자 주학(州學)의 제생 수백 인이 가서 통곡하였고, 성이 끝내 함락된 뒤에는 그의 죽음에 감격하여 그와 같이 순절한 이가 또한 많았다. 宋史 卷450 忠義列傳 尹穀

287)풍만한……자:한유(韓愈)의 잡설(雜說)에 “또한 풍만한 몸집 윤택한 살결에 얼굴이 붉고 번지르르하여 외모는 아름다우나 마음이 잔악한 자가 있으니, 용모는 사람이지만 마음은 금수이거늘 또 어찌 그를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卽有平脅曼膚 顔如渥丹 美而狠者 貌則人 其心則禽獸 又惡可謂之人邪]”라고 하였다. 別本韓文考異 卷11

288)난복(襴襆):옛날에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가 예복(禮服)으로 입었던 난삼(襴衫)과 복두(襆頭)를 합칭한 말이다. 가례(家禮)에 “진사는 복두, 난삼에 띠를 두른다.[進士則襆頭襴衫帶]”라고 하였다.

289)아연(鴉煙):아편(鴉片)의 별칭이다. 앵속(罌粟)의 열매 속에서 마치 유즙(乳汁)같이 생긴 진액(津液)을 뽑아내어 달여서 고약(膏藥)처럼 제조한 것을 말한다. 또는 아편연(鴉片煙)이라고도 한다.

290)남자는……것이다:의례(儀禮) 기석례(旣夕禮)에 “남자는 부인의 수중에서 숨을 거두지 않으며, 부인은 남자의 수중에서 숨을 거두지 않는다.[男子不絶于婦人之手 婦人不絶于男子之手]”라고 하였다.

291)이경재(李耕齋):이건창(李建昌)의 아우인 진사(進士) 이건승(李建昇)을 가리킨다. 경재는 그의 호이다.

292)신공 위당(申公威堂):신헌(申櫶, 1810〜1888)이다. 조선 말기의 무신(武臣)으로,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 시호는 장숙(壯肅)이다. 고종(高宗) 연간에 각 조(曹)의 판서(判書), 총융사(摠戎使), 훈련대장(訓鍊大將), 어영대장(御營大將) 등을 역임하고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에 이르렀다. 무인이었으나 문장과 서화에 모두 능했다.

293)향농(香農):신정희(申正熙, 1833〜1895)의 호이다. 자는 중원(中元), 시호는 정익(靖翼)이다. 신헌의 아들이다.1877년(고종14) 무과에 급제한 이후 어영대장, 포도대장, 친군통위사(親軍統衛使),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하였다.

294)박정양(朴定陽):1841〜1904.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천(竹泉),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1866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이후 여러 내외직을 거쳐 호조 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하고,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에는 학부 대신(學部大臣), 총리대신(摠理大臣), 참정대신(參政大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개화파(開化派)의 주역으로 일컬어진다.

295)이유원(李惟遠):1833〜1901. 조선 말기의 무신(武臣)으로 자는 성오(星五), 시호는 장희(莊僖)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이후 고종 연간에 통진 부사(通津府使)를 거쳐 울릉도 검찰사(鬱陵島檢察使)로 나가서 섬을 두루 시찰하고 돌아왔다. 뒤에 어영대장, 총융사, 동남제도 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 등 여러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296)탕건(宕巾):옛날에 관원이 갓 아래에 받쳐 쓰던 관(冠)의 일종이다. 말총으로 뜨는데 앞이 낮고 뒤가 높아서 턱이 졌다.

297)사가법(史可法)이……글:사가법은 명(明)나라 말기의 충신(忠臣)으로 자는 헌지(憲之),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그는 숭정(崇禎) 연간에 진사(進士)가 된 이후 유적(流賊) 장헌충(張獻忠) 등을 토평하여 공을 세워 남경 병부상서(南京兵部尙書)가 되었고, 복왕(福王) 때 무영전 대학사(武英殿大學士)에 이르렀다. 당시 마사영(馬士英)이 권력을 독점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양주(揚州)로 가서 강북(江北)의 군사를 통솔하고 있다가, 청군(淸軍)이 남하(南下)하여 양주를 포위하자, 극력 항전하다가 끝내 청군에게 체포되어 피살당했다. 구왕(九王)은 청 태조(淸太祖)의 열넷째 아들인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의 또 다른 호칭이다. 다이곤이 일찍이 유적 이자성(李自成)을 토벌하러 가기에 앞서 사가법에게 장서(長書)를 보내서 서로 협력하여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를 꼭 갚자는 등등의 일을 말하였는데, 사가법 또한 그에게 장서의 답서를 보내서 간절한 우국충정(憂國忠情)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明史 卷274

298)무술정변기(戊戌政變記):무술정변을 기록한 책이다. 무술정변은, 청(淸)나라 광서(光緖) 24년(1898) 8월, 덕종(德宗)이 채용한 강유위(康有爲) 등의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에 반대하던 서 태후(西太后) 등의 수구파(守舊派)가 덕종을 유폐(幽閉)시킨 정변이다. 이때 강유위는 외국으로 망명하고 그 일파가 모두 처형되었다. 이에 앞서 4월에 강유위, 양계초(梁啓超) 등이 보국회(保國會)를 조직하고 국정 개혁을 시도했었다.

299)김공 춘희(金公春熙):1855〜1926. 1883년(고종20)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 참판,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이 들어선 이후 개화파(開化派)로서 다시 황해도 관찰사, 특진관(特進官) 등을 역임했으며, 한일합병 때 일본 정부에 의해 남작(男爵)이 되었다.

300)신임론(辛壬論):신축년(1721, 경종1)과 임인년(1722) 두 해에 걸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에 일어난 당쟁(黨爭)의 화(禍), 즉 신임사화(辛壬士禍)에 관하여 논한 것을 말한 듯하다.

301)시벽론(時辟論):시파(時派)와 벽파(辟派)의 싸움에 관하여 논한 것을 말한다. 1762년(영조38)에 있었던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폐위(廢位), 아사(餓死)를 둘러싸고 세자를 동정하는 파와 세자를 더욱 공격하는 파가 서로 맞서서 파당 간의 싸움이 치열했다. 이때 세자를 동정하는 파를 시파라 하였는데 그들은 대부분 남인(南人) 계통이었고, 세자를 더욱 공격하는 파를 벽파라 하였는데 그들은 주로 노론이었다.

302)문헌통고(文獻通考):원(元)나라 마단림(馬端臨)이 지은 책으로 모두 348권이다. 당(唐)나라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을 증보(增補)하여 송대(宋代)에 이르기까지의 제도(制度), 문헌(文獻) 등의 연혁(沿革)을 24문(門)으로 분류하여 기록하였다.

303)통전(通典):당나라 두우가 지은 책으로 모두 200권이다. 고대(古代)로부터 당 현종(唐玄宗)까지의 제도를 식화(食貨), 선거(選擧), 직관(職官), 예(禮), 악(樂), 병형(兵刑), 주군(州郡), 변방(邊方)의 8문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304)축(筑)의 애절한 가락:축은 거문고 비슷한 현악기이다. 연조(燕趙) 지방에는 예로부터 비장한 노래를 부르며 비분강개(悲憤慷慨)한 기개를 과시하던 선비가 많았는데, 전국 시대 자객(刺客) 형가(荊軻)가 일찍이 연시(燕市)에 가서 개백정[狗屠] 및 축을 잘 연주하는 고점리(高漸離) 등과 서로 어울려 날마다 도성 거리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애절한 가락의 축을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비장한 회포를 풀었다는 고사가 특히 유명하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荊軻

305)붉은……못했는데:붉은 줄이란 곧 청묘(淸廟), 즉 문왕(文王)의 사당 제악(祭樂)에 쓰였던 붉은 줄의 비파(琵琶)를 가리킨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청묘의 비파는 붉은 줄에 너른 구멍을 밑바닥에 뚫었으며, 한 사람이 연주를 하면 세 사람이 따라서 감탄하는데, 이는 선왕의 남긴 소리가 있는 것이다.[淸廟之瑟 朱絃而疏越 壹倡而三歎 有遺音者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전하여 여기서는 매천의 훌륭한 시문(詩文)이 청묘의 제악에는 쓰이지 못했다는 뜻이다.

306)푸른……알리었구려:장자(萇子)는 춘추 시대 주 경왕(周敬王)의 대부(大夫) 장홍(萇弘)을 가리킨다. 그가 일찍이 진(晉)의 범씨(范氏), 중행씨(中行氏)의 난(難)에 간여했다가 진인(晉人)의 참소를 입어, 경왕에게 충간(忠諫)을 하였으나 간언(諫言)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촉(蜀) 땅으로 들어가서 분개함을 견디지 못해 자결하였다. 촉 지방 사람들이 그의 충성에 감격하여 그의 피를 잘 간직해 두었다. 3년 뒤에 그의 피가 푸른 구슬로 변화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國語 周語下 莊子 外物

1)정축고(丁丑稿):1877년(고종14), 매천의 나이 23세 때 지은 시고(詩稿)이다.

2)연곡사(燕谷寺):지리산(智異山)에 있는 절인데, 고려(高麗)의 학사(學士) 왕융(王融)이 지은 현각선사탑비(玄覺禪師塔碑) 등이 있다.

3)신오(神烏):흔히 묘사(廟祠)나 신전(神殿) 등의 제물(祭物)을 찾아 먹으려고 날아드는 까마귀를 가리킨다.

4)무인고(戊寅稿):1878년(고종15), 매천의 나이 24세 때 지은 시고이다.

5)박쥐들은……날아:습유기(拾遺記)에 의하면 “대여산에는 오색 박쥐가 사는데, 그중에 노란 놈은 창자가 없고, 거꾸로 날아서 배를 하늘로 향한다.[岱輿山有五色蝙蝠 黃者無腸 倒飛腹向天]”라고 하였다.

6)동파 학사(東坡學士)는……데다:동파 학사는 북송(北宋) 시대 학자이며 문장가인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자는 자첨(子瞻), 동파는 호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일찍이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고, 이백(李白)과 마찬가지로 적선(謫仙)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는 아버지 소순(蘇洵), 아우 소철(蘇轍)과 함께 삼부자(三父子)가 모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들기도 했다. 일찍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논박했다가 항주(杭州), 호주(湖州), 황주(黃州) 등지로 좌천, 폄척되었고, 뒤에 풀려나와 한림학사, 한림 승지(翰林承旨), 예부 상서(禮部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시문서화(詩文書畫)에도 모두 뛰어났다. 동파전집(東坡全集)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宋史 卷338 蘇軾列傳

7)기개(氣槪)는……대적하고:기개가 가을 하늘에 꽉 찼다는 것은, 남제(南齊)의 문인(文人) 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서 주옹(周顒)이 처음 북산(北山)에 은거할 때의 기상(氣像)을 평론하기를 “풍류 정취는 태양을 가릴 듯하고, 추상같은 기개는 가을 하늘에 꽉 찼었다.[風情張日 霜氣橫秋]”라고 한 데서 온 말이고, 만인을 대적한다는 것은,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큰 용맹을 부자께 들었는데, 스스로 반성해 보아 정직하지 못했으면 아무리 천인이라도 내가 그를 두렵게 하지 않거니와 스스로 반성해 보아 정직했으면 아무리 천만인이 앞에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吾嘗聞大勇於夫子矣 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公孫丑上

8)가동(賈董)을……노예시했네:가동은 한대(漢代)의 대유(大儒)요 문장가였던 가의(賈誼)와 동중서(董仲舒)를 합칭한 말이다. 가의는 한 문제(漢文帝) 때에 시국 광구책(時局匡救策)인 치안책(治安策)을 올려 명문(名文)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동중서는 한 무제(漢武帝) 때에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천인 감응(天人感應)의 설(說)을 요지(要旨)로 삼아 대책(對策)을 세 번 올려 천인 삼책(天人三策)이라 일컬어졌다. 비앙(非鞅)은 전국 시대 법가(法家)인 한(韓)의 공자(公子) 한비(韓非)와 상앙(商鞅)을 합칭한 말이다. 한비는 형명법술학(刑名法術學)을 좋아하여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에게 배웠는데, 뒤에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사에게 독살당하였고, 상앙은 전국 시대 위(衛)나라 사람으로 역시 형명학(刑名學)을 좋아하여 진 효공(秦孝公)을 섬기면서 부국강병책을 사용, 치적(治績)을 올렸으나, 그의 법이 너무 각박한 탓으로 귀척대신(貴戚大臣)의 원망을 사서 끝내 극형(極刑)에 처해졌다.

9)풍자한……빚어냈지만:오대안(烏臺案)이란, 소식이 시사를 풍자한 시를 지었다 하여 어사대(御史臺)에서 그를 잡아다가 신문할 때의 옥사(獄辭)를 가리킨다. 소식이 일찍이 왕안석(王安石)이 제창한 신법의 불편한 점을 극력 논박한 죄로, 항주 통판(杭州通判), 지호주(知湖州) 등으로 폄적(貶謫)되었다. 이윽고 풍자시를 지은 것으로 인하여 어사대에 의해 군부(君父)를 원망하고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하옥되었다가 감형되어 다시 황주 단련부사(黃州團練副使)로 안치(安置)되었다. 이 사건을 오대구안(烏臺舊案) 또는 오대시안(烏臺詩案)이라고도 한다. 소식이 지은 풍자시라는 것 중에는 특히 그의 회(檜)나무를 읊은 시에 “뿌리가 구천에 이르도록 굽은 곳이 없으니, 세간에선 오직 땅속에 숨은 용만이 알리라.[根到九泉無曲處 世間唯有蟄龍知]”라고 한 것이 유명한데, 이 시를 가지고 왕안석의 당여(黨與)들은 심지어 소식이 불신(不臣)의 마음을 품었다고까지 모진 탄핵을 가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송(宋)나라 붕구만(朋九萬)이 지은 오대시안에 나온다.

10)당당하게……들어갔네:송 철종(宋哲宗) 원우(元祐) 연간에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한 문인, 학자를 모조리 간당(奸黨)으로 지목하여 비(碑)를 세웠던 데서 온 말이다. 앞서 신종(神宗) 때 사마광(司馬光)을 중심으로 한 구당(舊黨)인 여문저(呂文著), 문언박(文彦博), 소식, 정이(程頤), 황정견(黃庭堅) 등이 왕안석의 신당(新黨)과 대립해 왔는데, 휘종(徽宗) 때 왕안석의 신당인 증포(曾布), 채경(蔡京) 등이 구당 120인을 간당이라고 새긴 비를 단례문(端禮門)에 세웠고, 이어서 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를 다시 세웠으며, 얼마 후에 또 원우당인(元祐黨人) 309인을 채경의 글씨로 써서 천하에 공포하여 각 군현(郡縣)에 비를 세우도록 했다. 이것을 원우당적비(元祐黨籍碑)라고도 칭한다.

11)도사(道士)를……삼으니:소식을 적선(謫仙)이라 칭한 데서, 도사는 곧 소식을 가리킨다. 당시 조정에서 소식을 사면(赦免)하여 다시 등용한 것을 말한 듯하나, 그를 공신(功臣)으로 삼았다는 말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12)규성(奎星):문장(文章)을 주관한다는 별 이름으로, 전하여 문장 또는 문명(文明)을 의미한다.

13)균천광악(鈞天廣樂)……연주:균천광악은 천상(天上)의 미묘한 음악을 가리킨 것으로, 전하여 아주 우아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말한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조간자(趙簡子)가 병이 들어 의식을 잃었다가 이틀 반 만에 깨어나서 대부(大夫)에게 이르기를 “내가 상제가 계신 곳에 가 보니 매우 즐거웠다. 온갖 신들과 함께 균천에서 노니는데, 광악 아홉 곡을 연주하고 만인이 춤을 추니, 삼대의 음악과는 같지 않으나 그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하였다.[我之帝所甚樂 與百神遊於鈞天 廣樂九奏萬舞 不類三代之樂 其聲動人心]”라고 하였다. 史記 卷43 趙世家

14)안탑(雁塔)에……가운데:당(唐)나라 때 진사(進士)에 급제한 사람들이 자은사(慈恩寺)의 안탑 밑에 이름을 적었던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문과에 급제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15)곽령(郭令)의……튼튼해라:곽령은 당대(唐代)의 명장(名將)으로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고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진 곽자의(郭子儀)를 가리킨다. 新唐書 卷137 郭子儀列傳 여기서는 곧 대장(大將) 신정희(申正熙)의 아버지인 신헌(申櫶)을 곽자의에 비유한 것이다. 무혜(武惠)는 역시 북송(北宋) 초기의 명장으로 벼슬이 검교태사겸시중(檢校太師兼侍中)에 이르러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지고 죽은 뒤 제양군왕(濟陽郡王)에 추봉된 조빈(曹彬)의 시호이다. 宋史 卷258 曹彬列傳 여기서는 곧 신정희를 조빈에 비유한 것이다. 신헌, 신정희 부자(父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77쪽 주67, 68 참조.

16)대장(大將)의……모였네:신헌, 신정희 부자가 모두 대장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17)계극(棨戟):검붉은 비단으로 싼 나무창을 말한다. 고대(古代)에 관리들이 사용하던 의장(儀仗)의 하나로 출행(出行)할 때 전도(前導)로 삼았던 것인데, 후세에는 흔히 문정(門庭)에 벌여 세웠다.

18)감히……못하겠구려:마주(馬周)는 당(唐)나라 임평(荏平) 사람으로 자는 빈왕(賓王)인데, 학문을 좋아하여 시경(詩經)춘추(春秋)에 능통하였다. 그는 일찍이 중랑장(中郞將) 상하(常何)의 문객으로 있었다. 어느 날 당 태종(唐太宗)이 백관(百官)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각각 득실(得失)을 말하게 했을 때, 상하는 본디 무인(武人)이라 배운 것이 없는데도 20여 조(條)의 글을 올렸다. 태종이 괴이하게 여겨 상하에게 묻자, 상하가 대답하기를 “신의 집 문객 마주가 지은 것입니다.[家客馬周具草也]”라고 하므로, 태종이 마침내 마주를 불러 대화를 해 보고는 아주 기뻐하여 그를 감찰 어사(監察御史)로 등용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舊唐書 卷74 馬周列傳

19)영규선사비(靈圭禪師碑):조선 승병장(僧兵將) 영규선사의 비이다. 영규의 성은 박씨(朴氏), 호는 기허(騎虛)이다. 고승(高僧) 휴정대사(休靜大師)의 고제(高弟)로 일찍이 공주(公州) 청련암(靑蓮庵)에서 불도(佛道)를 수행하면서 한편 선장(禪杖)으로 무예를 익혔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500인의 승병(僧兵)을 규합하여 의병장(義兵將)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淸州)를 수복하고, 이어 금산(錦山)에 이르러 왜장(倭將)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이 거느린 왜군을 맞아 격전 끝에 의병장 조헌 등 700의사(義士)와 함께 전사했다.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고, 금산의 진락산(進樂山)에 그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진영각(眞影閣)과 사적을 수록한 비가 세워졌다.

20)목릉(穆陵):조선 선조(宣祖)의 능호(陵號)로, 전하여 선조를 가리킨다.

21)영원하길 맹세한 대려 철권(帶礪鐵券):철권은 옛날 제왕(帝王)이 공신(功臣)들에게 나누어 주던 철제(鐵制)의 계권(契券)을 말하는데, 맨 위에 단사(丹砂)로 서사(誓詞)를 썼다. 대려는 곧 한(漢)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공신들을 봉작(封爵)하는 서사에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는다 하더라도, 나라는 영원히 보존되어, 후손에게 대대로 영화가 미치게 하리라.[使黃河如帶 泰山若礪 國以永存 爰及苗裔]”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2)기묘고(己卯稿):1879년(고종16), 매천의 나이 25세 때 지은 시고이다.

23)경진고(庚辰稿):1880년(고종17), 매천의 나이 26세 때 지은 시고이다.

24)강위(姜瑋):추금(秋琴)은 조선 말기의 시인(詩人) 강위의 호이다. 그는 1800년(고종17)에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隨行員)으로 일본에 갔다.

25)붕새……글이로다:붕새를 말한 것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북쪽 바다에는 곤이라는 물고기가 있어 그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고, 이 고기가 변화하여 붕이라는 새가 되는데, 붕새의 등 넓이는 또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갈 때에는 물결을 치는 것이 삼천 리요,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올라가 여섯 달을 가서야 쉰다.[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不知其幾千里也……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영웅호걸이 웅대한 포부를 펴는 데에 비유한 것이다. 해신(海神)을 제(祭)한 글이라는 것은 해로(海路)가 평온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해신에게 축원하는 글을 의미한다.

26)해돋이:여기서는 일본(日本)을 가리킨다. 수 양제(隋煬帝) 대업(大業) 3년에 일본이 수나라에 보낸 국서(國書)에서 “해 뜨는 곳의 천자가 서신을 드립니다. 해 지는 곳의 천자께서는 무양하십니까?[日出處天子致書 日沒處天子無恙]”라고 하였다. 隋書 卷81 東夷列傳 倭國

27)진성(眞性)을 기를 만하겠지:도가(道家)에서 이른바, 진성을 존양(存養)하여 본원(本元)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전하여 선인(仙人)의 경지를 의미한다. 진서(晉書) 권72 갈홍열전 논(葛洪列傳論)에 의하면 “덕에 편안히 즐기고 진성을 길러서 세속 일 밖에 초탈했다.[游德棲眞 超然事外]”라고 하였다.

28)해금강(海金剛):외금강(外金剛) 동쪽 동해안(東海岸)에 자리하고 있는데, 경치가 금강산(金剛山)을 꼭 닮았다 하여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29)불두(佛頭)와 선인장(仙人掌):불두는 석가모니(釋迦牟尼)의 두발(頭髮)이 청색(靑色)이었다는 전설에 의해 푸른 산 빛을 ‘불두청(佛頭靑)’이라 칭하는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푸른 산봉우리를 가리킨다. 송대(宋代)의 처사(處士) 임포(林逋)의 서호(西湖) 시에 의하면 “봄물은 호승의 파란 눈보다 더 파랗고, 석양 산 빛은 부처의 푸른 두발처럼 짙구나.[春水淨於僧眼碧 晩山濃似佛頭靑]”라고 하였다. 선인장은 본디 한 무제(漢武帝)가 신선을 사모한 나머지, 건장궁(建章宮)에 동(銅)으로 선인장을 만들어 세워서 승로반(承露盤)을 받쳐 들고 이슬을 받게 하여 그 이슬을 옥가루[玉屑]에 타서 마셨던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역시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비유한 것이다.

30)벽해(碧海)가……뿐일세:벽해가 상전(桑田)으로, 상전이 벽해로 변한다는 뜻으로, 오랜 세월의 변천을 의미한다. 겁(劫)은 불교 용어로, 인간 세상의 연월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으로, 전하여 아주 오랜 세월을 뜻한다. 신선전(神仙傳)에 의하면, 선녀(仙女) 마고(麻姑)가 왕방평(王方平)에게 이르기를 “만나 뵌 이래로 벌써 동해가 세 차례 상전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접때 봉래산에 이르러 보매, 물이 또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대략 절반쯤 얕아졌으니, 어찌 장차 다시 육지로 변하지 않겠는가.[接侍以來 已見東海三爲桑田 向到蓬萊 水又淺于往者會時略半也 豈將復還爲陵陸乎]”라고 했다 한다.

31)신사고(辛巳稿):1881년(고종18), 매천의 나이 27세 때 지은 시고이다.

32)임오고(壬午稿):1882년(고종19), 매천의 나이 28세 때 지은 시고이다.

33)향농 대장(香農大將):향농은 신정희(申正熙)의 호이다. 자세한 내용은 77쪽 주68조.

34)창해(滄海)에……거:오랜 세월의 변천을 의미한다. 자세한 내용은 101쪽 주30 참조.

35)계미고(癸未稿):1883년(고종20), 매천의 나이 29세 때 지은 시고이다.

36)해추(海鰌):수염이 있는 큰 고래, 즉 노척경(露脊鯨)의 별칭이기도 하고, 소형 전선(小型戰船)의 별칭으로도 쓰이는데, 여기서는 후자(後者)에 해당한다.

37)옥녀(玉女)는……굴리고:옥녀가 우레 차를 굴린다는 것은 비를 내리지 않고 천둥 번개만 친다는 것을 말한다. 동방삭(東方朔)의 신이경(神異經) 동황경(東荒經)에 “동황산중에는 큰 석실이 있어 동왕공이 살고 있다.……그가 항상 한 옥녀와 투호를 하되, 매양 살대를 1200번 던져서 병 속에 넣었다 튀어나온 것을 되받아 재차 던져 넣곤 하는데, 혹 살대가 들어가서 튀어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하늘이 탄식을 하고, 튀어나온 살대를 손으로 잡지 못하고 놓쳤을 경우에는 하늘이 입을 벌리고 웃었다.[東荒山中有大石室 東王公居焉……恒與一玉女投壺 每投千二百矯 設有入不出者 天爲之噓 矯出而脫悞不接者 天爲之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하늘이 탄식했다는 것은 곧 비를 내리는 데에 비유한 말이고, 하늘이 웃었다는 것은 곧 비를 내리지 않고 천둥 번개만 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說郛 卷66

38)갑사(甲士)는……듯:갑사는 갑옷 입은 군사를, 철마(鐵馬)는 철갑(鐵甲) 입힌 전마(戰馬)를 가리킨 것으로, 전하여 여기서는 모두 태풍의 위세에 비유한 말이다.

39)기둥……끊어졌나:여기서 말한 기둥은 곧 하늘을 무너지지 않도록 괴어 준다는 기둥을 가리키고, 밧줄은 곧 대지(大地)의 사방 귀퉁이를 또한 무너지지 않도록 잡아매고 있다는 밧줄을 가리키는바, 전하여 여기서는 대단히 거센 폭풍의 위세를 염려하여 이른 말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의하면 “공공씨가 전욱씨와 서로 제왕이 되려고 겨루다가 노하여 부주산을 들이받아서 하늘의 기둥을 꺾어 버리고 땅의 밧줄을 끊어 버렸다.[共工氏與顓頊爭爲帝 怒而觸不周之山 折天柱 絶地維]”라고 하였다.

40)임공(任公)의 고기 낚던:임공은 전설상의 인물인 임공자(任公子)의 준말이다. 임공자가 큰 낚시와 굵은 낚싯줄을 만들어 50마리의 불깐소를 미끼로 삼아 회계산(會稽山)에 걸터앉아서 동해(東海)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날마다 낚시질을 했는데, 1년이 되도록 고기 한 마리를 낚지 못했다가, 이윽고 산더미같이 큰 고기를 낚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임공의 낚시질은 흔히 세속을 초월한 선비 또는 남아의 큰 기개와 원대한 포부를 비유하기도 한다. 이백(李白)이 일찍이 한 재상(宰相)을 알현하면서 해상조오객(海上釣鼇客)이라 자칭하자, 재상이 묻기를 “선생이 창해에 임하여 큰 자라를 낚으려면 무엇을 낚시와 낚싯줄로 삼겠는가?[先生臨滄海 釣巨鼇 以何物爲鉤絲]” 하니, 이백이 말하기를 “무지개를 낚싯줄로 삼고, 밝은 달을 낚시로 삼겠소.[以虹霓爲絲 明月爲鉤]” 하므로, 재상이 또 묻기를 “미끼는 무엇으로 할 것인가?[何物爲餌]” 하니, 이백이 말하기를 “천하에 의기 없는 장부를 미끼로 삼겠소.[以天下無義氣丈夫爲餌]” 했다 한다. 莊子 外物 侯鯖錄 卷6

41)가시……웃고파라:가시 울과 관솔불은 곧 지도(智島)에 유배 중인 신정희(申正熙)의 처소를 가리킨 것이다.

42)해연(海鳶)이 서로 부르짖어대겠지:해연은 바닷새의 일종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원문의 ‘알옥(戞屋)’은 맑고 고운 소리의 형용사인 알옥(戞玉)과 동음(同音)으로 의미 또한 동일하게 쓰인 듯하다.

43)옥잠(玉簪):벽옥잠(碧玉簪)의 약칭으로, 본래는 벽옥으로 만든 비녀를 말하는데, 흔히 파랗게 빼어난 산봉우리를 비유한다.

44)화엄누각(華嚴樓閣):화엄은 본디 불교어(佛敎語)로는 화엄종(華嚴宗)의 대승경계(大乘境界) 또는 화엄경(華嚴經)의 약칭으로도 쓰인다. 여기서는 단지 화려하고 장엄함을 이른 말로, 전하여 화엄누각은 곧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는 월출산(月出山)을 형용한 말로 쓰인 듯하다.

45)석종유(石鍾乳)……만나서:석종유는 예로부터 아주 영험한 약재로 유명한바, 석종유가 돌아왔다는 고사는 다음과 같다. 유종원(柳宗元)의 영릉군복유혈기(零陵郡復乳穴記)에 의하면, 석종유가 연주(連州), 소주(韶州)의 산품(産品)이 유독 유명했던바, 연주 사람들이 거짓 연주의 석종유가 바닥났다고 관청에 보고한 지 5년이 되었는데, 자사(刺史) 최군민(崔君敏)이 부임한 이후, 그곳 백성들이 석종유가 다시 되돌아왔다고 보고하였으니, 그 까닭은 곧 예전의 자사들은 탐하고 이끗을 좋아하여 백성을 부려서 석종유를 취해 가기만 하고 돈을 주지 않았으나, 당시의 자사 최군민은 백성을 속이지 않고 성심으로 대해 준 결과, 백성들이 그의 성심에 감복하여 다시 사실대로 보고했던 것이라고 하였다. 柳河東集 卷28 또 진주(眞珠)가 돌아왔다는 고사는 다음과 같다. 후한서(後漢書)76 순리열전(循吏列傳) 맹상(孟嘗)에 의하면, 합포군(合浦郡)에는 본디 곡식이 생산되지 않고 방주(蚌珠)가 많이 생산되었는바, 역대 태수(太守)들이 탐오하여 그 방주를 끝없이 탐취(貪取)한 결과, 방주들이 점차 이웃 고을인 교지군(交趾郡)으로 옮겨가 버려서 백성들이 곤궁함을 감당할 수 없었는데, 맹상이 뒤에 합포 태수로 부임해서는 앞서의 잘못된 폐단을 개혁하고 청렴한 정사를 펴자, 떠나갔던 방주들이 다시 돌아옴으로써 백성들이 생업(生業)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의 두 가지 고사는 단지 지방관의 선정(善政)을 바라는 뜻에서 인용한 것이다.

46)삼아 오엽(三椏五葉):세 가장귀에 각각 다섯 잎씩 달린다 하여 인삼(人蔘)을 일컫는 말이다.

47) 순강(鶉江):남원(南原)의 순자진(鶉子津)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진안현(鎭安縣) 중대산(中臺山)과 태인현(泰仁縣) 운주산(雲住山)의 물이 합쳐 흘러서 남원부의 서쪽 40리쯤에 이르러 순자진이 되었는데, 곡성현(谷城縣)에 들어가서는 압록진(鴨綠津)이 되었다고 한다.

48)갑신고(甲申稿):1884년(고종21), 매천의 나이 30세 때 지은 시이다.

49)추금(秋琴) 선생:추금은 조선 말기의 시인 강위(姜瑋)의 호이다. 그는 김택영(金澤榮), 매천과 함께 한말(韓末) 3대 시인으로 일컬어졌다고 하며, 그는 특히 율시(律詩)에 능했던바, 김택영과 매천이 그의 시풍(詩風)에 영향을 입었다고도 한다. 벼슬은 감역(監役)에 그쳤다고 한다.

50)산택(山澤)의 여윈 신선: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천자(天子)가 선도(仙道)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인하여 생각하기를 ‘역대 신선들이 서로 전해 가면서 산택 사이에 거주한 이들은 형용이 몹시 파리했으니, 이것은 제왕이 하고자 하는 신선이 아니다.[列仙之傳居山澤間 形容甚癯 此非帝王之仙意也]’ 하고, 마침내 대인부(大人賦)를 써서 올렸다는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형용이 파리한 은사(隱士)를 가리킨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51)오악(五岳)을……먹었거니와:여기서 말한 오악은 조선의 이름난 다섯 산, 즉 백두산(白頭山), 금강산(金剛山), 묘향산(妙香山), 지리산(智異山), 삼각산(三角山)을 가리킨 것으로, 강위가 젊었을 때 명산을 두루 유람하면서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던 데서 온 말이다. 그리고 황정반(黃精飯)의 황정은 옛날 도사(道士)와 선인(仙人)들이 복용했다는, 비위(脾胃)를 보하고 원기를 증진시키는 유명한 약초인데, 전하여 황정반은 곧 선약(仙藥)을 의미한다.

52)백옥호(白玉壺):백옥병을 말한 것으로, 여기서는 술병을 의미한다.

53)깊은……졌어라:조선 말기의 시인 강위의 금회잡흥(錦洄雜興) 시에 “깊은 나무에 꽃은 피었는데 사람은 안 보이고, 텅 빈 강에 달은 졌는데 물은 오히려 밝구나.[深樹花開人不見 空江月墮水猶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古歡堂收艸詩稿 卷4

54)곤궁한……내렸고:곤궁한 시름이란, 전국 시대 유세사(遊說士)였던 우경(虞卿)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우경이 일찍이 조(趙)나라의 재상이 되었다가, 친구인 위제(魏齊)의 일로 인하여 상인(相印)을 내던지고 위제와 함께 양(梁)으로 가서 곤궁하게 지내면서 이른바 우씨춘추(虞氏春秋)라는 책을 저술했던바, 태사공(太史公)은 그를 평론하기를 “우경은 곤궁한 시름이 아니었다면 또한 글을 저술해서 스스로 후세에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虞卿非窮愁 亦不能著書以自見於後世云]”라고 하였다. 史記 卷76 虞卿列傳 그리고 권형책(權衡策)의 권형은 저울추와 저울대를 가리킨 것으로, 형평(衡平)을 의미하는바, 형평의 정책을 말한 것이다. 강위가 일찍이 친구인 판서(判書) 정건조(鄭健朝)의 권유에 의해 올리려고 지었던 시무책(時務策)인 의삼정구폐책(擬三政捄弊策)을 가리키는데, 이 내용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정건조가 이것을 조정에 올리는 데 난색을 표하자, 끝내 올리지 않고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이건창(李建昌)의 고환당시문집서(古歡堂詩文集序)에 의하면, 강위의 의삼정구폐책을 가리켜, 송(宋)나라 소순(蘇洵)이 일찍이 조정에 올린 권형론책(權衡論策)에 견주어 말하였다.

55)철적(鐵笛) 소리 구슬펐고:철적은 흔히 은자(隱者)나 고사(高士)가 불었던 젓대라고 전해 온다. 주희(朱熹)의 철적정서(鐵笛亭序)에 의하면 무이산(武夷山)에 사는 은자인 유군(劉君)이 “철적을 잘 불었는데, 구름을 뚫고 돌을 찢는 소리가 난다.[善吹鐵笛 有穿雲裂石之聲]”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9여기서는 강위를 은사(隱士)에 빗대서 한 말이다.

56)관(棺)……정해지리니:50쪽 주9 참조.

57)칼……여겼고:강위가 일개의 서생으로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연행사(燕行使)를 따라 중국에 여행한 일을 가리키는데, 이때 그는 청(淸)나라의 여러 문인(文人)들과 두루 교유(交遊)했다. 천하를 작게 여겼다는 것은 곧 강위의 문장이 중국의 문인들을 능가했음을 의미한다.

58)배……여겼지:강위가 1880년(고종17)에 다시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일을 가리키는데, 태양을 더디 여겼다는 것은 곧 강위의 국사를 매우 시급하게 여겼던 뜻을 말한 듯하다.

59)죽은……입었었지:명정(銘旌)에는 본디 망인(亡人)의 관직을 쓰는바, 강위는 본래 신분이 미천하여 벼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찍이 과거(科擧) 응시를 포기했는데, 나이 63세에 이르러서야 미천한 신분의 관직 진출이 허용되어 비로소 9품직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이 제수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의 명정에는 의당 감역을 썼을 것이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그가 감역 제수를 받고 나서 지은 시에 “칠십 바라보는 노인이 구품 관함을 받아라, 갑자기 소식 들으니 눈물이 나그네 적삼 적시네.[七十山翁一命銜 忽聞涕淚滿征衫]”라고 했다 한다.

60)원숭이……우네:남제(南齊) 때 공치규(孔稚圭)가 일찍이 변절하여 벼슬길에 나간 주옹(周顒)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북산(北山) 신령의 이름을 가탁하여 관청의 이문(移文)을 본떠서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그로 하여금 다시는 북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는 뜻을 서술했던바, 그 대략에 “종산의 영령과 초당의 신령이 연기로 하여금 역로를 달려가서 산정에 이문을 새기게 하였다.……혜초 장막은 텅 비어 밤 학이 원망하고, 산중 사람이 떠나감에 새벽 원숭이가 놀란다.[鍾山之英 草堂之靈 馳煙驛路 勒移山庭……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원숭이와 학은 모두 흔히 은사(隱士)의 배경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61)육교(六橋):1870년대에 서울 광교(廣橋) 지역에서 강위(姜瑋)를 중심으로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이를 육교시사(六橋詩社)라고 하였다. 육교란 바로 청계천(淸溪川) 하류로부터 여섯째 다리인 광교를 가리킨 것으로, 이곳 주위에는 의관(醫官), 역관(譯官) 등 중인(中人)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육교시사에 참가한 이로는 변진환(邊晉桓), 백춘배(白春培), 김재옥(金在玉), 이명선(李鳴善), 성혜영(成蕙永), 배전(裵㙉), 이용백(李容白), 박승혁(朴承爀), 유영표(劉英杓) 등이었는데, 시회(詩會)의 장소는 일정하지 않았고 주로 변진환의 해당루(海棠樓)에서 가졌다. 여기에서 작성된 시축(詩軸)이 바로 해당루상원첩(海棠樓上元帖)이란 것이고, 강위는 따로 육교연음집(六橋聯吟集)이란 시집을 남겼다고 한다.

62)매영(梅營):전라남도 여수(麗水)에 위치한 조선 시대 전라 좌수영(全羅左水營)의 별칭이다.

63)운상(雲祥)의……가서:운상은 조선 후기의 무신(武臣)이었던 전운상(田雲祥)을 가리킨다. 그는 숙종(肅宗) 연간, 무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역임하면서 가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특히 영조(英祖) 연간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 있을 때는 수군(水軍)의 특수함정(特殊艦艇)인 해골선(海鶻船)을 제작하였는데, 해골선의 선제(船制)는 앞이 크고 뒤가 작은 것이 마치 매[鶻] 모양 같고, 외판(外板) 위의 좌우편에 매의 두 날개 같은 부판(浮板)을 붙였기 때문에 바람을 타지 않고 운행이 매우 경쾌하고 빨라서 아주 실용적이었다고 한다. 다만 원문에 ‘新畫本’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어쨌든 해골선을 상징한 말일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64)이청재(李靑在):은사(隱士)로서 서화(書畫)에도 능한 인사였던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특히 이 시 절구(絶句) 4수 가운데 마지막 절구의 내용으로 보면, 김정희(金正喜)가 일찍이 그에게 그림이나 초상(肖像)을 그려 주었던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하나, 그의 연대와 행적에 대하여 모두 자세하지 않다.

65)무지개……돛배:북송(北宋) 시대에 시(詩), 서(書), 화(畫)에 모두 뛰어났던 미불(米芾)이 서화를 소장하기도 매우 좋아하여 많은 서화를 소장했었는데, 그가 뒤에 강회발운구관(江淮發運句管)이 되어서는 행선(行船) 위에 ‘미가서화선(米家書畫船)’이라는 패(牌)를 써서 걸고 다녔던바, 밤이면 그 배에서 무지개가 달을 꿰는 현상이 나타나곤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황정견(黃庭堅)이 일찍이 미불에게 준 시에 의하면 “푸른 강 고요한 밤에 무지개가 달을 꿰어라, 이것이 정히 미씨 집의 서화 실은 배로구나.[滄江靜夜虹貫月 定是米家書畫船]”라고 하였다. 전하여 여기서는 이청재를 미불에 빗대서 한 말이다. 山谷集 卷9

66)현진자(玄眞子)의……도롱이:현진자는 당(唐)나라 때의 은사(隱士) 장지화(張志和)의 호이다. 장지화는 일찍 벼슬을 그만두고 강호(江湖)에 살면서 연파조도(煙波釣徒)라 자칭하고 또한 현진자라 자호했다. 御定全唐詩 卷308그의 어부사(漁父詞)에 의하면 “서새산 앞에는 백로가 나는데, 복사꽃 물에 떠서 흐르고 쏘가리가 살졌네. 푸른 대삿갓 쓰고 푸른 도롱이 걸쳤으니, 비낀 바람 가랑비에 돌아갈 것 없고말고.[西塞山前白鷺飛 桃花流水鱖魚肥 靑箬笠 綠簑衣 斜風細雨不須歸]”라고 하였다.

67)도원(桃源):무릉도원(武陵桃源)의 약칭으로, 전하여 산수(山水) 좋은 선경(仙境) 같은 곳을 이른다.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의하면, 동진(東晉)의 태원(太元) 연간에 무릉(武陵)의 한 어부가 일찍이 시내를 따라 한없이 올라가다가 갑자기 도화림(桃花林)이 찬란한 선경을 만나 그곳에 들어가서, 일찍이 선대(先代)에 진(秦)나라 때의 난리를 피해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그곳에 들어와 대대로 살고 있다는 그곳 사람들을 만나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수일 후에 그곳을 떠나서 배를 타고 다시 되돌아왔는데, 그 후로는 다시 그 도화림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陶淵明集 卷6

68)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草堂):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실학자이며 서화가이기도 했던 추사(秋史) 김정희의 당호(堂號)로, 전하여 김정희를 가리킨다. 김정희는 호가 무려 100여 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69)금속여래(金粟如來)의 후신(後身)이었고말고:금속여래는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속제자(俗弟子)인 유마힐거사(維摩詰居士)의 불명(佛名)인데, 성당(盛唐) 시대 시인이며 명화가(名畫家)였던 왕유(王維)의 자가 또한 마힐(摩詰)이었으므로, 전하여 후세에는 흔히 왕유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곧 김정희를 왕유의 후신이라고 예찬한 것이다.

70)해천(海天)의……전하였네:해천의 한 삿갓이란 바로 김정희를 가리킨다. 김정희가 일찍이 제주(濟州)로 유배되어 있을 적에 자기 자신을 일컬어 “어찌하여 바다 하늘 아래 한 삿갓 쓴 내가 문득 원우 연간의 죄인 소식(蘇軾)과 흡사한고.[胡爲乎海天一笠 忽似元祐罪人]”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삿갓을 가지고 소식을 말한 것은 또한 동파입극도(東坡笠屐圖)라는 그림을 가리킨 것이다. 이 그림은 처음 원(元)나라 때 문인(文人) 정원우(鄭元祐)가 그렸는데, 청(淸)나라의 문인 송락(宋犖)의 제동파입극도(題東坡笠屐圖)에 의하면, 동파(東坡) 소식이 일찍이 경주 별가(瓊州別駕)로 폄척되어 있을 때, 한번은 그곳의 문인 여자운(黎子雲) 형제를 방문하러 가던 도중에 비를 만나서 급히 한 농가(農家)에 들어가 대삿갓과 나막신을 빌려 착용하였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하였다. 阮堂先生全集 卷6 西陂類稿 卷28 조선 말기의 화가인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9〜1892)가 이 동파입극도를 모방하여 그린 것이 전해지고 있다.

71)청산(靑山)은 살 만하여:산림에 들어가 은거하는 것을 뜻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배조(排調)에 의하면, 진(晉)나라 때 고승(高僧) 지둔(支遁)이 심공(深公)에게 사람을 넣어서 인산(印山)을 사려고 하자, 심공이 말하기를 “소보, 허유가 산을 사서 은거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未聞巢由買山而隱]” 한 데서 온 말이다.

72)서원(西園)의……되었네그려:서원의 아회(雅會)란 곧 문인(文人)의 연회(宴會)를 비유한 말이다. 서원은 원명(園名)으로, 북송(北宋) 시대의 문사(文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진관(秦觀) 등이 항상 서원에서 연회를 가졌던 데서 온 말이다. 송대(宋代)의 문인화가(文人畫家)로 시, 서, 화에 모두 뛰어났던 이공린(李公麟)이 일찍이 그들을 사모하여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를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방회(賀方回)는 송(宋)나라 문인(文人) 하주(賀鑄)를 가리키는데, 방회는 그의 자이다. 그는 일찍이 승사랑(承事郞), 사주 통판(泗州通判) 등을 역임하고는 바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 일생을 간서(看書)로 유유자적하였다. 그는 시에 능하였고 특히 사(詞)에 뛰어났다고 한다. 저서에 동산악부(東山樂府), 경호유로집(慶湖遺老集) 등이 있다. 그가 소식 등 문사들보다 시대가 조금 앞섰기 때문에 서원의 연회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宋史 卷443 文苑列傳 賀鑄여기서는 곧 이청재(李靑在) 역시 매천보다 시대가 앞섰기 때문에 함께 종유(從遊)할 수 없었음을 비유한 말인 듯하나 역시 자세하지 않다.

73)경담 선사(鏡潭禪師):경담은 구한말의 스님 서관(瑞寬)의 호이다. 속성(俗姓)은 주씨(朱氏)인데, 15세에 백양사(白羊寺)에서 중이 되고, 뒤에 구암사(龜巖寺)의 백파(白坡)에게서 불교의 경전을 두루 배워 통하였다. 그는 특히 일생 동안 계율을 엄격히 지켰다고 한다.

74)묘고대(妙高臺):불교(佛敎)에서 수미산(須彌山)을 가리키는데, 화엄경(華嚴經)에 의하면, 여기에 고승(高僧) 덕운 비구(德雲比丘)가 거처한다고 하였다. 전하여 여기서는 승사(僧寺)를 의미한다.

75)외론……주고:바다에 뜨고픈 소원이란, 공자(孔子)가 일찍이 천하에 현군(賢君)이 없어 도(道)를 행할 수 없음을 탄식하는 뜻에서 가설적인 말로 이르기를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떼를 타고 바다에 떠서 떠나리라. 나를 따를 자는 유인저.[道不行 乘桴浮于海 從我者其由與]”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유(由)는 자로(子路)의 이름이다. 論語 公冶長전하여 여기서는 난세(亂世)를 탄식하는 의미로 쓰였다.

76)셋이……고맙구려:셋이 웃으며 호계(虎溪)를 지나쳤다는 것은, 동진(東晉) 시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고승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당시의 명유(名儒)인 도잠(陶潛),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노닐다가 그들을 전송할 때, 그들과 서로 의기가 투합한 나머지 이야기에 마음이 팔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라는 시내를 지나가서 범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세 사람이 서로 크게 웃었다는 전설에서 온 말이다.

77)못내……주고:갈피(葛陂)는 하남성(河南省) 신채현(新蔡縣)에 있던 늪의 이름이다. 후한(後漢) 때 시장에서 약(藥)을 팔던 한 노인이 있어, 자기 점포 머리에 병 하나를 걸어 놓고 있다가 시장을 파하고 나서는 매양 그 병 속으로 뛰어 들어가곤 했는데, 당시 시연(市掾)으로 있던 비장방(費長房)이 그 사실을 알고는 그 노인에게 가서 재배하고 인하여 노인을 따라서 그 병 속에 들어가 보니, 옥당(玉堂)이 화려하고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가 그득하여 함께 실컷 마시고, 그가 돌아올 때에는 그 노인이 대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이것만 타면 저절로 집에 갈 수 있다.”라고 하므로, 비장방이 그 지팡이를 타고 조는 듯한 순간에 홀연히 집을 당도해서는 그 지팡이를 갈피 속에 던져 버리고 보니, 그것이 바로 청룡(靑龍)으로 변화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78)하삭(河朔)의……기울이었네:하삭은 일반적으로 황하(黃河) 이북 지방을 가리킨다. 후한(後漢) 말기에 광록대부(光祿大夫) 유송(劉松)이 원소(袁紹)의 군(軍)을 진무(鎭撫)하고 있을 때 원소의 자제(子弟)들과 함께 날마다 이곳에서 연음(宴飮)을 즐겼던바, 항상 삼복(三伏) 때를 당해서는 밤낮으로 통음(痛飮)하여 곤드레가 되도록 취하곤 했던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하삭의 술잔이란 여름날 피서(避暑)의 술자리나 통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79)양가(楊家)는……여겼었지:양매(楊梅)는 과일 이름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의하면, 양(梁)나라 양씨(楊氏)의 아홉 살 된 아들이 매우 총명했는데, 한번은 공탄(孔坦)이 그 아이의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가 그가 부재중이었으므로, 그 아이를 불러 본 결과 아이가 과일을 내와서 보니, 과일 중에 양매가 있으므로, 공탄이 그 양매를 아이에게 가리켜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그대 집의 과일이로구나.[此是君家果]” 하자, 그 아이가 즉시 대답하기를 “공작이 바로 선생님 댁의 새란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未聞孔雀是夫子家禽]”라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이는 곧 그 아이의 성이 양씨이므로, 공탄이 양매를 그의 집 과일이라고 농을 한 것이다.

80)이 충무공 귀선가(李忠武公龜船歌):조선 선조(宣祖) 때의 명장(名將)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제작한 거북선을 두고 노래한다는 뜻인데, 가(歌)는 시체(詩體)의 하나이기도 하다.

81)천구(天狗)가……말라붙고:천구는 살별의 일종인데, 달을 먹었다는 것은 매우 큰 재변(災變)이거니와 달은 태음(太陰), 즉 물[水]의 정기(精氣)인바, 천구가 달을 먹어서 바다가 마르게 되는 재변이 따른 것이다. 전하여 여기서는 단지 왜란(倭亂)의 큰 변고를 의미한다.

82)부상(扶桑)이 꺾이었네:부상은 동해(東海)의 해 돋는 곳에 있다는 신목(神木) 이름으로, 전하여 일본을 가리키기도 한다. 부상이 꺾이었다는 것은 왜변(倭變)을 의미한다.

83)원씨(元氏)……불과하여:원씨 집 노장(老將)은 바로 원균(元均)을 가리킨다. 그는 무장(武將)으로서 임진왜란 때에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의 휘하에 있었다. 나이가 이순신보다 많은데도 그 휘하에 있게 됨을 불쾌하게 여겨 이순신을 늘 모함하였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마침내 이순신을 무고하여 투옥시키고 자신이 대신 통제사가 되었으나, 왜병(倭兵)의 전술에 빠져 칠천도(漆川島)에서 크게 패하고 이어 거제도(巨濟島)에 상륙하여 도주하다가 끝내 왜병에게 붙잡혀 죽었다. 고기 자루라는 것은 곧 아주 무능한 사람을 조롱하는 말이다.

84)개미 구원:아주 적은 원군(援軍)을 비유한 말이다. 한유(韓愈)의 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序)에 의하면 “성을 지키고 있을 때 밖으로는 크고 작은 개미만한 원군도 없었지만, 충성을 바치고 싶은 곳은 국가와 임금뿐이었다.[當其圍守時 外無蚍蜉蟻子之援 所欲忠者 國與主耳]”라고 하였다. 東雅堂昌黎集註 卷13

85)거룻배를……있으랴:진(秦)이 월(越) 보듯 한다는 것은 곧 서로 무관심한 데에 비유한 말로, 한유(韓愈)의 쟁신론(爭臣論)에 “정치의 득실을 보기를 마치 월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의 살찌고 파리함을 보듯이 하여 조금도 마음에 기쁨과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視政之得失 若越人視秦人之肥瘠 忽焉不加喜戚於其心]”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東雅堂昌黎集註 卷14 여기서는 이순신이 당시 조선 수군(水軍)의 약세(弱勢)를 크게 염려한 나머지, 이를 보강하기 위해 거북선을 제작하게 된 동기를 의미한다.

86)적벽(赤壁)의……요행이었고:적벽의 소년은 삼국(三國) 시대 오(吳)나라 손권(孫權)의 장수였던 주유(周瑜)를 가리킨다. 조조(曹操)가 일찍이 남으로 형주(荊州)의 유표(劉表)를 치고, 이어 강릉(江陵)으로부터 장강(長江)을 따라 동으로 내려갈 때, 촉(蜀)과 오가 군대를 연합하여 항거하였다. 이때 주유가 조조의 대군(大軍)과 적벽에서 대전(大戰)을 벌이게 되어, 조조는 북쪽 언덕에 진을 치고, 주유는 남쪽 언덕에 진을 쳤는데, 주유의 막하장(幕下將) 황개(黃蓋)의 책략에 따라 배에 가득 섶[薪]을 싣고 가서 조조의 전함에 화공을 쓴 결과, 때마침 동남풍이 거세게 불어와서 조조의 전함들을 모두 불태움으로써 끝내 조조의 대군을 크게 격파했던 데서 온 말이다. 그때 주유는 겨우 30여 세였다. 三國志 卷54 吳書 周瑜傳

87)채석(采石)의……과시했지만:남송(南宋) 연간에 문신(文臣) 우윤문(虞允文)이 일찍이 예부 낭관(禮部郎官) 등을 역임하고, 금(金)나라에 사신을 다녀와서 무비(武備)의 확충을 건의한 바 있었는데, 뒤에 과연 금주(金主)가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와서 채석산(采石山) 아래 진을 치고 있을 때, 우윤문이 소수의 패잔병(敗殘兵)을 수습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독전(督戰)을 강행하여 마침내 채석의 대첩(大捷)을 거두었던 데서 온 말이다. 그로부터 그는 20여 년 동안 출장입상(出將入相)하면서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 좌승상 겸 추밀사(左丞相兼樞密使)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宋史 卷383 虞允文列傳

88)주머니……테니:노년(老年)의 지혜(智慧) 또는 노련한 지혜의 뜻으로 쓰인 말이다. 후연(後燕) 성무제(成武帝) 모용수(慕容垂)가 일찍이 거사(擧事)를 하려면서 말하기를 “나의 계략은 이미 결정되었다. 또 나는 늘그막에 이르렀는지라, 내 주머니 속의 지혜를 짜내면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 다시 역적을 남겨 두어 자손에게 누가 되지 않게 할 것이다.[吾計決矣 且吾投老 扣囊底智 足以克之 不復留逆賊以累子孫也]”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123 載記 慕容垂

89)을유고(乙酉稿):1885년(고종22), 매천의 나이 31세 때 지은 시고이다.

90)왕소금 사천(王素琴師天):왕사천(王師天, 1842〜1906)으로, 호가 소금이다. 바로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의 둘째 아들이다.

91)백석(白石)을 노래한 우가(牛歌):백석은 흰 돌을 가리키고, 우가는 소뿔을 두드리며 노래한 것을 이른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 영척(甯戚)이 미천했을 때, 제 환공(齊桓公)에게 등용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제나라에 들어가 남의 소를 먹이면서 제 환공의 행차를 바라보고는 소뿔을 두드리며 노래했던 데서 온 말인데, 이때 환공은 그 노랫소리를 듣고 그를 현자(賢者)로 여겨 등용했다고 한다. 그 노래는 대략 다음과 같다. “남산은 빛나고, 백석은 깨끗하도다. 태어나서 서로 선양하던 요순 시대 못 만나, 짧은 베 홑옷도 겨우 정강이만 가릴 뿐인데, 이른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소를 먹이자니, 긴 밤이 지루해라 언제나 아침이 올런고.[南山粲 白石爛 生不逢堯與舜禪 短布單衣裁至骭 從昏飯牛薄夜半 長夜漫漫何時旦]” 三齊記전하여 불우한 선비가 세상에 쓰이기를 바라는 뜻으로 흔히 쓰인다.

92)홍렬(鴻烈)의……기이하구려:홍렬은 한(漢)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저서인 회남자(淮南子)의 별칭이다. 유안은 본디 신선술(神仙術)을 좋아하여 일찍이 방술사(方術士) 수천 인을 불러들여 종유(從遊)하고 또 많은 저서를 남겼다. 황금(黃金)을 제조한 술법이란 것은 곧 신선술을 가리킨다. 한 무제(漢武帝) 때 방사(方士) 이소군(李少君)이 일찍이 무제에게 아뢰기를 “부엌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귀신이 오게 할 수 있고, 귀신이 오면 단사를 황금으로 만들 수 있으며, 황금이 이루어져서 이것으로 음식 그릇을 만들어 사용하면 수명을 늘릴 수 있고, 수명이 늘어나면 바다 가운데 봉래의 신선을 볼 수 있으며, 신선을 보고 봉선제를 지내면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니, 황제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祠竈則致物 致物而丹砂可化爲黃金 黃金成以爲飮食器則益壽 益壽而海中蓬萊仙者可見 見之以封禪則不死 黃帝是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2 孝武本紀여기서는 곧 왕사천이 끝내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거했음을 의미한다.

93)강리(江蘺):향초(香草)인 천궁(川芎)의 별칭으로, 전하여 현자(賢者)를 상징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의하면 “강리와 벽지를 몸에 걸쳐 입고, 가을 난초를 꿰어서 허리에 찬다.……아침엔 목란의 떨어진 이슬을 마심이여, 저녁엔 가을 국화의 떨어진 꽃잎을 먹는도다.[扈江離與辟芷 紉秋蘭以爲佩……朝飮木蘭之墜露兮 夕餐秋菊之落英]”라고 하였다.

94)춘사(春社):입춘(立春) 이후 다섯 번째 무일(戊日)을 일컫는다. 옛날 민속에 의하면, 이날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하여 풍년을 기원했다고 한다.

95)꿈속엔……노닐거니와: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일찍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기뻐하며 훨훨 나는 것이 분명 나비였는데,……이윽고 깨어 보니 의기양양한 모습의 장주가 분명하였다. 그래서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俄然覺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 胡蝶之夢爲周與]”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흔히 인생의 무상함을 한바탕 꿈에 비유하는 뜻으로 쓰인다.

96)막걸리는……가져오고:양자(揚子)는 한대(漢代)의 문장가인 양웅(揚雄)을 가리키는데, 그는 본디 고문(古文), 기자(奇字) 등을 많이 알았으므로, 유분(劉棻) 등이 항상 그에게 가서 기자를 물어 배웠다. 원래 가난한 데다 술을 좋아했으므로, 가끔 호사자(好事者)들이 술과 안주를 싣고 그를 찾아가 수업을 청하곤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87 揚雄傳 여기서 말한 양자의 집이란 곧 서숙(書塾)을 의미한다.

97)봄……하구려:정공향(鄭公鄕)은 후한(後漢) 때의 경학자(經學者)인 정현(鄭玄)의 마을을 예찬하여 일컬은 말이다. 북해 상(北海相) 공융(孔融)이 평소 정현을 매우 존경한 나머지, 고밀현(高密縣)에 고하여 정현을 위해 특별히 일향(一鄕)을 정하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공이란 것은 인덕에 대한 바른 호칭이니, 꼭 삼공, 육경, 대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정군의 마을을 의당 ‘정공향’ 이라 불러야 한다.[公者仁德之正號 不必三事大夫也 今鄭君鄕宜曰鄭公鄕]”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여기서 말한 정공향이란 곧 서숙이 있는 마을을 의미한다.

98)내……없는데: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지금 천하에 왕을 하려는 것은 마치 7년 된 병에 3년 묵은 약쑥 구하기와 같으니, 이제부터라도 미리 약쑥을 저축하지 않으면 종신토록 얻지 못할 것이다.[今之欲王者 猶七年之病求三年之艾也 苟爲不畜 終身不得]”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上여기서는 병이 깊어져도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의미한다.

99)나라……논할쏜가:맹자가 이르기를 “오묘의 집 둘레에 뽕나무를 심게 하면 50세 이상 된 사람이 따뜻한 명주옷을 입을 수 있고, 닭, 돼지, 개 등의 가축에 대하여 때를 놓치지 않고 번식시켜 기르게 하면 70세 된 사람이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이며, 100묘의 경작지를 제때에 농사짓도록 때를 빼앗지 않으면 몇 식구가 굶주리지 않을 것이

다.……그렇게 하고도 왕이 되지 못한 자는 없다.[五畝之宅 樹之以桑 五十者可以衣帛矣 鷄豚狗彘之畜 無失其時 七十者可以食肉矣 百畝之田 勿奪其時 數口之家 可以無飢矣……然而不王者 未之有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맹자는 이것을 왕도(王道) 정치의 시초라고 역설하였다. 孟子 梁惠王上

100)저술하면서……무방하겠네:잠부(潛夫)는 곧 은자(隱者)를 말한다. 후한(後漢) 때 왕부(王符)가 일찍이 난세(亂世)를 만나서 강직한 지조 때문에 세상에 용납되지 못함을 분개하게 여겨 은거하면서 당시의 폐정(弊政)을 통절히 비판하여 잠부론(潛夫論)을 저술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49 王符列傳

101)옛……푸르네:아주 오래된 비석을 두고 한 말이다. 호악문(灝噩文)의 호악은 당우삼대(唐虞三代)의 문장을 평론한 말로서, 양웅(揚雄)의 법언(法言)에 “우하 시대의 글은 혼혼하고, 상서는 호호하고, 주서는 악악하다.[虞夏之書渾渾爾 商書灝灝爾 周書噩噩爾]”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혼혼은 밝고 엄숙한 모양이고, 호호는 끝없이 멀고 아득한 모양이고, 악악은 엄숙한 모양 또는 밝고 곧은 모양이라고도 한다.

102)묘군(卯君):묘년(卯年)에 태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로, 본디 소식(蘇軾)이 기묘년에 태어난 아우 소철(蘇轍)을 묘군이라 칭했던 데서 비롯되었는데, 전하여 여기서는 곧 을묘년(1855, 철종6)에 태어난 매천 자신을 지칭한 것이다.

103)나무꾼은……불고: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은 술을 매우 즐겨 마셨고, 또 휘파람을 대단히 잘 불어서 금조(琴操)와 조화를 잘 이루었다 하며, 진류(陳留)에 그의 소대(嘯臺)가 있기도 하다. 그는 또 일찍이 소문산(蘇門山)에 올라가 은사(隱士) 손등(孫登)을 만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해 보았으나 손등이 전혀 대꾸를 하지 않으므로, 그가 마침내 휘파람을 길이 불면서 내려가는데, 산 중턱쯤 내려갔을 때 마치 난봉(鸞鳳) 같은 아름다운 소리가 암곡(巖谷)에 울려 퍼졌던바, 그게 바로 손등의 휘파람 소리였다는 고사가 전하기도 한다. 晉書 卷49 阮籍列傳전하여 소문(蘇門)의 휘파람 소리는 곧 은사의 정취를 의미한다.

104)춘풍(春風)에……읊는구나:양보음(梁甫吟)은 악부가사(樂府歌辭)의 이름으로, 예부터 전해 온 만가(挽歌)이다.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일찍이 지어 노래한 가사가 특히 유명한데, 그 내용은 곧 제 경공(齊景公) 때 안영(晏嬰)이 천하무적의 용력(勇力)을 지닌 공손접(公孫接), 전개강(田開疆), 고야자(古冶子) 세 용사(勇士)에게 기계(奇計)를 써서 그들에게 복숭아 두 개를 주어 서로 다투게 하여 끝내 모두 자살하도록 만들었던 일을 몹시 안타깝게 여겨 노래한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권35 제갈량전(諸葛亮傳)에 의하면 “제갈량은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양보음 읊기를 좋아했다.[亮躬耕壟畝 好爲梁父吟]”라고 하였다.

105)자지(紫芝)의……마음이로다:자지는 당대(唐代)의 은사(隱士) 원덕수(元德秀)의 자이다. 그는 일찍이 진사(進士)가 되고 이어 노산 영(魯山令)을 잠시 지내고는 이내 명리(名利)를 버리고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거문고나 타면서 스스로 즐기었으며,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는 이유로 끝내 장가도 들지 않았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그의 행실을 높이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원 노산(元魯山)이라 칭했다고 한다. 시호는 문행선생(文行先生)이다. 현종(玄宗) 때의 명신(名臣)인 방관(房琯)은 매양 원덕수를 보고 감탄하기를 “자지의 용모를 보면 그 모습이 사람으로 하여금 명리를 꾀하는 마음이 모두 사라지게 한다.[見紫芝眉宇 使人名利之心都盡]” 하였고, 소원명(蘇源明)은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불행하여 쇠패한 세속에 태어났지만 부끄럽지 않은 것은 오직 원자지를 아는 것 때문이다.[吾不幸生衰俗 所不恥者 識元紫芝也]” 하였다. 新唐書 卷194 元德秀列傳

106)다섯……있었으니:여기서 말한 한 대장(大將)은 곧 조선 말기의 무신(武臣)으로 호가 위당(威堂)인 신헌(申櫶)을 가리킨다. 인서(人瑞)는 덕행(德行)이 있는 사람 또는 장수(長壽)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신헌은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 고종(高宗)까지 모두 네 조정(朝廷)을 섬겼을 뿐이고 보면, 여기서 다섯 조정이라고 한 데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신헌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77쪽 주67 참조.

107)휘하(麾下)의……많았거니와:감(瑊)은 당대(唐代)의 용장(勇將) 혼감(渾瑊)을 가리킨다. 그는 역시 용장으로 일찍이 전공(戰功)을 많이 세우고 벼슬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태상경(太常卿)에 이르고 영삭군왕(寧朔郡王)에 봉해진 혼석지(渾釋之)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기사(騎射)를 잘하고 용맹이 삼군(三軍)에 뛰어나서 일찍이 이광필(李光弼), 곽자의(郭子儀) 등 명장(名將)을 따라 종군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전공을 세우고, 뒤에 벼슬이 평장사(平章事), 시중(侍中)에 이르고 함녕군왕(咸寧郡王)에 봉해졌다. 그는 무장이지만 춘추(春秋)한서(漢書)에도 능통했고, 천성이 충근(忠謹)하여 공이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전한(前漢)의 명신(名臣) 김일제(金日磾)에 비유했다고 한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新唐書 卷155 渾瑊列傳

108)집안의……웅걸하네:위(瑋)는 송대(宋代)의 용장 조빈(曹彬)의 셋째 아들인 조위(曹瑋)를 가리킨다. 그는 태종(太宗) 때 19세의 나이로 대장에 임명되어 이계천(李繼遷)의 반란을 평정하였고, 진종(眞宗) 때에는 지진융군(知鎭戎軍)으로 서강(西羌)을 격파하였으며, 뒤에 벼슬이 내주 관찰사(萊州觀察使), 창무군 절도사(彰武軍節度使)에 이르렀다. 그는 무장이면서도 독서를 좋아하여 춘추 삼전(三傳)에 다 통했다고 한다. 시호는 무목(武穆)이다. 조위의 아버지 조빈에 대해서는 94쪽 주15 참조.

109)관(棺)……만사(萬事):관 뚜껑을 덮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말하고, 만사는 곧 죽은 뒤에 평판을 받게 되는 일생 행적의 전부를 가리킨다. 자세한 내용은 50쪽 주9 참조.

110)애영(哀榮)을……게:자공(子貢)이 공자(孔子)를 일러 “살아서는 세상이 다 그를 존경하고, 죽어서는 세상이 다 그를 슬퍼하나니, 어떻게 그분에게 미칠 수 있으리오.[其生也榮 其死也哀 如之何其可及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생전과 사후에 모두 총영(寵榮)을 입는 것을 말한다. 論語 子張신당서(新唐書) 권137 곽자의열전(郭子儀列傳)에 의하면 “부귀와 장수를 누렸고, 살아서는 존경을 받고 죽어서는 애도함을 입어서, 신하의 도리에 조금도 결점이 없었다.[富貴壽考 哀榮終始 人臣之道無缺焉]”라고 하였다.

111)사군(四郡)의 강산(江山):사군은 한 무제(漢武帝)가 일찍이 평양(平壤)에 도읍한 위만 조선(衛滿朝鮮)을 멸하고 설치한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도(玄菟), 진번(眞蕃)의 네 군이다. 낙랑군이 바로 지금의 평양에 해당되므로, 평양으로부터 그 주위 여러 지역의 경치 좋은 강산을 의미한다.

112)정일택(丁日宅):아전이었으나, 부호(富豪)로서 문필(文筆)을 겸하여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113)그대는……달랐음을:매마(枚馬)는 한대(漢代)의 문장가인 매고(枚皐)와 사마상여(司馬相如)를 합칭한 말이고, 이곡 동공(異曲同工)이란 곧 음악을 연주하는 데 있어 곡조는 서로 달라도 기량은 서로 같다는 뜻으로, 전하여 문장의 작법은 서로 다르지만 정교함은 서로 같은 데 비유한 말이다. 한서(漢書)51 매고(枚皐傳)에 “매고는 동방삭보다 부를 더 잘 지었다.……임금이 느낀 바가 있을 때마다 매고에게 부를 짓도록 하였는데, 글을 워낙 빨리 짓는 솜씨라서 매양 분부를 받은 즉시 지었으므로, 그는 부를 지은 것이 많았고, 사마상여는 글을 잘 짓되 더디었으므로, 지은 것은 적지만 내용은 매고의 글보다 정교했다.[皐爲賦善於朔也……上有所感 輒使賦之 爲文疾 受詔輒成 故所賦者多 司馬相如善爲文而遲 故所作少而善於皐]”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14)빨리……없다거니:왕충(王充)의 논형(論衡)에 “급히 가자면 좋은 발걸음이 없고, 곡조가 빠르면 화평한 소리가 적다.[急行無善步 促柱少和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15)작은……데:사기(史記) 권46 전완세가(田完世家)에 의하면, 추기자(騶忌子)가 거문고 타는 일로 위왕(威王)을 알현하여 말하기를 “대체로 큰 줄의 소리가 탁하여 봄의 다스운 기운을 느끼게 하는 것은 임금에 해당하고, 작은 줄의 소리가 예리하고 급하여 맑은 것은 재상에 해당합니다.[夫大絃濁以春溫者 君也 小絃廉折以淸者 相也]” 하였고, 소식(蘇軾)의 청현사금(聽賢師琴) 시에는 “큰 줄 소리는 봄기운처럼 다스워 평화롭고, 작은 줄 소리는 예리하고 급하여 청량쿠려.[大絃春溫和且平 小絃廉折亮以淸]”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12

116)서유음하(徐庾陰何)가……하더니:서유음하는 남북조(南北朝) 시대 남조(南朝) 양(梁), 진(陳)의 문인(文人) 서릉(徐陵)과 북조(北朝) 북주(北周)의 문인 유신(庾信)과 남조 진의 문인 음갱(陰鏗)과 남조 양의 문인 하손(何遜)을 합칭한 말인데, 이들은 각각 당대에 시문(詩文)으로 명성이 천하에 드높았다.

117)육조(六朝)는……아득하여라:육조는 후한(後漢)이 멸망하고부터 수(隋)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직전까지의 기간에 건업(建業), 즉 지금의 남경(南京)에 도읍했던 오(吳),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여섯 나라를 가리킨다. 구름 연기가 스쳐 간 듯 아득하다는 것은 곧 오랜 세월이 흘러서 기억이 희미해졌음을 의미한다.

118)당(唐)의……꿈꾸었지:지당(池塘)의 풀이란, 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일찍이 영가(永嘉)의 서당(西堂)에서 온종일 시를 생각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가, 꿈에 족제(族弟)인 사혜련(謝惠連)을 만나서 “못 둑에 봄풀이 난다.[池塘生春草]”라는 시구(詩句)를 얻고는 대단히 만족하게 여기어, 일찍이 말하기를 “이 말에는 귀신의 도움이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此語有神助 非吾語也]”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명작(名作)을 의미하는바, 여기서는 곧 당대(唐代)의 시풍(詩風)이 바로 육조 시대의 영향을 입었음을 의미한다.

119)손 떠남이 천연스럽고:손을 떠난다는 것은 곧 ‘손 떠난 탄환[脫手彈丸]’이란 말에서 온 것으로, 전하여 아름답고도 거침없이 유창한 시문을 가리킨다. 남제(南齊)의 시인 사조(謝朓)가 일찍이 같은 시인 심약(沈約)에게 말하기를 “좋은 시는 원만하고 아름다워서 거침없이 유창한 것이 마치 탄환 같은 것이다.[好詩圓美 流轉如彈丸]” 하였는데, 심약이 뒤에 왕균(王筠)의 시를 평하면서 사조의 이 말을 인용했던바, 소식(蘇軾)의 차운답왕공(次韻答王鞏) 시에서도 또한 이 고사를 인용하여 “새로운 시가 마치 탄환 같아서, 손을 떠나서 잠시도 멎지를 않네.[新詩如彈丸 脫手不暫停]”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南史 卷22 王筠列傳 蘇東坡詩集 卷19

120)화엄누각(華嚴樓閣)에……같고말고:화엄누각의 화엄은 본디 불교어(佛敎語)로는 화엄종(華嚴宗)의 대승경계(大乘境界) 또는 화엄경(華嚴經)의 약칭으로도 쓰이나, 여기서는 단지 화려하고 장엄함을 의미하고, 묘고봉(妙高峯)은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須彌山)의 별칭으로, 전하여 여기서 말한 화엄누각과 묘고봉은 최대(最大), 최상(最上), 천연(天然) 등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청대(淸代)의 문인(文人) 시윤장(施閏章)이 일찍이 왕사정(王士禎)의 문인(門人) 홍승(洪昇)에게 말하기를 “자네 스승의 시는 마치 우뚝한 화엄누각과 같아서 면모가 즉시 드러나지만, 나의 시는 마치 집을 짓는 자가 기왓장, 벽돌, 나무, 돌 등을 가지고 하나하나 평지에서 쌓아 올리는 것과 같다.[爾師詩如華嚴樓閣 彈指卽見 吾詩如作室者瓴甓木石 一一就平地築起]” 하였는데, 홍승이 여기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것은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 점수 두 가지의 의의다.[此禪宗頓漸二義也]” 했다 한다. 皇朝文獻通考 卷231 漁洋詩話 卷中

121)기경자(騎鯨子):이백(李白)이 일찍이 채석강(采石江)에서 취중(醉中)에 뱃놀이하다가 달을 잡으려고 물에 뛰어들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에서, 전하여 이백의 별칭으로 쓰인다. 송(宋)나라 때 문인(文人) 마존(馬存)의 연사정(燕思亭) 시에 의하면 “이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에 오르고 나니, 강남의 풍월이 한가해진 지 오래이로다.[李白騎鯨飛上天 江南風月閑多年]”라고 하였다. 宋藝圃集 卷13

122)경쾌한……경과함일세:이백의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 시에 “아침에 백제성 채색 구름 사이서 출발하여, 천리나 먼 길 강릉을 하루에 돌아왔네. 강 양쪽 언덕 원숭이는 끝없이 울어대는데, 경쾌한 배로 이미 만 겹 산을 지났네그려.[朝發白帝彩雲間 千里江陵一日還 兩岸猿聲啼不住 輕舟已過萬重山]”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특히 예로부터 이백의 절창(絶唱) 중의 절창으로 회자(膾炙)되었다. 李太白集 卷21

123)청련(靑蓮):이백이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 자호(自號)한 데서, 전하여 이백을 가리킨다.

124)개천(開天)……세웠는데:개천은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인 개원(開元)과 천보(天寶)를 합칭한 말인데, 성당(盛唐) 시대 시성(詩聖)으로 추앙되는 두보(杜甫)가 바로 이때에 시명(詩名)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붉은 깃발이란 모범이나 본보기 또는 우두머리를 비유하는 말로, 이 또한 두보의 시가 당대에 으뜸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25)후일(後日)에……내세웠네:고정례(高廷禮)는 명(明)나라 사람으로 자는 언회(彦恢), 호는 소대(嘯臺), 만사(漫士)이고, 벼슬은 한림 대조(翰林待詔), 한림 전적(翰林典籍)을 역임하였다. 시문(詩文)에 뛰어나 민중십재자(閩中十才子)의 한 사람으로 꼽혔고, 서화에도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삼당(三唐)은 고정례가 처음 당시(唐詩)를 기간별로 나누어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의 사당(四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후인들이 중당을 성당이나 또는 만당에 붙여 삼당으로 일컬은 데서 온 말이다. 고정례의 당시품휘총서(唐詩品彙總敍)에 의하면 “당나라 300년간의 시에 여러 가지 체가 갖추어졌다. 그래서 왕체, 근체, 장단편, 오칠언 율구, 절구 등의 제작이 있었으되, 모두가 처음에 일어나고, 중간에 이루어졌다가 변격으로 빠져서 종말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성률의 정취와 문사의 의리에 이르러서도 각각 품격의 높낮음의 차이가 있게 되었으니,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초당, 성당, 중당, 만당의 차이가 있다.……개원 천보 연간에는 이 한림의 뛰어남과 두 공부의 침울함이……이것이 바로 성당의 성대한 것이다.[有唐三百年詩 衆體備矣 故有往體近體長短篇五七言律句絶句等製 莫不興於始 成於中 流於變而陊之於終 至於聲律興象 文詞理致 各有品格高下之不同 略而言之 則有初唐盛唐中唐晩唐之不同……開元天寶間 則有李翰林之飄逸 杜工部之沈鬱……此盛唐之盛者也]”라고 하였다.

126)소릉(少陵):두보의 호이다.

127)한……지키면서:교가(郊可)는 당대(唐代)의 시인인 맹교(孟郊), 가도(賈島)를 합칭한 교가(郊賈)의 착오인 듯하다. 소식(蘇軾)의 건주여의승사……(虔州呂倚承事……) 시에 의하면 “읊으면 쓰르라미 소리를 내지만, 때로는 도가의 시구가 나오기도 한다.[吟爲蜩蛩聲 時有島可句]” 하였는데, 거기서는 가도의 도는 가도, 가는 가명(可明)을 말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여기의 경우는 맹교와 가도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맹교와 가도는 모두 아주 곤궁한 시인으로 일컬어졌던바, 소식의 제유자옥문(祭柳子玉文)에서 당나라 시인들의 시격(詩格)을 논평한 데 의하면 “맹교의 시격은 청한하고, 가도의 시격은 수척하며, 원진의 시격은 경조하고, 백거이의 시격은 비속하다.[郊寒島瘦 元輕白俗]”라고 하였다. 궁교(窮交)는 빈천할 때의 사귐을 말한다. 東坡全集 卷25, 卷91

128)나무……듯했는데:이는 곧 곤궁한 시인의 애절한 시격(詩格)을 쓰르라미 울음에 비유한 것이다.

129)오두(五杜)와……삼았네:오두는 남송(南宋) 시대 금화인(金華人)으로 두씨(杜氏) 형제 5인을 말하는바, 장형 두여(杜旟)의 자는 백고(伯高), 다음 두전(杜旃)의 자는 중고(仲高), 다음 두유(杜斿)의 자는 숙고(叔高), 다음 두수(杜旞)의 자는 계고(季高), 다음 두괴(杜旝)의 자는 유고(幼高)인데, 이들이 모두 시문(詩文)에 뛰어나서 당시에 금화오고(金華五高)로 일컬어졌다. 그리고 사령(四靈)은 역시 남송 시대 4인의 시인인 서조(徐照)의 자가 영휘(靈暉), 서기(徐璣)의 호가 영연(靈淵), 옹권(翁卷)의 자가 영서(靈舒), 조사수(趙師秀)의 호가 영수(靈秀)이므로 이들을 영가사령(永嘉四靈)이라 일컬었던 데서 온 말이다. 이들은 모두 종래 황정견(黃庭堅)을 종사(宗師)로 하는 강서시파(江西詩派)에 반대하고 만당시체(晩唐詩體)를 종(宗)으로 삼았는데, 그중에 특히 가도(賈島), 요합(姚合) 등의 시풍을 전적으로 본받았다고 한다. 香祖筆記 卷5 宋百家詩存 卷36 禮部集 卷16

130)가륭(嘉隆)의……맞고말고:가륭은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가정(嘉靖)과 목종(穆宗)의 연호 융경(隆慶)의 합칭이다. 이 시기에는 후칠자(後七子), 즉 명나라 후기의 일곱 재자(才子)들이 활약하였고, 이에 앞서 명나라 효종(孝宗)의 홍치(弘治) 연간부터 무종(武宗)의 정덕(正德) 연간까지는 전칠자(前七子), 즉 명나라 전기의 일곱 재자들이 활약하였다. 전칠자는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 서정경(徐禎卿), 변공(邊貢), 강해(康海), 왕구사(王九思), 왕정상(王廷相)이고, 후칠자는 이반룡(李攀龍), 왕세정(王世貞), 사진(謝榛), 종신(宗臣), 양유예(梁有譽), 서중행(徐中行), 오국륜(吳國倫)이다. 이상의 전칠자, 후칠자는 모두 복고(復古)를 주장하여 문(文)은 진한(秦漢)을, 시(詩)는 성당(盛唐)의 격조를 숭상하였던바, 이몽양의 잠규산인기(潛虯山人記)에 의하면 “송나라에는 시가 없었다.[宋無詩]”라고 말했거니와, 그 밖의 명인(明人)들에게서도 ‘송나라에 시가 없었다’는 말을 흔히 볼 수 있다. 空同集 卷48

131)소동파(蘇東坡)와 황산곡(黃山谷):송대(宋代)의 문장가였던 소식과 황정견(黃庭堅)을 가리킨다. 동파는 소식의 호이고, 산곡은 황정견의 호이다.

132)눈에……듯:허깨비 꽃이란 불교에서 이른바, 안질이 있는 사람의 시각(視覺) 중에 나타나는 허공의 꽃 현상을 말한 것으로, 흔히 망상에 비유하는데, 전하여 여기서는 시의 자연스러운 풍격을 형적(形迹)이 전혀 없는 허깨비 꽃에 비유한 것이다. 거울 속에 드리운다는 것 또한 형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133)영양(羚羊)의……없고말고:영양은 밤에 잠잘 때 뿔은 나무 가지에 걸어 두고 발은 땅에 내려놓지 않아서 형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전설에서 온 말로, 전하여 의미가 초탈하여 형적을 드러내지 않은 데에 비유한다.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에 의하면 “시라는 것은 성정을 읊조리는 것인데, 성당 시대 시인들은 오직 흥취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마치 영양이 뿔을 걸어 놓은 것 같아서 형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절묘한 곳은 투철하고 영롱하여 한데 모아 덩어리를 형성할 수 없다.[詩者 吟詠性情也 盛唐諸人 唯在興趣 羚羊掛角 無迹可求 故其妙處 透澈玲瓏 不可湊泊]”라고 하였다.

134)방옹(放翁):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의 호이다. 자는 무관(務觀), 또 다른 호는 위남(渭南), 노학암(老學菴), 구곡노초(九曲老樵) 등이다. 당시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金)나라와의 강화(講和)를 주장한 때를 당해서 우국충정으로 강화를 극력 반대했기 때문에 전혀 등용되지 못했다가, 진회가 죽은 뒤에야 효종(孝宗)의 부름을 받아 추밀원 편수(樞密院編修)를 거쳐 기주(夔州), 엄주(嚴州)의 지현(知縣)을 역임하고 보장각 대제(寶章閣待制)로 치사(致仕)하였다. 뛰어난 시인으로 역대 최다의 시작(詩作)을 남겼으며,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자연을 즐기는 시풍을 가장 숭상했다고 한다. 85세의 장수를 누렸고, 일찍이 촉도(蜀道)의 풍토(風土)를 좋아하여 평생에 지은 시를 검남시고(劍南詩稿)라고 제(題)하였다. 검남시고 외에도 많은 저서가 있다. 宋史 卷395 陸游列傳

135)해탈(解脫)이랑 금단(金丹):해탈은 불교의 용어로,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로운 경계에 이름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 속에 유유자적함을 뜻하고, 금단은 도가(道家)에서 제조하는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을 말한 것으로, 구전단(九轉丹) 또는 구전환단(九轉還丹)이라고도 한다. 육유(陸游)의 올좌파념유력산수희작(兀坐頗念游歷山水戱作) 시에 의하면 “예전엔 멀리 놀며 귀밑 희어짐을 탄식했더니, 요즘은 병이 많기 때문에 금단을 배우노라.[昔歎遠遊生雪鬢 近緣多病學金丹]”라고 하였다.

136)검남(劍南):육유가 일찍이 기주 통판(夔州通判)에 제수되어 촉중(蜀中)에 가 있으면서 촉중의 풍토(風土)를 보고 매우 좋아한 나머지, 평생 지은 시를 검남시고라고 명명했던 데서, 육유를 가리킨다.

137)유산(遺山):금(金), 원(元) 양대(兩代)에 걸친 시인인 원호문(元好問)의 호이다. 자는 유지(裕之)이다. 금나라 말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내향령(內鄕令)을 거쳐 좌사도사(左司都事), 행상서성좌사원외랑(行尙書省左司員外郞)을 역임하고 금나라가 망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의 시 가운데 오언(五言)은 당시의 조류와 달리 고고(高古)하고 침울한 특징이 있었고, 칠언(七言) 악부(樂府)의 경우는 고제(古題)를 사용하지 않고 특별히 새로운 뜻을 창출했으며, 가요(歌謠)는 매우 비분강개한 뜻을 담았고, 장단구(長短句) 또한 새로운 가락을 창출하였다. 만년에는 망한 금나라의 전장법도(典章法度)가 묻힐 것을 염려하여 자기 집에 야사정(野史亭)을 세우고 그곳에 앉아서 예전 금나라의 군신 간에 남긴 언행들을 들은 대로 낱낱이 모아 기록하여 그것이 무려 백여 만언(百餘萬言)에 이르렀던바, 지금 전하는 것은 중주집(中州集)임진잡편(壬辰雜編) 등이 있다. 이 밖에 많은 시집을 남겼다. 金史 卷126 文藝列傳 元好問

138)운림(雲林):원(元)나라 시인이며 서화가였던 예찬(倪瓚)을 가리킨다. 예찬의 자는 원진(元鎭), 운림거사(雲林居士)라 자호(自號)하였다. 그가 거처하는 청비각(淸閟閣)에는 수천 권의 장서(藏書)가 있었고, 고정법서(古鼎法書), 명금 기화(名琴奇畫) 등을 좌우에 진열하였으며, 주위에는 고목 수죽(高木脩竹),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무성하였다. 그는 결벽증이 있어 마냥 씻는 게 일이었고, 속객(俗客)이 다녀간 뒤에는 반드시 그가 앉았던 곳을 씻어 내고야 말았다고 한다. 그는 본래 가산(家産)이 많았으나 친구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삿갓 차림에 일엽편주(一葉片舟)로 진택(震澤), 삼묘(三泖) 사이를 왕래하면서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明史 卷298 隱逸列傳 倪瓚

139)홍정(弘正):명 효종(明孝宗)의 홍치(弘治) 연간과 무종(武宗)의 정덕(正德) 연간을 합칭한 말인데, 이때에 명대(明代)의 문인 전칠자(前七子)가 활약했다. 전칠자는 144쪽 주130 참조.

140)조정(朝廷)과……알았으랴:조정에서 벼슬한 사람과 전야(田野)에 묻혀 산 사람 간에 시풍(詩風)이 서로 다름을 의미한다.

141)왕이(王李):명대(明代)의 문인으로 후칠자(後七子)에 속한 왕세정(王世貞), 이반룡(李攀龍)을 합칭한 말이다. 후칠자는 144쪽 주130 참조.

