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명필 양사언의 시조(時調) 시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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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랩] ◈ 명필 양사언의 시조(時調) 시비 이야기.| ☆∞ 문화정보

임종혁 | 조회 121 |추천 0 | 2009.07.02. 21:57


◈ 명필 양사언의 시조(時調) 시비 이야기. 낙서장

2007/07/20 22:50

http://blog.naver.com/kimivo/80040503381

출처 블로그 > 德 田 의 문 화 일 기.
원본 http://blog.naver.com/bhjang3/140037952614

 



◈ 명필 양사언의 시조(時調) 시비 이야기.

 

 

德田   張  俸  赫

 

 

   봉래 양사언 (楊士彦 1517∼1584)은 조선조 중기에 한석봉과 함께 같은 시기를 살다 간 명필가이자 선정을 베풀면서 여덟 고을을 다스린 선비이다. 또한 단 한 수의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는 인간의 부단한 노력을 요구하면서도, 읽거나 외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 하지 않고, 용기를 북돋는 내용으로서 만인에게 회자되는 글이다. 그래서, 봉래 양사언은 명필가이면서 한 수의 시조로서 그 이름이 드높다.

 

   수년전에 강원도 삼척의 무릉계곡의 너럭바위에 봉래의 명필이 쓰여 있다고 하여 찾아가 본 적이 있으나, 그 때에는 그 많은 옛 사람들의 글씨 중에 어느 것인지를 분별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뒤에 알고 보니 양사언은 그 글씨에 봉래(蓬萊)라는 호를 쓰지 않고 옥호거사(玉壺居士)라는 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찾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근래에는 삼척시에서 너럭바위의 글이 손상 마모되는 것을 영구히 보존하고자 모사(模寫)하여 같은 크기로 길가에 새로이 조성하여 누구나 찾아가면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위의 사진은 삼척의 무릉반석에 남아 있는 옥호거사(玉壺居士) 양사언의 휘호 암각문.‘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의 열두글자가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마멸이 심하여 삼척시에서는 화강암에 모사(模寫)품을 제작하여 진품 현장으로부터 약 40m 거리의 길가에 노천 전시중이다. 그러나 식자들 사이에서는 이 암각문이 봉래 양사언의 것이 분명한지를 놓고 아직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봉래 양사언은 옥호(玉壺)거사라는 아호를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데에서 이런 의문이 제기 되고 있다고. 특히 강원도의 문화 유산에 관하여 관심이 깊은  강원일보 논설주간이자 태백문화연구소장 김영기(金永琪 018-291-6923)님의 의견이다.

 

   그토록 유명한 명필가 양봉래의 글씨 암각문 여러 점이 경기도 포천금수정 주변의 암벽에 새겨져 있다고 경기도 문화관광해설사 초운(肖云 <choun59@naver.com>) 총무 님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금수정은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한탄강 상류 물가 언덕에 있다.

 

 

1. 양사언 어머니의 재기(才氣)에 넘치는 지혜.

 

   봉래 양사언은 그의 이름이 높은 만큼이나 풀리지 않는 여러 설화들이 따라다닌다.  한석봉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명필가 봉래의 어머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온다.  그의 어머니는 촌가 출신으로 13세 때의 일이다. 그녀가 혼자 집을 보고 있을 때 마침 한 길손이 대문을 두드렸다. 길손의 사연인즉 “말이 지쳐서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으니 좀 쉬어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소녀였던 양사언의 어머니는 “제가 말죽을 쑤어드리지요”하고는 돗자리를 들고 와 그 길손도 나무 밑에서 쉬게 하고 말죽뿐 아니라 그 길손에게 밥 한상을 잘 차려 접대하였다.

 

 

   소녀는 또 “말이 지쳤으면 손님께선 얼마나 더 시장하시겠습니까”라고 말해 길손은 그 친절함에 더욱 반하게 되었다. 밥을 먹던 길손은  먼발치에서 그 소녀를 아무리 보아도 영리하고 심부름하는 맵시가 귀히 살 만하였다.  또한 몇 마디 물어봐도 나직하고 다소곳이 대답하는 품이 여간 귀엽지가 않았고, 조리 정연한 말솜씨에 놀랐다. 공손하고 절도있는 소녀의 행실에 반하여 그 길손은 자기의 신분을 밝혔다. 다름 아닌 그 고을 사또였다. 사또는 가지고 다니든 애지중지하던 부채를 채단(采緞)처럼 생각하라며 선물로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후일에 그 고을 사또의 후실이 되였다.

 

 

2. 서자(庶子)에서 적자(嫡子)가 되다. 

