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선명필 한석봉 묘 북한 개성 인근서 발견

2017. 11. 27. 16:33서예가



조선명필 한석봉 묘 북한 개성 인근서 발견

희망나라 2011.11.07 16:28

      

조선명필 한석봉 묘

북한 개성 인근서 발견

연합뉴스 기사입력 2010-04-25 19:00


조선시대 명필로 유명한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의 묘가 그의 고향인 개성 인근에서 발견됐다.



  2010.4.25일 북한의 대남 라디오 `평양방송'에 따르면 개성 고려박물관 연구사들이 최근 개성시와 인접한 황해남도 토산군 석봉리에서 한호의 묘비와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발견했다. 


북한 학자들이 발견한 묘비에는 `조선국 통훈대부 가평군수 증 승지 한공지묘(朝鮮國通訓大夫加平郡守贈承旨韓公之墓)'라고 돼 있다.


이는 생전 가평군수까지 올랐던 한호에게 사후 왕명의 출납을 맡는 승지직이 내려졌다는 뜻이다.


비석에는 한호가 명필로 이름을 떨쳐, 사람들이 한호의 글씨 한장을 얻으면 마치 구슬이나 옥돌을 얻은 것처럼 여겼고, 왕과 왕족들도 그의 글씨를 병풍이나 책상에 놓고 아침저녁으로 감상했다는 내용이 음각돼 있다.


또 명나라 사신들까지 그에게 글씨를 부탁해 갖고 갈 정도로 명성이 나라 안팎으로 높았으며, 명나라 학자 왕세종이 한호의 글을 `노한 사자가 돌을 부수고 목마른 준마가 샘물로 달리는 듯하다'고 극찬한 기록도 포함돼 있다고 평양방송은 전했다.


방송은 "현재 개성시에는 한석봉의 필적으로 된 선죽교비와 화담 서경덕 신도비가 남아 있고, 불타버린 (개성) 남대문의 현판 글도 그의 필적인 것으로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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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조선조 서예가 한석봉 무덤 조사



"한석봉 무덤, 황해북도 토산군 석봉리 위치"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연구집단이 개성고려박물관 학술성원과 함께 조선조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였던 한석봉의 무덤을 조사했다고 조선신보가 전했다.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는 13일 "한석봉의 무덤은 황해북도 토산군 석봉리 리 소재지의 석봉산이라고 부르는 높지 않은 야산 중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무덤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 무덤무지의 흙이 많이 흘러내려 현재 높이가 1.2m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조선신보는 "무덤 앞에는 높이 155㎝, 75㎝인 크고 작은 돌사람 조각상이 좌우에 2상씩 배치돼 있고 큰 돌사람 조각상들은 넘어진 상태이며, 무덤 왼쪽에는 받침돌과 비몸으로 된 높이가 167㎝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고 설명했다.


비석에는 "통훈대부(조선조 정3품 벼슬)이며 가평군수였던 한석봉의 무덤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무덤에서 남쪽(앞쪽)으로 약 35m 되는 곳에도 넘어진 받침돌과 비몸, 비머리가 있다"고 말했다.


비몸의 앞면 웃부분에는 '한석봉묘갈명'(묘갈명은 묘비명이라는 뜻)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그 아래에는 한석봉의 출생과 생애 그리고 그의 뛰여난 서예술에 대하여 칭송한 글이 새겨져 있다고 전했다.


   조선신보는 "한석봉은 1543년에 출생해 1605년에 숨졌으며, 비문에는 한석봉의 이름은 한호이고 자는 경홍, 석봉은 호라고 쓰여져 있다"고 전했다.


고고학연구소의 리창진(44살) 실장은 "이번에 새로 조사한 한석봉의 무덤은 조선민족이 예로부터 서예분야에서도 남달리 뛰여난 슬기와 재능을 가진 우수한 민족이라는것을 보여주는 학술적의의가 큰 유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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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 (한석봉)

 

  본관 삼화(三和) 후에 청주로 본관이 합쳐짐. 자 경홍(景洪). 호 석봉(石峯) ·청사(淸沙). 개성 출생.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해(楷) ·행(行) ·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1599년 사어(司禦)가 되었으며, 가평군수를 거쳐 1604년(선조 37) 흡곡현령(歙谷縣令) ·존숭도감 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을 지냈다.