142)어양(漁洋):청(淸)나라의 문인 왕사정(王士禎)을 가리킨다. 그의 호가 어양산인(漁洋山人)이고, 서실(書室) 이름은 대경당(帶經堂)이다. 명대(明代) 전후 칠자(前後七子)들은 한(漢), 위(魏), 성당(盛唐)의 시풍(詩風)만을 고집함으로써 그 폐단은 실제에 절실하지 못한 데로 흐르게 되고, 공안파(公安派)는 송인(宋人)의 시풍을 가지고 칠자(七子)의 단점을 바로잡음으로써 그 폐단은 또 천근하고 추솔한 데로 흐르게 되었으므로, 왕사정이 일찍이 이 양파(兩派)의 치우친 점을 바로잡기 위해 당(唐)나라 사공도(司空圖)의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과 송(宋)나라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의 이론(理論)을 취하여 신운설(神韻說)을 처음 만들었는데, 이 설을 당대의 문인들이 크게 숭상했다고 한다. 신운설의 요지는 ‘흥취가 있는 곳에 신묘함이 이른다.[興會神到]’라는 것을 강조하여, 청담 한아(淸淡閒雅)한 정취와 운치를 시가(詩歌)의 최고 경지로 삼은 것이다. 공안파는 명대 후기에 공안(公安) 사람인 원종도(袁宗道), 원굉도(袁宏道), 원중도(袁中道) 3형제로 형성된 한 문학파를 가리킨다. 왕사정의 저서에 어양시문집(漁洋詩文集), 정화록(精華錄), 대경당집(帶經堂集), 엄주산인사부고(弇州山人四部稿) 등이 있다. 淸史稿 卷272

143)창랑(滄浪):송대(宋代)의 문인으로 호가 창랑포객(滄浪逋客)인 엄우(嚴羽)를 가리킨다. 그가 일찍이 창랑시화(滄浪詩話)를 저술했던바, 여기에는 시변(詩辨), 시체(詩體), 시법(詩法), 시평(詩評), 시증(詩證)의 다섯 체제로 나누고, 시도(詩道)의 지표를 선(禪)에 비유하여 송나라의 시풍(詩風)을 비판하고 성당(盛唐)의 시풍을 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44)종영(鍾嶸):양(梁)나라의 문인으로 일찍이 시품(詩品) 3권을 저술하여 한위(漢魏) 이래의 시인 103인의 우열을 논하여 상․중․하 3품으로 나누었다. 이 책이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과 병칭(竝稱)되었다고 한다. 梁書 卷49 文學列傳 鍾嶸

145)자지(紫芝)의……다했어라:자지는 당대(唐代)의 은사(隱士) 원덕수(元德秀)의 자이다. 자세한 내용은 136쪽 주105 참조.

146)홍두가(紅豆歌)……어리는구려:홍두는 홍두수(紅豆樹) 또는 상사자(相思子)라 칭하는 일종의 과목(果木)인데, 과일은 선홍색(鮮紅色)인 데다 모양은 심장처럼 생겼고 빛이 영롱하여 사랑스러우므로, 문학작품에서 흔히 남녀 간의 상사(相思)의 상징으로 쓰인다. 전하여 여기서는 매천이 고인(古人)을 그리워하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왕유(王維)의 상사(相思) 시에 의하면 “홍두가 남국에서 나는데, 가을에는 몇 가지나 피었는지? 권하노니 그대여 많이 따 두게나, 이 과실이 가장 생각나는구려.[紅豆生南國 秋來發幾枝 勸君多採擷 此物最相思]”라고 하였다. 王右丞集 卷15

147)명산(名山)의……있겠는가: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은 술을 매우 즐겨 마셨고, 휘파람을 대단히 잘 불어서 금조(琴操)와 조화를 잘 이루었다고 하며, 진류(陳留)에 그의 소대(嘯臺)가 전하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135쪽 주103 참조.

148)병술고(丙戌稿):1886년(고종23), 매천의 나이 32세 때 지은 시고이다.

149)왕봉주 선생 사각(王鳳洲先生師覺):호가 봉주인 왕사각(王師覺, 1836〜1895)을 가리킨다. 왕사각은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의 장남으로, 자는 임지(任之)이다. 그는 일찍이 학행(學行)이 훌륭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나서 중년에 서울로 과거(科擧)를 보러 갔다가 어지러운 시국을 보고는 과거를 단념하고 돌아와 버렸다. 그 후 백운산(白雲山) 만수동(萬壽洞)으로 이거(移居)했다가 다시 오봉산(五峯山)으로 이거하여 후학(後學)을 길렀는데, 매천도 이때 그에게 사사(師事)했다.

150)거문고……건:원래는 아주 아름다운 사물을 훼손시키는 데 비유한 말이다. 만당(晩唐)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의산잡찬(義山雜纂)에 의하면, 좋은 풍경을 훼손시키는, 이른바 살풍경(殺風景)을 말하였는바, 즉 맑은 샘에 발 씻기[淸泉濯足], 꽃 위에 잠방이 말리기[花上曬褌], 산을 등져서 누각 짓기[背山起樓], 거문고 불 때고 학 삶아먹기[燒琴煮鶴], 꽃 마주하여 차 마시기[對花啜茶], 소나무 아래서 갈도하기[松下喝道]에서 온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생활이 어려워서 본의 아니게 좋은 물건을 훼손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151)칼……노래하네:장부가 때를 만나지 못해 포부를 펴지 못하여 분개함을 뜻한다. 두보(杜甫)의 단가행증왕랑사직(短歌行贈王郞司直) 시에 “왕랑이 술 취하면 칼 뽑아 땅 치며 노래함이 더없이 슬퍼라, 내가 능히 그대 억눌려 있는 뛰어난 재주를 발천하리라.[王郞酒酣拔劍斫地歌莫哀 我能拔爾抑塞磊落之奇才]”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21

152)모소(毷氉):번뇌를 뜻한다. 당(唐)나라 이조(李肇)의 당국사보(唐國史補)에 의하면 “과거에 급제하여 그의 성명을 자은사의 안탑에 벌여 기록하는 것을 ‘제명회’라 하고, 급제자에게 곡강정에서 연회를 베푸는 것을 ‘곡강회’라 하고……과거에 낙제하여 배부르게 취하는 것을 ‘타모소’라 한다.[旣捷 列書其姓名於慈恩寺塔 謂之題名會 大醼於曲江亭子 謂之曲江會……不捷而醉飽 謂之打毷氉]”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타모소는 곧 낙제에 따른 번뇌를 떨어 버린다는 뜻이다.

153)송(頌)이……만하고:자연(子淵)은 한대(漢代)의 문장가로 특히 사부(辭賦)에 뛰어났던 왕포(王褒)의 자이다. 그가 일찍이 선제(宣帝)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이르러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을 지었는데, 선제가 이 글을 보고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즉석에서 그를 대조(待詔)로 임명했던바, 그로 인하여 이 글이 세상에 더욱 회자(膾炙)되었다. 漢書 卷64 王褒列傳전하여 여기서는 왕사각(王師覺) 또한 왕씨이므로 그를 왕포의 재능에 빗대서 말한 것이다.

154)책(策)이……하건만:개황(開皇)은 수 문제(隋文帝)의 연호이다. 수나라 왕반(王頒)이 일찍이 자기 아버지 승변(僧辯)이 진 무제(陳武帝)에게 살해당한 것을 몹시 비통하게 여겨 이를 갈고 복수를 꾀한 나머지, 수 문제 개황 초기에 취진책(取陳策)을 올리고 이어 군대를 대거 징발하여 진(陳)을 쳐서 끝내 진을 멸망시키고 따라서 진 무제의 능을 발굴하여 부관 분골(剖棺焚骨)까지 했던바, 수 문제는 그를 효의(孝義)의 도리를 다했다고 칭찬했다 한다. 御定孝經衍義 卷81이 역시 같은 왕씨이기 때문에 왕사각을 왕반의 재능과 의기(義氣)에 빗대서 말한 것이다.

155)먼지……돌보고:불을 지펴 끼니를 지을 것이 없을 만큼 몹시 곤궁한데도 전혀 여기에 마음을 쓰지 않음을 뜻한다.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 범염(范冉)의 자는 사운(史雲)이고, 일찍이 내무장(萊蕪長)으로 부름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는 벼슬길에도 나가지 않고 워낙 청빈하게 지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를 두고 노래하기를 “시루 속에 먼지가 쌓인 범사운이요, 솥 안에 물고기가 사는 범 내무로다.[甑中生塵范史雲 釜中生魚范萊蕪]”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81 獨行列傳 范冉

156)초록 인간(蕉鹿人間):파초(芭蕉)와 사슴 사이의 인간이라는 뜻으로, 인간의 흐리멍덩한 삶 또는 득실의 무상(無常)함을 비유한다. 옛날에 정(鄭)나라 사람이 땔나무를 하러 갔다가 사슴을 잡아 가지고 남이 볼까 봐 깊은 구덩이에 감춰 두고 파초 잎으로 덮어놓고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윽고 그 사슴 감춰 둔 곳을 잊어버리고는 마침내 꿈이라 여기고 길을 가면서 계속 그 사실을 혼자 중얼거리고 있으므로, 곁에서 그 말을 들은 자가 마침내 그의 말대로 그곳을 찾아가 사슴을 취하고, 그가 집에 돌아가서는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까 땔나무하던 사람은 꿈에 사슴을 얻고도 그곳을 알지 못했고, 내가 지금 그 사슴을 얻었으니, 저 사람은 참으로 꿈을 꾼 사람일 뿐인 것이다.[向薪者夢得鹿而不知其處 吾今得之 彼直眞夢者矣]”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列子 周穆王

157)육경(六經)은……아니었네:육경은 성인(聖人)의 언행이 담긴 책을 말하고, 착륜(斲輪)은 수레바퀴를 깎는다는 뜻이다. 춘추 시대 제 환공(齊桓公)이 일찍이 대청에서 글을 읽고 있을 때, 마침 수레바퀴를 깎는 편(扁)이라는 장인(匠人)이 대청 아래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제 환공에게 묻기를 “감히 묻겠습니다. 대왕께서 읽으시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敢問公之所讀者何言耶]” 하자, 환공이 성인의 말씀이라고 대답하니, 그가 또 성인이 살아 있느냐고 물으므로, 환공이 이미 돌아갔다고 대답하자, 그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대왕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입니다.[然則君之所讀者 古人之糟粕已夫]”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莊子 天道

158)곤포(崑圃)에서……아니다마다:곤포는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에 있는 선경(仙境)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곤륜산을 가리킨다. 예로부터 곤륜산에는 옥이 아주 많이 생산되므로, 한(漢)나라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에 “중국에 희귀한 것을 외국에서는 천히 여긴다. 그러므로 남월에서는 공작의 깃털을 문호에 치장하고, 곤륜산 주위에서는 옥박을 까치에게 던지기도 한다.[中國所鮮 外國賤之 故南越以孔雀珥門戶 崑山之旁 以玉璞抵鳥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59)강운루(絳雲樓)……것을:강운루는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문인(文人) 전겸익(錢謙益)의 장서실(藏書室) 이름이고, 우산(虞山)은 호가 우산종백(虞山宗伯)인 전겸익을 가리키는데, 그는 일찍이 강운루에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각종 서책 수만 권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뒤에 화재로 인해 서책이 모두 소실(燒失)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그리고 한서(漢書)를 전당 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양(梁)나라 때 사교(謝僑)가 본래는 부귀를 누렸는데, 어느 날 갑자기 먹을 것도 없게 되어, 그의 아들이 한서를 전당 잡히고 돈을 구해 오려는 뜻으로 아뢰자, 그가 대답하기를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어찌 이것을 가지고 먹을 것을 채울 수가 있겠느냐.[寧餓死 豈可以此充食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60)창곡(昌穀)은……엄연하였음을:창곡은 명대(明代)의 문인 서정경(徐禎卿)의 호이다. 서정경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여 집에 책 한 권이 없어도 통하지 못한 글이 없었고, 제생(諸生)으로 있을 때부터 시가(詩歌)에 뛰어나서 명성이 자자했으며, 홍치(弘治) 연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은 국자 박사(國子博士)에 그치고 2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는 또 축윤명(祝允明), 당인(唐寅), 문징명(文徵明)과 명성을 나란히 하여 오중사재자(吳中四才子)로 불리었고, 전칠자(前七子)인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 등과도 교유(交遊)하였다. 明史 卷286 文苑列傳 徐禎卿전칠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44쪽 주130 참조.

161)정경석(鄭卿錫):자는 선보(善步), 호는 소취(小翠), 성재(惺齋)이다. 구례(求禮) 출신으로 매천집(梅泉集) 발간에 연조(捐助)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162)고학(苦學)은……만하고말고:송(宋)나라 축목(祝穆)의 방여승람(方輿勝覽) 마침계(磨針溪)에 의하면 “상이산 아래 있는데,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태백이 이 산중에서 글을 읽다가 미처 다 성취하기 전에 이곳을 버리고 떠나면서 이 시내를 지나다가, 한 노파가 한창 무쇠 절굿공이를 갈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 까닭을 묻자, 노파가 말하기를 ‘바늘을 만들기 위해 갈고 있다.’ 하므로, 이태백이 그 뜻에 감동을 받아 다시 되돌아가서 학업을 마쳤다고 한다.[在象耳山下 世傳李太白讀書山中 未成棄去 過是溪 逢老媼方磨鐵杵 問之 曰欲作針 太白感其意還 卒業]”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학문에 끝까지 정진하는 것을 비유한다.

163)형설지공(螢雪之功):진(晉)나라 때 차윤(車胤)과 손강(孫康)이 모두 젊었을 때 집이 몹시 가난하여 기름을 마련할 수가 없었으므로, 차윤은 여름밤에 반딧불[螢]을 모아서 그 불빛으로 글을 읽었고, 손강은 겨울밤에 눈[雪] 빛으로 책을 비추어서 열심히 글을 읽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집이 가난하여 고학(苦學)하는 데에 비유한다.

164)아미산(峨嵋山):충남 남포현(藍浦縣)에 있는 산명(山名)이다.

165)먼지……벼루:무쇠 벼루란, 오대(五代) 시대 진(晉)의 상유한(桑維翰)이 일찍이 진사(進士)에 응시했을 때 시관(試官)이 그의 성(姓) 자가 상(喪)과 동음(同音)이란 것을 꺼리어 그를 빼 버렸으므로, 혹자가 그에게 굳이 진사 급제를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달리 벼슬을 구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자, 그가 분개하게 여겨 일출부상부(日出扶桑賦)를 지어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고, 또 무쇠 벼루를 주조하여 남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 벼루가 다 닳거든 마음을 바꿔 다른 길로 벼슬을 구하겠다.” 하고는, 그 후로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끝내 진사에 급제했던 데서 온 말이다. 五代史 卷29 전하여 문필(文筆)의 공부가 도저(到底)함을 의미하는바, 벼루에 먼지가 쌓였다는 것은 곧 공부를 중단했음을 뜻한다.

166)꿈같은……저버렸구려:감역(監役)의 미관말직(微官末職)이나마 지냄으로 인해 은거하여 학문에만 전념하려던 초심(初心)을 지키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167)뱃속 상자의 경전(經傳):후한(後漢) 때의 문인(文人) 변소(邊韶)의 자는 효선(孝先)인데, 그가 일찍이 수백 인의 문도(門徒)를 교수(敎授)할 적에 한번은 낮잠을 자는데 한 제자가 선생을 조롱하기를 “변효선은 배가 똥똥하여 글 읽기는 싫어하고 잠만 자려고 한다.[邊孝先 便便腹 懶讀書 但欲眠]”라고 하자, 변소가 그 말을 듣고 즉시 대구(對句)하기를 “똥똥한 내 배는 오경의 상자이고, 잠만 자려고 하는 것은 경을 생각하기 위함이다.[腹便便 五經笥 但欲眠 思經事]”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80上 文苑列傳 邊韶전하여 흔히 경학(經學)에 밝음을 의미한다.

168)연상(硏桑)의……못했겠지:연상의 연은 춘추 시대 월(越)나라 사람으로 계산(計算)을 아주 잘한 데다 범려(范蠡)의 계책을 사용하여 거부(巨富)를 이루었던 계연(計硏)을 가리키고, 상은 한(漢)나라 사람으로 경제정책에 아주 밝아 무제(武帝) 때 대농승(大農丞)으로 재직하면서 천하의 염철(鹽鐵)을 모두 관장하여 평준법(平準法)을 만들었고 벼슬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른 상홍양(桑弘羊)을 가리킨다. 史記 卷30 平準書 漢書 卷91 貨殖傳여기서 주의가 깊지 못했다는 것은 곧 죽은 유노식(柳魯植)이 치산(治産)을 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169)청전(靑氈):본디 푸른 담요를 말하는데, 진(晉)나라 때 왕헌지(王獻之)가 어느 날 밤 서재(書齋)에 누웠을 때, 도둑이 그 방에 들어와서 다른 물건을 모조리 훔치고 또 와탑(臥榻)으로 올라가자, 왕헌지가 천천히 말하기를 “청전은 우리 집의 대대로 전해 온 물건이니, 그것만은 놓아두거라.[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 하니, 도둑이 놀라서 달아났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80 王獻之列傳전하여 가전(家傳)의 구물(舊物) 또는 세전지업(世傳之業)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170)봉성(鳳城):구례(求禮)의 고호이다.

171)구절장(九折杖):구절장(九節杖)의 착오인 듯하다. 본디 선인(仙人)이 사용하는 지팡이를 가리키고 또는 대지팡이를 가리키기도 한다.

172)도부(桃符):옛 풍속에 신년(新年) 초하루가 되면 복숭아나무 판자[桃木板] 두 개에다 신도(神荼), 울루(鬱壘)라는 두 신명(神名)을 써서 문 양쪽 곁에 걸어 이것으로 사귀(邪鬼)를 물리쳤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부적(符籍)을 가리킨다.

173)경비(輕肥)의 차림:공자(孔子)가 이르기를 “공서적은 제나라에 갈 적에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었다.[赤之適齊也 乘肥馬衣輕裘]”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의미한다. 論語 雍也

174)어초(漁樵):고기 잡고 나무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전하여 산중에 은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175)경경(卿卿):당신 또는 자네라는 뜻으로, 본디 아내가 남편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인데, 남편이 아내를 이렇게 부르기도 하고, 친구를 친애하는 뜻으로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진(晉)나라 왕융(王戎)의 아내가 왕융을 당신이라고 부르자, 왕융이 말하기를 “부인이 남편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경스러우니,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마오.”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당신을 친하고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니, 내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누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르겠소.[親卿愛卿 是以卿卿 我不卿卿 誰當卿卿]” 한 데서 온 말이다. 世說新語 惑溺여기서는 특히 아내를 부르는 말로 쓰였다.

176)송료(松醪):송진(松津)이나 송화(松花)를 넣어서 빚은 술을 말한다. 송(宋)나라 이강(李綱)의 망백수산차합강루운(望白水山次合江樓韻) 시에 의하면 “일천 근심 백 가지 생각을 다 제쳐 두고, 우선 한 섬 송료춘으로 취해나 보잤구나.[撥置千憂竝百慮 且醉一斛松醪春]”라고 하였다.

177)정해고(丁亥稿):1887년(고종24), 매천의 나이 33세 때 지은 시고이다.

178)하동 사군(河東使君) 동석(東石) 조정현(趙正顯):사군은 흔히 지방관의 별칭으로 쓰이는바, 하동 사군은 곧 하동 군수(河東郡守)를 가리킨다. 호가 동석인 조정현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179)취묵(醉墨):취중에 시화(詩畫) 등을 짓고 쓰는 것을 말한다.

180)철적(鐵笛):자세한 내용은 116쪽 주55 참조.

181)선보(單父)의……힘들고:선보는 고을 이름이다. 공자의 제자 복자천(宓子賤)은 성품이 매우 인애(仁愛)하여 일찍이 선보를 다스릴 적에 항상 거문고만 타고 앉아서 당(堂) 아래를 내려가지 않았으나 선보가 잘 다스려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呂覽 察賢여기서는 곧 조정현이 당시 하동 군수로 선정(善政)을 펴고 있음을 의미한다.

182)진번(陳蕃)의……어렵네:진번은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로 일찍이 예장 태수(豫章太守)가 되었는데, 그는 본디 빈객을 전혀 접대하지 않았으되, 다만 당대의 고사였던 서치(徐穉)가 찾아오면 특별히 걸상 하나를 내려서 그를 정중히 접대하고, 그가 떠난 뒤에는 다시 그 걸상을 걸어 두곤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53 徐穉列傳전하여 여기서는 주객(主客)이 서로 가장 의기투합한 친구 사이임을 의미한다.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물건의 정화는 천연의 보배이니 용천검의 광채가 우성 두성의 자리를 쏘아 비추고, 사람이 걸출함은 땅이 영수하기 때문이니 서유가 진번의 걸상을 내려놓게 했다.[物華天寶 龍光射牛斗之墟 人傑地靈 徐孺下陳蕃之榻]”라고 하였다.

183)조동석(趙東石):조정현(趙正顯)으로 호가 동석이다.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으나, 고종(高宗) 연간에 구례(求禮)․광양(光陽)의 현감(縣監), 하동 도호부사(河東都護府使) 등을 역임했다고 한다.

184)정규석(鄭圭錫):생몰년은 알 수 없으나, 고종 연간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고 한다.

185)문창후(文昌侯)……사람이었지:문창후는 신라 시대 유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의 봉호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최치원이 일찍이 지리산(智異山) 쌍계사(雙溪寺)에서 글을 읽었다 한다. 그리고 쌍계사 뜰에는 100아름이나 되는 늙은 괴목(槐木)이 있어 그 뿌리가 작은 계곡을 가로질러 서리서리 얽혀서 다리[橋] 같으므로 이것을 다리로 삼았다 하는데, 이 나무는 최치원이 손수 심었다 하며, 또 골짝 어귀에는 고비(古碑)가 있는데 그 비문 또한 최치원이 지은 것이다. 옥보고(玉寶高)는 신라 시대 음악가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그가 일찍이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50년 동안 금법(琴法)을 닦고 거문고의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었다 한다.

186)매화(梅花)는……있고:여기서 외로운 학이란 곧 이 시(詩) 2수 중 앞 시의 맨 마지막 구절에 나온 청학루(靑鶴樓)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187)상연(桑緣):불도(佛徒)를 상문(桑門)이라 칭하므로, 불도와의 인연이라는 뜻으로 쓰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188)대명금(大明錦):명나라 비단을 말한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여기서는 곧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명나라 비단으로 장황(裝潢)한 아미타경(阿彌陀經)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아미타경은 1903년(광무7) 국사암(國師菴)에서 판각된 것이 쌍계사(雙溪寺)에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189)천계(天啓):명 희종(明熹宗)의 연호이다.

190)이때가……소란스러웠고:여기서 폐조(廢朝)는 조선 광해군 재위 시절을 가리키고, 매미처럼 소란스러웠다는 것은 광해군의 무도한 정치로 인하여 조정이 몹시 소란스러웠음을 뜻한다. 시경 탕(蕩)에 “문왕이 말씀하기를, 아 슬프다 너희 은상아, 매미들이 울 듯이 시끄러우며, 국이 끓듯이 소란스럽다.[文王曰咨 咨女殷商 如蜩如螗 如沸如羹]” 하였다.

191)도성(都城)……번성했었지:1611년(광해군3)에 진사(進士) 임숙영(任叔英)이 책문시(策問試)에서 당시의 무도한 정치를 풍자하여 말이 매우 간절하고 곧았으므로, 고시관(考試官)이 두려워서 그 시지(試紙)를 감히 펴지 못하자, 광해군이 친히 펴 보고 대단히 노하여 임숙영의 이름을 방(榜)에서 빼 버리도록 명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권필(權韠)이 다시 조정을 풍자하는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대궐 버들 하 푸르고 꾀꼬리들 요란히 날 제, 도성 가득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양을 떠네. 조정에선 모두 태평의 봄을 하례하는 이때, 누가 포의의 입에서 위태론 말을 내게 했나.[宮柳靑靑鶯亂飛 滿城冠蓋媚春暉 朝家共賀昇平樂 誰遣危言出布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燃藜室記述 卷19 廢主光海君故事本末 權韠여기서 말한 대궐 버들은 광해군의 외척(外戚)으로 발호(跋扈)하던 유씨(柳氏)들을 가리키고, 포의(布衣)는 임숙영을 가리킨 것이다.

192)연계(燕薊)의 비린내 속:연계는 지금의 북경(北京)으로, 즉 청(淸)나라를 가리키고, 비린내란 본디 추악한 사물을 말하는 것으로, 전하여 반적(叛賊)을 지칭한다. 여기서는 곧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에 이어, 만주족(滿洲族)인 누루하치(奴兒哈赤)가 마지막으로 명나라를 멸망시키던 전란(戰亂)을 가리킨다.

193)틈헌(闖獻)의 현황(玄黃):틈헌의 틈은 명나라 말기의 유적으로 틈왕(闖王)이라 자칭한 이자성을 가리키고, 헌은  이자성과 함께 반군을 일으켜 성도(成都)를 함락하고 대서국왕(大西國王)이라 자칭한 장헌충(張獻忠)을 가리킨다. 그리고 현황은 주역(周易) 곤괘(坤卦)에 “상육은 용이 들에서 싸우니, 그 피가 검고 누렇다.[上六 龍戰于野 其血玄黃]”라고 한 데서, 전하여 피를 가리키는바, 이 역시 전란을 의미한다.

194)청학동(靑鶴洞) 선경(仙境):지리산(智異山)에 본디 선경인 청학동이 있다는 전설에서 온 말인데, 당시 매천이 지리산 국사암(國師菴)에서 쉬면서 아미타경을 보고 있던 터라 청학동을 말한 것이다.

195)열다섯……오래이거니:황릉(皇陵)은 명(明)나라 황제들의 능을 말한다. 열다섯 능이란 바로 명나라 태조(太祖)로부터 장렬제(莊烈帝)에 이르기까지의 능을 가리킨다.

196)난정 옥갑(蘭亭玉匣)은……것이요:난정 옥갑이란, 당 태종(唐太宗)이 일찍이 진대(晉代)의 명필(名筆) 왕희지(王羲之)로부터 그 이하 명필들의 글씨 1000여 축(軸)을 구입했던바, 그중에도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를 유독 소중히 여겨 옥갑(玉匣)에 담아서 그의 후비(后妃)인 문덕황후(文德皇后)의 소릉(昭陵)에 순장했던 데서 온 말이고, 귀신이 밤에 곡을 했다는 것은, 오대(五代) 당(唐)의 온도(溫韜)가 소릉을 도굴하여 그 옥갑에 담긴 글씨들을 다 훔쳐 갈 적에 광중(壙中)에서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데서 온 말이다. 다만 광중에서 곡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전해 온 말일 뿐, 그 근거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舊五代史 卷73 唐書 溫韜列傳 蘭亭考 卷3

197)휘릉(徽陵)의……버려졌었지:휘릉은 후당(後唐) 명종(明宗)의 능호(陵號)이고, 철경(鐵檠)은 무쇠로 된 등잔걸이를 말하는데, 후당이 후진(後晉)에게 멸망당한 후 휘릉이 발굴되었던바, 거기에는 후목(朽木) 한 조각과 철경 하나만 남아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舊五代史 卷44 唐書 明宗本紀 資治通鑑後編 卷155

198)무종(無從)의 눈물 흘러라:무종의 눈물이란 슬퍼하기만 할 뿐, 슬퍼한 만큼 도움을 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위(衛)나라에 가서 옛 주인의 상을 만나서 들어가 곡하고 나와서 자공(子貢)을 시켜 참마(驂馬)로 부의(賻儀)를 하라고 하므로, 자공이 옛 주인에게 참마의 부의는 너무 과중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공자가 이르기를 “내가 지난번 들어가 곡할 적에 한번 슬퍼하매 눈물이 나왔으니, 나는 눈물을 따르는 게 없이 흘리는 것을 싫어하노라.[予鄕者 入而哭之 遇於一哀而出涕 予惡夫涕之無從也]”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上

199)한……보호하고:존각(尊閣)은 원대(元代)에 건립했던, 학궁(學宮)의 장서(藏書)를 보관하던 존경각(尊經閣)의 약칭으로, 전하여 여기서는 불경(佛經)을 소장하는 곳을 가리키고, 석거각(石渠閣)은 한대(漢代) 황실의 도서각(圖書閣) 이름이다.

200)무자고(戊子稿):1888년(고종25), 매천의 나이 34세 때 지은 시고이다.

201)서생(書生)의……깨달았지만: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뱁새는 깊은 숲에 둥지를 틀어도 의지한 것은 나뭇가지 하나에 지나지 않고, 두더지는 강물을 마셔도 제 배를 채우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鷦鷯巢於深林 不過一枝 鼴鼠飮河 不過滿腹]”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매천 자신의 식견을 하찮게 여겨 겸사로 하는 말이다.

202)문희연(聞喜宴):당대(唐代)에 진사 급제자를 방방(放榜)한 다음, 이들을 장안(長安)의 곡강정(曲江亭)에 모아 놓고 베풀었던 주연을 말하는데, 이것을 문희연 또는 곡강회(曲江會)라고도 한다.

203)안 상사 중섭(安上舍重燮):상사(上舍)는 조선 시대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를 달리 이르던 말로, 즉 1882년(고종19)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안중섭을 가리키는데, 자는 성심(聖深)이고, 호는 해사(海史) 또 다른 호는 연상(蓮上)이다. 저서로 연상집(蓮上集)이 있다.

204) 도림사(道林寺):전라남도 곡성군 월봉리 동악산(桐岳山)에 있던 절이다.

205)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시를 짓는 데 있어 제자리에 꼭 알맞은 글자를 놓으려고 고심하는 것을 말한다. 당대(唐代)의 시인(詩人) 가도(賈島)가 하루는 나귀를 타고 도성(都城) 거리를 나갔다가, ‘승고월하문’이라는 시구(詩句)를 짓고는 혼자 손짓을 하면서 퇴(推) 자를 쓸까, 고(敲) 자를 쓸까 하고 수없이 고심하다가, 마침 당시 경조윤(京兆尹)이던 한유(韓愈)의 행차를 만나서 한유에게 그 사실을 갖추 말하자, 한유가 그에게 고(敲) 자가 더 좋다고 말해 주었던 데서 온 말이다. 唐詩紀事 卷40

206)기축고(己丑稿):1889년(고종26), 매천의 나이 35세 때 지은 것이다.

207)오가야국(五伽倻國):지금의 경상도에 걸쳐 존재했던 고대(古代)의 소국(小國)으로, 지금의 함안(咸安)인 아라가야(阿羅伽倻), 지금의 함창(咸昌)인 고령가야(古寧伽倻), 지금의 고령(高靈)인 대가야(大伽倻), 지금의 경산(京山)인 성산가야(星山伽倻), 지금의 고성(固城)인 소가야(小伽倻)를 합칭한 말이다. 三國遺事 五伽倻

208)삼백부(三百部):부는 대열(隊列)을 뜻하는 말로, 수많은 대열의 악인(樂人)을 형용한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209)몇……기다리는고:주랑(周郞)은 삼국(三國) 시대 오(吳)의 주유(周瑜)를 가리킨다. 그는 젊어서부터 음악에 매우 밝아서 아무리 술 취한 뒤에도 음악 곡조가 그릇된 곳이 있으면 반드시 알았고, 알면 반드시 돌아보곤 했으므로, 당시 사람들 사이에 “곡조에 그릇된 곳 있으면 주랑이 돌아본다.[曲有誤 周郞顧]”라는 민요가 있기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또 당(唐)나라 곽애(郭曖)의 비첩(婢妾) 경아(鏡兒)가 쟁(箏)을 잘 탔는데, 이단(李端)이 일찍이 곽애의 연회(宴會)에 참석하여 경아를 몹시 좋아하는 눈치를 보이므로, 곽애가 이단에게 탄쟁(彈箏)으로 제(題)를 삼아 시를 잘 지어서 빈객들을 즐겁게만 해 주면 경아를 주겠다고 하자, 이단이 즉석에서 시를 지어 불렀다. 그 시에 의하면 “쟁은 금속의 기러기발을 괴었고, 섬섬옥수는 옥방 앞에 앉았도다. 주랑이 돌아보길 간절히 바라서, 때때로 일부러 줄을 잘못 타누나.[鳴箏金粟柱 素手玉房前 欲得周郞顧 時時誤拂絃]”라고 했다 한다. 三國志 卷54 吳書 周瑜傳 說郛

210)홍류동(紅流洞):가야산(伽倻山)의 많은 계곡 중에 가장 이름난 계곡이다. 높은 절벽과 봉우리 밑 골짜기에 울창한 송림(松林) 사이로 흐르는 계곡 물이 봄이면 양쪽 언덕의 진달래와 철쭉꽃에, 가을이면 단풍에 붉게 물든다고 하여 이렇게 이른 것이라 한다. 또 여름철이면 계곡 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마치 금강산(金剛山) 옥류천(玉流川) 같다 하여 일명 옥류동(玉流洞)이라 부르기도 한다.

211)농산정(籠山亭):가야산의 ‘고운최치원둔세지(孤雲崔致遠遯世地)’라는 비석이 있는 곳에 제시석(題詩石)이 있고, 그 계곡 가운데 이 정자가 있어 송림(松林)과 잘 어우러져 그림 같은 정경을 이루고 있다.

212)농산(籠山)은……아니로다:농산은 산을 둘러싼다는 뜻으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가야산에 은거했던바, 그의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시에 “돌 틈을 거세게 흘러 겹겹산을 쩡쩡 울려라, 지척에서도 사람 말소리 분간을 못하겠네. 항상 시비의 소리가 귀에 닿을까 두려워, 짐짓 흐르는 물로 산을 몽땅 감싸게 했구나.[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孤雲集 卷1

213)하사(下士):재덕(才德)이 조금 있는 사람 또는 초야에 있는 무명(無名)의 선비를 말하기도 한다. 안씨가훈(顔氏家訓) 명실(名實)에 의하면 “상사는 이름을 잊어버리고, 중사는 이름을 위주로 하며, 하사는 이름을 훔친다.[上士忘名 中士主名 下士竊名]”라고 하였다.

214)특별히……그것일세:외론 구름이란 최치원의 호가 고운인 데서 온 말로, 즉 그의 명성을 만고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바위 골짝의 외로운 구름에 빗대서 한 말이다.

215)경담 화상(鏡潭和尙):화상은 수행이 높은 승려에 대한 존칭이다. 경담에 대해서는 125쪽 주73 참조.

216)푸른 두 눈동자:옛날 서역(西域) 출신의 승려를 일컬어 벽안 호승(碧眼胡僧)이라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흔히 승려를 이렇게 일컫는다. 또 불경에 의하면, “여래의 눈동자는 감청색 같은 빛이 난다.[如來瞳子如紺靑色]”라고 하였다.

217)만홀산(萬笏山):홀은 본디 대신들이 천자를 조현(朝見)할 때 반열에 죽 늘어서서 손에 가지는 긴 수판(手板)을 말한 것으로, 만홀은 곧 죽 나열해 있는 뭇 산봉우리를 가리킨다.

218)수승대(搜勝臺):경남 거창군(居昌郡) 위천면 황산 마을 앞 구연동(龜淵洞)에 위치한 대 이름이다. 본디 삼국 시대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때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는 뜻에서 수송대(愁送臺)라 일렀다고 한다. 조선 중종(中宗) 때에 이르러 신권(愼權)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구연서당(龜淵書堂)을 건립하여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대(臺)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 하여 암구대(巖龜臺)라 이름하고 경내를 구연동이라 하였는데, 그 무렵 이황(李滉)이 한번은 그 근처를 유람차 갔다가 수송대에 대한 내력을 듣고는, 여정이 바빠서 그곳을 직접 들르지는 못하고 수송대라는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음이 비슷한 수승대로 고칠 것을 권하는 시를 지어 신권에게 보냈던바, 신권이 이황의 시를 대의 전면(前面)에 새기고부터 마침내 수승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219)십……길이요:구지산(九池山)은 감숙성(甘肅省) 성현(成縣) 서쪽에 있는데, 산상(山上)에 수지(水池)가 있어 이렇게 일렀다고 한다. 소식(蘇軾)의 화도도화원시(和陶桃花源詩)의 서(序)에 의하면 “공부 시랑 왕흠신 중지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구지산을 지나다 보니, 아흔아홉 개의 샘이 있고 수많은 산들이 빙둘러 싸고 있어 마치 도화원처럼 난세를 피해 은거할 만하더라.’ 했다.[工部侍郞王欽臣仲至謂予曰 吾嘗奉使過仇池 有九十九泉 萬山環之 可以避世如桃源也]”라고 하였는바, 소식의 차운조무구학사상영(次韻晁无咎學士相迎) 시에는 “꿈속에 구지산의 천 길 암벽이, 나를 푸른 안개 장막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네.[夢中仇池千仞巖 便欲攬我靑霞幨]” 하였고, 또 소식의 산파타행(山坡陀行) 시에는 “마치 사람이 있는 듯함이여, 꿈속의 구지산이 바로 내가 돌아갈 곳이로다.[若有人兮 夢中仇池我歸路]”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35, 卷43, 卷50여기서는 곧 매천이 평생 처음 보는 산수(山水)를 소식의 고사에 빗대서 한 말이다.

220)동도인(東道人):동도주(東道主)와 같은 뜻으로, 춘추 시대 진(晉)과 진(秦)이 군대를 연합하여 정(鄭)을 포위했을 때, 정 문공(鄭文公)이 촉지무(燭之武)를 보내서 진 목공(秦穆公)을 달래어 말하기를 “만일 우리 정나라를 그대로 두어 동방 길의 주인으로 삼아서 사자의 왕래에 부족한 것들을 공급하게 한다면 군주께서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若舍鄭以爲東道主 行李之往來 共其乏困 君亦無所害]” 한 데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僖公30年전하여 뒤에는 흔히 빈객을 접대하는 주인의 뜻으로 쓰인다.

221)계수(桂樹)……않는가:진 무제(晉武帝) 때 극선(郤詵)이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천하제일로 뽑혔는데, 무제가 극선에게 이르기를 “경(卿)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극선이 대답하기를 “신의 현량 대책이 천하제일로 뽑힌 것은 마치 계림의 계수나무 한 가지나, 곤륜산의 한 조각 구슬과 같은 것입니다.[臣擧賢良對策 爲天下第一 猶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52 郤詵列傳전하여 계수나무를 꺾는 것은 과거 급제를 의미하는바, 여기서는 곧 상대방에게 과거를 보아 벼슬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한 말이다.

222)돌아보니……알겠네:광려(匡廬)는 곧 여산(廬山)의 별칭이다. 소식의 제서림벽(題西林壁) 시에 의하면 “가로로 보면 산마루요 곁에서 보면 봉우리라, 원근에 따라 높고 낮음이 각각 다르구려.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다만 이 몸이 이 산 가운데 있기 때문일세.[橫看成嶺側成峯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23

223)두거령(杜居嶺)을……짓다:이 시제(詩題)에 나온 압강(鴨江)은 곧 전라북도 남원(南原)의 압록진(鴨綠津)을 말한 것이고, 시 속에 또 남원의 교룡산성(蛟龍山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시는 분명 매천이 남원의 압록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읊은 시인 듯한데, 다만 남원에는 옛날 거령현(居寧縣)이 있었을 뿐, 두거령에 대해서는 상고할 길이 없다.

224)봉우리마다……비둘기로다:비둘기가 울어대는 것을 말한다. 속설에 비둘기가 울면 비가 온다는 데서 온 말이다.

225)교룡산성(蛟龍山城):남원(南原)의 교룡산(蛟龍山) 중턱에 돌로 쌓은 산성인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의하면, 산성의 둘레는 5717척(尺)이고, 높이는 10척이며, 그 안에는 99개의 우물과 작은 시내 하나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고 한다.

226)살구꽃은……섰나:두목(杜牧)의 청명(淸明) 시에 “얘야 술집이 어드메 있느냐고 물으니, 목동이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借問酒家何處在 牧童遙指杏花村]”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살구꽃이 가리고 섰다는 곳이란 곧 술집을 의미한다.

227)십……깨뜨렸나:괴황(槐黃)은 괴화황(槐花黃)의 약칭으로, 당(唐)나라 때 유생(儒生)들이 응시 준비에 바빴던 계절을 말한다. 여기서 괴황을 깨뜨렸다는 것은 혹 낙제(落第)를 말한 것인지, 과거 응시를 포기한 것을 말한 것인지 자세하지 않다. 당나라 때 장안(長安)의 응시생들 중에 낙제한 자들이 6월 이후에는 도성(都城)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흔히 조용한 묘원(廟院)이나 주택을 빌려 거주하면서 작문을 연습하여 바로 그해 7월에 새로 지은 문장을 재차 헌상(獻上)하는데, 이 과정을 통틀어 과하(過夏)라고 하며, 이때가 마침 홰나무 꽃이 한창 노랗게 피는 무렵이므로 이 말이 있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228)해산(海山)에서……들려오네:영금(靈琴)은 신통한 거문고를 뜻한다. 악부(樂府) 수선조(水仙操)의 서(序)에 의하면, 옛날 백아(伯牙)가 스승 성련(成連)에게서 거문고를 3년 동안 배우고 나자, 성련이 이르기를 “나의 학식으로는 인정(人情)까지는 변화시킬 수 없다. 나의 스승 방자춘(房子春)이 지금 동해(東海) 가운데 계시는데, 능히 인정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다.” 하고, 마침내 백아를 데리고 동해의 봉래산(蓬萊山)에 들어가 백아를 그곳에 머물게 하면서 이르기를 “그대는 여기서 거문고를 연습하라. 나는 가서 스승을 맞아 오리라.” 하고는 배를 타고 떠나서 10일이 경과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백아는 서글피 사방을 바라보아도 사람은 하나도 없고, 파도가 쾅쾅 쳐대는 바닷물 소리와 그윽한 산림(山林)에서 뭇 새들의 슬피 지저귀는 소리만 들려오므로, 백아가 슬피 탄식하여 말하기를 “선생이 나의 정(情)을 변화시키려 한 것이다.” 하고, 이에 거문고를 가져다 한 곡조를 노래하고 나자, 그제야 성련은 스승을 맞이하여 돌아왔고, 백아는 마침내 거문고의 천하 일인자가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매천 자신이 인정세태(人情世態)와는 부합하지 못하는 반면, 바닷물 소리나 산새 소리 등 자연의 소리와 정신이 서로 감통함을 의미한 말이다.

229)옷소매……들국화로다:옷소매를 떨친다는 것은 곧 마음이 즐겁지 않아서 분노를 표시하고 바로 떠나 버리는 개결한 선비의 태도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흔히 퇴은(退隱)의 뜻으로 쓰이는바, 여기서는 곧 국화의 개결한 정취를 은사(隱士)의 지조에 빗대서 한 말이다.

230)계륵(鷄肋):닭갈비를 말하는데,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양수(楊脩)의 말에 “대저 닭갈비란 버리자면 아까운 생각이 들고, 먹자면 또한 먹을 것이 없다.[夫雞肋 棄之如可惜 食之無所得]”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三國志 卷1 魏書 武帝紀전하여 그리 취할 만한 가치도 없지만, 그렇다고 차마 버릴 수도 없는 사물을 비유한다.

231)연명(淵明)이 발병이 있어:연명은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의 자인데, 그는 평소 각질(脚疾)이 있어 한 문생(門生)과 두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남여(籃輿)를 메게 하여 다녔던 데서 온 말이다. 宋書 卷93 隱逸列傳 陶潛여기서는 단지 매천 자신에게 발병이 있었던 것을 도잠의 각질에 빗대서 한 말이다.

232)금단(金丹):도가(道家)에서 제조하는 장생불사약을 말한 것으로, 환단(還丹) 또는 구전환단(九轉還丹)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좋은 약을 의미한다.

233)요계(蓼溪)……당도했으니:요계는 남원(南原)에 있는 요천(蓼川)을 가리키고, 객중(客中)의 두 잉어란 바로 악부(樂府) 상화가사(相和歌辭)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 “손이 먼 곳으로부터 와서, 나에게 잉어 두 마리를 주길래, 아이 불러 잉어를 삶게 했더니, 뱃속에서 짤막한 서신이 나오네.[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兒烹鯉魚 中有尺素書]”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서신(書信)을 가리킨다.

234)수많은……시름했으리:두보(杜甫)의강상치수여해세요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 시에 의하면 “나는 성질이 아름다운 시구를 지나치게 좋아해, 남을 놀래키지 못하면 죽어도 마지않는데, 늘그막의 시편은 다 부질없는 흥취일 뿐이니, 봄이 오매 꽃과 새들은 너무 시름하지 말거라.[爲人性癖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 老去詩篇渾謾興 春來花鳥莫深愁]”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10여기서는 곧 상대방이 보내온 국화시(菊花詩)가 매우 훌륭했음을 의미한다.

235)절필(絶筆):죽기 전의 마지막 필적(筆跡)을 가리킨다.

236)손……날아갔구려: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생학(笙鶴)은 신선이 타는 학을 가리킨다. 일주서(逸周書)에 의하면,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太子)인 왕자교(王子喬)는 본디 생소(笙簫)를 불어서 봉황의 울음소리를 잘 냈는데, 그가 일찍이 도사 부구공(浮丘公)을 따라 숭고산(嵩高山)에 올라가서 선술(仙術)을 배운 지 30여 년 뒤에 구지산(緱氏山)에서 백학(白鶴)을 타고 승천했다는 고사가 있고, 또 열선전(列仙傳)에 의하면, 왕자교가 일찍이 환량(桓良)이라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에 고하라. 7월 7일에 내가 구지산 꼭대기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告吾家 七月七日 待我於緱氏山頭]”라고 하더니, 과연 그날 왕자교가 백학을 타고 구지산 꼭대기에 머물러 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고도 곁에 다가가지 못했는데, 그가 마침내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승천했다고 한다.

237)경인고(庚寅稿):1890년(고종27), 매천의 나이 36세 때 지은 시고이다.

238)구안실(苟安室):매천의 서실(書室) 이름이다.

239)내 집을 사랑하니:도잠(陶潛)의 독산해경(讀山海經) 시에 “새들은 의탁할 곳 있음을 좋아하거니와, 나는 또한 내 집을 사랑하노라.[衆鳥欣有託 吾亦愛吾廬]”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陶淵明集 卷4

240)사립짝이……두노라:도잠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정원은 날로 거닐어 정취를 이루고, 사립짝은 달렸어도 항상 닫혀 있네.[園日涉以成趣 門雖設而常關]”라고 하였다.

241)옹산(甕算)은……이랑뿐이지만:옹산은 망상(妄想)과 같은 뜻이다. 원(元)나라 위거안(韋居安)의 매간시화(梅磵詩話)에 의하면 “동파시(東坡詩)의 주석에 이르기를 ‘어느 가난한 선비의 집에 오직 항아리 하나가 있었으므로, 밤이면 항상 그 항아리를 지키면서 자곤 했던바, 하루저녁에는 혼자 마음속으로 만일 부귀를 얻는다면 약간의 돈만으로도 전택(田宅)을 경영하고 기녀(妓女)를 데리고 크나큰 수레까지 모든 것을 다 비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즐거워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다가 마침내 그 항아리를 밟아 깨 버렸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 세속에 망상하는 자를 가리켜 옹산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242)기우(杞憂)는……생각하네:기우는 옛날 기(杞)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면 자기가 도망가서 살 곳이 없다고 생각하여 침식(寢食)을 폐하고 걱정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흔히 불필요한 걱정을 하는 데에 비유한다. 그리고 천 칸의 집을 생각한다는 것은 곧 두보(杜甫)의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에 “팔월이라 한가을에 바람이 거세게 불어, 우리 지붕 세 겹 띠 이엉을 다 말아 갔네.……침상마다 새어 든 빗물로 마른 곳이 없는데, 삼대 같은 빗줄기는 영 끊이질 않누나. 상란을 겪은 뒤로는 잠이 절로 적어졌으니, 축축한 자리에서 기나긴 밤을 어이 지샐꼬. 어떻게 하면 천만 칸의 너른 집을 얻어, 천하의 한빈한 선비를 다 가려 주어 모두 기쁘게 하고,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산처럼 안온하게 할꼬. 아 언제나 눈앞에 우뚝 이런 집을 보게 될거나. 내 집이야 부서져 내 얼어 죽어도 만족하리라.[八月秋高風怒號 卷我屋上三重茅……牀牀屋漏無乾處 雨脚如麻未斷絶 自經喪亂小睡眠 長夜沾濕何由徹 安得廣廈千萬間 大庇天下寒士俱歡顔 風雨不動安如山 嗚呼何時眼前突兀見此屋 吾廬獨破受凍死亦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列子 天瑞 杜少陵集 卷10여기서는 곧 오활하게 실현 가능성 없는 생각을 해 본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243)뿌리……안다면:뿌리는 채소 뿌리를 말한 것으로, 채소 뿌리를 씹어 먹는다는 것은 곧 청고(淸苦)한 생활을 의미한다. 송(宋)나라 왕신민(汪信民)의 말에 “사람이 항상 채소 뿌리만 먹으면서 곤궁한 생활을 견딜 수 있다면 백사를 다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人常咬得菜根則百事可做]”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당시 호안국(胡安國)은 이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여 칭찬했다고 한다. 小學 善行

244)석류꽃……재촉하고:석류꽃은 5월에 피므로, 즉 모내기의 막바지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245)탕병(湯餠)으로……선보이네:탕병은 온면(溫麵) 즉 국수를 말한 것으로, 옛날에 어린애를 낳은 지 3일이나 만 1개월이 되는 날, 만 1년이 되는 날에 탕병으로 축하연(祝賀宴)을 베풀었던 데서 온 말인데, 이로 인하여 이 축하연을 탕병회(湯餠會)라 일컫기도 한다. 영물(英物)은 아주 걸출한 인물을 말한 것으로, 진(晉)나라 때 환온(桓溫)이 태어난 지 아직 한 돌도 되기 전에 온교(溫嶠)가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에게 기골이 있으니, 시험 삼아 울려 보라.[此兒有奇骨 可試使啼]” 하여 우는 소리를 들어 보고는 또 말하기를 “참으로 영물이다.[眞英物也]”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98 桓溫列傳

246)소 잡아먹을 기운:어린애의 기운이 힘차 보이는 것을 말한다. 시자(尸子)에 “범이나 표범의 새끼는 아직 문채를 이루기 전에도 소를 잡아먹을 기세가 있고, 기러기나 고니의 새끼는 날개가 완전히 나기 전에도 사해를 날아다닐 마음이 있다. 현자의 탄생 또한 그러하다.[虎豹之駒 未成文而有食牛之氣 鴻鵠之鷇 羽翼未全而有四海之心 賢者之生亦然]”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두보(杜甫)의 서경이자가(徐卿二子歌)에 의하면 “그대는 못 보았나 서경의 두 아들 뛰어나게 잘난 것을, 길한 꿈에 감응하여 연이어 태어났다네. 공자와 석가가 친히 안아다 주었다니, 두 아이는 모두가 천상의 기린아일세. 큰 아이는 아홉 살에 용모가 맑고 깨끗해, 정신은 가을 물 같고 골격은 옥과 같고, 작은 아이는 다섯 살에 소를 잡아먹을 기개라, 당에 가득한 손들이 다 머리 돌려 감탄하네.[君不見徐卿二子生絶奇 感應吉夢相追隨 孔子釋氏親抱送 竝是天上麒麟兒 大兒九齡色淸徹 秋水爲神玉爲骨 小兒五歲氣食牛 滿堂賓客皆回頭]”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0

247)상봉(桑蓬):뽕나무활[桑弧]과 쑥대화살[蓬矢]을 말한다. 옛날 남아가 태어나면 장차 사방을 경영(經營)하는 데에 뜻을 두게 한다는 의미에서, 뽕나무활과 쑥대화살 여섯 개로 천지 사방을 향해 한 개씩 쏘았다는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득남을 의미한다. 禮記 射義

248)이치로……게고:환(瑍)은 남조(南朝) 송(宋)의 문장가인 사영운(謝靈運)의 아버지 이름이다. 사환은 막 나서부터 총명하지 못했으며, 비서랑(秘書郞)을 지내고 일찍 죽었는데, 사영운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으므로, 그의 조부(祖父)인 사현(謝玄)이 일찍이 친지(親知)에게 말하기를 “나는 환을 낳았을 뿐인데, 환이 어떻게 영운을 낳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我乃生瑍 瑍那得生靈運]”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宋書 卷67 謝靈運列傳

249)손금이……이름하리:현(玄)은 후한(後漢)의 경학자(經學者)인 정현(鄭玄)을 가리킨다. 정현은 오직 독자(獨子) 정익은(鄭益恩)을 두었는데, 공융(孔融)이 북해 상(北海相)으로 있을 때 그를 효렴(孝廉)으로 천거했던바, 그 후 공융이 황건적(黃巾賊)에게 포위를 당했을 때 정익은이 전사하였고, 그에게 유복자(遺腹子)가 있었는데, 조부(祖父)인 정현이 손자 아이의 손금이 자기를 닮았다 하여 이름을 소동(小同)이라 지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250)흥이……걸세: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 진식(陳寔)이 일찍이 순숙(荀淑)의 집을 방문했던바, 그가 본래 가난하여 노복(奴僕)이 없었으므로, 장자(長子) 진기(陳紀)에게 수레를 몰게 하고 차자 진심(陳諶)에게는 지팡이를 갖고 뒤에서 따르게 하고 손자 진군(陳羣)은 아직 어려서 수레에 앉힌 채로 순숙의 집을 들어가자, 순숙은 아들이 여덟이었는데, 셋째 아들 순정(荀靖)을 시켜 손님을 맞아들이게 하고 여섯째 순상(荀爽)을 시켜 술시중을 들게 하고 손자 순욱(荀彧)을 무릎에 앉혀 안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재덕(才德)이 뛰어난 인물들이었으므로, 이날 밤에 덕성(德星)이 나타나자,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500리 안에 반드시 현인이 모였을 것입니다.[五百里內有賢人聚]”라고 했다고 한다. 순숙이 살던 마을은 본래 서호리(西豪里)였는데, 현령(縣令) 원강(苑康)이 말하기를 “옛날 고양씨(高陽氏)가 재자(才子) 8인을 두었었다.” 하고는 그 마을을 고양리(高陽里)로 바꿔 부르게 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순숙의 여덟 아들을 팔룡(八龍)이라 호칭했다고 한다. 世說新語 德行 여기서는 박석초(朴石樵)와 매천의 집안을 진식과 순숙의 집안에 빗대서 한 말이다.

251)백리(百里)……찬란하여라:덕성은 곧 경성(景星), 세성(歲星) 등을 일컫는 말로, 국가에 도덕이 있는 사람, 다복한 사람, 또는 현인이 세상에 나왔을 때에 나타난다고 한다. 194쪽 주250 참조.

252)감석(甘石)의……하누나:감석은 전국 시대 천문학(天文學)에 뛰어났던 제(齊)나라 사람 감공(甘公)과 위(魏)나라 사람 석신(石申)을 합칭한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매천 자신의 천문 성상(天文星象)에 대한 관찰력을 감공과 석신에 빗대서 한 말이다.

253)귀학(龜鶴):거북이나 학은 백년, 천년의 장수(長壽)를 누린다는 전설에서 온 말로, 전하여 사람의 장수에 비유한다.

254)선행(善行)의……보았고:선행을 쌓은 음덕(陰德)으로 훌륭한 손자를 얻었음을 의미한다. 영운(靈運)은 곧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키며, 사영운에 대한 내용은 194쪽 주248 참조.

255)맹광(孟光):한(漢)나라 때 은사(隱士)인 양홍(梁鴻)의 아내의 이름인데, 그녀가 부덕(婦德)이 매우 훌륭했던 데서, 전하여 검소하고 예의 바른 현부인(賢婦人)에 비유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梁鴻

256)봉주(鳳洲):매천의 어릴 때 스승이었던 왕사각(王師覺)의 호이다. 자세한 내용은 150쪽 주149 참조.

257)담장……만류함:두보(杜甫)의 하일이공견방(夏日李公見訪) 시에 “지붕 너머로 술집 주인을 불러, 술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담장 머리로 탁주를 넘겨주어, 자리 펴고 시냇물 임하여 마시네.[隔屋喚酒家 借問有酒否 牆頭過濁醪 展席俯長流]”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3

258)선생(先生)의……채취하누나:도연명(陶淵明)의 연명은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의 자이다. 도잠은 유독 국화를 좋아했던바, 그의 음주(飮酒) 시에 의하면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고, 하염없이 남산을 바라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고 하였다. 陶淵明集 卷3

259)등루부(登樓賦):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왕찬(王粲)이 일찍이 동탁(董卓)의 난리를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하고 있을 적에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 고향을 생각하면서 진퇴 위구(進退危懼)의 정을 서술하여 등루부를 지었던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후세에는 문인(文人)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또는 재능을 갖추고도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고사로 흔히 쓰인다. 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

260)택승정(擇勝亭):소식(蘇軾)이 일찍이 여음(汝陰)의 수재(守宰)로 있을 때 유막(帷幕)만으로 정자(亭子)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곧 어디든지 가고 싶은 승경(勝景)이 있기만 하면 그곳에 가서 바로 설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東坡全集 卷97 古今事文類聚 續集 卷11여기서는 곧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한 낡은 여관을 소식의 택승정에 빗대서 한 말이다.

261)안사(顔駟)는……희어졌고:한무고사(漢武故事)에 의하면, 안사라는 사람이 한 문제(漢文帝) 때에 낭관(郎官)이 되었는데,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무제가 한번은 낭서(郎署)를 지나다가 큰 눈썹에 하얀 머리털[龐眉皓髮]의 안사를 보고 묻기를 “늙은이는 어느 때 낭관이 되었는가, 어찌하여 그리도 늙었는가?[叟何時爲郞 何其老也]” 하자, 안사가 대답하기를 “신이 문제 때에 낭관이 되었으나, 문제는 문을 좋아했는데 신은 무를 좋아하였고, 경제 때에 이르러서는 경제는 미모를 좋아했는데 신의 얼굴은 추했고, 폐하께서 즉위하셔서는 젊은이를 좋아하시는데 신은 이미 늙었으므로, 이 때문에 삼세를 불우하여 낭서에서 늙었습니다.[臣文帝時爲郞 文帝好文而臣好武 至景帝 好美而臣貌醜 陛下卽位 好少而臣以老 是以三世不遇 故老於郞署]”라고 하므로, 무제가 그의 말에 감동을 받아 그를 회계 도위(會稽都尉)로 탁배(擢拜)시켰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262)한강(韓康)은……푸려졌네:한강은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로 자는 백휴(伯休)이며 경조(京兆) 패릉(霸陵)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명산(名山)을 유람하면서 약(藥)을 캐다가 장안(長安)의 시중(市中)에 가져다 팔았는데, 30여 년 동안 값을 두 가지로 불러 본 적이 없었다. 한번은 한 여자가 한강에게 약을 사러 왔다가 약값을 깎아 주지 않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말하기를 “공이 바로 한백휴입니까, 그래서 값을 두 가지로 하지 않습니까?[公是韓伯休邪 乃不二價乎]” 하였다. 한강이 속으로 탄식하기를 “나는 이름을 피하려고 했는데, 지금 하찮은 여인들까지 내가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니, 약을 팔아서 무엇하랴.[我欲避名 今區區女子皆知有我 何用藥爲]” 하고는, 마침내 패릉의 산중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조정에서 연달아 징소(徵召)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韓康눈이 푸르다는 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여기서는 도사(道士)나 청춘소년의 뜻으로 쓰인 듯하다.

263)천진스런……정박했노라:진(晉)나라 때 산음(山陰)에 살던 왕휘지(王徽之)가 어느 날 밤에 큰 눈이 막 개고 달빛이 휘영청 밝은 것을 보고는 홀로 술을 마시면서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읊조리다가 갑자기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戴逵)가 생각났다. 그는 즉시 거룻배를 명하여 타고 밤새도록 가서 다음 날 아침에야 대규의 집 문 앞에 당도해서는 그 집을 들어가지 않고 다시 뱃머리를 돌렸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왕휘지가 대답하기를 “내가 본래 흥겨워서 왔다가 흥이 다해서 되돌아가는 것이다. 굳이 대안도를 만날 것 있겠는가.[吾本乘興而行 興盡而返何必見戴安道耶]” 하고는 그대로 되돌아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안도(安道)는 대규의 자이다. 晉書 卷80 王徽之列傳여기서 매천은 천진스러운 흥취가 왕휘지만 못한 탓으로 배를 돌려 그냥 되돌아가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붙들려 놀게 되었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264)각학(閣學) 이회당 성렬(李晦堂聖烈):각학은 송대(宋代)에는 현모각(顯謨閣), 휘유각(徽猷閣) 등의 직학사(直學士)의 호칭으로 쓰였고, 명청(明淸) 시대에는 내각 학사(內閣學士)의 호칭으로도 쓰였다. 회당은 우국지사(憂國之士) 이성렬(李聖烈, 1865〜?)의 호이다. 또 다른 호는 퇴암(退菴)이다. 1888년(고종25)에 판관(判官)으로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등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있을 때 직무상의 문제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고, 뒤에 경상북도, 전라북도의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5년(광무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벼슬을 사직하고 여주(驪州)에 은거하여 민종식(閔宗植), 이시영(李始榮) 등과 협의하여 의병(義兵)을 규합했는데, 그 후 의병의 명부(名簿)가 압수되어 많은 동지들이 체포되자, 이를 몹시 비통해하다가 결국 단식 끝에 자결했다고 한다.

265)분성(汾城):단성현(丹城縣)에 강성(江城), 진성(珍城) 등의 고호는 있으나, 분성은 찾아볼 수 없으니, 혹 강성의 착오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266)용등(榕燈):유종원(柳宗元)이 일찍이 유주(柳州)로 폄척되어 가서 있을 때 봄 2월에 용나무 잎이 다 지는 것을 보고 지은 유주이월용엽낙진우제(柳州二月榕葉落盡偶題) 시에 “벼슬살이 나그네 심정 둘 다 처량하기만 한데, 봄 중반이 가을 같아서 뜻이 더욱 헷갈리네. 산성에 비가 와서 온갖 꽃이 다 떨어지고, 용나무 잎 뜰에 가득한데 꾀꼬리는 어지러이 우누나.[宦情羈思共悽悽 春半如秋意轉迷 山城遇雨百花盡 榕葉滿庭鶯亂啼]”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유배지를 의미한다. 柳河東集 卷42

267)놀란……더하네:백거이(白居易)의 남방으로 유배 가는 사람을 보내는 시, 즉 송객남천(送客南遷) 시에 “길손은 활시위에 놀란 기러기 같고, 배는 파도에 맡겨진 부평초 같구나. 그 누가 웃고 말하도록 권유하며, 그 무엇으로 떠도는 신세를 위로할꼬?[客似驚弦雁 舟如委浪萍 誰人勸言笑 何計慰漂零]”라고 하였다. 白樂天詩集 卷19

268)용성(龍城):남원(南原)의 고호이다.

269)심씨(沈氏):은사(隱士)였던 듯하나, 이름이나 기타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270)갠……삼삼(三三)이라:봉우리가 육륙(六六)이라는 것은 본디 무산(巫山) 삼십육봉(峯)을 승산(乘算)으로 호칭한 것이다. 송대(宋代)의 시인 범성대(范成大)의 범씨장원(范氏莊園) 시에 의하면 “석양의 흙먼지가 먼 들판에 자욱해라, 육륙봉 머리에서 꿈을 깨고 앉았는 때로다.[夕陽塵土漲郊墟 六六峯頭夢覺餘]” 하였다. 范石湖集 卷18 그러나 여기서 말한 육륙봉은 혹 경상북도 봉화(奉化)에 위치한 청량산(淸凉山)을 가리킨 게 아닌지 자세하지 않다. 그리고 오솔길이 삼삼이라는 것은 역시 송대의 시인 양만리(楊萬里)가 일찍이 동원(東園)에다 아홉 갈래의 오솔길을 낸 다음, 서로 다른 아홉 종류의 꽃나무들을 나누어 심어 놓고 이를 삼삼경(三三徑)이라 부른 데서 온 말이다. 誠齋集 卷36

271)시인(詩人)으로……알맞구려:계남(啓南)은 명(明)나라 심주(沈周)의 자이다. 호는 석전(石田), 그 밖에 백석옹(白石翁), 옥전옹(玉田翁), 유죽장주인(有竹莊主人) 등의 호가 있다. 그는 매우 박학다식하였던바, 문은 좌씨(左氏)를, 시는 백거이(白居易), 소식(蘇軾), 육유(陸游)를, 글씨는 황정견(黃庭堅)을 각각 모방하였으며, 그림에 더욱 뛰어나서 당인(唐寅), 문징명(文徵明), 구영(仇英)과 함께 명대(明代)의 사가(四家)로 일컬어졌다. 조정의 부름을 사절하고 평생 은거하다가 정덕(正德) 연간에 83세로 죽었다. 明史 卷298 隱逸列傳 沈周여기서는 특히 설산초당(雪山草堂) 주인이 심씨(沈氏)이기 때문에 그를 심주에 빗대서 한 말이다.

272)초당(草堂)은……흡사한고:백화담(百花潭)은 사천성(四川省) 성도현(成都縣)의 서북쪽에 있던 못 이름인데, 이 못의 북쪽에 바로 두보(杜甫)의 완화초당(浣花草堂)이 있었다고 한다. 두보의 광부(狂夫) 시에 “만리교의 서쪽으로 한 초당이 있으니, 백화담의 물이 바로 창랑의 물이라네.[萬里橋西一草堂 百花潭水卽滄浪]”라고 하였고, 또 두보의 회금수거지(懷錦水居止) 시에는 “만리교 서쪽의 집이며, 백화담 북쪽의 별장이, 높은 난간은 모두 물을 마주했고, 늙은 나무는 오랜 세월을 겪었네.[萬里橋西宅 百花潭北莊 層軒皆面水 老樹飽經霜]”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9, 卷14이 역시 심씨의 초당을 두보의 초당에 빗대서 한 말이다.

273)검은 못물:후한(後漢) 때 초성(草聖)으로 일컬어졌던 장지(張芝)가 일찍이 글씨를 익힐 적에 자기 집안에 있는 모든 의백(衣帛)에다 반드시 글씨를 쓴 다음에 다시 빨곤 했으므로, 그를 일러 “못가에서 글씨를 연습하여 못물이 다 검어졌다.[臨池學書 池水盡黑]” 하였고, 또 왕희지(王羲之)가 일찍이 어떤 이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장지는 못가에서 글씨를 연습하여 못물이 다 검어졌으니, 누구나 그와 같이 탐닉하기만 한다면 꼭 장지에게 뒤지지만은 않을 것이다.[張芝臨池學書 池水盡黑 使人耽之若是 未必後之也]”라고 하였으며, 또 송(宋)나라 증공(曾鞏)의 묵지기(墨池記)에 의하면, 왕희지가 일찍이 못가에서 글씨를 연습했던 장지의 일을 사모하여 그 또한 임천(臨川)의 묵지(墨池)에서 글씨를 연습했다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심씨 또한 글씨를 많이 쓰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274)단조(丹竈):도사(道士)가 단약(丹藥)을 고는 화로가 안치된 부엌을 말한다. 단약은 곧 금단(金丹)과 같은 뜻으로, 자세한 내용은 146쪽 주135 참조.

275)이기(李沂):18481909. 애국지사(愛國志士)로, 자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海鶴)이다. 실학을 연구하여 유형원(柳馨遠), 정약용(丁若鏞) 등의 학통을 계승했다. 1894년(고종31)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났을 때는 이에 적극 가담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5년(광무9)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과 러시아가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할 때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천황과 정계요인들에게 일본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 항의(書面抗議)를 했고, 이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장지연(張志淵), 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해서 민중 계몽과 항일운동에 진력하였다. 1907년에는 동지 10여 명과 함께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의 암살을 결행했으나 실패하여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저서에 해학유서(海鶴遺書)가 있다.

276)나는……알기에:춘추 시대 포숙아(鮑叔牙)와 관중(管仲)은 모두 제(齊)나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서로 친구 사이였는데, 포숙아는 관중의 어짊을 잘 알아주었지만, 관중은 워낙 빈곤했기 때문에 포숙아를 항상 속이곤 했으나, 포숙아는 끝까지 관중을 잘 대해 주었으므로, 관중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 빈곤했을 때 포숙아와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는데, 재리를 나눌 때는 내가 스스로 많이 차지했으나, 포숙아가 나를 탐한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은 내가 가난한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포자였다.[吾始困時 嘗與鮑叔賈 分財利多自與 鮑叔不以我爲貪 知我貧也……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62 管仲列傳여기서는 처음 한번 만나 보고 바로 극친한 친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277)그대……동정하노라: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왕찬(王粲)이 17세 때 황문 시랑(黃門侍郞)에 제수되었으나, 당시 동탁(董卓)의 난리로 서경(西京)이 요란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형주(荊州)로 가서 한동안 유표(劉表)에게 의지하여 지냈던 데서 온 말이다. 三國志 卷25 魏書 王粲傳 전하여 유표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곧 권세가에게 의지함을 의미하는바, 여기서는 곧 이기가 당시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 때문에 달성(達城)으로 가게 된 것을 왕찬에 빗대서 한 말이다. 그러나 달성에 가서 누구에게 의지해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278)봉성(鳳城):전라남도 구례(求禮)의 고호이다.

279)숙상구(鷫鷞裘):한(漢)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입었던, 숙상이라는 날쥐[飛鼠]의 가죽으로 만든 진귀한 갖옷 이름이다. 사마상여가 일찍이 부인 탁문군(卓文君)과 함께 고향인 성도(成都)로 돌아갔을 적에 워낙 가난했던 탓으로 자기가 입고 있던 숙상구를 전당 잡히고 술을 사서 탁문군과 함께 마시며 즐겼다는 고사가 있다. 西京雜記 卷2여기서는 단지 갖옷을 의미한다.

280)가다가……걸세:진(晉)나라 때 장화(張華)가 북두(北斗), 견우(牽牛) 사이에 항상 자줏빛 서기[紫氣]가 뻗쳐 있는 것을 보고는 예장(豫章)의 풍성(豐城)에 보검(寶劍)이 있는 것을 헤아려 알고 친구인 뇌환(雷煥)을 시켜 풍성에 가서 옥사(獄舍)의 옛터를 발굴하여 보검 용천(龍泉), 태아(太阿) 두 자루를 찾아내서 이것을 장화와 뇌환이 각각 한 자루씩 소지했다. 그러다가 뒤에 장화가 죽고 나서는 장화가 소지했던 보검을 갑자기 잃어버렸다. 그 후 뇌환이 죽고 나서는 뇌환의 아들이 뇌환의 보검을 소지했다. 그가 한번은 길을 가다가 연평진(延平津)에 이르렀을 때 보검이 갑자기 허리에서 빠져나가 물로 떨어져 버리므로, 사람을 시켜 물에 들어가서 보검을 찾아오게 했더니, 보검은 간 데 없고 각각 수장(數丈)쯤 되는 쌍룡(雙龍)만이 굼틀거리고 있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36 張華列傳 여기서는 단지 연진(延津)이란 나루를 두고 이 고사를 인용한 듯하다.

281)정하산(鄭夏山):시(詩)의 내용으로 보아 달성(達城) 사람으로 하산은 그의 호인 듯한데, 이름이나 기타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282)말은……하고: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 의하면, 이백(李白)이 젊었을 때 어느 날 밤 꿈에 자기가 쓰고 있던 붓 꼭대기에서 꽃이 피는 것을 본 이후로 문재(文才)가 뛰어나서 명성이 천하에 알려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붓끝에서 꽃 핀다는 것은 곧 재주가 뛰어나고 문사(文思)가 풍부함을 의미한다.

283)얼굴은……같거니:두보(杜甫)의 몽이백(夢李白) 시에 “사별이라면 이미 소리를 삼켰겠거니와, 생이별은 항상 슬프기만 하구려. 강남 땅은 장기가 많은 곳이라는데, 귀양 간 나그네는 소식도 없구나.……지는 달빛 지붕마루에 가득하니, 아직도 그대 얼굴이 비추는가 의심하노라.[死別已呑聲 生別常惻惻 江南瘴癘地 逐客無消息……落月滿屋梁 猶疑照顔色]”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친구를 몹시 그리워하는 뜻으로 쓰인다. 杜少陵詩集 卷7

284)구름……다하랴:여기서 구름 산이란 곧 상대방이 살고 있는 고장을 가리킨 것으로, 친구를 몹시 사모하는 뜻에서 한 말이다.

285)비바람……어렵구려:여기서 비바람 꿈이란 곧 비바람 몰아치는 밤에 두 친구가 서로 만나서 즐겁게 보내는 것을 뜻한다. 백거이(白居易)의 우중초장사업숙(雨中招張司業宿) 시에 “내게 와서 함께 묵지 않으려나, 빗소리 들으며 와상 마주해 자세나.[能來同宿否 聽雨對牀眠]”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白樂天詩後集 卷9

286)세한(歲寒)의 꿋꿋한 지조:엄동설한의 추위를 꿋꿋이 견뎌 내는 자태, 즉 굳은 지조를 말한 것으로,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해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罕

287)신묘고(辛卯稿):1891년(고종28), 매천의 나이 37세 때 지은 시고이다.

288)푸른……비웃었거니와:평중(平仲)은 송대(宋代)의 명상(名相) 구준(寇準)의 자이다. 송대의 시인 위야(魏野)가 일찍이 명상 구준을 수행하여 섬부(陝府)의 승사(僧舍)에 가 노닐면서 각각 시를 유제(留題)한 것이 있었는데, 뒤에 다시 함께 그 승사에 놀러 가서 보니, 구준의 시는 이미 푸른 깁으로 잘 싸서 보호하였으나, 위야의 시는 그대로 방치하여 벽에 가득 먼지가 끼어 있었으므로, 이때 마침 그 일행을 수행했던 총명한 한 관기(官妓)가 즉시 자기의 붉은 옷소매로 그 먼지를 닦아내자, 위야가 천천히 말하기를 “항상 붉은 소매로 먼지를 닦을 수만 있다면, 응당 푸른 깁으로 싸 놓은 것보다 나으리.[若得常將紅袖拂 也應勝似碧紗籠]”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唐摭言 卷7

289)봄풀이랑……거고말고: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일찍이 영가(永嘉)의 서당(西堂)에서 온종일 시를 생각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가, 꿈에 족제(族弟)인 사혜련(謝惠連)을 만나서 “못 둑 위에 봄풀이 난다.[池塘生春草]”라는 시구(詩句)를 얻어서 비로소 “못 둑 위엔 봄풀이 나고, 동산 버들엔 우는 새가 바뀌었네.[池塘生春草 園柳變鳴禽]”라는 대구(對句)를 이루고는 스스로 대단히 만족하게 여기어 “이 말에는 귀신의 도움이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此語有神助 非吾語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南史 卷19 謝惠連列傳전하여 혜련을 꿈꾼다는 것은 곧 명작(名作)을 의미한다.

290)쟁글쟁글 패옥 소리:여기서는 곧 맑은 물의 흐르는 소리를 형용한 말이다.

291)거친……나네:이백(李白)의 원별리(遠別離)에 “햇빛이 무색함이여 구름은 캄캄하고, 성성이는 연기 속에 울고 도깨비는 빗속에 휘파람 부네.[日慘慘兮雲冥冥 猩猩啼煙兮鬼嘯雨]”라고 하였다. 李太白集 卷2

292)남은……한스러워라:송도(松濤)는 소나무 숲에 부는 바람 소리가 마치 바다의 파도 소리 같다 하여 일컫는 말인데, 이 시 두 구절의 전체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하지 않다. 다만 소식(蘇軾)의 재윤주도상과제야(在潤州道上過除夜) 시에 의하면 “시관은 미관이라 조참을 하지 않기에, 붉은 햇살 반창에 오르도록 봄 잠 곤히 자노라. 이웃 닭에게 알리노니 나를 놀라 깨게 말아서, 다시 남은 꿈이 강남을 갈 수 있게 도와주오.[寺官官小未朝參 紅日半窓春睡酣 爲報鄰雞莫驚覺 更容殘夢到江南]”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48강남 운운한 말이 혹 이 시와 관련이 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293)임진고(壬辰稿):1892년(고종29), 매천의 나이 38세 때 지은 시고이다.

294)집집마다……썰렁해라:느릅 버들이란, 옛날에 1년 사계절 동안 계절마다 나무를 바꾸어 불씨를 취했던바, 즉 봄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楡柳]에서, 여름에는 대추나무와 은행나무[棗杏]에서, 늦여름에는 뽕나무와 산뽕나무[桑柘]에서, 가을에는 떡갈나무와 참나무[柞楢]에서, 겨울에는 홰나무와 박달나무[槐檀]에서 각각 불씨를 취했던 데서 온 말이다. 그리고 새 연기가 썰렁하다는 것은 곧 옛날 풍속에 한식일(寒食日)에는 불을 지피지 않았으므로, 이미 느릅과 버들에서 불씨는 취했지만 이날만은 불을 지피지 않았기에 한 말이다. 한식 바로 다음 날이 청명(淸明)인데, 두보(杜甫)의 청명시에 의하면 “오늘 아침에 새 불씨가 새 연기 일으키니, 호수 빛 봄 풍광이 나그네의 배에 하 맑아라.[朝來新火起新煙 湖色春光淨客船]”라고 하였다. 周禮 夏官 司爟注 杜少陵詩集 卷22

295)봄여름……있었던가:밭두둑 길을 잊었다는 것은 곧 독서와 저술에 전념하여 바깥출입이 없음을 의미한다. 또 세설신어(世說新語) 상예(賞譽)에 의하면, 당대의 뛰어난 문사(文士) 육운(陸雲) 등을 가리켜 “무릇 이상의 제군은 큰 붓을 호미와 쟁기로 삼고, 종잇장을 좋은 밭으로 삼았다.[凡此諸君 以洪筆爲鋤耒 以紙札爲良田]”라고 하였다.

296)단양(端陽):5월 5일인 단오절(端午節)의 별칭이다.

297)탕병(湯餠):자세한 내용은 193쪽 주245 참조.

298)혜초(蕙草)……바람:전국 시대 송옥(宋玉)의 초혼(招魂)에 “갠 바람은 혜초를 흔들고, 한 떨기 난초 꽃 향기 넘치어라.[光風轉蕙 氾崇蘭些]”라고 하였다. 文選 卷33

299)황병욱(黃炳郁):자는 진문(晉文), 호는 소운(少雲)이며, 벼슬은 감역(監役)이었다. 전남 광양(光陽) 출신으로, 매천이 순절(殉節)한 뒤 매천집(梅泉集)을 발간(發刊)하고 분질(分帙)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300)아침에……건:옛날 민간의 전설에 까치가 아침에 울면 기쁜 소식이 있다는 데서 온 말이다. 한유(韓愈)의 만추언성야회연구(晩秋郾城夜會聯句)에 의하면 “부인은 우는 황새를 탄식하고, 가인은 기쁜 까치를 기원하네.[室婦歎鳴鸛 家人祝喜鵲]”라고 하였다. 韓昌黎集 卷8

301)계등(溪藤):본디 절강성(浙江省) 섬계(剡溪)에서 생산된 등(藤)으로 만든 종이를 가리키는데, 이 종이가 매우 유명했던 데서, 전하여 좋은 종이의 뜻으로 쓰인다.

302)어찌……저버렸도다:우군(右軍)은 진대(晉代)의 명필(名筆)로 일찍이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낸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키고, 난정서(蘭亭序) 법첩(法帖)이란 곧 왕희지가 일찍이 난정서를 친히 짓고 친히 행서(行書)로 썼던바, 후세에 그의 글씨를 매우 소중히 여겨 그것을 범본(範本)으로 삼아서 일컫는 말이다.

303)대번에……내놓았듯이:전(箋)은 전지(箋紙), 곧 글씨 쓰는 종이를 말한 것으로, 어림(語林)에 이르기를 “왕 우군이 회계령으로 있을 때 사안(謝安)이 글씨 쓸 종이를 달라고 요청하자, 창고를 조사한 결과 구만의 전지가 있어 이것을 몽땅 사안에게 내주었다.[王右軍爲會稽令 謝公就乞箋紙 檢校庫中有九萬箋紙 悉以予謝公]”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藝文類聚 卷58동산(東山)은 사안이 일찍이 은거했던 곳으로, 전하여 사안을 가리킨다.

304)단사(丹砂) 기운이 어리고:단사는 도가(道家)에서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이라고 하는 이른바 단약(丹藥)을 제조하는 재료이다. 단사 기운이 어린다는 것은 곧 장수(長壽)를 상징하여 이른 말이다.

305)인(仁)에……송축드리네:인은 곧 인수지역(仁壽之域)의 약칭으로, 인덕(仁德)이 있어 장수한다는 뜻에서, 본디 공자(孔子)의 말에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한 자는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자는 동하고, 인한 자는 고요하며,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인한 자는 장수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雍也한서(漢書)22 예악지(禮樂志)에 의하면 “예전의 예법을 계승하고, 왕의 제도를 밝히어, 온 세상의 백성들을 몰아서 인수의 지경으로 올려놓는다면 풍속이 어찌 성왕과 강왕 시대만 못하며, 장수는 어찌 고종 시대만 못하겠는가.[述舊禮 明王制 驅一世之民 躋之仁壽之域 則俗何以不若成康 壽何以不若高宗]”라고 하였다.

306)속상한 가난: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일찍이 말하기를 “속상해라 가난함이여, 생전에는 봉양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돌아가셔서는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가 없구나.[傷哉貧也 生無以爲養 死無以爲禮也]”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

307)색동옷: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효자인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어린애처럼 색동옷을 입고 부모 앞에서 새 새끼를 가지고 장난을 하여 부모를 즐겁게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308)을미고(乙未稿):1895년(고종32), 매천의 나이 41세 때 지은 시고이다.

309)아호(莪蒿)가……어려워라:아호는 시경 육아(蓼莪)에서 온 말인데, 이 시는 이미 돌아간 부모에게 하늘처럼 끝없는 은덕을 갚을 길이 없어 부모를 몹시 그리워하여 부른 노래이다. 육아 시에 “길고 큰 것이 쑥인 줄 알았더니, 아름다운 쑥이 아니라 저 나쁜 쑥이로다. 슬프고 슬퍼라 부모님이여, 나를 낳으시느라 수고하셨도다.……아버지가 없으면 누구를 믿으며, 어머니가 없으면 누구를 의지할꼬. 나가서는 근심 걱정뿐이요, 들어오면 돌아갈 곳이 없노라.[蓼蓼者莪 匪莪伊蒿 哀哀父母 生我劬勞……無父何怙 無母何恃 出則銜恤 入則靡至]”라고 하였다.

310)동죽(桐竹):부상(父喪)에는 상장(喪杖)을 오동나무로 만들어 짚고, 모상(母喪)에는 상장을 대로 만들어 짚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311)상금(祥琴):고대(古代)의 상례(喪禮)에서, 친상(親喪)의 대상일(大祥日)에 슬픔을 절제하기 위하여 거문고를 탔던 것을 이른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의하면 “공자가 상제를 지낸 지 5일 뒤에 거문고를 탔으나 소리를 이루지 못했고, 10일 뒤에야 생황을 불고 노래할 수 있었다.[孔子旣祥 五日彈琴而不成聲 十日而成笙歌]”라고 하였다.

312)게을리……보답하노라:희슬(希瑟)은 비파를 드문드문 타는 것을 이른다. 공자가 일찍이 자로, 증점(曾點),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등의 제자에게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해 보라고 했을 때, 다른 제자들이 다 말을 마친 다음에 공자가 다시 증점에게 묻기를 “점아,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點爾何如]” 하자, 증점이 이때 비파를 드문드문 타고 있다가 쟁그랑 소리와 함께 비파를 내려놓고 대답하기를 “저는 앞의 세 사람의 선택한 바와는 다릅니다.……저문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異乎三子者之撰……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313)몇……내렸던고:한 문제(漢文帝) 때 박사제자(博士弟子) 가산(賈山)이 일찍이 치란(治亂)의 도를 말하여 천자(天子)를 간(諫)하는 글을 올렸는데, 이 글을 지언(至言)이라 불렀던바, 그 가운데 “신은 듣건대, 산동의 관리가 조령을 포고하자, 아무리 늙고 병든 백성이라도 모두 지팡이를 짚고 가서 들으면서, 잠시나마 죽지 않고 더 사는 동안에 덕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간절히 보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臣聞山東吏布詔令 民雖老羸癃疾 扶杖而往聽之 願須臾毋死 思見德化之成]”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51 賈山傳

314)성명(姓名)은……싶구나:매천의 성명이 황현(黃玹)이고 보면, 여기서 후 신선(後神仙)이란 곧 옛날의 선인(仙人)인 황석공(黃石公)의 후신(後身)이라는 뜻으로 한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315)난초……이루고:화사(花史)는 모든 화훼(花卉)의 이름이나 특성 등을 기록한 책을 이른다. 황정견(黃庭堅)의 수수기(修水記)에 의하면 “난초는 군자와 같고, 혜초는 사대부와 같으니, 대개 산림 중에 혜초가 열이면 난초는 하나일 뿐이다. 이소경에 ‘이미 구완에 난초를 심고, 또 백묘에 혜초를 심는다.’라고 하였으니, 초나라 사람들이 혜초를 천히 여기고 난초를 귀히 여겼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蘭似君子 蕙似士大夫 槪山林十蕙而一蘭也 離騷曰旣滋蘭之九畹 又植蕙之百畝 則知楚人賤蕙而貴蘭矣]”라고 하였다. 山谷後集 卷29

316)돌 구름의 주름:여기서 말한 주름은 곧 산수화에서 산석(山石), 봉만(峰巒), 수목(樹木) 등의 표피(表皮)의 맥락 문리(脈絡紋理)를 표현하는 기법, 즉 준법(皴法)에서 온 말이다. 송대(宋代)의 화가인 곽희(郭熙)의 산수화 기법에는 특히 귀신 얼굴 같은 돌[鬼面石], 어지러이 뒤섞인 구름의 주름[亂雲皴] 등을 잘 표현했다고 하며, 소식(蘇軾)은 특히 돌 주름[石皺]을 잘 표현했다고 한다. 格古要論 卷上

317)곡영(谷永)은……있으랴:곡영은 한대(漢代)의 경학자(經學者)로 일찍이 성제(成帝) 연간에 재이(災異)로 인하여 대책(對策)을 올려서 상제(上第)를 받기까지 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성제의 허 황후(許皇后)의 전총(專寵)이 재이를 불러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무고한 허 황후에 대해서는 극구 비판을 가했던 반면, 성제의 외척(外戚)으로 발호(跋扈)가 더없이 극성했던 왕봉(王鳳) 5형제 등 왕씨들에 대해서는 은밀히 스스로 의탁하고자 하는 뜻에서 그들에게 아첨하여 빌붙었으므로 중용(重用)되어 벼슬이 북지 태수(北地太守), 대사농(大司農)에 이르렀다. 漢書 卷85 谷永傳

318)왕통(王通)은……알았었지:왕통은 수(隋)나라 때의 유학자로 일찍이 장안(長安)에 들어가서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을 올렸으나 쓰이지 않자, 그 후 하분(河汾)에 은거하여 제자들을 교수(敎授)했던바, 당(唐)나라 초기의 명신(名臣)인 방현령(房玄齡), 위징(魏徵) 등이 모두 그 밑에서 배출되었다. 뒤에 수 양제(隋煬帝)의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저서에 문중자(文中子) 10권이 전한다.

319)사길(士吉):이사길(李士吉)인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320)한상(漢上)의 문기(文氣):한상은 한수(漢水) 가를 가리키고, 문기는 곧 문장의 기세를 말하는데, 당대(唐代)의 문인(文人) 단성식(段成式)이 일찍이 한수 가의 양양(襄陽)에 퇴거(退居)하면서 온정균(溫庭筠), 여지고(余知古) 등과 함께 늘 시를 지어서 서로 창화(唱和)하였던바, 그 시를 한상제금집(漢上題襟集)이라 불렀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시인의 정취를 의미한다.

321)관남(關南)의 창칼:어디서 온 말인지 자세하지 않다.

322)습미(襲美)는……있었지만:습미는 당대(唐代)의 시인 피일휴(皮日休)의 자이다. 그는 문장에 능하였으나 일찍이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여 육귀몽(陸龜夢)과 서로 친하게 지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 두 사람을 합쳐서 ‘피육(皮陸)’으로 일컬었다. 의종(懿宗) 연간에 그는 비로소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벼슬은 태상박사(太常博士)에 그쳤다. 저서에 피자문수(皮子文藪), 송릉창화시집(松陵唱和詩集) 등이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한 면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하지 않다.