 

   우리 역사에서 첩실의 아들이 봉래처럼 본실의 아들로 된 예는 아주 드문 일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정실이 죽으니 봉래의 어머니는 정실처럼 들어앉아 크나큰 살림을 맡게 되었다. 어느새 두 아들을 낳아 사언, 사기 두 형제의 어머니가 된 부인은 전처 소생인 양사준 까지를  돌보면서 대. 소사를 주장하게 되었다. 성장할수록 부인이 낳은 양사언과 양사기는 물론 본실의 아들 양사준 삼형제의 재주는 참으로 뛰어났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재기가 넘쳐흘렀다. 특히 양사언의 재기(才氣)에 놀란 주위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적서(嫡庶)의 차이가 심하였고 서자는 한스런 신분으로 평생을 보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두 아들 사언. 사기 형제의 머리 위에 띄어진 서자의 너울을 벗겨 자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위 사진- 포천 금수정 물 가운데 봉래 휘호 암각 문이 새겨진 바위) 

 

   때마침 양봉래의 아버지가 죽게 되었다. 집안은 장례문제로 분주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장례절차를 모두 보살핀 끝에 성복(成服-초상이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날) 이 다가오자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어코 그녀의 한스런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의 어머니는 지극한 태도로 눈을 바로 뜨고 본실의 아들 양사준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첩이 양씨 가문에 들어와서 두 아들을 낳았으나 우리나라 풍습은 적서를 심하게 갈라놓고 있으니 슬프기만 합니다. 아들이 재주있고 풍채 비록 남다르다 하나 서자의 너울을 벗을 길이 없읍니다."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양사언의 어머니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첩이 또한 이 다음에 서모의 누를 가진 채 흙을 쓰고 죽는 날에도 우리 큰아드님(양사준)께서는 석달 복 밖에 입지 않을 터이니, 이리되면 그때 가서 내가 낳은 두 아들은 서자소리를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영감님의 성복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동하여 남들이 모를 것입니다. 내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무엇을 주저하리까마는 내가 죽은 뒤 사언, 사기 두 형제한테 서자란 말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죽어서도 기꺼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겠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봉래의 어머니는 고개를 들고 품속에 감추어 두었던 칼을 꺼내어 땅바닥에 폭삭 엎어졌다. 세 아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일으켜 세웠을 때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여 양사언은 서자에서 적자가 되었다.

 

   명필로 이름난 봉래에 관한 이 설화는 여러 문헌자료집에 실려 있는 것으로 양사언의 출생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계서야담(溪西野談)에 2편, 청구야담(靑丘野談)·해동야서(海東野書)·동야휘집(東野彙輯)·기문총화(記聞叢話)·선언편(選諺篇)에 각각 1편씩 수록되어 있다. 또한 근년에 발간된 양사언부대야담연구(권태을, 상주농업전문대학 논문집, 1982), 양사언설화연구(김대숙, 梨花語文論集 7, 1984)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정조실록 2년 8월 삭(朔)조에 서얼(庶孼)에게도 벼슬자리를 요구하는 명문장의 상소문에도 양사언이 서자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3. 인물 양사언.

 

   봉래(蓬萊) 양사언은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로 본관은 청주이다'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 봉해(蓬海)등 다양한 필호(筆號)를 사용하였다.  형 사준(士俊), 아우 사기(士奇)와 함께 글에 능하였다.  아들 만고(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왼편 사진- 봉래 선생의 휘호 암각문<경도(瓊島)>

봉래는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함흥·평창·강릉·회양·안변·철원 등 여덟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감상하였으며, 만폭동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 새겨진 그의 글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 군수로 있을 때는 선정으로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북변의 병란을 미리 예측하고 마초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함에 대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릉(智陵 -조선 태조의 증조부인 익조의 능으로 함경남도 안변의 서쪽 서곡현에 있다.)에 일어난 화재의 책임을 지고  해서로 귀양갔다가 2년 뒤 풀려 돌아오는 길에 병고로 인하여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봉래는 40년 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도 아니하였다. 그의 글씨는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안평대군·김구·석봉 한호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 한시와 글씨에는 작위성이 없고 자연스러워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평을 받았다.

 

   가사에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읊은 〈미인별곡〉과 1555년의 을묘왜란 때 남정군을 따라 전쟁터에 나갔다가 지은 남정가(南征歌)가 있다. 이밖에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한편, 그는 남사고에게서 역술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문집으로 봉래집(蓬萊集)이 있고, 그가 지은 〈미인별곡〉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4. 풀릴 듯 한 사생활의 의문들.