 

그 동안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을 때 연석(宴席)에 나가 정묘한 필치로 명성을 떨쳤으며, 한국 서예계에서 김정희(金正喜)와 쌍벽을 이룬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이 모간(模刊)되었고, 친필은 별로 남은 것이 없으나 그가 쓴 비문(碑文)은 많이 남아 있다.

 

글씨로는 《허엽신도비(許曄神道碑)》(용인) 《서경덕신도비(徐敬德神道碑)》(개성) 《기자묘비(箕子廟碑)》(평양) 《김광계비(金光啓碑)》(양주) 《행주승전비(幸州勝戰碑)》 《선죽교비(善竹橋碑)》 《좌상유홍묘표(左相兪弘墓表)》 등이 있다.

 

   한호의 부친은 한언공(韓彦恭, 1524∼1572)입니다.

 

   한호의 본관은 삼화인데 후에 삼화에서 청주로 본관이 합쳐진 연유는 확실치 않습니다. 혹 그의 필명이 이런 합본(合本) 과정에서 큰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되는데, 특히 1593년 임진왜란 때 파손된 기자묘비를 새로 세울 때 한호가 글씨를 썼던 사실은 기씨.·선우씨와 함께 기자삼성으로 공인 받은 청주 한씨들에게 의미 있는 일로 여겨졌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합본 시기 또한 미상인데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한호의 본관이 청주로 적혀있으므로 18세기 이전에 이미 합본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호의 신분에 대해 궁금한 사항입니다.

 

신분을 언급할 때는 조상의 관력을 살피게 되는데, 한호의 5대조 한대기는 황해도 곡산 군수, 고조 한치명(1442∼1482)은 진사, 증조 한순손(1467∼1494)은 무과

백령첨사, 조부 한세관(1486∼1557)은 중종 때 정국원종공신으로 호조정랑 벼슬을 하였다.

 

백부 한언량( 1521∼1581)과 부친 한언공(韓彦恭, 1524∼1572)은 관직에 못나갔고다만, 백부는 시(詩)로 이름이 있었다.

 


   TV 진품명품에서 한호 서첩을 소개하면서 조선시대의 중인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은 한호, 즉 한석봉과 허준 이다.

이 두분은 중인 출신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출세를 하고 또한 역사에 그 이름이 오랫동안 남아있다고 소개한 기사를 보았다.

 

하지만 중인이라는 용어는 17세기 이후에 사용되었고 한호가 개성 출신으로 한미한 집안이지만 명종 연간에 사마시(진사,생원)에 합격했고 당시 경국대전에 서얼(중인)은 생원, 진사시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즉, 서얼은 과거시험 응시에도 제한을 두어, 문과응시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무과와 잡과에는 응시 가능하나, 승진에 제한이 있어 6품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수 있습니다


  한호의 모친 홍주 백씨(洪州 白氏, ?∼1575)는 장사랑 백옥근의 따님으로 한부, 한호, 한제, 한택4형제를 낳았고 한택을 제외하고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이 모두 생원·진사를 뽑는 사마시에 합격한 것과 그의 조상이 현달하지는 못했으나 관력으로 가문을 이어갔음을 볼 때, 단지 한호 모친이 떡을 썰어 훈육하는 내용들을 가지고 그가 중인이라 칭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고 설령 중인이라 할지라도 조선시대 훌륭한 명필에게 중인이라는 표현은 걸맞는 수식어(대우)는 아니다.


   조선후기 중인 출신들이 낮은 벼슬을 갖고 다방면에서 기여 하기도 했지만 신분상 제약과 제도적인 뒷받침이 부족하여 많은 능력을 제대로 발휘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시대상의 흐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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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사박물관은 조선 중기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친필이 담긴 '석봉한호해서첩'이 최근 보물로 지정됐다고 25일 밝혔다. 2010.1.25


한석봉이란 호칭과 여러 일화로 친숙한 한호는 추사 김정희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필로 꼽히는 인물이다.


   석봉한호해서첩은 한호가 평소 절친했던 간이당 최립의 시문 21편을 단정한 해서로 필사한 글씨첩이며 가로 27.2㎝, 세로 36.3㎝의 상ㆍ하권 두 첩으로 구성돼 있다.