323)장경(長卿)은……이루었던가:장경은 한대(漢代)의 문장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이고, 권유(倦游)는 곧 타국에 떠돌아다니며 벼슬하기를 싫어한다는 뜻으로, 한서(漢書) 권57상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에 “장경은 본래 떠돌아다니며 벼슬하기 싫어하였다.[長卿故倦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324)육률(陸律):북송(北宋) 말기의 시인 육유(陸游)의 율시(律詩)를 말한다.

325)고려(高麗)의……높았거니와:산선(繖扇)은 본디 옛날 임금이 거둥할 때 따르던 의장(儀仗)의 하나로서, 베로 일산(日傘)같이 만들어 선두에서 잡고 가게 했던 것이고 보면, 여기서 말한 것은 곧 접는 부채, 즉 살선(撒扇)의 착오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다음에 두 번 더 나오는 산선 또한 마찬가지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중국에는 원(元)나라 때까지만 해도 접는 부채가 없었고, 명(明)나라 초기에 이르러 조선에서 접는 부채를 진상함으로써 비로소 중국에도 이 부채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특히 명 태조(明太祖)는 이 부채의 접히고 펴지는 것을 좋아하여 상방(尙方)에 명을 내려 이것을 모방해서 만들도록 하고 이를 살선 또는 고려선(高麗扇)이라 불렀다고 한다.

326)한……하였네:첩첩 산봉을 흔들게 했다는 것은 아마도 조선 사람들의 접부채가 바람이 아주 잘 나는 것을 과장된 비유로 쓴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327)서글피……어떠했던가:반 첩여(班婕妤)는 한 성제(漢成帝)의 후궁 중에 재색(才色)이 뛰어났던 여인으로, 한때는 성제의 총애를 독차지했다가 뒤에 조비연(趙飛燕)으로 인해 총애를 잃고는 스스로 장신궁(長信宮)의 태후(太后)를 봉양하겠다는 이유로 천자(天子)의 곁을 떠나 동궁(東宮)으로 물러가 거처하면서, 자신을 깁 부채[紈扇]에 비유하여 원가행(怨歌行)을 지어 노래하였던바, 원가행에 “제나라 흰 비단을 새로 마름질하니, 희고 깨끗함이 눈서리 빛과 똑같았네. 재단하여 합환선을 만들어 놓으니, 둥근 모양은 밝은 달과 흡사한데, 임금님 품속을 늘 드나들면서, 서늘한 바람을 솔솔 일으켰었지. 항상 맘속으로 가을철이 이르러,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빼앗아 가면, 상자 속에 그대로 버려져서, 은정이 중도에 끊어질까 염려했었네.[新裂齊紈素 皎潔如霜雪 裁爲合歡扇 團圓似明月 出入君懷袖 動搖微風發 常恐秋節至 涼風奪炎熱 棄捐篋笥中 恩情中道絶]”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97下 外傳 班婕妤

328)삼통(三統)이……일어난:삼통은 하(夏), 상(商), 주(周) 삼대(三代)의 정삭(正朔)을 말한 것으로, 하나라는 인월(寅月)을 세수(歲首)로 삼았고, 상나라는 축월(丑月)을 세수로 삼았으며, 주나라는 자월(子月)을 세수로 삼았던바, 전하여 여기서는 삼대 시대의 오랜 역년(歷年)을 두고 한 말이다.

329)문교(文巧):화려하게 꾸미고 기교를 부리는 행위를 말한다.

330)주한(周漢)의……두었는지라:주한의 사이란 곧 주나라가 망한 때로부터 한나라가 일어나기 전까지의 기간, 즉 이른바 춘추전국 시대 및 진 시황(秦始皇) 시대까지를 가리키고, 윤월(閏月)을 두었다는 것은 곧 태평성세가 아닌 군더더기의 기간을 의미한다.

331)정이(鼎彝):고대 종묘(宗廟)에 간직했던 두 가지 제기(祭器)의 이름인데, 그 표면에 유공자(有功者)의 미덕(美德), 공렬(功烈), 훈로(勳勞) 등을 새겨서 길이 자손에게 전했다고 한다.

332)여덟……죽었도다:여덟 글자 남전(藍田)의 옥이란 바로 진 시황 때 이사(李斯)가 ‘수명어천황제수창(受命於天皇帝壽昌)’이라는 여덟 글자를 새긴 옥새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황제를 가리키고, 끝내 목을 매어 죽었다는 것은 곧 진나라의 마지막 왕인 진왕 자영(秦王子嬰)이 항우(項羽)에게 죽음을 당한 것을 이른 말이다. 처음에 패공(沛公)이 관중(關中)에 들어갔을 때는 진왕 자영에게 항복만 받고 목숨은 살려 주었는데, 뒤에 항우가 관중에 들어가서는 끝내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에 의하면, 이것은 진 시황의 옥새가 아니라, 진대(晉代)에 새로 새긴 것이라고 하였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大學衍義補 卷90

333)아내는……들고: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 양홍(梁鴻)의 아내 맹광(孟光)이 남편을 매우 존경한 나머지, 밥상을 항상 눈썹 높이로 들어 올렸다는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권83 일민열전(逸民列傳) 양홍(梁鴻)에 의하면 “아내가 매양 식사를 준비하되, 양홍의 앞에서는 감히 얼굴을 쳐들어 보지 않았고, 밥상을 눈썹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妻爲具食 不敢於鴻前仰視 擧案齊眉]”라고 하였다.

334)연화루(煙火累):불을 때서 식물(食物)을 만들어 먹고사는 속인(俗人)의 생활을 의미한다.

335)문무화(文武火)로……만들겠지:문무화는 약이나 차를 달일 때에 적당한 시간과 농도 등을 맞추기 위해 화력을 높였다 낮췄다 하는 것을 말한다. 단약(丹藥)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장생불사약, 즉 구전환단(九轉還丹)을 가리킨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146쪽 주135 참조.

336)물……알겠어라:증자(曾子)가 이르기를 “부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니, 덕이 있으면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펴져서 태연해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뜻을 성실히 하는 것이다.[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大學章句 傳6章여기서 띳집이 윤택해진다는 것은 곧 참으로 부유해서가 아니라 생활이 조금 나아짐을 의미한다.

337)전지(田地)를……없고:천맥(阡陌)은 논밭 사이의 길을 이르는 말로, 천맥이 서로 연한다는 것은 곧 전지가 아주 광활함을 의미한다. 한서(漢書) 권24상 식화지(食貨志)에 의하면 “부유한 자는 전지의 천맥이 서로 연해지고, 가난한 자는 송곳 하나 찌를 땅도 없다.[富者田連阡陌 貧者亡立錐之地]”라고 하였다.

338)염양천(廉讓泉):물 이름인 염천(廉泉)과 양수(讓水)의 합칭으로, 전하여 순후한 풍속의 고장을 비유한다. 송 명제(宋明帝) 때 양주 자사(梁州刺史) 범백년(范柏年)이 일찍이 명제를 알현했을 때 명제가 광주(廣州)의 탐천(貪泉)을 언급했다가 인하여 백년에게 묻기를 “경의 고을에도 이런 이름의 물이 있는가?[卿州復有此水不]” 하자, 백년이 대답하기를 “양주에는 오직 문천, 무향, 염천, 양수만 있습니다.[梁州唯有文川武鄕廉泉讓水]” 하므로, 명제가 또 묻기를 “경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卿宅在何處]” 하자, 백년이 대답하기를 “신이 사는 곳은 염천과 양수의 중간입니다.[臣所居廉讓之間]”라고 하니, 명제가 그의 답변에 감탄했다고 한다. 南史 卷47 范柏年列傳

339)영만(盈滿):분수에 넘치도록 극도의 부귀를 누리는 것을 말한다.

340)복파장군(伏波將軍)은……바라보았지:복파장군은 후한(後漢)의 명장(名將) 마원(馬援)을 가리킨다. 호두(壺頭)는 산명(山名)인데, 마원이 최후에 오랑캐를 정벌하러 나가서 호두산에 군영(軍營)을 설치했던바, 그때 더위가 극심하여 수많은 사졸들이 역질(疫疾)로 사망하고, 마원도 병에 걸려 토실(土室)을 파고 들어가 더위를 피하곤 하다가 끝내는 이곳에서 죽고 말았다. 소유(少游)는 바로 마원의 종제(從弟) 이름인데, 마원이 일찍이 남방(南方)인 교지(交趾)로 정벌을 나가서 적군 수천 급(級)을 참획(斬獲)하여 크게 격파하고 나서 군사들을 호궤(犒饋)하면서 부하 관속(官屬)에게 이르기를 “나의 종제 소유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가 세상에 나서 의식(衣食)이나 해결할 만하거든, 하택거(下澤車)를 타고 관단마(款段馬)를 몰고 선영의 분묘나 잘 수호하며 조용히 지내서 향리(鄕里)로부터 선인(善人)이라는 말이나 들으면 그만이지, 넘치는 행복을 구하는 것은 스스로 괴로울 뿐이다.’ 하더니, 내가 이곳에 와서 미처 오랑캐를 다 멸하기도 전에 장열(瘴熱)의 훈증(薰蒸)으로 인하여 솔개가 수중(水中)으로 툭툭 떨어지는 것을 쳐다보면서, 내 종제가 평상시에 하던 말을 생각해 보았지만, 이제는 어쩔 수가 없구나.”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하택거는 늪지대를 다니기에 알맞은 바퀴통이 짧은 수레를 말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341)그림의 떡:그림에 그려 놓은 떡은 먹을 수가 없으므로 아무 소용이 없는 사물의 비유로 쓰이는바, 전하여 여기서는 역시 아주 이루기 어려운 일에 비유한 것이다.

342)무릉(武陵)엔……가리우고:무릉은 곧 무릉도원(武陵桃源)에 숨어 살던 사람을 가리킨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122쪽 주67 참조.

343)동봉(董奉)은……전하였었지:동봉은 삼국(三國) 시대 오(吳)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여산(廬山)에 은거하면서 의술(醫術)에 정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었는데, 그는 질병을 치료해 주고도 돈을 받지 않고 다만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원에 살구나무를 심게 하여 살구나무가 무려 10만 그루에 달했던바, 그는 또 그 행림(杏林) 속에 조그마한 창고 하나를 지어 놓고, 그 살구를 사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곡식 한 그릇을 그 창고에 갖다 두고 대신 살구 한 그릇을 가져가도록 하여 그것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神仙傳 董奉

344)저닉(沮溺)의……데:저닉은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두 은자(隱者)였던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을 합칭한 말이다. 공자가 일찍이 초나라로부터 채(蔡)나라로 돌아가던 도중에 장저와 걸닉이 함께 밭을 갈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로(子路)를 시켜 장저에게 나루를 묻게 했더니, 장저가 말하기를 “저 수레 고삐를 잡고 있는 분이 누구냐?[夫執輿者爲誰]” 하므로, 자로가 공구(孔丘)라고 말하자, 장저가 말하기를 “그분은 나루를 알 것이다.[是知津矣]”라고만 하고 나루를 가르쳐 주지 않으므로, 다시 걸닉에게 물었으나 그 역시 나루는 가르쳐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밭일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論語 微子

345)심향(心香):본디 불교의 용어로, 마음속으로 정성을 다하기를 마치 공불(供佛)의 분향(焚香)처럼 하는 것을 이르는데, 전하여 여기서는 속마음을 거짓 없이 다 토로하는 것을 의미한다.

346)양보음(梁父吟):양보는 산명(山名)으로, 본래는 사람이 죽으면 이 산에 장사를 지냈던 데서, 전하여 양보음은 장가(葬歌)로 알려졌다. 자세한 내용은 135쪽 주104 참조.

347)하마(蝦蟆)가……듯:하마는 두꺼비를 가리킨 것으로, 사기(史記) 권128 귀책열전(龜策列傳)에 “태양은 덕이 되어 천하에 군림하다가 세 발 달린 까마귀에게 곤욕을 당하고, 달은 법이 되어 군왕을 보좌하다가 두꺼비에게 잡아먹힌다.[日爲德而君於天下 辱於三足之烏 月爲刑而相佐 見食於蝦蟆]”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곧 넓은 밭에 담배 모종을 차근차근 이식(移植)해 가고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348)곽색(郭索)이……했지:곽색은 게의 별칭인데, 게는 본래 갯벌에서 옆걸음질을 잘하므로, 전하여 여기서는 곧 담배 모종을 이식하느라 온 밭을 헤매고 다니는 것을 게에 비유한 말이다.

349)삼백 전(廛):시경 벌단(伐檀)에 “심지 않고 수확하지 않으면, 어떻게 삼백 전의 벼를 수확하리오.[不稼不穡 胡取禾三百廛兮]”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많은 곡식을 의미하는데, 그 집주(集註)에 의하면, 전(廛)은 곧 한 가구의 주택이라고 하였다.

350)애석해라……것이: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의하면, 송(宋)나라 사람 중에 손을 트지 않게 하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어, 대대로 세탁업을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100금(金)을 주고 그 약방문(藥方文)을 사 가지고는 오왕(吳王)을 찾아가서 유세(遊說)를 하여 마침내 오(吳)나라의 장군이 되어 월(越)나라와 수전(水戰)을 벌여서 월나라를 크게 격파하여 오왕으로부터 봉토(封土)를 하사받았으므로, 약방문은 한 가지지만 서로 쓰는 법칙이 달랐기 때문에 한 사람은 이것을 가지고 봉토를 하사받았고, 한 사람은 고작 세탁업을 면하는 데에 그쳤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351)화살……묻혔으리니:한대(漢代)의 명장 이광(李廣)은 본디 용력(勇力)이 매우 뛰어났던바, 일찍이 자기가 사는 고을에 호랑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호랑이를 쏘아 잡았고, 또 북평 태수(北平太守)로 있을 적에도 손수 호랑이를 쏘아 잡았으며, 한번은 사냥을 나갔다가 풀 속에 엎드려 있는 돌[石]을 보고는 잘못 호랑이로 알고 활을 쏘았더니, 화살이 돌에 꽂혀 파묻혀 버렸는데, 자세히 보니 돌이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352)천랑성(天狼星)을 쏘았다면:천랑성은 별 이름으로, 흔히 탐잔(貪殘)한 무리 또는 도적 등에 비유되는바, 초사(楚辭) 구가(九歌) 동군(東君)에 의하면 “청운으로 윗옷 삼고 백예로 아래옷 삼아, 긴 화살 뽑아서 천랑성을 쏘도다.[靑雲衣兮白霓裳 擧長矢兮射天狼]”라고 하였다.

353)소천(小川):왕사찬(王師瓚, 1841〜1912)의 호이다. 전남 구례(求禮) 출신으로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의 셋째 아들인데, 그는 특히 고체시(古體詩)에 능해서 매천으로부터 찬사를 들었고, 그 지방에서는 매천과 더불어 당대에 시명(詩名)을 떨쳤다고 한다.

354)소육(蘇陸)의……기운:소육은 북송(北宋) 말기의 문장가인 소식(蘇軾)과 시인인 육유(陸游)를 합칭한 말인데, 하늘을 찌르는 기운이란 곧 그들의 높은 시격(詩格)을 찬양하여 이른 말이다.

355)조나(曹羅):만당(晩唐)의 시인으로, 조당(曹唐), 조송(曹松)과 나은(羅隱), 나업(羅鄴) 형제를 합칭한 말인데, 조송은 특별한 장점이 없었고, 나은은 영사시(詠史詩)에 능했다고 한다.

356)이후(李侯)가……말인가:이후는 이군(李君)과 같은 뜻으로, 여기서는 곧 이백(李白)을 가리키고, 음갱(陰鏗)은 전오대(前五代) 시대 진(陳)의 시인으로, 그는 특히 오언시(五言詩)에 뛰어났다고 하는데, 두보(杜甫)의 여이십이백동심범십은거(與李十二白同尋范十隱居) 시에 “이후의 아름다운 시구는, 이따금 음갱의 시와 비슷하네.[李侯有佳句 往往似陰鏗]”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南史 卷64 陰鏗列傳 杜少陵詩集 卷1

357)재갈……가려무나:재갈을 물린다는 것은 곧 옛날 행군할 때에 사병들의 떠드는 소리를 방지하기 위하여, 젓가락 같은 재갈의 양쪽 끝에 끈을 달아서 사병들의 입에 재갈을 물린 다음 양쪽 끝의 끈을 목 뒤로 돌려 묶었던 데서 온 말이고, 양장판(羊腸坂)은 산서성(山西省)에 위치한 아주 험난한 비탈길을 가리키는바, 비탈길이 마치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만 이 시구(詩句)의 전체적인 뜻은 시문(詩文) 짓는 문장력이 매우 뛰어남을 형용한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358)토원책(兎園冊):서명(書名)인데, 저자에 대해서는 당대(唐代)의 이운(李惲), 우세남(虞世南) 등의 설이 있어 누구의 저서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내용은 향중(鄕中)의 촌부(村夫), 목자(牧子) 등에게 읽혀진 아주 천근(淺近)한 서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359)고래……기다리네:용천검(龍泉劍)은 춘추 시대 간장(干將), 막야(莫邪) 두 부부(夫婦)가 제작했다는 보검(寶劍)의 이름으로, 전하여 여기서는 단지 보검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이 구절 또한 힘찬 문장력을 형용한 말이다.

360)닷……쓸모없고:장자(莊子)의 친구 혜자(惠子)가 일찍이 장자에게 말하기를 “위왕이 나에게 큰 박씨 하나를 보내 주므로, 이것을 심었더니, 닷 섬들이 박이 열렸는데, 그 속에다 음료수를 채워 놓으니 무거워서 들 수가 없었고, 다시 두 쪽으로 쪼개어 바가지를 만들었으나 너무 넓어서 쓸 수가 없었네. 속이 텅 비어 크기는 했지만, 나는 아무 소용이 없어 부수어 버렸네.[魏王貽我大瓠之種 我樹之成 而實五石 以盛水漿 其堅不能擧也 剖之以爲瓢 則瓠落無所用 非不呺然大也 吾爲其無用而掊之]” 하자, 장자가 말하기를 “지금 자네에겐 닷 섬들이 바가지가 있었는데, 어찌하여 그것을 큰 통으로 만들어 강호에 띄울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것이 너무 커서 쓸 데가 없다고 걱정만 하는가?[今子有五石之瓠 何不慮以爲大樽而浮乎江湖 而憂其瓠落無所容]”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莊子 逍遙遊

361)창랑(滄浪)과 후촌(後村):창랑은 남송(南宋) 시대 시인인 엄우(嚴羽)의 호이다. 그는 같은 시인이었던 엄인(嚴仁), 엄삼(嚴參)과 명성을 나란히 하여 당시에 삼엄(三嚴)으로 호칭되었으며, 저서에 창랑시집(滄浪詩集), 창랑시화(滄浪詩話) 등이 있다. 후촌은 역시 남송 시대 시인인 유극장(劉克莊)의 호이다. 그는 동진사 출신(同進士出身)으로 용도각 학사(龍圖閣學士)를 지냈고, 저서에 후촌거사시문집(後村居士詩文集), 후촌시화(後村詩話) 등이 있다.

362)그들은……않았던고:두보의 강상치수여해세요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 시에 의하면 “나는 성질이 아름다운 시구를 지나치게 좋아해, 남을 놀래키지 못하면 죽어도 마지않는데, 늘그막의 시편은 다 부질없는 흥취일 뿐이니, 봄이 오매 꽃과 새들은 너무 시름하지 말거라.[爲人性癖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 老去詩篇渾謾興 春來花鳥莫深愁]”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10이 절구(絶句)의 전체 내용은 곧 엄우, 유극장 같은 시인들도 모두 두시(杜詩)를 매우 좋아하여 본받았음을 의미한다.

363)소황(蘇黃):북송(北宋) 시대 문학가인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의 병칭(竝稱)이다. 송사(宋史) 권444 문원열전(文苑列傳)에 의하면 “황정견은 문장을 함에 있어 시에 더욱 능하였으므로, 촉 지방과 강서 지방의 군자들이 황정견을 소식에 짝하였기 때문에 소황이라 칭한 것이다.[庭堅於文章尤長於詩 蜀江西君子以庭堅配軾 故稱蘇黃]”라고 하였다. 촉(蜀)은 소식의 고향이고, 강서(江西)는 황정견의 고향이다. 그리하여 송 철종(宋哲宗)의 연간에는 황정견을 으뜸으로 하여 그 이하 진사도(陳師道), 반대림(潘大臨), 사일(謝逸) 등 25인의 시인들을 모두 황정견의 법사(法嗣)로 삼아 강서시파(江西詩派)라 호칭하였으니, 황정견이 본디 강서인(江西人)으로서 끼친 영향이 가장 컸기 때문이었다.

364)패가(霸家)의……했네:패가는 패자(覇者)와 같은 뜻으로, 전하여 여기서는 각 시파(詩派) 간에 우열을 서로 겨루었던 것을 이른 말인 듯하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13년 조에 의하면 “가을 칠월 신축일에 노나라 애공이 진후, 오후와 함께 맹약을 하는데, 오와 진이 서로 맹주가 되고자 하여 희생의 피를 서로 먼저 마시려고 하였다. 오인이 말하기를 ‘주나라 왕실로 보면 나는 태백의 후예로서 응당 어른이 된다.’ 하였고, 진인은 말하기를 ‘희성을 가진 제후 중에 내가 가장 으뜸이 된다.’ 했다.[秋七月辛丑盟 吳晉爭先 吳人曰於周室我爲長 晉人曰於姬姓我爲伯]”라고 하였다.

365)강서(江西)가……이뤘거니:강서는 곧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시풍(詩風)을 가리킨 것으로, 즉 강서시파의 시풍이 북송(北宋) 말기까지 이어졌고, 남송(南宋)에 이르러서는 시풍이 다시 한 번 변하였음을 의미한다. 자세한 내용은 144쪽 주129 참조.

366)평탄한……말인가:석호(石湖)는 남송 때의 시인으로 호가 석호거사(石湖居士)인 범성대(范成大)를 가리킨다. 그의 자는 치능(致能), 시호는 문목(文穆)이며, 숭국공(崇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문명(文名)이 높았고, 시에 더욱 뛰어나서 육유(陸游), 양만리(楊萬里)와 명성을 나란히 했으며, 고종(高宗) 초기에 진사(進士)가 되고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자정전 대학사(資政殿大學士),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석호집(石湖集)을 비롯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宋史 卷386 范成大列傳

367)천관산(天冠山):전남 장흥(長興)에 있는 산명(山名)이다.

368)거령(巨靈):전설상의 신명(神名)으로, 먼 옛날에 황하(黃河)가 화산(華山)에 막혀 흐르지 못하자, 화산을 쪼개서 태화산(太華山), 소화산(少華山) 둘로 나누어 황하를 그 중간으로 흐르게 했다는 하신(河神)의 이름이다.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 의하면 “한나라의 처음 도읍지는 위수 가에 있었고, 진나라의 도읍지는 그 북쪽에 있었으니, 이곳이 바로 함양의 옛 서울이다. 동쪽으로는 효산, 함곡관의 중첩한 험고함과 도림의 요새가 있고, 태화, 소화 두 산과 연접해 있는데, 옛날에 거령이 큰 힘을 써서 손으로는 화산의 꼭대기를 둘로 쪼개고 다리로는 화산의 기슭을 밟아 찢어서 태화, 소화 두 산으로 만들어 그 중간으로 황하가 굽게 흘러가도록 하였으니, 그 거령의 손과 발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다.[漢氏初都 在渭之涘 秦里其朔 寔爲咸陽 左有崤函重險 桃林之塞 綴以二華 巨靈屭贔 高掌遠蹠 以流河曲 厥迹猶存]”라고 하였다. 文選 卷2

369)생오(鼪鼯):족제비와 날다람쥐를 합칭한 말이다.

370)그가……터이니:영랑(永郞)은 신라 때 네 선인(仙人) 중의 한 사람이다. 강원도 통천(通川)의 바다 가운데 수십 개의 돌기둥이 모여 서 있었던바, 전설에 의하면, 신라 때 술랑(述郞), 남랑(南郞), 영랑, 안상(安祥)의 네 선인이 일찍이 이곳에서 놀며 구경을 했다 하여 뒤에 이곳을 사선봉(四仙峯)이라 불렀다고 하며, 또 그 바닷가에서 돌기둥 무더기를 굽어보고 서 있는 정자를 또한 총석정(叢石亭)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는 강원도 고성(高城)의 삼일포(三日浦)에 조그마한 섬이 있어, 이 네 선인이 일찍이 이곳에서 놀다가 3일 간이나 돌아가지 않았다 하여 이곳을 삼일포라 하고, 뒤에 사선정(四仙亭)을 세웠다고도 한다. 그리고 옥보고(玉寶高)는 역시 신라 때 특히 거문고에 신통한 음악가였다. 옥보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63쪽 주185 참조.

371)송풍조(松風操):옛 금곡(琴曲) 이름으로, 송풍곡(松風曲)이라고도 한다.

372)동파(東坡)의 도장산 운(道場山韻):동파는 소식(蘇軾)의 호이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에 실려 있는 원 시제(詩題)는 “도장산과 하산을 유람하다[遊道場山何山]”로 되어 있다. 

373)고생 용주(高生墉柱):자는 현중(玄中), 호는 봉계(鳳溪)이며, 1903년(광무7)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가 되었다. 특히 매천야록(梅泉野錄) 가운데 1910년 8월 22일 합방조서(合邦詔書)로부터 같은 해 9월 10일까지를 보충하여 기록했다고 한다. 공립구례보통학교(公立求禮普通學校)의 교사를 지냈고, 매천집(梅泉集) 발간의 연조자(捐助者)이기도 하였다.

374)향리(鄕里)의……올라갔네:향리의 조그만 아이란 바로 고용주를 가리킨 말이고, 옥주발에 담긴 개똥이란 곧 자치통감(資治通鑑) 주기(周紀)에 “손성이 평소 풍연기를 경멸하여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금술잔, 옥주발에다 개똥을 담는단 말인가.’ 했다.[孫晟素輕馮延己 謂人曰 金盃玉盌 乃貯狗矢乎]”라는 데서 온 말로, 이는 곧 손성이, 아무 재능도 없는 풍연기가 요직(要職)에 있는 것을 풍자한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바로 전에는 문재(文才)가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고용주가 어느 날 갑자기 문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을 장난삼아 이른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375)방에……잡으니:후한(後漢) 시대 경학자(經學者)인 하휴(何休)가 공양씨(公羊氏)의 학(學)을 좋아하여 마침내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폐질(穀梁廢疾)을 저술하였는데, 정현(鄭玄)이 여기에 반박하는 글, 즉 발묵수(發墨守), 침고황(鍼膏肓), 기폐질(起廢疾)을 저술하였으므로, 하휴가 그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강성이 내 방에 들어와서 내 창을 잡고 나를 치는가?[康成入吾室 操吾戈以伐我乎]”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강성(康成)은 정현의 자이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전하여 후세에 흔히 그 사람의 학설을 가지고 그 사람을 반박하는 데에 비유한다.

376)하분(河汾) 사이:하분은 황하(黃河)와 분수(汾水)의 병칭인데, 수(隋)나라 때 대유(大儒) 왕통(王通)이 일찍이 황하와 분수의 사이에 은거하면서 후진들을 교수(敎授)했던바, 당시 그에게서 수업한 사람이 1000여 인에 달했다고 한다. 전하여 여기서는 곧 학덕이 높은 스승의 문하를 의미한다. 왕통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226쪽 주318 참조.

377)정밀……듯하니:쥐가 쇠뿔에 든다는 것은 곧 오대(五代) 시대 남한(南漢)의 고조(高祖) 유엄(劉龑)이 임종시에 자식들이 모두 불초함을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내 자손들은 이렇게 불초한고. 후세에 마치 쥐가 쇠뿔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형세가 의당 점점 작아질 것이다.[奈何吾子孫不肖 後世如鼠入牛角 勢當漸小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新五代史 卷65 南漢世家 劉龑본래는 세력이 갈수록 약화되어 가는 것을 비유하는데, 전하여 여기서는 아마도 학문의 아주 정밀한 곳을 형용한 말로 쓰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378)우공(愚公)이……힘썼으면:우공이 산을 옮겼다는 것은 곧 고대의 우언(寓言)에서 나온 말로, 즉 북산(北山)의 우공이라는 사람이 나이 90 가까이 되었을 때, 자기 집 앞에 태항(太行), 왕옥(王屋) 두 산이 있어 출입하기가 불편함을 염려한 나머지, 그 두 산을 다 파내서 편평하게 만들 결심을 하자, 지수(智叟)가 되지 않을 일을 한다 하여 우공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므로, 우공이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내 아들이 있고, 아들이 죽은 뒤에는 손자가 있어 자자손손이 이어갈 것이고, 저 산은 더 높아지지 않을 것이니, 왜 저 산을 다 파내지 못하겠느냐.” 하고, 날마다 쉴 새 없이 산을 파내자, 상제(上帝)가 그의 집념에 감동하여 마침내 과아씨(夸娥氏)의 두 아들을 내려보내서 그 산들을 등에 지고 도주하도록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列子 湯問전하여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굳은 집념을 가지고 노력하면 다 성취할 수 있다는 비유로 흔히 쓰인다.

379)음사(吟社):시사(詩社)와 같은 뜻으로, 문인(文人)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시를 짓기 위해 결성한 단체를 말한다.

380)경인어(驚人語):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시구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249쪽 주362 참조.

381)조내(曹鼐) 황종(況鍾):조내는 명(明)나라 사람으로 자는 만종(萬鍾),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선종(宣宗) 연간에 1등으로 진사 급제(進士及第)하였고, 뒤에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 이부 좌시랑(吏部左侍郞)에 이르렀다. 영종(英宗)이 야선(也先)을 정벌하러 나갔다가 오히려 야선에게 잡혀갈 때 그 또한 함께 잡혀가서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고 황종은 역시 명나라 사람으로 자는 백률(伯律)이다. 그는 일찍이 소주지부사(蘇州知府事)로 부임하여 강직하고 청렴하게 선정(善政)을 베푼 결과 백성들이 그를 마치 신명(神明)처럼 받들었고, 심지어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게 되었을 때는 백성들이 순안 어사(巡按御史)에게 달려가서 그를 재임(再任)시켜 주기를 요구하여 재임되기도 했다. 그가 끝내 관(官)에서 죽자, 백성들이 서로 모여 통곡하였고, 그를 위해 사당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明史 卷161 況鍾列傳, 卷167 曹鼐列傳

382)사주(社酒):입춘(立春) 후 다섯 번째 무일(戊日)을 춘사(春社), 입추(立秋) 후 다섯째 무일을 추사(秋社)라 하는데, 옛날 민속에 의하면, 이날 토지신에게 제사하여 풍년을 기원했던바, 사주는 곧 그 제사에 쓰고 남은 술을 가리킨다.

383)노호행(老狐行):늙은 여우를 두고 노래한다는 뜻인데, 이 노래의 내용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권력자에게 빌붙거나 혹은 왜적(倭賊)의 앞잡이가 되어서 온갖 간악을 자행하는 자를 늙은 여우에 빗대서 풍자한 것으로 보인다.

384)우소(齲笑):여자가 마치 치통을 앓는 듯이 얼굴을 살며시 가리고 약간 찡그리며 웃는 것을 말하는데, 이 또한 남자를 미혹하는 일종의 교태(嬌態)이다.

385)장방(長房)의 부적(符籍):후한(後漢) 때 비장방(費長房)이 일찍이 선인(仙人) 호공(壺公)에게 한 부적 하나를 얻어서 이것으로 온갖 귀신들을 제복(制服)시켰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그러나 뒤에 귀신이 그 부적을 훔쳐 가서 그것을 가지고 도리어 비장방을 죽였다고 한다. 廣博物志 卷15

386)연산(燕山)의……없어졌지만:연산은 곧 연산에 있는 연 소왕(燕昭王)의 무덤을 가리키고, 화표주(華表柱)는 곧 무덤에 세우는 망주석(望柱石)을 가리킨다. 수신기(搜神記)에 의하면, 연 소왕의 무덤에 살던 늙은 여우가 일찍이 남자로 둔갑해서 장화(張華)의 강설(講說)을 들었는데, 장화가 그를 괴이하게 여겨 자기 친구인 뇌환(雷煥)에게 말하기를 “지금 젊고 아름다운 한 남자가 고상한 담론을 한다.[今有一男子少美高談]” 하자, 뇌환이 말하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늙은 여우의 정기일 것이다. 듣건대 연 소왕의 묘에 이미 천년 된 화표주가 있다 하니, 그것을 가져다 비추어 보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當是老精 聞昭王墓有華表柱已千年 可取照之 當自見]” 하므로, 장화가 그의 말대로 한 결과, 그 남자가 과연 다시 여우로 변신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전하여 여기서는 곧 이미 그 화표주가 없어져서 늙은 여우를 밝혀낼 길이 없음을 의미한다.

387)알유(猰貐)가……겸하여:알유는 고대 전설에 나오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맹수의 이름인데, 흔히 흉악한 사람의 비유로 쓰인다. 호추(虎貙)는 호랑이와 호랑이 비슷한 추라는 맹수를 합칭한 말이다.

388)다순……부러졌네:조선이 외세의 침략에 무방비 상태로 당하던 일을 비유한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두보(杜甫)의 애왕손(哀王孫) 시에 “보배로운 패옥 청산호를 허리에 차고, 길가에서 울어대는 왕손이 가련하구나.[腰下寶玦靑珊瑚 可憐王孫泣路隅]”라고 하였는데, 이 시는 당 현종(唐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 일어나서 현종이 촉(蜀)으로 몽진(蒙塵)할 당시, 종실 왕손, 비자(妃子), 공주(公主) 등이 피살되거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광경을 서술한 것이다.

389)천추(天樞):북두칠성 가운데 제일성(第一星)을 가리키는데, 흔히 국가의 중앙정권에 비유된다.

390)괴강(魁罡):북두칠성의 제일성인 두괴(斗魁)와 천강성(天罡星)을 합칭한 말이다.

391)육정(六丁)을……하여:육정은 도교(道敎)에서 이른바 정묘(丁卯), 정사(丁巳), 정미(丁未), 정유(丁酉), 정해(丁亥), 정축(丁丑)의 여섯 정신(丁神)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본래 천제(天帝)의 부림을 받는 신들이다. 도사(道士)의 경우는 부록(符籙)을 사용하여 이들을 불러서 부릴 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천오(天吳)는 해신(海神)의 이름이다.

392)알유(猰貐)의……보내졌고:알유의 목이 이미 잘려 나갔음을 뜻한다. 후한(後漢) 때 원소(袁紹)의 두 아들인 원희(袁熙), 원상(袁尙)이 조조(曹操)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요동(遼東)으로 달아나 있으면서 장군 공손강(公孫康)을 잡아 죽이고 요동 땅을 탈취하려고 생각했는데, 공손강 또한 이들 두 형제를 포살(捕殺)해서 조조와 친해지고자 하여 먼저 복병을 설치해서 이들을 사로잡아 꽁꽁 언 땅에 앉혀 두자, 원상이 공손강에게 좌석이나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므로, 공손강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머리는 곧 만리 밖으로 옮겨지게 될 것인데, 무슨 좌석을 요구하는가?[卿頭顱方行萬里 何席之爲]” 하고는 곧 두 사람의 머리를 베어서 조조에게 보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74上 袁紹列傳

393)사반(社飯):옛날 사일(社日)에 돼지고기, 양고기 등 맛좋은 고기류를 밥 위에 펼쳐서 먹던 밥을 가리킨다.

394)정양(旌陽)의……무뎌졌으랴:정양은 곧 진대(晉代)의 선인(仙人)으로 일찍이 정양 현령(旌陽縣令)을 지낸 허손(許遜)을 가리킨다. 허손은 젊어서 천문, 지리, 음양, 율력(律歷) 등의 서적에 모두 정통하였고, 신선 수련의 술법을 더욱 좋아하여 일찍이 도사(道士) 오맹(吳猛)의 술서(術書)를 얻어 정밀히 수련하였으며, 태강(太康) 연간에는 마침내 촉(蜀)의 정양 현령이 되어 충효를 표창하고 번가(煩苛)한 것을 제거하는 등 많은 선정을 베푼 결과, 백성들이 그를 대단히 감모(感慕)한 나머지, 그의 선정을 가요로 찬송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뒤에 벼슬을 버리고 단양(丹陽)의 한 도사를 찾아가서 다시 도술을 배우고 보서부권(寶書符券)의 참사비보(斬邪飛步)의 술법을 터득하여, 이에 해혼(海昏)의 거대한 이무기[巨蟒]를 베 죽여서 백성들의 재앙을 제거해 주고, 강호(江湖)의 늙은 교룡[老蛟]을 베 죽여서 수환(水患)을 지식(止息)시킴으로써 천택(川澤)에는 망상(罔象)에 대한 걱정이 없게 되었고, 산림(山林)에는 이매(魑魅)의 요괴가 없어져서 천리 안통의 민물(民物)들이 모두 평온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江西通志 卷121

395)그……바이다:초라한 제물(祭物)에 아무런 의식 절차도 없이 지내는 농신제(農神祭)에 대하여, 그와 정반대로 풍후한 제물에 성대한 의식 절차를 갖춘 것처럼 서술한다는 뜻이다.

396)경전(藑篿):영초(靈草)인 경모(藑茅)와 대나무 점대로 점치는 것을 이른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의하면 “경모와 가는 대를 점대로 삼아서, 영분에게 명하여 나를 위해 점을 치게 하노라.[索藑茅以筳篿兮 命靈氛爲余占之]”라고 하였다.

397)황관(黃冠):누런 색깔의 관을 말하는데, 옛날에 야인(野人)들이 이 관을 썼다고 한다. 후세에는 도사들도 흔히 이 관을 썼으므로 도사를 일컫기도 한다.

398)초계(椒桂):산초(山椒)와 육계(肉桂)를 말한 것으로, 보통은 뛰어난 향료(香料)를 가리키는데, 맛좋은 술을 가리키기도 한다. 초사(楚辭) 구가(九歌) 동황태일(東皇太一)에 의하면 “혜초로 고기를 찌고 난초로 밑바닥 깔아서, 계주랑 초장을 드리도다.[蕙肴蒸兮蘭藉 奠桂酒兮椒漿]”라고 하였다.

399)육기(六氣)가……우선이로다:육기는 천지간의 여섯 가지 기운, 즉 음(陰), 양(陽), 풍(風), 우(雨), 회(晦), 명(明)을 말하고, 우양(雨暘)은 곧 비가 내려야 할 때 내리고, 볕이 나야 할 때 볕이 나는 것을 이르는 말로, 전하여 우순풍조(雨順風調)를 의미한다.

400)구구 오야(甌窶汙邪)에서……하소서:구구는 높은 지대의 협소한 땅을 말하고, 오야는 낮은 지대의 땅을 말한 것으로,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한 농부가 돼지 발굽 하나, 술 한 사발을 차려 놓고 농신(農神)에게 풍년을 빌어 말하기를 “높은 지대 협소한 땅에서는 곡식을 농에 가득 수확하고, 낮은 땅에서는 곡식을 수레 가득 수확하게 해 주소서.[甌窶滿篝 汙邪滿車]”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그리고 천창 만상(千倉萬箱)은 시경 보전(甫田)에 “증손의 농사가 이엉 같고 수레의 끌채 같으며, 증손의 노적이, 모래톱 같고 언덕과 같은지라, 이에 천 개의 창고를 구하며, 이에 만 개의 수레 짐칸을 구하노니, 서직과 도량이, 농부의 복이라, 큰 복으로 보답하니, 만수무강하리로다.[曾孫之稼 如茨如梁 曾孫之庾 如坁如京 乃求千斯倉 乃求萬斯箱 黍稷稻粱 農夫之慶 報以介福 萬壽無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401)바나나와 여지(荔枝):무도 남방(南方)에서 나는 과일 이름인데, 한유(韓愈)의 유주나지묘비(柳州羅池廟碑)에 “여지는 빨갛고 바나나는 노란데, 고기와 채소 곁들여 자사의 사당에 올리네.[荔子丹兮蕉黃 雜肴蔬兮進侯堂]”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흔히 제수(祭需)의 뜻으로 쓰인다.

402)웅번(熊膰) 표태(豹胎):웅번은 곰의 발바닥을 말하고, 표태는 표범의 태반(胎盤)을 말하는데, 모두 옛날에 진수(珍羞)로 일컬어졌다.

403)열결(列缺):하늘이 찢어져 이지러진다는 뜻에서, 번개의 별칭으로 쓰인다.

404)방호(方壺)……아니거니:방호와 원교(員嶠)는 모두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다는 전설상의 선산(仙山) 이름이다. 그리고 아름답지만 내 고향이 아니라는 것은 곧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왕찬(王粲)이 일찍이 동탁(董卓)의 난리를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하고 있을 적에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 고향을 생각하면서 진퇴 위구(進退危懼)의 정을 서술하여 지은 등루부(登樓賦)에 “참으로 아름답지만 내 고향이 아니거니, 어찌 족히 조금이나마 머무를 수 있으랴.[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留]”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405)석주관성(石柱關城)의……조상하다:석주관성은 전남 구례군(求禮郡) 송정리에 위치한 요새이다. 칠의사(七義士)는 바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구례 지방으로 침입한 왜구를 석주관성에서 그들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일곱 의사, 그 당시 구례 현감(求禮縣監)이었던 이원춘(李元春)을 비롯하여 사인(士人) 왕득인(王得仁), 이정익(李廷翼), 한호성(韓好誠), 양응록(梁應祿), 고정철(高貞喆), 오종(吳琮)을 가리킨다. 순조(純祖) 연간에 나라에서 칠의사에게 각각 벼슬을 추증하였고, 근대에 들어와서 그 지방 인사들이 칠의각(七義閣)과 영모정(永慕亭)을 지어서 그 일을 기리고 있다 한다.

406)목릉(穆陵):조선 선조(宣祖)의 능호(陵號)로, 전하여 선조를 가리킨다.

407)고조곽(高趙郭):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고경명(高敬命), 조헌(趙憲)과 역시 의병장으로 여러 차례 왜적을 크게 무찔렀던 곽재우(郭再祐)를 합칭한 말이다. 고경명의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峯),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명종(明宗) 연간, 문과에 장원 급제한 이후, 정언(正言)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光州)에서 모집한 의병 6000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에 침입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조헌의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그 역시 명종 연간 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연간에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 저작(著作)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종묘서 영(宗廟署令),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玉川)에서 의병 1700여 명을 규합하여 승병(僧兵)과 합세해서 청주(淸州)를 수복하고,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적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으나 전공(戰功)을 시기하는 관군(官軍)의 방해로 대부분의 의병이 해산되고 고작 700여 명의 의병으로 금산 전투에 참가하여 끝까지 용전(勇戰)하다가 700의 의병과 함께 모두 전사했다. 곽재우의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선조 연간 문과에 급제했으나 파방(罷榜)당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宜嶺)에서 의병을 일으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칭하고 연거푸 왜적을 물리쳤으나, 관찰사의 모함으로 한때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가 김성일(金誠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 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가 되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다. 뒤에 한성부 좌윤, 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408)사호위기도(四皓圍棋圖):사호가 바둑 두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사호는 진(秦)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해 상산(商山)에 들어가 은거하던 네 노인, 즉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을 가리킨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말년에 이미 세운 태자를 폐하고 척 부인(戚夫人)의 소생인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태자로 삼으려고 할 적에 대신들이 극력 간쟁하여도 듣지 않자, 장량(張良)의 주선에 의해 당시 상산에 은거하던 이 네 노인을 초빙해다가 태자를 극력 보필하게 한 결과, 고조가 마침내 이 네 노인이 태자 보필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미 세운 태자를 바꿀 계획을 포기함으로써 끝내 한(漢)의 황실(皇室)이 무사하게 되었다.

409)청낭(靑囊):푸른 빛깔의 포대(布袋)나 푸른 주머니를 가리키는데, 옛날에 의가(醫家)에서는 의서(醫書)를 담은 포대를 이렇게 일컬었고, 도가에서는 도가의 전적(典籍)을 담은 포대를 이렇게 일컬었다.

410)영지(靈芝)는……띠었네:영지는 곧 선약(仙藥)인 붉은 영지버섯[紫芝]을 가리키는바, 진(秦)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해 상산에 은거했던 네 노인, 즉 동원공, 기리계, 하황공, 녹리선생이 일찍이 상산에서 이 영지를 캐 먹었고, 또한 자지가(紫芝歌)를 지어 부르기도 했었다.

411)원숭이는……마시며:두보(杜甫)의 장강(長江) 시에 “외로운 돌은 물에 잠겨 말같이 뵈고, 높은 등라엔 물 먹는 원숭이 매달렸네.[孤石隱如馬 高蘿垂飮猿]”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4

412)한나라의……당하여:전성(前星)은 태자를 가리킨다. 한서(漢書) 권27하 오행지(五行志)에 “심성 중에 큰 별은 천왕에 해당하고, 그 앞의 별은 태자에 해당하고, 뒤의 별은 서자에 해당한다.[心大星 天王也 其前星 太子也 後星 庶子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곧 한 고조가 이미 세운 태자를 바꾸려고 하여 태자의 자리가 불안했던 그때를 두고 한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270쪽 주408 참조.

413)유후(留侯):한나라의 개국공신 장량(張良)의 봉호이다.

414)당국자(當局者)는……법:당국자는 바둑을 직접 두는 사람을 가리키고, 방관자는 바둑 두는 것을 곁에서 구경하는 사람을 가리킨 것으로, 옛 속어(俗語)에 “곁에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사람은 잘 알고, 직접 바둑을 두는 사람은 판단이 헷갈리게 된다.[傍觀者審 當局者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415)원룡(元龍)의……않고:원룡은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진등(陳登)의 자이다. 허사(許汜)가 일찍이 유비(劉備)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기가 한번은 진등을 찾아갔더니, 진등이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주인인 자신은 높은 와상(臥牀)으로 올라가 눕고, 손님인 자기는 아래 와상에 눕게 하더라고 말하자, 유비가 말하기를 “그대는 국사의 명망을 지닌 사람으로,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임금이 처소를 잃은 판이라, 그대에게 오직 나라를 걱정하고 자신을 잊어서 온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기를 바랐는데, 그대는 전답이나 살 집을 구하고 다닐 뿐, 아무런 채택할 만한 말이 없었으니, 원룡이 이것을 꺼렸던 것이다. 어찌 그대와 말할 가치가 있었겠는가. 나 같았으면 자신은 백척루 위로 올라가 눕고, 그대는 땅바닥에 눕게 했을 것이다. 어찌 와상을 위아래의 차이로만 하였겠는가.[君有國士之名 今天下大亂 帝主失所 望君憂國忘家 有救世之意 而君求田問舍 言無可采 是元龍所也 何緣當與君語 如小人 欲臥百尺樓上 臥君於地 何但上下牀之間耶]”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三國志 卷7 魏書 陳登傳전하여 원룡의 큰 와상은 곧 남아의 큰 호기를 상징한다.

416)누워서……삼았노라: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특히 주호(酒豪)로 이름이 높았던 유령(劉伶)이 일찍이 주덕송(酒德頌)을 지어 술을 예찬했던 데서 온 말인데, 그 대략에 의하면 “대인 선생이 있어 천지를 하루아침으로 삼고, 만년의 세월을 잠시로 여기며, 해와 달을 지게문과 창으로 삼고, 광활한 천지 사방을 뜰과 길거리로 삼아, 다닐 때는 일정한 수레바퀴 자국이 없고, 사는 데는 일정한 집이 없어, 하늘을 장막으로 삼고, 땅을 자리로 삼아서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며, 머물러 있을 때는 크고 작은 술잔을 손에 쥐고, 움직일 때는 술통과 술병을 몸에 지녀서, 오직 술만을 일삼거니, 어찌 그 밖의 것을 알겠는가.[有大人先生 以天地爲一朝 萬期爲須臾 日月爲扃牖 八荒爲庭衢 行無轍跡 居無室廬 幕天席地 縱意所如 止則操巵執觚 動則挈榼提壺 唯酒是務 焉知其餘]”라고 하였다.

417)천지(天地)의……같네:여기서 천지의 도란 곧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天圓地方]”라는 데서 온 말이다. 하늘의 형태는 본디 둥글고, 말[斗]은 곡식을 되는 네모진 양기(量器)인바, 가옥의 구조 또한 그와 같이 생겼으므로 이른 말이다.

418)술……씻고:승(僧) 가준(可遵)의 취우(驟雨) 시에 의하면 “만리 안통엔 은하수가 쏟아지고, 사방 처마에선 폭포를 내리쏟누나.[萬里瀉銀河 四簷垂瀑布]”라고 하였다. 山堂肆考 卷4

419)집을 삿갓으로 삼았는데:정자 이름을 일립정(一笠亭)이라 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420)태경(泰卿):윤종균(尹鍾均, 1861〜1941)의 자이다. 전남 순천(順天) 출생으로 호는 유당(酉堂)이다. 벼슬은 남원부 주사(南原府主事)를 지냈다고 한다. 저서에 유당시집(酉堂詩集)이 있다.

421)해내에서는……많다:두보(杜甫)의 배이북해연역하정(陪李北海宴歷下亭) 시에 “바다 오른쪽에는 이 정자가 예스럽고, 제수 남쪽에는 명사가 많기도 하네.[海右此亭古 濟南名士多]”라고 한 것을 인용하였는데, ‘우(右)’ 자만 ‘내(內)’ 자로 바꾸었다. 杜少陵詩集 卷1

422)십……왕관곡(王官谷)이요:남제(南齊) 때 공치규(孔稚圭)가 일찍이 변절하여 벼슬길에 나간 주옹(周顒)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북산(北山) 신령의 이름을 가탁하여 관청의 이문(移文)을 본떠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그로 하여금 다시는 북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는 뜻을 서술했다. 그 대략에 “혜초 장막은 텅 비어 밤 학이 원망하고, 산중 사람이 떠나감에 새벽 원숭이가 놀란다.[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원숭이와 학은 깊은 산중의 은자(隱者)의 처소를 의미한다. 왕관곡은 골짜기 이름으로, 당(唐)나라 때 시인 사공도(司空圖)가 만년에 벼슬을 사퇴하고 중조산(中條山) 왕관곡에 정자를 짓고 은거했던 데서 온 말이다. 사공도는 그 정자를 삼휴정(三休亭) 또는 휴휴정(休休亭)이라 칭했던바, 스스로 지은 휴휴정기(休休亭記)에 “재주를 헤아리매 한 가지 마땅히 쉬어야 할 일이요, 분수를 헤아리매 두 가지 마땅히 쉬어야 할 일이요, 늙고 또 귀가 어두우니 세 가지 마땅히 쉬어야 할 일이다.[蓋量其才 一宜休 揣其分 二宜休 耄且聵 三宜休]”라고 하였다.

423)하루아침에……택승정(擇勝亭)이로다:택승정은 소식(蘇軾)이 일찍이 여음(汝陰)에 있을 때 지은 정자 이름인데, 동파전집(東坡全集) 권97 택승정명(擇勝亭銘)에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199쪽 주260 참조.

424)장강(長康):동진(東晉) 시대 문인화가인 고개지(顧愷之)의 자이다. 고개지는 박학하고 재기가 뛰어났으며, 특히 인물화에 뛰어났다. 특히 세속에서는 그를 재절(才絶), 화절(畫絶), 치절(癡絶)의 삼절(三絶)로 일컫기도 하였다.

425)운봉대첩(雲峯大捷):1894년(고종31) 동학군(東學軍)이 봉기했을 때, 전라도 남원(南原) 운봉현(雲峰縣)의 아전(衙前) 박봉양(朴鳳陽)이 의병 수천 명을 모집, 지휘하여 운봉의 여원치(女院峙)에서 동학군을 크게 격파한 것을 말한다. 박봉양의 집안은 대대로 아전을 지내면서 현민(縣民)을 착취해 왔다고 한다. 동학군이 남원을 점령하고 이어 운봉을 쳐들어오려 할 때, 박봉양이 운봉을 비롯하여 인근 인월면, 산내면 등지에서 장정 5000여 명을 모집하여 총괄 지휘했다. 그는 용력과 지모를 겸비한 장군으로 눈이 애꾸여서 일목장군(一目將軍)으로도 불렸다. 그가 여원치에서 동학군을 방어하기로 작전을 세우고 기다리다가 동학군 10만여 명이 운봉을 향해 출진하여 선봉대가 여원치에 올라왔을 때, 그가 장정들에게 명하여 돌을 굴리고 화살을 쏘고 해서 동학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 후 동학군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고 한다.

426)옥부(玉斧):도끼의 미칭(美稱)으로, 옛날에 장수가 출정할 때에 임금이 장수에게 부월(斧鉞), 즉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내려 주어 병권의 위임을 표시했던 데서, 전하여 여기서는 초토사(招討使)나 관찰사 또한 한 방면(方面)의 병권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도끼를 말한 것이다.

427)독안룡(獨眼龍):애꾸눈으로 무용(武勇)이 아주 뛰어난 사람을 이르는데, 독안은 애꾸눈을 말한다. 여기서는 곧 일목장군(一目將軍)으로 호칭되었던 박봉양을 가리킨다. 구오대사(舊五代史) 권25 당서(唐書) 무황기(武皇紀)에 의하면 “무황이 이미 장안을 수습하여 군세가 매우 강성하자, 제후들의 군대가 모두 그를 두려워했던바, 무황은 한쪽 눈이 애꾸였으므로, 당시에 그를 독안룡이라 호칭했다.[武皇旣收長安 軍勢甚雄 諸侯之師皆畏之 武皇一目微眇 故其時號爲獨眼龍]”라고 하였다.

428)교룡산성(蛟龍山城):183쪽 주225 참조.

429)불랑기포(佛狼機炮):명대(明代)에 포르투칼과 에스파냐 사람을 모두 불랑기(佛狼機) 사람으로 범칭했던 데서, 불랑기포는 곧 포르투칼과 에스파냐 사람이 제조한 화포를 말한다.

430)강회(江淮)의 보장(保障):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당시 원군(援軍)이 단절된 수양성(睢陽城)에 적병(賊兵)이 물밀듯이 쳐들어오자, 수양성을 지키고 있던 여러 군중이 모두 동쪽으로 달아날 것을 의논했으나, 이때 진원 영(眞源令) 장순(張巡)이 수양 태수(睢陽太守) 허원(許遠)과 함께 의논하기를 “수양성은 강회 지역의 보루가 되는 곳이니, 만일 이곳을 버리고 떠난다면 적이 승승장구하여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강회 지역은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다.[睢陽江淮保障也 若棄之 賊乘勝鼓而南 江淮必亡]”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강회는 한 지방의 중요한 요새를 의미한다. 그 당시 장순과 허원은 끝까지 수양성을 굳게 지키다가 끝내는 적에게 성이 함락되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新唐書 卷192 忠義列傳 張巡

431)도필리(刀筆吏):가장 하급 관리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여기서는 아전 출신인 박봉양(朴鳳陽)을 가리킨다.

432)연와(碾渦):물레방아를 돌리는 물줄기가 쏟아져 소용돌이를 이룬 곳을 말한다.

433) 대승암(大乘菴):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의 선암사에 있는 암자이다.

434) 연 상인(演上人):금봉 병연(錦峰秉演, 1869~1916)으로, 선암사 대승암에 주석하였으며 매천, 이건창 등과도 교유를 맺었다.

435) 친구가……주자:북송(北宋) 시대 고승(高僧) 불인 선사(佛印禪師) 요원(了元)은 소식(蘇軾)의 방외우(方外友)였는데, 하루는 소식이 불인을 방문하자, 불인이 말하기를 “학림학사(翰林學士)가 왕림하셨는데, 앉을 곳이 없으니 어찌한단 말이오.” 하므로 소식이 장난삼아 “잠시 화상(和尙)의 몸을 빌려서 선상(禪牀)으로 삼고 싶소이다.” 하니, 불인이 말하기를, “이 산승(山僧)이 한 마디 전어(轉語)를 발하여 공(公)이 즉시 답변을 하면 산승이 공의 요청을 따를 것이고, 공이 답변을 하지 못하면 이 산승의 요청에 따라서 공의 옥대(玉帶)를 풀어 산문(山門)을 지키도록 하겠소.” 하므로 소식이 이를 승낙하자, 불인이 “산승의 몸은 본래 공허(空虛)한 것인데, 학사는 어디에 앉으려는 것이오.”라고 물었으나, 소식이 얼른 답변을 하지 못하자 불인이 이에 시자(侍者)를 불러 이르기를, “이 옥대를 가져다가 산문을 지키도록 하라.”라고 하므로, 소식이 마침내 웃으면서 옥대를 내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소식의 이옥대시원장로원이납군상보(以玉帶施元長老元以衲裙相報) 시에 “병든 몸에 옥대 띠기도 감당키 어려웠는데, 둔근이 따라서 활촉 같은 기봉에 떨어졌네. 나를 가희원에서 바리때를 들고 걸식케 하려고, 짐짓 운산의 옛 납의를 주는구려.[病骨難堪玉帶圍 鈍根仍落箭鋒機 欲敎乞食歌姬院 故與雲山舊衲衣]”라고 하였다. 東坡詩集註 卷21 여기서는 아마 대승암의 연 상인과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과의 사이에 있었던 모종의 일을 가지고 소식의 고사에 빗대서 말한 것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436)복지(福地)에서……여겼다더군:복지와 낭환(琅環)은 모두 전설에 나오는 선경(仙境) 이름이다. 청(淸)나라 손승택(孫承澤)의 춘명몽여록(春明夢餘錄)에 의하면 “진(晉)의 장화(張華)가 어떤 사람과 함께 어느 곳에 이르자, 큰 바위 가운데서 갑자기 문이 열리므로, 그가 장화를 인도하여 문 안으로 두어 걸음을 걸어 들어가 보니, 거기가 바로 별천지로 궁실이 높다랗게 서 있고, 한 집을 들어가 보니 서책들이 서가에 가득하였다.……장화가 그곳 지명을 물어보니, 낭환복지라고 대답했다.[共至一處 大石中忽然有門 引華入數步 則別有天地 宮室嵯峨 引入一室中 陳書滿架……華問地名 對曰琅環福地也]”라고 하였다.

437)손끝의……꿈이었거니와:달 도장이란 곧 달은 하나지만 천 강에 다 같이 비춰 준다는 ‘월인천강(月印千江)’에서 온 말로, 이는 바로 부처의 자비가 모든 중생에게 다 같이 베풀어진다는 선리(禪理)를 말한 것이고, 손가락 끝[指端]이란 곧 부처가 중생에게 불법을 교도하는 데 비유한 것으로, 능엄경(楞嚴經) 권2에 “가령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다른 사람에게 보이거든 저 사람은 이 사람의 손가락을 인해서 응당 달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람의 손가락만 보고서 그것을 달의 본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어찌 달 바퀴만 잃어버릴 뿐이겠는가. 아까 본 손가락까지도 잃어버리게 된다.[如人以手指月示人 彼人因指 當應看月 若復觀指 以爲月體 此人豈唯亡失月輪 亦亡其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438)붓끝은……없네:연 상인(演上人)의 뛰어난 필력을 형용한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439)넓고……때로다:아득한 나의 회포란 곧 소식(蘇軾)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서 온 말이다. 전적벽부의 대략에 의하면 “임술년 가을 7월 16일에 소자가 손과 더불어 적벽 아래 배를 띄우고 노는데, 맑은 바람이 서서히 불어오고 물결이 일지 않는지라, 술잔을 들어 손에게 권하면서 명월시를 외우고 요조장을 노래하였다. 이윽고 달이 동산 위에서 솟아 나와, 북두와 견우의 사이를 배회할 제, 흰 이슬은 강물 위에 가득 내리고, 강물의 빛은 하늘과 맞닿았다.……이에 술을 마시고 즐거움이 고조에 달하여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앗대로, 맑은 물결을 치며 달빛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도다. 아득한 나의 회포여, 하늘 저 끝에 있는 미인을 그리도다.’라고 했다.[壬戌之秋七月旣望 蘇子與客 泛舟遊於赤壁之下 淸風徐來 水波不興 擧酒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白露橫江 水光接天……於是飮酒樂甚 扣舷而歌之 歌曰 桂棹兮蘭槳 擊空明兮泝流光 渺渺兮余懷 望美人兮天一方]” 하였다.

440)가득……때말일세:소옹(邵雍)의 청야음(淸夜吟)에 “달은 하늘 한가운데 이르고, 바람은 물 위에 살살 부누나. 이러한 맑고 깨끗한 의미를, 아마도 아는 사람이 적으리.[月到天心處 風來水面時 一般淸意味 料得少人知]”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곧 물과 달이 서로 비치는 맑은 정경을 서술한 것으로, 마치 광풍제월(光風霽月)처럼 가슴속이 깨끗하여 조금의 사욕도 없이 조용히 도에 합치되는 경지를 의미한다.

441)두꺼비도……모습이:달 속에 두꺼비가 있다느니, 옥토끼가 있다느니 하는 전설을 두고 한 말이다.

442)옥탁반(玉琢盤):옥을 쪼아 다듬어서 만든 쟁반을 말한다.

1)을미고(乙未稿):1895년(고종32), 매천의 나이 41세 때 지은 시고이다.

2) 나무……닿았네:유종원(柳宗元)의 우청지강도(雨晴至江渡) 시에 의하면 “나루터에 물 빠져 마을 오솔길이 생기고, 뗏목들은 어지러이 높은 나무에 걸려 있네.[渡頭水落村徑成 撩亂浮槎在高樹]”라고 하였다. 柳河東集 卷43

3)이정직(李定稷):1841〜1910. 전북 김제(金堤) 출신으로 자는 형오(馨五), 호는 석정(石亭)이다. 실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문(詩文)과 글씨, 그림에도 모두 능했다고 한다. 저서에 석정집(石亭集)이 있다.

4)글씨는……있고:운연(雲煙)의 기운이란 구름이나 연기가 자유자재로 유동하는 것을 말하는데, 전하여 여기서는 필세(筆勢)의 자연스러움을 비유한 것이다.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의하면 “장욱은 석 잔 술에 초성으로 전해지는데, 왕공의 앞에서도 모자 벗어 이마를 드러내고, 종이에 붓 대고 휘두르면 구름 연기 같았네.[張旭三杯草聖傳 脫帽露頂王公前 揮毫落紙如雲煙]”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2

5)악양(岳陽):경남 진주(晉州)의 서쪽에 위치한 현명(縣名)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 현을 하동군(河東郡)에 예속시켰다.

6)묘호(泖湖):춘추 시대 오(吳)의 송강현(松江縣) 서쪽에 위치한 호수 이름인데, 상, 중, 하의 삼묘(三泖)로 일컬어지는바, 물이 많고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다. 송(宋)나라 하원(何薳)의 춘저기문(春渚紀聞)에 의하면 “이른바 삼묘라는 곳을 지금 보니, 모두 넓고 큰 호수로, 봄, 여름에는 연과 부들이 널리 퍼져 있어 물 위에 서늘한 바람이 일어나고, 가을, 겨울에는 갈대숲이 무성하고 고기를 낚을 만한 섬들이 줄 이어 있어 강호의 썰렁한 풍경은 아예 없으니, 이른바 겨울에는 다습고 여름에는 서늘하다는 것이 정히 그 아름다움의 극치라 하겠다.[今觀所謂三泖 皆漫水巨浸 春夏則荷蒲演迤 水風生涼 秋冬則葭葦藂蘙 魚嶼相望 初無江湖凄凜之色 所謂冬暖夏涼者 正盡其美]”라고 하였다.

7)삼고(三高):춘추 시대 월(越)의 범려(范蠡), 진(晉)나라 때 장한(張翰), 당(唐)나라 때 육귀몽(陸龜蒙)이 모두 오(吳) 지방 사람이므로, 송(宋)나라 때에 오강(吳江) 사람들이 이 세 사람을 고사(高士)라 하여 삼고사(三高祠)를 세우고 그들을 제사했던 데서 온 말이다. 齊東野語 卷7

8) 삽암(鍤巖):하동군 섬진강 변에 있는 바위 이름으로, 고려 시대의 은사(隱士) 한유한(韓惟漢)의 전설이 얽혀 있다. 조식(曹植)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의하면 “별안간에 악양현(岳陽縣)을 지나는데, 강가에 삽암이란 것이 있었으니, 바로 녹사(錄事) 한유한이 살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가 곧 망할 것을 알고는 처자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살다가 조정에서 대비원 녹사(大悲院錄事)로 부르자, 어느 날 밤에 집을 떠나 도망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모른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南冥集 卷2

9)한유한(韓惟漢):고려 인종(仁宗) 때 사람으로, 처음에 벼슬을 하다가 이자겸(李資謙)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는 것을 보고는 장차 화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가족을 데리고 악양현(岳陽縣)에 숨어 살았는데, 그 후 조정에서 그의 재주를 아껴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찾았으나 그는 끝내 숨어 버리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세인(世人)들은 그가 신선이 되어 갔다고도 하는데, 후일 지리산(智異山)의 화엄사(華嚴寺), 연곡사(燕谷寺), 쌍계사(雙磎寺) 등지에서 그의 자취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 그가 일찍이 최치원(崔致遠)의 도를 이어받아 삼신산(三神山)으로 알려진 금강산(金剛山), 지리산, 한라산(漢挐山)을 두루 다니면서 신선을 따라 노닐었다고도 한다.

10)고운(孤雲)의 취적대(吹笛臺):고운은 신라 말기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의 자인데, 취적대는 최치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어느 곳에 있었는지를 전혀 상고할 길이 없다.

11)계림(鷄林) 황엽(黃葉):계림은 신라의 고도(古都)인 경주(慶州)의 고호이고, 황엽은 누렇게 단풍 든 나뭇잎을 가리킨 것으로, 전하여 여기서는 신라가 곧 망할 것을 예측한 말이다. 최치원이 일찍이 고려의 왕건(王建)에게 보낸 서한(書翰)에 “계림은 시들어 가는 누런 잎이요, 개경의 송악산은 푸른 소나무다.[鷄林黃葉 鵠嶺靑松]”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곧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창건될 것을 미리 예언한 것이었다. 三國史記 卷46 崔致遠列傳

12)선인(仙人)이……있길래:여기서 선인은 곧 최치원을 가리킨다. 그가 일찍이 난세(亂世)를 피하여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은거했던 까닭에 후인(後人)들이 그를 유선(儒仙)이라 일컬었던 데서 온 말이다.

13)일두(一蠹):조선 전기의 유학자인 정여창(鄭汝昌)의 호이다. 자는 백욱(伯勗),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성종(成宗) 연간에 진사시(進士試) 및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 안음 현감(安陰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뒤에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의 일파로 몰려 종성(鍾城)에 유배되었고, 죽은 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중종(中宗) 때 우의정에 추증되고, 광해군(光海君) 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14)풍포(風蒲) 한 절구(絶句):일두 정여창의 저술로 유일하게 전해 오는 절구 한 수를 가리킨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냇버들 바람에 나부껴 가벼이 한들거려라, 사월 달 화개동에 벌써 보리 가을이 되었네. 두류산 천만 봉을 두루 다 유람하고, 외론 배 띄우러 또 큰 강가로 내려가노라.[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洲]”

15)한두(寒蠹):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 정여창을 합칭한 말이다. 김굉필의 자는 사옹(蓑翁),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소학(小學)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일컬었다. 성종 연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뒤에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南部參奉),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감찰(監察) 등을 역임하고, 연산군 초기에 형조 좌랑에 이르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일파로 몰려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었으며, 1504년 갑자사화 때 사사(賜死)되었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일두 정여창에 대해서는 위의 주13 참조.

16)폐조(廢朝):여기서는 광해군 시대를 가리킨다.

17)오현(五賢):동방(東方)의 오현으로 불리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을 가리키는데, 1610년(광해군2)에 위의 다섯 사람을 문묘에 종사(從祀)하였다.

18)남파(南坡):당시 하동(河東) 출신의 문사(文士)였던 성혜영(成惠永)의 호이다.

19)방초(芳草)에……잊으랴만: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조식(曹植)의 삭풍(朔風) 시에 “그대가 방초 같은 나를 좋아하거니, 그대가 베푼 은혜를 어찌 잊을쏜가.[子好芳草 豈忘爾貽]”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文選 卷29

20)벽라(薜蘿):벽려(薜荔) 넝쿨과 여라(女蘿) 넝쿨을 합칭한 말인데, 옛날에 은자(隱者)들이 흔히 이것으로 옷을 지어 입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은자나 고사(高士)의 처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21)순채……와서:진대(晉代)의 문인(文人) 장한(張翰)이 일찍이 낙양(洛陽)에 들어가 동조연(東曹掾)으로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을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자기 고향인 강동(江東) 오중(吳中)의 순챗국[蓴羹]과 농어회[鱸鱠]를 생각하면서 “인생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귀중하거늘, 어찌 수천 리 타관에서 벼슬하여 명작을 구하겠는가.[人生貴得適志 何能羈宦數千里 以要名爵乎]” 하고, 즉시 수레를 명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張翰여기서는 단지 고향이 그리워 찾아간 것을 의미한다.

22)환선정(喚仙亭):전라남도 순천(順天) 죽도봉공원(竹島峯公園)에 있는 정자이다. 이 정자는 1543년(중종38)에 부사(府使) 심통원(沈通源)이 처음으로 지금의 순천시 동천(東川) 가에 건립하여 무예를 연습하는 강무정(講武亭)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소실되었다가 1614년(광해군6)에 부사 유순익(柳舜翼)이 중건(重建)하였고, 1826년(순조26)에 부사 김정균(金鼎均)이 중수(重修)하였으며, 1869년(고종6)에 부사 성이호(成彛鎬)가 다시 중수했다고 한다.

23)지봉(芝峯)의 원운(原韻):지봉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이수광(李睟光)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는 선조(宣祖) 연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거쳐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문(詩文)에도 능하였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여기서 원운이란 곧 이수광이 일찍이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재직할 때에 환선정을 두고 읊은 시를 가리키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귤나무 숲속에 화려한 처마 우뚝하여라, 호산의 뛰어난 경치를 모두 다 겸하였네. 맑은 가을날 바라보인 건 천 봉우리 구름이요, 긴긴 밤 읊조리는 정은 한 주렴 달이로다. 대숲 빗소리 침상 흔드니 절로 거문고 소리요, 물풀 바람이 낯을 불어라 술은 더 마셔야겠네. 봉래 영주를 가리켜 보여라 아마 멀지 않나 봐, 자라 등 위의 푸른 영산이 뾰족하게 드러났네.[萬橘叢中出畫簷 湖山勝槪儘相兼 淸秋望眼雲千岫 永夜吟情月一簾 竹雨撼牀琴自響 蘋風吹面酒須添 蓬瀛指點知無遠 鼇背靈峯露碧尖]” 芝峯集 卷18 喚仙亭次韻

24)달빛……희롱하네:여기서 선녀는 곧 상고 시대 복희씨(伏羲氏)의 딸 복비(宓妃)가 낙수(洛水)에서 익사하여 수신(水神)이 되었다는 전설에 의하여 바로 그를 가리킨 것으로, 조식(曹植)이 지은 낙신부(洛神賦)의 대략에 “그 형체가 경쾌함은 마치 놀란 기러기 같고, 유순함은 마치 헤엄치는 용 같고, 빛난 광채는 가을 국화 같고, 무성함은 봄 소나무 같은데, 어렴풋함은 마치 가벼운 구름이 달빛을 가린 듯도 하고, 흩날림은 마치 실바람에 눈발이 돌아 날리는 듯도 하네. 멀리서 바라보면 깨끗함이 마치 아침놀 속의 태양 같고,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곱기가 마치 맑은 물결 위에 나온 연꽃 같도다.……물결 헤치며 사뿐사뿐 거닐면 비단 버선에 안개 먼지가 일도다.[其形也 翩若驚鴻 婉若游龍 榮耀秋菊 華茂春松 仿佛兮若輕雲之蔽月 飄搖兮若流風之回雪 遠而望之 皎若太陽升朝霞 迫而察之 灼若芙蕖出淥波……凌波微步 羅襪生塵]”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후세에는 이 고사에 의거하여 흔히 미인 또는 연화(蓮花), 수선화 등의 자태를 신녀의 사뿐한 몸매와 고운 자태에 비유하는바, 여기서 매천 또한 연화나 수선화를 이렇게 형용한 듯하다. 당대(唐代)의 시인 온정균(溫庭筠)의 연화(蓮花) 시에 의하면 “응당 낙수 신녀의 물결 위의 버선일 터라, 지금까지도 연꽃술에 향진이 묻어 있네.[應爲洛神波上襪 至今蓮蘂有香塵]”라고 하였고, 또 송대(宋代)의 시인 황정견(黃庭堅)의 수선화에 대한 시에는 “물결 헤쳐 가는 선녀 버선에 물안개 일어라, 초승달 아래 물 위를 사뿐사뿐 거니는구나.[凌波仙子生塵襪 水上輕盈步微月]”라고 하였다.

25) 첨산(尖山):순천(順天), 여수(麗水), 고흥(高興) 등지에 모두 이런 산명(山名)이 나오기는 하나, 여기서는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26)옥부용(玉芙蓉):본래는 백련(白蓮)의 별칭으로 쓰이고, 설봉(雪峰)을 형용하기도 하는바, 여기서는 역시 벽부용(碧芙蓉)과 같이 산봉(山峰)의 비유로 쓰였다.

27)인간의……되는데:이백(李白)의 추포음(秋浦吟)에 의하면 “백발이 삼천 길이나 된 것은, 시름 때문에 이렇게 긴 거라네.[白髮三千丈 緣愁似箇長]”라고 하였다. 李太白集 卷74

28)봉래산(蓬萊山):동해(東海) 가운데에 있다는 선경(仙境)인 방장(方丈), 영주(瀛洲)와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29)귤호(橘戶):술이기(述異記)에 의하면 “월 지방 사람들은 귤유원이 많아서 해마다 귤세를 내므로, 이들을 등귤호라 한다.[越人多橘柚園 歲出橘稅 謂橙橘戶]”라고 하였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귤나무가 있는 집을 가리켜 이렇게 일컬은 듯도 하고, 귤중지락(橘中之樂)의 고사에 의거해서 조그마한 집의 미칭으로 쓰인 말인 듯도 하나 자세하지 않다.

30)어찌……말겠는가:봉전(葑田)은 호택(湖澤) 가운데 오랜 세월 줄 뿌리가 많이 모이고 쌓인 곳이 부화(腐化)하여 진흙이 되고 이어 물이 말라서 밭이 된 곳을 말한다. 10쌍(雙)의 쌍은 곧 전토(田土)의 단위를 말한 것으로, 철경록(輟耕錄)에 의하면, 전(田) 1쌍을 4묘(畝)라 하였고, 신당서(新唐書) 권222상 남만열전(南蠻列傳) 남조(南詔)에 의하면, 전 1쌍을 5묘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10쌍은 40묘 또는 50묘 정도에 해당한다.

31)동파입극도(東坡笠屐圖):원(元)나라 때 문인(文人) 정원우(鄭元祐)의 그림이다. 청(淸)나라의 문인 송락(宋犖)의 제동파입극도(題東坡笠屐圖)에 의하면,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일찍이 경주 별가(瓊州別駕)로 폄척되어 있을 때, 한번은 그곳의 문인 여자운(黎子雲) 형제를 방문하러 가던 도중에 비를 만나서 급히 한 농가(農家)에 들어가 대삿갓과 나막신을 빌려 착용하였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하였다. 西陂類稿 卷28 조선 말기의 화가인 소치(小癡) 허유(許維)도 동파입극도를 모방하여 그린 그림이 전한다.

32)임종(林宗)의……사모했었지:임종은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 곽태(郭太)의 자이다. 곽태는 명망이 당시에 우뚝했는데, 하루는 그가 도중에 비를 만나서 두건이 비에 젖어 한쪽 귀퉁이가 꺾여 겹쳐진 일이 있었던바, 당시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본받고자 일부러 두건의 한쪽 귀퉁이를 꺾어서 쓰곤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33)백일(白日)에 승천한 천사(天師):천사는 옛날 도술이 있는 사람에 대한 존칭인바, 여기서는 후한(後漢) 때 오두미도(五斗米道)의 창시자인 장도릉(張道陵)을 가리킨다. 장도릉이 죽은 뒤 그의 손자 장로(張魯)가 그 도를 계속 전해 왔는데, 그를 신봉하는 자들이 그를 천사라 칭했다. 장천사비승도(張天師飛昇圖)라는 그림이 전하기도 한다.

34)무릉도원(武陵桃源):선경(仙境)을 말한다.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의하면, 동진(東晉)의 태원(太元) 연간에 무릉(武陵)의 한 어부가 일찍이 시내를 따라 한없이 올라가다가 갑자기 도화림(桃花林)이 찬란한 선경을 만나 그곳에 들어가서, 일찍이 선대(先代)에 진(秦)나라 때의 난리를 피해 처자를 거느리고 그곳에 들어와 대대로 그곳에 살고 있다는 사람들을 만나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수일 후에 그곳을 떠나서 배를 얻어 타고 다시 길을 되돌아왔는데, 그 후로는 다시 그 도화림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陶淵明集 卷6

35)영위(令威)는……했었지:한(漢)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일찍이 영허산(靈虛山)에 들어가 선술(仙術)을 배우고 뒤에 학으로 변화하여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성문(城門)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았는데, 한 소년이 활을 가지고 그를 쏘려 하자, 그 학이 날아올라 공중을 배회하면서 말하기를 “새여 새여 정영위가,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이제야 돌아왔네. 성곽은 예전 같은데 사람은 그때 사람 아니어라, 어이해 신선 안 배우고 무덤만 즐비한고.[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冢纍纍]”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36)석양(夕陽)이……제:서희(徐熙)는 남당(南唐) 시대 명화가(名畫家)로 특히 화죽(花竹)을 잘 그렸다고 한다. 전하여 여기서 ‘서희의 그림 속’이라고 한 것은 곧 그곳의 아름다운 산수 경치를 서희의 그림에 견주어 말한 것이다.

37)선암사(仙巖寺):전라남도 승주군(昇州郡) 조계산(曹溪山)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라 진평왕 3년(542)에 아도 화상(阿度和尙)이 처음 창건하여 비로암(毘盧庵)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고, 또 신라 헌강왕 5년(875)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여 선암사라 불렀다는 설이 있는데, 이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丈)이나 되고 면(面)이 편평한 큰 바위가 있는바, 이 바위를 옛날 신선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 하여 선암사라는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38)등림절(登臨節):9월 9일, 즉 중양절(重陽節)을 가리킨다. 등림(登臨)이라고 한 연유는, 옛날 풍속에 9월 9일에는 사람들이 붉은 주머니에 수유(茱萸)를 담아서 팔뚝에 걸고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菊花酒)를 마시어 재액을 소멸시켰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머니에 수유를 담은 데에 관한 내력은 선인(仙人) 비장방(費長房)의 고사에서 온 것으로, 그 사실은 대략 다음과 같다. 후한(後漢) 때 환경(桓景)이라는 사람이 일찍이 선인 비장방에게 가서 유학(遊學)했는데, 하루는 비장방이 환경에게 이르기를 “9월 9일 너의 집에 재앙이 있을 것이니, 급히 가서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붉은 주머니에 수유를 담아서 팔뚝에 걸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국화주를 마시게 하면 이 재앙을 면할 것이다.”라고 하므로, 환경이 그의 말에 따라 9월 9일에 과연 온 가족을 거느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다가 저물녘에 내려와 보니, 닭과 개, 소와 양 등의 가축만 일시에 다 죽어 버리고 사람들은 끝내 무사했다고 한다.

39)초지(初地):불교의 용어로, 수행 과정 십계위(十階位) 가운데 제일계위(第一階位)를 말하는데, 사원(寺院)의 별칭으로도 쓰인다.

40)가을을……마음인데:여기서 말한 초인(楚人)이란 바로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문인(文人) 송옥(宋玉)을 가리킨다. 그는 충신(忠臣) 굴원(屈原)의 제자이기도 했는데, 일찍이 가을을 슬퍼하는 뜻으로 구변(九辯)을 노래했던바, 그 대략에 “슬프다, 가을의 기후 됨이여. 쓸쓸하여라, 초목은 낙엽이 져서 쇠하였도다. 처창하여라, 흡사 타향에 있는 듯하도다. 산에 올라 물을 굽어봄이여, 돌아가는 이를 보내도다.[悲哉秋之爲氣也 蕭瑟兮 草木搖落而變衰 憭慄兮 若在遠行 登山臨水兮 送將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楚辭 卷6

41) 세상……졸고:설록(雪鹿)은 흰 사슴, 즉 백록(白鹿)과 같은 뜻으로, 당(唐)나라 때 은사(隱士) 이발(李渤)이 일찍이 그의 형 이섭(李涉)과 함께 여산(廬山) 오로봉(五老峯) 아래 은거하며 글을 읽으면서 흰 사슴 한 마리를 길렀던 데서 온 말인데, 이로 인하여 이곳을 백록동(白鹿洞)이라 부르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백록선생(白鹿先生)이라 칭하였으며, 남당(南唐) 때 이곳에 학관(學館)을 세워 여산국학(廬山國學)이라 칭했던바, 송대(宋代)에 이르러 다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으로 개칭하였다. 宋史 卷429 道學列傳 朱熹 전하여 여기서는 곧 은사의 처소를 의미한다.

42) 하늘에……내려앉네:상금(霜禽)은 곧 백구(白鷗), 백로(白鷺) 등을 가리킨 것으로, 이들이 내려앉았다는 것은 역시 은자(隱者)의 처소를 의미한다. 맹교(孟郊)의 입덕신거(立德新居) 시에 의하면 “상금들도 각각 제 짝을 부르나니, 내 또한 우리 무리를 사랑하노라.[霜禽各嘯侶 吾亦愛吾曹]” 하였다.

43)번천(樊川)이……때요:번천은 만당(晩唐)의 시인 두목(杜牧)의 호이다. 두목의 구일제산등고(九日齊山登高) 시에 “강은 가을 그림자 머금고 기러기 처음 날 제, 손과 함께 술병 들고 산 중턱에 올랐네. 속세에선 담소 나눌 이를 만나기 어려우니, 모름지기 국화나 머리 가득 꽂고 돌아가리. 곤드레 취하는 걸로 좋은 명절에 보답할 뿐, 높은 데 올라서 석양을 한탄할 것 없고말고. 고금 이래로 인생사가 이와 같을 뿐인데, 어찌 우산 탄식의 눈물로 옷깃 적실 것 있으랴.[江涵秋影雁初飛 與客携壺上翠微 塵世難逢開口笑 菊花須揷滿頭歸 但將酩酊酬佳節 不用登臨恨落暉 古往今來只如此 牛山何必獨霑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樊川詩集 卷3

44)가도(賈島)의……깊숙하네:가도는 중당(中唐)의 시인으로 승려가 되었다가 뒤에 환속(還俗)했는데, 그가 하루는 나귀를 타고 도성(都城) 거리를 나갔다가,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이라는 시구를 짓고는 혼자 손짓을 하면서 퇴(推) 자를 쓸까, 고(敲) 자를 쓸까 하고 수없이 고심하다가, 마침 당시 경조윤(京兆尹)이던 한유(韓愈)의 행차를 만나서 한유에게 그 사실을 갖추 말하자, 한유가 그에게 고 자가 더 좋다고 말해 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가도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곧 시를 짓는 데 있어 제자리에 꼭 알맞은 글자를 놓으려고 고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45)송광사(松廣寺):전라남도 승주군(昇州郡) 조계산(曹溪山)에 있는 사찰이다. 대길상사(大吉祥寺), 수선사(修禪寺)라고도 불리었던 유서 깊은 사찰로 유명하다.

46)산은……힘입었네:본래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였던 것을 고려 희종(熙宗)이 조계산 수선사로 개칭하여 친히 편액(扁額)을 써서 내려보냈던 데서 온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송광사라는 명칭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47)화엄누각(華嚴樓閣):화엄은 본디 불교어(佛敎語)로는 화엄종(華嚴宗)의 대승경계(大乘境界) 또는 화엄경(華嚴經)의 약칭으로도 쓰이나, 여기서는 단지 화려하고 장엄함을 의미한다.

48)양허(楊許)의……오르니:벽락(碧落)은 청천(靑天)을 가리키고, 양허는 진(晉)나라 때 선인(仙人)이며 명필이기도 했던 양희(楊羲)와 허매(許邁)를 합칭한 말인데, 이들은 일찍이 서로 신명지교(神明之交)를 맺고 구용산(句容山)에 은거하였고, 뒤에 득도(得道)하여 승천(昇天)했다는 전설에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곧 승려를 선인에 비유하여 승려와의 동행을 의미한다.

49)선정(禪定):불가에서 승려가 행하는 참선(參禪)을 달리 이른 말이다. 참선에 들어가는 것을 입정(入定)이라 하고, 참선을 끝내고 나오는 것을 출정(出定)이라 한다.

50)목서(木犀):계수나무의 별칭이라고 하나 자세하지 않다.

51)철수(鐵樹)의……피누나:철수는 식물(植物) 이름으로, 잎은 향포(香蒲)와 같고 자색(紫色)을 띤 나무인데, 소철(蘇鐵)이라고도 하고, 해송(海松)이라고도 하나 자세하지 않다. 다만 이 나무는 원래 열대 식물인데, 꽃도 피지 않고 열매도 맺지 않으므로, 선가(禪家)에서는 이것을 무심(無心), 무작(無作)의 묘용(妙用)에 비유하여 사려와 분별을 단절하는 수행의 법칙으로 삼는다고 한다. 속전등록(續傳燈錄) 혹암사체선사(或庵師體禪師) 조에 의하면 “순희 기해년 8월 초하룻날, 선사가 경미한 질병을 앓는 가운데 글을 써서 군수 증공과 결별하고, 그날 저녁 한밤중에 이르러서는 게송을 써서 대중과 하직하여 이르기를 ‘철수에 꽃이 피고, 수탉이 알을 낳으리라. 72년 뒤에는, 요람의 끈이 끊어지리라.’라고 했다.[淳熙己亥八月朔示微疾 染翰別郡守曾公 逮夜半書偈辭衆曰 鐵樹開花 雄鷄生卵 七十二年 搖籃繩斷]” 하였다. 칠전(七殿)은 칠성전(七星殿)을 가리키는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52) 만겁(萬劫)의……있거니:만겁의 재란, 불교의 용어인 겁회(劫灰)에서 온 말로, 이 세계가 괴멸(壞滅)할 때에 일어난다는 큰 불, 즉 겁화(劫火)의 타고 남은 재를 말하는바, 전하여 만겁이라고 한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한 등(燈)은 곧 불법(佛法)을 가리킨다.

53) 경운(擎雲):1852〜1936. 근대의 승려로 속성은 김씨(金氏), 경운은 법명이다. 경남 웅천(熊川) 출신으로 17세에 출가하여 연곡사(鷰谷寺)에서 환월(幻月)의 제자가 되었다. 후에 선암사 대승강원(大乘講院)에서 강의하였다. 금봉 병연(錦峰秉演)의 스승이기도 하다.

54) 등불이 연이어져:불법(佛法)이 계속 전해지고 있음을 뜻한다. 불법은 마치 등불과 같아서 어둠을 밝혀 준다 하여, 불법을 등불에 비유한다.