 

   예술품이란 감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느끼게 하여야 한다. 아무리 글씨를 모른다 해도 이 글씨를 보고 감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초서로서의 둥글게 돌아간 필획은 짜임세가 어느 한곳 모자라는 데가 없다. 왼편 사진은 포천시 금수정 한탄강 상류 물 가운데 바위 위에 새겨 져 있는 경도(瓊島)라는 글씨 탁본으로 글씨의 크기는 한 글자가 약 1 m 20 cm 가 조금 넘는다. 경도(瓊島)의 의미는 옥 바위섬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북경 북해공원의 호수 안에 있다.  경도(瓊島)라는 어휘의 유래는 본래에 북경의 고궁 서편 북해공원에 있는 황제의 궁원 안쪽 한 돌섬이다.  북해공원은 바다가 아니라 아름다운 인공호수로 북경 서쪽 교외에 있는 옥천산에서 솟는 샘물을 끌어서 만든 호수 공원으로 그 규모가 자금성에 필적한다. 경도(瓊島)가 생긴 연유를 살펴 본다면 900년 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금수정 앞 한탄강 상류 물가운데 바위에 세겨진 양사언의 휘호 <경도>

 


   금 나라의 군대가 북송의 수도였던 지금의 개봉 시를 1128년에 무너뜨리고, 그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 이름난 돌을 탈취하여 북경으로 가지고 돌아와 그것을 기념으로 조성한 바위섬이 바로 경도(瓊島)이었다. 그래서 북경에서 가장 오래된 900년 역사를 지닌 호수공원이다.  봉래는 그 유서 깊은 경도(瓊島)가 여기 포천의 금수정 아래 바위라고 여긴 듯 멋들어진 휘호를 남겼다.  보고 또 보아도 멋들어진 휘호임에 틀림이 없다.

 

   의문스러운 문제는 봉래가 어떠한 사유로 이 물가에 여러 점의 암각문을 남겼을까.  봉래에 관한 연보(年譜)와 여러 전적을 들추어 보아도 별 실마리를 찾지 못하였다. 사실 봉래는 만인에게 회자되는 시조 "태산이 높다하되"로 이름만 높았지 그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미약한 상태이다. 2001년에 간행된 홍순석 님의 강남대학교 출판부 간행 <楊士彦의 生涯와 詩>가 유일한 자료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하다. 그 이외에 봉래 선생의 서예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는 거의 없던 차, 2004년에 경기대학교 예술대학원의 강양희님의 석사학위논문 <봉래 양사언의 서예연구>와 2005년에 대전대학교 대학원의 조향진님의 같은 제목의 석사학위논문이 봉래의 서예에 관한 연구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자료에도 금수정 물가의 봉래의 휘호 암각문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표현한 자료는 없었다. 그러한 의문을 품고 금수정 물가의 암각문 휘호를 더듬고 다니는데 마침  근처 마을에 사는 초로(初老)의 안동 김씨 부인과의 대화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마을은 오래 전부터 안동 김씨의 집성촌이었는데, 봉래는 안동 김씨 집안의 규수와 혼외의 연을 맺으며 자녀를 낳고 살았다는 것이 김씨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란다. 공식적으로 봉래는 음성 박씨와 혼인하였으나 소생이 없이 죽자, 간성 이씨를 재취로 하여 독자 아들 만고(萬古)뿐이라고 전해온다. 그러나 봉래에게는 네 명의 서자(萬世, 萬善, 萬春, 萬祥)와 세 명의 서녀가 있었다는 기록을 여기 저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경도> 글씨가 세겨진 바위.

 


   옛말에 색시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보고도 절을 한다 하였는데, 금수정 물가의 여러 점 봉래의 암각문은, 한두 해가 아닌 여러 해를 두고 찾아와 새겼음을 자획의 변화로서 알 수가 있다. 그 중의 암각된 시문에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종자기(鍾子期)의 고사를 들어 썼음은 더욱 여러 가지를 생각나도록 한다.  종자기(鍾子期)는 중국 춘추 시대 초 나라 사람으로 당시 거문고의 명인이었던 백아(伯牙)의 친구로서, 오직 종자기만이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들었다고 하는 고사가 전해오듯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연인이 그곳에 있었다고 미루어 상상을 해본다.

 

 

5. 봉래의 천의무봉(天衣無縫)한 명필들.

 

① 오언절구 시문 두루마리(시축(詩軸))

 

霜餘水反壑(상여수반학)    - 서리 녹아 내린 물 계곡으로 흘러가고
風落木歸山(풍락목귀산)    - 바람에 지는 나무닢 산으로 돌아가네.
염염歲華晩(염염세화만)    - 어느덧 세월 흘러 한 해가 저물어 가니,
昆蟲皆閉關(곤충계페관)    - 벌레들도 모두 다 숨어 움츠리네.    

