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선 명필 창암 이삼만李三晩

2017. 11. 27. 16:37서예가



       [스크랩] 조선 명필 창암 이삼만李三晩(1770-1847)| 기본 자료실

섬하나 | 조회 1 |추천 0 | 2013.02.09. 01:21


 

조선 명필 창암 이삼만李三晩

 

   사람이 태어나 한 세상을 살며 제대로 미치면 한 시대와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단한 노력과 의지로 자기 삶을 개척한 사람이 있다.

평생 글씨 하나로 한 시대의 전설이 된 사람이다.

바로 창암 이삼만선생이다.

 

 

 

창암 이삼만선생의 '초서 시고'

 

 

   창암 이삼만 (1770-1847)선생은 선생이 생존할 당시 '조선의 3대 명필' 이라 하여 호서의 눌인 조광업, 기호의 추사 김정희, 호남의 창암 이삼만선생을 이야기한다.

 

   추사선생보다 10여살위의 연상이나, 추사선생과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점이 많다.

추사선생은 유복한 환경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았으나, 창암선생은 몰락한 양반의 후손으로서 약초를 캐서 팔아 삶을 연명하는 등 힘들게 공부를 하였다.

   붓과 종이가 없어 대나무와 칡뿌리를 갈아서 사용했고, 종이가 없어서 모래위에 막대기를 사용하여 글씨를 쓰는 등 그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평생동안 글씨에 대한 집념을 놓지않고 몸이 아프더라도 하루 천자를 쓰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창암 이삼만선생 '행서'

 

 

   추사의 경우 힘찬 예서와 해서 등이 좋으나, 창암선생은 유수체라 부르는 걸림없는 행초서가 좋다.

평생 한길을 간 제대로 미친 사람의 모습은 오늘날 많은 글씨들이 전해짐으로서 그 아름다움을 알게 해준다.

 

   물 흐르듯 흐르는 창암선생의 걸림없는 모습을 생각해본다.

 

  창암선생은 주로 자신이 잘 아는 글씨에 관한 글과 시고를 즐겨썼다고 한다.

그중에 말년에 쓰셨다는 다음 글은 한 분야로 일로매진한 전문가다운 맛과 멋을 느낄 수 있어 좋다.

 

" 글씨를 쓰는 것보다 좋은 즐거움이란 없다.

  하얀 종이 위에 이리저리 휘갈겨도

  거리낌이 없는 것은

  이것 밖에 더 있겠는가? "

 

 

창암 이삼만선생 '행초서'


 


  

창암선생 낙서론



   세상을 살다보면 항시 주류主流와 비주류非主流와의 다툼과 알력이 상존함을 알게 된다. 한국서예사에 있어서도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아직까지도 힘든 것 같다. 작품의 질質과 상관없이 그 이름만으로 대접받는 경우도 있고,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한국의 서예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받은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선생이다. 창암 선생은 오늘날 일부 전문가그룹들에게는 전설傳說로 남아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창암선생은 동시대를 살았던 추사선생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일반인에게는 매우 낮설은 사람이다. 추사보다 16세 먼저 활동한 선배로서 작품의 수준이 매우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지방의 한 지방작가로만 대접받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전라도 지방 뿐만이 아니라 매니아들에게 창암선생은 한 시대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신필神筆로서 평가되고 있다.


   사실 당대에 팬들을 많이 확보할 수는 있어도 이미 당대에 전설로 남겨진 사람은 드물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조선시대 후기 창암 이삼만선생과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생존했던 석재 서병오선생은 생존에 이미 전설화된 인물들이다. 안타깝게도 요즘엔 일부 매니아나 서예가들만 알고 있지만 말이다.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선생은 그 이름부터가 평범하지 않다. 삼만三晩이라는 이름도 가난하여 배움과 친구관계와 결혼이 늦어 삼만이라 지었다고 한다. 몰락한 선비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에 약초캐는 아버지가 약초를 캐다가 뱀에 물려 죽게되자, 본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약초를 캐다 팔며 보이는 뱀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고 한다. 그러자 뱀들도 무서워 달아났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이 이삼만李三晩선생의 이름 석자를 적어 걸어두면 뱀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창암선생 '칠택오악'