55)공중(空中)에……꽂고:석장(錫杖)은 스님의 지팡이를 말한다. 석장을 날린다는 것은 곧 옛날 고승(高僧) 은봉(隱峰)이 오대산(五臺山)을 유람하고 회서(淮西)로 나가서는 석장을 던져 공중으로 날아서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승려들이 사방으로 행각(行脚)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천근(泉根)은 샘의 근원을 말한 것으로, 당대(唐代)의 고승 태전(太顚)이 일찍이 행각하던 도중에 석장을 꽂아 세워 놓은 자리에서 샘물을 얻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데, 이로 인하여 또한 그 샘을 탁석천(卓錫泉)이라 했다고 한다. 明一統志 卷80

56)환생하거든……찾아내겠지:진(晉)나라의 명장(名將) 양호(羊祜)가 5세 때에 한번은 자기 유모(乳母)로 하여금 자기가 가지고 놀던 금가락지를 가져오라고 하자, 유모가 말하기를 “너한테는 일찍이 금가락지가 없었단다.” 하니, 양호가 즉시 이웃의 이씨(李氏) 집으로 가서 동쪽 담장 곁의 뽕나무 속에서 금가락지를 찾아내자, 그 주인이 놀라며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죽은 아이가 잃어버린 물건인데, 왜 가져가느냐?” 하므로, 유모가 그 사실을 자세히 말하자, 이씨는 매우 슬퍼하였고, 당시 사람들은 그 일을 이상히 여겨, 이씨의 아들이 바로 양호의 전신(前身)이었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57)상평(向平):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로 자가 자평(子平)인 상장(向長)을 가리킨다. 그는 일찍이 노자(老子)주역(周易)에 모두 정통했는데, 젊어서부터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일찍이 말하기를 “남혼여가를 마치고 나면 집안일은 끊어 버리고 다시 상관하지 않겠다.[男女嫁娶旣畢 敕斷家事勿相關]” 하더니, 광무제(光武帝) 연간에 남혼여가를 마치고는 과연 친구들과 함께 오악(五嶽) 등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고 끝내 신선이 되어 갔다고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向長 여기서는 단지 매천이 상장처럼 하고 싶은 심정을 피력한 것이다. 

58)구호(口號):시(詩)를 즉석에서 읊조려 이루는 것을 말한다.

59)원공(遠公)이……주었네:원공은 동진(東晉) 시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고승(高僧) 혜원법사(慧遠法師)를 가리키는데, 그가 일찍이 당시의 명유(名儒)인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노닐다가 그들을 전송할 때, 그들과 서로 의기가 투합한 나머지 이야기에 마음이 팔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항상 손을 전송할 때 호계(虎溪)를 넘어가지 않았던 경계를 깜빡 잊고 호계를 건너가서 범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세 사람이 서로 크게 웃었다[三笑]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書畫題跋記 續書畫題跋記 卷2여기서는 곧 승(僧) 경운(擎雲)을 혜원법사에 비유하고, 매천 자신을 도연명에 비유하여 그와 서로 의기가 투합했음을 의미한다.

60) 소를……싶어라:송(宋)나라 시인 반랑(潘閬)의 과화산(過華山) 시에 “하늘에 우뚝 솟은 세 봉우리가 너무 좋아서, 머리 돌려 읊으며 바라보다 나귀를 거꾸로 탔네. 옆 사람이 크게 웃지만 그야 웃거나 말거나, 나는 끝내 이곳에 집 옮겨 살고만 싶구나.[高愛三峯揷太虛 掉頭吟望倒騎驢 旁人大笑徒他笑 終擬移家向此居]”라고 하였다. 逍遙集

61)사촌(沙村):동복현(同福縣)의 사평촌(沙坪村)을 가리킨 듯하다.

62)이완(二阮)의……은거하는데:이완은 위진(魏晉) 시대 완적(阮籍)과 그의 조카인 완함(阮咸)을 합칭한 말인데, 이들 숙질(叔姪)은 모두 당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다. 죽림칠현은 곧 완적을 비롯하여 혜강(嵇康), 산도(山濤), 상수(向秀), 완함, 왕융(王戎), 유령(劉伶)의 7인으로, 이들은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모두 예속(禮俗)에 얽매이지 않고 호방 광달(豪放曠達)하여 노장(老莊)의 학설을 말하기 좋아하고 술을 즐겨 마시면서 항상 죽림(竹林) 사이에 모여 놀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죽림칠현이라고 호칭했다. 전하여 여기서는 아마 상대방이 숙질간에 죽림 사이에 은거하고 지낸 것을 두고 죽림칠현에 비유한 듯하다.

63)사문(駟門)엔……않고:사문은 고거사마(高車駟馬)가 출입할 만한 대문을 가리키고, 등산 나막신이란 곧 남조(南朝) 때의 문인(文人)으로 풍류가 고상했던 사영운(謝靈運)은 특히 깊고 험준한 명산을 오르기 좋아하여 매양 밀칠한 나막신[蠟屐]을 신고 등산했던 데서 온 말이다.

64)학권(鶴券):학전권(鶴田券)의 약칭으로 쓰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명(明)나라 때 시인 손일원(孫一元)이 일찍이 무림(武林)의 남병산(南屛山)에 우거하면서 항상 학(鶴) 한 마리를 길렀는데, 당시 병과 급사중(兵科給事中)으로 있던 그의 친구 허상경(許相卿)이 삼묘(三畝)의 전토를 마련하여 해마다 여기서 수확한 양식을 남병산으로 보내서 학의 양식에 충당하도록 하고 증서[券]를 만들어 주면서 “태백산인의 학전이다.[太白山人鶴田]”라고 했다 한다. 태백산인은 손일원의 자호이다. 浙江通志 卷280

65)적벽(赤壁):동복현(同福縣)에 있는 지명인 듯하다. 이곳에는 특히 예로부터 적벽정(赤壁亭), 물염정(勿染亭), 창랑정(滄浪亭) 등이 유명하다.

66)천상(天上)의 옥당(玉堂):천상은 조정을 가리킨 말이고, 옥당은 조선 시대 홍문관(弘文館)을 달리 일컫던 말로, 전하여 홍문관의 여러 학사(學士)들을 의미한다.

67)정운 별관(停雲別館):명대(明代)의 문인으로 시문서화(詩文書畫)에 모두 뛰어났던 문징명(文徵明)의 서실(書室) 이름이다. 그의 서실은 정운관(停雲館), 옥란당(玉蘭堂), 졸정원(拙政園) 등 여러 가지 명칭이 있는데, 원명사류초(元明事類鈔)에 의하면, 문징명의 정운관을 일러 “정운(停雲)은 별관(別館)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전하여 여기서는 아마 매천의 친구의 서실을 문징명의 서실에 빗대서 말한 듯하다.

68)조 도사 규당(趙都事圭堂):도사는 관직명으로, 즉 도사를 지낸 사람으로 호가 규당인 조씨 아무를 가리킨 듯한데, 그의 이름은 알 수가 없다.

69)동자(童子)는……나오누나:당대(唐代)의 시인 가도(賈島)의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 시에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으니, 스승이 약 캐러 가셨다 하네. 다만 이 산 안에 있으련만, 구름이 깊어 간 곳을 알 수 없구나.[松下問童子 言師採藥去 只在此山中 雲深不知處]”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70)범(凡)……이때:범 자를 쓴다는 것은 곧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이 여안(呂安)과 매우 친하여 서로 생각만 나면 천리 먼 길이라도 즉시 달려가 만나곤 했는데, 한번은 여안이 혜강의 집을 찾았을 때, 마침 혜강은 출타 중이어서 그의 형인 혜희(嵇喜)가 나와서 여안을 맞았으나, 여안은 들어가지 않고 문 위에다 봉(鳳) 자만 써 놓고 가 버렸던 데서 온 말인데, 봉 자를 파자(破字)하면 범조(凡鳥)가 되므로, 즉 혜희를 범인(凡人)이란 뜻으로 우롱한 것이었다. 世說新語 簡傲전하여 후세에는 단지 친구의 집을 방문하는 뜻으로도 흔히 쓰인다.

71)목송홍(目送鴻):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혜강의 증수재입군(贈秀才入軍) 시에 “눈으로는 가는 기러기를 보내고, 손으로는 다섯 줄 거문고를 타네.[目送歸鴻 手揮五弦]”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文選 卷24전하여 이연자득(怡然自得)한 정취를 의미한다.

72)김농암(金農巖):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창협(金昌協)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 또는 삼주(三洲),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농암집(農巖集),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73)이곳……했으리:부(賦) 짓던 신선이란 곧 이백(李白)의 다음으로 적선(謫仙)이란 호칭을 얻은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소식이 일찍이 황주 단련부사(黃州團練副使)로 폄척되어 있던 중, 임술년 가을 7월 16일과 같은 해 10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적벽(赤壁) 아래 강에서 객들과 함께 선유(船遊)를 하면서 풍류를 만끽했던바,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전적벽부(前赤壁賦)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었던 데서 온 말이다. 전하여 여기서는 곧 동복현의 적벽정(赤壁亭) 주변의 경치가 황주(皇州)의 적벽 경치보다 낫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74)기고(夔皐)와……틀렸거니와:기고는 요순(堯舜) 시대의 현신(賢臣)이었던 법관(法官) 고요(皐陶)와 악관(樂官) 기(夔)를 합칭한 말이고, 옥촉(玉燭)은 사시(四時)의 기(氣)가 조화를 잘 이루는 것을 이르는 말로,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시자(尸子)에 “사시의 기가 조화를 이루어 두루 비춤을 바르게 하는 것을 옥촉이라 한다.[四氣和 正光照 此之謂玉燭]”라고 하였다. 전하여 여기서는 매천 자신이 태평성대를 만나서 훌륭한 정치에 참여해 보지 못함을 한탄한 것이다.

75)금단(金丹)을……늦었네:금단은 도가(道家)에서 제조하는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을 말한 것으로, 구전단(九轉丹) 또는 구전환단(九轉還丹)이라고도 하는바, 금단을 이룬다는 것은 곧 신선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갈도(葛陶)는 남조(南朝) 시대 양(梁)의 선인(仙人) 도홍경(陶弘景)과 진(晉)나라 때의 갈홍(葛洪)을 합칭한 말이다.

76)백빈(白蘋):하얗게 꽃을 피운 부평초를 가리킨다.

77)서글퍼라……어려워: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이란 곧 일이 지난 뒤에 남은 흔적을 비유하는데, 또 눈이 녹으면 바로 사라지듯이, 모든 사물이 그와 같이 덧없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소식(蘇軾)의 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澠池懷舊) 시에 “인생이 가는 곳마다 그 무엇과 같을꼬, 응당 눈 위에 발자국 남긴 기러기 같으리. 눈 진창에 우연히 발자국을 남겼지만, 기러기 날아가면 어찌 다시 동서를 알리오.[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詩集 卷3

78)애써……읊조리노라:당대(唐代)의 문인 노연양(盧延讓)의 고음(苦吟) 시에 “시 읊어 한 글자를 안배하느라, 두어 가닥 수염을 꼬아 끊었네.[吟安一個字 撚斷數莖鬚]”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수염을 꼰다는 것은 곧 시구(詩句)를 퇴고(推敲)하면서 괴로이 읊조리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79) 영미(潁尾):영수(潁水)의 하류를 말한다. 영수는 요(堯) 임금 때 은사 허유(許由)가 은거하던 곳이기도 한데, 소식(蘇軾)이 영주(潁州)에 있으면서 지은 시에 영미란 말을 자주 쓰기도 했다. 전하여 여기서는 매천의 친구가 사는 곳을 영미에 빗대서 한 말이다.

80)심양(潯陽)에……같구려:심양은 동진(東晉) 시대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의 고향이다. 도잠은 특히 국화를 좋아하였고, 또 술을 매우 즐겨 마셨던바, 그의 음주(飮酒) 시에 의하면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면서, 하염없이 남산을 바라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고 하였다. 陶淵明集 卷3국화도 그 사람 같다는 것은 곧 국화 또한 도잠 같다는 뜻으로, 전하여 여기서는 곧 매천의 친구를 도잠에 빗대서 한 말이다.

81)고등(孤藤):등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가리킨다.

82)근래에……그것일세:단풍 숲 천 봉우리의 가을 경치를 마냥 괴로이 읊조리느라 몸이 초췌해졌다는 뜻으로 한 말인 듯하다.

83) 가을……많거니와:매천 자신의 노쇠해 가는 모습을 말한 것이다.

84) 뜬……있으랴:이것은 곧 오공(公)의 처지를 말한 것이다.

85)공문(空門):일반적으로 불법(佛法)을 일컫는다.

86)금상(禽向):전한(前漢) 말기의 유생(儒生)으로 왕망(王莽) 때에 이르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금경(禽慶)과 같은 시기의 은사(隱士) 상장(向長)을 합칭한 말이다. 상장이 일찍이 남혼여가(男婚女嫁)를 다 마치고는 그의 친구인 금경과 함께 오악 명산(五嶽名山)을 두루 유람했는데, 끝내 그들의 죽은 곳을 알 수 없다고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向長상장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316쪽 주57 참조.

87)웅황(雄黃):광물(鑛物)의 일종으로 귤황색(橘黃色)을 띤다.

88)성명(姓名)은……들어갔거니와:기구전(耆舊傳)은 옛날 각 지방 원로(元老)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으로, 역대에 걸쳐 경구기구전(京口耆舊傳), 양양기구전(襄陽耆舊傳), 금리기구전(錦里耆舊傳) 등 많은 기구전이 전한다. 전하여 여기서는 곧 죽은 이를 원로로 추앙하여 이른 말이다.

89)강호(江湖)엔……못하겠네:소미성(少微星)은 일명 처사성(處士星)이라고도 한다. 송 휘종(宋徽宗) 때 처사 강지(江贄)가 일찍이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은거하였는데, 한번은 태사(太史)가 소미성이 나타났다고 아뢴 결과, 조서(詔書)에 의거하여 특별히 강지를 유일(遺逸)로 천거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으므로, 그를 소미선생(少微先生)이라 사호(賜號)하였다. 四庫提要 卷48전하여 여기서는 또한 죽은 이를 처사로 추앙하여 이른 말이다.

90)유당(酉堂):윤종균(尹鍾均, 1861〜1941)의 호이다. 윤종균은 전남 순천(順天) 출생으로 자는 태경(泰卿)이고, 벼슬은 남원부 주사(南原府主事)를 지냈다고 한다. 저서에 유당시집(酉堂詩集)이 있다.

91)황계(荒鷄)……나니:황계는 삼경(三更) 전에 우는 닭을 가리키는데, 본디 그 닭 소리를 불길한 징조로 보았던바, 진(晉)나라 때 강개(慷慨)한 지절(志節)로 명성이 높았던 조적(祖逖)이 일찍이 자기 친구 유곤(劉琨)과 함께 사주 주부(司州主簿)가 되었을 때, 유곤과 한 이불을 덮고 자다가 한밤중에 때 아닌 닭 우는 소리를 듣고는 유곤을 발로 차서 깨우며 말하기를 “이것은 나쁜 소리가 아니다.[此非惡聲也]” 하고, 인하여 일어나서 춤을 덩실덩실 추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62 祖逖列傳전하여 큰 뜻을 품은 선비가 때를 당하여 세상을 맑히려는 호장(豪壯)한 기개를 분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92)해진……어렵네:전국 시대 유세가(游說家)로 특히 합종설(合縱說)을 제창했던 소진(蘇秦)이 일찍이 진(秦)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고자 진왕(秦王)에게 열 번이나 글을 올려 설득하려 했지만, 그의 말이 먹혀들지 않아서 벼슬을 얻지 못한 채, 검은 담비갖옷이 다 해지고, 여비로 가져간 황금 백 근도 다 떨어져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의 형수, 제수, 처첩(妻妾) 등 가족들이 모두 그를 냉대했다가, 그가 뒤에 연(燕), 조(趙), 한(韓), 위(魏), 제(齊), 초(楚) 육국(六國)의 왕들을 합종설로 유세하여 종약(從約)을 체결하고 나서 육국의 상인(相印)을 한 몸에 차고 왕만큼 호화로운 행차로 고향인 낙양(洛陽)을 지날 적에는 그의 가족들이 그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행차 앞에 엎드려 있으므로, 그가 형수에게 묻기를 “어째서 전일에는 거만하게 대해 놓고 오늘은 공손해졌는가.[何前倨而後恭也]”라고 하자, 그 형수가 얼굴을 가리고 대답하기를 “계자의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見季子位高而金多也]” 하니, 소진이 탄식하기를 “가령 나에게 낙양 근교의 토지 두 이랑만 있었다면 내가 어찌 오늘날 육국의 상인을 찰 수 있었겠는가.[且使我有洛陽負郭田二頃 吾豈能佩六國相印乎]”라고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69 蘇秦列傳여기서는 상대방이 고향에 머물지 못하고 미관말직이나마 얻어 부임하는 것을 소진의 일에 빗대서 한 말이다.

93)오늘……기뻐하거니와:후한(後漢) 때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모의(毛義)가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었으므로, 일찍이 부(府)에서 내려보낸 수령 임명장을 받고는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희색(喜色)이 만면(滿面)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39

94)예로부터……싫었었지:타관살이의 괴로움을 뜻한다.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왕찬(王粲)이 일찍이 동탁(董卓)의 난리를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하고 있을 적에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 고향을 생각하면서 진퇴 위구(進退危懼)의 정을 서술하여 지은 등루부(登樓賦)에 “참으로 아름답지만 내 고향이 아니거니, 어찌 족히 조금이나마 머무를 수 있으랴.[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留]”라고 하였는데, 두보(杜甫)의 장사송이십일함(長沙送李十一銜) 시에서 왕찬의 고사를 인용하여 “상방에서 신 주던 게 멀리 부끄러워라, 끝내 내 고향 아니라 누각 오르기도 싫구려.[遠愧尙方曾賜履 竟非吾土倦登樓]”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23

95)굳이……아니라:운수(雲樹)는 두보의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 시에 “위수 북쪽엔 봄 하늘의 나무요, 강 동쪽엔 해 저문 구름이로다. 어느 때나 한 동이 술을 두고서, 우리 함께 글을 조용히 논해 볼꼬.[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1전하여 운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곧 멀리 있는 친구를 서로 그리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96)소천(小川):왕사찬(王師瓚, 1841〜1912)의 호이다. 전남 구례(求禮) 출신으로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의 셋째 아들인데, 그는 특히 고체시(古體詩)에 능해서 매천으로부터 찬사를 들었고, 그 지방에서는 매천과 더불어 당대에 시명(詩名)을 떨쳤다고 한다.

97)칠실(漆室):아주 깜깜한 방을 이른다. 또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읍명(邑名)이기도 한데, 노 목공(魯穆公) 때에 임금은 늙고 태자는 어려서 국사(國事)가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칠실에 사는 한 소녀가 기둥을 기대고 슬피 휘파람을 불면서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근심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列女傳 漆室女전하여 한미한 신분으로 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을 비유한다.

98)육혼(陸渾)의……시작되었지:육혼은 옛 지명(地名)으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 일대를 가리키는데, 춘추 시대에 진(秦), 진(晉) 두 나라가 일찍이 그 땅에 살게 했던 융(戎)을 다시 꾀어서 이천(伊川)으로 옮겨 살게 하고 그곳을 육혼이라 불렀다고 하는바, 춘추 시대에 그들은 자주 중국을 침구(侵寇)하여 많이 괴롭히기도 했지만, 끝내는 중국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전하여 여기서는 당시 우리나라가 오래전부터 왜적(倭賊) 등 여러 외세의 침략을 받아 온 것을 비유한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99)병신고(丙申稿):1896년(고종33), 매천의 나이 42세 때 지은 시고이다.

100)꾀꼬리는……놀리고:생황(笙簧)의 혀란 곧 시경 교언(巧言)에 “생황의 혀 같은 공교로운 말은, 낯짝이 두껍기 때문이란다.[巧言如簧 顔之厚矣]”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본래는 소인(小人)들의 교묘하게 잘 꾸며 대는 참언(讒言)을 비유한 것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꾀꼬리의 아주 고운 노랫소리를 생황의 혀에 빗대서 한 말이다.

101)복사꽃……없고:진(晉)나라 때 문인(文人) 반악(潘岳)이 일찍이 하양 영(河陽令)으로 있을 적에 복사꽃, 오얏꽃 나무를 온 고을에 두루 심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하양 온 고을이 꽃이다.[河陽一縣花]”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白氏六帖 縣令

102)맥우(麥雨):보리가 익을 무렵에 내리는 비를 말한다.

103)동원(東垣):금(金)나라 때 의가(醫家)였던 이고(李杲)를 동원노인(東垣老人) 또는 동원선생(東垣先生)이라 칭했던 데서, 전하여 의원(醫員)을 가리킨다.

104)의당……해야겠네:소미(少微)는 별자리 이름으로 일명 처사성(處士星)으로 일컫기도 한다. 여기서는 곧 약포(藥鋪)의 주인을 처사에 빗대서 한 말이다.

105)봉주(鳳洲) 왕 선생(王先生):호가 봉주인 왕사각(王師覺, 1836〜1895)을 가리킨다. 왕사각은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의 장남으로, 자는 임지(任之)이다. 일찍이 학행(學行)이 훌륭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나서 중년에 서울로 과거(科擧)를 보러 갔다가 어지러운 시국을 보고는 과거를 단념하고 돌아왔다. 그 후 백운산(白雲山) 만수동(萬壽洞)으로 이거(移居)했다가 다시 오봉산(五峯山)으로 이거하여 후학(後學)을 길렀는데, 매천도 이때에 그에게 사사(師事)했다.

106)봉성(鳳城):전라남도 구례(求禮)의 고호이다.

107)왕씨(王氏)의……있었네:청상(靑箱)은 서적을 쟁여 두는 상자를 말한다. 유송(劉宋) 시대 왕표지(王彪之)가 박문 다식(博聞多識)하고 조정의 의절(儀節)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로부터 집안 대대로 그에 관한 서적들을 상자에 담아 전하였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왕씨의 가학(家學)이 대대로 전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108)양한(兩漢)의……했거니와:양한은 전한(前漢), 후한(後漢)을 합칭한 말이다. 양한 시대의 큰 유자(儒者)들은 대부분 많은 문도(門徒)를 교수(敎授)했던바, 여기서는 곧 왕사각 또한 문도를 많이 가르쳤으므로, 그를 양한의 유자에 빗대서 한 말이다.

109)삼당(三唐)의……공(工)했지:삼당은 명(明)나라 고정례(高廷禮)가 처음 당시(唐詩)를 기간별로 나누어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의 사당(四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후인(後人)들이 중당을 성당이나 만당에 붙여 삼당으로 일컬은 데서 온 말이다. 그리고 궁(窮)하여 공했다는 것은 송대(宋代)의 시인 매요신(梅堯臣)은 일찍이 하남 주부(河南主簿), 도관 원외랑(都官員外郞) 등 말직(末職)만 조금 지냈을 뿐, 일생을 몹시 빈궁하게 살았으므로, 그의 시우(詩友)였던 구양수(歐陽脩)가 일찍이 매요신의 시집(詩集)에 쓴 서(序)에서 “대체로 세상에 전해 오는 시들은 대부분이 옛날 곤궁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다.……대개 곤궁할수록 시가 더욱 공교해지는 것이니, 그렇다면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곤궁한 사람이어야만 시가 공교해지는 것이로다.[蓋世所傳詩者 多出於古窮人之辭也……蓋兪窮則兪工 然則非詩之能窮人 殆窮者而後工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왕사각도 곤궁하여 시를 잘했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110)함장(函丈):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만일 음식 대접이나 하려고 청한 손이 아니거든, 자리를 펼 때에 자리와 자리의 사이를 한 길 정도가 되게 한다.[若非飮食之客 則布席 席間函丈]”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함장은 곧 서로 묻고 배우는 사생(師生)의 사이를 말하고, 또 스승의 별칭으로 흔히 쓰인다.

111)만사(萬事)는……눈물이요:청파(淸灞)는 장안(長安)의 남교(南郊)로 흐르는 파수(灞水)를 가리킨 것으로, 당나라 때의 한유(韓愈)의 현재유감(縣齋有感) 시에 “서책을 싸 들고 도성을 떠나서, 눈물을 머금고 청파를 건넜었네.[懷書出皇都 銜淚渡淸灞]”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 시의 내용은 곧 한유가 일찍이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합격은 하였으나 쉬 보임이 되지 않자, 당시의 재상에게 무려 세 차례나 서신을 올려서 보임을 요청해 보았지만 끝내 들어 주지 않으므로, 마침내 경사(京師)를 떠나서 하양(河陽)으로 돌아갔던 일을 회상한 것이다. 韓昌黎集 卷2전하여 여기서는 역시 죽은 이 또한 운수가 기박하여 세상에 쓰이지 못했던 것을 한유에 빗대서 한 말이다.

112)세상은……하직했구려:망천도(輞川圖)는 본디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산수화에도 아주 뛰어났던 왕유(王維)가 일찍이 망천(輞川)에 별장을 짓고 망천의 20곳의 승경(勝景)을 배경으로 하여 그린 그림이다. 전하여 여기서는 죽은 이가 평생 동안 세상에 나가지 않고 산수 사이에서 조용히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음을 의미한다.

113)면지(牛眠地):장사 지낼 길지(吉地)를 말한다. 진(晉)나라 도간(陶侃)이 미천했을 때 친상(親喪)을 당하여 장사를 준비하던 중, 갑자기 집에 있던 소를 잃어버려 간 곳을 알 수 없었는데, 그때 만난 한 노인이 도간에게 이르기를 “앞 산등성이에서 보니 소 한 마리가 산기슭에서 자고 있는데, 그 땅에 장사를 지내면 대신의 지위에 오를 것이다.[前岡見一牛眠山汙中 其地若葬 位極人臣矣]” 하므로, 도간이 마침내 그 소를 찾아서 소가 잠자던 곳에 장사를 지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58 周訪列傳

114)오골(傲骨)에……높직하구려:오골은 세상을 경시하여 조금도 남에게 굽히지 않는 거만한 풍채(風采)를 이른다. 부당(斧堂)은 봉분(封墳)을 이르는 말로,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의하면,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옛날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보건대, 봉분하는 것을 마치 마루처럼 쌓아 올린 것이 있고……도끼날처럼 위가 좁게 쌓아 올린 것도 있었으니, 나는 도끼처럼 하는 것을 따르겠다.’ 하셨으니, 도끼날처럼 하는 것은 세속에서 이른 바 마렵봉이라고 하는 것이다.[昔者 夫子言之曰 吾見封之若堂者矣……見若斧者矣 從若斧者焉 馬鬣封之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15)재귀(才鬼):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양(梁)나라 때 도홍경(陶弘景)이 일찍이 양 무제(梁武帝)에게 글씨를 논하여 올린 계(啓)에서 “매양 재귀가 되는 것이 또한 의당 완둔한 신선보다 낫다고 여깁니다.[每以爲得作才鬼 亦當勝於頑仙矣]”라고 하였다. 당(唐)나라 때의 천재 시인 이하(李賀)가 죽은 뒤에 그를 재귀라 일컫기도 하였다.

116)애오라지……하고파라:초혼(招魂)은 넋을 부른다는 뜻으로,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충신(忠臣)인 굴원(屈原)의 제자 송옥(宋玉)이 스승 굴원의 넋을 부르는 뜻으로 초혼을 지었던 데서 온 말이다. 이소(離騷)는 굴원이 지은 글로 즉 굴원을 가리킨다. 전하여 여기서는 매천 또한 스승을 위해 송옥처럼 초혼을 하고 싶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117)용성(龍城):전라북도 남원(南原)의 고호이다.

118)백겸산 관찰(白兼山觀察):남원부 관찰사(南原府觀察使) 백낙륜(白樂倫)이다. 겸산은 그의 호이다. 백낙륜은 이 밖에도 순천 부사(順天府使), 각 도(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매천의 시우(詩友)였다.

119)한……봄이로다:감당(甘棠)은 팥배나무를 가리킨다. 시경 감당에 “무성한 저 감당나무 가지를, 갈기지 말고 베지도 말라. 우리 소백이 쉬시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곧 소공(召公)이 남국(南國)을 순행(巡行)하면서 문왕(文王)의 정사를 편 데 대하여 그곳 백성들이 소공의 덕을 추모하여 부른 노래이므로, 전하여 감당을 말한 것은 곧 지방관의 선정(善政)을 의미하는바, 여기서는 곧 당시 남원부 관찰사로 있던 백낙륜의 선정을 칭찬하여 이른 말이다.

120)비를 청하는:대본에는 ‘訂雨’로 되어 있는데, 해석이 불가능하여 우선 비를 구한다는 ‘請雨’의 뜻으로 번역해 두고 독자(讀者)의 밝은 눈을 기다리는 바이다.

121)천추(千秋)의……걸상도:서유(徐孺)는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로 자가 유자(孺子)인 서치(徐穉)를 가리키는데, 역시 당대의 고사였던 예장 태수(豫章太守) 진번(陳蕃)은 본디 빈객을 전혀 접대하지 않았으나, 다만 서치가 찾아오면 특별히 한  걸상을 내려다가 그를 정중히 접대하고, 그가 떠난 뒤에는 다시 그 걸상을 걸어 두곤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서유의 걸상이란 곧 특별한 예우에 비유한다.

122)만일……여겨:북해(北海)는 후한 때의 학자로 일찍이 북해 상(北海相)을 지낸 공융(孔融)을 가리키는데, 그는 본디 선비를 좋아하고 후진들을 교도하기 좋아하여 빈객이 항상 문에 가득했던바, 일찍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자리에는 빈객이 항상 가득하고, 동이에는 술이 항상 떨어지지만 않으면 나는 근심이 없겠다.[坐上客恒滿 樽中酒不空 吾無憂矣]” 했다. 그리고 동산(東山)은 동진(東晉)의 명신(名臣)으로 일찍이 조정의 부름에 전혀 응하지 않고 동산에 은거했던 사안(謝安)을 가리키는데, 그는 특히 당대에 풍류와 아량이 높기로 유명했으므로, 그가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있을 적에 모든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안석이 나가려고 하지 않으니, 장차 이 창생들을 어찌한단 말인가.[安石不肯出 將如蒼生何]”라고 했는데, 과연 뒤에 사안이 40세가 넘어서야 벼슬길에 나가서 정토 대도독(征討大都督)이 되어 부견(苻堅)의 백만 대군(大軍)을 격파하였고, 뒤에 벼슬이 태보(太保)에 이르고 건창현공(建昌縣公)에 봉해졌다. 안석(安石)은 사안의 자이다. 後漢書 卷70 孔融列傳 晉書 卷79 謝安列傳여기서는 역시 상대방을 공융, 사안 같은 인물로 추앙하여 이른 말이다.

123)오래전부터……기울였고:제금시(題襟詩)란, 당대(唐代)의 문인(文人) 단성식(段成式)이 일찍이 한수(漢水) 가의 양양(襄陽)에 퇴거(退居)하면서 온정균(溫庭筠), 여지고(余知古) 등과 함께 늘 시를 지어서 서로 창화(唱和)하여 회포를 풀곤 했던바, 그 시를 한상제금집(漢上題襟集)이라 일렀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제금시를 지었다는 것은 곧 시회(詩會)를 의미하고, 백하(白下)는 금릉(金陵)에 있었던 백하정(白下亭)을 가리킨 것으로, 이곳은 옛날 금릉의 문사(文士)들이 많이 회집(會集)했던 곳으로 알려졌는바, 이백(李白)의 시집에도 백하정에 관한 시가 여러 편 보인다. 전하여 여기서는 상대방의 시회의 풍류를 한상제금시(漢上題襟詩) 또는 백하정의 풍류에 빗대서 이른 말인 듯하다.

124)갑옷……없다마다:무인(武人)의 일에는 전혀 종사해 본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125)칼……좋아졌고:한 선제(漢宣帝) 때에 공수(龔遂)가 발해 태수(渤海太守)로 부임하여 보니, 그곳 백성들 중에 도검(刀劍)을 휴대하고 다니는 자들이 있으므로, 그들에게 검을 팔아 소를 사고[賣劍買牛], 도를 팔아 송아지를 사도록 하고[賣刀買犢], 말하기를 “어찌하여 소를 휴대하고 송아지를 차고 다니느냐?[何爲帶牛佩犢]” 하고는 농사를 적극 권장하여 그곳 백성들의 생활이 부유해지고 송사(訟事)가 멈추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89 循吏傳 龔遂여기서는 상대방이 지방을 잘 다스리고 있음을 공수에 빗대서 한 말이다.

126)학(鶴)과……한가롭네:송대(宋代)의 문신 조변(趙抃)이 일찍이 성도 전운사(成都轉運使)로 부임할 적에 몸에 딸린 것이라고는 거문고 한 장과 학 한 마리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학과 거문고를 짝했다는 것은 곧 청렴한 지방관을 의미한다. 宋史 卷316 趙抃列傳

127)후대(後代)에……있으랴:난릉 절창(蘭陵絶唱)은 또 난정 절창(蘭亭絶唱)이라고도 하는데, 즉 회계(會稽) 산음현(山陰縣) 난정(蘭亭)의 뛰어난 시가(詩歌)를 의미하는바, 당대(唐代)의 시인 원진(元稹)이 일찍이 절동 관찰사(浙東觀察使)로 부임해 있을 적에 회계 고을의 산수가 매우 빼어난 데다 그의 막료들은 모두 당시의 문사(文士)였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경호(鏡湖), 진망(秦望) 지역을 매월 서너 차례씩 유람하면서 읊조린 시가 매우 많았고, 그중에서도 부사(副使)인 두공(竇鞏)은 시명(詩名)이 더욱 높아서 매양 원진과 서로 창수(唱酬)한 것이 가장 많았으므로, 후세까지도 그들의 시문을 ‘난정 절창’이라고 일컬은 데서 온 말이다. 舊唐書 卷166 元稹列傳전하여 여기서는 남원부 관찰사 백낙륜의 막료로서 역시 시재(詩才)가 뛰어난 유당(酉堂) 윤종균(尹鍾均)을 원진의 부사 두공에 빗대서 한 말로서, 소년 막부(幕府)란 바로 윤종균을 가리킨 것이다. 원문의 ‘하반(何攀)’은 인명(人名)으로도 볼 수 있을 듯하나, 여기서는 걸맞지 않은 듯하다. 하반은 진(晉)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왕준(王濬)의 막하(幕下)에서 별가(別駕), 참군(參軍) 등을 역임하면서 유능한 막료로 칭찬받았고, 그 후 정위평(廷尉平)으로 있을 때는 의옥(疑獄)을 잘 판결하기로 또한 명성이 높았다. 晉書 卷45 何攀列傳독자의 견해를 돕기 위해 밝혀 두는 바이다.

128)경병(競病):험운(險韻), 즉 시 짓기 어려운 운(韻)을 말한다. 양 무제(梁武帝) 때의 장군 조경종(曹景宗)이 일찍이 위(魏)나라를 격파하고 개선했을 적에 무제가 화광전(華光殿)에서 연회를 베풀고 연구(聯句)를 지으면서 심약(沈約)으로 하여금 운자를 나누어 주게 했던바, 조경종 차례에 와서는 운자를 이미 다 사용하고 ‘경병’ 두 자만 남았는데, 조경종이 즉시 붓을 잡고 시 한 수를 대번에 이루어 “떠날 때는 아녀자들이 슬퍼했는데, 돌아오니 피리 북소리 다퉈 울리네. 길 가는 사람에게 시험 삼아 묻노니, 내가 저 곽거병과 어떠한가.[去時兒女悲 歸來笳鼓競 借問行路人 何如霍去病]”라고 하자, 무제 및 군신(群臣)들이 모두 경탄하여 마지않았다 한다. 南史 卷55 曹景宗列傳

129)규원(葵園):정병조(鄭丙朝, 1863〜1945)의 호이다. 자는 관경(寬卿),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고종(高宗) 연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동궁 시종관(東宮侍從官)이 되었으며, 한일합방 후에는 중추원(中樞院)의 촉탁으로 조선사(朝鮮史) 편찬에 참여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130)관중(管仲) 상앙(商鞅):관중은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현상(賢相)으로 환공(桓公)을 도와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전력하여, 환공으로 하여금 제후를 규합하고 천하를 바로잡아 다스려서 오패(五霸)의 으뜸이 되게 하였다. 상앙은 전국 시대의 정치가로 일찍이 진 효공(秦孝公)의 정승이 되어 법령을 고치고 부강책을 써서 치적을 크게 올림으로써, 끝내 진 효공으로 하여금 당대의 패주(霸主)가 되게 하였다.

131)반악(潘岳) 육기(陸機):이들은 모두 서진(西晉) 시대의 문학가로 당대에 명성이 천하에 드높았다.

132)가을……없어:기러기는 본디 소식을 전하는 의미로 쓰이는바, 전하여 여기서는 곧 친구에게 소식을 전할 길이 없음을 의미한다.

133)하인에게……지어지고:두보(杜甫)의 입주행증서산검찰사두시어(入奏行贈西山檢察使竇侍御)에 의하면 “강가의 꽃이 지기 전에 성도로 돌아오거든, 완화계 가의 늙은이를 즐겨 찾아 줄런가. 그대 위해 술을 사거든 눈앞 가득 살 것이고, 하인에겐 쌀밥 주고 말에겐 푸른 꼴 주리라.[江花未落還成都 肯訪浣花老翁無 爲君酤酒滿眼酤 與奴白飯馬靑蒭]”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0

134)언론(言論)……오래요:통가(通家)는 흔히 사우(師友) 간의 세의(世誼) 또는 인친(姻親) 간을 말한다. 태중(太中)은 후한 때의 학자로 일찍이 북해 상(北海相)을 지내고 뒤에 벼슬이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른 공융(孔融)을 가리킨 것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났던바, 그가 10세 때 아버지를 따라 경사(京師)에 갔다가 당시 천하제일의 고사(高士)로 명성이 드높던 하남 윤(河南尹) 이응(李膺)의 위인을 보고자 하여 그를 찾아가서 서로 통가의 세의라고 자칭하므로, 이응이, 그대의 부조(父祖)와 우리 선대(先代)와 서로 통가한 적이 있느냐고 묻자, 공융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우리 선군 공자께서는 당신의 선인 이 노군과 덕과 의리가 서로 같으면서 서로 사우가 되었으니, 저와 당신과는 누대 동안 서로 통가의 세의가 있는 것입니다.[然 先君孔子 與君先人李老君 同德比義而相師友 則融與君累世通家也]” 하니, 온 좌중(座中)이 감탄해 마지않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70 孔融列傳여기서는 곧 우산초당의 주인과 매천의 사이가 사우 관계나 인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인 듯하다.

135)계자(季子)의……많구려:벼슬아치는 아니라도 생활은 요족함을 의미한다. 계자는 전국 시대 종횡가(從橫家)였던 소진(蘇秦)의 자이다. 소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334쪽 주92 참조.

136)원숭이……우는구나:남제(南齊) 때 공치규(孔稚圭)가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일찍이 북산에 은거하다가 변절하여 벼슬길에 나간 주옹(周顒)을 몹시 책망하는 뜻을 서술했던바, 그 대략에 “혜초 장막은 텅 비어 밤 학이 원망하고, 산중 사람이 떠나감에 새벽 원숭이가 놀란다.[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원숭이와 학을 말한 것은 흔히 은자(隱者)의 처소를 의미한다.

137)대대로……본받고:중엄(仲淹)은 북송(北宋) 시대의 명신(名臣)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키는바, 그가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있을 때 조정으로부터 받은 녹봉으로 비옥한 전지(田地) 1000묘(畝)를 마련하여 이것을 의전택(義田宅)이라 호칭하고, 여기에서 수확한 것으로 가난한 종족들을 구제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송매정(松梅亭)의 주인 또한 일찍이 그와 같이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138)사람……하네:명성(明誠)은 송대(宋代)의 문인(文人) 조명성(趙明誠)을 가리킨다. 자는 덕보(德父)이고 벼슬은 지호주군주사(知湖州軍州事)를 지냈다. 그가 일찍이 자기 집에 소장한 삼대(三代) 시대의 이기(彝器)와 한당(漢唐) 시대 이후의 석각(石刻)들을 모아서 구양수(歐陽脩)가 편찬한 집고록(集古錄)의 예를 모방하여 금석록(金石錄)을 편찬했던 데서 온 말이다. 전하여 여기서는 송매정의 주인 또한 금석문자(金石文字)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139)텅……끊어졌고:거문고 줄이 끊어졌다는 것은 곧 지기지우(知己之友)가 죽었음을 의미하고, 아내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지기지우를 지칭한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지기지우에 관한 고사는 다음과 같다. 옛날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고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는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백아가 일찍이 높은 산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가 듣고 말하기를 “좋다, 높다란 것이 마치 태산과 같구나.[善哉 峨峨兮若泰山]” 하였고, 또 백아가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가 또 말하기를 “좋다, 광대한 것이 마치 강하와 같구나.[善哉 洋洋兮若江河]” 하여, 백아가 생각한 것은 종자기가 반드시 다 알아들었으므로, 종자기가 죽은 뒤로는 백아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마침내 거문고를 부숴 버리고 종신토록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

140)달빛……나누나:철적(鐵笛)은 흔히 은자(隱者)나 고사(高士)가 불었던 젓대라고 전해 온다. 주희(朱熹)의 철적정서(鐵笛亭序)에 의하면 무이산(武夷山)에 사는 은자인 유군(劉君)이 “철적을 잘 불었는데, 구름을 뚫고 돌을 찢는 소리가 난다.[善吹鐵笛 有穿雲裂石之聲]”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9

141)일판향(一瓣香):향을 피우고 예불하듯이, 매우 경건한 마음으로 별인(別人)을 앙모하는 것을 말한다.

142)백구(白鷗)의 맹세:갈매기와 함께 수향(水鄕)에서 머물기로 맹세한다는 뜻으로, 전하여 속세를 떠나서 산수 좋은 곳에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143)황지(潢池) 농병(弄兵):황지는 본디 저수지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아주 협소한 땅을 비유하고, 농병은 제멋대로 군사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한 선제(漢宣帝) 때 발해군(渤海郡)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자주 일어나자, 선제가 공수(龔遂)를 발해 태수(渤海太守)로 삼고 그를 불러 이르기를 “발해가 황폐하고 어지러워져서 짐이 매우 걱정스러운데, 그대는 어떻게 도적을 지식시켜 짐의 뜻에 부응하려는가?[渤海廢亂 朕甚憂之 君欲何以息其盜賊 以稱朕意]” 하자, 공수가 대답하기를 “바닷가가 하도 멀어서 성왕의 풍화를 입지 못한 데다 그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있는데도 관리가 그들을 구휼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끝내 폐하의 적자들로 하여금 조그마한 땅에서 폐하의 군사를 움직에게 한 것일 뿐입니다.[海瀕遐遠 不霑聖化 其民困於飢寒而吏不恤 故使陛下赤子盜弄陛下之兵於潢池中耳]”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흔히 백성들의 반란을 가리킨다. 漢書 卷89 循吏傳 龔遂여기서는 바로 동학군(東學軍)의 군사 행동을 가리켜 한 말이다.

144)금양(金穰):풍년 들 조짐을 뜻한다. 태세성(太歲星)의 운행이 금(金), 즉 유궁(酉宮)에 이르렀을 때 풍년이 든다는 뜻으로, 사기(史記)27 천관서(天官書)에 “반드시 태세성이 있는 곳을 살펴야 한다. 태세성이 금에 있으면 풍년이 들고, 수에 있으면 상해를 입고, 목에 있으면 기근이 들고, 화에 있으면 한재가 든다.[必察太歲所在 在金穰 水毁 木饑 火旱]”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유궁은 서방(西方)에 해당한다.

145)안춘정 종학(安春艇鍾鶴):전남 보성(寶城)의 택촌(澤村) 사람 안종학을 가리킨다. 춘정은 그의 호인 듯한데, 또 지봉(支峯)이란 호가 있기도 하다.

146)농사할……훌륭하네:예기(禮記) 소의(少儀)에 “누가 사의 아들에 대해서 그 나이를 묻거든, 성인 이상일 경우에는 농사할 만하다 하고, 아직 어릴 경우에는 나뭇짐을 질 만하다고 하든가, 아직 나뭇짐을 질 만하지 못하다고 대답한다.[問士之子長幼 長則曰能耕矣 幼則曰能負薪 未能負薪]”라고 하였다.

147)박 장흥 헌양(朴長興憲陽):장흥 부사(長興府使) 박헌양(朴憲陽)을 말한다. 1894년(고종31) 12월 5일에 동학군(東學軍)이 장흥을 함락하고 부사 박헌양을 죽였다. 박헌양은 앞서 같은 해 7월에 부임했는데, 임지로 출발할 적에 친구가 만류하자, 박헌양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평일에 국록을 먹고 살다가 위란한 때라 하여 이를 기피하려고 해서야 되겠는가.[平日食國祿 可以危亂而規避乎]”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동학군이 장흥에 침입했는데, 장흥은 수비할 병력이 부족했으므로, 혹자가 그에게 도망갈 것을 권유했으나 듣지 않았다. 적당들이 이르자, 그는 조복(朝服)을 입고 인부(印符)를 차고 동헌(東軒)의 대청 위에 앉아서 적들을 큰 소리로 꾸짖자, 적들이 그를 끌어내어 쇠뇌를 쏘아 죽였다. 이때 그는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죽었다 한다. 梅泉野錄 卷2

148)호서(狐鼠) 같은 놈들:호서는 여우와 쥐를 이르는바, 본래는 사람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성 안에 사는 여우와 사당에 사는 쥐[城狐社鼠]’라는 고어(古語)에서 온 말로, 여우와 쥐는 흔히 임금 곁에서 알랑거리는 간소배(奸小輩)에 비유되는데, 전하여 여기서는 곧 위란한 때에 구차히 제 몸만 살기 위해 도망친 소인배들을 비유한 것이다.

149)무정(茂亭):정만조(鄭萬朝, 1858〜1936)의 호이다. 강위(姜瑋)의 문인(門人)으로 문장에 능했고, 글씨도 잘 썼다. 고종(高宗) 연간에 일찍이 교섭통상아문 주사(交涉通商衙門主事)가 되었고, 그 후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이후 예조 참의 등을 지내고, 한때 무고(誣告)를 받고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12년 만에 풀려 돌아와서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규장각 부제학(奎章閣副提學) 등을 거쳐 경학원 대제학(經學院大提學)에 이르렀다. 저서에 무정전고(茂亭全稿)가 있다.

150)복사(鵩舍):유배소(流配所)를 가리킨다. 한 문제(漢文帝) 때 태중대부(太中大夫) 가의(賈誼)가 일찍이 참소를 입어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폄척되어 나갔는데, 장사 지방은 본래 땅이 낮고 습기가 많다는 말을 진작 들었던 터라, 스스로 오래 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데다 집에 복조(鵩鳥)가 날아 들어오자, 그는 복조를 상서롭지 못한 새라고 여겨 불길한 생각에 복조부(鵩鳥賦)를 지어 스스로 위로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48 賈誼傳

151)경악(鯨鰐)도……흐려지누나:경악은 고래와 악어를 말한 것으로, 이것들이 바다에서 힘차게 유영(游泳)함으로 인해 바닷물이 흐려짐을 의미한다.

152)일부……해라:온돈(溫敦)은 온화하고 돈후함을 말한 것으로,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그 나라에 들어가 보면 그 나라의 가르침을 알 수 있다. 그 사람됨이 온화하고 돈후한 경우는 시의 가르침을 입은 것이다.[入其國 其敎可知也 其爲人也 溫柔敦厚 詩敎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經解

153)나는……존경한다네:백두음(白頭吟)은 본디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처(妻) 탁문군(卓文君)이 지은 가사이다. 사마상여가 일찍이 무릉(茂陵)의 처녀를 첩으로 들이려고 했을 때, 탁문군이 이 노래를 지어서 사마상여에게 주어 서로 헤어질 것을 결단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백두음을 짓지 않았다는 것은 곧 상대방이 친구 간의 교의(交誼)를 단절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154)소치(小癡):허유(許維, 1809〜1892)의 호이다. 조선 말기의 서화가로 자는 마힐(摩詰)이다. 전남 진도(珍島) 출신으로,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詩), 서(書), 화(畫)를 모두 잘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리었는데, 그림은 특히 묵죽(墨竹)을 잘 그렸고, 글씨는 김정희(金正喜)의 서체를 많이 따라서 썼다. 그가 만년에는 고향인 진도로 내려가서 운림산방(雲林山房)이라는 화실을 마련하고 작품 제작에 몰두했다고 한다.

155) 묵연권(墨緣卷):시문(詩文), 서화(書畫) 등 필묵(筆墨)이 서로 만난 인연이라는 뜻에서, 묵연권은 곧 서화권(書畫卷)을 의미하는바, 여기서는 단지 시권(詩卷)을 말하였다.

156)장지(粧池):서책이나 서화첩(書畫帖)의 가장자리에 비단 조각을 붙여서 보기 좋게 꾸민 것을 말한다.

157)책……시로세:소식(蘇軾)이 일찍이 왕유(王維)의 남전연우도(藍田煙雨圖)에 쓰기를 “마힐의 시를 음미해 보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관찰해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味摩詰之詩 詩中有畫 觀摩詰之畫 畫中有詩]”라고 하였다. 마힐은 왕유의 자이다. 王右丞集 卷14

158)백록선인(白鹿仙人)이……저편:진도(珍島)에서 환히 바라볼 수 있는 제주도 한라산(漢拏山)을 가리켜 한 말이다. 백록선인이란 곧 한라산 정상에 백록담(白鹿潭)이 있는데, 옛날에 선인(仙人)들이 여기에 모여서 백록주(白鹿酒)를 마시고 놀았다느니, 흰 사슴이 이 못에서 물을 마셨다는 등의 전설로 인하여 이 못을 백록담이라 명명한 데서 온 말이고, 수성(壽星)이 반짝인다는 것은 곧 이 또한 예로부터 한라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 남쪽 하늘에 떠오른 수성, 즉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 있으며, 이 별을 본 사람은 장수한다는 전설에서 온 말이다.

159)달……들리누나:생학(笙鶴)은 옛날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 진(太子晉)이 일찍이 생(笙)을 불어 봉황의 울음소리를 내면서 이락(伊洛) 사이에 노닐다가 뒤에 신선이 되어 백학(白鶴)을 타고 승천했다는 고사에서, 신선의 피리 또는 학을 가리키는바, 여기서 생학을 말한 것은 곧 그 고장이 선경(仙境)임을 의미한 것이다.

160)완당(阮堂)은……죽었는데:완당은 조선 말기의 문인으로 서화가이며 금석학자(金石學者)이기도 한 김정희의 호이고, 이옹(彝翁)은 조선 말기의 재상으로 호가 이재(彝齋)인 권돈인(權敦仁)을 가리킨다. 권돈인도 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김정희와는 일생 동안 친밀히 지내던 사이였는데, 그의 서화는 일찍이 김정희로부터 뜻과 생각이 아주 뛰어났다는 평을 들었고, 특히 그의 예서체(隸書體)의 비문(碑文) 글씨에 대해서는 김정희가 동국(東國)에 전혀 없던 글씨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권돈인의 유작(遺作)으로 세한도(歲寒圖)가 있는데, 싸늘한 느낌을 주는 김정희의 세한도와는 달리 안온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161)벽파진(碧波津):전라도 해남(海南)과 진도(珍島)의 경계에 위치한 포구(浦口)였던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이곳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한 것이 바로 명량대첩(鳴梁大捷)이다.

162)역사(歷史)는……가련해했고:악의(樂毅)는 전국 시대 연 소왕(燕昭王)의 장수였는데, 그가 일찍이 연(燕), 조(趙), 초(楚), 한(韓), 위(魏) 다섯 나라의 연합군을 거느리고 강대한 제(齊)나라를 쳐서 70여 성을 빼앗고 그 공으로 창국군(昌國君)에 봉해졌으나, 소왕이 죽고 혜왕(惠王)이 즉위해서는 혜왕이 제나라 전단(田單)의 이간질한 말을 믿고 악의를 의심하자, 악의는 마침내 연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史記 卷80 樂毅列傳여기서는 이순신 또한 임진왜란 때 여러 차례의 수전(水戰)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올랐으나,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통해서 전해 온 왜적의 흉계에 빠진 우리 조정의 잘못 내린 명령을 즉시 따르지 않은 데 대하여, 평소 이순신을 시기해 오던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이순신을 극력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마침내 원균의 말만을 믿고 즉시 이순신을 파직하여 서울로 압송해다가 가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모진 고통을 겪게 되었던 것을 악의의 일에 빗대서 한 말이다.

163)하늘은……주었네:분양(汾陽)은 당대(唐代)의 명장(名將)으로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진 곽자의(郭子儀)를 가리키는데, 그는 숙종(肅宗) 연간에 안사(安史)의 난(亂)을 평정한 것을 비롯하여 그 후 토번(吐蕃), 회흘(回紇) 등의 군대를 격파하는 등 많은 공을 세우고, 덕종(德宗) 때에 상부(尙父)의 호를 하사받고 벼슬이 태위 중서령(太尉中書令)에 이르렀던바, 그가 한때 행신(幸臣) 어조은(魚朝恩)의 참소를 입어 파직되었다가, 뒤에 다시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으로 기용되어 연달아 큰 공을 세웠던 데서 온 말이다. 新唐書 卷137 郭子儀列傳 전하여 여기서는 곧 충무공 이순신 또한 참소를 입어 파직당하고 모진 고통을 겪다가 겨우 죽음을 면한 채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시작하여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된 후 끝내 왜적을 연달아 크게 무찔러 큰 공을 세웠던 것을 곽자의의 일에 빗대서 한 말이다.

164)표충사(表忠祠):전라도 해남(海南) 대흥사(大興寺) 경내에 세워진 사우(祠宇)로,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여 많은 공을 세웠던 고승(高僧) 휴정(休靜), 유정(惟政)과 휴정의 제자인 처영(處英)까지 모두 진영(眞影)을 봉안하고, 관(官)에서 봄가을로 제관(祭官)을 보내 향사(享祀)하고 있다.

165) 비……말랐구나:괴송(怪松)이 말랐다는 것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의미한다. 피일휴(皮日休)의 유서하사(遊棲霞寺) 시에 의하면 “샘물은 차거워 삼복더위가 없고 소나무는 말라서 육조의 오랜 세월 간직했네.[泉冷無三伏 松枯有六朝]”라고 하였다. 또한 필력(筆力)이 아주 힘찬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166)김한섭(金漢燮):이 시의 내용으로 보아, 강진(康津)의 선비 출신으로 동학란(東學亂) 때에 목숨을 바쳐 저항했던 인물로 보인다.

167)뱀 돼지:탐포한 자를 비유한 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정공(定公) 4년 조에 “오나라가 큰 돼지와 긴 뱀이 되어 상국을 잠식한다.[吳爲封豕長蛇 以荐食上國]”라고 하였다.

168)갑오년……십이월에:갑오년은 1894년(고종31), 즉 동학란(東學亂)이 처음 일어났던 해를 가리킨다.

169)이어풍(鯉魚風):늦가을 9월에 부는 바람을 말한다.

170)돌다리……솟았네:전남 보성군(寶城郡) 벌교(筏橋) 읍내에 있던 홍교(虹橋)를 가리켜 한 말이다.

171)태호(太湖):강소(江蘇), 절강(浙江) 두 성(省)에 걸쳐 있는 큰 호수의 이름인데, 일명 오호(五湖)라고도 한다.

172)연자루(燕子樓):순천부(順天府)의 남쪽 옥천(玉川) 위에 걸터앉은 누각 이름이다. 옛날에 태수(太守) 손억(孫億)이 관기(官妓) 호호(好好)와 이곳의 연회(宴會)로 인해서 서로 사랑했던바, 그가 뒤에 관찰사가 되어 다시 그곳을 가 보니, 호호는 이미 늙어 버렸더라는 고사가 특히 유명하다. 이 일을 두고 통판(通判) 장일(張鎰)이 지은 시에 의하면 “차가운 달 처량도 해라 우뚝한 연자루에, 낭군이 한번 가고 나니 꿈만 유유하였네. 당시 한자리에 앉았던 손을 늙었다 꺼려 마소, 누각 위의 호호도 또한 백발이 되었는걸.[霜月凄涼燕子樓 郞官一去夢悠悠 當時座客休嫌老 樓上佳人亦白頭]”이라고 하였다.

173)칠분(七分)의……있었지:칠분의 밝은 달이란 곧 아주 번화(繁華)함을 비유한 말이다. 당(唐)나라 서응(徐凝)의 억양주(憶揚州) 시에 의하면 “천하의 삼분 밝은 달밤 가운데, 이분을 차지한 게 저 번화한 양주였네.[天下三分明月夜 二分無賴是揚州]”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연자루는 곧 중국 서주(徐州)에 있던 것으로, 백거이(白居易)의 연자루 시의 서(序)에 의하면, 서주 자사(徐州刺史) 장음(張愔)에게 미색(美色)이 있고 가무(歌舞)도 잘하던 반반(盼盼)이라는 애기(愛妓)가 있었는데, 장음이 죽은 뒤에도 그가 옛 정을 잊지 못하여 시집도 가지 않고 그의 집에 있는 조그마한 누각 연자루에 홀로 살고 있었다는 등의 말이 나온다. 白樂天詩集 卷15전하여 여기서는 매천이 조선 순천(順天)에 있는 연자루를 중국 서주에 있는 연자루에 빗대서 한 말이다.

174)숭양(崧陽)……시구(詩句):숭양은 개성(開城)의 별칭이고, 한 진사(韓進士)는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전주매천시집(箋註梅泉詩集)에 의하면 “숭양 한 진사의 시가 제일이었다고 한다.[崧陽韓進士詩爲第一云]”라고 하였다. 아마 한 진사의 시가 연자루에 걸려 있었던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175)미인(美人)인들……걸세:자세한 내용은 374쪽 주172 참조.

176)김경범(金景範):당시 석현(石峴)에 살던 젊은이로 요절을 했던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177)지상 신선(地上神仙):땅 위에 사는 신선이란 뜻으로, 흔히 한가로이 지내면서 장수(長壽)와 향락(享樂)을 누리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포박자(抱朴子) 논선(論仙)에 의하면 “상등의 선비가 형체를 일으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천선이라 하고, 중등의 선비가 명산에 유람하는 것을 지선이라 한다.[上士擧形昇虛 謂之天仙 中士遊於名山 謂之地仙]”라고 하였다.

178)귀식(龜息) 웅경(熊經):귀식은 거북처럼 호흡을 고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렇게 하면 음식을 먹지 않고도 장생(長生)한다고 한다. 웅경 역시 옛날 양생법(養生法)의 한 가지로, 마치 곰이 나뭇가지에 매달리듯 하는 운동을 말한다. 장자(莊子) 각의(刻意)에 의하면 “새로운 기운을 들이쉬고 탁한 공기를 내쉬며, 묵은 것을 토해 버리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곰이 나뭇가지에 매달리듯, 새가 공중을 날며 두 다리를 쭉 펴듯이 하는 운동은 바로 장수를 위한 것이다.[吹呴呼吸 吐故納新 熊經鳥申 爲壽而已矣]”라고 하였다.

179)황아(黃芽):도교(道敎)에서 이른바, 납[鉛] 속에서 녹여낸 정화(精華)를 말한 것으로, 이것이 곧 장생의 선약(仙藥)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단지 주인옹(主人翁)을 축수하는 뜻에서 상징적으로 말한 것이다. 도가서(道家書)인 참동계(參同契)에 “물이 황아를 간직하고 있으니, 이것이 오금의 주가 된다.[玄含黃芽 五金之主]” 하였는데, 그 해석에 의하면 “물이 황아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물속에서 납이 생산되는 것을 이른 말이다. 납은 곧 오금의 주가 되는데, 북방의 현명 안에 있으면서 흙을 얻어 황아를 생산하는 것이니, 황아는 곧 황금의 화채를 뜻한다.[玄含黃芽者 水中産鉛也 鉛爲五金之主 在北方玄冥之內 得土而生黃芽 黃芽 卽金華也]”라고 하였다.

180)첩첩산중……신선(神仙):이백(李白)의 유태산(遊泰山) 시에 의하면 “우연히 선동을 만났는데, 두 귀밑 검은 머리를 틀어 올렸네.[偶然値靑童 綠髮雙雲鬟]”라고 하였다. 李太白集 卷19

181)눈……듯:초(楚)의 옥박(玉璞)이란, 옛날 초나라의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일찍이 초산(楚山)에서 옥박을 얻어 초나라 여왕(厲王)과 무왕(武王) 2대에 걸쳐 왕에게 바쳤으나, 그때마다 옥인(玉人)의 잘못된 판정에 의해 왕을 속였다는 죄목으로 양쪽 발꿈치를 다 베이었는데, 문왕(文王)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변화가 이 옥박을 안고 초산에서 3일을 밤낮 운 끝에 왕명에 의해 그 옥박을 다시 조사하게 한 결과 마침내 보옥(寶玉)을 얻게 되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韓非子 和氏여기서는 곧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처지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의지를 굳게 지키는 것을 비유하는바, 눈 속에 핀 매화 또한 그와 같음을 의미한다.

182)바람에……듯:제(齊)의 피리를 훔쳐 분다는 것은, 전국 시대 제 선왕(齊宣王)이 피리 소리 듣기를 좋아하여 항상 악인(樂人) 300인을 불러서 피리를 합주하게 하였는데, 이때 남곽 처사(南郭處士)라는 사람은 원래 피리를 불지도 못하면서 자청하여 악인 300인 틈에 끼어 외람되이 피리를 불어서 후록(厚祿)을 받고 지냈으나, 뒤에 선왕(宣王)이 죽고 민왕(湣王)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한 사람씩 불러서 피리를 불어 보게 하자, 남곽 처사가 마침내 도망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韓非子 內儲說上전하여 본래는 무능한 사람이 재능이 있는 것처럼 속여서 외람되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또한 송죽(松竹)이 본래는 굳은 절개로 유명한데도 소나무가 바람에 쓰러져 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183)다람쥐……분감(分甘)했었지:다람쥐 운운한 것은,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에 “텅 빈 골짜기에 숨어 사는 사람은 명아주와 콩잎이 족제비의 길마저 막고 있는 터라, 빈 골짜기에서 홀로 걷다가 쉬다가 하노라면, 다른 사람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뻐하는 것이다.[逃空虛者 藜藿柱乎鼪鼬之逕 踉位其空 聞人足音跫然而喜]”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아주 깊은 산중(山中)에서 외로이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분감은 효경원신계(孝經援神契)에 “어머니는 자식에 대하여 정성을 다해 기르되, 마른자리는 자식을 앉히고 진자리는 자신이 앉으며, 적은 것은 스스로 사양하고 감미로운 것은 나누어 먹인다.[母之於子也 鞠養殷勤 推燥居濕 絶少分甘]”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어머니의 자애 또는 친구 간의 우호 등에 쓰인다.

184)김 주사 효찬(金主事孝燦):주사는 대한제국(大韓帝國) 때 각 관청에 딸린 판임관(判任官) 벼슬이다. 여기서는 당시 남원부 주사(南原府主事)로 있던 김효찬을 가리킨다. 김효찬은 전라남도 순천(順天) 출신으로 자는 대겸(大兼), 호는 남파(南坡)이고, 벼슬은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이르렀다. 저서에 남파시집(南坡詩集)이 있다. 454쪽 김효찬의 용성음고에 제하다[題金孝燦龍城吟稿] 시의 서(序) 참조.

185)청삼(靑衫):푸른 도포를 말하는데, 이것은 곧 당(唐)나라 때 8품, 9품의 관복(官服)으로, 전하여 미관말직을 의미한다. 전하여 여기서는 곧 주사 김효찬을 가리킨 말이다.

186)엄성(嚴城):경계(警戒)가 삼엄(森嚴)한 성지(城池)를 말한다.

187)일산……아래:일산(日傘)을 기울였다는 것은 곧 옛 속담에 “백발이 되도록 오래 사귀었어도 서로 지기(知己)가 되지 못하면 처음 만난 사이나 다름이 없고, 길을 가다가 일산을 맞대고 처음 서로 잠깐 만났더라도 의기가 투합하면 예전부터 사귄 친구와 같다.[白頭如新 傾蓋如故]”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처음 만난 것을 의미한다.

188)한강(韓康)은……돌아오누나:한강은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로 자는 백휴(伯休)이며 경조(京兆) 패릉(霸陵)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명산을 유람하면서 약(藥)을 캐다가 장안(長安)의 시중(市中)에 가져다 팔았는데, 30여 년 동안 값을 두 가지로 불러 본 적이 없었다. 한번은 한 여자가 한강에게 약을 사러 왔다가 약값을 깎아 주지 않은 것을 불쾌하게 여겨 말하기를 “공이 바로 한백휴입니까, 그래서 값을 두 가지로 하지 않습니까?[公是韓伯休邪 乃不二價乎]” 하자, 한강이 속으로 탄식하기를 “나는 이름을 피하려고 했는데, 지금 하찮은 여인들까지 내가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니, 약을 팔아서 무엇하랴.[我欲避名 今區區女子皆知有我 何用藥爲]” 하고는, 마침내 패릉의 산중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조정에서 징소(徵召)가 연달았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韓康전하여 여기서는 약포(藥鋪)의 주인을 한강에 빗대서 한 말이다.

189)정유고(丁酉稿):1897년(광무1), 매천의 나이 43세 때 지은 시고이다.

190)토돈(土豚):옛날에 방수(防水) 또는 축성용(築城用)으로 사토(沙土)를 담은 거적자루를 말한다. 그것이 조그마한 돼지 모양과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지(三國志) 권14 위서(魏書) 장제전(蔣濟傳)에 의하면 “미리 토돈을 만들어서 호수를 막아 끊었다.[豫作土豚 遏斷湖水]”라고 하였다.

191)오악(五岳)……남았구려:누(累)는 가사(家事)의 이런저런 여러 가지 거리낌을 말한 것으로, 후한 때의 은사(隱士) 상장(向長)의 고사에서 온 말인데, 자세한 내용은 316쪽 주57 참조.

192)석정(石亭):이정직(李定稷, 1841〜1910)의 호이다. 자세한 내용은 288쪽 주3 참조.

193)승두전(蠅頭箋):승두 세자(蠅頭細字), 즉 파리 대가리만큼 잔글씨로 쓴 서신(書信)을 말한다. 육유(陸游)의 서감(書感) 시에 의하면 “어찌 알았으랴 죽을 날 가까운 백발 늙은이가, 아직껏 파리 대가리만큼 잔글자를 읽을 줄을.[豈知鶴髮殘年叟 猶讀蠅頭細字書]”이라고 하였다.

194)화가(畫家)의……취했네그려:석정 이정직이 일찍이 매천에게 묵죽(墨竹)을 그려 준다고 승낙해 놓고 오래도록 그려 주지 않다가 이제야 묵죽을 그려 왔으므로, 매천의 입장에서는 마치 채권(債券) 없는 빚을 받은 셈이 되었음을 의미한 말이다.

195)묵은……결과겠지:묵은 김치 삼백 단지란 극히 많은 양의 김치를 말한 것으로, 항상 김치만 먹고 사는 청빈한 생활을 의미한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 가난한 선비가 죽어서 저승의 관원(官員)을 만났는데, 그 관원이 그 선비에게 이르기를 “너는 의당 재생할 것이다. 너에게는 3백 단지 김치의 녹이 다하지 않았다.[當再生 汝有三百甕虀祿未盡]”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또 소황골계첩(蘇黃滑稽帖)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한다. “소식이 말하기를 ‘왕 장원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일찍이 술에 취하여 변강에 빠졌는데, 이때 물귀신이 그를 구해 주면서 말하기를 「공에게 삼백 천이나 되는 요전이 있는데, 만일 여기에서 죽어 버린다면 이것을 어디다 쓰겠는가.」 했던바, 과연 그다음 해에 그가 진사에 급제하였다. 또 오래도록 등제하지 못한 사람이 있어 그 역시 왕 장원의 일을 본받아 거짓 취한 체하고 변강에 빠졌더니, 그 역시 물귀신이 구해 주므로, 그는 대단히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 요전은 얼마나 되는가?」 하자, 귀신이 말하기를 「나는 모르겠다. 다만 3백 단지의 묵은 김치를 소비할 곳이 없을 뿐이다.」 했다.’ 하였다.[蘇軾曰王狀元未第時 醉墮汴河 爲水神扶出曰 公有三百千料錢 若死於此 何處消破? 明年 遂登進士 有久不第者 亦效之 佯醉落河 河神亦扶出 士大喜曰我料錢幾何 神曰吾不知也 但三百甕黃虀 無處消破耳]”

196)매자우(梅子雨):매실(梅實)이 익을 무렵에 내리는 비를 말한 것으로, 매우(梅雨) 또는 황매우(黃梅雨)라고도 한다.

197)연화풍(楝花風):꽃 피는 계절에 불어오는 바람을 말한 것으로, 예를 들면, 1년 24절기 가운데 소한(小寒)부터 곡우(穀雨)에 이르기까지 모두 4개월, 8절기 사이의 120일 동안을 5일마다 1후(候)로 잡으면 총 24후가 되는바, 1후마다 일종(一種)의 꽃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일러 이십사번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이라 하는데, 이십사번화신풍 가운데 연화풍은 곧 음력 3월에 해당한다.

198)변소(邊韶)의……알았네그려:변소는 후한(後漢) 때의 문인(文人)으로 자는 효선(孝先)이다. 그가 일찍이 수백 인의 문도(門徒)를 교수(敎授)할 적에 한번은 낮잠을 자는데 한 제자가 선생을 조롱하기를 “변효선은 배가 똥똥하여 글 읽기는 싫어하고 잠만 자려고 한다.[邊孝先 便便腹 懶讀書 但欲眠]”라고 하자, 변소가 그 말을 듣고 즉시 대구하기를 “똥똥한 내 배는 오경의 상자이고, 잠만 자려고 하는 것은 경을 생각하기 위함이다.[腹便便 五經笥 但欲眠 思經事]”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80 文苑列傳 邊韶

199)휘파람……짓노니: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은 술을 매우 즐겨 마셨고, 또 휘파람을 대단히 잘 불어서 금조(琴操)와 조화를 잘 이루었다 하며, 진류(陳留)에 그의 소대(嘯臺)가 있기도 하다. 그는 또 일찍이 소문산(蘇門山)에 올라가 은사(隱士) 손등(孫登)을 만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해 보았으나 손등이 전혀 대꾸하지 않으므로, 그가 마침내 휘파람을 길게 불면서 내려가는데, 산 중턱쯤 내려갔을 때 마치 난봉(鸞鳳) 같은 아름다운 소리가 암곡(巖谷)에 울려 퍼졌던바, 그게 바로 손등의 휘파람 소리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49 阮籍列傳휘파람 소리를 난봉(鸞鳳)의 소리에 비유하는 것은 곧 은사의 정취를 의미한다.

200)그……알꼬:흥공(興公)은 진대(晉代)의 문인(文人) 손작(孫綽)의 자이다. 그가 일찍이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를 지어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던바, 그 부에 “적성엔 붉은 놀이 일어 우뚝한 표주를 세우고, 폭포는 날아 흘러서 청산에 한계를 만들었도다.[赤城霞起而建標 瀑布飛流以界道]”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文選 卷8전하여 여기서는 뛰어난 문장 솜씨를 의미한다.

201)백위(白葦) 황모(黃茅):흰 갈대꽃과 누런 띠풀이라는 뜻으로, 하찮은 학문이나 문장 따위를 비유한 말이다. 소식(蘇軾)이 일찍이 장문잠(張文潛)에게 답한 편지에 “왕씨는 자기 학문을 가지고 온 천하를 똑같게 하려고 하지만, 비옥한 땅은 물건을 생산하는 것은 같으나 생산되는 물건은 같지 않은 것이요, 오직 거칠고 척박한 땅만이 눈앞에 아득히 펼쳐진 것은 모두 흰 갈대꽃이나 누런 띠풀일 뿐인 것이니, 이것이 곧 왕씨가 천하를 똑같게 하려는 데에 해당한 것이다.[王氏欲以其學同天下 地之美者 同於生物 不同於所生 惟荒瘠斥鹵之地 彌望皆黃茅白葦 此則王氏之同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왕씨는 곧 왕안석(王安石)을 가리킨다. 東坡全集 卷74

202)단술 마련해:한(漢)나라 때 초 원왕(楚元王)이 글을 좋아하여 일찍이 노(魯)나라의 신공(申公), 목생(穆生), 백생(白生) 등 세 선비와 더불어 부구백(浮丘伯)에게 시를 배웠고, 뒤에 초 원왕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이 세 사람을 중대부(中大夫)로 삼아 사부(師傅)로 모셨던바, 그중 목생은 술을 마시지 못하므로, 원왕이 주연(酒宴)을 베풀 때마다 항상 목생을 위하여 단술[醴]을 준비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36 楚元王劉交傳전하여 단술을 마련한다는 것은 곧 현사(賢士)에 대한 예우의 뜻으로 쓰인다.

203)두뇌(頭腦)가 동홍(冬烘)하다:당(唐)나라 때 정훈(鄭薰)이 일찍이 고시(考試)를 주관했을 적에 안표(顔標)를 잘못 안진경(顔眞卿)의 후손으로 알고 그를 장원으로 뽑자, 당시에 한 무명씨(無名氏)가 시를 지어 그를 풍자하기를 “주사의 머리는 너무나도 동홍이라서, 안표를 잘못 안 노공 후손으로 알았네.[主司頭腦太冬烘 錯認顔標作魯公]”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동홍은 생각이 진부하고 견식(見識)이 천루(淺陋)하여 흐리멍덩한 사람을 가리킨다. 唐摭言 誤放

204)노련한……가득해라:남제(南齊)의 문인(文人) 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서 주옹(周顒)이 처음 북산(北山)에 은거할 때의 기상을 평론하기를 “풍류 정취는 태양을 가릴 듯하고, 추상같은 기개는 가을 하늘에 꽉 찼었다.[風情張日 霜氣橫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05)진계(秦系)는……정예했고:편사(偏師)는 본디 주력군(主力軍) 이외의 부분적인 군대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여기서는 시격(詩格)의 단조로움을 의미한다. 진계는 당대(唐代)의 은사(隱士)로 자는 공서(公緖)이다. 그는 천보(天寶) 말년에 난리를 피해 섬계(剡溪)로 가 있다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뒤에 남안(南安)의 구일산(九日山)에 들어가 초려(草廬)를 짓고 여러 해 동안 은거하면서 노자(老子)에 주(註)를 내기도 하였다. 또 그는 시에 능하여 유장경(劉長卿)과 서로 친히 지내면서 시를 서로 증답(贈答)한 것이 많았는데, 권덕여(權德輿)가 일찍이 말하기를 “유장경은 자기의 시를 오언시의 장성으로 여기는데, 진계는 편사를 가지고 그를 공격하여 노익장을 과시했다.[長卿自以爲五言長城 系用偏師攻之 雖老益壯]”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新唐書 卷196 秦系列傳

206)낙승(駱丞)은……이루었었지:낙승은 곧 초당(初唐) 시대 문장가로 임해 승(臨海丞)을 지낸 낙빈왕(駱賓王)을 가리킨다. 그는 왕발(王勃),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鄰)과 함께 문장으로 명성을 나란히 하여 초당 사걸(初唐四傑)로 일컬어졌던바, 그의 이름은 이들 가운데 맨 끝인 네 번째에 들었다. 新唐書 卷201 文藝列傳上 王勃

207)나는……합당쿠려:경(卿)은 옛날 공(公)의 다음인 제이인(第二人)의 존칭으로 쓰였던바, 진(晉)나라 때 태위(太尉) 왕연(王衍)이 평소 유애(庾敱)와는 교우(交友) 관계가 아니었는데, 유애가 왕연에게 매양 경으로 호칭하므로, 왕연이 말하기를 “군이 그렇게 호칭할 수 없다.[君不得爲耳]” 하자, 유애가 말하기를 “경은 스스로 나를 군이라 호칭하고, 나는 스스로 경을 경이라 호칭하니, 이는 곧 나는 스스로 나의 법을 쓰고, 경은 스스로 경의 법을 쓴 것이오.[卿自君我 我自卿卿 我自用我法 卿自用卿法]”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世說新語 方正전하여 여기서는 곧 진(晉)나라 사람들의 자기 법 쓰는 것과 반대로 상대방의 법을 서로 존중하여 쓰고 있음을 의미한다.

208)금단(金丹)으로 환골탈태하는 때:본디 선약(仙藥)을 먹고 신선이 되는 것을 이르는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시인의 조예가 갑자기 깨어 깊은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육유(陸游)의 야음(夜吟) 시에 의하면 “육십여 년 동안을 망녕되이 시를 배워, 공부가 깊어진 곳을 내 마음 홀로 알 뿐이네. 밤중에 차가운 등불 아래서 한번 웃노니, 비로소 금단으로 환골탈태하는 때로세.[六十餘年妄學詩 工夫深處獨心知 夜來一笑寒燈下 始是金丹換骨時]”라고 하였다. 劍南詩藁 卷51

209)어리석은……마소:어리석은 사람을 대해서 꿈 얘기를 해 주면 그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말을 사실로 잘못 알아듣게 된다는 뜻이다. 냉재야화(冷齋夜話)에 의하면 “당나라 고종 연간에 승가가 장강과 회하 사이의 지방을 유람하면서 아주 기이한 행적을 남겼는데, 그때 어떤 이가 그에게 묻기를 ‘네 성이 무엇이냐?’라고 하자, ‘성이 무엇이다.’라고 대답하므로, 또 묻기를 ‘어느 나라 사람이냐?’라고 하자, 또 대답하기를 ‘어느 나라 사람이다.’라고 했던바, 뒤에 문인 이옹은 비문을 지으면서 이상의 주고받은 말들을 잘못 이해하여 전기에 쓰기를 ‘대사의 성은 하이고 하국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어리석은 사람에게 꿈을 얘기한 격이라는 것이다.[僧伽龍朔中遊江淮間 其迹甚異 有問之曰 汝姓何 答曰 姓何 又問曰 何國人 答曰 何國人 唐李邕作碑 不曉其言 乃書傳曰 大師姓何 何國人 此正所謂對癡人說夢耳]”라고 하였다.

210)편문(偏門)이라서……않았네:편문은 한쪽으로 치우쳐서 중정(中正)한 도가 되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명(明)나라의 문인(文人) 호응린(胡應麟)의 시수(詩藪)에 의하면 “요컨대, 숙야의 시는 너무나 농후하고, 연명의 시는 너무나 담담하니, 고상하고 순정한 시율에 비하면 모두가 편문일 뿐이다.[要之叔夜太濃 淵明太淡 律之大雅 俱偏門耳]”라고 하였다. 숙야는 진대(晉代)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의 자이고, 연명은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의 자이다. 그리고 왕위(王韋)는 성당(盛唐) 시대의 시인인 왕유(王維), 위응물(韋應物)을 합칭한 말인데, 이들의 시는 모두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하는 데에 특징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맹호연(孟浩然),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류(王孟韋柳)로 병칭(竝稱)되기도 한다.

211)석실(石室)의……하고:석실은 전설에 나오는 신선의 동부(洞府)를 가리키고, 황정(黃精)은 옛날 도사(道士), 선인(仙人)들이 복용했다는, 비위(脾胃)를 보하고 원기를 증진시키는 약초인데, 이것으로 밥을 지어 먹으면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고 한다. 전하여 여기서는 상대방을 선인에 비유하여 이른 말이다.

212)송릉집(松陵集):당대(唐代)의 시인 피일휴(皮日休)와 그의 시우(詩友)인 육귀몽(陸龜蒙)이 서로 창화(唱和)한 시집인 송릉창화시집(松陵唱和詩集)의 약칭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피육(皮陸)으로 병칭하였다.

213)목제(牧荑)가……감동함일세:목제는 야외에 나는 띠싹을 말한 것으로, 시경 정녀(靜女)에 “들판에서 띠싹을 내게 선사하니, 참말로 예쁘고 색다른 것이로다. 띠싹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미인이 주었기 때문이라오.[自牧歸荑 洵美且異 匪女之爲美 美人之貽]”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14)협소한……잦아들었네:황지(潢池)는 협소한 땅을 말하고, 소겁(小劫)은 작은 도둑을 말한다. 여기서 말한 작은 도둑이란 곧 당시 정부에 대항하여 일어난 동학군(東學軍)을 가리킨 듯하다.

215)멀리……비추누나:진(晉)나라 때 문인(文人)으로 천문(天文), 방기(方技)에도 정통했던 장화(張華)가 일찍이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 사이에 자줏빛 서기[紫氣]가 쏘아 비추는 것을 보고는, 예장(豫章)의 풍성(豐城)에 보검(寶劍)이 있는 것을 헤아려 알고 친구인 뇌환(雷煥)을 시켜 풍성에 가서 옥사(獄舍)의 옛터를 발굴하게 하여, 마침내 춘추 시대 간장(干將), 막야(莫邪) 두 부부가 제작했다는 용천(龍泉), 태아(太阿) 두 보검을 찾아내서 이것을 장화와 뇌환이 각각 한 자루씩 소지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216)완산(完山):전주(全州)의 고호이다.

217)앵화(鶯花):꾀꼬리 울고 꽃 피는 것을 이르는 말로, 일반적으로 봄철의 경색(景色)을 가리키는데, 기녀(妓女)에 비유하기도 한다.

218) 금전을……않아:서민은 재물을 모아도 괜찮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이백(李白)의 증최추포(贈崔秋浦) 시에 의하면 “손을 만나면 술잔이나 기울일 뿐, 관리가 되어서는 돈을 탐하지 않네.[見客但傾酒 爲官不愛錢]”라고 하였다. 李太白集 卷9

219)아주(牙籌)를 던져 버리고:아주는 상아(象牙)로 된 주판(籌板)으로, 아주를 던져 버렸다는 것은 곧 재물에 전혀 관심이 없음을 의미한다.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 가운데 한 사람인 왕융(王戎)은 천성이 재물 불리기를 좋아하여 매양 상아 주판을 손수 잡고 밤낮으로 계산하면서 항상 부족하게 여기는 기색이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43 王戎列傳

220)지미(芝眉):얼굴에 영지의 광채가 나타나는 것을 이른다. 옛날에 귀인(貴人)의 상(相)을 일컬었던 데서, 전하여 남의 용안(容顔)에 대한 경칭(敬稱)으로 쓰인다.

221)방옹(放翁):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의 호이다. 자는 무관(務觀), 또 다른 호는 위남(渭南), 노학암(老學菴), 구곡노초(九曲老樵) 등이다. 당시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金)나라와의 강화(講和)를 주장할 때 그는 우국충정으로 강화를 극력 반대했기 때문에 등용되지 못하다가, 진회가 죽은 뒤에야 효종(孝宗)의 부름을 받아 추밀원 편수(樞密院編修)를 거쳐 기주(夔州), 엄주(嚴州)의 지현(知縣)을 역임하고 보장각 대제(寶章閣待制)로 치사(致仕)하였다. 뛰어난 시인으로 역대 최다의 시작(詩作)을 남겼으며, 특히 도잠의 자연을 즐기는 시풍을 가장 숭상했다고 한다. 그는 또 85세의 장수를 누렸고, 일찍이 촉도(蜀道)의 풍토(風土)를 좋아하여 평생 지은 시를 검남시고(劍南詩稿)라 제(題)하였다. 검남시고 외에도 많은 저서가 있다. 宋史 卷395 陸游列傳

222)온……돌아오네:옛 풍속에 단오절(端午節)이면 사기(邪氣)를 물리치는 뜻에서 이른바 애인(艾人), 즉 쑥을 뜯어다가 사람의 형상처럼 만든 것을 집집마다 문호(門戶) 위에 걸었던 데서 온 말이다.

223)술……푸르고:사종(嗣宗)은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의 자이다. 눈이 푸르다는 것은 청안(靑眼), 즉 반겨 주는 눈빛을 말한 것으로, 완적은 난세(亂世)에 몸을 보전하기 위해 짐짓 세상일을 관여하지 않고 술만 마시고 취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던바, 자기 모친(母親)이 작고했을 때에도 혜희(嵇喜)가 빈손으로 가서 조문할 적에는 흰 눈짓을 하여 반갑잖은 표정을 지었다가, 혜희의 아우인 혜강(嵇康)이 술을 가지고 가서 조문하자, 그제는 크게 기뻐하여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49 阮籍列傳

224)꿈속의……하얗구나:업후(鄴侯)는 당대(唐代)의 명신(名臣)으로 업현후(鄴縣侯)에 봉해진 이필(李泌)을 가리킨다. 그는 7세에 이미 문장에 능하여 기동(奇童)으로 일컬어졌는데, 일찍이 숭산(嵩山), 종남산(終南山) 등지를 유람하면서 신선술(神仙術)에 유념하다가, 현종(玄宗) 연간에 동궁(東宮)의 한림 공봉(翰林供奉)이 되면서부터 천자와 태자의 은총을 한 몸에 입게 되어, 숙종(肅宗)이 즉위한 뒤에는 빈우(賓友)로서 모든 국사(國事)의 의논에 참예하였고, 그 후 권신(權臣)의 질시(疾視)를 받아 한때 형산(衡山)에 은거하기도 했으나, 대종(代宗), 덕종(德宗) 때에 다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서 뒤에 벼슬이 중서시중동평장사(中書侍中同平章事)에 이르고 업현후에 봉해졌다. 구름이 업후의 옷을 희게 했다는 것은 곧 그를 백의재상(白衣宰相) 또는 백의산인(白衣山人)이라 일컫는 것을 가지고 한 말이다. 역작(易酌)에 의하면, 돈괘(遯卦) 구오(九五)의 “아름다운 은둔이니 정하여 길하니라.[嘉遯貞吉]”라고 한 대문의 주석에 “장자방이 적송자를 따라 노닐던 일과 이 업후가 백의로 재상이 된 일 같은 것이 여기에 근사한 것이다.[若張子房之從遊赤松 李鄴侯之白衣宰相 其近之矣]”라고 하였고, 양오재집(養吾齋集) 권16 유주난계업후사기(攸州蘭溪鄴侯祠記)에도 그를 ‘백의산인’으로 일컬었다.

225)타향살이……느껴지네:타향에서 오랫동안 행역(行役)을 하다 보면 고향을 몹시 그리워한 나머지 그곳을 또한 고향처럼 여기게 되는 것을 뜻한다. 가도(賈島)의 도상간(渡桑乾) 시에 “병주의 타향살이 십 년 세월이 흘렀는지라, 밤낮으로 함양 고향 돌아갈 마음 간절한데, 무단히 또다시 상간수를 건너와서는, 문득 병주를 바라보고 이게 고향인가 하노라.[客舍幷州已十霜 歸心日夜憶咸陽 無端更渡桑乾水 却望幷州是故鄕]”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賈長江集 卷9

226)식자우환(識字憂患):인생의 고통이 글을 읽어 학식이 있는 데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두보(杜甫)의 취시가(醉時歌)에 “사마상여는 뛰어난 재주로 친히 그릇을 씻었고, 양자운은 글자를 알아서 끝내 천록각서 투신했네.[相如逸才親滌器 子雲識字終投閣]”라고 하였고, 소식(蘇軾)의 석창서취묵당(石蒼舒醉墨堂) 시에는 “인생이 글자를 아는 게 우환의 시초이거니, 성명이나 대강 기록할 만하면 그만둬야지.[人生識字憂患始 姓名麤記可以休]”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3 蘇東坡詩集 卷6

227)행장(行藏)을……좋으련만:행장은 나라에 쓰이면 도를 행하고, 버려지면 숨어 산다는 뜻으로, 공자(孔子)가 일찍이 안연(顔淵)에게 이르기를 “쓰이면 도를 행하고, 버려지면 숨어 사는 것을 오직 나와 너만이 이 포부를 지녔으리라.[用之則行 舍之則藏 唯我與爾有是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述而 고사전(高士傳)은 본디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이 찬(撰)한 서명(書名)으로, 모두 옛 은사(隱士)들의 전기(傳記)를 기재해 놓은 책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고사전과 같은 양식의 저서를 의미한다.