 ※염염(염염)-세월이 흘러가는 모양. 冉冉

 

 


 

 

   이 두루마리는 오언절구시축(五言絶句詩軸)으로 크기가(103.5×57.2Cm이다. 임창순(任昌淳)의 구장(舊藏)으로 이 시축은 현재 호암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한국미술전집 11, 임창순 편, 동화출판공사, 1975. 간행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호암 미술관측 해설에 의하면“본 작품은 봉래의 장기인 초서가 유감 없이 드러난 것으로 활달 분방한 필세가 잘 나타나 있고, ‘봉래산인(蓬萊散人)’·‘양사언인(楊士彦印)’의 도장 2 과(顆)가 찍혀 있다. 단, 사진으로는 도장을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설문에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씨는 봉래 선생의 휘호이나, 시문의 내용은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주장이 민족문화추진회 회보 제 85호에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의 글이 발표된 바 있으나, 그 내용으로 보아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참고로 시문 두루마리를 간단히 표현할 때에 시축(詩軸)이라 쓴다.

 

 

② 오언절구 시문.

 


 


飄飄靜上人(표표정상인)    - 표표히 떠나가는 靜이란 이름의 스님은
橫吹紫鸞笙(횡취자란생)    - 자색 난새 타고 피리소리 바람에 부쳐 보내며.
披雲呼我道(피운호아도)    - 구름을 헤치고 나와 내 불러 말하기를
自是安期生(자시안기생)    - 나 자신은 옛날 신선이라고 일러지던 安期生이라오.
                                          -蓬萊翁書(봉래옹 씀)-

 

 

   봉래 선생 스스로를 지칭한 안기생(安期生)은 중국 진시황 때 신선으로.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려 하자. 그는 '자신을 천년 뒤에 봉래산에서 만나자` 하고 동해로 떠나 버렸다. 뒷날 한무제(漢武帝) 때 이소군(李昭君)이 동해에 노닐다가 안기생이 오이만 한 큰 대추를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고사가 전해온다. 이러한 내용을  봉래는 이 시에 인용하여 고고하고 청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깨끗한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천의(天衣)는 원래 바늘이나 실로 꿰매 만드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그대로 만들어져 있다는 전설적인 옷으로, 무봉(無縫)은 꿔맨 데가 없다는 뜻으로, 때로는 타고난 재질이 매우 아름답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태평광기(太平廣記)의 고사에는 곽한(郭翰)이란 사람이 어느 여름 밤, 뜰에 누워 있노라니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함께 밤을 지내게 되었다. 매일 밤 즐기다가 우연히 그녀의 옷을 보니 바느질 자국이 없어 그 연유를 물은 즉 “하늘의 옷은 원래 바늘이나 실로 꿰매는 것이 아닙니다(天衣本非針線爲也)”라고 대답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대개는 잘된 문장을 비유하여 사용하는 어휘이나, 위의 글씨를 보고 어찌 천의무봉(天衣無縫)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

 

 

③ 아려(雅麗)한 초서의 서간문.

 

   아직까지 양봉래의 글씨가 모두다 휘집(彙集)되지 못한 상태에서 어는 글씨가 가장 잘 쓰였는가를 말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다. 양봉래의 서예에 관한 자료가 모두 집성되어 더 많이 발굴될 것으로 기대를 해본다.  아래의 글씨는 봉래의 나이 50이 되든 해 여름에 쓴 서간문이다. 말미의 기록에 병인년이라면 1566년 여름 6월 념일(念日)이라고 하였는데 念日은 20일을 말한다.

 


 


   대개의 초서 글씨는 한편으로 치우치기 마련인데,  얼핏  보기에 고르지 못하고 어지러이 번잡하게 보이면서(參差),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는 모양(錯落) 같으나,  글자마다 하나 하나 뜯어보면 빈곳 없이 꽉 차있고,  전체의 글씨도 빈틈없이 한 덩어리로 보인다. <韓國書藝>에 실려 있다. 양봉래의 글씨를 두고 허다히 노니는 용(遊龍), 신령스러운 용(神龍)으로 평가를 하고 있는데 특히 그의 초서는, 용사비등(龍蛇飛騰)의 필력(筆力)을 나타내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의 생활과 사상이 도가적 취향이었기에 아룰러 평가한 것으로 여겨진다.


 

6. 금수정에 새워진 양봉래의 시조 시비.