 

 

창암선생 행초서



   이삼만李三晩선생의 어려서부터 글씨공부에 뜻을 둔 것 같다. 하지만, 집안의 어려운 환경때문에 제대로 된 공부를 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글씨는 왕희지의 법첩을 중심으로 시작하였고, 이후 원교 이광사선생 등의 글씨를 보고 더욱 글씨를 연마했다 한다.


   20여년 이상 오로지 글씨공부에 부단히 노력하였다고 하며, 한 30여년 이상 부지런히 쓰다보니 글씨의 틀이 잡히고,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에도 죽을 때까지 몸이 아플 때에도 하루 천자 이상 쓰지 않으면 자지 않았다고 한다.


   창암선생의 글씨가 유명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아는 약재상이 대구 약령시에 약재를 팔러 가면서 약물기藥物記를 써 달라고 해서 천에 약물의 이름을 부르는 대로 써 주었다고 한다. 그 약물기를 보고 약재를 사러온 중국상인들이 창암선생의 글씨를 보고 감탄하였고, ‘조선명필朝鮮名筆 이삼만李三晩’을 다시 찾아와 글씨들을 구해갔다고 한다.  또한 잠자는 어느 부채상인의 부채가 잘 팔리지 않아 졸고 있기에 창암선생이 부채에 글씨를 써 놓았더니 모두 팔려나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창암蒼巖선생이 살아계신 당시부터 창암선생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었던 것 같다. 그 대표적인 예중의 하나가 동시대를 살며 후배였던 추사선생의 창암蒼巖선생에 대한 평가이다.


   그 중 하나는 제주도로 유배갈 적에 전주에 들러 창암선생을 찾아서 추사선생이 한 ‘명불허전이요, 신필神筆’이라는 극찬이고, 또 하나는 ‘지방에서 먹고 살만한 글씨’라는 혹평이다. 이와 같은 혹평에 대한 창암선생의 반응이 재미있다. “저 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추사선생이 제주 유배지에서 돌아오면서 다시 전주에 들러 창암선생에게 사죄하러 갔지만, 이미 창암선생은 3년 전에 고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추사선생은 창암선생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창암선생의 묘비명墓碑銘을 써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창암선생 오언율시



   그러나 아직까지도 창암선생에 대한 평가는 후자에 가깝다. 일부 매니아는 있어도 오랫동안 대중적인 인기를 담아내지 못해 묻혀진 대가이다. 이점에서 창암선생과 추사선생은 같은 시대를 산 사람으로서 많이 비교가 되는 것 같다.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겠지만, 우선은 각자 어려운 환경에서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에 의해 서예를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켜 자신만의 개성적인 세계를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점은 창안선생은 붓과 종이를 구하기 힘들 정도로 생활이 어려운 입장에서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인 칡뿌리와 대나무 등으로 붓을 만들어 사용하는 등 도구자체의 열악한 과정에서 서예를 추구한 방면에, 추사선생은 명문대가의 후손으로서 최고의 붓과 먹, 그리고, 글씨쓰기 좋은 중국종이와 비단 등을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창암선생은 평생을 전라도지역에서 생활한 반면에 추사선생은 중국 등을 유학하는 등 외국의 문물을 비교적 많이 접하는 등 공부할 환경이 좋았다고 볼 수가 있다. 상대적으로 추사선생이 훨씬 훌륭한 재료와 환경에서 서예를 배우게 되었고, 당대와 후대에 걸친 명문귀족들의 든든한 후원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추사선생은 귀족적이고, 국제적이고, 이상적이었던 반면에 창암선생은 현실적이고, 한국적이고, 서민적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작품에 대한 평가도 창암蒼巖선생은 전라도지역과 일부 매니아들에 의해 평가된 반면에 일반대중에 대한 이미지는 아직 보편적으로 확대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추사선생의 경우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로서 당대의 명문귀족들과 오늘날의 일반대중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로 많이 알려져 있다. 허나 지금의 시점에서 어느 분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인가, 그리고, 누가 더 나은가?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창암선생이나, 추사선생 각기 창암체와 추사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만들어낸 우리나라의 서예사를 대표하는 대가이고, 상대적으로 창암선생의 경우 유려한 초서가, 추사선생의 경우 고졸한 예서가 각각 대표적인 서체로서 자신만의 예술세계로 잘 승화시켜나갔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창암선생 행초 '춘수만사택'