석봉한호해서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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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의 유금강산기


 



 





한석봉 시첩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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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 (三和) 지명에 대하여



   평안남도 용강 지역의 옛 지명. (소재지 : 평안남도 용강군)


1136년(인종 14) 서경기(西京畿)를 나누어 6현을 만들 때 금당(金堂)ㆍ호산(呼山)ㆍ칠정(漆井)의 3부곡(部曲)을 합하여 삼화현을 만들고 현령을 두었다. 그 뒤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황주(黃州)의 영현으로 되었으나 충렬왕 때 현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도 그대로 따르다가 1686년(숙종 12) 도호부로 승격하고, 1895년(고종 32) 삼화군(三和郡)이 되었다가 용강군에 편입되어 삼화면이 되었다. 삼화의 지명은 세 개의 부곡을 합쳤다는 데서 나온 듯하다.


   이곳은 대동강 하구에 자리잡고 있어 평안도와 황해도를 방어하는 군사적 요지이므로, 해안가의 광량진(廣梁鎭)은 독진(獨鎭)으로 도호부사가 겸임하였다. 우산(牛山)과 대당두산(大堂頭山)에는 봉수가 있어 서해안을 연결하였다.


이 지역에는 고구려의 고분이 산재되어 있는데, 쌍영총(雙楹塚)ㆍ성총(星塚)이 유명하다. 삼화는 예로부터 고려자기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용강현지(龍岡縣誌)』


『평안남도지(平安南道誌)』(평안남도지편찬위원회, 1977)




http://blog.daum.net/yescheers/8598111    






[스크랩] [청주] 한석봉(韓石峯) 묘갈명 병서 -월사 이정구| 신도비 및 묘갈5-안,오,우, 유,하,한,허,현,홍,황.

雲影(禹顯) | 조회 31 |추천 0 | 2016.11.06. 21:09
  


한석봉(韓石峯) 묘갈명 병서

 


   내가 폐축(廢逐)되어 택반(澤畔)에 살고부터 늘 칭병(稱病)하여 손님을 사절하였다. 그런데 한 손님이 문 앞에서 몸을 굽힌 채 만나기를 청하기에 보니 한석봉(韓石峯)의 아들 민정(敏政)이었다. 내가 석봉의 묘도문자(墓道文字)를 부탁받은 지가 3년이 되었다. 그럭저럭 사무에 정신을 빼앗겼고 게다가 또 병으로 필연(筆硯)을 멀리한 탓에 유명(幽明) 사이에 정의(情誼)를 저버린 채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서 민정을 보고 먼저 나의 불민(不敏)을 사죄하니, 민정이 서글픈 기색으로 말하기를 “가난한 형편에 애써 비석을 마련해 놓았으니, 조석이 급합니다. 감히 예전의 부탁을 다시 부탁드립니다.” 하였다.

   아, 내가 처음 글자를 배울 때부터 이미 한석봉을 알고 있었다. 석봉은 글씨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고 나는 문사(文辭)로 허명(虛名)을 훔치고 있던 터라 드디어 석봉과 지기(知己)가 되었다. 내가 조사(詔使)를 영접하러 갈 때 조정에 아뢰어 석봉과 함께 가게 되었다. 그래서 용만(龍灣)에 머물러 해를 넘기며 서로 매우 즐겁게 지냈으니, 당시 함께 종유(從遊)하던 그 즐거운 때가 어제 일만 같다. 그러니 석봉의 묘도에 어찌 나의 글이 없을 수 있겠는가.
행장을 살펴보건대, 석봉은 이름은 호(濩)이고 자는 경홍(景洪)이며, 석봉은 그 호이다. 5대조(代祖) 대기(大基)는 곡산 군수(谷山郡守)이고, 조부 세관(世寬) 때 비로소 송도(松都)에서 집안을 이루었다. 부친은 학생(學生) 언공(彦恭)이며, 송도에서 석봉을 낳았다.