 

   만인의 입에 즐겨 외워지고 있는 시조 중에 양봉래의 시조는 단연 빼 놓을 수 없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시조의 시비는 양봉래의 묘 앞에도 있고, 사당 앞에도 있으며, 양봉래의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금수정에도 있다. 이 모두가 포천시의 관내에 있다. 금수정에 새워진 시조시비는 그 새워지기까지 사연이 많았다고 전한다.

 


(한글 비문 사진- 故 김진동 서예가의 글씨로 쓰여진 봉래의 시조 전문. )

 

 

   하나의 비석이 완성되어 제자리를 잡고 새워지기까지는 여러 사연이 뒤따른다. 비석의 몸돌이 잘못 선택되면 풍화작용에 빨리 마모되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비석의 안치 장소를 잘못 잡으면 비석의 몸돌이 유랑하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경우가 허다히 있으며, 비석의 글씨가 명필일 경우에도 그렇다.

 

   우리 역사상 이름난 비석 중에 유랑하는 <백월비>가 있는데, 그 글씨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쓴 비석이다.  백월비는 처음 경북 봉화군 하남면 태자사에 세워졌는데, 김생의 집자비라는 이유로 조선 중종 때인 1509년 영천군수 이항(李沆)이 글씨 감상을 위해 자민루로 옮겼다. 그리고 1918년 비신만이 왜인의 손에 넘어 갔다가 얼마 후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져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두었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창고 속에서 자리를 못 정한 채 쉬고 있다.

 

 



(사진- 금수정에 새워진 봉래의 시조 시비 전체 모습)

 

 

   금수정에 새워진 양봉래의 시조 시비는 포천 지역에서 서예 문화활동을 하던 故 외길 김진동(金縉東 1937- 2006)에 의하여 그 글씨가 쓰여졌다. 그는 교육자이면서 서울 세종문화회관 등지에서 여러 차례의 개인 서예전을 갖인 경험과 한글 글씨체의 새로운 개발이라는 차원에서 명필 양봉래의 시조 시비를 꼭 자기의 글씨로 써 새우고자 하는 서예가로서의 욕망이 있었다. 그것은 양사언의 글씨에 관한 재능이 바다와 같다면 자기의 재능은 작은 호수와 같을지라도 명필 양사언을 진정으로 기리는 심정의 발로였다.

  

   포천 지역의 여러 지방 유지들도 그의 마음에 감동 하여 <봉래 양사언 시조시비건립 추진위원회>가 1988년 4월에 발족을 보았다. 비석의 위치는 양봉래의 사당 앞에 새우기로 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청주 양씨 종문에서 사당 앞의 비석을 자기네 문중에서 새워야지 왜 타인의 손에 의하여 새워야 하느냐고,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삶이 뭐 별거겠오, 그냥 그렇에 사는거라오"
의길 김진동의 생전 휘호.
 
 

   뿐만 아니라 비석의 몸돌을 구하는 것 등 여러 비용지출 등등의 모든 일을 때로는 외길 김진동 스스로가 부담하였다. 그렇게 되자 10년의 세월이 흘러 1998년 5월에야 양봉래의 유적이 많은 금수정에 새워지게 되었다. 가까이에서 시조 시비의 글씨를 살펴보면 필획이 둥글면서 거침없이 돌아가 청송(靑松)이 관목(灌木)을 뚫고 우뚝 서듯 활달한 글씨체가 돋보인다. 그래서 유족들은 이 글씨를 쓴 사람의 호를 따서 외길체라 불러 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이 비석의 앞날이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가 되는 것은 금수정이라는 건물은 포천시 향토유적으로 지정이 되어 있으나, 그 부지는 안동 김씨 종중 자산으로, 김씨 종중에서는 이 비석을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포천시 문화원에 건의 중이다. 서예를 사랑하던 고인의 정성으로 세워진 이 시조 시비가 말썽 없이 제자리에 잘 있어 주기를 바란다는 봉래 양사언의 후손으로 포천시 문화원의 양윤택 부원장(031-532-5015)의 말이다. 끝으로 봉래 양사언의 호방한 시 한편 <불취원무귀(不醉願無歸)-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으리>를 감상하여보자.  금강산 불정대에 올라 읊은 시라고 한다.

 

 

山岳爲肴核(산악위효핵)      -   높고 낮은 산을 안주로 삼고, 
滄溟作酒池(창명작주지)      -   푸른 바다 물로 술을 빚어.
狂歌凋萬古(광가조만고)      -   미친 노래 불러 만고를 슬퍼하면서,  
不醉願無歸(불취원무귀)      -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으리.

 

- 이 글은 사단법인 동방문화진흥회 간행 2007년 5월호 <동인>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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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그날에 솟아 오른 해
글쓴이 : 케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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