228)잡가류(雜家類):잡가란 곧 전국 시대 말기로부터 한(漢)나라 초기까지에 걸쳐 각 파(派)의 학설을 취사선택하여 일가(一家)의 학설을 세운 학파를 이르는 말로, 그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여씨춘추(呂氏春秋), 회남자(淮南子) 등을 꼽는다. 전하여 여기서는 그와 같은 번잡한 학문을 의미한다.

229)대청……보네: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물의 고인 것이 깊지 못하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대청의 우묵한 곳에 한 잔의 물을 부으면 지푸라기는 배처럼 띄울 수 있다. 그러나 술잔을 띄우면 가라앉으니,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且夫水之積也不厚 則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자기 분수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함을 의미한다.

230)도도(桃都):전설에 나오는 나무 이름이다. 현중기(玄中記)에 의하면 “동남쪽에 도도산이 있고 그 위에 큰 나무가 있어 도도라 이름하는데, 가지끼리 서로의 거리가 삼천 리나 되고, 그 위에는 하늘닭 한 마리가 있어 아침 해가 막 돋아 올라 햇살이 이 나무를 비추면 하늘닭이 즉시 울고 뭇 닭이 그를 따라 일제히 운다.[東南有桃都山 上有大樹 名曰桃都 枝相去三千里 上有一天鷄 日初出 光照此木 天鷄則鳴 群鷄皆隨之鳴]”라고 하였다. 太平御覽 卷918

231)천륜(天倫)의 즐거운 일:가정(家庭)에서 부자 형제 등이 단란하게 모여 즐거운 놀이를 하는 것을 이른다. 이백(李白)의 춘야연종제도리원서(春夜宴從弟桃李園序)에 “복사꽃 오얏꽃 핀 아름다운 정원에 모여서 천륜의 즐거운 놀이를 벌인다.[會桃李之芳園 序天倫之樂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李太白集 卷26

232)노망(魯望)의 배:노망은 당대(唐代)의 은사(隱士)이며 시인인 육귀몽(陸龜蒙)의 자이다. 그의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천수자(天隨子), 보리선생(甫里先生)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육귀몽은 일찍부터 속인(俗人)들과 교유하지 않고 배 한 척을 마련하여 거기에다 항상 서책, 다조(茶竈), 필상(筆牀), 조구(釣具) 등을 싣고 강호(江湖) 사이를 이리저리 유람하며 지냈던 데서 온 말이다. 그는 시인 피일휴(皮日休)와 유독 친교(親交)가 있어 그와 서로 시를 창화(唱和)했던바, 그들이 서로 창화한 시를 모은 송릉창화시집(松陵唱和詩集)이 전한다. 이 밖에도 뇌사경(耒耜經), 입택총서(笠澤叢書) 등 여러 저서가 있다. 新唐書 卷196 隱逸列傳 陸龜蒙

233)재주……비치했네:광문(廣文)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인(文人)으로 광문관 박사(廣文館博士)를 지낸 정건(鄭虔)을 가리키는데, 그는 일찍이 현종의 특별한 배려로 인해 한직(閒職)이나마 광문관 박사가 되었으나, 몹시 빈한한 데다 술을 매우 즐겼으므로, 두보(杜甫)가 일찍이 장난삼아 그에게 준 희간정광문……(戱簡鄭廣文……) 시에 “광문의 관사에 당도해서는, 당의 계단 밑에 말을 매 놓았다가, 취하면 말을 타고 그냥 돌아가서, 자못 관장의 꾸지람을 들었네. 재주 명성은 삼십 년을 날렸으되, 빈객은 추워도 앉을 방석이 없네. 다행히도 소 사업이 있어, 때때로 술값을 빌리는구려.[廣文到官舍 繫馬堂階下 醉則騎馬歸 頗遭官長罵 才名三十年 坐客寒無氈 賴有蘇司業 時時乞酒錢]”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3 전하여 후세에는 교관(敎官)을 높여서 광문으로 흔히 일컬었던바, 여기서는 곧 매천 자신이 정건 같은 재주는 없어도 방석은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234)양보음(梁甫吟):악부가사(樂府歌辭)의 이름으로, 예부터 전해 온 만가(挽歌)이다.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일찍이 지어 노래한 가사가 특히 유명한데, 그 내용은 곧 제 경공(齊景公) 때 안영(晏嬰)이 천하무적의 용력(勇力)을 지닌 공손접(公孫接), 전개강(田開疆), 고야자(古冶子) 세 용사(勇士)에게 기계(奇計)를 써서 그들에게 복숭아 두 개를 주어 서로 다투게 하여 끝내 모두 자살하도록 만들었던 일을 몹시 안타깝게 여겨 노래한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권35 촉서(蜀書) 제갈량전(諸葛亮傳)에 의하면 “제갈량은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양보음 읊기를 좋아했다.[亮躬耕壟畝 好爲梁父吟]”라고 하였다.

235)남가몽(南柯夢):당(唐)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 일찍이 술에 취하여 자기 집 남쪽에 있는 괴나무[槐樹] 밑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대괴안국(大槐安國)이라는 나라로부터 초빙받고 가서 남가군 태수(南柯郡太守)가 되어 부귀영화를 실컷 누리고 깨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흔히 낮잠 또는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의미한다.

236)태(胎)에서……되거니와:학(鶴)은 조류(鳥類) 중에 유독 태생(胎生)이라는 전설에서 온 말이다. 그래서 선금(仙禽) 또는 태선(胎仙)이라는 별칭이 있기도 하다.

237)허물……아니고말고: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 세속을 초탈함을 의미한다.

238)장수(障囚):마음이 어떤 사물에 의해 속박받는 것을 의미한다. 백거이(白居易)의 중수향산사필제이십이운이기지(重修香山寺畢題二十二韻而紀之) 시에 의하면 “반드시 명예 좋아하는 장벽 제거하고, 내 집 연연하여 갇히지도 말아야지.[須除愛名障 莫作戀家囚]”라고 하였다. 白樂天詩後集 卷11

239)문장은……같고말고:정이(程頤)가 말하기를 “지금은 문장을 하는 사람들이 오로지 장구에만 힘써서 남의 이목을 기쁘게 하고 있다. 이미 남의 이목을 기쁘게 하였으니, 배우가 아니고 무엇이랴.[今爲文者 專務章句 悅人耳目 旣務悅人 非俳優而何]” 하였다. 近思錄 爲學

240)삼천독(三千牘):한 무제(漢武帝) 때에 동방삭(東方朔)이 처음 장안(長安)에 들어가서 공거(公車)에 이르러 상서(上書)하여 무릇 삼천독을 상주했다는 데서 온 말로, 본래는 제왕에게 올리는 장편의 소장(疏章)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여기서는 학문이나 지식이 방대함을 의미한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241)하택거(下澤車) 타는 선인(善人):하택거는 늪지대를 다니기에 알맞은 바퀴통이 짧은 수레를 말한다. 후한(後漢)의 명장(名將) 마원(馬援)이 일찍이 남방(南方)인 교지(交趾)로 정벌을 나가서 적군 수천 급(級)을 참획(斬獲)하고 크게 격파하여 신식후(新息侯)에 봉해졌는데, 이때 군사들을 호궤(犒饋)하면서 부하 관속(官屬)에게 이르기를 “나의 종제(從弟) 소유(少游)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가 세상에 나서 의식(衣食)이나 해결할 만하거든, 하택거를 타고 관단마(款段馬)를 몰고 선영의 분묘나 잘 수호하며 조용히 지내면서 향리(鄕里)로부터 선인이란 말만 들으면 될 것이요, 넘치는 행복을 구하는 것은 스스로 괴로울 뿐이다.’ 하더니, 내가 이곳에 와서 미처 오랑캐를 멸하기도 전에 장열(瘴熱)의 훈증(薰蒸)으로 인해 솔개가 수중(水中)으로 툭툭 떨어지는 것을 쳐다보면서, 내 종제가 평상시에 하던 말을 생각해 보았지만, 이제는 어쩔 수가 없구나.”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242)남주(南州)의 고사(高士):후한 때의 고사 서치(徐穉)를 가리킨다. 당시의 고사였던 곽태(郭太)가 일찍이 모상(母喪)을 당했을 적에 평소 그를 존경해 왔던 서치가 그곳에 조문을 가서는 곽태를 현사(賢士)로 존경하는 뜻에서 생꼴 한 묶음만 여막(廬幕) 앞에 두고 상주(喪主)는 만나지도 않은 채 그냥 돌아가 버렸으므로, 여러 사람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괴이하게 여기자, 곽태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반드시 남주의 고사 서유자일 것이다. 시경 백구(白駒)에 떠나는 현사를 보내기가 아쉬워 ‘흰 망아지에게 생꼴 한 묶음을 먹이노니, 그 사람이 옥 같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덕이 없구려.[此必南州高士徐孺子也 詩不云乎 生芻一束 其人如玉 吾無德以堪之]” 한 데서 온 말이다. 유자(孺子)는 서치의 자이다. 後漢書 卷53 徐穉列傳

243)어두운……같은데:자세한 내용은 336쪽 주97 참조.

244)시배(時輩)들은……하누나:시배는 당시에 유명한 인사들을 이른다. 육식자(肉食者)란 곧 고위직(高位職)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 것으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10년 조에 의하면, 제(齊)나라가 노(魯)나라를 치려고 하자, 노나라 장공이 나가 싸우려고 하므로, 조귀(曹劌)라는 이가 장공을 뵙기를 요청했다. 그러자 그의 마을 사람이 말하기를 “고위직에 있는 분이 꾀한 일인데, 또 어찌하여 참견하려 하는가?[肉食者謀之 又何間焉]” 하자, 조귀가 말하기를 “고위직에 있는 분은 식견이 모자라서 원대한 꾀를 하지 못한다.[肉食者鄙 未能遠謀]” 하였다.

245)빈……부치노라:빈 방에 광명(光明)이 생긴다는 것은 곧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빈 방 안에는 흰빛이 생기고 거기에는 좋은 징조가 깃든다.[虛室生白 吉祥止止]”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마음이 청허(淸虛)하여 욕심이 없으면 도심(道心)이 절로 생겨나는 것을 의미하고, 천유(天遊)는 역시 장자 외물(外物)에 “방 안에 공간이 없으면 며느리와 시어미가 서로 다투게 되듯이, 마음속에 자유 자적함이 없으면 육착이 서로 다투게 된다.[室無空虛 則婦姑勃谿 心無天遊 則六鑿相攘]”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마음이 외물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 자적함을 의미한다.

246)영계기(榮啓期)는……있었는데:영계기는 춘추 시대의 은사(隱士)였는데, 공자(孔子)가 일찍이 태산(泰山)을 유람하다가, 영계기가 사슴 털 갖옷에 새끼줄을 허리에 띠고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묻기를 “선생이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하자, 영계기가 대답하기를 “하늘이 만물을 낸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인데 나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요,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데 나는 남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두 가지 즐거움이요, 사람이 태어나서 포대기를 면치 못하고 죽는 아이도 있는데 나는 아흔다섯 살이 되도록 살았으니 이것이 세 가지 즐거움이다.[天生萬物 惟人爲貴 吾得爲人 一樂也 男尊女卑 吾得爲男 二樂也 人生有不免襁褓者 吾行年九十五矣 三樂也]”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孔子家語 六本

247)평자(平子)는……이루었었지:평자는 후한 때의 문인(文人) 장형(張衡)의 자이다. 그가 일찍이 하간왕 상(河間王相)으로 있을 때, 하간왕이 교만하고 사치하여 법도(法度)를 준행하지 않은 데다, 시국(時局)도 몹시 불안함을 근심한 나머지, 장(章)마다 칠언(七言), 칠구(七句)씩으로 엮은 4장(章)의 사수시(四愁詩)를 지어서 스스로 우수 번민(憂愁煩憫)의 정을 토로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59 張衡列傳

248)분분(紛紛)한……어렵거니와:옛날에 정(鄭)나라 사람이 땔나무를 하러 갔다가 사슴을 잡아 가지고 남이 볼까 봐 깊은 구덩이에 감춰 두고 파초(芭蕉) 잎으로 덮어 놓고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윽고 그 사슴 감춰 둔 곳을 잊어버리고는 마침내 꿈이라 여기고 길을 가면서 계속 그 사실을 혼자 중얼거리고 있으므로, 곁에서 그 말을 들은 자가 마침내 그의 말대로 그곳을 찾아가 사슴을 취하고, 그가 집에 돌아가서는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까 땔나무하던 사람은 꿈에 사슴을 얻고도 그곳을 알지 못했고, 내가 지금 그 사슴을 얻었으니, 저 사람은 참으로 꿈을 꾼 사람일 뿐인 것이다.[向薪者夢得鹿而不知其處 吾今得之 彼直眞夢者矣]”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列子 周穆王전하여 인간의 흐리멍덩한 삶 또는 득실(得失)의 무상(無常)함을 비유한다.

249)개굴개굴……위하누나:진 혜제(晉惠帝)가 천성이 혼암(昏暗)하여, 일찍이 태자(太子)로 있을 때 밖에 나갔다가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는 옆 사람에게 “저것이 관의 개구리냐, 사가의 개구리냐?[是官蝦蟆私蝦蟆]”라고 묻자, 시신(侍臣) 가윤(賈胤)이 대답하기를 “관의 땅에 있는 놈은 관의 개구리이고, 사가의 땅에 있는 놈은 사가의 개구리입니다.[在官地爲官蝦蟆 在私地爲私蝦蟆]” 하니, 명하여 이르기를 “관의 개구리에게는 늠료를 지급하라.[若官蝦蟆 可給廩]” 하였고, 그가 즉위한 뒤에는 또 일찍이 화림원(華林園)에서 놀다가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좌우 신하들에게 묻기를 “저 개구리가 관을 위해서 우느냐, 사가를 위해서 우느냐?[此鳴者爲官乎 私乎]” 하자, 혹자가 대답하기를 “관의 땅에 있는 놈은 관을 위해서 울고, 사가의 땅에 있는 놈은 사가를 위해서 우는 것입니다.[在官地爲官 在私地爲私]”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4 惠帝紀

250)적적한……끊겨라:전혀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거처가 아주 적막함을 말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382쪽 주183 참조.

251)방……내리보고:백성(百城)은 100개의 성이란 뜻으로 큰 나라를 의미한다. 북위(北魏) 때 처사(處士) 이밀(李謐)이 군서(群書)를 박람(博覽)하여 학식이 높았으나 벼슬할 뜻이 전혀 없었고, 온 재산을 기울여 많은 서적을 구입했던바, 그가 세심히 읽은 책만도 무려 4000여 권에 달했다고 하는데, 그가 일찍이 “장부가 만 권의 서책 가지는 것이 중요하거니, 어찌 백성 나라의 임금이 될 필요가 있겠는가.[丈夫擁書萬卷 何假南面百城]”라는 명언을 남긴 데서 온 말이다. 魏書 卷90 逸士列傳 李謐

252)해……법:옛날에 지력(地力)을 보강하기 위하여 어느 전답에 일정 기간 농작(農作)을 금했던 데서 온 말이다.

253)천금추(千金帚):하찮은 물건이라도 자기 것이면 아주 소중히 여기는 폐단을 말한 것이다. 위 문제(魏文帝)의 논문(論文)에 “속담에 ‘자기 집의 낡은 빗자루를 천금처럼 소중히 여겨 간직한다.’라고 하니, 이것은 곧 자신을 알지 못한 걱정거리인 것이다.[里語曰 家有弊帚 享之千金 斯不自見之患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54)구부전(九府錢):구부는 주(周)나라 시대에 국가의 전재(錢財)를 총관(總管)했던 9개의 부고(府庫), 즉 대부(大府), 옥부(玉府), 내부(內府), 외부(外府), 천부(泉府), 천부(天府), 직내(職內), 직금(職金), 직폐(職幣)를 말한 것으로, 바로 수많은 전재를 말하는바, 전하여 여기서는 곧 학문이나 문학, 예술 등의 방대한 범역(範域)을 의미한다.

255)대낮에……했었지:군평(君平)은 전한(前漢) 시대 촉(蜀)의 은사(隱士) 엄준(嚴遵)의 자이다. 그는 성도(成都)의 저자에서 매일 점(占)을 쳐서 생활을 영위했는데, 하루에 겨우 두어 사람의 점을 쳐서 하루 생활 할 정도의 100전(錢)만 얻으면 즉시 점방의 발을 내리고, 학도(學徒)들에게 노자(老子)를 가르쳤다고 한다. 저서에 노자지귀(老子指歸)가 있다. 漢書 卷72 嚴遵傳전하여 여기서는 매천 자신의 생활을 엄군평에 빗대서 말한 것이다.

256)바람에……꿈꾸고:여기서의 선천(先天)은 곧 태어나기 전의 배태(胚胎)를 말한다. 의종금감(醫宗金鑑)삼부탕(參附湯) 아래 주석에 의하면 “몸보다 먼저 생긴 것을 선천이라 하고, 몸보다 뒤에 생긴 것을 후천이라 한다.[先身而生 謂之先天 後身而生 謂之後天]”라고 하였다. 따라서 매미 허물이 선천을 꿈꾼다는 것은 곧 매미의 허물에도 태어나기 전의 영혼이 잠재해 있음을 의미한다.

257)우뚝우뚝……결탁하였네:정연(淨緣)은 청정(淸淨)한 인연이란 뜻으로, 청정은 곧 불가(佛家)의 교리(敎理)이고, 따라서 연꽃 또한 불가의 상징적인 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예찬한 것이다.

258)하삭(河朔)……마심:하삭은 황하(黃河) 이북 지역을 범칭한 말이다. 위 문제(魏文帝)의 전론(典論)에 “대가가 허 땅에 도읍했을 때 광록대부 유송으로 하여금 북으로 원소의 군대를 진압하게 했는데, 이때 유송은 원소의 자제들과 함께 날마다 연회를 열었던바, 매양 삼복의 혹염을 당해서는 밤낮으로 술을 진탕 마시고 극도로 취해 아무 것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곤 하였다.[大駕都許 使光祿大夫劉松北鎭袁紹軍 與紹子弟日共宴飮 常以三伏之際 晝夜酣飮 極醉 至於無知]”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太平御覽 卷31여기서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통음(痛飮)하는 것을 의미한다.

259)운대관(雲臺觀)……잠:운대관은 은자(隱者)나 도사(道士)가 거주하는 도관(道觀)의 이름이다. 북송(北宋) 초기에 도사 진단(陳摶)은 일찍부터 벼슬할 마음이 없어 큰 뜻을 품고 무당산(武當山)에 은거하다가 뒤에 화산(華山)의 운대관으로 처소를 옮겼는데, 그는 잠을 한번 자기 시작하면 많게는 100여 일씩 계속 자곤 했다고 한다. 宋史 卷457 隱逸列傳 陳摶

260)쪽부채……흔들리고:여기서 말한 쪽부채란 바로 강물에 거꾸로 비치는 푸른 산봉우리의 모습을 형용한 말인 듯하다.

261)인간의……뿌리로다:아주 청고(淸苦)한 생활을 의미한다. 송(宋)나라 왕신민(汪信民)의 말에 “사람이 항상 채소 뿌리만 먹으면서 곤궁한 생활을 견딜 수 있다면 백사를 다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人常咬得菜根則百事可做]”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당시 호안국(胡安國)은 이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여 칭찬했다고 한다. 小學 善行

262)오릉(五陵)의……동료들은:오릉은 한대(漢代)의 장안(長安)에 있던 한 고조(漢高祖), 혜제(惠帝), 경제(景帝), 무제(武帝), 소제(昭帝)의 다섯 능원(陵園)을 합칭한 말이다. 예로부터 이곳 장안 주변에는 부호가(富豪家)의 자제들로 호탕한 기개를 지닌 연소가가 많이 거주했던 데서, 전하여 여기서 말한 오릉의 동료들이란, 곧 도성(都城)에 사는 기개 있는 친구들을 가리킨 듯하다.

263)인연경(因緣境)이나 의지할 수밖에:인연경이란 불교의 용어에서 온 말로,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육식(六識)으로 인식하는 대경(對境), 곧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말한다. 전하여 여기서 인연경을 의지한다는 것은 바로 특별히 좋은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직접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물 등의 현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264)동부(洞府):본래는 신선이 산다는 선경(仙境)을 가리킨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산촌의 풍광을 선경에 빗대서 한 말이다.

265)두어……듯하지만:두어 서까래란 바로 아주 초라한 오두막집을 뜻하고, 경쇠를 걸어 놓은 듯하다는 것은 곧 집에 아무것도 없고 들보만이 흡사 경쇠를 걸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전하여 집이 몹시 가난함을 의미한다.

266)한……않음일세:벼슬할 계제가 없음을 오히려 기쁘게 여기는 뜻에서 한 말이다. 진(晉)나라 때 어떤 사람이 은호(殷浩)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벼슬자리를 얻게 될 때에는 널을 꿈꾸고, 재물을 얻게 될 때에는 똥을 꿈꾸는 것인가?[何以將得位而夢棺器 將得財而夢矢穢]”라고 하자, 은호가 말하기를 “벼슬은 본디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이기 때문에 벼슬을 얻게 될 때에는 널의 시체를 꿈꾸게 되고, 재물은 본디 똥거름 준 흙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재물을 얻게 될 때에는 똥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官本是臭腐 所以將得而夢棺屍 財本是糞土 所以將得而夢穢汚]” 하였다. 世說新語 文學

267)뜻은……하는데:신선을 흠모하는 뜻으로 한 말이다. 선경(仙經)은 도가(道家)의 경전(經典)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신선을 가리키고, 자석(煮石)은 옛날에 선인(仙人)이 흰 돌을 구워서 양식으로 삼았다는 전설에서 온 말로, 전하여 도가의 수련하는 방술을 가리킨다. 신선전(神仙傳) 백석(白石) 선생 조에 의하면 “백석 선생은 항상 흰 돌을 구워서 양식으로 삼고 인하여 백석산에 들어가 살았다.[常煮白石爲糧 因就白石山居]”라고 하였다.

268)해진 솜옷과 패옥(佩玉):패옥은 고관(高官)이 차는 것으로, 고관대작(高官大爵)을 가리킨다. 해진 솜옷이란 미천한 이의 복장을 말한 것으로,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해진 솜옷을 입고 여우 갖옷, 담비 갖옷 입은 사람과 같이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 유뿐이로다.[衣敝縕袍 與衣狐貉者 立而不恥者 其由也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유(由)는 자로(子路)의 이름이다. 論語 子罕

269)산……비슷하고:진사(晉士)는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잠의 귀전원거(歸田園居) 시에 “남산 아래 콩을 심었더니, 잡초가 무성해 콩 싹이 드물구나. 새벽에 나가서 우거진 잡초를 매고, 달빛 아래 호미 메고 돌아오네.[種豆南山下 草盛豆苗稀 晨興理荒穢 帶月荷鋤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陶淵明集 卷2

270)길……잃었구려:진후(秦侯)는 진(秦)나라 때 동릉후(東陵侯)에 봉해진 소평(邵平)을 가리킨다. 소평은 진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스스로 평민의 신분이 되어, 장안성(長安城)의 동문(東門) 밖에 오이를 심어 가꾸며 조용히 은거했는데, 특히 그 오이가 맛이 좋기로 유명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동릉과(東陵瓜)라고 일컬어지기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三輔黃圖 卷1여기서는 지금도 동릉과 같은 맛 좋은 오이는 있으나 동릉후는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271)칠석(七夕):7월 7일 밤을 말하는데, 해마다 이날이면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이 오작교(烏鵲橋)에서 서로 한 번씩 만난다는 전설이 있다. 또 예로부터 칠석날 밤이면 부녀자들이 견우, 직녀 두 별에게 길쌈과 바느질 솜씨가 늘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풍속이 있었던바, 이것을 걸교(乞巧)라고 한다.

272)허정묘(許丁卯):당대(唐代)의 시인 허혼(許渾)을 가리킨다. 허혼이 강소성(江蘇省) 단도현(丹徒縣)의 정묘교(丁卯橋) 근처 정묘장(丁卯莊)에 거주하였고, 그의 저서에 정묘집(丁卯集)이 있으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273)의관(衣冠)이……지:본디 서진(西晉) 말기에 원제(元帝)가 난리를 피해 장강(長江)을 건너서 남쪽으로 건업(建業)에 새 도읍을 정함으로써 중원(中原)의 사족(士族)들 역시 모두 난리를 피해 남쪽으로 옮겨갔고, 또 북송(北宋) 말기에 고종(高宗) 또한 난리를 피해 장강을 건너 임안(臨安)에 도읍을 정함으로써 중원의 사족들 또한 남쪽으로 옮겨갔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후세에는 흔히 피란하여 시골로 내려가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어떤 일을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274)승평(昇平):순천(順天)의 고호이다.

275)오희가(五噫歌):후한(後漢)의 은사(隱士) 양홍(梁鴻)이 지은 노래로, 다섯 구절 끝마다 한탄하는 소리를 붙여 지었다. 오희가는 다음과 같다. “저 북망산을 오름이여, 아. 제경을 돌아봄이여, 아. 궁실이 우뚝함이여, 아. 사람들의 수고로움이여, 아. 깊은 슬픔 끝이 없음이여, 아.[陟彼北邙兮 噫 顧覽帝京兮 噫 宮室崔嵬兮 噫 人之劬勞兮 噫 遼遼未央兮 噫]”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梁鴻

276)정자에……장천기(張天驥)요:장천기는 송대(宋代)의 은사로 자는 성도(聖途)이고 호는 운룡산인(雲龍山人)인데, 그가 일찍이 운룡산(雲龍山)에 은거하면서 학(鶴) 두 마리를 길렀던바, 학들이 매우 잘 길들여져서, 매일 아침마다 산인이 서산(西山)을 향하여 놓아주면, 저물녘에는 학이 스스로 동산(東山)을 향하여 돌아오곤 하였으므로, 소식(蘇軾)이 일찍이 그의 초당(草堂)인 방학정(放鶴亭)에 대한 기문(記文)을 지어 주었다. 東坡全集 卷36 放鶴亭記 蘇詩補註 卷32 元祐五年十二月十二日……游七寶寺題竹上

277)삿갓……홍경로(洪景盧)로다:홍경로는 남송(南宋) 시대 학자인 홍매(洪邁)를 가리킨다. 경로는 그의 호이다. 그는 소흥(紹興) 연간,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효종(孝宗) 때 단명 학사(端明學士)로 치사(致仕)하였고,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사기법어(史記法語), 용재수필(容齋隨筆)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삿갓을 메고 배를 노 젓는다는 것은 곧 홍매가 일찍이 역시 같은 시대의 문인(文人)이며 문신(文臣)인 신기질(辛棄疾)을 위해 지은 가헌기(稼軒記)에 “내가 다행히 늙기 전에, 신후가 큰 공명을 이루고 금의환향하여 끝내 고관대작으로 고루 거각에 지내던 향락을 그만두고 장차 삿갓을 메고 배를 노 저으며 옥계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고자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幸未黎老時 及見侯展大功名 錦衣來歸 竟厦屋潭潭之樂 將荷笠棹舟 風乎玉溪之上]”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신기질의 자는 유안(幼安), 호는 가헌(稼軒), 시호는 충민(忠敏)이며, 벼슬은 용도각 대제(龍圖閣待制), 추밀 도승지(樞密都承旨) 등을 역임했다. 그는 특히 시문(詩文)에 뛰어나서 소식과 함께 소신(蘇辛)으로 일컬어졌으며, 저서에 가헌사(稼軒詞), 가헌집(稼軒集)이 있다. 宋史 卷373 洪邁列傳, 卷401 辛葉疾列傳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36

278)운대(雲臺):섬서성(陝西省) 화음현(華陰縣)에 있는 산명(山名)인데, 옛날에 은자(隱者)나 도사(道士)들이 많이 이곳에 거주했다고 한다. 또 도관(道觀)인 운대관(雲臺觀)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운대관에 대한 내용은 415쪽 주259 참조.

279)지음(至音):본래 가장 미묘한 음악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여기서는 곧 자연의 소리를 의미한다.

280)눈물을 닦다:대본에는 ‘枚淚’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아 ‘抆淚’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281)으르렁대고:대본에는 ‘唁唁’으로 되어 있는데, 조위(弔慰)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狺狺’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282)천랑(天狼)이……나니:천랑은 별 이름으로 흔히 잔포(殘暴)한 침략자에 비유되는바, 전하여 여기서는 왜인(倭人)을 비유한 것이고, 무녀(婺女)는 역시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여수(女宿)를 가리킨 것으로, 전하여 여기서는 왜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가리킨 듯하다.

283)구중궁궐은……지키누나:여기서 범은 왜인을 가리킨 것이다.

284)무양(巫陽)이……불러오자:무양은 고대(古代) 전설상의 여무(女巫)를 가리키는데, 사자(死者)의 넋을 잘 불렀다고 한다. 천손(天孫)은 직녀성(織女星)의 별칭으로, 이 또한 명성황후를 가리킨 것이다.

285)육정(六丁):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정묘(丁卯), 정사(丁巳), 정미(丁未), 정유(丁酉), 정해(丁亥), 정축(丁丑)의 여섯 정신(丁神)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본래 천제(天帝)의 부림을 받는 신들이다. 도사(道士)의 경우는 부록(符籙)을 사용하여 이들을 불러서 부릴 수가 있다고 한다.

286)벚꽃은……사납구려:당(唐)나라 두숙향(竇叔向)의 정의황후만가(貞懿皇后挽歌)에 의하면 “명부들은 수초의 잎을 제수로 삼고, 도성 사람들은 벚꽃을 머리에 꽂았네.[命婦羞蘋葉 都人揷奈花]”라고 하였다.

287)건문(建文)의……통곡커니와:건문은 명(明)나라 혜제(惠帝)의 연호로, 전하여 혜제를 가리키는데, 그는 즉위한 이후 방효유(方孝孺) 등을 등용해서 전장제도(典章制度)를 일신하여 치적이 훌륭하였다. 그러나 연왕(燕王) 체(棣)가 군대를 일으켜 경사(京師)를 함락했을 때, 혜제는 끝내 죽은 곳을 알 수 없게 되었고, 그 후비(后妃)의 시신만 불 속에서 끌어내서 장사를 지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明史 卷4 恭閔帝本紀여기서는 곧 명성황후가 왜인에게 시해당한 다음 불에 태워지기까지 했던 일을 혜제 후비의 일에 빗대서 한 말이다.

288)김이(金怡)의……의탁할쏜가: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모비(母妃)인 의비(懿妃)가 원(元)나라에서 죽었는데, 상구(喪具)가 준비되지 않아서, 당시 평리(評理)로 있던 김이가 의비의 시신을 화장하여 그의 유골을 함에 담아서 친히 묻어 주고 삭망(朔望) 때마다 양주(羊酒)를 갖추어 전제(奠祭)를 올려 오다가 뒤에 본국(本國)으로 환장(還葬)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東史綱目 卷13 忠肅王3年전하여 여기서는 곧 왜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이어 그 시신을 불에 태워서 뒷산에 묻었던 것을 뒤에 다시 홍릉(弘陵)으로 이장(移葬)하게 된 경위를 충숙왕의 모비인 의비의 일에 빗대서 한 말이다.

289)주유(珠襦) 옥갑(玉匣):옛날 제왕(帝王), 후비(后妃) 및 귀족의 장례에 사용했던 염복(殮服)이다. 주유는 곧 구슬로 갑옷 모양처럼 만든 속옷인데, 황금 실로 구슬을 연해서 꿰맨 것이고, 옥갑은 곧 허리 밑으로 갑(匣)처럼 만들어서 역시 황금 실로 꿰맨 것이다.

290)광중(壙中)이 벽옥(碧玉)으로 화(化)하고:춘추 시대 주 경왕(周敬王)의 대부(大夫) 장홍(萇弘)이 일찍이 진(晉)의 범씨(范氏), 중행씨(中行氏)의 난(難)에 간여했다가 진인(晉人)의 참소를 입어, 경왕에게 충간(忠諫)을 하였으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촉(蜀) 땅으로 들어가서 분개함을 견디지 못해 자결하였는데, 촉 지방 사람들이 그의 충성에 감격하여 그의 피를 잘 간직해 두었던바, 3년 뒤에 그의 피가 벽옥으로 변화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國語 周語下 莊子 外物

291)소길(蕭吉)이 성인을 속였다:지관(地官)이 처음에 명성황후의 장지(葬地)를 잘못 간택했음을 의미한다. 처음 명성황후를 청량리(淸涼里)에 있는 홍릉(弘陵)에 장사  지냈다가 자리가 좋지 않아서 뒤에 다시 양주군(楊州郡) 미금면(渼金面) 금곡리(金谷里)로 옮겼다. 소길은 수 문제(隋文帝) 때의 문신(文臣)으로 음양서(陰陽書)에 매우 밝았던바, 문제의 비(妃) 독고씨(獨孤氏)가 죽었을 때 문제가 의동삼사(儀同三司) 소길에게 황후(皇后)의 장지를 간택하게 한 결과, 소길이 어느 한 곳을 정해 놓고 속여 말하기를 “햇수로는 이천 년, 대수로는 이백 세를 누릴 것입니다.[卜年二千 卜世二百]”라고 하므로, 문제가 말하기를 “길흉은 사람에 달린 것이지, 땅에 달린 것이 아니다. 고위(高緯)는 자기 아비의 장지를 어찌 잘 간택하지 않았겠는가마는 그 나라가 이내 멸망하였다. 그것이 정히 우리 집안의 묘지와 같다. 우리 집안의 묘지가 만일 길하지 못했다면 내가 의당 천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만일 흉하지 않았다면 내 아우가 전사하지 않았을 것이다.[吉凶由人 不在於地 高緯父葬 豈不卜乎 國尋滅亡 正如我家墓田 若云不吉 朕不當爲天子 若云不凶 我弟不當戰沒]” 하였다. 그러나 끝내 소길의 말대로 그곳에 황후를 장사하였는데, 뒤에 소길이 자기 족인(族人)인 소평중(蕭平仲)에게 조용히 고하기를 “지금의 태자가 즉위하면 수나라는 곧 망할 것이고, 의당 진인이 나와서 천하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내가 앞서 상께 ‘햇수로 이천 년을 누릴 것이라.[卜年二千]’라고 속여 말한 것은 바로 ‘삼십자(三十字)’를 의미한 것이고, ‘대수로 이백 세를 누릴 것이라.[卜世二百]’라고 한 것은 바로 ‘삼십이운(三十二運)’을 취한 것이다. 내 말이 틀림없으니, 너는 잘 기억해 두어라.[太子得政 隋其亡乎 當有眞人出治之矣 吾前紿云 卜年二千者 是三十字也 卜世二百者 取三十二運也 吾言信矣 汝其誌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독례통고(讀禮通考)에 의하면, 소길의 말이 다음과 같이 조금 달리 기재되어 있다. “내가 앞서 상께 ‘햇수로 이천 년을 누릴 것이라.’라고 속여 말한 것은 바로 ‘이십자(二十字)’를 의미한 것이고, ‘댓수로 이백세를 누릴 것이라.’라고 한 것은 바로 ‘세대가 두 번 전함[世二傳]’을 취한 것이다.[吾前紿之云 卜年二千者 二十字也 卜世二百者 取世二傳也]” 隋書 卷78 藝術列傳 蕭吉 讀禮通考 卷89

292)꿈속에……덮었으니:송 신종(宋神宗)의 모후(母后)인 자성광헌황후(慈聖光獻皇后)가 훙(薨)했을 때 신종이 슬픔과 그리움이 사무친 나머지, 어떤 자가 신술(神術)로 사자(死者)를 다시 살릴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그자에게 그 신술을 시험해 보도록 했으나, 아무런 응험도 없었다. 그러자 그자가 말하기를 “신이 뵈오니, 태황태후께서 방금 인종과 연회를 하시고 백옥 난간에 납시어 모란꽃을 감상하시면서 다시 인간에 돌아오실 뜻이 없었습니다.[臣見太皇太后方與仁宗宴 臨白玉欄干 賞牡丹 無意復來人間也]”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황후의 죽음을 의미한다. 당시 문신(文臣) 채승희(蔡承禧)가 올린 태황태후 만사(挽詞)에 의하면 “천상의 백옥 난간에 꽃이 이미 꺾였는데, 인간 방사의 술법을 그 어디에 쓰겠는가.[天上玉欄花已折 人間方士術何施]”라고 하였다. 類說 卷17

293)어느……돌아올런고:요양(遼陽)은 곧 요동(遼東)을 가리킨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306쪽 주35 참조.

294)선정(宣靖)……것:선정은 조선 성종(成宗)의 능인 선릉(宣陵)과 중종(中宗)의 능인 정릉(靖陵)을 합칭한 말이다. 이 두 능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군들에게 도굴의 화(禍)를 입었던 데서 온 말이다. 겁회(劫灰)가 날렸다는 것은 곧 전란(戰亂)이나 큰 화재를 겪은 뒤의 잔적(殘迹)을 가리켜 한 말이다.

295)눈……차가우니:당대(唐代)의 시인 가지(賈至)의 송이시랑부상주(送李侍郞赴常州) 시에 “눈 개고 구름 흩어지고 북풍이 차가우니, 초나라 물 오나라 산은 도로가 험난할 걸세. 오늘 그대 보내면서 실컷 취해야 하고말고, 내일 아침에 생각하면 그대 가는 길 아득하리.[雪晴雲散北風寒 楚水吳山道路難 今日送君須盡醉 明朝相憶路漫漫]”라고 한 데서 온 시구이다. 古今事文類聚 別集 卷24

296)지피(紙被):원래는 옛날 등(藤)에서 추출한 섬유(纖維)로 만든 종이를 가지고 지은 이불을 말하는데, 전하여 여기서는 얇은 무명 이불을 가리키는 듯하다.

297)화택(火宅):불교의 용어인데, 본디 고통이 많은 속세를 뜨거운 집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전하여 속세를 가리킨다.

298)천추(千秋)의……듯:옥가루를 쏟는다는 것은 곧 훌륭한 시문이나 유창한 담론을 비유한 말이다.

299)무쇠……뿐이네:무쇠 벼루란, 오대(五代) 시대 진(晉)의 상유한(桑維翰)이 일찍이 진사(進士)에 응시했을 때 시관(試官)이 그의 성(姓) 자가 상(喪)과 동음(同音)이라는 이유로 꺼리어 그를 빼 버렸으므로, 혹자가 그에게 굳이 진사 급제를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달리 벼슬을 구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자, 그가 분개하게 여겨 일출부상부(日出扶桑賦)를 지어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고, 또 무쇠 벼루를 주조하여 남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 벼루가 다 닳거든 마음을 바꿔 다른 길로 벼슬을 구하겠다.” 하고는, 그 후로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끝내 진사에 급제했던 데서 온 말이다. 舊五代史 卷89 晉書 桑維翰列傳전하여 문필의 공부에 열중함을 의미한다.

300)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세간은 세간에 있으면서 불도(佛道)를 닦는 것을 뜻하고, 출세간은 출가(出家)하여 불도를 닦는 것을 의미한다. 출세간은 본디 불교의 용어로, 생사를 초탈하는 것을 이른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출가하여 불도를 닦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

301)유마(維摩)는……기뻐했었지:유마는 석가모니의 속제자(俗弟子)인 유마힐거사(維摩詰居士)를 가리키고, 십홀방(十笏房)은 홀(笏), 즉 수판(手板) 10개를 용납할 정도의 방을 말한 것으로, 아주 작은 방을 가리킨다. 수당가화(隋唐嘉話)에 의하면 “유마거사의 석실은 수판을 가지고 종횡으로 헤아린 결과 십홀을 용납할 정도였다.[有維摩居士石室 以手板縱橫量之 得十笏]”라고 하였다. 그리고 참선(參禪)으로 기뻐했다는 것은 곧 선정(禪定)에 들어가서 심신을 기쁘게 했다는 뜻으로, 유마힐경(維摩詰經) 방편품(方便品)에 “아무리 보배로운 장식을 착용했더라도 상호로써 몸을 장엄하게 하고, 아무리 음식을 먹더라도 참선의 기쁨을 좋은 맛으로 삼아야 한다.[雖服寶飾 而以相好嚴身 雖復飮食 而以禪悅爲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상호(相好)는 역시 불교의 용어인바, 불경에서 석가모니의 용모를 가리켜 32종(種)의 상(相)과 82종의 호(好)가 있다고 칭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부처다운 용모를 의미한다.

302)늙은……과시하거니와:춘추 시대 제(齊)나라 관중(管仲)과 습붕(隰朋)이 일찍이 환공(桓公)을 수행하여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했는데, 봄에 갔다가 겨울에야 돌아오면서 옛길을 잃어버리고 헤매게 되자, 관중이 말하기를 “늙은 말의 지혜를 쓸 만하다.[老馬之智可用也]” 하고, 이에 늙은 말을 풀어놓아 말 가는 대로 따라가다가 마침내 옛길을 찾게 되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韓非子 說林전하여 늙은 말이 길을 안다는 것은 곧 어떤 일에 대해서 경험이 많은 사람이 선도자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303)훌륭한……전한다지: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정공(定公) 13년 조에 “팔이 세 번 부러져 봐야만 훌륭한 의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三折肱 知爲良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세 번 팔을 분질렀다는 것은 곧 여러 차례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보아야만 그 팔을 치료할 방법을 알게 된다는 뜻으로, 전하여 세상일에 경험이 많음을 비유한다.

304)매화설(梅花雪):매화와 눈을 합칭한 말로 쓰이기도 하나, 흔히 하얗게 만발한 매화를 흰 눈에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305)풍아(風雅):가장 고상한 시가(詩歌)로 일컬어진 시경국풍(國風)대아(大雅), 소아(小雅)를 합칭한 말이다.

306)근체시(近體詩):고체시(古體詩)에 대하여 율시(律詩)와 절구(絶句)를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307)육대(六代):삼국(三國) 시대 오(吳)로부터 그 이하 건강(建康)에 도읍한 여섯 국조(國朝), 즉 오(吳),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시대를 말한다. 이를 흔히 육조(六朝)라고 칭한다.

308)승두 세자(蠅頭細字):자세한 내용은 388쪽 주193 참조.

309)절굿공이……만들면:이백(李白)이 젊었을 때 일찍이 상이산(象耳山)에서 글을 읽다가 미처 학업을 성취하지 못한 채 그곳을 버리고 떠나는 도중에 한 노파를 만났는데, 그 노파가 한창 무쇠 절굿공이를 갈고 있으므로, 이백이 그 까닭을 묻자, 노파가 말하기를 “이것으로 바늘을 만들려고 한다.[欲作針耳]” 하므로, 이백이 그의 말에 느낀 바가 있어 마침내 다시 되돌아가서 학업을 다 마쳤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蜀中廣記 卷12

310)혼박(渾璞):아직 탁마(琢磨)의 가공을 거치지 않은 옥덩이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여기서는 아직 문식(文飾)되지 않은 천연의 아름다운 자질에 비유한 것이다.

311)거우(琚瑀)와 규장(珪璋):거우는 패옥(佩玉) 이름이고, 규장은 고대(古代)에 조빙(朝聘)과 제사에 주로 쓰이던 옥제(玉製)의 예기(禮器)이다.

312)군자는……드러나느니라:중용장구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이는 문채가 너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어둑하여 은은한 가운데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반짝 빛나서 날로 없어진다.[詩曰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하였다.

313)검은……있는데:고별(告別)을 뜻한다. 원문의 ‘여구(驪駒)’는 일시(逸詩)의 편명으로, 손이 떠나려고 할 때 부른 노래라고 한다. 대대례(大戴禮)에 나온다. 그 가사에 의하면 “검은 말이 문에 있으니, 마부가 함께 있도다. 검은 말이 길에 나서니, 마부가 멍에를 정돈하도다.[驪駒在門 僕夫俱存 驪駒在路 僕夫整駕]”라고 하였다.

314)무술고(戊戌稿):1898년(광무2), 매천의 나이 44세 때 지은 시고이다.

315)살아서는……하고:형색(形色)은 사람이 타고난 바른 형체(形體)와 색(色)을 합칭한 것으로,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형색은 타고난 성이니, 오직 성인이어야만이 타고난 형색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形色 天性也 惟聖人然後 可以踐形]”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316)죽어서는……하다마다:공자(孔子)가 일찍이 송(宋)나라에 있을 때, 환 사마(桓司馬)가 자신의 석곽(石槨)을 워낙 호사스럽게 만드느라 3년이 걸려서도 다 이루지 못한 것을 보고 이르기를 “이렇듯 화려하게 하기보다는 죽어서 빨리 썩는 것이 나으니라.[若是其靡也 死不如速朽之愈也]”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上

317)재앙과……와서:선을 쌓으면 복을 받고 악을 지으면 재앙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남은 복이 있고, 불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남은 재앙이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라고 하였고, 한유(韓愈)가 일찍이 맹 상서(孟尙書)에게 준 글에는 “선을 많이 쌓거나 악을 많이 쌓은 데 대하여 재앙과 복이 각각 그 유를 따라서 이르는 것인데, 어찌 성인의 도를 버리고 선왕의 법도를 버리고 오랑캐의 가르침을 좇아서 부처에게 복을 구할 리가 있겠는가.[積善積惡 殃慶各自以其類至 何有去聖人之道 舍先王之法 而從夷狄之敎 以求福利也]”라고 하였다. 東雅堂昌黎集註 卷18

318)가령……할지라도:옛날에 선인(仙人) 조성자(趙成子)라는 사람이 일찍이 남악부인(南岳夫人)에게 도를 닦고 나서는 다시 태음(太陰)으로 들어가 형모(形貌)를 바꾸어 태어나기 위해 유주(幽州) 현구(玄丘)의 석실(石室) 아래서 스스로 죽었는데, 그가 죽은 지 5, 6년 뒤에 산행하던 사람이 그곳을 지나다 보니, 백골이 석실에 그대로 있고 또 오장(五臟)이 스스로 살아서 썩지 않은 것이 마치 생시와 같고 오색 꽃이 그 안에 환히 광채를 발하므로, 산행하던 사람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예전에 듣건대, 오장을 잘 기르면 썩지 않게 할 수 있다더니, 백골 안에서 꽃핀 사람을 오늘에 보았도다.[昔聞五臟可養 以至不朽 白骨中生花者 覩其人矣]”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雲笈七籤 卷86

319)척교(跖蹻):옛날에 대도(大盜)로 악명이 높았던 도척(盜跖)과 장교(莊蹻)를 합칭한 말이다.

320)여우가……있으랴:여우가 묻고 파고 한다는 것은 곧 여우가 무덤의 시체를 파먹으려고 흔히 무덤을 파헤치는 일이 있던 데서 온 말이고, 천사(千駟)는 말 4000필을 말하는데,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제 경공은 천사의 말을 가졌었으나, 그가 죽은 날에 백성이 그에게 덕이 있었다고 칭하는 자가 없었다.[齊景公有馬千駟 死之日 民無德而稱焉]”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큰 부(富)를 의미한다. 論語 季氏여기서는 곧 사람들이 흔히 명당(明堂)을 가려 묘(墓)를 쓰고 부자가 되기를 기원하는 풍조에 대해서 매우 부정하는 의미로 한 말이다.

321)곽양(郭楊):진(晉)나라 곽박(郭璞)과 당(唐)나라 양균송(楊筠松)을 합칭한 말이다. 문장가이기도 했던 곽박은 오행(五行), 천문(天文), 복서(卜筮) 등의 술수(術數)에도 정통하였고, 특히 지리(地理)에 밝아서 장경(葬經) 등의 지리서(地理書)를 저술하기도 했다. 양균송 또한 지리에 밝아서 감룡경(撼龍經), 청낭오어(靑囊奧語) 등의 많은 지리서를 저술했다고 한다.

322)신도(神道)로……만들었다지:귀신 섬기는 일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시킨 것을 의미한다.

323)지술(地術):풍수설(風水說)에 의하여 지리(地理)를 살펴서 묏자리, 집터 등의 좋고 나쁨을 알아내는 술법을 말한다.

324)영등신(永登神):민속(民俗)에서 ‘영등할머니’라고 일컫는 신을 말한다. 21일에 내려와서 농가(農家)의 여러 가지 일들을 살펴보고 20일에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는데, 그 신이 내려오는 날 비가 오면 풍년이 들고, 바람이 불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325)백성의……보네:제 눈자위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알지 못하는 데 비유한 말이다. 전국 시대 초 장왕(楚莊王)이 월(越)을 치려고 하자, 두자(杜子)가 간하기를 “어리석은 신은 지혜가 눈과 같을까 염려됩니다. 사람의 눈이란 백보 밖은 잘 보면서도 자신의 속눈썹은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臣愚患智之如目也 能見百步之外 而不能自見其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韓非子 喩老

326)총사(叢祠):본래는 숲 속에 있는 신묘(神廟)를 가리키는데, 전하여 일반적으로 신을 모시는 사당을 의미한다.

327)추로향(鄒魯鄕):추나라는 맹자(孟子)의 고향이고, 노나라는 공자(孔子)의 고향이었던 데서, 전하여 추로향이란 곧 문화가 아주 창성한 고장을 말한다.

328)조두(俎豆)와 현송(絃誦)의 교화:조두는 제사 때 쓰는 제기(祭器)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제례(祭禮)를 가리키고, 현송은 거문고를 타고 시가(詩歌)를 읊는 것을 이르는 말로, 전하여 시서 예악(詩書禮樂)의 교화를 뜻한다. 공자가 일찍이 제자인 자유(子游)가 다스리던 무성(武城) 고을에 이르렀을 때, 자유가 시서 예악으로 그곳 백성들을 교화시킨 결과, 백성들이 모두 거문고를 타고 시가를 노래하므로, 공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농으로 이르기를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割雞焉用牛刀]”라고 하였다. 論語 陽貨

329)음사(淫祀):아무 귀신에게나 함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 하(曲禮下)에 “자기가 제사 지낼 귀신이 아닌데 제사 지내는 것을 음사라 이름한다.[非其所祭而祭之 名曰淫祀]”라고 하였다.

330)동경(東京)의……것:동경은 곧 경주(慶州)를 가리킨 것으로, 동경의 야호(野狐)란 바로 경주 최씨(慶州崔氏)로서 동학 교조(東學敎祖)인 최제우(崔濟愚)를 가리키고, 경예(鯨鯢)는 고래의 암컷과 수컷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흉악한 적인(敵人)을 가리키며, 무고하게 살육당한 사람들에 비유하기도 한다. 최제우는 젊어서부터 전국 각지를 돌며 구도행각(求道行脚)에 나섰고, 뒤에 천성산(天聖山) 내원암(內院庵)에 들어가 술수(術數)를 터득한 이후에는 도술을 부려 차츰 기인(奇人)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그 후 그는 이를 바탕으로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敎理)를 완성하고 동학(東學)을 창시하여 널리 포교를 해 오다가, 마침내 조정에서 내려보낸 선전관(宣傳官) 정운귀(鄭雲龜)에게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大邱) 장대(將臺)에서 처형되었던바, 끝내 이 사건으로 인하여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나서 수많은 인민이 살육당했던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 특히 최제우를 야호라 칭한 것은 그가 전국 각지를 돌며 구도행각을 벌이고, 끝내 도술을 부려 기인으로 행세한 일 등의 음흉한 행적을 가지고 그를 배척하여 이른 말이다.

331)어느……떠났나:명홍(冥鴻)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하늘 높이 나는 기러기를 말한 것으로, 흔히 은사(隱士)를 비유한다. 기러기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긴 데에 대한 내용은 325쪽 주77 참조.

332)반세상……채:택상(宅相)은 훌륭한 외손(外孫)을 말한다. 진(晉)나라 때 위서(魏舒)가 어려서 고아가 되어 외가인 영씨(寧氏) 집에서 자랐던바, 일찍이 영씨가 집을 지으려고 할 적에 집터를 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반드시 귀한 생질을 두겠다.[當出貴甥]” 하므로, 위서의 외조모(外祖母)가 위서의 총명함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위서가 바로 그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위서는 또한 말하기를 “의당 외가를 위하여 내가 이 집터의 상대로 되겠다.[當爲外氏 成此宅相]” 하더니, 뒤에 과연 위서가 현달(顯達)하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41 魏舒列傳여기서는 외손 노씨(盧氏)가 위서처럼 현달하지 못하고 죽은 것을 의미한다.

333)상여……속죄하노라:해가(薤歌)는 해로가(薤露歌)의 약칭으로, 상여가 나갈 때에 부르는 만가(輓歌)를 말하는데, 사람의 생명은 부추 잎에 내린 이슬처럼 허무하다는 뜻에서 이렇게 일컫는다. 후건(餱愆)은 시경 벌목(伐木)에 “산비탈에서 나무를 베거늘, 거른 술이 많기도 하여라. 변두가 질서 정연히 놓였으니, 형제들이 먼 사람까지 다 있도다. 사람들이 덕을 잃는 것은, 말린 밥 때문에 허물이 생기나니, 술이 있으면 내가 거를 것이요, 술이 없으면 내가 받아 올 것이요, 북을 둥둥 내 울리며, 덩실덩실 내 춤을 추어, 내 한가한 때를 만나서, 이 거른 술을 마시리라.[伐木于阪 釃酒有衍 籩豆有踐 兄弟無遠 民之失德 乾餱以愆 有酒湑我 無酒酤我 坎坎鼓我 蹲蹲舞我 迨我暇矣 飮此湑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말린 밥이란 하찮은 음식을 말한 것으로, 친구 사이에 하찮은 음식이나마 서로 나누어 먹지 않아 허물을 짓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334)허함(虛銜):실지 직무는 집행하지 않고 벼슬자리의 명목만 가지는 벼슬을 말한다.

335)춘풍(春風)이……했던고:춘풍은 은택을 비유한 말로, 즉 농민들이 신씨(申氏)의 은택에 감격하여 모두 눈물을 흘렸음을 의미한다. 신씨가 은택을 베푼 데에 관한 내용은 자주(自註)에 나타나 있다.

336)그대가……힘입어:의발(衣鉢)은 본디 불교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전법(傳法)의 표신으로 주는 가사(袈裟)와 식기(食器)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특히 학문을 전수하는 등의 경우에 쓰이고, 당에 올랐다는 것은 공자가 이르기를 “유는 당에까지 올랐고 실에만 들지 못했을 뿐이다.[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학문의 조예가 썩 깊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337)강한(江漢)의……하누나:진대(晉代)의 재상(宰相) 유량(庾亮)이 일찍이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어 무창(武昌)에 있을 때 장강(長江) 가에 누각을 세우고 이를 남루(南樓)라 하였는데, 어느 가을날 밤에 달이 막 떠오르고 천기(天氣)가 아주 쾌청하자, 유량이 남루에 올라가서 그의 좌리(佐吏)인 은호(殷浩), 왕호지(王胡之) 등과 함께 시를 읊조리며 고상한 풍류를 만끽했던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강한의 풍류란 곧 관장(官長)이 요속(僚屬)들과 주연(酒宴)을 열고 시를 읊조리며 풍류를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두보(杜甫)의 강릉절도사양성군왕신루성왕청엄시어판관부칠자구동작(江陵節度使陽城郡王新樓成王請嚴侍御判官賦七字句同作) 시에 의하면 “퇴청한 여가에는 막료들을 맞아 즐기니, 강한의 풍류가 만고에 길이 전하리로다.[自公多暇延參佐 江漢風流萬古情]”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21

338)연화막(蓮花幕)……같았어라:연화막은 진(晉)나라 때 재신(宰臣) 왕검(王儉)의 막부(幕府)를 연화지(蓮花池) 또는 홍련막(紅蓮幕)으로 예찬했던 데서, 즉 재상 대신(宰相大臣)의 막부를 가리키는데, 일찍이 유고지(庾杲之)가 왕검의 막료(幕僚)로 채용되었을 때, 소면(蕭緬)이 왕검에게 보낸 편지에 “성부(盛府)의 원료(元僚)는 참으로 적임자를 얻기 어려운데, 유경행(庾景行)이 푸른 물에 둥둥 떠서 연꽃을 의지하니[泛綠水依芙蓉], 어쩌면 그리도 화려하단 말인가.”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훌륭한 막료를 지칭하기도 한다. 경행(景行)은 유고지의 자이다. 南史 卷49 庾杲之列傳 白樂天詩集 卷19하루가 1년 같다는 것은 흔히 하루가 1년같이 지루하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그와 반대로 하루의 가일(暇日)이 1년과 맞먹을 만큼 한가롭고 즐겁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백거이(白居易)의 견우급사가일상직기남성제랑관인이희증(見于給事暇日上直寄南省諸郞官因以戱贈) 시에 의하면 “그대는 천선의 몸으로 지선을 희롱하여, 하루의 휴가를 천년만큼이나 과장하였네.[倚作天仙弄地仙 誇張一日抵千年]”라고 하였다.

339)동실동실한……얻었네:여기서 밝은 구슬이란 곧 좋은 시를 비유한 말이다.

340)교룡산성(蛟龍山城):전라도 남원(南原)에 있던 성(城) 이름이다.

341)등루부(登樓賦)……않았구려:등루부는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왕찬(王粲)이 일찍이 동탁(董卓)의 난리를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하고 있을 적에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 고향을 생각하면서 진퇴 위구(進退危懼)의 정을 서술하여 지은 부인데, 그 부에 의하면 “참으로 아름답지만 내 고향이 아니거니, 어찌 족히 조금이나마 머무를 수 있으랴.[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留]”라는 등의 고향을 몹시 그리워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文選 卷11전하여 여기서는 김효찬(金孝燦) 또한 남원부 관찰사(南原府觀察使) 백낙륜(白樂倫)의 막료로 있으면서 어려운 객지 생활을 한 것을 왕찬의 고사에 빗대서 한 말이다.

342)환선정(喚仙亭):전라남도 순천(順天) 죽도봉공원(竹島峯公園)에 있는 정자이다. 1543년(중종38)에 부사(府使) 심통원(沈通源)이 처음으로 지금의 순천시 동천(東川) 가에 건립하여 무예를 연습하는 강무정(講武亭)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소실되었다가 1614년(광해군6)에 부사 유순익(柳舜翼)이 중건(重建)하였고, 1826년(순조26)에 부사 김정균(金鼎均)이 중수(重修)하였으며, 1869년(고종6)에 부사 성이호(成彛鎬)가 다시 중수했다고 한다.

343)연자루(燕子樓):자세한 내용은 374쪽 주172 참조.

344)신악부(新樂府):악부가사(樂府歌辭)의 체(體)를 본떠서 지었으나 성률(聲律)을 입히지 않은 가사를 말한다. 이 신악부는 초당(初唐) 시대부터 나오기 시작하여 이백(李白), 두보(杜甫)에게서 더 발전하였고, 원진(元稹), 백거이(白居易)에 이르러 더욱더 발전하여 ‘신악부’라는 명칭이 정해졌다고 한다. 악부가사는 본래 시사(時事)를 풍유(諷諭)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점으로 보아, 전하여 여기서는 역시 시사를 풍유한 좋은 시를 의미한다.

345)목롯집……어이할꼬:한대(漢代)의 문장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탁왕손(卓王孫)의 딸 탁문군(卓文君)을 아내로 삼아 자기 고향인 성도(成都)로 돌아갔으나, 집이 하도 가난하여 세간살이는 하나도 없고 오직 사면(四面)으로 벽만 둘려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탁문군과 함께 목롯집을 마련하여 탁문군은 술을 팔고 자신은 쇠코잠방이를 입고 천인(賤人)들 틈에 섞여 시중(市中)에서 그릇 닦는 일을 하면서도 탁문군과 행복하게 살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여기서는 한경선(韓景善) 노인이 젊어서 혹 술집을 경영한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닌가 싶으나 자세하지 않다.

346)선오(善吾):이병호(李秉浩)로, 자는 선오, 호는 백촌(白村)이다. 매천의 제자인 듯하다.

347)난산(亂山):높낮이가 가지런하지 않게 여기저기 어지러이 솟은 산봉우리를 말한다.

348)어찌……살겠나마는:한유(韓愈)의 기노동(寄盧仝) 시에 “물 북쪽에 살던 은사는 명성을 얻어서, 지난해에 절도사의 막료가 되어 갔네.[水北山人得名聲 去年去作幕下士]”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물 북쪽에 살던 은사란 바로 처사(處士) 석홍(石洪)을 가리킨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한유의 송석홍처사서(送石洪處士序)에 나온다. 韓昌黎集 卷5

349)담장……무방하구나:후한(後漢) 때 은사(隱士) 왕군공(王君公)은 난리를 만나서 홀로 멀리 피란하지 않고 시장 바닥에서 소거간꾼 행세를 하면서 숨어 살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두고 논평하기를 “담장 동쪽에서 난세 피하는 이는 왕군공이다.[避世牆東王君公]”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83 隱逸列傳 逢萌전하여 담장 동쪽이란 곧 시장 바닥의 은거지를 의미한다.

350)만경(曼卿)은……했는데:만경은 송대(宋代)의 시인 석연년(石延年)의 자이다. 그가 시로는 소순흠(蘇舜欽), 매요신(梅堯臣) 등과 명성을 나란히 하여 구양수(歐陽脩)로부터 많은 찬사를 입었고, 특히 술을 매우 즐기어 통음(痛飮)을 자주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주선(酒仙)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그는 매양 손들과 통음을 하고 나서는 관(冠)을 벗고 맨발을 벗은 채 형틀을 채우고 앉아서 스스로 이를 ‘수음(囚飮)’이라 하고, 혹 나무에 올라가서 스스로 이를 ‘소음(巢飮)’이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宋史 卷442 文苑列傳 石延年 夢溪筆談 人事1

351)우수(迂叟)는……살았었지:우수는 당(唐)의 시인 백거이의 자호(自號)이며, 또한 송(宋)의 명신(名臣) 사마광(司馬光)의 자호이기도 한데, 이들에게는 특별히 굴을 파고 살았던 일을 상고할 길이 없어 누구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또한 우수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늙은이란 뜻으로, 혹 매천 자신을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352)아직도……말일세:태허(太虛)는 송대(宋代)의 시인 진관(秦觀)의 자이고, 손을 마주해 붓을 휘두른다는 것은 곧 문사(文思)가 아주 민첩함을 뜻한 것으로, 황정견(黃庭堅)의 병기형강즉사(病起荊江卽事) 시에 “문 닫고 앉아 시구 찾는 이는 진무기이고, 손 마주해 붓 휘두르는 이는 진소유로다.[閉門覓句陳無己 對客揮毫秦少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소유(少游) 또한 진관의 자이다. 진관의 호는 회해(淮海)이므로, 세인(世人)들이 그를 진회해(秦淮海)라고도 칭하였다. 그는 일찍이 소식(蘇軾)에 의해 현량방정(賢良方正)으로 천거되어 태학박사(太學博士), 국사원 편수(國史院編修)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宋史 卷444 文苑列傳 秦觀

353)일홀(一笏):홀은 옛날 관원들이 조회(朝會) 때 손에 쥐는 장방형(長方形)의 수판(手板)을 가리킨다. 전하여 좁고 길쭉한 물건을 형용하는 말로도 쓰이는바, 여기서는 곧 좁고 길쭉한 산을 말한다.

354)새 그림:여기서는 초여름의 막 파래진 산수의 경치를 형용한 말이다.

355)항아리……울어대누나:남조 송(宋)의 은사(隱士) 대옹(戴顒)이 어느 봄날에 감귤 두 개, 술 한 말[雙柑斗酒]을 휴대하고 나가므로, 어떤 이가 그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가서 꾀꼬리 소리를 들을 것이다. 꾀꼬리 소리는 속인의 귀를 일깨우는 침폄과 같아서 시상을 고취시켜 준다오. 그대는 그것을 아는가?[往聽黃鸝聲 此俗耳針砭 詩腸鼓吹 汝知之乎]”라고 한 데서 온 이다. 雲仙雜記 卷2전하여 감귤과 술은 봄날의 흥겨운 놀이의 뜻으로 쓰인다.

356)괴안몽(槐安夢):자세한 내용은 407쪽 주235 참조.

357)산인(山人)의……게:여기서 산인은 곧 매천 자신을 가리킨 말이고, 시제(詩題)가 안 맞다는 것은 시의 제목과 시의 내용이 서로 걸맞지 않음을 의미한다.

358)머리 말리며:흔히 고결하게 세속을 초탈한 행위의 의미로 쓰인다. 초사(楚辭) 구가(九歌) 소사명(少司命)에 “너와 더불어 함지에서 머리를 감고, 너와 함께 태양 구석에서 머리를 말리리라.[與女沐兮咸池 晞女髮兮陽之阿]”라고 하였다.

359)수염 배배 꼬며:자세한 내용은 326쪽 주78 참조.

360)가난한……따르고:안촉(顔蠋)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은사(隱士)이다. 제 선왕(齊宣王)이 일찍이 안촉을 만나 보고 말하기를 “안 선생이 과인과 교유만 해 준다면 음식은 반드시 태뢰로 대접하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수레를 타게 할 것이며, 처자에게도 화려한 의복을 입게 해 드리겠소.[顔先生與寡人游 食必太牢 出必乘車 妻子衣服麗都]”라고 하자, 안촉이 사양하고 떠나려면서 말하기를 “대저 옥은 산에서 나는데 이것을 다스리자면 깨뜨려야 하니, 이렇게 깨뜨려서 만든 보옥이 대단히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박옥의 완전한 처음 형태를 잃게 되고, 선비는 초야에서 태어나 추천을 받으면 녹을 먹게 되는데, 그것이 존귀하고 현달함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선비의 본질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촉은 바라건대, 내 집에 돌아가서 배고플 때 음식을 먹어 진수성찬과 맞먹게 하고, 천천히 걸어서 수레 타는 것과 맞먹게 하며, 죄짓지 않는 것으로 존귀함과 맞먹게 하고, 맑고 고요하고 곧고 바름으로써 스스로 즐기려 합니다.[夫玉生於山 制則破矣 非不寶貴矣 然夫璞不完 士生乎鄙野 推薦則祿矣 非不得尊遂也 然而形神不全 蠋願得歸 晩食以當肉 安步以當車 無罪以當貴 淸靜貞正以自虞]” 하였는데, 소식(蘇軾)이 일찍이 안촉의 이 말을 들어서 그를 평하기를 “안촉은 가난한 생활을 아주 지혜롭게 한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蠋可謂巧於居貧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戰國策 齊策 東坡志林 卷2

361)위험한……배우리:고시(高柴)는 공자의 제자인데, 공자가 일찍이 “고시는 어리석다.[柴也愚]”라고 하였다. 論語 季氏여기서 어리석다는 것은 곧 지혜는 부족하고 후한 마음은 넉넉함[知不足而厚有餘]을 말한 것으로, 가어(家語)에서 그의 행동을 들어 “발로는 그림자도 밟지 않았고, 땅속에서 막 나온 벌레를 죽이지 않았으며, 한창 자라나는 초목을 꺾지 않았고,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삼 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면서 한번도 이를 드러내어 웃은 적이 없었으며, 피난길에도 지름길로 가지 않고 구멍을 뚫어 나가지도 않았다.[足不履影 啓蟄不殺 方長不折 執親之喪 泣血三年 未嘗見齒 避難而行 不徑不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362)오늘……하누나:전초현(全椒縣)은 저주(滁州)에 있는 현 이름인데, 당(唐)의 시인 위응물(韋應物)이 일찍이 저주 자사(滁州刺史)로 있을 때 지은 기전초산중도사(寄全椒山中道士) 시에 “오늘 아침 군재가 썰렁하니, 갑자기 산중의 나그네가 생각나네. 계곡 사이에서 땔나무를 해서, 돌아가 백석을 삶아 먹겠지. 한 표주박의 술을 가지고 가서, 멀리 비바람 치는 밤을 위로하고 싶으나, 떨어진 잎새만 빈산에 가득하거니, 그 어디서 종적을 찾는단 말인가.[今朝郡齋冷 忽念山中客 澗底束荊薪 歸來煮白石 欲持一瓢酒 遠慰風雨夕 落葉滿空山 何處尋行迹]”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363)도원골……있는데:도원골은 이곳의 지명(地名)이고, 석문(石門)은 중국의 지명으로, 전하여 이곳 산촌의 풍경을 선경(仙境)에 빗대서 한 말인 듯하다. 이백(李白)의 하도귀석문구거(下途歸石門舊居) 시에 의하면 “석문의 흐르는 물가에 복사꽃이 만발했어라, 내 또한 피란 나온 진나라 사람의 집에 갔었지.[石門流水徧桃花 我亦曾到秦人家]”라고 하였다. 李太白集 卷21

364)대래(大來):주역(周易) 태괘(泰卦) 괘사(卦辭)에 “태는 음이 가고 양이 오니, 길하여 형통하다.[泰 小往大來 吉 亨]”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만사형통을 의미한다.

365)방초(芳艸)의 한(恨):초사(楚辭) 초은사(招隱士)에 “왕손은 집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데, 봄풀은 나서 무성하도다.[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흔히 이별의 한을 뜻한다.

366)권주가(勸酒歌)를……개편했는데:당(唐)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양류지사(楊柳枝詞)에 의하면 “청컨대 그대는 전조의 곡조를 연주하지 말고, 새로 개편한 양류지 곡조를 들어 보게나.[請君莫奏前朝曲 聽唱新翻楊柳枝]”라고 하였다.

367)예전……없어졌는데:달팽이 침이란 곧 달팽이가 이리저리 꼬불꼬불 다니는 곳마다 그 체내에서 분비되는 점액을 말하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흔히 전서(篆書)에 비유하는바, 여기서는 특히 예전 기자(奇字)의 모양을 비유한 말로 쓰인 듯하다. 기자는 한(漢)나라 왕망(王莽) 때의 육체서(六體書)의 하나로, 대략 고문(古文)에 근거하여 거기에 약간의 변화를 가해서 만든 것이다. 수서(隋書) 권33 경적지(經籍志)에 의하면 “한나라 때에 여섯 가지 체의 글로 학동들을 가르쳤는바, 여기에 고문, 기자, 전서, 예서, 무전, 충조가 있었다.[漢時以六體敎學童 有古文奇字篆書隷書繆篆蟲鳥]”라고 하였다.

368)땅……신고:자세한 내용은 321쪽 주63 참조.

369)선진(先秦) 시대:진 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기 이전의 시기를 말한 것으로, 흔히 춘추전국 시대를 가리킨다. 한서(漢書) 권53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 “헌왕이 얻은 글은 모두 고문으로 선진 시대의 옛글이다.[獻王所得書 皆古文先秦舊書]”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의하면 “선진은 진나라 이전이라는 말과 같으니, 진나라가 서적을 불태우기 전을 이른 말이다.[先秦 猶言秦先 謂未焚書之前]”라고 하였다.

370)낙양(洛陽)의……것:진(晉)나라 때 문장가인 좌사(左思)가 10년을 구상하여 삼도부(三都賦)를 지었으나, 당시 사람들에게 중시되지 못했다가, 황보밀(皇甫謐)이 삼도부의 서(序)를 짓고, 장재(張載), 유규(劉逵)가 주(注)를 내고, 장화(張華)가 이 글을 보고 감탄하여 “반고, 장형의 등류이다.[班張之流也]”라고 찬사를 보낸 이후로, 당시 부호(富豪)들의 집에서 서로 다투어 이 글을 베낌으로 인하여 낙양의 종이 값이 폭등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左思

371)옥판(玉版)을 삶고 있노라니:옥판은 옥판사(玉版師)의 약칭으로 죽순(竹筍)의 별명이다. 소식의 유기지호담선……가동참옥판장로작차시(劉器之好談禪……可同參玉版長老作此詩) 시에 “총림은 참으로 백장산과 같은데, 그 법사가 횡지에서 나왔기에, 석두의 험난한 길을 두려워 않고, 옥판사에게 와서 참선하노라.[叢林眞百丈 法嗣有橫枝 不怕石頭路 來參玉版師]”리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송나라 혜홍(惠洪)의 냉재야화(冷齋夜話)에 의하면, 소식이 한번은 유안세(劉安世)에게 옥판 화상(玉版和尙)을 찾아가서 함께 참선하자고 요청하여……마침내 함께 염천사(廉泉寺)에 가서 죽순을 삶아 먹었는데, 유안세가 죽순의 맛이 좋은 걸 느끼고 이 죽순의 이름이 무어냐고 묻자, 소식이 “바로 옥판이다. 이 노사는 설법을 잘하여 능히 사람들에게 선정에 들어 심신이 기뻐지는 맛을 얻도록 해 준다.[卽玉版也 此老師善說法 要能令人得禪悅之味]” 하므로, 그제야 유안세가 소식이 전에 한 말이 장난임을 깨달았다 한다. 蘇東坡詩集 卷45

372)하늘 찌르는 칼:여기서는 사람의 지기(志氣)가 초매(超邁)함을 비유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400쪽 주215 참조.

373)물 거스르는 배:양 태조(梁太祖)가 즉위한 처음에 요기(姚洎)는 학사(學士)가 되었는데, 한번은 태조가 요기를 대하여 과거의 학사였던 배정유(裴庭裕)의 소식을 묻고 이어 배정유의 문장 구사(構思)가 매우 민첩했음을 언급하자, 요기가 대답하기를 “그가 지난날 한림으로 있을 때 그를 흐르는 물을 따라 내려가는 배 같다고 호칭했습니다.[頃在翰林 號爲下水船]”라고 하므로, 태조가 즉시 요기에게 이르기를 “경은 바로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로구려.[卿便是上水船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문사(文思)가 아주 더디고 둔함을 의미한다. 배정유는 문장을 짓는 데에 민첩하기로 명성이 높았고, 벼슬은 일찍이 한림학사(翰林學士), 중서사인(中書舍人), 병부시랑(兵部侍郞)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唐摭言 敏捷

374)강장(絳帳)의……사절하니:강장은 빨간 휘장을 이른다. 후한 때 경학자(經學者)인 마융(馬融)은 고재 박식(高才博識)한 대유(大儒)로서 문하에 항상 1000여 명의 제생(諸生)을 교수(敎授)하였는데, 그는 자기 거실을 퍽 사치스럽게 꾸몄던바, 항상 고당(高堂)에 앉아서 빨간 휘장을 쳐 놓고 그 앞쪽으로는 생도를 가르치고, 뒤쪽에는 여악(女樂)을 베풀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67上 馬融列傳 전하여 후세에는 사문(師門) 또는 강석(講席)의 뜻으로 쓰인다. 그리고 냄새를 쫓는다는 것은, 여씨춘추(呂氏春秋) 우합(遇合)에 “몸에서 대단한 악취가 나는 사람이 있어 친척, 형제, 아내, 친지 등 그 누구도 그와 함께 거처할 수가 없게 되자, 스스로 고민 끝에 홀로 바닷가에 가서 살았는데, 그 바닷가에 사는 한 사람이 유독 그 냄새를 좋아하여 밤낮으로 그를 따라다녀서 그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人有大臭者 其親戚兄弟妻妾知識無能與居者 自苦而居海上 海上人有說其臭者 晝夜隨之而不能去]”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기호(嗜好)가 아주 괴벽(怪僻)함을 비유하는바, 여기서는 곧 매천을 모든 사람이 다 꺼리는 가운데 혹 좋아하여 찾아오는 이도 있으나 그마저 찾아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인 듯하다.

375)사립짝엔……면했네:범(凡) 자를 쓴다는 것은 본디 부족한 사람을 우롱하는 행위에서 온 말인데, 일반적으로 친구의 집을 방문을 비유할 때 쓴다. 전하여 여기서는 매천의 집에 찾아오는 손이 없음을 의미한다. 범 자를 쓴 데에 관한 고사는 323쪽 주70 참조.

376)박금사 항래(朴錦士恒來):금사는 박항래의 호이다. 박항래는 전북 금산(錦山) 출신으로 구례 군수(求禮郡守), 자성 부사(慈城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매천과 시문(詩文)으로 사귀었다.

377)해학(海鶴):애국지사(愛國志士) 이기(李沂, 18481909)의 호이다. 그는 실학을 연구하여 유형원(柳馨遠), 정약용(丁若鏞) 등의 학통을 계승했다. 1894년(고종31)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났을 때는 이에 적극 가담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과 러시아가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할 때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천황(天皇)과 정계요인(政界要人)들에게 일본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 항의(書面抗議)를 했고, 이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장지연(張志淵), 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해서 민중 계몽과 항일운동에 진력하였다. 1907년에는 동지(同志) 10여 명과 함께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의 암살을 결행했으나 실패하여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저서에 해학유서(海鶴遺書)가 있다.

378)양원(梁園)의……났고:양원은 한(漢)나라 때 양 효왕(梁孝王)의 원유(園囿)인 토원(兎園)을 가리킨다. 타관 벼슬에 싫증 났다는 것은 곧 사기(史記) 권117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에 “장경은 본디 타관에서 벼슬하는 것에 싫증이 났다.[長卿故倦遊]”라고 하였다. 장경(長卿)은 사마상여의 자이다. 남조 송(宋)의 문학가인 사혜련(謝惠連)의 설부(雪賦)에 의하면, 양 효왕이 일찍이 토원에서 연회를 베풀고 당대 제일가는 문장가인 사마상여, 추양(鄒陽), 매승(枚乘) 등을 초대하여 상좌(上座)에 앉히고 노는데, 이윽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자, 효왕이 이에 위시(衛詩)의 북풍(北風)을 노래하고는 사마상여에게 간찰(簡札)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그대의 비장해 둔 재주를 다 풀어내고, 그대의 아름다운 문사를 다 구사하여 경색을 아주 핍진하게 형용하고 묘사해서 과인을 위하여 한 편의 설부를 지어 달라.[抽子祕思 騁子姸辭 侔色揣稱 爲寡人賦之]”라고 하니, 사마상여가 이에 일어나서 읍(揖)하고 나서 운운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文選 卷13 전하여 여기서는 곧 좌중(座中)에 있는 어떤 이를 사마상여의 문장에 빗대서 한 말이다.

379)구루(句漏)의……않았네:구루는 산명(山名)이다. 진(晉)나라 때 선인(仙人) 갈홍(葛洪)이 본래부터 신선도양술(神仙導養術)을 좋아하여, 조정의 부름을 고사하고, 교지(交趾)에서 선약(仙藥)의 재료인 단사(丹砂)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는 그곳의 구루산(句漏山)에 은거하면서 연단술(鍊丹術), 즉 선약 만드는 법을 통하여 선인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380)백성은……늙었고:오랜 세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세상이 평온했음을 의미한다.

381)관리(官吏)가……드물구려:여기서 기러기는 곧 유랑하는 백성을 가리킨 것으로, 즉 관리가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고 농사를 권장하여 잘 살게 함으로써 유랑하는 백성이 드물어졌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이는 본디 시경 홍안(鴻雁)에서 온 말인데, 그 내용은 곧 주실(周室)이 아주 쇠미해진 때에 주 선왕(周宣王)이 유랑하는 백성들을 안집시켜서 모두 제 살 곳을 얻게 해 준 데 대하여 백성들이 기쁘게 여겨 노래한 것이라 한다.

382)삼부(三釜) 봉양:부(釜)는 6말 4되들이의 용량을 말하는바, 삼부는 보통 사람이 겨우 한 달을 먹을 수 있는 양으로, 전하여 박봉(薄俸)에 비유한다. 장자 우언(寓言)에 “증자가 두 번 벼슬을 했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변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어버이 생존시에 벼슬할 적에는 삼부의 녹봉만 받아도 즐거웠는데, 뒤에는 벼슬하여 삼천 종의 녹봉을 받았지만, 어버이를 봉양할 수 없어 내 마음이 슬펐다.’ 했다.[曾子再仕 而心再化 曰吾及親仕 三釜而心樂 後仕三千鍾 不曁 吾心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383)금당(琴堂)에서……게:공자의 제자 복자천(宓子賤)이 성품이 매우 인애(仁愛)하여 일찍이 선보(單父)를 다스릴 적에 항상 거문고만 타고 앉아서 당(堂) 아래를 내려가지 않았으나 선보가 잘 다스려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呂覽 察賢전하여 금당은 주(州), 부(府), 현(縣) 등의 관서(官署)를 가리킨 말이다. 채의(綵衣)는 곧 색동옷을 말한 것으로,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효자로 명성이 높았던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어린애처럼 색동옷을 입고 부모 앞에서 새 새끼를 가지고 장난을 하여 부모를 즐겁게 했던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바로 성주(城主) 박항래(朴恒來)가 아직껏 어버이를 모시고 있음을 의미한다.

384)꽃을……두려우니:무릉도원(武陵桃源) 같은 선경(仙境)이 속인(俗人)들에게 알려질까 두렵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무릉도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306쪽 주34 참조.

385)무술고(戊戌稿):무술년(1898, 광무2)에 지은 시이다. 매천이 44세 때이다.

386)선오(善吾):이병호(李秉浩)이다. 자는 선오, 호는 백촌(白寸)이다. 매천의 제자인 듯하다. 구례 운조루(雲鳥樓)의 주인 유제양(柳濟陽)의 일기 시언(是言)과 아들 유형업(柳螢業)의 일기 기어(紀語)에 의하면 구례군 용방면 용강리 두동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387)백일홍:원문의 ‘정동(赬桐)’은 백일홍을 말한다. 기언(記言) 권14 석록초목지(石鹿草木誌)에 “정동은 여름에 꽃이 피는데 불과 같다.” 하였고, 이재유고(頤齋遺藁) 권3 불대산승영일구시(佛臺山僧永日求詩)의 원주(原註)에 “정동은 백일홍(百日紅)이다.” 하였다.

388)일천……있으니:북위(北魏) 때의 처사(處士) 이밀(李謐)이라는 사람은 조정에서 누차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매양 말하기를, “장부가 책 1만 권이 있으면 되지 어찌 남면하여 세상을 다스리겠는가.[丈夫擁書萬卷 何假南面百城]” 하면서 두문불출하고 독서를 하였다고 한다.

389)남산가(南山歌)……늦었고:벼슬을 구하기에는 늦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에 영척(甯戚)이 제(齊)나라 환공(桓公)에게 벼슬을 얻고자 했으나 가난하여 만날 방법이 없자, 장사치가 되어 짐수레를 끌고 제나라에 가서 장사를 하였다. 어느 날 성문 밖에서 묵는데, 환공이 손님을 맞이하러 성문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영척이 소를 먹이다가 수레 아래에서 멀리 환공을 바라보고 쇠뿔을 두드리며 슬프게 노래하기를, “남산에 돌이 솟아, 하얀 돌이 반짝이네. 살아서 요순 같은 성군을 못 만나니, 짧은 잠방이가 정강이도 못 가리네. 긴긴 밤 더디 가니 아침이 언제 올까.[南山矸 白石爛 生不逢堯與舜禪 短布單衣纔至骭 長夜漫漫何時旦]” 하였는데, 환공이 이 노래를 듣고 불러서 등용하였다. 이 내용은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태평어람(太平御覽), 연감유함(淵鑑類函) 등에 실려서 전하는데, 출전에 따라 글자에 다소 차이가 있다. 이 노래를 반우가(飯牛歌), 남산가라고 한다.

390)황량몽(黃粱夢)이나……글렀구나:당나라 심기제(沈旣濟)가 지은 침중기(枕中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나라 현종(玄宗) 때에 노생(盧生)이라는 자가 객관에서 도사(道士) 여옹(呂翁)을 만나서, 그가 주는 베개를 베고 잠이 들어, 꿈속에서 출세하여 부귀영화를 포함한 온갖 인생살이를 다 겪으며 한평생을 보낸 뒤에 깨어 보니, 잠들기 전에 여관 주인이 짓고 있던 황량(黃粱) 밥이 아직 다 익기도 전이었다. 여옹이 말하기를, “인간 세상의 일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라네.” 하였다. 침중기태평광기(太平廣記), 고금사문유취, 문원영화(文苑英華) 등에 실려 있다.

391) 베갯머리 닭이라네:남조(南朝) 때에 진(晉)나라 연주 자사(兗州刺史) 송처종(宋處宗)이라는 사람이 현담(玄談)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잘 우는 닭을 한 마리 사서 매우 애지중지하며 잘 길러 항상 닭장을 창가에 두고 돌보았는데, 그 닭이 드디어 사람의 말을 하게 되어, 송처종과 함께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담론을 나누었다. 그 말에 매우 조리가 있었으므로 송처종의 언변술이 매우 발전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세설신어(世說新語), 예문유취(藝文類聚), 태평어람등에 실려 전한다.

392)부귀공명:원문의 헌사(軒駟)는 사마헌거(駟馬軒車)의 준말인데 높은 벼슬을 하여 호사를 누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므로 ‘부귀공명’으로 번역하였다.

393)짚신 생활:원문의 망혜(芒鞋)는 죽장망혜(竹杖芒鞋)와 같은 말로, 대나무 지팡이와 짚으로 삼은 신발을 말하는데, 소박하고 단출한 행장을 비유하는 말이다.

394) 은거 생활:원문의 금상(禽向)은 후한 때의 은사(隱士) 상장(向長)과 금경(禽慶)을 말한다. 상장이 자녀들의 혼사를 모두 마친 뒤에 금경과 함께 오악(五嶽)을 두루 유람하며 은거 생활을 했다고 한다.

395)코끼리를 길들이는 듯: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코끼리를 길들이는 것과 같다는 불교 우화가 있는데, 여기서는 마음을 다해 학생을 가르친다는 뜻인 듯하다.

396)개구리에게 절하는 듯:원문의 식와(式蛙)는 개구리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뜻이다. 한비자 내저설 상(內儲說上)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할 때에 사졸들의 용기를 북돋울 방법을 생각하여, 성을 낸 개구리를 보고 식(軾)을 하여 경의를 표하였다. 종자(從者)가, ‘개구리에게 어찌하여 경의를 표합니까?’ 하니, 구천이,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하였다. 이 이야기는 사문유취, 태평광기, 태평어람 등에 실려 전하며, 오월춘추(吳越春秋) 권6 구천벌오외전(句踐伐吳外傳)에는 더 상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397)옛 벗:당나라 두보(杜甫)의 추술(秋述)에 “내가 병으로 장안(長安)의 여관에 누워 있을 때에, 장마가 져서 물고기가 생길 정도였고 푸른 이끼가 침상까지 올라왔다. 평상시에 오가던 벗들이, 예전에는 비가 와도 왔는데[舊雨來] 요즘은 비가 오면 오지 않는다.[今雨不來]” 하였다. 이후로 구우(舊雨)는 옛 벗을, 금우(今雨)는 새 벗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398)맛있는 술:원문의 하약(下若)은 중국 절강성에 있는 고을 이름인데, 옛날에 이곳의 물로 빚은 술이 맛이 좋았으므로 후세에는 좋은 술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399)금사(錦士):박항래(朴恒來, 1853~1933)의 호이다. 박항래는 1879년(고종16)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부산 첨사(釜山僉使)를 거쳐, 1897년(광무1) 말에 구례 군수(求禮郡守)로 부임하여 재임하다가 1899년 6월에 자성 군수(慈城郡守)에 제수되었다. 원문의 군후(君侯)는 박항래를 가리킨다.

400)송규암(宋圭菴):송인수(宋麟壽, 1499〜1547)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미수(眉叟)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규암은 그의 호이다. 1521년(중종16)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대사성, 대사헌, 이조 참판,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547년(명종2)에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송후춘(宋厚春)은 송인수의 후손으로, 유형업의 기어(紀語)에 의하면, 고산(高山) 화평(花坪)에 살았고 박항래의 아객(衙客)이었다고 한다.

401)백박(白縛):띠를 엮은 이엉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얼기설기 얽은 모양의 어떤 채소나 박을 말하는 듯하나 정확한 뜻은 미상이다.

402)황단(黃團):누런 호박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403)벼슬은……술:고금사문유취에 “당나라 시인 왕적(王績)은 술을 좋아하였다. 문하성 대조(門下省待詔)로 있을 때에 문하성에서 매일 술[良醞] 서 되[三升]를 지급하였는데, 아우가 묻기를, ‘대조로 있는 것이 즐겁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대조의 녹봉은 아주 하찮지만, 술 서 되가 다소 맘에 든다.’ 하였다. 같은 대조로 있던 친구가 ‘술 서 되로는 왕 선생을 붙잡아 둘 수 없겠다.’라고 여기고는, 날마다 술을 한 말씩 주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왕적을 두주학사(斗酒學士)라고 불렀다.” 하였다.