   석봉이 막 태어났을 때 일자(日者)가 점을 쳐 보고 말하기를, “옥토(玉兔)가 동방에 태어났으니, 낙양(洛陽)의 지가(紙價)가 높아지겠다.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이름날 것이다.” 하였다. 조금 성장해서는 스스로 글씨 쓰기에 힘썼다. 그리고 왕 우군(王右軍 동진(東晉)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이 자기가 쓴 글씨를 주는 꿈을 꾼 것이 두 차례였다. 이로부터 마음속으로 기쁘고 자부심이 생겼으며 글씨를 쓸 때면 마치 신조(神助)가 있는 듯하였다. 이미 천재인 데다 또 오래 공력을 쌓은 터라 해액진초(楷額眞草), 모든 서체에 두루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향시(鄕試)를 볼 때면 늘 시험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25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고, 계미년(1583, 선조16)에 와서 별제(瓦署別提)에 임명되었다. 문무해(文無害)로 누차 천관(遷官)하여 인의(引儀), 사포(司圃), 북부 사도(北部司䆃), 사재 주부(司宰主簿), 감찰(監察), 한성 판관(漢城判官), 호조(戶曹)ㆍ형조(刑曹)ㆍ공조(工曹)의 정랑(正郞), 전부(典簿), 찬의(贊儀), 사어(司禦), 가평 군수(加平郡守), 흡곡 현령(歙谷縣令)을 역임했으며, 이 중에는 두 차례 제수된 것도 있다. 그리고 누차 원종공(原從功)에 참여했다 하여 사후에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생전에 부친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고 모친 백씨(白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석봉은 이미 명필로 당대에 명성을 독차지했다. 조정이 조사(詔使)를 영접하거나 중국에 주청사(奏請使)를 보낼 때면 반드시 시문과 글씨에 능한 사람을 특별히 뽑았다. 그래서 임신년(1572, 선조5) 원접사(遠接使) 임당(林塘) 정상(鄭相 정유길(鄭惟吉))의 사행(使行), 임오년(1582) 율곡(栗谷) 선생의 사행, 신축년(1601) 나의 사행 및 신사년(1581)ㆍ계사년(1593) 주청사의 사행에 석봉이 모두 참여하였고 가는 곳마다 반드시 중외(中外)를 놀라게 했다. 중국의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마귀(麻貴) 및 북해(北海) 등계달(鄧季達), 유구(琉球)의 사신 양찬(梁燦) 등이 모두 석봉의 필적을 받아 가지고 갔다. 이런 까닭에 석봉의 글씨가 천하에 두루 퍼졌고 천하 사람들이 조선에 한석봉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엄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은 필담(筆談)에서 석봉의 글씨를 칭찬하여 “마치 노한 고래가 바위를 가르고 목마른 천리마가 샘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다.” 하였으며, 한림(翰林) 주지번(朱之蕃)은 우리나라에 와서 말하기를 “석봉의 글씨는 왕 우군(王右軍)ㆍ안진경(安眞卿)과 우열을 겨룰 만하다.” 하였다. 이에 석봉의 글씨가 더욱 귀중해져서 사람들이 작은 종이에 쓴 글씨 한 점을 얻어도 마치 수주(隋珠)나 곤옥(崑玉)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였다.

   선왕(先王)과 금상(今上)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쓰게 한 글씨가 이루 기억할 수 없이 많은데 모두 병풍과 궤안(几案)에 늘어놓고 조석으로 완상하였으며, 양궁(兩宮)이 내린 하사품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어선(御膳)과 어주(御酒)를 보내는 것이 길에 이어졌다. 선왕이 일찍이 석봉이 쓴 대자(大字)를 보고 감탄하며 “기장(奇壯)하기가 이루 측량할 수 없다.”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 집안에 주연(酒宴)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한가한 군(郡)에 수령으로 보내면서 유시(諭示)하기를, “반드시 너의 글씨를 받고자 하는 것은 필법을 후세에 전할 수 있게 하고자 해서이다. 피곤할 때 억지로 쓰지 말 것이며 게으르지도 서두르지도 말라.” 하고 어필로 ‘취리건곤 필탈조화(醉裏乾坤筆奪造化)’ 여덟 자를 써서 하사하였다.

  석봉이 병들자 약품과 의원이 번갈아 이어졌으며, 부음이 들리자 부의(賻儀)를 매우 넉넉히 하사하고 부관(府官)을 시켜 상장(喪葬)을 보살펴 주게 하였으니, 그 성총(聖寵)의 우악(優渥)함이 이와 같았다.
석봉은 계묘년(1543, 중종38)에 태어났고 을사년(1605, 선조38)에 졸(卒)하였으니, 향년은 63세이다.
학생(學生) 최담(崔湛)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바로 민정(敏政)이다. 그도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글씨를 잘 써서 그 가업을 이었으며 괴원(槐院)의 보직(補職)을 맡고 있다.