 

   재미있는 사실중의 하나는 중국 서예상인의 추사와 창암선생에 대한 평가이다. 추사선생의 글씨는 말위를 달리는 뛰어난 장군의 기상과 동서 십만리와 상하 팔천년동안 남을 글씨(마상봉영장지기상 동서십만리상하팔천년(馬上逢靈將之氣像 東西十萬里上下八千年))이고, 창암선생의 글씨는 사물 밖의 한가로운 도(道)를 갖춘 글씨(물외한도지격(物外閑道之格))라고 하였다.


   이익선생은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라고 했다. 예로부터 시詩는 마음의 소리이고, 글씨는 마음의 획이고, 그림은 마음의 모양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글씨의 맥은 신라시대 김생으로부터 고려시대 탄연스님, 조선시대 초기의 안평대군, 중기의 한석봉, 후기는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 그리고 말기는 창암 이삼만 추사 김정희가 있다.


   특히 창암 이삼만선생은 조선후기 백하 윤순과 원교 이광사로 이어지는 동국진체의 진수를 이어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완성시킨 한국서예의 한 정화이다. 사실 많은 분들이 창암선생을 상대적으로 저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지방사람이고, 법에 따르지 않았으며, 다작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독창성이고, 자신만의 세계를 제대로 드러냈냐는 점이 중요하다. 그 점에서 창암선생은 우리나라의 어느 서예가보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스스로의 글씨에만 전념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창출시켰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경지를 드러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힘든 가운데서도 부단히 노력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글씨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사실 어느 분야건 대가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최소한 대가 스스로의 자질과 불굴의 노력이 없이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점에서 창암선생은 개인적 자질도 있었겠지만, 창암체蒼巖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만들기까지에는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과 불굴의 정진이 더 중요함을 알게 된다.


 

 

 

창암선생 오언절구


   오늘날 존재하는 창암선생의 작품은 병풍과 서첩 등이 많다. 그중에서도 옛시와 서법에 관한 글들이 많으며, 특히 옛시를 쓴 소폭의 글씨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어서 다실에 걸어두는 다서화로 활용하기에 참 좋은 것 같다. 무엇보다 가격도 추사선생 등과 비교하여도 상대적으로 비싼 편이 아니어서 좋은 것 같다. 다실에 창암선생의 글씨를 걸어두면, 물 흐르듯이 흐르는 창암체의 유려함이 다실을 가득 채울 것 같다. 그렇듯이 한 분야에 일로매진한 대가들의 정신이 차향기와 더불어 다실안에 가득할 것 같다.


   창암蒼巖선생은 평생 수많은 글을 썼지만, 특히 스스로의 마음을 담은 시고詩稿와 서법書法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그중의 한 말을 전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 그대에게 지금까지 써준 것은 모두가 서법(書法)에 관한 것이니

  더 이상 써 줄 것은 없다. 그러나 나도 최근에 터득한 게 많다.

  만일 작용이 지나치면 스스로의 참됨(天眞)을 손상시킬 수가 있나니

  모름지기 생기(生氣)와 자연(自然)을 위주로 하게 되었다.

  그대도 만년이 되면 이것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창암선생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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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그날에 솟아 오른 해
글쓴이 : 케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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