404)일곱 잔 차:당나라 시인 노동(盧仝)이 지은 간의대부 맹간이 새로운 차를 보내 주었으므로 그에 대해 감사하는 글을 그 자리에서 써서 보내다[走筆謝孟諫議寄新茶]에 “첫째 잔은 목과 입술을 적셔 주고, 둘째 잔은 외로운 시름을 없애 준다. 셋째 잔은 메마른 창자 속을 더듬는데 그 안에는 문자 오천 권이 들어 있고, 넷째 잔은 땀을 송송 나게 하는데 평소의 불평스러운 일들을 모두 털구멍으로 빠져나가게 한다. 다섯째 잔은 기골을 맑게 해 주고, 여섯째 잔은 신선과 통하게 해 준다. 일곱째 잔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솟아 퍼덕이며 맑은 바람이 일어나는 것 같다.[一椀喉吻潤 二椀破孤悶 三碗搜枯腸 惟有文字五千卷 四椀發輕汗 平生不平事 盡向毛孔散 五椀肌骨淸 六椀通仙靈 七椀喫不得 也唯覺兩腋習習淸風生]” 하였다. 노동의 이 시는 고금사문유취, 연감유함, 패문운부(佩文韻府) 등의 유서(類書)에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고문진보 전집(前集)에 다가(茶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405)몽당비:원문의 폐추(弊帚)는 다 닳아서 빗살이 짧아진 빗자루이다. 몽당비는 빗자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하찮은 것이지만 주인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아까워한다. 자신의 작품을 일컬을 때에 쓰는 겸사이다.

406)금사(錦士) 성주(城主):구례 군수 박항래를 말한다. 19쪽 주15 참조.

407)천은사(泉隱寺):구례군 광의면 지리산 자락에 있는 사찰이다. 통일신라 때에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408)이산(二山):유제양(柳濟陽, 1846〜1922)이다. 자는 낙중(洛中)이고, 호는 이산, 난사(蘭榭), 안선재(岸船齋), 쌍봉(雙峰) 등이다. 99칸 전통 한옥인 운조루(雲鳥樓)의 주인이다. 그가 쓴 일기인 시언(是言)이 있다.

409)해학(海鶴):이기(李沂, 1848〜1909)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자는 백증(伯曾)이며 호는 해학(海鶴), 재곡(梓谷), 질재(質齋) 등이다. 1890년(고종27)에 구례(求禮)에서 매천을 처음 만났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 등의 시고(詩稿)에 서문을 썼으며, 1896년(건양1)에는 안동에서 안동부 관찰사 이남규(李南珪)의 부좌(府佐)로 모병(募兵)과 군사 조련을 맡기도 하였다. 한국문집총간 347집에 이해학유서(李海鶴遺書)가 실려 있다.

410)소천(小川):왕사찬(王師瓚, 1846〜1912)이다.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의 셋째 아들이다. 자가 찬지(贊之)이고 호가 소천이다.

411)서늘하게:장자 소요유에 나오는 ‘영연(泠然)’은 주로 ‘가볍고 경쾌한 모양’을 뜻하는 말로 풀이하는데, 여기서 매천은 ‘냉연(冷然)’의 뜻으로 사용한 듯하다.

412)泠:전주매천시집(箋註梅泉詩集)에는 ‘冷’으로 되어 있다.

413)박봉양(朴鳳陽):매천야록에 “운봉현(雲峯縣)의 아전 출신이다. 대대로 부유하게 살아왔는데, 민영준(閔泳駿)에게 10만 냥을 바치고 급제하였다. 동학농민봉기 때에 동학군을 방어하여 운봉을 지켰다. 전봉준(全琫準)이 처형된 뒤에 주사(主事)에 임명되었는데, 시국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관직을 사퇴하고 돌아갔다.” 하였다. 박봉양은 눈이 하나여서 당시에 일목장군(一目將軍)이라 불렸다고 한다.

414)감옥……쏘았지:진서(晉書) 권36 장화열전(張華列傳)에 “천문(天文)의 오(吳)나라 지역에 해당하는 두성(斗星)과 우성(牛星) 사이에 자기(紫氣)가 항상 있었으므로 장화가 천문에 밝은 뇌환(雷煥)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뇌환이 말하기를, ‘보검의 정기가 하늘에 닿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풍성(豐城)이라고 하였다. 이에 장화가 뇌환을 풍성 영(豐城令)으로 삼아서 비밀리에 그 보검을 찾게 하였다. 뇌환이 풍성에 도착하여 옥사(獄舍)의 바닥을 파니 그곳에 빛이 서린 상자 하나가 나왔고 그 상자 속에 쌍검(雙劍)이 들어 있었는데 하나는 용천(龍泉), 하나는 태아(太阿)라 쓰여 있었다. 그 뒤로 두성과 우성 사이에 비치는 자색 기운이 없어졌다.” 하였다. 이 이야기는 통지(通志), 태평어람, 고금사문유취, 패문운부 등에도 실려 전한다.

415)운봉(雲峯)의……달려갔네:주역 대장괘(大壯卦)의 정전(程傳)에 “끓는 물이나 타는 불 속에 뛰어들고[赴湯火] 시퍼런 칼날을 밟는[蹈白刃] 것은 무부(武夫)의 용기로도 가능한 일이지만, 극기복례는 군자의 장대함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하였다. 한서 권49 조조전(鼂錯傳)에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탕화(湯火)에 달려가 죽음을 삶과 같이 보았다.” 하였다. 여기서는 박봉양이 앞장서서 선도하니 토벌군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 나갔다는 뜻이다.

416)참호:원문의 지(池)는 성지(城池)의 지(池)에서 온 것으로 보이므로 ‘참호’로 번역하였다. 지는 성 둘레를 파서 물을 채운 해자를 말한다.

417)고향이나……하였는데:시경 소반(小弁)에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하는데, 우러러볼 분이 아버지 말고는 없으며 의지할 분이 어머니 말고는 없다네.[維桑與梓 必恭敬止 靡瞻匪父 靡依匪母]”라고 하였다. 그 주석에 “상재(桑梓)는, 고대에 5묘(畝)의 집 담장 가에 심어서 자손들에게 물려주어 누에를 치고 그릇 등을 만드는 데에 쓰게 한 나무이다.” 하였다. 상재는 후세에는 부모와 조부모 등의 선대가 살아온 고향 또는 그 고향에 살고 있는 친척 어른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418)호남(湖南)……만들었네:매천야록에 “박봉양이 운봉을 수비한 뒤로 호남의 적당들은 감히 영남으로 향하지 못하게 되었고, 함양, 거창 등 몇 개의 군은 차츰 진정되어 갔다.” 하였다. 보장(保障)은 보호하고 방위해 주는 사물 또는 지역을 뜻하는 말이다.

419)기상(旂常):주례 춘관(春官) 사상(司常)에 “해와 달을 그린 깃발이 상(常)이고 교룡(交龍)을 그린 깃발이 기(旂)이다. 천자는 태상(大常)을 세우고 제후는 기(旂)를 세운다.” 하였다. 공적을 이룬 신하의 이름을 여기에 기록하여 그 공적을 기렸다고 한다.

420)백전산(柏田山):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과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사이에 있는 백운산(白雲山)을 일컫는다.

421)작은 도원(桃源):도원은 중국 동진(東晉)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별천지인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말한다. 도화원기에 의하면, 무릉에 사는 어떤 어부가 시내를 따라 올라가다가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선경(仙境)을 만나 그곳에서, 진(秦)나라 때에 난리를 피해 그곳에 들어와 살고 있던 사람들을 만나 극진한 대접을 받고 나왔는데, 뒤에 다시 그곳을 찾아갔더니 흔적이 없어서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작은 도원[小桃園]은, 백전산 계곡이 도화원과 흡사하다는 말이다.

422)采:대본에는 ‘釆’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采’가 타당할 듯하므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423)梘:전주매천시집에는 ‘筧’으로 되어 있다. 뜻은 대동소이하다.

424) 중산(中山) 마을: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다곡리이다.

425) 육십령(六十嶺):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과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사이의 고개이다.

426)팔공산(八公山):전북 진안군과 장수군 사이에 있는 산이다.

427)장정(長亭):길손들이 쉬어갈 수 있는 작은 건물로, 오늘날의 휴게소 같은 곳이다.

428)의기(義妓) 논개(論介)의 비석: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의 애첩 또는 내실(內室)로 알려져 있다. 최경회가 장수 현감(長水縣監)으로 있을 때에 가정 형편이 어려운 논개 모녀를 관아로 데려와 돌봐 주었는데 최경회가 경상 우병사가 되어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게 되자 그를 따라서 진주로 왔다고 한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촉석루에서 잔치를 열었을 때에 논개가 적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었다. 논개의 생가인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에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命碑)’가 있다.

429)신내:전북 장수군에 있는 시내 이름이다. 신나무가 무성하여 ‘신내[楓川]’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430)낭군이……때문이라:원문의 고침(藁砧)은 짚자리와 작두 받침대이다. 고대 중국에서 죄수를 사형할 때에 죄수를 침판(砧板)에 엎드리게 하고 작두[鈇]로 참형을 시행했다. 부(鈇)는 부(夫)와 발음이 같으므로, 후세에는 남편을 가리키는 은어로 쓰였다. 여기서는 논개의 남편인 최경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편항(編行)은 항오(行伍)에 편입시켰다는 뜻이다. 고대 중국 전국 시대의 제(齊)나라 장군 전단(田單)이 연(燕)나라와 전쟁을 할 때에 몸소 판삽(板揷)을 잡고 병사들과 함께 일을 하였고 처첩(妻妾)들을 항오에 편입시켜 함께 고생하게 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한다.

431)영재(寧齋):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다.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봉조(鳳朝) 또는 봉조(鳳藻)이며 호는 영재, 명미당(明美堂), 담녕재(澹寧齋), 결당거사(潔堂居士) 등이다. 1866년(고종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양명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전주매천시집 자주(自註)에 “이건창은 호가 영재이다. 충청도 어사가 되었을 때에 감사(監司) 조병식(趙秉式)을 탄핵한 일로 벽동(碧潼)에 유배되었고 강직하다는 명성이 세상에 진동하였다. 갑오년(1894, 고종31) 후에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강력히 진달하였다.”하였다. 저서로 당의통략(黨議通略), 명미당집(明美堂集) 등이 남아 있다.

432)눈물만 실상도 없이:원문의 ‘무종(無從)’은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 위(衛)나라에 갔을 때에 옛날에 묵었던 여관집 주인의 초상을 만나 참마(驂馬)를 부의(賻儀)하였다. 곁에 있던 자공이, “문인들이 죽었을 때에도 참마를 부의한 적이 없었는데, 여관집 주인의 초상에 참마를 부의하는 것은 과중하지 않습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나는 눈물만 흘리고 뒤따르는 정성 표시가 없는 것[無從]을 미워한다.” 하였다. 일설에는 “무종은 까닭 없이, 즉 눈물이 나올 만한 진심이 없는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말한다.”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433)似紅玉:전주매천시집에는 ‘紅似玉’으로 되어 있다.

434)방아 노래 멈추었고:춘추 시대 진(秦)나라 오고대부(五羖大夫) 백리해(百里奚)가 죽었을 때에, 백리해를 추모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아이들은 동요를 부르지 않았고 방아 찧는 자들은 방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사기 권68 상군열전(商君列傳), 자치통감 권2 주기(周紀) 등에 실려 있다. 태평어람 권487 인사부(人事部)에는 가의(賈誼)의 신서(新書)를 인용하여, “추(鄒)나라 목공(穆公)이 죽자 백성들이 마치 자기 아버지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아이들은 동요를 부르지 않았고 방아 찧는 자들은 방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하였다.

435)상제(上帝)가……불러갔으니:향안리(香案吏)는 하늘의 궁궐에서 옥황상제를 모시는 관리를 말한다. 당나라 원진(元稹)의 이주택과우낙천(以州宅夸于樂天)에 “나는 옥황상제의 향안을 담당하는 아전이었던지라 인간 세상에 귀양 와서도 봉래산에 머문다네.[我是玉皇香案吏 謫居猶得小蓬萊]” 하였다. 여기서는 전생에 옥황상제의 향안리였던 안병택을 옥황상제가 다시 데리고 갔다는 의미이다.

436)저승에서……흘리랴:예기 단궁 상에 의하면,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는 서하(西河)에 살면서 아들이 죽었을 때에 지나치게 슬피 울어 눈이 멀었다고 한다. 자하는 이치에 통달하지 못하여 아들의 죽음에 지나치게 슬퍼하였지만, 안병택은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므로 저승에서 지나치게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437)생질 김가:시의 내용으로 보아, 매천의 매부(妹夫) 김하술(金河述)의 아들을 말하는 듯하나 미상이다.

438)가장(家長)……만하네:원문의 ‘고과(孤寡)’는 아버지가 죽거나 남편이 죽어서 의지할 데가 없는 고아와 과부를 말한다. ‘작라(雀羅)’는 새를 잡는 그물을 말한다. 사기 권120 급정열전(汲鄭列傳)에 “예전에 적공(翟公)이 정위(廷尉)가 되었을 때에는 빈객이 문 앞에 가득했었는데,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문 앞에 새그물을 칠 만하였다.[可設雀羅] 적공이 다시 정위가 되자 빈객들이 적공을 찾아가려 하였다. 적공이 대문에 써 붙이기를, ‘한 번 귀해지고 한 번 천해져 봐야 사귀는 정이 드러난다.’ 하였다.” 하였다. 작라문(雀羅門)은 영락한 집이거나 권세를 잃은 집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439)승평(昇平):순천(順天)의 옛 이름이다.

440)유당(酉堂) 윤태경(尹泰卿):윤종균(尹鍾均, 1861~1940)이다. 자가 태경이고 호가 유당이다. 1890년(고종27)부터 매천에게 배웠다. 1906년(광무10) 순천 승명학교(昇明學校)에서 교편을 잡았고 1913년 ‘난국음사(蘭菊吟社)’라는 시 모임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저서로 유당시집(酉堂詩集)이 있다.

441) 강남(江南):순천을 ‘소강남(小江南)’이라고 일컬었다.

442)花:전주매천시집에는 ‘色’으로 되어 있다.

443)황제의 생신:원문의 만수성절(萬壽聖節)은 원래 중국 황제의 생일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1897년(광무1)에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바꾸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이후로 고종황제의 생일인 음력 7월 25일을 만수성절이라고 불렀다.

444)금사(錦士) 성주(城主):당시의 구례 군수 박항래(朴恒來)를 가리킨다. 19쪽 주15 참조.

445)천보(天保)……읊고:시경 천보(天保)6장에 “커 가는 상현달 같으며 솟아오르는 해와 같네. 영원히 버티고 있는 남산처럼 이지러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네. 소나무 잣나무가 무성하듯이 그대를 계승하지 않음이 조금도 없구나.[如月之恒 如日之升 如南山之壽 不騫不崩 如松柏之茂 無不爾或承]”라고 하였다. 그 집주(集註)에 “천보는 군주가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니 이에 신하들이 이 시를 노래하여 군주에게 보답한 것이다.” 하였다. 이 시에 나오는 끝 구절 “여송백지무 무불이혹승(如松柏之茂 無不爾或承)”이라는 10글자 중에서 매천이 ‘지(之)’ 자를 운자로 하여 시를 지은 것이다.

446)화봉첩(華封帖):화봉은 장자 천지(天地)에 나오는 말이다. 요 임금이 화(華) 땅을 유람할 때에 화 땅의 봉인(封人)이 요 임금을 위해 수(壽), 부(富), 다남자(多男子)로 축원을 하였다. 이후 ‘화봉삼축(華封三祝)’은 축원하는 말로 쓰였다.

447)官:대본에는 ‘宮’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매천집정오는 번역 대본인 한국문집총간 제348집에 수록된 매천집권7 뒤에 첨부되어 있다.

448)만세(萬歲) 부르고:원문의 ‘숭호(嵩呼)’는, 한나라 무제(武帝)가 숭산(嵩山)에 올라갔을 때에 만세를 세 번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 데에서 나온 어휘인데, 이후로 만세를 부르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449)해옥(海屋)의 산가지를 더하며:송나라 소식(蘇軾)의 동파전집(東坡全集) 권102 지림(志林) 삼로어(三老語)에, “세 노인이 만났는데, 어떤 이가 그들에게 나이를 묻자, 한 노인은 ‘내 나이는 기억할 수 없소만, 소년 때에 반고(盤古)와 친하게 지냈었소.’ 하였고, 한 노인은 ‘바다가 뽕밭이 될 때마다 내가 산가지[籌]를 하나씩 놓았는데, 지금까지 내가 놓은 산가지가 열 칸 집에 가득 찼소.’ 하였고, 한 노인은 ‘내가 선도(仙桃)를 먹고 그 씨를 곤륜산 아래에 버렸는데, 지금은 그 나무가 곤륜산 높이만큼 자랐소.’ 하였다.” 하였다. 산가지를 놓았다는 이야기는 해옥첨주(海屋添籌)라 하여 장수(長壽)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나중에는 축수(祝壽)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450)옥 섬돌:왕궁의 섬돌인데, 왕궁이나 조정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451)땅……이르고:땅 가까이에 낮게 떠오르는 별은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을 말한다. 사기 권27 천관서(天官書)에 “남극노인성이 나타나면 정치가 안정이 되고 나타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난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와 남해안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별을 보면 장수한다고 하여, 장수를 상징하는 별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남극노인성이 나타났으니 일찌감치 국운의 평화와 고종황제의 장수가 결정된 것이라는 뜻으로 인용한 듯하다.

452)상서로운 구름이 나오니:사기 권27 천관서에 “연기 같으면서도 연기도 아니고 구름 같으면서도 구름도 아닌 것이 뭉게뭉게 솟아서 흩어졌다가 엉겼다가 하는 것을 경운이라 한다.[若煙非煙 若雲非雲 郁郁紛紛 蕭索輪囷 是謂卿雲]” 하였다. 경운(卿雲)은 경운(慶雲)과 같다. 원문의 비연(非烟)은 오색찬란한 상서로운 구름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453)용이 서린 백악(白岳):백악은 백악산(白岳山)이다. 경복궁 뒷산으로, 서울의 진산(鎭山)이다. 용반(龍盤)은 제왕의 도읍지를 표현할 때에 사용하는 어휘이다.

454)봉황 역수(曆數)의 청구(靑邱):춘추좌씨전 소공 17년에 “소호씨(少皞氏) 지(摯)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 봉조(鳳鳥)가 마침 왔기 때문에 조(鳥)로 기록을 하였습니다. 조를 사(師)로 삼고 관직을 조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봉조씨(鳳鳥氏)는 역정(歷正)이었고 현조씨(玄鳥氏)는 춘분과 추분을 담당하는 관직이었고 백조씨(伯趙氏)는 동지와 하지를 담당하는 관직이었고 청조씨(靑鳥氏)는 계(啓)를 담당하는 관직이었고 단조씨(丹鳥氏)는 폐(閉)를 담당하는 관직이었고……” 하였는데, 이후에 봉력(鳳曆)은 황제의 역수, 정삭(正朔) 등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로 왕조 기년(紀年)을 표현할 때에 이 말을 쓰는데, 조선 시대에는 주로 중국 황제가 제정한 달력을 뜻하는 말로 쓰였으나, 여기서 매천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제정한 역법 내지는 달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청구는, 중국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 ‘동방에 있는 구역’이라는 뜻인데,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로 많이 사용하였다.

455) 선제(宣帝)와……자태로다:고종이 1897년(광무1)에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의 나라를 세운 것을 비유한 것이다. 원문의 선광(宣光)은 한나라 선제(宣帝)와 후한 광무제(光武帝)를 말한다. 둘 다 중흥(中興)의 군주이다. 풍예(豐豫)는 각각 주역의 괘명인데 성대함과 화락함을 뜻한다. 여기서는 지나치게 향락을 누려 폐단이 생긴 뒤라는 뜻으로 사용한 듯하다.

456)용릉(舂陵)에서 기운을 보고:후한서 권1 광무제기에 나온다. 왕망(王莽) 때에 소백아(蘇伯阿)가 용릉을 바라보니 천자가 흥기할 기운이 있었는데, 나중에 후한 광무제가 그곳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457)대저(代邸)에서 횡경(橫庚) 점괘: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아들 유항(劉恒)이 대왕(代王)에 봉해지자 그가 거처하는 곳을 대저라 하였다. 진평(陳平)과 주발(周勃) 등이 소제(少帝)를 폐위하고 대왕을 세우니 이가 문제(文帝)이다. 뒤에 대저는 제왕을 이은 번왕의 옛 봉지(封地)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문제가 천자가 되기 전에 거북점을 치니, ‘대횡경경 여위천왕(大橫庚庚 余爲天王)’이라는 점괘가 나왔는데, 이를 풀이하는 이가 ‘제후(諸侯)로서 다시 황제가 된다.’라는 의미로 풀이하였다고 한다. 한 문제는 유방의 넷째 아들이고 고종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둘째 아들이다.

458)하늘에……하고:보감(寶鑑)은 좋은 거울을 말한다. 고종이, 거울이 하늘에서 비치듯이 환히 아래를 다 내려다보고 있어서 부정한 무리가 설치지 못했다는 뜻으로 쓴 것인 듯하다. 보감은 ‘달’을 가리키는 말로 쓰기도 한다.

459)태아검(太阿劍)을……정하셨네:태아검에 대해서는 28쪽 주30 참조. 원문의 건유(乾維)는 하늘의 벼리인데, 조정의 기강, 군주의 권위 등의 뜻으로 쓰인다.

460)절뚝발이……기원하고:미천한 백성들까지도 덕화와 공업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서 오래 살기를 바랐다는 뜻이다. 한서 권51 가산전(賈山傳)에 의하면, 한나라 문제(文帝) 때에 가산(賈山)이 문제에게 아뢴 말에, “신이 들으니, 산동(山東)의 관리가 조령(詔令)을 반포하자 늙고 병든 백성들까지도 지팡이를 짚고 가서 경청하면서, 잠시라도 더 살아서 덕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461)구세(九世)의 원수:춘추 시대 제(齊)나라 양공(襄公)이 9세조 애공(哀公)의 원수를 갚은 일에서 나온 말로, 구세지수(九世之讐)는 대개 먼 과거의 원수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인조(仁祖) 때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준 청나라를 가리킨다.

462)강호(江湖)에서는……진달했고:유자후(柳子厚)는 당나라 유종원(柳宗元)으로 자후는 자(字)이다. 유종원은 한유(韓愈)와 함께 당나라 고문(古文)의 대가이다. 유종원이 시경의 아(雅)를 본떠서 평회이아(平淮夷雅)를 지었다.

463)궁궐에서는……일으켰지:숙손통(叔孫通)은 한나라 고조(高祖) 때에 조정의 예법 의식을 제정하여, 조정 예법의 기반을 확립한 인물이다. 숙손통 같은 인물이 대한제국의 예법을 정비했다는 의미로 쓴 것인 듯하다.

464)상서로움……시기였네:고종이 1897년에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하였다.

465)염파(廉頗)와 이목(李牧):모두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명장(名將)이다.

466)疆:대본에 ‘强’으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疆’이 타당할 듯하므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467)고요(皐陶)와 기(夔):모두 고대 순(舜) 임금 때의 훌륭한 신하들이다. 고요는 법관이었고 기는 전악(典樂)이었다.

468)현가(絃歌)가 이곳에서 울리다니:논어 양화에 “공자께서 무성(武城)에 갔을 때에 금슬을 타며 노래하는[弦歌] 소리를 들었다. 공자께서 웃으며 말하기를,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칼을 쓰느냐.’ 하셨다.” 하였다. 여기서는 군수 박항래가 다스리는 구례군이 예악으로 잘 다스려지고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469)유아(儒雅)함이……되네:당나라 두보의 영회고적(詠懷古迹)에 “지는 잎에 깊이 송옥의 슬픔을 알겠으니 풍류와 유아함이 또한 나의 스승이네.[搖落深知宋玉悲 風流儒雅亦吾師]” 하였다. 박항래의 학문과 문채가 본받을 만하다는 뜻이다.

470)달빛……돌아왔고:후한서 권76 맹상열전(孟嘗列傳)에 “맹상이 합포 태수(合浦太守)가 되었다. 합포군은 곡식이 생산되지 않고 바다에서 진주(眞珠)가 나서 옆 고을인 교지(交阯)에서 나는 곡물과 무역을 해서 살았다. 이전의 수령들이 다들 탐욕스러워서 백성들에게 끝없이 채취하게 하였기 때문에 진주가 차츰 교지군 쪽으로 옮겨 갔다. 이에 먹고살 물자가 없어져서 굶어 죽는 자까지 생겼다. 맹상이 수령이 되어, 그 폐단을 제거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니 한 해도 안 되어, 떠났던 진주가 다시 돌아왔고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였다.

471)황하……알았더라:후한서 권79 유곤열전(劉昆列傳)에 “유곤이 홍농 태수(弘農太守)가 되었다. 이전에 이곳 효산(崤山)의 역도(驛道)에 호랑이가 많아서 사람들을 해쳤으므로 길이 막혔다. 유곤이 3년 동안 잘 다스리자 교화가 크게 행해져서, 호랑이들이 모두 새끼를 업고 황하를 건너 떠났다.” 하였다.

472)그대가……같고:서경 열명 상(說命上)에 “쇠를 다룰 때라면 너를 써서 숫돌을 만들고 큰 냇물을 건널 때라면 너를 써서 배와 노를 만들고 큰 가뭄이 든 때라면 너를 써서 비를 만들리라.[若金 用汝作礪 若濟巨川 用汝作舟楫 若歲大旱 用汝作霖雨]” 하였다. 열명은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명한 말을 기록한 것이니, 여기서는 박항래를 부열에 견주어 말한 것이다.

473)옥처럼 온화하네:시경 소융(小戎)에 “군자를 생각하니 온화함이 옥과 같네.[言念君子 溫其如玉]” 하였다.

474)두……되고:후한서 권82 방술열전(方術列傳) 왕교(王喬)에, “상서랑(尙書郞) 왕교가 현종 때에 섭현(葉縣)의 현령이 되었다. 왕교는 신술(神術)이 있었는데, 매달 삭망(朔望)이면 섭현에서 조정으로 와서 조회에 참여하였다. 그가 그렇게 자주 오는데도 타고 온 수레나 말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황제가 태사(太史)를 시켜서 몰래 살펴보게 하였더니, 왕교가 올 때에는 항상 오리 두 마리[雙鳧]가 동남쪽에서 날아오는 것이었다. 그물을 쳐서 그 오리를 잡아서 보니 그물에 걸린 것은 신발 한 짝이었는데, 바로 조정에서 하사한 상서랑의 신발이었다.” 하였다. 여기서는 박항래가 군주에 대한 충성심으로 꿈에 왕교처럼 오리가 되어 대궐로 날아가곤 하였다는 뜻인 듯하다.

475) 저상(滁上)의……돋우는데:송나라 구양수(歐陽脩, 1007~1072)의 취옹정기(醉翁亭記)에 “저주(滁州)를 두르고 있는 것은 모두 산이다. 그 서남쪽의 봉우리들[諸峰]은 임학(林壑)이 더욱 아름다워.……” 하였다. 원문의 저상제봉(滁上諸峯)은 아마 여기서 따온 말로, 구례의 주변 경관을 비유한 것인 듯하다.

476) 제남(濟南)의……잘하였지:당나라 두보의 배이북해연역하정(陪李北海宴歷下亭)에, “해우에 이 정자가 예스럽고 제남에는 명사가 많다네.[海右此亭古 濟南名士多]” 하였다. 중국 산동(山東) 제남의 역산(歷山) 아래에 역하정(歷下亭)이 있었는데, 이 정자에서 잔치를 할 때에 두보가 이 시를 지었다. 여기에서는 ‘제남명사’를 전라도 구례 일대의 명사들을 비유하여 말한 것인 듯하다.

477)통을……회복했고:두공(竇鞏)은 당나라 때의 인물인데 시에 능하였다. 시통(詩筒)을 전하여 서로 시를 주고받은 일이 있었던 듯하다.

478)걸상……본받았네:후한서 권53 서치열전(徐穉列傳)에 “진번(陳蕃)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을 때에 빈객을 접대하지 않았는데, 오직 서치가 왔을 때에만 특별히 걸상[榻]을 마련하여 대우를 하고 서치가 돌아가면 걸상을 걸어 두었다.” 하였다. 서치는 후한의 고사(高士)이다. 당나라 왕발(王勃, 447〜501)이 지은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물화(物華)는 하늘의 보배이니 용천검(龍泉劍) 빛이 우성(牛星)과 두성(斗星)을 비추었고, 인걸(人傑)은 땅의 신령함이니 서유(徐孺)가 진번의 걸상을 내리게 하였다.” 하였다. 서치는 자가 유자(孺子)인데, 서유자(徐孺子)를 줄여서 서유(徐孺)라 한다.

479)심성(心星)이……느끼겠고:시경 칠월(七月)에 “7월에 심성이 내려가고 9월에는 옷을 만들어 주느니라.[七月流火 九月授衣]” 하였다. 7월에는 대화심성(大火心星)이 초저녁에 나타나는 위치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더 낮아지고 날씨가 추워지니 9월에는 옷을 만들어 주어서 추위를 막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시를 짓는 시기가 서늘한 가을 기운이 느껴지는 7월이므로 이 말을 한 것이다.

480)금(金)에……하네:고대에는 태세성(太歲星)의 운행 방위에 따라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는데, 태세성이 서방(西方)에 있는 것을 태세성이 금방(金方)에 있다고 하여, 풍년의 조짐으로 인식하였다. 사기 권27 천관서(天官書)에 “태세성이 금(金)에 있으면 풍년이 들고 수(水)에 있으면 작황이 좋지 않으며 목(木)에 있으면 기근이 들고 화(火)에 있으면 가뭄이 든다.” 하였다.

481) 서산(西山)에 기운은 상쾌하니:동진(東晉) 때의 왕휘지(王徽之)가 환온(桓溫)의 거기참군(車騎參軍)으로 있을 때에 환온이 “경이 관부에 온 지가 오래되었으니 관부의 업무 처리를 이제 서로 의논해야겠소.” 하니, 왕휘지가 대답을 아니하고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수판(手版)으로 턱을 괴고 말하기를, “서산에 아침이 오니 시원한 기운이 감돕니다.” 하였다고 한다.

482) 북궐(北闕):군주가 있는 대궐을 말한다.

483) 칠월……날에:음력 1월 보름을 상원(上元), 7월 보름을 중원(中元), 10월 보름을 하원(下元)이라 한다. 이 셋을 가리켜 삼원(三元)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7월 보름, 즉 중원을 열흘 지난 날이니 7월 25일을 말한다. 음력 7월 25일은 하현에서 그믐으로 가는 날짜이다.

484) 큰……축수하리:시경 행위(行葦)에 “장수하고 길하여 큰 복을 누리리라.[壽考維祺 以介景福]” 하였다.

485) 금경록(金鏡錄):금경의 본래 뜻은 구리거울이다. 당나라 현종(玄宗)의 생일 때에 신하들이 모두 거울[寶鏡]을 올렸는데, 장구령(張九齡)이 “거울로는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시고 인물로는 길흉을 비추어 보소서.” 하면서, 전대(前代)의 흥폐(興廢) 원인을 기술하여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올렸다. 천추는, 황제의 생일을 천추절이라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이후로 거울삼을 만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기록하여 군주를 풍자적 수법으로 깨우쳐 주는 문장이나 서적을 가리킬 때에 금경록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였다.

486)수조사(水調詞):수조(水調)는 곡조의 이름으로,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지었다고 하는데, 당나라 때에 산서(散序), 중서(中序), 입파(入破)로 구성하여 대곡(大曲)을 만들었다. 중서의 제1장을 ‘가두(歌頭)’라고 하는데, 대개 95자 내외로 되어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 문인들이 이 수조가두에 가사(歌詞)로 시를 지어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에 소식(蘇軾)이 귀양 가 있으면서 수조사를 지었는데, 그 가사에 “다만 임금이 계신 궁궐 높은 곳이 추위를 이기지 못할까 염려되네.[只恐瓊樓玉宇 高處不勝寒]” 하였다. 이 노래가 전파되자, 신종이 듣고는 “소식이 끝까지 임금을 사랑하는구나.” 하면서, 죄를 감하여 귀양지를 옮겨 주었다고 한다.

487)병이(秉彝):시경 증민(烝民)에 “하늘이 백성을 내시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네. 백성이 상법(常法)을 잡고 있기에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것이라네.[天生烝民 有物有則 民之秉彝 好是懿德]” 하였다. 병이의 병(秉)은 집(執)의 뜻이고 이(彝)는 상(常)의 뜻이다.

488)갖추어……가닥이고:금신(衿紳)은 대개 유자(儒者)의 옷을 입고 띠를 드리운 선비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군주로부터 벼슬을 받아 그 벼슬에 맞는 관복(官服)을 갖추어 입은 구례 군수의 복색을 표현한 말인 듯하다.

489)주인이 손님을 인도하니:소학 명륜(明倫), 예기 곡례(曲禮) 등에, “손님과 함께 들어갈 때에는 문에 이를 때마다 손님에게 양보하고 손님이 침문(寢門)에 이르면 주인이 ‘들어가서 자리를 펴겠습니다.’라고 하고 들어가서 자리를 편 뒤에 나와서 손님을 영접하고, 손님이 고사(固辭)하면 주인이 손님을 인도하여 들어간다.[肅客而入]” 하였다. 숙객(肅客)의 숙(肅)은, ‘진(進)의 뜻이니 손님을 인도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손을 낮추어 읍을 하는 것이니[俯手以揖之] 이른바 숙배(肅拜)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490)계수나무……있고:송나라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앗대로 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치며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네.[桂棹兮蘭槳 擊空明兮泝流光]” 하였다.

491)개암나무……바라보네:시경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습지에는 감초가 있네.[山有榛 隰有苓]” 하였다. 그 주석에 간혜는 “현자(賢者)가 쇠퇴한 시대에 하국(下國)에서 뜻을 얻지 못하고, 융성했던 시대의 훌륭한 왕을 그리워한 것이다.” 하였다.

492)어리석은……바치고:옛날 중국의 어떤 농부가 초봄에 따뜻한 햇살을 등에 쬐다가 그것이 좋아서 자기 아내에게 말하기를, “임금께 이 햇볕을 갖다 바치면 큰 상을 받을 것이다.” 하니, 그 아내가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사람이 미나리 줄기가 맛있다고 여겨 고을의 부호에게 권했는데, 부호가 그것을 먹어 보니 입에 쓰고 배가 아팠다고 합니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원래는 고대광실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추위를 모르고 사는 군주에게는 따뜻한 햇볕이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며, 늘 맛있는 음식을 먹는 부호에게는 미나리 반찬이 맛있는 음식일 수가 없다는 뜻인데, 후세에는 윗사람에게 물건을 바칠 때에 바치는 물건이 보잘것없다는 뜻의 겸사로 쓰였다. 이 고사는 열자(列子) 양주(楊朱)에 나온다. 이아익(爾雅翼), 통지(通志),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등에도 인용되어 있다.

493)이슬이……나고:원문의 항해(沆瀣)는 야기(夜氣) 또는 이슬[淸露]을 말하는데, 신선이 마신다고 하는 음료수이다. 동장(銅掌)은 구리로 만든 선인장(仙人掌)인데, 한나라 무제(武帝)가 신선술에 미혹되어 신명대(神明臺)를 세우고 구리로 이슬을 받는 승로반(承露盤)을 설치하여 밤이슬을 받아 마셨다고 한다. 여기서는 가을 이슬이 촉촉이 내린 것을 표현한 말인 듯하다.

494)아홉……가득하네:산림경제(山林經濟) 권1 섭생(攝生)에 “한 치가 아홉 마디인 석창포(石菖蒲)를 5월 5일에 채취하여 그늘에 100일 동안 말려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먹는다. 또 뿌리를 찧어 즙을 내어 찹쌀 미음에 섞어 먹거나 술을 빚어 먹는다. 그러면 정신을 소통시키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하였다. 태평광기 신선(神仙)에 “한나라 무제가 숭산(嵩山)에 올라갔을 때에 한밤중에 문득 선인(仙人)을 만났는데, 키가 2장(丈)이고 귀가 머리 위에서 나와서 어깨에 닿는 사람이었다. 무제가 예를 갖추어 물으니, 선인이 말하기를, ‘나는 구의산(九嶷山)의 산신이다. 중악(中岳)에 석창포가 있는데 한 치가 아홉 마디이고 그것을 먹으면 장생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와서 그것을 채취하고 있다.’ 하였다. 무제가 ‘이는 중악의 산신이 나에게 알려 준 것이다.’라고 하며 그 창포를 채취하여 복용하였는데, 2년이 지나도록 효과가 없자 복용을 중지하였다. 당시에 수행한 관리들 중에 그것을 복용한 자가 많았는데 아무도 오래도록 지속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왕흥(王興)이라는 자가 그 소문을 듣고 오래도록 창포를 복용하여 장생하였다.” 하였다. 창포, 또는 석창포는 대개 술을 빚거나 가루로 만들어 복용하면 장생할 수 있는 식물로 시문에 인용되어 있다.

495)초(楚)나라……오고: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초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5백 년이 봄이고 5백 년이 가을이며, 상고(上古) 시대에 대춘(大椿)이라는 나무는 8천 년이 봄이고 8천 년이 가을이었다.” 하였다.

496)동해……가네:사문유취, 예문유취, 분류자금(分類字錦) 등의 유서류의 기록에 의하면, 동해 바다에 있는 신선들이 사는 섬에 반도(蟠桃)라는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그 가지가 수천 리에 걸쳐 서려 있으며 3천 년에 한 번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한나라 무제 때에 신선 서왕모(西王母)가 무제를 찾아와서 복숭아 일곱 개를 주면서 “이 복숭아나무는 3천 년에 한 번 열매를 맺습니다.” 하였다고 한다.

497)조서(詔書)를……봉황(鳳凰)이고:단혈(丹穴)은 전설상의 산 이름으로 봉황이 사는 곳이다. 봉황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스스로 울고 스스로 노래하는데, 봉황이 나타나면 천하가 편안해진다고 한다. 조서를 보냈다는 것은, 중국에서 고종의 생일을 축하하는 글을 보내왔다는 표현인 듯하다.

498)궁궐……거북이네:오래 살아서 등에 푸른 이끼가 낀 거북이를 녹모귀(綠毛龜)라 하는데, 옛날에는 상서로운 동물로 여겼다. 사기 권128 귀책열전(龜策列傳)에 “남방(南方)의 노인이 거북이로 평상의 다리를 괴었는데, 20여 년이 지나 노인이 죽은 뒤에 평상을 옮기니, 거북이가 그때까지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하였다. 몸이 곤궁한 처지에서 속박을 받고 있음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군주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인용한 것이다.

499)支:대본에 ‘攴’로 되어 있는데, 문리로 보아 ‘支’가 타당하므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500)중동(重瞳)의 눈동자:중동은 눈동자가 두 개라는 말인데, 귀상(貴相)이라 한다. 순(舜) 임금이 눈동자가 두 개였으므로, 이후로 중동은 순 임금과 같은 훌륭한 군주를 가리켜 말할 때에 사용되었다.

501)팔채(八彩)의 눈썹:요(堯) 임금의 눈썹이 여덟 문채가 났다고 한다. 이후로 팔채미(八彩眉)는 훌륭한 군주를 가리켜 말할 때에 사용되었다.

502)원력(願力):부처에게 빌어서 소원을 이루려는 의지를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

503)영수장(靈壽杖):영수목(靈壽木)으로 만든 지팡이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영수장변증설(靈壽杖辨證說)에 “영수장은 영수목으로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영수장이라 하는 것은 그 재료가 무슨 나무인지 모르겠는데, 중국에서 말하는 영수목은 아니다. 내가 여러 학설로 상고해 보건대, 영수목은 우리나라의 두릅나무[頭菜木]와 흡사할 듯하다. 말리면 쇠처럼 단단해서 잘 부러지지 않으므로 사냥꾼이 호랑이를 잡는 창 자루를 만들 때에 이 나무를 많이 사용한다. 또한 지팡이를 만들기에도 좋다.” 하였다.

504)如:대본에는 ‘知’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505)산처럼……나서:시경 천보(天保)에 “하늘이 그대를 안정시켜 흥성하지 아니함이 없는지라, 산과 같고 언덕과 같으며 큰 산과 같고 큰 언덕과 같으며 냇물이 흘러오는 것과 같아서 불어나지 아니함이 없도다.[天保定爾 以莫不興 如山如阜 如岡如陵 如川之方至 以莫不增]” 하였다. 원문의 강릉(岡陵)은 축수하는 말로 많이 인용된다. 보산(寶筭)은 군주의 수명 또는 나이를 말한다.

506)축하 글을 짓는다네:원문의 모추(毛錐)는 붓이라는 뜻이다. 오대사(五代史) 권107 사홍조열전(史弘肇列傳)에, “조정을 편안히 하고 혼란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긴 창과 큰 칼이 필요한 것이지 붓[毛錐子] 같은 것이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모추를 붓[筆]으로 보면, 재모추(載毛錐)는 재필(載筆)이 되며, 재필은 ‘필기도구를 휴대하고 군왕의 언행을 기록한다.’ 또는 ‘소차(疏箚)나 표문(表文)을 짓는다.’라는 뜻이다.

507)신중함:시경 소민(小旻)에 “전전하며 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며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한다.[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하였는데, 그 집주에 “여림심연(如臨深淵)은 떨어질까 봐 염려하는 것이고 여리박빙(如履薄氷)은 빠질까 봐 염려하는 것이다.” 하였다. 논어 태백(泰伯)에도 인용되어 있다. 임리(臨履)는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히 한다는 뜻이다.

508)도올(檮杌)……것:춘추좌씨전 문공(文公) 18년에 “옛날 중국에 제홍씨(帝鴻氏)에게 못된 아들이 있었는데 천하 사람들이 그를 혼돈(渾敦)이라 하였고, 소호씨(少皞氏)에게 못된 아들이 있었는데 그를 궁기(窮奇)라 하였고, 전욱씨(顓頊氏)에게 못된 아들이 있었는데 그를 도올이라 하였고, 진운씨(縉雲氏)에게 못된 아들이 있었는데 그를 도철(饕餮)이라 하였다. 순(舜)이 이 네 흉족(凶族)을 사방 변경으로 내쳐서 이매(螭魅)를 막게 하였다.” 하였다. 이들의 이름은 대개 악인을 비유할 때에 쓰인다. 원문의 도도(檮饕)는 도올과 도철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도올과 도철 같은 탐관오리나 지방 수령을 비유한 것이다.

509)급암(汲黯)……것:전한(前漢) 때의 급암과 정당시(鄭當時)를 병칭하여 급정(汲鄭)이라고 한다. 급암은 직언(直言)을 서슴없이 하여 무제가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 칭찬을 하였으며, 정당시는 빈객을 좋아하여 장안(長安)의 곳곳에 역말을 대기시켜 빈객들을 맞이해 대접을 극진하게 했다고 한다. 사기 권120 급정열전(汲鄭列傳)에 나온다.

510)위육(位育)에 참여하고:만물을 기르는 천지의 일에 함께 참여하여 그 일을 돕는다는 뜻이다. 중용장구1장에 “중(中)과 화(和)를 미루어 궁극에까지 가면,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하였고, “사물의 성(性)을 다하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될 수 있다.[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하였다.

511)아름다움을 송축하네:원문의 의나(猗那)는 시경 나(那)에 “아, 많구나. 우리의 작은북 큰북을 설치하네. 화락하게 북을 두드려서 우리 열조를 즐겁게 하네.[猗與那與 置我鞉鼓 奏鼓簡簡 衎我烈祖]”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512)혼호(渾灝)의……더하고:법언(法言)4 문신(問神)에 “우(虞)나라와 하(夏)나라의 글은 혼혼(渾渾)하고 상(商)나라의 글은 호호(灝灝)하고 주(周)나라의 글은 악악(噩噩)하다. 주나라 이하로는 글이라 할 수 없다.” 하였다. 혼혼은 혼후하고 질박하다는 뜻이고 호호는 넓고 원대하다는 뜻이고 악악은 엄숙하고 정대하다는 뜻이라 한다. 후세에는 ‘혼혼호호’ 또는 ‘혼혼악악’을 순박함이나 순박한 글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혼혼호호’를 줄여서 ‘혼호’로 쓰기도 한다. 여기서 혼호의 글은 순박한 문체로 쓴 서경의 문자를 가리키며, 죽간을 더한다는 것은 태평성대로 평가되는 삼대(三代) 때의 기록물인 서경의 끝에 대한제국의 글이 편입될 수 있다는 표현인 듯하다.

513)오랑캐들:전국책 조책(趙策), 사기 권43 조세가(趙世家) 등에 “머리카락을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며 어깨를 드러내고 옷깃을 왼쪽으로 두르는 것은 구월의 백성들이고, 치아를 검게 칠하고 이마에 문신을 새기며 갓을 버리고 솜씨 없이 바느질한 모자를 쓰는 것은 남쪽 오나라의 풍속이다.[翦髮文身 錯臂左袵 甌越之民也 黒齒雕題 却冠秫絀 大吳之國也]” 하였다. 중국 고대 흉노족은 초상을 당하면 얼굴에 칼자국을 내어[剺面] 피를 흘리면서 슬픔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원문의 ‘조리(雕剺)’는 ‘조제이면(雕題剺面)’을 말하는 듯하다.

514)제왕(帝王)의 힘을 잊고:요 임금 때에 어떤 노인이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는 거라.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을 갈아 밥을 먹네. 황제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飲 耕田而食 帝力於我 何有哉]” 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격양가(擊壤歌)라고 하며, 태평성대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515)노인은……즐거워하네:한나라 문제(文帝) 때에 백성을 보살피는 정치가 잘 이루어지자 6, 7십 세 노인들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놀이를 했다고 한다. 태평한 시대를 표현한 것이다.

516)지팡이……하네:한서 권51 가산전(賈山傳)에 “산동(山東)의 아전이 조령(詔令)을 반포하니 백성들이 늙은이와 병약자들까지도 지팡이를 짚고 가서 들으면서, 죽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덕화(德化)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자 하였다.” 하였다.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517)만시(挽詩):원문의 호리(蒿里)는 본래 중국 태산(泰山)의 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죽은 자를 묻는 장소였는데, 뒤에는 묘지(墓地)를 뜻하는 말로 쓰였으며, 호리(蒿里)라는 상가(喪歌)가 있었다고 한다.

518)갈장(渴葬):초상이 났을 때에 장례 때까지의 기간이 신분에 따라 예법에 정해져 있는데 이 기간을 당겨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519)예로부터……나왔었지:소식(蘇軾)의 방산자전(方山子傳)에 “방산자는 광황(光黃) 지역에 은둔해 사는 사람이다.” 하였는데, 광황은 송나라 때의 광주(光州)와 황주(黃州)로 오늘날의 호북(湖北) 광화현(光化縣)과 황강현(黄岡縣)이 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광황은 방산자전이 나온 이후로, 은자(隱者)와 기인(奇人)이 사는 지역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520)도산(道山)은……급했구나:도산은 사람이 죽으면 간다고 하는 선계(仙界)를 말한다. 도산에서 안정회를 서둘러 데려다가 그곳에 있는 선관(仙官)들의 주인을 삼았다는 뜻이니, 안정회의 죽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521)암혈 군자:초야에 은둔해 사는 은자를 말한다. 산림처사와 흡사한 표현이다.

522)해학(海鶴):이기(李沂, 1848〜1909)의 호이다. 24쪽 주25 참조. 전주매천시집 자주(自註)에 “이기는 자가 백증(伯曾)이고 호는 해학이며 만경(萬頃)에 살았는데 재명(才名)과 지략(智略)이 있었다.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교관(敎官)을 거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서 집필(執筆)하다가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암살을 도모했는데 일이 발각되어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사면되어 돌아와 한성의 객사(客舍)에서 별세하였다.” 하였다.

523)노령(蘆嶺):전라남도 장성과 전라북도 정읍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갈재라고 하고 위령(葦嶺)이라고도 한다.

524)진평(陳平)의 계책:한(漢)나라 진평이 고조(高祖)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냈던 계책 여섯 가지를 말한다. 간첩을 보내 초(楚)나라 항우(項羽)의 군신(君臣) 사이를 이간시키고, 밤에 여자 2천 명을 내보내 형양(滎陽)의 포위를 풀어 고조를 탈출시키고, 한신(韓信)을 임시로 제왕(齊王)에 봉했다가 속여서 운몽(雲夢)에서 잡은 일 등이다.

525)배에서……것:진평이 초나라에서 한나라로 도망쳐 올 때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뱃사람들이, 잘생긴 사내가 혼자서 배를 탔으니 틀림없이 도망치는 장군일 것이어서 허리춤에는 응당 보화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진평을 죽일 생각을 하였다. 이것을 눈치 챈 진평이 옷을 다 벗고 앉아서 배를 저으니, 그들이 의심을 풀고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한다.

526)躶:전주매천시집에는 ‘裸’로 되어 있다.

527)눈을……게야:당나라 시인 이섭(李涉)이 도적을 만났을 때에 도적의 두목이 말하기를, “정말로 이섭이 맞다면 빼앗지 않겠다. 시를 잘 짓는다는 명성을 오래 전부터 듣고 있다. 시를 한 수 지어 주면 놓아 주겠다.” 하여, 이섭이 시를 지어 주고 풀려났다고 한다. 그 시에, “저녁 비 부슬부슬 내리는 강가 마을에, 녹림의 호걸이 밤손님으로 오셨네. 후일에는 서로 얼굴 피할 일 없으리라. 세상은 지금 절반이 그대 같은 사람이니.[暮雨蕭蕭江上村 綠林豪客夜相聞 他年不用相面避 世上如今半是君]” 하였다. 이 시는 여러 서적에 인용되어 나오며 출전에 따라 글자의 차이가 다소 있다. 신(新)나라 때에 왕망(王莽)의 통치에 반대하는 무리가 녹림산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이후 ‘녹림’은 ‘도둑의 소굴’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녹림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유명한 시인을 알아볼 안목을 지닌 도적이 없다는 뜻이다.

528)영재(寧齋):35쪽 주47 참조.

529) 석문(石門):이건창의 선조인 이경직(李景稷, 1577〜1640)의 호이다.

530)石門:전주매천시집에는 ‘右門’으로 되어 있으나, ‘石門’의 오류이다.

531)왕관곡(王官谷)의……깨끗했고:왕관곡의 처사는 당나라의 시인 사공도(司空圖, 837〜908)를 말한다. 그는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중조산(中條山) 왕관곡에 은거하였다. 그는 탁영정(濯纓亭)을 휴휴정(休休亭)이라 이름을 고치고 기문을 지었는데, 그 휴휴정기(休休亭記)에 “그 재주를 헤아려 보니 쉬는 게 마땅하고 그 분수를 헤아려 보니 쉬는 게 마땅하고 늙고 귀가 먹었으니 쉬는 게 마땅하다.” 하였다. 구당서 권190하 문원열전(文苑列傳) 사공도(司空圖)에 나온다.

532)원우(元祐)……존엄했네:송나라 신종(神宗) 때부터 철종(哲宗) 때인 원우 연간에 이르기까지 당쟁이 극심하여, 사마광(司馬光)을 중심으로 한 문언박(文彦博), 소식(蘇軾), 정이(程頤), 황정견(黃庭堅) 등의 구법당(舊法黨)과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채경(蔡京), 증포(曾布) 등의 신법당(新法黨)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휘종(徽宗) 때에 채경 등이 권세를 잡게 되자, 원우 연간에 재상을 지낸 사마광을 비롯한 문언박, 소식, 정이 등을 원우간당(元祐奸黨)으로 지목하여 배척하였다. 그 뒤 신법당 양사성(梁師成)은 구법당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취하며 그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여, 은둔해 지내던 유안세(劉安世)에게 편지를 보내 관직에 나오기를 종용하였다. 그 편지에, 자손을 위해서라도 관직에 나오기를 바란다는 말도 있었다. 유안세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자손을 위할 생각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폐기되어 지낸 지 30년 동안 조정의 권귀(權貴)에게 한 줄[一點墨]도 글을 보낸 적이 없다. 나는 원우 완인(元祐完人)이 되어 사마광을 지하에서 뵙고자 한다. 이런 소신을 깰 수 없다.” 하고 그 편지를 돌려보내고 답장을 하지 않았다. 송사(宋史) 권345 유안세열전(劉安世列傳),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후집(後集) 권12 등에 나온다.

533)지주(砥柱) 같은 지조:지주는 중국 하남(河南) 삼문협(三門峽)에 있는 작은 바위섬인데, 황하(黃河) 강줄기 안에 서 있다. 황하의 세찬 물결에도 굽히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그 형상으로 인해, 세상 풍파를 견디며 굳센 지조를 지키는 사람을 비유할 때에 황하지주(黃河砥柱) 또는 중류지주(中流砥柱)라는 말을 쓴다.

534)하백(河伯):전설상의 황하의 수신(水神)을 말하는데, 이름은 풍이(馮夷)라고 한다.

535)규성(奎星)이 땅에 떨어지니:대문장가가 죽었다는 의미이다. 고대 천문학에서는 움직이지 않아서 천문(天文)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경성(經星) 28개를 정하여 대략 천구(天球)의 동서남북의 방위에 7개씩 나누어 붙여서 28수(宿)라고 불렀다. 그중에 서쪽 하늘에 뜨는 7개의 별을 백호칠사(白虎七舍)라 하는데, 백호칠사의 하나가 규성이다. 이 규성은 문운(文運)을 담당한다고 한다.

536)훌륭한……마셨으니:원문의 가옥(葭玉)은 겸가옥수(蒹葭玉樹)의 준말이다. 겸(蒹)과 가(葭)는 하찮은 수초(水草)의 이름인데, 자신을 낮추는 겸사로 많이 사용한다. 옥수(玉樹)는 훌륭한 자제(子弟)나 훌륭한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 명제(明帝)가 왕후의 아우인 모증(毛曾)을 황문시랑(黃門侍郞) 하후현(夏侯玄)과 함께 앉게 하자, 당시 사람들이 “갈대가 옥수에 의지한 것과 같다.[蒹葭倚玉樹]”라고 하였다고 한다. 하찮은 모증이 옥수 같은 하후현 옆에 앉았다는 뜻인데, 후세에는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어 겸양하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였다. 세설신어 용지(容止), 삼국지 권9 위서(魏書) 하후현전 등에 실려 있다. 여기서는 영재를 높이고 매천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뜻으로 쓴 것이다.

537)경기와……부여잡았고:총마(驄馬)는 대개 왕명을 받은 어사(御史)가 타는 말을 가리킨다. 이건창은 암행 어사가 되어 충청도와 경기도를 감찰한 적이 있으므로, 경호(京湖)를 경기와 호서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538)요동과……맞이했네:이건창은 1874년(고종11)에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동지 정사(冬至正使) 이회정(李會正), 부사(副使) 심이택(沈履澤)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539)祗:대본에는 ‘抵’로 되어 있으나 오류로 판단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540)귓속……사는구나:성호사설 권9 인사문(人事門)에 “예로부터 장수의 징조를 논함에, ‘눈썹 속에 자란 털이 귓속에 자란 털만 못하다.[眉毫不如耳毫]’라고 하였다.” 하였다. 이호(耳毫)는 귓속에서 자라는 털인데, 이 털이 자라나면 오래 살 징조라고 한다. 세상의 악인들은 귓속 털이 자라서 장수하는데 영재 이건창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다.

541)진천(震川):명나라 귀유광(歸有光, 1506〜1571)의 호이다. 당송고문(唐宋古文)을 주창하여 명나라 고문의 대가(大家)로 일컬어졌다.

542)망계(望溪):청나라 방포(方苞, 1668〜1749)의 호이다. 학술은 정주학(程朱學)을 따랐고 문장은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를 본받았으며 동성파(桐城派) 산문(散文)의 창시자이다.

543)천상(天上)에……것이었던가:옥루(玉樓)는 백옥루(白玉樓)를 말한다. 백옥루는 천상에 있는 누각으로 천제(天帝) 또는 신선이 거처하는 곳이라 한다. 백옥루 이야기는 27세의 나이로 요절한 당나라 때의 천재 시인 이하(李賀)와 관련된 고사이다. 이하가 죽을 때에, 낮에 붉은옷[緋衣]을 입은 어떤 사람이 붉은 용[赤虯]을 타고 판자를 들고 나타났는데, 그 판자에 태고(太古)의 전자(篆字)로 “상제가 백옥루를 완성하여, 지금 그대를 불러서 기문을 짓게 하시려 한다.”라고 쓰여 있었고, 이윽고 이하가 죽었다고 한다. 후세의 시문에서는 문인(文人)의 요절을 비유하는 말로 백옥루 고사를 인용하였다.

544)조정(朝廷)에……것인가:인감(人鑑)은 인경(人鏡)과 같은 말인데, 송나라 태조의 조부 이름이 조경(趙敬)이었으므로 송나라 때부터는 이름과 같은 발음을 피하기 위해 경(鏡)을 감(鑑)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정관정요 권2 임현(任賢) 위징(魏徵), 구당서 권71 위징열전(魏徵列傳) 등에 의하면, “위징의 죽음에 대해 태종이 탄식하기를,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衣冠)을 바르게 할 수 있고 옛 역사로 거울을 만들면 국가의 흥망을 알 수 있고 사람으로 거울을 만들면 정치의 득실을 밝게 알 수 있다. 짐이 항상 이 세 거울을 보존하여 나의 허물을 방지하였는데 이제 위징이 세상을 떠났으니 거울 하나를 잃었다.” 하였다. 이후에 인경은, 직간(直諫)을 잘하여 군주의 허물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직간을 잘하던 영재 이건창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만 한 이가 조정에 누가 있겠는가라는 말이다.

545)창강(滄江)도……있었구나:이건창이 세상을 떠난 때가 1898년(광무2) 6월인데, 창강 김택영은 1896년(건양1)에 부친상을 당해 복상 중이었고 1898년 4월에 계실(繼室) 전씨(全氏)의 상을 당한 상황이었다. 창강이 와병 중이었다는 말은, 계실의 초상을 당한 창강의 상황을 표현한 것인 듯하다.

546)구름 머문:도잠(陶潛)이 지은 정운(停雲)에 “어둑어둑 멈춘 구름, 부슬부슬 내리는 비.[靄靄停雲 濛濛時雨]”라는 구절이 있다. 그 자서(自序)에 “정운은 친우(親友)를 그리워하는 시이다.”라고 하였다. 이후로는 문인들이 친구를 그리워하는 것을 표현할 때에 이 ‘정운(停雲)’을 많이 사용하였다.

547)내 수심을 자아냈네:전국 시대 초나라 충신 굴원(屈原)이 지은 상부인(湘夫人)에 “황제의 따님들이 북쪽 물에 빠졌으니 그 아름다운 모습이 내 수심을 자아내네.[帝子降兮北渚 目眇眇兮愁予]” 하였다. 순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요 임금의 두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상강에 빠져 죽었는데, 지은이 굴원이 자신의 처지를 아황과 여영에 견주어 이 노래를 지은 것이라 한다. 원문의 묘수여(眇愁予)는 이 상부인의 ‘목묘묘혜수여(目眇眇兮愁予)’에서 따온 것인 듯하다.

548)백성들……그리워함이었고:안석(安石)은 남북조 시대 진(晉)나라 사안(謝安)의 자이다. 사안이 누차에 걸친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하여 산수(山水)와 문적(文籍)을 즐기며 지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안석이 나오지 않으니 창생을 어찌할 것인가.[安石不出 當如蒼生何]” 하였다고 한다. 진서(晉書) 권79 사안열전(謝安列傳), 세설신어 배조(排調) 등에 실려 전한다.

549)황제……애석했지:경여(敬輿)는 당나라 육지(陸贄, 754805)의 자이다. 당나라 덕종(德宗) 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었다. 주자(朱泚)가 반란을 일으켜 덕종이 봉천(奉天)으로 피란 갔을 때에 천하가 혼란스럽고 처리할 일이 많아서 하루에도 조서(詔書)가 수백 통씩 내려졌는데 그 조서의 초안을 육지가 만들면서 붓을 들고 마치 샘물이 솟듯이 써 내려갔다고 한다. 구당서(舊唐書)139 육지열전(陸贄列傳), 사문유취, 책부원귀(冊府元龜) 등에 실려 전한다. 여기서는 영재 이건창 같은 문장가가 조정의 황제 곁에 없었던 것이 애석하다는 뜻으로 쓴 것인 듯하다.

550)쥐새끼……말거라:장자 추수(秋水)에 ‘혁(嚇)’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양(梁)나라의 정승으로 있는 혜자(惠子)가 장자를 의심하여 자기의 정승 자리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걱정을 하니, 장자가 말하기를, “남쪽 지방에 원추(鵷鶵)라는 새가 있는데, 이 새는 남해(南海)에서 날아올라 북해(北海)까지 날아간다. 오동(梧桐)이 아니면 앉지 않고 연실(練實)이 아니면 먹지 않으며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이때에 부엉이가 썩은 쥐를 한 마리 차지하고 있으면서, 하늘 위에 원추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부엉이는 원추가 그 쥐를 빼앗을까 봐 올려다보고 ‘꿱![嚇]’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그대는 그대가 가진 양국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나에게 ‘꿱!’ 하고 소리를 지르려 하는가?” 하였다. 이건창을 시기하거나 두려워하여 그의 벼슬 진출을 막고자 하던 벼슬아치들이 이제는 이건창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551)바람……수레:진(晉)나라 부현(傅玄, 217〜278)의 작품으로 알려진 오초가(吳楚歌)라는 악부시(樂府詩)에 “구름으로 수레를 삼고 바람으로 말을 삼네.[雲爲車兮 風爲馬]”라는 구절이 있다.

552)새매가……준엄했고:춘추좌씨전 문공(文公) 18년에 “거(莒)나라 기공(紀公)이 계타(季佗)를 총애하여 태자 복(僕)을 폐출하니, 태자 복이 기공을 죽이고 거나라의 보옥(寶玉)을 훔쳐 노나라로 망명해 와서 노나라 선공(宣公)에게 바쳤다. 선공이 복에게 성읍(城邑)을 주라고 명하였으나 계문자(季文子)가 사구(司寇)를 시켜 복을 국경 밖으로 축출하게 하고, 선공에게 그 까닭을 말하기를, ‘선대부 장문중(臧文仲)이 저에게 군주 섬기는 예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저는 그대로 봉행하며 감히 실추하지 않았습니다. 선대부께서 말씀하기를, 자기 군주에게 무례한 자를 보거든 그를 마치 새매가 참새를 낚아채듯이 잡아서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의 행위는 모두 흉덕(凶德)이므로 그를 쫓아 보냈습니다.’ 하였다.” 하였고,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25년에 “자산(子産)이 연명(然明)에게 정사(政事)를 묻자, 연명이 답하기를, ‘백성을 자식처럼 보고, 불인한 자를 보거든 그를 마치 새매가 참새를 낚아채듯이 잡아서 죽여야 합니다.’ 하니, 자산이 기뻐하여 그 말을 자태숙(子太叔)에게 해 주고, 또 말하기를, ‘전에는 내가 연명의 얼굴만 보았을 뿐인데 이제 내가 그의 마음을 보았다.’ 하였다.” 하였다. 여기서는 이건창(李建昌)이 1878년(고종15)에 충청 우도 암행 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로서 감사(監司) 조병식(趙秉式)의 탐오한 죄상을 아뢴 서계(書啓), 1893년에 동학군 토벌을 청하는 내용으로 올린 상소 등을 말하는 듯하다. 이건창의 문집인 명미당집(明美堂集) 권7에 청초사비부진면소(請勦邪匪附陳勉疏)가 실려 있다.

553)원추(鵷雛)가……내던졌지:원추는 봉황새의 일종이라 한다. 65쪽 주166 참조. 이건창은 1896년(건양1)에 해주부 관찰사(海州府觀察使)에 제수되었을 때에 누차 상소를 올려 극구 사직하여, 왕명을 거역한 죄목으로 지도군(智島郡)에 유배된 적이 있다. 이때의 사직 상소가 명미당집 권7에 실려 있다.

554)세한(歲寒)에……강직함이었고:논어 자한(子罕)에 “해가 추워진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하였다.

555)강호(江湖)에서도……마음이었네:북송(北宋)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내가 일찍이 옛 인인(仁人)의 마음이 어떠한 것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인인은 묘당에 있을 때에는 그 백성을 근심하고 강호에 있을 때에는 그 군주를 근심하였다. 이는 나아가서도 근심하고 물러나서도 근심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어느 때에 즐거울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이 구절은 벼슬에서 물러나 초야에 있을 때에도 한결같이 군주와 나라를 근심하는 충성심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여씨춘추 권21 심위(審爲)장자 권28 양왕(讓王) 등에 “중산 공자(中山公子) 모(牟)가 첨자(瞻子)에게 말하기를, ‘몸은 강해(江海) 가에 있는데 마음은 위궐(魏闕) 아래에 가 있으니, 어찌합니까?’ 하니, 첨자가 말하기를, ‘생명을 중시해야 하니, 생명을 중시하면 이익을 경시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공자 모가 ‘그것을 알기야 하지만, 마음을 누를 수가 없습니다.’ 하니, 첨자가 말하기를, ‘자신의 욕망을 누를 수 없다면, 그대로 따르십시오. 누를 수 없으면서 억지로 참으면 거듭 손상을 주는 것입니다. 거듭 손상을 주는 사람은 오래 살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였다. 대개 강호와 위궐이라는 어휘는 여기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사기 권120 급정열전(汲鄭列傳)에 “예전에 적공(翟公)이 정위(廷尉)로 있을 때에는 빈객들이 문전을 채웠는데 벼슬에서 물러나자 문 앞에 새그물을 칠 정도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정위가 되자 빈객들이 적공의 집에 찾아가고자 하였다. 적공이 대문에 써 붙이기를, ‘한 번 죽고 한 번 살아 봐야 사귀는 정을 알 수 있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해져  봐야 사귀는 태도를 알 수 있고, 한 번 귀해지고 한 번 천해져 봐야 사귀는 정이 드러난다.[一死一生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態 一貴一賤 交情乃見]’ 하였다.” 하였다. 대개 인심의 무상함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이건창의 변함없는 충성심을 표현한 것이다.

556)구름과……자부하랴만:주역 건괘(乾卦) 구오(九五)에 “같은 소리가 서로 호응하고 같은 기운이 서로 찾는다. 물은 축축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타들어 간다. 구름은 용을 따라 일어나고 바람은 범을 따라 일어난다.” 하였다. 여기서는 ‘이건창과 매천 자신이 운종룡(雲從龍)의 구름과 용 같은 사이가 되어 천추에 그 이름을 남길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이라는 뜻일 듯하다.

557)난초와……뿜는다네:이건창과 매천 자신이 난초와 혜초처럼 서로 같은 기운으로 향기를 뿜는 동류의 사람들이었다는 뜻이다.

558)두보(杜甫)는……슬퍼하였고:차율(次律)은 당나라 때 시인 두보의 친구 방관(房琯, 697〜763)의 자이다. 안녹산의 난 때에 방관이 4만 대군을 이끌고 적을 치다가 전술을 잘못 시행하여 대패하자 숙종이 그를 파직하고 벌을 내리려 하였는데, 친구인 두보가 변호해 주었다고 한다.

559)공융(孔融)은……그리워했지:공융(153〜208)은 후한 말기의 학자로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이다. 조조(曹操)를 비판하다가 처형되었다. 채 중랑(蔡中郞)은 후한 때 중랑장을 지낸 채옹(蔡邕, 132〜192)을 말한다. 육경(六經)의 문자(文字)를 확정하여 비석을 세웠다. 후한서 권70 공융열전(孔融列傳)에, “공융은 채옹과 잘 지냈는데, 채옹이 죽은 뒤에 채옹과 모습이 비슷한 병사가 있자 그를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면서 ‘노성인(老成人)은 없지만 그 전형(典刑)은 남아 있구나.’ 하였다.” 하였다.

560)서주문(西州門)……무성하고:진(晉)나라 사안(謝安, 320〜385)은 평소 생질 왕담(王曇)을 매우 사랑하였다. 사안이 죽었을 때에 왕담은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고 사안이 살던 서주(西州)의 길을 다니지 않았다. 한번은 술에 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서주의 문에 이르게 되어서는, 조자건(曹子建)의 “살아서 고대광실에서 지내시더니 죽어서는 산언덕으로 돌아가셨구나.[生存處華屋 零落歸山丘]”라는 시를 읊으며 통곡을 하고 돌아갔다. 진서(晉書) 권79 사안열전(謝安列傳)에 나온다. 서주문은, 여기서는 이건창이 살던 곳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561)도산(道山)의……전하는구나:도산은 사람이 죽으면 간다고 하는 선계(仙界)이니, 도산의 소식이란, 이건창의 사망 소식을 말한다.

562)진췌(殄瘁)하는 마음:몸과 마음이 모두 초췌해지도록 몹시 애통해하는 마음을 말한다.

563)명직(冥職)에……두었으니:명직은 저승의 벼슬자리를 말하고, 안복(顔卜)은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과 복상(卜商)을 말한다. 진(晉)나라 때에 중모 영(中牟令) 소소(蘇韶)가 죽은 뒤에 그 모습이 다시 나타나서 당제(堂弟) 소절(蘇節)에게 말하기를, “안연과 복상이 지금 지하에서 수문랑(修文郞)으로 있다. 수문랑이 모두 여덟인데, 나도 그 직책을 맡게 되었다.” 하였다고 한다. 이 내용은 태평어람, 태평광기, 사문유취 등에 실려 전하며, 퇴계문집고증(退溪文集攷證)에도 소개되어 있다. 후세에는 지하랑(地下郞) 또는 수문랑은 문사(文士)의 죽음을 뜻하는 비유로 쓰였다.

564)유림(儒林)이……당하는구나:사진년(巳辰年)이라 한 것은 후한(後漢) 때의 정현(鄭玄, 127〜200)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후한서 권35 장조정열전(張曹鄭列傳) 정현(鄭玄)에 “5년(후한 헌제 5년, 200) 봄에 꿈에 공자(孔子)가 나타나 정현에게 일러 주기를, ‘일어나거라, 일어나거라. 올해는 세성(歲星)이 진방(辰方)에 있고 내년에는 세성이 사방(巳方)에 있다.’ 하였다. 정현이 잠에서 깨어 참위설(讖緯說)과 맞춰 보고는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 뒤 병이 들어 그해 6월에 죽으니 향년이 74세였다.” 하였다. 200년은 경진년(庚辰年)이고 201년은 신사년(辛巳年)이다. 그 후로 사진년과 진사년은 현인(賢人)의 죽음을 비유할 때에 사용하는 말이 되었다.

565)거문고……버렸네:춘추 시대에 초나라 사람 백아(伯牙)는 거문고 타는 솜씨가 좋았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뜻이 태산(泰山)에 있으면 백아의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그 소리를 듣고 “우뚝하여 마치 태산과 같구나.” 하였고, 얼마 뒤에 다시 뜻이 유수(流水)에 있으면 종자기가 “넘실넘실 마치 흐르는 강물과 같구나.” 하였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들어 줄 사람이 없다고 여겨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어 버렸다고 한다.

566)고광문(高光文):1864~1944. 의병장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의 동생으로, 자는 치덕(致德)이며, 다른 이름은 광술(光述)이다. 형의 휘하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고광순의 의병이 패산하자, 1907년(융희1) 곡성 일대에서 군사를 규합하고 군수물자를 제조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901년(광무5)에 중추원 의관에 임용되고, 1905년에 비서감 승에 임용되었다.

567)연못……같고:후한(後漢) 때의 번중(樊重)은 치산(治産)을 잘하여 농경지가 300경(頃)에 이르렀다. 종족(宗族)들을 모두 돌보았고 향려(鄕閭)에도 은혜를 많이 베풀었으며, 죽을 때에는 타인에게 빚을 주고 받은 채권(債券)을 모두 불태우게 하였다. 한번은 번중이 나중에 기물(器物)을 만들 요량으로 가래나무와 옻나무를 심자 사람들이 그것을 비웃었는데 세월이 흘러 그 나무가 쓰이게 되니 비웃었던 사람들이 그것을 빌려다 썼다고 한다. 이 내용은 후한서 권32 번굉열전(樊宏列傳)에 들어 있는데, 사문유취, 패문운부 등에도 실려 전한다. 여기서는 고광문도 미래에 쓰기 위해서 가래나무와 오동나무를 심어 길렀다는 뜻이다.

568)빗속의……같네:안영(晏嬰)은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명재상으로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위 구절에 나오는 번중은 큰 부자였는데, 번중이 그러했던 것처럼 좋은 재목이 될 나무를 심어 기르기는 했지만, 고광문은 부자는 아니고 검소하게 살았음을 표현한 것인 듯하다.

569)이산(二山):유제양(柳濟陽, 1846〜1922)이다. 24쪽 주24 참조.

570)동파(東坡)의 취성당설(聚星堂雪) 시:송나라 구양수가 1050년(송 인종 황우2)에 영주(潁州)에 있을 때 취성당에서 눈이 오는 날 빈객들과 시를 지으면서, 눈을 읊을 때에 흔히 등장하는 옥(玉), 월(月), 이(梨), 매(梅), 연(練), 서(絮), 백(白), 무(舞), 아(鵝), 학(鶴), 은(銀) 등의 글자를 쓰지 못하게 했는데, 그 뒤 소식(蘇軾)이 1091년(송 철종 원우6) 11월에 구양수의 규칙을 따라 취성당설이라는 시를 지었다.

571)牖:대본에는 ‘窓’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572)畫:대본에는 ‘盡’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따라 고쳐서 번역하였다.

573)摸:대본에는 ‘模’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따라 고쳐서 번역하였다.

574)옛일……스쳐가네:옛날에 구양수와 소식이 보고 느꼈던 그 정경을 지금 매천도 보고 느끼고 있다는 뜻인 듯하다.

575)섬곡(剡曲)에서……일:왕휘지(王徽之)가 산음(山陰)에 살았는데, 눈이 많이 내린 밤에 잠이 깨어 갑자기 섬계에 사는 벗 대안도(戴安道)가 생각나서 배를 타고 만나러 갔다가 새벽에 그 집 문 앞에 이르러서는 감흥이 식자 들어가지 않고 돌아왔다.

576)양왕(梁王)이……일:한나라 때 문제(文帝)의 아들인 양 효왕(梁孝王)은 궁실과 원유(苑囿)의 향락을 좋아하여, 토원(兔園), 원암(猿巖), 안소(雁沼), 학주(鶴洲), 부저(鳧渚) 등을 만들어 놓고 즐겼는데, 하루는 토원에 있다가 큰 눈이 내리자 사마대부(司馬大夫)들에게 통지서를 보내서 말하기를, “그대들의 숨겨 두었던 생각을 뽑아내서 과인을 위해 시를 지어 보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양원수간(梁園授簡)이라 한다. 사혜련(謝惠連)의 설부(雪賦)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문선, 사문유취, 연감유함 등에 실려 전한다.

577)원생(袁生)은……닫혔으니:원생은 원안(袁安)으로, 한나라 때의 사람이다. 큰 눈이 한 길 넘게 내려 낙양 영(洛陽令)이 순찰을 나가서 보니, 민가(民家)가 모두 눈을 치우고 나와서 식량을 구걸하고 있는데, 원안의 집 문 앞에는 사람의 자취가 없었다. 얼어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눈을 치우고 방에 들어가 보니 원안이 뻣뻣하게 누워 있었다. 왜 밖으로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원안이 답하기를,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모두 주리고 있는데 남들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이 이야기는 고금사문유취, 태평어람 예문유취 등에 실려 있다. ‘원안와설(袁安臥雪)’ ‘원안고와(袁安高臥)’ 등의 용어로 쓴다.

578)철석간장(鐵石肝腸):원문의 장철(腸鐵)은 철석간장 또는 철심석장(鐵心石腸)을 말하는데, 의지가 철석 같아 외물(外物)에 의해 동요되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579)조소아(趙小雅):조성희(趙性喜)이다. 호가 소아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고종 때에 동복 현감(同福縣監), 임실 현감(任實縣監), 태인 현감(泰仁縣監), 옥천 군수(沃川郡守), 무주 부사(茂朱府使) 등을 지냈다.

580)목석(木石)과 함께 지내노라니:초야에 묻혀서 지내는 생활을 뜻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순(舜)이 깊은 산속에 살 때에 목석과 더불어 지내고 녹시(鹿豕)와 더불어 노닐었으니, 깊은 산속의 야인(野人)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하였다.

581)옷자락……거:한서(漢書)51 추양전(鄒陽傳)에 나온다. 한나라 경제(景帝) 때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모반을 꾀하자 추양(鄒陽)이 글을 올려 간하면서 “제가 고루한 속마음을 숨기고 나선다면, 어느 왕후(王侯)의 문에선들 긴 소매를 끌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권문세가의 문전에 출입하며 벼슬살이를 한다는 뜻이다.

582)영험한……있으니:옛날에 뿔 안에 실과 같은 하얀 결이 뿌리에서 뿔 끝까지 이어져 있는 무소의 뿔을 영험하게 여겨, 통서(通犀) 또는 통천서(通天犀)라고 하였다. 후세에는 영험한 무소뿔을 영서(靈犀)라 하여, 두 사람 사이에 마음이 통하거나, 남녀 사이에 애정이 통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583)강남(江南) 소식:남북조 시대 송(宋)나라 육개(陸凱)가 범엽(范曄)과 친했는데, 강남에서 매화 한 가지를 장안(長安)에 있는 범엽에게 보내며 시를 함께 보냈다. 그 시에 “매화를 꺾다가 역사(驛使)를 만나 농두에 사는 친구에게 보내네. 강남에는 별다른 것이 없어서 그저 그냥 봄 담긴 매화 가지 하나 보내네.[折梅逢驛使 寄與隴頭人 江南無所有 聊贈一枝春]” 하였다. 이 내용은 태평어람, 사문유취 등에 실려 전한다. 이후로 친구로부터 오는 서신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584)동파(東坡)의 시:소식(蘇軾)의 궤세(饋歲), 별세(別歲), 수세(守歲) 시 서문에 “한 해가 저물 때에 서로 음식물을 가지고 문안하는 것을 궤세라 하고,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서로 불러 함께 마시는 것을 별세라 하고, 섣달 그믐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는 것을 수세라 한다. 촉(蜀) 지방의 풍속이 이와 같다. 내가 기하(岐下)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세모에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있었지만 갈 수가 없어서 이 3수의 시를 지어 자유(子由)에게 부친다.” 하였다. 자유는 소식의 아우 소철(蘇轍)의 자이다.

585)발자국 소리:장자 서무귀(徐无鬼)에, 서무귀가 여상(女商)에게 말하기를, “유배된 월나라 사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겠지요. 본국을 떠나서 며칠이 지나면 아는 사람을 만나면 기쁘고, 본국을 떠나서 열흘이나 한 달이 지나면 일찍이 본국에서 얼굴 한번 본 적이 있는 사람만 만나도 기쁘며, 본국을 떠나서 일 년쯤 되면 본국 사람과 비슷하게 보이는 사람만 보아도 기뻐하게 됩니다.……인적이 없는 산골짜기로 도망쳐 홀로 사는 사람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586)갑절 가치의 보화:맹자 공손추 하에, “왕이 겸금(兼金) 100을 주었는데도 받지 않으시고……” 하였는데, 그 집주(集注)에 “겸금은 호금(好金)이다.” 하였다. 분량이 많거나 가치가 큰 금은전백(金銀錢帛), 즉 돈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587)금단(金丹):고대에 방술사들이 연금(煉金)을 하여 만들었다는 단약(丹藥)을 말한다. 이 약을 먹으면 장생불로(長生不老)한다고 한다.

588)물가에서 돌아오지:장자 산목(山木)에 나오는 내용이다. 시남자(市南子)가 노(魯)나라 군주에게 말하기를, “군주께서 강을 건너 바다로 떠나가시면, 먼 바다를 바라볼 때에 끝이 안 보일 것이며 갈수록 끝이 어딘지를 모를 것입니다. 군주를 전송하는 이들이 모두 그 물가에서 돌아오면 군주께서는 그때부터는 더욱 멀리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여기서는 섣달 그믐날 밤에 일 년 열두 달을 다 보내는 것을 비유한 것인 듯한데, 정확한 뜻은 미상이다.

589)발을……것이지:전국책 제책(齊策) 2에 “초나라에서 제사를 마치고 사인(舍人)들에게 술을 한 병 하사하였는데, 사인들이 말하기를, ‘여럿이서 마시자면 술이 부족하고 한 사람이 마시면 넉넉히 마실 수 있다. 땅에 뱀을 그리기로 하여 먼저 그리는 자가 마시기로 하자.’ 하였다. 한 사람이 뱀을 먼저 그리고는 술을 마시려 하면서 왼손에 술병을 들고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발도 그릴 수 있다.’ 하였다. 발을 다 그리기도 전에, 다른 한 사람이 뱀을 다 그리고는 그 술병을 빼앗아 들고 말하기를, ‘뱀은 본래 발이 없는데 그대는 어찌 발을 그리는가.’ 하고 드디어 그 술을 마셔 버렸다.” 하였다.

590)세월……거라네:시력을 보완하기 위해 안경을 쓰면 어느 정도는 잘 보이게 할 수 있지만 근원적인 치료는 되지 못한다. 세월의 흐름을 막는 일은 안경처럼 일시적인 처방도 불가능한 것이라는 뜻인 듯하다.

591)고인의……것을:옛사람들이 ‘수세(守歲)’라고 한 것도 세월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다 알고서 한 얘기라는 뜻이다.

592)戒:대본에는 ‘戎’으로 되어 있으나, ‘戒’의 오류일 것으로 판단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593)기해고(己亥稿):기해년(1899, 광무3)에 쓴 시의 모음이다. 기해년은 매천이 45세 때이다.

594)동파(東坡)의 시:동파 소식의 시는 그믐 밤에 큰 눈이 내려 유주에 머물고 초하루 아침에 날이 개어 출발하였는데 중도에 다시 눈이 내렸다[除夜大雪留濰州元日早晴遂行中途雪復作]이다.

595)욕심을 낼까 보냐:원문의 망촉(望蜀)은 사람의 탐욕이 끝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잠팽(岑彭)에게 내린 조서에, “사람은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병통이다. 이미 농(隴) 땅을 평정하고서도 다시 촉(蜀) 땅을 바라는구나.” 하였다. 후한서 권17 잠팽열전(岑彭列傳)에 나온다.

596)나라가……되어:고종이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국왕의 명칭을 황제로 바꾼 것을 말하는 듯하다.

597)예(禮) 그물:당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송온조처사서(送溫造處士序)에 “대부 오공(烏公)이 하양(河陽)에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석생(石生)을 인재라 하여 예의로 그물을 만들어[以禮爲羅] 그물질하여 막하(幕下)로 데려갔고, 몇 달이 못 되어 온생(溫生)을 인재라 하여 석생을 중매로 삼고 예의로 그물을 만들어 또 그물질하여 막하로 데려갔다.” 하였다. 이후에는 군주가 예의를 갖추어 인재를 모으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598)산동에……싶네:43쪽 주76 참조.

599)백성은……있으니:왕자(王者)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양식을 하늘로 삼는다는 옛말이 있다.

600)단지를 안고 사네:포옹(抱甕) 이야기는 장자 천지(天地)에 나온다. 천지에,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초(楚)나라를 유람하고 진(晉)나라로 돌아올 때에 보니, 한 노인이 우물에 물동이를 들고 들어가 물을 담아서 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이에 자공이, ‘기계를 설치하여 두레박으로 물을 퍼내면 고생을 덜하고도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하니, 노인이 답하기를, ‘기계를 사용하면 기심(機心)이 생기고 기심이 생기면 본성이 안정을 잃는다. 본성이 안정을 잃으면 도가 깃들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다. 후세에는 자연에 따르는 순박한 생활을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601) 조소아(趙小雅):75쪽 주195 참조.

602) 순자강(鶉子江):전라남도 곡성 근처를 지나는 섬진강 상류의 일부 구간을 순자강이라 한다. 때로는 섬진강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순강(鶉江)이라고도 한다.

603)火:전주매천시집에는 ‘花’로 되어 있다.

604)道:전주매천시집에는 ‘路’로 되어 있다.

605)짚신을 벗 삼아:송나라 육유(陸游)의 농포가(農圃歌)에 “먼지가 풀풀 한 켤레 나막신, 빈 벽에 서 있는 한 개의 지팡이.[塵生一緉屐 壁倚一枝筇]”라는 구절이 있다. ‘극(屐)’은 본래의 뜻이 나막신이지만, 여기서는 짚신으로 번역하였다.

606)緉:대본에는 ‘輛’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梅泉集正誤)에 의거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607) 영재(寧齋):이건창(李建昌)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봉조(鳳朝)이다. 35쪽 주47 참조.

608)술병……있네:재주(載酒)는, 한나라 때의 양웅(揚雄)이 기자(奇字)를 많이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술통을 싣고 양웅을 찾아가서 글자를 물으며 종유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인데, 대개 부지런히 배우려는 사람을 비유할 때에 쓴다. 여기서는 매천이, 자신에게 글자를 물으러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뜻으로 쓴 것인지 아니면 예사롭게 그냥 정자의 풍경을 묘사한 것인지 미상이다.

609)거울 닦는 고생:평생을 포의(布衣)로 살았던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서치(徐穉)가 일찍이 태위(太尉) 황경(黃瓊)을 섬긴 적이 있었는데 황경이 벼슬살이를 하자 그와 교제를 끊었다. 그 뒤 황경이 죽었을 때에 조문을 갔는데, 가난하여 경비가 없자 ‘거울 닦는 도구[磨鏡具]’를 가지고 다니며 거울을 닦아 주고 비용을 마련하여 조문을 갔다고 한다. 이 내용은 후한서 권53 서치열전(徐穉列傳), 고금사문유취, 태평어람 등에 실려 있다. 매천이 구례에서 강화까지 영재 이건창을 조문하러 가는 천리 길이 경비가 부족하여 고생스럽지만 벗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길을 가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610)송곳이라 자천한 것:모수자천(毛遂自薦)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모수는 전국 시대 조(趙)나라 변사(辯士)로, 평원군(平原君)을 따라 초(楚)나라에 가서 구원을 요청하는 외교를 성공시킨 인물이다. 평원군은 식객(食客)이 수천 명이었다. 초나라에 갈 때에 식객 중에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 20명을 뽑아 데리고 갈 참이었는데 뽑고 나니 1명이 부족하였다. 이때 모수가 함께 가겠다고 자청하였다. 평원군이 말하기를, “사(士)의 처세(處世)는 마치 송곳[錐]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과 같아서 그 끝이 저절로 즉시 삐져나오게 되어 있다. 그대가 나의 문하에 있은 지 3년인데 내가 그대의 명성을 듣지 못하였다.” 하니, 모수가 말하기를, “저를 자루 속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셨다면, 그 송곳이 전부 진작 비집고 나왔을 것입니다.” 하였다.

611)鬢:전주매천시집에는 ‘鬚’로 되어 있다.

612)煖:전주매천시집에는 ‘暖’으로 되어 있다.

613)황지(潢池):흙탕물로 이루어진 작은 연못을 말한다. 한서 권89 공수전(龔遂傳)에, “발해의 반란은 백성들이 추위와 주림에 고생을 하는데도 관리들이 돌보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폐하의 어린 백성들이 폐하의 군대를 훔쳐서 흙탕물 속에서 장난을 한번 친 것입니다.” 하였다. 이후 반란 세력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614)금성탕지(金城湯池)가 무력했으니:금성탕지는 쇠처럼 튼튼한 성곽과 끓는 물로 채워진 해자(垓子)라는 말인데, 견고한 요새지를 비유하는 말이다. 동학농민군의 김개남(金開南) 장군에 의해 남원의 교룡산성(蛟龍山城)이 점령당한 것을 표현한 말이다.