  석봉은 사람됨이 돈중(敦重)하고 과묵하며 술을 잘 마셨다. 술을 마셨다 하면 도도한 주흥(酒興)에 겨워 자적하며 시를 읊고 글씨를 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미 높은 명성을 한 몸에 받아 공경(公卿)들 사이에 성예(聲譽)가 자자했다. 성품이 너그럽고 남을 시기하는 마음이 적어 비록 남의 선악(善惡)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으나 내면은 기실 확고하여 조수(操守)가 있었다. 그래서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부드러운 말로 상대방의 기분에 영합한 적이 없었다.
시를 지음에는 유독 이백(李白)을 좋아하여 그 작품은 왕왕 자못 아취(雅趣)가 있었다.

   대저 선비가 재예(才藝)를 품고서 출세를 도모하는 이가 어찌 한량이 있으리오. 그러나 혹자는 남에게 배척을 당하고 혹자는 흠결(欠缺)을 드러내고 마니, 끝까지 신명(身名)을 잘 지키고 군은(君恩)을 보전하는 이는 드물다. 한때 기세를 떨치는 공명(功名)은 한갓 귓가를 지나가는 모기처럼 하찮은 것일 뿐이다. 죽은 뒤에 누가 알아주겠는가. 석봉과 같은 이는 초야에서 일어나 세 치 길이 붓을 잡고 인주(人主)로부터 세상에 드문 지우(知遇)를 입어 권세를 다투는 자도 이간하지 못하고 비방을 잘하는 자도 감히 헐뜯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명랑하게 살다 일생을 마쳤고 그 명성은 후세에 길이 남을 것이니, 참으로 훌륭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살아서는 성총(聖寵)의 영광 입었으니 / 生而寵榮
존귀한 게 어찌 공경(公卿)의 높은 작위이랴 / 貴豈其卿
죽어서는 길이 불후하리니 / 死而不朽
뉘라서 장수하지 못했다 하랴 / 孰云不壽
아아 석봉이여 / 噫嘻石峯
그대를 불후하게 하는 것은 이름이요 / 不朽汝者名
그대의 이름을 이름 짓는 것은 나의 명이로다 / 名汝名者吾銘

 

 

 

韓石峯墓碣銘 幷序

自余廢逐居澤畔。恒稱病謝客。客有跼門求見者視之。韓石峯之子敏政也。余受石峯墓道之托三載矣。忽忽爲事奪。病且怠筆硯。負幽明以至今。見敏政先謝不敏。敏政慼然而曰。力貧治石。惟朝暮是急。敢申前請。噫。自 余始學字。已識韓石峯。石峯以書名於天下。余以文辭竊虛聲。遂與石峯爲知己。及余候詔使行。白于朝與之偕。留龍灣經歲。相得益歡。幕中從遊之樂如昨日。石峯之墓。烏可無余言。按狀。石峯名濩。字景洪。石峯其號。五代祖大基。谷山郡守。祖世寛。始家松都。考學生彥恭。生石峯於松都。始生。日者占之曰。玉兔生東。高洛陽之紙價。是兒必以善書名。少長。能自課書。夢王右軍授以所書者再。由是心獨喜自負。臨帖若有神助。旣天才又積用功。楷額眞草。無不各臻其妙。擧於鄕。輒驚試闈。二十五。中進士。癸未。拜瓦署別提。以文無害累遷官。歷引 儀,司圃,北部司導司宰主簿,監察,漢城判官,戶,刑,工正郞,典簿贊儀司禦,加平郡守,歙谷縣令。或有再除者。以屢參原從功。沒後贈戶曹參議。生贈考戶曹參判。妣白氏貞夫人。石峯旣以名筆擅一時。朝廷於迎儐詔使若奏請天朝。必盛選詞翰。壬申遠接使林塘鄭相之行。壬午栗谷先生之行。辛丑不佞之行及辛巳癸巳奏請使之行。石峯皆與焉。所至必驚動中外。天朝提督李如松,麻貴,北海鄧季達,琉球使梁燦。皆要筆迹以去。以故石峯之書。遍於天下。天下皆知朝鮮有韓石峯。弇州王世貞筆談。稱石峯書。如怒鯢決石。渴驥奔泉。翰  林朱之蕃來我國曰。石峯書。當與王右軍,顏眞卿相優劣。於是其書益貴重。人得一赫不啻隋珠崑玉。先王及今上在東宮所命寫不可殫記皆列之屛障几案朝夕賞玩兩宮。前後錫賚。又不可殫記。御膳法酒。絡繹於道。先王嘗見其大字。歎曰。奇壯不可測也。遣中使錫宴于家。又命除閑郡諭之曰。必要爾書者。欲使筆法傳於後世。倦時無強作。勿怠勿迫。又御書醉裏乾坤筆奪造化八字賜之。及病。藥醫交路。訃聞。賻賜甚厚。命府官庀喪葬。其寵渥如此。石峯生於癸卯。卒於乙巳。得年六十三。娶學生崔湛女。有子一人。卽 敏政。中進士。亦能書。世其家。隷槐院補職。石峯爲人敦重寡言。善食酒。遇輒陶然自適。吟灑不倦。旣負高名。延譽公卿間。寛中小忮。雖不口人臧否。而內實堅確有守。非其意。未嘗軟語苟合。爲詩獨慕李白。往往頗有趣夫士之抱才藝圖顯寵者何限。或爲人傾奪。或未免疪累。其卒能完身名保主恩者鮮矣。一時功名薰灼。特蚊蝱之過耳。死後誰知之者。若石峯起草萊。操三寸管。與人主結不世之知遇。爭權者不能間。工毀者莫敢議。昭朗令終。聲施於後世。亦韙矣。銘曰。
生而寵榮。貴豈其卿。死而不朽。孰云不壽。噫嘻石峯。不 朽汝者名。名汝名者吾銘。



 

[주D-001]낙양(洛陽)의 지가(紙價)가 높아지겠다 : 사람들이 석봉의 글씨를 받느라 종이값이 폭등할까 걱정이라는 뜻으로, 상대방의 시를 칭찬한 것이다. 한(漢)나라 좌사(左思)가 구상한 지 십 년 만에 〈삼도부(三都賦)〉를 완성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 작품을 베껴 적느라 낙양의 종이값이 비싸졌다는 고사를 차용하였다.
[주D-002]문무해(文無害) : 문서를 잘 작성하여 문서에 하자가 없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서 한 고조(漢高祖)의 신하 소하(蕭何)에 대해 “소 상국 하(蕭相國何)는 풍패(豐沛) 사람인데 문무해로 패(沛)의 연리(掾吏)가 되었다.” 하였다.
[주D-003]수주(隋珠)나 곤옥(崑玉) : 수주는 수후(隋侯)가 뱀을 살려 준 보답으로 뱀에게서 얻었다는 명월주(明月珠)이고, 곤옥은 곤륜산에 나는 좋은 옥이다. 모두 더없이 귀한 보배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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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제공파 한호 한석봉| 등제공파 관련

한 장석 | 조회 99 |추천 0 | 2010.11.12. 19:27


한석봉

등제공계(登第公系)

 
서성 한석봉(書聖 韓石峯(濩) : 中宗 38年(1543)~宣祖 38年(1605) 19世)


   선생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서예가(書藝家)이다. 휘(諱)는 호(濩)요, 자는 경홍(景洪)이요,호는 석봉(石峯). 청사(淸沙)이다. 증 부사공 언공(贈 府事公 彦恭)의 아들이고 정랑공 세관(正郞公 世寬)의 손자이다.
명종(明宗) 22년(1567)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寫字官)으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명나라에 사절로 갈 때도 서사관(書寫官)으로 파견되었다. 별제감찰(別提監察),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사어(司禦) 등을 지내고 한성판관(漢城判官)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재임중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이 일자 선조(宣祖)를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광국선무호성원종 공신(光國宣武扈聖原從功臣)이 되고 왜란(倭亂) 관계로 투사의 명을 받고 명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난이 끝나자 가평군수(加平郡守)로 나가 천자문(千字文)을 언해(諺解)하니 선조 33년(1600) 9월 선생이 58세 때였다. 흡곡현령(翕谷縣令)도 지냈다. 만년(晩年)에 금천석봉산(金川石峯山)하에서 선조 38년(1605) 63세로 졸하였다.
아들은 사과(司果) 민정(敏政)이며 증 호조참의(贈 戶曹參議)이다. 어머니 홍주 백씨(洪州 白氏)가 떡장사를 하며 글공부를 시켰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의 묘갈(墓碣)에 의하면, “송도(松都)에서 났으며, 점(占)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옥토끼가 동쪽에 났으니 낙양(洛陽)의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글씨 쓰기에 힘썼고, 꿈에 왕희지(王羲之)에게서 글씨를 받아, 이로부터 마음속으로 자부(自負)하고 법첩(法帖)을 대할 때마다 신(神)이 돕는 것 같아 마침내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그 묘(妙)를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서법(書法)은 조선 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趙孟부)의 서체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체(體)를 배웠다. 그러나 그가 배운 것은 진위(眞僞)가 문제가 되는 악의론(樂毅論) · 동방삭찬(東方朔贊) · 황정경(黃庭經) 등의 소해(小楷)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조법(趙法)보다 뒤떨어져서 진당인(晉唐人)의 높고 굳센 기운(氣韻)이 모자라는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졌다.