615) 만마관(萬馬關):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에 있었다. 남원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길의 전주 동남쪽에 있는 관문이다.

616)난리를 겪어서이고:장자 칙양(則陽)에 “달팽이의 왼쪽 뿔 위에 나라를 소유한 자가 있는데 촉씨(觸氏)라 하고 달팽이의 오른쪽 뿔 위에 나라를 소유한 자가 있는데 만씨(蠻氏)라 합니다. 수시로 서로 땅을 다투어 전쟁을 하여 엎어져 죽은 시체가 수만 명이나 되었고 도망가는 적군을 쫓아서 보름이나 지난 뒤에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전쟁이 이처럼 하찮은 것인 줄을 알면 천하에 전쟁을 할 일이 없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 만촉(蠻觸)은 하찮은 전쟁을 뜻한다.

617)원묘(原廟):태조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慶基殿)을 말한다. 임하필기(林下筆記) 권14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경기전에 의하면, 경기전은 전주부의 남문(南門) 안에 있는데, 태종 10년(1410)에 창건하여 태조의 영정을 모셨다. 임진란 이후로 영정을 내장산, 강화부, 묘향산 등으로 옮겼다가, 광해군 6년(1614)에 경기전을 중건(重建)하고 영정을 다시 경기전에 봉안하였다. 인조 13년(1635)에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경기전에 봉안하였다.

618)왕조의 발상지:패풍(沛豐)은 풍패(豐沛)라고도 하는데,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고향이므로 후세에는 제왕의 고향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여기서는 전주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선대가 살던 곳이므로 패풍이라고 한 것이다.

619) 황화정(皇華亭):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에 있던 정자 이름인 듯하다. 현재도 이곳에 황화정리(皇華亭里)가 있는데, 황화정의 명칭 유래는 미상이다.

620)澗:전주매천시집에는 ‘洞’으로 되어 있다.

621)峰:전주매천시집에는 ‘岸’으로 되어 있다.

622) 간웅(奸雄)이……죽었고:조선 시대에 유행한 도참서 정감록(鄭鑑錄)이 계룡산을 조선 이후의 도읍지로 예언하고 있는데, 고종 때에도 이필제(李弼濟), 정만식(鄭晩植) 등이 정감록을 이용하여 반란을 도모했다가 소탕되었다.

623)양호(兩湖)의……이어지니:쌍수산성(雙樹山城)은 백제 때의 도읍지였던 공주를 방위하던 산성이다. 백제 때에는 웅진성(熊津城), 고려 때에는 공산성(公山城)이라 하였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 때에 이곳으로 피신했던 인조가 성안의 두 그루 나무 아래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후로는 쌍수산성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형승(形勝)이 북쪽으로 이어져 쌍수산성에까지 연결되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624)마곡사(麻谷寺):충남 공주시 사곡면에 있는 사찰이다. 643년에 자장(慈藏) 스님이 창건했다고도 하고 840년에 체징(體澄) 스님이 창건했다고도 하는데, 이후에 고려의 도선(道詵), 지눌(知訥), 조선의 각순(覺淳) 스님 등에 의해 중창되었다.

625)松:전주매천시집에는 ‘樹’로 되어 있다.

626) 총림(叢林):불교에서 많은 스님이 모여 사는 곳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사찰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627)鳴:전주매천시집에는 ‘鳥’로 되어 있다.

628)백겸산(白兼山):백낙륜(白樂倫)으로, 겸산은 그의 호이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1885년(고종22)에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에, 1886년에 황해도 병마절도사에, 1894년에 군무아문 협판(軍務衙門協辦)에, 1895년에 남원부 관찰사(南原府觀察使)에 제수되었다. 김택영이 지은 유시당시고서(有是堂詩稿序)에 의하면,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병조 참판을 지냈으며 유시당시고 3책이 세상에 전한다고 하였다.

629)향산(香山)이……것:향산은 백거이(白居易, 772〜846)를 말한다. 당나라 때의 시인 백거이는 아끼는 첩이 둘 있었는데 노래를 잘 부르는 번소(樊素)와 춤을 잘 추는 소만(小蠻)이었다. 백거이가 늙고 병이 들자 이들 첩을 다 내보냈다고 한다. 백낙륜도 백거이처럼 첩을 놓아 보낸 일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630)섬계(剡溪)에서……것:왕휘지가 눈이 내린 밤에 벗 대안도(戴安道) 만나러 갔다가 그 집 문 앞에 이르러서는 들어가지 않고 돌아온 고사가 있다. 74쪽 주191 참조.

631)장수……때:예기 악기(樂記)에 “군자는 큰북 작은북 소리를 들으면 장수의 신하를 생각한다.[君子聽鼓鼙之聲 則思將帥之臣]” 하였다. 고(鼓)는 큰북이고 비(鼙)는 작은북인데, 고대에 군중(軍中)에서 공격 명령을 내릴 때에 사용한 것이다. 비사(鼙思)는 능력이 뛰어난 무인(武人)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632)송강(松江)에……마시오:세설신어 식감(識鑑)에 의하면, 서진(西晉) 때에 오군(吳郡) 출신인 장한(張翰)이라는 사람이 제왕(齊王)에게 벼슬살이를 하고 있다가, 병란(兵亂)의 조짐이 있는 것을 보고, “가을바람이 부니, 오중(吳中)의 순챗국과 농어회가 그립다. 인생살이란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최고인데, 어찌 수천 리 타향에 와서 벼슬살이를 한단 말인가.”라고 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송나라 소식(蘇軾)이 지은 후적벽부(後赤壁賦)에 “소식이 한탄하기를, ‘손[客]이 있으면 술이 없고 술이 있으면 안주가 없구나. 달이 환하고 바람이 맑으니, 이 좋은 밤을 어이한단 말인가.’ 하니, 손이 말하기를, ‘오늘 해 질 녘에 그물을 올려 고기를 건지니, 주둥이가 크고 비늘이 가늘어 송강의 농어[鱸魚]와 같았습니다. 술은 어디서 구하지요?’ 하였다.” 하였다. 송강은 오(吳) 지역에 있는 강 이름이며, 이곳에서 잡히는 농어는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송강의 옥린이란, 송강에서 잡히는 농어를 말한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에 지금 훌륭한 무인이 필요한 때이니 시골로 물러나 지낼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인용한 것이다.

633)황제……가지셨네:전주매천시집 자주(自注)에는 옥독(屋纛)을 독립문(獨立門)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였다. 옥독은 황옥좌독(黃玉左纛)을 줄인 말이다. 황옥은 누런 비단으로 덮은 수레이고 좌독은 수레 왼쪽에 세운 깃털로 장식한 깃발을 말하는데, 모두 황제의 거복(車服)을 가리키는 말이다.

634)우습다……가득:열자 천서(天瑞)에 “옛날 기(杞)나라에,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이 되어 잠도 못 자고 음식도 먹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하였다. 여기서 기우(杞憂)라는 말이 나왔다.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기 땅 사람이란, 세상 걱정을 하고 있는 매천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635)봄인데도 하야니:봄인데도 마치 겨울에 내린 눈이 남아 있는 것처럼, 달빛을 받은 농가 지붕이 하얗게 보인다는 뜻인 듯하다.

636)정묘집(丁卯集):만당(晚唐) 때의 시인 허혼(許渾)의 문집이다.

637)지세는……아님을:맹자 공손추 하에 “천시가 지리만 못하고 지리가 인화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고 하였다.

638)행주(幸州)에 와서 알았네:임진란 때에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이 왜적을 격파한 행주대첩을 염두에 두고 쓴 말이다.

639)변방의 봉화는 꺼졌고:봉화는 위급한 일을 알리는 통신 수단이다. 봉화가 꺼졌다는 것은 왜적의 침입 등,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긴급히 전달해야 하는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뜻인 듯하다.

640)밧줄 청할 뜻:당나라 왕발(王勃)이 지은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나는 석 자 띠를 띠는 낮은 관원이고 한 서생일 뿐이다. 청영할 길은 없지만, 나이는 종군과 같은 약관의 나이이고,……[勃三尺微命 一介書生 無路請纓 等終軍之弱冠……]” 하였다. 종군(終軍)에 대한 이야기는 한서 권64하 종군전(終軍傳)에 나온다. 종군이 한 무제(漢武帝)에게 “긴 띠를 주면 반드시 남월왕(南越王)을 묶어 오겠다.”라고 자청하였는데, 후세에는 ‘종군청영(終軍請纓)’이라 하여, 뜻을 세우고 국가를 위하여 출정(出征)하거나 출사(出使)하기를 청하는 일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장영(長纓)’을  ‘큰 갓과 긴 갓끈’의 뜻으로 보아, ‘왕명을 수행하는 어사(御史) 같은 높은 권한을 주면 반드시 남월왕을 잡아오겠다.’라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641)자성(慈城)으로……전송하다:승정원일기 고종 36년(1899) 6월 25일 기사에 의하면, 박항래는 6월 25일에 자성 군수(慈城郡守)에 임명되었다. 명부(明府)는 지방 수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박항래에 대해서는 19쪽 주15 참조.

642)순리전(循吏傳):사기, 한서, 후한서 등의 열전(列傳)의 한가지이다. 법을 잘 지키면서 백성을 잘 다스린 지방관을 소개한 열전이다.

643)삼대(三代)의 백성: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내가 사람들에 대해서, 누구를 헐뜯겠으며 누구를 칭찬하겠는가. 만약 칭찬하는 자가 있다면 시험한 바가 있어서인 것이다. 이 백성은 삼대 때에 도를 정직하게 시행했던 대상들이었다.” 하였다. 태평성대로 일컬어졌던 중국 고대의 하(夏), 은(殷), 주(周) 시대에 정직하게 통치했던 백성과 동일한 백성이라는 뜻이다.

644)갓을 쓴 호랑이:의관을 차려 입었지만 품성은 흉포한 호랑이와 같은 탐관오리를 가리킨다.

645)북과……비었고:시경 대동(大東)에 “소동이나 대동이나 북과 바디가 텅 비었네.[小東大東 杼柚其空]” 하였다. 동방에 있는 크고 작은 나라들이 베를 짤 수도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는 뜻인데, 가난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646)소칼……푸르렀지:논어 양화에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칼을 쓰느냐.”라는 말이 있다. 박항래의 전임 직책이 구례 군수였는데, 그가 그 직책을 잘 수행했음을 비유하는 말로 쓴 것이다.

647) 운근지족(雲根地足):형벌이 매우 관대한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세설신어 정사(政事)에 나온다. 중국 진(晉)나라 환온(桓溫)이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을 때에 정치를 관대하게 하여, 위엄으로 사람들을 겁주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므로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하급 관리인 영사(令史)가 장형(杖刑)을 받을 때에 곤장이 주의(朱衣) 위를 그냥 스쳐 지나갔다. 환온의 아들 환식(桓式)이 어릴 때에 밖에서 들어와 말하기를, “아까 관소 옆을 지나가다가 영사가 곤장을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위로는 곤장이 구름을 스쳤고 아래로는 곤장이 땅을 스쳤습니다.[上捎雲根 下拂地足]” 하였다. 곤장이 몸에 닿지 않는 것을 기롱하는 말이었다. 환온이 말하기를, “나는 그래도 무거울까 염려된다.” 하였다.

648)뽕나무……묵었구나:후한서 권30 양해열전(襄楷列傳)에, “부처는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을 이어서 묵지 않았습니다. 오래 있다가 애착의 마음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아니한 것이니 지극한 정진(精進)입니다.[浮屠不三宿桑下 不欲久生恩愛 精之至也]” 하였다. 여기서는 임기 3년이 금방 지나갔음을 비유한 말인 듯하다.

649)수레 몰아:한유(韓愈)의 송이원귀반곡(送李愿歸盤谷)에 “내 수레에 기름 치고 나의 말에 꼴을 먹여.[膏吾車兮 秣吾馬]”라는 구절이 있다. 이후 고말(膏秣)은 길을 떠날 차비를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650)사방……꿈:예기 내칙에 의하면, 옛날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 천지 사방에 대고 쏘았는데, 원대한 뜻을 품고 큰일을 성취하라고 기원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651)병주(幷州)……실낱같으니:신당서 권115 적인걸열전(狄仁傑列傳)에 “당나라 적인걸이 병주 법조참군(法曹參軍)으로 있을 때에 그 어버이는 하양(河陽)에 떨어져 있었는데, 적인걸이 태항산(太行山)에 올라가 한 덩이 흰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어버이께서 저 아래에 살고 계신다.’ 하고,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가 구름이 멀리 흘러간 뒤에 그 자리를 떴다.” 하였다.

652)판여(板輿):가마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모친을 모시고 갈 가마라는 뜻이다.

653)중서성(中書省):조선 시대의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키는 말이다.

654)인재(人才):서경 순전(舜典)에 “백(伯)이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기용(夔龍)에게 사양하니……” 하였는데, 그 주석에 “기(夔)와 용(龍)은 순 임금의 두 신하의 이름이다.” 하였다. 기는 악관(樂官)이고 용은 간관(諫官)이었다고 한다. 후세에 기용은 훌륭한 신하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655)배 진공(裴晉公):당나라 명재상이었던 배도(裴度)를 말한다.

656)파주(播州)……있으려나:몽득(夢得)은 당나라 유우석(劉禹錫)의 자이다. 구당서(舊唐書) 권160 유우석열전(劉禹錫列傳)에, “원화(元和) 10년(815)에 유우석이 좌천되어 파주 자사(播州刺史)로 가게 되자 어사중승(御史中丞) 배도(裴度)가 상주(上奏)하기를, ‘유우석은 노모가 80여 세이고 파주는 서남쪽 극변이어서 인적도 드문 곳입니다. 유우석이 비록 벌을 받아야 마땅하나, 노모가 필시 함께 가지 못할 것이니, 이리되면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신은 폐하의 효도를 장려하는 다스림에 손상이 갈까 염려스럽습니다. 정상을 참작하여 조금 가까운 곳으로 보내기를 청합니다.’ 하여, 마침내 연주(連州)로 보냈다.” 하였다. 유하동집(柳河東集) 부록(附錄)에는, “유종원이 주문(奏文)을 올려, 유우석을 유주(柳州)로 보내고 자신을 대신 파주로 가게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마침 배도도 그 일을 아뢰어, 유우석이 마침내 연주로 가게 되었다.” 하였다.

657)조장(祖帳):먼 길 떠나는 사람을 전송할 때에 전별연을 베풀기 위해 설치하는 장막이다.

658)斷:대본에는 ‘聲’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659)효자와……것을:한서 권76 왕존전(王尊傳)에 나온다. 한나라 왕존(王尊)이 익주 자사(益州刺史)가 되어 험난하기로 유명한 공래산(卭郲山) 구절판(九折阪)이라는 고개를 넘게 되었다. 이전에 익주 자사에 임명되었던 왕양(王陽)이 이곳을 넘으면서 “어버이가 물려주신 이 몸을 이끌고 어찌 이렇게 험난한 곳을 자주 넘어 다닐 수 있겠는가.” 하고는 병을 핑계 대고 벼슬을 버리고 가 버렸다. 왕존이 이 구절판에 이르러 관리에게 묻기를, “여기가 왕양이 겁을 냈었다는 그 길인가?” 하니, 관리가 “그렇습니다.” 하자, 왕존이 마부에게 말하기를, “바삐 몰아라. 왕양은 효자이고 왕존은 충신이다.” 하면서 고개를 넘어갔다.

660)한 위공(韓魏公):북송 때의 정치인 한기(韓琦, 1008〜1075)이다. 송 인종 때에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으므로 한 위공이라 일컬어졌다.

661)溽:대본에는 ‘濕’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662)괴이해라……나가는구나:한나라 반초(班超)는 서역(西域)에 종군(從軍)하여 큰 공을 세워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는데, 오래도록 변방에서 지방관으로 지냈다. 고금사문유취 속집 권4 거처부(居處部)에, “반초가 오래도록 변방에서 지방관으로 있다가 늙어서는 고향 생각이 나서 상소하기를, ‘신이 감히 주천군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단지 살아서 옥문관을 들어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臣不敢望酒泉郡 但願生入玉門關]’ 하였다.” 하였다. 여기서는, 반초는 늙어서 서울로 들어왔는데, 금사 박항래는 늙어서 도리어 변방 수령으로 부임하게 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동경(東京)은 낙양(洛陽)인데, 이곳을 수도로 정한 후한(後漢)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옥문관은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에 있는 관문인데, 변방 지역으로 나가는 길목 또는 변방 지역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663)심 은후(沈隱侯):남조(南朝) 시대 양(梁)나라 심약(沈約, 441~513)을 말한다. 시문에 능하였다고 한다. 건창후(建昌侯)에 봉해졌고 시호가 은(隱)이었으므로 심 은후라 불렀다.

664) 선오(善吾):이병호(李秉浩)이다. 자는 백촌(白村)이고 선오는 그의 자이다. 15쪽 주2 참조.

665)철수(鐵樹) 꽃이 피었구나:철수는 잎이 자색(紫色)이고 줄기는 마디가 촘촘한 구절창포(九節菖蒲)와 같은 식물이라고 하기도 하고, 소철(蘇鐵)을 말한다고도 한다. 열대식물이고 거의 꽃이 피지 않는 식물이어서, 철수가 꽃을 피운다는 철수개화(鐵樹開花)는 보기가 쉽지 않은,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심전고(心田稿), 청장관전서, 오주연문장전산고 및 중국 연행 기사 등에 기록이 보인다. 청장관전서 권55 앙엽기(盎葉記) 2에는 “철수는 키가 서너 자이며 잎은 자주색이고 꽃은 계화(桂花)와 같으나 향기가 나지 않는다. 어떤 이가 ‘이 나무는 일갑(一甲)에 한 번 꽃을 피우는데 반드시 정묘년에 핀다.’라고 한다.” 하였고, 심전고에는 “중국 광제사(廣濟寺) 서쪽 협문 밖에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철수라고 한다. 30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싱싱하고 나긋나긋하여 늙고 큰 나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또한 이상한 종류의 나무이다.” 하였다. 우리나라 문인들의 시문에서 철수개화는 대개 장수(長壽)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666)청낭(靑囊):푸른 주머니라는 뜻인데, 비결(祕訣)이 들어 있는 도가(道家)의 전적(典籍)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며, 때로는 고대 의서(醫書)를 가리키는 말로 쓰기도 하였다. 진서(晉書) 권72 곽박열전(郭璞列傳)에 “곽공(郭公)이라는 자가 하동(河東)에 와서 묵고 있었는데, 복서(卜筮)에 능하였다. 곽박(郭璞)이 그에게 가서 수업하였다. 곽공이 청낭에서 책을 꺼내서 곽박에게 주니 이로부터 곽박이 천문(天文), 오행(五行), 복서에 통달하게 되었다. 곽박의 문인 조재(趙載)가 그 책을 훔쳐갔는데 미처 읽기도 전에 화재가 나서 불에 타 버렸다.” 하였다.

667)방호(方壺):발해의 동쪽에 있다고 하는 다섯 신산(神山) 중의 하나이다.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지리산을 가리킨다.

668)좋은 구슬:원문의 명주(明珠)는 아들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669)근래엔……드물다니:시경 사간(斯干)에, “태인(太人)이 꿈풀이를 하니, 곰이 꿈에 나타나면 아들을 낳을 조짐이고 뱀이 꿈에 나타나면 딸을 낳을 조짐이네.[大人占之 維熊維羆 男子之祥 有虺有蛇 女子之祥]” 하였다. 곰 꿈이라 함은, 아들을 낳을 태몽을 말한다.

670)마고(麻姑)는 아직도 청춘인데:마고는 옛 전설에 나오는 선녀(仙女)이다. 여기서는 아마도 두산 노인이 젊은 부인과 살고 있음을 비유한 것인 듯하다.

671)조카:두산 노인의 조카인 선오(善吾) 이병호(李秉浩)를 말한다.

672)죽림(竹林)에……거라: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의 조카 완함(阮咸)이 재명(才名)이 있었는데, 후세에는 남의 조카를 아함(阿咸)이라 하였다. 완함도 훌륭한 조카였지만 이병호처럼 시를 잘 지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다.

673)사주(社酒):봄과 가을의 사일(社日)에 토지신에게 제사하는데 이때의 모임에 쓰기 위해 담그는 술을 말한다. 사일은 입춘과 입추가 지난 뒤의 다섯 번째 무일(戊日)을 말하는데, 이날에 오방(五方)의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마을 단위로 잔치를 연다. 산림경제 권4 선택(選擇)에는 “사일은 입춘 뒤 다섯째 무일과 입추 뒤 다섯째 무일이다.” 하였고, 택당집 별집 권1 답왜인문목(答倭人問目)에는 “춘분과 추분이 지난 뒤의 무일을 사일로 삼는다.” 하였다.

674)정한강(鄭寒岡):정구(鄭逑, 1543〜1620)이다. 자는 도가(道可)이고, 한강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675)회수(淮水)를……마소:서경 우공(禹貢)에 의하면, 회수 남쪽 지역이 양주(揚州)인데 이곳의 특산물이 귤과 유자[橘柚]이다. 주례 고공기(考工記)에 “귤이 회수를 넘어 북쪽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 하였다. 같은 식물이라도 토질에 따라 변하게 된다는 뜻이다.

676) 황정유(黃正宥):황병중(黃炳中)이다.

677)聞:대본에는 ‘間’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678)오의(烏衣)……인재들이라:진(晉)나라 때에 왕도(王導)와 사안(謝安) 등 귀족들이 모두 오의항(烏衣巷)에 살았는데, 이곳의 젊은이들을 세상에서는 오의자제(烏衣子弟) 또는 오의랑(烏衣郞)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후세에는 부귀한 집안의 자제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679)승천사(承天寺)……걱정이네:송나라 신종(神宗) 때에 소식(蘇軾)이 승천사로 장회민(張懷民)을 찾아가서 함께 달밤에 뜰을 거닐었다는 고사에서 따온 말이다. 동파전집(東坡全集) 권101 지림(志林) 기유(記游)에, “원풍 6년(1083) 10월 12일 밤에 막 옷을 벗고 잠을 청하려 하다가, 달빛이 환하게 방 안에 들어오자 기쁜 마음으로 일어났는데, 생각해 보니 함께 즐길 자가 없었다. 드디어 승천사로 장회민을 찾아갔다. 장회민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둘이 함께 뜰을 거닐었다. 뜰에는 마치 넘실넘실 물결 속에 마름풀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대나무와 측백나무의 그림자가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어느 밤인들 달 없는 밤이 있겠으며 어느 곳인들 대나무와 측백이 없겠는가마는, 우리 두 사람처럼 한가로운 정취를 지닌 자가 드물었던 것이다.” 하였다. 여기서는, 매천이 찾아가서 달빛 어린 뜰을 황정유와 함께 거닐고 싶어도 황정유가 공부하느라 바빠서 한가로운 정취를 즐기려 들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는 뜻이니, 열심히 공부하는 황정유를 칭찬하는 말이다.

680) 웅동(熊洞):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죽천리에 있는 지명이다. 곰골이라 한다.

681)붉은 열매:밤, 오미자(五味子), 찔레 열매 등이 이에 해당할 수 있겠는데, 무엇을 가리키는지 미상이다.

682)진간재집(陳簡齋集):남송 진여의(陳與義, 1090〜1138)의 문집이다. 진여의는 자는 거비(去非)이고 호는 간재(簡齋)이다. 시풍(詩風)이 두보(杜甫)와 매우 흡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성종 때에 간행하여 보급하였다는 기록이 연려실기술, 용재총화 등에 나온다.

683)경자고(庚子稿):매천이 46세 때인 경자년(1900, 광무4)에 지은 시이다.

684)귀밝이술:약재(藥材)로 빚은 술인데, 정월 보름날 아침에 마시면 사특한 기운을 물리치며, 귀가 밝아지고 귓병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685)용(龍)은……듣는다: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청성변증설(聽聲辨證說)에 왕사정(王士禎)의 농촉여문(隴蜀餘聞)을 인용하여, “용은 뿔로 듣고 소는 코로 듣고 뱀은 눈으로 듣고 물고기는 귀가 없어도 듣는다. 듣는 이치는 또한 한결같이 통상적인 사례로 논할 수 없다.[龍聽以角 牛聽以鼻 蛇聽以眼 魚無耳而聽 聽之理 亦不可以一槪常例論也]” 하였다. “용은 뿔로 듣는다.”라는 내용은 송나라 왕응린(王應麟)의 곤학기문(困學紀聞), 명나라 방이지(方以智)의 물리소지(物理小識) 등에 나오며, 송나라 채변(蔡卞)이 엮은 모시명물해(毛詩名物解) 권11 석충(釋蟲)에 “소는 코로 듣고 뱀은 눈으로 듣는다.[牛以鼻聽 蛇以目聽]”라는 말이 있다.

686)도소주(屠穌酒):오주연문장전산고 도소주변증설(屠蘇酒辨證說)에 “백출(白朮), 대황(大黃), 길경(桔梗), 천초(川椒), 계심(桂心), 호장근(虎杖根), 천오(川烏) 등의 약초를 썰어서 붉은 주머니에 넣어, 섣달 그믐에 우물에 담가 두었다가 정월 보름날 이른 새벽에 꺼내 청주(淸酒)에 넣어 끓여서 동쪽을 향하여 마시는데, 어린 사람부터 순서대로 한 잔씩 마신다. 그 찌꺼기는 다시 우물 속에 담가 두고 물을 떠 마신다.” 하였다.

687)구리……따뜻하니:구리 술병[銅甁]은 술을 데우는 주전자 같은 기구를 말하는 듯하다. 원문의 아황(鵝黃)은 술을 뜻한다.

688)빙긋……되었다네:시경 모구(旄丘)에 “숙이여, 백이여. 빙긋이 귀먹은 것과 같구나.[叔兮伯兮 褎如充耳]” 하였다. 그 주석에 “유(褎)는 웃음이 많은 모양이고 충이(充耳)는 귀를 막는다는 뜻이니, 귀먹은 사람은 항상 웃음이 많다.” 하였다.

689)聵:대본에는 ‘瞶’로 되어 있는데, 문리로 보아 ‘聵’가 맞을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690)더위팔기:정월 보름날에 행했던 풍속의 일종이다. 그날 아침에 서로 상대의 이름을 불러서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가라.”라고 한다. 상대가 대답을 하지 않고 “내 더위 사가라.”라고 하면 더위를 팔지 못하고 도리어 내가 상대의 더위를 사는 꼴이 된다. 더위를 많이 팔면, 그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고 지낼 수가 있다고 한다.

691)사람들 너도나도:시경 재삼(載芟)에 “풀을 베어 내고 나무를 베어 내니 푸실푸실 흙을 잘 갈았구나. 일천 짝이 김을 매니 논밭에도 다니고 두둑에도 다니도다.[載芟載柞 其耕澤澤 千耦其耘 徂隰徂畛]” 하였다. 천우(千耦)는 많은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692)배 두드릴:원문의 고복(鼓腹)은 함포고복(含哺鼓腹)을 말한다. 실컷 먹고 배를 두드린다는 뜻으로, 태평성대에 백성들이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을 표현할 때에 주로 사용하였다. 장자 마제(馬蹄)에 “옛날 혁서씨(赫胥氏) 시대에는, 백성들이 집에 있을 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따지지 않았고 길을 갈 때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요량하지 않았다. 음식을 입 안 가득 넣고서 즐거워하였으며 배를 두드리며 놀았다.[含哺而熙 鼓腹而遊]” 하였다.

693)淫淫:대본에는 ‘滛滛’로 되어 있으나 ‘淫淫’의 오류로 판단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694)쌍계(雙溪), 칠불(七佛), 영원사(靈源寺):쌍계사와 칠불사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 영원사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 있는 사찰이다. 이곳은 모두 지리산 자락이다.

695) 旱:대본에는 ‘早’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696)동지(同知)……시:전주매천시집에는 둘째 수 ‘眼前無碍……’와 넷째 수 ‘姹女黃芽……’의 위치가 바뀌어 배치되어 있다.

697)비옥(緋玉):비(緋)는 비단옷이고 옥(玉)은 옥관자를 말한다. 정3품 당상관이 입던 의복을 가리킨다.

698)왕렬(王烈)의 고을이 깊어:후한서 권81 왕렬열전(王烈列傳)에, “왕렬은 자는 언방(彦方)이고, 효우(孝友)로 향리에 소문이 났다. 그 고을에 소를 훔친 도둑이 있었는데, 주인이 체포하니 도둑이 말하기를, ‘벌을 달게 받겠으나 왕언방이 알지 못하도록 해 주십시오.’ 하였다. 왕렬이 그 소식을 듣고 그에게 베 한 필을 보내 주었다. 혹자가 그 까닭을 물으니, 왕렬이 말하기를, ‘도둑이 내가 그 허물을 알까 봐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악행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악행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선행으로 고칠 수가 있다. 그래서 이것으로 그를 격려한 것이다.’ 하였다. 뒷날 어떤 노인이 길에서 칼을 잃었는데, 길 가던 사람 하나가 그것을 지키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서 그 노인이 돌아와 그 칼을 찾아가면서, 그의 성명을 묻고 이 사실을 왕렬에게 말하였다. 왕렬이 사람을 시켜 그를 찾아보게 하였더니, 이전에 소를 훔쳤던 그 도둑이었다. 곡직을 쟁송하여 왕렬에게 질정을 받으려 하다가 혹 길에 올랐다가는 돌아가고 혹 왕렬의 집을 바라보고는 돌아갔다. 그가 덕(德)으로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이러하였다.” 하였다. 여기서는 심우서(沈禹瑞)를 왕렬에 비유한 것이다.

699)남명(南溟):남극에 있는 천지(天池)라는 못이라 한다. 대개 후대의 시문에서는 남쪽 바다 끝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말로, 북명(北冥)에 살던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변화하여 엄청 큰 붕(鵬)이라는 새가 되어, 바다에 태풍이 불면 그 회오리바람을 타고 남명으로 날아간다고 한다.

700)남쪽:원문의 병정(丙丁)은 남쪽을 말한다. 십간(十干)을 오방(五方)에 배합할 때에 갑을(甲乙)은 동방(東方), 병정(丙丁)은 남방(南方), 무기(戊己)는 중앙(中央), 경신(庚辛)은 서방(西方), 임계(壬癸)는 북방(北方)에 배치한다.

701)노인성(老人星):남쪽 하늘에 뜨는 별로, 서양 이름은 카노푸스(Canopus)이다. 수성(壽星)이라고도 하는데, 이 별을 보면 장수한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추분 새벽에 병방(丙方)에 나타나고, 춘분 저녁에 정방(丁方)으로 진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남부 지방의 산 위, 제주도 등지에서 남쪽 수평선 위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702)색동옷……추고: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효자 노래자(老萊子)는 나이 70에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서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었으며, 일부러 마루에 물을 뿌려 놓고 미끄러져서 어린애처럼 울기도 하였고, 새를 희롱하며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원문의 내의(萊衣)는 ‘노래자의 색동옷’이라는 뜻인데, 노래자처럼 색동옷을 입은 자손들을 비유한 것이다.

703)아내는……따르네:원문의 맹안(孟案)은 ‘맹광(孟光)이 차려 올리는 밥상’이라는 뜻이다. 맹광은 후한 때의 은사(隱士)인 양홍(梁鴻)의 아내이다. 후한서 권83 일민열전(逸民列傳) 양홍에 나온다. 양홍과 맹광이 패릉산(霸陵山)에 들어가 은거 생활을 하였는데, 맹광이 양홍의 밥상을 차려 올릴 때에는 공경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밥상을 눈썹 높이까지 높이 받들어 올렸다고 한다.

704)차녀(姹女)니 황아(黃芽)니:도가(道家)의 연단술(煉丹術)에서 수은(水銀)을 차녀라 하며, 수련 결과 발생하는 정화(精華) 가운데 하나가 황아이다. 주역참동계차녀황아장(姹女黃芽章)이 있다.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위한 수련 과정을 비유한 말이다.

705)지선(地仙):육신을 유지한 채 인간 세상의 자연 속에서 노니는 신선을 말한다. 포박자 권2 논선(論仙)에 “상사(上士)는 육신을 지닌 채 하늘로 올라가니 이를 천선(天仙)이라 하고 중사(中士)는 명산(名山)에 노니니 이를 지선이라 하고 하사(下士)는 죽은 뒤에 몸을 벗어 버리니 이를 시해선(尸解仙)이라 한다.” 하였다.

706)청려장(靑藜杖):명아주 줄기로 만든 지팡이이다. 명아주 줄기가 단단하고 가벼워서 노인들의 지팡이를 만들기에 좋다고 한다.

707)무……좋아라:노인인데도 치아가 튼튼하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708)서도부(西都賦):후한의 반고(班固)가 지은 부(賦)이다. 첫머리가 “서도의 손[客]이 동도의 주인에게 묻기를[有西都賓問於東都主人曰]”로 시작된다. 그 끝 부분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각각 득기소(得其所)하였음을 말하면서, “농부는 선인이 물려주신 농토에서 농사를 짓는다.[農服先疇之畎畝]” 하였다. 반고는 자가 맹견(孟堅)이다.

709)곡식이 넘쳐 났지:사기 권30 평준서(平準書)에 “한나라가 흥기한 지 70여 년 동안 국가가 무사하고 수한(水旱)의 재난을 당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풍족해졌다. 경사(京師)에는 돈이 수만금이어서 꿰미가 썩는데도 셀 수가 없을 정도이고 태창(太倉)에는 묵은 곡식이 남아돌아 창고 바깥에까지 내다 쌓았으며 부패하여 먹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하였다. 원문의 ‘홍진진(紅陳陳)’은 붉게 곰팡이가 피어서 먹지 못하게 된 묵은 곡식이 많다는 뜻인데, 곡식의 풍요로움을 표현한 것이다.

710)이사 다니느라:원문의 묵돌(墨突)은 ‘묵적(墨翟)의 아궁이’이다. 묵적은 세상을 구제하는 일에 마음이 급하여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으므로 그의 아궁이에는 그을음이 낄 틈이 없었다고 한다.

711)유산(遺産):원문의 청전(靑氈)은 푸른 모직물인데,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물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밤에 누워 있을 때에 도둑이 들어 물건을 훔치는데, 왕헌지가 조용히 말하기를, “청전은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 하나만은 두고 가시게.” 하니, 도둑이 놀라서 그냥 달아났다고 한다.

712)부곽전(負郭田)……부끄럽고:사기 권69 소진열전(蘇秦列傳)에, “소진(蘇秦)이 곤궁을 겪을 때에는 형제와 형수, 누이, 처첩들이 모두들 소진을 비웃었는데, 육국(六國)의 종약장(縱約長)이 되어 낙양을 지나가게 되니, 감히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엎드려 있었다. 소진이 탄식하기를, ‘친척들도, 부귀하면 두려워하고 빈천하면 우습게 본다. 하물며 남들이겠는가. 나에게 낙양 성곽 교외에 부곽전 두 마지기라도 있었다면 내가 어찌 여섯 나라 정승의 인(印)을 찰 수 있었겠는가.’ 하고는, 1천 금(金)을 풀어 종족과 붕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였다. 그 주석에, “부곽은 도성 가까운 지역의 기름진 땅을 말한다.” 하였다. 성호사설에는 “성곽을 등진 척박(瘠薄)한 땅을 가리킨다.” 하였다. 땅 몇 마지기도 없었던 소진은 높은 신분의 사람이 되었는데 매천 자신은 몇 마지기 땅을 지니고 있음으로써 출세하지 못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713)미음……되었지:왕통(王通)은 수(隋)나라 말기의 대학자이다. 자는 중엄(仲淹)이다. 20세에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을 바쳤다가 채택되지 않자 초야로 물러나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사문유취에 의하면, 당시에 양소(楊素)가 왕통에게 벼슬할 것을 권하자 왕통이 답하기를, “선인에게서 물려받은 폐려(敝廬)가 비바람을 가리기에 충분하고 박전(薄田)이 죽을 끓여 먹기에 충분하고 책을 읽고 담론을 하는 것이 스스로 즐기기에 충분합니다. 벼슬을 원치 않습니다.” 하였다고 한다.

714)우공(愚公)이……해치웠네:열자 탕문(湯問)에 “북산(北山)의 우공이 나이가 아흔에 가까웠는데 집 앞에 태항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이 막혀 있는 것이 싫어서 그 산을 옮기려고 자손들을 데리고 삼태기에 산을 파 담아 발해(渤海) 바닷가로 날라다 부었다. 지수(智叟)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여생에 산의 일부분도 파내지 못할 것이다.’ 하니, 우공이 길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마음이 고루하구나. 내가 죽으면 아들이 있고 아들은 손자를 낳을 것이고 그 손자는 또 아들을 낳을 것이다. 자자손손 끊임없이 이어질 것인데, 산은 더 높아지지 않을 것이니, 산이 어찌 평지가 되지 않겠는가.’ 하니, 지수가 대답을 못하였다. 산신(山神)이 산이 없어질까  봐 두려워서 상제(上帝)에게 보고하니, 상제가 우공의 정성에 감동하여, 그 산들을 옮겨 주었다.” 하였다. ‘섶나무를 꺾는다’는 것은, 오랫동안 자란 송백(松柏)을 경솔하게 베어서 땔나무로 만든다는 뜻이다. 할아버지가 석현 농장을 마련할 때에는, 마치 우공이 산을 옮기기 시작했던 것처럼, 대대로 조금씩 넓혀 나가기를 바란 것일 터인데 매천 자신이 그러한 뜻을 저버리고 마치 큰 나무를 베어서 땔감을 만들 듯이 쉽게 농장을 팔게 되었음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715)새옹(塞翁)의……옳았던가:회남자 인간훈(人間訓)에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 집 말이 도망가서 오랑캐 땅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이 다들 위로하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복이 되지 않는다 하겠는가.’ 하였다. 몇 달 뒤에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駿馬)와 함께 돌아왔다. 사람들이 축하하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재앙이 되지 않는다 하겠는가.’ 하였다. 집안에 훌륭한 말이 많게 되니 그 아들이 말타기를 좋아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사람들이 위로하니,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복이 되지 않는다 하겠는가.’ 하였다. 한 해쯤 지나서, 오랑캐가 변방에 침입해 왔다. 건장한 젊은이들은 모두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가 싸우다 대부분이 죽었다. 아들은 다리가 성하지 못한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복이 재앙이 되고 재앙이 복이 되는 것은 변화가 끝이 없어서 예측할 수 없다.” 하였다.

716)옹기(甕器)……어렵다네:어떤 가난한 사람이, 옹기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밤에 그 옹기 속에 들어가 자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옹기를 팔아 조금만 잘 불리면 두 배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두 배씩 불려 나가면 두 개가 네 개가 되고 나중에는 끝없이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하여, 드디어 기분이 좋아서 덩실거리다가 자기도 모르게 옹기를 깨뜨리고 말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운부군옥(韻府羣玉), 고금사문유취 등에 실려 있다.

717)창업(創業)과 수성(守成):국가를 처음으로 창건하는 것을 창업이라 하고 그것을 이어받아서 잘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수성이라고 한다. 창업과 수성은 국가나 집안이나 동일하다는 뜻이다.

718)가업을 이을 책임:원문의 당구(堂構)는 긍당긍구(肯堂肯構)의 준말로, 서경 대고(大誥)에 나오는데, 선조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719) 보수(寶樹):훌륭한 자손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후손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인 듯하다.

720)양자운(揚子雲)이……하더라:한서 권87하 양웅전(揚雄傳)에 의하면, 한나라의 문장가인 양웅이 고문(古文), 기자(奇字) 등을 많이 알았으므로, 유흠(劉歆)의 아들 유분(劉棻) 등이 그에게 가서 글자를 물어 배웠다고 한다. 사문유취에는 “양웅은 가난하게 살면서 술을 좋아하였다. 그 집을 찾아가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가끔 호사자가 술과 안주를 들고 가서 기이한 글자를 물었다.” 하였다. 기자는 한나라 때에 제정된 여섯 가지 서체[六書] 가운데 하나인데, 독특한 고문 서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자운은 양웅의 자이다.

721)옛 서적:중국 구주(九州)에 대한 기록물을 구구(九丘)라 하고 팔괘(八卦)의 설(說)을 팔색(八索)이라 한다고 한다. 원문의 구색(丘索)은 일반적으로 고전(古典), 고서(古書)의 뜻으로 쓰인다.

722)좋은……해야:시경 목과(木瓜)에 “나에게 목과를 던져 주었는데 좋은 패옥으로 보답을 하였네. 보답했다고 여기지 아니함은 길이 우호를 하고자 함이라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 匪報也 永以爲好也]”라고 하였다. 여기서 목과와 경거(瓊琚)를 따와서 응용한 것인 듯하다.

723) 곤양 군수(昆陽郡守) 박처양(朴處陽):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877년(고종14) 8월 21일(계묘) 기사에 순천의 유학 박처양이 돈 1200냥을 내어 진휼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고, 1892년(고종29) 7월 30일(을묘) 기사에 곤양 군수에 제수한 기록이 있으며, 그해 8월 2일 기사에 신병을 이유로 체직을 청하여 개차를 허락한 기록이 있다.

724)부유하면……있었는데:맹자 등문공 상에 “양호(陽虎)가 말하기를, ‘부유해지려면 인자하지 못하고 인자하면 부유해질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725)덕을……근원이니:서경 홍범(洪範)에 “다섯 가지 복록은 첫째 수(壽), 둘째 부(富), 셋째 강녕(康寧), 넷째 유호덕(攸好德), 다섯째 고종명(考終命)이다.” 하였다.

726)처자가 화합하고:시경 상체(常棣)에 “처자들이 잘 지내니 마치 금과 슬이 화합하듯.[妻子好合 如琴瑟之和]”이라고 하였다.

727)형제가 잘 지냈고:시경 하인사(何人斯)에 “백씨가 질나발을 불고 중씨가 젓대를 부는구나.[伯氏吹壎 仲氏吹篪]” 하였다. 훈지(壎篪)는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하는 말이다.

728)봉황……같았지:봉황과 기린은 걸출한 인재를 비유하는 말이다.

729)해로가(薤露歌):상여가 나갈 때에 부르는 만가(輓歌)를 말한다. 진(晉)나라 최표(崔豹)가 엮은 고금주(古今注)에 “전횡(田横)이 죽은 뒤에 그 문인이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그 1장에 ‘염교 잎에 맺힌 아침 이슬이 어찌 그리 쉬이 마르는가. 이슬이야 다음 날이면 다시 촉촉이 내리지만, 사람은 한 번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나.[薤上朝露何易晞 露晞明朝還復滋 人死一去 何時歸]’라고 하였다.” 하였다. 해로는 덧없는 인생을 비유하는 말인데, 이후에 만가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730)우면(牛眠)……쓰니:진서(晉書) 권58 주방열전(周訪列傳)에 “이전에 도간(陶侃)이 초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려던 차에 집 안에 있던 소가 갑자기 없어져 어디로 갔는지를 찾지 못하였다. 어떤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앞산 골짜기에 소 한 마리가 자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곳에 장례를 치르면 지위가 신하로서는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게 될 것이다.’ 하고, 또 산 하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이 또한 두 번째로 좋은 길지이다. 당세에 이천 석의 벼슬을 하는 자가 나오게 될 것이다.’ 하고는 문득 사라졌다. 도간이 소를 찾아서 그곳에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그 두 번째라고 한 산을 주방에게 주었다. 주방이 부친이 죽자 그곳에 장례를 치렀다. 그러자 과연 자사(刺史)가 되었고 주방 이하로 3세에 걸쳐 익주(益州)를 맡아 41년이나 다스렸다.” 하였다. 이후로 우면은 길지(吉地)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마렵(馬鬣)은 봉분(封墳)을 말한다. 예기 단궁 상에 나온다.

731)啅:전주매천시집에는 ‘啄’으로 되어 있다.

732)朽:대본에는 ‘杇’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朽’가 타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733)根:대본에는 ‘眼’으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根’이 타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734)山:전주매천시집에는 ‘田’으로 되어 있다.

735)飛:전주매천시집에는 ‘流’로 되어 있다.

736)풍진(風塵)에서……하랴:한서 권51 추양전(鄒陽傳)에 “긴 옷자락을 끈다.[曳長裾]”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권문세가의 문전에 출입하며 벼슬살이를 한다는 뜻인데, 이 말을 매천이 속세에서 벼슬살이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인용한 듯하다. 75쪽 주197 참조.

737) 반가운 눈:진(晉)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은 예교(禮敎)에 얽매인 속된 선비가 찾아오면 백안(白眼)으로 대하였고, 맑은 고사(高士)가 찾아오면 청안(靑眼)으로 대하였다고 한다. 이후 청안은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눈빛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738)누가……드나:회남자 범론훈(氾論訓)에 “낙숫물도 작은 물통은 채우기에 충분하고, 강하도 구멍 난 술잔은 채울 수가 없다.[霤水足以溢壺榼 而江河不能實漏巵]” 하였다. 경지 측량을 하고 토지 제도를 바꾸어 생산량을 증대시켜 세수(稅收)를 늘려도 절약을 하지 않으면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뿐이라는 말이다.

739)진(秦)나라……말이지:전국 시대 진나라 효공(孝公) 때에 상앙(商鞅)의 건의를 받아들여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시행했는데 그중에는 토지 개혁에 대한 것도 있었다. 이때에 기존의 정전제(井田制)를 개혁하여 천맥(阡陌)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는 개간을 하여 농지를 늘리고 사유권을 부여함으로써 생산을 증대시켜 부국강병을 추구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개혁 정책들이 뒷날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매천은 진나라의 토지 개혁 정책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740)노(魯)나라……것이라네: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선공(宣公) 15년 조에 나온다. 노나라는 주(周)나라 때부터 시행해 온 정전법(井田法)에 의한 조세 제도 이외에, 선공 때부터는 사전(私田)의 소출에 대해서도 세곡(稅穀)을 거두었다. 공전(公田)의 소출이 대략 10%였고 또 사전에서 10%의 세곡을 거두었으므로 20%의 세곡을 거둔 것이다. 논어 안연의 집주(集注)에도 이 내용이 실려 있다.

741)떠돌이 살림:기러기는 계절에 따라 남쪽과 북쪽으로 이동을 하는 새이므로, 일정한 주거지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백성을 비유할 때에 안호(雁戶)라는 말을 쓴다.

742)반계(磻溪)도……계시니:반계는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호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저술하였다. 반계수록에는 토지 제도 개혁에 대한 그의 견해가 실려 있다. 다산(茶山)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호이다. 그가 저술한 경세유표(經世遺表)에 전제(田制)에 대한 견해가 실려 있다. 유형원의 균전제(均田制)와 정약용의 여전론(閭田論)의 핵심은, 토지를 국가가 공유하고 경자(耕者)에게 분배하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주장한 것이었다. 이렇게 경제 정책에 밝은 두 분 선생이 지금 안 계신다는 말이다.

743)경재(耕齋):이건창(李建昌)의 아우 이건승(李建昇)의 호이다. 자는 보경(保卿)이다.

744)동파(東坡)는……있었는데:동파는 송(宋)나라 문장가 소식(蘇軾, 1036〜1101)의 호이고 그의 아우는 소철(蘇轍, 1039〜1112)이다. 아버지 소순(蘇洵, 1009〜1066)과 함께 삼소(三蘇)로 일컬어졌다. 소식이 죽었지만 훌륭한 아우 소철이 남아 있었듯이 이건창이 죽었지만 그의 아우 이건승이 남아 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745)낙천(樂天)은……없었다네:낙천은 당나라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자이다. 백거이는 늙도록 아들을 두지 못하다가 첩실을 얻어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태자소부(太子小傅)를 지냈으므로 백부(白傅)라고 일컫기도 한다.

746)仗:대본에는 ‘伏’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747)밤중에도……않았으리:밤에도 성문을 닫지 않았다는 것은 수령이 정치를 잘하여 단속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치안이 훌륭하다는 뜻이다.

748)사냥:원문의 교렵(校獵)은 사냥 대회로, 짐승을 일정한 곳에 몰아 놓고 무기를 사용하여 사냥을 하는 군사 훈련의 일종이다.

749)돌……재주:한나라 때의 장군 이광(李廣)을 석호장군(射虎將軍)이라 하였는데, 사기 권10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에 의하면, 이광이 사냥을 나갔을 때에 풀숲에 있는 바위를 호랑이로 오인하여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바위에 박혔다고 한다.  금사 박항래의 무예를 이광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750)명주(明珠)와……얽어맸다오:후한(後漢)의 명장(名將)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에 있다가 돌아올 때에 율무[薏苡]를 수레에 가득 싣고 왔는데, 마원이 죽은 뒤에 어떤 이가 이것을 명주와 무소뿔[文犀]을 싣고 온 것이라고 참소하였다. 이 내용은 후한서 권24 마원열전(馬援列傳)에 나온다. 문연(文淵)은 마원의 자이다.

751)매화가……보이고:남북조 시대의 육개(陸凱)와 범엽(范曄)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태평어람 권19 시서부(時序部) 춘중(春中)에 “육개가 강남(江南)에 있을 때에 역졸을 시켜 매화 한 가지를 장안(長安)에 있는 벗 범엽에게 보내면서 시를 함께 부쳤는데, 그 시에, ‘매화를 꺾다 역졸을 만나, 농산(隴山)의 벗에게 부쳐 보내노라. 강남엔 별로 보낼 것이 없어, 그저 봄 실은 가지 하나 보내는 것이네.[折花逢驛使 寄與隴頭人 江南無所有 聊贈一枝春]’ 하였다.” 하였다. 이 내용은 같은 책 권409 인사부(人事部) 교우(交友)와 권970 과부(果部) 매(梅)에도 실려 있으며, 고금사문유취, 연감유함 등에도 나온다. 매천이 소식을 전하고 싶어도 인편이 없어서 전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한 것인 듯하다.

752)봄바람에……않네:기러기는 주로 가을에 남쪽으로 날아왔다가 봄에는 북쪽으로 날아간다. 현재의 시절이 봄이기 때문에 기러기가 남쪽으로 날지 않는 것이니, 자성 부사로 있는 박항래의 서신이 오지 아니함을 비유한 말인 듯하다.

753)문수암(文殊菴):전남 구례군 토지면에 있는 사찰이다. 현재는 문수사(文殊寺)이다.

754)모연문(募緣文):돈이나 물건을 시주하여 좋은 인연을 맺기를 바라는 글이다.

755)와관사(瓦官寺)……생동했지:진(晉)나라 화가 고개지(顧愷之)의 일화를 인용하였다. 태평어람 권751 공예부(工藝部)에 의하면, 고개지가 와관사의 벽에 유마힐(維摩詰)의 불상을 그리자 이 불상이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이 있어서, 이를 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낸 보시(布施)가 100만 전이 되었다고 한다. 고개지의 자는 장강(長康)이다.

756)杏:전주매천시집에는 ‘鬱’로 되어 있다.

757)글솜씨:백전(白戰)은 시를 지어 서로 솜씨를 겨루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송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취성당(聚星堂)에서 빈객들과 눈[雪]에 대한 시를 지으면서, 눈과 관련된 글자들을 쓰지 못하게 했는데, 그 뒤 소식이 빈객들과 함께 시를 지을 때에 구양수가 정했던 규칙을 지키며 취성당설(聚星堂雪)이라는 시를 지었다. 그 시의 끝 구절에 “당시의 규칙을 그대들은 따를지니, 맨손으로 싸워야지 무기를 잡으면 아니되네.[當時號令君聽取 白戰不許持寸鐵]” 하였다.

758)금성(錦城):나주(羅州)의 옛 이름이다.

759)기수(沂水)에서……어긋났네:기수 관련 내용은 논어 선진에 나온다. 증점(曾點)이 공자에게 자신의 뜻을 말하기를, “늦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자(冠者) 대여섯 명과 동자(童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 하였다. 매천이 제자 봉계(鳳溪) 박 아무개와 함께 봄 소풍을 가기로 약속했다가 지키지 못한 일이 있었던 듯하다.

760)제비가 서쪽으로 날아가는데:중국 고악부(古樂府) 동비백로가(東飛伯勞歌)에 “동쪽으로는 백로가 날고 서쪽으로는 제비가 난다.[東飛伯勞西飛燕]” 하였는데, 이후로 노연분비(勞燕分飛)는 친척이나 친구 사이의 이별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여기서는 조인여(趙仁汝)가 고향으로 떠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761)알록달록 입은 옷:춘추 시대에 초(楚)나라 현인 노래자(老萊子)가 나이가 70이었는데도 부모님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려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렸다고 한다. 여기서는 조인여도 고향에 가서 노래자가 했던 것처럼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임을 비유한 것이다.

762)가는……있지:매천이 조인여의 노정(路程)을 학문에 비유하여, 목표를 원대하게 정하고 그 목표를 성취하도록 격려하는 뜻을 담은 말인 듯하다.

763)회당(晦堂):이성렬(李聖烈)을 가리킨다. 1900년(광무4) 6월에 경상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고 1903년 7월에 전라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매천이 이 시를 쓴 1900년에는 경상북도 관찰사로 재임 중이었다.

764)옥절(玉節)을……와서:옥절은 옥으로 만든 부절(符節)인데, 고대에 천자의 명령을 받은 자가 지닌 일종의 징표이다. 여기서는 회당 이성렬이 고종황제의 임명을 받아서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했음을 말한다.

765)달성(達城):대구의 옛 이름이다.

766)곽세후(郭細侯)……않으리라:세후는 동한(東漢) 때의 곽급(郭伋)의 자이다. 곽급은 지방관을 두루 지내면서 정치를 잘하여 그가 가는 고을마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환영하였다. 병주(幷州)에 재차 부임하였을 때에는, 서하(西河)에 이르자 어린이 수백 명이 죽마(竹馬)를 타고 길에 나와 환영하였다. 후한서 권31 곽급열전(郭伋列傳)에 나오며, 태평어람, 고금사문유취, 패문운부 등에 전한다.

767)업후(鄴侯)는……희어졌지:업후는 당(唐)나라 이필(李泌)을 말한다. 업현(鄴縣)의 후(侯)에 봉해졌기 때문에 업후라고 일컬어진다. 신선술을 좋아하여 형산(衡山)에 은거해 지내다가, 조정의 부름에 나가서 힘을 다해 봉사하였고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768)임조(臨洮):중국 감숙성(甘肅省) 지역에 있는 도시 이름이다.

769)영전(令箭):군령(軍令)을 전달할 때에 사용하는 화살이다. 만기요람 군정편(軍政編)에 “화살촉 한쪽에는 모영대장(某營大將)이라 쓰고 한쪽에는 영(令) 자를 쓴다. 군중에 명령을 전달하거나 비밀 명령을 내릴 때에 사용한다.” 하였다.

770)하란(賀蘭):산 이름이다. 현재의 중국 영하회족(寧夏回族) 자치구와 내몽고 자치구의 접경지대에 있다. 하란은 몽고어로 준마(駿馬)라는 뜻이라 한다.

771)용하(龍河):옛 발해 염주(鹽州) 지역에 용하군(龍河郡)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사항은 미상이다.

772)수항성(受降城):한(漢)나라와 당(唐)나라 때에 적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변방에 쌓은 성을 말한다. 한나라 무제(武帝)는 장군 공손오(公孫敖)를 시켜 변방에 수항성을 쌓게 하였으며, 당나라 때에는 장인원(張仁愿)이 수항성을 쌓았다.

773)풍운(風雲)도……보호하네:당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주필역(籌筆驛)에 “원숭이와 새들도 오히려 군령을 두려워하는 듯하고 바람과 구름도 항상 방책이 되어 보호해 주었네.[猿鳥猶疑畏簡書 風雲常爲護儲胥]” 하였다. 여기서는 자성 군수 금사 박항래의 충성심이 신명을 감동시켜서 주변의 자연환경이 그 보호막이 되어 준다는 뜻으로 말한 것인 듯하다.

774)도산(道山):신선(神仙)이 살고 있다는 전설상의 산을 말하는데, 대개 사람이 죽으면 도산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775)선우(先友):부친의 벗을 선우라고 한다.

776)나는……거야:나는 이승에서 벗을 하나 잃었지만 저승의 귀신들은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어 기뻐할 것이라는 뜻이다.

777) 조소아(趙小雅):조성희(趙性喜)이다. 호가 소아이다. 무주 부사(茂州府使)를 지냈으므로 조 무주(趙茂州)라고도 하였다. 75쪽 주195 참조.

778)굽 높은 나막신:남북조 시대 동진(東晉)․송(宋) 때의 사영운(謝靈運, 385 ~433)이 등산을 좋아했는데, 산에 오를 때에는 나막신의 앞굽을 떼어내고 산에서 내려올 때에는 나막신의 뒷굽을 떼어내 오르내리기에 편리하게 하였다고 한다.

779)높다란 갓:전국 시대 초나라 굴원이 지은 섭강(涉江)에 “내가 어릴 적부터 이런 특이한 복장을 좋아하였는데 늙어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네. 긴 칼을 허리에 차고 우뚝 높은 갓을 머리에 썼지.[余幼好此奇服兮 年旣老而不衰 帶長鋏之陸離兮 冠切雲之崔嵬]” 하였다. 절운관(切雲冠)은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오만한 기상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780)용렬한……여겼고:후한서 권80하 예형열전(禰衡列傳)에 “예형은 오직 노국(魯國)의 공융(孔融), 홍농(弘農), 양수(楊脩)와 친하게 지냈는데 항상 그들을 칭찬하기를, ‘대아는 공문거이고 소아는 양덕조이다. 그 나머지 용렬한 것들은 말할 것도 없다.[大兒孔文擧 小兒楊德祖 餘子碌碌 莫足數也]’ 하였다. 공융도 그 재주를 매우 사랑하였다. 예형은 약관의 나이였고 공융은 나이가 마흔이었는데, 드디어 벗이 되었다.” 하였고, 송나라 소식의 시 차운화왕공(次韻和王鞏)에 “평소에 나 역시 몇몇 이외에는 경시하며 살았으니 늘그막에 그 누가 이 늙은이를 생각하랴.[平生我亦輕餘子 晩歲人誰念此翁]” 하였으며, 육유(陸游)의 시 취부(醉賦)에 “나도 다른 사람들은 가볍게 여기니, 그대도 응당 취한 나를 용서해 주시리라.[我亦輕餘子 君當恕醉人]” 하였다. 경여자(輕餘子)는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하찮게 여겼다는 뜻이니, 고고한 태도를 비유하는 말이다.

781)적벽(赤壁):전남 화순군 동복천 일대의 적벽을 말한다.

782)깊은……지나가네:송나라 소식(蘇軾)의 후적벽부(後赤壁賦)에 “때는 한밤중이라 사방이 고요한데 마침 한 마리 학이 강을 가로질러 동쪽에서 날아왔다. 날개는 수레바퀴 같고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었는데, 끼룩끼룩 길게 울며 나의 배를 스쳐 서쪽으로 날아갔다.[時夜將半 四顧寂寥 適有孤鶴 橫江東來 翅如車輪 玄裳縞衣 戞然長鳴 掠予舟而西也]” 하였는데, 이 내용을 인용하여 조소아(趙小雅)를 학에 비유한 것이다.

783)미불(米芾)의 연운(烟雲):송나라 때의 서화가(書畫家) 미불은 산수화를 잘 그렸다. 자가 원장(元章)이어서 미원장으로 불렸다.

784)노철(老鐵)의 매화:원(元)나라 양유정(楊維禎)은 자호가 철적도인(鐵笛道人)인데, 초호(初號)는 매화도인(梅花道人)이었다고 한다. 회계(會稽) 철애산(鐵崖山)에 매화 수백 그루를 심고 높은 누각을 지어서 서적 수만 권을 쌓아 두고 지냈다고 한다.

785)담화(曇華)처럼 환생하여 오셨었네:불교 용어에 일현담화(一現曇華)라는 것이 있는데, 세상일이나 인물이 우연히 한 번 왔다가 금세 가 버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라 한다.

786)뗏목……재주였네:한 무제(漢武帝) 때에 장건(張騫)이 뗏목을 타고 바다 끝까지 가서 은하수로 들어가 직녀(織女)의 지기석(支機石)을 받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후세에는 승사만리(乘槎萬里)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물을 건너 먼 외국에 나가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787)용면(龍眠)의 붓:이공린(李公麟)의 붓이라는 말인데, 그림을 잘 그리는 솜씨라는 뜻으로 사용한 듯하다. 용면은 송나라 때의 화가 이공린을 말한다. 이공린이 벼슬을 그만두고 용면산(龍眠山)에 들어가 지내며 용면거사(龍眠居士)라 자호하였다.

788)山:전주매천시집에는 ‘田’으로 되어 있다.

789)승복(承服):승중복(承重服)을 말한다. 아버지가 없는 경우, 조부모의 초상에 망자(亡者)의 손자가 상복을 입는 것이다.

790)같은 손금에 흐느끼네:후한의 경학자 정현(鄭玄)은 아들이 황건적의 난리에 27세로 죽고 손자가 유복자로 태어났다. 정현이 정묘년에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정묘일에 태어났고 손금이 또 할아버지인 자기와 닮았다고 하여 이름을 소동(小同)이라 지었다 한다. 삼국 시대 때 정소동은 정현과 그 문인들의 문답을 기록한 정지(鄭志)를 엮었다. 여기서는 조소아(趙小雅)가 아들이 없어서 그 손자가 승중복을 입었는데 손자가 조부인 조소아를 많이 닮았음을 표현한 것인 듯하다.

791)왕발(王勃)과 노조린(盧照隣)처럼:당나라 초기에 왕발, 양형(楊炯), 노조린, 낙빈왕(駱賓王) 등, 네 사람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나서, 세상 사람들이 왕양노낙(王楊盧駱) 또는 사걸(四傑)이라 일컬었다. 양형이 이 말을 듣고는 “내가 노조린보다 앞에 놓인 것은 좀 계면쩍지만 왕발보다 뒤에 놓인 것은 수치스럽다.” 하였다. 이 내용은 구당서 권190 문원열전(文苑列傳)에 나오는데, 고금사문유취, 연감유함, 태평어람 등에도 인용되어 실려 있다. 여기서는 매천과 조소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궁궐에서 함께 시험을 보았다는 뜻으로 쓴 듯하다.

792)마신 먹물:옛날에 과거 시험에서 글씨가 졸렬한 자에게 먹물을 마시게 한 데에서 유래하여, ‘먹물을 마시다[飮墨]’는 과거 시험에 낙방한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793)만년에……자부했지:당나라 한유(韓愈)의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曲序)에 “내 수레에 기름 치고 내 말을 잘 먹여서 그대 따라 반곡에서 한가로이 살다가 나의 생애를 마치리라.[膏吾車兮 秣吾馬 從子于盤兮 終吾生以徜徉]” 하였다. ‘수레에 기름을 치다[膏車]’라는 말은 떠날 채비를 한다는 뜻이다. 매천이 만년에 벼슬길을 포기하고 은둔하러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794)학남비(鶴南飛)……끊어졌고:송나라 소식이 생일에 적벽 아래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거나하게 취하여 높은 봉우리에 걸터앉아 학 둥지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강의 상류 쪽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을 시켜 가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진사 이위(李委)라는 이가 소식의 생일에 ‘학이 남쪽으로 날아가다’라는 뜻의 학남비라는 신곡(新曲)을 지어서 소식에게 바치는 것이라 하였다. 이 내용은 소동파시집 이위취적(李委吹笛), 연감유함, 운부군옥 등에 실려 있다. 여기서는 조소아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제 생일을 축하하는 곡조를 연주할 일이 없어졌다는 뜻으로 쓴 듯하다.

795)꼴……더디구나:평생을 포의(布衣)로 가난하게 살았던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서치(徐穉)가 부의(賻儀)를 마련하지 못한 채 곽태(郭泰)의 모친상에 가서 꼴 한 묶음[生芻一束]을 여막 앞에 놓아두고는 말없이 그대로 떠나자 사람들은 그 연유를 알지 못했으나 곽태는 그가 서치인 줄을 알았다고 하며, 태위(太尉) 황경(黃瓊)이 죽었을 때에 서치가 조문을 가면서, 가난하여 경비가 없자 ‘거울 가는 도구[磨鏡具]’를 가지고 다니며 거울을 갈아 주고 비용을 마련하여 조문을 갔다고 한다. 이런 내용은 후한서53 서치열전(徐穉列傳), 고금사문유취, 태평어람 등에 실려 있다.

796)僆:대본에는 ‘連’으로 되어 있으나,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797)곧은……생각났다:장자 산목(山木)에 “곧은 나무가 먼저 베어지고 물맛 좋은 우물이 먼저 고갈된다.[直木先伐 甘井先竭]” 하였다. 쓸모가 있는 것이 먼저 희생되며 쓸모가 없는 것이 오래 장수할 수 있다는 뜻이다.

798)옛날에……있었으니:진서(晉書)94 도잠열전(陶潛列傳)“진나라 도잠은 음률을 모르면서 줄 없는 거문고를 하나 두고서 벗들과 술을 마실 때에는 그 거문고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거문고에 있는 멋을 알면 그뿐이지 어찌 수고롭게 소리를 내랴.[但識琴中趣 何勞絃上聲]’ 하였다.” 하였다.

799)손을……자신이니까:춘추 시대 초나라 사람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잘 탔는데, 높은 산에 오를 생각을 하면서 타면 벗 종자기(鍾子期)가 “우뚝 태산처럼 높구나.” 하고, 흐르는 물을 생각하면서 타면 “넘실넘실 강물과 같구나.” 하여, 백아의 생각을 종자기가 모두 알았다고 한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모두 끊어 버리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열자 탕문(湯問), 여씨춘추, 고금사문유취, 태평어람 등 여러 곳에 실려 있다. 여기서 매천은, 백아의 거문고 소리는 종자기가 알아주었지만, 나는 알아줄 이가 없고 나 스스로 나를 알아줄 뿐이라고 한 것이다.

800)세한의 자태:논어 자한(子罕)에 “해가 추워진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하였다.

801) 진수성찬:원문의 오정(五鼎)은 다섯 종류의 육식을 늘어놓고 먹는 것을 말하는데, 고관대작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사기 권112 주보언열전(主父偃列傳)에 “대장부가 살아서 오정의 음식을 먹지 못하면 오정에 삶기는 혹형을 당하여 죽을 뿐이다.” 하였다.

802)늦게 이루어지는 것:노자에 “큰 네모는 모서리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고 큰 소리는 소리가 드물고 큰 형상은 형체가 없다.[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하였다.

803)배만 한 연꽃:당나라 한유(韓愈)의 고의(古意)에 “태화산 봉우리 옥정에 연(蓮)이 있는데 꽃은 열 길이나 되고 뿌리는 배와 같네.[太華峯頭玉井蓮 開花十丈藕如船]” 하였다. 여기서 우선(藕船) 또는 선우(船藕)라는 말이 나왔고 그 뜻을 대개 연뿌리가 배만큼 크다는 말로 해석한다. 여기서는 ‘우(藕)’를 ‘연꽃’이라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여 ‘연꽃’이라 번역하였다.

804)청정(淸靜)한……아닐지라도:이백(李白)의 영선사방관산해도(瑩禪師房觀山海圖)에 “그윽히 참 마음과 하나가 되어 고요한 이의 완상물로 참으로 알맞다.[杳與眞心冥 遂諧靜者翫]” 하였다. 정자(靜者)는 청정의 도를 깨달아 마음이 고요한 자를 말하는데, 은사(隱士), 승려(僧侶)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석류꽃이 매화처럼 은자의 벗이 될 만하지는 못하더라도’라는 말이다.

805)양중(羊仲)과 구중(求仲):두 사람은 한나라 때의 청렴한 선비이다. 한나라 때에 왕망(王莽)이 권력을 독점하자 연주 자사(兗州刺史) 장후(蔣詡)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 두릉(杜陵)으로 돌아가 대밭 속에 세 갈래의 오솔길[三徑]을 만들어 놓고 오직 구중, 양중과 어울려 지냈다고 한다. 이 내용은 태평어람, 고금사문유취, 패문운부 등에 전한다. 진나라 도잠의 귀거래사에 “세 오솔길은 황폐해졌으나 솔과 국화는 아직 남아 있다.[三徑就荒 松菊猶存]” 하였는데, 이 ‘삼경’도 양중, 구중과 관련된 고사이다.

806)물을 주었는데:원문의 포옹(抱甕)은 장자 천지에 나오는 말로, “물동이로 물을 길어다 정원에 물을 준다.”라는 뜻이다. 83쪽 주216 참조.

807)꽃이라……아닐까:송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 “국화는 꽃 중의 은자(隱者)이고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한 자이고, 연꽃은 꽃 중의 군자이다.[菊 花之隱逸者也 牡丹 花之富貴者也 蓮 花之君子者也]”라고 하였다. 주돈이가 모란을 국화, 연꽃과 함께 대표적인 꽃으로 언급했지만, 향기가 없다면 이것이 진정한 꽃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표시한 것인 듯하나, 자세한 뜻은 미상이다.

808)동사(東史)에……아닐까:동사는 ‘우리나라 역사서’라는 뜻이다. 삼국사기 본기(本紀) 선덕왕(善德王)에 “진평왕 때에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덕만(德曼)에게 보였더니,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은 매우 아름답기는 하나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하니, 덕만이 답하기를, ‘꽃에 나비가 없는 것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가 매우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릅니다. 이 꽃은 매우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틀림없이 향기가 없는 꽃입니다.’ 하였다. 그 씨앗을 심었더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으니, 예지력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이런 내용은 삼국유사 기이(紀異), 동사강목 등에도 실려 전한다.

809)옛사람은……수밖에:송나라 임포(林逋, 967〜1028)가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여 학을 기르고 매화를 기르며 살았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옛사람은 임포를 가리키는 듯하다.

810)향기가……않다:굴원의 이소경(離騷經)에 “나의 경패(瓊佩)는 귀한 것인데, 그 아름다움이 버림받아 여기에 이르렀네. 향기가 그윽하여 없어지기 어려우니, 그 향기 지금도 없어지지 않았다네.[惟茲佩之可貴兮 委厥美而歷茲 芳菲菲而難虧兮 芬至今猶未沫]” 하였다. ‘미매(未沬)’는 ‘미말(未沫)’로도 쓰인다.

811)한……있으니:송사(宋史)316 포증열전(包拯列傳)에 “강직한 포증(包拯, 9991062)이 우사낭중(右司郎中)으로 조정에 들어오자 귀척(貴戚)과 환관(宦官)들이 몸조심을 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자들이 모두 포증을 경외하였다. 포증은 남들에게 구차스럽게 영합하는 일이 없었고 말이나 얼굴빛으로 남을 기쁘게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포증의 웃음을 황하가 맑아지는 것에 견주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송나라 육유(陸游, 1125〜1210)의 추일차전배신년운(秋日次前輩新年韻)에 “노인이 항상 홀로 지내며, 한 번 웃음은 황하가 맑아짐에 견주겠네.[老人常獨處 一笑比河淸]”라는 구절이 있다. ‘일소비하청(一笑比河淸)’과 유사한 표현이 육유의 다른 시에도 나오는데, 황하는 맑아질 날이 없으므로, ‘황하가 맑아짐에 견준다’는 표현은 웃음이 없는 근엄한 모습을 형용하는 말이다.

812)다섯 이랑의 집:맹자 양혜왕 상에 “5묘(畝)의 집에 뽕나무를 심으면 나이 50이 된 사람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다.” 하였는데, 주희의 주석에 “5묘의 집이라는 것은 한 가장(家長)이 받는 집터인데 2.5묘는 들에 있고 2.5묘는 마을에 있었다.” 하였다. 대개 한 농가(農家)의 주택을 말한다.

813)천년……있는데:태평광기(太平廣記) 초목(草木)에 “송백(松柏)의 기름[脂]이 땅에 스며들어 1천 년이 지나면 변화하여 복령(茯苓)이 된다.” 하였다. 이런 내용은 태평어람, 예문유취, 연감유함 등에도 실려 전한다. 천년 묵은 송진은 ‘복령’을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814)가루를 만들면:굴원의 이소경(離騷經)에 “경옥 가지를 꺾어 음식을 만들고 경옥 가루 빻아 식량을 삼으리라.[折瓊枝以爲羞兮 精瓊爢以爲粻]” 하였다. 원문의 경미(瓊糜)는 경미(瓊爢)와 같으니, ‘옥가루’라는 뜻으로, 진귀한 식량을 표현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복령을 갈아 미숫가루 같은 식량을 만든다는 말이다.

815)떠나서……들어가리라:‘무궁(無窮)의 문’은 지극한 도[至道]의 문을 말한다. 장자 재유(在宥)에 “황제(黃帝)가 공동산(空同山)으로 광성자(廣成子)를 찾아가 지극한 도를 묻자, 광성자가 이르기를 ‘저 지극한 도는 무궁한 물건인데 사람들은 모두 끝남이 있는 줄로 여기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인데 사람들은 모두 궁극이 있는 줄로 여긴다.……지금 저 만물들은 모두 흙에서 생겨나서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장차 그대를 떠나서 무궁의 문으로 들어가 무극(無極)의 들에서 노닐고자 한다.’ 하였다.” 하였다.

816)한 해에……권장하였다:맹자 양혜왕 상 등에 “5묘(畝)의 집에 뽕나무를 심으면……”이라고 하였다. ‘아성(亞聖)’은 맹자를 말한다. 184쪽 주428 참조.

817)오십이……하였는데:맹자 양혜왕 상에 “5묘의 집에 뽕나무를 심으면 나이 50인 자가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계돈구체(雞豚狗彘)를 기름에 그 때를 놓치지 않으면 나이 70인 자가 주리지 않을 수 있다.” 하였고, 진심 상에 “나이 50이 된 자는 비단옷이 아니면 따뜻하지 아니하고 나이 70인 자는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아니하다.” 하였다.

818)상홍양(桑弘羊)과……곤궁해졌는데:상홍양과 공근(孔僅)은 한나라 때에 재화 증식의 능력이 탁월했던 경제 관료들이다. 한나라는 무제 때에 흉노를 몰아내고 국력이 막강해졌는데, 상홍양이 소금과 철의 매매를 국가가 운영하고 화폐 제도를 개혁하게 하여 국가의 세금 수입을 증대시켜 막대한 전쟁 비용에 대한 재정적 뒷받침을 했다고 한다. 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상홍양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819)어찌……되었던가:사기30 평준서(平準書)한서24 식화지(食貨志) 등에 의하면, 한나라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때에 정치를 잘하여 경제적 풍요로움을 이루어, 무제(武帝) 초기에는 도시나 시골이나 곡식 창고가 가득하고 재화가 넉넉하여 경사(京師)에는 돈이 넘쳐 나 돈꿰미가 썩어서 돈을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고 창고에는 묵은 곡식이 남아돌아 붉게 곰팡이가 피어 먹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을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한다. 태평어람, 연감유함, 예문유취 등에도 실려 전한다.

820)노란……없다:당나라 때에 장안(長安)의 거자(擧子)들이 6월 이후에는 시험에 낙방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장안에 머물면서 작문 연습을 하여 새로 지은 문장을 7월에 다시 시험관에게 올렸는데, 이때가 마침 괴화(槐花)가 노랗게 피는 시기였다. 세속에서는 이것을 두고 “괴화가 노랗게 피면 거자들이 바쁘다.[槐花黄 擧子忙]”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사문유취, 연감유함, 자사정화(子史精華) 등에 실려 전한다. 여기서는 시험을 볼 사람들은 노란 꽃이 피기 전까지 열심히 작문 연습을 해야 하는데 이미 가을이 되어 낙엽이 다 져 시기가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나는 시험을 볼 생각이 없으니 꽃이 피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821)꿈속에서는……날아다닌다:장자 제물론에 “예전에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는데 영락없는 나비여서 자신이 장주인 줄을 몰랐다. 얼마 뒤에 꿈에서 깨니 곧 장주의 모습이었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일까,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어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하였다.

822)남가(南柯)가 좋다는 말:당나라 때에 순우분(淳于棼)이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 집 앞의 홰나무 아래에서 잠이 들어, 꿈에 사자(使者)를 따라 괴안국(槐安國)에 가서 국왕의 사위가 되어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살다가 깨어나 살펴보니, 홰나무 아래에는 개미집이 있고 자기가 갔던 괴안국은 그 개미들의 나라였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꿈을 남가몽(南柯夢)이라 한다.

823)관문과 다리를 모른다:원문의 관(關)은 육로(陸路)의 길목을, 양(梁)은 수로(水路)의 길목을 말한다.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이다.

824)고야(姑射)의 자태:장자 소요유에 “막고야산(藐姑射山)에 신인(神人)이 사는데, 피부가 빙설(氷雪) 같고 부드럽기가 처녀의 살결 같다.” 하였다. 여기서는 백일홍의 나무 모양을 형용하는 말로 쓴 것인 듯하다.

825)여든에……들어갔으니:주(周)나라 태공망 여상(呂尙)이 반계(磻溪)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옥황(玉璜)을 건져 올렸는데 그 옥황에 “희씨(姬氏)가 천명을 받고 여씨(呂氏)가 보좌하리라.……[姬受命 吕佐之……]”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문왕이 그를 데려와서 사부(師傅)로 삼았다. 태공망은 주나라 무왕이 천하를 평정할 때 보좌한 대표적인 신하 열 명[亂臣十人] 가운데 한 사람이다.

826)좋은……하였다:고금사문유취, 연감유함 등에 옥(玉)의 색깔을 비유한 글이 채집되어 실려 있는데, 그곳에 “붉은 옥은 계관(鷄冠)과 같고 누런 옥은 증률(蒸栗)과 같고 흰 옥은 저방(猪肪)과 같고 검은 옥은 순칠(純漆)과 같다.” 하였다.

827)후세로……못했다:세상이 쇠퇴하게 되자 땅이 보배를 생산하는 일에 인색하여 세상에서 이러한 좋은 옥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828)밤으로써……같았다:시경 첨피락의(瞻彼洛矣)에 “군자가 이르시니 칼집에 옥 장식이 있다.[君子至止 鞞琫有珌]” 하였다. 봉(琫)은 위쪽의 장식이고 필(珌)은 아래쪽의 장식이라 한다. 여기서는 옥 대신 밤을 꿰어서 차니 칼집을 장식하는 옥 장식과 같았다는 뜻이다.

829)이를 깨물듯이:지봉유설 금충부(禽蟲部)에 “내가 북경에 들어갔을 때에 보니 중국의 미천한 일반 백성들은 이를 잡으면 이빨로 깨물어 죽였다.” 하였다. 패문운부 슬(蝨)제동야어(齊東野語)의 말을 인용하여, “이를 잡은 자는 모두들 치아로 으깨서 죽이니 몸을 해친 것에 대한 미움 때문이다.” 하였다.

830)옥 먹는 방법:옛 전설에, 선가(仙家)에서는 옥가루를 복용하여 수명을 연장하였다고 한다.

831)줄기와 잎:인삼은 주로 잎줄기가 세 갈래로 갈라지고 그 잎이 다섯 장이므로 인삼을 삼아오엽(三椏五葉)이라고 한다. 원문의 ‘아엽(椏葉)’은 인삼의 줄기와 잎이다.

832)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랴:예문유취8 수부(水部) 하수(河水)태평어람61 지부(地部) 하(河) 등에 주나라 시로 소개된 일시(逸詩)의 구절이 실려 있는데, 그 시에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랴? 사람의 수명이 얼마나 되기에.[俟河之淸 人夀幾何]” 하였고, 책부원귀21 제왕부(帝王部) 징응(徵應), 사문유취 등에는 “황하는 천 년에 한 번 맑아지는데,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탄생한다.”라는 기록도 있다. 원문의 ‘하청(河淸)’은 ‘백년하청’으로 많이 쓰이는데, 황하는 본래 흐린 강이어서 맑아질 리가 없으므로, 부질없이 오랜 세월을 기다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833)칠……어려운데:맹자 이루 상에 “오늘날 왕 노릇을 하고자 하는 자는 마치 7년 된 병을 고치기 위해 3년 된 약쑥을 구하는 것과 같다. 정말이지 미리 비축해 두지 않으면 종신토록 구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834)교송(喬松)의 자태:교(喬)는 주(周)나라 태자 왕자교(王子喬)이고 송(松)은 적송자(赤松子)이다. 신선술을 익혀 불로장수한 인물들로 일컬어진다.

835)오정(五鼎)의 음식:오정은 다섯 가지 고기를 요리하는 솥을 가리키는데 고대에 대부(大夫)는 제사할 때에 오정의 요리를 올려 제사하였다고 한다. 고기가 두루 갖추어진 진수성찬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836)육지(肉芝):산림경제 권4 치약(治藥)에 “박쥐[蝙蝠]는 석회암 동굴[乳石洞]에 살면서 그 정즙(精汁)을 먹는다. 색깔이 하얗고 비둘기나 까치만 한 것은 나이가 모두 1천 세를 산 것이다. 선경(仙經)에 이른바 육지라는 것이다. 그것을 먹으면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다.” 하였다. 또한 태평어람, 사문유취, 연감유함, 태평광기 등에는 육지에 대한 기록이 곳곳에 있는데, “두꺼비가 1만 년을 살면 머리에 뿔이 솟고 턱밑에 단서(丹書)가 새겨지는데 그것을 육지라 한다. 5월 5일에 잡아서 그늘에 말려 몸에 지니고 있으면 다섯 가지 병기(兵器)를 물리치는 효험이 있다.”, “1천 년을 살아서 하얗게 변한 제비를 말한다.”, “작은 인형처럼 생긴 사람이 수레를 타고 있는 모습의 물건이다.”, “동물처럼 머리와 꼬리와 사지를 갖추고 험준한 곳의 바위에 붙어 있는데 흡사 생물과 같다.” 등등의 다양한 설명이 있다. 대개 무병장수할 수 있는 선약(仙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837)이윤(伊尹)과 부열(傅說):이윤은 은(殷)나라 탕왕(湯王)을 도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난세를 평정한 뒤에 훌륭한 정치를 이룩한 명재상이고, 부열은 은나라 고종(高宗)을 도와 훌륭한 정치를 이룩한 명재상이다.

838)한비(韓非)와 상앙(商鞅):전국 시대의 인물들이다. 한비는 한(韓)나라의 공자(公子)로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주창하였고, 상앙은 위(衛)나라의 공자로 위앙(衛鞅) 또는 공손앙(公孫鞅)이라고도 하는데 법령을 제정하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였다. 중국의 국가 제도를 정비한 법가(法家) 사상가들인데,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은 대개 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839)속화(速化):서둘러 벼슬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840) 소천(小川):왕사찬(王師瓚)이다. 왕석보(王錫輔)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찬지(贊之)이고 호는 소천이다.

841)石:전주매천시집에는 ‘江’으로 되어 있다.

842)뜰……익혔구나:오동나무는 봉황이 깃드는 나무이다. 원문의 추봉(雛鳳)은 약헌 주인의 아들 또는 손자가 훌륭하게 자라고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843) 생일:이해가 1900년 경자년이니 매천의 46세 생일이다.

844)잔치……그립구나:원문의 ‘탕병(湯餠)’은 뜨겁게 끓인 국수를 말한다. 옛날에는 태어난 지 사흘째 되는 날과 한 돌이 되는 날에 탕병을 먹으면서 잔치를 열어 축하하였다고 한다. ‘시제(試啼)’는 아기를 울려서 그 울음소리를 듣고 아이의 미래를 점치는 일을 말한다. 진서(晉書)98 환온열전(桓溫列傳)에 “환온이 태어나 한 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에 온교(溫嶠)가 보고서 ‘이 아이는 골상(骨相)이 특별하니 시험해 봐야겠다.’ 하고는 울려서 그 울음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참으로 특별한 아이로다.’ 하였다. 그 아버지가 이름을 온(溫)이라고 지었다. 환온은 벼슬이 대사마(大司馬)에 이르렀다.” 하였다.

845)쑥대……느꺼워라:원문의 상봉(桑蓬)은 상호봉시(桑弧蓬矢)의 준말이다. 예기 사의(射儀)에 의하면, 옛날에 아들을 낳으면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 6개로 하늘과 땅과 동서남북을 향하여 쏘았는데 세상에 대하여 원대한 뜻을 품으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효경(孝經)에 “몸과 사체와 터럭과 살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출세하여 도를 시행해서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효도의 끝맺음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부모님이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복해 주면서 큰 꿈을 가지라고 기원을 하였고, 자신은 출세하여 부모님께 효도를 하고자 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해서 서글픈 마음이 든다는 뜻이다.

846)영계기(榮啓期)는……보네:춘추 시대 영계기라는 사람이 사슴 갖옷을 입고[鹿裘] 새끼줄 띠를 매고[帶索] 거문고를 타며[鼓琴]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공자가 무엇이 그리 즐거우냐고 물으니 답하기를, “하늘이 낸 만물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한데 내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첫째 즐거움이고, 남자가 높고 여자가 낮기 때문에 남자를 귀히 여기는데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둘째 즐거움이고, 사람은 태어나기도 전에 죽거나 강보에서 요절하기도 하는데 나는 아흔 살까지 살았으니 이것이 셋째 즐거움이오.” 하였다고 한다. 열자 천서(天瑞), 태평어람, 연감유함, 예문유취, 패문운부 등에 실려 전한다. 대삭가는 영계기가 부른 노래라는 말인데 청빈한 은둔자의 노래를 뜻한다.

847)큰……전해졌나:항통은 목이 좁아서 쪽지를 넣을 수는 있지만 꺼낼 수는 없게 만든 대나무 통을 말한다. 한나라 때에 영천(潁川)의 호걸들이 상호 인척을 맺고 붕당을 이루는 바람에 통치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자 영천 태수 조광한(趙廣漢)이 이 투서함을 만들어서 상호 투서를 하게 하여 이간질을 시켰다고 한다. 여기서는 억울한 백성이 사또에게 억울한 사연을 호소해서 해결되었다는 뜻인 듯한데, 정확한 의미는 미상이다.

848) 얼음……만드느라:얼음판을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모습을 형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의미가 불분명하여 우선 이와 같이 번역하였다.

849)廻:대본에는 ‘逈’으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廻’가 타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850)세상에……같으리:당나라 왕발(王勃, 650676)의 두소부지임촉주(杜少府之任蜀州)라는 시에 나온다.

851)석정(石亭):이정직(李定稷, 1841〜1910)이다. 이정직은 어릴 적에 김포(金浦)에서 김제(金堤)로 와서 살았다. 매천, 해학(海鶴)과 함께 ‘호남삼걸(湖南三傑)’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852)최경창(崔慶昌)과 백광훈(白光勳):최경창, 이달(李達), 백광훈은 송시풍(宋詩風)이 주류를 이루던 조선 중기에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즐겨 지었으므로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부른다.

853)바르고……피웠구나:당나라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위로는 시경의 바르고 아름다움[詩正而葩]을 규범으로 삼고.”라고 하였다. ‘정(正)’은 의미가 바르다는 뜻이고 ‘파(葩)’는 문사가 아름답다는 뜻이다. 시경의 문체 또는 시경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854)택당(澤堂)은……있다:택당은 이식(李植, 1584〜1647)의 호이다. 이식의 조부의 외가(外家)가 고부(古阜)에 있었고 부유하였다고 한다. 조부 때부터 고부에 농장을 소유하였고, 이식은 어릴 때에 이곳 우일장(雨日莊)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855)반계(磻溪)는……이주하였다:반계는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호이다. 유형원은 전북 부안의 우반동(愚磻洞)에 내려가 살며 호를 반계라 짓고 농촌 생활을 하였는데 그때의 기록이 반계수록이다. ‘磻溪’는 대본에 ‘潘溪’로 되어 있으나, 고쳐서 번역하였다. ‘15세 때에 이주하였다’는 기록은 오류인 듯하다.