   또한,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오랫동안 사자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천분을 발휘하지 못하고 틀에 맞추려는 노력이 앞섰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공(工)과 힘(筆力)이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는다 하여도 동기창(董基昌)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러한 경지는 알지 못하는 자들과는 논할 수 없다고 김정희(金正喜)는 말하였다. 이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가 창출될 만큼 그의 영향은 컸으며 또 이로부터 사자관 제도가 이루어졌다. 양주에 있는 김광계비(金光啓碑) · 황주서대수비(黃注書大受碑) · 이윤식비(李允湜碑) · 이별제공집비(李別提公楫碑), 고양에 있는 권도원수대첩전면(權都元帥大捷碑前面) · 기응세비(奇應世碑), 장단(長湍) 윤감정변묘표액(尹監正卞墓表額), 과천(果川) 유용비(柳容碑) · 허초당엽묘표음(許草堂曄墓表陰), 포천(抱川) 이판서몽량비(李判書夢亮碑), 남양(南陽) 홍영상섬비(洪領相暹碑), 용인 정의흥희린갈(鄭義興姬隣碣) · 정대헌유비(鄭大憲裕碑), 개성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합천 박사간소갈(朴司諫紹碣), 평양 기자묘비(箕子墓碑) 등을 썼다.







  《동국금석평 東國金石評》에는 모든 글씨체에 숙달되기는 하였으나 속되다고 평하였다. 그로부터 비롯되어 사자관체(寫字官體)라는 서체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서체를 중국에서는 간록체(千祿體)라 한다.
선조(宣祖)는 한석봉의 글씨를 궁전(宮殿)에 걸어놓고 감탄하여 가상(嘉賞)했다. 마침내 선조는 가평군수(加平郡守)인 한석봉에게 하지(下旨)하였다. 천자문(千字文)을 언해(諺解)케 하고 국민교본(國民敎本)으로 삼기로 하였으니 이는 선조 33년(1600) 9월 선생이 58세 때였다.

   지금도 이 언해 천자문은 많이 보급(普及)되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군이 벽제관(碧蹄館)에서 승리한 여세(餘勢)로 선조(宣祖) 26년(1593) 2월 12일 3만여 명을 투입하여 행주산성(幸州山城)을 내습(來襲)하니 지리적 이점(地理的 利點)과 아군의 필승의 기백으로 승전(勝戰)하는데 부녀자들의 행주 치마로 나른 돌이 많은 보탬을 주었다고 한다.


   이 승전을 기리기 위해 선조 35년(1602) 덕양산정(德陽山頂)에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 : 大理石으로 되어 있는 舊碑)를 세우니 최 립(崔 笠)이 비문을 짓고 한석봉(韓石峯) 선생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썼다. 비문 끝의 추기(追記)는 이항복(李恒福)이 지었고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비석이 오래되어 훼손(毁損)이 심해지자 1907년 비각을 새로 개축(改築)하였다. 그러나 또 훼손되어 행주산성 보수정화사업(補修淨化事業 : 1969~1970)에 따라 대첩비각(大捷碑閣 : 舊碑에)을 세웠다. 비 상부(上部)에 금이 간 것은 비를 세운 후 왜인(倭人)이 훼상시켰다고 전한다. 행주대첩비 구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京畿道 有形文化財) 제74호로 1978년 10월 10일 지정(指定)되었다.