856)초(楚)나라의……있었구나:춘추좌씨전 양공(襄公) 26년에 나온다. 채(蔡)나라 성자(聲子)가 진(晉)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평화 협정에 관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진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초나라에 들르니 영윤 자목(子木)이 진나라의 국내 정세를 묻고 진나라와 초나라의 대부(大夫)들에 대한 역량을 견주는 질문을 하였다. 이에 성자는, 초나라의 상벌 제도가 타당치 못하여 인재들이 다들 외국으로 망명하였는데 그 인재들을 진나라가 데려다 등용하여 그들의 계책이 도리어 초나라에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뜻의 비유로, “초나라에 비록 재목이 있으나 실제로는 진나라가 그것을 쓰고 있다.[楚雖有材 晉實用之]”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후세에는 ‘타국의 인재를 등용한다는 의미’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김포 출신의 이정직이 어릴 때에 김제에 와서 정착하여 김제 사람이 되어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857)옥……하였구나:“좋은 옥을 찾으려는 이는 형산(荊山)으로 가고 좋은 말을 찾으려는 이는 기북(冀北)으로 가야 한다.”라든지 “진주를 찾으려는 자는 바다로 가야 하고 좋은 옥을 찾으려는 자는 남전(藍田)으로 가야 하고 현사(賢士)를 찾으려는 자는 큰 도회지로 가야 한다.”라는 등의 글에서 의미를 따온 것이다. 이정직이 김제에 살고 있으므로 보옥, 곧 인재를 구하려는 이가 바닷가 고을인 김제로 오지 않을 수 없겠다는 뜻이다.

858)완산(完山):전주의 옛 이름이다.

859)기이한……물어보고:한서 권87 양웅전에 의하면, 한나라의 문장가인 양웅(揚雄)이 고문(古文), 기자(奇字) 등을 많이 알았으므로, 유흠(劉歆)의 아들 유분(劉棻) 등이 그에게 가서 글자를 물어 배웠다고 한다. 여기서는 이정직이 한나라 때의 양웅처럼 글자를 자문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860)꺽인……쓰네:후한서 권68 곽태열전(郭泰列傳)에 나온다. 후한의 곽태(郭泰)는 자가 임종(林宗)인데 당대의 명사(名士)였다. 외출했다가 비를 만나 그가 쓴 각건(角巾)의 한쪽 모서리가 빗물에 젖어 접혔는데, 당시 사람들이 일부러 곽태와 같이 각건의 한 모서리를 접어서 쓰면서 그것을 임종건(林宗巾)이라 불렀다고 한다. 후세에는 명사의 고아(高雅)한 풍치를 모방하는 것을 ‘점건(墊巾)’, ‘점각(墊角)’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정직이 곽태처럼 사람들의 앙모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861)단사(丹砂)를……기다리네:단사는 복용하면 불로장생한다는 단약(丹藥)을 만들 때에 쓰이는 광물이다. 마고(麻姑)는 도가(道家)에서 장생불사한다고 하는 선녀이다. 장자 추수(秋水)에 “노래기[蚿]가 말하기를, ‘그대도 저 침 튀기는 사람을 보았겠지? 침을 뿜어내면 큰 것은 구슬이 되고 작은 것은 안개 같아서 뒤섞여서 떨어지는데 그 숫자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하였고, 장자 어부(漁夫)에 “공자가 행단(杏亶)에서 어부에게 말하기를, ‘삼가 하풍(下風)에서 기다리오니 해타(咳唾)의 말씀을 듣게 해 주시어 저에게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하였다. 뒷날에는 해타성주(咳唾成珠)라는 성어(成語)가 되어, 타인의 언어(言語)나 문장(文章)을 찬미하는 말로 쓰였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 고사를 섞어서, 마치 마고 선녀의 기침을 기다려 단사를 줍듯이, 이정직이 써 주는 시문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뜻으로 사용한 듯하다.

862)그들의……주었다네:후한의 고사(高士) 엄광(嚴光)에게 오랜 벗이었던 사도(司徒) 후패(侯覇)가 엄광을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게 할 요량으로 편지를 써서 후자도(侯子道)를 보내 초청하였는데, 엄광이 응하지 않자 후자도가 답장을 요구하였다. 엄광이 말하기를, “내 손이 지금 글씨를 쓸 수 없으니 입으로 불러 주겠다.” 하고는 간단하게 불러 주었다. 후자도가, 너무 짧으니 좀더 내용을 채워 달라고 하니, 엄광이 말하기를, “채소를 사면서 더 달라고 하는구나.[買菜乎 求益也]” 하였다. 이 이야기는 후한서83 엄광열전(嚴光列傳), 고사전(髙士傳) 권하(卷下) 엄광(嚴光), 사문유취, 자사정화 등에 실려 있다. ‘매채구익(買菜求益)’은 하찮은 이익을 계교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이정직이 엄광처럼 고고하게 굴지 않고 사람들의 그러한 요구에 흔쾌히 응해 주었다는 뜻인 듯하다.

863)은둔하여:원문의 ‘화광(和光)’은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준말로,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세속에 묻혀 사는 은둔 생활을 뜻한다.

864) 만물의……아니라네:장자 전자방(田子方)에 나온다. 공자가 노담(老聃)을 만나서 “선생의 모습은 마치 고목이 서 있는 것과 같아서 만물을 잊고 인간 세계를 떠나서 홀로 우뚝 서 있는 듯하였습니다.” 하니, 노담이 말하기를, “나는 만물의 근원에서 노닐고 있었소.” 하였다. 만물의 근원에서 노닌다는 말은 인간 세계를 초탈하여 천지자연의 상태를 즐긴다는 의미이다. 송나라 육유(陸游)의 추일견회(秋日遣懷)에 “내 바야흐로 사물의 근원에서 노니니, 초연히 형체의 노역을 벗어났다네.[吾方游物初 超然謝形役]” 하였다. 방내(方內)는 인간 세계를 말하며 이것을 벗어난 것을 방외(方外)라 한다.

865)활을……되었다네:주역 해괘(解卦) 상육(上六)에 “공이 새매를 높은 담장 위에서 쏘아 잡으니 이롭지 아니함이 없다.[公用射隼于高墉之上 獲之 无不利]” 하였다. 새매는 소인을 의미하는데, 소인을 제거하니 천하의 우환이 모두 풀렸다는 뜻이다.

866)高:대본에는 ‘亭’으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867)소여록(燒餘錄):석정 이정직(李定稷)의 시집(詩集)이다.

868)두심언(杜審言)의……듯하네:두심언은 당나라 시인인데 그의 손자가 두보(杜甫)이다.

869)어리석음만을 더할 뿐이네:바보 앞에서 꿈 이야기를 하면 바보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오해를 한다는 뜻이다. 말속에 담겨 있는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로 겉 흉내만 내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870)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 무리:황정견을 중심으로 한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시인들을 가리킨다. 두보(杜甫)를 모범으로 삼아 법고(法古)를 중시하는 시풍을 지녔으나 지나치게 기교주의로 흘러 시법의 정수는 터득하지 못하고 기교만 흉내 내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후대의 육유(陸游) 등이 그 시풍에 동의하지 않았다.

871)연석산방고(燕石山房稿):이정직(李定稷)의 시문집(詩文集)이다.

872)구양수(歐陽脩)와 증공(曾鞏):구양수는 북송(北宋)의 문장가로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증공(1019〜1083) 역시 북송의 문장가로 자는 자고(子固)이다. 둘 다 당송팔가에 들었다.

873) 옛것……어렵다네:이정직은 시론(詩論)이 법고(法古)를 중시하는 경향을 지녔다. 매천이 자신과 이정직의 시풍을 비유한 말이다.

874)세상에……없으니:춘추 시대에 말[馬]을 잘 알아보는 구방고(九方皐)가 진(秦)나라 목공(穆公)을 위하여 석 달 만에 좋은 말을 구했는데, 목공이 어떠한 말인지 묻자, ‘암컷이고 털빛이 노란 말[牝而黃]’이라고 하였다. 목공이 사람을 시켜 가 보게 했더니, ‘수컷이고 털빛이 까만 말[牡而驪]’이었다. 구방고를 추천한 백락(伯樂)을 목공이 불러서 책망하기를, “말의 색깔과 암수도 구분할 줄 모르는데, 어찌 말에 대해서 알 수 있겠는가.” 하니, 백락이 말하기를, “구방고가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것이 신보다 훨씬 뛰어난 까닭입니다. 그가 보는 것은 천기(天機)입니다. 그가 본 것은 말의 내면이지 외면이 아닙니다.” 하였다. 말이 도착했는데 보니 과연 천하의 명마였다. 이 내용은 열자 설부(說符)에 나오는데, 고금사문유취, 연감유함, 예문유취 등에도 실려 전한다.

875)미원장(米元章):송나라 서화가 미불(米芾, 1051〜1107)이다. 원장(元章)은 그의 자이다. 그림과 글씨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876)벽골(碧骨) 호수: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를 말한다.

877)안 태사(顔太師):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유명한 서예가였던 안진경(顔眞卿, 709〜785)을 말한다. 노군개국공(魯郡開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안 노공(顔魯公)이라고도 불렸다.

878)오계(浯溪)의……드러내고:중국 호남성에 오계라는 냇물이 있는데 당나라 시인 원결(元結)이 은거해 살던 곳이다. 당나라가 안녹산의 반란을 평정하고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수복한 뒤에 원결이 대당중흥송(大唐中興頌)을 지어 숙종(肅宗)의 공덕을 칭송하고 오계의 석벽(石壁)에 새겼는데, 그 글씨를 안진경이 썼다. 이것을 마애비(磨崖碑)라 하였다.

879)가묘(家廟)의……날았지:안진경이 지은 곽자의가묘비(郭子儀家廟碑)를 가리켜 말한 것인 듯하다.

880)쟁좌첩(爭座帖):안진경의 서첩(書帖)이다. 쟁좌위고(爭座位稿)라고도 한다.

881)창힐(倉頡):중국 고대 황제(黃帝) 때의 사관(史官)으로서 한자를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882)얼음과……두었으니:순자 권학(勸學)에 “청색은 쪽에서 취하나 쪽보다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언 것이지만 물보다 차갑다.[靑取之於藍 而靑於藍 冰水爲之 而寒於水]”라고 하였다. 제자가 스승보다 더 훌륭한 학문의 성취를 이루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이정직이 안진경의 서체를 배워서 안진경보다 뛰어난 성취를 이룰 것이라는 말로 쓰인 듯하다.

883)상황에……살아왔다네:선가(禪家)의 화두(話頭)에 봉장작희(逢場作戱)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광대가 적합한 장소를 만나면 곧 무대를 열고 기구를 꺼내서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 연기를 펼친다는 뜻으로, 후세에는 세상을 희롱하며 유희로 살아가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완세불공(玩世不恭), 유희인간(遊戲人間) 등과 같은 의미이다.

884)황지(潢池):흙탕물로 이루어진 작은 연못이라는 뜻인데, 주로 반란 세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87쪽 주229 참조. 여기서는 동학농민봉기를 뜻하는 말이다.

885)사마휘(司馬徽)가……같았지:후한(後漢)의 사마휘는 자가 덕조(德操)인데, 사람을 잘 알아보았으므로 ‘수경(水鏡)’이라고 일컬어졌다. 방공(龐公)은 후한의 은사(隱士) 방덕공(龐德公)을 말한다.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하고 녹문산(鹿門山)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사마휘가 일찍이 방덕공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 마침 방덕공이 선친의 묘소에 성묘를 가고 집에 없자, 사마휘가 마치 집주인처럼 방덕공의 처자들을 지휘하여 다른 손님들을 맞았다고 한다. 북송 소식(蘇軾)의 한식일답이공택삼절차운(寒食日答李公擇三絶次韻) 시에 “한식에 덕공이 성묘를 갔는데, 돌아오니 누가 주인인지 손님인지.[寒食德公方上冢 歸來誰主復誰賓]”라는 구절이 있다.

886)누가……백아(伯牙)인가:춘추 시대에 초나라 사람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그의 친구인 종자기(鍾子期)가 그 소리를 듣고 백아의 의중을 알아냈다고 한다.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는 서로의 심중을 알아주는 절친한 친구 사이를 비유할 때에 주로 인용한다. 71쪽 주181 참조.

887)한방에……테지:왕발(王勃)의 두소부지임촉주(杜少府之任蜀州)에 “세상에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땅끝 외진 곳도 이웃집과 같으리.[海內存知己 天涯若比鄰]” 하였는데, 이 내용을 응용하여 매천이, 자신과 이정직이 동실(同室)에 있는데도 타인들의 시각으로는 천애(天涯)에 떨어져 있는 것처럼 여길 것이라고 한 것이다.

888)지선(地仙):육신을 유지한 채 인간 세상의 자연에서 노니는 신선을 가리킨다. 130쪽 주321 참조.

889)좋은 글귀:당나라 두보(杜甫)의 강상치수여해세료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 “나는 좋은 구절을 좋아하는 지나친 성미가 있어서, 남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말이 아니면 죽을 때까지도 마지아니하네. 늙어 갈수록 시편은 온통 부질없는 흥취일 뿐이니 봄날의 꽃과 새들은 너무 근심하지 말거라.[爲人性癖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 老去詩篇渾漫興 春來花鳥莫深愁]” 하였다. 시구(詩句)가 절묘하여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것을 경인구(驚人句)라고 한다.

890)파천황(破天荒):아직까지 아무도 못한 일을 처음으로 해내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원문의 벽락(碧落)은 ‘하늘’이라는 뜻이므로 파벽락(破碧落)은 파천(破天)과 같은 말이며, 파천은 파천황의 준말이다. 

891)집으로……했더니: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금성이 좋다고는 하나 집으로 일찍 돌아가는 것만은 못하리.[錦城雖云樂 不如早還家]” 하였다. 금성은 중국 성도(成都)에 있는 금관성(錦官城)이다. 매천이 즐겨 읽었던 육유(陸游)의 시에는 ‘환가(還家)’라는 시어가 매우 많이 쓰였다.

892)해약(海若)을 못 만났구나:굴원(屈原)의 원유(遠遊)에 “상령을 시켜 비파를 타게 함이여, 해약을 부리고 풍이를 춤추게 하네.[使湘靈鼓瑟兮 令海若舞馮夷]” 하였고, 장자 추수(秋水)에는 황하의 신(神) 하백(河伯)이 북해약(北海若)에게 대도(大道)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 ‘해약’ 또는 ‘북해약’은 바다의 신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아직 큰 도를 듣지 못해서 이정직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893) 여뀌다리: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에 있다.

894)다섯 가축:소, 말, 돼지, 양, 나귀 등 다섯 종류 동물의 암컷을 말한다. 공총자(孔叢子) 진사의(陳士義)에 “의돈(猗頓)은 노나라의 곤궁한 선비였다. 농사를 지어도 항상 굶주렸고 누에를 길러도 항상 옷이 부족했다. 도(陶)의 주공(朱公)이 부자라는 말을 듣고 찾아가 부자가 되는 방법을 물었다. 주공이, ‘그대가 속히 부자가 되고자 한다면 다섯 모축(母畜)을 길러야 하네.’ 하였다. 이에 가축을 길러 큰 부자가 되었다.” 하였다.

895) 천유(天游):장자 외물(外物)에 나오는 말로, 마음에 구애되는 바가 전혀 없이 천지자연 속에서 노니는 것을 말한다.

896)옥보고(玉寶高)의……않았고:지리산에 신선이 많아서 거문고의 연주 기법이 계속 전수되었다는 뜻인 듯하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추강집(秋江集) 권6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때에 옥보고라는 승려가 현금(玄琴)을 메고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선인(仙人)이 되어 50여 년 동안 금(琴)으로 마음을 수양하였다고 한다. ‘금’은 거문고와는 다른 악기이지만 현금의 종류로는 일반적으로 거문고가 많이 알려졌으므로 ‘거문고’라고 번역하였다.

897)최고운(崔孤雲)의……새로웠다:지리산 쌍계사 입구의 암석에 새겨져 있는 ‘쌍계(雙溪)’와 ‘석문(石門)’이라는 신라 최치원(崔致遠)의 글씨를 말하는 듯하다. 고운은 최치원의 자이다.

898)나루를 묻는다:진나라 도잠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무릉(武陵)에 사는 어떤 어부가 도화원(桃花源)에 갔다가 나와서 그 고을 태수에게 말했는데 태수가 사람을 시켜서 찾아보게 하였으나 길을 찾지 못하였다. 고사(高士) 유자기(劉子驥)라는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직접 찾아 나섰다가 결국은 찾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그 뒤로는 나루를 묻는 자[問津者]가 없었다.” 하였다. 여기서는 도화원에 들어갈 분수를 지니지 못한 속세 인간들이 이곳에 와서 도화원 가는 길을 찾는다는 뜻이다.

899)塵:대본에는 ‘鹿’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에 의거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900)묵적(墨翟)도……돌렸지:묵적은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으로 천하를 분주히 돌아다녔는데 읍호(邑號)가 조가(朝歌)인 고을에 이르러서는 수레를 돌렸다고 한다. 조가(朝歌)는 ‘아침 노래’라는 뜻이다. 묵적은 검소를 숭상하고 음악을 싫어했는데 그 고을의 명칭이 ‘때에 맞지 않게 아침에 노래한다’는 뜻이었으므로 그것이 싫어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고사는 회남자, 사기, 한서 등에 실려 전한다. 매천이 어떠한 의미로 인용했는지는 미상이다.

901)어깨 치며:진(晉)나라 곽박(郭璞, 276〜324)의 유선시(遊仙詩)에 “왼손으로는 부구의 소매를 당기고 오른손으로는 홍애의 어깨를 치네. 하루살이에게 물어본들 어찌 거북과 학의 나이를 알겠는가.[左挹浮丘袖 右拍洪崖肩 借問蜉蝣輩 寧知龜鶴年]” 하였다. 부구와 홍애는 모두 옛 선인(仙人)의 이름이다. 여기서는 옛 신선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정직과 함께 속세를 잊고 살고 싶다는 뜻을 표현한 것인 듯하다.

902)남악(南岳):국가의 대표적인 명산 다섯 개를 오악(五岳)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시대에 따라 그 위치가 차이가 있었다. 여기서는 지리산을 말한 것이다.

903)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18501927. 본관은 화개(花開)이고 자는 우림(于霖)이며 호는 창강이다. 대대로 개성에 살았다. 17세에 초시(初試)에 입격했다. 34세 때인 1883년(고종20)에 김윤식(金允植)을 통해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청나라 장건(張騫)과 교유하게 되었다. 42세 때인 1891년에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이후 편사국 주사(編史局主事), 중추원 서기관(中樞院書記官) 등을 지냈다. 1905년(광무9)에 청나라로 망명하여, 장건의 주선으로 한림묵인서국(翰林墨印書局)이라는 출판사에서 근무하였다. 이곳에서 매천집을 비롯한 우리나라 문인들의 문집을 많이 간행하였다.

904)세상……보았지:한나라 학자 양웅(揚雄, 기원전 53〜18)의 자가 자운(子雲)이다. 양웅은 학문이 깊고 기이한 글자[奇字]를 잘 알았는데도 벼슬은 궁정(宮庭)에서 창을 잡는[執戟] 낭관(郞官)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태현경(太玄經), 법언(法言)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성씨는 고전 자료에 ‘楊’과 ‘揚’이 섞여 나온다.

905)신숭(神崧)에……갖추었다네:신숭은 개성(開城)의 진산(鎭山)인 송악산(松嶽山)의 다른 이름이다. 곡령(鵠嶺), 숭산(崧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는 김택영이 봉황과 같은 자질을 갖추고 개성에 살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906)대나무……없었지:봉황은 오동나무에 깃들며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사는 새인데, 그 먹이인 대나무 열매가 없었다는 것이니, 김택영이 개성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음을 비유한 것이다.

907)부러워라……가득했으니:시경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네, 저 높은 언덕에서. 오동이 자라네, 해 뜨는 동쪽에서.[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 하였다. 주나라 언덕의 오동나무는, 봉황으로 비유된 창강 김택영이 생활할 수 있는 청나라 지역을 의미한다. 김택영은 청나라를 부러워하다가 1905년(광무9)에 망명하였다.

908)단농(丹農) 이건초(李建初):이건초는 호가 단농이고 자가 태린(泰鄰)이다.

909) 산림(山林)에……않았네:산림에 은둔하여 자기 몸만 고결하게 지니고 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910)홀로……불었지:남명(南明)은 명나라가 멸망한 뒤 명나라 왕실의 일족이 화중(華中)과 화남(華南)에 세운 지방 정권이다. 수당집(修堂集) 이동포화첩중모서(李東浦畫帖重摹序))에 의하면, 이태린의 부친인 어당공(齬堂公)이 의종(毅宗) 17년(1644) 이후의 남명의 일사를 채집하여 편년체로 엮어 정강(正綱)이라 하였는데, 그 뒤 아들 이태린이 보완하였다고 한다. 명나라 마지막 왕인 영명왕(永明王)은 계림(桂林)으로 도망쳐 숨어 살다가 1662년에 살해되어 남명이 멸망하였다.  

911)원안(袁安)의……보네:한나라 때 원안의 고사이다. 74쪽 주193 참조. 여기서는 단농 이건초도 주위의 도움도 못 받고 곤궁하게 살면서 원안처럼 눈이 온 날에 나와 보지도 않고 절조를 지키며 살았다는 의미이다.

912)하정(荷亭) 여규형(呂圭亨):1848〜1921.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자는 사원(士元)이며 하정은 그의 호이다. 1882년(고종1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지만, 잦은 유배로 집이 몹시 가난하여 이틀에 한 번 불을 때어 밥을 지을 정도였다고 한다. 술을 좋아하였고, 시문에 뛰어났으며 음악, 수학, 천문 등에 두루 능통하였다. 시, 서, 문을 비롯하여 사(射), 금(琴), 기(棋), 주(酒)를 잘하였으므로 칠절(七絶)이라 일컬어졌다고 한다. 저서로 하정집(荷亭集)이 있다.

913) 양강(楊江):경기도 양평 근처의 남한강을 말한다.

914)종남산(終南山):당나라 수도 장안(長安) 앞에 있는 산인데, 남산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뜻을 취하여, 우리나라의 시문에서는 남산을 종남산이라 하기도 하였다.

915)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1858〜1936.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대경(大卿)이며 호는 무정이다. 강위(姜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889년(고종26) 알성시에 급제하였다. 1896년(건양1)에 팔월역변(八月逆變)과 시월무옥(十月誣獄)에 연관되어 전라도 진도군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었다가 1907년(융희1) 순종이 즉위한 뒤 사면받았다. 그 뒤 규장각 부제학, 조선사편수회 위원 등을 지내고,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 강사가 되었으며, 1929년에 경학원(經學院)의 대제학이 되어 명륜학원(明倫學院)의 총재를 겸임하였다.

916)파주(播州)와……없거니와:유하동집(柳河東集) 부록(附錄)에 의하면, 당나라 때의 문장가 유우석과 유종원이 각각 파주와 유주(柳州)로 귀양을 가게 되자 유종원이, 노모(老母)가 있는 유우석을 가까운 유주로 보내고 자신이 대신 먼 파주로 가겠다고 주문(奏文)을 올렸다고 한다. 104쪽 주272 참조. 정만조도 유우석처럼 노모를 두고 진도군 금갑도로 귀양을 간 것으로 보인다.

917)경주(瓊州)와……아득했던가:송나라 소식(蘇軾)이 경주 별가(瓊州別駕)로 좌천되었을 때에 경주의 담이(儋耳)라는 고을에서 지냈는데 같은 시기에 그의 아우인 묘군(卯君) 소철(蘇轍)이 뇌주(雷州)에 귀양 가 있으면서 형제간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위로했다고 한다. 정만조의 아우 정병조(鄭丙朝, 1863〜1945)도 제주도로 유배되고 위도(蝟島)로 이배된 적이 있으므로, 이들을 소식 형제에 비유한 것이다.

918)뱃사람들이……곳:옛날 중국 광동(廣東), 복건(福建) 지역의 앞바다에는 통치자들의 박해를 받던 사람들이 흩어져 살았는데, 이들은 육지로 올라오지도 못하고 호적에 편입되지도 못하여, 배를 집으로 삼아 생활하였다고 한다. 이들을 단호(蜑戶)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정만조 등이 귀양 간 바닷가 지역을 말한다.

919)벽파진(碧波津):전라남도 진도군에 있는 나루이다.

920)두약(杜若):향초이다. 굴원(屈原)의 상부인(湘夫人)에 “물가에서 두약을 캐니 은자에게 주려는 것이네.[搴汀洲兮杜若 將以遺兮遠者]” 하였다.

921)그대를……만드시리:시경 민로(民勞)에 “왕께서 너를 보옥으로 만들고자 하시니 이 때문에 내가 곧은 말로 너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王欲玉女 是用大諫]” 하였다. 군주가 장차 너를 보배로운 인물로 만들어서 아끼고 존중할 것이라는 뜻이다.

922)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이건창(李建昌)의 아우이다. 자는 보경(保卿)이고 경재는 그의 호이다.

923)죽은……있네:죽은 자는 이건창을 가리키고 산 자는 이건승을 가리킨다.

924)혜강(嵇康)과……했던가:진서(晉書)49 혜강열전(嵇康列傳)에, “여안(呂安)이 혜강의 고상한 풍도를 존경하여 매양 그리울 때마다 천리를 멀다 아니하고 수레를 타고 찾아갔다.” 하였다. 이 내용은 세설신어 간오(簡倣), 고금사문유취, 연감유함, 태평광기 등에 전재되어 전한다.

925)편지 전하는 잉어:문선, 고문진보 등에 실려 있는 작자 미상의 악부(樂府)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 “먼 곳에서 온 손님이 잉어 두 마리를 주었네. 그 잉어를 삶게 했더니 뱃속에서 편지가 나왔네.[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兒烹鯉魚 中有尺素書]” 하였다. 잉어는 편지 또는 편지를 전하는 것을 비유할 때에 사용하는 물고기 이름이다.

926)남사(南史) 홍건(洪楗):본관은 남양(南陽)이다.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승우(李勝宇)를 도와 동학군을 토벌하는 데에 앞장섰다.

927)만고에……사건:장추궁(長秋宮)은 한나라의 궁전 이름인데 황후의 거처로 쓰였으므로, 후세에는 황후나 왕비 또는 그 거처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을미사변에 명성황후가 시해된 사건을 가리켜 말한 것인 듯하다.

928)인재를……년인데:시경 청청자아(菁菁者莪)에 “무럭무럭 쑥이 언덕 위에 자랐구나.[菁菁者莪 在彼中阿]” 하였고, 그 모서(毛序)에 “청청자아는 인재를 육성함을 즐거워한 시이다. 군자가 인재를 잘 기르면 천하가 그것을 즐거워한다.” 하였다. 원문의 청아(菁莪)는 인재를 육성한다는 뜻으로 쓰이니, 조선이 인재를 육성해 온 지가 5백 년이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929)장군이……가니:양 무제(梁武帝)가 즉위하기 전에 순제(荀濟)는 무제와 오랜 친구였는데, 무제가 큰 뜻을 품은 것을 알고도 순제는 자기의 재기(才氣)를 자부하며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정변이 일어난다면 나는 방패 손잡이에 먹을 갈아서 격문을 띄워 그를 성토할 능력이 있다.” 하였다. 이는 짧은 시간에 격문을 지어서 동조자들을 동원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순제는 이 때문에 무제가 즉위한 뒤에도 무제에게 등용되지 못했으며 결국은 죽음을 당하였다. 이 내용은 자치통감 권160 양기(梁紀)에 실려 있으며, 연감유함, 패문운부 등에도 전한다. 여기서는 매천이 홍건의 격문(檄文) 솜씨를 칭송하는 뜻으로 인용하였다.

930)판삽(版鍤)을 잡았었네:전국 시대 제(齊)나라 명장 전단(田單)은 연(燕)나라 장군 악의(樂毅)의 공격을 즉묵(卽墨)에서 맞서 싸웠다. 그는 앉아 있을 때에는 삼태기를 짰고 서 있을 때에는 가래를 들고 몸소 병사들과 함께 노동을 하였다. 처첩(妻妾)들을 항오(行伍)에 편입시켜 병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먹이게 한 뒤에,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노약자들로 하여금 거짓으로 항복을 하는 듯이 하여, 적군을 속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는 홍건이 병사들과 함께 몸소 축성 등의 일을 했다는 말인 듯하다.

931)송의(宋義)의……전에:전국 시대 초(楚)나라 회왕(懷王)이 송의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항우(項羽)를 차장(次將)으로 삼아,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는 조(趙)나라 거록(鉅鹿)을 구원하게 하였다. 출정을 한 뒤에 송의가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제(齊)나라와 뒷거래를 하며 술잔치를 열고 놀자 항우가 이에 불만을 품고 송의를 죽이고 스스로 상장군이 되어 승리를 거두었다. 한서 권31 항적전(項籍傳), 사기 권7 항우본기(項羽本紀) 등에 실려 있다. 여기서는 당시의 홍주 목사 이승우와의 관계를 견주어 말한 것인 듯하다. 당시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승우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관망하고 있었는데, 영장(營將) 홍건, 전 승지 이설(李偰) 등이 이승우를 협박하여, 단발령을 거부하기로 의결하였다. 이들은 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이승우는 석방되고 이설, 홍건 등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뒤에 이승우는 의병들을 감금하고 자신의 처지를 해명하는 상소를 올린 뒤에 관내의 관리들을 강제로 삭발하였다. 매천야록에서는 이승우를 몹시 부정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932)도리어……넣었네: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등에 의하면, 춘추 시대 노(魯)나라 정공(定公) 13년에, 진(晉)나라에서 순인(荀寅)과 사길역(士吉射)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앙(趙鞅)이 진양(晉陽)의 군대를 취하여, 군주 측근의 악인(惡人)을 축출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그들을 축출하였다. 진양은 조앙이 윤탁(尹鐸)을 시켜 다스리게 하면서 세금을 견감하고 선정을 베풀게 하여 보장지지(保障之地)로 만든 곳으로, 튼튼한 국가의 기반이 되는 지역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진양의 군대[晉陽之甲]’는, 후세에는 지방의 수령이 조정에 불만을 품고 거병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고, 지방의 수령이 조정의 명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악인을 공격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어느 쪽의 뜻을 취하여 썼는지 자세하지 않은데, 우선 후자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933)구묘(九廟)엔……되었으리:구묘는 천자의 종묘이고, 체제사(禘祭祀)는 천자가 지내는 제사이다. 홍건의 거사(擧事)가 없었다면 나라가 망하게 되어 군주가 종묘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934)섶……잊히고:한서 권68 곽광전(霍光傳)에 “아궁이를 돌리고 섶을 옮겨 놓으라고 한 자에게는 은택이 없고, 머리를 그슬리고 이마를 데인 자를 윗자리에 앉혔다.[曲突徙薪亡恩澤 燋頭爛額爲上客]” 하였다. 아궁이와 섶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화재의 위험이 있음을 안 어떤 손님이 주인에게 “아궁이 위치를 돌리고 섶을 멀리 옮겨  놓으라.”라고 충고했는데도, 주인이 말을 듣지 않다가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불을 끈 뒤에는, 허겁지겁 뛰어다니며 불을 끄느라 애를 쓴 자들에게 술과 고기를 마련해 대접하면서, 이전에 미리 예방할 것을 충고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대접이 없었다는 것이다.

935)가을바람에……말았구나:가을이 되어 날씨가 서늘해지면 부채는 불필요한 물건이 되어 버려진다는 말인데, 대개 여자가 늙어 총애를 잃거나 신하가 군주의 총애를 잃는 것을 비유할 때에 이 말을 쓴다. 한나라 성제(成帝)의 후궁(後宮) 반첩여(班婕妤)가 성제의 총애를 차지하고 있다가 뒤에 조비연(趙飛燕)으로 인해 총애를 잃자, 자신을 부채[紈扇]에 비유하여 원가행(怨歌行)을 지어 불렀는데, 그 노래에, “항상 두려운 건 가을이 와서, 서늘함이 더위를 빼앗는 것이었지. 상자 속에 그대로 버려져서, 은총이 중간에 끊어졌구나.[常恐秋節至 凉風奪炎熱 棄捐篋笥中 恩情中道絶]” 하였다.

936)금복고(金僕姑):춘추좌씨전 장공 11년에 “승구(乘丘)의 전쟁 때에 장공(莊公)이 금복고로 송나라 대부 남궁장만(南宮長萬)을 쏘아 맞혔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금복고는 화살 이름이다.” 하였다. 이후 좋은 화살을 가리켜 말할 때에 쓰였다.

937)제비턱:후한(後漢) 때에 어떤 관상쟁이가 반초(班超)의 관상을 보고 “그대의 관상은 제비의 턱에 범의 머리라 날아서 고기를 먹는 상이니, 이는 만리후에 봉해질 상이다.[燕頷虎頭 飛而食肉 此萬里侯相也]” 하였는데, 과연 반초는 서역(西域)을 평정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워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이 내용은 후한서 권47 반초열전(班超列傳)에 실려 있으며, 태평어람, 연감유함, 고금사문유취 등에 전한다. 여기서는 홍건의 무예가 반초에 견줄 만하였음을 말한 것인 듯하다.

938)취당(取堂) 이원긍(李源兢):1849〜?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공리(公履)이며, 취당은 그의 호이다. 1891년(고종28)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북청 부사(北靑府使) 등을 지냈고,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누차 투옥되었다.

939)아침 운기(雲氣)가 흩어졌네:시경 체동(蝃蝀)에 “서쪽 하늘에 아침 무지개 뜨니, 오던 비가 끊어지네.[朝隮于西 崇朝其雨]” 하였는데, 주희의 주석에 “비가 올 때에 무지개가 뜨면 비가 아침나절에만 오고 그치니, 대개 음란하고 사특한 기운이 음양의 화합을 해치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후인(侯人)에 “울창하고 무성해라, 남산에 아침 운기 올라가네.[薈兮蔚兮 南山朝隮]” 하였는데, 주희의 주석에 “조제(朝隮)는 운기가 솟아오른다는 말이다. 초목이 울창한 남산에 아침 운기가 솟아오른다는 것은 소인들이 많아서 그 기염이 성대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여기서 아침 운기가 흩어진다고 한 것은 사특한 소인들이 흩어진다는 뜻인 듯하다.

940)머리를……암송하며:굴원의 구가(九歌)에 “너와 함께 함지에서 머리 감고, 양지바른 언덕에서 네 머리를 말리리라.[與汝沐兮咸池 晞汝髮兮陽之阿]” 하였고, 장평자(張平子)의 사현부(思玄賦)에 “맑은 물에 머리 감고, 아침 햇살에 머리를 말리리라.[旦余沐於淸源兮 晞余髮於朝陽]” 하였다.

941)겸산(兼山) 백낙륜(白樂倫):김택영이 지은 유시당시고서(有是堂詩稿序)에 의하면, 백낙륜은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벼슬은 병조 참판을 지냈으며 유시당시고(有是堂詩稿) 3책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고 하였다.

942)전당시(全唐詩):중국의 당시(唐詩)를 모은 책이다. 1705년(청나라 강희44)에서 1706년에 이르기까지 칙명(勅命)에 따라 조인(曹寅), 팽정구(彭定求) 등 10여 명이 편교(編校)하였다. 모두 900권 120책이며 수록한 작자는 2200여 명이고 시는 4만 8900여 수에 이른다.

943)용천검(龍泉劍):춘추 시대 진(晉)나라에 있었다고 하는 보검의 이름이다.

944)천산(天山)의 화살을 더듬었지:당나라 장군 설인귀(薛仁貴)가 천산에서 돌궐(突厥)과 전투를 할 때에 화살 세 발을 쏘아서 적군 셋을 명중시켜 죽이니 적군이 모두 기가 꺾여 항복하였다. 군인들이 회군하면서 노래 부르기를, “장군이 화살 세 발로 천산을 평정하니, 장사들이 노래하며 관문으로 들어가네.[將軍三箭定天山 壯士長歌入漢關]”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천산의 화살을 더듬었다’ 함은, 백낙륜이 나라의 혼란을 평정할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인 듯하다.

945)연주(燕州)와 계주(薊州)의 건아:지금의 북경과 그 주변 지역을 말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기질이 강인하고 용맹하다고 일컬어진다. 여기서는 용맹한 병사들을 말한다.

946)깨진 벼루만 희롱하네:송나라 소식(蘇軾)의 차운공의보구한이이심우(次韻孔毅甫久旱已而甚雨)에 “나는 본래 논밭 없어 깨진 벼루로 먹고 살았는데, 요즈음엔 벼루도 말라 갈아도 먹물 안 나오네.[我生無田食破硯 爾來硯枯磨不出]” 하였다. ‘깨진 벼루로 먹고 산다’라는 말은, 문필 생활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여기서 ‘깨진 벼루만 희롱한다’라는 말은 그저 글이나 지으면서 지냈다는 뜻으로 쓴 것인 듯하다.

947) 백 번을 단련하여:백 번을 담금질한 강철을 백련강(百鍊剛) 또는 백련정(百鍊精)이라 하였다.

948)찬란해라……꺼내니:송나라 시인 황정견(黃庭堅)의 증진소의(贈秦少儀)에 “소의가 소매에 시를 넣고 왔는데, 조개에서 꺼낸 진주처럼 그 빛이 영롱하네.[少儀袖詩來 剖蚌珠的皪]” 하였다.

949)종정(鐘鼎):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공신들의 이름을 새겨 넣던 종(鐘)과 솥[鼎]을 말하는데, 국가 공신이 누리는 부귀를 의미한다. 또 하나는 종명정식(鐘鳴鼎食)의 준말이다. 사람이 많아서 밥 먹을 시간이 되면 종을 쳐서 모이게 하고, 밥을 먹을 때에는 솥을 늘어놓고 먹는다는 말인데, 부귀한 집안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뜻한다.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마을에 들어찬 집들은 종을 치고 솥을 늘어놓고 먹은 집들이고.[閭閻撲地 鍾鳴鼎食之家]” 하였다.

950)회당(晦堂) 이성렬(李聖烈):1866〜? 본관은 예안(禮安)이고 호는 퇴암(退菴)이다. 1885년(고종22)에 관학유생 응제(應製)에 입격하여 그해에 연기 현감(燕岐縣監)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에 무안 현감(務安縣監), 대구 판관(大邱判官) 등에 임명되었다. 1888년 무자년 별시(別試)에 급제하였다. 검교직각(檢校直閣), 경상북도 관찰사, 전라북도 관찰사,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을 역임하였다. 고향인 온양(溫陽) 외암촌에서 왜인들에게 살해된 이남규(李南珪)의 시신을 거두어 염습을 하였다.

951)스물세……격파하였지:이성렬은 1888년 무자년 별시에 병과(丙科) 27위로 급제하였다.

952)초심을 노래하며:진(晉)나라 때에 손작(孫綽, 314〜371)이 고양(高陽), 허순(許詢) 등과 함께 고상한 뜻을 품고 회계산(會稽山)에 은거하여 10여 년간을 산수를 유람하며 살면서 수초부(遂初賦)를 지었는데, 수초(遂初)란 벼슬을 사직하고 은거하여 그 초심을 이루어 즐겁다는 의미이다.

953)아침엔……찍네:당나라 고변(高駢)의 보허사(步虛詞)에 “동구 문은 깊게 잠겼고 푸른 창은 차가운데, 이슬로 주사 갈아 주역에 점을 찍네.[洞門深鎖碧窓寒 滴露硏朱點周易]” 하였으며, 송나라 육유(陸游)의 폐문(閉門)에 “주사를 갈아 주역에 점을 찍고, 술을 마시며 이소를 읽는다.[硏朱點周易 飮酒讀離騷]” 하였고 또 북재(北齋)에 “주사를 갈아 아침엔 주역에 점을 찍고, 황벽 찧어 밤에는 경서 책장에 칠을 하네.[硏朱朝點易 搗蘗夜潢經]” 하였다. ‘주역에 점을 찍는다’는 것은 붉은 주사 먹물로 비점과 관주를 치면서 주역을 읽는다는 뜻인 듯하다.

954)금비(金篦):금으로 만든 빗으로, 고대 인도(印度)에서 의사가 맹인의 안막(眼膜)을 제거해 줄 때 사용하던 도구였다. 후세에는 불가(佛家)에서 중생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무지(無智)의 막(膜)을 제거해 준다는 뜻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955)칠실(漆室)의 근심:춘추 시대 노(魯)나라 칠실이라는 고을에서 혼기를 놓치고 시집을 못 간 어떤 처녀가 기둥에 기대어 흐느끼고 있자 이웃의 아낙이 묻기를, “시집을 가고 싶어서 그러는가?” 하니, 처녀가 답하기를, “아닙니다. 노나라 군주는 늙었고 태자는 어리니, 걱정이 되어서 그럽니다.” 하였다. 아낙이 말하기를, “그런 일은 대부(大夫)가 할 걱정이네.” 하니, 처녀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노나라에 난리가 나서 군신과 부자가 치욕을 당하면 부녀들이 갈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 내용은 고열녀전(古列女傳) 권3 인지전(仁智傳) 노칠실녀(魯漆室女), 후한서 권94 노식열전(盧植列傳), 고금사문유취, 운부군옥, 연감유함, 패문운부 등에 전한다. 한미한 신분으로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956)북산(北山)의 노역:시경 북산에 “저 북산에 올라 기 나물을 뜯는구나. 건장한 군사들이 조석으로 종사하네. 왕사를 소홀히 할 수 없는지라 부모님을 근심케 하네.[陟彼北山 言采其杞 偕偕士子 朝夕從事 王事靡盬 憂我父母]” 하였다. 시경에서의 본래 뜻은, 부역이 고르지 못하여 자기들만 고생을 시키므로 부모님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여기서는 군주에게 등용되어 나라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을 비유한 말로 쓴 것인 듯하다.

957)창주(滄洲):물가에 있는 은사(隱士)의 거처를 비유할 때에 쓰는 말이다.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 완적(阮籍, 210〜263)의 위정충권진왕전(爲鄭冲勸晉王牋)에 “창주에 가서 지백에게 인사하고 기산에 올라 허유에게 읍을 한다.[臨滄洲而謝支伯 登箕山以揖許由]” 하였다.

958)호산(瓠山) 박문호(朴文鎬):1846〜1918. 본관은 영해(寧海)이고 자는 경모(景模)이며 호는 호산(壺山), 호산, 풍산(楓山), 노초(老樵) 등이다. 논어집주상설(論語集註詳說), 맹자집주상설 등 경학 연구서를 많이 남겼다. 보은에 풍림정사(楓林精舍)를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고, 주희(朱熹),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 한원진(韓元震)을 봉안하여 제향을 올렸다.

959)엎어지는 물살:원문의 퇴파(頹波)는 거세게 아래로 흘러내려 가는 물살을 말하는데, 무너져 가는 세상의 풍속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황하의 중류에 거센 물결을 막고 있는 지주(砥柱)라는 바위산이 있는데, 이 지주와 함께 ‘퇴파지주(頹波砥柱)’라고 쓰이기도 한다.

960)이택당(麗澤堂):이건창(李建昌)의 명미당집(明美堂集)에 실려 있는 이택당기(麗澤堂記)에 의하면, 호산 박문호는 나이 마흔에 고향으로 돌아가 사서(四書)를 연구하였으며, 찾아오는 제자들이 늘어나자 이택당을 지어서 그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961)글을 읽으니:예기 학기(學記)에 “오늘날 가르치는 자들은 그 글자만 보고 웅얼거릴 뿐이다.[今之敎者 呻其佔畢]” 하였다. 신(呻)은 음(吟)의 뜻이고 점(佔)은 시(視)의 뜻이고 필(畢)은 간(簡)의 뜻이니, 오늘날 경서를 가르치는 스승들은 경서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단지 간편(簡片)에 있는 글자만 보고 송독(誦讀)하여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말이다. 대개 ‘점필’은 글의 내용은 모른 채 입으로만 송독한다는 다소 부정적인 뜻인데, 후세에는 글을 송독하는 것을 범칭하는 말로 쓰였다. 여기서는 ‘송독’의 뜻으로 쓰였다.

962)경내(境內)에……넘쳤지:논어 양화에 “공자가 무성(武城)에 가서 현가(弦歌) 소리를 듣고는, 웃으며 말하기를,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칼을 쓰는가.’ 하니, 무성의 수령으로 있던 자유(子游)가 ‘전에 제가 선생님께 들었더니,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셨습니다.’ 하였다.” 하였다. 작은 고을에서 현가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수령이 선정을 베풀어 잘 다스리고 있음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호산 박문호의 교육으로 회인현(懷仁縣)이 문교(文敎)가 이루어졌다는 뜻인 듯하다.

963)현인 찾는 수레:원문의 윤백(輪帛)은 포륜속백(蒲輪束帛)의 준말이다. 포륜은 부들로 수레바퀴를 감싸서 푹신푹신하게 만든 것으로, 현자(賢者)를 초빙할 때에 사용하는 수레이며, 속백은 비단 묶음으로, 현자를 초빙하는 예물이다.

964)중장통(仲長統):후한(後漢) 때의 명사(名士)이다. 그의 낙지론(樂志論)에 “남풍의 고아한 곡조를 타고 청상의 오묘한 가락을 연주한다.[彈南風之雅操 發淸商之妙曲]” 하였다.

965)갈옷……품었다:노자 제70장에 “성인은 겉에는 갈옷을 입고 속에는 보옥을 품는다.[聖人被褐懷玉]” 하였다. 여기서는 대개 선비들이 가난하게 살면서도 속으로는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뜻으로 인용한 것인 듯하다.

966)한 대그릇……때에는:논어 옹야에 “어질구나, 안회는. 한 대그릇 밥과 한 바가지 물[一簞食一瓢飮]로 누추한 마을에서 지내는구나. 사람들은 그 근심을 감당치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아니하니, 어질구나, 안회는.” 하였고, 논어 선진에 “안회는 거의 도에 가깝다. 자주 쌀독이 비었다.[回也 其庶乎 屢空]” 하였다. 단표누공(簞瓢屢空)은 안빈낙도하는 생활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967)예원진(倪元鎭):원말 명초의 산수화가 예찬(倪瓚, 1301〜1374)이다. 자가 원진(元鎭)이다. 성품이 고결함을 좋아하였으며, 천하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는 가산을 다 팔고 은둔하여 산천을 유람하며 살았다고 한다.

968)황곡(黃鵠):한 번 날면 천 리를 날아간다는 새이다. 황곡은 예원진을 비유한 것이고 또 오한응을 비유한 것이다.

969)남파(南坡) 성혜영(成蕙永):생몰년 미상이다. 자는 차란(次蘭)이고 호는 남파이다.

970)초(楚)나라 강물:대개 초나라 굴원(屈原)의 초사(楚辭)에 나오는 강호(江湖)를 염두에 둔 표현인데, 은자의 처소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971)강고환(姜古歡):강위(姜瑋, 1820〜1884)이다. 초명은 성호(性澔), 문위(文瑋), 호(浩)이며 자는 유성(惟聖), 중무(仲武), 요장(堯章), 위옥(韋玉)이고 호는 고환(古歡), 고환(古懽), 추금(秋琴), 자기(慈屺), 청추각(聽秋閣) 등이다.

972)진제(眞諦):현상계의 미(迷)한 세계를 말하는 속제(俗諦)에 대해, 진지(眞智)에 의하여 터득하는 궁극적인 진여(眞如)의 세계를 말한다.

973)최상승(最上乘):불교 용어로 최고로 고명(高明)하고 원만(圓滿)한 교법(敎法)을 말한다. 문학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974)부재(符載)처럼……못하였고:당나라 때에 우적(于頔)이라는 사람이 양양(襄陽)을 진무(鎭撫)할 때에, 여산(廬山)의 부대산인(符戴山人)이 산을 구매하기 위한 매산전(買山錢) 100만 전(錢)을 빌려 달라고 청하니, 우적이 100만 전을 내주고 지필묵과 의복 등을 함께 주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패문운부, 고금사문유취, 태평광기 등에 전한다. ‘부대(符戴)’는 출전에 따라 부재(符載), 대부(戴符), 재부(載符)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한정록(閒情錄)에는 ‘부재(符載)’라고 표기되어 있다.

975)나은(羅隱)처럼……못하였다:나은은 당나라 시인으로, 자는 소간(昭諫)이다. 영사시(詠史詩)를 잘 지었고, 성품이 거만하고 풍자를 잘 하였기 때문에 누차 진사시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구오대사(舊五代史) 권24 양서(梁書) 나은열전(羅隱列傳), 당재자전(唐才子傳) 권7 등에 실려 있다.

976)너덜너덜……떨어졌지:전국 시대 유세객 소진(蘇秦)이 조(趙)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흑초구(黑貂裘)와 황금(黄金) 백 냥을 가지고 진(秦)나라 왕에게 합종책을 설득하러 가서, 글을 열 번이나 올려 유세를 했지만 진나라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일이 지나자 흑초구는 해지고 황금은 바닥이 나, 결국 유세를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집에 오자 아내는 베틀에서 내려오지도 않았고 형수는 밥도 지어 주지 않았고 부모는 소진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전국책 진책(秦策)에 들어 있는데, 태평어람, 고금사문유취, 연감유함 등에도 실려 전한다.

977)회오리바람을……꿈:장자 소요유에 “붕새가 남극 바다로 이동할 때에는 물을 박차고 3천 리를 달려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를 올라가 날아서 여섯 달 만에 쉰다.” 하였다. 여기서는 웅대한 뜻을 펼치려는 큰 의지를 비유한 것이다.

978)오곡을 가꾸었지:맹자 등문공 상에 “후직이 백성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쳐 오곡을 심어서 기르게 하니 오곡이 익어 백성들이 길러졌다.[后稷敎民稼穡 樹藝五穀 五穀熟而民人育]” 하였다. 원문의 수예(樹藝)는 종식(種殖)과 같은 뜻이다.

979)장저(長沮)……하리라:논어 미자에 “장저와 걸닉(桀溺)이 짝이 되어 밭갈이를 하고 있었는데, 공자가 그곳을 지나다가 자로(子路)를 시켜서 나루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게 하였다.” 하였다. 장저와 걸닉은, 후세의 시문에서는 세상을 피해서 사는 은자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여기서는 매천이 남파 성혜영과 함께 고대의 장저와 걸닉처럼 나란히 은둔하여 살고 싶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980)부질없이……말라:초사 초은사(招隱士)에 “산속 깊은 곳에 계수나무 무성하네. 울퉁불퉁 엉긴 것은 가지가 뒤엉킨 것.[桂樹叢生兮 山之幽 偃蹇連蜷兮 枝相繆]” 이라고 하였다. 원문의 총계(叢桂)는 무더기로 무성히 자란 계수나무를 말하는데, 은자가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부질없이 노래하지 말라’라는 것은, 실제로는 은둔하지도 못하면서 시문을 지을 때에 입으로만 은둔이나 은사를 거론하는 것을 조롱하는 말이다.

981)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1〜1910. 27세에 중국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북경을 다녀왔다. 매천이 성정론(性情論)을 주장한 데에 반해 이정직은 법고론(法古論)을 주장하였다. 205쪽 주467 참조.

982)엄숙하게……솟았네:원문의 지미(芝眉)는 당나라 때 원덕수(元徳秀)의 눈썹을 뜻하는 자지미우(紫芝眉宇)의 준말이다. 신당서 권194 원덕수열전(元徳秀列傳)에, “원덕수는 자가 자지(紫芝)이다. 글을 잘 지었는데, 한사부(寒士賦)를 지어 자신을 비겼다. 방관(房琯)이 원덕수를 볼 때마다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자지의 눈썹을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명리(名利)를 추구하는 마음이 완전히 없어지게 한다.’ 하였다.” 하였다. 이후 자지미우는 덕행의 고결함을 칭송하는 말로 쓰였다.

983)분육(賁育)의 용기:분육은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인데 전국 시대 때의 용사(勇士)들이다.

984)굶주린 울화:원문의 기화(飢火)는 참기 어려운 굶주림을 뜻하는 말이다. 당나라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한열(旱熱)에 “장부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서, 굶주린 울화가 창자를 다 태우네.[壯者不耐飢 飢火燒其腸]” 하였다.

985)콸콸……솟았네:맹자 이루 하에 “원천이 솟아올라 밤낮을 쉬지 않네. 웅덩이를 채우고 흘러가서 사해에 이른다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하였다. 주희의 주석에 “원천(原泉)은 근원이 있는 물이다.” 하였다. 석정 이정직이 기본 바탕이 튼튼하기 때문에 좋은 글이 계속 솟아 나왔다는 뜻이다.

986)정신을 전하는 것:진(晉)나라 화가 고개지(顧愷之)가 초상화를 그리면서 여러 해 동안 눈동자를 찍지 않자,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겉모습이 아닌 정신을 전할 수 있는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바로 눈동자에 달려 있다.[傳神寫照 正在阿堵中]” 하였다. 여기서는 이정직이 법고(法古)를 주장하매 고인의 시풍(詩風)을 전하고 있음을 비유한 것인 듯하다.

987)바다를 바라봄:황하의 신 하백(河伯)이 황하가 불어나자 의기양양해하다가 북해(北海)에 이르러 그 끝없이 펼쳐진 물을 보고 탄식하기를, “내가 대방가(大方家)에게 비웃음을 당하겠구나.” 하였다. 작은 성취에 만족해하다가 자기보다 더욱 뛰어난 상대를 만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로 망양지탄(望洋之歎)을 쓴다. 장자 추수(秋水)에 나온다.

988)필총(筆塚):고대의 서화가(書畫家)들이 다 쓰고 버리는 붓을 묻은 무덤이다. 서화 연습을 많이 했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989)봉남(鳳南):현재 전라북도 김제시에 봉남면이 있는데, 아마도 이곳을 가리키는 듯하다.

990)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자는 백증(伯曾)이며 호는 해학, 재곡(梓谷), 질재(質齋), 효산자(曉山子), 남악거사(南嶽居士) 등이다. 24쪽 주25 참조.

991)두번천(杜樊川):번천은 당나라 두목(杜牧, 803〜852)의 호이다. 자는 목지(牧之)이다. 근체시(近體詩)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능했다고 한다. 두보(杜甫)와 구별하기 위해 소두(小杜)라 불렀다.

992)진동보(陳同甫):동보는 남송(南宋)의 학자인 진량(陳亮, 1143〜1194)의 자이다. 진량은 호는 용천(龍川)이고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주희와 누차 서신을 주고받으며 왕도와 패도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왕도와 패도를 겸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사공(事功)을 중시하였다. 송나라 때에 이학(理學)을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배척되었지만, 명청(明淸) 시대로 내려와서는 이지(李贄), 황종희(黃宗羲), 왕부지(王夫之), 대진(戴震)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993)나……뿐이었고:논어 술이에 “부(富)를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집편(執鞭)하는 사(士)의 일일지라도 내가 또한 그것을 하겠지만, 추구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리라.[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하였다.

994)근래엔……나아갔다:신상(申商)은 전국 시대 법가(法家) 정치 사상가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을 말한다. 해학 이기가 전제망언(田制妄言)을 지어서 토지 제도 개혁에 대한 의견을 냈다는 뜻이다. 전제망언이해학유서(李海鶴遺書) 권1에 실려 있다.

995)조(趙)나라 비파:전국 시대 조나라는 비파가 유명했으므로 좋은 비파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조왕(趙王)이 진왕(秦王)과 회담을 할 때에 진왕이 조왕으로 하여금 비파를 타게 하고 사관을 시켜 그 사실을 기록하게 하자, 인상여가 진왕으로 하여금 장군[缶]을 두드리게 하고 그 사실을 조나라 사관을 시켜 기록하게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진쟁조슬(秦箏趙瑟), 조슬진부(趙瑟秦缶), 조슬초가(趙瑟楚歌) 등으로 활용된다. ‘슬(瑟)’은 실제로는 ‘비파’와는 다른 악기이지만 일반적으로 ‘비파’로 번역하며 ‘비파’로 번역해도 시의 뜻에 크게 어긋나지 않으므로 여기서도 ‘비파’로 번역하였다.

996)속금루곡(續金縷曲):금루곡(金縷曲)을 이어서 짓는 작품을 말한다. 금루(金縷)는 당나라 때에 절도사 이기(李錡)의 첩 두추낭(杜秋娘)이 잘 불렀다고 하는 노래 이름이다. 금루의(金縷衣), 금루곡이라고도 한다. 사문유취, 패문운부, 전당시 등에 그 가사가 실려 전한다. 그 가사에, “그대여, 금실 옷을 아낄 생각 말고, 젊은 시절 지나감을 아껴야 하리. 꽃 피어 꺾을 수 있을 때에 곧장 꺾어야지, 꽃이 진 뒤에 부질없이 빈 가지를 꺾지 마소.[勸君莫惜金縷衣 勸君須惜少年時 花開堪折直須折 莫待無花空折枝]” 하였다.

997)이산(二山) 유제양(柳濟陽):1846〜1922.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자는 낙중(洛中)이며 호는 난사(蘭榭), 쌍봉(雙峰), 이산 등이다. 99칸 전통 한옥인 운조루(雲鳥樓)의 주인이다.

998) 痕:대본에는 ‘㾗’으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痕’이 타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999)벽을……마치리라:송서(宋書) 권93 종병열전(宗炳列傳)에 의하면, 송나라 때의 종병이 늙고 병이 들어 유람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동안 다녔던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서 걸어 두고 누워서 그림을 보며 즐겼다고 한다.

1000)소천(小川) 왕사찬(王師瓚):1846〜1912. 본관은 개성이고 자는 찬지(贊之)이며, 소천이 그의 호이다.

1001)열세 살:예기 내칙(內則)에 “열세 살 때에 음악을 배우고 시를 외며 문무(文舞)를 춤춘다.[十有三年 學樂誦詩舞勺]” 하였다.

1002)수염은……가득하였지:당나라 한유(韓愈, 768824)의 동도우춘(東都遇春)“백발이 거울에 가득하다.[白髮忽滿鏡]”라는 구절이 있다. 당나라와 송나라 시인들의 시문에 ‘만경(滿鏡)’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였다.

1003)기러기 같았네:예기 왕제(王制)에 “아버지와 같은 나이인 사람에게는 뒤에서 따라가고 형과 같은 나이인 사람에게는 날아가는 기러기 행렬처럼 따라가고[雁行] 친구 사이에는 서로 앞서지 아니한다.” 하였다. 기러기처럼 따라간다는 것은, 형제 또는 형제처럼 친한 사이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1004)사귐이……했지:왕사찬은 매천의 스승이자 벗이었으므로 벗으로서의 친밀함으로 인해 스승으로 대하는 태도에 경건함이 다소 줄어들기도 했다는 뜻인 듯하다.

1005)차라리……될지언정:아름다운 벽옥(璧玉)에 작은 하자가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에 백벽미하(白璧微瑕)라는 말이 있다.

1006)간휼(奸譎)하여……않았지:논어 헌문에 “진 문공은 간휼하고 부정하며 제 환공은 올바르고 간휼하지 않다.[晉文公譎而不正 齊桓公正而不譎]” 하였다.

1007)전유(錢劉):전기(錢起)와 유장경(劉長卿)을 병칭하는 말이다. 모두 오언율시에 솜씨가 뛰어났던 당나라 시인들이다. 유장경의 오언시 솜씨를 비유하여 오언장성(五言長城)이라 하였다.

1008)계맹지간(季孟之間):논어 미자(微子)에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공자를 대우하여 말하기를, ‘계씨(季氏)와 같이 대우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없겠지만 계씨와 맹씨(孟氏)의 중간 정도로는 대우하겠다.’ 하였다.” 하였다. 당시에 노나라에서 계씨는 상경(上卿)이고 맹씨는 하경(下卿)이었으니, 계씨와 맹씨의 중간이라는 것은 상등과 하등의 중간이라는 말과 같다.

1009)둔마가……우러러보다가:전국 시대 초나라 송옥(宋玉)의 구변(九辯)에, “천리마를 물리치고 타지 아니하고, 둔마를 채찍질하며 길을 나섰네.[却騏驥而不乘兮 策駑駘而取路]” 하였다. 이후로는 노태(駑駘)는 열등한 자신의 재능을 비유하는 겸사로 주로 사용되었다. 녹이(騄耳)는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타던 팔준마(八駿馬) 중의 하나였다고 하는데, 좋은 말을 가리키는 말이다.

1010)한참을……휘둥그레:장자 전자방(田子方)에 “안연이 중니에게 묻기를, ‘부자께서 걸으면 저도 걷고 부자께서 빠르게 걸으면 저도 빠르게 걸으며 부자께서 뛰면 저도 뛰어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부자께서 먼지도 나지 않을 정도로 빨리 달리면 저는 그저 멍하니 뒤에 처져서 눈만 휘둥그레 뜨고 바라볼 뿐입니다.[夫子奔逸絶塵 而回瞠若乎後矣]’ 하였다.” 하였다.

1011)장경(長慶):당나라 목종(穆宗)의 연호이다. 목종 때에 백거이(白居易)와 원진(元稹)의 시풍(詩風)이 이루어졌으므로 그들의 시풍을 장경체(長慶體)라고 한다. 왕사찬의 시(詩)가 원진과 백거이에 견줄 만하다는 뜻이다.

1012)곤궁하면……말:송나라 구양수(歐陽脩)의 매성유시집서(梅聖俞詩集序)에 “대개 사람이 곤궁하면 시가 더욱 공교해진다. 그렇다면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곤궁해진 뒤에 시가 공교해지는 것이리라.” 하였다.

1013)가난을……있으랴:장자 양왕(讓王)에, “가난하게 살고 있는 원헌(原憲)을 자공(子貢)이 찾아가서 ‘선생은 어찌 이렇게 병들어 보이십니까?’라고 묻자 원헌이 답하기를,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貧]이라 하고, 배우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병들었다[病]고 한답디다. 지금 나는 가난한 것일 뿐이지 병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하였다.

1014) 금오산(金鰲山):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에 있는 오산(鰲山)을 말한다.

1015)석문(席門):사기 권56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진평(陳平)의 집에 이르러 보니, 성곽을 등진 누추한 골목[負郭窮巷]에 있었고 다 떨어진 자리로 문을 달았는데도[以弊席爲門], 장자(長者)의 수레바퀴 자국이 많았다.” 하였다. 후세에는 청빈하게 사는 사람의 집이나 은둔해 사는 사람의 집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1016)유당(酉堂) 윤종균(尹鍾均):38쪽 주56 참조. 당시(唐詩)를 좋아하였으며 특히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잠삼(岑參), 유장경(劉長卿) 등의 작품을 연모하였다고 한다.

1017)기린이……같네:포박자(抱朴子) 권13 극언(極言)에 “재물과 여색을 보고도 마음에 갈등을 느끼지 않으며 세속의 말을 듣고도 의지가 꺾이지 아니할 자는, 만 명 중에 한 사람이 있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일을 하는 자는 소의 털만큼이나 많지만 성취하는 자는 기린의 뿔처럼 희귀하다.” 하였다. 이 내용은 태평어람, 자사정화, 패문운부 등에도 실려 전한다.

1018) 겸산(兼山):백낙륜(白樂倫)이다. 95쪽 주244 참조.

1019)피육(皮陸):당나라 때의 피일휴(皮日休)와 육귀몽(陸龜蒙)을 말한다. 이 두 사람은 매우 친밀했으며 시풍(詩風)도 흡사하여 서로 창화한 시가 매우 많다.

1020)한맹(韓孟):당나라 때의 한유(韓愈)와 맹교(孟郊)를 말한다.

1021)옥도끼로 쪼아 다듬었지:당나라 문종 때에 정인본(鄭仁本)의 표제(表弟)가 왕수재(王秀才)와 함께 숭산(嵩山)에 놀러 가서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문득 숲 속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에 살펴보았더니 어떤 사람이 보따리를 베고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 그를 불러 물으니, 그가 “달은 칠보(七寶)로 합성된 것인데, 항상 8만 2천 호(戶)가 달을 수선한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하며, 보따리를 풀어 보이는데 그 안에는 도끼, 자귀 등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가 옥가루로 지은 밥을 두 사람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먹으면, 비록 장생(長生)은 못하더라도, 일생 동안 질병이 없을 수 있다.” 하였다. 이 내용은 유양잡조(酉陽雜俎)에 들어 있는데, 고금사문유취, 운부군옥, 패문운부 등에도 실려 전한다. 옥부수월(玉斧修月)은 시문(詩文)을 갈고 다듬는 일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1022)누가……줄까:송나라 구양수의 매성유시집서(梅聖俞詩集序)에, 사람들이 다들 매성유(梅聖兪)의 시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도 아무도 매성유를 천거하는 이가 없음을 말하면서, “만약 그를 조정에 등용되게 하여 아송(雅頌)을 지어 대송(大宋)의 공덕(功德)을 노래하여 청묘(淸廟)에 올려서 상송(商頌), 주송(周頌), 노송(魯頌)의 작자를 뒤따르게 했더라면 어찌 대단하지 아니했으랴.” 하였다. 성유는 매요신(梅堯臣, 1002〜1060)의 자이고 완릉(宛陵)에 살았으므로 완릉 선생이라 일컬어졌다. 매천이 윤종균을 매요신에 견주어 말하면서, 누군가가 윤종균을 조정에 천거해 주기를 바란 것이다.

1023)초(楚)나라……거야:춘추 시대에 초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옥박(玉璞)을 얻어 초나라 여왕(厲王)에게 바치니 돌을 옥이라고 속였다고 하면서 그의 왼쪽 발을 베었다. 그 뒤 다시 무왕(武王)에게 바치니 또 거짓말을 한다고 하면서 그의 오른쪽 발을 베었다. 문왕이 즉위한 뒤에 변화는 옥박을 안고 사흘 밤낮을 통곡하였다. 문왕이 불러서 말하기를, “천하에는 월형(刖刑)을 받은 자가 많은데 그대는 어찌 그토록 통곡하는가?” 하니, 변화가 답하기를, “제가 슬퍼하는 것은 월형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보옥(寶玉)을 돌[石]이라 하고 정사(貞士)를 광인(誑人)이라 하니 그것이 슬퍼서 통곡한 것입니다.” 하였다. 문왕이 그 옥박을 가공하게 하여 보배로운 구슬을 얻어 그것을 화씨벽(和氏璧)이라 하였다. 한비자 화씨(和氏)에 실려 있다. 매천은 시문의 재능을 지닌 윤종균이 끝까지 알아주는 이 없이 초야에 묻혀 있게 될까 염려한 것이다.

1024)염암(念菴) 윤병수(尹秉綬):1850〜?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자는 경조(景組)이다. 1888년(고종25) 무자년 별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우세마, 부교리, 공조 참의, 동부승지, 중추원 의관,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1025)석재(碩齋):윤행임(尹行恁, 17621801)의 호이다. 본관은 남원이고, 초명은 행임(行任), 자는 성보(聖甫)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1782년(정조6)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규장각 직각, 이조 참의, 도승지, 대제학,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026)비녀장을……같았고:한서 권92 진준전(陳遵傳)에 “진준(陳遵)은 자가 맹공(孟公)이다. 장안(長安)에 살 때에 근신(近臣)과 귀척(貴戚)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지방관으로 나가는 자와 경사(京師)에 오는 호걸들이 모두 진준의 집에 들렀다. 진준은 술을 좋아하여 매양 크게 술잔치를 열었는데, 손님들이 집에 가득 차면 문을 닫아걸고 손님들의 수레 비녀장을 뽑아 우물 속에 던졌다. 손님들은 급한 일이 생겨도 끝까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하였다. 이 내용은 고금사문유취, 설부, 패문운부 등에도 실려 전한다.

1027)投:대본에는 ‘推’로 되어 있는데, 매천집정오에 따라 고쳐서 번역하였다.

1028)교외에……같았네:사기 권120 급정열전(汲鄭列傳), 한서 권50 정당시전(鄭當時傳)에 “정당시(鄭當時)는 자가 장(莊)이다. 효경제(孝景帝) 때에 태자사인(太子舍人)이 되었는데, 닷새마다 돌아오는 휴일이 되면 몸을 깨끗이 하고 장안(長安)의 교외에 역말을 배치하여 손님들을 초대해서 밤새도록 잔치를 열었다.” 하였다. 이 내용은 태평어람, 연감유함, 패문운부 등에도 실려 전한다.

1029)해산물 반찬:남제서(南齊書) 권34 유고지열전(庾杲之列傳)에 나온다. 유고지가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매우 청빈한 생활을 하여 밥을 먹을 때에 반찬이 부추 절임, 데친 부추, 생 부추 등 세 가지밖에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유고지를 희롱하기를, “누가 유랑(庾郞)을 가난하다고 하는가. 규채(鮭菜)를 스물일곱 가지나 차려서 먹는데.[誰謂庾郎貧 食鮭常有二十七種]” 하였다. 부추 구(韭) 자는 아홉 구(九) 자와 발음이 비슷하고 또 규(鮭)와도 발음이 비슷하므로, 부추 반찬이 세[三] 가지이므로 9×3=27로 계산하였고 구(韭)를 규(鮭)로 바꾸어 말한 것이다. 규(鮭)는 복어, 어류, 해산물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규채(鮭菜)는 청빈한 생활, 소박한 음식 등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데, 육유(陸游)의 북창즉사(北窓即事)에는 “거친 밥에 어찌 다시 해산물 반찬이 필요하랴. 지게문에 무엇 하러 빗장을 설치하랴.[粗餐豈復須鮭菜 蓬戶何曾設扊扅]” 하여, 규채를 고급스러운 요리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매천도 육유의 시풍을 따랐을 것이므로 맛있는 해산물이나 물고기 반찬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1030)왕관곡(王官谷):당나라 사공도(司空圖)가 삼휴정(三休亭)을 짓고 은둔했던 곳으로, 후세에는 은둔지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1031)가을 소리:가을에 들려오는 쓸쓸한 소리들인데, 송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지은 추성부(秋聲賦)에 자세하다.

1032)하궤(荷蕢)의 부류:논어 헌문에 “공자가 위나라에서 경쇠를 치고 있을 때에 삼태기를 메고 공자의 집 앞을 지나가던 자가 ‘경쇠 소리를 들어보니 세상일을 마음에서 놓지 못했구나!’ 하였다.” 하였다. 삼태기를 메고 지나가던 자는 은자(隱者)를 가리키므로, 매천이 윤병수를 은자에 비유한 것이다.

1033)그대가……속이랴:매천의 생각에 윤병수가 벼슬을 버리고 은거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 예상대로 과연 은거하였다는 뜻인 듯하다.

1034)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1872〜1941.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자는 평숙(平叔)이며, 염재는 그의 호이다. 1888년(고종25)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에 오산고보(吾山高普)를 설립하였으며, 그림과 글씨에 조예가 깊었다. 매천선생진찬(梅泉先生眞贊)을 지었다.

1035)아버지가……당겼고:아경(阿敬)은 왕헌지(王獻之)의 자이다. 진서(晉書) 권80 왕희지열전(王羲之列傳)에 “왕헌지가 7, 8세에 글씨를 배울 때에 아버지인 왕희지가 몰래 뒤에서 그 붓을 잡아당겨 보았더니[掣筆] 왕헌지가 붓을 놓치지 않았다. 왕희지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나중에 크게 이름을 낼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이후 글씨 공부를 열심히 하는 어린이를 칭찬할 때에 체필랑(掣筆郞)이라고 하였다. 송태회도 서예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1036)좌중이……놀랐네:당나라 때에 왕발(王勃)이 홍주 도독 염공(閻公)이 베푼 등왕각의 잔치에서 지은 등왕각서는 당대의 명문장으로 유명하다. 왕발은 지방 수령으로 있는 부친에게 가는 길에 이 등왕각을 지나면서 글을 지었다.

1037)용(龍)……맡으니:장자 열어구(列禦寇)에 “주평만(朱泙漫)이 지리익(支離益)에게 용 잡는 기술을 배웠다. 1천 금(金)의 가산을 다 들여서 그 비법을 완성했는데 기술을 쓸 데가 없었다.” 하였다. 큰일을 처리할 능력을 지닌 송태회가 작은 일 처리를 맡았다는 뜻인 듯하다.

1038)낭자하던……꿰어졌지:송나라 한유(韓愈, 768〜824)의 증장적(贈張籍)에 “시험삼아 시경의 뜻을 가르쳐 주었더니 마치 고기를 꼬챙이에 꿰듯이 꿰뚫어 이해했네.[試將詩義授 如以肉貫丳]” 하였다. ‘고기를 꼬챙이에 꿴다’라는 말은 어떤 복잡한 일을 명쾌하게 이해하거나 처리했다는 뜻이다.

1039)들창코:사기 권79 범수채택열전(范雎蔡澤列傳)에 나온다. 연(燕)나라 변사(辯士) 채택(蔡澤)이 제후들에게 등용되지 않자 관상쟁이 당거(唐擧)를 찾아가서 관상을 보았다. 당거가 말하기를, “선생은 들창코[曷鼻], 자라목[巨肩], 우락부락한 얼굴[魋顔], 찌그러진 미간[蹙齃], 휜 다리[膝攣]를 가진 관상이오. 내가 들으니 성인의 모습은 관상을 볼 수가 없다고 하던데, 아마도 선생의 관상이 이에 해당할 듯싶소.” 하였다. 갈비(曷鼻)의 갈(曷)은 갈충(蝎蟲)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앙(仰)의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우선 들창코로 번역하였다.

1040)자은(慈恩)의 방목:당나라 때에 진사시에 입격하면 자은사(慈恩寺)의 대안탑(大雁塔)에 그 이름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진사시에 입격한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1041)앞서 나아감:진서(晉書) 권56 손작열전(孫綽列傳)에 “손작은 성품이 활달하고 농담을 좋아했는데, 습착치(習鑿齒)와 함께 길을 갈 때에 손작이 앞서 가면서 습착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쌀을 일면 돌들이 뒤에 남지.[沙之汰之 瓦石在後]’ 하니, 습착치가 그 말을 받아서 말하기를, ‘곡식을 까불면 쭉정이가 앞에 날지.[簸之颺之 糠粃在前]’ 하였다.” 하였다. 원문의 강전(糠前)은 실력도 없으면서 남보다 먼저 앞으로 나서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1042)세한(歲寒)의 기약:논어 자한에 “해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하였다. 여기서는 절개를 굳게 지키려는 의지를 지녔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1043)제염(虀鹽):제(虀)는 절인 채소를 말하고 염(鹽)은 소금이다. 염제(鹽虀)로도 쓰며, 소금에 절인 채소를 말하기도 한다. 나물 반찬과 소금 또는 절인 나물 반찬은 청빈한 생활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1044)파산(灞滻):장안(長安)에 있는 두 강물인 파수(灞水)와 산수(滻水)를 말한다. 여기서는 서울 교외를 뜻하는 말로 쓴 것인 듯하다.

1045)사통팔달 큰길:다섯 방향으로 통하는 길을 강(康)이라 하고 여섯 방향으로 통하는 길을 장(莊)이라 한다. 강장(康莊)은 툭 트인 큰길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1046)넓은……막으랴만:포박자(抱朴子) 가둔(嘉遁)에 “한 치의 갖풀로는 황하의 혼탁함을 맑게 할 수 없다.[寸膠不能治黄河之濁]” 하였다.

1047)칠조개(漆雕開)처럼……보았으리:논어 공야장에 “공자께서 칠조개를 벼슬을 시키려고 하니, 칠조개가 대답하기를, ‘저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하였다. 공자께서 기뻐하셨다.” 하였다.

1048)저……내어:시경 벌목(伐木)에 “저 새를 보아도 벗을 찾는 소리를 내는데, 하물며 우리 사람들이 벗을 찾지 아니하랴.[相彼鳥矣 猶求友聲 矧伊人矣 不求友生]” 하였다.

1049)꾀꼴꾀꼴:시경 개풍(凱風)에 “곱고 고운 꾀꼬리가 그 소리도 예쁘구나.[睍睆黃鳥 載好其音]” 하였다. 대개 현환(睍睆)은 예쁜 모습을 뜻하는 말이라고 풀이하는데, 주희의 집주에는 “맑고 조화롭고 원만하게 굴러간다는 뜻이다.”라고 하여 꾀꼬리의 우는 소리를 묘사하는 말로 풀이하였다. 현환을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 타당할 듯하나, 여기서는 우선 청각적 묘사로 보아 의성어로 번역하였다. 매천이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보았는지 청각적 아름다움으로 보았는지는 미상이다.

1050)적벽강(赤壁江):전라남도 화순에 있는 적벽강을 말한다.

1051)용상(龍象):용(龍)과 코끼리[象]라는 말인데, 학덕이 높은 고승(高僧)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1052)기린……어떠할까:당나라 때에 양형(楊炯)은 조관(朝官)들을 볼 때마다 기린훤(麒麟楦)이라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기린 놀이를 하는 자들을 보자면, 기린의 모습을 꾸며서 나귀에게 씌우면 영락없이 기린 모습이 된다. 그러나 그 겉치장을 벗겨 내면 도로 나귀일 뿐이다. 지금 덕도 없으면서 높은 벼슬아치의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랴.” 하였다. 이 내용은 태평광기, 운부군옥, 연감유함 등에 실려 전하는데, 그 원전을 조야첨재(朝野僉載)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후 ‘기린 탈’은 조정의 벼슬아치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1053)속세 그물:인간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속박을 받는 것이 마치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 있는 것과 같다는 데에서 나온 말로, 일반적으로 속세를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에 사용한다.

1054)지축(支竺):정확한 뜻은 미상이다. 지(支)를 지나(支那), 축(竺)을 천축(天竺)으로 보아, 중국과 인도의 승려들을 뜻한다고 보면, 불교 승려들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으며, 지를 동진(東晉)의 고승 지둔(支遁), 축을 축승(竺僧)으로 보면, 축승은 승려라는 뜻이므로 지둔 같은 승려의 무리들을 가리키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1055)제도하는 어려운 임무:원문의 진량(津梁)은 ‘나루와 다리’라는 뜻인데, 두 가지 모두 물을 건너는 수단이므로,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1056)종고(宗杲):남송 때의 임제종(臨濟宗) 승려인 보각 대혜 선사(普覺大慧禪師)이다. 간화선(看話禪)을 발전시켜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며 당시 사대부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057)혜원(惠遠):동진(東晉)의 고승 혜원 법사(惠遠法師)이다. 당대의 도잠(陶潛), 육수정(陸修靜) 등과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서로 친밀하게 교유하였다고 한다.

1058)사자좌(獅子座):부처가 설법한 자리인데, 고승이 설법하는 자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불교에서 부처의 큰 위엄을 사자(獅子)에 비유하여 부처의 설법(說法)을 사자후(獅子吼)라 한다.

1059)당(幢):부처의 권위와 공덕을 드러내기 위해 사찰에 세우는 일종의 깃발이다. 당을 걸기 위한 깃대가 당간(幢竿)인데 당간은 철(鐵)이나 돌[石]로 만든다. 그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만든 받침대가 당간지주(幢竿支柱)이다.

1060)간절히 원하면 이에:맹자 등문공 하에 “단간목(段干木)은 담을 넘어 피하였고 설류(泄柳)는 문을 닫고 들이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너무 심하였다. 절박하면 이에[迫斯] 만나 볼 수도 있는 것이다.[可以見矣]” 하였다. 원문의 박사(迫斯)는 ‘대중들이 간절하게 원하면’이라는 뜻으로 쓴 것인 듯하다.

1061)기봉(機鋒)을 내니:병기의 날카로운 날이라는 뜻으로, 불교 용어이다. 언어나 문답의 민첩함과 예리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촌철살인하는 언어로 대중을 제도하였다는 말이다.

1062)삼거(三車):세 종류의 수레라는 뜻인데, 불교에서 삼승(三乘)의 사람이 각기 삼계(三界)를 벗어나 열반에 들어가는 세 가지 방법을 비유한다. 보살승(菩薩乘)은 소가 끄는 우거(牛車)를, 연각승(緣覺乘)은 사슴이 끄는 녹거(鹿車)를, 성문승(聲聞乘)은 양이 끄는 양거(羊車)를 이용한다고 한다.

1063)기어(綺語)를 참회하지도 아니하고:기어는 불교에서 말하는 십악(十惡) 가운데 하나로, 진실을 어기고 남들이 듣기 좋게 겉으로 꾸며서 하는 말을 뜻하는데, 시문을 꾸미는 일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기어를 참회하지 않았다는 말은 스님으로서 속세인처럼 시문(詩文) 짓는 일을 계속했다는 뜻인 듯하다.

1064)풍소(風騷):시경국풍(國風)초사이소(離騷)를 아울러 가리키는 말인데, 대개 시문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1065)소순(蔬筍):채소와 죽순이라는 말인데, 승려들은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을 하므로 승려들의 기풍 또는 승려들이 지은 시문의 문체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1066)소……만큼:당나라 이백(李白)의 취후증왕역양(醉後贈王歷陽)에 “글씨는 천 마리 토끼털 붓이 다 닳도록 썼고, 시는 두 마리 소 등에 실을 만큼 많이 지었네.[書秃千兔毫 詩裁兩牛腰]” 하였다. 우요(牛腰)는 지은 시문이 많은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1067)이루어짐과 무너짐:불교에서 말하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준말이니, 성주괴공은 세계가 변화하는 4단계를 말한다. 이를 4대겁(四大劫)이라고 하는데, 생겨나는 시기를 성겁(成劫), 존재하는 시기를 주겁(住劫), 파괴되는 시기를 괴겁(壞劫),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시기를 공겁(空劫)이라 한다. 세상은 이 네 단계가 서로 윤회한다고 한다.

1068)조권(操券):고대에는 계약을 할 때에 계약 증서를 둘로 나누어서 한 조각은 채권자가 가지고 다른 한 조각은 채무자가 가졌는데, 조권은 채권자가 가진 조각을 말한다. 조좌권(操左券) 또는 조우권(操右券)이라고도 쓴다. 여기서는 채권 증서나 어음의 뜻으로 사용한 듯하다.

1069)신축고(辛丑稿):1901년(광무5) 매천이 47세 때에 지은 시 모음이다.

1070)택당(澤堂)의 시:택당집(澤堂集) 속집 권2 원일등파자령(元日登巴子嶺)을 말한다. 한국문집총간 88집에 실려 있다.

1071)허리가 가늘어졌네:미인의 가는 허리를 비유하여 ‘요여약소(腰如約素)’라고 한다. 약소(約素)는 동그랗게 묶은 비단 깁을 말한다. 원문의 약요(約腰)는 허리가 더 가늘어져서 졸라매야 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1072)새해 맞아:원문의 배세(拜歲)는 옛날에는 대개 섣달 그믐에 한 해를 보내며 존장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을 말했는데, 후세에는 새해를 맞아 존장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을 뜻하니 세배(歲拜)와 같은 말이다.

1073)아침 햇살:시경 포유고엽(匏有苦葉)에 “끼룩끼룩 기러기 울고 아침 해가 솟아오르네. 남자가 아내를 데려오는 일은 얼음이 풀리기 전에 해야 하네.[雝雝鳴雁 旭日始旦 士如歸妻 迨氷未泮]” 하였다. 욱일(旭日)은 혼인하는 때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1074)좋은……얘기하니:후한서 권83 양홍열전(梁鴻列傳)에 “양홍은 자가 백란(伯鸞)이다. 권세가에서 양홍의 고절(高節)을 사모하여 그에게 딸을 시집보내고자 하는 자가 많았으나 양홍은 모두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고을 맹씨(孟氏) 집에 딸이 있었는데, 양홍이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함께 패릉산(霸陵山)에 들어가 몸소 농사를 짓고 베를 짜고 시서(詩書)를 읊고 금(琴)을 타면서 살았다.” 하였다. 이 내용은 고금사문유취, 연감유함, 패문운부 등에 실려 전하며, 조선 허균(許筠)의 한정록(閑情錄) 은둔(隱遁)에도 실려 있다. 여기서는 사위가 양홍처럼 검소한 인물이므로 혼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1075)남북으로 날면:천남해북(天南海北)은 남쪽 끝과 북쪽 끝처럼 서로 현격하게 거리가 먼 두 지역을 비유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기러기가 남쪽으로 날아왔다가 다시 북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표현한 것인 듯하다.

1076)마흔 헛되이 넘겼었지:예기 곡례 상에 “사람이 태어나서 10세가 되면 ‘유(幼)’라 하니 학문을 하며, 20세를 ‘약(弱)’이라 하니 관례를 하며, 30세를 ‘장(壯)’이라 하니 혼인을 하며, 40세를 ‘강(强)’이라 하니 벼슬을 한다.……” 하였다. 사십강(四十强)은 벼슬을 할 나이인 40세를 말한다.

1077)금단(金丹)이……깨니:진몽(塵夢)은 인간 세상을 꿈속으로 비유한 것이며, 꿈을 깬다는 것은 저승으로 간다는 의미이다. 선약(仙藥)인 금단을 때늦지 않게 준비했으면 죽지 않을 수 있었는데, 금단 만드는 일이 늦어져서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말이다.

1078)옥수(玉樹)는……있네:옥수는 훌륭한 아들을 비유하는 말이다. 상주가 된 아들이 초췌한 모습으로 추운 새벽에 울고 있다는 뜻이다.

1079)煖:전주매천시집에는 ‘暖’으로 되어 있다.

1080)사람 홀로 걸어가는데:매천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말한다.

1081)산속에……패었구나:산속에 살면서 신선처럼 생활하면 벽곡(辟穀)을 하여 속세의 익힌 음식을 먹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역시 속세의 음식을 버리지 못해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말이다.

1082)자진(子眞)을……있네:한나라 때에 정박(鄭樸)이라는 고사(高士)가 곡구(谷口)에 은둔하여, 권세가인 왕봉(王鳳)의 초빙에도 일절 응하지 않고 청고(淸高)하게 살았는데, 그 후 곡구는 은자(隱者)가 사는 곳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으며, 지조를 지키며 청렴하게 은둔해 생활하는 사람을 비유할 때에 ‘곡구자진(谷口子眞)’ 또는 ‘곡구진(谷口眞)’이라 하였다. 자진은 정박의 자이다. 법언(法言)5 문신(問神)에 “곡구에서 정자진이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암석 아래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그 명성이 서울에 자자하였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재야에 있는 정씨(鄭氏) 인물을 시문(詩文)에서 묘사할 때에 이 내용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서도 정운익(鄭運翼)이 정씨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원문의 사라곡구(紗羅谷口)는 정운익이 사는 광양(光陽)의 사곡(紗谷) 마을을 곡구에 견주어 표현한 것이다.

1083)바람에 나비:원문의 풍접(風蝶)은 나비의 한 종류인 호랑나비를 가리키기도 하나, 여기서는 위 구절의 청금(晴禽)과 대응시켜 풍(風)을 수식어로 번역하였다.

1084)이아(爾雅):한(漢)나라 때의 훈고학 서적이다.

1085)모릉(模稜):가타부타 결정을 짓지 아니하고 적절히 얼버무리는 태도를 말한다.

1086)공후(公侯)에게……의심하네:육유(陸游)의 광부(狂夫)에 “광부는 세상과는 본래 어울리기 어렵지. 취하여 임금도 우습게 보니 또한 아니 장대한가.[狂夫與世本難諧 醉傲王侯亦壯哉]” 하였다.

1087)없는……귤밭이네:중국 삼국 시대 오(吳)나라 단양 태수(丹陽太守) 이형(李衡)이라는 사람이 치가(治家)를 반대하는 처(妻) 몰래 용양(龍陽)의 강가에 감귤 1000그루를 심어 길러 놓고, 죽을 때에 아들에게 이르기를, “네 어미가 치가를 반대하여 이렇게 곤궁하다. 고을의 강가에 네가 의식(衣食)을 제공하지 않아도 되는 목노(木奴) 1000명이 있다.” 하면서 물려주었다고 한다.

1088)日:전주매천시집에는 ‘中’으로 되어 있다.


출처 : 고전번역연구소
글쓴이 : 수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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