   조선조 대학자(大學者)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을 향사(享祀)한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있는데 퇴계선성이 졸한지 4년만인 선조(宣祖) 7년(1574) 유림(儒林)들이 상의하여 그가 만년(晩年)에 독서하던 곳인 도산서당(陶山書堂) 뒤에 이듬 해 도산서원을 세웠다. 선조로부터 도산서원의 액자(額字)를 받아 사당(祠堂)에 걸어놓고 퇴계 선생을 향사하였는데 글씨는 선조 8년(1575) 한석봉(韓石峯) 선생이 썼다.


   韓石峯 선생의 예(隸), 초서(草書)로 천자문(千字文)을 선조 30년(1597) 가을에 썼고 목판(木版)인 것을 탁본(拓本)으로 남겨놓았는데 여기에는 선생이 서명, 날인(署名, 捺印)하여 남겨 놓았다.


 





 이 글은 고문진보(古文眞寶)중의 한편으로 중국역대(中國歷代) 정대(亭臺), 누각(樓閣)에  대한

수많은 기문(記文)중에 우수(優秀)한 문장(文章)인 악양누기(岳陽樓記)의 부분(部分)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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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의 묘| 짧고 유익한 글

이종원 | 조회 19 |추천 0 | 2010.04.29. 06:29


 한석봉의 묘  

 

                                                               - 김태익 -

 

   중국 서예사에서 왕헌지는 아버지 왕희지와 함께 '2왕(二王)'으로 불린다.

헌지는 어려서 재주는 뛰어났지만 꾀가 많았다.

어느 날 헌지가 '큰 대(大)' 자 한 자를 써놓고 급히 놀러 나가자 왕희지가

들어와 보고 점 하나를 보태 '태(太)' 자를 만들었다.

헌지가 나중에 이를 어머니에게 보여줬더니 어머니가 말했다.

"가운데 점 하나만 잘 썼구나."

왕헌지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아버지에게 서예의 비법을 물었다.

왕희지가 마당에 있는 18개 물 항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이 안의 물을 먹 가는 데 다 쓰고 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조선조의 석봉(石峰) 한호(韓濩·1543~1605)는 평생 왕희지를 흠모했고,

왕희지의 비법을 실천에 옮겼다.

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크면서 종이가 없어 뜰 앞 항아리

표면과 가랑잎 위에 습자를 했다.

깜깜한 밤 어머니는 떡을 썰고 석봉은 글씨를 쓰는 장면은 그의 피나는

연마를 전해주는 한 에피소드다.

 

   석봉은 왕희지체(體)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소화하고 뛰어넘어 자기만의

'석봉체(石峰體)'로 완성시켰다.

그것은 고려말부터 내려온 중국 송설체의 부드러운 아름다움과 달리

조선서예 특유의 엄정·단아한 아름다움이었다.

 

   ▶ 석봉이 품성이 괴팍하고 글씨나 쓰는 기능인이라며 문인 사대부 중

헐뜯는 이가 많았다.

그때마다 그 자신 명필이었던 선조 임금이 막아주었다.

대마도 도주(島主)가 현판 글씨를 하나 써달라고 요청해오자 선조는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 아무나 보고 쓰라 하라"고 했다.

 


   ▶ 북한의 대남 라디오 평양방송이 최근 개성 근처 황해남도 토산군 석봉리

에서 한석봉의 묘비와 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석봉의 호는 그의 고향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묘비에는 생전 가평군수까지 올랐던 그에게 사후 국왕의 비서인 승지 벼슬이

내려졌고, 명나라 학자가 한석봉의 글씨를

 

"노한 사자가 돌을 부수고 목마른 준마가 샘물을 향해 달리는 듯하다"

격찬한 내용이 담겨있다고 한다.

 

   ▶ 석봉이 살아있을 때 세상은

최립의 문장, 차천로의 시, 석봉의 글씨를 '송도 3절'이라고 했다.

석봉은 안동 도산서원의 현판, 고양 행주산성의 대첩비와 함께 선죽교비,

화담 서경덕 신도비 등을 고향에 남겼다.

천안함 침몰 이후 개성이 갈수록 멀어지는 땅이 되는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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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谷齋/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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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그날에 솟아 오른 해
글쓴이 : 케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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